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난(女難) 소설

"대리님 방금 전에, 뭐라고 하신거에요?"

근무시간. 작은 목소리로 살짝 웃음끼와 당혹스러움이 뒤섞인, 아주 미묘한 표정으로 나에게 속삭이는 소연씨.

"방금 전에요? 내가 뭐라고 했지? 아, 나랑 모티브 안 갈래요? 라고 했죠. 잠 너무 오는데, 커피 한잔 마시고 해요"

그러자 혼자 "아아" 하면서 발을 동동 구르며 웃는 그녀.

"왜요?"

당황해서 내가 묻자 "카페 가서 말씀드릴게요. 모티브 가요" 하며 먼저 일어서는 소연의 뒤를 따르며 지갑부터 챙긴다.




1층의 카페 '모티브'에 내려와서는 같이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씩을 받아들고 테이블을 마주보고 앉았다.

"아니 나는, 갑자기 대리님이 나한테 '나랑 모텔 안 갈래요?' 이러길래, 이거 뭐지? 했죠"

정말로 마시던 커피를 뿜을 뻔 했다.

"아니 무슨 소리에요. 모티브가 어떻게 모텔로 들려요! 이건 음란마귀 드립치기도 뭐할 정도네!"
"맞아요 나 요즘 음란마귀 들렸나봐요. 저번에는 아름 언니가 '유부초밥 먹으러 가자'라고 한걸 '고추…' 아 이건 대리님한테 말하긴 좀 그렇다. 여튼, 요즘 나 좀 그래요"
"일상생활 불가능 수준인데, 대체 왜 그러는거에요"

둘이 낄낄대고 있으려니 아름씨와 선화씨도 어느새 카페로 내려왔다.

"어허! 아니 이 싸람들이 근무시간에 카페에서 이런 땡땡이를?"
"언니들도 마찬가지잖아요"
"응 맞어"
"언니꺼는 내가 주문할게요. 아름 언니 뭐 마실거에요?"
"나 그냥 아아. 아냐 선화야 내 카드로 결제해"

소연, 아름, 선화. 우리 팀원들이다. 같은 여자이건만 "나는 외모도 경쟁력이라고 봐" 하면서 대놓고 외모 보고 뽑는 우리 선 매니저님의 취향에 따라 다들 한 미모 하는 직원들이다. 성격도 쿨하다 못해 형님 같은 그녀들. 물론 그런 만큼 다들 멋진 남자친구들이 있고.

"아니 아까 대리님이 나한테 대뜸 모텔 가자고 해서 깜짝 놀랐잖아."
"뭐?! 아니 대리님!"
"아냐! 무슨 소리야, 소연씨 말을 똑바로 설명해요!"
"어, 사실은 나한테 모티브 가자고 한건데 내가 모텔로 들어서."

소연의 부연에 아름은 한숨을 크게 쉬며 이마를 친다.

"야, 장소연, 진짜 너 왜 그래. 야, 너 남친한테 딱 전해. 다 이게 지금 사랑이 부족해서 그런거니까 만날 때마다 뽀뽀 열 번씩 해달라고"
"아유 언니. 뽀뽀 열 번이 뭐야. 약해, 그런 걸로는 안 돼"

나는 그녀들의 농담에 혼자 피식피식 웃는다. 다들 드립이 장사다. 아름은 내 눈치를 살피며 "대리님도 있는데 그럼 뽀뽀라고 하지 뭐라고 말해" 하며 또 웃는다.

"아 다들 왜들 그래. 진짜 좀 너무하네. 나 사내 고충위에 신고할래요"

내가 너스레를 떨자 소연이 또 한발자국 나선다.

"무슨위요? 나 지금 미쳤나봐, 또 말이 이상하게 들려"
"고'충'위! 사내 고충 위원회"
"아아"

그리고 그제서야 소연의 말을 이해한 아름이 웃으며 그녀의 팔뚝을 때린다.

"진짜 미친거야?"




퇴근 길, 후문 쪽의 주차타워 앞에서 차 꺼내는 것을 기다리고 있으려니 뒤늦게 소연이 나온다.

"어 대리님? 아직 안 가셨어요?"
"아 네. 차 빼느라고. 우리 주차타워 느려도 너무 느려."
"아 맞아요. 저번에 영업팀 조 과장님도 한 소리 하던데. 세상에 무슨 차 하나 빼는데 20분씩 걸린다고, 너무 짜증난다고"
"그러게요. 아 소연씨 집이 사당쪽이라고 했나? 태워줄까요?"

내 제안에 반색하는 소연.

"정말요? 좋아요!"




"우리 팀 다들 어디 산다고 했죠?"
"아름 언니는 건대쪽에 살고, 선화 언니는 목동 쪽이에요. 저는 사당에서 조금만 들어가면 돼요, 이따가 사당역 근처에서 세워주세요. 걸어가면 금방이에요"
"아 그렇구나. 네"

조금 더 가노라니 소연이 묻는다.

"대리님 여자친구 있다고 하셨죠? 몇 살이에요?"
"한 살 어려요. 서른 하나에요. 건축 일하고 있어요"
"건축이요? 설계 뭐 그런거?"
"네"
"와 멋있다"

나도 묻는다.

"소연씨 남자친구는요?"
"동갑인데, 코스포 다녀요. 그래서 일주일에 한번도 볼까말까. 맨날 지방 돌아다니고, 1년에 막 두 세달씩 출장 가고 그래요"
"와 힘들겠다. 그래도 연봉 장난 아니겠는데?"
"연봉도 연봉인데, 원래 집이 좀 살아요. 부모님이 뭐 사업하신다던가? 그럼 뭐해. 내 돈도 아닌걸"
"맛있는거 많이 사달라고 해요"
"그래서 이렇게 살쪘잖아요"
"에이 살은 무슨"

하지만 알고 있다. 수시로 바뀌는 소연의 가방과 구두 중에 상당수가 그녀의 남자친구에게 지분이 있다는 것을. 어쨌든 내 여자친구와 그녀의 남자친구, 결혼 이슈로 이야기가 돌다가 아름씨가 남자친구 쪽 집안의 반대로 결혼에 난항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를 넘어 소연이 자기는 나중에 결혼하면 애를 최소한 둘은 낳고 싶다는 이야기까지 흘러간 무렵, 그녀의 뱃 속에서 꽤나 요란한 꼬르륵 소리가 들려온다.

"어 배고픈가 보네. 나도 배고픈데. 우리 밥 먹고 들어갈래요?"

무안해할 것 같아서 건낸 빈 말인데, 소연은 "좋아요" 하며 가볍게 콜한다.

"저기 골목 앞에 파스타 맛집 있어요. 주인이 이태리에서 유학한 사람이라나봐요"
"올, 본토의 맛"

대학생 때 나름 맛집 파워블로거까지 했다던 소연의 추천이면 기대해 볼만하다 싶었다. 정말 맛있으면 다음에 가희랑 와야겠다고 다짐하며 가게 골목 안쪽 공터에 차를 세웠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보인 노을이 참 예뻤다.




"오 여기 진짜 맛있네. 스튜 정말 맛있다. 고기 스튜 이렇게 잘하는 곳 드문데"

소연이 "그쵸!" 하면서 맞장구를 친다.

"대리님도 은근 맛잘알이야. 미식가야, 저번에 '페이로드' 가서 미슐랭 밥 혼자 먹고 왔다는 이야기 듣고 딱 알아봤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거"
"아니 그냥 그건 그 날 여친이랑 싸워서 그렇게 된거에요"

그 말에 소연이 웃으면서 반박한다.

"아니 보통 사람 같으면 그럼 예약을 취소하지 굳이 가서 혼자 밥 먹는 경우는 없다구요"
"예약 잡느라 고생한게 아까워서"
"그러니까 미식가지. 근데 여친 분 진짜 그거 혼자 먹은거 알면 더 화날걸요? 완전 미쳤다고 할텐데"
"그래서 비밀로 하고 있어요"
"웃겨 진짜"

소연은 신이 나서 이것저것 맛집에 대한 썰과 정보를 푼다. 이 동네 맛집은 어디어디가 있으며, 다음에 여친이랑 꼭 어디어디 가보라는 둥, 자기 남친은 이런거 맛집 찾아다니는거 정말 귀찮아하고 이해 못한다고, 맨날 무슨 탕이나 먹자고 한다고 투덜대며.

"입맛 무난하면 좋죠"
"그렇지도 않아요. 약간 마마보이 끼도 있어서, 아직도 김치는 엄마표 김치 아니면 안 먹어요"
"흐, 나도 스무살 때까지 그랬는데"
"어떻게 고쳤어요?"
"군대 가서"
"아, 내 남친은 군대도 공익 다녀왔어요"

한참을 서로의 남친, 여친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새 우리 서로의 취미로 이야기가 넘어갔다. 소연은 전시나 공연 보러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지난 주에는 무슨 르네상스 위인들 전시를 보러 갔대나.

"갈릴레오 망원경 진짜 큰 거 봤는데 멋있더라구요"
"그렇구나. 나도 전시 같은거 좋아하는데, 좋은 전시 있으면 같이 보러 가요"

말을 하고 나서 뭔가 이상하게 들릴 수 있겠다 싶어서 '남친하고 같이' 하고 말을 덧붙이려다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하게 들릴 것 같아서 굳이 덧붙이지는 않았다.

"꼭 보러가요 꼭"

내가 빈 말을 많이 해서일까, 소연은 '꼭'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와서는 "잘 먹었습니다" 하며 "내일 모레 점심은 제가 쏠게요. 목요일에 선화 언니랑 아름 언니 둘 다 외근이잖아요" 하며 인사를 한다. 이직한 이래 근 삼주일만에 부쩍 가까워진 느낌이 좋다.

"좋아요. 그럼 잘 들어가고, 내일 봐요"
"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대리님"

걸어가면서 생긋 웃고 다시 한번 이쪽을 바라보는 모습이 참 귀여웠다. 차가운 인상의 가희와는 확실히 다른 이미지와 행동.




"응, 저녁은 먹고 들어왔어. 어? 스파게티. 아, 그냥 간만에 땡겨서. 어 그럼, 혼자 먹었지. 어어, 씻고 이따가 연락할게"

가희 성격에 회사 여직원이랑 밥 먹고 들어왔다면 불 같이 화를 낼 것 같아서 괜한 거짓말을 했다. 정작 지는 이 놈 저 놈 신경 거슬리는 놈들이랑 같이 밥 잘만 먹으면서 말이다, 라는 내 안의 핑계를 대며.

[ 소연 : 대리님 나 넘 배불러요ㅋㅋㅋ배 터질 것 같아요 ]

소연의 카톡 메세지. 나도 배가 많이 부르다. 애초에 파스타만 해도 양이 많은데다, 큼지막한 식전 빵에다가 화덕피자 맛있을 것 같다고 피자까지 시켜먹었더니 정말 나도 배 터질 것 같다.

[ 나 : 난 이미 터짐ㅋㅋㅋㅋㅋ ]
[ 소연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여친이 아닌 또래 여자와 이렇게 사담을 나누는 재미. 허튼 생각이 아예 안든다면 그것이야말로 거짓말이리라. 하지만 그저 친해지는 동료 관계일 뿐.




"다녀오겠습니다. 대리님 저희 근데 꼭 복귀해야 되나요? 지금 가면 암만 빨라도 오후 5시 전에는 못 오지 싶은데. 꼭 복귀해야 되요?"
"음, 모르겠네요. 차장님이랑 부장님 지금 다 안 계시네. 두 분도 아마 오늘 복귀 안 하실거 같은데. 그럼 그냥 거기 끝날 무렵해서 전화 한 통 주세요. 그냥 복귀 안 하고 바로 집에 가도 될 거에요. 뭐 크게 뭔 일 있겠어요? 끝나면 거기서 바로 퇴근해요"
"오? 그러다 내일 혼나면요"
"내가 책임질게요"
"정말요!?"
"끽해야 시말서 한 장 밖에 더 쓰겠어요?"
"올"

아름과 선화가 "올~" 하면서 엄지를 치켜들지만 사실 어제 물어봤다. 그냥 현지 퇴근하라는 허락 받아놨다. 소연도 옆에서 들었고. 그 모습을 보던 소연이 "어제 대리님이 물어봤어요. 그냥 부장님이 바로 퇴근하랬어요" 하고 끼어든다.

"아 뭐야, 난 왠일로 우리 대리님이 멋있나 했네"

아름의 독설에 "뭐라고? '왠'일'로'?" 하며 되묻자 그녀들은 그저 웃으며 "다녀오겠습니다" 하며 외근을 나선다.




"온지 얼마 안 됐는데, 여직원들하고 잘 어울리네"

현장에 잠깐 가야하는데 차가 말썽이라며 금요일에 차 좀 빌릴 수 있냐는 가희의 전화를 받느라고 1층으로 나온 차, 담배를 피우러 내려 와 있던 총무팀 박 과장님이 말을 건다.

"아 예. 안녕하세요. 네, 그냥 뭐, 어린 친구들이라 같이 일하기 재밌네요. 어려운 것도 있지만"
"흐, 좋을 때지. 아 잠깐만, 김 대리 여자친구 있나? 없으면 저 중에 하나 골라서 만나면 되잖아?"

아, 이런 꼰대.

"아니요 아니요, 여자친구 있습니다. 큰일나요. 그런 말씀 여자친구가 실수로라도 들었다가는 저 죽어요"

일부러 괜한 오바를 했다. 그러자 그는 히죽 웃고는 "에이, 김 대리 여친한테 꽉 잡혀지내네. 장가가면 바람도 못 피우겠어" 하고는 껄껄 웃는다. 여직원들과 즐겁게 일하는 모습에서 저런 부류의 꼰대들이 느낄 어떤 시샘. 그 부분에서 흘러나올 묘한 짖궂음을 그런 식으로 풀어준다.

"그럼 수고해요. 점심 맛있게 먹고"
"네, 과장님도 화이팅입니다"
"어이~"




점심시간. 오늘따라 소연이 왠지 화장에도 머리에도 옷에도 힘을 좀 준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내 착각일까.

"오늘 끝나고 어디 가요?"
"아니요, 바로 집에 가요"
"근데 오늘 뭔가 좀 멋있는데?"

내 말에 픽 웃은 소연이 "대리님이랑 단 둘이 점심 먹으니까요" 하고 농담을 건낸다. 농담이지만 기분 좋다. 이거야말로 박과장님에게 내가 한 말처럼, 소연이 알았다가는 "죽을 일" 지도 모를 일이지만.

"뭐 먹을까요?"

내 질문에 소연이 "저번에 아름이 언니랑 찾은 초밥집 있는데 거기가요. 맛있어요" 하며 안내한다.




"나 사실 좀 고민 있는데, 대리님한테 물어봐도 되요?"
"뭐든"

고개를 끄덕이자 소연이 잠시 고민하는 듯 하다가 말한다. 인당 18,000원짜리 초밥 세트가 나왔다. 직장인의 점심식사치고는 살짝 과하지만, 사실 구성으로 치자면 그저 그렇다. 단지 이 동네 가게 중에서는 그래도 그나마 먹을만한 스시야니까.

"지금 남친이 일하는 회사에, 좀 신경쓰이는 여자가 있는데요오"
"오우"

…그렇고 그런 이야기. 소연의 남친 주변에 여자가 붙은 것 같다는 이야기다. 다만 이미 예전에 한번 어설프게 의심했다가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어서 자기만 이상한 여자가 됐었는데, 요즘은 어째 아무리 생각해도 의심스럽다는 것.

"소연씨 그런데 원래 의심이라는게, 한번 꼬리에 꼬리를 물면 기가 막히게도 맞아 떨어져요. 진짜 그런 거 같다는 생각만 들고, 아귀가 착착 맞아 떨어지는 것만 같고. 원래 그래요. 이걸 전문용어로 뭐라고 하던데? 뭐래더라, 확증편향! 맞어. 한번 의심하면 그런 쪽으로만 뇌가 정보를 받아들인다나?"
"맞아요…근데 이건 진짜 좀 아… 대리님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죠?"
"알죠, 당연히"

머리가 꽤 복잡해보이는 그녀.

"여자의 촉, 남자의 감, 뭐 이런 이야기들 하고… 실제로 오래 만나온 커플은 그게 정확히 뭔지는 몰라도 이상한 낌새를 느끼면 바로 알아채잖아요. 어? 얘가 이런 애가 아닌데 오늘 왜 이렇게 자꾸 전화를 빨리 끊으려고 하지? 얘가 이 시간에 잔다고? 얘 목소리가 왜 이러지? 뭐 이런거부터… 뭐 안하던 짓을 한다거나, 그럴 시간이 아닌데 평소와 행동이 좀 많이 다르다던가. 다 느끼죠. 분명히 감은 무시 못하죠. 근데… 의심부터 하면 결국 오해만 쌓여요. 진짜 만에 하나 아니면 나만 완전 이상한 사람 되는거고."
"하…"

이 기름지고 맛나보이는 초밥을 앞에 두고 한숨만 길게 쉬는 소연.

"그냥 솔직하게 이야기를 해봐요. 만나서, 나 요즘 너 때문에 이러이러해서 엄청 신경 쓰인다, 그러니까 내 말 이상하게만 듣지 말고, 조금 진지하게 이야기 해달라고"
"왜 그런 이야기 안 해봤겠어요. 절대 그런거 아니라는데 뭐라고 하겠어요. 오히려 왜 또 그러냐는데"

하긴 그렇겠지.

"그럼 그냥 완전 믿어요. 믿음이 있으니까 만나온 거잖아요. 그리고 솔직히 바람 피우는 사람 많긴 한데, 또 의외로 드물기도 한게 바람이니까. 오해겠지, 하고 묻어두세요 그냥. 애초에 바람은 교통사고 같은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나 교통사고 두 번이나 났었는데"
"세 번은 안 나겠죠"

그 말에 어이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린 소연.

"얼른 먹어요. 이러다 생선 다 밥에 눌어 붙겠어요"
"대리님도 얼른 드세요. 고마워요, 이런 이야기 들어줘서"




"그런데 우리 회사도 너무 웃기지 않아요? 아무리 그냥 인사차 서류만 받아 오는거래도 사원급 두 명 달랑 보내는게 어딨어. 너무 막장이야. 내가 그 회사 사장이면 화날거 같아"
"내가 그 회사 사장이면, 아름씨 선화씨 둘이 오면 되게 좋아할거 같은데"

소연의 중얼거림에 내 심드렁한 한 마디. 그리고 그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기획팀 최 주임이 혼자 웃음 터뜨린다.

"와, 대리님 진짜 솔직하시다. 인정"
"아 남자들이란. 내가 이래서 못 믿어"

나와 최 주임을 보며 혀를 차며 손가락질 하는 소연.

"솔직한게 최고에요."

묘하게 뼈있는 한 마디씩을 주고 받은 우리는 다시 모니터를 바라본다. 하지만 소연은 자꾸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며 쉽게 집중하지 못한다.




"어, 대리님"
"아, 소연씨! 같이 갈래요? 태워줄게요. 같이 타고 가요"

비구름에 어두워진 퇴근 길, 주차 타워 옆에 서있노라니 이번에도 소연씨를 만났다. 솔직히 '괜찮아요' 할 줄 알았는데 이번에도 그녀는 스스럼이 없이 "고마워요 대리님" 하면서 내 옆에 선다. 정말 이제 빈 말은 하지 말아야겠다.

"하루종일 집중 못 하던데. 그렇게 불안해요?"
"네"

많이 좋아하는구나.

"소연씨가 그렇게 걱정하는거, 남자친구도 알아요?"

아, 이런. 괜한 질문을 했다 싶었다. 대답이 없다. 한참을 말이 없던 소연은 "대리님 말대로, 그냥 믿기로 했어요. 또 바람 나면 그땐 정말 내 잘못이겠죠. 내가 뭔가 부족한 사람이니까 그런 거겠죠" 하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그것대로 좀 아닌데. 그래서 나는 빈 말 하지 말자는 1분 전의 다짐을 뒤로 하고, 또 실없는 소리를 했다. 꽤나 위험한 실없는 소리를.

"정 그럼 먼저 바람 피워버려요. 그럼 안 억울하잖아요"

소연은 입을 삐죽 내밀며 "대리님, 나 화나면 무서워요" 하며 주먹을 움켜쥔다. 귀엽군.




오늘따라 차가 조금 막힌다.

"아까 아름 언니랑 통화했거든요? 지금 거기서 퇴근한다고"
"아아 맞다. 네, 뭐래요? 일은 잘 됐대요?"
"네. 가니까 거기 사장님이 회 사줬대요. 이미 밥 먹었는데도 오후 3시에 회를."
"헐! 진짜 내 말이 맞네. 이쁜 여직원들 가니까 그러는거봐. 와"

또 아차 싶었다. 가벼운 농담이라지만 결과적으로 자꾸 말 실수를 하는 느낌이다. 남자친구가 예쁜 직장동료에 눈이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는 의심을 하고 있는 사람 앞에서 외모에 흔들리는 남자 이야기를 자꾸하다니. 나는 헛기침을 했다.

"근데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왜요?"

아까부터 침체된 기분의 그녀가 처음으로 다소 밝은 톤의 목소리로 묻는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많이 걱정한 일들이, 실제로 안 좋게 벌어지는 일들은 거의 없더라구요. 진짜 안 좋은 일들은, 꼭 전혀 의심도 안 할 때 터지는 법이니까"

내 말에 대답이 없던 소연은 잠시 후 "고마워요 대리님. 자꾸 제가 신경쓰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하고 대답해왔다. 조금은 도움이 된 것 같아서 기뻤다. 그리고 그 무렵부터 막혔던 길도 조금씩 뚫리기 시작했다.




"어제 대리님 조언대로 그냥 완전 직설적으로 물어봤는데, 내가 막 말하다가 우니까 남친이 그 자리에서 카톡한거 다 보여주고 막… 그래서 나 다 풀렸어요"
"오 레알? 대박이네"

환해진 얼굴의 소연, 그리고 어리둥절한 아름과 선화.

"뭐야, 둘이 이제 연애상담까지 해? 대리님 완전 그거다. 그 뭐지? 친구 미만 연인 이상"
"반대 아냐?"

아름의 말에 선화가 치고 들어온다.

"남친하고 못하는 연애상담은 하는데, 막 친구보다도 못한 사이. 완전 딱인데요?"
"뭐야 말은 그럴 듯 한데, 여튼 어감 이상해, 구려"
"어 이상하긴 해요. 맞어, 나 저번에 인스타 하는데 대놓고 프로필에 FWB 써놓은 남자가…"
"악! 무슨 틸더야 뭐야"

아침의 카페. 다들 깔깔대며 커피 한잔씩을 들고 사무실로 올라간다. 수다를 떨며 환하게 웃는 그녀들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차에 그 머리카락 누구거야?"

금요일 밤, 차를 빌려쓴 가희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아, 이런.

"무슨 머리카락?"

당연히 소연의 머리카락인 것을 알면서도 잠깐 시간을 벌어본다. 솔직히 말하는게 좋을까, 구라를 치는게 좋을까. 이래서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는게 좋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나는 그게 잘 안된다. 망할.

"이거"

가희가 머리카락을 내민다. 그걸 또 가지고 왔니. 음, 색으로 보나 길이로 보나 무조건 소연의 머리카락이다.

"아, 우리 회사 여직원"
"뭐?"
"아 무슨 그런거 아냐. 저번에 회사 여직원이 자기 남친이랑 막 사이 별로라서, 엄청 정신 못 차리길래 퇴근하면서 잠깐 같은 방향이라서 데려다 준거야"
"오빠가 그 여자를 왜 챙기는데?"
"아 부하직원이니까. 하루종일 일도 못하고 정신 못 차리니까 내가 그럼 사수니까 챙겨야지. 아 그리고 걔 남친도 있어."
"오빠 지금 이직한지 얼마나 됐다고 여자 문제로 나 짜증나게 만들어? 그리고 언제 걔가 오빠 차에 탔는데?"
"아 그, 화요일에"
"화요일 언제"

후, 따지기의 무한루프에 빠져들어가는 느낌이다.

"아 화요일 퇴근길에"
"스파게티 먹은 날? 그 날 혼자 먹었다며"

이런건 쓸데없이 기억력이 좋다. 작년에는 내 생일까지 까먹은 주제에.

"걔 데려다 주면서 달래주고 오는 길에 밥 혼자 먹었다고"
"하"

진실의 함정에 빠질 뻔 했지만 나는 곧바로 구라의 2단 기어를 집어넣고 간신히 빠져나온다. 하지만 그 앞에는 진실의 과속방지턱, 블랙박스가 있었다.

"블박 까봐"
"야, 이가희"
"까보라고"

정색하는 표정의 이가희. 암만 생각해도 얘 학교 다닐 때 껌 좀 씹었을 것 같다.

"에효"

나는 가희를 데리고는 주차장까지 내려와서 기어코 그 자리에서 블랙박스를 조작했다. 화요일, 약 30분 남짓한 시간의 운행시간 중 몇 분간의 녹화된 영상들이 있었고 그 조그마한 블박의 스피커로는 대화가 잘 들리지 않았지만, 적어도 남친 운운하는 내용은 분명히 있었기에 적어도 내 말에서 상당한 부분의 의혹이 조각되어 가희는 심문을 중단했다.

"진짜 왜 그래? 뭐 좋은 아는 오빠 노릇이라도 하고 싶은거야? 회사에서?'

짜증은 여전히 상당한 수위로 배어있지만 적어도 아까만큼의 흥분한 기색은 다소 누그러든 눈치다. 사실 바람을 피운다는 전제라면 남친이 있던 없던, 오히려 그게 더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가희의 평가로는 내가 '골키퍼까지 제치고 골을 넣는' 수준의 골게터가 아니라는 것이겠지.

"아니, 너야말로 이상하게 생각하냐. 너는 회사 사람들이랑 상담 같은거 안해?"
"안해. 그리고 무슨 상담을 해도 무슨 연애상담 같은걸 하냐고. 오빠가 무슨 대학생이야? 동아리 회장이야?"
"참나"

동아리 회장이라는 말에 솔직히 공감이 가서 나 혼자 피식 웃음이 터졌다.

"왜 웃는데"
"동아리 회장 맞는거 같아서"

그리고 그 말에 가희도 할 말이 없었던지 "참" 하고 허탈하게 입맛을 다시다가 지도 웃겼는지 웃음을 흘린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는 적당한 진심과 적당한 사과를 섞어 말한다.

"미안해, 여튼 또래 그룹이라서 더 그런거 같아. 내가 좀 주책 부렸나봐. 안 그럴게, 선 잘 그을게. 그리고 넌 날 모르냐? 내가 미쳤다고 그 불여우 같은 것들이랑 연애질을 해? 그리고 너가 백배는 이뻐. 안심해도 돼"
"말 같지도 않는 말로 어설프게 넘기려고 하지마. 그리고 그 기집애 사진 좀 보여줘"
"사진이 어딨어"
"휴대폰에 번호 있을거 아냐. 그럼 카톡이라도 추가되어 있을거고"
"하 징그럽다 징그러워"

나는 당당하게 휴대폰을 내민다. 그러나 그 순간 머리 끝까지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꼈다.

'아뿔싸'

서로 배부르다고 이야기 나눈 카톡이 있지 않은가. 그것도 화요일에. 아 젠장, 진짜 뭣도 아닌 구라 하나로 이렇게까지 몰리게 되나. 짜증이 난다. 그냥 앞으로는 공기만 같이 쳐마셔도 같이 쳐먹었다고 솔직하게 불어야겠다.

"걔 이름이 뭔데?"

휴대폰을 뒤적이던 가희가 묻는다. 일이 괜히 더 커지기 전에 나는 서둘러 다른 이름을 댄다.

"윤선화"

아름이나 소연과는 그래도 제법 자주 이야기를 나누는데, 특히나 더 도도한 느낌의 선화는 그닥 카톡을 나눈게 없다.

"얘 머리카락 까만색인데?"

치밀하게 파고 들지만 "예전 사진이야. 지금은 염색했어" 하고 둘러댄다. 가희는 다소 찜찜한 듯 했지만 어쨌든 더이상은 파고 들지 않는다.

"하여간 한번만 더 차에 딴 년 머리카락 떨어져 있고 막 그랬단 봐. 그냥 그때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잘라 버릴거야"
"뭘 잘라"
"알면서 뭘 물어"



…불금이니 자고 가라고 했지만, 내일 또 현장 가야된다면서 피곤하다고 기어코 집으로 가버린 가희. 지난 주에도 현장 핑계대고 나 주말 내내 외롭게 한 주제에.

"후"

어쨌든 간만에 심장 두근거린 하루였다. 씻고 나니 가희의 카톡 상태명이 "지켜본다" 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껄껄 웃음을 터뜨리며 휴대폰을 던져놓고 침대에 누웠다.

"으 시발"

아주 약간의 설레임이 그만 본전도 못 찾고 아주 간만 콩알만해졌다. 총무팀 박 과장님이랑 농담처럼 한 이야기가 현실이 됐다. 망할. 하지만 그래도 나는 소연과 함께 나누었던 갈릴레이 이야기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고추는 선다'

- 끝 -

생각보다 짧은 시간, 100권 판매 돌파! 망상


구매해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나이트 드라이브 소설



새벽의 도로. 그럴싸한 드라이브 뮤직과 함께 나와 주리의 말이 잠시 끊어진다. 주리의 휴대폰이 간간히 빛나고, 악셀을 밟는 나의 발이 깊어질 무렵 나는 서서히 피곤과 밤에 취하기 시작한다.

I want to drive you through the night, down the hills
I'm gonna tell you something you don't want to hear
I'm gonna show you where it's dark, but have no fear

에어컨 바람이 싸늘함을 넘어 추위까지 느끼게 하지만 나도 주리도 에어컨을 끄지 않는다. 온 팔에 돋아나는 닭살과 함께 어느새 속도는 위험 수준을 넘기고야 만다.

"조금 줄여요"

주리의 핀찬에 그제서야 속도를 줄이고, 잠시 유치하게 혼자만의 기분에 취했던 바보 같은 나를 속으로 책망하며 "우리 뭐라도 마실까" 하고 별로 마음에도 없는 제안을 한다. 주리는 대답 대신 휴대폰을 갑자기 나에게 들어보인다.

[ 재호빠 ]

주리의 남자친구, 그리고 나의 오랜 동업자 재호. 나는 대답 대신 차의 속도를 높인다. 사실 목적지도 없으면서.






나이트 드라이브 






'첫눈에 반한다'라는 말을 나는 이제껏 외형에 관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외적으로 그리 특별할 것이 없는 나로서는 결코 겪을 리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주리의 견해는 달랐다.

"정말로 한번도 여자한테 잘 생겼다는 말 들어본 적 없어요?"
"그만해라잉"
"으악, 진짠데?"

재호가 거래처에 잠깐 다녀오겠다며 나간 사이에 가게에 방문한 그의 여자친구 주리. 한 시간 정도의 빈 시간 동안 우리는 다소간의 어색함 속에서도 빠르게 친해졌고 7살의 나이 차에도 오래 만난 친구처럼 금방 편히 웃을 수 있었다.

"저 오빠 재밌어"
"그치? 내가 맨날 재밌다고 했잖아. 엄청 웃기다고"
"야, 사람 앞에 놓고 쑥덕거리지 마라?"

재호의 등장이 아쉽게 느껴진 순간 등줄기를 타고 흐른 묘한 죄책감에 나는 혼자 실없이 웃었고, 어째서인지 나를 보며 또 묘하게 웃고 있던 주리의 모습에 묘한 가능성을 느낀 나.

그것은 평생 몇 번 밖에 느낀 적 없는, 아주 오래간만의 어떤 솔직하면서도 복잡한 감정이었다.

물 빠진 스키니 청바지에 연보라색 트랙탑, 블루블랙으로 염색한 아주 짧은 숏커트. 별로 대단할 것도 없고, 내가 어울리기에도 지나치게 어린 나이. 그저 재호와 만나다보니 우리 또래와도 잘 어울려주는구나 하고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려고 해도 어느새 카톡 메세지로 다가온 그녀.

[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
[ 재호빠 폰ㅋ 뭐해요? 아직 가게에요? ]
[ ㅇ ]
[ 뭐야 성의없게 ]
[ ㅋ ]
[ 이따 놀러가도 되요? ]

재호가 대학원 가는 날마다 꼭 연락을 미리하고 그를 피해 가게에 나타난 그녀. 세번째의 등장에 나는 혼자 속 끓이다 못해 결국 먼저 묻고 말았다.

"나랑 따로 동업하고 싶냐? 왜 꼭 내 동업자 없을 때 놀러오는데?"

직구로 묻고 싶은 마음을 돌리고 돌리고 돌려 비겁하게 물었지만 주리의 대답은 꽤나 직설적이었다.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거에요?"




10시 갓 넘긴 시점에 일찍 가게 문을 닫고 근처 분식집으로 자리를 옮긴 우리. 아니 그녀와 나. 둘 다 저녁을 거른 상태였기 때문에 떡튀순을 주문하려고 했지만 주리는 라면으로 족하다고 했다.

"아니 내가 먹고 싶다고"
"그냥 오빠도 라면 먹어요"

기어코 나에게도 라면을 강요한 그녀는 서로가 라면을 반쯤 먹었을 무렵 툭 털어놓듯이 말했다.

"오빠가 좋아요"

사실 나는 이런 류의 여자애들을 좀 겪어본 적이 있다. 기도 승도 전도 없이 갑자기 툭툭 자석 달라붙듯이 마음을 부딪혀 오는 아이들. 내가 대단한 뭘 한 것도 아닌데, 혼자 하트 뿅뿅이 되어서는. 심지어 남친까지, 그것도 오랜 동업자인 친구를 달고 부딪혀 온 경우는 처음이었지만.

"내가 널 만나면 재호가 날 죽이려고 할걸"

나는 '내가 널 만나지 말아야 할 내 안의 이유' 대신 외부의 이유를 들어 거절 아닌 거절을 했다. 확실히 단언컨데 나는 비겁한 타입의 인간이다.

"그럼 내가 재호 오빠 정리하면 되잖아요"
"그런 걸 정리라고 할 수 있냐?"
"아"

짜증난다는 류의 인상을 쓰는 주리. 아, 그렇구나. 아마 확신하건데, 재호 역시 주리가 저 코 끝을 찡그린 표정에 반했을거라 생각했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럼 말죠 뭐. 이렇게만 만나요. 가끔"

'그럼 말죠' 라는 말에 느낀 찰나의 아쉬움과 후회. 그리고 '이렇게만' 이라는 말에서 느낀 안도감과 더러운 충동.

"아니야"

아무리 순간의 충동으로 살아온 나였지만, 사랑 아닌 여자 때문에 손에 쥔 많은 것을 송두리채 박살내 버리기에는 내 나이도 이제는 어린 나이가 아니다.

그러자 말없이 라면 국물을 들이킨 그녀. 꿀꺽 꿀꺽 뭐야, 안 짜나, 꿀꺽. 무슨 라면 국물을 시원한 냉국이라도 되는 양 들이킨 주리는 그릇을 내려놓고는 "겁쟁이" 라면서 나를 몰아세웠다. 맞는 말이다. 겁쟁이.

아예 여지를 안 준 것도 아니고, 주리가 올 때마다 설레이는 표정으로 이것저것 시키지도 않은 음료를 내어주고 지난 십수 년간 여자 꼬실 때마다 써온 수많은 마음의 테크닉을 활용하가며 최대한 그녀를 기쁘게 한 나.

몰랐을 리가 없다.

재호 앞에서였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표현들을 통해, 잔잔하고 담백하면서도 은은하게 배어드는 감정의 얽힘을 유도한 나. 아마도 재호 같은 타입과는 다른 류의 어떤 부드러운 재미를 느꼈을 것이다.

"정말 후회 안 할 자신 있어요?"

조금은 귀여움까지 느껴지는 도발. 그리고 솔직하게 "아니, 당연히 후회할거야" 라며 답을 하는 나의 여유.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매번 이런 타입의 여자애들과 엮이곤 했다. 정말 매번.

곰곰히 생각해보건데 그녀들이 '남자'라는 성별에게서 항상 느껴온 어떤 전형성에서 묘하게 탈피한 모습에서 신선함들을 느낀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지만 달리 말하면 그것은 그만큼 순간의 콩깍지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너는?"

우습지만 나의 이 역질문에 꼬리 내린 애들은 한 명도 없다. 단 한 명도. 그리고 비겁한 나는 "그럼 니가 선택한 거니까, 절대로 후회하지마" 라는 말과 함께 그녀들을 집으로 들이곤 했지. 쓰레기처럼.




나의 08년식 랜서 에볼루션를 본 주리는 "와 차 진짜 못 생겼다" 하면서 아저씨 차라고 놀려댔다. 연식을 듣고는 헛웃음을 짓기까지.

"야, 그래도 이거 좋은 차야. 진짜로"
"수리비가 더 들어갈거 같은데"

아픈 구석을 찔렸지만 어쨌든 나는 변명 대신 여유있는 드라이브로 밤의 도로를 주행하기 시작했다. 답답함 도심을 벗어나 자유로와 통일로를 거쳐 다시 차를 돌려 인천공항 고속도로를 달렸다. 중간에 기름을 넣고 조금 오버했나 생각할 무렵 주리가 말했다.

"드라이브하니까 좋다"
"조금만 더 달리자"

그리고는 드디어 김포 어느 켠까지 다시 차를 몰고 와서는 차를 세웠다.

"안 졸려?"

슬슬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하는 무의미한 드라이브. 이게 뭘까. 연애도 아니고, 사랑의 도피도 아니고.

"오빠는 졸려요?"
"조금"
"그럼 잠깐 눈 붙여요"

창문을 내리고 어느새 완연한 가을의 날씨를 느끼게 하는 선선한 공기를 폐에 채우는 것도 잠시, 주리는 차에서 내려 담배에 불을 붙였다.

"오빠는 담배 안 피워요?"
"끊었어"
"정말요? 어떻게 사람이 담배를 끊어요?"
"난 끊을 수 있어. 섹스도 끊었어"

내 아저씨 같은 농담에 푸푸하며 실없이 웃는 주리.

"끊은게 아니라 끊어진거 아니에요? 아니 아예 이제는 잘 안서나? 아 그래서 담배 끊은거?"
"야"

슥 들이대보는데 한술 더 뜨며 치고 들어오는게 재밌다. 이런 느낌 얼마만인가. 하지만 난 찬물을 또 끼얹고야 만다.

"근데 너 재호랑은 뭐 문제 있어?"

그 말에 어깨를 으쓱한 주리는 담배를 다시 한 모금 깊게 빨아들였다.

"남 탓 하고 싶은거에요?"

역시 비겁했나.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는 않다. 너 앞에서는.

"그냥, 궁금해서"

사방에서 들려오는 가을 벌레들의 오케스트라. 주리는 머리를 쓸어올리며 말했다.

"모르겠어요. 나는 그냥 편하게 만나고 싶은건데, 재호 오빠는 자꾸 진지해지니까. 그래서 더 그런 것도 같고. 그리고 그런 걸 떠나서 오빠 같은 사람 궁금해서요"
"뭐가?"
"평생 결혼 안 할 거 같은 사람. 누가 뭐라고 안 하면 진짜로 인생에 계획 같은거 하나도 안 정하고 대충 막 살 거 같은 사람"
"내가 그런 이미지야?"
"아니에요?"

모르겠다. 어쩌면 이러다가, 아니 매우 높은 확률로 평생 독신은 각오하고 있었지만, 인생에 계획도 없이 살았던가. 분명 예전에는 아니었는데. 글쎄. 그런지도 모르지.

"모르겠네"
"근데 나도 그래요. 나도 꼭 그렇게 막 계획 따라서 살아야 되나 싶기도 하고. 그럴 나이가 아니라는건 아는데, 계획 따라 사는게 무슨 의미인가 싶고. 그럼 뭐가 크게 다른가 싶고. 안 그래요?"

나도 차에서 내려 밤의 가을 바람을 맞이하고 있었다. 때 아닌 인생 상담. 잘만 유도하면 이 일탈을 꿈꾸는 어린 양을 성실한 한 남자의 품으로 다시 곱게 돌려보낼 수도 있고, 또 모든 것을 파멸 속으로 날려버릴 것이 분명한 더럽고 짜릿한 인연 속으로 떠날 수도 있는 이 기묘한 갈림길에서 나는 주리의 얼굴을 달빛 아래서 또 보고야 만다.

이름도 기억 안 나는 고등학교 때의 역사 선생님이 그랬다. 절대로 달빛 아래에서 여자와 오래 이야기 하지 말라고. 천하의 못생긴 여자도 이뻐 보인다고. 그래서 자기가 평생 집에 들어갈 때마다 후회하며 살고 있다고. 아재식 쓰레기 농담 같은 이야기를 진지하게 신신당부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나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또 어기고야 만다. 하물며 주리만큼 예쁜 여자애라서야.

"주리야"

조금 운을 길게 뗀 어색한 부름. 분위기를 잡을 생각이었지만, 연애 감각이 녹슨 탓일까 내 방식이 후져진 것일까, 너무 뻔한 패턴에 주리는 피식 웃고 만다.

"우리 이제 어떻게 해요?"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해두고 싶어하는 주리의 질문. 그리고 여기까지 와서도 흘낏 손목시계의 시간을 확인하며 내적갈등에 대한 변명을 찾아보는 나.

"가자"

어디로 가냐는 주리의 연이은 질문에 나는 "어디긴, 자러 가야지. 안 졸려?" 하며 그녀를 차에 태운다. 어느새 밤 12시 반이 넘었다. 나는 서울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조금 눈이 뻑뻑해지는 것을 느끼며 음악을 튼다.



새벽의 도로. 그럴싸한 드라이브 뮤직과 함께 나와 주리의 말이 잠시 끊어진다. 주리의 휴대폰이 간간히 빛나고, 악셀을 밟는 나의 발이 깊어질 무렵 나는 서서히 밤에 취하기 시작한다.

I want to drive you through the night, down the hills
I'm gonna tell you something you don't want to hear
I'm gonna show you where it's dark, but have no fear

에어컨 바람이 싸늘함을 넘어 추위까지 느끼게 하지만 나도 주리도 에어컨을 끄지 않는다. 온 팔에 돋아나는 닭살과 함께 어느새 속도는 위험 수준을 넘기고야 만다.

"조금 줄여요"

주리의 핀찬에 그제서야 속도를 줄이고, 잠시 유치하게 혼자만의 기분에 취했던 바보 같은 나를 속으로 책망하며 "우리 뭐라도 마실까" 하고 별로 마음에도 없는 제안을 한다. 주리는 대답 대신 휴대폰을 갑자기 나에게 들어보인다.

[ 재호빠 ]

주리의 남자친구, 그리고 나의 오랜 동업자 재호. 나는 대답 대신 차의 속도를 높인다. 사실 목적지도 없으면서.




"내가 뭐 이 시간에 잘 사람인가? 어 잠깐 담배 사러 나왔어. 우리 윗 집 그 미친 년 땜에 이제 집에서 담배도 못 피우잖아. 응, 어. 가을이라 그런지 날씨 좋네. 오빠도 피곤하지. 응? 아니. 응, 그럼. 나도. 어, 어어, 그럼 잘 자"

모텔 주차장 앞. 차에서 내려 재호와의 짧은 통화를 마친 주리는 다시 나의 안색을 살핀다.

"화난 거에요?"
"아니"
"근데 표정이 왜 그래요"
"이 나이 쳐먹고 뒷감당 안 되는 짓을 또 벌이는 것 같아서"

또 라는 말에 푸푸하고 웃은 주리는 "올~ 처음이 아니시다?" 하며 내 옆구리를 푹 찌른다. 아주 오래 전의 일이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바뀐 입장이긴 했지만. 나는 머쓱하게 웃고는 주리의 손목을 잡았다. 그래, 길게 생각할 것 없다. 굴러 들어오는 떡을 거부할 이유가 없다.

"겁나요?"

솔직히 말해서 나 같은 타입의 인간은 세상에 별로 겁나는 것이 없다. 정말로. 아마도 주리도 마찬가지이리라. 그렇다고 이 망설임이 도덕율에 의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아니"

2억 2천만원짜리 섹스를 하게 될까봐 겁난다는 드립을 치고 싶었지만, 아무리 내 연애세포가 다 죽었다 해도 그 정도는 아니다. 물론 재호의 투자금 2억 2천만원이 떠오른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망설임은 어느새 주리의 손깍지가 날려버렸다.

"이제 고민 그만해요 고만"

그 말은, 재호가 평소 즐겨쓰던 말이라는 사실에 혼자 속으로 히죽 웃으며, 그렇다면 나는 어떤 말, 어떤 생각, 어떤 행동을 주리에게 흔적처럼 남기게 될까를 생각했다. 또 주리는 어떤 흔적을 나에게 남기게 될까를 생각하며.

- 끝 -

방구석 황제 소설

그는 스스로를 황제라고 칭했다. 6.5평 원룸 안에도 각 성의 관료들을 임명했으며 하늘 아래 부여된 모든 권력을 휘두르곤 했다.

"어찌하여 이리도 궁성이 어수선한 것이냐!"
"폐하, 죽을 죄를 지었사옵나이다, 즉시 치우도록 하겠사옵나이다"
"짐이 오늘 은혜를 베풀 것인즉, 즉각 청결히 치우도록 하라!"
"예! 폐하!"

…물론 저 모든 대사는 혼잣말이다. 혼자 무거운 음성으로 역정을 내고, 혼자 간들어진 음성으로 허둥지둥 대는 것이다. 즉 그는 황제이자 대소신료이었으며 백성이었다. 가장 위대한 자이자 가장 미천한 자이기도 했다. 오늘도 그는 혼자 크게 화를 낸 뒤 궁시렁대며 걸레질을 시작했다. 그때였다.

[ SB 알림 : 9월 5일 11:13 58091-**-*****213 새서민일자리지원 150,000원 입금, 잔액 152,200원 ]

띠링하는 알림과 함께 백수 청장년들을 위한 국가 복지 지원금이 입금되었다. 그는 뛸듯이 기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했다.

"부어라! 마셔라! 오늘은 좋은 날이 아니더냐, 왜 이리 풍악소리가 작은게냐, 풍악을 울려라, 풍악을 울려! 여봐라, 서둘러 대취타를 연주하라!"
"부로바, 대취타 연주해줘"

[ 베이버 뮤직에서 국립국악단, 대취타를 재생하겠습니다 ]

빠아아아~애애앵~

풍악이 울리기 시작하자 그는 진정으로 대취타에 맞춰 격렬히 춤을 추기 시작했다. 물론 박자도 분위기도 맞지 않는 엉터리 율동이었지만 알게 뭔가. 그는 황제인데.

"동방예의지국에서 황제의 나라로 조공을 보내와 이리도 국고가 풍족해지니 실로 기쁘구나, 태평성대로다 태평성대야, 이 모두 짐의 요순치세 덕분 아닌가! 좋다 오늘은 이 나라 만 백성에게 짐이 큰 포상을 내도록 하겠노라"
"폐하,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역시 그는 혼자 기분 내고 혼자 감읍하며 스스로이자 만 백성을 위한 거대한 축제를 계획했다.

"여보세요? 네, 여기 성운하우스 302호실인데요, 네, 후라이드 양념 반반에 콜라 세트로 해서 하나 보내주세요. 카드 결제할게요. 아 그리고 양념 좀 많이 부탁 드릴게요 네네 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고 그는 콧노래를 불렀다. 지난 달, 알바자리에서 짤린 뒤로 남은 돈도 똑 떨어진 상황에서 때마침 공돈이 들어왔다. 이거 다 쓰고 나면 이제는 진짜 뭘로 먹고 살지 암담한 상황이었지만 그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그는 지엄한 국체이자 제국 만인의 지존이니 결코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되었으니까.

'흔들리면 안된다'

부지런히 알바 채용 사이트를 뒤지지만 어째 마땅한 자리가 없다. 그는 혀를 찼다. 세상이 어찌 이리도 쓸만한 일자리가 없단 말인가.

"제국 상서는 즉시 들라!"
"부르셨사옵니까 폐하"
"짐이 민정을 살핀 결과, 백성들이 일할 자리가 없으니 이는 필시 그들의 곤궁함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상서는 어찌하여 백성들의 곤궁함을 살피지 못한 것인가! 백성들이 밥벌이를 하지 못하면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흔들리며 장차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이니 이는 짐의 시름이 깊어짐이며 그것은 불충이다. 그대는 서둘러 백성들의 어려움을 보살피도록 하라"

백성을 어루만지는 어진 황제의 사려. 하지만 제국상서 역시 고민이 깊었다.

"예 폐하…분부 받들겠사옵니다. 하오나 이에 부연을 하온즉, 작금의 불경기는 하루이틀 내로 해결이 가능한 문제가 아니며 장차적인 대비와 깊은…"
"네 이 놈이 감히! 짐의 말에…! 즉각 이 자를 끌고가 참형에 처하라"
"폐, 폐하!"

물론 그가 참형을 운운하며 극형을 내린다고 하여도 실제로 그 누군가가 끔찍한 일을 당하는 것은 아니다. 그 스스로가 황제이자 재상이고 내관이며 백성인데 누가 뭐 누굴 죽인단 말인가. 스스로 목을 자를 것도 아니고. 그러나 그렇게 누군가를 극형으로 끝내버린다는 말 한 마디만으로 어딘가 속이 좀 시원해지는 것이 있었다.

"폐하, 부디 자비를 베푸소서"

그러나 아무리 상상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한들, 누군가를 말 한 마디로 죽인다는 것도 지나치게 과하다는 생각에 그는 또 혼자 작게 황제 최측근의 내관을 흉내내어 간들어지는 목소리로 스스로에게 간언을 했다. 하지만 황제의 뜻은 확고했다.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는 결코 뜻을 이룰 수 없다. 때로는 지나친 수단이 가장 적당한 수단일 수도 있다. 만 백성을 위한 우리의 책무는 한 개인의 목숨값에 비할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이대로 하루하루 시간만 보내며 자기 자신을 돌보지 못한다면 살아 무엇한단 말인가.

띵동-

"네, 19500원입니다. 영수증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네 맛있게 드세요"

치킨이 도착했다. 그는 밥상을 펴고 앉아 치킨을 뜯기 시작했다. 달고 짜고 맵고 맛나다. 얼마만에 맛보는 치킨인가. 거의 한달은 넘었지 싶은데.

"폐하,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또 혼자 스스로에게 감사하고는 치킨에 열중했다. 한참 뜯으며 심심하다는 생각에 카톡을 확인하자 어제 밤에 성태가 보내온 게 있었다.

[ 살아있냐? ]

그는 답을 하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그런가, 살아있는가. 살아야있지. 당연히. 숨을 쉬고 먹고 싸며 생각을 하는데. 하지만 나이 스물아홉에 취업은 커녕 알바자리도 없고 여자친구도 없고 통장잔고는 쥐뿔 나라에서 준 돈과 부모님 흡혈로 먹고 사는 비루한 처지에 차마 살아있다는 답이 민망하게 느껴졌다.

결국 답장 대신 읽씹으로 살아있음에 대한 간접적 증명만을 남긴 채 치킨에 열중했다.

"본디 황제가 움직이면 국고가 축나기 마련이다. 만 백성이 힘든데 어찌 짐 혼자만 즐거움을 누리겠는가"
"기운을 차리소서 폐하"
"그래, 그렇기 위한 보양식 아닌가"

뱃살을 생각해보면 보양이 아니라 일주일쯤 굶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새삼 떠올리지만 그는 허튼 생각을 집어치우기로 했다.

"짐은 황제다!"

그리고 문득 생각이 닿았던 '여자친구'에 대해 씁쓸한 고찰을 하기로 했다. 황후를 맞이하고 싶다. 생각해보니 모쏠로 끝난 황제도 있던가? 있기야 있겠지 싶긴 한데, 우리나라 왕 중에 그런 케이스도 있었나? 아, 단종은 일찍 죽었으니, 혹시 하며 검색해보니 그도 왕후가 있었다.

"지미럴"

나이 스물도 안된 애송이들도 할건 다 했구만, 하는 생각에 새삼 시름이 깊어졌다. 사랑하는 왕후와 함께 국사를 논의하며 정답게 세자 생산행위에 임하는 막중한 책무를 도외시한 채, 허구헌 날 금발 오랑캐와 왜구의 나체처자 영상서화나 밝히는 스스로의 처참한 처지에 그만 깊은 비탄에 빠질 뻔 했지만 다시 한번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짐은 황제다"

일단 다 먹은 치킨을 치우고 손을 씻고는 컴퓨터 앞에 앉아 다시 알바자리를 알아본다. 별로 하고 싶지 않지만 버스 세 정거장 거리의 PC방 심야 알바자리 하나와 역 근처 마트 매대판매 알바 자리에 지원해 본다. 어쨌든 돈을 벌어야 한다. 국고가 바닥나면 황제고 나발이고 그 끝은 볼 것도 없으니까.

"어흠"
"폐하, 밤이 깊었사옵니다. 기침에 드소서"
"오늘 밤은 외롭구나"
"본디 높은 자리는 외로운 법입니다. 폐하의 마음이 약해져서는 결코 아니되옵니다"
"그냥 해 본 소리일 뿐이다."

그래놓고서는 또 게임과 인터넷을 하며 결국 새벽 2시가 넘은 시간이 되어서야 피곤에 절어 잠자리에 든다.

"오늘 하루 참 고되었구나"

그렇게 혼자 중얼거린 그는 드디어 잠자리에 든다. 언제 빨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아 쿰쿰한 냄새가 나는 베게보를 좀 빨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부디 내일 눈을 뜨면 좋은 소식이 들려오길 기대한다.

그렇게, 고단한 잠자리에서 그는 꿈을 꾼다.

어느 따스한 봄날, 황금색 천이 휘날리며 문무백관이 모인 자리에 우러러 서서 만인지상의 위상을 뽐내는 기쁨을 누리며, 끝없는 부와 사치를 즐기고 가슴 벅치도록 넘쳐나는 행복 속에서 최고의 재주를 가진 이들과 큰 일을 논하고 동작대를 지어 대교 소교 못지 않은 미인들과 향락과 거사에 임하는, 결코 현실에 오지 않을 아름다운 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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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생각보다 짧은 시간'은 어쩌면 이 시대에는 팔아서도, 사서도, 봐서도 안되는 몹쓸 책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것에 크게 개의치 않는 우리들이기에 근 10년의 긴 시간을 뛰어넘어 이렇게 다시 한번 여러분을 만나뵙니다. 

구매해주신, 관심을 가져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데스토피아 소설

"더이상은 힘들 것 같습니다"
"…네"

나보다 7살이나 어린 은실장님과의 3차 면담. 나는 간절히 부탁했지만 그녀의 입장 역시도 사실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저 그녀는 회사의 뜻을 전달하는 메신저에 불과하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실장님. 감사합니다 그동안 신경 많이 써주셔서"

그래, 그녀는 나에 대해 배려를 많이 해줬다. 회사와 싸워가며 한달치 해고예고 수당에 위로수당이라고 한달치 월급을 더 받아주기까지 한 그녀다. 요즘 같은 노동유연화 사회에 그 무슨 꿈같은 말인가. 진짜 은 실장은 할만큼 했다. 처음에는 '왜 나를 해고 대상자로 골랐냐!'며 은 실장한테 막말까지 했지만, 내가 그녀 입장이라도 마찬가지였을거다. 딸린 입이 하나라도 더 적은 놈이 회사 입장에서도 자르는데 마음의 부담도 덜할테니까. 독신이 제일 만만하지. 하기사 뭐 스펙도 훨씬 더 짱짱하고 어리고 연봉도 싼 놈이 수두룩 빽빽한데 나 같은 놈을 회사가 굳이 더 데리고 있을 이유가 없겠지.

"미안합니다"

연신 미안하다며 눈시울까지 붉히는 그녀의 모습에 내가 더 미안할 지경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조금 더 잘해줄 걸 그랬다. 막판에 일이 손에 안 잡혀서 개판친게 조금 미안했다.

"저 죽으러 나가는거 아니잖아요. 당분간 쉬면서 또 좋은 일자리 알아보죠 뭐. 정말 감사합니다. 신경 많이 써주신 것 알아요"
"아니에요. 그리고. 힘내세요. 양 과장님이면 할 수 있어요."
"그럼요"

그렇게 씩씩하게 나왔지만 나는 느끼고 있었다. 진짜 나 좆됐다는거.






데스토피아 






나이 마흔 아홉의 만년 과장. 작년 말, '이번에야말로' 싶던 승진에서 기어이 미끄러지며 막연하지만 확실하던 불안이 서서히 현실로 다가왔다. 그 다음 주에 권고사직을 권유 받았다. 나는 불같이 화를 냈다. 사실 화가 났다기보다는 겁이 났다. 독거노인이 코 앞인데 노후대책은 커녕 천애고아 주제에 빚더미 뿐이니까.

"부디, 재고 부탁드립니다"

생산은 물론 물류나 상품기획단계까지 모두 기계에 의한 전공정 자동화 공장이 대세가 된 요즘이다. 나같은 쉰을 바라보는 중늙은이가 재취업이 될 리가 없다. 40대를 넘어 30대 후반도 정리해고 명단에 오르는 시대다.

"부디…"

실업율이 60%를 훌쩍 넘긴 요즘 같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 실업은 직장이 아닌 계급의 상실이다. 추락이다. 급속도로 줄어가는 일자리 속에서 나이 먹은 실업자는 서민도 아니고 그대로 빈민추락이다. 실업급여제도가 사라진지가 벌써 10년이다. 게다가 이렇게 갑작스러운-은 사실 아니지만- 해고는 장기 고용을 기반으로 계획한 대출이나 각종 장기 생활계약 때문에라도 파멸을 부르는 일이다.

"내가 회사에서!"

솔직히 말하자면 딱히 뭐 한 일이 있겠나. 주는 일만 항상 어기적 어기적 대충 쳐내고 월급도둑으로 보내온 지난 11년. 그나마 제일 일찍 출근해서 제일 늦게까지 하는 무급야근, 빠지지 않는 회식, 자존심이고 뭐고 없이 그저 비벼대고 빨아대며 아부로 버틴 세월. 물론 알고 있었다. 그것마저 슬슬 한계가 오고 있었다는 것을.

"나도 배우면 되잖아요 배우면. 배움에 빠르고 이르고가 어딨어요!"

억지도 부려봤다. 하, 진작에 좀 배워놓을 것을. 젊었을 때는 영어 공부 안 해서 후회했고, 늙어서는 개발언어 공부 안 배워서 후회했다. 그거 뒤늦게 배운다고 뭐 크게 변했을까 싶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를 잘라야 하는 핑계거리라도 덜 줬을 것 같아서.

뭐 정말 각 잡고 배우자면 별 것도 아니었을텐데 나이 먹으니 왜 그리도 무언가를 배우기 싫었던건지. 수십 명 업무량을 혼자 해치우는 요즘 놈들 보면 감탄부터 나온다. 그걸 옆에서 맨날 보면서도 '내일 내일' 하다가 결국 이 나이 먹도록 그렇게 되어버렸다. 하기사 내 사회초년생 시절에 엑셀 못하고 파워포인트 못하던 부장이 얼마나 한심해 보였던가. 역지사지해보면 똑같은 거겠지. 내 게으름이 원수다.





"어쩌지"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중얼거린다. 생각없이 멍하게 오다가 사고가 날 뻔 했다. 그래서 부랴부랴 자율주행 모드로 바꿨다. 고집스럽게도 맨날 꺼둔 기능인데. 인공지능이 싫었다. 일자리도 빼앗고 사회도 극단으로 만들어 가는 것 같아서. 그러나 필요하다는 것도 안다. 잘 안다. 아직 이 기계 할부가 반 년은 남았다. 이 미친 나라는 수백만원짜리 장치를 법으로 강제로 달게 하면서도 지원금 한 푼 안 준다. 돼지 목에 진주도 아니고, 근 20년이 되어가는 2015년형 똥차에 인공지능 4세대 자율주행장치라니 그냥 웃음부터 나온다.

"진짜 어쩌냐고"

이 달 월급이랑 해고예고수당, 위로금까지 합해서 한 돈 2천 남짓한 돈이 나왔다. 퇴직금이라도 있었으면 어떻게든 버틸 수는 있었을텐데. 안보 대통령이랍시고 뽑아준 김정길이 그 개새끼가 퇴직금 제도를 날리는 바람에 이 꼴이 됐다. 뭐, 그나마의 퇴직연금을 중간에 가져다 쓴 내 잘못도 있지만.

"씨발"

이제 나도 사회복지원이나 드나드는 신세가 되겠지. 그래도 일단 먹거리라도 쟁여놓자는 생각이 들었다.

"25만 8천원입니다"
"뭐 이 시팔?"

마트 무인계산대를 향해 나는 쌍욕을 내뱉는다. 진짜 아무리 생각해도 이 나라의 물가는 미쳤다. 우울한 마음에 거하게 밥이나 배 터지게 먹자고 이것저것 좀 집었더니 20만원이 넘게 나왔다. 평소 같았으면 "조금 많이 나왔네" 하고 말았겠지만, 마음이 초조하다보니 그렇지가 못하다. 서둘러 허둥지둥 술이랑 안주를 조금 내려놓는다. 뒷 사람들 눈치가 보인다.

"결제가 완료되었습니다"

줄이고 줄였는데도 8만원이 넘는다. 이제는 이런 마트도 못 오겠다. 하기사 왜 빌스플러스로 왔을까. 이제 내 주제에 맞게 싸구려 썬마트나 갈 것을. 그럼 아까처럼 집었어도 10만원 대에 뚝딱 해결일텐데. 이제 백수가 된 내 주제에 무슨 질을 따지고 있는가. 정신차리자. 어쩔 수 없이 10kg 쌀 한 포대랑 라면 무너기를 차에 싣고 다시 집으로 향한다. 정말로 겁이 난다. 이 나이에 정말 재취업이 가능할까.

띠딩-

반나절만이다. 원스탑 퇴사처리가 되자마자 바로 당일 지역보험가입센터에서 가입 안내 메세지가 날아온다. 맞다. 이젠 정말 좆됐다. 달달히 건강보험료만 70만원씩 뜯어간다던데. 이번 달 카드값은 얼마지?

띠딩-

미용실이다. 워치폰에 연동되어 차 HUD에 뿌려지는 적정 미용시기 안내 메세지. 생각해보니 뭐한다고 맨날 6만원씩이나 주고 머리를 잘랐을까. 더욱 후회가 되었다. 그리고 이런 현실적인 고민을 해야되는 내 처지가 서글펐졌다. 농담이 아니라 눈가가 뿌옇게 변했다. 역시 정확히 말하자면 슬퍼서도 억울해서도 아니고 무서워서. 정말 무서워서.





당장의 생활비를 줄여야 했다. 마흔 아홉 싱글라이프. '화려한 싱글'이라는 단어에 부족함 없이 한달 월급 460만원 중 410만원을 소비하며 살아왔다. 물론 집세 포함해서.

집에 오자마자 이력서 업데이트를 하고 이틀간 5개 구인구직 채용 사이트에 글을 올렸다. 취업난이 심화될수록 취업 사이트만 늘어간다. 내용도 다 거기서 거기다. 아예 기업이 아니라 채용 사이트에서 돈을 주고 채용공고를 역으로 모셔오는 곳도 있다고 들었다.

"만원이라…"

업데이트만 만원이다. 그래도 아쉬운 것은 내쪽이다. 다른 구직자보다 조금 더 눈에 띄게 번쩍이는 효과 하나에 5만원, 2배 사이즈 노출은 10만원. 미친 세상이다. 그래도 역시 아쉬운 것은 내쪽이다.

"후우"

노동부에서 제공하는 사회적 재교육 사이트를 돌아본다. 그러나 역시 뭐가 없다. 제대로 된 구직 교육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구직자를 대상으로 교육하는 방법을 교육하는' 아귀다툼 조장용 교육이 대부분이다. 그나마도 비교적 저렴하거나 전망이 조금이라도 있어 보이는 교육은 모조리 매진이다.

'하아'

장사를 생각해보아도 답이 없다. 자본도 없고, 요즘 같은 세상에 자영업이라니 재주도 없고 경험도 없는 내가 성공할 리 없다. 근 30년째 화두 아닌가.

'뻔히 실패할 것 아는 장사에 도전하다 망하고 죽는가, 버티다 죽는가'

애초에 무슨 장사를 한단 말인가. 요리도 못하고, 말주변도 없는 내가. 그 와중에 돈은 무서운 속도로 빠져나간다. 집세, 전기요금, 수돗세, 국민연금, 보험료, 카드값, 통신비, 인터넷…게다가 그 와중에 깜빡한 죄로 게임 정기결제, OTT & VTT 정기결제가 빠져 나갔고 자동차 보험료와 자동차세가 생각치도 못하게 타격을 입히고는 수도관 수리비와 정수기 대여료 등등이 또 야금야금 돈을 빼먹는다.

매달.

그 뿐인가. 삼시세끼 밥 먹고 커피 먹고 과자 먹고 술 사먹고 하는 모든 돈이 나를 초조하게 만든다. 차라리 아예 아무 것도 없는 거지라면 매달 30만원 남짓한 생활비 지원이라도 있지만 나에게는 당연히 그런 것이 주어지지 않는다. 부모님이라도 살아 계셨다면 좋았겠지만, 빚만 물려주셨다.




낮잠을 자다 일어나니 목이 탔다.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옛날에 사막에서 조난 당한 남자를 주제로 한 단편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언제, 어디서 본 영화인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그저 끝없이 펼쳐진 사막 한복판에서 손에 든 생수병 하나가 전부인 주인공은 철저히 한 모금 한 모금 아껴서 물을 마시며, 정말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느낄 때만 반 모금을 먹고 먹고 하면서 걸어나간다.

보통의 영화였다면 그렇게 역경을 딛고 사막을 횡단하거나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누군가의 구원으로 살아났겠지만 감독이 나같은 니힐한 취향인지 아니면 리얼리스트였는지 주인공은 결국 탈진해서 죽고 만다. 허무한 결말. 1시간 반 동안 내내 정말 보는 사람의 입이 마를 정도의 목마름과 갈증을 너무나 리얼하고 괴롭게 그려낸 영화였다.

그때 생각했다. 나였다면 어땠을까. 아마 당연하다는 듯이 한참 걷다가 너무 목이 마르고 짜증이 나면 벌컥벌컥 마시고 어느 시점까지 더 걷다가 그대로 뻗어 죽음을 맞이했겠지.

지금의 처지가 문득 오버랩되었다. 재취업은 현실적으로 무리라고 치자. 내가 야금야금 돈을 아껴쓴다고 해봐야 잘해야 네다섯달 정도가 한계이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 마음이 정해졌다.

'적당히 놀다 두 달 후에 그냥 죽자'

그러자 정말 놀랍게도 깔끔하게 마음이 정리가 됐다. 앞으로 뭐해먹고 살지, 이제 재취업은 어떻게 하나,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등등, 모든 고민의 답이 그걸로 정해졌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생각하자 두 달 동안 즐기고 살자는 생각이 들었다. 2천은 두 달 살기에는 넘치도록 풍족한 돈이다. 무슨 방법으로 어떻게 죽을지만 정하면 된다. 마음이 편해졌다.





며칠 간은 차로 여행을 다녔다. 임진각에서 땅끝마을까지, 경포대에서 여수까지 돌아다녔다. 좋았다. 경치 좋은 곳이 이리도 많았구나 싶었다. 진작에 여행 좀 다닐걸 하는 후회를 했다. 기름값 아낀다고, 시간 없다고 핑계만 대면서 사무실과 집에서만 인생 다 날렸다.

'좋구나'

자율주행 모드로 놓은 채로 맛있는 것을 먹고, 풍광 좋은 곳을 드라이브 했다. 참 좋았다. 울기도 많이 울었다. 사실은 죽고 싶지 않다. 나는 긍정적인 사람이니까. 그저 조용히 행복하게 살고 싶을 뿐이니까. 왜 이렇게 됐을까.

'남처럼 살지 않았던 탓일까'

젊은 시절 아끼고 모으고, 결혼할 사람 만나서 결혼하고, 대출 내서 집 얻고 애기 낳고 살다가, 둘이 아둥바둥 번 돈 모아 집 사고, 오른 집 값으로 나중에 잘릴 무렵 되어 역모기지론으로 노후대책하고, 애들 잘 커가는거 보면서 웃다가 장가가는거 보고 웃는, 그렇게 조용히 살다 조용히 죽는 삶. 사실 이제는 전체 가정의 30%도 되지않는 모습의 꽤나 성공한 삶이지만 어쨌거나 흔히들 '평범한 삶'이라고 불리는 그런 '보통의 길'.

나는 그러기가 싫었다. 아니 그럴 수가 없었다.

사기를 당해 전재산을 날린 부모님, 자살한 아버지와 충격으로 정신질환을 얻은 어머니, 언젠가는 결혼식 하고 살자며 같이 동거하던 13년 지기 여자친구, 아니 사실상의 마누라와의 이별이 연이어 일어났고 내 명의로도 대출된 부모님의 빚은 4년 전에야 간신히 다 갚았다. 물론 내가 만든 빚은 제외하고서 말이다.

'후'

나는 그런 '평범한 행복의 꿈'을 꾸어볼 기회가 없었다. 상관없었다. 애초부터 바라지도 않았으니까.

"응? 저게 뭐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저기 산 아래 에드벌룬 현수막을 바라보았다.

[ '가장 힘들 때 서로 힘이 된 사람들' - 영산 생활문화연구소 ]

이름은 들어본 적 있었다. 그게 여기 있었구나. 생활문화연구소인가. 신랄하게 말하자면 가난뱅이들끼리 모여 집단공동체 생활을 하는거다. 최저생활비 인당 30만원을 네 가족이 받아봐야 120만원으로 생활할 수 있을 리 없지만, 10가족이 모여 40명이 1200만원으로 산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규모의 경제가 실현되니까. 게다가 모인 사람들의 노동력을 집약하여 무언가의 생산하청이나 자급자족 농사 같은 것도 할 수 있으니 적어도 먹고 사는 고통에서는 어느 정도 해방될 수 있다는 논리로 출발한 사회단체다.

"말은 그럴싸하긴 한데"

이런 류의 집단에서 항상 발생하는 묘한 컬트적인 냄새와 그와 동반하는 구린 일들. 다 같은 옷을 입고, 종교적 의식도 일주일에 몇 번이나 한다고 하고, 구닥다리 공산주의 강령 비슷한 뭔가를 공부한다고도 하고, 단순히 경제공동체를 넘어서 마누라와 남편을 종종 바꿔 자기도 한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있다. 뭐, 누군가에게는 흉흉한이 아니라 훈훈한 일지도 모르겠지만. 나 역시도 무슨 공산주의 집단농장 같은 냄새가 나서 극도로 싫어했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살 길을 하나라도 알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쉽지만 저희 지부에서는 미혼자 분은 받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설령 결혼을 하셨다고 하더라도 저희와 함께 가실 수 있는 분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절차도 오래 걸립니다. 저희 입장에서도 새로운 가족을 맞이하는 일이니까요"
"그렇군요"

안내 팜블렛만 하나 받아왔다. 미혼자는 안된단다. 규모의 경제로 잉여이익을 발생시켜야 하는 부분이 있는데, 독신자 1인은 그런 면에서 부적합하단다. 애를 낳을 수도 없고.

"그럼 만약에 미혼모를 자청하는 싱글여성이 있다면 받아주려나? 궁금하네"

일단은 합리적인 이야기다. 차 안에서 메뉴얼을 읽었다. 웃음이 나오는 포인트가 몇 개 있었다. 출산계획을 모두가 함께 고민해서 결정한단다. 뭐 따지고 보면 당연한 소리다. 애 하나 낳으면 그거 대학 보낼 때까지 돈이 얼마가 들어가고 양육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어느 미친 놈이 들어와서 번식욕 채운다고 다짜고짜 애만 마구 낳아버리면 그것도 답 없는 일 아닌가. 공동체의 생애주기를 감안한 자금 싸이클도 고려하여 출산도 계획한단다. 아마 바로 그 '출산계획을 함께 모두가 함께 고민한다'에서 마누라 남편을 바꾼다 어쩐다 하는 흉흉한 소문이 나왔으리라. 세상의 소문이란 참 무섭구나 새삼 생각이 든다.



"흠"

큰 마음 먹고 엊그제 예약한 파인 다이닝 고급 레스토랑에 왔다. 한 끼에 28만원이란다. 하지만 '최후의 만찬'으로서 좋다고 생각했다. 나처럼 혼자 온 사람도 몇 명 있었다. 이제 파인 다이닝에 1인 고객은 드문 풍경이 아니다. 혼자 살고 직장이 있는 사람들. 그렇다고 남까지 사주기에는 여유가 부족하고 일에 치여 연애할 시간도 많지 않은 그런 사람들. 아니면 만사 다른 사람 엮이기 귀찮은 사람들.

"반갑습니다"

그리고 저런 사람들. 사람은 언제나 외롭다. 연애와 결혼이 힘들어진 사회 속에서 인연을 찾기 위한 온갖 어플과 서비스, 기업들이 날뛴다. 부질없는 만남의 희망 속에서 희박한 확률을 뚫고 만난 사람들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캐쉬템으로 헛돈지랄 좀 했을거다. 어떻게 어플로 만난 사람들인가를 알 수 있냐면, 서비스로 제공하는 와인에 [맛나요] 라는 만남 어플의 상호가 붙어있었다.

'거기 담당자 이뻤었는데'

전에 일하던 회사에 있을 때 광고문의로 우리 회사에 왔었다. 그 어플업체에서. 처음 봤을 때 기획 잘했다고 생각했다. 흔한 데이트 어플처럼 만남이 중심이 아니라 '밥 같이 먹이 먹을 사람 모아주는' 앱인데, [내가 쏩니다] 메뉴까지 있으니 누구들은 밥 얻어먹기 좋고, 누구는 그 핑계로 잘난 외모 사람과 밥 같이 먹을 수 있으니. 그게 아니더라도 그냥 혼자 밥 먹기 힘든 분위기의 가게에서 밥 같이 먹을 사람 찾기, 술 친구 필요한 사람 등이 모여먹을 수 있으니 말이다. 사실 나도 몇 번 써봤다. 어째 꼭 고기 안 뒤집는 놈들만 나와서 금방 관뒀지만.

"관자 구이에 소이소스를 입혀 구이한 오리 요리입니다"
"감사합니다"

맛있다. 그래, 사실 이 재미로 살았다. 먹는 재미. 나는 맛있는거 먹는게 좋았다.

"와"

천원 더주고 사이즈 키우면, 1500원만 더 주고 토핑 더 얹으면, 5천원만 더 주고 사이드 하나 시켜먹으면, 만원 더 주고 새로운 맛 추가하면, 2만원만 더 주고 고급메뉴로 고르면, 딱 10만원만 더 주고 고급 레스토랑에 가면 훨씬 더 풍성하고 화려한 맛을 즐길 수 있다. 세상 프리미엄이라는게 대부분 그랬다. 남들보다 아주 조금만 더 투자하면 훨씬 나은 세상이 바로 그 앞에 있었다. 나는 그게 좋았다.

"맛있군"

하지만 이제는 그런 행복은 없을 것이다. 가성비와 저렴함. 오로지 그것만을 추구하는 삶이 될 것이다. 아니 그렇게 해서라도 삶이 지속될 수 있다면 그것조차 어렵겠지.

빈익빈 부익부는 이제 끝을 모르고 벌어졌다. 직장을 잘리고 낙오한 사람들의 구매력은 처참하다. 기업에도 부담이 된다. 소비자가 줄어드니까. 저가 경쟁에도 한계가 있다. 생필품이라면 저가 경쟁으로 살아남을 수 있지만 사치재나 기타 소비재는 그렇지 않다. 아예 서민층은 사지 않으니까. 오히려 성능과 고급스러운 프리미엄으로 경쟁력을 확보한다. 그렇다고 부자만을 상대로 사업할 수는 없으니 나같은 푼푼이 직장인들을 위해 120개월 할부 같은 상품도 나온다.


한편 그나마의 직장도 없는 빈민들은 정말 상황이 어렵다. 한달 최저생활비 30만원. 인스턴트 라면 한 봉지가 3천원 하는 시대에 말이다. 부업이 필요하다. 공공근로 사업. 일당 5만원짜리를 받으러 나간다. 물론 매일 할 수도 없다. 아예 법적으로 최대 3일에 한번만 할 수 있다. 모두가 일하고 싶어하니까.

그래도 부족하니 사람들은 팔 수 있는 모든 것을 판다. 예쁜 글씨, 노래, 자작 게임, 영상 컨텐츠, 노하우, 자랑거리, 아이디어, 재주, 수공예품을. 오프라인에서도 팔고 온라인에서도 판다. 물론 몸도. 아둥바둥 살고, 죽어라 산다. 겨우겨우 그렇게.




"우리나라도 이런거나 좀 들어왔으면 좋겠네"

A.I와 온라인 마켓의 발달, 로봇 시장의 본격화와 그로 인한 일자리의 폭발적 붕괴. 사회적 낙오자가 대거 양산되고 좌절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많은 나라에서 보험과 공공 의료시장이 붕괴되었고, 네덜란드와 스위스에서 최초로 자살에 대한 서비스가 격렬한 논쟁 끝에 허용되었다. 안락사에서 몇 발자국이나 성큼성큼 다가온 '편안한 죽음'에 대한 서비스.

"나라에도 어차피 이득 아니냐고"

더이상 노동생산성이 의미가 없는 세상. 물리적인 것부터 정신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이미 기존에 존재하던 거의 모든 것을 기계가 대신 생산할 수 있는 사회. 인간이 설 자리는 좁았다. 더이상 사람 목숨이 귀한 시대가 아니다. 무능한 국민은 매달 복지비만 까먹는 짐일 뿐이다. 사람 목숨이 귀하다는 공허한 외침도 비루한 삶의 현실 앞에서 비웃음 당했다. 자살방지 인권 운동하던 사람이 사회단체에서 알력으로 잘리고 나와서 생계에 쫒겨 자살한 사건은 사회에 많은 씁쓸함을 안겨주었다.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삶에서 탈출하기 위한 러시가 이어졌고, 스위스와 네덜란드에서는 매년 10만명이 넘는 이들이 안락한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물론 무료로. 정부 지원 사업이다. 암이나 뇌출혈 등 중증질환에 대한 국가 지원시스템도 사라진 시대에 말이다.

"왜 한국만 이런게 없어"

항상 그랬다. 한국은 항상 늦었다. 남들이 다 해보고 '이거 해보니까 영 별로야. 그만해야겠어' 할 때 도입하고, 남들이 '이거 무조건 금지했었는데, 막다보니 부작용도 많고 막을 이유도 없는 것 같네' 싶어서 다 풀어도 혼자 끝까지 금지했다. 그런 나라인만큼 자살지원정책도 그랬다. 미국에서 자살지원기업이 드디어 허용된 시점에서도 한국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니 다들 괴롭게 죽는거지"

이제는 더이상 생산되지 않는 연탄을 구태어 동남아에서 수입해다 피우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고, 알려진 몇몇 '확실하게 죽을 수 있는' 화학용액을 섞어 마시고, 목 매달고 하면서. 그렇게 해서 자살에 성공이라도 하면 다행(?)이지만 실패하도 했다가는 폭탄 같은 병원비에 이제는 일가족 자살의 고민이 시작된다.

어차피 막는다고 막아질 수도 없는 것이고 희망도 없는 사람들에게 뻔한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정부와 관련단체의 쓰레기들. 아마 자신들이 같은 처지에 빠지면 일주일도 안되어서 먼저 목 메달 인간들이 감히 생명의 존엄성을 논한다. 존엄성이라는 단어마저 미워질 정도의 지옥같은 처지에 그들의 삶을 던져놓은 것들이.



약 2주일간의 전국 여행은 즐거웠다. 생각보다는 비용이 덜 들었다. 약 400만원 정도. 정말 즐거웠는데 별로 남는게 없었다. 당연하지만.

"두 달이 아니라 이러다 한달 안에도 죽겠는데"

막상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죽기로 결심하니까 생각보다 재미가 조금 덜했다. 다 담담한 느낌이다. 맛있는 것도 그저 그랬고, 노는 것도 그저 그렇고. 늘어지게 12시간씩 자봐도 그냥 피곤하고.

죽는 방식은 고민해봤는데, 역시 목 메다는게 제일 낫겠다 싶었다. 고통이 적을 것 같고, 실패시에 대한 부담도 그나마 적었다. 뒷처리는, 집주인한테 정말 미안하긴 하지만 나 죽은 3일 뒤에 자동예약 문자 보내놓고 내 장례비-라고 해봐야 그냥 공공화장터에만 보내줘도-와 뒷처리 비용까지 합해서 한 500만원 드리면 어떨까 싶었다. 요즘 그런 뒷처리 업체도 경쟁이 심해져서 200이면 된다던데.

"삼만 오천원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자살할 목줄 사오는데 감사하다며 점원에게 말하는 기분이 묘했다. 튼튼한 등산용 합성 나일론줄을 사왔다. 방 문 위에 목을 박고 걸어놨다. 언제든 결심들면 바로 메달 수 있게.

내 장례식에는 아무도 오지 않겠구나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했다. 누군가에게 나쁜 기억을 남기고 싶지도 않고. 조용히 떠난다고 생각하니 좋았다.

이제는 울음도 나오지 않는다. 그저 조금 헛헛한 웃음만 나올 뿐. 휴대폰에는 전화 한 통, 문자 한 통이 오지 않…이 아니네. 어제 저녁에 은 실장이 보낸 메세지가 있다.

[ 양 과장님, 잘 계시죠? ]





"이제 뭘로 불러야죠?"
"뭘로 부르긴요. 오빠라고 부르면 되죠"
"뭐야, 나간 사이에 그새 아저씨 된 거에요? 양 과장님 갑자기 늙었어"
"늙기는 이미 옛날에 늙었죠. 아저씨가 뭐람 할아버지 소리 들을 나인데"

하루종일 무슨 일을 하던 마음 한 구석에 찜찜하게 남아있는 '자살'에 대한 부담과 삶에 대한 희미한 미련, 걱정. 그 모두가 은 실장을 만나자 조금은 씻겨나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만큼 사람에 대해 외로웠던 것 같다.

"어떻게 지내셨어요?"
"2주간 전국 여행 했어요. 제주도 빼고 다 가본 거 같아요."
"와, 멋있네요. 어땠어요? 나 전국일주 하는게 꿈이었는데"

맨날 일에 치인 채로, 권고사직을 앞두고 숨막히는 걱정과 좌절 속에 초조하게 그녀를 앞에 둔 것과, 지금처럼 다 내려놓고 편안하게 만나는 것은 달랐다. 편안하고 좋았다. 같이 맛있는 것을 먹노라니 정말 좋았다. 나 정말 사람이 그리웠구나. 평생 혼자 살아놓고 말이다.

"다 먹었으면 2차 갈까요?"
"좋아요"

바로 옆의 바로 자리를 옮겼다. 한 잔 두 잔 술이 오가고, 살짝 술이 올라온다 느낄 무렵 나는 솔직하게 다 이야기 했다.

"암담하더라구요. 이대로 몇 달이나 버틸 수 있을까. 알죠? 나 집도 월세인거. 지금 갖고 있는 돈 2천 다 까먹으면 그걸로 끝이죠"
"…"
"떠나기 전에 만날 사람도 없더라구요. 누구 하나 연락할 사람도 없고, 연락하고 싶지도 않고. 그래서 딱 그냥 두 달만 신나게 놀다 죽자 했는데 2주 지나니 그것도 시들하더라구요"
"…"

나는 잠시 나도 모르게 입술을 떨다가 술잔을 내려놓고, 갑자기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나 어제, 등산줄 샀어요. 목 메달려고. 삼만 오천원 주고"
"양 과장님"
"과장님은 무슨! 나 백수인데 무슨 과장이에요"

그러자 은 실장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요, 그럼 호열 오빠. 됐죠? 정신차려요. 죽긴 뭘 죽어요. 진짜 미친 거에요?"

의외로 이런 면도 있었구나.

"그럼 물어볼게요. 나 어떻게 살면 돼요? 열심히, 잘? 정말 몰라서 그래요. 이제 뭐해서 먹고 살아요? 새벽 4시에 공공근로 일자리 나가서 맨날 터덜터덜 돌아오고 뭐 그렇게? 아니면 빅튜브라도 할까요? 나이 먹은 썰 푼다 하면서?"
"살아야하면 그렇게라도 살아야죠"
"…그렇게해서라도, 살 수 있기는 해요?"

나의 울먹이는 질문에 은 실장도 눈물을 보였다. 고마웠다. 그냥 날 위해 울어주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새삼스러운 생각에.

"…미안해요. 실장님한테 뭐라고 하려는 것도 아니고, 부담주려는건 절대 아니었어요. 에이, 그냥. 그냥 정말 맛있는 밥이라도 사주고, 술 한 잔만 얻어마실까 했는데. 미안해요. 내가 원래 주책 바가지 잖아요. 회사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은 실장은 눈물을 닦았다.

"나 사실 양 과장님 되게 멋있다고 생각한거 알아요? 맨날 부대표님한테 싫은 소리 듣고, 회사 옥상에서 혼자 안 좋은 표정으로 있다가도 내려와서는 항상 밝게 웃고 먼저 싹싹하게 사람들한테 대하는거, 저는 그게 진짜 프로라고 생각했어요. 알죠, 다 알잖아요. 살려고 노력하는거. 저 같았어도 몇 번이나 때려치울 싫은 소리, 무시당하는 소리 듣고도 웃으면서 미안합니다 다음에 잘할게요 소리 하는거! 저 그거 정말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생존력 있잖아요. 자존심 피우는거 누구나 하죠. 근데 그거 내려놓는거 어려운 거잖아요. 나한테도… 나한테도 막, 소리 지르고 욕하고 그럴 때도, 살라고 그랬던 거잖아요. 과장님, 아니, 호열 오빠 살고 싶어서 그랬던 거잖아요"

이번에는 내가 할 말이 없었다.

"근데 왜 그래요 왜. 정말 멋있게 살라고, 막 열심히 항상 살려고 했던 사람이 왜 죽을라고 그래요"

무어라 대답하면 좋을까.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고자 했다.

"너무 힘들어서요. 이제는 조금 쉬어도 되겠다 생각했어요. 앞으로는 너무 힘든 일만 있을거 같아서요"

그 말에 또 은 실장이 눈물이 터졌다. 문득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 다행히 손님은 우리 뿐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무슨 이별의 모습처럼 보이리라. 하긴 이별은 이별인지도.

"미안해요, 주접 떨어서. 그냥 그렇다고요"

나는 남은 술을 비웠다.

"아 그리고 오빠라는 말 농담이니까 진짜로 자꾸 오빠 오빠 하지 말아요. 나 얼굴 빨개져요"

그 말에는 다시 은실장도 웃었다.




가끔 안부 전하겠다고, 정말로 이상한 생각 절대로 절대로 하지 말라고, 그러면 진짜 자기가 죄책감 느껴서 자기도 죽을거라고 말하는 은실장의 말에 참 고마웠다. 가끔 같이 저녁에 밥 먹어주고 가끔 영화도 봐줄테니까 혼자 죽지 말라는 말에 부끄럽지만 이 나이에 살짝 설레기도 했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잘나가는 중견기업의 화려한 40대 젊은 임원과 초라한 늙은 백수.

집으로 돌아와 올가미는 내려놓았지만 여전히 미래에 대한 씁쓸한 마음은 가시지를 않는다. 그리고 생각을 정리한다.

차는 팔아야지. 운전연습용으로 내놓으면 얼마는 받을 수 있겠지.
집도 당연히 저렴한 집으로 이사하고.
앞으로 식비는 한달에 10만원 안쪽으로 줄일 수 있도록 하고. 탄수화물 식단으로 가득차겠구나.
준비하던 기획서 내용 정리해서 아이디어샵에 올려보고.

세상에 나의 쓸모를 알리고 싶지만 사실 정말 쓸모 있는 인간인지에 대한 자신이 없다.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16층 이 오피스텔에서 아래를 하염없이 바라보다 뛰어내리고 싶다는 충동과 저어기 달동네 어딘가의 반지하방을 동시에 떠올린다.

'삶이 뭐며, 죽음이 뭐라고'

나약하다, 용기를 내라, 미래를 바라보라 하는 마음 속의 외침과 그냥 편해지자는 읆조림이 뒤섞인다. 나는 그냥 조금 쉬고 싶을 따름이다. 손에 쥔 올가미는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책장 위에 올려놓은 술병들 중에서 짚히는대로 위스키 한 병을 꺼내어 한잔 따라 마신다.

'일단은'

어쨌든 두 달은 살아보기로 했으니까, 한달 반은 버텨보자고 생각했다. 그 이후의 삶에 크게 미련은 갖지 않기로 했다. 주어지면 사는 것이고, 주어지지 않으면 거기서 끝내면 되니까.

그리고 거울을 다시 한번 보았다.

'일단 최선을 다해서 살 길을 찾아라'

살 길에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 물론 길을 찾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때가서 생각하면 될 일이다. 어차피 나는 정통파 인간이 아니다. 남들처럼 사는 인간이 아니란 말이다.

"그래, 양호열이, 정신 차리고 임마"

어차피 죽음이라는 확실한 길을 하나 만들어 놓은 이상, 다른 길을 찾아보는 마음은 편하다.

"은다영"

나는 혼자 어이없는 웃음을 실실 흘린다. 나이 쉰을 바라보는 백수가 생각해 낸 '살 길'이라는게 너무 황당하고 비현실적이며 미친 생각이라서 그저 너무 웃겼다.

동정심
죄책감
미안함
측은함

동료의식

…무엇이든 상관없다. 그녀에게 죄가 있다면 나에게 동정심을 가진 것이 죄라고 해두자. 나는 그녀를 꼬셔보기로 마음 먹었다. 물론 단칼에 거절당하고, '잠깐 불쌍한 마음에 잘해줬더니 혼자 오해하고 버러지 같은 생각을 하더라'라는 소문을 터뜨려도 상관없다. 어차피 이대로라면 난 곧 죽을거니까.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잘 되면 적어도 당분간의 살 길은 생겨나는 것 아닌가. 독하게 말하자면 피차 40대의 연인 없는 싱글. 흐흐. 그냥 또 이 노망난 미친 생각에 웃음이 난다. 그걸 '살 길'이라고 떠올린 내가 너무 웃기고 즐겁다.

"또라이 새끼"

실실 웃으면서 나는 은 실장에게 메세지를 보낸다.

[ 오늘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밥 먹는건... ]

해보자.


- 끝 -

[장편] 수지 3화 [장편] 수지

"네, 5500원입니다. 영수증 드릴까요? 네, 또 오세요"

불금을 맞이한 강남의 저녁은 인산인해 그 자체다. 11번 출구 올라가는데만 5분은 족히 걸리도록 사람이 미어 터지니까. 편의점 손님도 마찬가지다. 베테랑 유나씨가 함께 일하는데도 계산을 하기 위해 계속 줄을 설 정도다. 그 와중에도 튀김을 돌리고 아이스크림을 만들어야 한다. 땀이 비오듯 쏟아진다. 하지만 10시 반을 넘어서면 서서히 조금씩 손님이 줄어간다.

"저 먼저 들어가볼게요"
"네, 들어가세요"

유나씨도 퇴근하고 이제 혼자 일하는 시간. 이미 손님도 아까의 반의 반의 반. 조금은 한가해진 것을 느끼며 나는 진열을 조금 손본다. 그리고는 휴대폰을 한번 더 들여다본다. 유투브 알람을 설정해놓은 몇몇 BJ의 새 영상들이 올라와 있다. 영상을 볼 여유는 없지만, 한쪽 귀에 끼운 에어팟으로 소리는 들을 수 있다.

"후"

가게 안에서 떠들고 있던 10대 손님들마저 나가고, 이제 간신히 한숨 돌리며 카운터 의자에 털썩 앉는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다. 지친다. 시급 천원 더 준다는 말에 이 가게로 옮겼는데 후회가 된다. 너무 빡세다. 아니 그보다 스스로가 좀 한심하게 느껴진다.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에 편의점 알바나 한다는 지금 내 처지가. 같은 영어 스터디에 있던 윤정씨가 얼마 전에 대기업에 입사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어서 그런지도. 괜한 짜증이 솟구친다.

"어서오세요"

그 찰나에 들어온 손님들. 금요일 밤, 한껏 화려하게 꾸민 여자들이다. 번화가 편의점에서 일하는 작은 보람이다.

"아 목마르다"
"혜미 넌 뭐 마실거?"
"난 제로 콜라"
"야, 그냥 콜라를 끊어"
"아 난 제로 콜라가 제일 맛있엉!"

나는 힐끗 그녀들을 바라보다 다시 휴대폰으로 눈길을 돌린다. 편의점 알바를 시작한지 어느새 9개월째. 나는 아직도 은평구에서 강남까지 출퇴근하며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다. 엄마한테는 영어 학원 때문에 겸사겸사 여기서 일한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9개월 전의 그 우연한 만남, '수지'와의 인연 때문에 시작한 알바다. 그냥 우연히라도 또 마주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뭐, 지금에 와서는 포기한 상태로 그냥 정말로 학원 가까워서 일하는 거나 마찬가지지만.

카톡을 열어본다. 반 년도 넘게 지난 그 날, 주말에 같이 영화 보자고 한 이래로 수지의 연락은 똑 끊겼다. 주말에 영화 뭐 보냐는 질문, 내일 바쁘냐는 질문, 그리고 세 통의 전화와 무슨 일 있냐는 카톡 등등 내가 보낸 모든 카톡 메세지는 그렇게 1이 사라지지 않았다.

'또 휴대폰을 잃어버렸던 것일까'

그리고는 어느 날 갑자기 알 수 없음으로 사라져 버린 그녀의 계정과 프로필 이미지. 귀여우면서도 도발적인 눈빛을 가졌던 수지. 그녀는 그렇게 신기루처럼 사라졌고, 난 짧게 꾸었던 단꿈에서 그렇게 깨어났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나는 여전히 그녀가 살고 있는 강남 근처의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술에 꼻은 그녀를 데려다 주러 갔던, 수지네 집 앞까지도 몇 번이나 가서 기다려봤다. 다섯 번? 여섯 번? 열 번? 그러나 참 뭐가 타이밍이 그리도 안 맞았는지 그때마다 수지는 집에 없었다. 그리고 사실 두려웠다. 만약 마주치더라도, 내가 무슨 명목으로 그녀 앞에 나타날까. 잘해봐야 눈치없는 놈, 보통은 스토커일텐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후로는 한번도 집 근처로 찾아간 적이 없다.

"수지, 넌?"
"난 지그램"

그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지?'

딱 보면 알 것 같았지만 그럴 리 없다. 비슷한 느낌이긴 한데 솔직히 긴가민가하다. 이미 반 년도 한참 더 된 일이다. 사람 얼굴 기억을 잘 못 하는 나는 '쟤인가?' 싶으면서도 확신은 없다. 가슴이 두근두근 뛴다. 아니 쟤가 맞다 하더라도 내가 뭘 어쩐단 말인가.

"장미나, 아 빨리 골라!"

짜증을 내는 단발머리의 그녀. 목소리 톤에서 조금 더 확신이 들지만 정말 맞을까. 셋은 시끌시끌 떠들더니 곧 카운터로 음료 하나씩을 들고 다가왔다.

"계산해주세요"
"네"

카드를 내미는 단발머리. 원래대로라면 앞에 그냥 꽂으면 된다고 안내하겠지만 굳이 카드를 받아서 슬쩍 이름부터 확인한다. 편의점 형광등 불빛에 힐끔 비친 영문자 JUNG. 그래 맞어. 정수지였지. 맞는 것 같다. 손이 떨린다. 미친 놈, 하고 속으로 스스로에게 욕을 하며 바코드기로 음료들을 찍고 다시 한번 슬쩍 그녀가 내 얼굴을 알아봐주길 기대한다.

"6300원입니다"

그러나 수지는 휴대폰에 눈길이 가 있다. 오히려 그녀 옆의 친구들이 내 굼뜬 동작에 짜증을 내는 느낌. 나는 마음 속 깊이 한숨을 내쉬며 결제를 진행하고, 영수증이 필요한지를 묻는다. 휴대폰에 눈을 고정한 채로 고개만 흔드는 수지.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조금 떨리는 내 목소리. 병신 같다.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근 반 년을 그리워 한 사람이 눈 앞에 있는데, 나는 입을 열지 못한다. 왜? 아니 알아보면 또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렇게 그녀들이 가게를 떠난다. 아니 그 직전.

"저, 혹시 정수지?"

그리고 내 질문에 셋이 일제히 나를 돌아다본다. 둘은 '너가 뭔데? 얘 이름을 알아?' 하는 황당한 표정, 하나는 놀람과 반가움이 뒤섞인 표정.

"어?!"

…를 상상해보지만 그저 나는 입도 뻥긋 못한 채 그녀들을 그렇게 떠나보낸다. 문이 닫히며 딸랑~ 하는 소리가 망상 속에서 나를 깨운다.








수지 







"수지 넌 어때?"

혜미의 질문에 난 혀를 찬다.

"재미없어. 알잖아, 우리 과 애들 싹 다 병신들인거"
"어? 수지 너 복학했어? 왜?"
"아빠 땜에. 유학가던지 복학하던지 둘 안 하면 호적에서 파버리겠다잖아"
"차라리 유학 오지"
"아 싫어 그것도. 나 예전에 유학 준비하다가 완전 고생한거 몰라?"
"아 맞어. 그랬지 참"

한국에 간만에 돌아온 미나의 생일 때문에 모처럼 강남역에서 만난 우리 셋. 1차로 장원닭갈비, 2차로 YA라운지, 3차로 커피비니에서 배를 가득가득 채운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근황을 업데이트 한다.

"너 그럼 아직도 여기서 자취해?"
"어, 집세는 내는데, 거의 요즘에는 아빠집에서 자. 옆집에 왠 미친 아저씨가 이사왔는데 맨날 밤에 막 쌍욕을 하고 소리를 질러. 무서워 죽겠어. 집주인한테 말해도, 집주인이 건물에 같이 사는 것도 아니고 관리인 아저씨는 경비실에서 10시면 자기 바빠."
"뭐야 그게"
"여튼 그래서 걍 아빠집에서 잘 때가 많아. 주중에는 학교 다니고 주말에는 아빠 갤러리 출근하고"

문득 미나가 묻는다.

"너 아직 재혁 오빠 만나?"

그 말에 혜미가 풋하고 웃는다. 아 짜증나.

"그 새끼랑 끝난게 언젠데. 그 바람둥이 새끼"

그러자 혜미가 부연한다.

"근데 너가 그때 좀 그렇긴 했어. 오빠랑 헤어지면서 그 뭐야, 이상한 찌질이 사진 인스타랑 카톡 프로필에 올리고 막 그때 우리 실시간으로 막 난리났잖아"
"찌질이?"
"뭐랬지? 후보선수? 아아, 선수교체! 막 선수교체라고 태그 쓰면서 남자 사진 올려서 막 우리 난리났잖아. 재혁 오빠에서 실시간으로 갈아탄거냐고. 수지 너 완전 멋있다고"
"뭐래"

미나는 그 이야기에 귀를 쫑긋하며 "뭐야, 나만 모르는 대박사건? 나 업데이트 하나도 안 됐어. 빨리빨리 털어" 하면서 보챈다. 혜미는 이야기를 야무지게 정리한다.

"재혁 오빠가, 수지 두고 또 바람 피웠는데 이번에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어"
"뭐? 둘? 세 다리 걸친거야?"
"아니, 쓰리썸"
"헐 대에박!"

미나의 경악에 "조용해 미친 년아" 하고 혜미가 뻥 터지며 입을 막는다. 나도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진다.

"첨엔 그렇게 수지가 차였거든? 맞지?"
"아니거든?"
"미친 너 차인거 맞잖아. 여튼, 근데 그 다음 날에 수지 얘가 다른 남자를 바로 꼬셔서 인스타에 '선수교체' 라면서 딱 사진 업댓한거야"
"오 뭐야 수지 너 대박 멋있다!"

미나는 연신 내 팔뚝을 내려친다.

"그래서 재혁 오빠 완전 빡쳐서 다음 날 수지한테 와서, 그 재혁 오빠가 막 그 남자 뭐냐고 난리난리 피우고 얘 폰 까보라고 그러고 완전 상난리 피웠어."
"정말? 재혁 오빠가? 그 쿨맨이?"
"어. 그날 수지랑 막 싸우다가 수지 휴대폰 막 던지고 난리 났었대"
"뭐야, 재혁 오빠 완전 찌질이네. 세상 쿨내는 혼자 다 풍기고 다니더니. 그럼 그 새 남자는? 지금도 만나?"
"아니. 그냥 그걸로 끝이지."

…그러고보니 그 남자 이름이 뭐였더라.

"근데 그럼 그 남자는 누구였어? 그 새 남자는?"

미나의 질문에 나는 대답이 궁해졌다. 그렇다고 진짜 아무나 만나서 대충 장난 좀 친거라는 말을 하자니 내가 쓰레기가 되는 느낌이었다.

"아는 오빠 있어. 아무한테나 돈 막 퍼주는 남자"

처음 만난 날, 아무 꺼리낌 없이 나한테 택시비로 없는 돈 2만원을 아낌없이 퍼준 남자. 맞긴 맞잖아. 혜미는 내 말에 크게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돈 잘 쓰는 남자가 최고지"

미나는 "야, 너네 진짜 더러워" 하며 빵 터진다.

"이제 슬슬 일어나자"




"조심해서 가"
"어, 우리 쑤, 또 봐"
"응"

카페를 나와 둘을 먼저 택시 태워 보내고 나도 아빠 집으로 가려고 세 번째 택시를 잡으려던 찰나, 뭔가 아까부터 아랫배가 살살 아프더라니 설마설마하던 중에 생리가 터졌다. 아차 싶었다.

'아…'

마침 가방도 바꾼 차에 비상용도 안 챙겨왔는데.

"아…"

어쩔 수 없이 그냥 강남집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에 생리대가 남아있던가? 이미 강남집에 안 들어간지 거의 몇 달 째라 확신이 없다. 어쩔 수 없이 아까 들린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찐따 같이 생긴 알바생이 날 보자마자 당황스러워 한다. 뭐야. 짜증나게. 설마 뭐 나 좀 상태 이상한가? 싶어서 서둘러 진열대 너머로 몸을 숨긴다. 아니, 나 오늘 블랙진이라서 뭐 티가 날 것도 없다. 일단 안도의 한숨을 쉬며 생리대를 집는다. 피곤하다. 계산을 위해 생리대를 올려놓고 지갑을 꺼낸다.

"저기요"

알바생이 말을 건다. 뭔데.

"혹시 수지…씨?"

어?

"나 알아요?"

카운터의 알바생 얼굴을 그제서야 똑바로 본다. 그리고 어디선가 본 느낌을 받는다. 누구더라. 분명히 본 얼굴인데.

"나에요, 호민이. 고호민. 그, 나 옷 사줬잖아요"

아, 그 찌질이. 아니, '돈 잘 쓰는 남자'.





생각보다 시큰둥한 표정의 수지. 하긴, 그게 정상이지 싶긴 한데.

"아, 잘 지냈어요?"

꽤나 건조한 말투의 그녀. 나는 단박에 아까의 용기가 사그라듬을 느끼며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그냥 뭐. 수지씨도 잘 지냈어요?"
"그냥 그랬어요"

어색함 그 자체. 나는 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그녀가 집어든 물건을 바코드로 찍는다. 아니 그보다, 이거 생리대네. 아, 괜히 말 오래하면 안되겠구나 싶었다.

"카드주세요. 얼른 결제해드릴게요"

그리고 그 말에 수지가 피식 웃었다.

"맞어, 이런 남자였어"
"어?"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마치고 꼼꼼히 화장을 지운 뒤, 혜미한테 연락했다.

"나 좀 전에 그 오빠 만났어"
"누구?"
"찌질이"
"찌질이? 재혁 오빠?"
"아니이! 그, 선수교체남"
"어? 진짜? 뭐야, 우리 보내고 따로 만난거야?"
"아니 그런건 아니구, 우연히 만났어"

혜미도 요즘 남자 안 만나지 좀 오래되서 남자 이야기만 나오면 귀가 쫑긋한다.

"그래서? 지금 너네 집에 같이 있는거야? 대박! 꺄!"
"무슨 소리야, 그냥 잠깐 길에서 봤어. 진짜 우연히"
"아! 좀만 늦게 올걸. 궁금하다. 맞어, 그 사람 뭐하는 사람이야?"

그러나 편의점 알바생이라고 말하기는 좀 그랬다.

"그냥 쉬면서 집안 일 돕는다나 봐"
"딱 너랑 같은 과네. 그 오빠는 연애 안 한대?"
"어, 아마도?"
"뭐야 왜 단정을 못 해. 그거부터 물어봐야지"
"됐어"
"여튼, 뭐야 우리 쑤지 그럼 간만에 다시 연애질 하는거? 막 운명의 스트릿 로맨스?"
"됐거든요?"
"야, 너 지금 딱 걸렸어. 우리 딱 보내자마자 남자 만나고, 어? 그 남자 만나고 나한테 바로 자랑하고. 너 완전 이거 딱 너 연애 시작할 때 느낌인데?"

아니, 죽어도 그럴 일은 없다. 하지만 굳이 그럴 말로 꺼낼 이유도 없다.

"됐거든? 여튼, 집에 잘 들어간거지?"
"어어 나 이제 씻고 잘래. 안농"
"응"

전화를 끊고, 아까 호민과의 대화를 떠올려 본다. 눈치도 둔한 주제에 묘하게 쓸데없는 곳에서 친절하다. "20원은 안 받을게요" 라며 검은 봉투에 담아주는 것도 그냥 웃기다. 뒤늦게 요즘 정말 잘 지냈냐는 말에 또 신나서 장황하게 말을 하려길래 말을 끊고 번호만 받았다.

[ 찌질이 ] 로 저장을 하려다가 그냥 [ 호민 오빠 ] 로 저장했다. 찌질이로 저장하면 진짜로 이름 까먹을 거 같아서. 사실 성은 이미 까먹었다. 뭐였더라.

"사실 그 뒤에 일이 조금 있어서, 연락을 못 했어요. 미안해요" 라는 나의 사과에 "아니요, 괜찮아요. 그냥 저는 그, 옷이 너무 고마워서 뭐라도 답례를 하고 싶었는데 그게 안되서 제가 미안했어요" 라며 또 정색하는 그.

"후우"

그냥 요즘 맨날 학교-아빠집-학교-아빠집-갤러리의 뻔한 일상만 보내던 도중 만난 우연한 인연.

"근데 그럼 아까 나 본 거 아니에요? 그때는 왜 인사 안 했어요?"
"그냥, 좀 말걸기가 그래서요.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흔하디 흔한 찌질남. 그러나 처음부터 지금까지 묘하게 이 남자에게서는 정을 느낀다. 확실히. 뭐지. 그리고 그 바보 같은 순진함에 또 왠지 장난을 치고 싶어진다.

'아'

학교 애들한테 보여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1학년 1학기, 기대 속에 시작한 대학 생활은 시작부터 꼬였다. 첫 MT에서 술기운에 얼떨결에 분위기 맞춘다며 승락하고만 한 머저리의 고백. 술자리에서의 작은 이벤트라고 생각했던 그 헤프닝을, 머저리는 물론이요 과 전체가 진지하게 받아들인 상황.

그 와중에 이어진 몇 차례의 짧은 만남, 그리고 머저리에 의해 황당하게 폭로된 사생활. 어느새 과에서는 '걸레', '오다리' 같은 별명과 눈총이 이어졌다. 그래서 결국 휴학을 하고 떠난 도피성 유학. 물론 그것도 일이 꼬여서 처절하게 실패했지만.

그리고 1년 반만의 복학이다. 죽기보다 싫은 복학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문득 지금 누군가 내 곁에서 나를 무조건적으로 믿어주고 이해해 줄 사람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생 때의 첫 사랑 준영을 떠올리는 내가 잠시 싫어졌다.

'또 그런 과에 끌리는거야? 또 찌질이냐고'

카톡 프로필의 이 어이없이 싱글벙글 웃고 있는 사진부터 그냥 웃겼다. 그게 꼭 싫다는건 아니지만.




보통 같으면 야간 알바가 끝나면 파김치가 되어 3호선 전철 안에서 꾸벅꾸벅 졸며 가겠지만 오늘의 나는 쌩쌩하다. 왜냐하면 강남 편의점에서의 '존버'가 대성공한 셈이었으니까. 결국 수지를 만났으니까, 그리고 다시 번호까지 얻었으니까. 기적이었다.

"기적이야 기적"

눈을 지그시 감으며 전철 시트에 몸을 깊숙히 기댄다. 물론 잘 안다. 그렇다고 내가 뭐 걔랑 어떻게 진지하게 잘 되길 기대하는 것은 김치국 마시는 것을 넘어서 아예 배추농사부터 미리 하는 짓에 가깝다는 것을.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정말 좋았다. 괜히.

< 계속 >


[공지] '생각보다 짧은 시간, 새 표지' 판매 시작 책판매

안녕하세요, 스타일박스입니다.

지난 2011년, 그동안 써왔던 글 중에서 마음에 들었던 내용 일부를 담아 출판했던 '생각보다 짧은 시간'은 제 개인적인 큰 기대와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의 응원에도 불구하고 아쉽게 많은 재고를 남긴 바 있습니다. 

그게 조금 속상하기도 했고, 부끄럽기도 해서 이후에도 구매를 문의해주시는 분들께 알음알음 한두권씩 판매는 해왔지만 마침 책의 코팅 겉표지가 모두 소진되고 난 이후에는 한동안 판매를 중단했습니다.

이후에도 정말로 많은 분들이 구매를 문의주셨지만, 새 표지를 추가로 찍는 것도 번거로운 일이고 다시 판매를 하는 것도 민망한 일이다 싶어서 그대로 제 안의 흑역사로 덮어두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진짜로 요즘도 구매 문의가 들어온다고.


그러다 요 얼마 전, 인터넷조차 안되는 먼 아프리카 대륙 오지로 한달 가까이 떠나시는 분이, 그 심심함을 달래고 싶다며 '생각보다 짧은 시간'의 구매를 요청해오셨습니다. 그 메일을 받았을 때의 느낌은 마치 "무인도에 떠날 때 뭘 들고갈래?" 할 때 제 책을 들고 가겠다는 답변을 들은 느낌이라 큰 감동이었습니다. 그래서 겉표지도 없는 책을 아쉬운대로 곧바로 보내드렸습니다. (물론 그 분은 존나 후회하겠지. 하고 많은 책 중에 하필 똥글 책을 골라가다니…ㄲㄲㄲ)

그리고 그에 탄력을 받아 곧바로 새 표지를 제작하였습니다. 

< 생각보다 짧은 시간, 2019 '인연' 에디션 >입니다. 타이틀 위에는 출간 이후 지난 8년간의 소회를 담은 소제목을 간단하게 사족으로 붙였고, 책 날개에는 개인적인 감회도 덧붙였습니다. 

물론 책 표지만 바꿔 씌운 것으로, 책의 내부는 당연히 기존과 완벽하게 똑같습니다. 부관참시 에디션, 예토전생 에디션, 반찬재활용 에디션이라고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입니다. 겉표지만 새로 씌운 책이니까요.

하지만 혹시라도 기존에 꼭 구매를 하고 싶었는데 기회가 닿지 않아 구매하지 못하셨던 분이나 누군가의 흑역사를 소장하고 싶으신 분, 돈이 썩어 넘치는 분, 호구인증을 하고 싶으신 분이 계시다면 어쩌면 진짜 마지막이 될 수도 있을 이번 기회를 잡아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부디 부탁 드립니다. 저도 이제 방 안을 가득 채운 책박스 더미를 치우고 사람답게 다리 뻗고 자고 싶습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싸인본을 원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책의 안쪽에 싸인을 남겨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원하시는 분은 주문시 함께 말씀해주세요. 참고로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스타일박스 싸인은 좀 거시기합니다. 

아울러 책은 7월 한달간 본 블로그에서 선 주문을 받은 후 7월 말 일괄배송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문은 아래의 박스 내용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 책을 구매하고 싶으신 분은-
1. (배송료 없음) 권당 10,000원을 입금계좌 : 국민은행 580901-01-187313 고용환 앞으로 입금해주시면 됩니다. 
2. 위 계좌로 입금하신 후 [ 받으실 주소(우편번호 첨부 권장)와 받으실 분 성함, 연락처, 기타 남기실 말(싸인본 요청 등)]을 비밀 댓글로 달아주시면 됩니다. 배송은 (아마도) 우체국 택배로 해드립니다. 

* 2권 구매시 2만원, 3권 구매시 3만원입니다. 해외배송(단, 배송비 발생)도 가능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잘 부탁 드립니다. 



- 책 속에서 - 
빛 바랜 쥐색 정장 안으로 땀이 줄줄 흐르는 가운데 동준은 끄트머리가 군데군데 해진 소매로 연방 이마의 땀을 훔친다. 제가 그리 더울진대 몸이 골골한 마누라는 또 얼마나 더울런지. 

"다 왔어. 저 있잖아"

손가락으로 가리킨 저 편에 떡하니 오 병원이 있다. 

"어휴…"

마누라는 또 현기증이 오는지 잠시 쉬어가자는 듯 동준의 팔을 그 가는 손목으로 잡아 끈다. 

"허, 다 왔구만…"

차라리 시원하니 병원에 가서 쉬는게 낫지 싶건만 한 걸음 한 걸음이 힘든 모양이다. 속이 탄다. 담배라도 한 대 태웠으면 좋겠건만 주머니에 딸랑 빌려온 돈 10만원은 당최 병원비로도 부족하지 싶으니 담배 따위로 하릴 없이 태울 돈이야 있을 리 없다. 

"가자, 쉬어도 병원에서 쉬는게 나아"

가로수 밑에 서있어봐야 바람 한 점 없는 숨막히는 여름 땡볕 아래 비척비척 땀이나 치솟지 얼른 들어가자고 재촉하니 그제서야 "알았어요" 하면서 마누라는 동준의 손을 잡고 그 힘없는 걸음을 내딛는다. 

'지미 덥기는 오라지게 덥네'

그냥 반팔 입고 올 거를 괜히 그래도 병원 같은 데서 얕보이면 바가지 쓰지 싶어서 딱 한벌 있는 낡은 정장을 입고 왔더니 땀에 목욕을 할 지경이다. 안되겠다 싶어서 마이를 벗어 손에 들고 가는데 그제사 시원한 바람이 한 줄기 불어오니 한숨 돌린다. 

(후략)

- 본문 중에서. 96p < 생각보다 짧은 시간. 땡볕 2011 >

"너 그 남자랑 잤어?"

새삼스러운 질문에 다들 눈을 흘겼지만 그래도 직접 본인의 말로 듣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

"하, 그건 당연한거 아니니?  하 정말이지… 그 남자 서른 하나야. 몸도 운동 많이 해서 군살 하나 없고 탄탄해. 배에 왕자도 있어. 우리 남편 뱃살, 완전 나 임신 막달 찼을 때도 그 정도는 아니었어. 그런 남편 배 보다가 그런 남자랑 자려니까 글쎄… 어머어머 어쩌면 그리도… 정말 너무너무 최고야 
진짜"

마치 꿈이라도 꾸는 듯한 그녀의 표정과 제스쳐에 이번엔 진희의 얼굴에 이채가 돈다. 

"그렇게 잘해?"

(후략)

- 본문 중에서. 51p < 생각보다 짧은 시간. "나 요즘에 애인 사귀잖아" >


혐식주의자 망상

"여러분이 드시는 것은 '폭력'입니다"

그들의 주장에 절반은 코웃음을 쳤고, 절반은 화를 냈으며, 그 어느 쪽에도 포함되지 않은 극소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채식주의자 식당에 들어가 식물을 먹지 말자면서 소리를 지르고 촬영을 막는 자들에게 "신체접촉 하지 마세요, 카메라 건드리지 마세요" 하며 경고하는 모습은 온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풀떼기만 쳐먹자더니, 한 수십 년 전에 지들 선배들이 한 일 고대로 돌려받네. 꼴 좋다"

극히 일부의 잡식주의자 노인들은 그런 식으로 낄낄대며 통쾌해했지만, 그들의 조롱은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이미 육식은 세상에서 사라진 식성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혐식주의자





2010년대 후반부터 유럽을 시작으로 곧 전 세계에 들불처럼 번진 레디컬 채식주의 운동. 사육 과정에서의 동물학대와 도축에 대한 동물생존권을 기치로 하여 시작된 소수 주장이었지만 생각보다 오래지 않아 그 주장은 힘을 받기 시작했다.

"채식주의는 돈이 됩니다"

인종 및 성별, 동성애 등, 기존의 소셜운동권 세력이 선점한 프레임이 공고해지고 주류의 위치에 올라와 더이상의 신선함을 찾기 어려워짐에 따라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 헤메이던 세계의 운동권 단체들이 찾아낸 키워드는 '채식'이었다.

'기존 사회에 충격을 줄 수 있을 정도의 센세이셔널함, 왠지 모를 진보적 이미지, 소수자 위치이기는 하나 적당히 힘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는 깔려있는 저변, 동물생존권 및 동물학대 등 적당히 그럴싸한 명분, 대기업이나 부자들에 대한 저항자적 포지션, 기존 소셜 운동권 세력과의 연대가 가능한 정치적 호환성' 등, 완벽하게 그들이 추구하던 키워드 그 자체였다.

"정말 왜 이런 키워드를 이제까지 놀려두고 있었는지 모르겠다니까, 퍼펙트해"

게다가 타이밍도 좋았다. 지지세력을 얻기 위한 세계적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윤리가 아닌 경제적 이유에서.

"우리도 고기를 먹게 해달라"

전세계 인류가 90억을 돌파한 것은 물론, 중국 및 인도 등 전통적 인구대국의 경제력이 상승함에 따라 세계의 육류 소비량 역시 엄청난 속도로 늘어났다. 그러나 한 마리의 소를 키우는데 들어가는 직접적, 사회적 비용은 결코 작지 아니한 것이었고, 그 많은 수요는 공급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수준이었다. 서서히 오르기 시작한 세계 육류시장의 물가 머지않아 폭발적인 수준으로 상승했고 어느새 서민들은 소, 돼지는 물론이요 닭조차 좀처럼 먹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부자만을 위한 고기, 꺼져라!"

식량공급의 위기가 도래하자 정치인들은 부단한 수를 썼지만, 애시당초 수요공급의 문제를 정치가 해결할 수는 없는 법. 수많은 부작용만을 발생시킨 채 결국 그들은 채식주의 운동을 해결사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소 한 마리를 키우기 위해 소비되는 물자가 얼마인지 아십니까?"
"우리 꿀꿀이, 꽥꽥이, 음메음메를 지켜주세요"
"여러분이 먹는 것은 폭력입니다!"

일부 소수자들의 사상, 소셜 소수자들의 레디컬 운동이던 채식주의가 어느새 사회적 교양운동이 되고 세력화가 되었으며 곧 정부의 정책이 되었다. 그런 급격한 변화에 기존 육류 소비자들은 당황하며 반박을 시도했지만 '기득권', '변화를 거부하는 꼴통'으로의 프레임이 씌워졌다.

"캬, 뜨신 흰 쌀밥에 말이야 고깃기름 자글자글 흐르는 구운 스팸 이렇게 딱 얹어서 계란후라이랑 뜨악 캬~"
"저기요, 죄송한데 채식주의자 앞에서 그런 말 하시는거 식희롱인거 아시나요?"
"뭐? 아니 무슨, 이건 그냥 내 취향이고 내 개인적인 취향인데"
"그걸 입 밖으로 내는게 문제라구요"
"아니 무슨 미친"
"미친건 그쪽이구요"

사회적인 오랜 통념을 깨는 것에는 분명히 많은 저항이 있었다. 그러나 그 주장에는 생각보다 적지 않은 힘이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유난히 까탈스러운 사람들의 정신나간 헛지랄"이었고, 누군가에게는 "그동안 인지하지도 못했던 스스로에 대한 반성이 필요한 끔찍한 사회적 폭력"이었다.



"물론 일부 사육장 환경이 매우 열악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네, 인정하셨고요. 소나 돼지의 축사 때문에 오염되는 환경비용이 얼마인지는 아십니까?"

'아니 상식적으로…'하는 식의 일반론을 들고 어설프게 비거니즘에 저항한 이들은 곧 처참한 패배와 손가락질을 마주해야 했다. '불편의 시선'으로 보노라면 이미 그동안의 육식이 저지른 죄악(?) 자체가 결코 적지 않았으니까. A.I에 대한 로봇인권이 서서히 거론되는 시기에 동물들의 목숨은 분명히 쉽게 묵과하기 어려운 가치였다. 게다가 백년 전의 인종 이슈까지 예시에 섞여들자 더이상 육식은 공적인 자리에서 대놓고 말하기 어려운 위치에 이르렀다.

"시청자 여러분, 지금으로부터 약 백여년 전 우리의 선조들은 아프리칸 어메리칸들을 돈을 주고 사고 팔았으며 그들의 목숨값을 자산가치로 매겼습니다. 우리와 같은 존재로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소비하고 소모해야 할 자원으로만 따졌을 뿐입니다. 우리와 똑같이 심장이 뛰고, 생각을 하며,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들을 말입니다. 우리는 그런 선조들의 사상을 잘못된 것으로 가르치고 반성해왔습니다. 자 이제 우리를 돌아봅시다. 지금 우리는 동물들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이상입니다"

몇몇 진보적 성향의 정당과 단체들이 비거니즘을 주요한 가치로 내세웠고 이후 오랜 싸움 끝에 드디어 꽤 큰 목소리로 받아들여 지게 되었다. 곧 여야를 막론한 주요 정치인들, 사회적 명망 있는 이들이 비거니즘 지원을 주장하고 그들을 위한 사회적 배려와 지원이 이어졌다. 청소년 급식이나 군대 메뉴에서도 채식이 주류가 되었다.

"한정된 자원 안에서, 잡식 메뉴와 채식 메뉴를 따로 준비하기가 쉽지 않아요. 비용적으로도 그렇고 시간적으로도 그렇고. 결국 그럼 못 먹는 사람이 있는 메뉴를 버리는게 현실적이죠. 우리 학교도 채식주의 식단만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일부 지식인들과 여전히 육류를 원하는 이들은 '채식의 위험성'과 '육류 선택의 자유'를 주장하며 싸웠지만 이미 대세는 넘어간지 오래였다. 애시당초 환경오염과 가격폭등을 이유로 선진국 및 중진국 서민들의 육류 소비가 2000년대의 1/10 수준으로 줄어든 상황에서 더이상 육류에 대한 옹호를 주장하는 목소리는 많지 않았다.

소비의 경험이 사라지자 입맛 역시 변했고, 정책 및 사상, 교육이 가미된 사회적 입맛의 변화는 선진국을 중심으로 중진국, 후진국으로 이어져 결국 전체 수요의 감소로 이어졌다. 취향의 변화는 단기적 수요 감소 그 이상의 힘을 갖고 있었다. 결국 사람들은 서서히 육류 소비를 줄이다 못해 터부시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또 수십 년이 흘렀다.




"아니 그럼 채식을 안 하면 뭘 먹고 살라는건데?"

채식주의자들의 분노에 대해 혐식주의자들은 "인공합성 사료"를 대안으로 내밀었다. 식물의 희생이 없는, 순수 인공단백질과 무기질 합성체로 제조된 '인간 사료'는 이미 소수자들의 훌륭한 대안이었다.

"이 다큐멘터리를 보아주세요. 우리가 식물의 잎사귀나 줄기를 꺾을 때 식물에서는 강력한 경계 호로몬이 발산되고 분명한 전기적 신호와 충격이 줄기와 뿌리, 잎파리까지 전달됩니다. 그리고 제발 < 잎, 줄기, 뿌리 그리고 삶 > 이 책을 보아주세요!"

혐식주의자들이 채식주의 식당에 함부러 쳐들어가 소리를 지르고 시위 영상을 온라인에 올리는 이들을 향해 네티즌들은 많은 분노와 코웃음을 표풀했다.

[ 저거 주장한 사람 트윗스타북에 들어가보니까 한 3개월 전 쯤에 '아 당근쥬스 너무 맛있다' 써놓은 내용있던데? ]
[ 맛없는 합성사료는 지들이나 쳐먹으라고 해. 아 고사리 살살 녹는다 ]
[ 응 오늘 밤은 새싹무침비빔밥, 어린 새싹 개꿀맛 완전 조타 ]
[ 저거 영업방해 아님? ]
[ 거대 팜과 플랜트에서는 하지도 못하면서, 꼭 저런 영세한 식당 들어가서 저 난리더라 ]
[ 님? 님님? 님들 작년에 비빔밥 스까묵은 사진 개털림요ㅋㅋㅋㅋ 얼른 사진 내려요ㅋㅋㅋ ]

혐식주의자들의 주장을 사람들은 그저 황당하다는 듯 조롱과 비아냥으로 흘러 넘겼지만, 그들은 진지했다.

[ 역사상 단 한번도 조롱이 진실된 주장을 이긴 적은 없습니다. 우리는 식물생존권을 주장합니다 ]
[ 제가 그때 먹은 당근쥬스는 당근 원액주스가 아니라 '당근향 쥬스'였고, 비빔밥이 아니라 비빔맛밥입니다. 물론 그것도 이제는 먹지 않고 있구요 ]
[ 제발 제 작은 티끌이 아니라, 제가 말하는 목소리에 집중해주세요. 식물도 우리의 친구입니다 ]

물론 그들의 '진지함'은 '순진함'과는 또 별개였지만.

"아니 정부에서 비거니즘에 40조를 지원하면 뭐하냐고. 그거 다 지들 카르텔에만 지원되는데. 그리고 다들 지들끼리 인맥이잖아. 새로운 먹거리 찾아야지"
"근데 나 정말 앞으로 채식 안 하고 살 수 있을까? 월급날에 쟁반 샐러드 안 먹고 어떻게 버팀? 해초무침은? 아 진짜"
"야, 요즘에 초무침 맛 합성사료 나온거 몰라? 과일맛도 종류별로 다 있어. 걍 뿌려 먹어"
"아 그래? 좋아 그럼"
"원영이 선배, 지금 행복당에 있잖아. 연락해볼까?"
"이건 기회야. 우리가 선점해야 된다고"
"오케이!"
"더이상 언니들이 허용한 혐식주의는 없어. 이제 우리들의 시대야"
"응!"

…그들의 운동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 끝 -

맹목에 대한 이야기 망상

1. 두발자유화

중학교 시절, 남학교였던 우리 학교는 학생들의 머리길이 규정에 대해 꽤나 엄격했다.

종종 아침 등교시간에 난데없이 진행되는 두발단속. 교문 앞에 서있던 학생주임과 담당 교사는 등교하는 학생들을 죽 살펴보다가 '학교에서 규정한 길이 이상의 앞머리, 옆머리를 한 학생을 발견하면' 그를 불러 그 자리에서 바리깡으로 앞머리부터 정수리를 지나 뒷머리까지 그대로 죽 밀어버렸다. 그들은 그것을 '고속도로를 낸다'고 부르며 웃곤 했다.

머리카락을 죽 밀려버린 학생은 당연히 하루종일 친구들과 다른 교사에게 웃음거리가 되고, 다음 날 스포츠 스타일을 넘어 사실상 반삭발 상태로 머리를 밀고 와야한다. 단속하는 교사에 따라, 단속당한 학생의 평소 이미지에 따라 다소간의 '깊이 차이'는 다를 수 있으나 어쨌거나 일단 '고속도로'를 당하면 그렇게 몇 달을 인내의 시간으로 보내야 한다. 특히 졸업앨범에 멋진 사진을 남기고 싶다며 서너달 전부터 머리길이를 길게 관리하던 내 친구 동철이는 몇 차례의 경고를 끝에 결국 '본보기'로 그렇게 머리를 박박 밀렸다. 그는 반삭발로 졸업앨범을 찍게 되었다. (여담으로 녀석은 졸업앨범을 받은 그 자리에서 찢어버렸다)

애시당초 '두발길이 단속을 통해 학생들을 그 본연의 본분에 맞는 행실로 계도한다'라는 두발단속의 목적과 방식도 그 실효성에 큰 의문이지만 설령 그걸 인정하더라도 두발단속에 그토록이나 강한 억지력을 동원해야 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또 그 놈의 '계도'와 '반 강제로 머리를 밀어야 했던 학생의 감수성' 중 과연 어떤 것이 더 중요한 것일까.

그리고 '평소에 꽤나 착실하게 학교생활을 하던 녀석이 주말에 미용실을 가지 못한 죄로 머리가 죽 밀리고는 이후로 꽤나 교사들에게 삐딱한 시선을 갖게 된 케이스'처럼 두발단속의 원래 목적과 결과가 완벽히 주객전도 된 케이스에 이르러서는 어떠한 결론을 내면 좋을까.

하지만 여기에서 내가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두발단속'에 참여한 교사들의 입장이다. 학생들의 머리를 그렇게 죽 밀어버리며 그들은 속으로 어떤 생각을 했을까.

1. 비록 내가 이 학생에게 욕을 먹을 지언정, 이 아이를 옳은 길로 이끌기 위해 나는 녀석의 머리를 박박 밀어버린다.
2. 요놈 봐라 요놈, 내 그러니까 전부터 머리카락 규정대로 잘 자르고 다니라고 했지? 낄낄낄 요 놈아 시원하냐?
3. 뒷머리가 규정보다 0.5cm 기네? 그러니 고속도로 내야겠네

…등등등, 과연 그들은 어떤 생각으로 바리캉을 들고 사춘기 소년들의 머리카락에 접근했던 것일까. 그리고 만약 그 중에 3번에 가까운 이가 있다면, 그는 '두발단속의 목적과 실효성, 그리고 그 부작용'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고민을 했으며 어떤 논리로 바리깡을 쥔 손에 힘을 주게 되었을까.



2. 절대악 논쟁

대학교 시절,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알게 된 임 모는 꽤 흥미로운 사람이었다. 남들은 대학 내내, 아니 평생 한번 건드려 보지도 않을 것 같은 두꺼운 인문학 서적들을 기꺼이 탐독하는 소위 '골방철학자' 같은 이미지를 가진 이였다. (때문에 실제로 만나보았을 때는 의외로 평범한 외모에 오히려 조금 실망했을 정도로)

그는 종종 뜬금없는 철학적 질문(?)을 나에게 던지곤 했는데, 한번은 "절대악의 존재"에 대해 물었다. 그리고 나는 그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분명히 극단적인 악은 존재할 수 있겠지만, '절대악'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순수한 악은 존재할 수 없을 것 같다. 세상 대부분의 일은 양면성을 갖기 마련인데 그 양면 모두에게 절대적 악으로 규정지어지는 것 자체가 어려울 것 같고, 시대와 사상에 따라서 한때는 절대적 가치를 지니는 것이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 될 때도 있고 그 반대가 되기도 하는데 그 모두를 초월해 악으로 존재하는 것은 역시 어려우며, 극단적인 악인이나 악행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와의 관계에 따라 아주 작게나마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기도 하며, 하다못해 '반면교사'로서도 그 가치가 극소하게나마 존재할 수 있는데 과연 그 모든 관계와 조건에서 순수히 악으로 규정되는 절대악이 존재할 수 있을까?'

라는, 역시 그의 취향에 맞춘 다소 철학적인(?) 답변을 했다. 그 사이사이에 '살인-전쟁터에서의 전투, 왕조시대의 가치-민주주의 시대의 가치, 역사 속 끔찍한 악인으로 손꼽히는 이들에 대한 의외의 면모' 등등을 언급하면서. 사실 나는 그의 의견 역시도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아무래도 철학을 좋아하는 이답게 굉장히 다각적인 면에서 접근하는 사고를 감안하건데), 의외로 그 반대였다.

"저는 절대악의 존재를 믿습니다"

나는 혹시 종교적인 이유에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물었지만 그건 또 아니란다. 그래서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물었고, 그는 몇 가지의 '우리나라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일반적으로 부정적으로 언급되는 몇 가지 집단-종교, 정치 등의-'을 그 예로 들었다. 사실 깊이(?)에 개인적으로 조금 실망했는데, 굉장히 깊이 있는 어떤 철학적 의견을 기대했지만 그가 주장한 내용들은 사실상 일반론이었다. '그들은 이러이러한 잘못들을 저질렀으므로 절대악이다' 같은.

그가 내놓은 주장들은 물론 상식적인 차원에서의 부정평가였으므로 당연히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의 평소 언행과 사상에 비추어 보건데 "절대악"이라는 표현을 쓰기에는 조금 과한 면이 있는 것 같다고 언급했다. 단어의 정의를 어떻게 규정하는가 하는 토론의 기본 문제를 환기하고 싶기도 했고, 그가 '절대악'이라고 단언한 집단들이 종종 행하는 어떤 '보여주기식 선행'만 놓고 보아도 이미 절대악은 아니지 않는가 하는 의문도 부연해서.

그러자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그들이 행하는 어떤 보여주기식 선행도 결국에는 큰 거악을 실행하기 위한 준비 절차이므로 악행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나는 그에 대해서 "무슨 그들이 만화 속 악당도 아니고 정말 순수히 악행만을 위해 집단을 구성한 것이 아니지 않는가. 네가 말하는 '거악'조차도 그저 단순히 사상적, 종교적 입장차이일 수 있고, 또 그런 이유로 그들을 절대악으로 규정한다면 그들과 반대되는 입장에 있는 이들은 절대선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서 결국 그 지점부터는 옳고 그름을 논하기 어려운 어떤 사상논쟁으로 흐르게 되어 이야기가 공전하게 되었다.

뒤돌아보면 조금 아쉬운 흐름인데(차라리 '보여주기식 선행을 정말 악행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가' 같은 부분에서의 논쟁이 더 흥미로웠을것 같아서), 어쨌거나 어떤 이상론적 관점에서의 절대악이 아니라 실존하는 집단을 절대악이라고 규정짓고 이를 가는 그의 모습은 꽤 깊게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의외로 그런 이들이 매우 흔하다는 사실을 조금 더 나이 먹고 깨달았을 때는 더 충격이었다.



3. 책임의 문제

몇 년 전의 일인데, 신문 귀퉁이에 실린 한 칼럼 기사였던 것 같다. 평생을 교회의 전도사로서 활동하며 수백 명의 지인들과 행인들을 교인으로 만든 이의 이야기였다. 그랬던 그가, -보통의 케이스와는 정 반대로- 인생 말년에 접어들어서는 오히려 종교의 무의미함을 느끼고 자연인으로서의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단다. 당연히 종교 활동은 접었고, 현재의 삶에 만족한다는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다)

회의주의에 가까운 내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일생 말년의 그 모습은 보통의 나였다면 "그래, 그게 맞는거지" 하고 박수를 쳤을지도 모르지만, 문득 그가 평생동안 교회로 이끈 수백 명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이 미치자 그의 의견이 궁금한 한편으로 조금 화까지 났다.

'평생동안 옳다고 믿어온 어떤 행동을 인생 말년에 완벽하게 뒤집는' 모습 그 자체는 보통의 용기로는 하기 어려운-다들 인지부조화를 일으키기 마련이니까-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홀가분해진 듯한 그 모습은 역으로 생각해보면 그가 끌어들인 수백 명의 교인들에 대해서는 굴레를 씌운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물론 그가 아무리 인도했다고는 하나 결국 교인이 되는 것은 그 본인들의 선택이었을테니 책임을 무겁게 지우기는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만약 그것이 교회가 아니라 다단계나 어떤 잘못된 사상의 집단의 경우였다면? (물론 다단계는 보통 아예 엿 먹이려고 인도하는 것이니 조금 옳은 예가 아닐지 모르지만, 때로는 그 본인조차 너무나 완벽하게 넘어가서 정말 좋은 거라고 생각해서 지인들에게 추천하는 경우들도 있으니까)

본의 아니게, 혹은 한때는 큰 확신을 갖고 옳은 일이라 생각하며 행해왔던 일들이 뒤늦게 보았더니 그렇지 않았을 때, 그 지나온 일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이번에는 반대로 자신이 교회로 이끈 교인들을 찾아다니며 "교회 믿지 말아라" 하고 권유해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이 터무니 없다고 생각된다면 처음에 교회를 권유할 때 행한 권유는 터무니 '있는' 행위였을까.



4. 악인과 그들의 결과물


종종 인성과 능력이 정확히 비례하지 않는 경우들을 우리는 너무나 흔하게 본다. 가까운 예로 '능력은 좋은데 성격이나 인성은 개차반인 직장 동료나 지인'들의 모습 같은.

나는 그들이 다소 밉상이고 속으로 쌍욕을 할 지언정, 결과물이 썩 괜찮다면 그 능력의 결과물들에 대해서만큼은 인정을 하는 편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고방식은 연예인이나 운동선수, 더 나아가서는 정치인이나 역사 속 인물에 대해서도 보통 그렇게 평가하는 편인데, 이에 대해 질색팔색을 하는 주변 사람들을 꽤 많이 보았다.

"네? 이번에 XXX, 그 사고친거 몰라요? 완전 쓰레기잖아요!"

그러한 반응에 대해 나는 "아니 그건 아는데, 그 인성이 쓰레기더라도 이 노래 자체는 좋지 않아요?" 하고 되물었는데, 그런 나의 모습에 더 이해가 어렵다며 정색하는 모습에서 당혹감을 느끼는 것이다.

물론 음악이나 문학처럼, 어느 정도 취향의 영역에 있는 것들은 그 제작자 자체가 싫어졌다면 결과물도 같이 싫어질 수 있다는 심정적인 부분이야 충분히 이해하지만, 더 나아가

"어떻게 쓰레기가 만든게 쓰레기가 아닐 수 있어요?" 하는 주장에 대해서는 고개가 갸우뚱 해지는 것이다.

사실 여기서도 그 '쓰레기'의 기준이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이지만, 어쨌거나 역사 속 인물들의 숨겨진 추한 모습(소아성애 논란이 있는 간디부터, 우리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작품들을 남겼지만 사생활에서는 불륜이나 각종 범죄를 저지른 수많은 예술가들, 우리의 일상을 위대하게 만든 수많은 과학자, 철학자들의 너무나 많은 부끄러운 이야기들에 이르기까지)을 감안해보면

"어떻게 쓰레기가 만든게 쓰레기가 아닐 수 있어요?" 라는 주장은 간단히 반박이 가능하다고 생각이 되는 것이다.

하다못해 "(쓰레기로 욕을 먹는 이들의)사고치기 전 인기와 작품에 대한 평가(순위 등)"를 감안해보면 역시 "쓰레기가 만들어서 쓰레기인데 왜 예전에는 그렇게 인기를 끌었대요?" 하고 되묻고 싶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다만 거기까지 생각하노라면 또 '제품의 문제가 아닌, 기업 그 자체나 제품 외적인 문제로 인해 발생하는 불매운동' 같은 개념으로 접근한다면, 그리고 그것에 대해 어떠한 '사회정의' 같은 개념을 연결지어 생각한다면 그 질색팔색의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기는 하다. 단지, 그 질색팔색의 범위가 너무나 주관적이며 자기편의적인 것 같다는 인상을 받을 뿐이다.



5. '옳음'에 대한 이야기

여지껏 인터넷에서 본, 가장 공감하면서도 역시 그 이행에는 어려움을 느끼는 댓글 중의 하나가 이거다.

"사람이 아무리 자기가 옳다는 확신을 가져도, 때로는 자기가 틀린 것이 아닌가 생각도 좀 해보고 남의 말도 진지하게 들어보고 해야 된다. 나이를 먹을 수록 더욱 더"

사실 나는 거의 모든 인간사 논쟁과 세상의 갈등이 저 문장들로 간단히 정리된다고 본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 라는 말처럼(딱 맞는 비유는 아니지만) 그 어떤 주장이라도, 억지나 의도적인 왜곡이 아닌 한, 진실되게 목소리 높이는 주장이라면 분명히 그 나름대로 최소한의 당위는 갖고 있다고 본다.

누군가들의 주장과 의견이 정말 터무니 없고 미친 소리 같아도, 내 의견을 잠시만 내려놓고 곰곰히 듣고 있다보면 분명 그들이 그런 주장을 하는 데에는 최소한 '그렇게 된 이유'라도 존재하기 마련인 것이다. (뭐, 그러한 당위가 결국 목소리와 행동으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변질되는 경우도 많지만)

게다가 '스스로가 남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할수록', '우리가 저들보다 정의롭다고 생각할수록', '내 주장이 그들의 주장보다 더 가치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할수록' 정말 그것이 그러한가에 대한 반문은 더욱 더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맹목(盲目)의 우에 빠져 헛소리를 진지하게 떠드는 나의 모습만큼 추한 것도 드무니까. 마치 이 글처럼 말이다.

가면 : 3화 소설

아라를 만나기 두 달 전 즈음, 나는 사실 가영에게 이별을 이야기 했었다.

"우리 그만하자"
"뭘?"
"그만 만나자"

모처럼 집 근처에 생긴 파스타 맛집에서 점심을 먹고, 동네 한 바퀴를 함께 산책한 직후에 내가 한참을 주억거리다 어렵게 꺼낸 난데없는 이별 통보. 가영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왜?" 하고 물었다.

글쎄. 뭐라고 이유를 말하면 좋을까.

가영이 너가 나를 안 좋아하는 것 같아서?
우리 집안 형편상, 멀리 생각해보아도 아무래도 결혼은 틀린 것 같아서?
아직까지도 주변 사람들에게 숨기는 연애가 힘들어서?
이제 이런 힘든 연애 관두고 그냥 나를 좋아해주는 아라와 만나고 싶어서?

한참이나 대답을 망설이던 나는 "너 나 안 좋아하잖아" 하면서 힘없이 웃었다. 무어라 잔뜩 퍼부을 준비를 하는 듯 하던 가영은 그 말에 할 말을 잃은 듯 그저 입을 몇 번이나 벌렸다가 닫으면서 "참 나" 하면서 할 말을 열심히 찾는 듯 했다.

솔직히 힘든 연애였다. 애정의 농도가 다르고 표현의 강도차이가 현격했으며 내 스스로 보아도 그녀가 나와 진지하게 미래를 꿈꾸는 것 같다고는 생각되지 않은 그런 연애. 혼자 애쓰고 혼자 고민하고 혼자 서운해하는 그런 외톨이의 연애.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정말로 힘이 빠졌다. 그리고 내 스스로가 불쌍해졌다.

"그래서 헤어지자는거야?"

나의 긴 한숨은 긍정의 답을 대신했다.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정말 최선을 다했던 내 자신에 대한 배려였다. 이제는 미련을 버리고, 나를 조금 더 아껴주기로 했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얼마를 그렇게나 바닥만 보고 있었을까.

'마지막이구나'

하는 생각에, 예쁜 가영이 얼굴이나 마지막으로 머릿 속에 새겨두고자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가영이는 두 눈 가득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었다.







가면 : 3화







아라와 벌거벗고 자던 것이 걸린 그 순간, 나는 츄리닝 바람에 옷도 간신히 걸친 채로 밖으로 나갔다. 가영이는 큰 길을 향해 저 앞에서 울면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가영아"

하고 부른 순간 돌아본 그녀의 모습은, 몇달 전 그 모습과 참 똑같았다. 두 눈 가득 눈물이 차오르다 못해 줄줄 흐르는 그 모습. 무어라 말을 하면 좋을까. 이번에는 내가 할 말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러자 가영이 말했다.

"개새끼야"

그리고 가영이 눈물을 닦고 똑바로 말했다.

"왜 그랬어 왜!"

차라리 거기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나는 변명을 했다. 그것도 최악의 변명을.

"너 나랑 마지막으로 잔 게 언제인 줄 알아? 아, 지난 달에 잔거 빼고. 그 이전에 말이야. 기억 나? 난 기억도 안 나."
"뭐?"
"나도 기억 안 나. 너 나 안 좋아하잖아. 나도 힘들었어, 힘들었다구. 나도 사람인데, 혼자만 하는 연애 같은거, 감당하기 힘들어. 그래, 나 쓰레기 맞고 인정하는데, 너도 잘한거 없어. 나 최선을 다했다고 너한테. 근데 너는 아니었잖아. 저번에 내가 먼저 처음으로 헤어지자고 했을 때, 니가 수백번도 넘게 헤어지자고 하던거 매번 붙들고 빌던 내가 처음으로 너한테 헤어지자고 했을 때, 너 그때 뭐랬니. 이제는 너가 잘한다고 했잖아. 근데 너 하나도 안 바뀌었어. 나 너무 힘들었다고"
"그래서 바람을 피운거야? 너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해?"

그래, 사실 그 타이밍에 할 말은 아니었지. 하지만 나는 당혹스러운 나머지 그렇게 쓰레기 같은 자기합리화를 시도했고, 가영은 어처구니 없어했다.

"변명이라기보다…"

그때 손에 들고 나온 휴대폰에서 아라의 전화가 울렸다. 그것을 본 가영은 "약!" 하고 비명과도 같은 고함을 지르면서 내 손에서 휴대폰을 낚아채서 바닥에 던져 깨버렸다.

"야…"
"뭐!"

박살이 난 휴대폰을 망연자실 바라보는 찰나, 저쪽에서 아라가 힘없이 걸어왔다. 나와 가영 모두가 이 막장 드라마와도 같은 상황에 얼굴을 쓸어내리는 순간, 아라는 처음으로 가영에게 말을 걸었다.

"가영씨, 나랑 잠깐 이야기 좀 해요"

당황스러웠다. 그래, 가영이야 뭐 그렇다고 쳐도, 아라는 날 뒤도 안 보고 버릴 줄 알았다. 그렇잖는가. 자기는 세컨드였던 사실을 알게 된 그녀가 무슨 할 말이… 아. 혹시 가영에게 나 만나지 말라는 말을 하려는건가.

"너는 무슨 말을 또 하려고? 니가 왜 끼어드는데"

그러자 아라가 세상 슬픈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 나는 더이상 말을 걸 수 없었다. 그러나 가영도 아라와 말을 섞고 싶은 기분은 당연히 아니었겠지.

"하"

가영은 헛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젓고는 큰 길 직전의 골목 한 켠에 세워둔 자신의 차를 향해 걸어갔다. 나와 아라 모두 가영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곧 차에 올라 시동을 건 그녀는 무서운 눈으로 아라와 나를 쏘아보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넌 꺼지고, 너 여기 타. 이야기 좀 해"

나에게 타라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아라는 "가영씨, 나도 할 말이 있어서 그래요. 잠깐 나랑 이야기 좀 해요" 하고 가영에게 부탁했다. 가영은 "넌 다른 남자 뺏은 더러운 년 주제에 나랑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그러는건데? 미친 년이 진짜. 야, 너 안 타?" 하고 나에게 말했다.

내가 아라를 한번 흘낏 보고 차를 향해 걸어가자 이번에는 아라가 내 팔을 붙잡았다.

"너 저 차 타면 나랑 끝이야"

선택의 기로. 아라도 가영도 나를 쳐다보았다. 보통, 이런 경우가 있나?




결론적으로 말해 나는 가영의 차를 타지 않았다. 최악의 순간에서 떠오른 이기적인 생각.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 양다리를 걸친 이상, 나는 당연히 그 둘 모두를 잃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뜻밖에 그녀들은 나를 사이에 두고 경쟁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주어진 기회에서 나는 조금 더 실리적인 선택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간단했다. 가영의 성격상, 내가 바람 피운 것을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에야 아라에게만큼은 뺏기기 싫어서 나와 이야기를 하자고 했지만, 아마 감정이 진정되면 나를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라는 조금 다를 것이라 생각했다. 지난 반 년간 붙어 지내면서, 아라는 나에게 줄곧 말해왔다. 자기가 만났던 남자 중에 내가 최고라고. 만나자마자 헤어지자고 했던 놈이 뭐가 좋냐고 자조적으로 미안함을 내비쳤으나 아라는 그저 좋다고 했다. 뭐, 다 떠나서 만나서 지난 6개월간 반 동거하며 지낸 상황이니 육체적으로든 감정적으로든 가장 뜨거울 때 아니겠는가. 한번 정도는 용서 받을 수도 있을거라는 철저히 확률적인 생각으로 아라의 곁에 섰다.

"… …"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가영에게 너무나도 큰 상처였으리라. 근 3년 가까이, 강아지처럼 자신만을 철저히 바라 보아주고 참아주고 좋아 어쩔 줄을 몰라하던 남친이 바람을 피운 것도 모자라, '당연히' 자신의 차에 탈 줄 알았던 그가 다른 여자 곁에서 겸언쩍은 표정으로 자신에게 선을 긋는다니.

가영은 끝내 울음을 다시 한번 터뜨리며 차를 몰고 큰 길로 나갔고, 그 와중에 나는 또 '저러다가 사고라도 나면' 하며 그녀를 걱정했다. 아라는 아무 말도 없이 서있다가 내 손을 잡았다.

"이야기 좀 해"




방으로 돌아와 나는 아라에게 지난 3년 간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아라는 묵묵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너 저번에, 아니 처음에. 나랑 잘 때 전화와서 이력서 봐준다고 했던 여자애. 걔가 가영이었지?"
"어"

아라는 아무 말 없이 다가와 침대에 걸터앉아 나에게 말했다.

"고마워"

고맙다니 뭐가. 그저 내 품에 기대는 아라가 고마웠다. 그리고 가영이에 대한 미안함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다음 날 저녁, 약간의 야근으로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보니 아라는 이미 편의점 출근을 하고 난 이후였다. 나는 멍하니 컴퓨터를 켰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너무 혼란스럽고 피곤했다. 양다리는 끝났다. 나는 아라를 골랐고, 나는 청춘의 순정을 바쳤던 가영을 그렇게 놓아버렸다. 허무했다.

'흐'

참 징하게 힘들었던 연애였다. 아니 '힘들었다'고 하기에는 사실 너무 즐거웠지만 바로 그렇게 너무 즐거웠기에 힘들었다. 나는 가영이 곁에만 있어도 좋았고, 가영이가 한번 웃어주면 너무 행복했다. 내가 그 어떤 맛있는 것을 먹는 것보다 가영이가 맛있게 먹는게 좋았고, 그녀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했다. 그렇게 그저 마냥 걔가 애틋하게 좋았다.

진심을 준 상대였다.

바로 그래서 더 힘들었다. 가영이가 화를 내면 나는 사과하기 바빴고, 설령 억울하고 서운한게 있어도 내가 한번 더 참고 혼자 스트레스 받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가영이를 잃는게 두려웠고, 그녀에게서 버려질까봐 걱정됐다.

헤어지자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나에 대한 마음이 깊지 않았던, 그리고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확실히 그리 미덥지 않은 남자였던 나는 그녀에게 '아쉬운' 남자였을테니.

그리고 매번 나는 매달렸다. 앞으로 잘하겠다, 노력하겠다, 내 앞날에 대한 비전을 설명하고, 지나간 시간들, 내가 정말 최선을 다해서 그녀를 즐겁게 해주고자 했던 시간들을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정으로 달랬고 울음으로 매달렸다. 자존심도 뭐도 없었다. 그저 어린 아이처럼 그녀의 곁에 있고 싶었다. 정말 최선을 다했다.

어쩌면 내가 그리 많은 연애를 해보지 못했기에 그랬던 것인지도 모른다. 호구의 연애, 바보의 연애. 밀당은 커녕 오로지 퍼주기 바빴던 연애. 물론 어느 순간 그러다가 나를 돌아보면 참으로 허무했던 그런 연애. 혼자만의 연애. 참으로 지독한 마음 고생을 계속했던 연애.

그랬던 연애가 그렇게 끝이 났다. 사실 아라와 본격적으로 양다리를 걸치기로 한 순간 어쩌면 예정된 결말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라도 마찬가지였지만, 가영과도 결코 좋은 끝이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당연히 나도 알았으니까.

"후우"

피곤했다. 습관처럼 로그인을 하고, 메일함에 들어갔다. 그러자 놀랍게도 가영에게 메일이 와 있었다. 무슨 내용일까. 가슴을 두근거리며 열람했다.




지금 어떤 말을 꺼내면 좋을지,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사실 나는 모르겠어.
그저 끝없는 악몽을 꾸는 듯한 어둠 속에서 끔찍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뿐이야.
어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 속에서 너를 떠나 집으로 돌아와 혼자 미친사람처럼 뜬 눈으로 이렇게 하루를 보냈어...

그리고 문득 깜빡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떴는데, 마치 그 모든 일들이 꿈이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너에게 물어보고 싶었어.
이거 정말 꿈 아니냐고.

너무 늦은 것이 아니냐고 말해도 할 말은 없지만, 이제서야 나는 너를 바라보아. 진심으로.
너 어제 "나랑 언제 잠 잤는지 기억이나 나느냐"고 물었지? 그래.
정말 그랬더라. 내가 너를 너무... 외롭게 만들었던 것 같아.
알아. 그것 뿐만이 아니라, 내가 너를 너무 가혹하게 몰아붙였던 것도. 마음적으로든 뭐든.
너를 인정해주지 않았던 많은 기억들... 그 기억들이 너무 후회스러워.

다만 변명을 해보자면, 나는 너가 지금의 너보다 더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을거라고 믿어서 그랬어.
변명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진심이야.

그리고 나는 이 어둠의 터널이 어쩌면 우리의 마지막이 아닐 수도 있다고 믿어.
너를 보고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지만 무서워. 니가 걔를 데리고 나타나는 것은 아닐지.
그럴 생각이라면 그냥 나타나지 않아도 좋아. 이 편지를 지워도 돼.
...아직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많아.

너와 꼭 마무리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다. 이번 주말에라도....




인터넷 창을 끄고 나는 끅끅 거리며 울었다. 가영이가 어떤 마음으로 이 메일을 썼을지를 생각하자 내 마음까지 찢어질 것만 같았다. 미친 놈, 머저리. 정신나간 새끼. 나를 저주하고 또 저주했다.

그리고 눈물을 닦고는 일요일 오후 2시에 만나자고 답장을 보내 약속을 잡았다. 이번 주는 마침 아라가 일하는 편의점의 여자애 하나가 관두는 바람에 주말에도 풀타임으로 근무하기로 한 것이라 시간도 딱 좋았다.

일요일 2시. 마음에 다시 한번 새겨놓고는, 나는 방청소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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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 : 2화 소설

"그거 에픽 템 먹을 생각 아니라면 굳이 거기에 시간 버릴 필요 없어요"
"그쵸? 그냥 제껴도 되죠? 오케이, 오늘 걍 그럼 바로 렙업만 쭉쭉 달린다"

그때 그 시절, 정모의 성지 '민토'에서 우리는 곧잘 정모를 가졌었다.

"페가님 요새 새벽에도 계속 접속해 계시던데"
"저 휴학했걸랑요. 아 근데 모드님 좀 늦으시네, 3시까지 모이기로 해놓고선 지금 거의 4시가 다 되어가는데"
"우리 여기 몇 시까지 예약해놨어요?"
"5시요"

흔한 온라인 게임 동호회의 정모. 키 작고 배 나온, 혹은 키만 멀대같이 큰 멸치, 혹은 키 작은 멸치, 혹은 거북목의 체크남방 입은 돼지들의 그렇고 그런 구질구질한 모임. 그러나 오늘은 묘한 긴장감과 함께 다들 어딘가 '조금은' 멋을 부린 듯한 느낌이 난다. 안경 대신 렌즈를 낀 '페가수스' 상철, 새 유니클로 남방을 사 입은-그러나 XL 스티커를 깜박하고 떼지 않아 조금 망신을 산- 'k86huns' 재훈, 세미정장을 걸친 '랜드로어' 동원, 닥터마틴으로 키를 2cm 키우고 미묘하게 더운 날씨에 가죽재킷을 걸친 나.

"누가 모드님한테 연락 좀 해보세요"

그렇다. 오늘은 길드의 유일한 여자 멤버 '아라모드'가 무려 대구에서 상경해서 처음으로 정모에 참석하는 날. 길드장이었던 나의 지시에 옳다꾸나 동원이 서둘러 그녀에게 전화를 건다. 영철이 재훈에게 "님도 아라모드님 연락처 알아요?" 하고 속삭인다. 동원의 전화기 너머로 전화 발신음만이 계속 울리는 가운데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

"쨘! 늦어서 죄송해요. 버스를 놓치는 바람에 다음 버스 타느라고 조금 늦었어요"

대구 사투리가 살짝 섞인, 애교 넘치는 목소리의 긴 생머리 금발 엘프 여신은 과연 '아라모드'라는 우아한 닉네임에 걸맞는 외모였다. 새하얀 피부에 보조개 쏙쏙 들어가는 얼굴, 큰 눈에 러블리한 목소리. 다들 "우아아아아!" 하는 함성과 함께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연창이 곧바로 터져나온다.



…나의 회고에, 아라는 웃었다.

"영호님 기억에서 제가 너무 미화된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진짜 그때 최고였어요. 솔직히 편견 있잖아요. '이쁜 여자가 게임을 왜 해? 그 시간에 밖에 나가서 잘생긴 남자들이랑 놀지' 같은. 근데 제 그 고정관념을 처음으로 깬 게 아라님이었어요"

과거 이야기는 우리 둘의 관계를 매우 빠르게 진전시켜주는 효과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그 다음 말에 나는 어떤 '확신'과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근데 솔직히 당시에 저도 기대 하나도 안 했거든요. 게임동호회 남자들 다 뻔하니까. 근데 영호님 처음 보고 조금 두근두근했어요. 맨날 게임 속에서만, 그리고 게시판에서 글로만 봤던 분이었으니까. 근데 생각 이상으로 좀 괜찮았던? 그리고 더 놀랬던 건, 지난 주에 봤을 때, 엄청 시간이 자났는데도 전이랑 비교해서 하나도 안 변한거에요. 아니 오히려 더 젊어진 느낌?"

그도 그럴 것이 그 몇 년 사이 가영을 통해 나름대로 가꾸어진 나였으니까.

"하하, 부끄럽네요"

지난 주, 아라와의 첫 데이트 이후 근 일주일만에 나는 또 그녀를 만났다. 가영에게는 "승준이 좀 만나고 올게" 하고 적당히 둘러대고 말이다. 두번째 데이트 역시 영화, 밥, 카페의 코스였다.

"저 공포영화 좋아하는데"
"아 그래요? 마침 잘 됐네요"

정확히 말하자면 공포보다는 호러SF 영화였다. 하지만 깜짝깜짝 놀라는 장면들이 있었고, 나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덥썩 잡았다. 아니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게까지 놀랄 장면도 아니었지만 일부러 잡았다. 보드라운 손. 여자친구가 아닌 다른 여자의 손. 5년 전 또래들 사이에서 '엘프' 칭호를 가졌던 여자의 손.

솔직히 말해 그 순간부터는 영화에 전혀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저 온 신경이 아라의 손에 다 가있었다. 아라는 내 손을 굳이 뿌리치지 않았다. 영화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 우리는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영화 재밌었죠?"

나의 어색한 질문에 아라는 대답 대신 묘한 미소를 짓더니, 영화관을 나와서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왜 내 손 계속 잡고 있었어요?"

아무리 내가 찌질이라고 해도, 이미 가영과의 오랜 연애로 이럴 땐 어떤 말을 해야하는지에 대해 통달한 나였다. 구태여 어설픈 변명 따위를 할 이유가 없었다.

"좋아해서요"

아라는 빙긋 웃었다. 솔직히 말해 첫 데이트 때 어느 정도 간을 다 봤다고 생각했다. 이만하면 간이 맞는다. 아니 더 졸이면 오히려 짤 판이다. 그녀가 거절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 만나요. 오늘부터"

조금은 낯 간지러운 말. 아라는 영화관 옆 골목에서 담배를 입에 물더니 "나 담배 피워도 괜찮죠?" 하고 묻는다. 아라가 담배를 피우는지는 몰랐었다.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요"

아라는 담배연기를 길게 뿜더니 말했다.

"좋아요. 솔직히 나 지금 너무너무 좋아요. 근데 우리 이제 말 놓는걸로?"
"그래"

나 역시 뛸듯이 좋았다. 하지만 역시 첫 데이트와 마찬가지로 나는 머릿 속에서 가영이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은 어쨌든 기뻤다.






가면 : 2화





"그래서 둘이 뭐했어?"

전화기 너머 가영의 질문에 나는 적당히 둘러댔다.

"간만에 만나서 둘이 고기 구워 먹었지. 아 근데 승준이 그 새끼 요즘 영 컨디션이 별로더라고"
"왜?"
"계약직 끝나고 이제 정규직 전환시켜준다고, 분명히 지난 달까지 그렇게 말해놓고선 이번 달에 갑자기 그게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거야. 부장 새끼가. 그래서 빡돈거지"
"와 그 회사 미쳤네. 근데 그런 회사 많대 요즘에"
"그러게. 말로만 들었는데 진짜로 있더라고 그런 회사"

사실은 며칠 전에 전화로 주고 받은 이야기. 그게 어느새 승준과의 만남에서 있었던 일로 탈바꿈 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그리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고, 가영은 곧 "나 네일 했어. 사진 봐봐" 하면서 카톡으로 이미지를 보냈다.

"오 이쁘다"

하지만 가영의 긴 손가락과 화려한 네일아트를 보면서도, 나는 수수한 아라의 그 보드라웠던 손을 떠올렸다.

"뭐야 반응이 시큰둥한데? 별로야?"

리액션의 크기에도 민감한 가영. 나는 서둘러 "아니, 이쁘다고. 근데 내가 뭐 네일이 이쁜지 어떤지 아나" 하면서 둘러댄다. 가영은 "확!" 하고 군기를 또 잡더니 "내일 우리 뭐해?"하고 묻는다. 뭘하면 좋을까.

"영화볼까"

그러나 의외로 영화에 대해서 별 불만이 없다.

"뭐 볼건데"
"공포영화"

공포영화라는 말에 가영이 놀랜다.

"왠 공포영화? 나 공포영화 싫은데"
"아냐, 재밌어. 아니 재밌대"
"알았어"

순순히 오케이 하는 가영. 나는 아라와 함께 본 영화를 다시 보기로 했다. 기억력이 그리 좋지 않은 나로서는 그렇게 혼란을 줄이는 것이 그나마의 '발각될 가능성'을 줄이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아 재미 하나도 없잖아. 무섭기만 해. 기분만 찝찝해. 공포영화 좋아하는 변태들이 제일 싫어"
"그러게"

나는 시큰둥하게 가영의 말에 맞장구쳤다. 영화를 보고 나오자 무엇을 하기에도 애매한 오후 4시 반. 무엇을 하면 좋을까.

"운동하러 가자"
"응? 운동? 니가 왠일로"

당시 '운동'은 가영이 나에게 섹스를 먼저 제안할 때의 은어였다. 계산해보니 700일 이래로 근 석 달만의 제안이었다.

"가자. 오늘 날씨 덥잖아. 시원한 에어컨 밑에서 쉬자"
"좋아"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가영과의 섹스가 뜸해졌었다. 물론 언제나 섹스에 굶주렸던 나는 항상 그녀와의 관계를 원했지만 가영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섹스를 기피했었고, 언젠가 내가 정색을 했던 날 그녀는 더욱 더 그 이상의 정색을 해왔다. 사실 입장을 바꿔놓고 보면 이해가 안 가는 바도 아니었다.

"아…"

나는 조루였다. 삽입으로 3분 넘기는 것이 어려웠다. 그러다보니 초조한 마음에 오히려 애무도 더 제대로 할 줄을 몰랐다. 몸만 달구어 놓고 본 게임에서 못하면 더 힘들어진다는 생각에서였다. 더 오래 하려고 머릿 속에서 천천히 숫자를 세보기도 했고, 아예 실제 허리 흔드는 속도를 줄이기도 해봤고 체위를 자주 바꾸기도 해봤지만 역시나 그리 오래 가지 않아 몰려오는 쾌감에 금방 사정을 했고 그렇게 어색한 타이밍, 아쉬운 순간에 끝난 이상 나는 묘하게 그녀 앞에서 작아지곤 했다.

"가영아"
"알았어, 어휴"

그래도 아직 팔팔하던 시절이라 잠시 쉬었다가 다시 시동이 걸리면 2차전을 뛰기도 했지만 어느새 가영이와의 만남도 3년 차에 접어드는 상황이었던만큼 재시동이 예전같지 않았다.

"…그냥 됐고, 영화나 보자. 아까 사온 과일 좀 씻어줘"
"어"

대실 시간 3~4시간 중에 애무와 본 게임, 뒷처리까지 다 합해 30분도 안되는 짧디 짧은 해피타임이 지나가고 우리는 정말로 시원한 에어컨 바람 아래에서 영화로 시간을 떼웠다. 가방 속에서 울리는 아라의 전화를 무음으로 바꿔놓은 채로.




"자기야, 혹시 강아지 키울 생각 없어?"

죽었다 깨나도 나에게 애칭 같은 것을 사용한 적이 없는 가영과 달리, 사귀기로 한 직후부터 나를 '자기'로 부르는 아라. 그녀의 권유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개는 귀찮잖아. 그리고 원룸에서 어떻게 개를 키워. 못해"

하지만 아라는 몇 번이고 권했다.

"근데 진짜 이런 개 없다니깐? 아는 오빠가 키우다가 갑자기 유학가게 되어서 분양하게 된 강아지인데, 너무 똑똑하고 절대 안 짖어. 그리고 똥오줌도 너무 잘 가리고, 막 귀찮게 조르지도 않아. 이런 개는 정말 없어"
"아 참"

…그렇게 딱 2주일만 시험삼아 길러보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우리 '반디'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세상에 이보다 더 똑똑하고 착한 개가 있을까. 구르라면 구르고 춤추라면 춤추고, 이건 정말 천재견이었다. "리모콘" 하면 리모콘을 입에 물고 오는 이 사랑스러운 요크셔에게 나는 흠뻑 빠졌다. 가영이도 마찬가지였다.

"얘 진짜 똑똑하다. 근데 어디서 난거야?"
"어? 아아, 그거. 예전에 알고 지내던 여자애가 있는데, 걔가 아는 오빠가 유학가게 됐다고, 분양할 곳 찾다가…"
"아는 여자애? 누구?"
"지민이라고 있어"
"지민이?"
"거 왜 예전에 내가 재훈이가 뭐 물어보다가 싸대기 맞고 친해진 애 얘기 한번 했잖아"
"아아, 그 도끼병? 근데 니가 걔를 어떻게 알아?"
"아 그냥 재훈이 통해서 분양할 사람 찾다가 나한테까지 순번이 온거지"
"그래. 나는 또 아는 여자애라고 하길래 뭔 소린가 했지. 여튼 배변패드 사왔어"
"올, 고마워"

가영이는 처음에 잠깐 의심을 했지만 순간적으로 적당히 잘 둘러낸 덕분에 더이상은 의심하지 않았다. 과연 여자의 촉. 어설프게 '아는 여자애' 라는 단어 하나에 갑자기 깊게 파고 든다. 이후 나는 괜히 긁어 부스럼이 될 것 같은 이야기는 더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



며칠 뒤, 주말이 되자 아라가 우리 집에 반디를 보러 온다며 강아지 간식 이만큼과 함께 찾아왔다.

"자기야, 우리 둘둘이건데, 반디 주려고 내가 이만큼 가져왔어"
"오, 넘 좋다"

아라는 내 방을 휘 둘러보다가 "방은 작은데 그래도 디게 아늑하다. 우리 집은 투룸이라서 집은 큰데, 룸메가 넘 집을 엉망진창으로 써서 오히려 생활공간은 더 좁은 느낌이야" 하면서 벌러덩 침대에 누웠다.

"아라야"
"응?"

사귀기로 한 지 9일째 되던 날. 나는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개었다. 그리고 로맨틱하다기보다는 에로틱한 키스를 이어나갔다. 내가 찌질했던 어떤 시절, 혼자 속으로만 짝사랑했던 여자. 그런 여자와 몇 년 뒤 인연이 되어 나누는 야한 키스. 그것은 무서울 정도의 흥분을 불러왔지만 마음 속 한 켠에서 큰 불안함과 미안함을 유발했다. 조루에 대한 걱정.

"왜 안 서?"

너무 그 불안이 컸던 탓이었을까. 아니면 가영에 대한 미안함 탓이었을까. 나의 성기는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고, 당황했을 아라는 나에게 웃으며 물었다. 뭐랄까…불안과 의심의 눈빛 같은 것이었다면 어쩌면 더 위축됐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라는 여유있게 나의 팬티를 벗기며 적극적으로 다가왔다. 그제서야 제대로 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하아…"

환희의 순간, 나는 묘한 뿌듯함을 느꼈다. 어째서였을까. 채 3분을 넘기기 힘들었던 가영과 달랐다. 아라와 할 때는 20분이고 30분이고 달릴 수 있었다. 그리고도 곧바로 부활하는 나의 쥬니어. 그래, 이게 섹스지. 이거였지. 근 십여년 전의 첫 경험 때도 그랬다. 그래, 나는 원래 조루가 아니었다. 심인성 조루. 무언가의 압박, 스트레스, 관계에서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상하관계에 의한 위축. 그 모든 것이 나의 멘탈을 흔들었고, 나는 그렇게 작아졌던 것이다.

"사랑해 영호야"

흥분이 채 식기 전, 내 품에 안겨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아라. 그녀는 가영과 달랐다.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나에게 은근한 애정을 눈빛에서부터 발산하고 있었고, 계속 나에게 멋지다, 좋다, 잘한다 등의 칭찬을 입에 붙이고 살았다. 표현하는 사랑.

"나도 우리 애기 사랑해"

닭살 돋는 말. 가영과의 관계에서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말. 하지만 어렵지 않았다.

"응"
"근데 나 어떻게 하지? 나 또 흥분했는데?"
"또? 너 진짜 변강쇠 아니니"

수컷으로서 그보다 기분 좋은 칭찬이 또 있을까. 침대에서 네 번의 사랑을 나누고, 더워서 냉장고를 연 순간 나는 책상 한 켠에 놓아둔 무음의 내 휴대폰을 확인했다. 부재 중 전화 네 통. 가영이었다. 사실 나는 아라가 강아지 간식만 주고 바로 갈 줄 알고, 따로 가영에 대한 변명거리를 준비해두지 않았었다. 즉, 이러다가 가영이 혹시라도 우리 집에 들이닥치기라도 한다면? 게다가 첫 전화는 무려 45분 전에 왔었다. 혹시 모른다. 그녀가 지금 우리 집으로 오는 중인지도. 그렇게 공포에 사로잡힌 나는 참 미련하게도, 그 자리에서 전화를 받았다.

"어, 가영아"

다른 여자의 이름에 이번에는 아라의 귀가 쫑긋하는 것이 느껴진다. 담배 연기를 내뿜는 소리가 분명히 아까에 비해 작다.

"어어, 뭐 좀 하느라고. 왜"

가영은 무척이나 짜증이 난 목소리였지만, 게임 곧 "나 이력서 수정한 것 좀 도와줘" 하며 부탁을 해온다.

"나 지금 좀 바쁜데, 일단 이메일로 보내놔. 어어. 어어"

전화를 끊었지만 아라의 눈빛이 분명히 조금 전과 다르다.

"누구?"

나는 이번에는 아라에게 또 거짓말을 한다.

"아, 가영이라고 아는 여자애있는데, 이번에 취업준비하면서 이력서 좀 봐달라고 해서"
"그걸 왜 자기가 봐주는데?"
"그냥 그나마 내가 대기업 계열사에서라도 일하고 있으니깐"

아라는 무언가 뭐라 말을 더 하려고 했지만 그저 "아무 여자한테나 다 잘해주지 마" 하고 한 마디 하고 끝이었다. 나는 알겠노라며 침대를 향해 달려갔다.

"우리 한판 더 하자!"



섹스에 대해 자신감을 찾은 나는 곧 가영에게도 그 '내공'을 시험하고 싶었다. 섹스는 멘탈스포츠, 라는 명언을 새삼 되새긴 나는 그동안 잃은 자존심을 회복하고 싶었다. 물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심적인 이유라면 분명히 이번 일을 계기로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영화 틀어봐"

…결과는 절반의 성공이었다. 분명 효과가 있었다. 예전에 가영이와의 플레이 타임이 보통 순수 5분 넘기가 어려웠다면 이번에는 10분 정도를 한 느낌이었다. 뉴 레코드. 그러나 가영을 충분히 만족(?)시키기에는 다소 부족한 플레이 타임이었던 것 같다. 단지 가영도 "오늘 평소랑은 좀 다르네?" 하고 은근하게 물어볼 따름이었다.



"아라야"
"응?"

그 즈음해서 나는 중심을 찾고 싶었다. 연애 3년 차의 여자친구, 가영에 대한 의리와 순정을 떠올렸다. 순간의 탈선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 아라는 분명히 매력적인 여자고, 솔직히 객관적으로 보아도 저런 '미소녀'가 나같은 찌질이를 좋아해준다는 자체가 뭔가 인생에 한두번 찾아올까 말까한 어떤 '기회'라는 생각은 했다. 또 최근들어 왠지 묘하게 관계가 좋아지긴 했지만 그 전까지 나를 정말 수없이 비참하게 만들었던 가영에 대한 서운함이 여기까지 상황을 몰고 온 것이라는 변명도 스스로에게 해보았다. 하지만 어쨌거나 더이상은 안된다고 생각했다.

"할 말이 있어"
"뭔데?"

어느 평일의 밤. 가영이 생리라며 피곤하다고 일찍 자겠다던 그 날 밤, 나는 집에 아라를 불러 질펀하게 섹스를 했다. '안전한 날'이라는 말에 더없이 짜릿한 경험까지 해가며. 사실 정말로 정리를 하려고 했다면 그 전에 했어야 할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한심한, 정말 더럽고 비열한 인간이었다.

"우리 그만 만날까"

아마 아라에게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말이었을게다.

"왜"

나는 내 진실된 속 마음과 구라를 적당히 섞어서 말했다. 사실 바로 얼마 전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그래서 그 과정에서 아라 너를 만난 것인데 아직 마음 속에서 그녀가 잊혀지지 않는다. 그래서 너를 더이상 만날 수 없을 것 같다, 라는 개소리를.

"그래"

아라는 슥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입었다. 굴욕적이었을 것이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모든 것을 준 남자에게 버려지는 순간의 고통.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혹시 마음 속에서 걔가 정리가 되면, 연락해"

그렇게 문을 나섰다. 아마 문을 나서면서 울었을 것이다. 나도 울었다. 가영이 그 년이 뭐가 좋다고. 맨날 나를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인데. 병신. 그냥 갈아타면 되는데. 아니, 근데 그럼 또 나를 바라보며 3년을 참아준 가영이는 뭔데. 그래, 둘 모두에게 미안했다.




아마 보통의 연애담이었다면 거기에서 모든 것이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아라는 조금 달랐다. 뒤늦게 알았지만 그녀에게는 많은 속사정이 있었고, 그런 그녀에게 나는 정말로 신선한 남자였던 것이다.

"자아, 묵자 묵자. 내 특제 김치찌개야. 엥? 너 표정이 왜 그래"
"나 남자가 해준 요리 처음 먹어봐. 감동해서"
"엥? 전 남친들은 그런거 안 해줬어?"
"대구 남자들은 주방에도 안 간다고. 그리고 서울 올라와서도 쓰레기 같은 놈들만 만나서"
"에휴, 너도 어지간한 병신 자석이었구나. 병신 같은 남자들만 척척 달라붙는"

…그리고 아라 입장에서도, 차라리 지금 만나고 있는 여자가 있어서 버린다고 했으면 차라리 쉽게 포기했겠지만, 나는 분명히 그녀에게 헤어진 여자 때문이라고 말을 한 만큼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을 것이다.

"영호야"

바로 다음 날 새벽. 아라는 내 방에 들어왔다. 그리고 내 침대 속으로 파고 들었다. 속옷 속으로 과감히 뻗는 그 보드러운 손길을 나는 뿌리치는 대신 그저 신음성과 함께 눈을 감을 따름이었다.




그렇게 본격적인 양다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분명 당시의 내 저울추는 가영에게 기울어 있었다. 지난 3년간이라는 시간의 무게, 함께 전 직장동료로서 일해온 우정의 무게, 실직-백수-어머니의 사고-가영이네 집의 사기 등 함께 이겨내 온 힘든 시간의 전우애가 있었다.

아라가 아무리 예쁘고 매력적이며 '첫 사랑'에 가까운 어떤 오랜 인연에 대한 애틋함이 있다 한들, 또 침대에서 엄청난 순종과 환상적인 속궁함을 보인다 해도 어쨌든 당시의 나는 그저 그녀를 '언젠가는 버려야 할 인연'이라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자기야, 나 오늘도 이 집에서 자도 돼?"
"어어, 그래"

그렇게 일주일에 최소 3~4일은 아라가 내 집에서 자고 갔다. 여자친구가 있는 놈이 자기 원룸에 다른 여자를 데리고 잔다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었지만 사실 꼭 그렇지도 않았던 것이… 기본적으로 가영은 내 집에 오면 개 냄새가 나고, 개털 때문에 답이 없다는 이유로 집에 오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곧 아라가 스스로 완벽한 환경까지 조성해주었기 때문이다.




"자기야, 나 알바 자리 구했어"
"편의점?"
"응. 심야근무 할거야. 그럼 돈도 1.5배 주지롱! 낮에는 자고 밤에 일하면 돼"
"오 대박인데?"
"주 7일 근무라는게 최악이긴 한데, 어쩌겠어"
"엥?"

아라는 그 무렵, 다니던 에이전시 회사를 관두고 편의점 알바를 시작했다. 지나친 격무와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해 회사를 관둔 아라는 카드값도 그렇고 월세도 그렇고, 급한 마음에 편의점 심야 알바 자리를 구했다. 물론 나는 쾌재를 불렀다. 스케쥴이 드디어 딱 맞춰졌다.

"어, 가영아. 나 일 끝났어. 어어 그럼 너네 집 근처에서 저녁 먹자. 오케이"

밤 11시부터 아침 10시까지 일하는 아라는, 집에 돌아오면 정신없이 자기 바빴다. 가뜩이나 잠이 많은 그녀가 심야 근무까지 하니 눈을 뜨는 것은 보통 오후 8시~9시 전후한 시간이었다. 그 시간이면 나는 가영과 저녁을 먹고 가벼운 커피 한잔을 하고 오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아니면 아예 일찍 집에 와서 아라를 깨우고 저녁을 차려줄 수도 있는 시간이고 말이다.

"아라야 밥 먹자. 내가 밥 차려줄게"
"우응, 응, 오늘 반찬은 뭐야?"

…그렇게 6개월을 살았다. 단언컨데, 당시의 나는 동네 반경 5Km 이내에서 가장 섹스를 많이 한 남자였을 것이다. 아라와 나의 궁합은 환상적이었고-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신혼생활을 시작하는 부부처럼 미친듯이 즐겼다. 나의 스킬은 뒤늦게 엄청나게 향상됐고 그 도전정신과 실험정신을 아라는 받아주었다. …물론 그만큼 내 업보도 쌓였겠지만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언제나와 같이 아라와 함께 저녁을 먹고, 언제나와 같이 섹스를 하고, 노곤한 몸으로 둘이 끌어안고 아라의 출근 전까지 두 시간 정도 잠을 자던 금요일 밤.

"아 왜 전화를 안 받는데!"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가영. 그녀는 "오늘 엄마네 집에서 자고 올거야" 라던 말과 달리, 저녁을 먹다가 엄마와 싸워서 그냥 집으로 향했고, 그 과정에서 맞장구를 쳐줄 남자친구에게 몇 통이고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아 짜증을 폭발시키며 남친의 집으로 향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벌거벗은 채 다른 여자와 끌어안고 자고 있던 더러운 남자친구의 모습일 뿐이었다.

"미친 쓰레기 같은 새끼!"

가영은 욕과 함께 현관문을 박차고 나섰고, 나는 그제서야 허둥지둥 옷을 주섬주섬 입으며 아라를 뒤에 남긴 채 가영의 뒤를 쫒아나섰다. 머리가 핑핑 돌기 시작했다. 그저 달콤하기만 했던 쾌락의 시간은 끝이었다. 아직 잠에서 덜 깨어 현실과 꿈의 구분이 모호한 그 순간, 나는 제발 이것이 악몽이길 바라며 몇 번이나 눈을 질끈 감아보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이미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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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 소설

"애기야 밥 먹자"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씻고 강아지 밥을 준다. 아, 방금 전에 말한 '애기'는 강아지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강아지 이름은 둘둘이다.

"둘둘이도 밥 먹어"

하얀 푸들. 사실 나는 강아지 중에서 푸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둘둘이만큼은 예외다. 이 놈은 정말 똑똑하니까. 꼬리를 좋아라 흔들며 밥을 먹는다.

"왔어?"

아라는 부스스한 얼굴로 화장실에서 간신히 세수만 하고 식탁에 앉는다. 푸석푸석한 피부. 건조한 목소리와 부은 눈.

"왜? 나 새삼 보니 너무 못 생겼어?"

얼굴을 매만지며 하는 자조적인 농담. 나는 웃으며 "아니, 완전 이쁜데? 우리 애기가 세상에서 제일 이쁘지" 하고 그녀의 앞으로 계란말이를 슥 내민다.

"얼른 먹어. 그래야 이따 약 먹지"
"응"

아라의 피부는 이제 새하얗다 못해 파리하다. 하루종일 집에만 있은 탓이다. 식사도 꼭 내가 있을 때만 한다.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은 잘해야 담배 사러 나갈 때 정도. 그때도 항상 마스크에 선글래스, 후드티에 에어팟은 필수다. 대인기피증, 공황장애, 우울증, 특발성 혈소판 감소증, 갑상선 항진증, 부정맥, 자가면역성 각막 알레르기, 편두통, 두통, 불면증, 빈혈, 피부 소양증 등등, 그녀가 겪고 있는 병들만 해도 열 가지가 넘는다. 물론 먹어야 하는 약도 한가득이다. 그녀도 나도 두렵다. 맨날 그렇게 한주먹씩 약을 먹어도 과연 간에 무리가 가지 않을런지. 게다가 그녀가 앓고 있는 병 상당수에 효과 있는 약물이 그나마 스테로이드다. 빌어먹게도.

"밥 먹고 요 앞에 산책 나갈까"

나의 제안에 아라는 의외로 순순히 "그러자"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로서는 근 3일 만의 외출이다. 아라의 대인기피증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나와 함께 있을 때는 그나마 덜한데, 혼자 있을 때는 이제 외출을 점점 덜하고 있다. 창도 하루종일 암막 커튼을 치고 어두운 방에서 휴대폰만 바라볼 뿐이다.



"많이 춥다. 그래도 둘둘이 데리고 나올걸 그랬나?"

검은 후드에 검은 롱패딩, 검은색 에어포스를 신은 채 마스크를 챙긴 아라. 긴 앞머리로도 가리지 못하는 예쁜 눈매가 여전히 나를 설레이게 한다.

"아냐, 둘둘이 산책은 아까 내가 시켰어. 두부 사러 나갔다 오면서"
"그렇구나"

아파트 근처 산책로를 따라 20분쯤 걸은 후, 그녀는 담배를 한 대 피웠다.

"이제는 그냥 담배는 못 피우지?"
"응, 전자담배 피우다가 그냥 담배 피우면 너무 독하고 맛도 이상해서 못 피우겠어"

아라가 먼 산을 바라보며 내뿜는 담배연기는 항상 묘하게 쓸쓸하다.

"들어가자"
"응, 춥네"

하루 반나절을 자고 일어나서 휴대폰으로 각종 모바일 응모 이벤트를 하고, 인터넷 유머 사이트들에 올라온 베스트글을 거의 다 읽고, 심심할 때면 심즈나 동물의 숲을 한다. 그리고 하루종일 굶거나 혹은 내가 사다놓은 혹은 만들어 놓은 요리를 먹고, 약을 먹고 약기운에 취해 또 자다가 일어나 일어나 퇴근한 나를 맞이한다. 함께 저녁을 먹고 이렇게 산책을 하거나, 영화를 보거나 한다. 그리고 둘둘이와 잠시 놀아주다가 밤이 되면 약을 먹은 뒤, 끌어안고 잔다.

그게 우리의 평화다. 어떨 때면 아라가 빵을 굽거나 푸딩을 만든다. 정작 식사 솜씨는 엉망이지만, 이런 제과 제빵은 제법 솜씨가 좋다.




그러나 가끔 심하게 잠을 자지 못하는 어떤 기간이 되면 아라는 심한 우울증과 공황장애에 시달린다. 거의 36시간을 피곤해 죽을 것 같아하면서도 잠을 자지 못하고 불안한 마음에 이상증세를 보이며 피가 날 때까지 몸을 긁거나 손톱을 물어뜯는다. 약에 취해 자거나 기절하듯 갑자기 쓰러져 잔다. 기면증처럼.

그 즈음이 되면 우리의 관계는 살얼음을 걷는 것과 같다. 연인의 싸움을 넘어 쌍욕과 처절한 저주의 말이 오가고, 자살 위협과 자학, 자해의 쇼가 밤마다 서로를 할퀸다. 며칠 간의 그 지옥과 같은 기간이 지나고, 이윽고 싸우다 지쳐 누군가 회한의 눈물을 흘리거나 비로소 서로의 감정을 부드럽게 움직이는 어떤 대화의 물꼬를 트기 시작하면 뒤늦게 화해무드가 펼쳐진다.

무한의 싸이클, 5년이 넘게 이어지고 있는 이 동거생활은 언제나 그랬다. 그 주기는 보름이 넘을 정도로 길 때도, 3일 단위일 때도 있었다. 그리고 간만에 그 싸이클이 도래했다.

"그냥 나 죽어버릴래"

무슨 지랄을 했는지 바닥에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아라. 가만히 보니 허벅지에서 뚝뚝 피가 흐르고 있었다. 소름이 돋았다. 설마 하혈이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저번처럼 성기에…. 내 낯빛까지 변해가며 당황하자, 아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냥 허벅지 심하게 긁었더니 살점이 조금 떨어져 나가서 피가 난거야. 닦으면 돼. 사타구니 조금 쓰린 정도야"

나는 얼른 주방으로 달려가서 새 독일행주를 들고 왔다. 그리고 그녀에게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봐봐"
"됐어"
"보라고, 벌려봐"
"됐다고!"

이쯤해서야 그녀는 말을 듣지 않는다. 차라리 빠른 포기가 나을 수도 있다. 나는 바닥에 얌전히 행주를 내려놓는다. 아라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한다.

"그냥 나는 너한테 도움이 안되는 인생이야. 매일 그 년이 생각나. 그리고 요즘 더 생각이 나"

나는 한숨과 함께 얼굴을 쓸어내린다.

"야, 그게 도대체 몇 년 전 이야기야"

하지만 아라는 서글픈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눈빛이 묘하다. 슬픈 눈빛일까, 나를 경멸하는 눈빛일까, 잡아달라는 눈빛일까.

"너한테는 지난 이야기지만 나는 아직도 귓 가에 생생해. 그리고 밤에 잘 때가 되면 머리 위에서 나를 내려다 봐. 얼마나 무섭고, 싫은지 몰라"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내가 바람 피웠던거, 그것도 3년이나 피운 거 정말 죽도록 미안한데… 이제는 잊을 때도 됐잖아. 아니 니 말대로 평생 나 원망하고 그래도 좋은데, 이제 자학은 안 해도 되잖아"

아라는 입술을 바르르 떨다가 말했다.

"누구는 하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나 너 처음 만났을 때 이 정도는 아니었어. 너 때문에 이렇게 된거야. 너랑 그 년 때문에, 니 두 년놈 때문에"

내가 대답 대신 또 그냥 얼굴을 쓸어내리고 있자 아라는 털썩 바닥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말해줄까. 내가 진짜 왜 이렇게 됐는지?"

나는 정말 몰랐다. 니가 왜 이렇게 됐는지.

"그 년 때문이야"

나는 그저 내가 피운 바람 때문에, 그리고 그 수습 과정에서 내가 우유부단 했던 것 때문에, 그게 아라에게 상처를 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다 그 년 때문이라고"

아라의 눈빛에서 원망을 본다. 좌절을 본다. 슬픔과 원한을 본다. 한없이 가라앉아 버릴 것만 같은 깊은 어둠을 본다.

"너는 몰랐다고 할 지도 모르겠지만, 그래, 차라리 몰랐기를 바래. 니가 알면서도 가만히 그 년을 그렇게 냅둔거면 내가 너무 괴롭잖아"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그 순간까지도 몰랐다.

"너 그 년이랑 만날 때, 걔가 나한테 연락한거 알아?"
"뭐? 언제?"

무슨 소리야.

"매일. 매일 매일. 무시무시한 쌍욕, 너 내가 입 거친거 알지? 근데 나는 비교도 안 돼. 그 년은 어디서 본 적도 없는 더러운 욕을, 하루에 50통도 넘게 보내고, 너 잘 때 니 자는 사진, 니 옷 벗은 사진, 니가 쓴 콘돔 사진까지 매일 매일 나한테 보낸거 알아? 아냐고"

웃으면서 이야기 하던 아라의 얼굴은 어느새 차갑게 굳더니 눈물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했다. 그녀의 눈물보다, 그녀의 말이 더 당황스러웠다.

"무슨 소리야. 가영이 걔가 너한테 그런 문자를 보냈다고? 정말이야?"

아라는 급기야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정말 몰랐냐, 정말 몰랐냐고"

정말 몰랐다.

"나는 니가 참으라고 해서 참았어. 그 년이랑 한번만 더 싸우고 지랄하면 그냥 둘 다 버리겠다는 니 말, 니 그 말이 무서워서… 아니 그냥 나한테만 두 년 다 버린다면서 그 년한테 가버릴까봐 그게 무서워서 그냥 혼자 꾹 참았다고. 내리 3년을. 알아? 그 년이 온갖 쌍욕과 조롱을 나한테 퍼부을 때, 나만 참았다고."

나는 정말 몰랐다. 모른다고 그 업이 사라지지야 않겠지만.




가면





가영과 나는 사내커플이었다. 작은 마케팅 회사에서 청춘남녀들이 하루종일 가족보다도 더 오래 바쁘게 일하다보면 불꽃 같은 우정이 생기거나 전장 속의 사랑이 싹트기 마련이다. 우정과 사랑의 수식어가 바뀐 것 같아도 사실이 그렇다.

동갑내기 그녀는 적어도 당시의 나보다는 이래저래 더 우월한 여자였다. 그녀가 엄청 우월했다기보다는 내가 부족한 형태로. 지질한 너드같은 나와는 다른, '보통에서 살짝 그 위를 넘나드는' 계급의 사람이었다. 사랑에 무슨 조건이 있겠느냐만 적어도 결혼을 서서히 생각할 나이의 남녀에게는 그렇지 않다. 나는 그래서 사실 딱지 맞을 것을 예상하고 고백했다. 오히려 속으로는 '그래, 차라리 딱지 맞고 이제 쿨하게 정말 열심히 다른 여자애 알아보자' 라고 생각했었다. 그게 정말 그 1년 동안의 허무한 짝사랑을 끝낼 방법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좋아, 대신 다른 사람한테는 절대 비밀이야. 말하는 순간 바로 난 회사 관두고 너랑 헤어질거야. 난 사람들이 뒤에서 너랑 나 두고 수근거리는거 죽기보다 싫어"

예상하지 못한 전개에 당황했지만 나로서는 정말 기쁜 대답이었다. 물론 다른 누군가들에게 자랑할 수 없다는 것은 마음 한 켠이 조금 쓸쓸해지는 이야기였지만 상관 없었다. 오히려 '나만의 연예인'이나 다름 없었던 그녀를 그렇게 나의 곁에 둘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녀는 상상 이상으로 철저했다. 사내커플은 결국 누군가에게 들키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는 들키지 않았다. 심지어 가장 가까이서 일하는 이들조차 짐작도 하지 못했다. 우리는 단 한번도 단 둘이 같은 시간에 퇴근한 적이 없었고, 같은 회사를 다니는 기간 동안 둘이 같은 시기에 휴가를 쓴 적도 없다. 그녀가 좋아하던 해외여행도 오로지 금요일 밤에 가서 일요일 밤, 월요일 새벽에 들어오는 것이 다였다.

그 철저함 이면으로, 다른 이들이 우리를 연인으로 생각하기에 우리는 너무 갭이 컸다. 지금의 내 모습만 아는 사람이라면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당시의 나는 분명한 찌질이였다. 외모도, 생각하는 것도 관심사도 수준도. 돌이켜 생각해보면 가영이 나를 받아준 이유조차 궁금할 정도로. 그저 어쩌면 여자들 일생에 한두번쯤 찾아오는 '착하고 못난 똥차와 사귀는 시기'였는지도 모른다.

대신 나는 정말 그녀에게 순정을 바쳤다. 가영이 화를 내도, 짜증을 내도, 못되게 굴어도 나는 혼자 분을 삭힐 지언정 마냥 그녀를 즐겁게 하기 바빴다.

갑자기 그 한참 이후의, 언젠가의 술자리에서 어느 직장 여자 동료가 술에 취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솔직히 지금 남편 처음 만났을 때는 외모도 취미도 말하는 것도 뭐 여자 챙기는 것도 다 엉망진창이었어요. 내가 너무 외로워서 그냥 만나보자고 했는데, 딱 알잖아요. 이 이 남자 연애경험 별로 없구나 싶은거. 연애 못하는 티도 많이 났고, 지금도 그렇지만 사람이 너무 꾸밀 줄도 모르고. 근데 어느 부분에서 마음이 열렸냐면… 한번은 내가 그냥 그만두자고 하면서 막 되게 모질게 가슴에 상처주는 말을 했어요. 정나미 떨어지고 그냥 돌아서게 하려고. 안 그러면 이 남자한테서 미안해서 나도 못 헤어질 거 같애서. 근데 그렇게 막 되게 모진 말을 했는데, 그래서 막 그게 분명히 그 사람한테도 상처가 됐는지 눈물 흘리고 손까지 떨리는거 보이는데도… 끝까지 나한테 '그래도 나한테는 니가 제일로 이뻐서 사귀는 내내 즐거웠어. 나같은 놈이랑 사귀어줘서 고마워. 행복해라' 하면서 돌아서는데… 그리고 막 자기 감정 주체 못하고 얼굴 막 쓸어내리면서 가는데 아 그 뒷 모습이 진짜…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거에요. 내가, 내 주제에… 내가 정말 내 스타일의 마음에 드는 남자 만난다고 해서 내가 이 남자처럼 나한테 잘할 그럴 사람이 또 있을까? 뭐 연애 감정 좀 지나면 본성 나오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그 누가 이 남자만큼 나한테 무식하게 잘해줄까 싶더라구요. 그래서 다시 불러서 잡았죠"

…나는 그 이야기를 듣는데 마치 내 이야기를 남에게서 듣는 것 같았다. 그 정도로 나 역시 가영에게 잘했다. 한달 월급 160만원 받던 시절에 카드값만 180만원을 썼다. 데이트 비용이 그랬다. 물론 가영에게는 가급적 티도 안 냈다.

그래도 즐겁고 행복했다. 호구의 연애란 그런 것이 아니던가. 마치 부모의 그것마냥 사랑하는 그녀가 무엇을 해도 좋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것. 하지만 그 행복함은 매번 오래가지 않았다. 내 딴에는 정말 최선을 다해 하는 연애였지만 그것이 가영의 눈에는 언제나 부족했던 것이다.

내가 모처럼 정성을 다해 고른 그 선물도 가영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고, 내가 모처럼 차려입은 옷도 가영에게는 패션 테러였으며, 내가 모처럼 찾아본 데이트 코스는 그녀에게 뻔하고 지루한 곳이었다.

"… …"

돌아오는 길의 택시 안은 언제나 조용했다. 데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연인들의 아쉬운 조잘거림 대신 침묵이 그 자리를 곧잘 대신했다. 나의 손길마저 부정한 채 그저 멍하니 차창 밖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내가 느낀 감정은 2년에 걸쳐 서서히 초조함에서 당혹감, 외로움에서 자괴감으로 바뀌어 갔다.

그것이 정점이 된 계기는 언젠가 명동에서 우연히 만난, 가영의 사촌오빠였다.

"어! 가영아!"
"어?! 형석 오빠!"

데이트를 하던 중, 횡단보도를 건너려 대기하던 중 갑자기 옆에서 가영을 보고 아는 척을 하는 왠 훤칠한 남자. 누군가 싶어 어리둥절하고 있는 찰나 먼저 사근사근하게 "아, 가영이 사촌 오빠에요. 둘은… 남자친구?" 하고 씩 웃는 그. 사촌오빠라는 말에 경계심을 풀며 씩 웃고는 악수를 나누기 직전 가영의 말.

"아니야, 남친은 무슨. 그냥 친구야"

쑥쓰럽게 웃으며 악수를 내밀던 나의 표정은 빠르게 굳어갔고, 뒤늦게 다시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웃어지지 않았다. 눈치 빠른 사촌 오빠는 "어어, 그래요. 어쨌든 둘이 재미나게 놀아요" 하고 금방 사라졌다. 횡단보도를 건너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려고 했지만 머릿 속에서 "그냥 친구야" 라는 말은 쉬이 떠나지 않았다.

차라리 그때 화를 냈다면 어땠을까. 가영은 이후에 들린 식당에서 평소답지 않게 "그냥, 이모가 알면 이러쿵 저러쿵 막 어른들한테도 말하고 그럴 거 같아서 그랬어" 등의 말로 애써 수습하려 했고, 나도 "그래, 뭐 당황스러울만해" 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결국 그 날은 도저히 감정조절이 되지 않아 저녁식사 후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의 나는 참 외로웠다. 지난 2년간의 연애가 송두리채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그 무렵이었던 것 같다.




"거의 우리 5~6년 만 아니에요? 아니 더 됐나?"

대학교 시절, 죽어라 열심히 활동했던 길드의 유일한 여자 멤버, 아라였다. 단 한번의 오프라인 정모에서 은근한 썸과 아쉬움을 남긴 채 헤어졌던 우리는 아주 뜻밖에 역시나 함께 활동했던 멤버 재훈을 통해 만날 수 있었다. 셋이 보기로 해놓고 정작 재훈이 다른 급한 약속으로 빠졌지만, 확신컨데 나와 아라는 아쉬워하는 대신 오히려 기뻐했던 것 같다.

"영화요? 좋아요! 뭐 볼까요? 보시고 싶은거 보세요. 저는 다 좋아요"

신선했다. 언제나 까다로운 취향에 맞추어 신중히 고르고 까탈스러운 재가를 거쳤어야 했던 가영과는 많이 달랐다. 내가 원하는 것을 존중하는 그녀의 모습은, 어쩌면 연인 사이에서 당연토록 누렸어야 할 그 무엇이었을런지도 모른다. 물론 그저 오랫만에 만난 '아는 여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사이에 여자친구까지 투영해서 비교하는 내 모습이 무척이나 한심하고 못났지만, 그만큼 그런 감정에 목말랐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정말 재밌었어요. 우리 조만간 또 봐요!"

밥 먹고 커피 마시며 대화하고 영화 보고 헤어지는, 가영이의 표현을 빌어 "연애 못하는 것들이나 하는 뻔하고도 재미없는 데이트 코스"에 정작 나 이상의 묘한 긴장과 설렘을 온 몸으로 표현해주는 아라가 좋았다. 단언컨데, 가영과의 연애 중에 단 한번도 받아본 적 없는 어떤 그런 행복 어린 표정과 시선이 좋았다.

"그래요"

이제 인사를 하고 집을 향해 돌아서야 할 타이밍에 서로 뭔가 묘하게 아쉬어서 미적대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들뜬 내 마음. 반나절 내내 두근거리는 마음에 어떤 확신을 쏟아내는 아라의 말.

"아, 근데 혹시 요즘에 만나시는 분 있으세요?"

물론 그 말에 나는 "아니요. 있으면 좋겠죠. 저 요즘 엄청 외로워요" 하고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대답했고, 밝아지는 아라의 표정을 보며 나는 우습게도 가영의 얼굴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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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들 소설

아들이 누운 병원 간이침대의 머리 맡에서 나는 잠든 아들의 목에 수건을 감는다. 이 늙은 애미의 힘만으로는 저 성난 것의 힘을 이길 수 없다. 약에 취해 잠든 아들의 목에 수건을 감고 마음을 독하게 먹는다.

'이 애미도 곧 따라갈거니까, 울지 말고 기달리고 있어'

눈을 질끈 감으며 있는 힘껏 수건에 체중을 실어 잡아당긴다. 곧장 눈을 뜬 아들은 컥컥 거리며 아둥거린다. 자식의 명을 끊는 이 지독한 애미를 원망하거라. 니는 죄가 없다. 내가 잘못해서 너를 그리 낳은 내 죄다. 니 죄까지 모조리 내 가지고 지옥 갈라니까 너도 이 지랄맞은 곳에서 밤마다 무섭고 외롭다고 울지 말고 천국가거라. 아들아 미안하다. 이 애미가 미안하다.

"아들 미안해"

어두운 병실 가득한 헐떡이는 소리. 그 영원과도 같은 고통 속에서 버둥대던 아들의 몸짓이 갑자기 축 늘어진다. 이 모진 어미는 그럼에도 한참을 더 수건에 몸을 지탱한다. 급기야 뚜둑이는 소리와 함께 자식의 명이 온전히 끊어졌음을 느낀다. 그 소리에 내 몸의 힘도 사르르 흩어지며 울음이 터진다. 모든 것이 끝났다. 아들 사랑해.

"엄마가 미안해 아들"

바닥에 주저앉았다. 자그맣게 터져나온 울음은 어느새 40년 한이 담긴 통곡이 되었고, 닫힌 병실의 문이 열림과 동시에 간호사의 비명도 울려 퍼졌다.






우리 아들 






"아이고 참 순하다. 애기가 어쩜 울지도 않누"

아들은 순했다. 갓난쟁이를 시장통 그 시끄러운 곳에 업고 가도 생전에 한번 우는 일이 없었고 그저 이 애미 등에서 그저 조용히 잠자다가 밥을 주면 곱게 먹고 이쁜 똥을 쌌다. 남편 복 없는 년은 자식 복도 없다는 말이 나한테는 틀린 말이라고 믿었다.

"근데 애가 너무 좀 심하게 조용한거 아녀?"

어느 날이었다. 순영 엄마가 한 말에, 내심 마음 속 걸리던 생각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덕이는 울지 않았다. 그리고 이 어미와 눈을 맞추지 않았다. 엄마, 하는 한 마디도 늦었다.

"엄마"

라는 그 말에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다음 말이 늦어도 너무 늦었다.




'병신을 낳은 병신'이라는 말에 내 눈알이 돌았다. 시장통에서 칼춤을 추고, 찾아간 시댁에서는 피눈물을 흘렸다. 천애고아는 세상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었다. 무능한 애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마음을 독하게 먹는 것 뿐이었다.

"걱정말어, 엄마만 믿어"

애기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누워서 버둥이며 하루종일 천장을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다. 일을 하고 돌아와 집에서도 부업을 하며 하루 4시간 반을 자면서 그리 낮인지 밤인지 도저히 구분이 되지 않는 하루하루를 멍한 머리로 살았다.

"우르르르르, 까꿍! 까꿍!"

머리 맡에 달아놓은 모빌에도, 책에도 인형에도 아들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오로지 "엄마" 한 마디. 밥도 똥도 잠도 그저 "엄마" 한 마디. 그래서 그 말은 더 특별했고, 엄마를 더 강하고 아프게 했다.



"엄마"
"응, 엄마가 일 다녀왔으니까 우리 애기 밥 먹자"
"엄마"
"어이구 우리 애기 오늘은 똥 가렸네. 잘했어"
"엄마"
"그려그려 우리 아들, 피곤하지? 엄마가 넨네코코 해줄테까 푹 자자"

8살 아들을 재우고 스탠드 하나에 피곤한 눈을 부비며 쇠꼬챙이로 손가락 마디 하나만한 미니 파이프에 쇠찌꺼기를 걸러낸다. 하루 온종일 일하고 그 피곤한 눈으로 이 피곤한 짓을 새벽 1시까지 매일해야 된다. 눈에 핏발이 서고 손가락은 쇠독이 올라 짓무르지만 그래도 이걸 하면 아들 분유 한 통이 더 생기고 아들의 상담비가 생긴다.

"아들"

엄마도 점점 말이 없어진다.

"아들"

엄마가 배고플 때면, 엄마가 힘들 때면, 엄마가 죽고 싶을 때면 그 말을 마음 속으로 몇 천 몇 만번을 더 떠올렸다.

"아들"




"많은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병신이라도 좋으니까 아프다, 배고프다, 엄마 나 머리가 아파요, 다리가 아파요, 이렇게 말이라도 못하는 거에요?"

나의 말에 의사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저 언제나처럼 "지켜봅시다" 하고 약을 내어준다. 나는 이미 이 약에 효과가 없음을 알면서도 아들을 다그쳐서라도 꼭 먹인다. 단 한 끼도 거름이 없이.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을지 모르니까.





"으어어어어!"

다른 것은 하나도 안 닮은 것이 힘과 등치만 지 아비를 그리도 닯았는지 15살 놈이 어지간한 어른만하다. 병원 한번 가기가 벅차다. 어르고 달래고 안고 졸라서 간신히 버스에 태워도 난동을 부리는 통에 연신 고개를 숙이고 말리고 야단이 난다. 택시를 타면 결국 기사가 내리라고 소리를 칠 때까지 난리를 피운다.




"으가가아아!"
"아이고 이 눔아, 이 눔아!"

아들을 아침마다 의자에 사지를 묶어놓고 출근하는 어미의 마음. 하루종일 불안하고 걱정되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건만 오늘도 그 무식한 힘으로 의자를 반쯤 부수고 그 짐승 같은 힘으로 온 방안을 다 부수고 찢었다.

"이 눔아"

아들의 어깨를 내려치면서도 미안하다. 얼마나,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었을꼬. 애미가 죄인이다.




몇 번이고 자살을 마음 먹었다. 임신한 나를 두고 그 놈이 떠났을 때도, 시댁 아닌 시댁에서 소금세례를 받고 피눈물을 흘렸을 때도, 눈밭에서 굴렀을 때 그냥 그렇게 모질게 놔두고 올 것을 다짐했을 때도, 둘 다 냉골방에서 열이 펄펄 끓으며 사경을 헤멜 때도, 그 모든 시간 속에서 죽음을 항상 염두에 두었고 그럼에도 미련하게 참고 또 참으며 버텼다.

"아들"

나이 서른을 바라보는 다 큰 아들의 똥칠한 벌거벗은 몸을 씻기며 "시원해?" 하고 이 어미는 또 웃는다. 시원해서 좋다고 "헤"하고 웃는 그 얼굴은 세 살 때나 서른이나 하나도 다름이 없었다. 어쩌다 고기반찬이라도 올려주면 무어라 무어라 알 수 없는 말을 웅얼거리며 좋아한다. 어미는 굶어도 너는 배불렀으면 좋겠다. 이 모자란 것보다 딱 하루만 더 살았으면 좋겠다. 




"여기에 지장 찍으세요"

손이 달달 떨린다. 참담한 마음에 할 말도 없지만 이대로 또 쫒겨나면 이제는 또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아들이 잘한 것도 없지만, 아들도 온 몸이 다 상했다. 얼마나 두들겨 맞고 얼마나 괴롭힘을 당했는지, 이 미련한 놈이 저 남자 간호사의 얼굴을 보는 순간 또 오줌을 지린다.

"어머니, 저희도 최대한 사정을 봐드리고 싶은데, 저희가 아무리 병원이라고 해도 되는 일이 있고 안되는 일이 있거든요"

지장을 찍으며 힘이 빠진다. 그럼에도 그저 이 모지리 아들은 엄마랑 집에 간다고 좋아한다.




이제는 다 틀렸다고 생각했다. 갈 병원도 없고 돈도 없다. 이 늙은 몸은 하루가 다르게 쇠해가고, 이 미련한 놈도 나 죽고나면 그 무슨 꼴을 당할지도 모른다. 흉흉한 소문도 들었다. 무료 요양소에서는 이런 젊은 장애인들 장기를 빼가는 놈돌도 있다고. 아니더라도 딱 죽지 않을 만큼만 먹을걸 주고 밤낮으로 때려 부려먹는다는 말도 들었다.

아니다 아니다 아닐 것이다 생각해도 이제는 내가 죽고 나면, 그때는 우리 아들 뜨신 밥 한 끼 멕여줄 사람이 없구나 하는데 생각이 닿는 순간 한없이 눈물이 흘렀다. 다 이 어미 탓이다. 진즉에 차라리 둘이 콱 죽어 버렸으면 덜 힘들어도 됐을텐데, 내가 니한테 덜 모질었어도 됐을텐데.

평생의 삼분지 이를 아들 뒷수발 들며 살았고, 아들은 평생을 그저 밧줄에 칭칭 묶여 살았다. 그것이 사람인가 짐승인가. 개도 이만치 묶여 살지는 않았을거다.

'그래'

딱 한번만 더 모질어지기로 했다. 딱 한번만 더. 이미 골수천번도 넘게 모질게 먹었던 마음, 딱 한번 더 모질어지면 된다. 그때는 더이상 이 애미를 원망하지도 않아도 된다 아들. 미안하다 아들. 죽어서 만나자 아들. 아니, 다음 생에는 나보다 좋은 부모 만나서 건강한 정신에 건강한 육신 물려받고 부디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아들. 미안해 아들, 사랑해 아들.

"애가 잠을 못 자는데, 진정제 투약 좀 해주세요"
"에휴, 네 알겠어요"

아들, 미안해. 정말 미안해.

공유오피스 소설

말로만 듣던 힙한 공유오피스에 사무실을 얻었다. 물론 독립 사무실도 아니고 그냥 임자 따로 없이 테이블만 빌리는 것인데 월 35만원의 비용은 조금 애매한, 아니 분명 비싼 감이 있기는 했지만 칙칙한 동네 사무실을 떠올려면 이 곳은 너무나 멋지고 힙한 곳이었다.

'게다가'

커피도, 맥주도 공짜라는 점에서 충분히 돈 값 한다고 느꼈다.

'하루에 커피 두 잔, 맥주 두 컵만 마셔도…'

그렇게 애써 합리화했다. 그만큼 마음에 들었다. 깔끔하고 멋진 설비도 설비였지만 그보다 더욱 마음에 든 것은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에너지였다. 아니 그 사람들 그 자체였다. 어디 뉴욕이나 LA 어딘가의 글로벌 사무실에서 일할거 같은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하나 같이 에어팟에 스타일리시한 패션, 애쉬 염색을 하고 흥겹게 몸을 흔들며 맥북으로 열심히 무언가의 일들을 하는 모습들은 과연 멋짐 그 자체였다. 이렇게 힙한 곳에서 이렇게 힙한 사람들과 힙하게 일을 할 수 있다니. 정말 35만원이 아깝지 않았다.

"나 패스트워크스페이스에 사무실 잡았어"

여친 주리한테 자랑했다. 여친은 "정말?" 하며 놀라워했다. 사실 여친 성격상 시큰둥해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나 아는 언니도 거기에서 서너달 정도 잠깐 일했었대. 엄청 멋있는 곳이라면서. 오빠 부럽다" 하면서 부러워했다. 더 신이 났다.






공유오피스





조금 우습고 허세스럽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괜히 거기에 찌질한 모습으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한동안 살까 말까 고민하던 에어팟도 사고 신발도 사고 나 역시 최대한 멋을 부리고 사무실에 들어섰다. 오전 10시 반, 의외로 밤에 비해 사람들이 오히려 더 적었다. 하긴, 이런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아침형 인간보다는 저녁형 인간들이 더 많겠지 하고 생각했다.

"음"

음악을 들으며 일을 하려니 확실히 신나고 좋긴 한데 집중력이 떨어진다. 커피 한잔 마시고 할까, 생각하던 차에 '아 맞다 공짜지!' 하는 생각에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 카운터 쪽으로 걸어가노라니 그냥 맥주 한잔을 마시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그렇게 하고자 마음 먹고 그쪽으로 걸어가니 아직 오전인데도 연거푸 잔을 비우고 있는 잘생긴 또래 하나가 보인다. 옷 차려입은게 그야말로 이 공유 오피스의 화신 같다. 스타일리시하다.

"어, 못 보던 분인데. 새로 계약하신거에요?"

놀랍게도 그가 나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규진이라고 이름을 밝힌 그는 나보다 한 살 위였다. 여기 강남점이 생기자마자 입주해서 벌써 1년 넘게 일을 했다고 했다. 무슨 일을 하나고 했더니 디자인 일을 한다고 했는데 자기는 잡스럽게 이 일 저 일 다 한다고 했다. 로고 디자인부터 웹디자인, UI, UX까지 다. 실력이 어마어마하신 거 같다고 하니 사실은 실력은 쥐뿔 없고 그냥 엄청 빨리 일을 쳐내주는 바람에 오래 거래하면서 일거리 던져주는 분들이 좀 있을 뿐이란다.

"그쪽은 무슨 일 하세요?"

자그마한 소품 관련 쇼핑몰 창업 준비한다고 하니 고개를 끄덕이더니 혹시 일거리 생기면 말만 하라고 번호 교환을 하잔다. 이 사무실에 친구 하나쯤 만들어 두는 것도 좋을 거 같고, 디자인쪽으로 이 일 저 일 다 할 줄 아는 사람 주변에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어느새 카톡 친추까지 했는지 [ 안녕하세요 ] 하고 말까지 건다.

"오, 여친 분 엄청 이쁘시네. 잘 어울린다. 몇 살이에요? "
"헤헤, 올해 서른이에요"
"우왁? 정말? 완전 동인이네. 한 20대 중반? 초반까지 봤어요"
"여친 들으면 기뻐서 춤 추겠네요"
"하하, 여튼 수고하시고, 이따 또 봐요"

그가 손을 흔들길래 조금 아쉬운 마음에 물었다.

"아 들어가세요?"
"그건 아니고, 그냥 답답해서 좀 나가서 스케이트 보드 좀 타고 올라구요"
"오 그렇구나"
"그럼 이따 봐요"
"네"

그리고 자기 자리로 가서 슥 스케이트 보드를 꺼내들고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그 모습은 남자가 봐도 멋있었다. 게다가 이 사무실에는 저런 좀 뭔가 일도 잘할거 같고 놀 줄도 알 것 같은 스타일의 사람이 최소 몇 십 명은 된다. 이 넘치는 에너지는 정말 최고다.



"어, 나도 안에 들어가 볼 수 있어?"
"그럼"
"대박"
"대신 나랑 같이 들어가야 돼. 미팅한다는 명목으로는 입실이 가능하지만, 아무나 들어 올 수 있어서야 관리가 안 될거 아냐"
"그렇구나"

며칠 뒤 토요일, 사무실을 방문한 주리는 안에 들어오더니 신이 나서 여기저기 사진을 찍는다.

"나 인스타에 올리고 싶어"
"그래"
"저거도 공짜라며? 커피"
"응, 공짜. 맥주도 공짜야"
"진짜 좋다"

함께 커피 한잔씩을 마시며, 마주보는 카페 테이블에 앉아 조금 수다를 떨고 있노라니 누가 아는 체를 한다. 규진이 형이다. 벌써 우리는 며칠 만에 제법 친해졌다.

"안녕! 어? 오늘은 여친도 함께 왔네? 안녕하세요"

규진이 형이 인사를 하며 우리 테이블에 합석을 한다. 주리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누구…?" 하고 묻다가 곧 "아! 같이 친해졌다고 하던 그 분?" 하고 묻는다. 규진이 형은 곧바로 "맞아요, 그 분이에요" 하고 씩 웃는다. 핸섬한 그 미소에 나까지 조금 으쓱해진다.

"여기 오늘 처음 와봤는데, 디게 분위기 멋있네요"
"그쵸? 그래서 저도 반해서 계속 여기에서 일하고 있어요"

그렇게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규진이 형은 "그럼 두 분 재밌게 노세요" 하고 좌르르 바닥에 스케이트 보드를 굴리며 저쪽으로 사라졌다. 이렇게 이 안에서 저런걸 타는건 당연히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관리자 안 보는 데서야 누가 뭘 어쩌겠는가.

"저 사람이구나."
"응, 잘 생겼지?"
"아니"

하지만 주리는 고개를 저었다.

"좀 사람이 어설프게 날티 나. 내 취향 아냐. 별로"
"그래도 좋은 사람이야. 그 오픈 이벤트 페이지 디자인한거도 저 형이 공짜로 해준거야"
"난 그거도 디자인 별로던데"
"그래"

주리가 조금 규진이 형에 대해 경계하고 불편해하는 기색이길래 나는 얼른 다른 주제로 대화를 돌렸다. 주리는 곧 또 다른 힙한 분위기의 사람들과 공간을 보며 기분을 풀었다.





"사실 창업이라는게, 리스크 생각하면 안 하는게 정답이긴 하죠. 아무리 힘들고 뭐 같아도 한달 20일만 어떻게든 버티면 알아서든 월급 통장에 딱딱 돈 꽂히니까. 당장 직장인 아니면 우린 진짜 집 얻을 전세대출도 힘들잖아요"

오늘은 초소형 스타트업에 대해 여섯 명이 함께 진행하는 미니 세미나를 들었다. 뻔한 이야기들이 많긴 했지만 그래도 다들 대기업에서 한자리씩 하다가 뜻이 있어 박차고 나온 사람들이라 그런지, 같은 말을 해도 훨씬 설득력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래봐야 평생 그랜저 이상 못 끌어요. 그게 현실이죠. 적당히 대기업 다니다가 가정 꾸리고 소나타 내지 그랜저 몰고 아들 딸 하나 낳아서 어떻게 어떻게 아둥바둥 살아봤자 딱 그게 한계라는거죠. 그나마도 엄청 잘 풀린거고, 잘 안 풀리면 훨씬 그거보다 피곤해지는거고.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사람의 꿈이 작아져요. 그냥 현실에 적당히 만족하게 된다는거죠. 절약, 자식, 부양, 학원비, 가장, 이런 단어에 치여 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나도 그렇게 점차 현실에 안주하게 되는게 싫어서… 아니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똑같이 그냥 그렇게 평생 기획서나 만들면서 9시 출근 8시 퇴근 반복하며 연봉 200 남짓 오르면 만세하고 싶어지는 그런 중소기업 또 찾아다니는게 무서워지고 싫어졌다. 그 싫어진 그게 설령 진짜 인생의 정답이라 할지라도 조금 뭔가 나에게 마지막 희망을 주고 싶었다.

'너 그렇게 평생 샐러리맨으로 살다가 끝내고 싶은거야?'

그 돌파구로 찾은게 조금 우습지만 이 짓이었다. 뭐 이것도 벌써 2주가 넘었는데 쇼핑몰 기획서만 몇 페이지 넘기지도 못했다. 그러던 차에 미니 세미나를 한다고 하길래 무슨 이야기들 하나 싶어 참여해봤는데 저 탈모끼 보이는 체크 남방의 힙스터 아재 말에 새삼 공감했다.

한참을 듣고 있노라니 어느새 소리도 없이 뒤에 나타난 규진이 형이 내 손목을 슥 끌어당기고는 구석으로 돌아가서는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저런거 듣지마. 도움 하나도 안 되고 시간만 잡아먹어. 저 사람들 뭔가 좀 뜻 있고 깨어있고 잘난거 같지? 다 그냥 지금 하는 일 답 안 나올 거 같으니까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단합대회 하는거야. 저 사람들 저거 코드 맞잖아? 맨날 그룹 지어 다니면서 술 마시고 점점 더 망가져. 그러다 창업자금 올인나면 그렇게 허무하게 하나둘씩 흩어지고. 최악이야 저런거"

규진의 말에 뭔가 마음 한 구석이 찔린 기분이라 부끄러우면서도 민망했다. 그리고 그 날은 결국 짐을 일찍 챙겨서 집으로 돌아갔다.




"한달 또 연장한다고? 이주일이면 다 한다고 하지 않았어?"

주리는 입술을 빼쭉한다.

"막상 해보니까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고. 디자이너도 없고, 혼자 구현해보려니까 영 후진거 같고 그래서, 다시 갈아엎고 엎고 하다보니 좀 시간이 더 걸리네"
"맨날 여기서 이쁜 여자들 보느라 눈 돌아가서 그런거 아냐? 보니까 엄청 꾸민 언니들도 있더만. 그 사람들 여기서 진짜 일하는거 맞긴 맞어? 남자 꼬시러 온 여자들 같애"
"엥? 어디어디?"
"오빠!"

내 너스레에 주리는 주먹을 쥐어보이더니 피식 웃는다.

"아 놔 진짜"
"야, 내가 다른 여자한테 눈이나 돌릴 남자냐? 너나 여기 맨날 와서는 외국인 백인 잘생긴 남자들 쳐다보지 마라"
"여기 잘생긴 남자가 어딨냐?"
"여깃…"

"저요!"

내가 농담을 하려던 차에 어느새 규진이 형이 끼어든다. 주리는 "둘 다 미친 거 아니에요?" 하며 웃는다. 처음에는 이렇게 불쑥불쑥 끼어드는 것에 불편해하던 그녀도 어느새 능청맞은 규진의 성격 탓에 제법 친해졌다.

"근데 뻥 안치고 여기 미친 사람이 절반은 넘을걸. 새벽 2시 넘어가면 비정상들 너무 많아. 특히 약간 취한 외국인들."
"규진 오빠도 그 중 하나 아니에요?"
"하하, 근데 맞음. 그리고 너도 마찬가지잖아"
"난 아님. 형만 미침"
"사실 나도 아님"
"둘 다 똑같이 미쳤어"



즐겁긴 했다. 그러나 문제는 일의 진도가 정말 안 나갔다. 2주면 될 것이라던 내 쇼핑몰은 기획부터 싹 뜯어고치고 요즘 최신 트랜드를 반영한 디자인의 시안만 계속 고를 뿐이었다. 맥주가 늘었다. 내일, 내일, 그리고 내일. 새벽이 되면 어느새 관리자들이 퇴근하고 금요일 저녁에는 외국인들이 많은 밤에는 무려 파티 분위기가 되기도 한다. 처음에는 다른 한국인들처럼 쭈뼛대며 잘 끼지 못했던 나는 어느새 규진이 형 덕분에 그들 사이에 낄 수 있었고 패션 쇼핑몰 창업준비를 한다던 지혜 누나, 나연이와도 친해졌다.

"어어, 잘 자"

그 무렵이었다. 일의 진도 문제로 몇 번 주리와 크게 싸운 이래로 나는 마음을 쉽게 잡지 못했고, 그때마다 주리는 조금씩 나에게서 마음이 멀어지는 것을 대놓고 보여주고 있었다. 아직 잘 리가 없는 시간인데도 그녀는 잔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고 그녀의 인스타며 뭐며 뒤늦은 시간에 업데이트 되는 것 때문에 나는 불만이 커지기도 했다.



"나연이가 너 좋아하는거 같더라"
"에? 정말요?"
"저번에 지혜랑 셋이라 같이 저녁 먹었거든? 근데 그때 나연이가 너 안 오냐면서 너 귀엽다고 했어"
"에이, 난 또. 귀엽다는 정도야 뭐"

규진이 형은 픽 웃으며 물었다.

"야, 난 또는 뭔데? 그럼 나연이가 너 진심 좋아한다고 하면?"
"그럼 뭐…"
"피팅모델 하던 애들이라 몸매 끝내주긴 하지"
"그쵸"
"여튼 조심해라. 그런 애들 은근 발라당 까져서 어느 날 갑자기 훅 들어온다. 한눈 팔지 말고 조심해라"
"에이 걔가 미쳤대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조금 설레이긴 했다. 괜히 더 신경쓰이고.



"야, 너 밤새 뭐했냐? 왜 전화도 안 하는데?"

금요일 밤, 파티를 하며 새벽까지 놀다가 커피 테이블 옆에서 눈을 떠보니 이미 아침 6시 40분. 그러나 지난 밤 9시에 아는 언니랑 밥 한 끼 먹고 온다던 주리는 밤새 연락이 없었다.

"그러는 오빠는?"

차마 밤새 사무실에서 파티하다가 밤새우고 새벽에 취해 쓰러져 잤다는 말은 못하고 그냥 "나는 어제 피곤해서 일찍 잤어. 근데 너는 들어가면서 연락이라도 해야 되는거 아냐?" 하며 따지기 바빴다.

"나도 그래. 일찍 들어왔는데 오빠 피곤할까봐 전화 그냥 안 한거야"
"뭐? 그래, 그건 좋다 이거야. 너 요즘 내 전화 왜 잘 안 받냐? 저녁에 걸면 한 10번 걸면 제때 받는거 한 서너번이나 되냐?"
"아 진짜 왜 그래? 백수생활 길어지더니 아주 미친거야?"
"야!"



그 날, 크게 싸웠다. 그리고 그 날이 기점이었다. 화해는 했지만, 주리의 마음은 점점 나에게서 빠르게 멀어져갔다. 그리고 나를 만날 때마다 불평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거 할건데. 하긴 하는거 맞아? 하루에 한 페이지씩만 했어도 지금 기획이 문제가 아니라 창업해서 팔고 있겠네"
"후우 야"
"그리고 씻긴 씻는거야? 뭐하는데 진짜. 팔꿈치에 때 이거 뭔데"
"아 진짜 쫌 너 쪽팔리게 할래?"

사무실까지 와서 다른 사람들 많은데서 싸우는건 무척 피곤하고 부끄러웠다. 커뮤니티 매니저가 와서 주의를 부탁드릴 정도였다. 나는 "야, 이럴거면 그냥 오지마" 하고 말해버렸다. 실언이었다. 그 날 이후로 주리는 정말로 이 사무실에 오지 않았다. 물론 다행히 며칠 뒤 화해를 하기는 했지만 그 날 이후로는 "별로 가고 싶지 않아" 하며 사무실쪽으로는 오지도 않았다. 생각해보면 엄청 저렴하게 데이트를 할 수 있었던 나날이었구나 하고 작고 찌질한, 후회 아닌 후회를 할 따름이었다.




이상기미는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지 않던 주리의 휴대폰에 비번이 걸리더니, 급기야는 섹스 빈도가 크게 낮아졌다. 한동안 스트레스를 핑계로 내가 잦은 섹스를 요구하기는 했지만 묵묵히 받아주던 그녀가 어느 날인가부터 그저 고개를 저을 따름이었고, 모텔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주말 이틀 모두를 만나지 못했던 어느 주말을 기점으로 나는 그녀에 대한 불안을 점차 의혹으로 키워나갔다. 내가 이름을 잘 모르는 친구들과의 만남이 늘어났고, 언젠가부터 백화점에서 속옷 매장에서 한참을 고민하던 평소답지 않은 모습에 나는 진한 의혹을 느꼈다. 그저 그녀는 "마음에 드는데 비싸서 고민한 것일 뿐"하고 말했을 따름이지만.

급기야 도저히 참치 못한 어느 날, 나는 몰래 미리 봐두었던 그녀의 폰 비번을 풀고 휴대폰을 뒤지기 시작했다. 흔적을 지운 것인지, 내가 헛다리를 짚은 것인지 별 크게 문제될만한 것은 없었지만 한가지 걸리는게 있었다.

임규진.

지난 주말, 그와 주리가 세 차례 연락을 한 기록이 있었다. 그것도 그냥 전화도 아니고 카톡 전화로. 나름 우리 사무실의 터줏대감이던 그는 지난 한달 전 즈음부터 갑자기 안 보이기 시작했다. 당연히 나랑도 엮일 일이 없었고. 우리는 친하기는 했지만 사무실에서만의 관계였다. 그런 그가 왜 주리와 연락을 했을까. 그리고 왜 그 전의 둘의 모든 대화 기록은 삭제되어 있었으며, 어제 내 폰이 꺼져서 주리의 폰으로 잠깐 지도 좀 찾으려니 왜 그렇게 정색을 했을까.

나는 조용히 주리의 폰을 내려놓고 침대에 다시 누웠다.




"솔직히 오빠 그 신발이랑 그 바지 너무 안 어울려. 너무 겉멋만 부리는거 같아. 그리고 나 이제 좀 신뢰를 못 하겠어. 세상에 쇼핑몰 하나 기획한다면서 벌써 반년이야. 준비를 하기는 하는거야? 그냥 거기에서 사람들이랑 어울려 놀고 먹는게 전부 아냐? 창업 자금 남기는 했어?"
"야, 4천 준비해서 고작 사무실 임대로 6개월에 2백 좀 넘게 쓴게 그리 문제냐? 그리고 2주만에 뚝딱 어설프게 시작했다가 한 큐에 말아먹느니 6개월 걸려서 이 사람 저 사람, 여기 안에 성공한 스타트업 출신들, 대기업 출신들, 외국계 기업 다니던 사람들한테 돈 주고도 못 들을 정보랑 조언 받으면서 신중을 기하는게 어느게 더 잘하는 일일까?"
"아니 맨날 말로는 그러는데 정말 하기는 하는거 맞아? 오빠 일하기는 해?"
"기획안 보여줄까? 지금 버전만 30가지가 넘어"
"아 근데 왜 안 하는데 그럼!"

주리는 초조해했다. 사실 진짜 초조한 사람은 나인데. 그녀가 나의 창업에 관심과 우려를 보내는 만큼, 나도 그녀의 정조와 식어가는 사랑에 대한 초조함이 절박했다. 강남 사무실에서 의왕시까지 뒤를 밟는 것도 피곤한 일이었고 그저 '설마'하는 의심만 가진 채 내 안의 불안함만 극대화 될 뿐이었다. 사실 내 미래에 대한 불안도 마찬가지였고.




"후, 끝났다"

솔직히 나도 어처구니 없지만 8개월차 계약을 마치고 딱 5일 더 지났을 무렵, 드디어 정식 넘버링 '5'의 타이틀을 달고 최종버전의 기획안이 완성됐다. 톡 까놓고 말해 처음 버전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는 디자인이지만, 멀고 먼 길을 돌아 온 것이었기에 처음의 나와 지금의 나는 꽤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다. 그렇지 않다면 대가가 너무 컸다. 근 8개월치의 임대료도 그렇고, 여기에서 사용한 밥값만 해도 그렇고, 무엇보다 주리도 그렇고.

"관두자"

그녀의 이별 선언에 나는 잡을 수 없었다. 주리가 그저 나에게 실망해서 떠난 것인지, 내 의심처럼 다른 무언가의 '의혹'이 있던 것인지, 규진이 처음에 주리에게 보였던 어떤 관심이 정말 단순한 관심종자의 그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인지 수많은 의혹만 남았을 뿐 결국 밝혀내진 못했다. 그냥 그것을 내가 정신 차리는 계기로 삼기로 했을 뿐이다.




"공백기간이 거의 1년 가까이 있는데, 이 시기에는 무엇을 했나요?"

면접관의 질문에 나는 잠시 주저하다가 솔직하게 답했다.

"개인사업을 준비했었습니다"
"어떤 사업이죠?"
"쇼핑몰입니다."
"잘 안 됐나보죠? 지금 이렇게 면접을 보는거 보면"
"네, 그렇습니다"

또 다른 면접관이 웃으며 농담을 던진다.

"그럼 우리 회사 다니다가 또 돈 모이면 다시 창업한다고 훌쩍 나가버리는거 아니야? 창업하는 사람들 많이들 그러던데"

다른 면접관들도 와 하고 웃는다. 나도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너무 제대로 쫄딱 망해서 절대 그런 일은 이제 없습니다. 호되게 데어봤습니다. 돈도 잃고, 여자친구도 잃고 해서요. 이제는 정말 회사 뿐입니다"

'이제는 정말 회사 뿐이다' 라는 멘트가 면접관인 임원들의 마음에 들었는지, 나는 결국 재취업에 어렵게 성공했다.





입사 전날 밤, 나는 오래간만에 어렵게 주리의 연락처로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주리가 받았다. 나는 어렵사리 입을 열고, 근황을 전했다. 돈은 거의 다 잃었지만 다행히 그럭저럭 괜찮은 회사에 재취업 했다고. 모든게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겨우 마지막에 지푸라기라도 잡은 느낌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간신히 멈추었다.

"잘됐네. 축하해"

조금 힘 빠진 목소리. 사실은 하고 싶은 말이 더 있었다. 다시 만나고 싶다고.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고. 이제는 어쩌면 정말 네가 바라는, 그런 조금 안정적인 그런 남자가 되었다고.

"그래, 고맙다"

하지만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했다. 그저 나 역시 무미건조한 말을 건냈을 뿐. 그러나 나는 다시 한번 용기를 내기로 했다.

"주리야, 나 말인데…"
"오빠"

그래, 다 알아. 그래도 나는 평생 후회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시 우리 시작해보면 안될까"

한참동안의 정적이 지나간 후, 주리는 물었다.

"오빠는 내가 좋아?"

나 역시 즉답 대신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야 어렵게 메인 목을 조용히 풀어넘기고 대답했다.

"어"

그리고 역시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주리의 대답 대신 전화가 끊어졌다. 곧바로 다시 걸었지만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답이 돌아올 뿐이었다. 배터리가 다 된 것일까. 나는 그 날 밤새 다시 그녀의 전화를 기다렸지만 전화는 걸려오지 않았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첫 출근을 하며 그녀에게 나는 문자 메세지를 남겼다.

[ 주리야 내가 간밤에 괜히 짜증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다. 힘내고, 언젠가 다시 인연 닿게 되면 그때는 부디 웃는 얼굴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행복해라 ]

답장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나는 그래도 괜찮다. 정말 괜찮다. 첫 출근, 다시 힘을 내자. 내야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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