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나비 소설

처음에는 아무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저 가벼운 접촉사고, 아니 그냥 사고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학생, 괜찮아?"
"예예"
"아니 저기, 아이, 어이!"

전날 연습에 늦은 것도 모자라 시합 날에 또 늦잠을 잤기에, 감독님의 구타가 두려웠다. 그냥 가볍게 차 범퍼에 가볍게 무릎이 닿은 정도의 사고였기에 그냥 그렇게 차를 보내고 정신없이 학교까지 달렸다.

'어어?'

학교에 거의 다 왔을 무렵, 뒤늦게 시큰한 통증이 왔다. 아차 싶었지만 별 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미 늦었기에, 몸도 제대로 못 푼 상태로 시합에 나갔다. 풀 타임으로 경기를 다 뛰고, 졌다는 이유로 시합이 끝나고 기합을 또 받았다.

그리고 그날 밤부터 나는 무릎 통증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일상 생활에는 큰 지장이 없는 수준이었지만, 경기를 뛰었다가는 여지없이 1쿼터만 끝나도 무릎을 감싸쥐고 이를 악물어야 했다. 처음에 병원에선 가볍게 인대가 놀란 정도라고 했지만 한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통증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이어지는 훈련과 시합 덕분에 나는 진통제를 달고 살았다. 온갖 마사지며 약물이며 안 써본 방법이 없지만 효험이 없었다. 신경쪽 문제인 것 같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절대 무리하면 안됩니다"

이미 병원에서는 통증 완화를 위해서 농구를 그만두라고 조언한 상태였다. 이대로 계속 무리했다가는 일상 생활에도 지장이 올 수 있다는 의사의 경고는 무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풀타임 경기가 어려운 수준으로 통증이 악화되었고, 1학년 태경이의 실력이 성장함에 따라서 나는 점차 벤치에 앉는 시간이 늘어났다. 경기 다음 날이면 하루에 진통제 거의 한 통을 다 먹으며 생활하던 내 모습에 엄마도 관둘 것을 권했다.

결국 태경에게 밀려 포인트 가드 포지션을 억지로 뛰며, 그것도 후보로 뛰던 날이 많던 나는 전국체전 지역예선 경기에서 1분도 뛰지 못한 날을 기점으로 농구를 관두기로 했다. 그렇게 학창 시절의 모든 것을 어이없게 잃은 나는 엇나가기 시작했다. 학교도 잘 나가지 않았고, 농구를 관둔 나가리 선배들과 어울리며 학교에 잘 나가지 않았다. '그래도 최소한' 하는 생각에 간신히 고등학교 졸업은 했지만 더이상 세상에는 내가 할만한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존재하지 않았다. 시간 버리는게 아까워 군대부터 다녀왔다.

"정신차리고 이제 일해야지"

군대 전역하고 나서고 한 3개월을 방구석에서 잠만 자니 엄마가 한 소리였다. 일자리를 안 알아본 것은 아니지만, 역시나 이런 후진 동네에 제대로 된 일자리가 있을 리 없었다. 그때 문득 생각난 것이 성기형이었다. 휴가 나올 때마다 어울린 농구 관둔 친구와 선배들. 그 중에서 서울에서 자리 잡았다는 그 형. 제네시스를 타고 왔던 성기 형.

"형, 잘 지내?"
"어어 우리 효원이 이 쉐리, 간만이네. 형은 잘 지내지. 왠일이야? 군대는 전역했지?"
"예, 뭐. 그보다 사실은 그냥 일 좀 할까해서"

술자리에서 형이 야부리 턴, 한달에 몇 백씩 번다던 그 일.

"어어? 왜, 너도 서울 올라오려고?"

조금은 당황스러워 하는 목소리에 실망하며 적당히 얼버무리며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형은 의외로 유쾌하게 대답했다.

"형 자취방 좁아지니까 짐 많이 가져오진 마라"







밤나비







버스를 타고 올라와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전철로 갈아타고 7호선 논현역에서 내린 나. 큰 더플백을 어깨에 메고 형이 말해준대로 논현 초등학교 근처로 향했다.

'와'

시장 골목을 지나며 '서울에도 이런 동네가 있네' 싶어 조금은 반갑기도 했다. 하지만 곧이어 한산한 동네를 바쁘게 걷는 퇴근길의 정장 입은 직장인들과 골목길을 누비는 외제차들, 미용실에 가득한 화려한 화장의 누나들을 보자 가벼운 한숨이 나왔다. 누가 촌놈 아니랄까봐.

"형, 나 거의 다 왔는데"

전화를 하자, 성기형은 "어, 벌써 왔냐? 미안 나 지금 강남역 쪽에 있는데. 그러면, 그… 한신포차 앞에서 기다려라. 한 10분 있다 보자" 하고 뚝 끊었다. 거기가 어딘가 싶어 고개를 두리번 거리다 결국 지나던 아저씨에게 물어 그쪽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있던 수많은 미용실과 그 안의 예쁜 여자들. 벌써부터 그것만으로도 작은 위안이 됐다.




"그 씨입쌔끼가 원래 그래. 전술 좆도 없고 무식하게 애들 체력으로 조지는거만 할 줄 아는 새끼. 영석이 허리 나갔을 때도 죽어라 돌렸잖아. 영석이 그 새끼도 결국 허리 씨발 개좆돼고, 우리 선배 중에 민우 선배도 씨발, 하이튼 그 새끼가 잡아먹은 새끼만 몇 명인지 몰라. 나도 그 새끼 땜에 다리 풀려서 계단에서 굴러서 여기 눈 밑에 이거, 이거 보이냐? 이거 그 때 상처잖아"

아디다스 삼선 츄리닝 바지에 스카쟝을 입고 나타난 성기형과, 청자켓에 검은 스키니 바지를 입고 나타난 그의 친구 원민. 성기형은 같이 운동했던 사이고, 원민이 형도 성기형이 바이크 탈 때 같이 다닌 모습을 몇 번 본 적 있어서 얼굴 정도는 아는 사이다. 농구부 출신의 우리 만큼이나 그 역시 키가 훤칠한 편이다. 새하얀 얼굴에 꼭 여자같이 예쁜 꽃미남 인상이라 성기형이랑 다니면 둘이 사귀는거 아니냐고 누나들이 놀리고 했었는데. 여전히 미남이긴 하다.

"그래서, 신세 좀 지고 싶다?"
"네"
"안될거 없지. 새키, 그래도 어떻게 내 생각을 다 했냐? 내가 니랑 뛸 때 존나 이뻐하긴 했다만. 아, 효원이 이 새끼 패스가 존나 예술이거든. 이 새끼랑 농구하면 존나 재밌어. 아 그리고 효원아, 원민이도 농구 좀 해. 중학교 때까지 농구한 애야 이 새끼도. 여자애 임신시키고 학교 짤렸지만. 레전드 아니냐? 하여튼 잘 왔어"

한참을 이야기하고, 술도 두 병 깠을 때 형은 담배를 피우며 대견해했다. 솔직히 나는 건달 일이라도 배울 생각으로 왔다. 농구만 하던 새끼가 농구 못하게 되고 배운 것도 없으니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는가. 자세히는 말 안 해줬지만, 화류계 일이라고 했으니 기도 쯤 되겠지 싶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뭐? 아…이 새끼. 건달 짓 해서 빨간 줄 가고 싶냐? 븅신도 아니고. 그런 짜치는 일을 왜 해. 하여간 촌놈 아니랄까봐"

성기형은 그저 '건달 짓'을 '빨간 줄 가는 일'이라며 욕할 뿐, 정확히 무슨 일 하는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그러자 원민이 형이 소주를 깔끔하게 넘기더니 말했다.

"선수. 호빠 선수 일이야. 너 할 수 있겠어?"
"호빠? 호스트바요?"

글쎄. 호빠라는 말을 듣는 순간 좆같다고 생각했다. 여자들 밑구녕 닦아주는 일이나 하면서 그 허세를 떨었나 싶어 절로 한숨이 나왔다. 나는 대답 대신 한잔을 더 들이켰고, 그 어색한 공백에 성기형이 말했다.

"더러운 일 하러 올라왔으면, 니도 그냥 좆걸레해. 주먹질 해서 호적 걸레 만드는 것보단 자지 걸레 만드는게 낫지. 여자랑 노닥대고, 따먹고 돈도 벌고. 건달은 씨발, 뭔 영화 찍냐? 기집애들 비유만 좀 맞춰주면 돈이 다발로 나오는데 뭐하러 병신같이 돼지어깨들 뒤닦아주고 다니냐?"




술자리를 마친건 새벽 1시를 살짝 넘긴 시간이었다. 출근해야 되는거 아니냐고 묻자 둘은 웃으면서 "야이 새끼야" 하고 손을 들었다. 간만에 고향 동생 왔는데 오늘도 일해야 되냐며 그냥 쳐놀기나 하라는 그들의 말에 그저 정신없이 놀았다. 술에, 노래방에, 생전 처음으로 룸까지 다녀왔다.

"아 간만에 씨발, 접대하다 접대 받으니 존나 좋네. 아 피곤하다. 원민아, 어떠냐, 이 새끼 잘할거 같지 않냐?"

집 앞에서 들어가기 전, 함께 셋이 오피스텔 앞 화단에 기대앉아 담배를 피우던 그 순간, 원민이 형은 성기 형의 말에 픽 웃었다.

"사이즈 나오잖아. 말 수 없고, 순진하고, 몸 좋고, 착하게 생겼고. 언니들이 환장하겠지. 좋아. 좀만 꾸미면."

그러나 담배를 짓이겨 끄며 어깨를 으쓱했다.

"근데 본인이 한다고 해야지. 그리고 승재 형이 하라고 해야 하는거지, 뭐 우리가 꽂아줄 수 있는 끕이나 되냐. 여튼 나 간다"
"어 그래, 잘 가라"
"들어가요"

그리고는 성기 형 오피스텔 주차장에 세워놓은 베스파를 타고 자기 집으로 향했다. 원민이 형 집은 역삼동이라고 했다. 성기형은 그제서야 얼큰하게 취한 술이 좀 깨는지 "드가자" 하며 나를 이끌었다.




"형 집 좋다"
"그럼"

상상 이상이었다. 하얀 대리석 바닥에 천장에는 무슨 레일 달린 조명에 50인치 TV에… 새하얀 방이 너무 좋았다. 원룸인가 했더니 넓직한 방도 두 개나 되고, 정말 좋았다. 이런게 고급 오피스텔이겠지. 바닥에 옷가지들이 어지럽게 널부러지긴 했지만, 그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형 이런 데는 막 몇 억씩 하지?"

그 말에 성기형은 웃었다.

"미친 무슨 부동산 하냐? 그냥 월세지 뭔 몇 억이야. 그 돈 있으면 장사하지"
"그럼 이런데 월세는 얼마나 해?"
"이백"
"이백?!"

놀라는 나에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증금 이백에 월세 이백"

그러나 나는 월세보다 보증금에 더 놀랐다. 우리 구미 집 보증금도 2천인데.

"서울인데 보증금이 왤케 싸?"
"이런 데는 다 씨발 우리 같은 새끼들이 대부분이야. 술집 다니는 년들 아니면 밤일 하는 새끼들. 평범한 직장 다니는 새끼들이 월세100만원 200만원 내면서 살 수 있냐. 태반이 그냥 우리 같은 애들이 사는거지. 금방 금방 가게 옮기고 하니까 단기로 살 수 있게 보증금 싸고 월세 비싸고, 뭐 그런거야. 나도 여기로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어. 한 두 달 됐나?"
"장난 아니네"
"아 피곤하다. 야, 거기 옷 방인데, 거기도 침대 있어. 거기서 자. 나 먼저 씻는다. 그리고 잘 생각해보고 결정해라. 앗싸리 안 할거면 빨리 말해주고. 그럼 걍 며칠 놀다 내려가고"




성기 형은 확실히 함께 농구할 때 죽이 잘 맞기는 했다. 그래도 그렇게까지 친한 사이는 아니었는데 이렇게까지 잘 해주다니. 어쩌면 그냥 나랑 같이 일하면 사이즈 좀 나오겠다 생각해서 끌어들이려고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잘해준건 잘해준거다. 고마운 사람이다. 하기사 옛날에 성기형 엄마 쓰러졌을 때, 우리 꼰대가 차에 태워서 병원 안 갔으면 그때 돌아가셨을거라고 했으니까.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 덕분에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후 느즈하게 일어난 우리는 집 앞 뼈해장국 집에서 속을 풀고, 신논현역과 강남역을 지나 원민이 형을 태워 신사동 쪽으로 향했다.

"딱 씨발 나도 2억. 아니 3억만 채워서 내려간다. 학교 앞에 노래방 차려야지. 에이끕 언니들 존나 돌리면서. 돈 딱 세게 맞춰주고, 여고 애들 졸업하면 바로 울 가게로 취업시키고. 개멋진 사장님 해야지. 원민이 니는?"
"나는 뭐, 그냥 돈 좀 있는 누나 하나 꼬셔서 씨 좀 뿌려주고 서방으로 살아야지. 평생 바람 피우면서"
"아 나 이 새끼는 진짜. 뭐가 이렇게 드럽냐. 효원이는?"
"난 그냥… 모르겠는데"

그러자 성기형이 룸미러로 힐끔 뒷좌석의 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효원아, 서울에서 자리잡고 일하던, 구미 다시 내려가든, 이거 하나는 확실히 해. 싸나이는 딱 인생에 목표가 있어야 되는거야. 누굴 따먹겠다, 아니면 뭐 사업을 하겠다, 아니면 뭐 돈을 모으겠다던간에. 딱 목표가 있어야 노력도 하는거고. 아니면 인생 바로 좆꼬인다. 이 새끼처럼"
"야"



성기 형이 나를 인도한 곳은 신사동의 한 미용실이었다. 촌스러운 머리 좀 어떻게 하라고. 예전에 일하다 망한 가게 앞의 미용실이라고 했는데, 형도 간만에 온다고 했다. '그런데 굳이 나를 왜 데려왔나' 했더니, 역시나 자기도 스타일링 받으며 여기의 한 미용사 여자애랑 노닥대기 시작했다. 애교를 엄청 부리는 것을 보니 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나보다. 어쨌든 내 머리를 담당하는 미용사, 아니 '헤어 스타일리스트' 누나도 엄청 예뻤다.

"어때요? 머리 길이 마음에 드세요?"
"네"
"그리고 머리는 내일 하루동안 감으시면 안되요"

다가온 성기형과 원민이 형은 "아 사람 됐네" 하며 박수를 쳤다. 조금 쑥쓰러웠지만, 솔직히 감탄했다. 머리 스타일 변화만으로도 사람이 이렇게 바뀌나 싶어서.

가게를 나와 가로수길 쪽으로 걷노라니, 성기 형이 문득 말했다.

"봐, 이 새끼야. 지나가는 기집애들 다 질질 싸잖아. 우리는 상품성이 있다고"
"야 다 들려, 볼륨 조절해라"

형에게 빌려입은 반듯한 블랙 수트에 팔찌와 시계 같은 악세사리들. 원민이 형은 브라운 수트, 성기형은 무슨 검도복 마냥 엄청 통 넓은 바지의 블랙 수트…평일 대낮에 쭉 빼입은, 헤어 스타일링 받고 나온 키 180 중반대의 남자 셋. 

'그럴싸하네'

지나가던 카페 창에 비친 우리 셋. 나는 적당히 평범하고, 성기 형은 전형적인… 나쁜 남자? 여자애들이 좋아하는 그런 인상이고, 원민이 형이야 꽃미남이니까. 지나가던 여자들이 모두 힐끔 거리고, 뒤에서 수근거리며 좋아라 하는 것이 느껴졌다. 특히 성기형은 고개를 휙 돌려 능글맞은 미소를 보내기까지 하니 어린 애들은 꺄꺄 대며 좋아하기도. 원래도 좀 장난기가 많긴 했지만, 이 정도로 능글 맞진 않았는데. 형도 제법 변했구나 싶었다.

"니가 어리버리하게 귀염 떨고, 원민이가 분위기 만들고, 나랑 승재 형이랑 조지면 딱 바로 게임 셋이지. 딱 박스 각 제대로 나오잖아. 경원이 창희 이딴 마바리들은 알아서 하라고 하고, 에이스들끼리 역할 분담 딱딱 팀으로 가는거지"

어쨌든 농구부 활동할 때도 여자들 시선이야 종종 받았지만, 서울 강남에서 제대로 차려입고 예쁜 강남 여자들에게 이런 시선을 받는 것은 정말 뿌듯한 일이었다. 물론 머릿 속 한 켠에서 '그래봤자' 하는 브레이크가 또 걸렸지만 굳이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슬슬 저녁이 되자 논현역으로 돌아온 우리. 나는 내심 오늘도 '술인가' 생각했지만 의외로 형이 나에게 카드를 주며 말했다.

"미안한데, 형들 오늘 일 생겨가지고 니는 그냥 혼자 좀 있어야겠다. 이걸로 밥 사먹어. 아님 뭐 어디 클럽이라도 가서 놀던지. 비싼거 먹어도 돼. 그렇다고 씨발 어디 뭐 지르면 죽인다. 카드 잃어버리면 뭐, 알지?"

손날로 목을 긋던 그는 원민이 형의 등을 툭치며 "가자, 아 근데 씨발 우리가 뭔 보도까지 뛰냐, 승재 그 새끼도 진짜 쌈마이 하고는 염병…" 하고는 차에 올라탔다.

"형 고마워"

뒤늦게 인사를 한 나는 그저 형의 오피스텔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손목에 찬 서브마리너의 무게에 새삼 형들이 돈을 잘 벌긴 버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잘 놀고, 멋있는 형들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만.

조금 생각이 복잡해졌다. 어쩌면 다행인지도 몰랐다. 진짜 조폭 일 하라고 했으면 내가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하고. 그러나 사실 여자애들이랑 뭐 그런 일을 한다는건, 솔직히 상상도 가지 않았다. 내 주제에 무슨. 그러다 형 오피스텔 근처의 작은 오뎅바가 보였다. 우동이 먹고 싶었다.




퇴근 시간대라서 그런지 가게 안에는 손님이 많았다. 그나마 비어있는 구석 쪽의 테이블에 앉은 나는 우동에 닭꼬치 두 개를 시켰다. 잠시 후 우동이 나왔고, 고춧가루를 뿌린 바로 그 순간에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한 여자애가 가게 안에 들어섰다.

'아…'

몸매가 확 드러나는 와인색 원피스를 입은 웨이브 진 밤색 머리의 그녀는 가게 안을 잠깐 살피더니 유일한 빈자리였던 내 옆 테이블에 앉았다. 내쪽으로 다가오는 내내 눈을 떼기 힘든 그녀의 외모에 진심 감탄했지만 너무 노골적으로 볼 수도 없었기에 나는 얼른 고개를 돌리고 내 밥그릇으로 시선을 거두었다.

'어'

하지만 수저통이 이쪽에 없었다. 나는 힐끔 옆자리를 보았고, 그 순간 방금 자리에 앉은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사실 나 뿐이 아니었다. 그녀가 들어서는 순간 가게 남자들이 다 대놓고 쳐다봤으니까. 연예인급 미인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뒤늦게 "저기, 죄송한데 수저 좀…" 하고 손가락으로 그녀 테이블 위의 수저통을 가리켰다.

그러자 여자는 "아, 네" 하고 수저통에서 숟가락과 젓가락을 한벌 챙겨 주었다. 그냥 수저통을 통째로 줘도 되는데 그거 챙겨주는게 또 묘하게 이뻐보였다.

"감사합니다"

수저를 전달받은 나는 다시 우동과 꼬치만 눈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먹고 있었는데, 그때 이번에 그녀가 내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예?"

은근 그녀의 동태에 촉을 세우고 있던 나는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고, 여자는 뭐가 그리 웃긴지 입을 가리며 웃다가 "아뇨 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시치미 통 좀…" 하고 내 테이블 위의 고춧가루를 가리켰다. 나도 그제서야 픽 웃고 고춧가루 통을 건내주었다. 일본어가 쓰여 있어서 그냥 일본 고추가루인가보다, 했더니 이거 이름이 '시치미'인가보다. 그리고 그 순간 테이블 아래로 힐끔 그녀의 새하얀 허벅지에 눈이 갔다. 엄청나다고 생각했다.

"고마워요"

우아하면서도 뭔가 섹시한 그녀의 말에 새삼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눈을 돌려 우동에 눈을 돌렸다. 여자도 나온 우동을 먹고, 은근히 옆으로 슬쩍 눈길을 주니 얼굴 옆라인도 이뻤다. 저런 여자는 누가 데리고 잘까.




"저기요"

아마 평범한 며칠 전의 나였다면 아마 저런 도도한 매력의 여자한테는 말도 못 붙였을거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성기 형이 빌려준 비싼 정장에 비싼 시계에, 파마까지 하고 관리 받은 나는, 내가 봐도 조금은 자신이 있었다. 은근히 먹는 속도를 조절하며 그녀가 다 먹고 일어서길 기다렸다가 따라나섰다.

"네?"

부르는 목소리에 여자가 가볍게 고개를 돌려 돌아보는데, 하….

"저기, 그쪽이 입…마음에 들어서 그런데 잠깐 커피라도 안 하실래요?"

모르겠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이런거. 이런 것도 처음이고. 내 말에 여자는 잠깐 픽, 하고 웃더니 "괜찮아요" 하고 고개를 저었다. 아, 역시 조금, 역시 쉽지 않지. 나는 민망함에 나도 모르게 머리를 긁적이며 "남친 있으신가요" 하고 한번 더 물었다. 여자는 이번에도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흐, 쪽팔리네"

또각또각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에 멋적음을 느끼며 나는 형의 오피스텔로 향했다. 할 일도 없는데 방 청소라도 해둘 요량이었다.





"후우"

청소를 다 끝내고 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이게 뭐지, 싶었다. 아직도 민망한 기분이 조금 남았지만, 그보다는 앞날에 대한 막막함이 더 컸다.

이대로 구미 내려가면 시팔 어디 공장 들어가서 박스나 나르고 조립이나 하겠지. 빡센 일 하면 무릎도 언제 다시 고장날지 모르고. 대학교를 가자니 돈도 없고 공부도 뭐 내 갈 길 아니고. 기술은 누가 공짜로 가르쳐주나.

'그래도 남자가 가오가 있지, 여자들 비유나 맞춰주면서 하…' 하는 생각이 지나갈 무렵. 좀 전의 그 여자가 생각났다. 어차피 연애질도 여자 비유 맞추는건 똑같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고 그 양복에 그 시계에 그 팔찌에 그 구두. 공장 다니면 어디 해보기나 할 일이 있을까. 차도 끽해야 트럭이나 몰겠지. 갑자기 담배가 겁나게 땡겼다. 하지만 이미 돗대는 아까 피운지 오래고, 나가기 귀찮았다.

문득 고생하는 엄마 생각이 났다. 한달 150 벌자고 아침 8시에 출근해서 밤 9시까지 공장 나가는 불쌍한 아줌마. 손발 퉁퉁 부어가지고는 야근 1시간 추가되면 그래도 얼마라도 더 번다고 좋아하고. 남편이라고는 딴 년이랑 살림 차려 나가서는 평생 돌아오지를 않고. 그나마 아들 새끼 하나 있는거 뒷바라지 했더니 무릎 병신 되서 이제 운동으로 돈 벌 일은 영영 없고. 그냥 고생 문이 훤하게 열려서, 죽는 날까지 고생만 하다 가실게 분명한 불쌍한 우리 엄마. 조온나게 불쌍한 우리 엄마.

"씨발…"

뭐 없다 싶었다. 나도 성기 형처럼 목돈 조금 만들어서, 엄마 데리고 청과물 가게라도 열어서 둘이, 아니 엄마는 쉬라고 하고 나 혼자 열심히 해서, 그래서….

'그게 될 리가 있나'

이렇게 굴러다니다가, 그래도 잠깐 멋지게 살다가, 그러다 말겠지. 그러나 '그래도 뭐 어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어차피 이러다 말 인생인데. 담배를 사러 가려고 몸을 일으켰다.




'그랬구나, 존나 뭐 없네'

편의점에서 담배를 사 나오는 길, 우연찮게도 아까의 그 여자가 다른 여자 하나와 함께 깔깔대며 편의점 골목 안 룸 술집으로 들어가는걸 봤다.

'결국 다 그렇고 그런건가'

그래, 운동 잘하는 놈이 땀 팔아 먹고 살고, 공부 잘하는 놈이 대가리 팔아 먹고 살고, 몸 좋은 놈이 좆 팔아서 돈 버는게 뭐 어때서. 그리고 뭐 다 파는 것도 아니라면서. 나는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고는 구름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는 밤하늘의 달을 쳐다봤다.

"뭐 없네 진짜. 서울도 별로."


< 끝 >






"그때 그 새끼가 그랬단 말이야. '횽, 죠는 건달할껀데요'. 원민이 완전 벙~ 쪘잖아. 나도 순간 이 새끼가 뭔 소리 하나 싶은데 빵 터지는거 참고, '건달해서 뭐할건데. 나처럼 맨날 여자들 행복주며 살래, 아니면 어깨들 수발들며 얻어터지며 살래' 하고 말하니까 애가 쭈삣대더라고.

어휴 우리 민정이 잔 비었네? 미안, 내가 한잔 벌주 마실게. 크, 어쨌든, 그리고 그날 셋이 술 마시고 놀고, 다음 날 딱 데리고 나와서 꾸며놨더니, 아 사이즈 제대로 나오는거야. 지금은 그 새끼가 그래도 곯아서 좀 그런데, 그때는 진짜 애가 지금보다 더 괜찮았어. 푸푸웃~한게 아주 괜찮았지"

민정은 "그럼 오빠가 효원 오빠 키운거네? 원민이 오빠랑? 진짜 슈퍼 에이스 제조기네. 몇 명을 키운거야" 하고 사과를 베어물었다.

"그치, 내가 진짜 아주, 어? 먹여주고 재워주고 똥 치워주고 다 애기 키우듯이 키웠다 진짜" 하고 성기가 넉살을 부리자, 민정은 화사하게 웃으면서 "은근 오빠 장가가면 디게 애들한테 잘할거 같다" 하고 그의 손을 잡았다.

성기는 어느새 민정의 허벅지에 손을 올리며 "그럼. 내가 키운 애기들이 우리 가게 반이 넘는데. 진짜 완전 보육원 원장님이야. 호빠 보육원" 하며 민정의 입술을 가볍게 맞추고 "근데 나도 이제 선수 그만 뛰려고. 나이도 있고, 내 가게 차려야지"라는 말과 함께 민정의 등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그 순간 민정은 문득 머릿 속으로, 성기와 함께 가게를 차리고 사장님이 되어 큰 돈을 버는 행복한 꿈을 떠올렸다. 엄마랑 함께 미용실 차리려고 모아 놓은 돈 8천만원으로 그게 가능할까, 속으로 계산해보면서.

"이 나이가 되어보니까" 소설

"알잖아 대충. 이제 내 인생에 로또라도 맞지 않는 다음에야 대충 이렇게 살다 가겠다는거. 이제 점점 더 좆같아지면 좆같아졌지, 더 좋아질 일은 없다는거. 그게 느낌이 딱 오잖아. 나이 먹으면. 니도 이제 대충은 감이 오잖아?"

내 어깨를 툭 치며 하는 그의 말에 반박할 수 없다는게 조금은 씁쓸했다.

"근데 말이야, 근데 그러면 사람이 뭔 짓을 하게 되냐면, 자꾸 지가 제일 잘나갔을 때 생각을 하게 돼. 하 그때는 내가 진짜 가능성이 있었는데, 그때는 막 내가 뭐라도 될 줄 알았는데, 그때는 돈이 막 이렇게 들어왔는데, 그때는 다들 내가 하는 말에 막 빵빵 웃음이 터졌는데, 뭐 그런 생각. 기집 년들 생각은 말할 것도 없고"

나는 묵묵히 듣고만 있기로 했다. 콧물을 훔친 그는 대충 양복 주머니에 손을 문지르려다 겨우 테이블 구석에서 티슈를 집어 닦았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반복하는거지. 지 주변에 잘나보이고 싶은 사람한테 계속 그 이야기만 하는거야. 평생을. 꼰대들 하던 짓을 어느새 내가 하고 있더라니까. 처음에는 그래도 집에 가는 길에 문득 온 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아 이러지 말아야겠다' 생각이라도 하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새로운 사람이 나한테 말 한 마디만 친근하게 건내도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지는거야. 미친 놈이지. '내가 이러이러한 놈이었는데, 뭐, 알아두라고' 하는 마음이랄까. 근데 또 그래. 처음에는 다들 웃어주고, 감탄하고, 이것저것 더 캐물어보고, 호감도 갖고. 아직은 쓸만한거지. 그 과거의 추억들이. 내 인생에 제일 맛있는 부분, 액기스 같은 이야기니까. 재밌고, 요긴하다고. 하지만 그게 어느 시점이 되면 빛, 빛이 바래"

빛이 바랜다는 말이 나올 즈음에야 나는 그의 목이 칼칼해졌음을 느끼고 잔을 다시 채워주었다. 물론 그는 방금 전처럼 바로 비웠다.

"후우, 아는 거지. 이 이야기가 정말로 쓸만한 이야기인지 아닌지를. 어디가서 이랬대 저랬다, 하면서 나도 남한테 한번 들려줄만한 재미나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꼰대가 좋은 시절 생각하며 헛소리 하는건지. 그런 시점이 되면 볼짱 다 본거지. 그리고 지금 내가 그렇고"

주문했던 소세지 안주는 여전히 나오지 않고 있고, 나는 이걸 주문이 제대로 들어갔는지 확인을 해봐야 되는지 아니면 그냥 무시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근데! 이거 하나는 알아둬도 좋은 이야기야. 꼰대의 충고라고 해도 좋은 이야기인데… 나도 꼰대한테 들은 이야기야. 그런데 생각은 나더라고. 남자는 말이야, 그러니까 나처럼 꼰대가 되었을 때… 딱 인생을 뒤돌아봤을 때…크후…"

그는 조금 힘들어 보였다.

"뒤돌아 봤을 때, 잘난 구석은 아무래도 상관없어. 아무리 상등신 비응신이라도 좋은 시절 이야기 하나쯤은 다 있으니까. 다 있다고, 그런거 쯤은. 저어기 영등포 굴다리 밑의 노숙자 아저씨들도 다 있어 그런건. 근데 문제는, 뒤돌아 봤을 때 부끄러운 기억이 없어야 돼. 실패한 기억 말고, 내가 모자라서, 내가 부족해서 망한거 그런거 말고, 그냥 부끄러운거. 내가 암만 되바라진 새끼라도 진짜 이런 짓까지는 하지 말았어야 되는건데, 하는 그런 기억 말이야. 그런건 있으면 안돼. 그런게 있으면 쓰레기가 되어 버리는거야. 아무리 한때 잘난 새끼라도."

나는 잔을 채워주는 대신 물었다.

"아저씨는 어떤데요"

내 질문에 그는 피식 웃더니 또 크허허헝 하며 코웃음을 길게 친다.

"나는… 뒤돌아 보면…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뒤돌아 보는거 자체가 무서워. 힐끗힐끗 눈길만 줘도, 당장이라도 목 메달아 죽어버리고 싶은 부끄러워 뒤지고 싶은 기억이 너무 많아. 그러니까 더 좋았던 시절에만 집중하는거야. 다른 데는 눈길조차 안 주고. 아예 못 주는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잔을 채우고 말했다.

"저도 그래요. 못 보겠어요. 그럼 이제 그건 어떻게 극복하죠. 이미 쓰레기가 되어버린 새끼는?"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그는 꽤 오랜 시간 이런 말 저런 말을 찾는 듯 하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없어, 그런 방법은"

나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새삼 피곤함과 취기를 함께 느낀다.

"한번 쓰레기는 영원한 쓰레기?"

그는 잔을 또 한번 채우고 비우며 말했다.

"그래도 재활용 쓰레기라면, 아직은 길이 있잖아. 안 그래?"

난 피식 웃고 되물었다.

"아저씨는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난 이미 음식물 쓰레기 수준이지. 냄새나고, 보기도, 만지기도 싫고. 어디 한 방울이라도 튀면 누가 치우던지 비가 오던지 하기 전에는 두고두고 냄새 풍기고, 아주 여러 사람 애 먹이는, 좆같은 음식물 쓰레기"

이제는 자학으로 넘어가나 싶어서 슬슬 집에 가야겠다 하는 순간, 그는 "으, 취한다. 이젠 집에 가야겄다" 라는 말과 함께 묘한 자신감을 보였다.

"그래도 음식물 쓰레기도 잘만 묵히면, 퇴비가 되지 않겠냐? 안 그냐?"

그리고 생각했다.

"가시죠"

나도, 스스로를 음식물 쓰레기 수준이라고 적당히 넘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나는…' 

방사성 폐기물 같은게 아닐까. 푸르스름하니 특이하게 빛나는. 그래서 신기해서, 좋은 건 줄 알고 다가온 사람들을 망치고, 병신 만드는, 다가서는 모든 사람을 상하게 만드는, 도저히 어떻게 처지할 방법도 없는 그런 쓰레기 중의 쓰레기, 말이다.

그 순간들 소설

1. 기희

"나 가지 말까? 응?"

웃는 그녀의 말에 나는 그냥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꽤 스무스하게 잘 대답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잘가'라는 말은 죽어도 목에서 나오지 않았다.




2. 가영

"사람 많은데서 정말 이럴거야? 아 쫌 놓으라구!"
"한번만 더 생각해봐라. 내가…하아, 이건 내가 납득이 안되서 그래. 이유라도 말해줘"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고, 히히덕대는 사람들마저 있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아쉬운 마음에 가영의 손을 꾹 쥐었고, 그녀는 "아프다고!" 하며 소리까지 질렀다. 그녀의 말에 나도 놀라 "미안"하고 그만 손을 놓았고, 가영은 차갑게 말했다.

"오빠도 그 새끼랑 똑같애. 똑같다고"

나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가영의 차가운 눈빛에 이미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알았다.




3. 아름

"그랬구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녀를 보며 나는 꽤 씁쓸함을 느꼈지만, 어차피 모두가 감수해야 할 순간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켰다. 이미 한참 전에 차갑게 식어버린 커피의 맛이, 입 안을 더욱 씁쓸하게 만들었다.

"나 먼저 일어난다"

뒤는 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그런다고 돌이킬 수 있는 상황도,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으니까. 단지 조금 더 좋게 마무리 지을 수는 없었을까 하는 작은 의문이 들기는 했다. 그건 다음 번을 기약하기로 했다.




4. 태미

밤사이 전화 52통, 문자 142개, 카톡 392개가 도착해 있었다. 아마도 예전이었다면 건조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 원망하는 그녀의 대꾸를 받아주다가 몇 마디인가의 이야기로 마음을 홀리고, 또 잠깐의 침묵, 그리고 문득 생각난 작은 가십성 이슈를 이야기 하면서 농담을 하고, 그리고 커피 한잔 혹은 식사를 제안하며, 밤사이 쓰라렸을 그녀의 외롭고 지친 마음을 달래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나는 지끈지끈한 머리를 매만지며, 조금 더 자고 이따가 전화번호를 바꾸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5. 소영

"그래서 이 미친 년아, 니가 잘했다는거야? 니가 잘했어?"

만약에, 정말로 내가 대신 죽어 그녀를 살릴 수 있다면 나는 단 한순간의 고민조차 하지 않고 그랬을 것이다. 딱 두달 전까지는. 아니 사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비록 씁쓸한 마음이 들었을지언정 그렇게 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분명히.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대신 죽기는 커녕 내가 당장 이 년의 목아지를 비틀어 패죽여버리고 싶었으니까. 차라리 그냥 바람을 피우지. 미친 년. 그러나 사실 더 화가 나는 것은, 이 순간에마저 깊게 패인 그녀의 가슴골에 시선이 꽂히는 이 개병신 호구 같은 나의 눈깔이었다.




6. 가을

이미 2시간 가까이 그네에서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문득 모든 감정에 앞서는 지독한 피로를 느꼈다.

"가을아"

그녀는 대답이 없었지만, 나는 계속 할 말을 이어갔다.

"됐어. 니 마음이 그렇다는걸 어쩌겠냐. 그게 뭐 니 잘못이냐. 다아 니 잘못이지"

가을이가 그토로 좋아하던, 내 마지막 말장난이었지만 당연히 그녀는 이번만큼은 웃지 않았다. 나는 그저 힘없이 몸을 일으켰다. 솔직히 그다지 슬플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빨리 자고 싶었다.




7. 지영

"너만큼 나 좋아해준 남자 분명 앞으로 다시 만나기 힘들겠지. 근데, 근데! 솔직히, 너만큼은 나 좋아해주지 않아도, 그냥 적당히, 너보다는 아니더라도 그냥 적당히 나 좋아해주는 남자 만나서 그렇게 살면 돼.

아니 정 안되서 혼자 살더라도, 너랑 앞으로 이렇게 살고 싶진 않아. 나는 그래. 나는 원래 그런 년이야. 너 그래서 나 때문에 눈물도 많이 흘렸잖아.

알아. 알잖아. 나 못된 년이야. 잘가, 나 이제 들어가볼께. 앞으로 다시 연락도 하지마. 우린 이제 끝이야. 영원히."




8. 효주

"그게 뭐"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나를 붙잡는 그녀의 사랑스러운 표정에 사실 이미 내 마음은 아까 진작에 풀렸습니다. 아니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애초부터 별로 화도 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그녀에게 고작 그까짓 일로 제가 화가 났겠습니까. 그냥 웃어 넘기고 말 일이지.

단지…

그녀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내가 너무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 야속할 따름일 뿐이지요. 그래서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9. 도연

"야, 시발 이게 말이 되냐? 어? 아, 도연아!"

새벽이 가까운 밤, 천장의 형광등 불빛이 문득 어지러움을 유발합니다.

"야야, 도연아. 진짜 이건 아니지. 어? 야! 진짜 시발 이건 너, 너 진짜 야, 이건 시바 아니 씨부랄 이게 말이 되냐고!"

갑작스레 소리를 버럭 지르는 나의 말에 그녀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립니다. 곧바로 맥시멈으로 치솟는 혈압에 온갖 개쌍욕을 중얼거리며 부들부들 대는 손으로 다시 전화를 걸지만, 하, 진짜. 이 기집애는 어쩜 그렇게 빨리도 차단을 걸까요. 진짜 미스테립니다. 이럴 때는 손이 아주 귀신같이 빨라요. 엠병 시부럴. 이제 일주일간 전화는 종 쳤습니다. 엠병.



10. 은나

"오빠 그게 할 소리야?"

언제부터였을까요. 우리 관계가 이렇게 된 것이. 나는 소주잔 속의 찰랑이는 소주에 문득 '소주도 찰랑이는구나' 하는 멍한 생각을 합니다.

"아니 도대체 왜 그러는건데"

바로 옆에 앉은 은나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리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슬슬 붙잡아줘야겠죠. 정신. 그래야 끝낼 수 있으니까.

"은나야"
"응? 왜?"

아, 순간 응? 하는 얼굴에 뽀뽀할 뻔 했습니다. 이 기집애 왜 이렇게 귀엽나요. 하지만 안됩니다. 오늘 끝내야 됩니다.

"그만하자"
"아 진짜 왜!"

은나는 버럭 화를 내지만, 사실 너도 알고 나도 아는 문제의 답을 왜 자꾸 캐묻냐. 힘들게 진짜. 안되니까 안되지. 뭘 묻고 난리야. 니네 엄마가 어제 우리 집에 전화까지 했는데. 이게 임마 사랑한다고 다 되면, 헤어지는 커플이 세상에 어딨냐. 사랑은 다 하는건데.




11. 새롬

"미쳤어, 미쳤어 진짜"

언제나의 그 웃으며 하는 톤의 미쳤어가 아닙니다. 제대로 한심한 병신을 논할 때의 미쳤어입니다. 그러고보니 이 기집애는 왜 미쳤다는 말을 이리 즐겨쓸까요.

"아, 미안해"

사실 사과할 입장도 아니지만 일단 사과를 합니다. 그녀는 혀를 끌끌 차며 내 바지를 벗깁니다.

"오빠, 잘 들어?"

뭔 소리를 하려고. 이미 술에 취해 몸 가누기도 힘들지만 그녀는 착착 내 옷을 벗기고 그 와중에도 틈틈히 방 정리를 하며 말합니다.

"그동안 나 많이 참았고, 오빠도 많이 노력한거 알어"
"흐"

사근사근한 그녀의 말투가 귀엽습니다.

"오빠 디게 매력 있는 사람인 것도 맞구, 능력 좋은 것도 알아. 필요할 때마다 착착 돈 만들어오는 재주 진짜 최고인거 알거든. 오빠가 나 정말 많이 도와줬구"
"그럼"

나는 흐뭇하게 맞장구를 칩니다. 마지막으로 내 양말을 다 벗기고, 하, 이 기집애 어디서 배운 스킬인지 물티슈로 발가락을 다 닦아주네요. 그렇게 나는 아기처럼 되어 이불 속에 편히 눕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어조가 바뀝니다.

"근데… 안될거 같아"

사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술 마신건데요. 그리고 말은 내 탓 하지만 진짜 이유도 잘 알고 있구요.

"흐, 새롬아"

나는 웃으며, 입을 맞추고는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그녀에게 마지막 선물을 줍니다.

"현관 앞에 그 포장지 열어봐. 니 구두야. 그거 신고 좋은데로 가라"

새롬의 표정은 볼 수 없지만, 알 수 있습니다.

"진짜 이러지 말지. 이게 뭐야, 사람 이상해지게"
"야, 이럴 땐 그냥 고맙다고 하고 받는거야. 니 말고 그런 구두 이제 줄 사람도 없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새롬은 말했습니다.

"나 갈게"




12. 유영

"에이 왜 그래. 선수끼리"

그녀는 완곡하게, 그러나 제법 단호하게 거절의 뜻을 드러냈습니다. 나는 침대에서 머리를 긁적이다 입을 열었습니다.

"그래, 내가 괜한 소리 했나보다. 미안, 잘가"

사실, 아마 유영이는 내가 몇 번 더 잡아주길 바랬을 겁니다. 당연히. 아마 당연히 내가 붙잡으리라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사실 긴가민가 하던 것은 저도 마찬가지였거든요. 그랬기에, 오히려 거절 당했을 때 차라리 기뻤습니다.

"왜?"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다, 문득 묘한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다시 유영이 쪽으로 돌리자, 그녀는 울고 있었습니다. 역시, 그랬겠죠. 그녀는 무어라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듯 했지만, 역시 그녀의 자존심은 언제나 그녀의 본심보다 힘이 셌죠. 바보같이. 얼른 고개를 돌리며 손으로 눈물을 훔치고, 옷을 주섬주섬 입기 시작하는 유영.

그리고 이제는 나도 압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게 그나마 제일 그녀를 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13. 승아

잠든 그녀의 얼굴을 머리에 온전히 새겨넣기라도 할 기세로, 선 하나하나를 모두 살핍니다. 혹시라도 내 콧김이 그녀를 깨울까 싶어 숨소리마저 조심스러워지는 이 순간.

이렇게 열심히 그녀의 모습을 머리에 그려넣어도, 어느 순간에는 잊혀지겠죠. 그리고 그 소중한 기억들도 하나하나씩.


"하늘에서 떨어지는 낙엽 말이야, 바닥에 닿기 전에 그 낙엽을 하늘에서 낚아채면, 안 헤어진대"
"어, 정말? 오, 오오, 어? 와 이거 생각보다 어렵네"
"어려운거야"

바람이 불 때마다 흩날리는 낙엽을 잡으려 이리저리 팔을 뻗어보지만 여간해서 안 잡히는 낙엽. 더이상은 떨어지는 낙엽도 없어 포기하려던 그 순간, 승아의 후드티에 모자 속 은행 잎을 발견합니다.

"찾았다!"

내가 기뻐하는 만큼, 승아도 기뻐했더랬죠. 근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낙엽은 매년 떨어지는데, 그럼 매년 붙잡아야 되는걸까, 하고. 올해는 더이상 안 붙잡아도 되겠지만.


"야, 나 또 싸웠다" 소설

나의 말에 재원이는 전화기 너머에서 또 짜증을 부린다.

"하 나 이 새끼야, 내가 무슨 초딩 1학년 담임 선생님이냐? 뭔 쌈박질만 하면 일일히 보고질이야? 걍 시원하게 헤어져어, 야 내가 봤을 때 니네는 텄어. 답 없다"

그 말에 나는 실없이 웃었다.

"아, 니네는 내 앞에서 서로 귀싸대기까지 날린 커플이 결혼까지 가놓고서는…"

그러자 한 3초 답이 없던 재원은 "하긴 그랬지. 아 나도 답 없는 새끼네" 하고는 "어디냐? 니네 동네로 가?" 하고 묻는다. 나는 그러라고 하고서는 슬슬 씻을 준비를 했다.





물베기





재원은 더웠는지 아이스 아메리카노 반 잔을 시원하게 단숨에 들이키더니 입을 닦았다.

"아 더워 뒤지는 줄 알았네. 뭔 10월이 코 앞인데 이렇게 덥냐"
"야, 뭔 나는 막걸리 마시는 줄 알았다. 누가 그렇게 커피를 무식하게 마셔"
"이게 남자지 임마. 니처럼 뭐 컵 앞에 고개 요래 가져다 놓고 빨때 쪽쪽, 어? 야 임마 니 그러다 그거 떨어진다?"
"지랄"

과장되게 연기하던 재원의 말에 나는 웃다가 물었다.

"니네는 잘 지내냐? 아름이 잘 있고?"

그러자 재원이 실없이 웃는다.

"야, 잘 생각해 봐. 내가 지금 3주만에 쉬거든? 지난 주, 지지난 주 물량 맞추느라 우리 야근에 특근까지 했단 말이야. 오자마자 자고 바로 출근하고 또 24시간 주야 근무 풀타임 뛰고 자고 이런 미친 주말 보냈다고. 그리고 드디어 쉬는데? 너랑 이렇게 둘이 있잖아. 뭐겠냐?"
"또 대판 했냐?"

재원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진짜 형들 말 듣는건데. 왜 내가 장가를 가 가지고. 성욱아, 진심으로 충고한다. 결혼하지 마"
"왜? 아름이는 근데 니만 잘하면 싸울 일 없지 않냐? 바가지 긁는 타입도 아니잖아?"

하지만 내 말에 재원은 조금 씁쓸한 얼굴을 보인다.

"하, 그래. 내가 그 착한 애 다 버려놨지. 뭐 아름이가 다른 기집애들처럼 막 떽떽 거리는 타입도 아니고. 근데 부부라는게, 아니 커플이라는거 자체가 원래 좀, 남이 볼 때랑 둘이 있을 때랑 또 다르잖아"
"왜? 니들끼리 있을 때는 또 막 지랄지랄하는 타입이야?"

손사래를 치는 재원.

"아니 그런건 아닌데, 이게 한번 토라지면 얘 답 없다. 진짜 뻥 안치고 한달은 간다. 차라리 씨팔 시원하게 한번 머리 끄댕이 잡고 쌍욕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치우는게 낫지, 어? 그 날 둘이 끌어안고 자면 되는데, 이건 혼자 꽁해서 일주일이고 이주일이고 그렇게 토라져 있으면 사람 피가 마른다니까"
"아 그것도 진짜 피곤하겠네"

우리는 서로 긴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그때 재원의 폰이 울렸다. 경식이 형이다. "어? 이 형 간만이네"하고 전화를 받은 재원.

"여 브라덜. 예? 저야 뭐. 성욱이랑 있죠. 아이, 이거 참. 아시잖아요. 우리 커플인거. 앞뒤를 다 쪽쪽. 아름이는 위장결혼이죠. 하하하하"

녀석의 농담에 나는 "뭔 소리야 미친 놈아" 하고 퉁을 놓고 내 말을 다 무시한 재원은 "아, 형 어딘데요? 승암사거리요? 그럼 오실래요? 예예, 여기 증원동 이디엠 커피에요. 예, 그 골뱅이집 옆에 있는데. 네네" 하고 전화를 끊었다.

"왜? 온대?" 하고 묻는 나의 말에 재원은 "응, 온대. 야 결혼 두 번 실패한 꼰대가 주말에 할 일이 뭐가 있겠냐. 맨날 놀아달라고 조르는거지" 하고 혀를 찬다.

"진짜 대단해. 뭐한다고 결혼을 두 번이나 할까" 하고 내가 감탄하자, 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젠 안 한대. 지금 만나는 것도 띠동갑 12살 연하랑 만나잖아. 형네 학원 선생인데, 저번에 봤거든? 새끈해. 근데 이게 모르는거다? 형이야 이젠 결혼 안 해, 해도, 만약에 그 여자가 형 재산보고 결혼 조르면? 하게 되어 있다. 백퍼"
"두 번이나 실패했는데 또 하겠냐. 이젠 아예 선 그어놓고 만나겠지"

그러자 재원은 웃었다.

"야, 맺고 끊는거 확실한 새끼가 장가를 어떻게 가. 흐리멍텅하게, 어? 그런 새끼들만 장가 가는거야. 근데 두 번 갔다? 답 없다"




한 15분 뒤, 노란 머즈탱을 타고 나타난 배 나온, 많이 나온 40대 남자 경식이 형이 나타났다. 재원은 반가운 얼굴로 맞이했다.

"오, 뭐야. 어? 형 차 또 새로 뽑은거야? 장난 아니네? 아 진짜 형이 최고다. 어? 야, 완전 짜세네 이거"

경식은 씩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린다.

"어, 타던 차 팔고 바꿨어. 근데 이거도 얼마나 탈진 모르겠다. 살 땐 허세로 질렀는데, 너무 좀, 내 소셜포지션치곤 가벼운 거 같지 않냐?"
"어휴, 형. 뭘 걱정해. 그럼 또 한 대 뽑으면 그만이지. 제로시스 이큐 구천, 딱 뽑으면 짜세 나오겠구만"
"허허"

그리고는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내 손을 덥썩 잡는 경식.

"간만이다 성욱아. 임마 니가 형한테 연락도 하고 그래야지"
"아휴, 저도 요즘 정신이 없어서. 잘 지내시죠?"
"그럼. 넌 아직도 서울에서 회사 다니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요즘 관두고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어요. 형도 커피 한잔 하세요"
"어어, 내가 주문할께. 근데 니넨 무슨 남자 둘이 커피를 마시냐. 딱 이거 한 잔 꺾어야지"
"낮이잖아요 낮. 그리고 재원이 저 새끼 한잔만 마셔도 시뻘개지잖아요. 따귀 맞은 거처럼"

그 말에 너털웃음 지은 경식이 형이 웃었다.

"그래, 맞어. 저 새퀴 그래"




이야기를 나눈 후, 경식은 목을 긁으며 말했다.

"이게, 내가 봤을 땐 그래. 부부로 살다보면, 아니 커플도 그렇지만 이게 딱 '이 말만 나오면 백 프로 싸운다'라는 주제들이 꼭 있어. 뭐 전 여친 전 남친, 혹은 돈 문제, 애기 문제, 뭐 등등, 커플마다 다 주제가 다른데, 여튼 그 주제 안에서도 백프로 싸우게 되는 키워드가 있다고 키워드가"

과연 이혼 두 번에 총각 시절부터 이미 수십번도 넘게 여자를 갈아치운 연애·이혼·섹스 전문가답게 그는 자신만의 개똥철학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보통 이게…딱 그런 날이 있을거야. '아 이건 진짜 조졌는데. 사이즈 안 나오네' 싶게 싸울 때가 있었을거야. 진심으로 헤어지네 마네 하고 제대로 싸웠던거. 뭐 지지고 볶고 이런 레벨이 아니라 제대로 다 태워먹고 아예 불이 나버린거. 그런 싸움. 그럼, 그건 이미 거기서 조진거야. 그 주제로 둘이 끝나는 날까지 그거로 싸우다가 그걸로 관계 다 조진다. 아예 그런 싸움까지는 가지 말아야 돼. 근데 이미 가버렸다? 그럼 딱, 거기서 시마이 쳐야 돼. 그게 서로 빠르다. 내가 그걸 모르고 장가를 두 번 갔잖냐. 등신같이"

그렇잖아도 큰 머리 사이즈에 머리까지 저렇게 풍성하게 장발로 기르니 진짜 머리가 더 커보이는 그의 얼굴에 새삼 속으로 감탄하지만, 그의 온 몸에 둘러진 이런저런 명품으로 그의 요즘 벌이에 대해 또 감탄하게 된다. 교육 시장은 정말 불황이 없는 산업인가.

"그래도 쟤네는 잘 붙었잖아요. 재원이 저 새끼 바람 피우고 아름이랑 서로 귀싸대기 갈군 날"

그 말에 또 경식이 형은 빵 터져 웃다가 말했다.

"근데 진짜 맞어. 이 새끼는 또라이는 제대로 또라이야. 너 그때 아름이는 왜 때렸냐? 니가 바람 피워놓고.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주 맞바람이라도 피운 줄 알았을걸. 니 그 날 우리 다 싸이코새끼라고 존나 욕했다"

재원은 피식 웃었다가 커피를 쭉 들이켰다. 그나저나 이 카페는 주말의 한낮인데 사람이 이리 없어서야 장사 안 망하나. 재원은 담배를 만지작 거리다가 다시 집어넣는다.

"형. 내가 봤을 땐 그래요. 사람 사이는 다 파워게임 하는 사이에요. 이게 한번 먹히면 되돌릴 수가 없거든요. 설령 내가 잘못했어도, 거기서 꿇고 들어간다? 그럼 먹히는거에요. 뭐 아예 내가 평생 꿇고 이 사람 내 웃사람으로 모실거다 하면 몰라도, 그럼 안되겠다 하는 사람이면 먹히면 그기서 끝나는거라구요. 근데 잘 생각해봐요, 아름이 같은 애한테 내가 뭐가 잘난게 있어요. 대학을 나왔나, 집에 돈이 있나 뭐 책상머리 일을 하나. 그냥 밑바닥에서 구르는 나 같은 새끼한테 콩깍지 씌인게 전부인데, 내가 좀 잘못했다고 기집애한테 싸대기 쳐맞고 싹싹 빈다? 그럼 그 날로 먹히는거죠. 내가 잘못했어도, 잘못한건 잘못한거고 나는 어쨌든 입장은 항상 위에 있어야 되는거에요. 그게 인간관계죠. 남녀보다 그 위에 있는. 그리고 그래야? 관계가 이어집니다. 진짜로"

중학교 시절부터의 오랜 친구지만 분명히 나와는 다른 삶의 궤적을 그린 재원. 그만의 인간론, 인간관계론을 새삼 본 느낌이랄까.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방학식 날, 어느새 자기보다 덩치가 더 좋아진 반의 넘버 투 곽현구 그 새끼랑 시비가 붙었을 때 주먹으로 안되자 의자로 대가리를 내리찍고 어깨에 콤파스를 쑤셔박던 그 지독함. 하기사 군대에서도 후임이 기어오르자 반 병신 되도록 두들겨 패서 만창 채웠던 일도 있었고. 독한 새끼. 그의 헌신적인 어머니만 아니었더라도 저 놈은 아마 옛날에 신세 조졌을거다. 조진다, 그 새 나도 이 양반들 표현에 감화되네.

"하여간 넌 제대로 또라이 기질이 있어. 성질 죽이고 살아야 된다. 아니면 마누라 두고 감방 가고, 마누라 바람난다. 알았냐? 나도 업종은 교육쪽인데, 여기도 양아치들이 엄청 많아. 여학생들 건드리고 그러는 새끼들. 그러다가 감방 가고 지랄나고 뭐 그러는데, 결말이 다 거시기해. 돈 좀 있는 새끼들이 감방 가잖아? 마누라들은 좋다고 백 프로 바람 피워. 백 프로. 근데 이혼은 안 해줘. 외려 감방 수발 들었다고 나중에 이혼 소송할 때도 존나 유리하게 끌고 간다니까? 그거보다 열불 나는 일이 어딨냐. 아, 시바 그보다 담배나 태워야겠다. 바깥으로 자리 옮기자"




경식이 형은 아이스코의 연기를 훅 뿜어내며 물었다.

"성욱이 너는 그럼 지금 아예 쉬고 있는거야?"
"예. 뭐. 지지난 주에 관둔거라서 뭐 급한건 아니지만, 뭐 그래요"
"여친은?"
"걱정하죠. 남친이라고 있는게 빌빌대고 있으면"

재원은 "아 이 새끼. 니가 그러니까 싸움이 별 하찮은걸로 자꾸 커지는거야. 빌빌대니까. 남자는 딱 가오지 가오" 하고 끼어들었지만, 경식이 형은 그저 실실 웃을 따름이었다.

"니네 근데 사귄지 좀 되지 않았냐? 결혼 이야기 안 나와?"
"됐죠. 벌써 3년인데. 결혼 이야기도 그 형이 말한 '키워드'에요. 그 말만 나오면 싸워요. 근데 뭐가 있어야 장가를 가지. 니미럴"

형은 피식 웃었다.

"야 근데 그건 진짜 아냐. 결혼? 그거 돈 없어도 다 하는거야. 너 내 첫 결혼 때 못 봤냐? 우리 꼰대 죽기 전에, 나한테 시바 10원 한장 안 물려준다고 그 지랄 떨고, 나 양아치 짓 하고 다닐 때 그, 누구야, 이젠 이름도 가물가물하네. 아 그래, 영지 그 년이랑 나 결혼할 때, 나 그때 울 엄마가 준 2천 딱 그거 하나 갖고 결혼한거야. 한 푼도 없었어. 우리 신혼여행 안 갔어. 못 갔어 씨발. 돈이 없어 갖고"

그건 처음 알았다. 마지막에 '씨발'하는 그의 말에 한이 조금 섞인 것을 느꼈다.

"아 그래도 형은 나중에 집 해줬잖아요. 아부지가"
"야 그것도 시발, 이제와서 하는 말인데 그때 우리가 뻥 쳤거든. 영지 임신했다고. 세상에 손자까지 생기는 마당에, 어? 안양에서 큰 학원 두 개나 돌리는 양반 아들이 손바닥만한 원룸에서 셋이 살고 있다고 하면 세상이 욕한다고. 내가 그 꼰대 앞에 가서 자살쇼를 하겠다고 지랄생쇼를 해서 받아낸거야. 그리고 그건 나중 이야기잖아. 어쨌든 결혼은 했다 이거지"

글쎄, 그거까진 몰랐다.

"내가 씨발 다른건 모르겠는데 딱 하나 그거는 진심 영지 그 년한테 미안해. 진짜 존나 지금도 자다가 눈이 번쩍 떠지게 미안해. 세상에 암만 그지 새끼들이라도 결혼해서 하다못해 제주도라도 신혼여행은 가는데, 나는 염병, 아…. 존나 철없던거지. 근데도 이혼할 때까지 그거 갖고는 단 한 마디를 원망 안 하더라. 진짜. 그 기집애 바람 났을 때 이상하게 그 생각이 딱 나니까 솔까 내 차마 뭐라고 못 하겠더라니까"

그의 첫 이혼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 재원이는 알고 있었던 듯 그를 달랬다.

"근데 형 잘못이 아니지 그건. 형네 꼰대가 좀 너무했던거고, 그리고 영지 누나도 뭐, 잘 됐잖아?"
"잘 됐지. 그 년이 그래도 이거는 되잖아. 탈아시안이지. 것도 아주 탱탱해. 어휴, 그니까 그런 새끼 물어서 시집 잘 갔지. 차라리 잘 됐어"

술자리도 아닌데 자리의 분위기가 열띄다.

"그래도 형은 그게 지나간 일이고, 1년도 안 된 일이잖아요. 고생시킨게. 근데 나는 아름이랑 몇 년이야 쉬바. 벌써 7년이네. 사귄 기간까지 합하면 9년이야 9년. 아 갑자기 술 땡기네. 형, 괜찮죠? 대리 부르면 되잖아. 대리"
"그래, 가자. 재원이 이 시키 그래도 속정은 있지. 성욱이 너는 뭐 먹고 싶냐?"




오후 3시에 소주잔을 채우며 고기를 굽노라니 이것도 별미다.

"좆까고, 그냥 해. 결혼. 우리 같은 새끼들은 원래 결혼하면 안되는 새끼가 결혼해서 이 지랄 난거고, 니는 그래도 그나마 좀 멀쩡한 새끼 아니냐. 어? 씨 없는 또라이, 배운 양아치, 서울로 회사 다니는 모범생. 이 세 병신 중에 그래도 니가 제일 낫잖아. 한국대 간판이 거저 난거냐. 캬 시발. 울 아버지가 니를 몰라서 다행이지, 니 알았으면 나는 진짜 뒤졌다. 얼마나 비교해댔을꼬"

중간에 씨 없는 또라이 라는 말에 재원이 "야 형 나 있다고. 그냥 우리 안 갖는거야. 딩크, 딩크으" 하고 수습했지만 난 알지. 언젠가 술 취해서 한 그의 고백을. 물론 우리 모두 안다.

"형은 그럼 만나고 있는 여자는요"

이미 재원에게 듣긴 했지만 물어본다. 그러자 그는 폰에서 그녀의 사진을 보여준다.

"29살이고, 선명여대 나온 애야. 괜찮아. 이쁘지?"
"뭐 형이 만나는 여자들이야 항상 외모는 되죠. 다른게 문제라서 그렇지"

그는 또 낄낄대며 웃는다.

"야, 니가 꼭 안 좋을 때만 봐서 그래. 걔들 다 괜찮은 애들이야. 근데 니랑 같이 볼 때만 꼭 그렇게 꼬여서 그렇지"
"뭘 또 성욱랑 볼 때만 그래요. 맨날 바람 나고, 성병 걸려오고, 어? 돈 땡겨쓰고, 구라쟁이에, 술자리에서 얼굴에 술 끼얹고 가고, 어? 아주 골고루잖아요 골고루. 존나 드림팀 아냐?"

재원의 핀찬에 더 크게 웃던 그는 "야 몰라, 됐고, 술이나 마셔. 자, 어이. 그리고 얘는 진짜 그런 애들 아냐. 얘는 깨끗해. 내가 다 싹 알아봤어. 내가 면접 본 애야" 하고 얼른 수습한다. 그리고 문득 어쩌면 형은 세 번째 장가를 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갈 수 있다면 말이지만.




둘과 헤어지고 혼자 터덜터덜 집으로 걷는 길. 간만에 많이 마셨다. 밤 1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지만, 휴대폰에는 그러나 전화 한 통 없다. 그 흔한 카톡 하나도. 그래, 나는 재원과도 다르고, 경식이 형과도 다르다. 누구처럼 독하지도, 누구처럼 부유하지도 않은 그런 흔한 소시민.

놓아주어야 하나, 하고 생각이 든다. 사실 나 없어도 알아서 잘 살 기집애다. 오히려 내가 발목을 잡으면 잡았지. 머릿 속이 복잡하다. 그녀도 그렇겠지. 어쩌면 결혼을 하는 이유는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놓치기 싫어서. 계속 잡고 싶어서. 더 오래 곁에 두고 더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서.

근데 만약에 내가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걸 안다면? 그럼 진짜 너무나 사랑한다면 놓아주는게 맞는거 아닐까. 사실 그녀가 행복하기 위한 조건에 나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오히려 내가 그녀의 행복을 가로막는 사람이라면? 나에 대한 자신감도, 자존감도 어느새 밑바닥을 긴다.

"시발…"

힘없는 욕이 흘러나온다.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지만, 그 순간 휴대폰이 울린다. 진아다.

"여보세요"

나의 힘없는 목소리에 한참 말이 없던 그녀가 대꾸한다.

"저녁은 먹었어?"

조금 화가 누그러진 것일까. 조금은 밝음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나도 조금은 힘이 들어간다.

"응, 아는 형이랑 재원이랑 같이 먹었어. 고기. 술도 좀 마시고"

그 말에 "잘했어" 한 진아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미안해. 나도 너무 예민하게 굴어서. 내일 뭐해"
"아무 것도"

그러자 "그럼 내일 같이 영화보자. 나 보고 싶은 영화 생겼어" 하고 제안하는 진아. 나는 조금 전 놓아주네 마네까지 생각했던 것에 생각이 미지차 조금은 부끄럽기도, 조금은 울컥하기도 하면서 단단히 얼었던 마음이 단숨에 녹아내리는 것을 느낀다.

"그래, 보러가자"

집으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이, 그렇게 조금 가벼워졌다.

-fin -

뿔테 바이러스 소설




"코드 브라운, 코드 브라운, 닥터 김박스 응급실로 속히 부탁 드립니다. 코드 브라운, 코드 브라운"

중증 체크남방 환자에 대한 스트라이프 이식 수술을 마치고 교수실에서 간신히 한숨 돌리고 있던 김박스는 곧 자신을 찾는 응급 코드에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심각한 간지 결손 환자에 대한 응급 코드인 코드 브라운은, '브라운'이 뜻하는 급똥만큼이나 김박스의 머릿 속을 똥색으로 뒤덮고 있었다.






뿔테 바이러스






"바이탈은?"

김박스의 질문에 새내기 당직 간호사 수연은 손을 바들바들 떨며 말하기 시작했다.

"845/5/1166입니다"

김박스는 탄식에 가까운 한숨과 함께 얼굴을 쓸어내렸다. 환자의 바이탈은 처참한 지경이었다. 인스타그램 게시글을 800개가 넘게 올렸는데 팔로워 수는 다섯에 팔로잉은 1천이 넘는 상황이라면, 이건 비정상을 넘어 심각한 만성질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천명이 넘는 친구를 추가하는데 그 중에 채 10명도 맞팔을 안 해준 상황이면 사실 볼 것도 없었다.

"이런"

김박스는 환자의 상태를 보다가 혀를 차더니 곧바로 그의 안경부터 벗겼다. 그 놈의 뿔테안경을.

"어서 수술실로. 긴급 OP 준비해"





한국인의 3대 만성 질환인 고혈압, 당뇨, 뿔테중독. 그 중에서도 젊은 층을 중심으로 그 끝을 알 수 없이 증가일로이던 뿔테안경은 다행히 2015년을 전후해서 드디어 그 기세가 껶였다. 근 10년에 이르는 뿔테안경 신드롬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던 간지관리본부(GDC) 측에서 이독제독(以毒制毒)의 마음으로 김구 안경을 전면적으로 투입했기 때문이다.

그 시도는 제법 효과를 보아서, 근 63%에 이르던 한국인의 뿔테 중독율은 2017년 현재 약 30% 중후반까지 낮아졌으나 사실 이 역시도 당시 간지의들의 엄청난 반발에 부딪혔었다. 물론 김박스 역시 그 선봉에 섰던 이중 하나였다.

"아니 장기하 잡자고 해리포터 투입이라니, 설사 막자고 된똥으로 항문 틀어막는거랑 뭔 차입니까? 라식, 라섹이야 안전이나 가격 이슈가 있다고 쳐도, 콘텍트 렌즈라는 수단이 있잖습니까"

하지만 그에 대한 반론 역시 만만찮았다. 특히 한국 모든 남성간지의 가성비를 평가하고 간지수가를 책정하는 신사평가원 측은 단호했다.

"멋쟁이들은 알아서들 다 잘 합니다. 문제는 한국의 평균남성들이죠. 생전에 안경 한번 맞추면 안경 다리 부러지는 날까지 같은 안경만 주구장창 쓰는 이들이 한국의 평균 남자란 말입니다. 그런 놈들한테 매달 렌즈 사라고 하면 제대로 살까요? 아니 돈이야 일단 넘어가봅시다. 위생은? 오줌싸고 손 한번 씻는 놈들이 절반이 안되는 이 나라 남자들의 위생 의식으로 렌즈라뇨? 눈알 다 상할 일 있습니까?"

언제나 간지의들의 발목을 잡는 신평원의 '한국남성 평균론'은 이번에도 그 위력을 발휘했다. 공개토론회에서 좌중을 압살한 신평원 측은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간지관리본부 측의 김구 안경에 대해서도 신랄한 태클을 걸었다.

"동네 안경점에서 단돈 만원에 구입 가능한 뿔테 버리고 도입하는게 김구라뇨? 아, 혹시나 해서. 요즘 이런거 민감해서리…여기서 말하는 '김구'라는 표현이 우리 민족대표 김구 선생님을 욕되게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은 모두가 알 거라고 생각하고, 이하 계속 김구라고 말하겠습니다. 예? 김구라뇨. 당장 한국 남자 얼굴 평균을 봅시다. 넙대대한 얼굴에 염색 안한 바가지 머리에 김구 안경 씌워봐야 도라에몽 노진구 밖에 더 됩니까? 1mm라도 더 가려야 할 판에, 거기에 이거 툭하면 툭툭 부러지는거, 어쩝니까? 그거 막자고 티타늄이라도 썼다간 가격 폭발하고. 이건 개악입니다 개악"

좌중 여기저기서 "으흠!" 혹은 "흠흠" 하는 불편한 헛기침 소리가 터져나오는 신랄한 혹평이었지만 조심스럽게 손을 든 간지관리본부 측 인사는 그에 대한 반박을 개시했다.

"압니다. 하지만 더이상 손쓰기 어려워지기 전에 무엇이라도 해야되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새로운 스타일이 도입됨으로서 또 다른 제 3, 제 4의 스타일이 발생하기를 조심스레 기대해봅니다"

물론 뭐가 하나 유행한다고 하면 그거 뒤쫒기 바쁘지 먼저 뭘 할 줄 모르는 한국인들이 제 3, 제 4의 스타일을 알아서 도입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뿔테중독 이슈는 이미 10년 전부터 나왔던 말이었기에 당시의 공개토론회에서는 김구 안경의 도입 인가가 지지를 얻었다. 정말이지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정도로 심각했던 시기였다.




"그런데도 여전히 뿔테란 말이지"

물론 이제는 또 하나의 클래식이 되어버린 뿔테이기에 그것을 스타일로 추구하는 녀석도 많지만, 애초에 이런 중증 환자가 그럴 리 없다. 싸구려 뿔테 안경테 장시간 착용으로 인해 완전히 눌러버린 콧잔등, 더운 날 안경다리가 퉁퉁한 옆얼굴에 밀착되어 생겨버린 소금가루 등 만성뿔테증후군의 증상들이 보였다. 김박스는 손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클리어 원데이"

그러자 폴리클 닥터 김원근이 그에게 클리어 원데이 렌즈를 전달하며 물었다.

"쿠퍼비전 프로클리어로 안 가십니까? 하다못해 트루아이라도…"

하지만 김박스는 고개를 저으며 환자의 손목을 들어보였다. 환자의 손목에는 싸구려 카시오 시계가 걸려있었다. 그리고 김박스는 부연했다.

"현재 간지학계의 최신 조류는 '주어진 환경 내에서의 좋은 결과 창출'이다. 무리한 명품 착용이 불러오는 파산 쇼크는 말할 것도 없고,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일상 용품조차 누군가에게는 상당한 부담이 되는 투자일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원데이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투자'이며,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과감한 시도'라는 사실을 우리 간지의들은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잠시 수술을 멈춘 그는 모두에게 다시 한번 다짐하듯 말을 해두었다.

"젊고 가난한 간지 결핍 환자들의 얼마 안되는 여윳돈은, 어쩌면 그가 이제 평생토록 다시는 누려보지 못할 멋에 대한 마지막 사치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고, 항상 신중히, 그리고 최선의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 진료를 선택해야 한다"

교과서와도 같은 말이지만, 그런 조언은 언제 들어도 새겨둘 가치가 있는 그런 말이었다. 하지만 사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닥터 김박스는 지금 자신의 말과는 정 반대의 노선에 있던 의사였다.




'매력은 육신에서 나오고, 멋은 돈에서 나온다'

칠판에 위 문장을 적은 김박스 교수는 의대생들에게 말했다.

"나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 우리 모두는 평생동안 단 한번도 지나가는 사람의 고개가 휙휙 돌아갈 정도의 매력을 내뿜을 수 없다. 타고난 외모가, 육신이 그렇기 때문이다. 한계가 너무나도 분명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아, 거기 인철 군과 여원 양을 비롯해 몇몇 여학생들은 예외. 자네들은 풀메이크업 하고 제대로 꾸미면 가능해. 하지만 나머지는 단언컨데 불가능하다. 우리는 평생 누군가의 마음을 눈빛 한 번으로 뺏을 수 없다. 그것이 외모이고, 그것이 우리의 숙명이다"

강의실이 조용해졌을 무렵, 박스는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인간은 날개가 없음에도 하늘을 날 수 있게 되었고, 물갈퀴와 지느러미가 없음에도 바다를 건널 수 있게 되었다.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도구와 기술과 능력 있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같은 매력 없는 이들도 이제는 집중적인 헬스 트레이닝과 성형수술, 의류와 악세서리, 헤어 스타일링과 피부 관리, 메이크업과 각종 보형물과 장구들로 그 나름의 매력을 내뿜을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한계는 존재하지만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 수 있게 되긴 하지만, 두 팔의 날개짓으로 떠있는 것은 여전히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러한 한계는 명확히 인지한 상태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이야기를 한바퀴 돌린 그는 다시 핵심으로 돌아왔다.

"요는 돈이다. 돈이 있다면 몸도 멋있어지고, 얼굴도 아름다워진다. 몸을 추하게 가리던 거적떼기가 아름답게 얼굴을 비추는 빛이 되고, 모두에게서 무시받던 외관을 사랑받는 무기로 만들 수 있다. 그것이 돈이고, 매력과 멋의 실체이다. 따라서 간지 결핍 또는 간지 결손 환자의 치료에 있어서 최선의 길은, 외모에 대한 확실한 투자가 가장 분명하고도 빠른 치료법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세상에서 가장 추하게 태어난 사람도, 큰 돈이 있다면 추앙받고 사랑받을 수 있기에, 돈은 이미 그 자체로 간지통치약에 다름 아니다. 이상!"





'그랬었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김박스는 여전히 뿔테 환자의 수술을 집도하면서도 많은 생각을 했다.

"포마드"
"포마드요? 왁스가 아니라?"

닥터 김박스는 원근의 손에서 포마드를 빼앗으며 말했다.

"헤어의 모질과 두상에 따라 한국인일지라도 포마드 기름이 어울리는 사람이 존재하며, 그것은 특별한 강점이 될 수도 있다. 특히 2천년대 이후 수많은 젊은 한국 부모들의 아기두상에 대한 처절한 관리와 노력에 의해 한국인의 두상도 많이 예뻐졌기 때문이지"
"알겠습니다"





간지 결손 환자들에 대한 치료에 있어서 굉장히 과감하고 사치적인 하이엔드 라인의 명품 도입을 아끼지 않았던 김박스가 갑자기 자신의 노선을 버리게 된 것은 놀랍게도 뿔테 바이러스의 감염 때문이었다.

"후우"

그것을 치료해야 할 병원이나 의료 기관에서 오히려 병원균이나 질환에 감염되는 원내감염. 그러나 그날따라 결막염을 이유로 콘텍트 렌즈 착용을 할 수 없었던 김박스는 그만큼이나 안경 면역력이 약해진 상황이었고, 하드한 업무 속에서 부주의한 선택은 그만 그가 잠결에 뿔테 안경을 뒤집어 쓰고 근무를 보게 된 치명적인 사고를 유발하고야 말았다.

"어머, 박스 선생님, 안경 쓰셨네요? 잘 어울려요"
"잘 어울리기는. 그냥 결막염이라서 쓴 거야"

더욱이 치명적이었던 것은 오전 내내 자신이 뒤집어 쓴 안경이 뿔테였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병원 안을 돌아다녔던 사실이었다. 믿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만성적인 수면부족과 뿔테 특유의 편안함이 그를 완벽하게 뿔테 바이러스에 감염시켰다. 그가 자신이 뿔테 바이러스에 감염됐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오후 회진 시간이 다 되어서였다.

"김박스, 자네 지금 뭐하는건가?"
"예?"
"지금 뭐하고 있는거냐고! 시위라도 하는거야? 아니면 무슨 애들 장난질 치는거야"

응급간지학의 권위자이자 애플학파의 거두인 강 교수는 얼마 전에 바꾼 자신의 린드버그를 고쳐쓰며 김박스를 몰아부쳤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던 김박스는 "예?" 하고 고개를 갸웃했고, 그러자 강교수는 폭발했다.

"내가 지금 안 어울리게 팀 쿡 스타일의 린드버그 며칠 썼다고 지금 자네 그런 싸구려 뿔테로 나 도발하는거 아닌가!"

그리고 그제서야 김박스는 자신이 실수로 싸구려 뿔테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엉겁결에 안경을 집어 던지면서까지 놀랐고, 그때까지만 해도 다들 멋으로 그가 뿔테를 썼다고 생각했던 모두는 그때 '닥터 김박스가 뿔테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라는 사실을 깨닫고 경악했다.

다행히 김박스는 즉시 병원 내의 옵티컬 샵으로 옮겨져 볼프강 프록쉐, 니로와 실루엣의 티타늄 안경으로 집중 치료를 받고 뿔테 바이러스를 곧바로 치료했지만 그는 한동안 병실에서 마음을 추스려야 했다. 게다가 놀랍게도, 도대체 언제 얼마주고 맞췄던 안경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 싸구려 보세 브랜드 뿔테 안경이 썩 나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 나쁘지 않았어'

오히려 박스의 얼굴형에는 니로 브랜드보다 그 싸구려 뿔테가 더 어울렸다는 사실을 그는 스스로 인정했다. 그리고 그날의 경험은, 그에게 새로운 의학적 깨달음을 주었다. 물론 그 시점에서도 "정말 해골물을 마셨다면 원효는 밤새 Vibrio parahaemolyticus에 시달렸을거라고"하고, 슬그머니 마음 한 구석에서 떠오르는 원효대사 해골물 이야기에 대해 귀여운 반박을 시도했지만 말이다.




"수술 완료, 회복실로"

싸구려 뿔테는 중저가 소프트 콘택트 원데이 레즈로, 환자의 더벅머리는 가벼운 가르마 펌으로 손보고, 손목의 카시오는 중고 애플 워치로 바꾸어 '최소의 투자로 그닥 썩 나쁘지 않은 간지의 확보'를 성공했으며, 정체불명의 보세 브랜드 옷은 역시 몇몇 중급 스트릿 브랜드로 갈아입히어 환자의 매력을 확보해냈다. 환자의 간지 바이탈이 팔로워-팔로잉 1/3 비율까지 올라오자 모두는 안심했고, 김박스는 수술 성공을 선언했다.

"수고하셨습니다. 특히 '중고'의 도입은 인상적이었습니다"

수술실을 나오며, 폴리클 닥터 김원근은 간지의학에서 사실상 금기시되는 '중고'를 과감히 도입한 닥터 김박스에게 감탄했고, 그는 고개를 으쓱했다.

"넓게 보면 리셀러를 통한 구입도 '중고'의 개념 하에 포함될 수 있지만 그에 대해 경제적이라면 몰라도 간지적인 측면에서는 그 누구 하나 태클 거는 이 없는 관대한 2017년의 기준으로는, 민트급이라는 부분만 확인된다면 중고라도 간지의학에서 이제는 과감히 도입해 볼 필요성이 있지 않나, 싶구나"
"항상 깊은 가르침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숙직실로 돌아온 김박스는 최종적으로 스케쥴을 확인한 뒤, 확실히 비어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고는 이번에야말로 기나긴 휴식의 꿀잠으로 돌입했다.

"음냐"

물론 머지않아 그 깊은 꿀잠이 준 행복감을, M자 탈모 디자인의 'X같은 디자인'을 한 아이폰X에 완전히 망쳐버리게 되지만 그것은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는 몇 십 시간 이후의 이야기였다.

- F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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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기리며 망상

내가 쓸 자서전에는
누구의 자서전처럼 고생 끝의
성공 자랑으로 가득차 있지도 않고


누구의 자서전처럼 똥도 안 누고
섹스도 안 할 것 같은 사람이
있지도 않을 것이다


내 자서전에서 독자들은
너무나 고상한 지식인 사회에
섞여 살며 힘들어 했던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슬퍼하는 사람과


으리으리한 교회 앞에서
구걸하는 걸인을 보고
가슴 먹먹해 하는 사람과


사람은 누구나 관능적으로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고 믿는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


또한 그것으로 너무나 불이익을 당했기에
과거의 집필생활을 후회하는 사람도
독자들은 만나게 될 것이다


내가 쓸 자서전에는
나의 글쓰기는 이랬어야 했다고
후회하는 장면이 담겨있을 것이다


우선 손톱 긴 여자가 좋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고
그리고 야한 여자들은
못 배운 여자들이거나 방탕 끝의 자살로
생(生)을 마감하는 여자여야 했다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라는 즐겁지 않았어야 했다고
권선징악으로 끝을 맺는
소설 속 여자이어야 했다고


나의 고된 삶 속에서
그나마 한줌 상상적 휴식이 돼주었던
그녀와 나의 잠자리가
타락이었다고 그래서 반성한다고


- <내가 쓸 자서전에는> 故 마광수 



저승이나 내세를 믿지 않는 분으로 알고 있기에 '다음 생에는'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단지 위선적이고 우매한 사람들 사이에서 그 고단한 수모를 당한 것을 뒤늦게나마 통탄스러운 마음으로 위로 드립니다. 항상 진심으로 존경했습니다, 교수님. 


"근태는 기본이야 기본! 어? 출근시간 툭하면 지각이고 말이야" 소설

김부장은 아주 오늘은 벼르고 벼렸다는 듯이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정신들이 있어없어? 어? 지금 김성원 대리, 이번 달에 지각 두 번, 9시 2분 9시 8분, 조혜리 주임 이번 달 지각 여섯 번, 2분 3분 8분 5분… 서아름씨 지각 한번, 9시 15분, 이 날은 아팠던 그 날인가? 최정민씨, 아주 상습범이야. 말 안 해도 알지? 강가을씨, 지각 두 번…지각 없는건 윤 과장이랑 인턴 한서정씨 둘 뿐이네"

인사팀에 말해서 출근 기록까지 뽑아놓고 작정하고 사원들을 닥달한다.

"근태는 기본이야 기본! 어? 출근시간 툭하면 지각이고 말이야. 이게 근본이 안되어 있는거야 근본이. 출근시간 왜 있어? 9시까지 해놓으면 9시까지 출근하는게 맞아? 늦어도 8시 50분까지는 와서 자리에 앉아야 되는거 아냐? 오자마자 바로 일해? 다들 뭐 화장실도 한번 다녀오고, 화장도 한번 고치고, 담배도 한 대 피우고, 커피도 타고, 다들 바쁘잖아? 그럼 실제 업무시간은 9시 10분 20분은 되야 시작하는거 아냐? 회사 돈 공짜로 벌어? 어?"

어느새 칼칼해진 목을 축이기 위해 물 한잔을 마신 그는 종이컵을 탁! 하고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는 말이야, 뭐 내가 나이 먹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아침 6시 반이면 눈이 딱 떠져. 준비하고 일찍 나와서 여유있게 와서 가볍게 운동하고, 그래도 8시 20분이야. 다 나처럼 하라는 말은 아니지만, 최소한 기본은 하라는 이야기지"

시계를 흘낏 본 그는 마지막으로 단단히 경고하며 말을 마무리 지었다.

"앞으로 지각 3회 이상이면 시말서 받을거고, 인사고과에 칼같이 반영할거야. 분명히 알아둬. 근태는 약속이야 약속!"






약속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은 가운데, 점심시간이 지나고 1시 반이 되자, 김부장은 계약직 서아름을 회의실로 호출했다.

"뭐 다른건 아니고, 이제 슬슬 아름씨가 온지 거의 한 2년 됐지?"

그렇잖아도 신경쓰이던 이야기를 이제서라도 꺼내자 아름의 얼굴은 긴장 속에서도 밝아진다.

"네"

그러나 마치 반전의 클리셰를 연출하기라도 하듯, 김부장은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눈썹을 긁적이며, 눈 앞의 서류를 몇 장 훑어보다 입을 열었다.

"길게 이야기해봤자 서로 입장만 난처하고… 여튼, 회사 사정상 이번에 전환이 어려울 것 같아"

아름의 표정이 순간 흙빛으로 변한다. 충격을 극복하는데 필요한 약 3~4초의 시간이 지난 후 그녀는 물었다.

"분명히 올 초에, 부장님이 기대해도 좋을거라고 하셨는데…"

김부장은 눈빛을 슬그머니 피하며 대답한다.

"내가 그랬나. 여튼, 올해 상반기 실적도 안 좋고, 아름씨 포지션도 지금 T.O 자체가 사라질 상황이라 어렵게 됐어. 뭐, 기대하게 했으면 미안하고, 한 두 어달 남았으니까, 아 이제 한달 보름 정도인가. 여튼 슬슬 알아봐야 할 것 같아"
"부장님"

그 유약하고 조용하던 아름이건만, 이제와서는 조금 할 말을 꺼내기 시작한다.

"저 지난 번 한섬 건 때도 정규직 전환 이야기 말씀하셔서 병원 다니면서도 계속 링겔 맞고 와서 일하고 9시 출근 밤 10시 퇴근 한달 내내 하면서도 한번도 불평불만한 적 없는데요, 이제와서 이렇게 말씀하시면, 이건 아니죠"

김부장도 거기에는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나도 아름씨 열심히 한 거 모르는 바 아니고, 전환 관련해서 계속 어필했는데, 알다시피 우리 부서 올 상반기 실적 나가리 나고 지금 명퇴를 받겠다느니 말겠다느니 하는 판에 잘 안 됐어. 나도 미안해"

이후 몇 마디의 말을 덧붙였지만 아름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진짜 부장님 어디 가셨어요?"

혜리 주임은 아까부터 발을 동동 구르다가 머리를 쓸어넘겼다. 희미한 향수 냄새가 성원 대리의 코를 스치고, 그는 움찔했지만 그저 어깨를 으쓱할 따름이었다.

"모르죠, 우리 부장님 한번 자리 비우면 어디갔는지 아무도 모르잖아요"
"아 진짜 미치겠네"

오전 중으로 처리해서 넘겨야 되는 문서인데 결재처리가 안되어서 혜리는 당혹스러워하다못해 짜증을 부린다.

"아니 본인이 30분 빨리 나오면 뭐해. 나와서 하루에 몇 시간을 자리 비우는데"

그녀의 말에 모두 실소를 짓다가도, 가을이 슬쩍 귀뜸한다.

"지금 옆 파티션에 원실장님 와있어요"

김부장 영혼의 파트너, 밀어주고 끌어주고 89학번 서울대 라인 원이사의 등장에 다들 말소리를 줄인다. 하지만 그 상황 속에서도 혜리의 속은 끓어오를 뿐이다. 계약서 검토해야 되는거 생각하다가 문득 시말서에 다시 생각이 미쳤고, 2분 3분 지각 타령이 그저 우습게만 느껴졌다.




"아름씨 이야기 들었어요?"

정민의 말에 가을이 한숨을 쉬었다.

"들었어요. 진짜 미친거 아니에요? 아니 사람 그렇게 부려먹었으면 이건 진짜 어떻게든 챙겨줘야 되는거 아니에요? 아름씨 눈 팅팅 부었던데"
"내 말이. 링겔 맞아가며 일한 사람인데. 솔까 아름씨 아니었음 그거 일정 절대 못 맞추고 빵꾸 났어요. 당장 그럼 김부장 본인이 목 날아갈거 아름씨가 살려준건데, 사람을 그렇게 뒤통수를 치나"
"아 진짜 짜증나요"

가을은 고등어를 뒤집으며 말했다.

"아까 서정씨랑 아름씨 복도에서 둘이 이야기 하더라구요. 뭔 이야기 하는지는 안 물어봤지만 뻔하겠지. 솔직히 서정씨도 그 꼴 봤는데 할 마음이 들겠냐고. 링겔 맞아가며 일한 사람 계약 연장 안되는데, 인턴인 자기도 안되는거 알겠지"
"아 그랬어요?"
"이게 사람 기 죽이는거에요. 우리도 마찬가지고. 같이 일하면서 서로 얼굴 어떻게 봐요. 당장 다음 주에도 동명 브로셔 건 때문에 디자인실에서 이것저것 요구할텐데 아름씨 손 놓으면 우리 아무도 그거 처리 안되요. 우린 우리대로 창원 행사도 준비해야 되는데"
"아 모르겠다 진짜"

정민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후 다시 자세를 바로 잡으며 방석을 고쳐 앉은 그는 물었다.

"아니 근데 진짜 아름씨 나가고 나면 그 업무 이제 누가 봐요?"
"몰라요, 혜리 주임이 하던가, 아니면 윤 과장님이 다시 잡겠지"
"아 말도 안돼. 진짜 망하겠네"
"아마 원래는…"

살짝 운을 뗀 가을은 자신의 추측을 말하기 시작했다.

"아마 원래는 서정씨를 아름씨 대타로 삼을라고 뽑은걸거에요. 인턴이 계약직보다 싸게 먹히니까. 새미 주임님 나간 것도 서정씨로 떼우려고 한 거고"
"헐"

정민은 길게 뜯어진 고등어 껍질을 스윽 들어올린다. 참으로 맛나보이는 노릇한 고등어 껍질에 가을이 "어!" 하고 아쉬워 하는 순간, 정민은 그대로 그것을 가을 앞으로 슥 가져다놓는다. 가을은 피식 웃고, 정민은 쑥쓰럽게 웃는다.




오후 2시 반, 윤과장은 쏟아지는 졸음과 싸우고 있다. 커피를 네 잔을 마셨지만 애초에 그게 먹힐 사람이 아니다. 간밤의 미드가 원수다. 아니 좀 더 말하면 위쳐3가 문제다.

"과장님, 그거 맞는지 한번 봐주세요"

혜리 주임의 말에, 깜빡이는 사내 메신저창을 뒤늦게 확인한다. 8분 전에 보낸 파일이다. 아 진짜 졸지 말아야지. 이게 매번 뭔 망신이냐. 하품을 연거푸 하며 엑셀 파일을 들여다보지만 눈 앞의 숫자는 이미 숫자가 아니라 암호다. 그저 혜리 주임에 대한 믿음이 그를 구원한다.

"응, 맞네"

사실 맞는지 안 맞는지도 모르겠다. 머리에 아무 것도 입력되지를 않는걸. 이렇게 흐리멍텅하게 일처리하다가 언제 한번 사고가 터져도 터지지 싶은데 적어도 현재까지는 멀쩡하다. 성원 대리와 혜리 주임이 있는 한 일단은 안심이다. 물론 그 둘이 있는 이상 언제 자리 뺏길지 모르겠지만.

"파일 숫자 맞나 다시 한번 확인해보고, 정산팀에 넘기기 전에 성원 대리한테도 공유해 줘. 한번 봐보라고 해"
"…네"

성원 대리에게도 슬쩍 일을 걸쳐둔다. 이로서 안심이다. 하지만 혜리는 또 표정이 썩는다. 업무 토스에 분개하는 거겠지. 근데 지가 왜 짜증내. 언젠가부터 혜리 주임은 표정을 숨기지 않는다. 자격지심인지도 모르겠지만 여튼 그렇게 보인다. 당장 기분은 조금 나쁘지만, 그대로 냅두기로 한다. 그걸 제 3자들이라고 모를 리 없다. 또 그런 모습 절대 용납 못하는 우리 부장님이 있는 한, 혜리 저 기집애는 대리 진급도 어려울거다.

가끔 보면 똑똑한 애들이 저런 바보 짓을 잘한다. 그저 지 똑똑한 줄만 알지 그 발톱 숨길 줄을 모르니까. 그저 지각 안 하고 안 튀고 술 잘 마시고 상사 써킹 잘하고 오래 엉덩이 붙일 줄 알고, 이거면 되는데 그게 그렇게나 어려운 것일까. 참 바보들 많다. 진짜 바보들.




"이거 싹 다 손봐야 될 거 같아"

오후 5시 반, 김부장이 벌개진 얼굴로 돌아온다. 뭐, 이제는 다들 그러려니 하지만 아름의 표정은 차갑다. 아마 더이상 이제 그녀에게서 혼이 담긴 야근을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퇴근 시간대에 인접한 야근선언령이 얼마나 먹힐까는 이번 사태의 좋은 관찰거리가 될 것이다, 라고 정민은 생각했다.

"문서 구조부터 다시요?"

그것만은 아니길, 하고 바라며 성원이 물었지만 안타깝게도 김부장은 고개를 젓는다.

"다~ 다시"

모두의 한숨이 터져나오고, 혜리가 "그거 위에서 먼저 컨펌 한번 됐던거 아니에요?" 하고 볼멘소리를 해보지만 김부장은 그저 "다시"라는 말만 할 따름이었다.

"후"

여기저기서 길게 한숨을 내쉬고, 인턴 서정은 빠르게 전 버전, 전전 버전, 전전전 버전의 파일들을 참고를 위해 인쇄한다. 혜리는 오늘의 데이트 취소를 통보하러 복도로 나간다. 가을이 정민에게 "혜리 주임 남친이랑 요즘 위태위태하던데"하고 입모양으로 말한다. 성민은 윤과장에게 "담배 한대 피우러 나가시죠"하고 제안하고, 그 말에 윤과장은 옳다꾸나 "그래" 하고 일어선다. 김부장은 오늘의 저녁 식사 메뉴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오후 8시 50분. 성원은 잠시 멍해진 머리를 달래러 포털의 뉴스를 읽다가 "포괄임금제"까지 눈이 닿는다. 그리고 문득 그는 근로계약서 내용과 이번 달의 야근 내역을 머릿 속으로 조심스레 계산해본다.

"초과된거 같은데"

하지만 그 말은 그 누구에게도 들릴 말이 아니고, 그저 오늘 저녁에는 사람인하고 링크드인 손 좀 봐야겠다고 생각할 따름이다. 잡코리아는 이미 어제 손을 봤으니까.

"파일 넘겼습니다"

혜리 주임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모두들 그녀를 의식한다. 그녀의 기분이 엉망이라는 소리니까. 아마 돌아올 월요일 팀회의에서는 또 업무 분장 관련해서 그녀의 열띈 주장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서정은 슬슬 초조함을 느낀다. 또 저번처럼 애매한 시간에 퇴근하게 되면 택시비만 깨질테니까. 쥐꼬리만한 인턴 월급에 큰 부담이다. 야근 수당이라도 나오면 좋겠는데 그런 걸 기대할 수는 없다. 그나마 저녁이라도 사주니 다행이라 생각할 따름이다. 지난 번 회사는 그마저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서정은 생각이 많아졌다. 지금까지는 조금이라도 애매하면 그냥 택시를 타버렸는데, 어차피 이 회사에서도 정규직 전환 희망이 거의 없다는 생각에 그 택시비들이 아깝게만 느껴졌다. 출근 시간 1~2분에는 그렇게 열변을 토하더니 퇴근 시간은 벌써 3시간 초과가 다 되어가도 말 한 마디 없는 부장님이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안되겠네. 슬슬 접고, 나머지는 다들 내일 조금 일찍 나와서 합시다"

김부장의 제언에, 차라리 지금 1시간 더하고 출근 정상대로 하고 싶다는 말에 목구멍에서 맴돈 성원이었지만 그저 대답 대신 가방 안에 지갑과 휴대폰을 챙겨넣을 따름이었다. 사실 그도 한계였다. 더이상은 눈이 뻑뻑해서라도 안되겠다고 생각했으니까.

잠긴 목을 풀고, 빠르게 컴퓨터를 끈다. 눈알을 비비며 생각한다. 돌아오는 주말은 푹 쉬어야 겠다고. 연수와의 캠핑 약속은 역시 이번 주에도 깨야겠다고.

- fin -

밤의 편의점에는 소설

저녁 시간, 출근할 즈음부터 한두방울 내리던 비는 어느새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양 퍼붓고 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 되자 이 편의점을 찾는 손님의 인적은 더욱 드물어지고, 가게 안은 더욱 조용해진다.

"음"

편의점 통유리에 흐르던 빗줄기는 이미 물벼락이 흐르는 수준이고, 편의점 안의 공기는 에어컨 때문에 으실으실함을 느낄 정도로 추워진다. 나는 이윽고 카운터 자리에 앉아 인터넷을 하염없이 훑는다. 오늘의 내 하루가 흐르듯이.





밤의 편의점에는




딸랑-

"어서오세요"

딸랑 소리에 맞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밤 12시를 10여분 남겨둔 지금, 언제나처럼 삐쩍 곯은 그 아줌마가 들어온다. 나이는 40대 중반이나 되었을까. 워낙에 곯은 인상에 나이 파악이 어렵다. 어쨌든 가게 안을 비척대는 걸음으로 반바퀴 휘 돌던 그녀는 매대에 남은 김밥 한 줄을 고른다. 아마도 그녀의 딸이 먹을 식사일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삼각김밥 두 개 묶음과 2단 도시락을 고른다. 그리고는 여지없이 소주 한 병과 간식용 소세지 몇 개를 집어든다.

"만 이천원입니다"

그녀는 품에서 카드 한 장과 동전 몇 개를 꺼낸다. 술은 현찰로, 나머지는 그녀의 카드로 결제한다. 신용카드가 아니다. 꿈나무 카드…저소득층 자녀들을 위한 식대 지원 복지제도다. 하루 1만원 한도의 식대 지원 카드이지만 나는 그 아줌마의 딸이 저 카드로 만원어치의 식사를 제대로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매번 저 아줌마가 와서 천 몇 백원짜리 김밥 나부랭이와 술안주를 사는 모습만을 보았을 뿐이니까.

"감사합니다"

계산을 마치고도 그녀는 가게를 바로 나서지 않는다. 가게 한 켠의 라면 식사대에 가서 언제나처럼 2단 도시락을 분리한다. 밥은 다시 뚜껑을 닫아 챙기고, 반찬만 전자렌지에 돌린다. 2분 여의 시간이 지나자, 익숙한 손길로 그녀는 데운 반찬 등을 들고 가게를 나가 바로 앞의 파라솔 자리에 앉는다.

"또 오세요"

나는 그녀를 계속 눈으로 힐끔힐끔 좆는다. 하류인생들의 모습이다. 그녀는 파라솔 의자에 앉아, 살짝 잦아든 비를 바라보며 소주를 딴다. 그리고는 데운 도시락 반찬과 삼각김밥과 소세지를 안주로 술을 즐긴다. 예전에는 소주에 먹기에는 조금 과한 안주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언젠가 허겁지겁 삼각김밥을 베어무는 모습에 깨달았다. 아마도 저 여자는 저게 하루에 먹는 식사의 전부일 것이다. 술과 삼각김밥과 소세지와 편시락 반찬 몇 가지. 그 짠 반찬들 말이다. 내가 본 것만 근 석달 째니 저 여자의 신장은 멀쩡할까, 아니 그 전에 간은 멀쩡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다시 휴대폰으로 눈길을 돌린다.




"어서오세요"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딸랑 하는 소리에 다시 눈을 문으로 돌리지만, 좀 전의 그녀다. "공병이요" 하고 근 30여 분만에 비운 소주 공병을 100원에 받아간다. 공병 값이 오른 뒤로 이 편의점을 찾는 수많은 '주당'들이 소주병을 모아오곤 한다. 가끔은 바코드가 없는 업소용 공병을 들고 와 돈 달라고 빡빡 우기다가 씩씩대며 돌아가는 이들도 있는데, 한심스럽기도 하지만 어디 술집에 가서 술 퍼마시다가 그 놈의 돈 100원 받을라고 소주 공병을 가방에 싸올 생각을 할까 하는데까지 생각이 미치면 안쓰러울 지경이다.

"이거, 포인트 적립해주세요"

아까 꿈나무 카드로 결제한 영수증을 들고 와서 내민다. 나도 순간 아차 싶다. "네, 알겠습니다" 하고 편의점 포인트 카드에 아까 구매한 내역을 포인트로 적립한다. 이윽고 여자는 다시 비척비척 저쪽으로 걸어가더니…

"이거 계산해주세요"

하는 무미건조한 목소리와 함께 맥주 한 병을 추가로 집어온다. 이번에는 편의점 적립카드로 계산한다. 딸내미의 꿈나무 카드로 이것저것 결제를 하고, 그렇게 적립되는 편의점 포인트로는 술을 산다. 꿈나무 카드로는 술을 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제를 마치고, 여자는 그녀의 딸이 먹을 김밥을 들고 집으로 향한다. 아니 집으로 향하는지조차 확실하진 않다. 저렇게 갔다가 두어 시간 후에 왠 아저씨들이랑 다시 편의점으로 돌아와 술을 또 빨아대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니까.




"미쳤어, 미친 인간들이야"

그녀가 나가고 나는 중얼거린다. 낮도 아니고 밤 12시 다 된 시각에 와서-절대로 12시를 넘기지는 않는다. 그랬다가는 저 카드의 금액이 리셋되니까 1만원을 그냥 허공에 날리는 셈이 되어버린다- 아이의 김밥을 사간다면, 아이는 도대체 이 시간까지 무엇을 먹는 것일까.

"점심 급식을 먹는다고 쳐도 말이지"

하루 한 끼에 김밥 한 줄… 거기에 라면을 끓이고 저 도시락 맨밥을 투하해서 추가로 한 끼? 그야말로 탄수화물 폭탄일텐데. 게다가 이 시간이라면. 여자는 한 눈에 보아도 알콜중독이다. 그리고 이 동네에는 저런 사람이 꽤 된다. 자식의 밥값에 손을 대는 인간들. 가난해서 어쩔 수 없이 생필품을 사는 거라면 이해라도 되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입에 들어갈 술안주를 산다. 술은 못 사니까. 가격이 제법 센 육포 같은 것은 못 사고, 그저 편시락 반찬 정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들 스마트폰 한 대씩은 들고 있다. 그것도 일종의 복지제도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간에 말이다. 하기사, 가끔 오는 노숙자들도 휴대폰 하나씩은 다들 들고 있는 모습 보고 기가 막힌 적도 있었다.




"여, 담배 줘 봐 담배"

비가 조금 잦아들자 손님들이 다시 늘기 시작한다. 새벽 3시에 만취한 채로 담배를 요구하는 이 아저씨.

"어떤거 드릴까요?"
"담배 달라고"
"어떤 담배 드릴까요?"
"아 담배 달라고!"

…가끔 이런 병신들이 있다. 생각보다 많다. 진상이나 병신들. 전체 편의점 고객이 100명이라고 치면 그 중에 대여섯명은 확실히 병신이다. 특히 이런 심야 시간대는. 가끔은 병신율이 20% 가까이 치솟으며 짜증이 폭발하는 날도 있는데, 그런 날은 정말 피곤한 날이다.

어쨌거나 나는 그의 요구대로 '아무거나' 집어든다. 에쎄 프라임을 집어든다. 이런 경우 보통 던힐 6미리나 팔리아먼트 아쿠아5를 집어들면 대충은 아다리지만, 이런 아재들은 에쎄가 취향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는 육두문자를 추가로 뱉으며 그제서야 "던힐 육미리"를 외친다. 나는 묵묵히 터져나오는 그의 쌍욕을 몇 마디 더 들으며, 카운터 테이블에 흩뿌려진 동전을 헤아린다.




새벽 3시, 김밥 폐기가 나오는 시간이지만 오늘은 폐기가 없다. 아까 그 아줌마가 집어간게 마지막이다. 하지만 아쉽지는 않다. 딱 두 달 만에 편시락이나 김밥에는 질려버렸으니까. 이젠 폐기가 나와도 안 먹는다. 그냥 아침 시간대의 민주에게 먹으라고 냅두곤 한다. 문득 나는 이렇게 불과 두달 만에 질려버렸는데, 그걸 몇 달, 어쩌면 몇 년을 먹고 있는 그 아줌마의 딸은 어떤 느낌일까. 생각해보니 조금 소름이 돋는다.

하기사 입맛 나름인지도 모른다. 아침 타임의 알바 민주는 1년 넘게 이 일을 했다고 하면서도 편의점 폐기음식을 없어서 못 먹는다니까. 걔도 집에 아빠가 없는 편모가정이랬다. 아니 그게 편부가정인가? 모르겠다. 아프리카 TV의 광팬인 그녀는 매번 교대 시간이면 그녀가 즐겨보는 몇 개 채널의 BJ 이야기들로 인사를 대신하곤 하는데, 그런 것에 관심이 요만큼도 없는 나로서는 정말 그 이야기 들어주는 것도 곤욕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가끔 일이 있어서 근무를 부탁할 사람도 그녀 뿐인 것을. 구태여 척을 질 필요가 없다. 당장 지난 주의 면접도 그녀 덕분에 겨우 볼 수 있었지 않는가.

딸랑-

"어서오세요"

또 손님이다. 이번에는 제법, 섹시하게 입은 만취 손님 셋이다. 앳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과한 화장…. 아마도 20대 초반쯤? 무어가 그리도 웃긴지 물건 고르면서도 지들끼리 한참을 깔깔대다가 결국 생리대와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골라 나간다.




사실 이 일을 하기 전에는 그저 계속 서서 바코드만 찍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온갖 잡무가 많다. 물건 들어오는거 채워넣는 것도 제법 큰 일이다. 엄청 귀찮은. 청소도 그렇고. 종종 민주가 빵꾸를 내는 날 갑자기 주인 아줌마나 아저씨가 올 때가 있는데, 아줌마는 꽤나 꼼꼼하게 청소 상태를 본다.

어쨌거나 청소를 시작할 시간이다.




새벽을 지나 아침이 가까워진 시간. 일하는 중간중간, 졸음이나 입이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군것질거리를 종종 사먹곤 한다. 초콜렛이나 빵 같은. 사실 이거 때문에 살도 조금 쪘다. 3킬로 정도. 다시 빼면 되지 뭐, 하는데 저번에 민주가 그랬다.

"편의점 음식으로 찐 살은 진짜 안 빠져요. 알아요? 나 이 일 하기 전에 오십이킬로였어요"

뭘 얼마나 먹었기에, 하고 되묻고 싶었지만 당연히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단지 조금 군것질거리를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할 뿐.




일출을 본다. 언제나처럼. 그리고 새삼 아침에 바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느낀다. 해가 뜬 직후인데도 벌써 출근을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가게에 와서 편시락을 집어 들기도 하고, 담배도 찾고, 이것저것 군것질거리도 산다. 물티슈도 사고, 라면을 먹고 가기도 하고.

이제 몇 시간 후면, 민주가 온다. 교대를 하고, 나는 피곤한 몸을 뉘이러 갈 것이다. 달콤한 잠을. 달콤함 속에 미래에 대한 불안함도 있지만, 오늘은, 아니 어쩌면 내일은… 조금 다르다. 지난 번의 면접은 좀 잘 봤으니까. 부디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대하며, 오늘은 정말 단잠을 잘 수 있을 것 같다.

그 단잠을 이룰 생각에, 벌써부터 기분이 좋다.

- fin -

행복의 그릇 소설

박 이사는 단숨에 맥주 한 잔을 비우더니 입을 열었다.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잖아? 내 인생이 딱 그랬다고. 뭔가 좋은 일이 생기면 기가 막힐 정도로 나쁜 일이 생기는거야. 초등학교 5학년 때, 생일 파티를 했어. 짝사랑하던 수정이도 오고, 불알친구 재성이, 훈민이, 정운이 등등등 해서 정말 즐거웠지. 그 나이에 '행복'이라는 단어가 눈 앞에 어른거릴 정도로. 근데 그 파티가 끝나갈 무렵에 집으로 전화가 왔어. 아버지가 교통사고 나셨다고"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기억나는 가장 어린 기억이 그거야. 그 이후로도 마찬가지였어. 재수를 하고 본 수능에서 대박이 터졌어. 그 정도면 서울대 쓰고도 남았단 말이야. 그리고 그날 함께 재수 준비를 하던 여자친구가 음독자살 시도를 했다고. 미친 년이. 답을 밀려썼대나? 다행히 죽진 않았는데 한동안 고생했지. 여튼 그런 식이야, 좋은 일이 있으면 반드시 나쁜 일이 생기는거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아 행복하다' 생각한 순간 곧바로 불행이 닥쳐오는거야. 호사다마라는 말을 나처럼 많이 떠올린 사람도 없을거야 정말로. 나 이사 승진 하고 그 다음 날 마누라한테 이혼 통보 받았잖아."

무어라 대답을 하면 좋을지 몰라 나 역시 그저 잔을 홀짝일 뿐이었다. 박 이사는 말을 이어나갔다.

"아니 세상에 남들은 막 흐름이 좋을 때 더 잘 풀리고 그런 사람들도 있는데 나는 왜 이럴까. 그런데 언젠가 딱 그 생각이 들더라고. 아, 이게 팔자구나. 이게 내 행복의 그릇이구나. 나는 그 행복의 그릇이 작아서, 그 그릇이 차는 순간 엎어지고 딱 불행이 들이 닥치는거지."

그때 나는 위로라고 할까, 그의 말에 토를 달았다.

"에이 그래도 이사 님은 이사 타이틀까지 달았고, 남들 못 가본 곳까지 가봤잖습니다. 객관적으로는 운이 좋은 편 아닙니까"

그러자 박 이사는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바보가 아니거든. 내 행복의 그릇이 작구나, 나는 완전 머리 끝까지 행복으로 가득 채워 버리면 안되는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내 나름의 대책이 보이더라고."
"대책이요?"
"그래"

박 이사는 술잔의 4/5쯤 찬 잔을 흔들며 말했다.

"행복이 딱 이만치 차오르면, 스스로 적당히 따라버리는거야. 행복을. 이를테면 꽁돈 10만원이 들어오면 그 반은 뚝 잘라서 어딘가에 기부해버리거나 허무하게 바보 같은 곳에 써버리는거지. 또 뭔가 좋은 일의 기미가 보이면 스스로 불행을 만들고. 우리 첫 애 태어날 때, 그 전날에 하늘에 맹세했지. 그 좋아하던 조기축구, 다시는 안 하겠다고. 우리 아들 무사히 태어나게 해달라고. 그리고 무사히 태어났잖아."

웃으며 이야기를 털어놓는 그였지만, 솔직히 나는 이쯤해서 그에 대해 다소 미심쩍고 부정적인 인상을 받기 시작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의외로 이런 류의 징크스나 미신적인 것에 민감한 케이스가 많다는 것 정도야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미신에 휘둘려서야 좋을게 없어보였으니까. 하지만 그는 과연 닳고 닳은 인생의 베테랑답게 내 표정을 읽어냈다.

"나도 뭐 내가 이러는게 과하다고는 생각해. 하지만 내 나름의 결론은 이게 꽤 확실한 이론 같단 말이야."
"확실한 이론이요?"

솔직히 술자리의 개똥철학이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좀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살다보면, 잘 나갈 때 병신 짓 하는 인간들이 종종 보이잖아. 막 성공한 연예인이나 스포츠스타가 어느날 갑자기 음주운전이나 마약에 손을 대서 갑자기 몰락해버리는거. 혹은 멀쩡하던 인간이 갑자기 병신 짓 해서 손해 크게 보는 거 말이야. 이런게 나는, 그 '행복의 그릇'이 넘쳤을 때 일어나는 일 같다는거지. 그 나름대로의. 윤 대리는 그런 일 없었나? 뭐 잘 흘러가던게 갑자기 망하던가, 뭐 연인이랑 행복의 절정이라고 느낀 시기에 확 이별 통보를 받는다던지"

별로 그런 일은 없었는데요, 라고 말하려던 순간 재희한테 고백해서 사귀게 된 일주일 후에 입대영장 받은게 생각났다. 구태어 말을 하진 않았지만.

"여튼, 뭐 내 말은 항상 사람이 잘 나갈 때 경계해야 된다는거야. 윤 대리도 이제 곧 다음 달에 과장 달게 되면 또 뭐 반대 급부로 안 좋은 일 생길지 누가 아나?"

걱정인지 저주인지 모를 말에 "아이고, 저는 그릇이 커서 걱정이 없습니다 이사님. 다만 당최 그릇이 너무 커서인지 어째 행복이 차오르지를 않네요?" 하고 웃어 넘길 뿐이었다. 이사는 그 말에 빵 터져서 "내가 이래서 윤 대리를 좋아한다니까? 아 재밌구만, 재밌어. 참 윤 대리 재밌어" 하고 박수까지 치며 웃었다. 회사에서 맨날 딱딱한 얼굴만 보던 그의 활짝 웃는 얼굴에 내가 다 시원함을 느낄 지경이었다.

그리고 박 이사는 그날 밤 음주사고로 사망했다.

나는 '그 날 그렇게 좀 웃었다고 그게 죽을 정도의 행복한 일이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지만, 다음 날 빈소에서 그의 아들이 서울대 수석 입학 통지서를 들고 오열하는 모습을 보며 새삼 납득했다. 확실히, 그토록 아끼던 아들을 혼자 키우며 결국 서울대까지 보냈는데 그 기쁨이 세상 무엇에 비한들 작았으랴. 그의 행복의 그릇이 또 한번 엎질러지기에 충분한 소식이었겠지.

부디 다음 생애에서는 박 이사님의 '행복의 그릇'이 태평양만하게 크길 바란다. 또한 그만한 그릇을 들고 그 위치까지 올라갔다는 사실에 새삼스레 감탄과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

- 完 -

깨진 유리잔 소설

무심결에 돌리던 채널 속에서 남녀의 격렬한 말다툼이 벌어지는 드라마 장면이 나온다. 남의 싸움은 언제나 즐거운 것이기에 채널을 멈췄지만 바로 그것이 함정이었다.

"너는 실수였다고 말하지만… 그건 나한테 피가 쓸려나가는 고통이었어. 알아? 한번이라도… 단 한번이라도! 내 마음 이해해 본 적 있어?"

한참을 소리치던 여주인공은 털썩 주저앉으며 비명에 가까운 한탄을 쏟아낸다. 피같은 눈물이 그녀의 아이라인을 망치며 줄줄 흘러내리고 남자 주인공은 당혹스러워 하는데, 상황을 휘어잡는 그 살아있는 연기가 TV를 넘어 너와 내가 있는 공간마저 얼려 버리고야 만다.

"흠"

나는 스윽 채널을 돌리지만 뒤에서 "왜 돌려! 다시 틀어 봐, 그거" 하고, 어느새 차가워진 목소리의 네가 입을 연다. 대답 대신 다시 채널을 돌리노라니 여주인공은 주저 앉아 엉엉 울고 있고, 남자 주인공은 "아, 제발 좀. 그만 좀 해!" 하고 소리치며 걸어가는데, 드라마답게 비가 쏟아지고 여주인공의 비참함은 극대화 된다.

방금 전까지 더워 죽을 것 같았던 열기가, 당장이라도 덮쳐서 운우의 정을 나누기 직전이던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단박에 날아가고 나는 어느새 에어컨 바람이 혹한기의 칼바람마냥 춥게 느껴져 팔과 등에 소름이 돋고 있다. TV 속 드라마도 이미 장면이 전환되어 식사 장면이 되어 있건만, 나는 아직도 고개를 돌려 너를 보기가 두렵다.







깨진 유리잔






"뭐라도 시켜먹을까"

식사를 제안하지만 수연은 여전히 대답 대신 고개를 젓는다. 나는 마른 세수를 하며 얼굴을 쓸어내리지만 무어라 할 말은 없다.

"흐음"

나는 그저 말 없이 휴대폰을 만지지만, 딱히 무엇을 할 수도 없다.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서, 어느새 오전 11시 반이던 시간은 오후 2시가 다 되어간다. 피곤함과 배고픔과 짜증이 함께 하는 시간.

"미안해"

뜬금없이 던지는 나의 사과. 그럴 수 밖에. 물론 대답은 없다. 고개를 숙인 채 바닥에 앉은 그녀는 그 후로도 한참을 그러고 있다 입을 연다.

"배고프면 너 혼자 뭐 사먹어"

그리고 수연은 침대로 가서 눕는다. 나는 여전히 침대 옆에 걸터앉아 아무 말 없이 그냥 그렇게, 허무한 시간을 흘려보낸다. 오후 3시가 되었을 무렵, 나는 어쩔 수 없이 냉장고 앞 중국집 번호를 확인하고 주문을 한다.

"예, 1번 세트로, 탕수육에 짜장 하나, 짬뽕 하…"

하지만 나의 주문은 완성되지 못했다. "안 먹는다고!" 하고 소리를 버럭 지르는 네 목소리에 나 뿐 아니라 전화기 너머의 사장님까지 놀랐을테니까. 나는 다시 "미안합니다. 나중에 다시 할께요"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길게 한숨을 내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 그냥 나는 니가 배고플 거 같아서, 그래서 주문했던건데…"
"오빠는 내가 어떤 것 같아?"

지금껏 수천번 가까이 들었던 질문. 그리고 그 어떤 답을 해도 그녀를 만족시킬 수 없었던 질문. 나는 시선을 돌리며 헛기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아까 그 드라마 보면서 또 안 좋은 생각… 났겠지. 그… 크흠, 미안해"

어느새 나는 손까지 모으고 있다. 수연은 차가운 눈으로 날 바라보다 또 그 대사를 꺼낸다.

"오빠는 몰라, 정말 하나도 몰라. 내가 어떤 기분이었고 어떤 마음이었는지"




그렇게, 아침 11시에 우연찮게 TV 드라마의 30초 장면 때문에 시작되어 지금 이렇게 밤 11시까지 이어지고 있는 냉전과 834차 세계대전과 이후의 신냉전, 그리고 이 우울한 기분. 그녀는 울다 지쳐 침대 구석에 얼굴을 묻고 자는지 자는 척 하는 것인지 모를 상황이고, 나는 침대에 몸을 기댄 채로 가만히 저 장판 한 구석을 쫒는다.

아까 그녀는 급기야 그런 말까지 했었다.

"내 친구들이 다 그래. 오빠랑 그냥 헤어지라고. 한번 바람 피운 새끼는 또 바람 피운다고. 그리고 깨진 신뢰는 복구 되는게 아니라고. 그리고 기억들이 잊혀지지를 않아. 점점 더 선명해진다고. 매일 매일이 죽을 것 같이 힘들어. 나 이러다 죽을 것 같다고!"

다시 눈을 지그시 감는다.




그래서 몇 번인가 너를 놓으려 했다. 다 내 잘못이고, 어차피 다 끝난 거, 미련으로 붙잡고 있는 것인가 싶어서.




"뭐해. 바닥에서 그러고 잘거면 올라와서 자"

어느새 나도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쓰읍 침을 닦고, "응 자야지" 하고 침대 위로 오른다. 수연은 내 배게를 건내고, 나는 눕는다. 그리고 밑도 끝도 없이 그녀가 사과한다.

"미안해"

하지만 그녀가 사과할 일 자체가 아니다. 그녀가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있다면 나같은 놈을 좋아했다는 것이 죄겠지.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눈을 질끈 감는다. 그러자 수연이 말했다.

"오늘 못 간 에버랜드는 내일 가자"

나는 대답 대신 그저 어둠 속에서 고개만 끄덕인다. 그리곤 그녀의 떨리는 손을 잡는다. 그렇게 십여 분, 하루종일 울다 지친 수연은 금새 다시 잠이 든다.



깨진 유리잔은 다시 붙지 않는다. 하지만 너와 나의 인연은 유리보다 강하다. 그리고 부러진 뼈는 다시 붙었을 때 더 강하다고 하지 않는가. 다시는, 다시는 그런 미친 짓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그렇게 잡은 손을 부드럽게 다시 꼬옥 쥐어본다.

설령 언젠가 네가 힘들어 나를 놓아버린다 해도, 결코 내가 먼저 놓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짐하며 말이다.

그녀의 전 남자 망상

함께 침대에 누워, 혹은 둘 다 적당히 취한 어느 맥주창고에서, 혹은 찜질방 한 구석에서 같이, 혹은 어느 공원 한 벤치에서 함께, 혹은 깊은 밤 전화기 저 너머로.

우연찮게 흘러나온 너의 전 남자 이야기를 듣는다.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털어놓는 아프고 분한 기억에 내 가슴 속 한 구석이 부글부글 끓는다. 이렇게나 예쁘고 착한 너를, 그 놈은 왜 그리도 괴롭혔단 말인가. 

비록 가진 것 없고 보잘 것 없으며 단점과 한계를 산처럼 쌓아놓고 사는 나이지만, 최소한 나라면 그 놈 같은 짓은 안 할텐데. 정말 잘해줘야지, 차마 말로 꺼내지는 않지만 가슴 속 깊이 다짐한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난 지금, 그때 그놈보다 더한 놈이 되어버린 괴물 같은 나를 저주하며, 그녀의 '최소한 그놈보다는'의 허들을 더 낮춘 것에 대해 죄책감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낀다. 

정말로 이제는, 니가 세상 그 어떤 미친 병신을 만나도 그 놈이 나보다는 낫겠지라는 것을 확신하니까. 

주말의 밤 소설

오늘 밤이 지나면, 내일이 되면, 돌아오는 금요일 밤에는 꼭, 토요일에는 반드시, 일요일에는…

그렇게 하루하루 미뤄가며 시간을 벌려 나간다. 이윽고 현실을 돌아보며 이제는 아무래도 너와의 연락을 기대할 수 없겠지, 하고 마음 접는 순간 다시 작디 작은 희망을 꿈꾸어 본다.

어쩌면 너는 아직도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또 너와의 연락을, 만남을 마음 속으로만 그려본다. 너를 만나고 싶다. 못 나눈 이야기도 하고 싶고, 어떻게 지냈는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요즘에는 어떤지, 네 기분은 어떤지, 어디 아프지는 않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친구들은 잘 있는지, 부모님 건강은 어떠신지,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하나하나 다 밤새도록, 일주일이며 한달이며 일년이며 평생이며 함께 이야기 나누고 끌어안고 안아주고 보듬어주고 쓰다듬고 어루만지며 울고 웃으며 화도 받아주고 눈물도 닦아주고 아쉬운 소리도 들어주고 맞아도 주고 화해도 하고 농담도 하고 업어주고 만져주고 등도 두드려 주고 어깨도 주물러주고 발도 마사지 해주고 맛있는 것도 같이 먹고 그때 못 사줬던 그것도 사주고, 걷고 뛰고 뒹굴며 하루하루를 함께 다시 보내고 싶다.

그때 그렇게 했던 것처럼, 그때 하지 못했던 것들을 그 누구보다 더 멋지고 사랑스럽게, 너를 아끼고 사랑하며 애정하며 존중하고 존중받으며 너를 다시 한번 품에 꼭 안아보고 싶다.

너를 그토록 아프게 했던 만큼 다시 그 누구보다 행복하게 만들어줄테니 제발 다시 한번, 너를 그렇게 품고 웃고 싶다. 그때 그 날들처럼. 가장 행복했던 그 순간들처럼…. 사랑했고, 사랑하며, 사랑할 것이다.

조금만 더 잘할걸, 그때 그러지 말걸, 그게 사실 내 진심이 아니었는데…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그게 아니었는데, 그때 그렇게 놓는게 아니었는데, 한번만 더 붙잡아볼걸….

아프다 못해 아린 가슴을 안고, 후회를 하고 또 하며 그렇게 오늘 밤도, 안녕.

가래로 막기 망상

개인적으로 삼국지 소설을 참 좋아해서 여러 작가 버전의 삼국지를 읽어보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역시 이문열 작가의 삼국지가 으뜸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이문열 삼국지의 '평역' 때문인데…

이문열 삼국지는 소설이 죽 전개되어가다가 얼추 일단락이 될 때마다, 혹은 중요한 장면마다 마치 해설자가 상황을 정리하듯 작가가 끼어들어 그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이런저런 '평'을 늘어놓는다. 혹자는 이러한 이문열 작가의 해설이 '소설의 맥을 끊고 자신만의 개똥철학을 설파하는 것 같아서' 매우 싫어하는 경우도 있는데(의외로 많다), 나는 반대로 그 평역 부분을 매우 좋아하는 편이다.

왜냐하면 생각없이 죽 보노라면 어떤 관념이 고정되기 쉬운 시점에서 '정말 그럴까?' 하는 또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느낌이라, 똑똑한 친구나 선생님이 자신만의 흥미로운 이론을 내 앞에서 "그렇지 않냐?" 하고 풀어놓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조조가 가후의 계략에 빠져 자신의 말까지 죽고 이제 꼼짝없이 잡히거나 죽을 수 밖에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 순간, 장남인 조앙이 "아버님, 부디 제 말을 타고 피하십시오" 하고 자신의 말을 건내고, 그 말을 타고 도망쳐 조조는 살고 조앙은 결국 죽게 되는 장면 이후의 평역이 그렇다.


나를 포함하여 보통 사람이라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상에 지 살자고 아들을 사지에 내버려두고 도망가다니" 하면서 혀를 끌끌 차며 조조를 욕할 것이다. 조금 상황이 다를지 모르지만 만약 대형 사고가 벌어졌는데, 어느 사회적 명사가 자기 살자고 자식의 안전장구를 대신 차고 살아남았다고 생각해보자. (설령 강제로 뺏은 것이 아니라 자식이 부모에게 안전장구를 양보한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과연 사회의 시선이 어떻겠는가. 대놓고 욕하지는 않아도 수근거림은 어마어마하지 않을까. 당연히 당대에도 그러한 평가는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보는데…

여기에서 이문열은 조조를 변호한다.

자식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범부라도 할 수 있는 것이지만, 거기서 자식을 살리고 자신이 죽어버려서야 자신의 세력(자신을 따라온 수많은 장수는 물론이요 조조의 자식들까지 포함하여)의 멸망을 피하기 어렵고, 그저 죽음이 잠시 미뤄질 뿐이라는 식의 논리로 조조를 변호한다. 오히려 조조 그 본인이 살아남아야 복수를 하던 뭘하던 훗날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조조는 그렇게 자식의 목숨을 대가로 간신히 살아나 결국 승리를 쟁취한다.

이문열 삼국지를 보노라면 평역에서 이런 식의 '이런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식의 접근이 많이 꽤 신선한 지적 자극을 주곤 하는데, 그 영향이 뒤늦게 발현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내 성격이 그저 꼬였을 뿐인지… 최근의 나는 세상 많은 일에 대해 '이런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식의 접근을 곧잘하곤 한다.


인터넷 기사나 주변에서 보고 겪는 일들에 대해 처음에는 단순히 "아니 이게 말이 돼?" 하고 발칵 성질을 냈다가도, 다시 한번 그 당사자의 입장에서, 혹은 단순히 해당 사건 뿐만 아니라 전후의 상황을 살피면서 한번 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물론 누군가들은 그런 '두 번 생각하기'가 가져오는 그 나름의 이유를 "말도 안되는 변명" 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실제로 저 조조-조앙의 건 역시도 단순히 너무 멋진 아들과 못난 아비의 비극적인 교차점이 역사적 승리로 인해 금칠된 것일 수도 있다. 만약 조조가 그렇게 도망가서도 승자로 남지 못했다면 그 장면은 비장미 넘치는 눈물의 한 장면이 아니라 세상 추악한 패륜 부모의 꼴사나운 모습이 되었을 수도 있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내 경험상…

세상 이해되지 않는 대부분의 일들도 당사자의 말을 자세히 들어보면, 의외로 그것이 윤리적인 면이나 효율면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최소한 당시 상황 속에서의 합리성은 갖추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호미로 막을거 왜 가래로 막았냐"고 따지고 보니까, 알고보니 아예 호미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가래로 막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거나 옆에서 모두가 가래로 막으라고 조언해서 가래로 막았을 뿐이거나 그때는 정말로 가래로 막는게 타당해보였기 때문에(나라도 그랬을 정도로)그랬을 뿐인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그럴만해서 그랬다" 라고나 할까.

뒤늦게 그것을 비난하고 평가하기는 쉬워도, 정작 내가 그 상황에 있었다면 정말 그보다 크게 더 잘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 솔직히 요즘의 나는 그다지 자신이 없다.

내가 그리도 쉽게 비난하고 비판했던 그 많은 일들에 대해서도 말이다.

도배 소설

형이 여자친구를 집에 데려 온다는 말에 엄마의 얼굴에는 기쁨 반, 걱정 반이 스쳐 지나갔다.

"그럼 장판, 도배부터 새로 싹 해야겠다"

형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그런 것을 왜 하냐고 했지만 엄마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십수년도 더 된 누렇게 바랜 흰 벽지와 노란 장판을 보노라면 그 어느 여자라도 우리 집안과 엮일 자신의 암담할 미래를 머릿 속에 단번에 그려 버릴테니까. 그래도 내심 '집에 데려온다는거 보면 형 여친도 어느 정도 사정이야 알고 있겠지'라고 생각은 한다만 변해가는 사람 마음 속이야 알 수 없는 법이니 나 역시도 걱정이 들었다.

'하긴'

형은 우리 집안 사람 같지 않게, 엄마나 나처럼 빈티나는 외모도 아니고 곱상하니 귀티나게 생긴데다 서울에서 회사 다니면서 말쑥하니 차려 입고 다니니 아마 모르긴 몰라도, 여자가 그렇게까지 쳐진다고는 짐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분명히.





"엄마"

형이 돌아가고 나서 나는 몰래 엄마한테 30만원을 쥐어주었다. 원래는 컴퓨터 업그레이드 하려고 모아놓은 돈인데, 도배 장판하는데 보태 쓰시라고 돈을 쥐어 드렸다. 형은 신신당부하며 절대 도배 장판 같은거 하지 말라고 하면서 갔지만 엄마는 분명히 할 것이다. 제 입에 들어가는 것은 굶을 지언정 자식 새끼들에는 고기 한점이라도 더 물리려는 이 신 여사의 삶에 있어 혹여라도 '가난 때문에 자식 새끼 발목 잡았다'라는 일이 있었다가는 못이 아니라 말뚝이 가슴에 박힐지도 모르니까. 아니, 이미 말뚝 여러개 박혀있긴 하지만 더 박히게는 하고 싶지 않았다.

"고맙다"

엄마는 내 손을 꼭 잡으며 "착한 아들" 하면서 내 등을 두드려 주었지만 그저 뿌듯함보다는 가난이 싫어 속이 상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이번 주 토요일에 온다니 시간이 얼마 없다. 엄마는 서둘러 현두 아줌마 집에 전화를 걸어 도배를 예약했는데 "싸게 해줘" 라는 말을 몇 번을 반복하는지, 그저 내 입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허어'




생각보다 할 일이 많았다. 제일 먼저 할 일은 온 집안 구석의 오만 짐들을 다 버리는 것부터였다. 거지 같은 집구석에 뭔 짐은 또 그리도 많은지 버리고 또 버려도 버릴 것이 나왔다. 꾀죄죄한 집구석이 너저분하기까지 해서야 답이 없으니 엄마는 정말 많은 것들을 버렸다. 몇 번을 버리려다 끝내 못 버린 그 고장난, 엄마의 손때 묻은 재봉틀마저 이번에는 과감히 버릴 수 있었다.

'아들을 위해'

저 다섯 글자라면 엄마는 정말 못할 것이 없는 사람이니까. 사실 형은 몰라도 나는 안다. 엄마가 돈을 벌기 위해, 무슨 일까지 했는지. 엄마는 내가 어려서 아마 모를 것이 생각했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안다. 그래도 나는 그것을 결코 부끄럽거나 더럽다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번도 없다. 그 돈으로 내 아가리 속에, 우리 세 가족 입에 뭐가 들어갔는지 아니까. 사실 그래서 지금껏 먹고 체했어도 나는 엄마가 차려준 밥은 단 한번도 남긴 적이 없다.

"이만하면 좀 됐나?"
"되기는, 이제 시작인데"

내 허리가 이 정도면 아마 지금 엄마의 허리는 어쩌면 이미 끊어졌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할 무렵인데도 엄마는 쉬지 않고 방을 청소했다. 어차피 곧 도배 장판 새로 해서 없어질 것이건만 무엇이 그리도 그녀를 초조하게 하는지 엄마는 그런 장판조차 트리오 풀어 철저하게 청소했다.

"엄마, 화장실 내가 이미 다 청소했어"
"니가 하긴 뭘해, 엄마가 다 해야지 한거지"
"에유, 그냥 좀 쉬지 쫌"

조금이라도 구질구질한 것은 다 버려졌다. 구멍난 때밀이 수건도 가차없었다. 그토록 아끼고 또 아끼는 신 여사는 어디갔는지, 그저 그녀는 조금이라도 '없어보이는' 무엇인가는 다 버렸다. 그렇게 해서라도 조금 덜 가난해보이고, 조금 더 넓어보이고 깔끔해 보인다면, 엄마는 그것으로 행복할테니.




"아니 시팔 그럼 이걸 다 어디로 옮기라는거여"
"아니 어따데고 시팔조팔이야?"

아침에 눈을 뜨자 집 밖에서 엄마와 우리 빌라 B102호 할아버지의 다투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잠도 덜 깬 상황이었지만 반사적으로 몸을 튕겨 일으켜 옷을 대충 추려입고 밖으로 향했다. 뭐 알만했다. 폐휴지를 주워 생활하는 영감님네는 우리 빌라 앞 골목에 산처럼 그 쓰레기더미들을 쌓아놓곤 했는데 지금 형의 여친이 그 모습일랑 봤다가는….

"에효"

그래도 맨날 뭐 하나라도 더 가져다 드리고 혼자 되신 불쌍한 할아버지라도 뭐 국도 떠다 드리고 하고 그랬는데, 결국 아들의 미래가 엮이니 엄마도 마음이 독해진 것이리라. 할아버지야 돌변한 엄마가 당황스럽기도 했겠지만, 그 역시도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감정이 격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으리라. 엄마와 할아버지의 싸움은 육두문자질로 번지기 직전이었지만 큰 소리에 함께 나온 다른 집 아줌마, 옆 동 아줌마들까지 엄마의 편에 합세하고 있었다. 내가 나설 필요도 없었다. 내가 정작 나서야 할 곳은, 그 쓰레기 산을 치울 때였다. …정말로 허리가 끊어질 뻔 했다.

"백수 아들 이럴 때라도 써먹어야지"
"아 진짜 나중에 내가 여친 데려올 때 두고 본다? 어?"

늦어도 목요일 금요일에는 도배, 장판 다 한다고 치면 집 주변 환경 정리는 오늘이 마지막이어야 했다. 나와 엄마는 집 앞 골목은 물론 우리 빌라단지 근처까지 다 싹싹 청소를 했고, 깨져서 신문지로 막아둔 2층의 복도 유리도 새 유리로 갈았다. 그리고 근 몇 년 만에, 문 앞의 센서등도 고쳤다. 정말로 근 10년은 된 거 같은데.




이미 깎고 깎고 또 깎았음에도 엄마는 일손을 돕겠다는 억지를 부려서 3만원을 더 깎았다. 결국에는 감정이 상해서 "상호 엄마도 그러는거 아니야" 소리까지 들어가면서 기어코 더 깎아낸 엄마는, 대신에 정말로 두 명 몫은 할 요량으로 도배 아줌마들을 도와 일을 했다.

어릴 적에는, 아니 지금도 사실 엄마의 저런 억척스러움이 너무 싫었지만, 언젠가의 중학교 때, 내가 자는 줄 알고 안방에서 엄마가 울면서 이모와 나눈 전화를 본의아니게 엿들은 뒤로는 난 단 한번도 그녀의 그런 억척스러움을 비난하거나 부끄러워 한 적이 없다. 단지 매번 슬플 뿐이었지.

도배 장판을 싹 새로 하고, 엄마는 거실의 시계까지 새 것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엄마가 어떤 마음으로 이 '아들의 여친맞이'를 준비하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상록수회'라고 쓰인 그 누런 시계는 엄마와 아빠의 결혼선물이었다. 그 낡고 빛바랜, 이젠 누렇다 못해 허연 느낌까지 있는 오래된 시계를 엄마는 수시로 닦고 또 닦았다. 그리 먼지가 쌓이지도 않았음에도.

아마 그것은 엄마가 외로움을 느낄 때, 너무 힘들어 아빠를 떠올릴 때마다 한 행동이었으리라. 그런 시계를 엄마는 "이것도 버리자, 진짜 이젠 낡아서 못 봐주겠다" 라며 떼어내었다. 나는 엄마가 후회할까 두려워 몇 번이고 말렸지만, 엄마는 단호했다.

"에휴 버려. 엄마가 이따 가서 새로 사올거야"
"참 진짜"

결국 엄마가 내다버린 것을, 내가 곧 뒤따라나가 그 시계를 슬쩍 가져다가 비닐 씌워 옥상 한 구석에 올려두었다. 엄마가 버린 것을 후회하는 모습이 보이면 얼른 다시 가져올 수 있도록.



"이거 다 먹지도 못한다니까"
"아 남으면 우리가 먹으면 되지"

마지막은 먹거리였다. 엄마는 유난히 들뜬 얼굴이었다. 갈비도 사고, 삼겹살도 사고, 전 부칠 거리도 사고, 한우 국거리도 사고, 봄동에 나물에 오만 반찬거리를 다 사고, 토마토에 청포도에 뭔 계절에 안 맞게 체리까지 사고 심지어 김치도 익은 김치 뿐이니 겉절이 조금 해야겠담서 배추까지 조금 샀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새벽 1시 반이 되도록 준비를 했다. 도배에 장판 까느라 힘들었을 금요일 밤인데도.




"아휴 엄마 됐어. 여울이 돈 많어"
"네네, 어머니 나오지 마세요. 아휴, 아니에요 어머니, 무슨 용돈을 다, 괜찮아요 어머니 정말 괜찮아요, 하하"
"받아둬, 응? 내가 주는거니까, 받아둬. 상호랑 둘이 맛난거 많이 먹고, 이건 니 용돈 해. 받아둬 받아둬"

카톡에서 몇 번 보았던 형의 여친은 사진보다는 더 정감 어린 얼굴이었다. 못 생겼다는 말이 아니라, 세련된 도시미녀보다는 싹싹한 타입의 친절한 얼굴이랄까. 누구라도 웃으며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은 호감형 타입. 분명 형도 어떤 '확신'이 있었기에 그녀를 우리 집에 데려올 수 있었으리라.

실제로 누나는 꽤나 싹싹했다. 엄마가 기겁을 하며 말리는데도 기어코 설거지도 엄마와 도와 나란히 하지를 않나, 빼는 대신 "어머니 정말 맛있어요" 하며 밥을 정말 맛있게 먹는다거나. 형의 얼굴도 꽤나 흐뭇해보였고, 저렇게 성격 좋은 여자를 만난 형이 새삼 부러울 지경이었다.

그래도 형이 과연 낫긴 낫다, 대단하다 하고 새삼 생각했다. 그저 엄마는 좋아서 입이 귀에 걸렸고, 나중에 만원짜리 수십장을 기어코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아마 그 돈은 내 돈이었겠지만.




그날 밤, 화장실을 가며 본 엄마는 안방에서 혼자 적금통장 몇 개를 펴보며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아마도 엄마의 머릿 속에선 형의 결혼식까지 이미 다 치뤄지고 있을테고, 이제는 전세자금을 생각해 본 것이겠지. 전세금이라도 어떻게 조금 보태야 할텐데, 하는.

나 역시 뻔한 우리 집 사정을 생각하며 혼자 짱구를 꽤 많이 굴려봤다. 그러나 백수 처지에 뾰족한 답이 있을리 없고, 조금은 답답한 밤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걱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형과 그 무척이나 행복한 표정으로 웃고 있던 형의 카톡 사진 속 누나의 모습은 그 후 몇 주 가지않아 사라졌고, 생전 카톡 프로필에 상태 메세지 같은 것을 남기지 않던 형의 카톡에 '힘들다' 라거나 '현실의 무게', '숨길 수 없는 세 가지' 등의 조금은 오그라드는 문장들이 수놓아지더니 그마저도 사라지고 곧 기본 프로필로 돌아갔다.

그것으로 이미 나는 조금 짐작했지만, 이후 형이 집에 올 때마다 웃으며 "여울인지 꺼굴인지는 잘 있냐?" 하는 엄마의 농 섞인 말에 어느 날 벌컥 "그 년 이야기 좀 꺼내지 마, 돈 밖에 모르는 년!" 하고 화를 내는 형의 모습에 결국 슬픈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엄마는 당황하며 형에게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지만 나는 그것을 말리며 그저 고개를 저었다. 이미 더이상 바늘 하나 더 들어갈 곳 없이 수없이 인이 박힌 엄마의 가슴이건만, 그날 또 굵은 말뚝이 박혔겠지.




"백퍼 엄마 후회할 거 같아서 따로 챙겨놨었어"

형에게는 "세상에 여자가 그년 밖에 없다디?" 하고 퉁을 놓더니, 정작 형이 가고 나자 혼자 거실에서 긴 한숨을 쉬는 엄마를 위해 몰래 옥상에서 결혼 기념 시계를 찾아다가 걸어놓았다.

"에그…"

그리고 그제서야 꽤 오랫동안 참았던 긴 울음을 터뜨린 엄마는 내 품 안에서 한참을 꺽꺽대며 울었다. 나 역시 괜히 눈물을 줄줄 흘리며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뭐, 사실 나는 결혼 같은거 별로 생각도 없고 마음도 접었지만, 만약 내가 결혼할 기회가 온다면… 정말 그런 여자가 있다면, 거지도 상거지 같은 우리 집 구석의 경제사정에 대해 실망하지 않을 수 있는 여자, 그거 하나면 절대, 절대로 그녀를 무슨 일이 있어도 평생 모시며 행복하게 해줄거라고, 요리 못하고 집안 일 같은거 안 하고 못생기고 뭐 잘난거 진짜 단 하나도 없는 여자라도, 그래도 정말 잘해줄거라고.

그래서 인이 박힌 엄마 가슴에 더이상 못 안 박을 여자면 그걸로 나는 족하다고. 뭐,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역시 그냥 나같은건 장가 안 가는게 모두에게 행복한 길이겠지만.

"에휴, 엄마도 그만 울어. 뭐 잘못했다고 울어. 됐고, 밥이나 먹자. 내가 라면 끓일게"




"후우"

닫힌 안방에서 희미한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은 내 착각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여울이 누나도, 물론 우리 집이 가난하긴 해도 진짜 우리 집은 다시 안 봐도 되는데, 절대 안 귀찮게 하고 무슨 시집살이니 그런거 없고 그냥 형하고 누나, 아니 형수님, 아니 전 형수? 여튼 누나하고 둘이서만 진짜 알콩달콩 잘 살면 되는데, 다시 한번 잘 생각해보고 우리 멋있고 착한 우리 형이랑 다시 사귀었으면 좋겠다. 정말로. 진심으로 다시 잘 되길 빈다.

그리고 끝끝내 다시 잘 안되더라도… 그냥 그 날 표정관리 잘해줘서 고맙다는 말은 하고 싶다. 솔직히, 나라도 실망했을테니까. 흐. 쯥. 

우리 같은 사람 소설

어릴 적부터 대가리가 좀 돌아가면서 크게 삐뚤어지지 않은 놈들은 알아. 자기가 지금 제대로 된 길을 걷고 있다는거. 이대로 스트레이트로 쭉 앞으로 가기만 하면 된다는거.

암, 알다마다.

본인 뿐 아니라 주변은 더 잘 알아. 이대로 가면 이 놈은 되는 놈이라는거. 부모들도 알아. 되는 놈이랑 안되는 놈이랑은 같은 제 자식새끼라도 손이 한번 덜 가고 더 가고가 있지. 부모가 그 정도인데 주변 사람은 어떻겠어. 되는 놈한테는 확실히 대우가 달라져. 그 본인도 자부심이 있어서 스스로 노력도 할 줄 알고 욕심도 많고, 사실 제 능력 잘난거 아는 놈들은 크게 열심히 안 해도 알아서 쭉쭉 앞서가. 사람 자신감이라는게 원래 그래. 뭐가 될 때는 노력도 안 하고 개판쳐도 알아서 잘 되거든. 신기하게 그래.

근데…

사람 사는게 꼭 꽃길만 걸을 수는 없거든. 본인 잘못이든 주변 환경 탓이든 삐끄덕 하는 수가 생긴단 말이야. 근데도 보통은 어떻게든 잘 주워 넘기게 되는게 우리 같은 사람이야. 누구 말마따나 "되는 놈은 하늘이 돕는다" 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그런데 운이 거기까지였는지 뭐가 단단히 꼬였는지 아니면 거기까지가 한계였는지 결국 미끄러지는 놈이 나와. 엘리트 노선, 1등 그룹에서 떨어져 나가는거지. 곤조 있는 놈들은 그래도 2등 그룹에라도 어떻게든 머무르며 아둥바둥대다 올라오기도 하는데, 열에 아홉은 나가떨어져. 그게 원래 또 그래. 1등, 최소한 1등 그룹에 있던 그 우월한 기분에 취해 살던 놈들이 그걸 못 갖게 되면 이게 견디기가 어지간히 힘들거든. 주변에서도 "어어?" 하고 한두번은 봐주다가 결국 '안되는 놈이구나' 하는 판단 들면 싹 대우가 달라져. 이제부턴 추락이지.

그래도 사실 본인은 잘 몰라. 대부분은 '내 지금 잠깐 폼이 떨어져 있긴 한데, 금방 다시 치고 올라간다. 어떻게든 올라간다' 마음은 먹는데 그게 잘 안돼. 사실 지가 잘나가던 것도 어떤 특별한 노력이나 뭘 해서가 아니라, 그냥 본능적으로 하는대로 하면 그게 잘되던 것들인데 그걸 잃어버리고 밑바닥에서 다시 올라간다는게 쉬운게 아니거든.

그리고 그렇게 시간 흘려보내다보면 슬슬 어느새 현실에 안주하게 돼. 꼭 그렇게 안해도 되잖아, 적당히 이런 느낌도 괜찮잖아? 하는 식으로. 이게 참 지랄맞게 묘한 함정인데 솔직히 말하자면 이게 맞아. 한번 제대로 낙오한 놈들은 저 끝 위에까지 다시 못 올라가. 열에 아홉은. 한번 비틀, 한 놈들은 다시 살아나도 아예 바닥에 추락해버리면 올라가기가 힘들어. 거기서 차라리 안주하는게 지 팔자에는 더 나을 수도 있어. 그래도 가락 있던 놈들이고 교양은 아는 놈들이라 만족하고 살면 기본은 하거든. 어디가도 무시는 안 받을 수 있어. 정신줄만 더이상 안 놓아버리면.

그럼 이제 그렇게 어떻게든 뭉개고 사는거야. 그래도 썩어도 준치라고, 되는 놈들은 그 가락이 있어서 뭘 해도 또 중간 이상은 가. 밑바닥에서 구걸을 해도 남바 투 남바 쓰리까진 어떻게든 꿰어찬다고. 나는 이게 바로 권력의 본질이라고 봐. 되는 놈이랑 안되는 놈은 싹수가 다르다니까.

설령 클라쓰가 좀 떨어지고 막 그러면서 혼란스러우면 몰라도, 어떻게든 정신 차리고 나면 지 주어진 환경 안에서는 또 어떻게든 해먹을 줄 아는 대가리와 기품이 있단 말이야. 이제 영영 소머리는 못할 지언정 고양이 대가리, 쥐모가지 정도까진 한다 이 말이지. 이거는 진짜 옆에 있는 여편네들이 더 잘 알걸? 이 사람이 '되는 놈'인데 때를 못 만나고 사람을 제대로 못 만나서 이러고 망해버렸구나, 하는거. 그 안타까운 마음이라는거는 사실 이루 말할 수가 없지. 물론 정신 못 차리고 현실 못 받아들이고 혼자 망상이나 꾸고 앉아 있으면 더 한심하겠지만.

그래도 여튼 팔자가 한번 꺾이고 나면 더이상 청운의 꿈은 펼치지 못하는거야. 제 마음 속에는 강태공마냥 '나는 세월을 낚을 뿐이오, 언젠가 내 크게 뜻을 펼칠 날이 올 것이다' 하고 막 다짐을 해도 본인 스스로가 잘 알지. 끝났다는거.

나이를 한살 두살 먹으면서 서서히 '그래도 어떻게든' 하고 막연하게 다짐했던 꿈을 향한 길들이 막히는 것을 느껴. 그래도 야심 있는 놈들은 다른게 뭐냐면, 그러니까 우리 같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다시 위로 가는 동앗줄이 보이잖아?

그럼 영혼을 팔아서라도 이를 악물어. 이미 이때부터는 그게 진짜 동앗줄인지 썩은 줄인지도 잘 구분이 안 돼. 어렸을 때는 그렇게나 잘 보이던게. 그래도 방법이 없어. 탐이 난단 말이지.

아니 재판 받으러 검찰청 가는 길에 가슴이 두근두근 뛰는데, 그게 무서워서 떨리는게 아니라, 여기가 대한민국 파워맨들이 있는 거기다 이 말이지? 하고 설레이는 마음으로 뛴다니까. 무슨 왕의 귀환이라도 하는 것마냥.

국회에 가잖아? 놀러와서는 하릴없이 그 잔디밭을 가로 지르면서 걸어가는데 막 되도 않는 야심이 뭉개뭉개 피어오르는거야. 내 반드시 저기 입성하리라, 언젠가는. 실제로는 국회는 무슨 동네 통반장도 못 해먹을 위인으로 추락했는데도. 그게 우리 같은 사람인거야.

그러니 우리한테 기회가 오면 어쩌겠어?

박근혜 발가락도 빨아주고 문재인이 똥꼬도 빨아줄 수 있어. 그게 우리 같은 사람이야. 알지, 알다마다. 바로 그런 걸 잘 알아서 우리 같은 놈들 이용하고 버린다는거.

근데도 어쩔 수 없어. …다시 한번 저 위로 가는 길, 잃어버린 그 빛을 찾을 길이 생기잖아? 가는거야. 불나방이든 뭐든, 평생 이러고 가판대에서 세상 모지리들 욕하면서 대가리 썩히다 죽을 바에야, 단 한번이라도 다시 "거봐라, 나 되는 놈이었다고! 알겠냐 이것들아?" 하고 떵떵거리면서 잃어버린 자존심 되찾고 빛나다 죽고 싶은 '망한 대가리'들이 우리 같은 사람들이지.

하지만 어쩌겠어. 나같은 놈들이 광역시로 하나 가득할텐데. 평생 이러고 뭉개다 가는거지. 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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