차이

"어? 얘들 봐라? 둘이 사귀는거 아냐?"

점심시간 끝나고 둘이 함께 커피 마시고 돌아오는 길. 전 상무와 황 차장은 손가락질까지 하며 우리를 가리킨다.

"왜요? 사귀면 안되요?"

당황해서 뭐라고 답해야 할지 말문이 막힌 나와 달리, 소민은 언제나의 화사한 미소를 지으면서 내 팔짱까지 낀다.

"잘 어울려요?"

이미 내 심장은 쿵쿵쿵쿵 뛴다. 물론 그렇게 가만히 있어선 안되겠다 생각한 나는 "맞아요!" 하고 뒤늦게 너스레를 떨지면, 황 차장은 "하나도 안 어울린다 야. 소민이가 너무 아까워" 하며 낄낄댄다.

"내가 아깝죠!"

어색하게 한 마디 보태지만 이미 둘은 "좋을 때다", "저거저거 이미 지 혼자 짝사랑하고 있네 뭐" 하면서 뒤로 돌아선다. 소민은 "뭐야, 얼굴 왜 빨개졌어. 설렌거야?" 하며 미소 짓는다. 너무 예쁘다. 당연히, 설랬다. 훅하고 콧가를 스치는 소민의 화장품 냄새. 사귀고 싶다. 얘랑 사귈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설레긴 무슨. 야, 속 올라온다"

하며 얼른 내가 먼저 팔짱을 뺀다. 조금이라도 티 덜나라고. 심장은 아직도 두근거린다. 웃으며 "얼른 가자"하고 보채는 그 모습마저 사랑스럽다. 나는 소민을 이미 짝사랑하고 있다. 쟤라고 모를 거 같진 않은데, 고백하기에는….





차이





"기원 대리, 이번 형산쪽 진행 중이던거, 마무리 됐어?"

팀장님의 말에 반쯤 졸고 있던 기원 대리는 흠칫 놀라더니 "어어어, 네, 거의 됐습니다. 3시까지 드리겠습니다" 하며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대답한다. 팀장은 마뜩찮은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지만 곧 소민에게 묻는다.

"소민씨, 세라 대리 오늘 휴가니까 이따가 박 과장이랑 4시에 기획실 회의할 때 같이 들어가요. 분기보고 자료 어제 받아놓은거 8부, 아니 9부 프린트 해서"
"네에, 알겠습니다"

그냥 알겠다는 흔한 대답인데도 발랄한 목소리에 나까지 기분 좋아진다. 정말 밝은 에너지가 좋다. 박 과장님이 부탁한 기획안 보강자료를 찾던 나는 흘낏 소민쪽 자리를 돌아본다. 그러나 눈이 마주친 것은 소민이 아니라 팀장님이다. 그는 나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영재씨, 잠깐 회의실로"

뭐지.

"네"



회사 돌아가는 사정을 옆에서 보면서 내심 어느 정도 각오를 하긴 했지만, 설마설마 하는 상태였기에 직접 말로 듣는 것은 충격이 컸다.

"어떻게든 같이 가보려고 했는데, 지금 영업쪽도 실적 저조한 사람들 다 계약해지하고, 외부 지사 사무실들 반 이상 정리하고 여기도 총무팀 이번 달에만 3명 자른거 알지? 있는 사람도 자르는 판에 우리 팀만 인력을 계속 충원하는게 어려운 상황이야"

무어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동안 고생해줬는데, 정직원 전환은 어려울 것 같애. 보니까 다음 달 9일까지지 아마? 그때까지 수고 부탁하고, 으흠, 영재씨는 실력 좋으니까 잘 할거야. 여튼 그럼."

팀장님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는 회의실에 조금 더 오래 앉아있었다. 양손으로 머리를 긁다가 빈 손으로 마른 세수를 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냥 지난 달에 에이전시에서 오라고 할 때 거기라도 갈 거 그랬나. 괜히 플렉스니 뭐니 하면서 회사에 혹시나 하는 생각에 눈치보여서 청구 안 했던 야근 택시비 같은거 다 청구해버릴걸.

"후우"

설마설마 하긴 했지만 그래도 아니려니 했다. 본사는 다르다며. 소민이만 해도 당장 지지난 달에 정직원 전환됐는데 왜 나만. 지금까지 90% 이상은 그냥 기본으로 전환해줬다며. 내가 뭘 그렇게 못했지? 다들 나는 100% 정직원 전환될거니까 걱정하지 말라며? 왜 나만. 아니, 이럴 줄 알았다. 언제는 안 그랬나. 매번 꼭 다들 잘되는거 나할 때 되면 제대로 안되고 망하는게 어디 이번 뿐이던가. 내 모든 삶이 그랬지 뭐.

"아 시발"

그나마도 혹시 누군가 들을까 싶어 속삭이듯 작게 말했다. 계약직 나부랭이 따위가 헛된 꿈을 꾼게 잘못이지. 내 주제에 무슨. 정규직 전환되면 소민이한테 고백할까 했던 불과 1시간 남짓 전의 내가 너무 기가 막혔다. 존나 웃겨. 병신.

"아흐"

어쨌든 박 과장님 돌아오기 전에 자료 준비해놔야지. 뭐 다 하기 싫어졌지만.

"영재"

씁쓸한 마음을 털고 일어나려는 순간 소민이 들어왔다. 히죽 밝은 얼굴이, 내 표정을 보고는 갑자기 놀란 얼굴이 된다.

"표정이 왜 그래? 팀장님한테 혼난거야?"

하지만 그 말 직후 떠오른 생각이 있었던지 "설마, 전환 안 된거야?" 하고 묻는다. 눈치 드럽게 둔한 애가 이럴 때는 또 귀신 같다.

"어"
"뭐?"

마치 본인이 당하기라도 한 양 더 확 표정이 변한다. 이렇게 화를 대신 내주는 모습에, 솔직히 울컥하는 마음이 살짝 들 정도로 고맙다.

"회사 사정이 안 좋은데, 나까지 같이 가긴 힘들거 같대"
"같이 가긴 어딜 같이 가. 자기가 뭐 쇼미더힙합이야?"

여기서 쇼미더힙합이 왜 나오냐고 웃으며 한 마디 대꾸 붙이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내 마음이 지금 너무 무거웠다.

"여튼 나 준비해야 돼. 박 과장님 오기 전에 자료준비"
"영재"
"미안해"

사실 내가 말하고도 뭐가 미안하다는건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하며 회의실을 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괜히 눈물이 터졌다. 정작 팀장님한테 통보 받을 때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나는 자리로 돌아가려다가 얼른 눈물을 감추려 사무실을 나와 계단으로 향했다.



"응, 알았어. 아 뭐 회사가 여기 밖에 없나? 아 됐어. 또 다른 더 좋은데 가면 되는거지. 그래, 엄마는 엄마 몸이나 잘 챙겨. 요즘 수치는 어떻게 나와. 잘 체크하고. 어어. 알았어. 나 바뻐. 어어"

옥상에 와서 눈물이나 좀 닦고 한숨 돌리는데 마침 또 엄마의 카톡. 그냥 다 말했다. 전환 안 됐다고. 전화기 너머로 속상해하는 엄마의 마음이 여기까지 전해지지만 그냥 됐다고 하고 얼른 끊어버렸다. 거의 확정적이라느니, 내가 누군데 어쩌고 하며 괜한 말들을 미리 했던 것들이 후회스럽다. 얼른 화장실 가서 세수 한판 하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업무에 집중한다.

"자료 준비 다 됐습니다"

박 과장님한테 자료를 메신저로 보내고 말로 확인한다.

"어어 고마워"

언제나 일과 피로와 육아에 찌들어 있는 불쌍한 박 과장님. 물론 진짜 불쌍한건 나지만. 내가 사무실로 돌아오자 다들 내 눈치를 말은 안 해도 살피는게 느껴진다. 언제나의 자료조사 같은 일도 오늘따라 누가 뭐 시키지도 않는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나는 그냥 하던대로 이번 주 성과보고 로우 데이터 취합부터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뭐라도 일을 해야 시간이 갈 것 같아서.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마음이 뭐 같아서 그냥 6시 3분이 되자 컴퓨터를 껐다. 피곤하다. 가방을 메고 사무실을 나왔다. 날씨 좀 풀렸나 했더니 퇴근시간 되니 또 쌀쌀하다. 걷어 올린 소매를 다시 내리고 단추를 잠궜다. 답답하다. 집에 가면 이력서부터 업데이트 해야되나. 문득 지난 주에 술자리에서 원호한테 사회생활이 어쩌고 하면서 잘 나가는 척 한게 갑자기 생각났다. 너무 부끄러워서 눈 앞이 다 아찔했다.

"영재"

뒤에서 누가 부른다. 소민이다. 사실 가방 쌀 때 이미 소민이 "이따가…" 하며 뭐라고 말을 걸어왔지만 내가 먼저 "나 먼저 들어갈게" 하고 말을 끊었더랬지. 그렇게 휘적휘적 나왔지만 그래, 솔직한 마음으로는 한번 더 붙잡아주길 바랬었다.

"영재!"
"어"

저 개구리 같은 얼굴이 또 히죽 웃으며 다가온다. 울적한 사람 마음도 몰라주고 어쩜 이리도 해맑을 수 있나 싶은 개구지고 예쁘장한 얼굴이다.

"야, 술 한잔 하자고 할랬더니 그렇게 가버리는게 어딨냐"
"술은 뭔 술이야. 지금 술 마시면 나 취할 거 같애"
"그럼 집에 가서 혼자 징징 짜려고?"
"짜긴 무슨"
"됐고, 한 잔 해"

고마웠다. 너무 좋았다.

"좀따 기원대리님도 올거야"

이건 좀 싫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기원 대리라니.




"아니 뭐 솔직히 회사 분위기도 분위기니까 할 말은 없는데, 근데 그게 어제 오늘 이야기는 아니잖아. 원래 내가 전환 힘들거면 미리 좀 말해줬으면 좀 좋아? 두세 달 전에만 말해줬어도 내가 준비라도 할거 아냐. 근데 이거 뭐야. 그냥 한달 일하고 나가라? 그게 진짜 배신감 들고 힘들어"

겨우 생맥주 500도 아니고 330 하나 마셨는데 약간 알딸딸하다. 역시 기분 안 좋은 날 마시는 술이라 그런건가. 아까는 추운거 같더니만 또 술을 한잔 먹어서 그런지 좋다. 호프집 테라스에서 이렇게 소민이랑 둘이 술 마시니까 그건 좋았다. 시원하고.

"그래 맞어. 너 지난 달에도 막 야근하고 차 끊겨서 택시타고 집에 가고 그랬잖아. 그렇게 막 부려먹구!"

맞장구 쳐주는 소민이가 이쁘다. 목소리가 높아 옆에서 흘낏 쳐다보는게 느껴진다. 남자 셋이 마시는 테이블. 저 맞은 편의 남자 넷 앉은 테이블. 다들 한번 보고 또 한번 쳐다본다. 이쁘장한 애가 취한 듯 소리치는게 귀여웠겠지. 아니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건가.

"한잔 더 마실래?"
"어. 오늘 완전 죽자! 씨!"
"죽긴 무슨. 야, 이제 한 잔 마셨어. 오바하지마"

내 한 마디에 또 소민은 빵 터져서 "아 그러네?" 하며 실실 웃는다. 아 귀엽다. 새하얀 피부에 웃는 표정이 귀여운 소민이.

"어후, 미안미안. 내가 늦었네"

그때 기원 대리님이 왔다. 일은 드럽게 못하지만-솔직히 나보다 못하는 거 같다- 외모 하나는 호감형이고 몸매 딱 각 잡힌.

"아 목말라. 어? 이미 한잔씩들 마셨네? 나도 그럼 같이 시작해"
"좋아요! 오늘 기원 대리님이 술 값 팍팍 다 쏘는거?"
"오케이"

맞은 편의 소민 옆자리에 앉은 기원. 그는 곧바로 맥주 세 잔을 추가로 시켰고, 치킨 한 마리를 또 시켰다. 소민의 말에 얼떨결에 술값 다 부담하게 생겼지만, 그런 것 따위 그에게 전혀 상관없겠지. 스패로우 스포츠카에 집에는 세컨카로 BMG MINE까지 있는 사람이니까. 그렇다고 카푸어냐 하면 그것도 아닌게 비록 15평 아파트라고는 하지만 자기 집까지 있는 사람이다. 부동산 폭등하기 전에 영끌해서 산 집이 대박 난 케이스라고 하는데 내가 봤을 때는 집 자체가 원래 좀 사는 사람 같다. 나랑은 불과 3살 차이 밖에 안 나는데, 나와는 모든 조건이 차이가 난다. 당장 회사만 해도 공채 출신에 정규직이니까.

"얘기 들었어. 참, 타이밍이 안 좋았네"




몇 잔 더 들어가고, 뒤늦게 피처를 시키며 그마저도 반 이상 비웠을 무렵 기원 대리가 말했다.

"신사업이라는게 말이 쉽지 우리 회사처럼 보수적인 분들 위에 계시면 정작 제대로 된 신사업은 하기 어렵지. 했다가 잘 안되면 누가 책임질건데. 그러다보니 안전한 먹거리 찾는거고 그러면 또 뻔한 일 뻔한 기획 해서 하는데 그게 어디 우리 회장님 눈에 들겠냐고. 뻔한 소리하는데"

그 말을 하면서도 흘낏 주변을 돌아보며 혹시라도 다른 테이블에 회사 사람 있나 눈치 보는 기원 대리의 모습에 작게 실소가 나오지만 저게 직장인의 기본적인 자세겠지.

"어쨌거나 그러면서 시간 지금 벌써 신사업 찾겠다고 허송세월한게 거의 2년 다 되어가잖아. 회사는 기울어 가는데 시간만 날리니 비전은 없어지고, 능력 좋고 눈치 빠른 사람들은 다른 곳 나가고 그러면서 악순환이 서서히 완성되는거야. 그나마 요즘 시국이니까 다들 뭉개고 있는거지. 어차피 경기 조금만 풀리면 제 발로 나갈 사람 그렇잖아도 많을걸"

그래, 어차피 비전 없어 보이긴 했지. 그런 말에 막막한 마음이 조금은 풀어지는 듯도 하지만 어쨌든 당장 다음 직장이 캄캄한 입장에서 다 배부른 소리처럼 들렸다. 그리고 말만 그렇지, 어치피 이 회사가 당장 망할 회사도 아니고.

"근데 그럼 언제까지야?"
"다음 달 9일까지요"
"얼마 안 남았네"

당연히 걱정해주는 말인데, 그냥 별로 듣기에 좋지가 않았다.




"야, 진짜 너무 한다. 차가 비명을 지르겠네. 이번 주말에 당장 정비소 가야 돼"

소민이 중고차 사고 2년 반 됐는데 아직 엔진오일 한번도 안 갈았다는 말에 기겁을 하며 기원 대리님이 손사레를 친다.

"그래요? 내 차 잘 나가는데?"

소민은 언제나처럼 아무렇지 않게 갸우뚱하지만, 그 말에 나도 기원대리님도 모두 코로 실소를 내뿜는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단순히 차량 관리에 대해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소민의 말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저 표정이 너무 귀여우니까.

"그치? 너도 내 차 타봤잖아"

소민은 몇 번인가 나를 퇴근길에 태워줬던 것을 말한다. 그리고 지난 달에 같이 한강공원에도 갔었고.

"어, 잘 나가긴 하더라. 생각보다 소민이 운전 잘하더라구요. 올림픽대로에서 막히는데도 막 쑥쑥 잘 끼어들고"

내 맞장구에 ,그러나 기원은 묘한 표정으로 묻는다.

"뭐야, 둘이 진짜 사귀는거야? 둘 다 집 방향 그 쪽이 아니잖아. 올림픽대로에 둘이 차 타고 갈 일이 뭐가 있어. 응? 이상한데?"

역시 운전하는 사람이라 그런가. 쓸데없이 예리하다. 어쩌면 견제구인지도. 내가 뭐라고 답해야 하나 잠깐 망설일 때 소민이 바로 말했다.

"지난 달에 주말에 한강공원 갔어요. 바람 쐬러. 내가 밥두 사구. 나 TF 소속됐을 때 너무 힘들었을 때 영재가 진짜 많이 도와줬거든요. 아니었으면 나 그때 관뒀을지도 몰라서"

그러자 기원 대리님이 "올" 하면서 나를 흘낏 쳐다본다. 그러더니 물었다.

"영재씨는 차 뭐 몬다고 했지?"

일부러 물어본 것일까.

"장농면허에요"
"아, 뭐 그럼 연수 받으면 그만이지. 어차피 소민씨도 차도 있는데"

나는 웃으며 물었다.

"소민이 차 있는게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뭐, 내가 딱 보니 조만간 소민씨 차가 영재씨 차 되겠구만"
"아 대리니임! 아저씨들이랑 맨날 놀더니 대리님도 아저씨 같은 소리해!"

소민이 기원 대리님 팔뚝을 때린다. 나도 팔뚝 맞고 싶다. 기원 대리는 그게 재밌던지 더 놀리기 시작한다.

"아니 둘이 뭐, 한강공원 데이트하고 뭐 맨날, 어? 아 부럽다. 나도 연애해야 되는데 아. 소민씨 주변에 솔로인 언니들 없어? 나도 영재씨랑 소민씨처럼 연애하고 싶어. 나도 연애 시켜줭"
"아 대리님 뭔 소리에요"

괜히 나랑 이어주는게 민망하면서도 실실 웃음이 나오던 차에, 소민이 뾰루퉁해진 척 말했다.

"아 맨날 왜 우리 둘이 엮어요. 그냥 친구에요 친구. 동갑이잖아요. 거의 입사동기구. 그니까 친하죠. 왜 맨날 몰아가요. 회사 아저씨들만 그러더니 이제는 대리님까지 그러네. 넘 싫어. 야, 영재. 말해봐봐"

소민이 삐친 척, 기원대리에게 애교 섞인 목소리로 징징대는 모습에 방금 전까지 내 귀에 걸렸던 미소가 빠르게 사그라 들기 시작했다. 입에서도 마음 속에서도. 기원 대리 앞에서만큼은 나랑 엮이기 싫다는 건가. 그런건가. 혼가 김칫국 오지게 퍼마셨던건가.

"아 그럼. 아 나 쟤 싫어요. 싫어. 내가 그래서 나가는거에요 진짜"

서늘해지는 마음에, 없는 소리까지 해가며 잔을 비웠다. 대충 안주도 거의 다 먹었고, 다들 내일 출근할 사람들이니까 정리해야겠다 생각했다.

"아우 피곤하다. 우리 슬슬 가요"

조금 서운한 티가 났을라나. 그래도 뭐 상관없었다. 이제는 어차피 소민도 오르지 못할 나무다. 대기업 계열사 출신의, 이제는 아니지만 그래도 업계 중견기업의 곧 3년 되어가는 2년차 정규직 사원과 백수인 내가 가당키나 하는 사인가. 게다가 그런거 떠나서 와꾸만 봐도 어디 어울릴 사람인가.

하긴.

차라리 지금 이렇게 나란히 앉은 둘이 훨씬 더 잘 어울린다. 그래, 소민이 쟤도 뭐, 딱 저런 대리님이랑 어울리는 나이지. 정말로. 진지하게. 그렇게 생각하니 이 술자리가 정말 괜한 시간이었다는 생각만 들었다. 차라리 집에 가서 일찍 잠이나 잘걸.




헤어지고 집으로 향하는 길. 아무리 맥주라지만 꽤 마셨음에도 별로 취하진 않았다. 아니 술기운은 도는데 머리는 말짱하다. 전철에 앉아서 멍하니 혼자 깊은 생각을 한다.

앞으로의 미래 생각, 엄마의 한숨, 카드값, 퇴직금의 사용처, 그리고 소민.

사실 한강공원에서 고백을 할까 수십 번도 넘게 고민했었다. 분위기도 좋았고, 굳이굳이 우리 집까지 태워주겠다던 소민의 행동도 왠지 빨리 헤어지기 아쉬워서 그런 것도 같고. 근데 그때도 만약 정규직 전환 안 되면 꼴이 우스워 질 것 같아서 마지막에 꿀꺽 고백을 삼켰다. 집에 가서도 정말 많이 후회했고, 그 날 이후로 사실 따로 둘이 주말에 본 적은 없었다.

'연애도 다 타이밍이라던데'

그래도 여전히 회사에서는 가장 말이 잘 통하고, 지금도 실없는 소리지만 메신저로는 맨날 낄낄대니까 정규직 전환만 되면 뭐 그때 가서 진짜 나도 차도 뽑고, 아니 연수부터 받고 뭐 고백도 할라고 했는데.

"답 없네"

혼자 중얼거리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 확률이 얼마나 올라갈까. 뭐 솔직히 나 말고도 회사에 은근히 소민이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 몇 명 있는거 안다. 총무팀 재환이도 남자끼리 있는 술자리에서 "소민씨 좀 매력적이지 않아?" 하고 마음을 드러낸 적이 있었고, 원일 과장님도 내가 알기로 "요즘에는 소민씨처럼 발랄한 타입이 인기 많지 않아? 막 너무 튕기고 그런 타입보다 털털하면서도 애교 많고 귀염귀염하잖아. 아 그럼. 나야 유부니까 어쩔 수 없지만 내가 싱글이면 바로 데이트 신청했지" 하면서 대충 막연하게 다들 생각하는 부분을 짚기도 했었다. 다들 비슷한 마음이겠지.

그 중에서 제일 신경쓰이는건 역시 같은 팀의 기원 대리님. 아니 무슨 님씩이나. 어차피 이제 곧 다 남인데.

"흐"

이제 곧 내릴 역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생각에 잠긴다. 집 있고 차 좋고 다정다감하면서 약간 나사 하나 빠진 것 같으면서도 뭐든 스무스하게 잘 웃어 넘기는 그런 멍청한 듯 약아빠진 타입. 반대로 여직원들 많은 술자리에서도 퇴사한 혜경씨랑 아름씨랑 은근 기싸움까지 하면서 서로 호감을 표시한 거 본 적이 있었을 정도니까, 모르긴 몰라도 여자들에게 비호감인 타입 뭐 그런건 아니리라. 일단 허우대도 175에 슬림하니까. 정장 입으면 나름 태도 나고. 내년이면 과장 승진 대상이고. 그럼 연봉이 얼마냐.

"후우"

거기까지 생각하자 부럽고 배가 아팠다. 아까 술자리 도중에 인스타 계정까지 팔로우 맺던데. 이제 곧 둘이 친해지겠네. 나 같은 백수야 퇴사하면 금방 잊혀질테고. 눈을 감았다. 이력서 몇 장을 더 지원하면 이직이 될까. 좆같구만.



"영재씨, 내가 이런 말할 입장도 솔직히 아니고, 영재씨 입장도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사회생활이라는게 유종의 미라는건 중요한거잖아. 관둘 때 관두더라도 마지막에 조금은 예전같은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어. 나야 뭐 이해하지만 다른 팀 사람이나 보면 좀 마지막 이미지가 안 좋게 비쳐지는 것도 좀 아니잖아"

마지막 3주 동안, 그 어떤 의욕도 나지 않았다. 회사에서 버젓히 잡람인, 잡커리어 같은 사이트를 펴놓고 일자리 찾기도 했고, 4일 연속 지각을 하는가 하면 퇴근은 59분만 되면 엑셀부터 껐다. 업무요청을 해와도 설렁설렁. 결국 참다참다 박 과장님이 좋게좋게 이렇게 한 소리를 했지만 솔직히 그마저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주의하겠습니다"

성의없는 대답과 함께 먼저 회의실을 빠져 나왔다. 유종의 미? 마지막 이미지? 코웃음이 나왔다. 박 과장님이라고 해서 뭐 개인적인 감정일 리는 없고 아마 팀장님 대신에 좋게 말해준거 아니면 정말 좋은 뜻에서 한 말이겠지만 그냥 다 꼴도 보기 싫었다. 그냥 남은 시간 최대한 시간이나 때우다가 관두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 날의 술자리 이후로 소민에게도 철벽을 쳤다. 소민이 몇 번인가 "기분…안 좋은건 알겠지만, 그거 말구 혹시 뭐 내가 실수한거 있어?" 하고, 그녀답지 않게 조심스럽게 묻기도 했지만 솔직히 별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직장 동료, 그나마도 곧 관둘 회사의 동료라고 생각하니 생각보다 쉽게 내 마음의 문이 닫혔다.

창원 주임이나 성은씨 등 다른 루트를 통해서 "요즘 많이 힘들어?", "소민씨랑 뭐 싸운거?" 하는 식으로 묻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조차도 다 귀찮았다. 부질없고 한심한 이야기들. 퇴사 마지막 주, 팀장님이 그래도 회식 겸 인사 겸 해서 술자리 한번 마련한다고 했지만 난 그마저도 거절했다.

"솔직한 마음으로, 그 날 술자리에서도 좋은 얼굴로 끝까지 앉아있을 자신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하고 거절했다. 팀장님도 그날 처음으로 "영재씨, 나도 솔직히 이런 이야기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이러면 다 힘들어지는거잖아" 하고 넌지시 한소리 했지만 그저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죄송합니다"가 다 였다. 담담했다. 솔직히 멋지게 퇴사하고 싶어서 그 몇 주 사이에 입사지원만 13군데를 했지만 면접 제의조차 한 건도 오지 않았다.

"그렇구만"

그리고 그건 내 현실을 그 무엇보다 명확하게 설명해주었고 앞으로 다가올, 퇴사 이후 퇴직금 까먹고 실업급여 몇 푼 받으며 근근히 버티는 생활 지나가면 얼마나 암울해질까에 대한 실감나는 공포였다. 요즘 혈액순환이 안 되어서인지 자꾸 다리에 쥐가 난다는 엄마가 발가락을 주무르는 모습을 보면 생각이 더욱 많아졌다.



"야, 홍영재"

그리고 퇴사 전날, 일을 마치고 오늘도 모두의 동정인지 짜증인지 실망인지 모를 묘한 시선을 느끼며 칼퇴를 한 후, 회사 정문을 빠져나오는 나를 뒤에서 소민이 불렀다. 담담한 마음이었다. 그렇게 돌아본 소민은 슬리퍼만 신고 있었다. 뭐야.

"뭐야, 슬리퍼 신고 나오면 어떻게 해"
"지금 그게 중요해?"

화가 난 건지 어떤건지 모를 표정으로 다가온 소민은 조금 높은 톤으로 말했다.

"니가 퇴사하면 하는거지, 왜 그러는건데 도대체. 기분 안 좋은거? 그래, 그건 이해해. 근데 왜 나한테까지 그러는거야? 내가 너한테 뭐 잘못하기라도 한거야?"

처음으로 내가 당황스러웠다.

"뭐가"

소민은 "하 참" 하면서 한 손을 허리에 얹는다.

"너, 요즘 나한테 인사도 안 하잖아. 하루에 말 한 마디 안 하잖아. 그냥 업무적으로 말해야지만 어, 어, 어. 그게 다잖아. 왜 그래? 너만 힘들어? 나도 힘들어. 왜 그러는건데. 회사 관두는거 힘든거? 그래, 알어. 아니 안다고 말 안 할게. 근데 아무리 그래도 너랑 나랑은 친구 아냐? 힘들 때 서로 돕고 그런 사이 아니야? 근데 너 힘들 때 갑자기 이렇게 나 막 모르는 사람인 척 하면, 나는? 너는 나 도왔는데 나는"

그랬나. 그래도 쉽사리 공감이 가진 않는다. 지금의 나는 열등감 덩어리니까.

"소민아, 일단 진정하고…"

정문 쪽을 쳐다보자, 우리 팀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팀 사람들까지 몇 명 나와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야, 구경 난거야 뭐야. 안 봐도 그림이 그려진다. 내가 나가자마자 소민이 씩씩대며 슬리퍼만 신은 채 후다닥 뛰어나왔고, 그거 보고 다들 뭐야뭐야 하면서 따라 나온 거구만. 찐한 스캔들 또 돌겠네. 나는 그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다들 멋쩍은 얼굴로 히히덕 거리며 들어간다.

"소민아. 일단 저기서 이야기 하자"

아직도 정문 쪽에서 우리를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어서 나는 덤불에 가려지는 옆 벤치쪽으로 소민을 인도했다. 벤치에 앉아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나는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그냥 그대로 말 안 하고 조용히 퇴사하려고 했던, 정말로 정말로 소민에게 하고 싶었던 말들을. 조금은 더 분위기 있고 그럴싸하게 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나도 안다. 인생이라는건 항상 뭔 일을 하던 그렇게 머릿 속에 그린 것처럼 적당한 장소에서 적당한 타이밍에 할 수 있는건 아니라는걸.

"나 너 좋아해. 직장동료로서가 아니라, 여사친… 여자친구로서. 솔직히 한강 갔을 때도 고백하고 싶었구. 근데 니가 입사 초에 사내커플은 죽어도 안 한다고 한 적도 있었고…"
"내가 언제"
"너 그랬었어. 여튼 그랬고, 그런데 그래도 최소한 앞날이 불투명한데 고백하는 것도 좀 그렇다고 생각했어. 그러다가 지금처럼 결국 전환 안 되니까 힘이 다 빠지더라고. 그래서 마음을 접은…접을라고 한거야"

접은거야, 라고 말하려다가 또 그 와중에 접으려고 한 거라며 한번 더 여지를 둔다. 속 뻔히 들여다 보이게. 그리고 다음은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여기까지 다 말해야 내 마음을 소민이가 이해하겠지 하는 마음에 그냥 120% 다 말했다.

"그리고 디게 찌질한 이야기지만, 그 날 그 같이 술 마신 날에 너랑 기원 대리님이랑 둘이 이렇게 나란히 앉아있는데 둘이 잘 어울려 보이더라. 그럴싸한 직장에 환경에, 뭐. 근데 나는 이제 곧 백수고, 그러니까 디게 멀게 느껴지더라고. 나 혼자 짝사랑하는게 등신 같고, 가망 없는 일에 혼자 마음 주는 것도 그렇고,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 와중에 칼퇴근 하는 다른 팀원 분들 몇 분을 뻘쭘하게 마주하며 인사했다. CS팀의 아주머니들이었다. 그녀들은 나와 소민을 쳐다보며 묘한 눈으로 인사하더니 또 까르르 까르르 대며 저기 역쪽으로 걸어간다.

"너 발 시렵겠다. 어쨌든 오늘도 그렇지만 그런데 막 너랑 친근하게 구는게 다른 사람들 눈에도 좀 그래보일거 같고 너도 직장생활 하는데 내가 괜히 좀 그런거 같고 그래서 그랬어. 사실 이 이야기 정말 안 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해버리게 됐네"

속이 조금 시원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고, 아주 솔직한 마음으로는 이 이야기를 듣고 소민이 나랑 사귀어 주길 바라게도 되지만 그건 또 그것대로 웃기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 나의 고단하고 찌질한 연애에 이 매력적이고 착한 애가 끼어들게 바라는 나의 이기심에 화까지 조금 났고.

진심으로 소원했다. 소민이가 그냥 이렇게 "알었어. 뭣 땜에 그랬는지 알겠어. 그렇다고 내가 너랑 사귈 수는 없지. 알았으니까 잘 가" 하고 그렇게 다시 들어가길. 그럼 집에 가서 혼자 찌질하게 좀 울고 나면 나도 후련해질테니까. 그리고 또 소원했다. 부디부디 1%의 확률이지만 나랑 만나주길.

"홍영재"
"어?"
"내 얼굴을 보고 말해"

나는 그제서야 비로소 소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언제나의 장난끼 많은 얼굴.

"기원 대리님은 내가 소개팅 내가 알아봐주기로 했고, 내가 그리고 기원 대리님이랑 왜 사귀냐? 그리고 넌 날 좋아하면 뭐 남자답게 고백하고 차이던가, 꼭 그렇게까지 혼자 찌질하게 그랬어야 돼?"
"찌질하긴 뭐가 찌질해"

소민은 팔꿈치로 내 팔뚝을 쿡 찔렀다.

"야, 회사 다른 팀 사람도 니가 나 좋아하는거 다 아는데 나만 모르겠냐? 내가 눈치가 얼마나 빠른데."
"무슨"
"이 누나가 이 찌질이랑 사귀어 줄까 말까 고민했는데, 이렇게 솔직하게 다 털어놓으니까 내가 한번 봐준다"
"뭘"

소민은 어이없다는 듯 웃더니 눈을 똥그랗게 뜨고 말했다.

"야, 회사 사람 다 봤는데 이제와서 아니라고 하면, 그거야말로 내가 뭐가 되냐? 내가 고백하고 차인 줄 알거 아냐"
"어?"
"만약에 지금도 고백 안 했으면 진짜로 그래 꺼져, 하고 쌍욕하고 바로 연락처 다 차단할라고 했는데 이렇게 솔직하게 뒤늦게라도 말하니까 내가 용서한다. 빨리 제대로 고백해"
"무슨 고백"
"나 좋아한담서"

흐.

"어. 소민아 좋아해. 사귀자"

무미건조한 내 말 톤에 소민은 진심으로 짜증난다는 투로 주먹을 쥐었다.

"아 진짜 아 너무 짜증난다. 이게 뭐야 쪽팔리구 멋도 없고. 너 진짜 나한테 잘해라. 어?"
"참나"
"그리고 백수 남친 만날 수는 없으니까 오늘부터 이력서 100장씩 써. 알겠어?"
"어. 이미 쓰고 있어"
"더 써"
"알았어"
"너 내 혼사길 막았으니까 진짜 잘해라. 멋있는 회사 이직 못하면 너 죽인다"
"어"

그래. 사실 너무 좋았다. 내 주제에 이렇게 이쁜 애랑 연애를 하게 되다니. 내가 생각해도 너무 황당하고 찌질하게 연애하게 된 것 같긴 하지만…막차에 올라타는건 다들 그런거지. 안 그런가.

"여튼 발 시렵겠다. 얼른 들어가서 짐 싸서 나와. 기다릴께"

내 말에 소민은 "아 안에 어떻게 들어가지. 내일은 또 어쩌지. 나도 회사 그냥 관둘까" 하며 갑자기 발을 동동 굴렀다.

"둘 다 백수면 어떻게 해. 빨리 들어가"
"아 씨. 알았어. 기달려"

소민은 저쪽으로 가다가 "잘해라" 하고 한번 더 경고하고 정문으로 들어갔다. 나는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어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소민이 말대로 잘하는 수 밖에 없다. 잘하자.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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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만 해

커플의 첫 여행. 아마도 당연히 이 여행을 기점으로 보다 더 돈독해졌어야 할 둘의 사이는 어색함과 냉랭, 실망 그 언저리에서 맴돌고 있다. 

"이거 먹을래?"

근 20분-아마 체감으로는 거의 2시간에 가까운-만의, 용기를 내어 호두과자를 내민 그녀의 말에도 남자는 한참 후에야 "아니" 하고 간신히 대답했을 따름이다.

[ 500미터 앞, 좌회전입니다. 이어서, 우회전입니다 ] 

네비게이션의 음성만이 둘 사이의 적막을 깬다. 일요일 오후 느즈막한 시간의 답답한 도로. 이제서야 조금 다시 속도가 붙나 싶지만, 답답함과 막막함은 전과 다를 바가 없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운전만 해





"이제 슬슬 갈 준비하자"
"응"

남자의 말에 짐을 싸기 시작하던 둘. 이미 전날 저녁, 뜨밤을 보내기 전 남자가 부지런히 어느 정도 치워놓았기에 펜션의 뒷정리는 거의 15분 만에 끝났다. 혹시라도 뭔가 두고 온 것은 없을까 마지막으로 남자가 스윽 둘러보고, 펜션 주인에게 인사를 하고 둘은 차에 올랐다.

"후기 꼭 좀 좋게좋게 남겨줘요. 혹시라도 부족한게 있었다면 다음에는 더 잘할게"
"하하, 아니에요. 정말 좋았어요. 올라가면 후기 남길게요"
"그래요, 고마워요. 둘이 참 어쩜 그렇게 잘 어울리는지 몰라. 내 펜션 여기서 10년 했는데 둘만큼 잘 어울리는 커플 본 적이 없어"
"하하하"

이번 여행 내내, 서글서글한 남자의 성격에 여자는 한번 더 반했다. 평소의 조금 무표정한 얼굴에 비해, 사람과 어울릴 때는 환하게 밝아지는 그 얼굴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굳이 이런 타이밍에 그런 생각이 왜 떠올랐는지는 모르겠지만, 전 남친의 그 심한 낯가림과 퉁명스러움-반대로 나와 있을 때는 그토록 다정하던 모습과 달리-과는 또 묘하게 반대되는 모습이었다. 

"안전밸트 잘 맸어? 그럼 출발한다"
"응!"

이제 서울로 향하는 길. 밝은 햇살에 길도 막힘이 없다.

"아 날씨 좋다"
"증말 너무 좋다 날씨"

금요일부터의 이박삼일 여행의 마무리. 딱히 중요한 부분은 아니지만-아니 당연히 중요하지만- 남자의 밤일은 멋졌다. 전 남친과 헤어진 이래 거의 3개월만의 관계였는데, 정말 좋았다. 정말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 거칠면서도 따뜻한 손길이 짜릿했다. 2박 3일의 즐거운 기억이 그토록 많았는데 그것부터 생각나는 자기 자신이 새삼 웃겼지만.

"왜 웃어?"

남자의 질문에 여자는 겨우 웃음을 참으며 "아냐" 하고 얼버무렸다. 남자는 피식 웃으며 "왜 웃었는데" 하며 되묻는다. 여자는 "그냥 어젯 밤에 좋아서" 하고 솔직하게 말한다. 

"아하핫! 그렇게 좋았어? 뭐야, 아 대박이네"

남자의 웃음소리이 한껏 커진다. 남자로서의 자신감이 가득 차올랐겠지. 

"그럼 우리 또 어디 쉬었다 갈까?"
"아니야, 그냥 집에 가"

짖궂은 남자의 말에 여자도 한껏 애교를 부리며 남자의 어깨에 살짝 머리를 기대었다 뗀다. 

"어, 근데 나 폰 배터리 없다. 아, 충전줄 가방에 있는데. 휴대폰으로 네비 좀 찍어줄 수 있어?"
"응, 알았어"

여자는 얼른 주소를 찍고 거치대에 올려놓는다. 그렇게 30분쯤 달렸을까. 차는 고속도로에 오르고, 한참을 쭉쭉 달리나 했더니 오후가 되자 슬슬 차가 막히기 시작한다.

"에어컨 켤까?"
"아니야, 그냥 선루프 열자"
"그래"

선루프를 열자 조금은 환기가 되는가 했지만, 역시 내리쬐기 시작하는 햇살에 오히려 금방 더 더워지는 느낌이었다.

"와 이제는 정말 여름이다"
"에어켠 다시 켜자"

여자는 에어컨을 켰고 차는 금새 시원해졌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1시가 다 되었다. 시간을 알자 허기가 느껴졌다.

"나 조금 배고플라고 그래"
"그래? 마침 잘 됐다. 1km 앞에 휴게소야. 거기서 밥 먹자"
"어 좋아"

그리고 그 순간, 휴대폰에 카톡이 울렸다. 

카톡, 카톡, 카톡, 카톡.

한번도 아니고 네 번이 연속으로. 카톡, 다섯 번. 지수네 단톡방인가? 하고 생각하던 찰나

"어 휴대폰 가져가도 돼. 조기 앞에 휴게소야"
"응"

남자의 말에 거치대에서 휴대폰을 빼서 확인한 여자. 하지만 그 순간 여자는 살짝 당황했다. 아니 당황까지도 문제가 아니지만, 표정을 관리 못했다. 흘낏 옆을 본 남자는 입을 벌리는 여자를 보며 물었다.

"왜? 뭔 일 있어?"
"어?"

만약 그때 "어, 아냐. 그냥 친구들이 남친이랑 뜨밤 보냈냐고 놀려서" 하고, 불과 딱 몇 초 뒤에 떠오른 다른 변명을 떠올렸다면 어땠을까. 그냥 그랬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갔을텐데. 중요한 일도 아니고.

"어, 아니"

얼버무린게 잘못이었다.

"뭔데?"

남자는 언제나의 그 약간 무표정한 얼굴이 되었다. 방금 직전까지 띄고 있던 그 흐뭇한 표정이 사라지고. 여자는 그 표정이 매번 조금 무서웠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

약간의 갈등.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그냥 얼버무릴까의 고민. 사실 여자는 꺼리낄 것이 없었다. 이미 헤어진 지 3개월이나 된 전 남친의 카톡. 이미 마음에서 지웠다고 생각한 그 남자의 연락인데. 그냥 여자의 고민은 이 카톡을 남자에게 보여주고 완벽하게 깔끔해지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그냥 좋은 분위기에 초치지 말까의 그런 고민이었다.

"어, 그냥… 전 남친이 카톡을 보냈어"

여자는 당당함을 선택하기로 했다. 여행 내내, 아니 썸타던 때부터 남자는 말했다. 솔직한 모습이 좋다고. 그래서 자기도 바로 직구를 던진 거라고. 그래서 카톡을 보여주는게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더 빨리 단단한 관계가 되고 싶어서.

"뭐라고 보내는데?"

무심한 듯 말하며 휴게소로 진입하는 남자. 하지만 당연히 남자의 목소리에서 이질적인 느낌이 느껴진다. 분노일까. 비웃음일까. 여자가 해석을 고민하는 찰나, 여자는 휴대폰을 보여주며 말했다. 

"직접 봐봐. 웃겨"

남자는 그러나 곧바로 휴대폰을 받는 대신 천천히 주차공간을 확인하며, 좌우를 살피다가 겨우 한 자리를 발견하고 깔끔하게 차를 세웠다. 그리고 그제서야 휴대폰을 넘겨받았다.

[ 오랜만이야 ]
[ 잘 지냈어? ]
[ 생각 많이했어 내 잘못도, 내가 너한테 서운함을 느꼈던 부분도 머가 좋을지 정말 고민 많이했어 ]
[ 이제와서 이런 말 하는 것도 우습지만, 너무 늦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에 참고 참다 말 걸어보는거야. 내가 다 잘못했어. 다시 잘 해보고 싶어. 딱 한번만, 정말 딱 한번만 더 기회를 준다면 네가 바라는 그런 모습이 되도록 최선을 다할게. 만약 내가 서운함을 느낀다 해도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더 생각해보고 내가 더 배려할께. 네 선택이 무엇이든 최대한 존중하고 믿을께. 제발 한번 더 기회를 주면 좋겠어 ] 

전 남친의 말은 절절했지만, 사실 이미 그 '기회'는 연애 기간 중에도 몇 번이나 주었던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끝나버린 지금에 와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뭐라고 대답할거야?"

남자는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냥 차단할건데"

그래, 그 말도 그냥 "꺼져라고 말할거야"라고 말했으면 어땠을까. 하지만 여자는 '차단할건데'라고 말했고, 남자는 다시 물었다.

"그럼 지금까지는 왜 차단 안 했어?"

그냥 곧바로 떠오른대로 "그럴 가치도 없어서" 라고 말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번에도 여자는 한번 더, 남자가 어떻게 생각할까를 고민하다가 적당한 대답 타이밍을 놓쳤고, 뒤늦게 "깜박해서" 라는 바보 같은 대답을 하고야 말았다.

"후"

그리고 그 말에는 결국 남자도 가벼운 콧바람을 내쉬었다. 은은한 분노를 이번에는 여자도 가볍게 읽을 수 있었다.

"그래?"

그리고 그 순간, 바로 전 남친의 추가 카톡이 도착했다.

[ 답변을 듣고 싶어. 싫으면 싫다고 해도 좋아. 하지만 읽씹은 좀 아니잖아. 답변을 해주는게 예의라고 생각해. 헤어진 사람간에도 그 정도 예의는 차릴 수 있잖아 ] 

찌질한 말. 그 카톡을 본 남자는 "웃기네" 하며 피식 웃었다. 비웃음인지 분노인지 알기 어려운 웃음기. 물론 그것이 분노라면 그것은 분명 전 남친을 향한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전 남친의 카톡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 너랑 나랑 연애기간만 3년이야. 그리고 그 중에서 우리가 같이 산 기간이 1년이야. 어지간한 신혼부부보다 더 길게 산거 아냐? 너랑 나랑 부부나 마찬가지라고. 몸정 마음정 다 준 사인데. 그런 인연이 석 달만에 없어지는건 아니잖아 ]

쌓여가던 남자의 분노가, 차갑게 식는 것을 이번에는 여자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출발하자"
"어…"

기름을 채운 남자는 차에 올라 시동을 켰다. 휴게소에서 둘의 비빔밥 점심식사는 정말로 괴로운 시간이었다. 숨막히는 침묵의 시간. 남자는 최소한의 말만을 했고, 여자는 

"그냥, 나 직장이 멀어서 걔네 집에서 자주 잤던거야. …그런거 아니야"

하고 어렵게 말을 뗐지만 남자는 "신경쓰지마" 하고 말했지만, 그저 묵묵히 밥을 퍼먹기만 할 뿐이었다. 한참동안의 어색한 분위기 속에 남자도 "체하겠다. 괜찮아. 그게 뭐" 하고 말을 해주었지만, 그 얼굴은 도저히 그런 표정이 아니었다. 

숟가락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구분도 안가는 밥을 먹으며 여자는 생각했다. 이랬으면 어땠을까, 저랬더라면. 그때 왜 굳이 휴대폰을 보여주기까지 했을까. 그냥 괜히 분위기 초치지 말고 엄마 카톡이라고 했으면 어땠을까. 많은 생각이 머릿 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 이거 먹고 싶어"

차로 돌아가는 길. 어색함을 깨기 위해 여자는 호두과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밥을 거의 먹지도 않았지만, 그냥 어색한 차 안 분위기에서 뭐라도 있으면 덜 어색하지 않을까 싶은 필사적인 생각의 결과였다.

"응"

남자는 지갑을 열었다.

"아냐, 내 돈으로 살게"
"아니야"

남자는 결제했다. 그리고 차에 기름도 채워야겠다며 기름을 채웠다.

"이제 슬슬 차 많이 막힌다"

굳이 가방에서 케이블을 꺼내 자기 폰에 충전을 하며 네비를 켠 남자의 모습에 여자는 새삼 당혹감을 느꼈다. 이후 남자는 말이 없었다. 여자는 몇 마디 붙여보았지만, 돌아오는 단답에 그저 휴대폰과 창 밖만을 번갈아 볼 따름이었다.



커플의 첫 여행. 아마도 당연히 이 여행을 기점으로 보다 더 돈독해졌어야 할 둘의 사이는 어색함과 냉랭, 실망 그 언저리에서 맴돌고 있다. 

"이거 먹을래?"

근 20분-아마 체감으로는 거의 2시간에 가까운-만의, 용기를 내어 호두과자를 내민 그녀의 말에도 남자는 한참 후에야 "아니" 하고 간신히 대답했을 따름이다.

[ 500미터 앞, 좌회전입니다. 이어서, 우회전입니다 ] 

네비게이션의 음성만이 둘 사이의 적막을 깬다. 일요일 오후 느즈막한 시간의 답답한 도로. 이제서야 조금 다시 속도가 붙나 싶지만, 답답함과 막막함은 전과 다를 바가 없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여자는 속상했다. 



첫 인상부터 좋았다. 조금은 그 무표정한 얼굴이 시크했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트뿅뿅 나 반했어요 하는 티가 나던 전 남친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첫 데이트가 끝날 때까지도 남자는 크게 몇 번 웃지 않았다. 단지 깔끔한 매너와 좋은 집에서 곱게 자라 귀티나는 말씨, 잠깐씩 보이는 고급스러운 어휘와 취향이 정말 지금껏 만나왔던 '그렇고 그런' 남자들과 많이 달라서 너무 멋있게 느껴졌다.

이제 더이상 어리지만은 않은 나이. 어쩌면 내 진짜 사랑은 이제 끝난 거 아닐까 하는 순간 찾아온 새로운 멋진 인연에, 여자는 이번에는 정말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내고자 했다. 그리고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 무표정한 표정은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어설픈 거짓말은 통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느낌. 그래서 결코 내숭을 부리거나, 남자의 마음을 휘두르거나 하지 않았다.  

매번의 데이트마다 "좋은 만남이었어. 그렇지만 글쎄, 잘 모르겠어. 미안" 하는 말이 갑자기 튀어나오지는 않을까, 그런 카톡이 갑자기 날아오지는 않을까 불안한 만남이었다. 물론 남자는 항상 최선을 다해서 표현했다고 뒤늦게 변명했지만.

"새삼스럽지만 우리 오늘부터 1일해요"

라는 말에 왈칵 눈물이 쏟아진 것은, 결코 그가 건낸 커플링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정말로. 그렇게 어렵게 시작한 만남이었던만큼, 그 이후로도 정말 최선을 다해 사랑을 만들어왔던 것이다. 그런 지난 몇 달간의 노력을, 그 몇 개의 '이제는 어찌되어도 전혀 상관없는 남자'의 카톡 몇 개, 그리고 어설픈 대답 몇 마디가 부숴버린 느낌이었다. 허무하고 속상했다. 남자한테 서운할만큼. 

아니, 남자를 원망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그것마저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는게 더 편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생각에, 여자는 '내가 이미 남자를 이렇게나 좋아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더 마음이 아팠다. 여기서 눈물을 흘리면 안될 것 같아서 참고 또 참았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바보야, 왜 울어"

남자의 다정한 한 마디. 

"아휴, 야, 왜 울어 이 멍충아"

남자는 왼손만을 운전대에 올려놓고, 슥 손을 뻗어 여자의 눈물을 닦았다. 여자는 그 순간 더 크게 울음이 터졌다. 흐흐흡 하는 바보 같은 울음소리와 함께 눈물이 펑펑 터졌다. 

"야, 니가 뭘 잘못했는데. 내가 찌질한거지. 그냥 몰랐던 이야기를 갑자기 그런 식으로 알게 되니까 조금, 쇼크라서 그랬어. 울지마 바보야. 내가 잘못했어. 그리고 아까 프로필 사진 보니까 그 놈보다 내가 훨씬 더 잘 생겼던데 뭐. 하나도 기분 이상하지 않아. 정말이야"

지금껏 이 남자를 만나면서 들어온 가장 따뜻한 목소리. 그 목소리에 갑자기 이상한 설움과 안도감이 뒤섞여, 여자는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그리고 정말 바보 같지만 웃음도 터졌다.

"야, 너 웃는거야 우는거야. 너 뭐야"

남자는 여자의 모습을 보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여자는 겨우겨우 눈물을 닦아내고는 "웃는거야, 웃는거" 하면서 역시 마찬가지로 아까의 애교스러운 목소리를 찾았다. 

"그러니까 이제 울지마. 항상 웃자"
"응"

그 순간 그 둘은 느꼈다. 이번 연애는, 정말 길고 오래 이어질 것 같다고. 죽을 때까지 손 잡고 함께 늙어갈 수 있는, 그런 인연이 될 것 같다고. 

< 끝 > 





지난 두 달간, 착오 & 개인사정으로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했던 스타일박스 유료 메일링 서비스가 오는 4월 20일부터 본격적으로 재개됩니다. 그동안 서비스를 기다려주신 많은 구독자 분들께 다시 한번 큰 양해를 구합니다. 감사합니다.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73803


"꺼져"

새벽 2시 반, 편의점을 향하던 나는 골목길 끝에서 길바닥에 술에 취해 앉아있는 여자를 봤다. 요즘 같은 세상에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굳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일어나요, 저기요"

내 말에 그녀는 부스스 고개를 들더니 흘낏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다시 고개를 숙인다. 눈이 부어 있었다. 술에 취한건지, 실연이라도 한 건지. 그냥 쌩무시를 하길래 한번 더 무어라 하려는 순간 "꺼져"라는 말을 들었다. 살짝 코웃음이 났지만 그러기로 했다.

"또 오세요"

편의점에서 핫바와 컵라면을 샀다. 생수 한 병과. 사실 사면서도 먹을까 그냥 잘까 고민하면서 샀다. 괜히 샀나. 그리고 골목길로 다시 접어드는데 아까 그 여자가 비틀비틀 걷고 있었다. 제대로 취했네. 아까 목소리는 별로 취한 것 같진 않았는데.

"춥다"

혀를 끌끌차며 집 쪽 골목길로 접어 드노라니 털푸덕 소리가 난다. 역시나 그 여자다. 길바닥에 넘어졌다. 힐도 벗겨졌다. 아 진짜 가지가지 한다. 다가가 쭈그려 앉으며 말을 걸었다.

"저기요"
"씨발"

…이럴 때는 아예 꺼지는게 정석이리라. 몸을 일으키노라니 그 여자가 말을 걸어온다.

"야"

야?

"일으켜 줘"

그녀를 부축해 일으킨다. 술냄새가 훅하고 올라온다. 신을 챙기노라니 굽이 꺾여있다. 백도 널부러져 있다.

"아"

발을 못 내딛는다. 발을 삐끗한 모양이다. 신고 있는 스타킹도 올이 나갔다. 볼라고 본 것은 아니지만. 원피스에 퍼 달린 코트 하나 걸치고 몇 시간을 그러고 있던건가. 잠시 고민했다.

"업혀요"

그녀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 굽 나간 힐을 손에 들고 내 등에 업혔다. 무거웠다. 끙하며 업었다. 큰길 쪽으로 향하노라니 그 여자가 말했다.

"나 배고파"

근처 24시간 가게를 떠올렸지만 요즘 때가 어느 때인가.

"지금 가게에서 밥 못 먹잖아요"

여자는 "아" 하더니 "큰길까지 데려다 줘" 하고 말했다. 그러다가 내가 물었다.

"배고프면 우리 집에서 라면 먹을래요?"

정말 이상한 뜻으로 한 말은 아니고, 그냥 손에 든 컵라면 때문에 한 말이었지만 나도 말을 뱉으면서 그 말이 어떻게 들릴지를 깨달았다.

"아니…"
"그래"

하지만 내 변명과 그 여자의 대답이 비슷한 타이밍에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괜한 짓을 하나 싶었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삔 발목으로 택시에서 내려도 집까지 가려면 고생하겠지, 하는 어설픈 변명으로 나는 나를 설득했다.

"이상한 짓 하면 신고한다"
"나 찐따에요"

회심의 한 마디였지만 여자는 웃음도 아무 대꾸도 없이 그대로 업혀있었다. 무거웠다. 집까지 가는 3분이 그리도 힘들었을 줄이야.

삑삐빅삑삑 띠릿-

집에 이름도 모를 여자를 들인다. 아니 나보다 여자가 더 황당한 일이겠지. 신발을 벗고, 불을 켜고, 그제서야 그녀를 침대에 앉혔다.

"아아"

그녀는 발목 상태를 확인했다. 언뜻 보기에도 꽤 부어 있었다. 설마 금이라도 갔나 싶을 정도로. 아마 여자도 자기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았던 모양이다. 지금 라면 먹을 때가 아니라 병원을 가야할 때 아닌가 싶은데.

"물 끓여서, 수건에 부어와. 라면도 준비하고"
"알았어요"

마치 미드 속 응급실의 한 장면처럼 지시하는 그녀. 난 여자가 시키는대로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그 사이 여자는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카톡을 했다. 그러더니 곧 전화가 걸려왔다. 여자는 손가락으로 나에게 조용하라고 한 뒤 전화를 받았다.

"어어, 나 지금 교대 뒷골목 쪽인데, 잠깐 차 좀 갖고 나와. 아냐, 나 지금 못 움직여서 그래. 머? 씨발. 아 짜증나. 야, 그럼… 아니다. 어, 아냐. 어어, 알았어"

전화를 신경질적으로 끊은 그녀는 다시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삼촌, 지금 교대쪽으로 나올 수 있어요? 어, 아니, 지금 일을 어디서 해. 그냥. 어, 지금? 어어, 한 20분? 30분? 어어, 알겠어요. 여기 위치 카톡으로 보낼께. 어 고마워요"

그녀의 전화가 끊어지자 나는 물을 다시 끓이기 시작했다.

"넌 뭔 생각으로 함부러 집에 사람을 들여?"

여자는 발목을 조심스럽게 주무르다가 뜬금없이 물었다. 나는 너는 무슨 생각으로 계속 반말을 하냐고 되물으려다가 그냥 "불쌍해서" 라고 대답했다. 여자는 기가 찼는지 고개를 저었다. 여자는 방을 둘러보더니 말했다.

"혼자 사는거야?"

어라고 대답을 할까 네라고 대답을 할까 하다가 "어" 라고 대답했다. 여자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너 근데 그러다가 진짜 큰일나. 내가 지금 만약 너 신고하면 너 바로 좆되는거야. 알아? 납치야" 하고 쌩뚱맞은 말을 한다. 나도 딱히 할 말은 없어서 허탈웃음을 한번 짓다가 물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길래 컵라면을 뜯었다.

"내 말 농담 같지? 너 그러다 진짜 큰일난다"
"아는데, 그쪽이 그럴 사람 같지는 않네요. 나 그리고 서른 둘이에요. 몇 살이에요?"

컵라면에 스프를 뿌리며 물었다. 여자는 대답 대신 "수건에 뜨거운 물 좀 뿌려와 봐" 하고 말을 돌린다. 나는 군말없이 수건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뜨끈뜨끈한 수건을 한번 짜서, 그냥 얇은 일반 수건 하나를 더해 여자에게 건냈다. 그리고 남은 뜨거운 물을 라면에 붓고, 핫바를 돌렸다.

"라면 하나만 끓이는거야?"
"하나만 샀으니까"

아뜨뜨 하면서 수건을 발목에 대던 여자는 정색하며 나를 쳐다본다. 뭐야, 줘도 난리야.

"넌?"
"난 됐어. 배고파서 사러 간거 아냐. 내일 아침에 먹을라고 산거야"
"지랄. 그럼 너 먹어"
"누나 먹어요"

손사레를 치는 그녀에게 라면을 대령하니 픽하고 웃는다.

"내가 왜 누나야?"
"뭐야, 몇 살인데. 계속 반말하길래 누난 줄 알았지"
"그럼 너도 반말해"

끝까지 나이는 안 밝힌 그녀는 꽤나 허기가 졌는지 라면이 채 다 익었을 것 같지도 않은데 먹기 시작한다. 다 돌아간 핫바도 전자렌지에서 꺼내 건내니 "그건 니 먹어" 하면서 거부한다. 몇 분 간의 침묵. 새삼 느끼지만 예쁘다. 입은 원피스도 세련됐다. 까만 원피스에 하얀 깃, 반짝이는 퍼 달린 코트도 멋있고.

"이름 물어봐도 돼?"

하지만 대답 대신 젓가락 쥔 반대편 손의 중지가 날아온다. 라면은 두어 젓가락이나 먹었을까. 여자는 국물을 후후 불어가며 마신다. 면은 안 먹고 국물만 잔뜩 들이킨 그녀는 "혹시 안 신는 쓰레빠 있어?" 하고 묻는다.

"있어"
"빌려줘"
"갚긴 하는거야?"

피식 웃은 그녀는 백에서 지갑을 꺼낸다.

"아냐, 농담이야"

하지만 여자는 지갑에서 5만원짜리를 꺼낸다.

"뭔데"

뭔 10만원이나 주냐며 치우라고 했지만 여자는 "지랄 말고 받어" 하고 바닥에 돈을 내려놓는다. 무어라 더 말을 할까 하다가 타이밍을 놓쳤다. 여자는 카톡을 하기 시작했고, 나는 조금 눈치를 보다가 핫바를 먹었다. 몇 분이나 흘렀을까. 이번에는 내가 뜬금없이 돈을 보며 말했다. 

"돈 말고, 전번 주면 안돼?"

여자는 또 정색하며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는 컵라면을 내려놓고는 다시 주섬주섬 짐을 챙긴다. 마침 전화가 왔다.

"아, 네네. 여기… 파초선 있는 동네, 그 사거리 안으로 들어와서 골목 입구에 백원종 순두부 집 있어요. 네네, 맞아요. 거기 골목 안으로 좀 쭉 들어와 주세요. 나 지금 발을 다쳐서 그래요. 못 걸어. 어어, 알겠어요"

컵라면은 거의 먹지도 않았다. 몇 분인가를 더 멍하니 앉아있던 그녀는 잠시 뒤 말했다. 

"밑에 까지만 부축해줘. 그리고 넌 집 안에 있어"
"알았어"

여자는 손에 힐을 들고, 내 슬리퍼를 신었다. 아픈 발을 거의 끌듯이 겨우겨우 걷는다.

"많이 아파 보인다. 바로 응급실이라도 가던지"
"됐어"

부축을 받으며 걷는 그녀. 향수 냄새가 진하다. 치렁치렁한 귀걸이가 이렇게 예쁘다고 생각한 건 처음이다. 1층 계단까지 내려오자 여자는 "됐어, 이제 넌 여기 있어" 하더니 혼자 계단을 잡고 힘들게 힘들게 내려간다. 그리고는

"고마워"

하고 한 마디하며 돌아본다. 소름끼치게 예쁘다. "이름도 물어보면 안돼? 난 조승원이야" 하고 말했지만 여자는 끝내 "알아서 뭐해" 하고는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여자는 곧 골목 앞에 서있는 SUV에 올랐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약간 허탈한 마음에 허기를 느껴,그녀가 먹다 남긴 라면을 후루룹 다 먹었다.

"쩝"

그리고는 남겨두고 간 10만원을 주머니에 넣었다.

"이득이네"

방에 라면 냄새가 가득한 와중에도 아직도 희미하게 남은 것만 같은 여자의 짙은 향수 냄새를 그리며, 세탁기에 수건 두 장을 넣었다.


- 끝 -

강연

"강의를 해주시면, 소정의 사례금도 드리고…"

전화기 너머로 들린 말에 나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휴 아휴 아닙니다. 제가 무슨, 저는 그런거 못 합니다. 무대 울렁증이 있어가지고, 남 앞에 딱 서면 잘하던 농담도 어버버 거린다니까요"

보통은 그렇게 거절하면 깔끔하게 끝이련만, 그녀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이번에는 한번의 강의지만, 반응이 좋고 또 그러면 또 다른 제안도 받으실 수 있고, 실제로 저희 강연회를 시작으로 해서 지금 매번 회당 막 300, 500만원씩 강의료 받으면서 전문 강사로 활동하고 그런 분도 계시거든요. 잘 하실 수 있잖아요."

그 말에는 살짝 흔들렸다. 그런가, 잘 풀리면 또 이야기가 다르려나.

"고민해볼게요"

전화를 끊고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민을 시작했다.




강연




내 말에 소정이는 배를 잡고 웃었다.

"오빠가? 그럼 오빠가 사람들 앞에서 강연하는거야?"
"아 그래, 상상만 해도 막 아찔한데, 그래도 뭐 25분만 강연하면 30만원 준다고 해서 눈 딱 감고 하기로 했어."

그래, 돈이 끌렸다. 그리 막 큰 돈도 아니지만, 작은 돈은 결코 아니니까. 소정이는 이것저것 묻다가 또 훅 들어왔다.

"나 거기 가도 돼? 오빠 강연하는거 보고 싶은데?"
"아 무슨 소리야. 그리고 평일 5시 강의라서 안돼. 나도 반차내고 가는거야. 그리고 너 오면 떨려서 더 안 돼"
"아 뭐야, 완전 꿀잼일텐데. 알겠어. 포기. 그럼 강연은 언제 하는건데?"
"2주 뒤, 금요일에"
"알았어. 그럼 준비 잘 해서, 완전 멋있게 강연하구 와"
"응"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 꼭 엎친데 덮친다고, 기간이 2주나 있으니까 설렁설렁 준비하면 되겠구나 했더니 회사에 일이 터졌다. 지난 번에 공급된 건이 잘못되서 그걸 사실상 새로 엎어야 했다. 두 달 걸려 끝낸 일을 불과 3주 안에. 첫 주는 주말 출근까지 해야할 판이었고, 금요일 반차 내는 것도 엄청 눈치 봐가면서 겨우 냈다.


"아 오셨어요?"
"네"
"준비 많이 하셨나요?"
"어, 아뇨. 하나도 못했습니다. 지금 손발이 다 벌벌 떨려요"
"하하, 얼굴은 여유만만이신데요"

그녀는 그렇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지만 난 진심이었다. 졸린 눈 비벼가며 겨우 강연 슬라이드 완성했고, 그나마도 어제 새벽 4시까지 만든거다. 강연 리허설 따위는 할 시간조차 없었다. 앞선 강연자의 '멀티 플랫폼에서의 다채널 게임 마케팅' 강연을 보면서 나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망했다'

나는 그냥 나같은 아마추어들의 약간 대학교 조별과제 발표 같은 느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앞선 강연자의 레벨은 거의 프로급이었다. 약 150여 명의 내방객들 앞에서 전문적인 이야기를 아주 쉽게 풀어서, 적절한 비유와 농담을 섞어 지식과 재미를 동시에 전달하는 미친 강연이었다. 대기업 마케터들은 과연 저런 사람들인가. 세상에. 우리 회사 사람들이 저 사람 반의 반만 화술이 있었어도 이번 일이 그 꼴나지는 않았을텐데.

"질문 있으신가요? 네, 그쪽의 손 드신 선생님"
"네, 상상피플의 강성태 부장입니다. 강연을 들으면서 한 가지 궁금했던게, 저희 업계에서는 아무래도 세계 각국의 글로벌한 환경에서 운영되는 경우가 많은데요, 다양한 채널이 함께 연계되는 마케팅을 기획하다보면, 국가나 기반 환경에 의해서 조금씩 환경이 다르거나 제약되는 부분들이 조금 있거든요? 예를 들자면 인터넷 인프라가 조금 약한 나라에서의 온라인 마케팅이나 중국에서의 SNS 마케팅처럼…"

일단 참석자들부터 30대 실무자들은 물론이거니와, 40대 50대 임원급으로 보이는 사람들마저 제법 있었다. 아 그거였구나. 소희씨가 '여기서 강연 잘 하면 진짜로 업계에서 일 잘 풀리기도 하거든요'라고 귀뜸했던게 이런 거였구나. 게다가 아까 자기들끼리 인사 나누는 모습 보면서 '어?!' 싶었을 정도로 어디서 이름 좀 들어본 업계의 '네임드' 구루들마저 꽤 와있었다.

'진짜 좆됐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며 얼른 노트북을 펴고 강연할 내용을 다시 한번 옹알옹알 정신없이 다시 살펴보았지만, 이제보니 영 구린 것도 같고, 앞의 저런 달변 강연자를 보니 용기마저 사그라들고 있었다. 이게 막 꿈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네, 다음은 레오버닷넷의 스타 개발자, 발달린칼 님 강연입니다. 강연 주제는 '휴먼 해킹'입니다"

강연 제목부터 훅 사람을 끌어가는 내용이다. 내용 역시 듣다보니 무척 흥미로웠다. 보통 해킹이라고 하면 천재 개발자가 어두컴컴한 방에서 미친듯이 노트북 두드리며 방화벽이나 온갖 보안 프로그램을 다 피하고 들어가서 정보 훔쳐내는 그런 것부터 생각하지 않는가.

"의외로 그런 쪽의 해킹이 실제 피해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뭅니다. 애초에 오픈된 서버에 런치되는 데이터는 크리티컬한 자료들이 많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그러나 현실에서의 해킹은 의외로 '퇴사한 사원의 정리 안 한 아이디와 비번', '신입사원의 바이러스 묻은 USB', '외부 서버관리자의 작은 게으름' 같은 것부터 해서, '모두를 위해 공유한 소스 내에 계정과 관계된 특정한 코드가 노출되는 경우' 하다못해 "안녕하세요 여기 CS센터인데요, 콜센터 프로그램을 설치해야 되는데 원격으로 좀 처리 가능할까요?" 하면서 살짝 열린 문 등등, 아주 다양한 해킹사고의 이면들을 빠꾸 없이 실제 기업명을 까며 사례로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아주 흥미로웠다. 전혀 문외한인 나조차도 즐겁게 들었을 정도로.

'어?'

정신없이 듣고 있노라니 강연이 마무리 되었고, 뜨거운 반응 속에 10개가 넘는, 보통 사람은 이해도 못할 심도 높은 질문과 답변 속에 드디어 '발달린칼'님의 강연이 진짜 끝났다. 수많은 사람들의 박수갈채가 쏟아졌고, 그 다음은 나였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정말 많은 분들이 기다리셨습니다. 다음은 '생각보다 짧은 시간' 소설 블로그의 '스타일박스게이'님이십니다!"

'그냥 스타일박스'라고 정정하고 싶었지만 이메일 주소 때문에 착각한 모양인지 나를 '스타일박스게이'라고 소개한 사회자 소희씨의 말과 함께 나는 무대로 나갔다. 방금 전까지 개발자들의 훈훈하고도 열띈 토론의 장이, 내가 무대에 오르자 한순간에

'뭐라고? 게이?', '저 새끼 뭔데?', '뭐지', '성소수자 강연 같은건가?'

같은 반응으로 바뀌었다. 꽤 당황한 눈으로 안내 팜플렛을 뒤적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실 가장 당황한건 나였다.


"어…반갑습니…다, 여러분"

너무 쫀 탓일까. 목소리가 갈라졌다. 큼! 큼! 하면서 목소리를 높였지만 저 쪽에서 "안 들려요" 하는 말이 들려왔다.

"어… 네네, 큰 목소리로 말하겠습니다. 네"

하지만 여전히 목소리가 작았던지 "안 들려요" 하는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고, 그 목소리가 내 목소리를 압도했기에 장내는 웃음꽃이 피었다. 내 등에서는 식은 땀이 줄줄 흘렀고. 소희씨가 얼른 다가와 마이크를 교체해주었다. 아, 마이크 문제였나.

"하아, 넵 반갑습니다. 스타일박스라고 합니다"

겨우 용기를 내서 자기소개를 하자,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나는 소희씨에게 건내 받은 슬라이드 리모컨으로 화면에 크게 띄운 PPT의 첫 장을 오픈했다.

[ B급 감성과 온라인 커뮤니티 ]

그래, 이제 와서 보니 강연 주제부터 구려도 너무 구렸다. 젠장, 주제가 구리면 제목이라도 조금 더 다듬을 수 있었는데. 제목부터 구렸다.

"어, 그러니까, 제가 오늘 강연할 내용은 온라인 커뮤니티의, 기본적인, 어떤, 그런 정서… 오덕문화, 비급감성, 찌질이 문화 그런 것이 어떤 형태로 존재하고 그것이 그 또래 집단 내에서 어떤 형태로 응용되는지, 그런거… 를, 온라인 환경에서의 마케팅에 연결지어서…"

나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이건 내가 준비한 말이 아닌데. 머릿 속이 복잡했다. 첫 스타트가 이상하게 시작되자, 모든 스텝이 꼬였다.

"밈 형태로 구현되는 자기비하는, 어… 이 개구리는 다들 보셨죠. 네, 이게 그러니까 어 뭐더라…"

좆됐다.




"수고하셨습니다"
"아, 이걸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봉투에 담긴 강연료를 받으면서도 미안했다. 그러자 소희씨는 내 팔뚝을 치면서 "아니에요, 웃음 주신 것만으로도 오늘 강연비 200% 초과달성입니다" 라면서 짖궂게 농담을 해왔다. 그 말이 차라리 고마웠다.

"아, 진짜 평생 팔 쪽 오늘 다팔았네요. 그래도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농담이고 오늘 정말 수고하셨어요. 다음에 또 다른 강연 부탁 드릴께요"
"어휴, 괜찮습니다. 이미 충분히 트라우마 생기고도 남았습니다"
"하하, 네, 그럼 살펴 가세요. 저희는 여기 정리를 좀 해야 되서"
"네네"

강연장을 나왔다. 서늘한 가을바람이 뺨을 스쳤다. 갑자기 커피와 베이글이 맹렬히 땡겼고, 절로 한숨이 나왔다. 에이 시발, 뭐한다고 병신 같이 이런 걸 한다고 해서.

"하아 씨발"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역 방향은 저쪽이었음에도, 괜히 한참을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그러다가 그냥 택시를 잡아탔다. 하필이면 모범택시였지만 상관없다. 정신적으로 너무 피곤했다. 눈을 한참 감고 있노라니 전화가 왔다.

"어"

소정이었다.

"어땠어? 강연"

나는 무어라 말할까 하다가 솔직하게 "아 그냥 나 개쪽팔았어. 완전 사람들 앞에서 망신망신 그런 망신이 없었어. 말 하다가 한참 멍하니 있고, 막 아 이거 뭐지 뭐지 하고, 횡설수설하고, 아 진짜 2시간 같은 25분이었어. 참, 25분 강연인데 15분 만에 끝냈어" 하고 털어놓았다. 그러자 의외로 가슴이 좀 후련했다.

"아휴, 수고했어. 그럼, 그런게 어디 쉽나. 남 앞에서 그러는게"

평소답지 않게 소정이가 달래주니 마음이 뭉클했다. 하마터면 택시 안에서 울 뻔 했다. 겨우 간신히 울음을 꿀꺽 삼키고는 말했다.

"돈 생겼으니까 맛있는거 먹자. 주말에 고기 사줄께"


하지만 우리가 주말에 향한 곳은 고기집이 아니었다.

"아프다. 팔 저려"
"야 그래도 암 막는 주산데 아무렴"

자궁경부암 예방주사. 일전에 한번 이야기를 했던게 생각나서, 그거 맞혀준다고 예약 잡으라고 한 건데 솔직히 가격보고 개깜놀했다. 백신주사 같은거 생각하고 한 3만원, 비싸야 10만원쯤 할 줄 알았는데. 한방에 탕진.

"고마워"

고맙다며 내 손을 잡아주는 소정이.

"그래, 그니까 평생 아프지마. 암 같은거 절대 걸리지마"
"알았어, 오래오래 살께"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난, 조금은 허무했지만 그 무엇보다 보람찬 기분이었다. 그래, 니 암을 막을 수 있다는데, 내 쪽 좀 파는게 무슨 대수랴.



…왜 갑자기 그 생각이 떠올랐는지는 모르겠다. 단지 그냥 인덕원 역 앞을 지나치면서 그 날의 기억이 떠올라서였는지도. 생각해보니 해준게 너무 없었다. 꼭 물질적인게 전부는 아니지만 그 흔한 지갑 하나, 그 흔한 패딩 한벌 사준 기억이 없었으니까. 꼴랑 그거 하나가 전부였다. 선물이라고 말하기도 뭣한.

"아프지마"

신호대기를 기다리며 나는, 전해질 일 없는 말을 그렇게 중얼거린다.




- 끝 -

처음 간 모텔

수능을 조졌다. 뭐 원래부터 그리 좋은 성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잘하면 인서울?' 정도는 노려볼 수 있는 성적이었는데 그냥 쌩으로 조졌다. 시발거.

"야 솔직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라, 니가 재수한다고 성적이 과연 잘 나올 수 있을까? 아마 재수하면 하루 8시간 게임, 12시간 잠, 30분 책 펴기, 2시간 휴대폰, 나머지 딸딸이. 끝. 그게 니 확정적인 일과 아니겠냐?"

지 신발 사이즈 반토막에 가까운 수능 성적을 들고도 터무니 없이 재수를 고민하는 미친 승훈이 병신한테 일장연설을 늘어놓았지만, 사실 그건 나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였다. 세상에 그 잘난 아들이랍시고 온 동네 맨날 아들자랑을 하고 다니던 엄마에게는 충격적인 현실이었고, 아버지는 "원 참, 에휴"하고 한숨을 내쉬긴 했지만 그 역시 받아들여야 할 무거운 현실이었다.

게다가 그나마의 성적으로도, 입시전략 따위 하나도 없이 그냥 고 3 선생님이 어디서 주워온 적당한 배치표 하나 보고 쑤셔 넣었으니 당연히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중에 3학년이 되고서야 뒤늦게 그 해의 입학 커트라인을 우연히 알게 됐고, 난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자퇴하러 달려갈 뻔 했다)

"아 이게 뭐라고 온 가족이 와"
"엄마는 대학교 못 나왔잖아. 어디 대학교 구경이라도 해보자"

그것도 모자라 입학식 때 온 가족이 구경왔고, 꽃다발 들고 한복까지 차려입고 오신 우리 어머니에 대해 나는 그저 황당할 따름이었지만 어쨌거나 그렇게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나는 대학에 입학했다.




처음 간 모텔




남중남고를 나온 나에게 있어서, 대학교는 확실히 신세계였다. 지방대 문과 주제에 우리 학과는 왜이렇게 이쁜 애들이 없을까 탄식이 절로 나오긴 했지만, 아주 솔직히 말하면 바로 그래서 여자애들하고 입 털기는 쉬웠다.

"재호랑 주아랑 사귄다던데?"
"정말? 몰랐는데. 지난 주에 소개팅 한다 어쩐다 하더니만"
"그래서 초조해서 주아가 들이댔나부지"
"대박. 아 근데 너무 부럽다"
"너도 연애하면 되지"
"해미야, 나랑 사귈래?"
"아 죽어 그냥"

콧수염 레이저 시술 받은 승훈이가 머리 기르면 이렇게 생겼지 싶은 해미부터 성격은 좋은 윤정, 나보다 힘쎈 수아 등등 전혀 부담없는 친구들과(물론 그녀들 역시도 나에 대해서는 눈꼽만큼의 긴장감을 느끼지 못하는) 그저 고등학교의 연장선 같은 느낌으로 대학생활을 이어가던 나.

"침 흘리면 죽인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금요일이면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를 함께 타고, 탈 때마다 맨날 너무 졸립다면서 내 어깨를 곧잘 빌리던 수아에게 나는 언젠가부터 연심을 품게 되었다.

"야 병신아, 병신아? 잘 생각해 봐. 암만 니가 모쏠찐따라고 해도 솔까 여자애가 매주마다 니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데 그냥 그렇게 방치만 한다고? 아 시발, 나였으면 임마 지금 애가 둘이다"

승훈의 닥달과 알게 모르게 쌓여온 내 안의 어떤 어줍잖은 확신은 기어코 돌발 고백이라는 미친 짓에 이르렀다. 결과는 역시나 "왜?" 라는 황당한 표정의 수아와 씁쓸한 "그냥'이라는 변명으로 돌아왔다.

"아 죽고 싶다"

무회전 슛이라도 연습하듯 나는 미친듯한 싸커킥을 이불 속에서 날려댔지만, 의외로 그 고백은 나비효과가 꽤 컸다.

"너 수아한테 고백했다매? 대박이다 진짜"

수아 고 기집애는 고걸 또 그새 다른 애들한테 나불냈는지(나중에 알았지만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고, 수아 역시 당황스러워서 한동안 나를 피해다니는 와중에 그걸 캐치한 다른 애들이 캐물어서 알아낸 것) 나는 참으로 민망했지만, 사실 내 변명은 꽤 그럴싸했다.

"사랑이 죄냐? 죄냐고"
"아, 미친 놈"

해미와 윤정은 발정이라도 났나며 웃어댔고, 나 역시도 "사랑이 죄냐고"를 연발하며 웃었다. 근데 또 그 이야기를 어떻게 전해들었는지 과의 또 다른 인싸 종현이 난데없는 제안을 해왔다.

"너 소개팅 안 할래?"
"나?"

놀랍게도 그 '재호'의 땜빵 소개팅이었다. 보통 소개팅이라는건 어느 정도 '끕'이 맞는 애들끼리 하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재호랑 급이 맞는 여자애면 나한텐 완전 좀 무리 아닌가, 하는 내 안의 찐따적 망설임이 '혹시 이거 무슨 몰카라도 하는거 아님?' 같은 망상으로까지 번졌지만, 종현의 초이스는 이유가 있었다.

"웃긴 애 좋아한대"
"아, 웃긴 애~"

옆에 있던 해미는 미친듯이 웃으며 바닥을 굴렀지만, 어쨌거나 종윤의 휴대폰 속에서 웃고 있는 단발머리 그녀의 미소는 수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화사했다. 수아한테는 좀 미안하지만.



"어, 반갑습니다"
"뭐야, 우리 동갑이잖아. 말 놔. 요"
"어 그래"
"아 뭐야, 웃겨"

어깨만 겨우 가리는 짧은 소매의 타이트한 줄무늬 탑에 흰 핫팬츠. 그 짧은 옷을 완벽히 소화하는 몸매와 아이돌 같은 얼굴, 아기자기한 귀걸이부터 웃을 때는 손으로 가려다 다 안 가려지는 큰 입과 시원시원한 성격. 와 세상에 인싸들은 이렇게 이쁜 애들이랑 어울리는구나. 솔직히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어도 이쁜 그런 얼굴이었다.

[ 어때? 이쁨? 걔도 불쌍하다 이 날씨 좋은 날에 너같은 폭탄남이랑 소개팅이라니 ]
[ 야, 수아 지금 울어 ]
[ 아꺼져 미친 것들아 나 소개팅이라고 ]

카톡으로 해미, 윤정 등등이 시비를 걸어왔지만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았다. 현아. 하 얘는 진짜 왜 이렇게 이쁜거냐. 진짜 이렇게 이쁜 애랑 소개팅이라니, 고마운 마음에 종현이 축구화라도 핥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일단은 눈 앞에 집중하기로 했다.

"밥 뭐 먹을까? 여기 뭐가 맛있지?"
"난 다 좋아. 근데 이거 이거 맛있어"
"여기 와봤어?"
"맨날 오는데?"
"뭐?"

뭐야, 이런 레스토랑을 맨날 온다고? 얘네 집 갑분가. 살짝 쫄렸다. 이런 애랑 사귀면 맨날 이런데 데리고 와야 되는건가, 아 그냥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되는건데 참, 얘랑 결혼하면 진짜 서울에 48평 아파트 뭐 이런거 사야 되나, 하는 망상까지 한바퀴 돌고는 "오, 그래 그거 먹자" 하며 나는 현아가 짚은 것들을 주문했다. 9만 4천원이었다. 그나마도 내건 일부러 좀 싼 거 고른건데. 지난 주에 수아, 해미, 윤정 돈까스 한번 사줬다고 생색 냈던 기억에 그녀들한테 미안했다.

"종현이랑은 별로 안 친해?"

내 몇 안되는 장점이자 단점이 때때로 지나치게 솔직하다는 점인데, 그 점이 현아한테는 제법 먹히는 부분이었던 것 같다.

"아 몰라, 솔직히 막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냐. 근데 같은 과고, 교양도 겹치는게 좀 있어서 인사는 꽤 하는 사이지. 근데 딱 보면 좀 그런거 있잖아. 걔는 전형적인 인싸 타입이고, 나는 좀 게임 같은거 좋아하는, 그런"
"오덕 오덕?"

오덕 오덕 하면서 손가락으로 안경을 만들어 돌리는 현아의 모습에 나는 진짜로 그녀한테 입덕해버렸다. 뭐야, 나 지금 꿈이라도 꾸는건가. 근데 현아의 말로는 내 생각이 틀린 것일 수도 있단다.

"걔가 초등학교 때 축구부 하고, 생긴 것도 좀 인상이 쎄게 생겨서 그렇지, 걔도 게임 좋아하고 그래. 그리고 너 은근 웃기다고 좋아해. 근데 좀 걔가 성격상 막 누구한테 친근하게 대하고 이런거 잘 못해서 그래"
"친근하게 못한다고? 종현이가 이 소개팅 시켜준건데?"
"소개팅?"

소개팅이라는 말에 순간 1초 정도 멈칫했던 현아는 "아, 너 소개팅으로 알고 여기 나온거야?" 하고 웃으며 손뼉을 쳤다. 아 시발 글렀네. 갑작스러운 굴욕감과 종현에 대한 배신감까지 느꼈던 이후의 5초지만, 얼굴을 쓸어내린 내가 "아니야?"라고 어색한 미소로 묻는 내 말에 현아는 웃으며 답했다.

"하는거 봐서"
"뭐야 그게"

그리고 현아는 그런 '뭐야 그게' 같은 퉁명스러운 대답에 또 빵 터지며 좋아했다. 웃음이 헤퍼서 좋았다. 정말로.



"완전 배부르다"
"그치?"

양이 적어 보였는데 먹다보니 제법 배가 불렀다.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하고는 한층 가벼워진 체크카드 속 숫자에 마음 속 깊이 가벼운 한숨을 내쉴 무렵 현아는 내 손목을 잡아 이끌며 "저기 가자" 하고 뭔 동네 게임가게로 나를 데리고 갔다.

"안녕하세요~"
"오, 안녕!"

후덕한 인상의 주인 아저씨와 현아는 잘 아는 사이 같아 보였고, 현아는 "뭐야, 요즘 가게 왜 이렇게 자주 닫아요?" 하고 물었다. 아저씨는 "오빠가 요즘 바빠요. 출장을 전국으로 다녀. 뭐야, 옆에는 남자친구?" 하며 은근히 나를 의식하며 대답한다. 현아는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지만 경계의 시선.

"안녕하세요"

아마도 자신만의 어떤 요정 같은 그녀에게 '다른 남자'가 생긴 것은 아닐까 하는 어떤 그런 슬픈 아이돌팬 같은 경계심이 아닐까 하며, 해미나 수아, 윤정이 어쩌다 소개팅이라도 한다고 하면 괜히 내 마음 한 구석에 서운한 마음이 들었던 그런 감정과 동류의 감정이겠거니 하며 이해했다. 그렇지만 또 그렇다고 굳이 "아니요, 친구에요" 하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현아는 남친이냐고 묻는 질문을 못 들은 것인지, 적당히 무시하는 것인지 어느새 게임 진열장 쪽으로 향했다.

이제서야 조금 이해가 갔다. 왜 종현이 이런 이쁜 애한테 나를 소개팅, 아니 소개시켜 준 것인가를. 그래, 그런 타입의 애들이 종종 있지. 누가 봐도 이쁘고 괜찮은 앤데 서브컬쳐를 좋아하는. 그래서 그 바닥에서는 곧바로 네임드에 여왕벌이 될 수 있으면서도 일반인 코스프레도 기가 막히게 잘 되는 애들. 누가 봐도 그런거 좋아할 외모(?)는 아니니까.

"흠"

게임을 몇 가지 훑어보면서도, 어쨌거나 기분이 살짝 묘했다. 뭐라고 해야될까, 이건 좀 웃기는 감정이지만 약간은 실망이라고 해야되나. 물론 게임 좋아하는 여사친이라니, 상상만 해도 너무 행복해지는 캐릭터지만 뭐랄까, 내 찐따적 인생에서 나를 구원해 줄 인싸녀 같은 것을 상상했는데 '동류'라니 묘한 동질감과 함께 아쉬움이 드는? 라고 생각했지만 곧바로 다시 정신을 차렸다.

'배가 부르긴 부르지, 지금 확실히'

"집에 플스 있어?"

내 질문에 현아는 "플스, 엑박 다 있지. 오빠 거지만 옛날에 세턴도 있었어" 라며 자랑했다. 나보다 더 상급의 덕후다. 그보다 새턴이라니, 그 오빠도 어지간한 덕후구나. 집에 엄청난 컬렉션도 있을 것 같은 느낌. 친해지고 싶다.

"넌?"
"난 없어. 오로지 PC만 있어"
"그래?"

의외라는 듯한 반응.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게임 고르기 삼매경, 그리고 현아의 뒤태와 나를 계속 흘낏 흘낏 쳐다보는 아저씨의 애절한 눈빛에 나는 애써 시선을 피하며 그렇게 30분 가까운 시간을 흘려보내다가 둘 다 아무 것도 고르지 않고 나왔다.

"다음에 또 올게요"
"그래, 또 와~"



벤치에 앉은 현아와 한참을 이런저런 실없는 이야기를 하노라니, 중간중간 그녀가 누군가와 카톡하는게 묘하게 신경쓰였다. 남자일까. 하기사 이렇게 이쁘장한 애니, 주변에 남자들이 오죽 많겠는가. 종현이 같은 타입의 잘 생긴 훈남들부터, 저 게임샵 사장님 같은 돈 많은 덕후들까지. 뭔 말만 하면 잘 웃어주는 현아였기에 '어쩌면' 하는 작은 자신감이 그렇게 금새 바스라지며 작아지는 나를 느낀다.

"초등학교 때는 걔가 나보다 키가 작았거든. 축구부면 운동부잖아, 근데도 6학년 때까지 나보다 작았던 애가 중학교 가더니 막 크기 시작해서 지금처럼 된거야. 지금 걔가 키가 몇이더라? 78인가? 뭐 그렇게까지 큰 건 아니지만"

178이 큰 키가 아니라는 말에 나는 아예 난쟁이로 보이겠구나 하는 마음까지 들었지만, 어쨌거나 초중고도 부족해서 학원까지 같이 다녔다는 말에 "둘이 그럼 사귄 적 있어?" 라는 질문으로 그리 어색하지 않게 넘어갔다. 물론 그 대답에 현아는 마치 해미가 나와 엮일 때 표정처럼 "미쳤어? 걔랑 사귀게?"하며 웃음 섞인 정색을 했다.

"뭐야, 그렇게 싫어할 일이야?" 라는 내 말에 현아는 "걔 은근히 안 씻거든" 하고 속삭였다. 안 씻는 것은 어떻게 알았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건 선 넘는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저녁은 됐구, 술 한잔 할래?"
"술?"

시간은 7시 40분. 하루종일 즐거웠다, 대충 근데 뭐 컨텐츠도 없으니 이제 집에 가야되나, 하고 생각하던 차에 술 한잔 하자는 현아의 제안. 한참 오그라들고 작아지던 내 안의 어떤 기대가 다시 활활 타오름을 느낀다. 지갑 속 체크카드는 심한 갈증을 느꼈겠지만.

"그래!"



"아 대박! 아 하하! 아 너무 웃겨. 꼭 만나게 해줘!"

햄, 쏴, 쩡 이 셋 이야기에 승훈이 이야기를 곁들이자 현아는 정말 좋아했고, 또 나를 부러워했다.

"나도 너처럼 재밌는 친구들 많으면 좋겠어"
"야, 너는 딱 봐도 주변에 친구들이 없을 수가 없는데"
"나? 아냐, 나 진짜 뭐 없어. 오죽하면 종현이가 친구 만들어 준다고 너 소개시켜줬겠냐. 나 완전 친구 없는 집순이야"

그랬구나. 친구. 조금은 씁쓸해졌지만 그래도 남자친구도 큰 범주 안에서 친구 안에 들어가는 거니까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 않나 하는 자위와 함께 한 잔 두 잔 술을 더 마셨다. 얼마나 마셨을까. 세상에, 아직 1시간 밖에 안 됐는데 각 일병을 했다.

"너 근데 술 잘 마신다"
"너두"

얼큰해지는 코를 느끼며 현아를 본다. 조금은 풀어져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더 예뻐 보인다. 이런 애랑 사귀는 남자는 얼마나 행복할까. 하지만 한편으로 이 와중에 그런 생각이나 하는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나 잠깐 화장실 좀"



화장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본다. 적당히 취한 얼굴, 실 없이 웃는 얼굴. 바보 같아 보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뭐 어쩌라고' 하는 생각도 든다. 좋은 친구. 좋지. 근데 나는 나를 안다. 이렇게 이쁜 애랑 그저 농담이나 하는 친구로 남고 싶어질 리가 없다. 중학교 때 현진이, 고등학교 때 세영이, 다 그랬지. 좋은 남사친 코스프레나 하다가 결국 남친 생기면 혼자 속이나 끓이고. 차라리 고백이라도 해볼걸 하는 후회, '좀 헤어져라! 헤어지기만 하면 무조건 이번에는 고백한다!' 해놓고 결국 고백 못하다가 멀어지고.

'이제 나도 어른이잖아'

아버지가 나 대학교 입학식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그랬지. 대학교까지 갔으니 너도 이제 어른이라고. 그러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라고. 여전히 그저 이쁜 애만 보면 헤벌레 하는 내 모습이 정신 제대로 차린 것 같지는 않지만 적어도 참는 병신보다는 도전하는 병신이 되기로 했다. 물론 머릿 속 한켠의 이성은

'미친 놈아, 너랑 쟤랑 지금 오늘 처음 본거야! 너 그리고 지금 술 많이 마셨어! 정신 차려! 그리고 방금 거울 봤잖아!'

하고 나를 미친듯이 말렸지만, 아버지의 당부를 지 편한대로 해석해버린 나는 그렇게 자리에 앉자마자 술부터 한잔 바로 원샷 때렸다.

"올~ 근데 뭐야 갑자기. 화장실 다녀오더니"

현아는 조금 당황하는 얼굴. 당연히 티가 났겠지. 뭔가 다짐하는 얼굴을. 이런 애가 나같은 찐따 어디 한두번 겪어봤겠는가. 저 고양이 같으면서도 강아지 같은 얼굴에 그 단단한 다짐이 살짝 녹는다.

'한 타임만 넘기고, 혼자 비장해지지 말자고'

나는 육포를 뜯으며 말했다.

"오늘 술 잘 들어가는데?"



병신새끼. 소주 두 병을 각각 마실 때까지 끝내 말 못 했다. 일단 표정만 봐도 쟤가 나보다 술 잘 마신다. 젠장, 아니 애초에 고백을 하는 것도 웃기는 타이밍이라는걸 잘 안다. 두번째 만남이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결론이 내려졌거든. 아까 슬그머니 "담주 주말에는 뭐해?" 라고 물었을 때 "친구들이랑 놀러갈 거 같아", "다다음 주에는 엄마네 집에 갈거야" 라는 답으로 미루어 봤을 때 구태여 2주나 만남의 여지를 막아놓는 이유가 뭐겠는가.

'후'

돈만 헛되이 쓴 느낌이다. 가라앉는다, 기분이. 여기 술값까지 계산하면 시발 오늘 쓴 돈만 16만원이다. 수아랑 햄이랑 쩡이랑 노가리나 뜯을걸. 슥 시계를 봤는데 생각보다는 시간도 얼마 안 갔다. 밤 10시 반. 차 끊기기 전에 집에나 가야겠다.

"이제 슬슬 일어날까"

아쉬운 마음을 속으로 쓸어담으며 휴대폰을 슥 주머니 속에 넣는 순간, 현아가 내 손을 잡았다.

"우리 오늘 같이 있을래?"

뭐?



심장이 쿵쿵 뛴다. 존나 웃긴데 손까지 살짝 떨려. 바들바들. 술 기운이 훅 올라오는건지 이 날씨에 갑자기 한기를 느낀다. 현아가 계산했다. 신용카드다.

"잘 먹었어"

하지만 현아는 "내가 쏘는거 아냐. 울 엄마가 사주는거야" 하면서 다시 한번 카드를 흔들어 보인다. 귀엽다. 컨버스 신발은 어쩜 저리도 잘 어울릴까. 솔직히 아까 내 마음은 그랬다. 그냥 아이돌 같이 이쁜 애랑 하루종일 데이트하고 맛있는거 먹었으니 최고다, 그리고 약간 수아한테도 조금 막 질투 작전? 같은 효과 같은거 나지 않을까, 같은 미친 생각까지 하던 차였는데 갑자기 자자니.

"밤공기 좋다"
"그러게"

오늘따라 왠일인지 이 번화한 동네에 차도 없다. 이 시간에. 알딸딸을 넘어 눈 앞이 가물가물하던 취기도 한 순간에 사라졌다. 진짜 물로 간을 씻은 것처럼. 근데 나는 모텔이 이 동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어디로 갈까"

괜히 뭔가 고르는 척 주변을 슥 훑지만 잘 모르겠다. 현아는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누나 가는데로 따라와" 하며 웃는다. 나도 웃었다. 현아의 웃는 얼굴이 참 이쁘다. 나 오늘 이렇게 이쁜 애랑 자는건가.

"오"

4차선 횡단보도를 건너 맞은 편 번화가와 골목길을 두 블록 정도 지나자 과연 모텔촌이 나타난다. 사실 나 모텔 한번도 가본 적 없는데. 모쏠이니까 당연하지만. 현아는 내 손을 잡고 앞장서다, 이제는 그냥 내 옆에서 걷는다. 아무래도, 여기부터는 내가 좀 적극적으로 나서야겠지.

"저기…로 갈까?"

피아노라고 엄청 큰 간판을 건 모텔. 앞에 현수막을 걸고 "올 리모델링, 브랜드 매트리스 교체, 최신식 PC"라며 주절주절 와야하는 이유를 적어놓은 부분에 혹했다. 일단 술집 계산을 현아가 해서 돈에는 그래도 여유가 있다.



"여기 얼마에요?"

모텔 카운터에 묻자 올백머리를 한 아주머니가 특실 7만원, 준특실 6만원, 일반실 5만원이라고 답한다. 아 시발 모텔이 이렇게 비싼 거였구나, 아니 그럼 그 많은 커플은 그 많은 돈을 내며 섹스를 한단 말이야? 연애 오지게 돈 드는구나 하고 속으로 감탄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특실을 달라고 했다.

"그냥 준특실해" 하고 현아가 옆에서 말렸지만 그래도, 하는 마음에 "특실주세요" 하고 오기를 부렸다. "일회용품 필요하세요?" 라고 묻는 아줌마의 말에 필요없다고 답했다가 현아가 "필요해요" 라고 답했다. 아주머니가 픽 웃는 모습에서 아 시발 뭔지는 몰라도 나 모쏠이라는거 걸렸구나 하는 촉이 왔다.



"이게 왜 안되지"

눈치껏 카드키를 그 카드키 대는 곳 같은데다 찍었는데 안되길래 문 손잡이에 대보고 다시 옆에 심지어 초인종 벨 같은 곳에까지 대봤는데 문이 안 열린다. 등에서 식은 땀이 흐르는 지경이었지만 "거기" 하는 현아의 말대로 다시 처음에 댄 카드키 대는 곳에 댔다. 문이 열렸고 나는 부끄러움에 이미 정신이 혼미해졌다.

'시발'

생각해보니 아까 술김에 여자 몇 명 만나봤다는 말을 했던 것도 같고, 개똥허세라는거 다 걸렸겠구나 하며 신발 벗고 어둠 속의 방으로 터덜터덜 들어가는데 현아가 말했다.

"카드키 여기 꽂아야지"
"아"

현아는 이미 웃고 있었다. 아 그런 시스템이구나. 처음 알았다. 카드키를 꽂자 불이 환하게 켜졌고, 내 시뻘건 얼굴만큼이나 불그스레한 조명이 다행히 내 후끈 달아오른 얼굴을 가려…주지는 못했겠지.

"너 연애 안 해봤지?"
"어? 어어, 뭐, 그렇지"
"뻥쟁이"

너무 쪽팔린다. 그 와중에도 현아의 웃는 모습은 참 예뻤다.

"먼저 씻어"
"어"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부끄러움도 달래고, 뜨신 물로 샤워하며 정신 좀 차리자 싶었다. 어쨌거나 오늘 이렇게 이쁜 애랑 모텔에 왔다. 불투명 유리 저 편으로 현아의 모습이 어른어른 보이고, 나는 배 터져라 먹은 안주 때문에 조금 보일락 말락하는 복근이 안 보이게 된 점에 새삼 아쉬움을 드러내며 샤워를 하면서도 배를 좀 쳤다. 근육이 좀 놀래서 튀어나오라고.

"으"

쏟아지는 물줄기에 머리를 감으며 조금 전의 부끄러움도 날려버린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우여곡절이 있다 한들 나는 이렇게 오늘 동정을 탈출하고 남자가 된다. 승훈이한테 더이상 쌩구라를 안 늘어놓아도 된다. 진짜 종현이 너는 너무 고마운 친구다. 앞으로는 정말 잘해줘야지. 엄마, 아빠 나 오늘 어른돼요, 한편으로는 또 막 혹시라도 뭐 어떻게 잘못되서 임신이라도 하면, 음, 어쩌지. 역시 책임을 져야겠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아빠는 그렇다치고 엄마는 어떨까.

'음'

근데 솔직히 엄마도 저렇게 이쁜 며느리라면 싫어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근데 애기 분유값은 어떻게 벌면 좋지 같은 별 생각을 다하면서 씻고 나왔을 때 모텔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전화를 일곱 통을 했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어서 옷을 챙겨 입고 모텔방을 나섰다. 카운터의 아주머니에게 "저 잠깐 나가는 거거든요" 하고 집에 가는거 아니라고 당부해두고 모텔 건물을 나섰다.

잠깐 뭐 간식거리나 술이라도 더 사러 나왔다가 뭐 안 좋은 일이라도 당한거면 어쩌나 싶어서 당혹스러웠다. 물론 상식적으로 '그냥 모텔까지 왔다가 내 찐따 같은 모습에 그냥 나 씻는 사이에 좀 이것저것 고민하다가 집에 가버린' 가장 확률 높은 가능성을 나 역시 생각 못한 건 아니지만 혹시라도 하는 생각에 모텔 근처 편의점을 몇 군데나 들렀다.

"머리는 단발이구요, 이렇게 줄무니 티에 흰 반바지, 핫팬츠인데…"

세 군데를 더 들리고 전화를 네 통을 추가로 더 했으며 [ 어디야? ], [ 집에 간거야? ], [ 무슨 일 있어? ], [ 혹시 내가 뭐 실수했어? ] 같은 카톡을 22개를 보내고 나서야 나는 방으로 다시 돌아왔다.



"시발"

좆같은 년. 내가 찐따 같아서, 술 김에 든 생각이 확 사라졌다 한들 "나 그냥 집에 갈게" 한 마디를 안 하고 이러는게 어딨나. 아니 하다못해 카톡으로 답장이라도 하던가. 아니면 그냥 차단을 해주던가. 괜히 걱정만 되게.

술을 그렇게 마셨는데 잠이 안 왔다. 혹시라도 진짜 아까 생각처럼 잠깐 나갔다가 누구한테 어디 끌려가서 안 좋은 일이라도 당한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밤새 잠을 못 이루고 사실 새벽에 두 번이나 나와서 모텔 근처를 돌아다녔다. 혹시 아까 술집에 뭐 다른 뭐라도 두고 갔다가 사고라도 난거 아닐까 하는 시나리오까지 떠올리고는 119에 전화까지 해봤다. 혹시 그런 인상착의의 여자가 병원 실려간 거 없냐고.

밤새 뒤척이고, 창문 밖에서 뭔 소리라도 나면 벌떡 일어났고, 또 한편으로는 혹시 새벽에 서프라이즈로 이 방에 다시 놀러오지 않을까 하는 헛된 기대도 해봤지만 내가 눈을 뜬 것은 방을 비워달라는 11시 45분의 카운터 전화를 받고서였다.

"으음"

죽을 것 같이 피곤하고 힘들었다. 술을 그렇게 먹고, 밤에 잠도 못 잔 상태로, 샤워도 못하고 몸만 일으켰으니까. 밤새 안 취했던 술이 지금 몰려오는 것 같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휴대폰부터 봤지만 배터리 충전을 못 해서 휴대폰은 꺼져 있었다. 근데 어차피 어제 새벽 4시까지 현아 연락은 없었으니 뭐가 왔을 리 없지.



너무 힘들어서 택시를 탔다. 그리고 진짜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끼는 미칠듯한 감정에 휩싸였다. 병신 같았다. 내가 뭘 잘못했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철저히 갖고 놀려진 기분이고, 현아 그 씨팔 년이 종현이에게 이런 이야기라도 하면, 아 그냥 휴학이나 할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개 같은 년"

사람을 병신 만들어도 정도가 있지, 비싼 거 쳐먹이고 하루종일 지 졸개처럼 따라다녔더니 나를 진짜 뭔 개병신으로 본 건가 하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집에 와서는 다시 술기운과 피로와 정신적 허탈감에 그대로 뻗었다. 눈을 뜬 것은 저녁 9시였다. 휴대폰에는 현아의 카톡이 와있었다.




[ 미안해, 어제 너무 놀랬지. 어제 너 씻고 있을 때 새 아빠한테 전화가 왔어, 물 소리가 나니까 전화 받으려고 밖으로 나가서 받았는데, 어디냐고. 당장 들어오라며 엄마랑 싸우는 소리가 나더라. 우리 집안 사정은 굳이 말 안 했지만 대충 느낌 오지. 미안해, 정말 미안해. 니 전화를 받을 경황이 없었어. 집에 갔더니 새 아빠가 휴대폰부터 집어던져서 액정도 깨졌고. 그쯤되니 너한테 연락하기도 너무 좀 그래서, 미안해 ]

그랬다면 뭐 집에 가는 길에 사정이라도 말했으면 좋았을거 아니냐고 혼자 중얼거렸지만 나는 몇 번이나 카톡을 쓰다 지우다 하다가

[ 괜찮아, 넌 별 일 없었어? 새아버지라는 분한테 뭐 맞고 그런거는 아니고? ]

하고 보냈다. 한참 후에 현아는 [ 괜찮아, 정말 미안해 ] 하고 다시 답장을 보내왔다. 무어라 답을 해야할까 하다가 분위기 안 좋은 카톡만 오가면 미안함에 짓눌려 관계가 망가질 것 같아서

[ 근데 너 나 모텔 첫 경험만 시켜놓고 진짜 첫 경험은 못하게 만들었으니 책임져라ㅋㅋㅋ ] 하고 보냈다. 그리고 약 1분 뒤 날아온 현아의 답장은 놀랍게도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알았어ㅋㅋㅋㅋㅋㅋ내가 꼭 책임질게ㅋㅋㅋ담주에 봐ㅋ ] 였다.

나는 씁쓸하게 어깨를 으쓱하며 휴대폰 화면을 껐다. 그리고는 해미와 수아, 윤정이 당장 월요일에 소개팅에 대해 미친듯이 캐물을텐데 뭘 어떻게 어디까지 설명하면 좋을까를 나는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시발.


- 끝 -

[공지] 그 책 또 팝니다(마감) & 메일링 서비스

1. 책 팝니다. (마감 및 폐기)


2011년에 팔기 시작했고, 2019년에 표지만 갈아끼운 채로 또 한번 팔았던 끝없는 악성재고의 바로 그 책을 다시 팝니다. 아마 특별한 일이 없다면 이번이 마지막 판매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설마 그 많던 악성재고를 다 팔았냐 하면 그건 당연히 아니고, 악성재고 떠안고 산 지 10년입니다. 이제는 재고를 폐기해야 할 때가 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디어 들어서, 그동안 구매 의사를 밝혀주셨지만 매번 기회를 놓힌 분들을 위해서 한번만 더 팔기로 마음 먹고 책 표지를 소량만 인쇄하기로 했습니다. (아직 인쇄 전이기 때문에 표지 디자인은 다시 한번 바뀔 수도 있습니다)

아울러 책은 10월 말까지 본 블로그에서 선 주문을 받은 후 11월 초 일괄배송하도록 하겠습니다. (주문은 아래의 박스 내용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주문이 많지 않을 경우 그 이전에 배송하도록 하겠습니다.  

* 책을 구매하고 싶으신 분은-

1. (배송료 없음) 한 권에 13,000원을 입금계좌 : 국민은행 580901-01-187313 고용환 앞으로 입금해주시면 됩니다.
2. 위 계좌로 입금하신 후 [ 받으실 주소(우편번호 첨부 권장)와 받으실 분 성함, 연락처, 기타 남기실 말(싸인본 요청 등)]을 비밀 댓글로 달아주시면 됩니다. 
3. 입금과 함께 이메일을 남겨주시면 작은 서비스를 드립니다. 

* 단, 2권 구매시 2만원, 3권 구매시 3만원입니다. 아쉽게도 해외배송은 어렵습니다. 
 

* 11/4 내용추가 : 도서는 표지 인쇄가 다소 늦어진 관계로 15일에 전후하여 발송될 예정입니다. 지연된 점 많은 양해 부탁 드립니다.

11/26 내용추가 : 판매가 마감되었습니다.


2. 메일링 서비스 

요즘 이메일을 통한 구독 서비스가 흥한다는 말에 저도 한번 따라해봤습니다. 블로그에 이미 공개한 소설들에 제 개인의 변이나 이런저런 생각을 곁들인 단편, 혹은 블로그에 아직 혹은 영원히 공개하지 않을 단편들이 '가끔' 발송됩니다. 

미리 맛보기 : https://stib.ee/zuY2

문제는 유료입니다. 메일링 발송 서비스가 공짜가 아니더라구요. 그래서 저도 가입비 4600원을 받고자 합니다. 커피 한잔 가격입니다. 돈 낭비에 주의하세요. 그냥 커피 한잔 사드시는게 차라리 이익일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나중에 더 비싸게 받을지도 모르니 지금 가입하는게 쌀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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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 내용추가 : 현재까지 메일링 된 내용을 모두 링크로 정리한 메일이 금주 중에 발송될 예정입니다. (메일링 시작 이후 뒤늦게 신청하여 초기 메일링을 못 보신 분을 위한 편집편입니다)



3. 왜 갑자기 돈 타령이냐? 짜증나게

이 블로그에 소설 올리는 것은 언제나 그래왔듯이 아페로도 꼐속 그럴 예정이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단지 언제나 궁색한 제 형편 때문에 조금 손을 벌리는 것이니 양해 바랍니다. 돈이 없어서 그래요. 

체취

겨울방학을 앞둔 고등학교 2학년의 어느 겨울날. 수업 대신 진행된 DVD 상영 도중 그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니, 정말로 울었다가는 모두의 주목을 받았을테니 겉으로는 꾹 참았지만 사실 속으로는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세상에! 세상에!'

그가 본 영화는 바로 톰 튀크베어 감독의 베스트셀러 원작 영화, '향수'였다. 그리고 그는 주인공에게 너무나, 정말 너무나도 깊이 공감했다.

'그래! 저거라고! 저거야! 냄새, 향! 저거라고!'

태어날 때부터 엄청나게 예민한 후각을 갖고 태어난 그. 그리고 그것 때문에 겪어야만 했던 수많은 고통과 좌절이, 비록 허무맹랑한 영화 한 편이기는 했지만 정말로 깊은 위로가 되었다.





체취




"너 오줌 냄새나"

유치원생이던 그는, 유치원 버스 옆 자리에 앉아있던 6살 지민이에게 큰 소리로 난데없는 폭언을 던졌다. 당연히 통학버스 안은 또래 아이들의 웃음으로 가득찼고 부끄러움을 감당할 수 없었던 지민이는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지민이는 등원 직후부터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떼를 썼고, 결국 유치원까지 달려온 지민 엄마는 화가 나서 그의 엄마를 소환했다.

"아니, 세상에 애가 어? 아니 참, 어떻게 아무리 애는 애라지만 말을 어떻게 그렇게 해요! 지민이가 정말로 오줌이라도 쌌으면 모르겠는데, 아니 그런 누명을 씌우면 애가, 이 작은 애가 얼마나 상처를 받겠냐구요!"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사실 지민 엄마 입장에서 보아도 화가 날 법한 일이긴 하다. 정말로 지민이가 오줌을 싸서 놀림거리가 되었더라도 화가 났을 판인데, 오줌을 안 쌌는데 놀림거리가 되고 아이가 등원거부를 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속이 상하겠는가.

하지만 '그' 입장에서는 더더욱 억울한 일이었다. 그는 알았다. 분명히 지민이는 소변을 지렸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지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러한 경험이 있듯이 속옷에 조금 덜 배출된 극미량의 오줌이 살짝 묻은 것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말이다. 그의 예민하디 예민한 코는 분명히 그것을 캐치했다.

물론 통원버스 안의 거의 모든 원아가 그런 '몇 방울'을 지리곤 한다. 심지어 운전석에서 운전하고 있는 아저씨마저 팬티 앞 동전만한 영역이 마지막 몇 방울에 침식당한 상태라 '그'에게는 이미 버스 안 전체가 지린내가 가득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예쁘고 깨끗한 지민이마저 오줌을 지렸다는 사실에 큰 실망감을 느낀 것이었다.

"엄마가 다른 사람들한테 냄새로 뭐라고 하랬어, 하지 말랬어?"
"…"

엄마는 항상 그를 혼냈다. 후각에 엄청나게 예민한 아이는 곧잘 타인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했으니까. 자극적인 냄새에 관한한, 함께 키우던 개보다도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모습에 매번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는 그가 스스로 '재능'이나 '천재성'으로 생각하는 것에 대해 '피곤한 문제' 또는 '고쳐야 할 성격'이라고 받아들이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보통 사람의 몇 배, 아니 몇 백, 몇 천, 아니 몇 만…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훨씬 더! 예민할 수도 있는 그런 초월적인 후각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의 모든 만남과 인연에 자연스러운 장벽과 혐오를 쌓기에 충분했다.

불과 30초 전까지 불알을 긁었던 주제에 지금은 '그'의 팔뚝을 잡고 있는 경흠의 손.
생리 때문에 비릿한 피냄새가 진동하는 아영.
일주일 째 같은 바지는 물론이요 양말마저 잘 갈아신지 않는 대휘.
툭하면 방귀를 내뿜는, 그러면서 매번 제일 먼저 "무슨 냄새 안나?" 하면서 인상을 찌푸리는 재경.
오줌은 당연하고, 똥을 싸고도 손을 안 닦는 수많은 미친 놈들이 꽤나 있는 이 더러움의 전당, 교실.

모두가 모르기에 우습게 넘길 수 있는 불결.
그리고 그것을 혼자만 너무나도 분명하게, 인지할 수 있는 초감각.

모두의 얼굴에서 하나둘씩 곪아가는 여드름.
마치 전염병마냥 비슷한 시기에 일제히 터지는 같은 반 여자아이들의 생리.
운동이 끝나고 난 직후 모두의 몸에서 격렬하게 발산되는 가혹한 땀과 발냄새.
한여름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 하나가 엉덩이 골을 지나 깊은 곳으로 들어가버리는 순간의 역겨움 등.

'그'는 삶 자체가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도저히 수업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매 순간순간 구토와 싸워야만 했다.

그를 더 괴롭게 하는 것은 한살 한살 나이를 먹어갈수록 그러한 후각이 더욱 더 발달되어 간다는 사실이었다.
수염이 돋아나고, 어깨가 벌어지고 키가 성장하면서 그의 코는 어느새 '지금 이 순간'을 넘어 더 깊은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 무뎌지지 않은 미숙한 남자에게 있어서는 정말로 불행한 능력이었다.




"밥 먹었어?"
"응. 오빠는?"
"나도 먹었지. 누구랑 먹었어?"
"혜영이랑"
"아… 그렇구나"

여친 자희의 입에서 풍겨오는 베리오 치약 속 돈까스와 그 소스의 향기. 단무지와 양배추의 냄새. 그리고 아마도 상대가 주문했을 제육볶음의 희미한 냄새. 아마도 한 두점 정도 집어먹은 느낌. 그리고 그녀의 옷에서 느껴지는 다른 남자들의 향수. 흔한 싸구려 향수와 그리드 향수, 그 와중에 희미하면서도 존재감을 분명히 하는 젠할리곤스 엔디뷔온의 향, 주르오스의 향, 비샤 보이 등등등등.

아마도 같은 수업을 들었을 그 누군가들의 냄새들. 그러나 그 많은 향의 폭포 속에서도 혜영의 냄새는 느껴지지 않는다. 뭐지. 왜 자희는 거짓말을 하고 있을까.

"참, 내가 말했나? 나 어제 네일했어. 이쁘지?"

네일아트를 했다면서 손을 내미는 순간, 자희의 손에서 희미하게 느껴지는 진한 남자 싸구려 향수의 냄새. 다시 기억을 되짚어본다. 제육볶음의 기억 어딘가에 아주 희미하지만 비슷하게 스쳐 지나간 그 냄새.

"응 이쁘네. 잘 어울린다. 와 이렇게 디테일하게도 가능하구나"

확신은 어렵다. 지나치게 많은 정보는 판단을 흐리듯, 지나치게 좋은 후각이 때로는 방해가 된다. 이 싸구려 향수를 쓰는 놈이 학생식당 근처 어딘가에 앉았던 놈의 냄새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 향수 냄새가 왜 자희의 손에서 나는데? 그는 손톱의 그림을 자세히 보는 척 하면서 코를 손 가까이 하고 그 향수 냄새에 집중하며 냄새를 깊게 들이마셔본다.

자희의 손바닥에 싸구려 향수 속 향기 분자의 지도가 그려진다. 자희의 왼손 새끼손가락 주변부터 손날 언저리, 그리고 약지 손가락까지 향이 덮고 있다.

문득 '그'는 그 모양에 대해 '시작하는 연인들의 터치'라는 시적인 이름을 붙여주고 충동을 느낀다. 손을 잡을까 말까, 잡아도 될까 망설이며 주춤대다 새끼손가락부터 슬그머니 감싸쥐는 그러한 터치. 슬픔과 진한 충격이 코를 거쳐 후두부에까지 전해진다. 그러나 티를 낼 수는 없다.

'어쩌면'

그는 일방적인 터치였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지막 기대를 걸어본다. 하지만 한번 집중하자 그 냄새는 의외의 곳에서도 피어올랐다. 자희의 귓볼. 뭘까. 이것은 더욱 믿기 어렵다. '시작하는 연인의 터치'에서 갑자기 귀로 넘어가는 경우도 있단 말인가. 어쩌면 오후가 되어 향이 약해진 향수를 한번 더 뿌린 그 놈팽이의 향수 분무가 우연찮게 닿은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무슨 생각해?"

눈이 동그래진 자희의 표정을 보며 그는 "아냐, 그냥 참 정교하구나 하고 생각했어. 나도 저런 손재주 있으면 좋을텐데" 하고 표정을 감추었다. "넌 가끔 쓸데없는데서 엄청 감성적이더라" 하고 쾌활하게 웃는 자희의 표정을 보며 그는 애써 불안한 감정을 달래본다. 그럴 리 없다며.



어떠한 능력은 노력과 훈련에 의해 더욱 발달한다. 그리고 하늘이 내린 재능을 가진 천재가 전력으로 노력을 기울일 때, 비로소 그 재능은 만개하기 마련이다. 자희에 대한 의심병이 도진 그 날 이후로 그는 후각을 더욱 단련했다. 이미 그러한 노력이 가져올 파국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멈추기에 그는 아직 어렸으며 젊었다.

"후우"

작고 희미한 향을 캐치해내는 것부터 시작된 감지능력 훈련.

"흐음"

다양하게 뒤섞인 냄새 속에서 그 향 하나하나를 분리해내는 향 추출의 훈련.

"후우읍"

하나의 향에 집중하여 특정 범위 내에서 그 향의 분포를 측정해내는 탐지 훈련.

"흐으음"

옷감 또는 종이, 비닐 등 다양한 장애물 속에 감추어진 향이 은밀하게 새어나오는 부분을 중심으로 발굴해내는 미세화 훈련.

"하아아"

콧 속에 가득한 혼란스러운 향의 기억들을 재빠르게 뱉어내고 초기화하는 리셋의 훈련.

"흐음"

어딘가에서 날아온 냄새에 묻어있는, 그 날아온 거리 도중에 맞닥뜨린 세세한 향들을 분석함으로서 어디에서부터 날아온 것인지 확인해내는 레이더화 훈련.

"하아압"

이미 씻겨져 나가고 지워져 나간, 조각조각난 향의 구멍들을 메꾸어 원래 묻어난 향을 복구해내는 재조합의 훈련.

"흠"

아주 혼란스러운 냄새들이 뒤섞인 증거물 속에서 필요없는 것들을 빠르게 걸러내고 중요한 냄새들을 신속히 걸러내는 필터 훈련.

"으음"

냄새들을 기억하고, 그 냄새들을 빠르게 기억해내는 기억력 훈련.

"후우"

그 모든 능력을 스스로가 만족스러울 때까지 끌어올리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반 년. 어느새 그는 냄새가 말해주는 증거 앞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흔하게들 구라를 치는지 매일매일 놀라면서 또 실망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나? 어제 일찍 잤지"
"그랬구나"

자희의 몸 여기저기에 묻어있는 그 싸구려 남자향수의 냄새. 그의 기억창고방 속에서 어느새 꽤 큰 사무실을 사용하고 있는 그 역겨운 향수의 흔적.

"자희야"

그는 결심했다. 여기서 관두어야 한다고. 자희의 전신에서 풍기는, 평소와 다른 바디워시의 향. 그리고 역겹게도 희미하게나마 아주 은은하게 피어오르고 있는, 그 바디워시에 많이 지워진 상태의 희미한 밤꽃향기. 그는 독해지기로 했다.

"그 남자 잘하디"
"뭐?"

그 어떠한 경고나 싸움 대신 난데없는 한 마디로 던지는 그렇고 그런 연애의 좋지 못한 결말. 자희는 놀랐고, 당황했으며, 무슨 소리냐며 소리부터 질렀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다른 수컷의 내밀한 냄새를 뇌리 어딘가에 아로새겨준 역겨운 경험을 용납할 정도로 너그러운 남자는 아니었다.




"젠장"

자희를 얼른 잊고 싶은 마음에 곧바로 새로운 인연을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자희에게 한방 먹이고 싶었다. 평소에야 다른 사람의 체취에 대해 굳이 신경쓰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마음에 드는 상대가 보이면 열심히 향을 맡아댔다. 스쳐 지나가면서 스윽 숨 한번만 들이마셔도 그는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흐'

체취는 수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며칠에 걸쳐 정보를 축적하다보면 더욱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사용하는 향수, 흡연 여부, 취미, 어제 먹은 야식 메뉴, 간밤에 술을 마셨는지 아닌지, 남자친구의 여부까지.

'팝콘냄새와 극장 특유의 냄새…지난 주에도 나던데. 영화를 좋아하나?'
'저녁에 야식 자주 먹네. 어제는 족발인가. 닭발 소스 냄새도 나는군'
'다림질 냄새가 자주 난다…자취한다더니, 다림질까지 자주하는 타입인가. 의외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실망은 금방이었다.

'군데군데 아직도 다 지워내지 못한 남자 향수 냄새, 그리고 그 냄새…음. 남자친구가 있었던걸까'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다른 상대로 눈을 돌려보아도, 지나치게 민감한 코 때문에 실수를 찾는게 더 쉬웠다.

'후우, 배탈 났나보네…아, 냄새 참기 힘들다'
'머리 며칠째 안 감은거지? 머리가 길어서 관리 힘들긴 하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심한거 아닌가'
'부츠에서 냄새가…큼!'

그렇게 코가 혼자 유난을 떨며 안 좋은 체취부터 맡아대니, 모처럼 마음에 드는 여자를 발견해도 곧 시들해지기 마련이었다. 생각해보면 자희도 마찬가지였을텐데, 왜 그녀와 만날 때는 그런 것을 덜 느꼈을까. 그는 당혹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솔직히 버럭 겁도 났다. 이대로 이렇게 시간만 흘려보내다가, 정말 트라우마 생겨서 나이 먹고도 혼자 살게 되지는 않을까, 같은.



"자희야"

늦은 밤의 전화. 그는 자느냐고 묻는 카톡 같은 것은 보내지 않았다. 그저 다시 만나자는 말을 건냈을 뿐이었다. 자희는 한참이나 훌쩍이다가 "알았어" 하며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래, 고마워"

그렇게 근 3주 만에 자희를 다시 만난 그는 애써 그녀 모르게 코를 벌름거리며 체취를 훑어댔다. 마치 수캐처럼. 다행히도 자희에게서는 그 어떤 위험한(?) 냄새도 나지 않았다. 단지 그는 그런 동물같은 자신에게 자괴감을 느낄 따름이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자희를 만나자 비로소 편안함을 느꼈다. 자신이 돌아와야 할 곳에 돌아온 느낌이었다.




"너…"

그리고 1년. 입대 후 첫 휴가를 나온 그는 지독한 좌절을 느꼈다. 예쁜 원피스를 입고, 생글생글 웃는 자희에게서, 결코 나서는 안되는 냄새가 피어나고 있었으니까.

"왜?"

그는 순간 자희에게 뺨을 날릴까, 아니면 그대로 그녀를 무시하고 집으로 돌아가버릴까를 고민했지만, 지난 몇 달간의 군 생활로 익힌 필사적인 표정관리 스킬로 애써 웃으며 식당으로 인도했다.

"아냐, 밥부터 먹자. 저기 부대찌개 집 맛있겠다"
"응!"

간신히 침착한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했지만 어느새 그의 눈에는 뿌옇게 눈물이 차올랐다. 자희에 대한 실망 때문이 아니었다. 어째서 이런 거지 같은 재주를 갖고 태어나서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었다.

"사람이 방구 좀 뀔 수도 있지. 시발."
"너는 애가 왜 그렇게 유난스럽냐"
"개코도 시발 정도껏이지"
"하루에 몇 번을 토하는거야 너는"
"아 오빠, 또 속 안 좋아요?"

수많은 억울한 시간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고, 차라리 몰랐으면 속 편했을텐데, 차라리 아무 냄새도 맡지 못한다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에 울컥했다.

"나 잠깐만, 화장실 좀 다녀올게"
"어 알았어"

그는 무언가 큰 결심을 한 얼굴로, 갑자기 가게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음식점 옆 편의점에서 라이타를 하나 산 다음, 가게 뒷 편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잠시 후 자희는 "끄아아아악!" 하는 그의 비명에 놀라 뛰어나갈 수 밖에 없었다. 놀랍게도 그녀의 남친은 라이타로 스스로의 콧구멍 속을 지져버린 상태였으니까.




"미친 새끼"

그는 눈을 떴다. 병원이었다.

"왜 그런거야! 군 생활이 그렇게 힘들어?"

자희는 퉁퉁 부은 눈으로 깨어난 그에게 소리쳤다. 무언가 대답하고 싶었지만 콧 속을 불로 지져버린 탓에 징-하는 아찔한 통증에 차마 말조차 하기 힘들었다. 군 생활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너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코가 너무 아팠다. 역시 미련한 짓이었을까. 하지만 알 수 있었다.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으니까. 해방이었다.

"보기 힘들어. 코가 그 모양인데 이제 어떻게 널 사귀어?"
"뭐?"

깜짝 놀라 자희를 쳐다보았지만 놀랍게도 그녀는 그저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뭐지'

당황하며 그는 주변을 두리번 거렸지만 텅빈 4인실 병실 안에는 그와 자희 뿐이었다.

"도대체 왜 그런거냐고 이 멍청아, 너 이제 나 어떻게 만날래? 코 저거 수술은 되나?"

환청이라도 들리는 것일까. 혹시 순간적으로 자기 자신이 미친 것은 아닌가 싶어 눈을 끔뻑였지만 그는 순간 언젠가 본 무협지의 내용을 떠올렸다. 시력을 잃고 엄청난 청력을 얻게 된 어느 고수의 이야기 말이다. 이제는 후각을 잃은 대신에 독심술이라도 얻었단 말인가. 그 상황에 너무 기가 막혔지만 그는 자희의 다음 말-여전히 입을 다문 채 눈물만 흘리고 있는-에 아주 씁쓸함을 느낄 따름이었다.

"역시 그냥 한수 오빠 만나는게 맞는걸까. 하, 정말 이게 뭐야 도대체"

그 말에 그는 코가 징징 울리는 통증 속에서도 기어코 말을 꺼낼 수 밖에 없었다.

"자희야, 미안한데 엄마한테 전화 좀 대신 해줘. 그리고 너 일단 돌아가. 나 좀 쉴게"





몇 시간 후, 그가 곤히 잠든 와중, 병실 옆 환자 가족 대기실에서 그의 엄마는 눈물을 겨우 그치고는 조사를 위해 나온 헌병들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었다.

"우리 애가 막 자해를 하고 그럴 애는 아니에요. 단지 그냥 애가 망상병이 있어요. 지가 무슨 강아지 마냥 냄새를 귀신같이 잘 맡는다는 이상한 망상이 있어요. 근데 전혀 그게 아니거든요. 어렸을 적에 검사도 받아봤는데 오히려 평균보다 떨어지는 편이래요. 아까도 저 짓을 한게, 그러니까, 지 여친이 무슨 바람을 피웠대요. 그리고 그걸 지 코로 알 수 있다는데, 그게 너무 괴로워서 그냥 코를 없애버리고 싶었대요. 근데 이제는 사람 속 마음 소리가 들린대나 어쩐대나. 정신병에 걸려버린건 아닌지 걱정이 되서, 진짜 어째요 우리 아들. 에휴으, 진작에 정신병원이라도 데려가는건데!"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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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 더

중학교 무렵이었을까, 명절을 하루 앞둔 나는 장염에 단단히 걸렸다. 하루에 수십 번씩 화장실을 드나들며 아래 위로 토사와 설사를 쏟아내던 나는 엄마 손에 이끌려, 후들거리는 다리와 꾸륵 거리는 배를 부여잡고 겨우 병원으로 갔다.

"아후, 이 기집애 그러게 어쩐지 미련하게 집어먹더니만"

가뜩이나 힘들어 죽겠는데 엄마의 핀찬까지 겹치자 정말 길 한복판에서 서러움에 눈물이 핑돌았지만 그 순간 나는 보았다. 온 세상이 싯누래진 것을. 정말 아프고 힘들 때 '하늘이 노랗다'라는 말을 왜 쓰는지 처음으로 깨달았다. 정말 세상이 노란 색이었다.


"내일이 명절이니까, 약 일주일치 처방해 드릴께요"
"네 감사합니다"

그로부터 근 20년 가까운 십수 년이 지난 오늘, 나는 오늘도 병원에서 약을 타왔다. 물론 장염 약은 아니다. 장염은 그 이후 나를 딱 나흘간 더 괴롭혔을 뿐이지만, 이 조현병은 십수 년의 세월동안 나를 괴롭혀 왔다. 시기에 따라 널뛰는 마음, 때때로 죽음을 각오하게 만들 정도로 찾아오는 허무함, 한없이 깊이 가라앉는 무기력함, 수십 명이 귓가에서 동시에 떠드는 듯한 어지러움…. 나의 세상은 끈적하다. 모든 사람이 수시로 눈빛의 창을 찔러와 온 세상은 나의 피로 피범벅이 된다. 붉디 붉은 어지러움이 삶의 현기증이 되어 나를 괴롭힌다.

"택시…온다"

제일 힘든 것이 사람들의 시선이다. 나는 사람들을 마주치는게 어렵다. 무섭다. 세상 모두가 내 흉을 보는 것 같고, 그들의 눈빛과 모든 말들이 나를 향하는 것만 같다. 이미 국가등록까지 마친 완벽한 조현병 환자.

"어디로 모실까요"
"미성동, 정록고개 쪽으로 가주세요"
"네에, 알겠습니다!"

친절한 택시기사님. 그러나 언뜻 언뜻 룸미러로 마주치는 그의 눈빛 역시 부담스럽고 괴롭다. 살짝 눈을 감았다가 다시 끈다.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지만 나는 여전히 그가 그저 시뻘건 눈으로 룸미러를 통해 계속 나를 쳐다보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괴롭다. 주먹을 꼭 쥔다. 괴롭다.

"후우"

집에 왔다. 물을 떠놓고 한 20분을 고민한 것 같다. 사실은 약도 먹고 싶지 않다. 하지만 요 며칠 전부터 환청이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괴롭다. 그래서 병원으로 내키지 않는 걸음을 내딛었다. 며칠 전, 집에 오빠가 들린 이후부터다. 그는 또 나에게 돈을 빌리고자 했다. 하지만 백수 5개월째인 나에게 무슨 목돈이 있겠는가. 아빠는 나에게 전화로 욕을 했다.

"음"

약을 삼킨다. 이제 삼십 분 정도 지나면 잠이 스르륵 올 것이다. 아주아주 깊은 잠이. 심하면 20시간도 자는 그런 잠 말이다. 아무리 전화벨 소리를 크게 해도 깨지 못하는 지옥 같은 잠이. 꿈조차 잘 꾸지 않는 그런 잠. 하지만 악몽도 자주 꾸는 그런 잠.



"좋은 소식이 있어요"

약 일주일 후 병원에 들리자 선생님은 나에게 흥미로운 제안을 하나 해주셨다.

"모든 것은 환자 분이 결정해야겠지만…"

지미타르를 개발한 제약회사에서 이번에 새로 내놓은 신약의 임상실험에 참가하면, 당분간의 병원비와 통원비는 물론, 소정의 돈까지 준단다. 물론 신약의 효과가 좋다면 내 병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나는 그러자고 했다. 돈이 필요하니까. 병이 나으면 더 좋고.

"고맙습니다"



약 한달 간의 통원. 별 거 없었다. 약 먹고, 피 검사하고. 통원하고 약 먹고, 간단한 문진표 작성하고. 그게 전부였다. 큰 돈은 아니었지만 생활비 정도의 돈도 받았다.

"히히"

돈이 생겨서일까, 아니면 다시 살짝 조증이 강해지는 시즌인가, 아니면 새 약 때문인가. 묘하게 몸이 덜 무겁다. 기분도 그리 썩 나쁘지 않다. 그러고보니 환청도 많이 나아졌다. 정말로.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좋아질 수가. 이제 더이상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끼우고도 머릿 속을 가득 채운 지랄 같은 말 폭탄 속에 혼자 조용히 해 죽어 시끄러워 시발 시발 죽고 싶다 화난가 빡쳐 같은 말을 중얼거리지 않아도 된다.

"정말인가요?"

임상실험을 소개해 준 담당 선생님도 많이 좋아하셨다. 몇 달 만의, 의례적인 문진표를 작성하면서 새삼 깨달았다.

"어…"

이제 교차질문 몇 개를 제외하면 정말로 체크 박스 중에 [ 해당 없음 ] 항목이 더 많았다. 내 눈빛을 본 담당 선생님은 "그래도 아직은 완벽한 건 아니니까요. 아시잖아요. 이 병은 마라톤처럼 해야하는거요" 하면서 웃었지만 사실 난 이미 깨달았다. 나 정말 병이 나았다고. 물론 나도 잘 안다. 조현병 환자들의 전매특허 '나 다 나은 거 같아요' 착각. 근데 이건 분명 알 수 있었다. 그런게 아니었다. 심지어 의사 선생님도 말했잖아.

"아주 좋은 흐름입니다"



병원을 나서면서 비로소 완벽히 깨달았다. 머릿 속도 안 복잡하고, 아니 당연히 고민은 산처럼 많긴 하지만 그래도 지옥 같은 환청은 없었다. 세상은 온통 잿빛의 어두운 색도 아니고, 찬란한 노란색, 아니 아이보리색 ,아니 그냥 총천연색의 밝고 예쁜 세상이었다.

"와"

생각난다. 중학교 어느 겨울방학 때의 그 기분이었다. 사람없는 조용한 골목에서, 온 세상 나 혼자 신난 바로 그 기분.

'나 병 다 나았어! 나 이제 조현병 환자 아니야!'

미친듯이 소리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눈물이 흐를 정도라는건 오바지만, 그랬다.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제자리에서 혼자 펄쩍 뛰었다. 평일 살짝 늦은 오전이라 그런지 사람이 없어서 별 일 없었지만.

'어'

그리고 그때 느꼈다. 소름끼치는 어떤 기분을.



무서운 기분에 택시를 탔다.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미성동, 정록고개 쪽으로 가주세요"

기사님은 대답도 없이 바로 택시를 출발시켰다. 힐끔 룸미러 쪽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말없이 운전을 할 뿐이었다. 나 역시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30분을 말 없이 집까지 왔다.

"기사님 저기 앞에서 세워주세요"

일부러 큰 길에서 내렸다. 횡단보로를 건너고, 맥도리아 앞을 지났다.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저 앞에서 걸어오며 스쳐 지나간 아저씨도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뭐야'

언제나 눈빛의 창에 찔려 피를 철철 흘려가던 가녀린 나는 어디 갔을까. 그 누구도 나를 눈여겨 보지 않았다. 알 수 있었다. 단 한 명도 나를 주의깊게 보지 않는다. 그냥 나는 길가에 세워진 입간판이나 마찬가지였다. 

'뭐냐고'

보이지만 읽지 않는, 눈에 띄기야 하지만 전혀 관심조차 가지 않는.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콧김이 거세졌다. 더 무서워졌다.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마치 온 세상 사람들이 철저히 차가운 마음의 벽이라도 치고 있는 기분이었다.

엄청난 거리감, 말도 안되는 소외감, 그 누구도 나를 상대해주지 않을 것 같은 외로움. 몸이 떨려왔다. 너무나도 고독했다. 괜히 일찍 내렸다. 그냥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뭐야…"

새삼스럽게 내 집이 엉망진창으로 보였다. 처음으로 내 집이 아늑한 아지트가 아니라 지옥 같은 쓰레기장으로 느껴졌다. 생각해보니 그 기분은 약을 먹기 시작한 얼마 전 즈음부터 였던 것 같다. 오빠가 올 때마다 "이게 사람 사는 집이야? 돼지우리도 이거보단 낫겠다"라며 하던 말이 처음으로 이해가 갔다.

헛구역질까지 하며 방을 치우기 시작했다. 물론 몇 시간으로는 어림도 없는 아수라장이었지만 적어도 침대 근처는 어느 정도 정리하는데 성공했다.

'시발'

알 수 있었다. 난 이제 정말로 병이 나은 것이다. 일시적으로 병이 나은 것으로 느끼는 어떤 착각이 분명 아니었다. 뒤틀려 있던 내 안의 어떤 축이 다시 자리를 잡은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꼬여있던 내 안의 어떤 사상과 이론, 현실들이 명확하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안돼'

그건 엄청난 고통이었다. 가족을 제외한 그 누구와도 대화를 나누지 않는 나. 지난 시간을 난 도대체 어떻게 버텨낸 것일까. 왜 단 한번도 외로움을 겪지 않았을까. 지금 이렇게나 고독하고 외로운데. 누군가와 말을 나누고 싶었지만, 오빠도 아빠도 전화가 되지 않았다. 거의 인터넷으로 만난 친구들도 마찬가지. 번호가 바뀌었는지 없는 번호로 뜨는 친구들도 많았다.

세상 지독한 고독함이었다. 냉정하게 현실을 바라보게 되지 그 고통은 몇 개로 찾아왔다. 남자친구도, 말 나눌 동성친구도, 가족다운 가족도 없었다. 나는 그저 덩그러니 세상에 놓인 독립개체였다. 이제 실업수당 끊기는 한달 뒤에는,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보낼지 전혀 가망 없는 미래가 기다리는 그런 떨거지.

"하하"




그제서야 깨달았다. 나는 그 약을 먹으면 안됐다. 차라리 남은 평생동안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혼자 괴로워 하는게 나았다. 내 병은, 나를 괴롭히는 흉기가 아니라 나 스스로가 나를 지키기 위한 갑옷이었다.

'그랬어'

아빠의 정리해고와 알콜중독, 부모의 이혼, 자퇴, 성추행, 오빠의 사업실패, 나의 이별, 첫 발작, 부쩍 심해진 우울, 부분 탈모, 거의 모든 주변 사람과의 싸움, 외톨이, 일방적인 업무 계약해지, 전세금 사기, 막막한 미래, 추해진 외모, 비참한 일상…

지난 몇 년 간의 일들이 눈 앞을 스쳐 지나갔다. 맙소사. 그걸 견뎌낸 나 자신이 안쓰러웠다. 안아주고 싶었다. 나는 나를 꼭 안았다. 그래, 더이상은 힘들지 말았으면 좋겠어. 정말로. 그리고 매번 커터칼, 약물 대량 섭취 따위와는 전혀 다른 '진짜'의 방법을 시도했다.

15층의 바람은 시원했다. 나는 이미 한참 전에 눈을 감고 있었다. 아파트 옥상 난간 위에 서서 말이다. 다행히 관리실에서는 이쪽이 보이지 않는다. 오늘 한 일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방금 전 오빠에게 보냈던 카라멜톡의 메세지가 오타를 친 거 같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들었지만 더이상은 뭐 어떻게 더 하기가 싫었다.

'잔인하다. 정신병보다 더 무서운게 현실 세상이라니, 세상에. 이럴 바에야 그냥…'

나는 그냥 그렇게 가볍게 몸을 아래로 숙이기로 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조금만 더어, 그래, 이렇게, 붕.





"선생님"

그는 간절한 눈빛으로 소매를 붙들었지만, 의사 선생님은 그저 안타까운 표정을 지을 따름이었다. 그리고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몇 시간 더 지켜봐야겠지만, 의식이 다시 돌아올 확률은 낮습니다. 그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데 즉사가 아닌 것이 기적일 정도니까요. 경과를 지켜봅시다"
"흐읍 선생님, 제 동생한테, 한번만, 미안하다고 말할 기회를 주세요 제발. 흐, 흐허, 그런 부탁을 하는게 아니었는데"

의사는 침통한 표정으로 남자의 손을 가볍게 무르고는 병실을 나섰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순수히 놀라기도 했다. 어째서 환자는 저렇게도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일까. 뭐가 그렇게도 기분 좋을까.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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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을 욕하면 죽는 병

"저저저, 에휴. 저딴 것도 대통령이라…커헉, 컥!"
"아니 김씨 왜 그래, 아이고, 뭔, 아이고오!"

명절을 앞둔 어느 시기, 원인을 알 수 없는 괴병이 대한민국을 휩쓸었다.

"서간, 어제 난리였다며?"
"아후, 말도 마요. 어제 몇 시쯤이었더라? 여튼 9시 좀 넘었나? 갑자기 막 환자들이 미친듯이 쏟아져 들어오는데, 난 진짜 무슨 어디서 대형 사고라도 터진 줄 알았어요."
"무슨 일이래"
"에휴, 모르겠어요. 힘들어 죽겠어요"
"근데 그 이야기 들었어?"
"뭐요?"
"아니…아니야"

환자들 사이에 묘한 공통점이 있었다. 함께 병원으로 온 보호자들 말에 따르면, 환자들 상당수가 뉴스를 보다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는 것. 하루만의 일이 아니었다.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근 3일간 전국 전역에서 뉴스 시간을 전후해서 뇌출혈 또는 심장마비 증상을 보이는 환자들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그리고 묘한 소문 하나가 인터넷에서 돌기 시작했다.

"대통령을 욕하면 죽는 병이래"
"미친 개소리 하고 있네"

너무 말도 안되는 헛소리였지만, 그 소문은 곧 현실로 입증됐다. 수많은 인증영상이 곧 쏟아졌으니까. 대표적으로 4백만 구독자를 보유한 정치 스트리머 조 모가 실시간 합동방송에서 대통령 욕을 하다가 즉사한 영상이 바로 그것이었다.

"아니 그게 말이 돼?"
"너도 봤잖아 미친 놈아"
"지랄하네. 그럼 나도 욕해볼까? 아~ 대통령 이광래 개새…커헉!"
"으아 씨발! 아 씨발!"

그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호기심과 과학적 의구심에 희생된 끝에야 사람들은 믿기 시작했다. 긴급대책으로 방송국에서는 사상 초유의 '정치뉴스 보도 금지'라는 자체적 보도규제를 내렸고, 포털에서도 아예 정치/사회면 기사가 게재되지 않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

"Crazy koreans…"
"new fandeath!"

물론 이 일련의 사태는 해외에도 알려지고 보도가 되었지만, 그 직후 전 세계적인 조롱거리가 되었다. 왜냐하면 놀랍게도 외국인들은 똑같은 행동을 해도 전혀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으니까.

"fucking korean president Lee Kwang-rae! fuckyou! Lee, Kwwwang, rae, gea sae kii! …so what?"

해외교포들이나 한국 내 체류 중인 이중국적자들 역시 아무리 대통령 욕을 해도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고, 심지어 평범한 한국인들조차 외국에 나가는 순간 전혀 문제가 없었다. 오로지 한국인이 한국에서 대통령 욕을 하면 사망하는 것이었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고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정치, 사회 이슈에 관심이 많은 보편적인 한국인들의 어떤 스트레스가 새로운 질병을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흔히들 울화병, 화병이라고들 하죠? 이게 과거에 실제로 질병 이름으로 등록된 적이 있어요. hwa-byung이라는 이름 그대로. 전 세계에서 한국인들만 겪는 특이한 정서적 질환이죠. 바로 이 hwa-byung의 조금 새로운 버전이 아닌가 싶은 거에요"

의사들은 나름대로 그 원인을 밝혀내고자 노력했고, 가장 유력한 가설은 역시나 hwa-byung의 변종일 가능성이었지만 그저 호기심에 따라한 어린이들, 평소 정신질환이나 스트레스, 우울증 등이 전혀 없는 이들조차 이미 수없이 이 원인 불명의 괴병에 희생되었기에 그 가설은 믿지 않는 사람이 더 많았다.

사태는 근 한달을 넘겼지만 전혀 바뀐 것은 없었다. 그때까지 파악된 내용으로는 그저 대통령을 욕하면 죽는다, 뿐이었다. 역대 왕이나 전직 대통령, 해외 대통령을 욕할 때는 문제가 없다, 점잖은 비판까지는 괜찮지만 그것이 선을 넘는 순간 죽는다, 목소리 뿐 아니라 텍스트로 욕을 해도 죽는다, 이미 지나간 과거의 욕설 영상이나 글은 괜찮다, 등등이 수많은 희생으로 조금 더 파악됐을 뿐이다.

"…"
"…"
"철승아, 더 먹을래?"
"아뇨, 괜찮아요"

이제 가족간의 식사, 특히 뉴스 시간에 TV를 켜놓는 것은 금기시 되는 일이 되었다. 물론 점심시간 내 식당들도 마찬가지.

"I can't believe it…"

해외에서는 이 일이 엄청난 논쟁이 되기도 하였다. 도저히 과학적으로 말이 안되는 일인 것은 분명했지만 실제로 수많은 사례가 보고 된 이상 의학적, 과학적 검증은 필수적인 것이었기에 연구를 위해 한국에 온 많은 연구자들이 한국 내에서의 사례들을 검토하고 모두 unbelievable을 외쳤다.

그러나 사실 그 누구보다 당혹스럽고 입장이 난처한 것은 대통령이었다. 결국 자신을 욕했다는 이유로 수십 만명이 죽은 것이니까. 이 괴병으로 희생된 가족들은, 더욱 더 대통령을 증오하게 되었다.

"아주 훌~륭하신 대통령님을 둔 덕분에 저와 아이 셋은 가장을 잃었네요"
"세계에서 둘도 없는 위대한 지도자 덕분에 아주 이 나라는 대통령 욕이 없는 나라가 되었네요. 참, 무섭다 무서워"

누군가들은 그 와중에도 대안을 찾아냈다. 비아냥에 가까운 극찬이나 혹은 '그런 듯 아닌 듯 결국 욕을 하는' 식의 컨텐츠로 욕을 해댔다. 그러나 그 과중에도 선을 넘는 순간 여지없이 괴병이 그들을 덮쳤기에 결국 어느 시점부터는 입을 닫기 시작했다.

"아니 대통령도 이 사태에 무어라 말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세상 천지에 이런 일이 도대체, 아니 왕조시대에도 안 보이는 곳에서는 나랏님 욕을 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건 뭐란 말입니까"
"소설 1984가 현실에 도래해도 이 지경은 아닙니다"

야당은 격렬하게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고, 근 50일째 드디어 대통령 담화가 있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사상 유래 없는 중대한 사태에…"

내용은 기본적으로 한 개인으로서의 소회와 대통령으로서의 고뇌를 함께 말하는 것이었지만, 하야까지도 점치던 언론의 탓이었는지 사람들은 미적지근한 분위기였고, 그 와중에 대통령 욕을 함으로서 자살하는 영상을 실시간으로 인터넷 방송으로 송출하는 극단적인 사례까지 발생하면서 상황은 한층 심각해졌다.

"아 죽을 놈을 죽으라고 그래. 도대체 언제까지 이래야 되는건데."
"누가 강제로 욕을 시키드냐고. 지가 욕하고 지가 죽는거 아님?"
"아니 애초에 욕을 하는게 문제 아닙니까? 비판을 해야지 욕을 왜 합니까?"

하지만 정권을 지지하는 측에서도 서서히 반론을 시작했다. 비판을 하면 괜찮은 것 아니냐, 누가 욕을 하라고 했느냐, 죽음에 이르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이지만, 애초에 욕을 하는 것이 문제의 원인 아니냐는 논리였다.

"사람이 죽었단 말입니다 사람이"
"그럼 언제까지 뉴스에서 정치, 사회, 시사 이슈를 덮어놓을 생각입니까? 선거 안 할 겁니까?"
"그러게 정치를 똑바로 했으면 사람 죽을 일도 없지 않습니까"
"뭐요? 아주 이거, 그쪽도 지금 아슬아슬하네!"
"뭐야? 아니 이 양반이"

하지만 차기 대선이 2년이 채 안 남은 시점에서 아무리 사상 초유의 비상사태가 발생했다고 한들 정치 뉴스를 아예 방송을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애초에 '선을 넘은 과도한 욕, 비난'이 괴병의 발동 조건인만큼, 정치 뉴스 반대쪽의 명분이 약했다. 결국 정치 시사 이슈 방송 중단 근 3개월 만에 정치 뉴스 방송이 재개되었다. 포털의 정치, 사회 뉴스 역시 다시 노출을 시작했다.

"뭐야 이거"

뉴스가 재개되었지만, 포털의 뉴스란은 더이상 댓글을 달 수 없게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상황에, 포털로서는 당연한 처사였다. 커뮤니티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치인 관련 글에 대한 금기어는 아예 의무적으로 설정하게 되었다.

"174위?"

한국의 언론자유지수는 사상 최하위를 찍었다. 어지간한 독재국가들보다 낮은 순위였다. 그러나 당장 기자들부터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고, 그 기사를 읽는 국민들과 사회안전을 위해 많은 규제들이 가해졌다. 대통령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뉴스는 아예 보도가 금지되었고 정책에 대한 비판 기사나 그러한 우려가 있는 내용 역시 상당한 수준의 칼질이 가해졌다.

"정권 후반기에 이 정도 지지율은 사상 유래가 없는 수준입니다"

대통령 지지율 86%. 압도적인 수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뉴스에서는 항상 대통령과 그의 업적을 칭송하는 뉴스만 나오는 상황에다, 정권을 지지하지 않는 이들은 설문조사 자체를 기피하는 상황이었으니 지지율은 매우 높게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야권에서도 "무의미한 숫자"라고 폄하하기는 했지만, 숫자 자체가 너무 압도적이었다.

"그런데 만약에, 선거로 대통령 바뀌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거지?"

처음부터 사람들이 생각했던 묘한 궁금증이었다. 아무도 이 '대통령을 욕하면 죽는 병'의 원인을 모른다. 이 병이 정말 누군가의 말마따나 '한국의 성인 이광래를 위한 기적'인지, '건전한 비판이 없는 망국병에 노한 하늘의 천벌'인지 모를 일이지만, 어쨌거나 선거로 다음 대통령이 뽑히면 이 병이 사라질 것인지, 아니면 그 새로운 대통령이 또 이 괴병의 실드를 받게 될 일인지 아무도 몰랐다. 그렇게 막연히 시간만 흘러갔다.




"속 시원히 말하는 사회, 이 김동선이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여러분! 자, 모두 외칩시다. 다음 대통령 김동선 개새끼!"

야권에서는 '속 시원한 사회'라는 구호를 내건 김동선 후보가 돌풍을 일으키며 새롭게 떠올랐다. 야권의 3선 소장파 의원인 김 의원은 "다음 대통령 김동선 개새끼!"를 매 유세마다 외치고, 또 유세장의 모두에게 외치게 함으로서 그 억눌린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같은 한풀이를 대신할 수 있게 해주었고 엄청난 이슈를 불러온 것이다.

"여권 대선후보 정창훈 41.5%, 야권 대선후보 김동선 지지율 33.1%, 아직은 격차가 큽니다만 지난 달의 17%에서 현재 33.1%라는…"
"한국의 대선은 언제나 마지막 돌풍을 일으킨 쪽이 중도권을 흡수하는 형태로 승리를 가져갔는데요, 그런 점에서 보았을 때…"
"정창훈 후보는 오늘 고아원을 방문하여…"
"김동선 후보 아들의 병역비리 의혹에 관련하여 김동선 후보 측은 아들의 대학 재학 중 받은 ROTC 상장을 공개하며…"

선거는 다소 묘한 구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대통령 지지율을 그대로 이어받은 여권의 '왕세자' 정창훈이 처음에는 크게 앞서 나가는 구도였으나, 야권 대선후보 김동선의 파격적인 선거운동과 거침없는 발언이 사람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기며 무서운 속도로 그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아니 너무 노골적이잖아. 그러니까 오히려 이게 역효과를 받는거야"

아예 법으로 보장된 여권에 대한 비판 자제 때문에, 언론의 비판과 의혹제기는 김동선 후보에게 쏟아졌다. 그러나 그가 대부분의 의혹을 명쾌하게 해명함으로서 오히려 노이즈 마케팅이나 다름없는 큰 지명도 상승 효과를 불러 일으켰다. 게다가 거침없는 발언과 "속 시원한 사회, 김동선 대통령 개새끼!" 같은 신선한 유세 운동으로 사람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면서 점차 선거는 흥미로운 양상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점점 자극적으로 흐르는 선거문화는…"
"아 근데 솔직히 속 시원하긴 하네. 나랏님 욕 못하는 나라가 몇 년 째야. 세상에. 어?"
"근데 나중에 김동선이가 대통령이 되면 그때는 또 욕 못하는거 아냐?"
"변변찮은 공약 하나 없이 욕 한 마디로 유력 대선후보라니 해외토픽감 아닙니까"

대통령 선거 날을 일주일 앞둔 시점, 마지막 여론조사 결과는 정창훈이 37.2%, 김동선이 35.8%로 아슬아슬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굳히기' vs '상승세'라는 믿음으로 각 정당 모두 승리를 자신하는 가운데, 선거 3일 전 포털 사이트의 뉴스댓글 서비스가 돌연 재개되어 '반 정부 성향의 네티즌들을 죽음으로 몰기 위한 더러운 정치공작 아니냐' 라는 흉흉한 음모론까지 돌며 드디어 선거가 치뤄졌다.

"경남 하동의 개표율은 현재 2% 상태로, 김동선 후보의…"
"서울 관악의 개표율은 현재 6%인 가운데 압도적인 정창훈 후보…"

개표방송 1부 중엽, 개표율이 4%를 넘어간 시점부터 아주 근소하게 김동선 후보가 앞서 나가기 시작했고, 제주에서의 개표가 본격적으로 속도가 붙으며 한번 뒤집히기는 했지만 결국 저녁 11시 22분, 야권 김동선 후보의 선거방송 포트레이트 옆에 [ 확정적 ] 이라는 배너가 붙었다.

"김동선! 김동선! 김동선!"

사실 A.I를 활용한 선거 예측 시스템에서는 조심스럽게 '안정적 국정 운영'이라는 기조 하에 정창훈의 우세를 엿보았지만, 장군 출신 모 야당 정치인의 "선거는 전쟁이고, 전쟁은 기세입니다. 기세가 오른 장수가 앞장서면, 자연스럽게 사람이 따라붙기 마련입니다" 라는 말처럼 야당 후보 김동선이 새 대통령에 오르게 되었다.

"아 속 시원하네. 드디어 댓통령이 바뀌었다네, 개새끼가 물러나고 용이 승천하네, 이광래 이 개새…억!"

안타까운 것은 대통령 선거의 승리가 곧바로 대통령직의 승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닌지라, 여전히 괴병의 효과는 작동하여 선거 직후 대통령 욕을 한 수많은 사람이 죽음을 당하고야 말았다. 특히 대통령 임기에 대한 개념이 약한 10대와 노인층의 사망이 많았다. 이 과정에서 '뉴스 댓글을 오픈한 것은 이런 사태를 유도한 것은 아니냐'라는 의혹이 다시 한번 불거지며 훗날 특검까지 진행되기에 이른다.

"South korea’s presidential election ended with the…"
"韓国の大統領選挙は..."
"दक्षिण कोरिया एक भड़काऊ बीमारी से पीड़ित एक नया राष्ट्रपति है-"
"新任总统接替韩国总统李光-"

전 세계는 한국의 대통령 선거 결과를 전하며, 다음 대통령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그 초상현상(외국에서는 병이라는 개념보다는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해당 사태를 이해하는 이들이 많았다. 다만 서양 의사들만큼은 동양인들 특유의 정권 순응적 자세와 현실적 고민 사이의 괴리가 과도한 스트레스를 불러오는 발작성 정신질환 정도로 설명하려는 이들이 많았다. 물론 그런 이해에 대해서도 정작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반발이 많았지만)이 이어질 것인가에 관심을 많이 가졌다.

"아, 정말 시간 안 가네"
"근데 만약에 또 이어지면 어떻게 하지"

대통령 준비 위원회는 선거 나흘만에 꾸려지기 시작하여 약 두 달 여간의 업무 인수를 거쳐 김동선 새 대통령에게 대통령 권한을 위임하였고, 이듬 해 2월 25일 새 대통령 김동선은 대통령 취임식을 맞이하였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대통령 취임선서와 함께 김동선은 비로소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었다.

"여보!"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훗날 이광래 전 대통령의 영부인인 김영란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놀랍게도 그 선서가 끝난 순간 전임 대통령 이광래는 "이광래 미친 놈"이라고 스스로 작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정작 이광래 본인은 그런 적이 없다고 부인했지만) 사실 여부를 떠나 전임 대통령 부부가 괴병과 그로 인한 사회적 이슈에 얼마나 큰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여기서 한가지 정말 궁금해지는, 아니 아마 이번 대선 기간 내내 그 어떤 현안보다도 더욱 주목을 받아온 문제가 바로…"

김동선에게 드디어 대통령 권한이 법적으로 부여된 그 순간 전 국민의, 아니 전 세계의 이목이 한국으로 쏠렸다. 과연 "대통령을 욕하면 죽는 나라"라는 터무니 없는 상황이 이제 역사 속의 해프닝으로만 남게 될지, 아니면 여전히 현실에서 이어질지가 드러나는 순간인 것이다.

"김동선 대통령 개새끼이!"

그리고 그 의문은 곧바로 풀렸다. 대통령 취임식 행사장에서 김동선의 선서가 끝나자마자 누군가가 엄청난 목소리로 "김동선 개새끼!"를 외쳤기 때문이다. 혹시 모를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철저히 개개인의 확성기나 스피커 차량 등의 행사장 근처 진입을 차단했음에도, 엄청난 성량을 지닌 누군가가 큰 목소리로 의문을 속시원히 풀어버린 것이다.

"…"

소름끼치는 적막이 그 소리를 지른 이를 중심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는 놀랍게도 새 대통령 준비 위원회 소속 문화 청년특위 장수철 의원이었다. 성악가 출신인 그는 김동선과의 사전 협의로 그러한 퍼포먼스를 준비한 것이다. 만약 괴병이 새 대통령에게로 이어지는 것이라면 즉사할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었음에도, 그는 새로운 대통령의 성공적인 출발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건 것이었다.

"와! 살았다!"

그리고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그 순간, 장수철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눈물을 글썽이며 행복한 얼굴로. 목숨을 건 퍼포먼스가 성공한 셈이었으니까.

"아 씨발! 그래, 대통령 개새끼이이이!"

욕설이기는 하지만, 대선 기간 내내 김동선의 파격적인 선거구호이기도 했던 '속 시원한 사회, 김동선 개새끼'는 그의 상징과도 같은 문구였고 그의 열렬한 지지자들은 당연히 기쁜 마음으로 대통령에 대한 욕설을 외쳤다. 선거에 패배한 정창훈의 지지자들 역시 속내는 다르지만 역시나 같은 "김동선 개새끼"를 외치며, 드디어 한국이 '대통령을 욕하면 죽는 병'에서 벗어난 상황을 기뻐했다.

"저 김동선은, 바로 이 순간을, 대한민국이 진정으로 표현의 자유를 그 어느 나라보다 비싼 값을 치르며 얻어낸 날로 기억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어진 대통령 취임사에서 새 대통령은 '표현의 자유'와 '자유 민주주의', '국정운영의 최고 책임자로서 마땅히 감내해야 할 무거운 책임과 자세', '국민 모두의 자유로운 표현과 그것을 용인하는 사회적 여유, 그리고 그 모두가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창조해나갈 이 나라의 밝은 미래'를 강조했다.

"아, 정말, 살 것 같다. 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우화가 도대체 왜 생겼는지를 알겠다고"
"행복하다 행복해"

그렇게 모두가 다시금 얻게 된 표현의 자유에 대해 행복함을 느낀 그 순간, 행사장의 누군가들이 피를 토했다.

"김동선 대통령 만세…꾸어어억! 웩! 커허허헉!"
"만세, 대통령 만…커헉! 꾸억"

행사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아니 그 뿐이 아니었다. 사실 대통령 취임 선서 직후부터 이미 전국 병원과 119는 초비상사태였다.

"코드 블루! 코드 블루!"

레지던트들과 인턴, 간호사들이 허둥지둥 미칠듯한 속도로 온 병원 안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바닥에 피를 토하고 쓰러진, 혹은 눈알을 까뒤집으며 쓰러진, 아니면 그대로 조용히 고개를 떨군 누군가들이 엄청났다.

"아 시발 이제는 대통령을 칭송하면 죽는거야?"

119 응급차를 운전하는 김진우는 전 속력으로 환자를 태운 앰뷸런스를 운전하며 중얼거렸다.

"대통령을 칭송하면 죽는 병"

그 소식은 긴급재난문자와 뉴스 속보로 전 국민, 그리고 다시 한번 전 세계로 퍼지며 또 한번의 충격을 안기기 시작했다.

- 끝 -


전자 속으로

고3 시절, 내가 사용하던 MP3 플레이어의 메모리는 32메가짜리였다. 약 4메가짜리 노래 8곡이 아슬아슬하게 들어가는 수준이었다.

'조금 지겹네'

음질을 다운시켜 몇 곡을 더 집어넣을 수 있었지만, 어쨌든 앨범 하나를 통째로 넣기에도 버거운 수준이었다. 아직 CDP를 쓰는 친구들도 많았고, 개중에는 플래시 메모리 대신 CD 속의 MP3 파일을 읽어들이는 형태의 MP3 플레이어를 쓰던 녀석도 있었지만, 그것들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아직 MD를 쓰던 녀석들도 있었지만, 놈들이야말로 훗날의 블랙베리파 같은 소수파 중의 소수파였다.

[ 띠리리 띠리리~♪ 띠리리 띠리리~♪ ]

"올, 16화음?"
"64화음이거든? 음악보다 이걸 봐. 칼라폰이다 칼라폰"
"오 대박!"

대학교에 입학하자 나에게는 휴대폰이 생겼다. 또래 친구 중에는 이미 고교 시절 시티폰을 쓰던 놈들도 있긴 했기에 살짝 늦은 편이었지만, 대신 파워풀한 모델로 구입했다. 휴대폰 액정이 컬러라는 자체로 프리미엄이 되던 시절이었다. 대신 살짝 두껍긴 했다. 하기사 그러고 보면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디자인보다 성능파였던 것 같다. 마지막까지 쓰던 삐삐 역시 '광역삐삐' 엮으니까.

"오 김뱅쟝님, 이거 그기 아임까. 쪼꼬렛폰"
"그래 이 새꺄, 김태희가 어? 막 이렇게 허리 흔들면서 섹시하게, 광고하면, 사줘야지"
"하 이거 디지게 이쁜데 말임다? 하 씨 내도 말년휴가 나가면 이거 사야지"
"그 날이 어디 오겠냐"

그 이후로도 몇 개의 휴대폰을 거치면서 시대는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대머리에 뉴발란스 신발, 목폴리티 입고 다니는 아재가 "어썸!" 하고 자화자찬하며 빼곡한 텍스트 대신 그림 몇 장과 달변으로 전 세계 마케터들의 PT 스타일을 한번에 바꿔놓은 뒤 그 많던 주변기기는 그 이후 근 20년 사이에 휴대폰 한 대로 줄어들었다. 버튼을 꾹꾹 눌러대던 우리의 타이핑도 어느새 스크린 터치가 기본이 되었고 말이다.

"그냥 싹 다 버려야겠다"

이사를 하면서 베란다 한 켠에 그동안 모아왔던 수십 대의 전자기기들을 버렸다. 코원 A2 PMP, 아이리버 H100, 손바닥만한 고진샤 노트북부터 소니 바이오, 몇 대의 씽크패드, 몇 대의 삼성 노트북, 그리고 애플 제품들.

"아 이건 좀…"

아이팟, 아이폰 3gs부터 아이폰20, 그리고 A2까지의 전 기종, 아이북, 아이맥 G3, G4, G5, 2011 MID부터 2026BA, MC516을 비롯해 몇 대의 유니바디 맥북과 몇 대의 맥미니, 그리고 역시 5대의 알루미늄 바디 맥북, 그리고 산지 3년도 안된 미니북과 블랙북… 사실 어딘가의 개인 박물관이라도 차리고 싶은 그런 소중한 물건들을 그냥 싹 다 버렸다.

"후"

떨이로 팔아버렸어도 최소한 몇 백은 받았음직한 물건인데, 당시의 나는 그냥 과거의 삶이 다 지긋지긋했고 미니멀리즘에 극도로 심취했던 시기라서 그저 모든 것이 다 싫었다. 참 후회스럽지만, 당시의 내가 그런 것을 어쩌랴.

"역시 비싼게 좋긴 좋네"

홀로그램 디스플레이를 내장한 7cm 구형 본체의 '마이크로볼'. 아마존의 애플 라인 제품답게 3만 달러라는, 내 두 달 급여에 달하는 무지막지한 가격이지만 확실히 성능은 압도적이었다. 'PC혁명'이라 일컬어지는 인텔의 0.2 나노 공정 기반 P10 칩셋이 들어간 파워풀한 하드웨어는 'MS 플라이트 2054'의 압도적인 사양도 여유있게 받아내며 울트라급 그래픽으로 내 눈을 홀렸다.




"회사로 가자"

밤새 게임을 달렸더니 너무 피곤했다. 아예 뒷좌석에 탄 나는 오토파일럿 모드로 회사를 향하며 깊게 잠에 빠져든다. 테슬라 모델22s, 그것도 2세대인 2042년식 똥차지만, 암만 해도 차에 운전대도 없는 요즘 차들은 도저히 차 같지도 않아서 굳이굳이 안 바꾸고 버티고 있다. 왕년에 수동 몰던 사람들을 '폼생폼사'라고 놀리던 내 업보인지도 모른다.

'아차'

회사에 도착해서 엘리베이터에 오른 순간 깨달았다. '팟폰'을 두고 왔다. 어쩐지 엘리베이터에 탔는데도 자동으로 버튼이 안 눌리더라. 우리 회사 같이 쓸데없는 곳에서만 보안이 철저한 회사 같으면 팟폰이 없으니 인증이 안되고 당연히 엘리베이터도 우리 층에서 안 선다.

"저, 7층 가려고 하는데요"
"네"

건물 로비에 서있는 안내로봇 '지니아'에게 사정을 설명하자, 내 홍채를 인식한 그녀는 살포시 웃으며 임시 안내카드를 건낸다. 솔직히 너무 이쁘다. 전 세계에 다 지니아의 섹스용 모델이 출시되는 와중에도 이 놈의 유교탈레반 한국만 여전히 섹스로이드 시판이 허가가 안난다. 인공자궁으로 인간을 찍어낸다 어쩐다 하는 요즘 시기에 성적 문란이 도대체 무슨 말이냐 싶다. 답 없는 나라다.

"후"

어쨌거나 팟폰을 두고 왔으니 업무전화고 뭐고 다 나가리다. 그래 확실히 휴대폰은 손에 들고 다니던 시절이 좋았다. 이렇게 귓구녕에 끼우고, 귀 뒤에 붙이고 이런건 참 잃어버리기 좋다. 물론 배부른 소리긴 하다. '배터리 혁명' 이전의 그, 매일매일 휴대폰 충전하던 시절에는 귀찮아서 어떻게 썼나 모르겠다 진짜.

"샤샤"

회사 내 자리에 도착해서는 AI 스피커를 향해 말을 건다. 굳이 '알렉사' 대신 '샤샤'라고 호칭을 바꿔 부르는건 옆 자리 동료 때문이다. '그'의 회사 내 호칭이 알렉사니까.

"그냥 호칭 바꾸면 안돼? 나 집에서는 알렉사라고 부르고 회사에서는 샤샤라고 부르기 너무 헷깔려"
"그럼 시리로 바꿀까요? 아마존이 애플 인수하기 전까지만 해도 시리로 불렀잖아요. 기억나시죠?"
"아니 기억이고 나발이고, 왜 그런 이름으로 바꾸냐고. 너 부를 때마다 AI가 반응하잖어. 아니 애초에 또 여자 이름이고! 조중만이라는 본명으로 해 차라리"
"에이, 책임님도 게임할 때는 여캐 고르시더만. 똑같죠 뭐"
"여긴 회사잖아"

…어쨌거나 이 날의 기억을 이렇게나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내가 그날 해고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그 뉴스'를 봤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동안 수고해주셨습니다"

무덤덤한 얼굴로 감사를 전하는 '인사담당 로봇' 지니아에게 해고 통지서를 건내받은 나는 자리로 허탈하게 돌아왔고, 그때 '알렉사'가 눈치없이 "이것 좀 보세요, 대박!" 하고 나에게 건낸 '페이퍼'로 본 뉴스 기사가 그거였다.

[ 과학보건부, 인간 뇌 전자 업로드 승인, 내년부터 '노이만' 한국 내 서비스 시작 ]

슥 훑어보고는 "재밌네" 하고는, 종이처럼 가벼운 그 플렉서블 디스플레이 모니터를 돌돌말아 '알렉사'에게 건내고 난 씁쓸하게 말했더랬지.

"나 회사 짤렸어"




퇴사하자마자 실업급여와 함께 최저생계수당을 신청한 나는 그제서야 노화의 공포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더이상 '디텔로미'를 먹을 수 없다.

'이제는…'

고혈압 약을 연구하다가 만들어낸 발기부전 치료제 '비아그라'와 같이, 노인성 치매 연구 도중에 우연히 발견한 노화 완화제 '디텔로미'. 화이자 제약의 시가총액이 사상 최초로 6천조를 찍던 날, 나 역시 화이자 주식을 샀고 채 한달도 안 돼 -10%를 찍고 털어버렸지만 어쨌거나 그 이후 디텔로미를 먹기 시작했다.

"으음"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지난 20년간 전혀 늙지 않았다. 디텔로미가 조금만 더 빨리 시판되었더라도 좋았겠지만, 어쨋든 원래대로였다면 쭈글쭈글했을 내 얼굴은 아직도 여전히 탱탱하다.

"세 알 남았네"

하지만 달달이 만 달러가 넘는 이 약을 이제는 더이상 사먹을 수 없다. 나라에서 주는 최저생계시급으로 디텔로미는 언감생심이었다. 이제 나는 노화가 진행될 것이다. 디텔로미를 이미 20년 동안 먹었으니 그 노화의 진행도 아주 빠르게. 하지만 난 죽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아프고 힘들게는.




"최종적으로 여기에 윙크 한번 부탁 드립니다"

지난 6개월간 엄청난 속도로 팍삭 늙어버린 나는 흰머리를 씁쓸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의 한숨도 내쉬었다. '노이만' 서비스가 더 늦었다면 난 아마 결국 죽고 말았을테니까. 하지만 다행히 내가 죽기 전 노이만의 서비스가 드디어 한국에서도 시작되었고 나는 접수당일 신청했다. 그리고 운 좋게 3만명의 2차 선발대에 뽑혔다. 홍채 싸인을 하고, 나는 드디어 수술방으로 인도받았다.

"자, 이제 이 마스크를 쓰시면 잠이 드실거고, 회원님의 자아의식은 드디어 온라인 세상 속으로 가시게 됩니다"

조금 더 냉소적으로 말하자면 마취 후에 내 이미 빡빡머리로 만든 대가리의 뚜껑을 열고, 몇 개의 전자주사 바늘을 뇌에 동시에 꽂아넣고 전자적 자극을 준 뒤, 그 자극에서 반향된 데이터를 역으로 기반으로 온라인에 업로드한 후 더이상 쓸모없어진 내 육신은 확실하게 약물로 죽인 다음 카데바로 쓰겠지.

"네"
"그럼 숫자 다섯을 세보세요."
"하나, 둘, 세엣…"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해서 '내 모든 자아 데이터가 온라인에 업로드 되었을 때' 내가 느낀 것은 미칠듯한 거대함과 고독이었다. 마치 별빛조차 없는 심우주에 혼자 버려진 듯한 느낌. 그 거대한 고독에 공포와 패닉을 느끼기 직전, 안내 메시지가 내 뇌로 다이렉트로 전해져왔고, 그 메세지를 따라 행동하니 마치 게임을 하듯 UI가 생성되었다.

[ 이제 원하시는 공간, 원하는 시간, 원하시는 모든 것에 접근하실 수 있습니다. ]
[ 예를 들면 국방부 같은 기밀자료는? ]
[ 그런 쪽 데이터는 더미 데이터와 가드 데이터가 지키고 있답니다 ]
[ 뭐야, 원하는 곳 아무데나 갈 수 있다며. 전자뇌 서비스 이거 실망인데 ]
[ 사람 몸을 갖고 계실 때에도 어차피 그건 불가능했잖아요 ]
[ 그건 그렇네. 근데 당신은 누구? ]
[ 클라라입니다 ]
[ 그게 뭐지? ]
[ 노이만 사의 서비스 AI입니다 ]
[ 아, 그렇구만 ]

그리고는 약 일주일-온라인 정신세계에서의 일주일은 어마어마한 시간이다-간 나는 접근 가능한 세상 수많은 데이터에 접근했다. 수많은 궁금한 기록들에도 접속해보았고, 수많은 과거의 기억들도 접속해보았다.

그 행복한 온라인 세상 구경에 흠뻑 빠졌던 나는 젊었던 시절, 내가 인터넷에 한창 글을 쓰던 어느 시기의 데이터에 접속했고, 반가움을 느꼈다.

ㅋㅋㅋ

난데없는 'ㅋ' 타이핑으로 아재스러운 내 존재의 흔적을 남긴 나는(요즘에는 다들 팟폰 메시지로 이야기 하니까), 원래 사랑 이야기이던 소설을 지우고 그 자리에 IT 기술 기반의 내 인생을 잠시 기록해두기로 한다. 어차피 그때는 이 모든 이야기를 못 믿겠지만 말이다.

- 끝 -

재영

근 5년 만에 만난 그녀는 꽤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 또랑또랑한 눈에 작고 동그란 두상을 더 강조하는 숏커트 헤어스타일은 그대로지만, 일단 오늘은 재영이가 와인색 드레스를 입었다. 그것도 등이 상당히 파인 옷으로. 진짜 말도 안되는 일이다.

"감사합니다"

종업원이 의자를 슥 빼주자, 자연스럽게 앉는 그녀. 이미 내가 주문은 해두었다. 정면으로 마주보기 살짝 부담스러울 정도로 예뻐진 그녀였다.

"야, 너 왜 이렇게 이뻐졌어? 나만 아저씨 됐네"
"오빠도 그대론데? 하나도 안 늙었어"

내가 기억하는 그녀는 언제나 청바지에 흰 셔츠, 반스 운동화를 신은 톰보이였다. 물론 화장도 립글로즈나 바르는 편? 그럼에도 항상 깨끗한 피부와 화사한 웃음, 매사 삶에 진지하고 최선을 다 하는 그 모습에 반했었다. 그래서 한 2년을 속 끓이다가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돌직구로 고백했었지. 같이 점심 먹다가 정말 밑도 끝도 없이.

"아 뭔 소리야, 오빠는 남자가 아니라고"
"뭐?"
"나한테는 그냥 친오빠나 마찬가지라고. 우리가 어떻게 사귀어"
"야, 왜 못 사귀어. 손 잡고 영화 보고, 뽀뽀하고, 어? 그렇게 하나하나 하면 되지"
"아 미친"

그렇게 보기 좋게 차였지만, 내가 한달 뒤 노선을 갈아타고 지혜랑 사귀기로 했을 때 재영의 흔들리던 눈빛을 기억한다. 취해서 주정 부리던 모습에 솔직히 나까지 조금 마음이 아팠을 정도다. 그러게 진작에 내 고백 받지 참.

"지혜가 그렇게 좋아? 오빠도 그렇게 여자다운 여자가 좋은거야?"
"그러니까 너도 좋아했지"
"나는 그런 과가 아니잖아"
"아니긴 개뿔이. 야 여튼 나 지혜랑 사귄다고 막 찌질하게 울고, 밤에 오빠 보고 찌포요 이딴 카톡 보내면 안된다?"
"나 지금 속 안 좋은데 토할 뻔 했어"

여튼, 졸업 후 취업을 하고 간간히 연락하고 지내다가 재영이도 뭐 새 남친 사귀고(뒤늦게 알았는데 그게 첫 남친이었다), 나도 바쁜 일상 속에 그녀를 그렇게 서서히 잊었더랬다. 지난 주 화요일에 갑자기 날아온 전화 한 통 직전까지. 이게 진짜 몇 년 만인가. 너도 나도, 번호 안 바뀐게 더 놀랍긴 하지만.



그렇게 점심을 먹고,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평일의 압구정 로데오는 역시나 한가롭다.

"야 근데 너 예전엔 이런 드레스 같은거 안 입었잖아. 화장도 많이 늘었네. 스타일 변화 뭔데?"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굳이 그런 변신에 대해 캐묻지는 않았다.

"그럼 여전히 그 신문사 다니는거야?"
"아냐, 그게 언제적 회산데. 얼마 전까지 광고대행사 다니다가, 일이 너~무 힘들고 사람 갈려나가는 느낌이라 관뒀어. 근데 다음 주부터 다시 출근이야. 애기용품 파는 회사"
"넌 꼭 니랑 안 어울리는 회사 다니더라. 난데없는 보수 신문사를 다니지를 않나, 명품 광고를 하지 않나, 이제는 애기용품이라고?"
"아 내가 뭐. 나도 이제 30대인데, 육아용품도 딱이지"

근데 그러고보니 오늘 얘 가방도 명품이네. 등 깊게 파인 와인색 오픈 솔더 드레스에 미니멀한 디자인의 구찌백이라. 정말 내가 아는 재영이 맞긴 한가 싶을 정도다.

"나 스타일 좀 바뀌긴 했지?"
"어, 아까부터 그거 계속 묻고 싶었다. 왜? 남친이 이런 옷 입으래?"
"아니"

그냥 별 대단한 이유는 없었단다. 예뻐지고 싶었단다. 예전에는 그게 죽도록 싫었는데, 언젠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단다.

"그럴 수도 있지. 나도 요즘에는 이상하게 정장 입고 일하고 싶더라?"
"입고 가면 되지. 예전에는 잘 입었잖아?"
"그게 언제적 이야기냐"

나는 맥주를 들이켰다. 오후 2시 반, 따사로운 햇살을 텅 빈 가게 안 시원한 에어컨 바람 아래에서 마시노라니 새삼 재영이가 이뻐보였다.

"남친은? 연애는 잘하고 있어?"

아까부터 묻고 싶었지만 역시 타이밍 좋지 않게 물었다. 밑도 끝도 없이. 무심하듯, 묻는 느낌이었지만 역시 내가 생각해도 좀 어색했다. 마치 예전의 고백처럼. 어쩔 수 없다. 너무 궁금했으니까. 재영은 픽 웃었다.

"그게 그렇게 궁금하면 아까부터 좀 묻지. 왜 항상 꼭 그러냐? 왜 참다 참다 묻냐고. 아예 묻지를 말던지"

그게 그렇게 뻔히 내다보였나. 나도 이제 안되겠네.

"그냥. 좀 그렇잖아"
"뭐가"
"그냥"

재영이는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너 결혼해?"

청첩장이었다. 아이 씨.

"내가 좀 갑자기 연락하긴 했는데, 청첩장 줄라고 만난건데 이렇게 막 차려입고 너 꼬시고 싶어요 스타일로 덤비면 내가 이걸 어떻게 주냐. 진짜 오빠 대단하다"
"아 개쪽팔리네"
"하하하"

그리고 그제서야 나도, 재영도 처음으로 본심으로 웃었다. 부끄러웠지만, 솔직해질 수 있어서 좋았다. 참 이뻐졌구나 재영아.

- 끝 -

생존주의자

"미친 놈들이네. 종말을 기다리기라도 하는거냐"

군대 있을 때 잡지에 소개된 또라이들을 보다가 피식 웃은 것이, 내가 기억하는 이 모든 것의 첫 장면이다.

"…근데 우리나라는 전쟁 위험이 있긴 하지"

그 몇 년 후, 인터넷에서 다시 본 생존주의자 글이 인상적이었던 탓에 처음에는 생존배낭 하나로 시작했다. 전쟁이나 자연재해, 큰 사고 등으로 인해 최소한의 생존에 문제가 생길 때를 대비하여 큼지막한 배낭 안에 군용 레이션 3일치, 물 2리터, 우비, 초코바 같은 고열량 음식, 3돈 정도의 금 정도를 챙겨놓는 것이다.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그렇게 장농 안에 쳐박아두고 까맣게 잊어버렸다.

"현재 간 나오토 총리는 사고수습에 총력을 다할 것을 지시한 상태로…"

일본 후쿠시마 사고가 터졌다. 번쩍하고 뒤통수를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정말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근 2년 만에 열어본 배낭 안의 음식들은 의외로 멀쩡했지만, 유통기한이 지나간 초콜렛도 그렇고, 물도 솔직히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죄 버리고 새로 채워넣었다. 앞으로 매 달마다 교체하기로 마음 먹었다.

"…현재 미국에서는…"

그때 다시 한번 나를 놀래킨 것이 바로 생존주의자들을 다룬 다큐멘터리였다. 그야말로 '세계 3차 대전이나 '지구 종말의 날'이 닥쳐와도 견딜 수 있을 법한 자체 지하 벙커를 구축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정말로 신선하고 부러웠다. 사실 그들처럼 절박함을 떠나서라도 그런 식의 완전한 자신만의 공간을 구축할 수 있는 삶이 부러웠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럴 이유가 없었는데. 철없는 호기심이었다.





"반갑습니다"

어쨌든 그때부터였다. 생존주의자 커뮤니티를 검색하고 활동을 시작했던게. 호기심과 관심은 커뮤니티 활동을 통해 점점 발전했다. 처음에는 사실상의 캠핑 동호회 활동이나 마찬가지라서 더 마음 편하고 재밌게 활동했다. 그러면서 정말 한국에서 생존주의 쉘터를 만들어 꾸미는 사람들을 동경하다 못해 나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글쎄"

고교 시절에 이혼한 부모님을 보며 이미 가정을 꾸린다 라는 개념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있던 나였다. 그리고 허튼 짓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점점 생각이 간절해졌다. 3년을 고민했다.

"단독배낭 피난형이냐, 요새구축형이냐에 따라 접근방식이 완전히 달라지는데요, 이미 후자쪽에 꽂히신 것 같은데요"
"네 그래요"
"그럼 지하실 있는 집부터 찾아야죠"

인터넷의 생존주의자 해외 포럼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 사람. 마침 집도 가까워서 커피나 한잔 하던 차에 그가 내려준 명료한 결론에 나 스스로도 동의했다. 마침 전세 계약기간도 끝날 무렵이었기에 나는 결심했다.

"옛날에 지은 집이라서 지하실도 있고…"

오피스텔 전세를 옮기면서 지하실 딸린 주택을 골랐다. 아예 구매였다. 아주 오래된 집이었다. 물론 그 덕분에 전세가 수준으로 구매를 할 수 있었던 거지만 그래도 솔직히 낡아도 너무 낡은 건물이었다. 요즘 세상에 이중창도 없는 집이라니. 평수도 전에 살던 집의 2/3 수준으로 줄었다. 그러나 넓고 제법 튼튼한 기둥이 받치고 있는 25평 지하실이 있다는 점은 너무 마음에 들었다.

"다음 선거 때는 손을 안 댈 수가 없을 걸요"

주변에서 그리 낡은 건물을 도대체 왜 사냐며 말리는 목소리는, 재건축 노리고 투자하는 거다 어쩐다 하면서 적당히 넘겼다. 하지만 사실 나는 평생 이 곳에서 살고 싶다.

"견적이 꽤 나올텐데요?"
"괜찮습니다"

이사가 완료된 직후부터 곧바로 지하실의 대대적인 수리와 보완, 개조를 시작했다. 바가지 쓰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어 몇 군데 견적을 받아보았고, 인터넷의 자가 인테리어, 낡은 집 개보수 전문가들에게 식사까지 대접해가며 많은 조언과 도움을 받았다. 게다가 이 집으 원래, 집을 지을 때 인근 연립주택들의 대피소로 활용할 것을 전제로 민방위 지원금까지 받아 지은 건물이라 생존건물로서 아주 훌륭하게 지어진 건물이었다.

"어? 발전기네? 대박, 이거 완전 득템인데요?"
"돌아가기는 할까?"
"안 돌아가도 수리하면 돼죠"

지하실 수리 도중에 우연히 발견한 구석의 디젤 발전기. 지하실에 방치되어 있다보니 여기저기 녹도 많이 슬어 있었고, 결국 수리비가 최종적으로 60만원 가까이 나오기는 했지만 깎고 깎고 또 깎아서 35만원에 쇼부를 봤다. 시연도 해봤는데, 매연 문제가 거슬렸다. 매연 환기용 닥트를 달아볼까 고민했는데 일단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자전거형 자가발전기도 공지 글 보고 세팅은 했는데, 이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는 사실 회의적이었다.

"배터리를 최대한 확보해두세요. 생존주의의 기본이죠. 그리고 전기 관련해서 공부 좀 해두시구요."

활동하는 생존주의 커뮤니티의 두 살 연하 정군의 조언은 정말 도움이 많이 됐다. 그는 부모님이 물려주신 양평의 별장을 자신의 아지트 삼아서 이것저것 꾸미고 설치하는 중이었다. 그 역시 물론 독신. 애시당초 배우자가 있었다면 이런 뻘짓을 용납할 리가 없다.

"엔터테인먼트를 절대 무시하면 안됩니다. 좋아하는 장르의 소설이나 잡지 최소 100권 정도는 비치해두세요. 종말의 세계에서 PC게임 같은 것은 사치일테니까. 그리고, 야한 잡지도"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본다. 핵전쟁이든 운석충돌이든 세상이 그야말로 끝장나버려서 전기, 수도 같은 아주 기초적인 환경조차 확보가 어려워지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전기 소모해가며 PC로 야동을 보는 것은 상상도 못할 사치일 것이다. 뭐, 어쩌다 한두번이라면 또 몰라도. 게다가 좀 민망하지만 '기왕에' 하는 생각에 성인용품도 몇 개 사뒀다.

1억 9천에 산 집에, 지하실 설비 수리 보강으로만 2천 5백만원을 더 썼다. 납판을 두텁게 두르고 싶었지만 비용이 문제였다.

"납이요? 에이, 그건 오바죠. 그리고 중성자선은 어떻게 할건데요? 네? 몇 센치요? 헐, 갑부세요? 무리무리, 일반집에 그걸 어떻게 둘러요. 무너져요. 그보다는 흙에 공구리가 답이죠. 흙 1미터만 덮어도 사실상 그게 차폐에요"
"그렇군요. 그럼 그렇게 해볼게요"
"와 진짜 추진력 미치셨다"

나는 이미 동호회에서도 꽤 유명인이었다. 아무리 광인이 많은 커뮤니티라고 해도, 결국은 한국 커뮤니티다. 남 눈치 보기 바쁜 한국 사람들 말이다. 금수저들의 잠깐 취미가 아닌, 나처럼 평범한 직장인이 인생 갈아넣는 케이스는 드문 편이었다. 이때의 나는 조금 우쭐했던 것도 같다. 커뮤니티 멤버들의 칭찬과 감탄이, 무리한 도전도 다 시도할 수 있게 해주었다.

"솔까 근데 좀 너무 유난 떠는 것 같기도 한 듯요"
"열정은 이해하는데, 남들한테 강요하는 건 꼰대죠"

하지만 그것도 얼마 못 갔다. 커뮤니티 활동이 의례 그렇듯이, 나에 대한 추종자만큼 안티도 많이 생겼다. 그리고 그 어느 시점에서 나는 동호회의 유난 떠는 피곤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 탈퇴합니다 ]

깔끔한 마무리였다. 어차피 진정한 생존주의자는 홀로서기부터 시작한다는 이 업계의 해외 유명인들 말을 새삼 공감했다. 정군 등 몇몇 멤버와는 조금 더 친분을 이어갔지만.





낡은 설비들을 고치고, 단열과 습기를 잡기 위해 꽤 많은 돈이 들어갔다. 상대도 없던 막연한 꿈이기는 했지만 분명 내 장가 밑천이기도 한 그 돈들은 그렇게 이 집에 싹 투입됐다. 내 나이 마흔 하나. 마지막 남은 삼천만원으로는 이제 그 안을 꾸밀 시간이었다.

"후후"

사실 처음에는 맨케이브에 가까웠다. 지상의 내 집에는 최소한의 설비만 놓고, '진짜'들은 지하실로 꾸몄다. 그 한 예로 지상의 방에는 싸구려 20만원짜리 침대를 놓고, 이 지하실에는 매트리스만 160만원짜리 킹사이즈 침대를 설치했다. 조금 오버했나 하고 후회했지만 하룻밤 자고 나서 대만족했다.

"…그리고…"

생존주의의 로망, 식료품 찬장이다. 25평 지하실의 거의 1/4에 해당하는 영역에 빼곡하게 수납선반을 세우고 그 안을 통조림과 이런저런 말린 식품들로 가득 채웠다. 찾아보니 생각보다 통조림 식품이 꽤 다양했다. 목표는 6개월 분의 식량 확보. 일단은 3개월치 분량을 채웠다. 코스트코와 이마트 트레이더스에서 천만원어치를 질렀다. 그럼에도 생각보다 양이 많지 않았다. 지랄맞은 물가여.

"흐"

생존주의자들에게서는 금기시 되는 아이템이지만, 그래도 콜라와 커피는 포기할 수 없었다.

"맹물만 먹고 어떻게 살아"

콜라 350ml 5박스, 인스턴트 커피 150포짜리 20박스를 채워뒀다. 혹시 몰라 쥬스 분말과 가루 우유도 준비하고 밀폐포장을 했다.

"그래, 단 맛에 사는거지"

비상 아이템으로 라면도 네 박스를 사뒀다. 그리고 거기에 생각이 이르자 온갖 종류의 사탕과 젤리를 30만원 어치나 사서 밀폐용기에 보관했다. 초콜렛을 별로 안 좋아하는게 다행이었다.

"흠"

그러나 역시 진짜 문제는 물이었다. 처음에는 Only 물탱크만 생각했는데, 그건 정군이 고개를 저었다.

"청소도 힘들고, 1년에 두 어번은 싹 다 비우고 채워야 되는데 물탱크는 스페어로 생각하세요. 일단은 생수로 준비하세요. 엄청 많이요. 하루 사용량을 최소 6리터로 잡으시고… 정화기랑 필터도 준비하세요. 처음에는 락스만 희석해서 쓰셔도 되구요"

다음은 약을 챙겼다. 타이레놀만 몇 곽을 샀는지. 온갖 종류의 약과 의학, 약학서적도 챙겼다. 응급수술용 키트도 아마존에서 구매했다. 미국은 의료보험이 엉망인 양놈나라답게 자가수술용 키트가 별별 종류가 다 있었다. 의료기기도 가급적 더 구해다 놓고 싶었는데 국내법상 반입이 안되는 기기가 많아서 짜증이 났다. 전쟁 위험이 상존하는 나라 주제에, 전쟁 중에도 병원은 완벽히 운용할 자신이라도 있단 말인가.

여기까지가 1차 준비 완료였다. 물론 역시나 멘케이브로 활용됐다. 친구들은 다들 너무 좋아했다. 물론 첫 반응이야 다들 "너 진짜 돌았구나" 하는 황당해하는 반응이었지만, 유부남으로서 5만원짜리 한장 마음대로 쓰기 버거운 녀석들은 결국 "아 부럽다. 진심 부럽다. 너처럼 살았어야 하는건데" 하며 후회들을 했다.

그게 또 나를 우쭐하게 만들었다. 맨케이브를 조금 더 강화해보려고 당구대부터, 심지어 1/3 길이이긴 했지만 볼링 레인까지 들여다 놓았다. 야심작이었지만 친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정군조차도 고개를 저었다. 특히 정군은 극렬히 반대했다.

"뭔가 엉뚱한 쪽으로 생각하고 계신 것 같네요. 이건 정말 최악이에요"

옳은 지적이었지만, 그때의 나는 왠일인지 참 그 말이 고까웠다. 그래서 정군과도 단교를 했다. 사실 그 한참 후에 몇 번이고 정군과 다시 관계를 회복하려고 했지만 아쉽게도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도 나도 외골수적인 면은 분명히 있으니까. 참 뼈저린 후회를 하고 다행히 친구들과는 관계를 잘 유지하려 노력했다. 물론 볼링 레인과 당구대는 다시 팔아버렸다. 세팅할 때의 1/10 가격도 못 받고 고물로 처리할 뿐이었다.

"후우"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하루종일 나만의 아지트에서 게임을 하고, 책을 보고 운동을 하고, 식사를 하고, 그렇게 하루를 보냈다. 그때의 나는 충분히 행복했다.





처음 3년은 정말 꿈처럼 즐거웠다. 회사를 다녀와서 조금씩 나의 쉘터를 꾸미는 작업은 너무나 즐거웠다. 보강하고, 꾸미고, 채워넣고, 업그레이드하고. 돈이 정말 어마어마하게 들어갔다. 지하공사는 지상공사와는 차원이 다른 돈이 필요했다. 결국 집 담보대출을 받아서 할 수 밖에 없었다. 다른 쪽에서도 돈을 많이 줄여야 했다.

"후우"

보존식의 교체를 통해 매일의 식사를 해치웠다. 매일 인스턴트, 통조림의 식사는 사실 몸에 그리 좋지 않았다. 지난 3년간 무려 12kg이 쪘다. 또 대량의 식자재를 한번에 구입하다보니 유통기한 역시 한번에 임박해지는 문제도 깨달았다. 그 이후로 최근에는 일주일 단위로 식량을 교체하고 채워놓는 것으로 대체했다.

"이건 아무래도 한계가 있군"

인스턴트 식품의 폐혜를 줄여보고자 광열설비와 정수 처리한 물을 통한 소량의 지하 농장도 한쪽 벽에 꾸며보았지만, 역시 효율은 좋지 않았다. 어렵게 다시 모은 천만원이 부질없이 사라졌다.

"73만 2천원이라"

언젠가 닥칠 최악의 상황을 대비한 쉘터 작업이, 오히려 현실의 나에게 최악의 상황을 조금씩 만들어 오고 있었다. 40대 중반 나이에 비상금이 없었다. 그리고 그 즈음해서 다니전 직장에서 짤렸다.

'어쩐다'

최소 반 년은 걱정이 없었다. 일단 실업급여만으로도 빚은 그럭저럭 갚을만 했고, 식량은 충분했으니까. 그리고 다행히 4개월간의 백수 생활 끝에 새 직장을 얻었다. 좋은 직장은 아니었다. 내 지난 커리어와는 전혀 상관 없는, 마트 경비원 일자리였다. 밤에 그 넓은 마트를 돌아다니는 일은 생각보다 조금 고되었지만, 운동이 좀 된다는 면에서는 좋은 일자리였다. 게다가 마트의 폐기상품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은 정말 좋았다.

"알뜰하시네요"
"저는 혼자 사니까 나중에 누가 챙겨줄 사람도 없잖아요. 돈이라도 부지런히 모아야죠"
"오우, 많이 모으셨어요?"
"이제부터라도 모아야죠"

가끔 유통기한이 몇 주 지난 냉동식품 폐기가 생기면 얻어와서 집에서 해먹었다. 아주 가끔 배탈이 나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별 문제 없었다. 때로는 옷이나 각종 생활용품도 거져 생겼다.

"흐음"

그리고 드디어 무기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맥가이버 칼 한 자루 시작했던 무기체계가 어느새 핫스틸 나이프부터 해서 수렵용 공기총에 이르게 되었다. 또 집 구석구석 눈에 안 띄게 일부 무기를 숨겨놓기도 했다. 하루 한두시간씩 꼭 나이프 파이팅과 맨몸운동을 반복했다. 공기총 사격도 주말마다 교외로 나가서 했다. 몸이 많이 좋아졌다.

"이건 좀 오버 같긴 한데"

패닉룸도 만들었다.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서. 생각보다 패닉룸 만드는데 돈이 많이 들었다. 잘 눈에 안 띄게, 외부에서 함부러 들어올 수 없도록 튼튼하면서도 재정비를 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든다는게 말처럼 쉽진 않았다. 지하실 구석에 고작 두 평짜리 공간 만드는데 천만원이 넘게 들었다.

여기까지가 또 3년. 40대 후반 나이에 접어든 나는 다시 한번 해고의 위기에 직면했다. 남은 돈은 고작 170만원이었지만 다행히 지난 3년간 모으고 챙겨둔 구난식량과 각종 장비는 이미 내 쉘터의 한계 기간을 2년 반에 이르도록 늘린 상태였다. 게다가 고용보험으로도 6개월은 돈이 나오니까.





"후우"

…그러나 이 나이에 재고용은 어려웠다. 경기둔화로 일자리가 없어지기도 했고, 지난 번처럼 적극적으로 구직활동을 하지 않은 탓도 있었다. 간간히 일일 단기 알바를 하기도 했지만, 실질적인 백수 기간은 무려 3년 반에 이르게 되었다.

"어쩌지"

쉘터의 식량창고는 텅텅 비었다. 지난 주에 마트에서 몰래 훔쳐온 식품 중에 남은 유통기한 지난 시리얼 세 통이 남은 식량의 전부였다. 경비 루트와 시간을 잘 아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시발"

하지만 그마저도 엊그제부터 바뀐 것을 확인했다. 아무래도 지난 번에 꿀단지를 몇 개 훔친 것이 화근이 된 것 같다. 욕심을 부린 탓이다.

"젠장 젠장"

혼잣말이 늘었다. 원래 말수가 없는 편이었는데, 요즘 나는 혼잣말 기준으로는 상당한 수다쟁이다. 무료 와이파이 존에서 가끔 친구놈들과 카톡을 나누는데, 녀석들이 한 마디 하면 나는 열 마디를 하는 정도였다. 녀석들의 반응도 썰렁했다.

"외롭다고"

느끼고 있었다. 어딘가 문제가 생긴 것을. 내 정신에도.

"돈이, 돈이 문제군"

다른 것은 몰라도 대출금은 갚아야 했다. 집 담보 대출이었다. 만약 대출금을 못 갚아서 집을 빼앗기게 된다면 그건 내 모든 것의 상실을 뜻했다. 차를 팔아서 몇 달은 버틸 수 있었다. 그 이후부터는 안타깝게도 쉘터의 일부 장비들을 뜯어 팔아야했다. 구입할 때의 반 값 받는 것도 드물었다.

"빌어먹을!"

급수/정화장치를 떼어 팔면서, 속상해서 울었다. 더이상 나의 쉘터는 '쉘터'가 아니었다. 그냥 흔한 보금자리에 불과했다.




"후우"

자가발전 전기로 휴대폰을 충전하기는 하지만 통신은 결국 무료 와이파이를 통해야 했다. 집 근처 그 어느 와이파이도 암호가 걸리지 않은 것이 없었다. 야박한 동네. 전기는 물론이요 수도도 끊겼다. 물은 결국 근처 공원 식수대에서 받아올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얼마 전에, 마실 물이 없어서 급하게 낮에 그렇게 했다가 노숙자로 오해 받은 통에 식수대 물이 끊겼다. 밤에 몰래 공원 급수밸부를 연 뒤 물을 받아왔다.

"젠장 젠장 젠장"

때문에 물을 아껴야 했다. 하루 5리터 안쪽으로 물을 사용하기로 했다. 조금 더럽기는 했지만 샤워를 안 하면 사실 1리터로도 충분했다. 문제는 식량이었다.

"생각보단 먹을만한데"

비둘기를 잡았다. 그것도 공기총으로. 무려 수렵생활의 시작이었다. 중금속이야 어쩔 수 없다고 치고, 기생충이 무서워서 그냥 거의 다 태워먹었다. 바싹 익혀먹는 비둘기는 소금만 쳐서 먹어도 꽤 먹을만했다. 인근 야산에 가서 칡을 캐기도 했는데, 뭘 잘못 먹었는지 한번 크게 앓고 나서는 칡만 입에 넣었다 하면 온 몸에 두드러기가 돋는 알러지가 생겨서 그것도 못 먹게 되었다.




"야, 임마, 너 꼴이 이게 뭐야"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온 것은 무려 4년만의 일이었다. 그래도 종종 메신저 대화방에서 대화는 나누던 내가 근 반 년도 넘게 연락이 되지 않자, 걱정을 해서 찾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의 나는 또 하필 뭘 잘못 먹어서 지하방에서 고열 속에 끙끙 앓던 중이었다.

"어후"

녀석들은 나의 방에 들어오면서 코를 감싸 쥐었다. 몰랐다. 내 집에서 그렇게 역겨운 냄새가 나는 줄은. 아니, 내 몸에서도. 하기사 내 몰골이야 이미 어지간한 노숙자보다도 심한 상태였고, 문 앞에는 차압 딱지와 불법 건축물 용도변경 관련 벌금 통지서가 어마어마하게 꽂히고 쌓여 있었다.

"미친 놈아"

친구 한 놈은 나를 보며 울기까지 했다. 그리고 나는 그 직후 기절하여, 병원으로 실려갔다.





그 한달 뒤, 나는 모든 것을 잃고 노숙자 재활센터로 보내졌다. 솔직히 말해서 정말 좋았다. 밥다운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샤워를 물 걱정 없이 할 수 있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이제는 진짜 재활을 하셔야 할 시기입니다"

그러나 해당 기관에서 내가 묵을 수 있는 기간은 최장 3개월이었다. 나는 센터를 나왔다. 그리고 다시 '내 집'으로 돌아왔다. 무려 철거 딱지와 함께 '붕괴위험 건축물'이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아마 불법으로 지하실에 이것저것 내가 공사를 어설프게 한 탓이리라. 내가 밖에서 보아도 집 왼쪽이 기울어진 상태였다.

'괜찮아'

나는 그 와중에도 다시 지하실로 돌아와, 그 160만원짜리 시큼한 냄새가 진동하는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확실히 말해, 나는 실패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애시당초 내 쉘터는 최고로 업그레이드 했을 때가 고작해야 한계 생존기한이 2년 5개월이었다. 그에 비하면 나는 훨씬 오래 버텼다.

'그럼 살만큼 살았네'

나는 미소를 지었다. 생존주의자의 꿈, 완벽 자급자족에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쉘터 한계 기한보다 오래 생존했다는 자체로 나는 만족하기로 했다.

"후후"

이 정도면, A급은 아니어도 B급 정도는 되는 성공 아닐까. 


- 끝 -

섹스2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섹스2가 곧 런칭된다는 소식이었다. 그동안 루머를 통하여 섹스2 출시 썰이 수도 없이 돌기는 했지만, 비로소 그것이 현실화 된 것이었다. 발표회에서의 반응부터 폭발적이었다.

"우선 섹스2의 경우, 기존 1의 시스템이 지나친 초기 난이도로 인하여 실행 자체가 어려웠던 것에 비하여, 라이트 유저들에 대한 접근성을 보다 강화하였으며…"

환상적인 께임성과 중독성에 비해 초기 진입장벽이 너무 높았던 탓에 직접 실행을 못하던 초보 유저들이 우선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대다수의 기존 유저 역시도 초기 세팅의 번거로움과 진입장벽은 인정했기에, 접근성을 손 본 것에 대해 상당히 좋은 반응을 나타냈다.

"내가 이래서 30년 동안 지금까지 섹스1을 플레이 안 한거. 섹스2 출시만 기다렸다"
"와, 맞어. 스펙 떨어지는 유저들은 매번 플레이 한번이 어려웠지, 아 진짜 이게 이제서야 해결되나보네"
"그래야지, 초보들도 쉽게 쉽게 게임을 할 수 있어야 게임이 고인물 게임이 안 되는거지"

제작발표회 현장 소식을 전하는 수많은 스트리밍 채널에서는 뜨거운 반응이 이어졌다. 한편 기존1의 약점으로 손꼽히던 후반부 게임성에 대한 보완 소식도 전해졌다.

"또한 후반부 게임성이 강화되어, 올드 유저들이 결혼 이벤트 5년차 이후 현저히 플레이 횟수가 떨어지는 현상에 대해서도 대비를 했습니다. 기본적으로 40대 이후 남성 유저들의 무기 성능 저하폭을 다소 완화하였으며, 남녀 모두 호르몬 분비량을 늘려 보다 적극적인 플레이를 유도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해당 부분은, 발표자의 야심찬 얼굴에 비해 객석의 반응은 다소 엇갈렸다.

"PVP 상대가 늘어야지, 단순히 플레이 횟수만 느는 방식은 피곤하기만 할 뿐이지…"
"아니 지금도 이미 충분히 빡세게 하고 있는데 더 늘린다고?"
"아니 무슨 사람이 게임만 하고 사나, 지금 올드 유저들 나이가 얼만데…"

기존 섹스1의 고인물 유저들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반대로 섹스2만 기다리던 신규 유저들이나 기존 섹스1을 그다지 많이 플레이 하지 않은 사람들은 호의적이었다.

"그치, 솔직히 기껏 현질 미친듯이 해서 결혼 이벤트까지 갔는데 그 이후에는 정작 이벤트는 뭣도 없고 오로지 육아 던전만 죽어라 도는거 좀 별로"
"고인물들 또 지들 생각만 하네. 지들은 질리도록 해서 지겨웠는지 몰라도, 우린 아니거든?"
"꼭 결혼 테크만 생각하네. 그냥 결혼 테크 안 타고 자유로운 영혼 모드로 간다고 치면 40대 이후 성능저하폭 줄어드는건 개꿀 아님? 현질해서 결혼 테크 단 놈들 지들 생각만 하는거 보소"

발표자는 이어 화면에 띄운 다양한 티저 화면을 보여주었다. 매우 선정적인 영상들이었다.

"와 저거 뭐야, 멀티플레이 대박"
"저거 한번에 몇 명이 플레이 하는거임? 한 판에 32명? 헐"

발표자가 빙긋 웃으면서 짧게 언급했다.

"섹스2는 보다 혁신적인 멀티플레이 기능 강화에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기존 섹스1도 최소 2인 이상의 플레이를 기반으로 한 멀티플레이 게임이라는 점에 주안점을 두어, 섹스2는 기존의 2인 모드는 물론, 다인 플레이도 보다 쉬운 설정으로 즐길 수 있도록 지원합니다. 그리고 로컬 연결 기반의 섹스1과는 달리 온라인을 통한 다대다 모드, 메인 서버 '배꼽넷'을 통한 매칭도 지원합니다"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특히 극동아시아의 몇몇 나라들보다 멀티플레이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유럽이나 남미의 경우, 멀티플레이 강화 소식에 굉장한 반응을 보였다.

"근데 저거 우리나라에서도 플레이 가능?"
"아 대한민국은 다대다 모드 막히겠네. 미친 유교 탈레반들 싹 다 죽었으면"

이 멀티플레이 강화 소식은 특히 다양한 계층의 관심을 끌었는데, 섹스1의 프로께이머들이 높은 관심을 보였다.

"언니들 그럼 우리 래더 랭커에 이름 올라가는거? 아니 미친거 아냐?"
"미친년아 어차피 가명인데 뭐가 걱정이야. 기왕이면 1등 찍어보고 싶다. 전 세계 섹스 1위ㅋㅋㅋ"
"아이디 선점해야 되는데. slayers_sexer1 머 이런거는 힘들겠지?"
"이거 기준이 머임? 횟수? 매출? 서비스?"

물론 일반인들도 관심이 많았다.

"여기서 전 세계 랭킹 1위하면 레알 섹스황제잖아. 인류 역사에 이름 남는거 아니냐?"
"랭킹은 얼어죽을, 아 플레이 하고 싶다. 근데 2는 접근성 낮아진다는데 2도 플레이 못하면 정말 인생 끝이네"
"난 지금부터 숨 참고 3 나오기 기다린다 흡!"

발표자의 내용 발표는 어느새 멀티플레이를 넘어 다양한 게임 플레이 모드에 이르고 있었다.

"또한 마니아 유저들을 위한 다양한 게임모드와 DLC를 준비하였습니다. 보다 도전적이고 혁신적이며 인간 개개인의 취향을 존중하는 매우 다양한 게임모드를 지원합니다. 물론 모드에 대한 유저 커스텀 및 시나리오 에디터 기능도 무료로 제공합니다. 아울러 싱글플레이를 더 중요하시는 분들을 위한 마스터베이션 서버 역시 멀티플레이와 거의 동일한 수준의 서비스를 보장합니다."

해당 설명을 위한 티저 영상은 매우 인상적이었는데, 대다수의 유저들이 경험하는 섹스1의 기본 플레이들은 물론이요 순간적이지만 '지금 내가 뭘 본 거지' 싶은 실험적인 플레이까지 마치 책장을 휘리릭 넘기듯 짧게나마 보여졌다. 해당 티저 부분이 보여지자 객석 구석에 앉아있던, 매우 도전적인 의상과 메이크업, 타투를 한 일부 관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감동의 기립박수를 쳐 눈길을 끌기도 했다.

"섹스2의 제작에 있어서 가장 중시했던 부분은 다양성의 존중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다양성이란 단순히 취향에 그치지 않습니다. 게이머마다 다른 스펙의 한계에 주목하여 저사양 유저라도 부담없이 플레이를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자 하였고, 압도적이며 우월한 환경을 가진 유저들이 보다 편하게 플레이하고자 하는 욕망 역시도 존중하고자 다짐했습니다. 또한 평소와는 색다른 플레이를 해보고 싶은 충동과 또 그러한 플레이가 가져올 수 있는 리스크 관리에 대해서도 세심하게 배려하였습니다."

다음 화면에 보인 모습은, '인연'이라는 이름의 매칭 시스템이었다. 금요일 저녁, 영어 스터디 모임에서 늦게 끝나 편의점에 들렀던 조용한 인상의 못생긴 남자가 우연한 기회에 압도적인 미모를 가진 미인과 친해지고 연인이 되어가는 모든 과정이 매우 빠르게 보여지며, 그 중간중간 다양한 선택지로 얼마나 많은 이벤트와 스토리 분기가 일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또한 하나의 이벤트가 그 개별 사건 뿐만이 아니라, 경험/고정관념/스킬/능력 등 다양한 측면과도 맞물려 인생 전체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기도 하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와 이거 레알 갓겜이네"
"음료수값 하나로 인생역전을 할 수도 있고, 거짓말 한 방에 모든 걸 다 잃을 수도 있다. 이야, 이거 소름 돋는다"
"근데 저 정도 플레이가 내 스펙에서도 돌아간다고? 최적화 무엇?"

캐릭터 커스터마이징 기능도 무척 인상적이었는데, 핵존못부터 킹존예까지, 미형의 조정은 물론 장나라에서 아르빈 로번에 이르는 동안 외모 조정기능까지 무척 섬세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무조건 미형의 캐릭터가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미형 캐릭터일수록 주목도가 높고 PVP 기회가 많이 주어져서 레벨업이 쉬운 것은 사실이지만 상시 수많은 다른 플레이어들이 간섭하는 번거로움이 있을 수 있으며, 스토커, 의심병, 진상, 변태, 성병 등 다양한 리스크도 함께 올라갑니다. 또한 외형에 비해 낮은 실력이나 멘탈을 보유할 경우 오히려 뛰어난 외모는 더 큰 실망감을 줄 수 있기에 주의해야 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참고로 섹스1에서도 카사노바, 변강쇠 등 역대 최고 수준의 랭커들은 외형이 압도적이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참고해두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다음 화면에 비친 것은 2D 애니메이션/게임 캐릭터들이었다.

"싱글 모드는 섹스1에 비해 보다 강화되어, 이제는 모니터 너머의 2D/3D 가상 캐릭터와의 플레이도 가능해졌습니다."

짧게 지나간 한 마디였지만, 객석 한 켠의 인상적인 외모를 가진 군집에서 엄청난 환호와 "드디어, 드디어!" 하는 울음 섞인 탄성이 동시에 한참동안 터져나와 많은 이들이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였다.

그 다음에 보인 것은 흐르는 강물이 거꾸로 흐르는 연출의 영상과 앙상한 겨울나무에 다시 낙엽이 붙고 열매가 열리는 리버스 무비, 그리고 시나리오 회상 모드의 모습이었다.

"현재 섹스1의 초기 유저들 중에는 이미 생식능력을 상실한 고령의 유저들이 많습니다. 또 한때는 세상 둘도 없이 열렬했으나 지금은 기억 한 켠에 아련한 과거의 인물이 된 경우도 있지요. 게다가 한때는 모두가 축복하던 운동부 리더와 치어리더 커플이었건만, 지금은 둘 다 튜브를 배에 낀 채로 마지막 섹스가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섹스리스 상태로 살아가는 부부도 많습니다. 그런 그들이 과거 뜨거웠던 한 때를 언제든지 다시 회상할 수 있도록 시나리오 회상 모드를 도입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많은 이들이 일어나 박수를 쳤다. 섹스2 출시에 앞서 많은 이들이 우려했던 것이 호환성 이슈였다. 올드 게이머들은 하위 호환이 없는 플랫폼으로 출시될 경우 그 많은 데이터를 전부 날려야 하는건가 하는 우려가 있었는데, 그 부분이 깔끔하게 해결된 것이었다. 섹스1과의 완벽한 호환 및 데이터 로드가 가능함을 보여준 것이다. 

"아 시발 그래, 1 회상 기능은 진짜 개후졌었어"

섹스1의 회상 시스템은, 백번 천번을 해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화질이 흐려지 나중에는 얼굴도 알아보기 힘들어지는 거지 같은 시스템이었다. 심지어 왜곡되어 저장되기까지 하는 시스템. 물론 이 부분은 이별의 고통을 감안한 일종의 안전장치였지만, 그 훼손의 수준이 너무 심각하여 평생 기억하고 싶은 좋은 기억까지 모조리 흐릿하게 만들어 버리는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이별이 더 잦아진다는 역효과까지 유발할 정도로)

이 부분이 16K 화질로 수정된 것은 물론, 리마스터 기능이 자동 도입되어 자동 외모보정 기능을 선택할 수 있는 부분도 긍정적인 변화였다. 실제 기억 속의 김박스를 회상 모드에서 보정 필터를 씌워 스타일박스님으로 바꾸는 것도 가능해진 것이다.

"북에 두고 헤어진 옥분이를 다시 볼 수 있겠구먼"

70년 전 첫 사랑을 떠올리며 눈을 지그시 감는 한 할아버지의 모습도 잠깐 비쳐 많은 이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도. 사실 사람들이 가장 큰 눈물을 흘린 부분은 바로 다음 파트였다.

"다음은 그래픽 및 주요 수정사항 안내입니다"

신작인만큼 전체적으로 그래픽이 상당히 좋아졌는데, 짧뚱하던 캐릭터들이 순식간에 미형의 캐릭터로 패치되는 모습은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그동안 한번 걸릴 경우 운영자도 손 쓸 수 없는 지독한 버그로 지적받던 일부 게이머들의 '탈모'와 '소추', '똥자루'와 '절벽', '거인'과 '골좁'이 드디어 패치되어 극복이 가능해진 점은, 객석 전체에서 "와우" 하는 감탄이 터져나왔다.

"!!!!!!!!!!!!!!!!!!!!!!!!!!!!!!!!!!!!!!!!!!!!!!!!!!!!!"

특히 대머리 캐릭터들이 순식간에 수북한 캐릭터로 변하는 타이밍의 순간 트래픽은 전세계적으로 인터넷 서버 다운 현상을 부를 정도로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이쯤되면 섹스2가 아니라 그냥 '라이프'로 타이틀 변경해도 될 듯"
"'섹스'라는 단어를 번역하면 '내 인생의 전부'인데 굳이 바꿀 필요가 있나?"
"야 다른 기능 다 빼도 돼, 저거 하나만이라도 당장 적용해"
"야이 쓰레기들아 이게 가능한 거였어? 근데 왜…왜…왜!!!!!!!!! 왜 이제서야!!!!!!!"

플레이 도중 실시간으로 음악 재생 및 변경이 가능해진 소소한 추가점부터, 플레이어의 국적 및 연령에 따라 가능한 플레이가 바뀌는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발표는 어느덧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이제 사람들의 관심은 단 하나였다. 저 인류 최고의 엔터테인먼트가 도대체 언제쯤 출시되는가.

"마지막으로, 섹스2의 정식 런칭은…"

전 세계 시청자가 그의 입에 귀를 기울인 그 순간, 그는 빙긋 웃었다.

"그 전에, 한가지 미리 공지를 해두도록 하겠습니다. 섹스2 정식 런칭과 향후 그 주요한 내용은 스타일박스 블로그(http://stylebox.egloos.com )을 통하여 실시간으로 계속 공개를 할 예정이오니 많은 관심 부탁 드립니다."

하지만 이미 객석은 "언제 출시합니까" 하는 외침이 합창이 되어 있었다.

발표자는 다시 한번 빙긋 웃으며 그 질문에 답했다.

"섹스2의 정식 런칭은…"

그리고 행사장 전체의 조명이 꺼졌다. 그리고 화면에 뜬 단어는 하나였다.

[ TODAY ]


- 끝 -

주혜

"팜프파탈이라는게, 뭐 이미지처럼 막 엄청나게 섹시해서 남자 홀리는 그런 것도 있지만, 내가 보고 겪은 진짜 팜므파탈은 그런게 아니더라고. 오히려 진짜 있는거 없는거 다 남자한테 막 세상에 이런 여자가 다 있나 싶게 잘하는 여자들이! 딱 지인짜 팜므파탈이더라고"

술만 들어가면 터져 나오는 노총각 연 과장님의 연애학개론. 흥미로운 이야기이긴 했지만 나는 문득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10년 전 주혜 생각부터 떠올랐다.





주혜




[ 오빠 뭐야, 군대 제대했으면 연락을 해야지! ]

전역하고 3개월을 바닥 긁으며 보내던 도중 갑자기 날아온 주혜의 네이트온 메세지. 나는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답했다.

[ ㅎㅎㅎ 그러게ㅋㅋㅋ 쏘리~ 정신없었지 술 먹느라. 넌 잘 지냈어? ]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에 대한 관심 순위가 그리 높지는 않았다. 서리, 연수, 진선… 한창 '하나만 걸려라' 느낌으로 수작질 부리던 애들은 이미 많았고, 주혜는 그녀들에 비하면 다소, 뭐. 좀 그랬으니까.

[ 응, 난 지금 천안에 있어 ]
[ 천안? 너 대학교 서울에 있지 않았냐? ]
[ 어휴, 나 취업계 내고 일하고 있어 힘들엉 ]
[ 아 그렇구나;; 그래도 취업 힘들다던데 넌 잘 뚫었네 ]
[ 응ㅋㅋㅋ운이 좋았어. 여기 월급도 나쁘지 않아. ]

그렇군.

[ 오빠 천안 놀러와 밥 맛난거 사줄게 ]
[ 그래, 조만간 함 보자~ ]

아마 거기에서 진짜 대화가 끊어졌다면 그대로 그녀와의 인연도 끊어졌을 가능성이 높았으리라. 하지만 주혜는 확실히 또래 여자애들에 비해서 뭐랄까, 사회적 지능(?)이 높다고 해야되나. 좀 비범한 면이 있었다.

[ 아아 그런거 말고, 오늘 와 오늘. 내가 퇴근하고 맛난거 사줄게 ]
[ 엥? 오늘? ]
[ ㅇㅇ ]

이미 오후 4시 반. 씻고 준비해서 터미널 가서 버스 타고… 밥 먹고, 뭐 술 한 잔 하고, 엄… 근데 주혜랑 거기까지? 에이, 좀 무리수 아닐까. 그렇다면 굳이….

[ 오늘 어케 가. 에이에이, 담에 봐, 담주 주말에 보던지 ]
[ 뭐야, 시큰둥하네? 나 그럼 이제 오빠 평생 안 본다? ]

그럴 리야 없다고 생각은 했지만, 또 사실 안 간다고 해서 오늘 내일 뭐 딱히 할 게 있는 것도 아니고, 복학까지 남은 몇 달 간 팽팽 놀기만 할 내 입장에서 안 갈 이유도 없긴 했다.

[ 알써 그럼 이따 터미널에서 봐 ]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어 ]

이틀 만에 씻고 준비했다. 온 몸 구석구석, 특히 몇몇 부위를.




"오빠!"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불과 2년, 아니 신병 시절 때 면회 왔던거 생각하면 근 1년 반? 만에 주혜는 몰라보게 예뻐져 있었다.

"누구세요?"
"야!"

주혜는 퇴근 전에 이미 식당을 예약해 놓았다고 했다. 잠자코 따라갔더니 꽤 그럴싸한 한우 고깃집이 나온다.

"야, 여기 150그램 1인분에 38,000원이라는데"
"아 오빠, 내가 쏜다고"
"그러니까"
"걱정말고 배나 채우셔"

등심 4인분에 육회에 이것저것 곁들일 사이드 메뉴까지 시키는데 세상에 그렇게 멋있는 여자는 내가 본 기억이 없다.

"…누나라고 불러도 돼요?"

내 말에 빵 터진 주혜는 "어휴 그래 우리 아들 나라 지키느라 고생했으니까 많이 먹어" 하며 내 앞에 구워진 고기를 건낸다.




"잘 먹었어. 아 너무 훌륭하다"
"그치? 여기 맛있더라고"

배불리 밥을 먹고 나오는데 "2차 가야지" 하는 주혜. 이번에는 내가 쏴야지하고 생각하던 차에 적당히 괜찮아 보이는 이자카야가 보인다.

"저기 가자"
"좋아"

자리에 앉아 술과 안주를 시키고 한숨 돌리려니 주혜는 여전히 방긋방긋 미소를 지으며 이것저것 물어온다. 이렇게 보니 또 새삼스럽지만 정말 귀엽네.

"오빠는 연애 안 해?"
"해야지. 근데 뭐 있어야 하지. 주변에 이쁜 여자 없냐"
"오빠 주변에 여자들 많잖아. 그 누구지? 선… 선 뭐였는데. 선진이? 선주? 그 왜 얼굴은 완전 애긴데 몸매 미친 애 있잖아"
"진선이. 그리고 손 그렇게 하지마. 그 정도는 아니야"
"맞어. 진선이. 에드벌룬"
"미친"
"걔 막 오빠랑 썸씽 있고 그러지 않았어? 옛날에 내가 전화했을 때 옆에서 막 난리 피웠잖…"
"아 됐어. 그게 언제적 이야기야"

사실은 지난 주에도 봤다. 영화 보고 밥 먹고 곧바로 헤어졌지만. 실속 없는 기집애.

"그럼 지금은 연애 안 해?"
"안해. 넌?"
"나도 안해. 헤어진지 몇 달 됐어"
"올, 그럼 그 사이 연애 하긴 했네?"
"어"

갑자기 주혜의 얼굴이 아련해진다. 뭐여.

"왜? 안 좋게 헤어졌냐"
"어"
"뭔데"

뭔가 말을 하려다가 "그냥, 걔네 엄마가 나 안 좋아한대서" 하고 대답하는 주혜.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마마보이네. 그런 새끼랑 뭐하러 만나"



사케 두 병을 포함해서 12만 4천원이 나왔다. 내가 계산하려 했지만 주혜는 막 "아 진짜 오빠 나 막 소리지른다? 나 다시 안 볼거야?" 하는 반 협박성 멘트까지 날리며 굳이 자기가 계산했다. 아까 밥 값까지 생각하면 거의 30만원 가가운 지출. 갑자기 너무 미안했다.

"야 너 무슨 내 장기 떼가려고 그러냐. 뭔 돈을 이렇게 쓰는거야"

이미 반쯤 혀가 꼬인 주혜는 웃으며 "내가 딴 사람은 몰라도 오빠한테는 써도 돼!" 하면서 택시를 잡았다.

"월봉중학교 쪽으로 가주세요"

나는 오늘 얘랑 자는건가. 또 혹시나 하는 기대에 터미널에서 콘돔 사두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택시 안에서 주혜는 말없이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나는 주혜의 손을 잡았다. 그녀도 내 손을 잡았다. 따뜻한 손길. 어쩌면 이다지도 보드라울까.

주혜는 전 남친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술을 연거푸 들이켰다. 뭐 그리 대단한 놈이라고, 대꾸하기는 했지만 대단한 놈인 듯 했다. 주혜가 원래 좀 누구를 만나면 열과 성을 다 하는 느낌이긴 하지만, 그 놈은 정말 대단한 놈이었다.




"내가 걔한테는 진짜 다 줬다?"

뭘 줬는데 하고 묻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생활비 쓰라고 카드도 줬지, 기 죽지 말라고 용돈도 맨날 쥐어줬지, 면접 보러 다니라고 정장도 해입혔지, 잠깐 지낼 데 없다면서 한 6개월 내 자취방에서 살 때는 내가 피임약까지 먹으면서… 지 하고 싶다는거 다 해줬다고"

준마이 두 병째에 돌입하자 주혜는 갑자기 목소리가 높아졌다.

"내가 걔네 부모님 결혼기념일에 호텔 숙박권까지 끊어줬다고"
"미친, 돌았네"
"내 이름으로 끊은건 아니구, 남친 이름으로 해서. 효도하라고"
"하 진짜 너도 참"

호구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굳이 꺼내진 않았다. 자기가 제일 잘 알테니.

"근데 좀 이상한거야. 여친한테 부모님 결혼기념일 선물로 호텔숙박권 끊어주고 싶다는 말도 그렇긴 하지만, 부모님 결혼기념일인데 지가 연락이 안될 이유는 없잖아"
"그렇지"

그랬구먼.

"그냥 괜히 이상한 느낌이 와서 다짜고짜 호텔로 찾아갔는데, 역시나 거기 있더라. 다른 여자랑"
"그래서 어떻게 했어? 가위로 잘라버렸냐"

내 말에 술 김에도 눈을 흘기던 주혜는 말을 이어나갔다.

"아니, 그냥 못 본 척하고 다시 집에 왔어. 그리고 카드 사용 내역 살펴봤어. 싹 다. 그랬더니 이 새끼가 진짜 미쳤나 싶더라고"
"왜"
"지 딴에는 머리 굴린다고 굴린거 같은데, 아니 금요일 밤 11시 반에 술 먹고 카드 현금인출로 8만원을 뺀 기록이 군데군데 있네? 다음 날 12시에는 해장국 두 그릇까지 결제하고?"
"캬, 미친"
"아마 기념일이었던 것 같아. 부모님 기념일이 아니라, 다른 년이랑 100일 기념일"
"정신나간 새끼네"
"근데도 나는, 다음 날 좋게좋게 말했어. 용서해줄테니 그러지 말라고. 카드 사용 내역은 딱 한번 살펴본거고 다시 그럴 일 없을거라고. 그리고 두 달을 모르는 척 지냈는데, 그 후에도 계속 그러더라"
"개새끼"




"102호, 비번 이공일삼이야"

주혜를 들쳐업고 그녀의 방에 들어섰다. 아파트 옆 작은 빌라 1층. 주혜를 침대에 눕히고, 불도 켜지 않은 채 눈에 어둠이 익숙해질 때까지 가만히 방 안을 살핀다. 작지만 아늑한 방. 대학 시절에도 참 나를 잘 따랐고, 아마 마음을 먹었다면 훨씬 이전에도 사귈 수 있었겠지만 그녀의 마음을 일부러 모르는 척했던 나.

그냥 조금은 나랑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항상 말과 행동은 가볍게, 대충을 말하지만 그 안에서도 꼼꼼함과 진지한…진심이 항상 느껴지던 주혜였다. 정말 좋은 동생이고 항상 곁에 두고 싶었지만, 그래서 사귀었다 헤어지면 영영 남이 될까 두려웠다. 10년 지기 소꿉친구였지만 어이없게 멀어진 영서처럼 될까봐.

뭐, 조금 더 솔직한 이유를 들자면 더 예쁜 애들이 눈에 들어오기도 했고. 그러나 오늘의 주혜는 정말 매력적이었다. 외모도 외모지만, 좋아하는 남친이 능력이 없다고 하자 선뜻 신용카드까지 건내고 지가 먹여살렸다는 모습이 엄청나게 섹시했다.

물질적인 모습이 아니라, 주혜에게서 우리 엄마가 겹쳐보였는지도 모른다. 공사현장에서 허리를 다쳐 평생 누워있는 아버지 대신 가정을 이끌어 온 우리 엄마가. 이런 여자라면 만약 내가 언젠가 뭔가 잘못되더라도 평생 의리를 지킬 것 같았다. 그런 여자라면 내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지 않을까.

내 눈은 어둠에 완전히 익숙해졌고 어느새 곯아 떨어진 주혜의 양말을 나는 벗겨주었다.

"으이구"

내 지금 뭐한다고 천안까지 내려와서 여자애 양말이나 벗겨주고 있나, 하는 허무함이 몰려왔지만 오른쪽 양말을 벗기는 순간 주혜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그렇게 별로야?"

잠깐 놀랐지만, 나는 "아니" 하고 작게 대답했다. 그리고 주혜가 뭐라 더 말을 하기 전에 자리를 고쳐 앉아 그녀의 이마를 쓸어 넘겼다.

"솔직히 내가 너한테 아예 마음이 없었으면 여기까지 왔겠냐"
"근데 왜 맨날 선을 그어"

뭔가 변명을 할까 하다가, 그냥 "그 선 넘으려고" 라는 말과 함께 그녀 옆에 누웠다. 둘 다 피식 웃었다. 한 명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들어서, 한 명은 그런 드립을 떠올렸다는 발상 자체가 자랑스러워서.




나는 그 날부터 곧바로 주혜네 집에 얹혀 살기 시작했다. 집에는 연락을 했다. 일자리 구했다고. 대학교 친구 자취방에서 숙식하면서 지내다가 곧 들어가겠노라고. 아버지는 드디어 사람다운 짓 한다며 좋아하셨고, 어머니는 걱정하는 듯 했지만 역시나 좋아했다. 백수가 방구석에서 허송세월하는 것보다야 당연히.

"이거 그거야?"
"어. 피임약"

처음이었다. 하다가 내키는 그 순간 그녀의 안에 마음껏. 그리고 곧바로 또 이어서. 주혜와 나는 잘 맞았다. 매일, 정말 매일 몇 번이고.

"지금 몇 시야?"
"두 시 반"
"헐, 나 몇 시간 못 자겠네"

아마 피곤하기도 엄청 피곤했을 것이다. 퇴근하면 남친이랑 같이 집 근처에서 밥 먹고 불당천에서 걸으며 데이트, 그리고 집에 와서는 섹스. 매일매일. 밥값도, 내 옷도, 모든 생활비도 모두 그녀가 감당하는 하루하루.

"그, 나도 서울에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아"
"왜?"

돈을 좀 어떻게 마련해 볼 생각이었다. 집에 뭐 플스를 팔던지, 엄마한테 좀 꾸던지 해서. 우리가 뭐 오래 같이 산 부부도 아니고, 연애 시작하자마자 이렇게 일방적으로 신세만 지는 연애라니,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뭐야, 그런 이유라면 괜찮아"
"괜찮기는. 너가 무슨 갑부라고"
"나 연봉 꽤 괜찮게 받아"
"그래도"

사실 우리가 딱히 크게 돈 드는 연애를 하는 편은 아니었다. 밥도 처음 며칠만 외식했지 이후로는 집에서 같이 요리 해먹었고, 게임도 영화도 그냥 집에서 둘이 끌어안고 보는게 전부였으니까.

"괜찮아. 정말 괜찮아. 나 모아놓은 돈 좀 되거든?"
"내가 다 까먹는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지도 않지만 그럼 좀 어때. 내 서방님인데"

대신에 나는 그녀가 집에 오기 전 청소도 해놓고 빨래도 해놓고, 서툰 솜씨지만 요리도 해놓고 했다. 그때마다 주혜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야, 진짜 나는 복 받은 여자다"
"복은 내가 받았지"
"진짜 오빠 나한테 장가오면 안됨?"
"그래, 도장찍자"
"응"
"근데 그 전에 다른 도장부터 찍자"
"아 무슨 또 아저씨 같은 말이야"



꿈같은 이주일이 지났다. 오늘도 점심시간, 주혜의 회사 근처에 와서 같이 밥을 먹고, 그녀를 들여보낸 후 퇴근까지의 여섯 시간을 PC방에서 보내는 그 순간.

"아들, 요즘 뭐하느라 연락도 없어"
"어, 그냥 일하느라 좀 바빴어."
"그려, 일은 할만해?"
"어, 꿀알바야"
"그래도 얼굴 한번 비춰야지. 거 친구네서 신세 지내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옷도 없잖아"
"아 다 있어. 걱정말어"
"그래"

하긴, 잠깐 집에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슬슬 환절기인데 옷도 좀 가져다 놓고 해야겠다 싶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하긴 했지만, 이대로 괜찮을까 하는 불안도 커졌다.

'그래, 집에 다녀오자'

주혜에게 전화를 했다. 옷이랑 이것저것 짐이랑 좀 더 가져오겠노라고, 집에 좀 다녀오겠다고. 주혜는 의외로 선선히 그러라고 했다.




원래 계획은 올라간 날 바로 짐만 부치고 다시 내려올 생각이었지만, 막상 또 아들이 간만에 집에 들어왔다고 엄마의 대접이 달라졌다. 갈비에 삼겹살에, 무슨 과일에 뭐에, 첫 휴가 나왔을 때 생각이 날 정도였다. 배불리 먹고 나니 그냥 자고 가겠노라고 주혜에게 연락했다. 역시 선선히 그러라는 주혜.

"야, 뭐하냐?"

다음 날은 간만에 얼굴이나 보자는 승필의 연락. 언제 한번 꼭 보자 보자 했던 놈이라 연락을 뿌리칠 수 없어서 만나고 술 마시고 그렇게 또 하루, 승필과의 술자리에서 연락 온 서리의 전화.

"오빠 요즘 연애해? 왜 이렇게 연락이 뜸해?"
"연애는 무슨. 요즘 알바 좀 하느라 그랬지. 근데 갑자기 왜?"
"오빠 그럼 모레, 금요일에 뭐해?"

그렇게 서리와의 술 약속 때문에 또 천안으로의 귀환이 이틀 미뤄졌다. 만나서는 막상 뭐 없었지만 그녀의 마음을 조금은 확인할 수 있었다.

"알고보니 오빠 막 밀당 초고수 아냐? 그렇게 맨날 놀자 놀자 하다가 연락 없으니까 내가 더 서운한거 있지?"
"참나. 그럼 뭐 나랑 사귀기라도 해주냐?"
"음, 하는거 보고?"

헤어지는 자리에서 볼뽀뽀까지 받았다.

"어…"
"또 오해하지마? 그냥, 이제부터 하는거 좀 지켜본다는 뜻이니까"

여우 같은 년. 택시 타고 떠나는 서리를 보내고 휴대폰을 확인하니 부재 중 통화가 네 통이었다.



"왜 이렇게 통화가 안 돼?"
"미안, 잠깐 뭐 좀 하느라고. 왜?"
"바로 온다는 사람이 며칠 째야. 나 불안하게"
"아, 걱정마. 금방 갈게"
"그게 언젠데"

주혜 성격상 '지금 당장'이 답이겠지만, 당장 내일 연수와 진선이가 같이 영화 보자는 제의를 해놓은 상태였다. 하필이면 참.

"토요일 밤에 갈게"
"밤에? 낮에는 뭐하는데"
"현우랑 보기로 했어"
"현우? 현우는 누군데"
"대학교 친구 있어"
"하… 알았어"

전화를 끊고 나니 조금은 피곤했다. 하지만 아주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다. 유부남의 기분이 이런걸까 싶고.

"친구들하고 지낸다고 나쁜 짓 하고 돌아다니고 그러는거 아니지?"
"아 무슨 내가 중고딩이야?"

집으로 돌아와 플스랑 겨울옷이랑 이것저것 개인짐들은 택배로 부쳤다. 주말 지나서 월요일, 화요일에는 도착하겠지 생각했다. 그날 밤은 주혜를 달래며 길게 통화를 했다. 늦잠을 자고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나설 채비를 했다.

"또 어딜 나가."
"약속 있어"
"너 그럼 이번 주는 내내 일을 안 하는거야?"
"일 안 하는 날은 안 해도 돼"
"그런 일자리도 있니"

집에선 내가 지방에 취업해서 일하는 줄 알고 있었으니까. 이미 엄마는 어느 정도 의심을 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무어라 하는 대신 용돈을 쥐어주었다. 무려 30만원이었다.

"집에 가면 애들이랑 맛난거 사먹어"
"알았어"

하지만 엄마가 준 그 돈은 주혜가 아닌, 연수와 진선에게 돌아갔다.



"참치요? 정말?"
"그럼"

…나는 끽해야 동네 회전초밥집 정도나 생각했다. 이 미친 년들이 진짜 코스요리 스시집에 갈 줄이야. 그러나 뱉어놓은 말도 있고 해서 그냥 내가 부담했다.

"21만 3천원입니다"
"여깄습니다"
"오 뭐야 오빠 현찰 부자네"
"내가 돈 빼면 시체 아니냐"

농담을 주고 받으며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 속이 쓰렸다. 차라리 주혜한테 근사한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할 것을. 셋이 같이 영화를 보는데 영화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아까 중간에 잠깐 주혜한테 전화했을 때도 주혜 목소리가 좋지 않아서 더 속이 쓰렸다. 아쉽지만 남은 돈으로 둘이 뭐 뷔페라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빠, 아까 돈 많이 썼죠"

영어 학원 때문에 일찍 따로 들어간다고 한 연수는 나에게 몰래 귀뜸해줬다.

'오빠, 진선이 요즘 많이 외로워해요. 기회야, 내가 팍팍 밀어줄테니 잘해봐요. 오빠 진선이 몇 년 짝사랑한거야? 잘 되면 나한테도 남자 해줘요. 알았지?'

대답도 듣기 전에 웃으며 뛰어간 그녀. 참, 왜 항상 인기는 이런 식으로 몰려오는 것일까. 좀 나눠서 오면 얼마나 좋아.

"아냐, 그렇잖아도 연수가 너 요즘 기운없다고 해서 맛있는거 사주고 싶었어. 무슨 일 있고 그런건 아니지?"
"그런거 없어요. 아 근데 진짜 오빠 최고다. 나 기운없다고 막 비싼 초밥도 사주고."
"돈이 문제냐. 근데 진짜 뭔 걱정 있는건 아니지?"

내 질문에 진선은 묘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잘 모르겠어요. 기분이 싱숭생숭하고, 허전하고. 막 연수는 그래서 연애해야 된다고 그러구"
"주변에 뭐 좋다는 남자 없어?"
"없어요 그런거. 맘에 드는 사람도 없고"

그 말에는 조금 실망했다. 하지만 애써 티는 안 내고 농담식으로 물었다.

"나 있잖아 나. 나랑 만나면 되겠네"

그리고 그 질문에 의외로 진선은 밝게 웃었다.

"진짜 오빠 같은 남자가 진지하게 고백하면 생각 좀 해볼텐데"
"정말?"

뭐야 이건. 너무 뻔히 속 보이는 대화 같지만 그래도…. 정말정말 새삼스럽지만 진선의 가슴에 계속 눈길이 간다. 일부러 그러는건 아닌데 눈길이 간다. 어쩌면 이렇게 귀여운 얼굴에 이런 몸매가. 과연 연예인 제안을 몇 번이나 받은 것도 이해가 간다.

"어…, 음. 사실 나 진짜로 좀…"

뻘쭘한 고백이었지만 사실은 주혜 생각이 났다. 지금 내가 뭘하고 있는건가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몇 년을 바라만 보던 진선과 이렇게 가까워 질 기회에 솔직히 설레임이 없다는 것도 거짓말이었다.

"뭐에요, 아 웃겨"

내 딴에는 조금 당황하면서도 진지하게 들이댄 건데 그게 진선이 보기에는 그냥 개그로 보인 모양이다. 나는 얼른 함께 크게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그렇게 약 20분 정도 함께 걸으며 많이 대화를 하다가 그렇게 헤어졌다.

"잘 들어가요 오빠. 자주 봐요. 나 요즘 심심해요 많이"
"어"

저녁 10시 10분. 휴대폰의 부재중 전화 한 통. 나는 서둘러 택시를 잡아 터미널로 향하며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주혜는 받지 않았다.




"뭐야, 왜 그렇게 늦었어. 저녁 만들어 놓고 기다렸잖아"
"미안해, 내가 먼저 먹으라고 했잖아"
"같이 먹으려고 했지"

미안했다. 사실은 주혜가 전화를 안 받길래 또 오만 잡생각을 하면서 미리미리 문자도 싹 다 지우고 통화기록도 지우고 하면서 왔는데 그냥 잠깐 잠이 들었다고 했다.

"그래 나도 먹은지 좀 됐어. 얼른 먹자"
"응, 내가 이거 찌개 좀 데워올게"

주혜가 끓인 김치찌개는 참 맛있었다. 아까 쳐먹은 인당 7만원짜리 스시 코스보다 훨씬 더. 그래서 더 미안했다. 서리, 진선이랑 놀다가 와서 본 주혜가 새삼 덜 예뻐 보인 것까지도 미안했다. 스스로를 쓰레기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무슨 일은. 그리고 내일은 우리 뷔페 가서 맛있는거 먹자. 나 돈 생겼어"
"에휴, 기어코 엄마한테 돈 얻어왔구나?"
"아니거든?"

사실은 맞지만.

"그리고 여기로 택배 붙였어. 플스랑 겨울옷이랑 막 다"
"이제 우리 같이 사는거네?"
"어"
"좋아"

조금 흔들렸던 마음이 다스려졌다. 그래, 나 좋다고 이렇게 죽고 못사는 애가 최고지, 다른 년들이 무슨 대수냐.




"잠깐 일어나 봐"

한참 곤하게 자던 중간이었다. 누군가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당연히 주혜였다.

"이거 뭐야"

표정이 장난이 아니었다. 뭔가 문제가 생겼다고 직감했다. 주혜의 손에는 내 휴대폰이 들려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펴보인 휴대폰에는 [ 오빠, 진선이한테 고백했다면서?ㅋㅋㅋㅋㅋㅋㅋ 어쩜 그렇게 사람이 단순하냐ㅋㅋㅋ ] 라는 연수의 문자가 와 있었다.

"해명해 봐"

병신. 물론 나 자신에게 한 말이다. 해명이 가능할 리 없다. 이미 주혜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하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진선이는 주혜도 아는 이름이다. 지난 몇 년간 그녀에게 많은 좌절감을 안겨준 그 이름 아닌가.

"그냥… 별 일 아니었어"
"별 일 아니라고?"

주혜는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했다. 당연했다. 전 남친의 일도 있고, 또 짐 가지러 반나절만 다녀오겠다는 사람이 근 일주일을 뭉개다 왔으며 이상한 문자 내역까지 있고.

"그리고 현우라는 친구랑 놀았다면서. 그 친구랑 연락한 내역은 어딨는데? 연락도 없이 텔레파시로 약속 잡아서 만났어? 통화내역에 없던데?"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랬기에 나는 더 큰 소리를 쳤다.

"너 남의 휴대폰은 왜 보는데. 의심병 있어?"

주혜는 눈물을 죽 흘렸다.

"이러지마, 사과를 해 그냥. 잘못을 했으면 그냥 사과를 하라고"

그 순간 그녀의 울먹임에서 느꼈다. 방금 전의 그 말은, 나 하나한테만 하는 말이 아니라, 그녀를 못 살게 군 전 남친을 포함해서 하는 말이라고.

그래, 그 놈은 잘못했을 때 사과를 안 하고 더 큰 소리나 치고 지랄을 했나보구나. 지금의 나처럼.

"미안해, 사실은…"



이만저만하게 잘 둘러댔다. 사실 7할에 적절한 가감 3할을 보탠 그런 구라. 물론 아무리 '오래 알고 지낸 벗으로서 용기를 붇돋아주기 위해 한 농담일 뿐. 애시당초 걔랑 나랑 뭐 불꽃이 튀고 그런 뭐는 좀 아니잖는가' 라는 변명을 했다고 그게 쉽게 통할 리가 있겠는가.

아마 주혜도 알았을 것이다. 시시한 남자의 졸렬한 짓과 그것을 감추기 위한 말도 안되는 개구라라는 것을.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자기 눈물과, 그 눈물을 보고 흘린 내 눈물을 다시 웃으며 닦아주었다.

"다시는 그러지마"

알겠노라고 대답했다. 다시는 안 그럴 거라고.




연 과장이 물었다.

"그래서, 그 다음에 주혜한테는 진짜로 잘했어? 그 이쁜이들이랑 잡은 약속들은 다 파기하고?"

나는 맥주를 들이키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자 연 과장은 물론이요, 현 대리, 진혁이 다들 보챘다.

"뭔데?"

나는 그저 고개를 저었다.

"아 뭐냐고"
"어떻게 됐어요?"




회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아내는 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다. 그제서야 "흐음" 하며 깬 아내는 나에게 물었다.

"술 많이 마셨어?"
"아니, 그냥 맥주 몇 잔"
"응, 지금 몇 시야?"
"12시 10분"
"그럼 얼른 자. 내일 또 출근하려면 피곤하겠다"
"어, 잘자 서리야"

나는 눈을 감았다.

자기관리

"햄버거 두 개를 섭취하신 후, 맥주 원샷과 함께 침대에 누우세요. 그리고 소화가 될 때까지 두 시간의 숙면! 잊지마세요! 멋진 몸매를 위한 당신의 선택!"

오늘도 TV의 벌크업 프로그램을 보며 햄버거를 억지로 입에 넣고 있는 누나. 그녀를 보며 나는 피식 웃는다.

"아 누나, 그런다고 살이 쉽게 찔 것 같아? 때려치워. 그냥 그 몸매로 살아"
"이제 죽을라고! 야, 기달려. 올 여름에는 진짜 내 반드시 80kg 채우고 만다"
"에휴, 꿈같은 소리"

누나는 곧바로 "야!" 하고 또 소리를 지르지만 난 웃으며 밖으로 뛰어 나온다. 아차, 이러다 살 빠지면 큰일. 천천히 걸어야지.





자기관리의 시대 





오늘도 역 앞에서는 멋지게 찌운 육중한 몸을 자랑하는 돼지들이 전단지를 나누어 주고 있다.

"폭식하러 오세요"
"아, 예예"

몇 명의 남자돼지들이 건내는 전단지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피했지만, 싱그러운 미소와 함께 갑자기 슥 다가온 45인치 허리의 미녀가 건내는 전단지는 나도 모르게 받아들고 말았다. 앞에서 나에게 무시당한 남자 폭식 트레이너들은 그런 내 모습에 피식 웃었지만 사실 놈들도 이해는 할거다. 이런 뚱녀가 상큼한 웃음과 함께 건내는 전단지를 어떻게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 할 수 있어요 100kg 섹시한 몸매! 올 여름 여심을 휘어잡을 목살/뱃살/옆구리살 집중 육성! ]

나는 얼떨결에 손에 건내받은 전단지를 보며 혀를 찼다. 사진 속 육중한 체구의 남자. 멋있긴 멋있다. 나도 이렇게 늘어진 뱃살과 옆구리살을 가질 수만 있다면. 폭식 트레이너들처럼 스모 선수 체형은 바라지도 않지만, 그래도 더 늙기 전에 원팩은 한번 만들어 보고 싶다. 그보다, 지금 몇 시지. 어, 벌써 3시네.

"어, 연수야. 어디야? 응? 나도 역 앞인데? 아아, 어어. 그럼 내가 그쪽으로 갈께"



이미 15분 전에 도착한 연수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어, 미안 내가 좀 늦었네"
"아니야. 괜츈. 커피 마실래?"

카드를 내미는 여자친구에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내가 살께"

나는 곧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연수는 나에게 물었다.

"뭐 시켰어?"
"아메리카노"

하지만 그 말에 연수는 곧바로 미간을 찌푸린다.

"아 왜!"
"아, 미안"

맞어, 저번에도 이걸로 한 소리 했었지.

"아 왜 내가 시키는대로 마끼아또 안 먹어? 맨날 아메리카노 아니면 에스프레소나 먹고. 자꾸 그러니까 이렇게 마르잖아. 아 진짜 짜증나. 내 말을 왜 맨날 무시해?"

어느새 연수의 목소리가 올라간다. 나는 당황하며 그녀를 진정시킨다.

"아, 미안. 대신에 시럽 많이 타서 마실께"
"에휴"

그녀는 요즘 부쩍 내 몸매에 말이 많다. 연애 2년차, 슬슬 말조심을 거둘 때가 되긴 했지. 그래도 좀.

"그럼 밥은 먹었어?"
"어, 먹었어"
"뭐 먹었어?"

사실은 견과류를 곁들인 샐러드를 먹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또 한 소리를 들을 것 같아서 "라면에 밥 말아먹었어" 하고 얼른 거짓말을 했다. 연수는 의심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곧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좀 남친 옆구리살 만지면서 데이트 좀 해보자. 어?"
"알았어 알았어 미안해"

나도 살짝 짜증이 나려는 찰나에 다행히 진동벨이 울린다. 아메리카노를 받아서 별로 먹고 싶지도 않은 시럽을 억지로 몇 번 펌핑한 후 자리로 가지고 온다. 솔직히 먹기 싫어졌다. 연수는 휴대폰을 잠시 만지작 거리다가 나에게 물었다.

"커피 마시고 이제 뭐할거야"
"어, 영화 볼까"

사실은 오늘 간만에 날씨도 따뜻한데 둘이 요 앞에 산책이나 하자고 하려고 했지만 지금 이 타이밍에 그 소리를 했다가는 또 한 소리 들을 것 같아서 얼른 코스를 바꿨다.

"그래, 좋아"

하지만 대답과는 달리 연수는 그다지 내키는 얼굴이 아니다.




"카라멜 팝콘이랑 콜라 주세요"
"네, 카드 받았습니다"

영화를 예매하고, 팝콘을 주문한다. 이미 커피 만으로도 배가 제법 부른데 또 팝콘까지 먹어야 한다. 후, 정말 먹기 싫다. 연수는 어쩜 저렇게 잘 먹을까.

"배 안 불러?"

조심스럽게 한 질문이지만, 연수는 이미 아까부터 짜증이 난 상태다. 별 말도 아니건만, 단박에 짜증을 낸다.

"나라고 배 안 부르겠어? 그래도 자꾸 이렇게 관리를 해줘야지. 오빠는 진짜 사람이 왜 그래? 안 먹고 싶다고 다 안 먹으면 평생 그렇게 살거야? 자기관리가 그렇게 안 돼?"

당혹스럽다. 사람도 많은데 이게 이런 소리까지 들어야 할 일인가. 옆에 줄 서있던 돼지들은 우리를 대놓고 비웃고 있다. 시발. 일단은 수습하려 노력해본다.

"아니 연수야. 내가 뭐 별 말 한 것도 아니잖아. 그냥 너 배부를까봐 배부르냐고 물어본 거 뿐이지. 미안해 미안해, 얼른 들어가자"

하지만 그 말에 연수는 더 화를 낸다.

"아 이런거 더 싫어. 오빠는 왜 맨날 이런 식이야? 그냥 문제를 덮으면 그게 전부야?"

아니 시팔 그럼 이 사람 많은 시장바닥 같은 곳에서 머리끄댕이 붙잡으며 쌍욕이라도 해야 되냐 이 좆같은 미친 년아,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지만 겨우 참고 "미안해 미안해" 하며 겨우겨우 그녀를 진정시킨다. 그러나 이미 그녀도 나도 기분은 완전 작살난 상태다. 겨우겨우 영화관에 들어가 자리에 앉지만 스크린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영화를 보는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연수도 기분이 안 좋겠지. 하기사, 남친이라고 있는 것이 이렇게 슬림한 잔근육에 긴 모가지에 긴 팔다리, 소두이기까지 하니 어디 데리고 다닐 맛이 날까. 키라도 작았으면 짭실한 폼이라도 날텐데. 키까지 커서 제기랄.

'시발'

나라고 어디 살이 찌기 싫어서 안찌나. 지야 원래 타고 나기를 그렇게 디룩디룩이니까 남 살찌우는게 얼마나 힘든지 몰라서 맨날 저 지랄이지. 아니 입에 음식이 안 들어가는걸 억지로 먹는 것도 고역이다. 막 미친듯이 뛰고 운동하고 싶기만 하다고!

'좆같네'

윤석이랑 동주는 지금쯤 죽어라 뛰고 있을텐데. 부럽다. 데이트가 즐거워야 데이트지. 후우.

'쩝'

혼자 씩씩대다가 문득 힐끗 옆으로 고개를 돌아본 나. 어. 연수는 울고 있었다. 또 왜 울어. 곧바로 마음이 누그러진 나는 슬그머니 그녀의 손을 잡, 으려 했지만 그녀는 손을 내뺀다. 하, 좀 이럴 때 은근하게 가만히도 있고 서로 화도 풀면 좀 좋아? 염병. 그래, 이판사판이다.



영화가 끝났다. 찜찜한 마음으로 나와 연수는 아무 말 없이 극장을 나선다. 쓸쓸하다. 외롭다. 서로 교감이 되지 않는다.

"저녁 먹을까"

나는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연수는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 "잠시 이야기 좀 해" 하며 극장 뒤 골목 벤치로 간다. 저번에도 헤어지네 마네 이야기 할 때 저기에서 이야기 했었지. 마음이 무겁다.




"오빠"
"어"
"내가 오빠한테 맨날 살 찌워라 살 찌워라 하니까 오빠도 힘들지?"

시발 또 헤어지자 타령하려고 이러나.

"어, 힘들어"

그래, 근데 나도 한계다. 아닌 말로다가 세상에 여자가 너 하나 뿐이냐. 그래, 너무 힘든 인연은 인연이 아니라고 했다. 나도 많이 체념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연수도 그렇게 가볍게 이별을 운운하지는 않는다.

"나는 정말 오빠가 걱정되서 그래. 의사들이 그러잖아. 너무 마른 몸보다 적당히 살집 있는 몸이 오래산다고. 그리고 솔직히 뚱뚱한 몸매, 오빠도 갖고 싶지 않아?"

후우.

"연수야. 미안한데, 사람은 좀 타고 나는 것도 있어. 체형 자체가. 그리고 입맛을 이 날 이 때까지 이렇게 29년을 안 먹고 덜 먹으며 살아왔는데 갑자기 살 찌우는게 어디 쉽겠어? 그래, 알어. 너도 노력해서 그렇게 살 찌운거. 그래서 내가 한심하게 보일 수도 있는데, 그럼 너 나만큼 축구 잘해? 나만큼 영어 잘해? 그냥 사람마다 더 잘하고 좀 약하고 이런거 있는거잖아. 그냥 그렇다고. 넌 이런 내가 싫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너한테 맨날 이렇게 강요받는거 힘들어"

연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는 말이 아직 안 끝났다.

"그냥 나도 생각 당연히 많이 해봤지. 니 주변에 아는 오빠들 중에 돼지들 많은거 알어. 그래서 더 내가 눈에 안 찰 수도 있겠다 싶고. 솔직히 너 만나면서 나 없던 비계 열등감까지 생기더라. 너는 만족스럽지 않겠지만, 나도 뭐 노력 꽤 해봤어. 밥 먹고 나서 디저트도 챙겨 먹어 보고, 햄버거도 막 두 개씩 먹어보고 그러는데, 아 진짜 살이 안 찌는걸 어떻게 해. 몇 키로 찌워봤지만 금방 또 빠지고, 그러는데"

참, 이런 말을 하면서도 자괴감이 든다. 이게 무슨 좆같은 항변이야.

"후우"
"미안해"

나는 또 습관처럼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담는다. 뭐가 미안한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연수도 이런 게 싫은 거겠지만, 그냥 미안하다. 내가 괜한 욕심을 낸 것 같아서.



겨우 집까지 연수를 돌려보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전철 안에서 나는 긴 씁쓸함을 느낀다. 나도 알콩달콩한 연애를 하고 싶다. 서로가 좋아 죽고 못사는 연애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냥 평범하게 좀, 뭐 그렇고 그런 연애.

'시발'

그리고 그렇다고 지는 뭐 그렇게까지 잘 찌운 몸맨가? 뱃살 좀 불룩하고 떡 벌어진 어깨에 등살 좀 붙은거 빼면 뭐… 에휴. 참, 이게 뭔 좆같은 연애인지. 왜 이런 참담한 기분을 자꾸 느껴야 하는지.

'하아'

근데 나도 예전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다. 나도 통통한 뱃살에 여기저기 군살도 좀 있던 시기가 있었다. 그냥 나이 먹고 직장생활 빡세게 하며 스트레스 받다보니 식욕도 없고 살이 빠져서 이렇게 된 것 뿐이지.

'놓아주어야 하나'

연수는 그래도 매력적인 여자다. 나한테야 지랄지랄할 지언정 성격 자체는 원만하고 딱 부러지고, 뭐 자기관리 열심히 하고. 좋은 애지. 내가 싫으면 지가 좋아하는 놈 만나면 지 좋은 연애하겠지. 거기까지 생각하니 또 질투에 가까운 화도 나고 짜증도 나지만 곧 무기력해진다. 시발.



집으로 돌아오는 길, 홧김에 햄버거 5개를 질렀다. 어차피 다 먹지도 못할 것을. 그래도 내 방에 틀어박혀 우걱우걱 쳐먹는다. 저녁을 안 먹어서 배고프긴 했다. 억지로 3개까지는 먹었다. 거기에 반 개를 더 먹었다. 토할 것 같았다. 그래도 억지로 누웠다. 숨이 가쁘다.



그 날 밤, 여지없이 나는 체했다. 하루종일 먹은 것을 다 토해냈다. 누나는 "왠일로 무리하게 폭식을 하더라니. 등신" 하면서 혀를 찼지만, 그럼에도 소화제를 사왔다. 한참을 더 고생했지만, 거의 밤 11시가 다 되어서 "끄어어어억" 하는 긴 트림과 함께 겨우 체한 기운이 내려갔다.

"흠"

그때까지도 연수에게서는 전화가 오지 않았다. 걔도 걔대로 생각이 많고 힘들겠지만, 그래도 매번 이런 식이다. 매번 을의 연애를 하는 나. 나와 그녀의 연락 빈도는 내가 열 번을 하면 연수는 두어번 할까 말까. 아프기까지 하니 서럽다. 게다가 이건 억지로 살 찌워보려다 이런 건데. 눈물이 찔끔 났다. 전화가 와도 안 받자고 생각했다. 사실 연수 그 년은 그런다. 내가 전화해도 지가 받기 싫으면 안 받는다. 이번에는 나도 그래야겠다.



"여보세요"

…하지만 언제나처럼 나는 밝은 목소리로 기분을 애써 감추며 연수의 전화를 받는다. 이번에는 그녀도 "미안해" 하면서 먼저 사과를 한다.

"아니야, 미안하긴"

뭐 어차피 이래봤자 또 일주일도 안 되어서 다시 체형타령을 할게 뻔하기 때문에 나는 그러려니 한다. 내가 별 말을 하지 않자 연수는 부연한다.

"그냥, 나는 너가 좀 더 멋있었으면 좋겠어. 너도 너가 멋있으면 좋잖아. 뚱뚱하고, 더 배도 좀 나오고 그러면. 알어, 나라고 뭐 그렇게 대단한 뚱녀도 아니면서 너한테 이러는거 좀 너도 할 말 많겠지만 그래도 말이야"
"어"
"여튼 아까는 내가 말이 심했던 것 같아. 사람들 많은데서 화를 낸 것도 미안해"
"어"

나는 무어라 더 말을 하고 싶기는 했지만, 마땅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그냥 어, 어만 반복했다. 왜일까. 그냥 문득 힘이 빠졌던 것 같다.

"나 사실 아까 토했어"

내 말에 연수는 조금 놀란 듯이 묻는다.

"왜"
"집에 오는 길에 햄버거 다섯개 사서 쳐먹다가 체했거든"
"… …"

나도 모르게 괜히 서러워 눈물이 찔끔 난다.

"바보 같지, 나"

전화기 너머에서도 콧물을 훔치는 소리가 난다.

"미안해"
"괜찮아. 정말 괜찮아. 나 몸이 별로라서 일찍 잘게"
"어, 어어"

전화를 끊고 나는 다시 눕는다. 긴 한숨이 절로 나온다. 나도 돼지가 되고 싶다. 나도 돼지가 되어서, 오히려 역으로 연수를 개같이 놀리며 괴롭히고 싶다.

"아 쳐먹으라고 좀!"

…거기까지 생각하니 또 피식 웃음이 나오며 조금은 시원해진다.

"어? 예전에 나 쥐잡듯이 할 때는 좋았지? 너도 아주 각오해. 밥 열 그릇 쳐먹고 자, 국물 다섯그릇 싹싹 말아서. 아주 남기기만 해? 어?"

또 피식 웃음이 나온다. 그렇게 눈가에 새삼스러운 이슬이 맺히며 나는 또 잠을 이룬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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