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의 밤 소설

오늘 밤이 지나면, 내일이 되면, 돌아오는 금요일 밤에는 꼭, 토요일에는 반드시, 일요일에는…

그렇게 하루하루 미뤄가며 시간을 벌려 나간다. 이윽고 현실을 돌아보며 이제는 아무래도 너와의 연락을 기대할 수 없겠지, 하고 마음 접는 순간 다시 작디 작은 희망을 꿈꾸어 본다.

어쩌면 너는 아직도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또 너와의 연락을, 만남을 마음 속으로만 그려본다. 너를 만나고 싶다. 못 나눈 이야기도 하고 싶고, 어떻게 지냈는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요즘에는 어떤지, 네 기분은 어떤지, 어디 아프지는 않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친구들은 잘 있는데, 부모님 건강은 어떠신지,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하나하나 다 밤새도록, 일주일이며 한달이며 일년이며 평생이며 함께 이야기 나누고 끌어안고 안아주고 보듬어주고 쓰다듬고 어루만지며 울고 웃으며 화도 받아주고 눈물도 닦아주고 아쉬운 소리도 들어주고 맞아도 주고 화해도 하고 농담도 하고 업어주고 만져주고 등도 두드려 주고 어깨도 주물러주고 발도 마사지 해주고 맛있는 것도 같이 먹고 그때 못 사줬던 그것도 사주고, 걷고 뛰고 뒹굴며 하루하루를 함께 다시 보내고 싶다.

그때 그렇게 했던 것처럼, 그때 하지 못했던 것들을 그 누구보다 더 멋지고 사랑스럽게, 너를 아끼고 사랑하며 애정하며 존중하고 존중받으며 너를 다시 한번 품에 꼭 안아보고 싶다.

너를 그토록 아프게 했던 만큼 다시 그 누구보다 행복하게 만들어줄테니 제발 다시 한번, 너를 그렇게 품고 웃고 싶다. 그때 그 날들처럼. 가장 행복했던 그 순간들처럼…. 사랑했고, 사랑하며, 사랑할 것이다.

조금만 더 잘할걸, 그때 그러지 말걸, 그게 사실 내 진심이 아니었는데…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그게 아니었는데, 그때 그렇게 놓는게 아니었는데, 한번만 더 붙잡아볼걸….

아프다 못해 아린 가슴을 안고, 후회를 하고 또 하며 그렇게 오늘 밤도, 안녕.

도배 소설

형이 여자친구를 집에 데려 온다는 말에 엄마의 얼굴에는 기쁨 반, 걱정 반이 스쳐 지나갔다.

"그럼 장판, 도배부터 새로 싹 해야겠다"

형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그런 것을 왜 하냐고 했지만 엄마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십수년도 더 된 누렇게 바랜 흰 벽지와 노란 장판을 보노라면 그 어느 여자라도 우리 집안과 엮일 자신의 암담할 미래를 머릿 속에 단번에 그려 버릴테니까. 그래도 내심 '집에 데려온다는거 보면 형 여친도 어느 정도 사정이야 알고 있겠지'라고 생각은 한다만 변해가는 사람 마음 속이야 알 수 없는 법이니 나 역시도 걱정이 들었다.

'하긴'

형은 우리 집안 사람 같지 않게, 엄마나 나처럼 빈티나는 외모도 아니고 곱상하니 귀티나게 생긴데다 서울에서 회사 다니면서 말쑥하니 차려 입고 다니니 아마 모르긴 몰라도, 여자가 그렇게까지 쳐진다고는 짐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분명히.





"엄마"

형이 돌아가고 나서 나는 몰래 엄마한테 30만원을 쥐어주었다. 원래는 컴퓨터 업그레이드 하려고 모아놓은 돈인데, 도배 장판하는데 보태 쓰시라고 돈을 쥐어 드렸다. 형은 신신당부하며 절대 도배 장판 같은거 하지 말라고 하면서 갔지만 엄마는 분명히 할 것이다. 제 입에 들어가는 것은 굶을 지언정 자식 새끼들에는 고기 한점이라도 더 물리려는 이 신 여사의 삶에 있어 혹여라도 '가난 때문에 자식 새끼 발목 잡았다'라는 일이 있었다가는 못이 아니라 말뚝이 가슴에 박힐지도 모르니까. 아니, 이미 말뚝 여러개 박혀있긴 하지만 더 박히게는 하고 싶지 않았다.

"고맙다"

엄마는 내 손을 꼭 잡으며 "착한 아들" 하면서 내 등을 두드려 주었지만 그저 뿌듯함보다는 가난이 싫어 속이 상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이번 주 토요일에 온다니 시간이 얼마 없다. 엄마는 서둘러 현두 아줌마 집에 전화를 걸어 도배를 예약했는데 "싸게 해줘" 라는 말을 몇 번을 반복하는지, 그저 내 입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허어'




생각보다 할 일이 많았다. 제일 먼저 할 일은 온 집안 구석의 오만 짐들을 다 버리는 것부터였다. 거지 같은 집구석에 뭔 짐은 또 그리도 많은지 버리고 또 버려도 버릴 것이 나왔다. 꾀죄죄한 집구석이 너저분하기까지 해서야 답이 없으니 엄마는 정말 많은 것들을 버렸다. 몇 번을 버리려다 끝내 못 버린 그 고장난, 엄마의 손때 묻은 재봉틀마저 이번에는 과감히 버릴 수 있었다.

'아들을 위해'

저 다섯 글자라면 엄마는 정말 못할 것이 없는 사람이니까. 사실 형은 몰라도 나는 안다. 엄마가 돈을 벌기 위해, 무슨 일까지 했는지. 엄마는 내가 어려서 아마 모를 것이 생각했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안다. 그래도 나는 그것을 결코 부끄럽거나 더럽다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번도 없다. 그 돈으로 내 아가리 속에, 우리 세 가족 입에 뭐가 들어갔는지 아니까. 사실 그래서 지금껏 먹고 체했어도 나는 엄마가 차려준 밥은 단 한번도 남긴 적이 없다.

"이만하면 좀 됐나?"
"되기는, 이제 시작인데"

내 허리가 이 정도면 아마 지금 엄마의 허리는 어쩌면 이미 끊어졌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할 무렵인데도 엄마는 쉬지 않고 방을 청소했다. 어차피 곧 도배 장판 새로 해서 없어질 것이건만 무엇이 그리도 그녀를 초조하게 하는지 엄마는 그런 장판조차 트리오 풀어 철저하게 청소했다.

"엄마, 화장실 내가 이미 다 청소했어"
"니가 하긴 뭘해, 엄마가 다 해야지 한거지"
"에유, 그냥 좀 쉬지 쫌"

조금이라도 구질구질한 것은 다 버려졌다. 구멍난 때밀이 수건도 가차없었다. 그토록 아끼고 또 아끼는 신 여사는 어디갔는지, 그저 그녀는 조금이라도 '없어보이는' 무엇인가는 다 버렸다. 그렇게 해서라도 조금 덜 가난해보이고, 조금 더 넓어보이고 깔끔해 보인다면, 엄마는 그것으로 행복할테니.




"아니 시팔 그럼 이걸 다 어디로 옮기라는거여"
"아니 어따데고 시팔조팔이야?"

아침에 눈을 뜨자 집 밖에서 엄마와 우리 빌라 B102호 할아버지의 다투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잠도 덜 깬 상황이었지만 반사적으로 몸을 튕겨 일으켜 옷을 대충 추려입고 밖으로 향했다. 뭐 알만했다. 폐휴지를 주워 생활하는 영감님네는 우리 빌라 앞 골목에 산처럼 그 쓰레기더미들을 쌓아놓곤 했는데 지금 형의 여친이 그 모습일랑 봤다가는….

"에효"

그래도 맨날 뭐 하나라도 더 가져다 드리고 혼자 되신 불쌍한 할아버지라도 뭐 국도 떠다 드리고 하고 그랬는데, 결국 아들의 미래가 엮이니 엄마도 마음이 독해진 것이리라. 할아버지야 돌변한 엄마가 당황스럽기도 했겠지만, 그 역시도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감정이 격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으리라. 엄마와 할아버지의 싸움은 육두문자질로 번지기 직전이었지만 큰 소리에 함께 나온 다른 집 아줌마, 옆 동 아줌마들까지 엄마의 편에 합세하고 있었다. 내가 나설 필요도 없었다. 내가 정작 나서야 할 곳은, 그 쓰레기 산을 치울 때였다. …정말로 허리가 끊어질 뻔 했다.

"백수 아들 이럴 때라도 써먹어야지"
"아 진짜 나중에 내가 여친 데려올 때 두고 본다? 어?"

늦어도 목요일 금요일에는 도배, 장판 다 한다고 치면 집 주변 환경 정리는 오늘이 마지막이어야 했다. 나와 엄마는 집 앞 골목은 물론 우리 빌라단지 근처까지 다 싹싹 청소를 했고, 깨져서 신문지로 막아둔 2층의 복도 유리도 새 유리로 갈았다. 그리고 근 몇 년 만에, 문 앞의 센서등도 고쳤다. 정말로 근 10년은 된 거 같은데.




이미 깎고 깎고 또 깎았음에도 엄마는 일손을 돕겠다는 억지를 부려서 3만원을 더 깎았다. 결국에는 감정이 상해서 "상호 엄마도 그러는거 아니야" 소리까지 들어가면서 기어코 더 깎아낸 엄마는, 대신에 정말로 두 명 몫은 할 요량으로 도배 아줌마들을 도와 일을 했다.

어릴 적에는, 아니 지금도 사실 엄마의 저런 억척스러움이 너무 싫었지만, 언젠가의 중학교 때, 내가 자는 줄 알고 안방에서 엄마가 울면서 이모와 나눈 전화를 본의아니게 엿들은 뒤로는 난 단 한번도 그녀의 그런 억척스러움을 비난하거나 부끄러워 한 적이 없다. 단지 매번 슬플 뿐이었지.

도배 장판을 싹 새로 하고, 엄마는 거실의 시계까지 새 것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엄마가 어떤 마음으로 이 '아들의 여친맞이'를 준비하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상록수회'라고 쓰인 그 누런 시계는 엄마와 아빠의 결혼선물이었다. 그 낡고 빛바랜, 이젠 누렇다 못해 허연 느낌까지 있는 오래된 시계를 엄마는 수시로 닦고 또 닦았다. 그리 먼지가 쌓이지도 않았음에도.

아마 그것은 엄마가 외로움을 느낄 때, 너무 힘들어 아빠를 떠올릴 때마다 한 행동이었으리라. 그런 시계를 엄마는 "이것도 버리자, 진짜 이젠 낡아서 못 봐주겠다" 라며 떼어내었다. 나는 엄마가 후회할까 두려워 몇 번이고 말렸지만, 엄마는 단호했다.

"에휴 버려. 엄마가 이따 가서 새로 사올거야"
"참 진짜"

결국 엄마가 내다버린 것을, 내가 곧 뒤따라나가 그 시계를 슬쩍 가져다가 비닐 씌워 옥상 한 구석에 올려두었다. 엄마가 버린 것을 후회하는 모습이 보이면 얼른 다시 가져올 수 있도록.



"이거 다 먹지도 못한다니까"
"아 남으면 우리가 먹으면 되지"

마지막은 먹거리였다. 엄마는 유난히 들뜬 얼굴이었다. 갈비도 사고, 삼겹살도 사고, 전 부칠 거리도 사고, 한우 국거리도 사고, 봄동에 나물에 오만 반찬거리를 다 사고, 토마토에 청포도에 뭔 계절에 안 맞게 체리까지 사고 심지어 김치도 익은 김치 뿐이니 겉절이 조금 해야겠담서 배추까지 조금 샀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새벽 1시 반이 되도록 준비를 했다. 도배에 장판 까느라 힘들었을 금요일 밤인데도.




"아휴 엄마 됐어. 여울이 돈 많어"
"네네, 어머니 나오지 마세요. 아휴, 아니에요 어머니, 무슨 용돈을 다, 괜찮아요 어머니 정말 괜찮아요, 하하"
"받아둬, 응? 내가 주는거니까, 받아둬. 상호랑 둘이 맛난거 많이 먹고, 이건 니 용돈 해. 받아둬 받아둬"

카톡에서 몇 번 보았던 형의 여친은 사진보다는 더 정감 어린 얼굴이었다. 못 생겼다는 말이 아니라, 세련된 도시미녀보다는 싹싹한 타입의 친절한 얼굴이랄까. 누구라도 웃으며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은 호감형 타입. 분명 형도 어떤 '확신'이 있었기에 그녀를 우리 집에 데려올 수 있었으리라.

실제로 누나는 꽤나 싹싹했다. 엄마가 기겁을 하며 말리는데도 기어코 설거지도 엄마와 도와 나란히 하지를 않나, 빼는 대신 "어머니 정말 맛있어요" 하며 밥을 정말 맛있게 먹는다거나. 형의 얼굴도 꽤나 흐뭇해보였고, 저렇게 성격 좋은 여자를 만난 형이 새삼 부러울 지경이었다.

그래도 형이 과연 낫긴 낫다, 대단하다 하고 새삼 생각했다. 그저 엄마는 좋아서 입이 귀에 걸렸고, 나중에 만원짜리 수십장을 기어코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아마 그 돈은 내 돈이었겠지만.




그날 밤, 화장실을 가며 본 엄마는 안방에서 혼자 적금통장 몇 개를 펴보며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아마도 엄마의 머릿 속에선 형의 결혼식까지 이미 다 치뤄지고 있을테고, 이제는 전세자금을 생각해 본 것이겠지. 전세금이라도 어떻게 조금 보태야 할텐데, 하는.

나 역시 뻔한 우리 집 사정을 생각하며 혼자 짱구를 꽤 많이 굴려봤다. 그러나 백수 처지에 뾰족한 답이 있을리 없고, 조금은 답답한 밤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걱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형과 그 무척이나 행복한 표정으로 웃고 있던 형의 카톡 사진 속 누나의 모습은 그 후 몇 주 가지않아 사라졌고, 생전 카톡 프로필에 상태 메세지 같은 것을 남기지 않던 형의 카톡에 '힘들다' 라거나 '현실의 무게', '숨길 수 없는 세 가지' 등의 조금은 오그라드는 문장들이 수놓아지더니 그마저도 사라지고 곧 기본 프로필로 돌아갔다.

그것으로 이미 나는 조금 짐작했지만, 이후 형이 집에 올 때마다 웃으며 "여울인지 꺼굴인지는 잘 있냐?" 하는 엄마의 농 섞인 말에 어느 날 벌컥 "그 년 이야기 좀 꺼내지 마, 돈 밖에 모르는 년!" 하고 화를 내는 형의 모습에 결국 슬픈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엄마는 당황하며 형에게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지만 나는 그것을 말리며 그저 고개를 저었다. 이미 더이상 바늘 하나 더 들어갈 곳 없이 수없이 인이 박힌 엄마의 가슴이건만, 그날 또 굵은 말뚝이 박혔겠지.




"백퍼 엄마 후회할 거 같아서 따로 챙겨놨었어"

형에게는 "세상에 여자가 그년 밖에 없다디?" 하고 퉁을 놓더니, 정작 형이 가고 나자 혼자 거실에서 긴 한숨을 쉬는 엄마를 위해 몰래 옥상에서 결혼 기념 시계를 찾아다가 걸어놓았다.

"에그…"

그리고 그제서야 꽤 오랫동안 참았던 긴 울음을 터뜨린 엄마는 내 품 안에서 한참을 꺽꺽대며 울었다. 나 역시 괜히 눈물을 줄줄 흘리며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뭐, 사실 나는 결혼 같은거 별로 생각도 없고 마음도 접었지만, 만약 내가 결혼할 기회가 온다면… 정말 그런 여자가 있다면, 거지도 상거지 같은 우리 집 구석의 경제사정에 대해 실망하지 않을 수 있는 여자, 그거 하나면 절대, 절대로 그녀를 무슨 일이 있어도 평생 모시며 행복하게 해줄거라고, 요리 못하고 집안 일 같은거 안 하고 못생기고 뭐 잘난거 진짜 단 하나도 없는 여자라도, 그래도 정말 잘해줄거라고.

그래서 인이 박힌 엄마 가슴에 더이상 못 안 박을 여자면 그걸로 나는 족하다고. 뭐,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역시 그냥 나같은건 장가 안 가는게 모두에게 행복한 길이겠지만.

"에휴, 엄마도 그만 울어. 뭐 잘못했다고 울어. 됐고, 밥이나 먹자. 내가 라면 끓일게"




"후우"

닫힌 안방에서 희미한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은 내 착각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여울이 누나도, 물론 우리 집이 가난하긴 해도 진짜 우리 집은 다시 안 봐도 되는데, 절대 안 귀찮게 하고 무슨 시집살이니 그런거 없고 그냥 형하고 누나, 아니 형수님, 아니 전 형수? 여튼 누나하고 둘이서만 진짜 알콩달콩 잘 살면 되는데, 다시 한번 잘 생각해보고 우리 멋있고 착한 우리 형이랑 다시 사귀었으면 좋겠다. 정말로. 진심으로 다시 잘 되길 빈다.

그리고 끝끝내 다시 잘 안되더라도… 그냥 그 날 표정관리 잘해줘서 고맙다는 말은 하고 싶다. 솔직히, 나라도 실망했을테니까. 흐. 쯥. 

우리 같은 사람 소설

어릴 적부터 대가리가 좀 돌아가면서 크게 삐뚤어지지 않은 놈들은 알아. 자기가 지금 제대로 된 길을 걷고 있다는거. 이대로 스트레이트로 쭉 앞으로 가기만 하면 된다는거.

암, 알다마다.

본인 뿐 아니라 주변은 더 잘 알아. 이대로 가면 이 놈은 되는 놈이라는거. 부모들도 알아. 되는 놈이랑 안되는 놈이랑은 같은 제 자식새끼라도 손이 한번 덜 가고 더 가고가 있지. 부모가 그 정도인데 주변 사람은 어떻겠어. 되는 놈한테는 확실히 대우가 달라져. 그 본인도 자부심이 있어서 스스로 노력도 할 줄 알고 욕심도 많고, 사실 제 능력 잘난거 아는 놈들은 크게 열심히 안 해도 알아서 쭉쭉 앞서가. 사람 자신감이라는게 원래 그래. 뭐가 될 때는 노력도 안 하고 개판쳐도 알아서 잘 되거든. 신기하게 그래.

근데…

사람 사는게 꼭 꽃길만 걸을 수는 없거든. 본인 잘못이든 주변 환경 탓이든 삐끄덕 하는 수가 생긴단 말이야. 근데도 보통은 어떻게든 잘 주워 넘기게 되는게 우리 같은 사람이야. 누구 말마따나 "되는 놈은 하늘이 돕는다" 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그런데 운이 거기까지였는지 뭐가 단단히 꼬였는지 아니면 거기까지가 한계였는지 결국 미끄러지는 놈이 나와. 엘리트 노선, 1등 그룹에서 떨어져 나가는거지. 곤조 있는 놈들은 그래도 2등 그룹에라도 어떻게든 머무르며 아둥바둥대다 올라오기도 하는데, 열에 아홉은 나가떨어져. 그게 원래 또 그래. 1등, 최소한 1등 그룹에 있던 그 우월한 기분에 취해 살던 놈들이 그걸 못 갖게 되면 이게 견디기가 어지간히 힘들거든. 주변에서도 "어어?" 하고 한두번은 봐주다가 결국 '안되는 놈이구나' 하는 판단 들면 싹 대우가 달라져. 이제부턴 추락이지.

그래도 사실 본인은 잘 몰라. 대부분은 '내 지금 잠깐 폼이 떨어져 있긴 한데, 금방 다시 치고 올라간다. 어떻게든 올라간다' 마음은 먹는데 그게 잘 안돼. 사실 지가 잘나가던 것도 어떤 특별한 노력이나 뭘 해서가 아니라, 그냥 본능적으로 하는대로 하면 그게 잘되던 것들인데 그걸 잃어버리고 밑바닥에서 다시 올라간다는게 쉬운게 아니거든.

그리고 그렇게 시간 흘려보내다보면 슬슬 어느새 현실에 안주하게 돼. 꼭 그렇게 안해도 되잖아, 적당히 이런 느낌도 괜찮잖아? 하는 식으로. 이게 참 지랄맞게 묘한 함정인데 솔직히 말하자면 이게 맞아. 한번 제대로 낙오한 놈들은 저 끝 위에까지 다시 못 올라가. 열에 아홉은. 한번 비틀, 한 놈들은 다시 살아나도 아예 바닥에 추락해버리면 올라가기가 힘들어. 거기서 차라리 안주하는게 지 팔자에는 더 나을 수도 있어. 그래도 가락 있던 놈들이고 교양은 아는 놈들이라 만족하고 살면 기본은 하거든. 어디가도 무시는 안 받을 수 있어. 정신줄만 더이상 안 놓아버리면.

그럼 이제 그렇게 어떻게든 뭉개고 사는거야. 그래도 썩어도 준치라고, 되는 놈들은 그 가락이 있어서 뭘 해도 또 중간 이상은 가. 밑바닥에서 구걸을 해도 남바 투 남바 쓰리까진 어떻게든 꿰어찬다고. 나는 이게 바로 권력의 본질이라고 봐. 되는 놈이랑 안되는 놈은 싹수가 다르다니까.

설령 클라쓰가 좀 떨어지고 막 그러면서 혼란스러우면 몰라도, 어떻게든 정신 차리고 나면 지 주어진 환경 안에서는 또 어떻게든 해먹을 줄 아는 대가리와 기품이 있단 말이야. 이제 영영 소머리는 못할 지언정 고양이 대가리, 쥐모가지 정도까진 한다 이 말이지. 이거는 진짜 옆에 있는 여편네들이 더 잘 알걸? 이 사람이 '되는 놈'인데 때를 못 만나고 사람을 제대로 못 만나서 이러고 망해버렸구나, 하는거. 그 안타까운 마음이라는거는 사실 이루 말할 수가 없지. 물론 정신 못 차리고 현실 못 받아들이고 혼자 망상이나 꾸고 앉아 있으면 더 한심하겠지만.

그래도 여튼 팔자가 한번 꺾이고 나면 더이상 청운의 꿈은 펼치지 못하는거야. 제 마음 속에는 강태공마냥 '나는 세월을 낚을 뿐이오, 언젠가 내 크게 뜻을 펼칠 날이 올 것이다' 하고 막 다짐을 해도 본인 스스로가 잘 알지. 끝났다는거.

나이를 한살 두살 먹으면서 서서히 '그래도 어떻게든' 하고 막연하게 다짐했던 꿈을 향한 길들이 막히는 것을 느껴. 그래도 야심 있는 놈들은 다른게 뭐냐면, 그러니까 우리 같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다시 위로 가는 동앗줄이 보이잖아?

그럼 영혼을 팔아서라도 이를 악물어. 이미 이때부터는 그게 진짜 동앗줄인지 썩은 줄인지도 잘 구분이 안 돼. 어렸을 때는 그렇게나 잘 보이던게. 그래도 방법이 없어. 탐이 난단 말이지.

아니 재판 받으러 검찰청 가는 길에 가슴이 두근두근 뛰는데, 그게 무서워서 떨리는게 아니라, 여기가 대한민국 파워맨들이 있는 거기다 이 말이지? 하고 설레이는 마음으로 뛴다니까. 무슨 왕의 귀환이라도 하는 것마냥.

국회에 가잖아? 놀러와서는 하릴없이 그 잔디밭을 가로 지르면서 걸어가는데 막 되도 않는 야심이 뭉개뭉개 피어오르는거야. 내 반드시 저기 입성하리라, 언젠가는. 실제로는 국회는 무슨 동네 통반장도 못 해먹을 위인으로 추락했는데도. 그게 우리 같은 사람인거야.

그러니 우리한테 기회가 오면 어쩌겠어?

박근혜 발가락도 빨아주고 문재인이 똥꼬도 빨아줄 수 있어. 그게 우리 같은 사람이야. 알지, 알다마다. 바로 그런 걸 잘 알아서 우리 같은 놈들 이용하고 버린다는거.

근데도 어쩔 수 없어. …다시 한번 저 위로 가는 길, 잃어버린 그 빛을 찾을 길이 생기잖아? 가는거야. 불나방이든 뭐든, 평생 이러고 가판대에서 세상 모지리들 욕하면서 대가리 썩히다 죽을 바에야, 단 한번이라도 다시 "거봐라, 나 되는 놈이었다고! 알겠냐 이것들아?" 하고 떵떵거리면서 잃어버린 자존심 되찾고 빛나다 죽고 싶은 '망한 대가리'들이 우리 같은 사람들이지.

하지만 어쩌겠어. 나같은 놈들이 광역시로 하나 가득할텐데. 평생 이러고 뭉개다 가는거지. 쯥.

모태솔로 소설

회식 자리의 분위기가 뜨악하는 분위기다.

"정말로요?"

뱉은 순간 후회했지만, '이런 흐름이라면' 하고 내뱉은 내가 잘못이라면 잘못이지.

"네, 38년 동안 살면서 단 한번도 여자를 사귀어 본 적이 없어요"

그 말에 곧바로 최 주임이 물어본다.

"그럼 여자랑 어디까지 가 봤어요? 모태솔로라고 해서 꼭 동정이라는 법은 없잖아요"

곧바로 이랑이랑 연희씨로부터 "어후~" 하는 비난이 쏟아졌지만 최 주임은 "아니 그게 뭐. 사랑해도 사귈 수 없는 상황이라는게 있잖아" 하고 어색하게 수습한다. 그리고 사실 뭐 '남자들 사이에서는' 적당히 면을 세우는 회피의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귀지는 않았지만 그거는 해봤다구, 하고 둘러대는 식의. 뭐 이 나이 먹고 정말로 여자 경험이 단 한번도 없다면 그건 그것대로 기분 나쁜 일이기도 하고 말이지. 하지만 거짓말을 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경험도 없어요. 그냥, 손 잡은거 정도? 뭐 그것도 대학교 때 일이에요"

그 말에 또 "와~" 하는 감탄이 터져나온다. "천연기념물이네 천연기념물" 하고 주 팀장님이 맥주 잔을 든다.

"그럼, 우리 강 대리 올해에는 꼭 연애할 수 있기를 기원하며, 건배!"

이런저런 이야기가 더 나오면, 이런 이야기의 결말은 꼭 우울한 나에 대한 비난으로 끝나는 법인데 적절한 타이밍에 팀장님이 끊어주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모태솔로






"에이"

그럼 그렇지, 헬조선의 술자리에서 약점 털어놓은 인간이 안 씹히고 끝나는 경우가 있나. 하, 개븅신 찐따 모지리 호구 등신 천치 새끼. 뭐한다고, 뭐가 자랑이라고 그걸 털어놓아 븅신아.

"하, 진짜"

신나게 독설파티가 시작됐다. 술자리에서 성질 부릴 수도 없고, 그저 이렇게 화장실에서 욕 한 마디 하고 세수 한번 하는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다시 문을 열고 나서자 모두의 이야기가 내 귀를 다시 괴롭히기 시작했다.




"실은 나도 저번에 강 대리님이랑 우리 다같이 강촌 갔을 때 있잖아요. 그때 나랑 같은 조 됐었잖아요. 그때 나랑 이인삼각하는데 다리에서부터 막 바르르 떠시더라구요. 나는 그때도 조금 그냥 혹시 강 대리님이 나한테 관심 있나? 그래서 긴장했나? 했는데"

이미 최 주임에 주 팀장이 신랄하게 한 마디씩 하고 나니, 현지 대리까지 웃으며 슬슬 포문을 연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화를 받았다.

"아 그럼, 모쏠이 여자 맨 다리에 다리 묶었는데 안 떨리겠어? 다리 뿐이 아니라 그때 달리는데 이렇게 막 다들 부둥켜 안듯이 뛰더라고. 나도 그렇게 해야되나? 해서 막 쿵쾅댔지 가슴이"

초연한 듯 말했지만 속이 쓰리다. 나만의 조금 설레였던 기분 좋은 추억이, 뭔가 묘하게 웃음거리가 되는 느낌이라서.

"그럼 그때 두 분은 어떻게 달렸어요? 나는 그때 그 마케팅팀 윤정씨랑 이렇게 서로 허리 안고 뛰었는데. 허리 엄청 가늘더라고, 윤정씨 완전 말랐어. 보기에도 그렇지만 진짜… 어휴. 근데 어떻게 참. 대단해. 막 위에는 이런 분이, 어? 허리는 또 그렇게나. 여튼, 두 분은?"

최 주임이 기분 나쁜 섹드립까지 치면서-그러나 다들 그의 과장된 손동작에 오히려 웃기까지 한다- 끼어들자, 현지 대리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우리는 디게 어색하게 자세 안 나오게 이러고 뛰었죠. 그래서 우리 꼴찌했잖아요"

입을 가리며 웃는 현지씨가, 더이상은 예쁘지 않다.





"이게 사람이 …그런게 있어. 외모라는게 중요한거거든. 아니 막말로, 어? 외모 보지 말았으면 좋겠다 하는 사람도 막상 지가 누구 사귀자고 할 때는 외모 보잖아? 안 그래?"

동의를 구하며 포문을 연 주 팀장님.

"그래, 사람이 옷을 왜 몇 만 원 몇 십만원씩 들이며 사입어? 그냥 추위 피할라고? 그럴라면 그냥 짐승 가죽 뒤집어쓰고 말지. 근데 왜 입어? 기왕이면 멋있으면 좋으니까. 디자인팀이 왜 있어? 기왕이면 같은 제품 더 이쁘면 잘 팔리니까. 왜 광고모델을 써? 잘난 사람이 광고하면 눈길 한번을 줘도 더 주고 상품 이미지도 좋아지니까. 하물며 사람도 어? 인물이 나으면 하는 짓도 더 이뻐보이고 똑똑해보이고 그런게 있거든. 같은 그거라도."

진지하게 파고 드는 그의 논조에 나는 어느새 안주만 입에 퍼넣고 있다.

"내가 강대리를 뭐라고 하는게 아니라, 이게 본인이 뭐, 어? 하루 아침에 달라질 수야 없지 당연히. 근데 이게 조금이라도 노력을 하면, 본인한테도 좋고, 뭐 그 본인을 보는 다른 사람들 눈에도 좋고, 두루두루 좋은거 아니겠어? 퉁퉁한 사람은 살도 좀 빼고, 너무 마른 사람은 좀 찌우고, 너무 작은 사람은 깔창을 깔고, 너무 큰 사람은 좀 자르고…"

뜬금없는 아재 개그에 분위기는 싸하지만 주 팀장은 그걸 무마하려고 오히려 논조를 좀 더 강조한다.

"나도 뭐 그렇게 잘나서 떠들 입장은 아니긴 하다만 그래도 뭐, 강대리 정말 좋아해. 인간적으로. 다 좋아. 착하고 성실하고, 어? 여기 다른 직원들도 다 열심히 하지만 그래도 내가 강 대리를 특별히 믿는게 뭐냐면, 사람이 됐어. 됐거든. 어떻게 됐냐? 지난 번 이브 때 그 납기 빵꾸 났다고 지역사에서 올라와서 다 뒤집어 엎을 뻔한거 있잖아. 그때 사실 그때도 먼저, 혼자 나와서 그냥 수습하겠다고, 그렇게 나와서 혼자 다 수습하고 크리스마스 전전날부터 철야해서 이브에 밤 9시에 퇴근하고… 내가 그 마음을 어디 모르겠어? 그니까 다들 다음에 강 대리 뭐 진급 이야기 나오면 입 싹 다물어. 알겠어? 또 뭔 씨 진급연한보다 이르네 뭐네 그딴 소리 하면 다 연휴 출근 시킬테니 그리 알어. 그리고 뭐냐, 내가 뭔 이야기 하다 여기까지 왔어?"

그랬구나. 다들 잘했다 고맙다 했지만 사실 뒤에서는 말들이 나왔었구나. 하, 참.

"하여튼, 맞어. 강 대리는 다 좋은데 뭐랄까 그거 하나. 자기를 꾸밀 줄을 몰라. 이게 외모만이 아니라, 사회생활이라는게 기름칠도 조금 하고 그래야 되는데, 이게 또 그런 면에서 사람이 잘나 보이고 뭐 좀 그런게 있으면 플러스로 더 받는게 있단 말이야. 당장 우리 인턴들도 봐. 이제 갓 대학 졸업하는 애들이 뭐 꾸미기는 또 얼마나 다들 이쁘고 멋지게 꾸몄어. 걔들이 뭐 여기서 소개팅하려고 꾸며? 아니잖아. 좋은 인상 주려고 그러는 거잖아. 아니 강대리도 당장 처음에 어? 입사할 때 입사면접 때 옷 뭐 입고 왔어? 정장 딱 멋있게 입고 왔잖아"

그때 나 정장 안 입고 왔었는데. 여튼 굳이 토 달고 싶진 않다. 그보다 내가 그렇게나 좀 그랬구나. 그랬어. 허허.

"팀장님, 술잔 비었는데 한잔 제가… 다들 잔들 채우시죠?"

나도 모르게 얼굴이 굳었던 모양인지, 최 주임이 힐끔 내 눈치를 보다가 팀장님의 잔을 채우며 살짝 맥을 끊는다.




"제 친구 중에 하나도 인스타그램에서 디엠 보낸 사람이랑 몇 번 보다가 사귄 적 있거든요"

취미 생활과 그것을 통한 연애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이랑씨가 주변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게 온라인에서 만나서 뭐가 되기는 돼? 도통 막 인터넷 사진은 딱 믿을 수가 없잖아? 특히 여자들 셀카는"

주 팀장의 말에 이랑 씨가 "아 왜요. 여자들 셀카가 뭐 어때서" 하고 애교를 부리더니 "나도 좀 그런가? 근데 원판이 구리면 셀카도 구린건데" 하며 혀를 쏙 내민다. 과연 스물 여섯살 여자애라 뭘해도 귀엽다.

"어? 강 대리님 아빠 미소 짓는다 아빠 미소"

최 주임이 또 끼어들어 나를 공격한다. 나는 얼른 표정을 수습하며 "아니에요 무슨" 하고 입을 슥 닦지만 얼굴은 화끈 달아오른다. 그러자 주 팀장이 묻는다.

"이랑씨 남친 있다고 했나?"
"있어요"

현지 대리가 대신 곧바로 대답한다. 그랬구나, 역시. 그게 내가 아쉬울 일은 당연히 아니지만.




"음, 일단! 강 대리님은 체형이나 패션 이런건 둘째치고, 그 좀 제가 되게 교정해주고 싶었는게, 이거 목 있는데 이렇게 좀 등 굽어서 걷는거랑 안경 이렇게 막 이상하게 고쳐 쓸 때랑 팔자 걸음이랑… 그리고 가방?"

가방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모두들 까르르 웃는다. 아 그랬구나. 이 가방이 뭔가 문제였구나. 뭐 말하는지는 알겠지만. 이랑 씨가 언제부턴가 제일 매섭고 아프게 나를 공격한다. 어쩌면 아직 어려서, 사회경험이 그리 많지 않아서 더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고, 술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맨날 보면서 저 가방에 뭐가 들었길래 그렇게 무거운 캠핑가방 같은걸 들고 다닐까 했거든요. 뭐 들었어요?"

뭐 안에 들은거야 별 거 없는데.

"노트북이랑 아이패드랑, 어, 책 이것저것이랑, 닌텐도 스위치랑, 3DS랑, 마우스랑, 블루투스 키보드랑 음, 마우스랑… 뭐 크게는 없어요"
"그게 이미 많은거죠!"

하긴 나도 요즘 좀 정리 좀 할까 생각을 많이 하기는 했다.

"그리고 게임 같은거, 뭐 취미생활이긴 해도 혼자 하는 취미 생활 갖는건 연애에도 마이너스라고 생각하거든요"

꽤 돌려 말하긴 했지만 결국 게임덕후는 싫다, 이거겠지. 물론 이해한다만.




"아냐 진짜 사내연애는 할게 못 돼요. 내가 예전에 전전 직장에서 잠깐 사내 연애 했을 때, 아 진짜 스트레스 받는게 하나둘이 아니고, 또 막 싸우면 하루종일 얼굴 봐야되지, 아 진짜 헤어져도 막 뒷수습 안되지 절대로 하면 안됩니다. 사내연애는"

팀장님이 "정 없으면 회사에서 한번 찾아봐 어? 내가 강 대리 사내연애는 딱 모르는 척 넘어간다!" 하고 너스레를 떨자 최 주임이 끼어들어 한 마디 퉁짜를 놓는다. 어디 뭐 나랑 사귈 여자가 우리 회사에 있긴 하겠냐만.

"아 그러고보니 연희씨는 남친 있다고 했나?"

팀장님이 묻자, 아까부터 계속 이야기만 잠자코 듣고 있던 그녀는 "아뇨, 없어요" 하고 어색하게 고개를 젓는다. 그러나 현지 대리가 웃으며 말한다.

"아 팀장님 연희씨가 몇 살인데요. 강 대리님이랑 띠동갑도 넘어가요"

그러자 팀장님이 웃는다.

"아 누가 뭐래나? 연애 이야기 하니까 물어본거지?"




"그게 근데 나는 솔직히 안 하는게, 정답이라고까지는 말 못 해도 제일 속 편한 길이라고는 봐. 막말로 여기서 술 퍼마시는 저 아저씨들부터 해서 여기서 결혼해서 나 진짜 너무너무 행복하다 말할 수 있는 사람 몇이나 있을까? 신혼부부 한 둘 빼면 없지 없어. 막 애 낳고 지지고 볶고 돈 들어가고 하면 그게 뭐야, 내 인생이라는게 아예 없잖아. 안 그래?"

팀장님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슥 떨군다.

"여자들은 여자들대로 애 키우고 집안일로 힘들고, 남자는 남자들대로 처자식 먹여 살릴 부담되고. 어찌보면 혼자 사는게 속 편한거야. 안 그래? 다들 똑똑한 척 하지만, 어찌보면 혼자 사는게 제일 난거야 제일."

어느새 나는 독신주의자처럼 되어 있었다. 물론 '안하는' 이 아닌 '못하는' 의 독신. 사실이기도 하고.





"어후 많이 먹었네요"
"네, 저도 엄청 먹었어요"

그 이후로 한 시간 정도 더 이런저런 수다의 시간이 지나가고, 드디어 술자리가 파한 후 나는 연희씨와 같은 방향으로 아차산을 향해 전철을 달리고 있었다. 내가 조금은 더 재미있는 사람이라면 좋았겠지만, 결국 이 나이 먹도록 솔로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에 대하 초탈하지 못한 나는 결국 연희씨를 무척이나 의식하며 어색하게 말 한마디 겨우 꺼내고 또 한참을 말없이 묵묵히 서서 가기 시작했다. 그녀도 몇 번인가 휴대폰을 꺼냈다 넣었다 하며 그 어색함을 달래는 모양이다.

"집이 원래 이쪽이에요?"

한참 대화가 끊어지고 텀이 길어졌던 터라, 그녀는 내 질문에 또 조금 놀라더니-미안했다- 대답했다.

"네, 대리 님도 이쪽이시죠"
"네. 그럼 보통 몇 시에 나와요?"

별 것 아닌 질문이었지만 대답이 다소 늦어짐에 '아 혹시 내가 일부러 그 시간에 맞춰 나오기라도 할까봐 좀 그래서 그런가보다' 하고 혼자 씁쓸한 생각을 하게 된다. 아니 그냥 내가 혼자 자격지심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흐.

"보통 7시에 도착해요 역에"
"아 그렇구나"

그러고 나니 할 말이 없어진다. 다행히 마침 우리 앞에 앉아있던 커플이 일어나고 우리는 함께 앉게 되었다. 그러나 역시 딱히 할 말은 없고 나는 언제나와 같이 가방에서 게임기를 꺼냈다. 그리고 그제서야 연희씨가 말을 건낸다.

"나 그거 알아요. 스위치, 처음 봤어요 실물로는"





연희씨는 보기와는 달리 나름 덕질 좀 하는 여자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집에 PS4가 있는 여자' 정도로, 내공이 심후한 타입은 아니고 그냥 지브리 애니메이션 좀 좋아하는 수준의 그런. 루리웹 좀 하냐고 물어볼까 하다가 관두었다. 회계팀 경진씨가 진짜 내공으로는 우리 회사 최고지. 뭐 별로 이야기를 몇 번 해본 적은 없지만.

연희씨는 어느새 게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젤다의 전설을 켜주니 한 10분 정도 꽤 재미있게 플레이를 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이런 여동생이 있었다면 스위치 정도야 얼마든지 양보…까진 힘들어도 그냥 한 대 더 사줄 수는 있지. 그리고 그랬더라면 지금처럼 여자 면역이 없어서 이 날 이 때까지 모솔로 지내지는 않았을텐데.

참 수많은 여자들을 짝사랑했다.

조금이라도 나에게 다정하게 대해주면 혼자 가슴 쿵쿵대고, 뭐 하나라도 더 챙겨 줄 수 있으면 챙겨주고. 그렇다고 대담하게 고백은 못 해봤지만-한번 해봤지만 그 당혹스러운 표정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만약에 내가 여자를 사귀게 된다면, 그러면 정말로 정말로 잘해줄텐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다 해주려고 했을텐데.

가끔 주변에서 우연찮게 주워들은 이야기나 혹은 인터넷의 사연들 보면 참 나쁜 놈들도 많은데 나라면 안 그랬을텐데, 정말 일편담심으로 잘해줬을텐데. 아니, 어쩌면 나도 그렇게 되려나.

게임을 열심히 하는 연희 씨의 모습을 보노라니 또 나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어버린 모양이다. 그리고 아까 회식 때 보니까 은근 그게 티가 나는 모양이다. 앞으로는 조심해야지 생각하며 다시 시선을 그저 게임기 안으로 돌린다. 조금은 서글프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 모양 이 꼴로 이렇게 살아온 내 탓을 누구에게 하겠는가. 그리고 또 나름대로는 나는 그럭저럭 최선을 다하고 살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대리님, 저 여기서 내릴께요"

한참 딴 생각을 하고 있노라니 그녀가 나에게 조심스레 게임기를 건내며 일어선다.

"아아, 그래요. 그럼 잘 들어가고 월요일에 봐요"
"네, 대리님도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그래요"

연희씨가 내리고, 어쨌든 나는 나름대로 '귀여운 여자가 내 게임기로 게임을 즐겁게 하는' 소중한 경험을 얻었다고 생각하며 내심 자축한다. 남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나에게는 꽤나 감동적이며 인생에 몇 번 없는 귀중한 경험이기도 한 것이다. 누군가가 알면 경기를 일으킬 변태같은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외롭고 쓸쓸한 삶이라 그런 것이라고 좋게좋게 생각해줬으면 좋겠다고 변명해 본다. 오타쿠 중에 나쁜 사람은 없다고! 라는 격언을 떠올리며. 물론 나는 이제는 그리 진성 덕후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아니 맞나? 아니더라도 솔직히 내 외모를 보면 보통 내가 덕후려니 생각하겠지.




"후우"

집에 도착하고 보니 어느새 10시 반이 넘었다. 습관적으로 PC를 발로 켜며, 보일러 불을 올리고 샤워를 시작한다. 예전에는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많이 불어난 뱃살이 요즘에는 정말 스스로 조금 신경이 쓰인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무엇인가를 하지는 않지만.

"응?"

씻고 나와보니 휴대폰 알림창에 카톡 메세지들이 주르륵 떠있었다. 뭐 회사 일에 문제 생겼나 싶어 토요일 출근을 각오했지만 의외로 그 내용은 꽤 뜻밖이었다. 현지 대리와 최주임과의 단톡방이었다.

[ 대리님ㅋㅋㅋㅋ ]
[ 도착하셨나요? ㅋㅋㅋㅋ ]
[ 상호 대리님 혹시 소개팅 생각 있어요? ]
[ 아까 팀장님도 은근히 강 대리님 소개팅 자리 좀 알아보라고 하셔서 아까 최주임님이랑 같이 집에 가는 길에 좀 알아봤거든요ㅋㅋ ㅋㅋ ]
[ 산본 센터의 아영님이라고 혹시 아세요? ]
[ 아 이제 읽으셨다 ]

둘은 신나서 무어라무어라 써대는데 뭐, 고맙지만 글쎄. 요즘처럼, 아니 원래부터 나처럼 자존감 떨어진 사람이 소개팅을 하는게 과연 맞을까. 조금은 조롱거리가 된 느낌이라 싫기도 하지만 그건 피해의식이겠지.

그보다 회사 사람이면…. 그리고 아영님은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사내망에서 몇 번 산본 센터 워크샵 사진 올라왔을 때 확 눈에 들어오는 귀여운 분, 이라 기억은 하고 있는데. 나야 싫을 이유가 없지만 내가 과연 어울리기나 할까. 나이도 엄청 어렸던 걸로 기억하는데. 스물 일고 여덟?

[ ㅎㅎ고마운데 회사 사람이면 좀;; 잘 안되면 민망하기도 하구... ]

그러자 또 몇 번인가의 ㅋㅋㅋ 세례가 지나가고 다시 최주임이 말을 건낸다.

[ 아니요ㅋ 아영님 아는 언니가 저번에 소개팅 자리 좀 알아봐달라고 했는데 41살이래요 ]

아. 뭐 내 입장에 누굴 가릴 상황은 당연히 아니라는 것은 잘 알지만 38살과 41살의 소개팅이라니 뭔가 이건 소개팅이 아니라 재혼 만남 쯤은 되야 어울리는 나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부터 든다.

[ 고마워 생각해볼게 근데 나 소개해주고 욕 먹는거 아냐? 막 억지로 소개해주고 그럴 필요 없어ㅋㅋ 괜찮어ㅋㅋ ]

진심으로. 당장 나부터가 내가 매력이 없는데 다른 누군가가 나를 좋아해주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무엇보다 당장 한껏 꾸미고 소개팅을 나올 그녀가 나를 보고 얼마나 충격을 먹겠으며 얼마나 자기 상황에 대해 자괴감이 들겠는가. '이제 나는 이런 사람이랑 만나야 하나?' 하는 생각.

"음"

거기까지 생각하자 문득 한없이 미안하고, 내 자존감이 가라앉으며 그 모두에 앞서서 그냥 괜히 모쏠이라는 것을 고백했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 여튼 고마워요 다들ㅎ 그럼 주말 잘 보내세요~ ]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아리송한 대답을 남긴 채 나는 머리의 물기를 털었다. 눈가에 맺힌 물기를 애써 수건으로 닦아내며. 그리고 카톡, 카톡, 하는 몇 번의 추가 메세지에 대답을 하는 대신 나는 못 본 체 침대에 누웠다.

"하아"

가볍게,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문득 꽤 낮게 느껴지는 천장에 깔려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잘못한 사람도 없고 미운 사람도 없다. 심지어 나에게조차도. 그냥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하는 생각도 해보고… 내일은 못다한 호라이존 엔딩이나 봐야겠다고 생각해본다. 그런 주말이다.

메탈맨 소설



* 경고: 본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기업이나 인물, 제품 등은 허구의 것이며, 현실과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미리 분명하게 밝혀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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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의 최종 선고를 앞두고, 재판장은 숨소리 하나 없이 조용해졌다. 이번 대법원의 판결로 나의 운명은 물론, 우리 그룹의 미래까지 꽤 많은 것들이 크게 바뀔 것이다.

"후우"

대한민국 최고의 변호사들로 드림팀을 꾸미고 입김이 닿는 정치계 인사들과 법조계 원로, 전현직 판검사들을 통한 압박에 나섰음에도 워낙에 여론과 정치적 상황이 좋지 않아, 변호팀은 6:4 정도의 조심스러운 우세를 내다보았다. 그러나 그 말은 달리 말하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우 아슬아슬한 우세라는 것이었다. 바로 그 점이 마음에 걸렸다.

"대용아, 아슬아슬하게 이기는건 아무 의미가 없단다. 오히려 그건 상대에게 포기하지 않는 근성과 언젠가에 대한 희망을 불어넣어 줄 뿐이지. 압도적인 승리만이 승리라고 할 수 있는거다. 아니면 아예 근성부터 다 바꿔버려. 처자식 빼고는 다 바꾸라고. "

정정했던 시절의 아버지가 제왕학으로서 누차 했던 그 말은, 지금의 상황에서는 오히려 나를 더욱 압박하고 있었다. 안경의 콧잔등 사이로 흐르는 땀방울은 턱을 지나 수의의 가슴팍을 적셨고, 나는 주먹을 꾹 쥐었다. 그리고 판결문을 손에 든 재판장의 입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게 유죄라는 것인지, 무죄라는 것인지 알듯 모를 듯하게 왔다갔다 살랑거리던 판결문은 곧 하이라이트에 접어들었다.

"…하여, 피고 김대용의, 뇌물공여 및 횡령 배임 혐의에 대해, 유죄를 선고한다."

그리고 그 말에 나는 그만 코웃음을 쳤다. 참관인석에서는 "와-"하는 기쁨의 탄성과 "이건 말도 안됩니다" 라는 최 이사의 호통이 동시에 터져 나왔고, 변호인단은 일제히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면서 나를 쳐다보았지만, 나는 그저 허탈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뭐, 어쩔 수 없지"

불행 중의 다행일까. 그때의 웃는 표정은 평생 내 사진 중에 제일 잘 나온 사진으로, 다음 날 대한민국 모든 일간지 1면 표지를 장식했다. 망할.







메탈맨






감방 생활은 생각보다 적응이 쉬웠다. 그도 그럴 수 밖에 없는게, 재벌가의 장남으로 온갖 시선과 답답함 속에서 자란 나에게 감방은 차라리 해방감마저 주는 데가 있었으니까. 밥도 생각보다 먹을만 했고, 소위 말하는 '범털' 대우에 그 누구 하나 나에게 빡빡하게 구는 이가 없었다. 덕분에 나는 꽤 모범적인 수감생활로 '모범수'로까지 지정받아 꽤 많은 편의를 누렸다.

"하아"

하지만 딱 하나 괴로운 것이 있다면 변기였다. 아무리 천하의 진상그룹 회장이라고 해도, 감방에 비데를 들여놓을 수는 없었다. 전자담배까지는 어떻게든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반입이 가능했지만, 비데는 안된단다. 숨겨놓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니까.

"문제는…"

내가 꽤나 심한 치질이라는 것이다. 세상 부러울 것 없는 대기업 회장이 치질이라니 농담처럼 들리겠지만, 바로 그 글로벌 대기업 회장이라는 자리가 문제다. 40대의 젊은 회장이 어느날 원인불명의 병-대놓고 치질을 밝힐 수는 없는 거 아닌가-으로 입원한다면 기업의 주가는 물론 겨우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나의 리더십에도 심각한 우려가 생길 수 밖에 없으니까. 때문에 나는 꽤나 지독한 치질을 달고 있었는데, 덕분에 농담이 아니라 투옥된지 일주일 째 되던 날, 참지 못하고 진지하게 치질로 병보석을 신청하려고 했다. 그러자 김 변호사가 도너스 방석과 물티슈 두 팩을 건내면서 나를 말렸다.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겁니다"

내가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상관 없지만, 아직 어린 아들과 딸까지 내 탓에 분명 놀림을 당할 것이라는 말에는 그만 나도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덕분에 어쩔 수 없이 참고는 있지만, 아침마다 곤욕을 치룰 수 밖에 없었고 대법원 3심에 이르는 재판 기간 동안 나의 치질은 꽤나 악화되고야 말았다.

"크흐… 쓰흡… 아아, 아… 어?"

쓰라린 똥꼬에 신경쓰며 변기에 앉아, 김 변호사가 건낸 오늘의 신문기사를 읽고 있노라니 경제면 한 켠에 그가 써놓은 붉은 싸인펜 글씨가 눈에 띄었다.

[ 한국군 첨단 전투복 사업 관련 특급정보 유출 위기 : 회장님 긴급 대응 요망 - SSS ]




근 10년 전 쯤의 이야기다. 아직 아버지가 정정하던 그 시기, 나는 당시 온라인 플랫폼 사업의 대실패를 책임지고 경영 2선으로 물러나 있었다. 물론 그것은 표면상의 이유고 진짜 이유는 국방부가 요청해 온 한국군 첨단 전투복 사업을 진두지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방부가 요청해 온 것은 약 2020년대의 미래 첨단 전장에서 활용될 병사들의 전투수트였다. 분대원간의 실시간 온라인 무선통신 기능이나 보다 강화된 신소재 방탄 장비, 전면 방탄 헬멧 등의 2세대급 차기 전투수트가 요구 사양이었는데, 해당 사업에 대한 보고를 받던 나는 아예 국방부에 역제안을 넣었다.

"이건 이것대로 진행하고, 별개로 세계 최강의 전투 수트를 만들면 어떻겠습니까. 일당백의 용사를 만드는 겁니다. 우리 기업의 첨단 기술로."

1km 거리 이내에서 대구경 저격총의 탄환을 막아낼 수 있는 초강화 전신 장갑, 위성과 링크되어 전장 정보를 실시간으로 제공받는 풀페이스 QLED HUD 방탄 헬멧은 물론 미니건, 초소형 대전차 미슬 등의 무기에 자체적으로 비행까지 가능한 로켓 엔진까지 탑재한 최첨단 전투 수트. 이른바 '메탈맨 프로젝트'

"그게 가능한 겁니까?"

당시는 물론 현재의 기술로도 양산은 꿈도 꿀 수 없지만, 돈을 퍼붓는다는 전제 하에 세상에 아예 안되는 일은 없다. 60년대 기술로도 달에 사람을 보내는게 돈의 힘이다. 그리고 그 개발 과정에서 획득되는 기술만으로도 충분히 그 가치는 할 것이라고 설득했다. 국방부는 혼쾌히 승락했고, 반대할 것으로 알았던 아버지 역시 의외로 해당 사업의 진행을 찬성했다.

"돈 문제만 해결할 수 있다면 말이다"

당대의 기술력을 아득히 초월하는 최첨단 무기를 극비리에 만든다는 것은, 정말로 상상 이상의 돈이 들어간다. 평생을 단 한번도 돈 걱정을 해본 적이 없는 나조차 덜컥 겁이 났을 정도로. 3천억 국방 예산을 배정받아 진행한 사업은 불과 반년 만에 돈이 증발했고 그 다음부터는 나의 개인 재산을 들이붓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효율을 높이고 속도를 조절했음에도 불과 3년 만에 생돈 1조원의 돈이 추가로 투입됐다. 그럼에도 메탈맨 프로젝트는 시작 단계였다.

당시 '차기 첨단 전투복 사업' 단장이었던 민 소장은 어느새 육군 참모총장이 되어 있었고(물론 내 입김이 꽤나 크게 작용했다), 덕분에 병사들의 막사 현대화 사업에 투자되었어야 할 6조원이 넘는 예산 중 절반이 추가로 메탈맨 프로젝트에 전용되었다.

뭐… 그 부분에 대해 할 말은 없지만, 굳이 변명을 해두자면 사업가 기질을 가진 과학자가 뭐 하나에 미치면 원래 그런 꼴이 나는 법이다. 그리고 드디어 그 첨단 수트는 근 10년 가까운 노력 끝에 완성이 되었다. 완성이라고 하기에는 사실 갈 길이 멀었지만, 어쨌든 영화 '아이언맨'의 그것처럼 하늘을 날아다니는 위대한 과학 초인은 개발이 완료된 것이다.

게다가 철저한 보안을 위해, 나는 실질적으로 본 사업을 진행한 우리 그룹 산하의 방위산업체 진상 테크윈을 다른 국내 대기업에 팔아버리기까지 했다. 메탈멘 관련 주요 정보들은 싹 파기하고 핵심 관련자는 모두 빼온 뒤에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보안을 신경써가며 현재 내 개인 자택에 고이 모셔져 있을-썩어빠진 똥별들이 가득한 한국 군대의 특성상, 이런 국가적 전략자산은 오히려 군부대 보다 우리 집이 더 안전하다는 판단 하에 우리 집 지하에 모셔지게 되었다- 그 '한국군의 미래'가 유출이라니?

'도대체 누가? 왜? 어째서? 어떻게?'

나는 밑을 채 닦지도 못한 채로 김 변호사의 메모에 집중했다. 마지막의 'SSS'는 비지니스나 도청 등의 우려가 있어 대화를 쉽게 주고 받기 힘든 상황일 때 몰래 주고 받는 암호로, '매우 매우 위험한/중요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음'임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후 근 일주일간 김 변호사는 면회를 오지 않았다. 매일 오던 그가 말이다. 아무래도 그의 신변에 무언가 큰일이 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김 변호사가 못 올 상황이라면 다른 누구라도 와야할 터인데 오지 않았다. 이쯤해서는 그룹 차원의 무슨 일이 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영권의 문제일까, 아니면 군사적 이슈일까. 감옥 안에서 아무런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없던 나는 꽤 초조해졌다. TV에서는 그저 새 대통령과 새로운 정권의 이야기만 끝없이 나올 뿐, 내가 원하는 정보를 단 하나도 얻을 수가 없었다. 신문도 마찬가지.

결국 나는 마음 먹었다. 놀랍게도 탈옥을 말이다.




글로벌 전자 대기업의 오너 총수 쯤 되면, 단순히 일반적인 기업의 CEO와는 차원이 다른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게 된다. 내 결정 하나에 수십 만의 일자리가 출렁이고 수천만, 수억의 지갑사정이 흔들리게 되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경제적 이유 이외에도 군사, 정치적인 다양한 문제가 현실에 닥치게 되는데…

예를 들어 외국의 산업 스파이나 혹은 그 사주를 받은 범죄자가 감방 안에서 나를 협박해서 고급 정보를 탈취, 어딘가로 보낸다면 하루 아침에 국가 차원에서 관리 해 온 정보가 털리게 되는 셈이니까. 물론 그건 좀 극단적으로 희박한 가능성의 이야기지만 당장 감방 안에서 내가 자살이라도 하면 바로 주가 지수가 요동치기도 할테고 말이다.

따라서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교도소 자체 경력은 물론 국가정보원 등에서도 신분을 위장한 요원들을 따로 투입해서 나의 신변을 철통 경호하게 되는데, 당연히 그들은 나에게 꽤나 협조적이다. 그들이 언제 또 나같은 대기업 회장과 직접 얼굴 보고 이야기 할 일이 있겠는가.

"부탁해요"

교도소 내 반입이 금지된 물건이지만 나는 '요원'을 통해 스마트폰을 반입 받았다. 그렇다고 대놓고 휴대폰을 꺼내어 쓸 수는 없었지만, 독방에서 등돌린 채로 변기를 바라보며 몰래 뉴스를 확인하는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했다.

"이런 망할!"

음모가 진행 중이었다. 우리 그룹사가 어느새 해체 수순을 밟고 있었다. 명분도 그럴 듯 했다. 21세기에 걸맞는 투명 운영과 경영 혁신을 위해, 진상 그룹은 이제 그룹사 차원의 움직임이 아닌 각 개별 단위 기업으로 움직일 것이라는 선언이었다. 게다가 그것이 내 평소 생각이라는 어이없는 보도가 나가고 있었다. 그룹사 차원의 공채도 올해가 마지막이라는 것. 결론적으로 말해 우리 진상 그룹 내에서 내 영향력은 자연스럽게 축소가 될 수 밖에 없었다.

"허"

기가 막힐 노릇이었지만, 그건 장난 수준이었다. 그 다음의 국제 뉴스를 보다가는 기절초풍을 할 뻔 했다.

"뭐?"

한반도에 미군의 항공모함이 세 대나 몰려 와있다는 것.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한반도에 전쟁의 암운이 드리웠다는 것.

"이게 도대체…"

스마트폰을 전달한 국정원의 '요원'은 내 궁금증을 쉽게 풀어주었다.

"한달 전 쯤, 미국의 첩보위성이 베이징 상공에서 기묘한 것을 찍었습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최첨단 군사용 보병 에어 수트. 그… 영화 '아이언맨'에 나오는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에어윙 수트 같은 것으로 파악했지만 자체 로켓동력원을 가진 것이 확인되었고…"

요약하자면, 자국에도 아직 존재하지 않는 최첨단 무기체계가 갑자기 중국에 등장했으니 미국으로선 의심과 경악의 눈길로 중국을 쳐다 볼 수 밖에 없었고, 결국 미국의 새 대통령은 '북한의 핵실험'을 핑계로 북한과 중국 모두에 압박을 시전한 것.

"단순히 겁만 주는거지?"

하지만 요원은 고개를 저었다.

"G2를 꿈꾸는 중국 입장에서는 여기서 쉽게 꼬리 내릴 수 없는데다, 일이 기묘하게 꼬여서 명분으로 내세웠던 북한이 핵실험을 진짜로 해버리면 미국으로서도 어쩔 수 없이 무력행동을 보일 수 밖에 없죠. 전 세계의 눈길이 쏠려 있는데 북핵을 용인할 순 없으니. 북한에 폭격을 할 겁니다. 말 그대로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격으로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거죠"

결론적으로 말해 내가 만든 전투용 수트 때문에 전쟁이 일어난다고? 아니, 그럴 수는 없다.

"시간이 얼마나 있는거지?"
"미국의 계산으로는 아마 이주일 정도 후에, 북한의 핵실험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 직후 폭격이 시작될 겁니다. 2주라는 시간마저도 확실하진 않지만요"
"좋아, 나에게 해결책이 있어"



모든 것에 앞서 중국이 도대체 어떻게 내 수트의 설계도를 훔쳤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그건 곧 알 수 있었다. 얼마 전, 국방부 서버가 해킹당했다는 것. 전쟁 수행에 관한 모든 것이 담긴 일급기밀 '작전계획'까지 싹싹 털렸다니 다른 것은 안봐도 뻔했다. 북한의 소행이라고 하지만, 북한 내의 중국 영향력이나 북한의 보안기술 수준을 감안하면 그 모든 것이 당일치기로 중국까지 넘어갔을 것은 불보듯 뻔한 일.

시간이 부족했다. 나는 즉시 탈옥을 준비했다. 그러나 탈옥은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무턱대고 담장을 넘었다가는 정말로 총에 맞아 죽을 수도 있다. 게다가 운좋게 감방의 담장을 넘었다고 하더라도 그 다음은? 경찰의 추격을 따돌릴 수는 없는 법이다. 게다가 우리 진상 그룹마저 대규모 조직개편 등 누군가의 손에 의해 흔들리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룹의 도움을 기대할 수도 없다. 결국 내가 믿을 것은 교도소 내의, '범털'에 대한 얄팍한 기대심을 갖고 있는 수감자들의 도움 뿐이었다. 어이없게도.




"으따 식판을 100장이나 빼돌리 불면 이게 도오저희 티가 안 날 수가 없당게요? 당최 이걸 머에 쓴당가 몰러? 대용이 성님"
"대기업 회장이, 식판 100장 새로 사줄 돈이 없겠어요?"
"고것을 의심하는 것은 아이지만서도, 식판으로 무엇을 하능가가 문제 아니것소"
"로보트를 만들려고 합니다"
"로보… 지금 로보트라고 했어라? 하따 즌자 대기업 회장 성님은 참말로 취미 생활도 독특하구마잉"

모범수였던 나는 비교적 교도소 내에서의 활동이 자유로웠다. 그런 내가, 교도소 안을 돌며 사람들을 포섭해서 비밀리에… 아니 솔직히 말해 거의 대놓고 '무언가'의 대작업을 시작하는 것은 다른 재소자들의 큰 흥미를 끌었다. 게다가 그 대작업이 무려 '로봇'을 만드는 것이라니.

"이게 원칙상 안되는 건데…"
"원칙 좋아하는 분이 '그 분'은 숙직실에서 재워요?"
"허허 참. 여튼 뭐, 재소자들 구경거리 만들어 주신다는데야. 저도 기대합니다"

교도소장까지 섭외를 마친 나는 드디어 본격적으로 로봇, 아니 '메탈맨 마크 2' 버전을 만들기 시작했다. 대기업 산하의 방위산업체에서 수조원대의 비용을 써가면서 만들었던 최첨단 무기체계를, 교도소에서 최소한의 도구만을 사용해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역시 이번에도 누군가의 눈을 피해서 말이다.



"이기 단순히 이리 돌돌 말믄, 즐때로 만족스려운 경도가 안 나온다카이. 이걸 이래 교차시켜가꼬 꼬질데 맨치로 중간에 피스를 박아넣은 담에 덧대믄, 이제는 이기 총알을 맞아도 겉에는 뚫려도 안에까진 못 뚫는다카이"
"식판 3장으로 총알도 막는단 말여?"
"이 식판 국그릇 부분을 딱 요래 갑빠 부분이 되도록 맞춰넣고, 요거는 팔 부분이 되는데 손가락에 총구는 그냥 이래 식판으로 만들면 딱 한발 쏘고 녹아내려 못씁니다. 다른게 필요한데요"
"총신은 철창살 잘라다 씁시다"
"아 딱이구만요"

처음에는 정말로 '식판을 녹여만든 인간형 로봇'이라는 그럴싸한 거짓말에 흥미를 느껴 동참한 엔지니어 재소자들도, 어느 시점을 넘은 순간 이건 로봇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이 입을 수 있는, 총알을 막을 수 있는 중갑판에 손에는 총기까지 달렸고 등에는 바이크 엔진과 구루마 바퀴가 달린… 전투수트'

그리고 그 수트는 누군가의 체형에 꼭 맞게 제작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누구 하나 그것을 교도소장에게 제보하는 이가 없었다. 담장 너머 어딘가로 향하는 꿈은 재소자라면 누구나 꾸는 아름다운 꿈. 그것에 도전하는 이가 있는데 그것을 말릴 이유가 없다.




"으음?"

그러나 교도소장도 바보는 아닌지라, CCTV로 보이는 저 무언가가 이제 절대 '로봇'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걸 김대용이 '입었으니까'.

"뭐, 뭐해! 당장 경교대 출동하라고 해!"

흐뭇한 얼굴로 CCTV를 바라보던 바라보던 교도소장은 대경실색해 부랴부랴 즉시 비상 출동을 시켰지만. '메탈맨 마크2'를 입은 김대용은 이미 양팔의 유압 실린더 파워로 자기가 갇힌 철창문을 크게 휘어버리고 탈옥을 하는 중이었다.

"맙소사"

철공 기술자가 틀을 잡고, 용접 전문가가 틈을 메꾸며, 금속 공예 기술자가 관절을 책임진 '메탈맨 마크2'. 당초 식판 100장으로 시작했지만 결국에는 교도소 내의 한층 분량에 해당하는 1200장이 넘는 식판을 써서야 완성한 이 '스뎅 머신'은 엄청난 위압감으로 당당히 정문을 향해 걸어나갔다.

"후우, 후우"

아무리 바이크 엔진으로 외골격의 움직임을 보조한다고 해도 400kg이 넘는 이 초중장갑을 끌고 움직이는 것은 중노동 이상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그 정도의 무게가 있기에, 감히 그에 맞서볼 엄두를 아무도 내지 못했다.

"차라리 총을 쏴!"

타, 타탕! 탕! 탕탕!

소장의 지시에 경교대 요원들은 권총 사격을 개시했지만 과연 다층 식판장갑을 갖춘 메탈맨 마크2의 갑옷은 뚫지 못했다. 이윽고 드디어 교도소 정문 근처까지 온 김대용은 벌러덩 드러누웠다.

"부스터, 온!"

이미 맹렬히 돌아가며 외골격의 움직임을 보조하던 마그마 125의 엔진은 드디어 그 토크가 메탈맨 등 뒤에 달린 구루마 수레 바퀴에 전달되어 비로소 고속 머신으로서의 위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 어어, 어어어어어어! 으아아아아아아아!"

사실상 누운 채로 시속 75km의 속도로 쏜살같이 교도소 정문을 향해 질주하는 그 '스뎅 머신'은, 어찌보면 '오즈의 마법사'의 양철로봇 같기도 했으며 어딘가 유럽 고성에 있을 법한 청동 기사상 같기도 했다. 실제로 비루한 식판을 소재로 만든 어설픈 강화장갑이기도 했고.

그러나 그 '머신'에는 진상전자가 자랑하는 최첨단 OS '다이젠'이 탑재되었고, AI 스마트 비서 '비스비'가 실려 있어 위성 GPS를 따라 안전하게 김대용을 집으로 모시기 시작했다.



"저, 저, 저거! 하하, 근데 어쩌나? 교도소 정문은 이미 닫혀버렸는데?"

교도소장은 당황했지만, 다행히 경교대 요원이 신속히 교도소 정문을 닫은 덕분에 김대용이 빠져나갈 길은 완전히 막혀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김대용은 전혀 당황하지 않은 채로, '미사일 발사' 버튼을 눌렀다.

"응?"

'메탈맨 마크2'의 고간 부위가 슬그머니 열리더니, 무엇인가가 '발사'되었다. 그것은 놀랍게도 김대용에게 그동안 많은 세상 소식을 전해주었던 요원이 건내준 스마트폰이었다. '갤럭시스 노트7'은 엄청난 속도로 교도소 정문을 향해 발사되었고, 이미 세간에 널리 입증된 것처럼 강력한 파괴력으로 폭발, 문을 부수는데 성공했다.

"가자, 비스비!"




아무리 용접 기술자가 노력했다지만 결국 집에 도착할 무렵에는 '스뎅머신' 메탈맨 마크2가 거의 다 망가진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등 뒤에 수십대의 경찰차를 끌고 집에 도착한 나는 서둘러 마크2를 벗어버리고, 지하실로 향했다.

"자, 자"

홍채인식을 통해 보안문을 지난 나는 이미 체력이 거의 탈진 상태나 다름 없었지만, '진짜 메탈맨' 수트를 입으면 그 이후에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진상전자의 첨단 기술은 물론 진상 그룹의 새로운 먹거리, 진상 바이로로직스의 최첨단 바이오 테크놀러지가 총동원되어 내 신체를 케어해주니까. 이를테면 항문의 튀어나온 치질 역시 전자석 리액터가 자리를 고정적으로 잡아주어 통증 하나 없이 아주 편안하게 활동이 가능하다.

"지문인식 및 잠금패턴을 통한 본인 확인완료. 김,대,용 확인. 메탈맨, 발진 준비 완료"

초기사업비 3천억에 막사 현대화 사업 전용예산 3조, 구난함 레이더 및 추가장비 예산 전용 1조, E-진상 사업 예산 전용 1조원, 진상물산 주식 300만주, 대용랜드 주식 42.5만주, 진상전자 사내 유보금 1조원, 김대용 나의 개인 사재 1조원 등 총합 9조 4천억의 금액이 투자된 한국 국방산업의 결정체, '메탈맨' 수트를 입은 나는 로켓 엔진을 가동, 지하실을 뚫고, 솟아올랐다.

"하하, 이 놈들!"

대기업 회장의 자택 지하실에서 갑자기 솟아오른 인간형 전투수트에 경찰들과 인근 군경 요원들은 당황했지만, 나는 그들을 유유히 뒤로 한 채, 풀페이스 아머 헬멧에 결합된 진상 뉴 기어VR 화면의 HUD 영상을 따라 서둘러 베이징을 향해 날아갔다.

"저, 저게 뭐야"

모두가 당황할 무렵, 눈이 좋은 누군가가 메탈맨 등에 씌인 이름을 읽었다.

"메탈맨?"






"현재 속도 마하 0.9, 베이징까지 앞으로 13분 남았습니다. 현재 날씨 양호, 미세먼지 나쁨"

비스비의 안내에 따라 편안히 베이징까지 날아온 나. 마하를 넘나드는 속도지만 스텔스 설계 덕분에 레이더에 표시되는 면적은 참새 이하. 당연히 레이더 오류로 인식하기 마련이다. 덕분에 한국-북한을 넘어 중국의 방공 식별을 무시하며 날아왔음에도 그 어떤 제지조차 받지 않았다. 확실히, 이런 무기체계가 갑자기 등장했으니, 미국이 경악할 법도 한 일이다.

"찾았다"

짱깨들은 나의 머신을 복제하면서 최소한의 양심이나 창의성도 발휘하지 않았는지, 메탈맨 내장 갤럭시스의 '내 디바이스 찾기' 기능을 사용하니 중국이 복제해 만든 짝퉁 메탈맨 위치가 표시되었다.

"천안문…가자, 비스비!"
"라져"

인공지능 비서 비스비는 나의 명령에 목표지를 천안문으로 조정했고, 속도를 마하 2.0까지 끌어올렸다. 그리고 상대 역시 나의 위치를 파악했는지, 짝퉁 역시 이쪽을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남은 조우 시간 4분 13초.

"으음"

나의 계획은 명료했다. 중국의 짝퉁 메탈맨을 쳐부수는 것. 아무리 중국이라고 해도 메탈맨 같은 초고가 전투머신을 양산할 수는 없다.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이 돈이 문제인 것이다. 애초에 이런 개인화 전투머신에 조 단위 돈을 쏟아붓는 미친 짓을 누가 더 할 수 있으랴. B-2 스텔스 폭격기보다 비싼 개인화 전투머신. 중국도 그저 기술복제용으로 만든 저 시제품이 전부일 것이다.

"결국, 저 놈만 부수면 된다"

그럼 더이상 미국이 이 신형 무기체계에 놀라 항공모함으로 중국을 은연 중에 압박할 이유도 없고, 항모가 돌아가 버리면 북한이 벼랑 끝 전술로 핵실험을 할지라도 당장 곧바로 한반도 전역에서 전쟁일 날 일은 없다.





"근접조우 남은 시간 10초"

비스비의 안내를 들은 나는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그리고 저 아득히, 작은 점처럼 보이는 짝퉁 메탈맨을 향해 갤럭시스 노트7포를 발사했다.

"발사!"

같은 설계도로 만든 머신이라고 해도 사용되는 부품이 다르다. 이 '진짜' 메탈맨에 들어가는 것은 진상전자의 낸드플래시 램이며, 나의 풀페이스 아머 속 디스플레이는 아직 양산도 안된 '진짜' QLED 화면이라 저 점처럼 작은 것도 분명히 표시된다. 사격통제 시스템은 세계 최고의 국산 자주포, 진상 테크윈 A-9 자주포의 그것을 더욱 개량한 것이며 로켓엔진기술은 나라호 사업에 참여했을 때 수많은 실패 속에서 피눈물 흘려가며 배운 것이다.

"다시는 한국을 무시하지 마라"

나의 읊조림과 함께, 저 멀리서 희미한 폭발과 함께 갤럭시스 노트7은 중국제 짝퉁 메탈맨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주가와 기업의 신뢰도 추락까지 감수해가며 만들어 낸 전략병기가 드디어 전장에서 그 제대로 된 첫 성과를 보인 것이다. 기실 메탈맨을 제대로 만들었다면 그 정도 폭발은 견뎌냈을테지만, 메이드 인 차이나 짝퉁의 한계는 그런 것이 아닐까.

"후"

나는 가벼운 미소를 짓고, 목적지를 수정했다. 물론, 내가 가야할 곳, 교도소로.




무단으로 교도소를 탈옥하고, 방공식별구역을 마구 넘나들고 급기야 타국에 가서 전투까지 벌이고 온 나지만, 그 모든 것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미국은 한국 국방부를 통해 사건의 모든 진상을 전해 듣고는 크게 만족하며 메탈맨 프로젝트 기술을 제공받는 대신 무상으로 사드 미사일 포대 2기를 제공(?)해주기로 약속했으며, 새삼 강력한 혈맹을 강조했다. 중국은 내심 속은 쓰렸지만 해킹 문제가 엮여있는 사건을 크게 비화해봐야 더 큰 손해가 우려되었기에 입을 닫았다. 북한 역시 미국의 항모가 돌아가자 핵실험을 추가로 예고하는 등 뒤늦게 온갖 허세를 부렸지만 그 누구도 관심갖지 않았다. 사건 이래 행방불명이 된 김 변호사에게는 가족에게 큰 후원금을 보내는 것으로 위로를 했다.

아울러 나는…

언제나 그랬듯이 새롭게 출범한 정부의 기업인 특별사면 조치를 받아 이후 근 2년 만에 다시 진상전자 회장직에 복귀했다.




"…없을 것이며, 앞으로 더욱 발전적인 기업의 모습을 보일 것으로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이상입니다. 추가 질문 있으신가요"

회장직 복귀 관련 기자회견장. 준비된 선언문을 낭독한 뒤, 나는 기자석을 천천히 돌아보며 물었다. 한 젊은 외신 여기자가 번쩍 손을 들었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물었다.

"지난 봄에 있었던 전쟁위기는 기실 첨단 무기체계 '메탈맨'을 둘러싼 한-미-중국간의 알력이었으며, 당시 목격자들에 의하면 '메탈맨'을 입은 주인공이 바로 회장님이라는 증언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사실 확인을 부탁 드립니다.

꽤 당돌한 질문이었지만, 나는 애써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음… 교도소에서 많은 일이 있기는 했습니다만 그런 일은 결코…"

흠. 아니, 아니지.

"들어본 적도…"

아니야 이건. 감옥에서 나를 위해 식판을 두들겨 준 동료들, 메탈맨 프로젝트에 피땀 흘린 수많은 엔지니어들을 생각해서라도…. 그래. 나는 어깨를 으쓱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제가 메탈맨입니다"

하, 아무래도 내일 또 신문 1면 도배하겠구만.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또 폭발하기 시작했다.


- Fin -

가을이 오기 전에 소설

어느 늦여름의 한가로운 주말 오후. 나른함이 몰려오는 와중에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그녀는 모히또를 반쯤 비운 상태로 테라스 테이블에 널부러진다.

"잡지나 볼까?"
"그래"

노을이 지기 전 부릴 수 있는 마지막 사치, 나는 매장 안 쪽에서 잡지 두 권을 집어 들고 나온다. 그녀는 패션 잡지, 나는 여행 잡지를. 조용히 페이지를 넘기다가도 수시로 서로를 부른다.

"이거 봐봐"
"오, 이쁘다. 얼마야?"

광고 페이지를 보며 히히덕 대고, 칼럼 기사를 보며 의견을 주고 받는다. 각각의 잡지 한 권을 다 보는데 20분 쯤 걸렸을까. 노을에 비친 우리의 얼굴은 마지막으로 환하게 번들거리다가 곧 가게의 야외 조명과 함께 새삼 로맨틱한 분위기 속으로 가라앉는다. 그리고 별반의 대화도 없이, 가볍게 손을 잡았다가 휴대폰 보다가를 반복하며 그렇게 하염없이 시간을 흘려보낸다. 

"흠"

불과 몇 시간 전의 찌는듯한 무더위를 잊은 것처럼 빠르게 내려가는 온도는 내 팔뚝에 닭살을 꽃피우고, 성큼 다가온 가을은 괜한 초조함으로 마음을 간질인다. 그리고 그 간질임에 안타까움을 느낄 무렵, 내 걱정은 어느새 가을을 싫어하는 너에게 이르고 만다. 

"저녁 먹으러 가자"

어둑어둑한 조명 아래서 마지막까지 무엇인가의 기사를 열심히 읽던 그녀가 잡지를 덮으며 말했고, 우리 둘 다 조금은 날씨에 비해 가볍게 입었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근처의 식당을 떠올렸다. 

"쌀쌀한데 뜨끈하게 참치찌개 먹자"
"그냥 김치찌개 먹을래"
"좋아"



우리의 만남은 매일매일이다. 토요일의 오늘이 지나면 내일도 본다. 월요일도 볼 것이고, 화요일도 볼 것이다. 수요일도 보고, 목요일도 보고, 어쩌면 하루쯤은 다른 약속이나 사정으로 못 볼지 모르지만 금요일에는 다시 볼 것이다. 토요일은 조금 기쁜 마음으로 볼 것이고, 일요일 역시 즐겁게 볼 것이다.

만난지 어느새 1년 남짓 되었지만 그래서 우리는 더 가깝다. 애틋하고 정겹다. 그녀의 약점도 단점도 알지만 그것은 기피하고 싶은 부분이 아니라 보듬고 싶은 부분이다. 네가 울면 내 눈에도 눈물이 맺히고, 네가 웃으면 나도 행복하다. 

손을 잡고 땅거미가 깔린 인적 드문 골목길을 지나다 가습적인 뽀뽀를 받는다. 씨익 웃으며 잡은 손에 힘을 준다. 맞잡은 손은 팔짱이 되고, 토요일 밤의 한가로움은 어느새 살짝 들뜬 기분이 된다.

골목길의 가로등 역시 하나둘씩 불이 들어오고, 땅거미가 온전히 저녁의 그늘에 지워질 무렵 우리는 식당에 도착한다. 

"김치찌개 두 개요"
"네"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환한 형광등 불빛에 너를 본다. 오목조목 귀여운 네 얼굴은 가게 구석의 브라운관 티비 속 뉴스에 참 다양하게도 표정을 보여주다 뒤늦게 나에게로 시선을 돌려온다.

"아 왜!"
"왜긴 그냥 이뻐서 그러지"
"아저씨처럼 그러지 마"

나는 물컵을 대령하고, 너는 수저를 세팅한다. 식탁 가운데에 휴대용 가스렌지가 놓이고, 초벌로 끓여나온 찌개는 다시 한번 몸을 불사른다. 

"오뎅 맛있다"

몇 점 안되는 반찬의 갯수는 반찬 재활용에 대한 의심을 거두고, 보글보글 끓는 찌개는 어느새 찾아온 우리의 그리 나쁘지 않은 침묵을 깬다. 

"불 좀 줄여"
"어"



괜히 과하게 먹은 것 같다며 혼자 투덜대는 그녀의 손을 잡고, 3분이면 갈 거리의 그녀 집을 빙 돌아 10분에 걸쳐 간다. 산책의 핑계는 쌀쌀한 날씨도 잊게 한다. 아니, 참게 한다. 

"내일 이태원 갈까"

사실은 조금 피곤함을 느끼지만 주말에 함께 무엇인가를, 어딘가를 가야만 아쉬움이 덜어지는 이 알 수 없는 초조함은 그러한 제안을 만들고 "음, 고민 좀 해보고" 라는 대답을 받아낸다. 

회사 이야기, 연예인 이야기, 친구 이야기, 인터넷에 본 화제의 이야기까지 나누자 드디어 그녀의 집 앞에 도착하고, 난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하고는 손 흔들어 준다. 

"들어가 멍충아"

잠시 후, 서너번 되돌아 볼 때까지 계속 손을 흔드는 저 위 10층 복도의 네 실루엣에서 웃는 얼굴을 찾아내고는 드디어 그렇게 그녀를 들여보낸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찔러넣고 역 근처까지 걸어가노라니, 수많은 커플들의 행복한 얼굴과 차들의 헤드라이트가 내 새콤달콤한 기분에 향긋한 쓸쓸함을 안기니, 그 오묘한 기분에 혼자 피식 웃은 나는 아무래도 내일은 이태원 대신 다른 곳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저기 사거리 지나 골목 쪽에, 우리가 자주 가며 땀 흘리는 거기 말이다.  

기억 속으로 소설

일요일 오후의 역삼동답게, 도로는 꽤나 막힌다. 황사 탓인지 코는 매케하게 막히고 콧물이 흐르기 시작하니, 아까 콘솔박스에 쳐박은 물티슈가 생각난다. 마침 신호도 걸린 차에 콘솔박스를 열자, 이런저런 잡동사니 사이로 CD 하나가 툭 떨어진다.

[ 승미에게 ]

매직으로 찍찍 갈겨쓴, 내 필적으로 적힌 문구. 그리고 추억의 이름. 피식 웃으며 다시 넣으려다 문득 시디를 그대로 집어 플레이어에 넣는다. 몇 초의 로딩과 함께 차 안에는 한숨 같은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아…"

그리고 꾹꾹 묻어두었던 추억들이 어느새 차 안에 가득해지고, 신호가 바뀜과 동시에 나는 그 무렵 어딘가의 기억으로 떠나기 시작한다.






기억 속으로 






"만약에 어느날 갑자기 내가 헤어지자고 하면 오빤 어떻게 할거야?"

부여를 향해 신나게 달리는 차 안에서, 그녀는 뜬금없이 물었다. 쿵작쿵작 음악 소리에 반쯤 묻힌 승미의 말이었지만 귀신같이 그 말을 캐치한 나는 볼륨을 줄이는 대신 음악 소리 이상으로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어쩌긴! 달려가서 붙잡고, 이유를 묻고, 반성하고 사과하고 고쳐서, 다시 마음 돌려서, 처음 만난 그때처럼 정말로 잘해주고 더 멋있고 재밌게 해줘서 꼭 붙들어야지. 절대로, 절대로 안 헤어져! 미쳤나!"

그 말에 그녀가 무어라 대꾸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다음에 흘러나온 신나는 노래에 맞춰 우리 둘 다 몸을 흔들며 터널 속으로 기분좋게 빨려들어간 것은 아직도 선명히 기억난다.

그 아름다웠던 여름 날의 찬란한 햇살이 단박에 터널의 붉은 빛으로 바뀌는 그 짜릿함과…, 선글래스를 벗고 슬쩍 옆자리를 보았을 때, 나를 보고 웃으며 몸을 흔들던 승미의 모습이 내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되었으니까.




선한 인상에 웃는 모습이 귀엽고, 못된 표정으로 애교 부릴 때는 또 한없이 고양이 같아지던 그녀. 맨날 그런 장난 좀 치지 말라고 하면 혼자 또 빵 터져서 "오빠 괴롭히는게 세상에서 제일 재밌어" 하고 좋아죽던 너.




"그래도 잠깐 밥이라도 먹자"
"알았어, 15초만 기다려"
"천천히 와도 돼"
"아냐, 오빠 춥잖아"

하나도 꾸미지 않은 채로, 그저 내가 나오라는 말에 싫다는 군소리 하나 없이 뛰어나오던 너. 아파트 단지 저 너머에서 나를 발견하곤 그토록 환하게 웃으며 뛰어오던 니 모습은….




"아…"

눈물이 그렁그런해져서 그만 앞이 뿌얘지는 김에 차를 길가에 잠깐 세웠다. 기억이 다 뭐라고. 쓸데없이 미화된 기억일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해보지만, 음악의 탓인가. 기억은 계속 차오른다.




승미가 씻는 사이에 호기심에 열어본 그녀의 속옷 서랍. 며칠 전 왕창 선물한 속옷들 사이로 문득 그녀의 통장이 보인다. 그토록 억척스럽게 돈 모으는게 참 웃기기도 해서 난 호기심을 못 이기고 열어본다. 그래, 얼마나 모았나보자.

'아…'

그토록 고민하며 안 줄거라고 다짐하더니, 결국 또 보냈다. 남은 잔액 124만원이 이제 그녀의 전재산. 그 아래의 다른 하나는 새로 발급 받았음이 분명한 1500짜리 마이너스 통장. 한참 후의 그 어느 날, 취해서 밑도 끝도없이 "그 돈 내가 어떻게 모은 돈인데…다 싫어 정말" 하고 울먹이던 승미의 등을 두드리던 나.




"의외로 너 부침개 잘 부친다?"
"울 집 제사 지낼 때 장난 아니거든. 나중에 오빠한테 내가 시집 가면 다른건 모르겠는데, 전은 하나도 걱정없다"
"얼, 대단한데? 우리 집은 근데 제사 안 지내"

펜션에서의 그 대화. 대충 흘려보내긴 했지만, 나한테 시집 온다는 말에 참 기뻤었다.





"나? 당장 데이트 비용만 해도 내가 거의 다 대잖아."

해서는 안되는 말을 했다. 그녀를 위한다면서 억지로 마초 연기까지 해가며 돈 못 쓰게 했는데. 그 모든 노력을 단숨에 날리는 생색을 내버렸다. 돈이 아까운 건 진짜 아니었는데. 그냥 나도 확신을 갖고 싶었을 뿐인데. 그저 한번씩, 화가 나면 주체를 못하고 아픈 사람 마음 후벼파고야 마는 나의 그 지독한 독설. 항상 내 인생의 앞 길을 막던 내 답 없는 주둥아리. 찢어 죽여버리고 싶은 내 주둥아리.

한참의 정적이 흐르고 "알았어, 내가 미안해" 하고 힘없이 가방을 짊어지던 너. 그 다음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거 알아? 첫 눈 오는 날 함께 걸으면, 다음 첫 눈 오는 날까지 그 커플 헤어지지 않는대"
"우리 그럼 최소한 1년은 안 헤어지겠네?"
"응"

웃는 얼굴. 하지만 네 얼굴에 희미하게 스쳐 지나간,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네 그 씁쓸한 표정. 무슨 의미였을까.





"중학교 이후로 가족들이랑 한번도 가족들이랑 여행을 가본 적이 없어"

아버지의 사업이 망한 이래로 한번도 가족끼리 어디 여행을 가본 적 없다는 말에 괜히 가슴이 쿡 하고 아팠다. 그냥, 남자친구가 아니라 승미의 남자로서, 그토록 아프시다는 그녀 어머니 허리를 위해 안마기를 보낸 것은 지금도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중에, 양가 부모님 모시고 우리 여행 꼭 가자"
"응"




"그 새끼 번호 내놔"

흥분한 나는 그녀 앞에서 처음으로 욕을 하고 있었다. 그만 좀 하라는 승미의 말에도 나는 분이 식지 않았다. 승미가 그런 애가 아니라는 것은 물론 잘 알고 있었다. 정말 그녀의 말 그대로가 분명한데. 그럼에도 분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나 자신에 대한 분노였는지도 모른다. 다른 누군가도 그녀를 그렇게나 아끼는데, 그 시간에 나는 다른 여자들 꽁무니나 쫒으며 정신 못 차리고 있었으니까.

"병원까지 데려다 준 것 뿐이라고! 오빠도 연락 안되고 하는데 어떻게 해 그럼!"
"알았으니까 번호부터 내놓으라고, 그 개새끼 번호!"
"아 쫌 진짜 왜 그러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내 안의 불안을 오히려 역으로 그녀에게 투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이게 다 뭔데, 어? 이거 뭐냐고! 말해봐, 설명해 봐!"

무어라 변명조차 할 수 없는 빼도박도 못하는 바람의 증거들. 분노인지 실망인지 부들부들 몸을 떨던 그녀는 대답을 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에 결국 주저앉으며 눈물을 뚝뚝 흘렸고, 그 짧은 시간 동안 또 적당히 꾸며낸 변명을 읊은 나.

"야, 그거…저기잖아. 저번에 내가 말했던 그, 있잖아. 희준이네 커플 사건 말이야"

하지만 그녀가 패대기 쳐버린 종이쪼가리 틈 사이로 흘러나온 내 이름 박힌 티켓에 그 헛소리는 곧바로 부정당하고, 민망함과 당황스러움에 "하, 그게 승미야. 니가 생각하는 그런게 아니야" 하고 또 다시 둘러대보지만…

"잘있어"

차라리 미안하다고 말이라도 할 것을. 끝까지 어설픈 변명을 둘러대던 나에게 승미는 더이상 얼굴조차 보이지 않고 저기 떨어뜨렸던 가방을 힘없이 든 채 걸어갔다.





"정말 다신 안 그럴거지? 정말이지?"

그 큰 눈에 또 왕방울만한 눈물을 뚝뚝 흘리는 승미. 그렇겠노라며 고개를 끄덕이던 나에게 그녀는 커플링을 나에게 내밀었다.

"하…"

그녀의 통장 잔고를 뻔히 아는 나로선 그 커플링이 새삼 그렇게 가슴이 아팠다. 그 놈의 커플링이, 그게 그녀에게 그렇게나 모질게 가슴에 박혔던 것일까.





어느새 나는 핸들에 머리를 묻고 울고 있었다. 멍청한 새끼. 그렇게 끔찍히도… 병신.

"미안하다"

나는 눈물을 닦고, 시디를 빼고서는 집으로 차를 몰아갔다. 그럼에도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한 기억들은 멈출 줄을 모른다.





"승미야…"

그녀가 떠나버린 뒤로 혼자 우두커니 길거리 한복판에서 서있던 나.

"하아"

뒤늦게 생각난 그럴듯한 변명거리, 그걸로 무마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번에도 정말 한순간의 실수라고 차라리 솔직하게 털어놓았더라면? 정말로, 진짜로 진짜로 이젠 다시는 그런 일 없을거라고 정말 무릎 꿇고 머리를 찍어가면서라도 반성했더라면? 아니 그 날 그 회식에 참여 안 하고 그냥 집으로 갔더라면? 그 전날 승미의 제안대로 그냥 같이 승미 집에서 자고 갔더라면? 그래서 빨래 안 한 옷 때문에 민망해서 회식까진 안 갔더라면? 아니아니 그냥, 그냥….

'승미를 처음 만난 그 카페에서 딱 3분만 일찍 일어났더라면'

그냥…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로 올라가는 나. 5층의 문이 열리고, 501호에 들어선 난 노을 지는 방바닥에 털썩 앉아 기억을 더듬기 시작한다.

"오육이…일? 삼?"

어느새 기억까지 가물가물해진 숫자들. 기억을 다시 해낸다고 해봐야 그녀의 번호라고 여전히 그대로일까 싶지만 그래도 필사적으로 떠올려 본다.

"씨발"

기억이 나지 않아 머리를 쥐어 뜯어본다. 있을 리 없는, 그녀의 번호라도 어디 적어놓지 않았을까 싶어 책상 서랍을 쓸데없이 뒤져본다.

"뭐였더라"

가슴이 뛰고, 잃어버린 시간들을 만회할, 아니 그렇지 못해도 좋다. 그런 것 따위 바라지도 않는다. 단지, 수없이 상상했던 그녀와의 재회만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본다.

"돌아와"

천장을 향해 중얼거린 나는 그렇게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한 채, 눈을 감으며 오늘도 그렇게 휴대폰을 쥔 손을 살며시 놓아버린다.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그녀와의 추억 하나를 떠올리며.





"오빠는 남자치고 눈물이 너무 많아"

영화관에서 빠져 나오는 나에게, 눈물이 그렁그렁한 나를 놀리던 그녀는 슬쩍 내 손을 잡는다.

"그리고 그래서 좋아. 나중에 나 생각하면서 많이 울어줄 것 같아서"
"내가 왜 니 때문에 우는데? 뭐, 니한테 채여서?"

그러자 또 픽 웃던 승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사랑했다, 아니 사랑한다 승미야. 그리고 또 생각해서 미안.





동아리 선배 소설

선배는 타인의 컴플렉스나 아파할 부분을 말로 적당히 유머스럽게 툭툭 건드려서 어느새 대화의 우위를 점하는 사람이었다. 동아리 모임이 끝나고 집에 와서도 기분이 쉽게 안 풀릴 정도로 짜증나는 말들이었지만 일단은 모두가 빵 터질 정도로 확실한 유머로 포장된 말인데다 사실을 기반으로 한 말이었기에 쉽게 정색을 할 수도 없었다. 그저 어색한 웃음만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 남자의 화법이 그랬다. 사람 다루는 기술이 그랬다.

그의 말에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그것을 애써 부정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웃음을 지어 보이지만 결국 주변인들은 그 웃음의 의미를 알기 마련이고, 결국 누가 더 센 캐릭터인지 그렇게 판정 도장이 찍혀버린다. 도도한 은영이도, '쎈 캐' 소희도 한 방에 나가 떨어졌다.

게다가 그는 보통 실권에서 멀어지는 4학년임에도 동아리를 실질적으로 이끌어 가는 동아리장이었고, 그렇게 리더쉽 측면에서도 '사람들을 어느새 자기 지배 하에 두는 사람'이었기에 아무도 그런 그의 모습에 감히 불평을 늘어놓지 못했다. 싫어하더라도 대놓고 표시할 수 없었다. 잘해야 애써 그와 거리를 두는 것이 한계였다. 그리고 그와 거리를 둔 사람은 결코 모임의 이너써클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가 2학년 3학년 일 때도 이미 선배들은 애써 체면치레만 할 뿐, 그의 눈치를 보는 것이 여실히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우리 동아리의 엄석대였다.

게다가 그런 그의 권력과 능력이 참 싫으면서도… 그의 영도 하에서 총애를 받고 동아리의 중심으로 떠오르는 아이들은 부러웠다. 그렇다. 솔직히 부러웠다. 승희, 진아, 선영… 나와 친하게 지내고, 나와 어딘가 비슷한 색을 갖고 있던 아이들이, 그의 총애를 받으며-정확히 표현하자면 그와 자고 난 뒤- 어느새 동아리 최고의 퀸카로 거듭나는 모습은 거의 질투에 가까운 감정을 유발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혐오스러울 정도로 괴로웠지만, 동기들이 하나둘씩 멀어져가는 것이 싫었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대학교 동아리 따위가 참 무어라고 그런 생각까지 하고, 그렇게 몸까지 바쳐가며 누군가들에게 호감과 선망의 시선을 받으려 노력들을 했는가 싶지만, 사람이 한번 맹목적이 되면 그때부턴 정상적인 사고가 어려운 법이다. 아니, 이런 오지랍 어린 시선도 마찬가지인지 모르겠지만.





동아리 선배





"야, 김지윤"

선배였다. 왜인지 모르게 순간 가슴이 철렁했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아, 선배"
"너 요즘 모임 왜 안 나오냐?"

살짝 땀에 젖은 티 너머로 잘 갈라진 가슴근육과 너른 어깨, 실팍한 팔 근육들이 과하지 않게, 딱 섹시할 정도로 세련되게 붙어있는 모습이 제일 먼저 내 눈에 들어왔다. 사람을 섬뜩하게 하는, 주영이의 말을 빌어 '늑대상'의 날카로운 눈매와 단단한 하관이 묵직하게 들어오는 목소리로 성큼 다가왔다.

"그냥, 요즘 좀 몸이 안 좋아서요"

사실은 니가 보기 부담스러워서. 하지만 결코 그렇게 대답할 수 없다.

"그래? 어디 아퍼?"

툭툭 쏘아대듯 내뱉는 말투가 어느 순간 한없이 자상해진다. 잔뜩 경계했던 마음이 다 풀어질 정도로. 그리고 문득 떠올렸다. 그의 첫 인상 말이다. 섹시한 발목 라인이 주는 동물적 에로틱과 함께 스타일리시하면서도 열정적인 자세, 다정한 말투에 우리 모든 신입 여학우들은 그에게 녹아버렸더랬지.

"아니요, …그냥, 조금"

훅 하고 들어와 내 안색을 살피는 그의 모습에 서둘러 변명을 하며 다시 거리를 확보하지만, 그는 다 안다는 듯 그 특유의 눈빛을 보낸다.

"그럼 조금 쉬고, 금요일에는 꼭 나와. 너 없으니까 모임이 영 재미가 없다. 동아리실에서 보고 싶네. 너 번호 그대로지?"
"네" 
"그래, 그럼 연락할게"

다시 아무렇지 않게 저기로 달려가는 모습에, 그리고 밉지만 남자로서 매력적인 그 모습에 묘한 감정이 엇갈린다.





"아 선배, 아 요즘 왜 안 나왔어요!"
"와 대박. 지윤아!"

간만에 동아리실에 내가 나타나자, 무언가 주전부리들을 집어먹으며 노트북과 장비들을 펴고 있던 후배들과 동기가 나를 반겨주었다. 개강 이래 한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던 내가 거의 방학을 앞두고서 얼굴을 비추자 모두들 마치 돌아온 탕자라도 되는 양 좋아라했다. 내가 후배들에게 이 정도 존재였나? 하고 스스로 반문할 무렵, 일부러 다른 일에 집중하는 척 누군가의 전화를 받으며 창 밖을 바라보던 선배를 발견했다. 그랬겠지. 그의 입김이 있었겠지.

"이게 누구야, 와 지윤아! 이게 얼마만이냐!"

한타임 늦게, 뒤늦게 나를 발견한 척 폰을 내려놓은 그는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나를 그렇게 끌어 안았다. 뭐지? 하고 당황할 무렵 그는 또 아무렇지 않게 모두의 앞에서 폭탄선언을 했다.

"야, 너가 다음 동아리장 해라. 너 밖에 없다"





아무도 없는 기술관 옥상에 온 우리 둘. 담배를 피우며 선배가 말했다.

"알잖아. 솔직히 지금 우리 동아리에 뭘 제대로 아는 애가 누가 있냐? 명색이 사진 동아리인데 승희, 진아, 주아 뭐 이런 애들은 메뉴얼 모드 놓고 사진 찍을 줄도 모르는데"

몇 달 전까지는 그랬었지. 모두의 앞에서 그렇게 핀찬을 주기도 했고. 하지만 지금은 거짓말이다. 그 셋 다 모두 그가 가르쳐줬으니까. 누드 사진 찍으면서.  

"저도 뭐 아나요"

게다가 현실적으로 나는 동아리에 깊게 관여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아니, 마음이야 있지만 이제 나도 곧 4학년인데… 금수저인 그와는 다르다. 취업준비만으로도 정신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동아리.

"모르는건 내가 가르쳐 줄 수 있어. 그건 중요한게 아니야"

'가르쳐 준다'는 말에 승희의 말이 떠올랐다. "아무한테도 못 보여줄 사진 찍었어. 선배랑" 괜시리 얼굴이 붉어진다. 솔직히 욕심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교내 탑 5 안에 드는 동아리다. 지원금도 빵빵하고, 나중에 경력에도 도움이 될지 모른다. 잘은 몰라도. 게다가 나도 이너써클에 들어가고 싶다. 그리고 사진도 배우고 싶고, 그의 프레임 안에서 환상의 나신으로 거듭나고 싶기도 하고. 아니 그건 아니려나. 다만 그저 왠지 모를 '그래서는 안된다'라는 경계만이 나를 막고 있을 뿐이다.

"그럼 뭐가 중요한데요"

선배는 어느 틈엔가 내 코 앞으로 얼굴을 들이대고 말했다.

"모르겠냐"

격하게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서둘러 고개를 피했다. 이건 아니다, 라는 생각과 기회야 바보야 라는 생각이 안에서 충돌했다. 나도 안다. 나 말고도 후보는 얼마든지 있다. 사진 좋아하는 승열이, 사진전 입선한 기찬이, 지원전자 사보 알바까지 했던 규원 선배까지. 아니 규원 선배도 다음 학기에는 졸업반인가. 어쨌든 나보다도 더, 아니 나보다 훨씬 더 적합한 인물들이 많다. 사진은 둘째치더라도 이너써클의 진아도 있고, 주아나 정민이도. 그런데 왜.

"저 말고도 많잖아요. 왜 뜬금없이 전데요"
"누구? 기찬이? 승열이? 걔들은 무뚝뚝하잖아. 사람 다룰 줄 모르고. 걔들이 여자애들 잘 컨트롤 하겠냐? 우리 동아리 애들을?"

그래, 나도 솔직히 걔들이 우리 동아리장을 맡는다면, 하면 앞날이 아득해진다. 성차별적인 단어들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주베충' 승열이, 매력 없는 선배 워너비로 되바라진 기찬… 아마도 동아리 말아먹기 딱 좋을 것이다.

"여자애들도 저보다 괜찮은 애들 많잖아요"
"그건 너가 더 잘 알지 않냐? 답 없다는거?"

파벌. 한 마디로 정리되는 그 무서운 권력관계. 그보다 얽힌 치정관계로 인해 선배가 조직을 떠나는 순간 난리가 날 것은 뻔하다. 불안한 삼각, 사각, 오각, 그리고 그 외곽으로 이어지는 거미줄 같은 관계들. 누군가 동아리를 떠나며 말했던 "여기가 동아리냐, 섹스의 왕국이냐. 더럽다 진짜" 하는 말이 새삼 떠오르는 그 관계들. 그걸 무서운 장악력으로 억누르고 있는 이 남자.

"제가 동아리장이 되어도 마찬가지일거 같은데요 그건. 그리고 당장 전 요즘 활동도 안 했는데. 다들 반발할걸요"
"그건 내가 다 카바쳐준다고. 다음 학기동안 상왕 전하 노릇 한다고"
"하…"

어느새 내 옆에 앉아 내 허벅지 위에 손을 올려놓고-그리고 그것을 슥 밀어낸 나-,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을 잇는 그.

"알아 나도. 내가 우리 동아리 이상하게 만들었다는거. 근데 알잖아. 승현 선배랑 중만 선배 그 미친 새끼들 때문에 동아리 공중분해될 뻔한거. 거기다 자인이가 비리건 터뜨리면서 이제 내 기수부턴 올드비들 모임에 부르지도 않는거. 올드비 모임 회보에서 아예 우리는 기수표 자체를 도려냈다고 하대. 진아 걔네 아버지 아니었음 지원금도 나가리 됐을테고. 믿을건 머릿 수 밖에 없고, 사진에 취미도 없는 새끼들 한달만에 다 나갈거 붙잡으려면 뭐 있겠냐. 술이랑 뭐, 노는거지"

뜬금없이 한템포 쉬는 말에 술이랑 섹스, 라고 말하지는 않을까 순간 노심초사했던 스스로가 저주스러워졌다.

"근데 다행히 이젠 동아리도 살아났고 사진에 관심도 있고 잘 찍고, 1학년 때부터 활동한테다 남자 여자애들한테 딱히 모난거 없고…"

은은하게 전해져 오는 그의 향수 냄새에 살짝 거칠어지는 내 콧김을 나는 간신히 숨긴다.

"그리고 누구한테 마음으로 빚 진거 없는 애. 생각해보니까 너 밖에 없더라. 정말로. 우리 동아리 완전 연애의 왕국이라, 다들 CC로 복잡하게 얽혔잖아. 진짜 뭐 딱히 없는건, 내가 이름이라도 기억하는 애들 중엔 너 뿐이야.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나마 올드비들이랑 연락되는 사람 너 밖에 없잖아. 언젠가는 회복해야지. 나는 실패했고, 너대에서 못하면 이제 영원히 우리 동아리는 그 쟁장한 선배들이랑 다 남 되는거야 남. 어떻게 애들 꼬셨나 생각해봐. 현역 작가 올드비들 이름 팔아서 꼬신건데 그거 다 나가리라고. 솔직히 나는 처음부터 성격적으로도 그렇고 우리 동아리 미래를 생각해봐도 그렇고 너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나 밖에 없다는 말. 그 말이 묘하게 들렸다. 물론 무슨 뜻에서 한지는 알지만.

"고민해볼게요"

한참을 눈을 감고 있던 난 그렇게 말했다. 선배가 더 다그치진 않을까 싶었지만, 의외로 쿨하게 그는 일어섰다.

"고맙다. 잘 생각해보고, 말해줘. 그리고 혹시 오늘 언제 끝나냐?"
"이따가 2시에 강의 하나 더 있어요"
"그럼 끝나면 전화해. 집까지 태워다 줄게"

태워다 준다는 말에 잠깐 또 고민했지만 난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옷을 갈아입고, 언제나의 검은 자켓을 입은 그의 모습은 새삼 멋졌다. 운전을 하며 살짝 걷어올린 소매도.

"지윤이 넌 남자 안 사귀냐? 너 내가 알기로…, 주변에 뭐, 남친 좀 사귀었어?"

알기로는 없지 않냐, 라고 말하려던 것 같은 그는 말하는 도중 어설프게 말을 바꿨다. 나는 솔직히 인정했다.

"고3 이후로 남친 없었어요"

썸을 탄 남자는 조금 있었지만, 하고 덧붙이려다 구차해지는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또 그가 무언가 조소를 퍼붓지는 않을까 걱정되기도 하고 어디가서 그 이야기를 떠들지는 않을까 싶어 아차 싶었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하기사 생각해보니 그가 또 남 없는 자리에서 뒷담화 한 기억은 없는 것도 같다.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냐. 넌 얼굴도 이쁘고 스타일도 좋은데. 대시 많이 받았을 줄 알았는데. 남자들이 바보네"

생각해보니 그와 이 정도의 사적인 대화라는 나누는 것도 정말 오래간만, 그것도 단 둘이 나누는 것은 처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그는 뜻밖의 말로 나를 띄웠다. 하지만 칭찬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얼른 그에게 바톤을 넘긴다.

"선배는 지금 사귀는 사람 있어요?"

무슨 대답이 나올지 궁금했다. 학교의 누군가 이름이 나올지.

"아니, 없어"

이후의 내 묵묵무답이 항의나 의구심 어린 눈총으로 느꼈던지 덧붙였다.

"1학년 신입생 아리 있지. 걔한테 들이대다가 까였어"

아, 진아가 말했던 선배가 공들인다는 그 신입생이 걔였나.

"왜요?"
"왜긴, 애들이 모르겠냐. 내 소문이랑, 사실들 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창 문으로 시선을 옮기다가 물었다.

"사실이에요? 사진… 가르쳐준거? 누드 사진으로?"
"뭐?"

선배는 '누드 사진'이라는 말에 피를 토하듯 놀라더니 말했다.

"너도 그 이야기 믿냐? 아 승희 그 기집애 진짜 아…"

다소 오버하는 톤의 말에 연기일까 싶어 그를 자세히 바라보았지만, 그는 꽤 리얼하게 괴로워하고 있었다.

"내 진짜 어디까지 말해야 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진아랑 잠깐 사귈 때, 승희가 그거 질투한건 너도 알거야"

당사자에게 이런 이야기 듣는 것은 아마도 우리 과 전체를 통틀어 내가 처음 아닐까.

"알아, 솔직히. 여자애들. 하, 이 죽일 놈의 인기…가 아니라, 무슨 내가 우리 동아리의 숨은 흑막처럼 그렇게 이상하게 생각하는거 안다고. 남자애들도 술 쳐먹고 나한테 밤에 울면서 전화하는 애들도 있는데 뭐. 근데 잘 생각해봐. 나 진아랑 잠깐 사귈 때 내가 어떻게 했냐? 너도 봤잖아. 근데 왜 그런 이상한 소문이 도는거야. 내가 무슨 카사노바라고. 찌질이면 찌질이지"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들과 너무 다른 이야기를 하기에 나는 곧바로 되물었다.

"그럼 내 동기 여자애들 중에 잔 애 한 명도 없어요? 진아 빼고"

선배는 한참을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말했다.

"없어. 맹세코. 내가 거짓말이면 당장 오늘 벼락 맞고 뒤진다"




"너도 기억나지? 정우 선배. 그 비원아이즈 했던 예리랑 같이 속옷 쇼핑몰 낸거. 그 선배가 승희 통해서 연락한거야. 모델이랑 포토그래퍼 필요한데 도와줄 수 있냐고. 승희 걔 좀 원래 슴부심 있잖아"
"많죠"
그래. 지가 오케이 한 거고, 나도 뭐 그래도 선배 부탁 받아서 하는 알바고 페이도 괜찮고, 무엇보다 정우 선배 통해서 나는 다시 어떻게 올드비들이랑 좀 잘 해보고 싶은 거도 있었고. 그래서 한건데, 그땐 이미 진아랑도 깨졌을 때고. 둘이 모텔에서 찍는데, 하다가… 아, 이건 좀 진짜. 말해도 되나 싶은데, 여튼 승희가 나 좋아했던건 알지?"
"알아요"
"그래서 승희가, 도발을 했어. 갑자기 브라 풀어버리고. 근데 거기서 내가 막 이상하게 대하는 것도 그렇고, 막말로 거기서 내가 정색하면 일이 이상하게 꼬일 수도 있지 않겠냐? 걔 자존심도 그렇고. 그래서 먼저 승희야, 너 가슴 이쁘다. 기왕 촬영도 거의 끝나가는데, 누드 사진 찍지 않을래, 한거지"

하.

"근데 둘이 안 잤다고요?"
"어 안 잤어. 잤으면 솔직히 걔가 지금 우리 동아리 남아있겠냐. 걔 성격에? 웃으면서 찍고, 나중에 걔가 그러더라. 오바해서 미안하다고"
"그래도 안 잤다는건 안 믿기는데"
"그때 찍은 사진 실시간으로 다 남았어. 모텔 나오면서 내가 이거 재수없음 큰일 나겠다 싶어서 찍은 사진들도 있고. EXIF 보면 알잖아"

그거야 어떻게는 방법은 많고, 또 꼭 그 날이 아니었더라도 볼 거 본 사이에 또 다른 날에 무슨 일이 있었을지 어떻게 아냐고 묻고 싶기도 했지만 문득 내가 그거에 궁금해 할 이유도 권리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꼬치꼬치 캐물은 내 질문들이 문득 속마음을 드러낸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우리 둘 다 말이 없어졌다.

"지윤아, 저기냐?"

그리고 마침 집 앞에 도착했다. 원룸촌 골목에 있는 천에 사십짜리 작은 원룸. 주차도 가능하지만 이제껏 내 칸에는 한번도 그 누가 주차한 적이 없는 내 집.

"선배"

오후 5시 54분. 지금도 눈에 선하다. 차에서 내리기 직전, 차창 밖의 골목길을 바라보던 그 순간을. 노을이 지면서 골목길엔 소슬한 바람이 부는 그 시간. 뱃 속이 조금 출출할 시간. 보일러를 켜놓지 않아 조금 방이 추울 그 시간. 그러나 그걸 이유라고 하기에는 그 다음 내가 한 말이 너무나도 이해가 가지 않는 그 말. 왜 그랬을까. 그냥 혼자 끙끙 앓던 고민이 조금은 해소된 탓? 아니면 지금이 아니라면 영원히 없다는 조바심이 든 탓? 어쨌거나 난 그 말을 내뱉고 말았다.

"라면 먹고 갈래요?"

미친 년. 개또라이 년. 아 죽일 년. 병신 미친 년. 아, 미친 년. 가슴이 미친듯이 쿵쾅대며, 내가 감히 그런 대사를 먼저 말했다는 사실에 난 얼굴이 단번에 새빨개졌다. 뭔데 미친 년아. 그리고 미친듯이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그저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후"

가벼운 한숨. 천 년과도 같은 5초가 흐르고, 선배는 입을 열었다.

"아니"

나는 곧바로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고 싶었다. 아, 시팔 내일부터 학교 어떻게 다니지. 휴학해야 되나, 자퇴해야 되나. 아 미친 년, 진짜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이게 꿈이 아닐까 간절하게 눈을 뜨고 또 떠봤다. 그렇게 자살하고 싶은 3초가 더 흐르고, 선배는 말을 이었다.

"혹시 짜파게티 있냐"

안전벨트를 풀고 바로 도망치듯 뛰어나가는 개그 캐릭터가 될 건가, 미안해요 라고 말하며 우는 비련의 캐릭터를 연기할까 고민했지만 그의 뒷 말에 나는 아득해지던 정신머리가 단번에 돌아왔다.

"네?"
"어제 저녁도 라면이고 오늘 점심도 라면 먹었어. 어제 기찬이랑 술 먹고 출출해서 라면 먹고, 오늘 아침에 또 해장라면 먹었지. 근데 저녁도 라면이면 너무 불쌍하잖아. 짜파게티라도 끓여줘라"

나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선배"

선배는 주차권은 없지만 어느새 뒤를 돌아보며 주차를 시작했고, "뭔 말인지 알아" 하고 내 말에 대답하며 말했다.

"내가 좀 매력적이긴 한데, 그래도 잠부터 자는건 너무 진도 빠르지 않냐?"

난 새빨개진 얼굴로 "나 그런 말 한거 아닌데" 하고 어설프게 둘러댔지만, 선배는 주차를 마치고 내 손을 잡았다.

"신입생 환영회 때 기억나냐"

아 그 날.

"선배가 나 똥배 나왔다고 놀린 날이요?"
"어. 기억하네? 그 날 승현이, 그 선배도 아닌 미친 새끼가 너한테 술 계속 먹이길래 내가 그랬잖아. 쟤 똥배 보라고. 배 터지겠다고, 그만 먹이라고"

아….

"그래서 그런 거였어요?"
"어. 너 그 날 나 아니었음 무슨 일 당했을지 모른다. 하, 조금만 빨리 그런거 알았어도 정미, 서윤이 걔들도 다 그런 일 없었을텐데"

이번에는 내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거 알아요? 나 거기선 웃었는데, 그 날 집에 가서 운거? 내 컴플렉스 지적당해서 완전 오빠 한동안 죽도록 미워한거?"
"알아. 그리고 그 이후로 너 일주일만에 살 독하게 빼온 거도 알고"

다 지켜보고 있었구나.

"오빠"

이번에는 내 눈빛에 부담을 느낀 것인지 선배는 서둘러 벨트부터 풀었다.

"얼른 가자. 짜파게티 끓…"

그러나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고, 나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그의 머리를 잡고 입을 들이댔다. 자세가 이상해서 제대로 입술을 맞추지도, 그다지 로맨틱하지도 않은 키스였지만, 그러고 싶었다.

"좋아해요"

휴학 기간까지 합해 근 5년간 저 멀리 방치해놓았던 그 짝사랑, 모처럼 몸에 붙는 옷까지 입어가며 혼자 훅 불타오른 바로 그 날 개망신과 함께 짜게 식어버린 그 마음을 이제서야 이렇게, 전달했다. 선배는 잠시 멍하니 있더니 혼자 또 픽 웃었다.

"너 진짜 무드없다. 그리고 그게 박치기지 키스냐. 야, 이거 무효로 쳐. 담에 제대로 해. 내가 제대로 가르쳐준다. 됐고 빨리 짜파게티 끓여"
"알았어요"

나는 신이 나서 차에서 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꽤 답 없는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기대가 됐다. 내 서툰 사랑이.

노을 지는 천장 소설

전철 창문 너머로 기울어지는 오후 네 시의 태양에 나도 모르게 감상적이 되어 눈시울이 붉어진다. 미래에 대한 걱정에 흐르는 눈물이라기보다는 그저 어쩐 이유에선지 떠오른 지나간 옛 연인들의 얼굴 때문이다.

'나랑 안 이어져서 다행이다'

혹시라도 나같은 새끼한테 시집이라도 왔으면 어쩔 뻔 했는가. 그래도 다들 알아서들 잘 제 인생들 찾아갔다.

"허"

나도 모르게 헛기침이 다 나온다. 그 장대비 속에서 바짓가랑이 붙잡고 매달리는 나를 참 모질게도 버리고 가 버린 유정이, 헤어지고 나서도 뭐가 그리 아쉬웠는지 맨날 술 쳐먹고 울며 전화하던, 그러나 다시 만날까? 하는 내 질문에는 귀신 같이 입 다물던 소영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가 차버린 핸드폰 가게 빚쟁이 경미, 못 생겼지만 마음 하나는 끝내주게 착했지만 역시 못 생겨서 싫었던 다희씨,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난 왜 그리도 눈치가 없었는가 후회되는 슈퍼 퀸카 정은이, 세상 털털했던 방귀쟁이 현정이, 비교쟁이 호정이, 5년 짝사랑 했다더니 3일 사귀고 날 차버린 경란이, 바람둥이 수연이, 변태년 소미, 짝눈 길희, 맛있고 착했던 유희, 이쁜 이모 연경, 사내 양다리 혜경이 이 개년…

울고 웃었던 추억들이지만 이제는 다 '차라리 잘됐네'라는 생각 속에 묻어둘 수 있다. 특히 유희 생각이 새삼 떠오른다. 궁합도 안 본다던 4살 차이, "오빠 우리 결혼할래?" 하고 먼저 프로포즈 했던 순진 덩어리에 여튼 참, 다시 생각해도 내가 그런 기집애랑 연애를 해봤다는 사실이 새삼 뿌듯해지는 그런 이쁘고 늘씬했던 그 기집애.



"오빠가 조금만 자리 잡으면, 그때 결혼하자"

등신 새끼. 자리 잡긴 시펄 뭔 어디에 무슨 자리를 잡는다는건지 당최 지금도 알 수 없는 개소리는, 그냥 시벌 손 잡아끌고 유희 아버지 찾아가서 "장인 어른!"하고 소리치고 우리 수원 집 팔아버리고 엄마 아빠 길바닥에 재우더라도 신혼집 장만해서는 둘이 오손오손 이쁘고 행복하게 살았어야 되는 것을 무슨 놈의 자리는 그리도 쳐잡겠다고 3년을 내리 질질 끌다가 남 좋은 일만 시켰는가.

"잘 다녀와"

잘 다녀오긴 엠병 어딜 잘 다녀와, 결혼 적령기 접어든 기집애가 외국 장기체류 시작하면 쫑나고 새출발 시작인 것을 어디 몰라서 보내줬나, 도대체 그 시절의 내 대가리 속에는 어떤 썩은 개똥이 문들어져가고 있었길래 그런 병신 짓만 연달아 했는지 당최 이해가 안 갈 지경이다. 결국에 현지에서 만난 인물 훤칠하고 교포 냄새 나는 버터 김치맨이랑 눈 맞아서 "오빠 미안해" 하는 전화 한 통에 눈물 콧물 다 쏟은, 그러고보니 왜 내가 그 환승녀를 착했던 년으로 기억하고 있는가 생각해봤더니 결국에는 거시기구나. 그래, 그건 훌륭했지. 인정, 가슴 하나는 역대 최고였지.

"그래, 다 그렇고 그런거지"

순진하긴 니미 세상 천지에 순진한 것이 다 뭐냐. 그냥 세상 물정 모르고 학교랑 부모한테 배운대로 행동하면 순진이고, 스스로 허리 열심히 돌리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볼장 다 본 것이지. 그래도 역시나 나에게 먼저 결혼하자는 제안 해준 것은 세상 고마운 것이다. 최소한 나와 함께 진지하게 미래를 꿈꿔보고 괜찮다 생각 해본 것 아닌가. 설령 그게 기분에 취해서 한 소리라고 한들 말이다. 다른 년들은 농담으로라도 그런 소리 안 했었더랬지. 물론 나도 마찬가지고.




"2만 6천원입니다"

카드로 결제하고 보니 이번 달 카드값도 어느새 팔백 오십이다. 언제쯤 리볼빙 인생을 탈출할 수 있을까. 아니, 모처럼 고기까지 산 마당에 기분 잡치는 소리는 관두자. 루루루 콧노래까지 부르며 집으로 향하노라니 어느새 콧노래는 군가를 쳐부르고 있었다. 이 나이 쳐먹고 흥겨워 부르는 콧노래 레파토리가 군가라니 참 내 팔자도 어지간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 참 답 없구만"

방문을 열자마자 희미하게 풍기는 쓰레기 냄새. 어제 내다 버린다는 것을 그냥 냅뒀더니 방 안에 썩는 내만 풀풀 풍기고 있다. 쓰레기 봉투 주둥이를 묶어놓고 환기를 좀 시킨다. 마지막 출근을 위해 입었던 외출복을 벗고 빤스 바람으로 방바닥에 널부러진다. 마트에서 사온 삼겹살과 마늘과 쌈장과 깻잎과 소주는 내 옆에 두고.

"아, 참 싫구나. 내 인생"

미지근한 방바닥이 조금은 신경 쓰이지만 딱 5분만 누워있다가 고기를 굽기로 한다. 그 화려하고 좋은 시간 다 지나가고, 결국에 이리 홀로 되어 직장에서도 쫒겨났다. 퇴직금 한 돈 천만원이 있긴 하다만 내 나이에 무슨 이직이 되겠는가. 한 달 두 달 세 달 까먹다 보면 어느새 빈털털이 다시 되겠지. 애초에 당장 카드값 다 갚고 나면 꼴랑 2백이 채 안 남는데 아마 은행대출 자동 연장 다음 달에 안되고 최소 10% 결제하고 나면 레알 개털될 것이다. 어쩌다 이리 되었는가. 왜긴 왜야, 그 놈의 영감쟁이 연대보증 때문이지.



치익- 칙-

아 참 맛있게도 구워진다. 가스렌지 멀쩡히 있는걸 두고 괜히 방에서 부루스타 켜고 돼지를 굽다보면 첫 사랑 유정이가 생각난다. 상암동 재개발 되기 전에 그 좁은 집에서 둘이 부루스타 켜고 고기 구워 먹는 추억을 떠올리면 아마 30년 후에도 우리 이러고 있겠지? 하고 히히덕 대던 말들이 지금도 선하게 기억난다.

30년 후는 얼어죽을, 바로 그 다음 다음 주에 장마비 속에 사람 그 많은 곳에서 그녀 바짓가랑이 붙잡고 엉엉 울던 그 날의 굴욕이 20년도 넘게 흐른 지금도 날 몸서리치게 만든다. 내가 찌질해서 싫어 차는건데 마지막까지 이러기냐며 쌀쌀맞게 날 버리고 가던 그  얄미운 뒷모습이 당시에는 그리도 원망스러웠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며 내가 사람 구실하기 시작한 것도 그 이후부터다.

"크, 술 맛 도는구만"

내가 후져 보여서 헤어진거다, 라는 생각은 정말로 찌질했던 나 스스로를 채찍질 하게 만들었고 서울로 올라오던 버스 안에서 그렇게 다짐하고 다짐했듯 스스로를 다듬기 시작한 나의 와꾸는 점차 오랑우탄에서 네안데르탈인을 거쳐 경훈 오빠에 이르게 되었더랬지.  

그리고 시작된 십 여 년간의 화려한 내 삶의 봄. 흐뭇하다. 이름조차 기억 못할 그 수많은 꽃밭의 향연 속에 내 입술과 기둥과 알주머니는 참으로 호강을 누렸으되 오늘의 이 허무함은 그것이야말로 인생의 참맛 아니겠는가.

"마늘, 마늘"

소미 년은 항상 생마늘을 강요했었다. 세상에 나보다 더 밝히는 기집애는 소미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왜 구워먹냐며 그러면 영양소 다 파괴되는거 아니냐며 쌈을 싸도 그 놈의 쌩마늘은 대여섯개를 퍼넣으니 그게 어디 고기쌈인가 마늘쌈이지. 맛도 모르고 먹느냐며 성질 벌컥 내고 싸우노라니 대뜸 티셔츠를 가슴팍까지 걷어올리고는 "만지고 화풀어" 하던 그 미친 발상에 새삼 그 년은 누구한테 시집가도 사랑받고 살겠구나 싶어 흐뭇하게 아빠 미소가 지어진다.

"하아"




배터지게 쳐먹고 널부러져 고기 냄새 충만하고 기름바닥 미끄러운 이 좁은 원룸에서 천장 바라보며 서서히 저물어가는 노을을 만끽한다. 눈가에 흐르는 이 눈물은 역시나 미래에 대한 불안이나 오늘의 현실에 대한 회한 따위가 아니라 그냥 그녀들이 참 괜히, 정말 괜히도 너무나 보고 싶어서다.

잘 지내고 있을까. 다들 정말로 잘들 지내며 살고 있을까.

혹시라도 지금의 나처럼 찌글찌글하게 사는 기집애가 있다면, 얼른 그 찌질함 털어버리고 부디 내 몫의 행운까지 가져가서 잘 살기를 바란다. 소주 한 병에 이렇게도 나는 얼큰해진다. 부디, 제발, 다들 잘. 끅.

주니 소설

그녀의 이름은 주니였다. 발음 편한 주니, 오주니.

"맛있네"

처음 들었을 때는 당연히 준희려니 했으나 그녀가 몇 번이고 강조해서 진짜 이름이 발음 편한 주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쵸?"

할아버지 소리 들을 연배인 그녀의 아버지가 막내 딸 이름을 등록하는 과정에서… 다소 소통의 문제가 있었단다. 주니의 표현을 빌어 '배움이 그리 넉넉하신 분이 아닌 탓'에 글에 약해 준희라고 등록해야 하는 것을 주니라고 등록했다나. 당연히 이상하다 싶어 몇 차례나 면사무소의 주사가 되물었지만 그 즈음해서는 또 워낙에 자존심 세고 고집 센 양반인지라 자기가 틀린 것을 인정하기 싫어 그저 주니라고 밀어 붙였다고.

"맛있죠? 진짜 맛있죠?"

어디서 알아온 맛집 정보에 혼자 신이 나서 들떠 내 팔뚝을 붙잡고 끌고 들어온 그녀는 연신 내 입맛을 묻는다. 딱히 입맛이 까다롭지도 않은데도. 주니는 내가 밥 먹는 모습이 복스러워서 그렇게 좋았단다. 생긴 것은 꼭 샌님 같은데 어쩜 밥 먹는 것은 그리도 맛나게 잘 먹는지, 보면서 그만 마음이 녹아내렸다며. 샌님이라는 표현조차 강원도 우리 외할머니나 사용할 법한 단어건만 어쨌거나 나 좋다는데야 기분 나쁠 리 없다. 오히려 그게 신이 나서 부러 더 급하게 먹다가 체한 바람에 집에 와 혼자 토한 기억도 두 번이나 있다.

"뭐라고?"

사실 남들 앞에서의 이미지와 달리 은근 생각하는 것도 샌님이라 낯선 여자 앞에서 서면 말이 없어지고 낯가림이 심해 친해지는데 시간이 제법 걸리는 내가 그녀 앞에서만큼은 그리도 빨리 달변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 칭찬들 덕분이다.

"어쩜 그리도 잘 생겼어요?"

밥그릇 너머로 그저 해맑게 웃으며 칭찬하기 바쁜 주니. 내 연애 상식으로는 여자는 조금 칭찬에 인색해야 남자가 몸이 달아 연애가 쉬워지거늘, 그녀는 그저 퍼주기 바빴다. 칭찬 뿐 아니라 마음 씀씀이 자체가 그랬다.

"월급 받은 김에 샀어요"

내가 그럴듯한 밥 한끼를 사주면 그 다음 번의 만남에는 내 구두을 사오는 격이다. 그것도 그녀가 정말 알고 산 것인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괜찮은 브랜드로. 같이 일하는 언니들의 도움이겠지만. 척 보아도 그리 넉넉함은 느껴지지 않는 그녀의 스타일이었으니 그녀의 그 선물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는 따로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미안한 마음에 그녀 손을 붙잡고 화장품 가게에라도 들어설라치자 기겁을 하는 것이, 그것이 부담스럽거나 필요 없어서가 아니라 사실은 화장 자체를 해본 적이 거의 없단다.

"정말로?"
"응. 전부 그냥 언니들이 도와줄 때나 했어요"

서울에 처음 상경해 느낀 것은 그 스스로의 초라함이었단다. 순진하긴 해도 그것은 본성이 착해서 약게 굴지 못함이지, 머리가 나빠서가 아닌지라 말씨야 기숙사에서 금새 서울 말씨를 익혔다만 화장이나 옷차림은 아무래도 도전하기가 어려웠다나.

"돈을 들여도 티도 안 나고, 실패는 자꾸 하니까 차라리 그냥 아끼는게 낫겠다 싶어서…"
"내가 도와줄게"

구두에 외투까지 얻어 입은 차에 나 역시 뭐 작은 거라도 하나는 해야겠다 라는 마음에 백화점에 내가 먼저 앞장을 섰다. 실은 이번 달 카드값이 아슬아슬해서 순간 아차 싶기는 했지만, 애써 허세를 부렸다.

"이거 얼마나 해요?"

가격을 들으니 걱정했던 것보다야 훨씬 저렴하니 이쯤해서는 의기양양하게 마음껏 골라보라 했다. 그럼에도 선뜻 집어들지 못하는 주니를 보다못한 점원이 두 어개를 골라주는데 그제서야 비교 눈이 생겼는지 주니도 몇 개를 집어들며 개중에 마음에 드는 것을 골랐다.

하나는 보랏빛에 하나는 새빨간 색이다.

"마음에 들어?"

실은 둘 다 색이 너무 진해서 촌스럽지는 않나 걱정이 되어 슬몃 점원의 눈치를 보았더니 어째 점원도 당혹스러워 하는 것이 나랑 비슷한 눈치다. 그래서 "이것은 어때?"하고 몇 개를 더 집어 보여주었건만 주니는 이미 마음을 정한 듯 했다. 기왕의 선물인데 본인의 마음도 중요하지만 모처럼의 선물이 망신이나 돋게 하면 그것도 내 잘못이다 싶어 아까 점원이 추천했던 다소 은은한 색 하나를 얼른 하나를 더 집어들었다. 주니는 괜찮다며 두 개도 많다며 남들 보기 민망할 정도로 손을 내저었지만 구두에 외투까지 한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우겨대며 기어코 나는 세 개를 계산하고 나왔다.

"고마워요"

몇 번이고 괜찮은데 괜찮은데 하다가 뒤늦게 무언가를 깨달은 것인지 "혹시 내가 고른 색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요? 그럼 그냥 두 개는 돈으로 바꿔올까요?" 하고 묻는데 그제서야 또 내가 괜한 걱정을 만든 것인가 싶어 "아니야, 이뻐. 잘 어울려. 내일은 그 빨간색 바르고 와" 하고 웃어보였다.

"고마워요, 정말로" 

그리고 그제서야 화사하게 웃는 웃음이… 그 환하고 밝은 웃음이 너무 사랑스럽게 느껴진 나는 그렇게 내 진심을 어이없이 쉽게 내주고야 말았다. 그 이후의, 우리가 함께 겪을 그 긴 사랑의 여정 따윈 생각조차 해본 적 없이 말이다.   

回顧 소설

오늘도 승남의 전화는 걸려오지 않는다. 알고 있다. 걸려 올 리 없다는 것을. 이미 반 년도 넘게 연락이 없는데 연락이 올 리가 없다. 우리는 이미 옛날에 완벽히 끝나버린 것이다.

"춥네"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들이치는 비바람이 여기까지 느껴진다. 다가가서 그렇게 창문을 닫는 순간… 서늘한 바람이 따뜻한 방 안에서도 가슴 한 줄기를 파고들며 아프도록 얼어붙게 만든다. 그리고 그 순간 어느 날이었던가 그과 함께 손을 잡고 같은 우산을 쓰며 눈 펑펑 내리는 길을 걷던 기억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좋았는데…"

그토록 순박했던 사랑. 나라는 사람을 어쩌면 그렇게까지 좋아해 줄 수 있었을까 싶은, 앞으로 죽는 날까지 다시 또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가슴이 미어지듯 죄어오는 그런 너.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할 줄 알았던 너.

다시 한번만, 정말로 다시 한번만 그때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삶에 지치고, 혼자 있을 때면 어느샌가 떠오르는 네 기억. 무엇 하나 너에게 만족스레 준 적 없어도 그저 미친듯이 나를 위하고 떠받들었던 너.

그게 귀한 줄 몰랐고, 아니 알았음에도 애써 무시했던, 그래서 그저 마냥 무시하고 지냈던 그 사랑. 너무나 당연하게 영원히 내 곁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사람, 그리고 그런 사랑.

아버지 사업이 망하고,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날 붙잡고 이겨낼 수 있게 도와준 사람. 그러나 나는 그 와중에 그가 얼마나 곯아가고 있었는지를 몰랐지.

"그래, 난 자격이 없지"

나에게 맞추기 위해 그가 얼마나 무리를 하고 있었는지, 또 내가 얼마나 까탈스럽고 피곤한 사람이 되어 있었는지 그때는 정말 몰랐었다. 그저 그라면 그걸 다 해줄 수 있고, 다 해주던 사람이었으니까.

뜬금없는 기억이지만 사귄지 얼마 안 됐던 때, 아니 어쩌면 1년 쯤? 아니 2년 쯤 지났던 때였을까. 모르겠다. 언제나 넌 그렇게 성실하고 헌신적이었으니까. 내가 과일이 먹고 싶다고 자기 전에 지나가던 말로 말했더니 정말로 그 빗 속을 뚫고 우리 집 앞까지 그것을 사왔던 네 모습은… 그래, 당혹스러웠지.

이해도 안 되고, 마치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고, 사실 고마운 마음도 있었지만, 그냥 당혹스럽고 두려웠었어. 그렇게 맹목적인 사랑은 싫었으니까. 그래서 내가 무어라 마구 퍼부었음에도-사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싫은 내색 한번 안 하고 "미안, 그러고 보니 그러네. 그래도 그거 이 시간에 힘들게 산 거니까, 먹어" 하고 웃으면서 과일만 건내주고 다시 그 빗 속을 돌아간 너. 그렇게 무언가 한 마디를 더 건내지도 못하고 멍하니 너 떠난 뒷모습만 그렇게 바라보다 며칠을 미안해서 연락도 못 했었지. 하.

이 책상도… 이 방석도, 저 커튼도.

너와 얽힌 기억은 하나같이 너에게 미안한 기억 뿐이야. 도대체 난 무엇 때문에 너에게 왜 그리도 못되게 굴었던 것일까. 가슴이 뭉클해지다가도,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그저 미친 사람 같은 나만 남아. 그게 너무 괴로워.

네가 그렇게 나를 떠나갔지만, 미안한 건 니가 아니라 나야. 그럴 리 절대 없겠지만… 만약에, 정말 만약에 다시 한번만 너와 다시 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절대, 절대로, 영원히 절대로, 맹세코 절대로 그렇지 않을테니…

"아니야"

나는 노트북을 덮고, 눈가에 글썽인 눈물을 그렇게 닦는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https://www.youtube.com/watch?v=WWS747M7UnQ

불안한 목소리 망상

요즘들어 부쩍 줄어든 너의 말 수. 모처럼의 즐거웠던 데이트. 그늘졌던 네 얼굴에 간만에 비친 환한 웃음. 그리고 그 웃음에 나까지 행복하진 그 날의 데이트.

"그런데 말이야…"

무언가를 이야기 하려다 얼버무린 너. 무슨 이야기냐고 조심스레 되물어도 그저 어색하게 아무 이야기도 아니라고 둘러대는 너. 초조해진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어주는 네 눈가에 고인 눈물.

"왜 그래"

몇 번을 물어도 물어도 대답하지 않고 그저 어색하게 웃다가 "그냥 너무 좋아서 그래. 너무 좋아서" 하고 또다시 얼버무리는 너. 이제는 진정되지 않는 내 심장. 불현듯 스치는 안 좋은 예감과 쿵쾅대는 심장 박동의 불안함에 그저 눈물이 뚝뚝 흐르는 나.

"미안해, 괜찮아, 왜 그러는데"

나를 안고 진정시키려 노력하지만 너의 가슴에서 느껴지는 서늘함. 어쩌면, 어쩌면 오늘은 결코 오지 않기를 바랬던 그 날일까. 몇 십 번이고 꿈에서 나를 울렸던 그 날이 정녕 와버린 것일까. 오늘도, 지금도 꿈이면 좋겠는데, 꿈이어야 하는데.

"집에 들어가자…"

하지만 네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차가워진 날씨. 꿈이 아님을 두려워하며 말과는 다른, 집이 아닌 놀이터로 향하는 네 발걸음에 그만 또 눈물이 줄줄 흐르는 나.

"왜 그래…"

쳐지는 네 목소리. 그리고 급기야 "그래, 오늘이야. 네가 두려워했던 그 날" 하고 선언하는 네 섬뜩하게 차가운 목소리에 그만 깨어난 잠. 등줄기에 줄줄 흐르는 이 식은 땀은,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몰라 나를 또 어리둥절하게 만들고도 남는다.  


준 결혼제도 소설

'결혼은 미친 짓이다'라는 구호와 함께 결혼제도에 대한 회의감이 사회를 휘감은 근 미래의 어느 아시아 국가… 사회 구성의 최소 단위가 '가정'에서 '개인'으로 무너지기 직전, 국가는 특단의 제도를 내놓았다. 그것은 '준 결혼제도'였다.








준 결혼제도 







"3년 짜리… 오케이, 성함 싸인 다 확인 하셨지요? 네, 다 됐습니다. 이제 두 분은 부부가 되셨습니다"

심드렁한 주민센터 공무원의 검수, 직인질이 끝나자마자 두 남녀는 행복한 비명을 지르며 끌어안았다.

"꺄!"
"와후!"

그 종이쪽지 하나가 뭐라고, 신주단지 모시듯 종이를 들고 뛰어나가는 둘을 바라보며 공무원 동석은 혀를 찼다.

"등신들"

그러자 옆에 있던 기택이 웃으며 말을 걸었다.

"왜, 보기 좋구만"

하지만 동석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 뭐한다고 3년씩이나 서로를 옭아매. 정 그렇게 좋으면 1년짜리 해서 연장 연장 하면 되는거지"
"귀찮잖아. 이사할 때 2년마다 전입신고 하는 것도 귀찮아 죽을 것 같은데, 결혼신고를 매년 하라고? 어후 귀찮아"
"자동갱신 되는데 뭐가 귀찮아. 전화 한 통만 받으면 되는데"
"아 귀찮아"
"에라, 그 정도로 귀찮아서 결혼생활은 어떻게 하고 있는거냐"

그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신입 은미가 끼어 들었다.

"동석님이 그래서 여자들한테 인기가 없는 거에요. 누구는 뭐 옭아메이는거 좋나? 그래도 기분상 1년짜리 보다는 최소한 3년짜리 계약은 해야 아 이 남자가 나를 많이 좋아하는구나, 하고 생각하지"
"그럼 아예 10년짜리를 해야지"
"그건 또 너무 부담되잖아요"
"에라이"



평생토록 단 한 사람만을 바라보고 살아가며, 삶의 모든 것을 하나로 영원히 합친다는, 그야말로 이상의 극치라 할 수 있는 결혼제도는 21세기 이후로 수많은 한계점을 노출했다.

대다수의 연인은 짧은 신혼의 기간이 지나면 더이상 서로만을 사랑하지 않으며, 폭력이나 금전적 제약 등 수많은 불합리 속에서도 남녀는 '부부'라는 제약 속에서 그저 참아야만 했다. 비록 이혼이라는 최후의 수단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풀기 어려운 제약이었으며 이혼은 결혼만큼이나 복잡하고 괴로운 일이었다.

애초에 결혼에 들어가는 비용이나 책임이 지나치게 과도했다. 20대 중후반~30대 중후반 사이의, 아직 삶에 대한 통찰이 부족한 시기에 내린 1년 남짓한 시간의 결단 때문에 평생을 그에 시달려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가혹한 일이었다.

그나마 어느 시기까지만 하더라도 '육아'라는 또 하나의 족쇄가 부부관계를 유지하는데 기여했지만, 출산율이 0.6 이하로 떨어진 어느 시기에 접어 들면서는 결혼 제도에 대한 회의는 더욱 크게 사람들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그것은 국가적 입장에서 보았을 때 재앙 그 이상이었다. 연인이 부부가 되고 가족을 이루며 출산을 하여 또 다른 사회 구성원을 생산해내지 않으면 국가는 결국 무너질 수 밖에 없다. 물론 그 문제는 수십년 전부터 심화된 상태였지만, 아예 결혼조차 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더욱 큰 문제였으니까. 결국 국가는 새로운 정책을 내놓았다. 그것은 '준 결혼제도'였다.

결혼 생활과 동일한 수준의 사회적 보장을 제공하되, 그 기간은 최단 1년 최장 10년까지의 기약이 있는… 이른바 계약 결혼의 허용이었다. 물론 계약 기간 내에도 얼마든지 이혼은 가능했다. 핵심은 '제도로 서로의 관계를 보장'해주는 것에 있으니까.





"궁극적으로 말해서 솔직히 결혼을 왜 해? 그냥 오래 사귀기만 해도 되는데 결혼 왜 하냐고? 그거야 이 사람이 정말 너무나 갖고 싶다, 너무 좋다, 이 사람이라면 오랜 시간 함께 해도 좋을 것 같다, 다른 누구한테 뺏기기 싫다, 이런 마음으로 하잖아? 근데 사람 마음이라는게 간사하잖아. 막상 결혼해서 딱 가져버리면, 1년, 3년, 5년, 10년 지나면 마음이 변한단 말이야. 이 사람 아니면 안돼, 절대 이 사람 밖에 없어… 하던 사람도 결국 에휴 저 화상, 내가 미쳤지 저런게 좋다고 결혼을 하다니, 하잖아"

원로 정치인 김석환의 말이었다.

"그럼 아예 제도에서 그걸 보장하자고. 두 사람이 일단 원하는 기간동안 결혼 생활을 시켜주고, 그 기간 살아보고 마음에 들면 연장 하고 아니면 딱 그 기간 끝나면 깔끔하게 헤어지는거지. 이혼 소송 그런거 안해도 알아서 자동으로, 제도적으로 딱딱"





제도의 도입을 놓고 근 10년 가까운 진통이 있었다. 역설적으로 결혼제도의 해체를 부를 것이다라는 전망부터 현 시점에서 내놓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라는 주장까지. 그러나 무턱대고 반대하기에는 이미 결혼율이 40% 미만으로 떨어진 상태였다. 대안이 없는 이상, 제도는 결국 도입되었다.

"오빠, 우리 100일날 뭐할거야?"
"주민센터 가자"
"에구, 이 화상아"
"난 진심이야"

생각보다 반응이 뜨거웠다. '평생동안 함께'라는 말은 달콤하지만 부담스럽다, 하지만 '1년간 함께'라면 괜찮지 않을까, 라는 생각은 누구나 한다. 수많은 연인들이 마치 선물처럼, 이벤트처럼 주민센터에서의 면사포 없는, 싸인 절차 뿐인 결혼을 거행했다.

어차피 그 누구도 진지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진지하게 생각할 사람 같았다면 정식 혼인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이제 사회에 채 4할이 되지 않는다. 동거가 기본인 시대에 싸인 뿐인 결혼식은 그저 본격적인 연인 관계 성립의 절차로 받아들여졌다.

관계가 이미 단단하다고 생각했거나 1년은 짧다, 라고 생각하는 초조한 이들은 3년, 5년짜리 계약을 연인에게 들이밀었다. 물론 부담스러워하면 그것으로 상대의 마음까지 확인할 수 있는 보너스까지 있었다.

10년짜리 계약은 드물었다. 그러나 나이가 많을수록,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한 이들일수록 장기계약을 선호했다. 적어도 그 기간동안은 안심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그 생각은 의외로 꽤 적중했다. 부담없는 싸인이었지만 확실히 연인과는 달랐다. 어쨌든 국가가 인정하는 공적 계약으로서의 관계라는 무게감 때문이었을까. 사람들은 부부 관계를 생각보다 오래 유지했다. 1년으로 시작해서 10년 이상 지속적으로 만나는 커플도 많았다. 10년짜리 계약의 경우 오히려 계약 갱신의 확률이 다소 낮은 편이었지만 그것은 이미 충분히 예상된 결과였다.

"10년이면 오래 만난거죠 뭐. 정은 많이 들었지만, 앞으로 좋은 친구로 지낼 수도 있는거잖아요"

애초에 10년 계약을 선호하는 계층일수록 자기 자신이나 서로에 대한 확신히 오히려 떨어지는 연인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었으니까.



"이벤트까지는 아니구, 그냥 같이 여행 가려구요. 올해가 계약 마지막 해니까요. 잘 보여야죠. 제가 이제 어디가서 그런 사람 또 만나겠어요. 하하"

3년, 5년 계약을 한 커플들은 특히나 유별났다. 마지막 시즌이 되면 재계약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과거, 그저 정식 혼인제도만 존재하던 시절의 3년차, 5년차 권태기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계약 3년차, 5년차 커플들이 보통 제일 서로에게 어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상대는 더이상 '잡아놓은 물고기'가 아니다. 그저 계약으로, 나와 대등하게 이어져 있는 관계일 따름이다, 그런 생각은 자기계발과 상대에 대한 존중으로 이어졌다. 물론 그러한 '불완전'에 대한 반복적인 스트레스로 심적 부담을 느끼는 이들도 많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리마인드 정식 결혼을 올리는 이들도 많아졌다.




"애를 뭐 제가 키우나요? 나라가 키우죠. 금요일에 잠깐 보러 가기는 해요. 근데 뭐, 아이도 저를 엄마로 생각하기는 하나"

제도 도입 초기부터 가장 큰 우려를 부른 이슈였다. 바로 육아 문제. 만약 계약 기간 중 출산을 하게 된다면, 그리고 계약 연장을 하지 않는다면 그 아이의 육아는 누가 책임을 지는가.

보통은 '출산을 하게 된다면 정식결혼으로 전환'이라는 선택지를 고르는 경우가 가장 일반적이었다. 계약결혼에 비해 더 많은 사회적 보장이 주어지고 육아 혜택도 풍성하니까.

하지만 임신을 하고 나서야, 혹은 막상 내 아이가 생겨 상대와 아이를 평생 책임져야 한다라는 것을 부담스럽게 느끼는 이들도 분명히 존재했다. 국가는 기꺼이 아이들을 맡아주었다. 애초에 요점은 출산율을 높여 사회가 지속적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미 반 세기 이전부터 나라에서 돈을 지원하며 반나절 이상 아이들을 맡아주지 않았던가. 단지 그것이 24시간으로 늘었을 뿐이다. 생각보다 별 차이는 없었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삶이 충실해졌다. 1년, 3년, 5년… 비록 제한된 시간이라고 할 지언정 '누군가와 온전히 하나가 되었다'라는 생각을 심어주는 제도의 힘.

누군가에게는 잘못된 선택을 부담없이 물릴 수 있는 보험이, 누군가에게는 관계에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새삼스레 일깨워주는 각성이 되어주었다. '나 혼자 늙어가는 것인가' 하는 생각과 함께 외로움에 떨던 싱글 중장년이나 노년에게도, 정례적인 계약만료자의 존재는 상대적인 위로와 또 다른 기회의 제공이 되었다.

누군가에게는 재태크의 수단이, 누군가에게는 금전적 손실의 부담없는 완벽한 제도이기도 했다. 어디까지나 '계약'에 따른 결혼제도이기에 강제적인 분할 명령 따위가 필요 없기 때문이었다. 계약서에 따라 진행하면 그만이었다.

결론적으로, 제도는 완벽히 성공했다. 사람들의 생애 결혼율은 68%까지 늘었다. 출산율도 55%나 더 늘었다. 여러 번의 결혼을 거치며 그 허무함을 느낀 이들이, 육아의 부담이 덜어진 이상 '자신의 쥬니어를 세상에 남기고자' 하는 생각에 아이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50대의 출산까지 나름 70% 이상의 확률로 안전을 보장하는 놀라운 의학 발전의 역할도 컸지만 말이다.




"허용하라! 허용하라!"

하지만 생애 결혼율이 68%까지 늘었다고 해도 끝끝내 스타일박스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그 발전된 제도 속에서도 아직까지 성소수자의 결혼은 허용되지 않았으니까. 전 세계 대다수의 나라에서 동성결혼을 허용한 22세기의 시대에서도 말이다.

마지막 인사 소설

어차피 알고 있었다. 너도, 나도, 주변 모든 사람도. 어떻게 끝날지는 다 아는 그런 만남. 그걸 알면서도 그저 나는 좋은 꿈을 꾸고 싶었을 뿐이다. 정말로 기분 좋은, 그래서 깨어났을 때 너무 가슴 아플 그 꿈을.

'너도 가슴이 아플까'

그걸 확신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 나를 한없이 참담하게 만들고 스스로의 비루함을 저주하게 만들지만, 그럼에도 나는 애써 미소를 짓는다. 가슴이 욱씬하고 또 아프다.

'사랑해'

설령 지금 이 억지 미소 때문에 내 가슴 속에 지울 수 없는 흉터를 남기게 될 지라도, 네가 조금이라도 덜 아팠으면. 그럼에도 차오르는 이 눈물을 어떻게 할 수 없어서 몇 번이고 눈을 끔뻑이지만, 결국 입술까지 떨려오고, 표정을 도저히 숨길 수 없게 되지만…

"미안해"

서둘러 등을 돌림으로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까지는 어떻게든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대신에 네 마지막 모습도 볼 수 없게 되었지만…. 손이 저릿저릿하다. 가슴은 아까부터 무언가로 찢어발긴 듯이, 참을 수 없이 공허하고 아프지만…

아마도 이제, 다시는 이런 통증은 느끼지 못할 것이라는, 너 아닌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통증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보면 차라리 견딜만하다.

더이상 참지 못하고 주룩주룩 흐르는 눈물을 열심히 손바닥으로 닦아내고 있노라니, 등 뒤에서 "미안해"라는 네 목소리가 다시 들리는 듯도 한데, 그것도 확신할 수 없다. 차라리 잘못 들은 것이기를 바란다.

눈물을 어떻게든 참아보려 하늘로 고개를 드니, 저 밤하늘이 마치 우리가 밤새 거닐었던 그 날의 밤하늘 같아서 이제는 설움과 아쉬움의 울음이 끅끅대며 터져 나온다. 훌쩍이다 못해 억지로 길게 심호흡을 하며 울음을 그쳐 보노라니, 등 뒤의 네 인기척이 더는 느껴지지 않아 슬며시 고개를 돌려본다.

과연, 저 멀리 걸어가고 있는 네 모습에 비로소 주룩주룩 흐르는 눈물을 부끄러움 없이 양손으로 열심히 닦아내고는, 방금 전부터 견딜 수 없이 조여오는 가슴을 한 손으로 비비며, 남은 한 손으로 네 뒷 모습을 쥐어본다.

"어… 어… 어어…"

무어라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이 끅끅대는 등신같은 내 모습을 스스로 견디지 못하고 그만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아픈 가슴을 쓸어내며, 드디어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는 생각에 울음을 꿀꺽 삼켜본다.

부디, 부디… 내게 남은 복이 있다면 그 모든 복 다 가져가도 좋으니, 정말로 부디… 행복하게 살길 바란다. 나에게 상처준 것, 내가 너에게 실망 준 것, 다 잊고… 그저 너 하나 잘사는 생각하며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며 바라마지 않는다.

그리고 혹시라도 우리 남은 인연 있어서 다음 생에 다시 또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정말로 정말로, 이번에 내가 해준 것 몇 곱으로 더 잘해서 갚을테니… 아니, 그냥 남은 연이 있다면 그냥 그것마저 네 복으로 쓰고, 나는 너와 이렇게 만나볼 수 있었던 것으로 만족하며 다시 없을 감사와 이별의 인사를 전한다. 

안녕, 내 가장 뜨거웠던 사람아. 정말 안녕.


[장편] 수지 2화 [장편] 수지

오후 2시, 오후 5시, 저녁 8시, 밤 11시, 새벽 2시… 창 밖에서 쏟아지는 햇살이 방 안을 비추고, 데우고, 다시 어둠이 되어 그 따스함을 빼앗아 갈 때까지 나는 그저 방 안에 홀로 앉아 있었다. 혼자 술을 마시며. 찌글찌글하게.

"병신…그깟 놈의…"

재혁은 오지 않았다. 문자 한 통, 전화 한 통 없었다. 그렇게 끝난 것이다. 그게 그의 연애고, 그게 그 안의 내 가치였을 뿐이다. 그제서야 눈물 한 방울이 눈가에 차 올랐다.

"병신…"

그깟 놈의 섹스가 뭐라고. 앞의 병신은 재혁에게, 뒤의 병신은 그런 놈을 기다린 나 자신에게 한 소리다.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일어났다. 이제 더이상은 안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다리가 휘청했다. 그럴 수 밖에.

"맥주 두 병도 못 마시는 주제에…"

위스키 반 병을 비웠다. 진작에 안 쓰러진게 대단한 일이다. 헤어진다고 기분내서 그랬나. 병신. 나는 그렇게 다시 침대에 누웠다.






수지







"압구정 로데오 거리쪽으로 가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눈을 떠보니 오후 1시 반이었다. 당연히 아빠의 전화가 네 통, 지은 선생님의 전화가 두 통, 갤러리 전화가 한 통이 와있었다. 분명히 어제 몸이 좀 안 좋다고 지각할 수도 있다고 말해놨는데. 솔직히 머리가 찢어질 것처럼 짜증이 났지만 그게 우리 아빠 '비움 갤러리 정용석 대표'의 방식 아니겠는가.

지독하게 꼼꼼하고 철저하며 강압적인 남자….


아빠가 직접 자기 입으로 털어놓고 이혼을 요구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엄마는 끝끝내 아버지 외도의 증거를 잡지 못했으리라.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재혁에게 흥미를 느낀 부분도 그 부분이었다. 사정을 하자마자 그 사용한 콘돔을 들고 화장실로 가져가서 물을 채우고서는 "자 봐, 콘돔에 이상없지? 임신 타령하면 너 죽는다?" 하며 나에게 들이밀던 그 황당한 행동.

다른건 몰라도 어디 가서 다른 여자 배 불려서 올 일은 없겠구나, 하며 왠지 모를 안심을 유발하던 그 행동. 원나잇으로 족했던 만남을 1년을 끌게 된 그 기행. 간신히 내가 피임약을 먹기 시작하면서 "그 개짓 다시는 하지마" 하고 중지시킨 그의 그 행동이 어이없지만 나는 마음에 들었다.

뭐, 알고 있었다. 그 주변에 여자가 많다는 것 정도는. 하지만 증거만 없으면, 나에게 걸리지만 않으면 애써 모르는 척 해줄 수 있었다. 사실 어제의 그 일도 "그냥 실수였어" 한 마디만 했더라면, 그래서 여기 와서 미안하다고만 했으면 난 분명히 봐줬을거다. 결국 난 엄마보다도 더 쉬운 여자니까. 이러고 살다가 나도 엄마처럼 암 걸리면 어떡하지 싶을 정도로.

그러나 "그게 왜 미안할 일인데? 우리 결혼했니?" 하며 정색할 재혁의 표정이 지금 먼저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고, 그게 또 그렇게 멋지게 느껴지는 내가 여전히 미친 년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그리고 그 순간 거울 속에 비친 미친 년 머리나 좀 어떻게 해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염색 예약 좀 하려구요. 내일 6시 반이요. 네, 지나 선생님이요. 네네, 4617입니다. 맞아요, 네에"

새까맣게 할 생각이다. 지금 내 타들어간 속처럼. 이제 갤러리 일하러 가서 아빠한테 또 한 소리 들을 생각하니 더 스트레스 받는다. 그냥 전시 없을 때만 알바로 나와서 잠깐 얼굴이나 비추라더니, 이제는 숫제 번역부터 청소까지 안 시키는 일이 없다. 아빠 앞에서는 절대적인 을일 뿐인 나. 힘들어 죽을 것 같다. 게다가 이젠 날 웃게 해줄 재혁도 없다. 그게 제일 힘들다.





"4천 2백원입니다. 카드 받았습니다. 영수증 필요하세요? 네, 그럼 또 오세요"

가볍게 한숨 돌렸다. 삼일째 출근 중이다. 그렇게 중심가 쪽도 아니건만, 오피스텔 건물이 몇 개 있는 관계로 손님이 많다. 집 근처 편의점보다 시급이 500원 더 세지만, 그 정도 보상으로는 부족하다 싶을 정도로 주인이 깐깐한 편이다. 청소도 수시로 하라고 하고, 진상도 좀 있다. 물론 집 앞 편의점 두고 이 먼 강남의 편의점까지 온 것은 시급보다 다른 이유가 있지만.

두근두근한 기억….

스터디 그룹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우연찮은 인연으로 만난 그녀, 수지. 나는 탄산수 하나를 대신 사주었을 뿐인데-물론 술 취한 그녀를 집에까지 곱게 데려다주기도 했지만-옷이며 신발이며, 몇 십곱으로 돌려 받았다.

그리고 그 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버스에서 만난 중학교 동창 대영. 녀석은 내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말도 안돼"를 연발하며 믿지 않았지만 내가 수지씨와 나눈 카톡 메세지와 내 양 손에 가득 들린 옷가지들을 보여주자, 혀를 찼다.

"카톡 사진 존나 이쁘네. 그럼 이제 둘이 사귀는거냐?"
"사귀긴…. 그저께 처음 알았는데. 그리고 이걸로 끝이지 뭐"

대영은 세상이 이런 병신이 또 있을까, 하는 시선으로 나를 아래 위로 훑다가 입을 열었다.

"고호민 이 새끼 이거, 이거? 야, 남자든 여자든 똑같은거야. 니가 돈이 있다고 쳐봐, 아니 존나 많다고 쳐? 근데 존나 딱 꽃힌 사람이 나타났어. 그럼 제일 빨리 그 사람 마음 훔치는 방법이 뭐겠냐? 뭐겠어. 걍 씨발 돈 쏟아붓는거지. 맛난거 사멕이고, 선물 왕창 안기고, 어? 남자든 여자든 다 똑같은거야. 그럼 새꺄, 니가 그걸 딱 받았으면, 너도 쫌, 아 그래요, 고맙습니다, 하고 끝이야? 이 새끼 이거 날강도네. 그럼 뭘 더해야 돼? 답례? 근데 넌 뭐 쥐뿔 없잖아? 그럼 몸으로 때워야지. 이거, 이거, 이거!"

대영은 내 사타구니 안쪽을 더듬으며 "이거, 이거, 이거"를 강조했다. 나는 정색하며 녀석의 손을 걷어냈다.

"에효 미친 놈아"
"넌 오늘 지금 집에 딱 들어가자마자, 너도 카톡 사진 제일 멋있는걸로 바꾸고, 살짝 간보다가 걔가 존나 심심할 것 같은 시간에 카톡 하나 보내. 그렇다고 무슨 또 모하세요? 이런 병신 질문하지 말고, 옷 사줘서 고맙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아무래도 너무 과하게 받아서 영 마음이 찜찜한데 제가 뭐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은데요, 하고 훅 들어가라고 훅"

훅- 하면서 과한 동작으로 손을 뻗다가 앞자리 아줌마의 목덜미를 건드린 대영은 "오우" 하고 지가 더 놀라더니 사과하곤, 어느새 내릴 곳이 됐는지 서둘러 일어나며 나에게 주의를 주었다.

"명심해라, 내가 봤을 때 호민이 넌 이번 기회 놓치면 향후 30년 간 솔로탈출 못한다. 장담한다"
"30년이면 완전… 악담을 해라. 잘 가"



…대영의 말이 헛소리 같긴 해도, 그제서야 확실히 너무 과하게 선물을 받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놈 말대로, 단순한 답례가 아니라 좀 이게 그린라이트 같은 거면 좋은거잖아.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정말 잘 아나?

내 하는 짓은 모르는 것 같은데? 왜 굳이 잘 다니던 집 앞 편의점 일자리 관두고, 부랴부랴 3일 만에 왜 이 먼 강남에서 편의점 자리를 구한거지? 그냥, 우연히라도 그녀와 다시 만나길 바래서? 내 삶에서 이렇게까지 과감히 행동력을 발휘한 적이 있던가. 조금이라도, 그녀 곁에 기반을 만들고 싶어서 이 먼 곳에 굳이 편의점 알바 자리를 구한거잖아. 만나고 싶어서, 행동을 하고 있잖아.

사실은 아까부터 카톡을 보낼까 말까 고민 중이기도 하고.

< 수지씨 안녕하세요, 저 호민이에요ㅎ 엊그제 정말 고마웠어요 근데 암만 생각해도 선물 너무 과하게 받은거 같아서, 제가 밥이나 커피라도 쏘고 싶은데 혹시 시간 가능하실까요? 꼭 오늘 아니더라두 >

멘트는 다 써놨다. 하루를 이 멘트 수정하는걸로 다 보냈다. 단지, 이걸 차마 못 보내고 추가로 두 시간 반을 고민 중일 따름인거지. 아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벌써 그 날부터 3일이나 지났고. 차라리 대영이 말대로 그 날 저녁에 바로 보냈으면 좋았을지도. 아, 답답하다. 그냥 아예 보내지 말까. 아 근데 그러면 또 여기에서 알바를 할 의미가 없잖아.

"후, 그래. 안되면 그만이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어쩌면 나는 그때, 차라리 그녀가 무시했으면, 하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두근거렸다.






"오, 머리색 바꾸셨네요. 잘 어울려요"

후후, 일요일에 내가 사준 옷을 예쁘게 차려입고 나온게 마음에 들었다. 그래, 이래야지. 또 그 놈의 고시생룩으로 나왔으면 아마 난 인사도 안 하고 그대로 돌아서 집으로 가버렸을거다. 또 한가지 마음에 드는건 시킨대로 덮수룩한 머리도 조금은 짧게 잘랐다는거. 여전히 촌스럽긴 하지만. 어디 동네 미용실에라도 간건가. 그러나 그 놈의 뿔테는 여전히 뒤집어 쓰고 있는게 짜증난다. 호민의 칭찬은 무시한 채, 내 하고 싶은 말부터 한다.

"렌즈는 왜 안 꼈어요?"

그러자 호민은 얼굴에 난색을 표했다.

"사실 어제 전화 받고 바로 안경점에 갔거든요? 그래서 렌즈도 일회용으로 끼워봤는데, 빼는게 너무 어렵더라구요. 눈알 긁을 것 같고…미안해요"
"미안할 건 없구요. 그냥 안경 벗으면 훨 나은데 왜 그렇게 고집스럽게 안경 쓰나 싶어서. 그럼 나중에 라식해요 라식"
"라식, 그래야겠네요"

그리고 그 대화를 기준으로 10초 이상 우리 사이의 말이 없었다. 애시당초 딱히 목적이 있어서 만난 것도 아니고. 그냥 마침 약속 없는 날이기도 했고, 이유도 없이 이 찌질이 같은 남자의 데이트 제안이 반가웠다. 온갖 폼 다 내면서 여자애들 카톡 메세지를 백개 넘게 그냥 무시하고 다니는 한량들이 아니라… 어디 평소 하루에 여자랑은 단 한마디도 안 할 것 같은 남자의 소심한 데이트 제안이.

"그래서 오늘 뭐할 생각이에요 우리?"

아마 영화나 보자고 하겠지.

"영화 볼래요? 밀담도 재밌다고 하고, 광주행 보셨어요? 아니면 아주라? 지금이 6시 30분이니까, 제일 빠른게 7시 10분에…"

리스트가 술술 나오는게 미리 검색 좀 해본 모양이다. 그러나 어느 것도 끌리지 않는다.

"영화는 됐고, 그냥 술이나 마시러 가요 우리"
"아… 네. 근데 그 날 보니까 술 잘 못하시던데…"

난 픽 웃었다.

"그냥 가요"
"네"

확실히 고분고분한게 조금은 마음에 든다. 틈만 나면 어떻게든 주도권 가지려는 징글징글한 새끼들이랑은 달라서.






"진짜로요?"

대화를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수지씨가 빵 터지며 호기심을 보인다. 그런데 내 나이가 그렇게 웃긴 이야기인가.

"스물아홉이 뭐 어때서요"
"난 무조건 많아야 한 두살 더 위라고 봤는데. 완전 아재였네. 뭐, 티가 안 난 건 아니지만"
"아재는 아닌데"
"맞아요"

사실 놀란건 나다. 물론 처음 봤을 때도 그 푸른빛 도는 백은발 머리카락 때문에라도 나이 짐작이 좀 어렵긴 했지만, 그래도 스물 대여섯 정도 아닐까 싶었는데. 더 어렸다니. 노안이라는건 아니고, 그만큼 뭔가 '센 언니' 느낌이라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근데 까만머리 진짜 잘 어울리는 거 같아요. 더 동안처럼 보여요"
"스물셋이 동안이면 몇 살처럼 보인다는 건데요?"
"음, 한 열아홉?"
"이 아저씨 미쳤네"

미쳤네 소리까지 들었는데 기분이 썩 나쁘지 않다. 그저 헤벌죽 해진다. 저 묘한 웃음이, 가슴을 뛰게하고 엔돌핀을 분출케 한다. 아드레날린인가. 어쨌든, 궁금한거… 물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근데 물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그…"
"그럼 물어보지 말아요. 긴가민가하면"
"아"

그 금요일의 일을 좀 더 묻고 싶었는데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제지 당했다. 음, 말하지 말아야지.

"뭐야, 참, 농담인데, 진짜로 입 닫으면 어떻게 해요. 물어봐요. 아 그리고 말 편하게 해요. 나도 말 편하게 하게"

하지만 수지씨는, 아니 수지는 피식 웃음을 지으면서 뭐든 물어보라고 했다. 뭐 자기도 말 놓는다면서 말 놓으라는데, 그래 여섯 살 차이야 뭐. 그러지. 일단 금요일의 일 대신에 다른거 물어보기로 했다. 예감상 안 좋은 화제 같아서.

"무슨 일 하고 있어? 학생인가?"

뱉고 보니 조금 허무한 질문이었지만,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냥 학교 휴학하고 아빠 일 도와드리고 있어. 갤러리 일"
"갤러리? 아버지가 화가야?"
"아니, 갤러리 운영해"
"아아, 그럼 인사동에 있는 뭐 그런데?"
"응, 압구정 쪽에 있어. 거기서 그냥 청소도 하고, 번역도 하고, 잡부야 잡부. 평소에는 백수나 다름없고"

압구정에서 갤러리 운영하다니. 금수저였구나. 그러니 그렇게 돈을 쿨하게 썼지. 그리고 쿨하게 '잡부'라면서 웃는 모습이 귀엽다.

"그래도 멋있다. 번역 같은 일도 하고, 영어 잘 하나보네"
"쫌 하지. 영어도 좀 하고, 불어도 하고"
"헐"

이쯤해서는 그냥 내가 한없이 초라해진다. 평범한 취준생에 17평 집에서 부모님과 같이 살고, 영어는 토익 700도 간당간당 하고, 학점도 황이고…현재 직업은 편돌이 알바생. 그런데 얘는 금수저에 영어도 잘하고 불어까지 하고, 얼굴도 이쁘고, 부모님이 물려주실 사업도 있고, 강남 살고, 그것도 자취하고….

"아 자취하던데. 그럼 집세는 부모님이 대신 내주는거야?"
"어. 월세랑 관리비, 공과금에 생활비까지"
"헐, 너 금수저구나. 그럼 그게 얼마나 돼?"
"모르지. 근데 월세가 120쯤 되니까 대충 한 300 좀 넘지 않을까? 아니면 400? 대신에 난 아빠가 하라는건 다해야 돼. 경제권 걸고 넘어지면 답 없으니까. 그리고 내가 무슨 금수저야. 얼마나 잘사는 사람들이 많은데. 난 음, 동수저쯤?"

그런 니가 동수저면 나는 아예 흙묻은 손으로 짬 퍼먹는 무(無)수저쯤 되려나. 부럽다. 얼추 한 학기 등록금을 한달 용돈으로 받는구나. 그리고 한편으로 이런 나랑 다른 계급 애랑 혼자 머릿 속에서 상상으로는 고백하고 알콩달콩 연애하고 장차 결혼까지, 아니 결혼까지는 좀 너무 어려서 힘들까 등등 별 생각을 다하며 좋아라 한 지난 며칠이 너무 한심했다.

연애는 무슨 얼어죽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냥 얼른 오늘 집에 가서 이력서 업데이트 하고, 공채 몇 군데 더 써보고, 알바는 일단 여기서 일하기로 했으니까 사장님한테 말해서 한달은 채우고 다시 집 근처에서…

"근데 오빠는 무슨 일 하는데?"

수지는 갑자기 말이 없어진 내 얼굴을 힐끔 바라보며 물었다. 그게 참 귀엽지만, 아까의 그 한없이 사랑스럽던 그녀가 아니라 그저 티비 속 연예인처럼 그냥 멀고 먼 누군가들처럼 느껴진 것은 물론 내 자격지심 때문이려나. 병신. 아니, 그게 현실이겠지. 주제파악이고.




"재밌다"

호민은 나에게 너무나 솔직하게, 자기는 내가 자기 좋아하는건 아닐까? 완전 그린 라이트 아닌가? 생각을 했던 것을 털어놓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 동네에 편의점 알바자리까지 잡았다는 말에 푸핫 하고 웃었는데 너무 무안해하길래 사과까지 했다. 

"맞아, 그럴 만 했어. 인정. 오빠가 이상한게 아니지"

그래, 이 남자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게, 드라마 같은 인연으로 만나서 여자가 그 다음 날 갑자기 옷 사주고 신발 사주고 선물 왕창 사먹이고 비싼 밥 사주고, 심지어 며칠 뒤에 데이트 신청까지 받아주니 호감 있나, 하고 생각하는게 당연하지.

헤픈 년.

아마 천하의 그 정수지가 이런 찌질이 같은 남자한테 그렇게 퍼주면서 연애한다는 소리 들으면 다들 아주 경악을 할거다. 그리고 생각이 거기에 미친 순간, 정말로 미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헤어지고 병신같이 찌글찌글하게 있는 대신에, 곧바로 다른 남자랑 썸 탄다? 그리고 그 남자한테 돈 쏟아 부어가며 멋진 남자로 만들어간다…. 그리고 그 소식을 재혁이 들으면 어떨까. 어떤 반응일지 짐작도 안 간다. 

"잠깐만 그렇게 있어봐요. 오케이, 아 얼굴 안 나오게 사진 찍을테니 그렇게 있어봐요"

생각보다 턱선 이쁘네. 얼굴 갸름하고. 생각보다 진짜 다듬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난 테이블과 건너 편 호민의 얼굴 아래 상반신까지 찍은 사진을 곧바로 내 인스타에 올렸다. 그리고 카톡 상메도 "선수 교체"로 바꿨다. 너무 속보이는 짓이긴 하지만, 대신 의도 전달도 확실히 됐다.




"대박!"

조금 전부터 수지는 "오빠 나 휴대폰 계속해서 미안, 잠깐만" 을 연발하면서, 웃음 가득한 얼굴로 나 대신 휴대폰에 정신을 팔기 시작했다. 

"괜찮아"

그래도 "오빠"라는 호칭이 새삼 흐뭇했다. 무슨 일이 그리도 좋을까.

"뭐 좋은 일 있어?"
"네, 아니, 응"

정신이 팔려있으니 존댓말까지 다시 하는구나. 그럼에도 역시 부연설명 대신 또 한참을 누군가와 카톡을 주고 받은 그녀는 폰을 다시 테이블 한쪽에 뒤집어 놓고-그 와중에도 징징 울려대는 휴대폰이 새삼 하루에 카톡 두어개 올까 말까한 나와 비교됐다- 웃음기 어린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지난 주 금요일 날 기억해?"

아, 묻고 싶었는데 먼저 이렇게 말해주다니.

"어어"

수지는 술술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그 날 남친, 아니 전 남친이지. 그 새끼가 바람 피운거 딱 걸려서 헤어졌어. 그래서 혼자 목 타서 물 마시려는데 그 새끼 차에 지갑이랑 카드랑 다 두고 왔단 말이야. 아 망했다, 하던 차에 오빠가 나 도와준거고. 그래서 뭐… 그 다음부터는 오빠도 다 알거고. 여튼 일요일에 오빠랑 밥 먹고 집에 와서 혼자 울면서 있었는데, 그 새끼는 지금도 내 생각은 하나도 안 할거란 말이야. 그래서 나도 좀 잘 살고 있다 어필하려고. 그래서 오빠 사진 내 인스타에 올렸어"
"니 인스타그램에? 내 사진을?"

휴대폰을 들어 수지가 보여준 화면에는 내 코 아래부터 상반신과 여기 맥주 테이블이 찍힌 사진과 '호민 오빠와 함께' 라는 부연 설명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두근두근이라는 태그까지.

"흐"

그 와중에도 수지 폰 속의 카톡은 쉴새없이 "호민 오빠가 누구야?" 하는 류의 알림을 알려왔다. 이렇게 예쁜 금수저 애들은, 일상이 헐리웃 스타 같겠지. 미드 가십맨에 나오는 뭐 그런 것처럼. 일상을 가따부따 떠들어 줄 호사가들도 있을테고. 그럼 나도 거기에 조연쯤으로 출연하는건가. 조금은 흐뭇하면서도 문득 애들 장난 연애질에 괜히 도구로 쓰이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건가. 지금 상황이 그쯤 되는건가. 내 속도 모르고 수지는 "사진 잘 나왔지?" 하고 웃으며 다시 친구들의 카톡에 답장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어떨까.

그래도 나쁘지 않은거 아닌가. 이렇게 이쁜 애랑 어떤 핑계로든 좀 더 만날 수 있다면. 어차피 뭐, 나같은 놈이 이런 애랑 뭘 연애를 할 것도 아니구, 같이 다니면서 좀 배울 거도 배우고 얻을 것도 얻으면.

미친 놈아, 정신 안 차려?

그렇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정신 바짝 차리고 공부하면서 일자리 알아봐야 되는데, 연애 노름질에, 그것도 뭐 남의 연애 노름질에…

헤어졌다는데?

뭐 바람 피워서 헤어진 놈이라고 하면 확실히 다시 만나지는 않지 않을까, 그리고 그렇다면 썸 타는 역할의 배우로서, 뭐 그렇다고 내가 진짜 시간 뺏겨가며 연애하는 것도 아닌데 뭐…. 아니 내가 지금 혼자 너무 깊게 들어가는건가. 가만히 잘 생각해보면 그냥 새 남자 만나 썸 타면서 바람 피워 헤어진 전 남친한테 복수의 자랑질 하는 것 뿐 아닌가?

등등의 생각을 하며 멍하니 내 폰만 바라보고 있노라니, 수지가 말했다.

"오빠도 맥주 한 잔 더 마실래?"

마시는건 좋은데, 문제는 내가 아니라…, 에 모르겠다. 





"원래 술이 그렇게 약해?"
"응, 약해"
"너 같은 사람은 술 마시면 안돼"

약하다면서 해실해실 웃는 모습이 하…, 그래. 연애고 나발이고 그냥 이런 아는 동생 하나 정도 있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래, 여친까진 아니더라도 여사친 하나 정도는 좋잖아.

"근데 오빠 은근 옆구리에 살 좀 있네? 살 빼"
"아 어딜 만지는거야, 이거 성추행이야"

맥주 500cc 한 개에 칵테일 반 잔 마셨다고 다리 후들거리는게 눈에 보이던 수지. 다행히 지난 번처럼 푹 쓰러지기 전에 거기서 멈췄지만 얼굴이 시뻘건개 취한 모습이 역력하다. 수지 집도 바로 근처고 하니 바래다 주기로 했는데, 술취한 그녀의 입 김이 훅훅 느껴지니 손만 잡고 가는데도 심장이 쿵쾅댄다. 심지어 은근히 거기까지 반응이 올락말락하다. 허, 기가 막혀서 가방으로 서둘러 앞을 가리고 걷노라니….

"오빠는 참 좋은 사람 같아. 매력은 한 개도 없지만. 아니 있어. 있는데 사람들이 잘 몰라주지만. 맞지?"
"아, 진짜 진상이다 진상이야"

속으로 푹 찔려 들어오는 말에 난 가슴이 뜨끔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대충 아무 말이나 떠들어댔다. 그리고 또 사실은 '있어'라는 말에 너만은 알아주었으면 좋겠네, 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다 왔어"
"응"

어느새 어깨까지 감아가며 나에게 무게를 실어오던 수지는 자신의 오피스텔 앞에서 정신을 번쩍 차린 듯 똑바로 섰다. 그리고 날 정면으로 보며 말했다.

"오늘 놀아줘서 고마워. 아니었으면 엄청 우울했을거야"

그 말에 나도 웃었다. 그래, 연애고 뭐고, 전 남친이고 뭐고… 그냥, 이렇게 너처럼 예쁜 애랑 같이 놀았으니 그걸로 좋았다 나는.

"나야말로 고맙지. 음… 그러면 들어가서, 쉬어"
"응"

무언가 한두마디 더 붙이고 싶었지만, 차마 말이 떨어지지 않아 그렇게 말을 꿀꺽 삼키고 돌아섰다. 내일부터는 다시 공부도 좀 하고, 취업 준비도 더 하고, 뭐, 내일 또 스터디니까 것도 좀 신경 쓰고. 흐.

"호민 오빠!"

그리고 그때 등 뒤에서 수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토요일에, 할 거 없으면 같이 영화 보자"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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