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름 소설

"아직도 자?"

토요일 오전 11시 40분. 혜영이에게서 걸려온 전화에 나는 비몽사몽하는 목소리로 "나 새벽에 잤어. 챔스 보느라" 하고 겨우 대답했다. 혜영은 "에휴" 하고 긴 한숨을 쉬더니 "알았어, 그럼 좀 더 자"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그녀의 긴 한숨 소리에 갑자기 짜증이 확 일어났지만 의례 그려려니 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소름




결국 눈을 뜬 것은 오후 1시 50분이 다 되어서였다. 겨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소변을 보고, 고양이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하려다 관두고 다시 나와서 냉장고를 열어 본다. 먹다 마시고 남긴 콜라 패트병을 입 대고 한 모음 마신 후 다시 냉장고에 넣어놓는다.

"어후 피곤해"

꽤 잤음에도 피로가 안 가신다. 치르미누의 미친 삽질에 경기도 조지고 기분도 조지고 주말도 이렇게 조졌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치킨부터 치우려다가 다시 침대에 걸터앉는다.

허기가 조금 진다. 그러나 냉장고에 먹을 것이라고는 콜라 뿐이다. 뭐 시켜먹을까 하다가 카드 한도가 간당간당하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다시 씁쓸하게 라면이나 끓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방귀가 갑자기 마렵다. 일부러 힘을 줘서 뿌아악하고 강하게 뀐다. 밤새 숙성된 치킨 단백질과 빙초산 무의 환장 콜라보로 지독한 냄새가 난다.

"어흐"

창문을 살짝 열고 원룸촌 골목을 내려다본다. 일요일 낮인데도 인적은 드물다. 환기를 시키며 담배를 입에 문다. 윗 집 창문이 열려있다면 한 소리 들을 일이지만 요즘에는 창문을 닫아놓는지 별 소리를 안 한다.

"아 힘들다 진짜"

담배를 다 피운 후 꽁초를 창 밖으로 버린 다음 냉장고를 열고 콜라를 벌컥벌컥 마신다. 입 안 가득 탄산을 느끼며 목구멍으로 따가움의 지옥을 느낀다. 그리고 이윽고 끄어어어억 하는 긴 트림을 마친다. 다시 방귀도 마렵다. 미친 더러운 몸이다. 피식 웃음이 터진다.



겨우겨우 샤워를 마치고 커피라도 한잔 마시려고 아무거나 걸치고 집을 나섰다. 한량 그 자체다. 큰 길까지 나가서 동네 커피숍에 들어선다. 그래도 오늘은 손님이 좀 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한다. 베이글이라도 먹을까 생각했지만 역시 돈이 아깝다.

"쿠폰 찍어주세요"

생전에 쿠폰을 찍지 않는 인간이지만 요즘에는 이런 거에도 조금 궁상 맞아진다. 등을 벅벅 긁으며 기다리다가 이윽고 커피가 나오자 커피를 받아들고 다시 집으로 향한다.

뚜루루루루- 뚜루루루루-

혜영이에게 전화를 걸지만 그녀는 받지 않는다. 오늘은 출근이라고 했다. 과연 쓰레기 좆소 인쇄업체답게 주말 출근이 아주 상시다.

[ 모하냐? 밥은 먹었고 ]

카톡을 보내놓는다. 약 15분 후쯤 [ 어 먹었어 도시락 사와서 ] 하고 답장이 날아온다. 또 회사 앞 두솥도시락에서 싸구려 도시락이나 사먹었겠지. 몸에 안 좋다고 그런거 먹지 말래도 돈 아낀답시고 맨날 사먹는다. 별로 싸지도 않더만 참.




방으로 돌아와 간만에 오버트랙을 했다. 거의 반 년만인거 같은데. 그러나 역시 재미없다. 팸팍에 들어가 웃긴거 몇 개 낄낄대며 보다가 시계를 보니 어이없게도 벌써 4시 50분이다. 하루가 벌써 다 지나간 기분이다.

입에서 나도 모르게 쌍욕이 터지는데 배가 고프다. 그래, 역시 제대로 된 밥을 난 오늘 안 먹었다. 다시 괜히 냉장고를 뒤져본다. 작년 3월에 사놓았던 돼지고기 뒷다리살 남은게 냉동실에 들어있고, 계란 한 알, 쉰 김치 정도만 있다. 계란 하나를 후라이해서 햇반 돌려 먹을까 생각했지만 그냥 참고 다시 밖으로 나간다.

"아 추워"

귀찮아서 맨발에 쪼리 신고 나왔더니 발 시리다. 그리 춥지도 않은 날씨지만 내 발만 시리다. 아까 혜영이한테는 툴툴 대놓고 이번에는 내가 편의점 도시락을 사먹는다. 백혜자 도시락 제육만찬.



집으로 또 가져와 콜라를 곁들여 "끄어어억"하고 다시 한번 긴 트림과 함께 식사를 마친다. 코를 팽 풀고 방 한 켠에 던져놓는다. 이 청소해야 되는데. 귀찮다. 생각해보니 빨래도 안 돌렸다. 입사 날짜가 다음 주 화요일이니까 진짜 제대로 놀 시간은 오늘 뿐이라는 생각도 든다.

일단은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서 성지로 맛집을 검색해본다. 혜영이 오늘 저녁이라도 맛있는거 사줄 생각이다.




"뭐라고?"
"어 아냐 그냥 오늘 집에 갈래"
"왜? 뭔 일 있어?"

기껏 검색해서 스시라도 먹여줄까 싶어 연락을 했더니 혜영은 거절했다. 목소리도 조금 다운 된 느낌이다.

"아냐, 없어. 그냥 나 얼른 일 마쳐야 퇴근할 수 있으니까 그냥 오빠 따로 먹어"
"알았어"

전화를 끊고 난 뻘쭘함에 [ 성지로 맛집 ] 검색창과 몇 개의 블로그 창을 껐다. 잠시 멍하니 레이버 메인화면만 쳐다보다가 다시 팸팍에 들어가 커뮤니티질이나 한다.




뚜루루루루- 뚜루루루루- 뚜루루루루-

저녁 9시 20분. 혜영은 전화를 받지 않는다. 설마 아직도 일하나? 싶어서 카톡을 날려본다.

[ 아직 퇴근 안 했어? ]

마지막 남은 콜라 패트를 비우고 컴퓨터를 하지만 묘하게 마우스가 손에 잡히지 않는다. 약 20분을 더 기다렸다가 전화를 하지만 받지 않는다.

"아 시발 뭐야"

또 왜 이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놈의 백수타령에 일자리 겨우 찾아서 취업했더니만. 또 헤어지자 타령하려는건가. 마음이 착찹해진다.

"쓰읍 후"

창문을 열고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는다. 그러나 곧 윗 집에서 "아 담배 피우지 말라고 씨팔" 하는 고함이 들려온다. 나는 서둘러 담배를 던져버리고 창문을 닫는다. 아 시발 짜증나.




"아 시발"

대충 차려입고 집 밖을 나선다. 오후 9시 56분. 여전히 혜영과는 연락이 닿지 않는다. 초조한 마음으로 버스에 올라탄다. 적당히 사람이 찬 버스, 다행히 한 구석의 자리에 앉는다. 피곤한 버스 안 형광등 불빛이 가뜩이나 찌뿌둥한 몸에 오한을 살짝 부른다.

'피곤하다'

혜영의 집으로 향하는 나. 가는 길에 잠깐 편의점 들러서 캔맥주랑 치킨이라도 사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보나마나 또 밥 안 먹고 혼자 침대에서 울고나 있겠지. 에휴, 궁상 맞은 기집애.

그게 귀엽긴 하지만.

사실 이 와중에 또 서랍을 뒤져서 콘돔 2개를 챙겨왔다. 이것도 중요한 목적이다. 뭐, 다 그렇고 그런거 아닌가. 담배가 또 땡긴다. 향수를 살짝 과하게 뿌렸나. 아직까지 느껴진다.



삑-

역 앞에서 내려 곧 뛰어가 전철에 오른다. 약 70미터의 질주. 오늘 한 운동 중에 제일 격한 운동이다. 숨이 차다. 이 놈의 담배라도 끊어야 할텐데.

"다음 역은 대로, 대로 역입니다"

환한 전철 안의 불빛은 역으로 또 피곤하다. 나는 눈을 감는다. 혜영은 여전히 연락이 없다. 나는 슬슬 조바심과 불안을 느낀다.



"어, 순살로 해서 반반, 아 후라이드는 크리스피로 해서요. 양념은 중간 매운 맛 칠리로"

결국 혜영의 동네 근처 네랑치킨 집에 들러서 치킨을 주문한다. 편의점에서 캔맥주도 한 줄 샀다. 칠라이트로. 뭐, 대충 맛만 느끼면 됐지. 치킨이 튀겨질 때까지 기다리며 나는 혜영에게 또 카톡을 보낸다.

[ 뭐하냐고;; 사람을 왜 걱정을 시켜 ]

치킨집 TV에서는 축구 재방을 보여준다. 전반 7분만에 한 명이 퇴장 당했음에도 오히려 선취점을 뽑으며 잘 나가던 지버풀은 후반 32분에 동점골, 40분에 자책골까지 넣으며 침몰했다. 병신들.

전화를 보며 다시 한번 전화를 한다. 저녁 11시 16분. 손이 바르르 떨리기 시작한다. 이것은 분노일까 걱정일까.




혜영의 원룸 골목촌. 참 올 때마다 느끼지만 으슥하고 여자 혼자 살기는 골목골목에 가로등 하나 없는 우범지대다. 치킨과 맥주를 들고 그녀의 집을 향한다. 아까 밥을 먹었지만 새삼 허기지다. 얼른 치킨을 먹고 싶다. 그냥 집에 혜영이가 있고, 우울한 기분을 이 치킨과 맥주로 달래줄 수 있으면 좋겠다. 혜영의 집은 불이 꺼져있다.

딩동-

평소답지 않게 벨까지 누른다. 쿵쿵쿵 하고 문을 두드린다. 어쩌면 자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만약 이중걸쇄라도 걸어놓고 깊이 자고 있는거면 똥망인데, 하는 생각을 하며 비밀번호를 누른다. 1221. 내 생일이다.

"혜영아"

불을 켜고 방을 둘러본다. 그러나 기대, 혹은 걱정와는 달리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방은 깨끗했다. 화장대 앞이 조금 어수선하고, 침대 이불만 아침에 일어난 고대로 접혀있다는거 빼면.

"아 시발 뭐하는건데"

사실 아까 치킨집에서 무서운 상상을 했다. 혜영이 어쩌면 이 집에 다른 남자랑 뒹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다행히도 그것은 아니었다.

나는 아직까지도 손에 들고 있던 치킨과 맥주를 내려놓았다. 다시 한번 방을 슥 돌아본다. 에휴 시발.

"모르겠다"

나는 혼자 꾸역꾸역 치킨을 뜯기 시작했다.




맛이 없었다. 어제 먹은 치킨을 또 쳐먹어서 그런가, 아니면 좆같은 기분으로 좆같은 상상을 하며 먹어서 그런가 진짜 치킨을 먹는건지 콩밥을 쳐먹는건지 모르게 맛이 없었다. 먹고 있던 고깃조각을 내려놓았다. 체할 거 같아서.

까톡!

나는 거의 척수반사적으로 휴대폰을 돌아본다. 그러나 엄마다.

[ 아들 다음주에는 하번 내려와 엄ㅁ마가 맜있는거 해주께 ]

에효. 그러나 지금 거기에 신경이 안 간다. 이 년이 뭐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그러다가 침대 한 켠, 쓰레기통에서 굴러다니는 듯한 스타킹 포장 비닐껍질이 보인다.

혜영이가 스타킹을?

뭐 외주업체 갑사 만나러 갈 때나 친구 결혼식 때 종종 스타킹을 신긴 하지만 주말 출근에? 뭐, 아니 꼭 오늘이라는 법은 없지만. 기분이 갑자기 확 찝찝해진다.



우우우우웅- 우우우우웅- 우-

"여보세요?"

혜영의 전화다. 시계를 본다. 밤 12시 6분.

"너 뭐야"

나도 놀랄 정도로 차가운 내 목소리. 당연히, 나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곧 전화기 너머에서 약간 혀가 꼬부러진 듯 한 혜영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왜 나눈 술 마시면 안돼? 힝"

애교가 넘치는 목소리. 평소에는 잘 듣기 힘든 목소리. 그래도 그 목소리에 마음이 누그러진다.

"왜 전화 안 받았는데"
"왜 나 의심해? 어? 전화 바끼 시로소 안 바다따 왜!"

빙구 같이 혀 꼬인 목소리. 어느새 이미 나는 화가 다 녹고 웃음마저 터져나온다.

"어디야 지금"
"역 앞이다 왜"
"나갈게"
"지롤. 오빠 오딘데"
"니네 집"

그러자 전화기 너머에서 혜영의 "올"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갈게"



역 앞까지 반 걸음, 반 뜀박질로 헉헉대며 혜영을 만나러 갔다. 다시금 짜증과 분노가 치솟았지만 곧 그녀의 애교 섞인 목소리가 머릿 속에서 울려퍼지며 그 짜증이 누그러진다.

"야, 너 이러기야?"

내가 보자마자 한 소리했다. 혜영은 단정한 스타일에 스타킹까지 챙겨신었지만 이미 술에 꼻아 옷은 다 구겨지고 주접을 떠는 상태로 변해있었다.

"웨 웨 웨"
"누구랑 술 마신거야"
"과장님이랑, 용진씨랑, 현주 팀장님이랑 마셨다 왜!"
"다 출근한거야?"
"구래"
"근데 옷은 왜 이렇게 다 차려입고 나간거야"
"오전에 거래처 사장님 온다고 사장님이 나보고 옷 챙겨입으래서"

갑자기 또 짜증이 팍 난다.

"거래처 사장이 오는데 왜 니가 옷을 챙겨입는데"
"밥 사주고 술 사준다고"
"뭐이 시발?"

내 짜증에 혜영은 "뭐이 쒸" 하면서 주먹을 내 입에 들이댄다. 나는 그만 웃음이 픽 터져나온다.

"그래서 밥 얻어먹고 술 얻어먹고 이렇게 늦게 온거야?"
"구래 왜"
"근데 그럼 왜 내 전화 안 받았어"
"짜증 대빵 나서. 꼰대 쓰레기들이랑 술 마셔야 되는데, 너같음 전화 받고 싶겠어?"
"아니 암만 그래도"
"글고 현주 팀장님 차에 폰 충전하느라 깜박하고 넣어 놨었어. 됐냐"

어느새 혀 꼬인 것도 풀린 혜영. 에효.

"그래, 알았어. 집에 치킨이랑 맥주랑 사다놨는데, 안 먹겠네"
"어, 배 터질거 같어"
"가자 가"

나는 혜영의 손을 잡고 그녀의 집으로 향한다. 안도의 한숨을 겨우 내쉬며.




…혜영이 사실 그 날 술을 마신 대상은 회사 사람과 거래처 사장이 아닌 전 남친 윤대원인가 하는 그 새끼였다는 사실을 내가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무려 한 달이나 더 지난 일이었으며, 그 날 그녀가 나의 스킨십을 거부한 것도 생리 때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그때의 일이었다.

후우-

"아 이 시팔 203호! 담배 피우지 말라고!"
"아 시발 작작 좀 해! 어쩌라고 시팔!"
"…뭐 이 새끼야?"

오늘은 참 재수가 오지게도 옴 붙은 날인 것 같다. 여친의 바람을 목격한 것도 모자라서 건달 같은 새끼랑 시비까지 붙는 날이니까.

- 끝 -

주혜 소설

"팜프파탈이라는게, 뭐 이미지처럼 막 엄청나게 섹시해서 남자 홀리는 그런 것도 있지만, 내가 보고 겪은 진짜 팜므파탈은 그런게 아니더라고. 오히려 진짜 있는거 없는거 다 남자한테 막 세상에 이런 여자가 다 있나 싶게 잘하는 여자들이! 딱 지인짜 팜므파탈이더라고"

술만 들어가면 터져 나오는 노총각 연 과장님의 연애학개론. 흥미로운 이야기이긴 했지만 나는 문득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10년 전 주혜 생각부터 떠올랐다.





주혜




[ 오빠 뭐야, 군대 제대했으면 연락을 해야지! ]

전역하고 3개월을 바닥 긁으며 보내던 도중 갑자기 날아온 주혜의 네이트온 메세지. 나는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답했다.

[ ㅎㅎㅎ 그러게ㅋㅋㅋ 쏘리~ 정신없었지 술 먹느라. 넌 잘 지냈어? ]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에 대한 관심 순위가 그리 높지는 않았다. 서리, 연수, 진선… 한창 '하나만 걸려라' 느낌으로 수작질 부리던 애들은 이미 많았고, 주혜는 그녀들에 비하면 다소, 뭐. 좀 그랬으니까.

[ 응, 난 지금 천안에 있어 ]
[ 천안? 너 대학교 서울에 있지 않았냐? ]
[ 어휴, 나 취업계 내고 일하고 있어 힘들엉 ]
[ 아 그렇구나;; 그래도 취업 힘들다던데 넌 잘 뚫었네 ]
[ 응ㅋㅋㅋ운이 좋았어. 여기 월급도 나쁘지 않아. ]

그렇군.

[ 오빠 천안 놀러와 밥 맛난거 사줄게 ]
[ 그래, 조만간 함 보자~ ]

아마 거기에서 진짜 대화가 끊어졌다면 그대로 그녀와의 인연도 끊어졌을 가능성이 높았으리라. 하지만 주혜는 확실히 또래 여자애들에 비해서 뭐랄까, 사회적 지능(?)이 높다고 해야되나. 좀 비범한 면이 있었다.

[ 아아 그런거 말고, 오늘 와 오늘. 내가 퇴근하고 맛난거 사줄게 ]
[ 엥? 오늘? ]
[ ㅇㅇ ]

이미 오후 4시 반. 씻고 준비해서 터미널 가서 버스 타고… 밥 먹고, 뭐 술 한 잔 하고, 엄… 근데 주혜랑 거기까지? 에이, 좀 무리수 아닐까. 그렇다면 굳이….

[ 오늘 어케 가. 에이에이, 담에 봐, 담주 주말에 보던지 ]
[ 뭐야, 시큰둥하네? 나 그럼 이제 오빠 평생 안 본다? ]

그럴 리야 없다고 생각은 했지만, 또 사실 안 간다고 해서 오늘 내일 뭐 딱히 할 게 있는 것도 아니고, 복학까지 남은 몇 달 간 팽팽 놀기만 할 내 입장에서 안 갈 이유도 없긴 했다.

[ 알써 그럼 이따 터미널에서 봐 ]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어 ]

이틀 만에 씻고 준비했다. 온 몸 구석구석, 특히 몇몇 부위를.




"오빠!"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불과 2년, 아니 신병 시절 때 면회 왔던거 생각하면 근 1년 반? 만에 주혜는 몰라보게 예뻐져 있었다.

"누구세요?"
"야!"

주혜는 퇴근 전에 이미 식당을 예약해 놓았다고 했다. 잠자코 따라갔더니 꽤 그럴싸한 한우 고깃집이 나온다.

"야, 여기 150그램 1인분에 38,000원이라는데"
"아 오빠, 내가 쏜다고"
"그러니까"
"걱정말고 배나 채우셔"

등심 4인분에 육회에 이것저것 곁들일 사이드 메뉴까지 시키는데 세상에 그렇게 멋있는 여자는 내가 본 기억이 없다.

"…누나라고 불러도 돼요?"

내 말에 빵 터진 주혜는 "어휴 그래 우리 아들 나라 지키느라 고생했으니까 많이 먹어" 하며 내 앞에 구워진 고기를 건낸다.




"잘 먹었어. 아 너무 훌륭하다"
"그치? 여기 맛있더라고"

배불리 밥을 먹고 나오는데 "2차 가야지" 하는 주혜. 이번에는 내가 쏴야지하고 생각하던 차에 적당히 괜찮아 보이는 이자카야가 보인다.

"저기 가자"
"좋아"

자리에 앉아 술과 안주를 시키고 한숨 돌리려니 주혜는 여전히 방긋방긋 미소를 지으며 이것저것 물어온다. 이렇게 보니 또 새삼스럽지만 정말 귀엽네.

"오빠는 연애 안 해?"
"해야지. 근데 뭐 있어야 하지. 주변에 이쁜 여자 없냐"
"오빠 주변에 여자들 많잖아. 그 누구지? 선… 선 뭐였는데. 선진이? 선주? 그 왜 얼굴은 완전 애긴데 몸매 미친 애 있잖아"
"진선이. 그리고 손 그렇게 하지마. 그 정도는 아니야"
"맞어. 진선이. 에드벌룬"
"미친"
"걔 막 오빠랑 썸씽 있고 그러지 않았어? 옛날에 내가 전화했을 때 옆에서 막 난리 피웠잖…"
"아 됐어. 그게 언제적 이야기야"

사실은 지난 주에도 봤다. 영화 보고 밥 먹고 곧바로 헤어졌지만. 실속 없는 기집애.

"그럼 지금은 연애 안 해?"
"안해. 넌?"
"나도 안해. 헤어진지 몇 달 됐어"
"올, 그럼 그 사이 연애 하긴 했네?"
"어"

갑자기 주혜의 얼굴이 아련해진다. 뭐여.

"왜? 안 좋게 헤어졌냐"
"어"
"뭔데"

뭔가 말을 하려다가 "그냥, 걔네 엄마가 나 안 좋아한대서" 하고 대답하는 주혜.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마마보이네. 그런 새끼랑 뭐하러 만나"



사케 두 병을 포함해서 12만 4천원이 나왔다. 내가 계산하려 했지만 주혜는 막 "아 진짜 오빠 나 막 소리지른다? 나 다시 안 볼거야?" 하는 반 협박성 멘트까지 날리며 굳이 자기가 계산했다. 아까 밥 값까지 생각하면 거의 30만원 가가운 지출. 갑자기 너무 미안했다.

"야 너 무슨 내 장기 떼가려고 그러냐. 뭔 돈을 이렇게 쓰는거야"

이미 반쯤 혀가 꼬인 주혜는 웃으며 "내가 딴 사람은 몰라도 오빠한테는 써도 돼!" 하면서 택시를 잡았다.

"월봉중학교 쪽으로 가주세요"

나는 오늘 얘랑 자는건가. 또 혹시나 하는 기대에 터미널에서 콘돔 사두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택시 안에서 주혜는 말없이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나는 주혜의 손을 잡았다. 그녀도 내 손을 잡았다. 따뜻한 손길. 어쩌면 이다지도 보드라울까.

주혜는 전 남친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술을 연거푸 들이켰다. 뭐 그리 대단한 놈이라고, 대꾸하기는 했지만 대단한 놈인 듯 했다. 주혜가 원래 좀 누구를 만나면 열과 성을 다 하는 느낌이긴 하지만, 그 놈은 정말 대단한 놈이었다.




"내가 걔한테는 진짜 다 줬다?"

뭘 줬는데 하고 묻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생활비 쓰라고 카드도 줬지, 기 죽지 말라고 용돈도 맨날 쥐어줬지, 면접 보러 다니라고 정장도 해입혔지, 잠깐 지낼 데 없다면서 한 6개월 내 자취방에서 살 때는 내가 피임약까지 먹으면서… 지 하고 싶다는거 다 해줬다고"

준마이 두 병째에 돌입하자 주혜는 갑자기 목소리가 높아졌다.

"내가 걔네 부모님 결혼기념일에 호텔 숙박권까지 끊어줬다고"
"미친, 돌았네"
"내 이름으로 끊은건 아니구, 남친 이름으로 해서. 효도하라고"
"하 진짜 너도 참"

호구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굳이 꺼내진 않았다. 자기가 제일 잘 알테니.

"근데 좀 이상한거야. 여친한테 부모님 결혼기념일 선물로 호텔숙박권 끊어주고 싶다는 말도 그렇긴 하지만, 부모님 결혼기념일인데 지가 연락이 안될 이유는 없잖아"
"그렇지"

그랬구먼.

"그냥 괜히 이상한 느낌이 와서 다짜고짜 호텔로 찾아갔는데, 역시나 거기 있더라. 다른 여자랑"
"그래서 어떻게 했어? 가위로 잘라버렸냐"

내 말에 술 김에도 눈을 흘기던 주혜는 말을 이어나갔다.

"아니, 그냥 못 본 척하고 다시 집에 왔어. 그리고 카드 사용 내역 살펴봤어. 싹 다. 그랬더니 이 새끼가 진짜 미쳤나 싶더라고"
"왜"
"지 딴에는 머리 굴린다고 굴린거 같은데, 아니 금요일 밤 11시 반에 술 먹고 카드 현금인출로 8만원을 뺀 기록이 군데군데 있네? 다음 날 12시에는 해장국 두 그릇까지 결제하고?"
"캬, 미친"
"아마 기념일이었던 것 같아. 부모님 기념일이 아니라, 다른 년이랑 100일 기념일"
"정신나간 새끼네"
"근데도 나는, 다음 날 좋게좋게 말했어. 용서해줄테니 그러지 말라고. 카드 사용 내역은 딱 한번 살펴본거고 다시 그럴 일 없을거라고. 그리고 두 달을 모르는 척 지냈는데, 그 후에도 계속 그러더라"
"개새끼"




"102호, 비번 이공일삼이야"

주혜를 들쳐업고 그녀의 방에 들어섰다. 아파트 옆 작은 빌라 1층. 주혜를 침대에 눕히고, 불도 켜지 않은 채 눈에 어둠이 익숙해질 때까지 가만히 방 안을 살핀다. 작지만 아늑한 방. 대학 시절에도 참 나를 잘 따랐고, 아마 마음을 먹었다면 훨씬 이전에도 사귈 수 있었겠지만 그녀의 마음을 일부러 모르는 척했던 나.

그냥 조금은 나랑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항상 말과 행동은 가볍게, 대충을 말하지만 그 안에서도 꼼꼼함과 진지한…진심이 항상 느껴지던 주혜였다. 정말 좋은 동생이고 항상 곁에 두고 싶었지만, 그래서 사귀었다 헤어지면 영영 남이 될까 두려웠다. 10년 지기 소꿉친구였지만 어이없게 멀어진 영서처럼 될까봐.

뭐, 조금 더 솔직한 이유를 들자면 더 예쁜 애들이 눈에 들어오기도 했고. 그러나 오늘의 주혜는 정말 매력적이었다. 외모도 외모지만, 좋아하는 남친이 능력이 없다고 하자 선뜻 신용카드까지 건내고 지가 먹여살렸다는 모습이 엄청나게 섹시했다.

물질적인 모습이 아니라, 주혜에게서 우리 엄마가 겹쳐보였는지도 모른다. 공사현장에서 허리를 다쳐 평생 누워있는 아버지 대신 가정을 이끌어 온 우리 엄마가. 이런 여자라면 만약 내가 언젠가 뭔가 잘못되더라도 평생 의리를 지킬 것 같았다. 그런 여자라면 내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지 않을까.

내 눈은 어둠에 완전히 익숙해졌고 어느새 곯아 떨어진 주혜의 양말을 나는 벗겨주었다.

"으이구"

내 지금 뭐한다고 천안까지 내려와서 여자애 양말이나 벗겨주고 있나, 하는 허무함이 몰려왔지만 오른쪽 양말을 벗기는 순간 주혜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그렇게 별로야?"

잠깐 놀랐지만, 나는 "아니" 하고 작게 대답했다. 그리고 주혜가 뭐라 더 말을 하기 전에 자리를 고쳐 앉아 그녀의 이마를 쓸어 넘겼다.

"솔직히 내가 너한테 아예 마음이 없었으면 여기까지 왔겠냐"
"근데 왜 맨날 선을 그어"

뭔가 변명을 할까 하다가, 그냥 "그 선 넘으려고" 라는 말과 함께 그녀 옆에 누웠다. 둘 다 피식 웃었다. 한 명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들어서, 한 명은 그런 드립을 떠올렸다는 발상 자체가 자랑스러워서.




나는 그 날부터 곧바로 주혜네 집에 얹혀 살기 시작했다. 집에는 연락을 했다. 일자리 구했다고. 대학교 친구 자취방에서 숙식하면서 지내다가 곧 들어가겠노라고. 아버지는 드디어 사람다운 짓 한다며 좋아하셨고, 어머니는 걱정하는 듯 했지만 역시나 좋아했다. 백수가 방구석에서 허송세월하는 것보다야 당연히.

"이거 그거야?"
"어. 피임약"

처음이었다. 하다가 내키는 그 순간 그녀의 안에 마음껏. 그리고 곧바로 또 이어서. 주혜와 나는 잘 맞았다. 매일, 정말 매일 몇 번이고.

"지금 몇 시야?"
"두 시 반"
"헐, 나 몇 시간 못 자겠네"

아마 피곤하기도 엄청 피곤했을 것이다. 퇴근하면 남친이랑 같이 집 근처에서 밥 먹고 불당천에서 걸으며 데이트, 그리고 집에 와서는 섹스. 매일매일. 밥값도, 내 옷도, 모든 생활비도 모두 그녀가 감당하는 하루하루.

"그, 나도 서울에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아"
"왜?"

돈을 좀 어떻게 마련해 볼 생각이었다. 집에 뭐 플스를 팔던지, 엄마한테 좀 꾸던지 해서. 우리가 뭐 오래 같이 산 부부도 아니고, 연애 시작하자마자 이렇게 일방적으로 신세만 지는 연애라니,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뭐야, 그런 이유라면 괜찮아"
"괜찮기는. 너가 무슨 갑부라고"
"나 연봉 꽤 괜찮게 받아"
"그래도"

사실 우리가 딱히 크게 돈 드는 연애를 하는 편은 아니었다. 밥도 처음 며칠만 외식했지 이후로는 집에서 같이 요리 해먹었고, 게임도 영화도 그냥 집에서 둘이 끌어안고 보는게 전부였으니까.

"괜찮아. 정말 괜찮아. 나 모아놓은 돈 좀 되거든?"
"내가 다 까먹는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지도 않지만 그럼 좀 어때. 내 서방님인데"

대신에 나는 그녀가 집에 오기 전 청소도 해놓고 빨래도 해놓고, 서툰 솜씨지만 요리도 해놓고 했다. 그때마다 주혜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야, 진짜 나는 복 받은 여자다"
"복은 내가 받았지"
"진짜 오빠 나한테 장가오면 안됨?"
"그래, 도장찍자"
"응"
"근데 그 전에 다른 도장부터 찍자"
"아 무슨 또 아저씨 같은 말이야"



꿈같은 이주일이 지났다. 오늘도 점심시간, 주혜의 회사 근처에 와서 같이 밥을 먹고, 그녀를 들여보낸 후 퇴근까지의 여섯 시간을 PC방에서 보내는 그 순간.

"아들, 요즘 뭐하느라 연락도 없어"
"어, 그냥 일하느라 좀 바빴어."
"그려, 일은 할만해?"
"어, 꿀알바야"
"그래도 얼굴 한번 비춰야지. 거 친구네서 신세 지내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옷도 없잖아"
"아 다 있어. 걱정말어"
"그래"

하긴, 잠깐 집에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슬슬 환절기인데 옷도 좀 가져다 놓고 해야겠다 싶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하긴 했지만, 이대로 괜찮을까 하는 불안도 커졌다.

'그래, 집에 다녀오자'

주혜에게 전화를 했다. 옷이랑 이것저것 짐이랑 좀 더 가져오겠노라고, 집에 좀 다녀오겠다고. 주혜는 의외로 선선히 그러라고 했다.




원래 계획은 올라간 날 바로 짐만 부치고 다시 내려올 생각이었지만, 막상 또 아들이 간만에 집에 들어왔다고 엄마의 대접이 달라졌다. 갈비에 삼겹살에, 무슨 과일에 뭐에, 첫 휴가 나왔을 때 생각이 날 정도였다. 배불리 먹고 나니 그냥 자고 가겠노라고 주혜에게 연락했다. 역시 선선히 그러라는 주혜.

"야, 뭐하냐?"

다음 날은 간만에 얼굴이나 보자는 승필의 연락. 언제 한번 꼭 보자 보자 했던 놈이라 연락을 뿌리칠 수 없어서 만나고 술 마시고 그렇게 또 하루, 승필과의 술자리에서 연락 온 서리의 전화.

"오빠 요즘 연애해? 왜 이렇게 연락이 뜸해?"
"연애는 무슨. 요즘 알바 좀 하느라 그랬지. 근데 갑자기 왜?"
"오빠 그럼 모레, 금요일에 뭐해?"

그렇게 서리와의 술 약속 때문에 또 천안으로의 귀환이 이틀 미뤄졌다. 만나서는 막상 뭐 없었지만 그녀의 마음을 조금은 확인할 수 있었다.

"알고보니 오빠 막 밀당 초고수 아냐? 그렇게 맨날 놀자 놀자 하다가 연락 없으니까 내가 더 서운한거 있지?"
"참나. 그럼 뭐 나랑 사귀기라도 해주냐?"
"음, 하는거 보고?"

헤어지는 자리에서 볼뽀뽀까지 받았다.

"어…"
"또 오해하지마? 그냥, 이제부터 하는거 좀 지켜본다는 뜻이니까"

여우 같은 년. 택시 타고 떠나는 서리를 보내고 휴대폰을 확인하니 부재 중 통화가 네 통이었다.



"왜 이렇게 통화가 안 돼?"
"미안, 잠깐 뭐 좀 하느라고. 왜?"
"바로 온다는 사람이 며칠 째야. 나 불안하게"
"아, 걱정마. 금방 갈게"
"그게 언젠데"

주혜 성격상 '지금 당장'이 답이겠지만, 당장 내일 연수와 진선이가 같이 영화 보자는 제의를 해놓은 상태였다. 하필이면 참.

"토요일 밤에 갈게"
"밤에? 낮에는 뭐하는데"
"현우랑 보기로 했어"
"현우? 현우는 누군데"
"대학교 친구 있어"
"하… 알았어"

전화를 끊고 나니 조금은 피곤했다. 하지만 아주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다. 유부남의 기분이 이런걸까 싶고.

"친구들하고 지낸다고 나쁜 짓 하고 돌아다니고 그러는거 아니지?"
"아 무슨 내가 중고딩이야?"

집으로 돌아와 플스랑 겨울옷이랑 이것저것 개인짐들은 택배로 부쳤다. 주말 지나서 월요일, 화요일에는 도착하겠지 생각했다. 그날 밤은 주혜를 달래며 길게 통화를 했다. 늦잠을 자고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나설 채비를 했다.

"또 어딜 나가."
"약속 있어"
"너 그럼 이번 주는 내내 일을 안 하는거야?"
"일 안 하는 날은 안 해도 돼"
"그런 일자리도 있니"

집에선 내가 지방에 취업해서 일하는 줄 알고 있었으니까. 이미 엄마는 어느 정도 의심을 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무어라 하는 대신 용돈을 쥐어주었다. 무려 30만원이었다.

"집에 가면 애들이랑 맛난거 사먹어"
"알았어"

하지만 엄마가 준 그 돈은 주혜가 아닌, 연수와 진선에게 돌아갔다.



"참치요? 정말?"
"그럼"

…나는 끽해야 동네 회전초밥집 정도나 생각했다. 이 미친 년들이 진짜 코스요리 스시집에 갈 줄이야. 그러나 뱉어놓은 말도 있고 해서 그냥 내가 부담했다.

"21만 3천원입니다"
"여깄습니다"
"오 뭐야 오빠 현찰 부자네"
"내가 돈 빼면 시체 아니냐"

농담을 주고 받으며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 속이 쓰렸다. 차라리 주혜한테 근사한 식사라도 한 끼 대접할 것을. 셋이 같이 영화를 보는데 영화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아까 중간에 잠깐 주혜한테 전화했을 때도 주혜 목소리가 좋지 않아서 더 속이 쓰렸다. 아쉽지만 남은 돈으로 둘이 뭐 뷔페라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빠, 아까 돈 많이 썼죠"

영어 학원 때문에 일찍 따로 들어간다고 한 연수는 나에게 몰래 귀뜸해줬다.

'오빠, 진선이 요즘 많이 외로워해요. 기회야, 내가 팍팍 밀어줄테니 잘해봐요. 오빠 진선이 몇 년 짝사랑한거야? 잘 되면 나한테도 남자 해줘요. 알았지?'

대답도 듣기 전에 웃으며 뛰어간 그녀. 참, 왜 항상 인기는 이런 식으로 몰려오는 것일까. 좀 나눠서 오면 얼마나 좋아.

"아냐, 그렇잖아도 연수가 너 요즘 기운없다고 해서 맛있는거 사주고 싶었어. 무슨 일 있고 그런건 아니지?"
"그런거 없어요. 아 근데 진짜 오빠 최고다. 나 기운없다고 막 비싼 초밥도 사주고."
"돈이 문제냐. 근데 진짜 뭔 걱정 있는건 아니지?"

내 질문에 진선은 묘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잘 모르겠어요. 기분이 싱숭생숭하고, 허전하고. 막 연수는 그래서 연애해야 된다고 그러구"
"주변에 뭐 좋다는 남자 없어?"
"없어요 그런거. 맘에 드는 사람도 없고"

그 말에는 조금 실망했다. 하지만 애써 티는 안 내고 농담식으로 물었다.

"나 있잖아 나. 나랑 만나면 되겠네"

그리고 그 질문에 의외로 진선은 밝게 웃었다.

"진짜 오빠 같은 남자가 진지하게 고백하면 생각 좀 해볼텐데"
"정말?"

뭐야 이건. 너무 뻔히 속 보이는 대화 같지만 그래도…. 정말정말 새삼스럽지만 진선의 가슴에 계속 눈길이 간다. 일부러 그러는건 아닌데 눈길이 간다. 어쩌면 이렇게 귀여운 얼굴에 이런 몸매가. 과연 연예인 제안을 몇 번이나 받은 것도 이해가 간다.

"어…, 음. 사실 나 진짜로 좀…"

뻘쭘한 고백이었지만 사실은 주혜 생각이 났다. 지금 내가 뭘하고 있는건가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몇 년을 바라만 보던 진선과 이렇게 가까워 질 기회에 솔직히 설레임이 없다는 것도 거짓말이었다.

"뭐에요, 아 웃겨"

내 딴에는 조금 당황하면서도 진지하게 들이댄 건데 그게 진선이 보기에는 그냥 개그로 보인 모양이다. 나는 얼른 함께 크게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그렇게 약 20분 정도 함께 걸으며 많이 대화를 하다가 그렇게 헤어졌다.

"잘 들어가요 오빠. 자주 봐요. 나 요즘 심심해요 많이"
"어"

저녁 10시 10분. 휴대폰의 부재중 전화 한 통. 나는 서둘러 택시를 잡아 터미널로 향하며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주혜는 받지 않았다.




"뭐야, 왜 그렇게 늦었어. 저녁 만들어 놓고 기다렸잖아"
"미안해, 내가 먼저 먹으라고 했잖아"
"같이 먹으려고 했지"

미안했다. 사실은 주혜가 전화를 안 받길래 또 오만 잡생각을 하면서 미리미리 문자도 싹 다 지우고 통화기록도 지우고 하면서 왔는데 그냥 잠깐 잠이 들었다고 했다.

"그래 나도 먹은지 좀 됐어. 얼른 먹자"
"응, 내가 이거 찌개 좀 데워올게"

주혜가 끓인 김치찌개는 참 맛있었다. 아까 쳐먹은 인당 7만원짜리 스시 코스보다 훨씬 더. 그래서 더 미안했다. 서리, 진선이랑 놀다가 와서 본 주혜가 새삼 덜 예뻐 보인 것까지도 미안했다. 스스로를 쓰레기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무슨 일은. 그리고 내일은 우리 뷔페 가서 맛있는거 먹자. 나 돈 생겼어"
"에휴, 기어코 엄마한테 돈 얻어왔구나?"
"아니거든?"

사실은 맞지만.

"그리고 여기로 택배 붙였어. 플스랑 겨울옷이랑 막 다"
"이제 우리 같이 사는거네?"
"어"
"좋아"

조금 흔들렸던 마음이 다스려졌다. 그래, 나 좋다고 이렇게 죽고 못사는 애가 최고지, 다른 년들이 무슨 대수냐.




"잠깐 일어나 봐"

한참 곤하게 자던 중간이었다. 누군가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당연히 주혜였다.

"이거 뭐야"

표정이 장난이 아니었다. 뭔가 문제가 생겼다고 직감했다. 주혜의 손에는 내 휴대폰이 들려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펴보인 휴대폰에는 [ 오빠, 진선이한테 고백했다면서?ㅋㅋㅋㅋㅋㅋㅋ 어쩜 그렇게 사람이 단순하냐ㅋㅋㅋ ] 라는 연수의 문자가 와 있었다.

"해명해 봐"

병신. 물론 나 자신에게 한 말이다. 해명이 가능할 리 없다. 이미 주혜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하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진선이는 주혜도 아는 이름이다. 지난 몇 년간 그녀에게 많은 좌절감을 안겨준 그 이름 아닌가.

"그냥… 별 일 아니었어"
"별 일 아니라고?"

주혜는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했다. 당연했다. 전 남친의 일도 있고, 또 짐 가지러 반나절만 다녀오겠다는 사람이 근 일주일을 뭉개다 왔으며 이상한 문자 내역까지 있고.

"그리고 현우라는 친구랑 놀았다면서. 그 친구랑 연락한 내역은 어딨는데? 연락도 없이 텔레파시로 약속 잡아서 만났어? 통화내역에 없던데?"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랬기에 나는 더 큰 소리를 쳤다.

"너 남의 휴대폰은 왜 보는데. 의심병 있어?"

주혜는 눈물을 죽 흘렸다.

"이러지마, 사과를 해 그냥. 잘못을 했으면 그냥 사과를 하라고"

그 순간 그녀의 울먹임에서 느꼈다. 방금 전의 그 말은, 나 하나한테만 하는 말이 아니라, 그녀를 못 살게 군 전 남친을 포함해서 하는 말이라고.

그래, 그 놈은 잘못했을 때 사과를 안 하고 더 큰 소리나 치고 지랄을 했나보구나. 지금의 나처럼.

"미안해, 사실은…"



이만저만하게 잘 둘러댔다. 사실 7할에 적절한 가감 3할을 보탠 그런 구라. 물론 아무리 '오래 알고 지낸 벗으로서 용기를 붇돋아주기 위해 한 농담일 뿐. 애시당초 걔랑 나랑 뭐 불꽃이 튀고 그런 뭐는 좀 아니잖는가' 라는 변명을 했다고 그게 쉽게 통할 리가 있겠는가.

아마 주혜도 알았을 것이다. 시시한 남자의 졸렬한 짓과 그것을 감추기 위한 말도 안되는 개구라라는 것을.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자기 눈물과, 그 눈물을 보고 흘린 내 눈물을 다시 웃으며 닦아주었다.

"다시는 그러지마"

알겠노라고 대답했다. 다시는 안 그럴 거라고.




연 과장이 물었다.

"그래서, 그 다음에 주혜한테는 진짜로 잘했어? 그 이쁜이들이랑 잡은 약속들은 다 파기하고?"

나는 맥주를 들이키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자 연 과장은 물론이요, 현 대리, 진혁이 다들 보챘다.

"뭔데?"

나는 그저 고개를 저었다.

"아 뭐냐고"
"어떻게 됐어요?"




회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아내는 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다. 그제서야 "흐음" 하며 깬 아내는 나에게 물었다.

"술 많이 마셨어?"
"아니, 그냥 맥주 몇 잔"
"응, 지금 몇 시야?"
"12시 10분"
"그럼 얼른 자. 내일 또 출근하려면 피곤하겠다"
"어, 잘자 서리야"

나는 눈을 감았다.

자기관리 소설

"햄버거 두 개를 섭취하신 후, 맥주 원샷과 함께 침대에 누우세요. 그리고 소화가 될 때까지 두 시간의 숙면! 잊지마세요! 멋진 몸매를 위한 당신의 선택!"

오늘도 TV의 벌크업 프로그램을 보며 햄버거를 억지로 입에 넣고 있는 누나. 그녀를 보며 나는 피식 웃는다.

"아 누나, 그런다고 살이 쉽게 찔 것 같아? 때려치워. 그냥 그 몸매로 살아"
"이제 죽을라고! 야, 기달려. 올 여름에는 진짜 내 반드시 80kg 채우고 만다"
"에휴, 꿈같은 소리"

누나는 곧바로 "야!" 하고 또 소리를 지르지만 난 웃으며 밖으로 뛰어 나온다. 아차, 이러다 살 빠지면 큰일. 천천히 걸어야지.





자기관리의 시대 





오늘도 역 앞에서는 멋지게 찌운 육중한 몸을 자랑하는 돼지들이 전단지를 나누어 주고 있다.

"폭식하러 오세요"
"아, 예예"

몇 명의 남자돼지들이 건내는 전단지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피했지만, 싱그러운 미소와 함께 갑자기 슥 다가온 45인치 허리의 미녀가 건내는 전단지는 나도 모르게 받아들고 말았다. 앞에서 나에게 무시당한 남자 폭식 트레이너들은 그런 내 모습에 피식 웃었지만 사실 놈들도 이해는 할거다. 이런 뚱녀가 상큼한 웃음과 함께 건내는 전단지를 어떻게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 할 수 있어요 100kg 섹시한 몸매! 올 여름 여심을 휘어잡을 목살/뱃살/옆구리살 집중 육성! ]

나는 얼떨결에 손에 건내받은 전단지를 보며 혀를 찼다. 사진 속 육중한 체구의 남자. 멋있긴 멋있다. 나도 이렇게 늘어진 뱃살과 옆구리살을 가질 수만 있다면. 폭식 트레이너들처럼 스모 선수 체형은 바라지도 않지만, 그래도 더 늙기 전에 원팩은 한번 만들어 보고 싶다. 그보다, 지금 몇 시지. 어, 벌써 3시네.

"어, 연수야. 어디야? 응? 나도 역 앞인데? 아아, 어어. 그럼 내가 그쪽으로 갈께"



이미 15분 전에 도착한 연수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어, 미안 내가 좀 늦었네"
"아니야. 괜츈. 커피 마실래?"

카드를 내미는 여자친구에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내가 살께"

나는 곧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연수는 나에게 물었다.

"뭐 시켰어?"
"아메리카노"

하지만 그 말에 연수는 곧바로 미간을 찌푸린다.

"아 왜!"
"아, 미안"

맞어, 저번에도 이걸로 한 소리 했었지.

"아 왜 내가 시키는대로 마끼아또 안 먹어? 맨날 아메리카노 아니면 에스프레소나 먹고. 자꾸 그러니까 이렇게 마르잖아. 아 진짜 짜증나. 내 말을 왜 맨날 무시해?"

어느새 연수의 목소리가 올라간다. 나는 당황하며 그녀를 진정시킨다.

"아, 미안. 대신에 시럽 많이 타서 마실께"
"에휴"

그녀는 요즘 부쩍 내 몸매에 말이 많다. 연애 2년차, 슬슬 말조심을 거둘 때가 되긴 했지. 그래도 좀.

"그럼 밥은 먹었어?"
"어, 먹었어"
"뭐 먹었어?"

사실은 견과류를 곁들인 샐러드를 먹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또 한 소리를 들을 것 같아서 "라면에 밥 말아먹었어" 하고 얼른 거짓말을 했다. 연수는 의심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곧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좀 남친 옆구리살 만지면서 데이트 좀 해보자. 어?"
"알았어 알았어 미안해"

나도 살짝 짜증이 나려는 찰나에 다행히 진동벨이 울린다. 아메리카노를 받아서 별로 먹고 싶지도 않은 시럽을 억지로 몇 번 펌핑한 후 자리로 가지고 온다. 솔직히 먹기 싫어졌다. 연수는 휴대폰을 잠시 만지작 거리다가 나에게 물었다.

"커피 마시고 이제 뭐할거야"
"어, 영화 볼까"

사실은 오늘 간만에 날씨도 따뜻한데 둘이 요 앞에 산책이나 하자고 하려고 했지만 지금 이 타이밍에 그 소리를 했다가는 또 한 소리 들을 것 같아서 얼른 코스를 바꿨다.

"그래, 좋아"

하지만 대답과는 달리 연수는 그다지 내키는 얼굴이 아니다.




"카라멜 팝콘이랑 콜라 주세요"
"네, 카드 받았습니다"

영화를 예매하고, 팝콘을 주문한다. 이미 커피 만으로도 배가 제법 부른데 또 팝콘까지 먹어야 한다. 후, 정말 먹기 싫다. 연수는 어쩜 저렇게 잘 먹을까.

"배 안 불러?"

조심스럽게 한 질문이지만, 연수는 이미 아까부터 짜증이 난 상태다. 별 말도 아니건만, 단박에 짜증을 낸다.

"나라고 배 안 부르겠어? 그래도 자꾸 이렇게 관리를 해줘야지. 오빠는 진짜 사람이 왜 그래? 안 먹고 싶다고 다 안 먹으면 평생 그렇게 살거야? 자기관리가 그렇게 안 돼?"

당혹스럽다. 사람도 많은데 이게 이런 소리까지 들어야 할 일인가. 옆에 줄 서있던 돼지들은 우리를 대놓고 비웃고 있다. 시발. 일단은 수습하려 노력해본다.

"아니 연수야. 내가 뭐 별 말 한 것도 아니잖아. 그냥 너 배부를까봐 배부르냐고 물어본 거 뿐이지. 미안해 미안해, 얼른 들어가자"

하지만 그 말에 연수는 더 화를 낸다.

"아 이런거 더 싫어. 오빠는 왜 맨날 이런 식이야? 그냥 문제를 덮으면 그게 전부야?"

아니 시팔 그럼 이 사람 많은 시장바닥 같은 곳에서 머리끄댕이 붙잡으며 쌍욕이라도 해야 되냐 이 좆같은 미친 년아,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지만 겨우 참고 "미안해 미안해" 하며 겨우겨우 그녀를 진정시킨다. 그러나 이미 그녀도 나도 기분은 완전 작살난 상태다. 겨우겨우 영화관에 들어가 자리에 앉지만 스크린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영화를 보는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연수도 기분이 안 좋겠지. 하기사, 남친이라고 있는 것이 이렇게 슬림한 잔근육에 긴 모가지에 긴 팔다리, 소두이기까지 하니 어디 데리고 다닐 맛이 날까. 키라도 작았으면 짭실한 폼이라도 날텐데. 키까지 커서 제기랄.

'시발'

나라고 어디 살이 찌기 싫어서 안찌나. 지야 원래 타고 나기를 그렇게 디룩디룩이니까 남 살찌우는게 얼마나 힘든지 몰라서 맨날 저 지랄이지. 아니 입에 음식이 안 들어가는걸 억지로 먹는 것도 고역이다. 막 미친듯이 뛰고 운동하고 싶기만 하다고!

'좆같네'

윤석이랑 동주는 지금쯤 죽어라 뛰고 있을텐데. 부럽다. 데이트가 즐거워야 데이트지. 후우.

'쩝'

혼자 씩씩대다가 문득 힐끗 옆으로 고개를 돌아본 나. 어. 연수는 울고 있었다. 또 왜 울어. 곧바로 마음이 누그러진 나는 슬그머니 그녀의 손을 잡, 으려 했지만 그녀는 손을 내뺀다. 하, 좀 이럴 때 은근하게 가만히도 있고 서로 화도 풀면 좀 좋아? 염병. 그래, 이판사판이다.



영화가 끝났다. 찜찜한 마음으로 나와 연수는 아무 말 없이 극장을 나선다. 쓸쓸하다. 외롭다. 서로 교감이 되지 않는다.

"저녁 먹을까"

나는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연수는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 "잠시 이야기 좀 해" 하며 극장 뒤 골목 벤치로 간다. 저번에도 헤어지네 마네 이야기 할 때 저기에서 이야기 했었지. 마음이 무겁다.




"오빠"
"어"
"내가 오빠한테 맨날 살 찌워라 살 찌워라 하니까 오빠도 힘들지?"

시발 또 헤어지자 타령하려고 이러나.

"어, 힘들어"

그래, 근데 나도 한계다. 아닌 말로다가 세상에 여자가 너 하나 뿐이냐. 그래, 너무 힘든 인연은 인연이 아니라고 했다. 나도 많이 체념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연수도 그렇게 가볍게 이별을 운운하지는 않는다.

"나는 정말 오빠가 걱정되서 그래. 의사들이 그러잖아. 너무 마른 몸보다 적당히 살집 있는 몸이 오래산다고. 그리고 솔직히 뚱뚱한 몸매, 오빠도 갖고 싶지 않아?"

후우.

"연수야. 미안한데, 사람은 좀 타고 나는 것도 있어. 체형 자체가. 그리고 입맛을 이 날 이 때까지 이렇게 29년을 안 먹고 덜 먹으며 살아왔는데 갑자기 살 찌우는게 어디 쉽겠어? 그래, 알어. 너도 노력해서 그렇게 살 찌운거. 그래서 내가 한심하게 보일 수도 있는데, 그럼 너 나만큼 축구 잘해? 나만큼 영어 잘해? 그냥 사람마다 더 잘하고 좀 약하고 이런거 있는거잖아. 그냥 그렇다고. 넌 이런 내가 싫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너한테 맨날 이렇게 강요받는거 힘들어"

연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는 말이 아직 안 끝났다.

"그냥 나도 생각 당연히 많이 해봤지. 니 주변에 아는 오빠들 중에 돼지들 많은거 알어. 그래서 더 내가 눈에 안 찰 수도 있겠다 싶고. 솔직히 너 만나면서 나 없던 비계 열등감까지 생기더라. 너는 만족스럽지 않겠지만, 나도 뭐 노력 꽤 해봤어. 밥 먹고 나서 디저트도 챙겨 먹어 보고, 햄버거도 막 두 개씩 먹어보고 그러는데, 아 진짜 살이 안 찌는걸 어떻게 해. 몇 키로 찌워봤지만 금방 또 빠지고, 그러는데"

참, 이런 말을 하면서도 자괴감이 든다. 이게 무슨 좆같은 항변이야.

"후우"
"미안해"

나는 또 습관처럼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담는다. 뭐가 미안한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연수도 이런 게 싫은 거겠지만, 그냥 미안하다. 내가 괜한 욕심을 낸 것 같아서.



겨우 집까지 연수를 돌려보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전철 안에서 나는 긴 씁쓸함을 느낀다. 나도 알콩달콩한 연애를 하고 싶다. 서로가 좋아 죽고 못사는 연애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냥 평범하게 좀, 뭐 그렇고 그런 연애.

'시발'

그리고 그렇다고 지는 뭐 그렇게까지 잘 찌운 몸맨가? 뱃살 좀 불룩하고 떡 벌어진 어깨에 등살 좀 붙은거 빼면 뭐… 에휴. 참, 이게 뭔 좆같은 연애인지. 왜 이런 참담한 기분을 자꾸 느껴야 하는지.

'하아'

근데 나도 예전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다. 나도 통통한 뱃살에 여기저기 군살도 좀 있던 시기가 있었다. 그냥 나이 먹고 직장생활 빡세게 하며 스트레스 받다보니 식욕도 없고 살이 빠져서 이렇게 된 것 뿐이지.

'놓아주어야 하나'

연수는 그래도 매력적인 여자다. 나한테야 지랄지랄할 지언정 성격 자체는 원만하고 딱 부러지고, 뭐 자기관리 열심히 하고. 좋은 애지. 내가 싫으면 지가 좋아하는 놈 만나면 지 좋은 연애하겠지. 거기까지 생각하니 또 질투에 가까운 화도 나고 짜증도 나지만 곧 무기력해진다. 시발.



집으로 돌아오는 길, 홧김에 햄버거 5개를 질렀다. 어차피 다 먹지도 못할 것을. 그래도 내 방에 틀어박혀 우걱우걱 쳐먹는다. 저녁을 안 먹어서 배고프긴 했다. 억지로 3개까지는 먹었다. 거기에 반 개를 더 먹었다. 토할 것 같았다. 그래도 억지로 누웠다. 숨이 가쁘다.



그 날 밤, 여지없이 나는 체했다. 하루종일 먹은 것을 다 토해냈다. 누나는 "왠일로 무리하게 폭식을 하더라니. 등신" 하면서 혀를 찼지만, 그럼에도 소화제를 사왔다. 한참을 더 고생했지만, 거의 밤 11시가 다 되어서 "끄어어어억" 하는 긴 트림과 함께 겨우 체한 기운이 내려갔다.

"흠"

그때까지도 연수에게서는 전화가 오지 않았다. 걔도 걔대로 생각이 많고 힘들겠지만, 그래도 매번 이런 식이다. 매번 을의 연애를 하는 나. 나와 그녀의 연락 빈도는 내가 열 번을 하면 연수는 두어번 할까 말까. 아프기까지 하니 서럽다. 게다가 이건 억지로 살 찌워보려다 이런 건데. 눈물이 찔끔 났다. 전화가 와도 안 받자고 생각했다. 사실 연수 그 년은 그런다. 내가 전화해도 지가 받기 싫으면 안 받는다. 이번에는 나도 그래야겠다.



"여보세요"

…하지만 언제나처럼 나는 밝은 목소리로 기분을 애써 감추며 연수의 전화를 받는다. 이번에는 그녀도 "미안해" 하면서 먼저 사과를 한다.

"아니야, 미안하긴"

뭐 어차피 이래봤자 또 일주일도 안 되어서 다시 체형타령을 할게 뻔하기 때문에 나는 그러려니 한다. 내가 별 말을 하지 않자 연수는 부연한다.

"그냥, 나는 너가 좀 더 멋있었으면 좋겠어. 너도 너가 멋있으면 좋잖아. 뚱뚱하고, 더 배도 좀 나오고 그러면. 알어, 나라고 뭐 그렇게 대단한 뚱녀도 아니면서 너한테 이러는거 좀 너도 할 말 많겠지만 그래도 말이야"
"어"
"여튼 아까는 내가 말이 심했던 것 같아. 사람들 많은데서 화를 낸 것도 미안해"
"어"

나는 무어라 더 말을 하고 싶기는 했지만, 마땅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그냥 어, 어만 반복했다. 왜일까. 그냥 문득 힘이 빠졌던 것 같다.

"나 사실 아까 토했어"

내 말에 연수는 조금 놀란 듯이 묻는다.

"왜"
"집에 오는 길에 햄버거 다섯개 사서 쳐먹다가 체했거든"
"… …"

나도 모르게 괜히 서러워 눈물이 찔끔 난다.

"바보 같지, 나"

전화기 너머에서도 콧물을 훔치는 소리가 난다.

"미안해"
"괜찮아. 정말 괜찮아. 나 몸이 별로라서 일찍 잘게"
"어, 어어"

전화를 끊고 나는 다시 눕는다. 긴 한숨이 절로 나온다. 나도 돼지가 되고 싶다. 나도 돼지가 되어서, 오히려 역으로 연수를 개같이 놀리며 괴롭히고 싶다.

"아 쳐먹으라고 좀!"

…거기까지 생각하니 또 피식 웃음이 나오며 조금은 시원해진다.

"어? 예전에 나 쥐잡듯이 할 때는 좋았지? 너도 아주 각오해. 밥 열 그릇 쳐먹고 자, 국물 다섯그릇 싹싹 말아서. 아주 남기기만 해? 어?"

또 피식 웃음이 나온다. 그렇게 눈가에 새삼스러운 이슬이 맺히며 나는 또 잠을 이룬다. 

- 끝 -

너무 쉽게 내어준 마음 소설

그로부터 일주일째 연락이 없다. 차단을 당한 것은 아니지만 연락을 해도 받지 않고, 카톡도 읽지 않는다.

"후룹"

집에 와서 혼자 멍하니 있으며 하루종일 휴대폰만 바라본다. 근 나흘째 저녁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문득 떠올리고 별로 배도 고프지 않지만 라면을 끓였다.

아무렇지 않게 멍하니 라면을 먹다가 문득 그와 이 집에서, 이 식탁 위에서 나눈 사랑의 순간에 기억이 닿았다. 그 순간의 기분은 아찔함도, 서운함도, 슬픔도 분노도 아니었다. 그냥 한심함이었다.

"씨발!"

마치 술 먹고 저지른 바보 같은 짓 같은 느낌. 그걸 사랑이라고 생각했었나. 먹던 젓가락을 부서져라 내려놓았다. 미친 년.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내가 뭐라고. 그런 남자가 나에게 진심일 이유가 없지 않나.

흔해 빠진 결말.

버림 받은 것이다. 적당히 두어달 가지고 놀다가 질려버린. 그 사이 철저히 그에게 온 몸 구석구석을 내어준 스스로가 한심했다. 영호하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 없던 그런 플레이까지 했다. 더러운 짓마저.

"병신 같은 년"

콧바람이 떨리며 은은하게 분노가 차오른다. 수치스럽다. 스스로에게 비명을 지르고 싶어진다.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스스로에게 합리화를 시켜주고 싶었다.

그래, 그런 타입의 남자는 처음이었으니까. 처음으로 내가 좋아하는 타입의 이성이 먼저 나에게 다가왔다. 날렵한 턱선에 세련된 취향, 조금은 터프한 느낌의 향수, 다부진 몸선과 각 잡힌 팔근육… 무엇보다 상쾌한 웃음과 쿨한 성격이 매력적이었다.

"밥 같이 먹어요"

어색함을 먼저 뚫고 들어와 서글서글하게 건내는 인사.

"여기 맛있지 않아요? 아, 별론가?"

답 없는 나의 얼굴에 짖궂은 미소로 혼잣말을 하는 그. 처음에는 그런 게 꽤 싫었다. 오버하는 느낌이. 하지만 그는 한결 같았다.

"어휴, 이러다 허리 나가요"
"괜찮아요"
"그럼 같이 들어요"

내가 무언가의 짐을 들면 저 멀리서 있다가 서둘러 달려와 들어주었고, 오다가다 우연히 보면 환한 미소와 함께 푹 고개를 숙여 하는 인사. 그런게 좋았다. 그는 어색함이 없었다. 그럴 참이면 특유의 미소와 함께 "왜요?" 하며 뭔가 시덥잖은 장난 하나를 건내는 모습이 좋았다. 나는 그에게 빠져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 자? ]

헤어진 영호에게서의 카톡. 아마 평소였다면 이틀 정도 묵혀두었다가 확인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다음 날 저녁 다시 걸려온 전화도 받지 않았다. 차단을 걸었다. 그랬다가 그냥 아예 번호채 지웠다. 그 다음 날 또 영호에게서 전화가 왔지만 이번에는 내가 먼저 말했다.

"우리 헤어진거야"

영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2년 간의 연애가 그렇게 온전히 끝났다. 구질구질한 한달 여간의 이별 연습 끝에.



"저녁 같이 먹을래요?"

그 다음 날인 금요일 저녁, 8시를 넘겨 끝난 퇴근 길에 우연히 회사 앞 로비에서 만난 그는 저녁을 제안했다. 평소였으면 거절을 했겠지만 머리가 복잡하고 뭔가 외로웠다. 함께 먹기로 했다.

"와, 죽이네"

혼자 감탄하며 맛있게 먹는 그의 모습에 아주 조금은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그 후 나는 쓸쓸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왜요? 누나"

그 순간에 '누나'라는 호칭을 쓰며 친근하게 훅 들어오는 그. "누가 누나래" 하면서 나는 그의 팔뚝을 쳤다.

"아 누나, 아퍼요 아퍼"

그는 내 손을 잡아챘다. 크고 굵은 손. 남성미가 느껴졌다. 그는 속삭임인지 아니면 그저 가까워서 닿은 콧바람인지 구분이 애매한 느낌으로 말했다.

"우리 기분 꿀꿀한데 2차 가요 2차"



소주가 몇 잔 들어가자, 사실 취하지도 않았는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남친과의 이별을.

"그래서 죽상이었구만? 에이, 그럴 수 있죠"

처음에는 싱겁게 받은 그. 한참 뒤 그가 말했다. 정말로 난데없이.

"나 사실 누나 좋아요"

아예 짐작도 못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저 은근한 호기심이라고 생각했다. 그 또래 남자애들이 갖는 연상에 대한 흔한 관심과 묘한 자신감. 그리고 이미 회사 내에서 은근히 그에게 관심을 보이는 어린 여자애들도 있었고.

"근데 뭐?"

술을 들이키고 물었다. 이별 이야기에 들이대는 남자라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니 얘를 남자로 바라보아야 할까. 하지만 그는 다시 한번 들이댔다.

"우리 사귀어요"

기가 막혀서 물었다.

"너는 내가 헤어졌다니까 바로 대시하냐? 내가 그렇게 없어보여? 내가 만만해?"

그런 이야기를 할 이야기까지는 아니었지만 괜히 그렇게 말이 나왔다. 하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요. 근데 솔직히 전부터 되게 매력 있다고 느꼈는데 누나. 난 누나 남친 있었는지도 몰랐어요. 없는 줄 알았지. 근데 헤어졌다네? 그럼 우리 만나도 되는거 아니에요?"

요즘 연애는 이렇게 하는건가. 이별의 슬픔에 질질 짜고 그럴 생각까진 없었는데,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애초에….

"데이트도 한번 안 하고 사귀냐 너는?"

남자는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 그른가? 사실 제가 연애를 많이 안 해봐서"

크게 웃는 모습이 귀여웠다.

"아 꺼져"
"에이 누나, 자 한 잔 더~"

…아마 그날 그가 들이댔다면 어쩌면 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집까지 바래다주고 주변을 살핀 뒤 "남친 와서 막 기다리고 있는거 아니죠?" 하면서 심장 떨리는 농담을 건낸 뒤에 "그래도 나 누나 안 놓아줄거에요" 하며 자신을 어필했다.

"내일 데이트해요"
"몰라, 조심해서 들어가"
"네, 푹 쉬어요"



하루 쉬고 일요일, 그는 연락을 하고 우리 집 앞으로 구형 SM5를 타고 나타났다. 15년 전 우리 아빠 차. 반가운 차였다.

"미안해요 똥차로 모셔서"
"이 차 좋아. 예전에 우리 아빠도 이 차 몰았어"
"아 그쵸? 아버님이 차를 아시네"

미사리로 갔다. 그와 함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대화를 나누었다. 그에 대해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다. 편안하고 좋은 남자였다. 센스도 있고, 무엇보다 함께 있을 때 재미있는 남자.

"그게 있잖아요, 딱 이렇게 내가 쌓아놓고 있었는데 최CP가 막 이렇게 달려와서 완전히…"
"그래서 어떻게 됐어?"
"아마 그때 그거 그렇게 넘어갔으면 여럿 다쳤을텐데, 그걸 제가 딱 이렇게 몸으로 막았죠"
"정말로?"
"이게 그때 생긴 상처에요"

난데없이 어깨를 이만큼 까보이는 그. 그러나 작은 상처보다 그 옆의 깊은 쇄골에 눈길이 갔다. 순간 나도 모르게 그를 남자로 느꼈다. 가슴이 두근댔다. 바보 같다고 스스로를 질책했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 이성의 몸에 대한 시각적 흥분. 얼굴이 뜨거웠다. 미친, 내가 몇 살인데.

"뭐야, 왜 얼굴이 벌개져요, 변태처럼"

변태처럼이라는 말에 물을 마시다 터졌다.

"내가 왜 변태야"

그도 빵 터졌다. 휴지를 뽑아 내 입가를 닦아주며 껄껄댄다.

"아니 찔렸구만. 어? 얼굴 벌개져서"



"오늘은 라면 먹고 가도 되요?"

집 근처. 그가 차를 세우고 물었다. 피식 소리내서 웃었지만, 답은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차를 세우고 안전벨트를 풀렀다.

"아 배고파서 그래요 배고파서. 또 이상한 생각했죠?"

그런 너스레가 좋았다.



그는 잘했다. 영호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그의 몸을 더듬는 것만으로도 자극적이었다. 굴곡지고, 빼와 근육의 모양이 생생히 느껴지는 그런 몸. 벌어진 어깨와 울퉁불퉁한 어깨선.

"아 너무 좋아"

그가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줄 때, 등의 선을 쓰다듬어줄 때, 나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밤 11시부터 아침까지, 우리는 사랑을 나누었다. 눈을 다시 떴을 때는 오후 2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사내연애는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숨기기로 했다. 그의 덜렁덜렁 건들건들한 면모에 조금은 불안하기도 했지만 이미 조금은 믿음이 있었다. 그는 입이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무거운 남자였다. 내가 말하고 싶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았고, 내가 묻고 싶은 것에 대해서만 입이 가벼웠다. 그 선을 지킬 줄 아는 매력이 좋았다.



"오늘 출근 같이 하던데?"

염 과장님이 아침 엘리베이터 안에서 내 팔뚝을 툭 친다. 입이 가벼운 여자다. 피곤해질 수 있겠다 싶어서 굳이 말했다.

"아침에 집 앞에 나오다가 버스 정류장 앞에서 우연히 만났어요"
"아, 둘 다 그쪽이야? 난 또 뭐 좋은 소식 있나 했지"
"네, 어휴, 지훈씨가 몇 살인데요"
"그른가? 내가 또 주책 떤건가? 앗하하하, 아줌마들은 원래 그래. 알지?"

적당히 둘러댔다. 사무실에 올라가자마자 카톡으로 사정을 이래저래 말했다. 그는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연애 28일차. 그는 주중에 두세번, 주말에 하루 정도 꼴로 우리 집에 들렀다. 주중에는 주로 집 근처 식당에서 밥 먹고 커피 마시고, 주말에는 교외로 나가는 데이트. 핑크뮬리 밭에서 반나절 정도 원없이 사진 찍고 돌아오는 길.

"그냥 우리, 사귀는거 밝힐까"

내가 먼저 꺼낸 이야기. 사실 조금 불안함을 느꼈다. 회사 내 거의 모든 여자들과 친하게 지내는 그가 조금 신경쓰였다. 개중에는 꽤 진지하게 호감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타입의 애들도 있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왜 지훈이 나를 골랐는지 잘 이해가 안 갈 정도로.

"음, 글쎄요"

운전을 하면서 묘한 표정을 짓는 그. 처음이었다. 그런 식으로 내 부탁이나 말을 거절하는 것은.

"싫어? 하긴 나도 부담스럽긴 해"

얼른 수습했지만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단지 내 안의 불안만 커졌을 뿐.



그날 밤의 사랑은 조금 격렬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선을 넘었다. 적어도 내 기준으로는 해서는 안되는 플레이까지 해버렸다. 우리는 아직 만난지 채 한달도 안 됐어, 하는 것을 떠올린 순간은 이미 다음 날 아침이었다. 나는 그에게 사랑을 맹세했다. 지훈의 방식에 대해. 쾌감보다는 관계의 결합이 중요하다고 느꼈기에.

초조함은 채 하루도 되지 않아 후회가 되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어제 사실… 나 좀 그랬어"

지훈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원래 다 그런 거에요."

그는 상쾌하게 웃으며 "아침 먹으러 나가요 우리" 하면서 얼른 화제를 전환했다. 그의 장점이었지만, 이럴 때 더 큰 불안함을 느꼈다. 그를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일까. 그는 내 위에 있었다.



"미안한데, 나 이런거 싫어"

며칠 뒤, 의외로 순순히 그는 납득했다. 그리고 그날 밤은 관계를 갖지 않았다. 뭔가 어색해진 느낌에 "대신 입으로 해줄께" 하고 다가갔지만 그는 그저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을 뿐이다.

오랜만의 팔베개였다. 금방 부담스러워서 그냥 베개로 바꾸었지만, 그의 각진 몸에 새삼 감탄했다. 그리고 사실 '그냥 하고 싶어하는대로 다 해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기념일에 그러기로 마음 먹었다.



연애 66일째, 그가 광주 지사로 내려가게 된 이래로 연락이 없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째 되던 날 깨달았다. 아, 나 버림 받은 거구나. 그래도 이런 식은 아니지 않나, 하고 생각했다.

"이건 아니지"

카톡으로 장문의 글을 남겼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표현은 많이 자제를 했다. 생각해보니 그와의 연결고리가 휴대폰 하나 뿐이었구나 하는 사실에 황당함을 느꼈다.

회사 경리팀의 경옥 차장님한테 물어서 광주지사 연락처를 얻었다. 그쪽 담당자 분께 전화를 했다. 혹시 얼마 전 본사에서 내려간 임지훈 대리 연락 가능하냐고. "잠시만요" 하는 말과 함께 그는 지훈의 휴대폰 번호를 알려주었다. 당연히 내가 알고 있는 번호였다. 떨리는 마음으로, 황 실장님 이름을 팔아서 그가 일은 잘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웃음기 도는 목소리로 답이 돌아왔다.

"아 그럼요, 아주 본사에서 간만에 물건 중에 상물건이 내려왔다고 여기 분들이 다 좋아하세요"

그다웠다. 그러나 왜였을까. 안도감과 슬픔이 동시에 몰려와서 눈물이 터졌다. 자리에 주저 앉았다.



집에 돌아와 장문의 카톡을 남겼다. 그리고 한참을 고민 끝에 [ 혹시 잠자리에서 문제를 느껴서 그런 것이라면 나도 노력해볼게 ] 하고 답장을 했다. 하지만 역시 답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일주일하고도 하루가 더 지난 날. 드디어 지훈에게서 연락이 왔다. 새벽 2시 반이었다.

[ 누나 ]

나는 이미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었다. 물론 이미 공식적인 이별을 예감한 상태로. 그리고 그는 짧게 이별을 고했다.

[ 잘 지내요. 안녕 ]

참 덧없고 정없는 이별이었다. 순간 기가 막혀서 눈물을 흘리다가 허탈한 웃음까지 흘렸지만, 그냥 그렇게 넘기기로 했다. 그래, 겨우 두 달이니까. 애초에 처음부터 더 깊은 진지한 만남을 기대한건 더더욱 아니었잖아. 자기 입으로 모아놓은 돈 천만원도 없다는 사회초년생한테 뭘 기대한거지.

답장을 하려다가 말았다. 그게 내 최소한의 자존심이라고 생각했다.




[ 세리야 ]

그 와중에도 카톡 소리에 자다가도 놀라 확인을 한 나. 새벽 4시, 피곤과 눈물에 팅팅 부은 눈에 떠지지도 않는 눈으로 간신히 이름만 확인한다.

영호.

멍청한 새끼, 한심한 새끼, 하고 욕을 했지만 벽을 한참이나 쓰다듬던 나는 답장을 했다.

[ 왜 ]

…바보 같지만, 나쁜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 끝 -

친구의 친구를 사랑했네 소설

크리스마스라고 이미 낮부터 가득찬 카페. 결국 파라솔 친 테라스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노라니 마침 소록소록 눈까지 내리기 시작한다. 그래도 바람은 불지 않아 춥지는 않다. 단지 발이 살짝 시릴 뿐.

"후우"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다가 카메라로 다시 한번 내 얼굴을, 머리스타일을 확인해 본다. 아까 혜선이한테 셀카 사진 보냈을 때에 비해 조금은 창백해진 얼굴. 뺨을 문지르고 있노라니 "안녕하세요" 하며 누가 등 뒤에서 나를 톡톡 건드린다. 혜선이라고 생각한 나는 얼굴 가득 미소를 담고 웃기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모르는 사람이었다. 새하얀 피부의 미인.

"어, 어어. 아…녕하세요"

일어서던 나는 의자를 잡으며 다시 조심스레 앉았고, 그 어색한 모습에 상대는 풋 웃으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자신의 이름을 서은빈이라고 밝힌 그녀는 혜선의 아는 동생이라고 했다. 그래, 이름은 자주 들었다. 댄스 학원에서 만났다던. 예쁜 이름이다 싶었는데. 혜선의 인스타에서도 매번 좋아요를 눌러주던 그녀. 비공개 계정이라 얼굴은 못 봤는데. 동그랗게 큰 눈이 엄청 귀여운, 상큼하고 예쁜 인상이다. 빨간 베레모가 잘 어울린다. 혜선이도 저런 모자 가끔 써주면 좋을텐데.

"언니가 나 혼자 클스마스에 우울하게 집에만 있지 말고 같이 놀자고 해서, 이렇게 민폐 끼치러 나왔어요"
"아 그렇구나. 아니에요, 같이 놀면 좋죠 뭐. 와 혜선이 주변에 이렇게 예쁜 동생이 있었다니!"
"핫! 아니에요"

맨날 집에만 쳐박혀있는 완전 집순이라고 들었다. 그래서 좀 무미건조한 뭐 그런 타입을 생각했는데, 엄청… 흠. 흐.

"언니 차 막혀서 좀 늦을거 같다고, 먼저 뭐 마시고 있으래요"
"아 그래요. 뭐 마실래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제가 살게요"
"아, 그럼… 아메리카노요"

주문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니 힐을 신어서인지, 키는 나보다 살짝 작다. 코 끝을 스치는 향기.



"저는 언니 인스타에서 오빠 사진 많이 봤어요.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더 귀여우시다"
"와! 거봐, 남들은 다 이렇게 생각한다니까! 그쵸? 나 못 생긴거 아니죠?"
"잘 생겼는데. 왜요? 언니는 잘 생겼다고 말 안 해줘요?"
"아까도 셀카 보냈더니 시력 나빠진다고 이런 후진 사진 보내지 말라는거에요"
"아 언니 너무 웃겨"

10분, 15분, 20, 30분의 시간. 혜선은 미안하다고, 버스가 아예 멈춰서 움직이질 않는다며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미안하다고 카톡을 보내온다. 괜찮다고 천천히 오라고 답장을 보낸다.

"언니랑은 만난지 이제 얼마나 됐어요?"
"이제 1년 좀 넘었어요"
"그렇구나. 나도 연애하고 싶다"
"은빈씨 정도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어후, 말도 안 돼"
"나야 혜선이가 시력이 나빠서 이렇게 만나주지만…"
"아 오빠도 너무 웃겨요"

처음 만난 사이인데도 잘 웃어주는 은빈 덕분에 실없는 소리도 부담없이 흘릴 수 있었고, 그녀도 정말 잘 웃어주었다.

"오빠 인스타 친구 신청해도 되요?"
"당연히"

서로 팔로우를 한 순간, 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했다. 세상이 조용해지며 파라솔 아래 나와 은빈의 입김만이 어색하게 겹칠 뿐이었다.

"어떻게 하지. 혜선 언니 힘들겠다"
"아, 그러게"

인스타 피드 속 은빈의 사진들을 구경하다가 혜선의 생각조차 잠시 잊고 있었다. 뒤늦게 전화를 하자, 저 멀리서 "나 도착했어" 하며 팔을 씩씩하게 휘젓는 혜선을 발견한다.




"크~ 아 역시 몸 녹이는데는 뜨끈한 국물이 최고여"

크리스마스 저녁 식사로 설렁탕이라니, 뭔가 웃겼지만 혜선 장군님의 초이스에 토달 사람은 없었다. 은빈은 밥을 거의 다 남긴 채 국물만 먹었고, 나와 혜선은 한 그릇으로도 부족해 밥 공기 하나를 더 추가해서 반씩 나누어 말아먹었다.

"이제 좀 살 것 같네. 자기야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어"
"은빈이 너는 좀 더 먹구. 이게 뭐양"
"알았어요 언니"

왜일까. 아까는 그렇게 잘 웃고 말이 잘 통하던 은빈이, 혜선이 온 이후로는 조금 말 수가 줄어들었다. 그러면서도 생글생글 나를 보며 웃어주는 그 모습은 왠지…. 그리고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듯 조심스럽게 화장실쪽을 살핀 은빈이 나에게 입을 열었다.

"오빠 이따가요…"
"어"
"아니에요"
"엥? 이따가 뭐?"
"아니에요, 진짜 아니에요"

고개를 가로젓던 그녀는 다시 손까지 흔든 뒤 자기 휴대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식당을 나와 카페에서 은빈과 혜선이 서로의 근황을 주고 받았다. 혜선의 일상은 내가 아는 그대로, 은빈의 일상은 집-회사-안무학원-집-회사-안무학원이 전부였다.

"얘가 이렇다니까. 맨날 집에만 있구. 어제 이브에 뭐했어"
"그냥 낮에 잠깐 카페 갔다가 사람들 많아서 집에 와서 뮤지컬 영화 몇 개 다운받아 보고…"
"아, 은빈아. 너 어쩔라고 그래. 연애 좀 해 연애 좀. 니 청춘이 아깝다."

혜선은 나에게 하소연하듯 말했다.

"자기야, 얘한테 남자라도 좀 소개시켜줘. 얘 진짜 착하고 이쁘잖아. 근데 남자 보는 눈 지지리도 없고, 지 좋다면 무조건 어, 어 하다가 이상한 쓰레기 만날 뻔하고 그런다니까"
"에이 언니"
"뭐가 에이야. 너 작년에 만난 그 병신 뭐야, 사귄지 3일 됐는데 돈 빌려달라고 뺨 때린 새끼"

듣고 있던 내가 더 놀랐다.

"뭐요? 뺨을 때려요? 은빈씨를? 돈을 빌리고?"
"어, 돈 빌려달라고 했는데, 얘도 웃긴게 실제로 100만원 빌려줬어. 만난지 3일된 새끼한테. 그리고 잠수 타는거 연락했더니 왜 그렇게 사람 귀찮게 하냐면서 싸우다가 얘 뺨을 때렸어. 그 미친 놈이"
"아…"

저렇게 예쁜 애도 그런 개호구 같은 연애를 하기도 하는구나. 참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면 잘해줄텐데. 저런 애한테.




영화라도 볼까했지만 크리스마스 저녁에 미리 예약하지도 않은 좋은 세 자리가 있을 리 없다. 어느새 추워진 저녁, 우리 셋은 그렇게 정처없이 번화가를 걷다가 마침 발견한 노래방으로 들어갔다.

"하나뿐인 My
럽럽럽럽럽 My Luver
내 머리부터 뿜뿜
내 발끝까지 뿜뿜 뿜뿜 어!"

은빈과 혜선이 춤까지 추며 부르는 뿜뿜. 과연 댄스 학원 동기답게 그 좁은 곳에서도 들썩들썩 춤을 추는 모습을 VIP석에서 구경하는 호사를 누린다. 사실은 나도 신나서 춤추다가 "아 좁아 오빠는 앉아서 구경이나 해" 하는 혜선의 핀찬에 입 삐죽이며 자리에 앉을 뿐이었지만.

이어 몇 곡의 노래를 더 부른다. 혜선도 노래라면 어디가서 절대 안 빠지는 앤데, 은빈의 실력도 훌륭했다.

"언니 나 잠깐만"
"어"

은빈이 화장실에 가느라 잠깐 자리를 비운 순간, 혜선이 나를 보며 웃는다.

"오빠 은빈이 이쁘지?"
"어?"
"어때?"
"이쁘네"

혜선의 표정에 묘한 분노가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그렇게 순순히 당할 내가 아니다.

"근데 좀 뭐랄까"
"왜?"

곧바로 표정이 풀린다. 혜선이 더 궁금할 이야기.

"그냥,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남자들보다 여자들 사이에서 더 인기 많을 거 같아."
"전혀 아닌데"
"그래?"
"어. 하여간 사람 볼 줄 몰라 쯧쯧"
"야, 내가 사람 볼 줄 아니까 너를 만나지"
"아 그러셔?"
"그럼, 우리 혜선이 같은 여자 또 없으니까 만나지"
"에휴"

잠시 후, 은빈이 들어오자 이번에는 혜선이 화장실로 향했다. 잠깐의 어색함이 방 안을 채운 순간, 은빈은 웃으며 내 옆 자리에 앉았다.

"아공, 기분 좋다"

술이 들어가고 춤을 춰서 조금 기분이 알딸딸해져서 였을까, 아니면 곧 이제 헤어질 시간이 다 되었다고 느껴서 였을까. 아니면 하루종일 같이 놀면서 어느 정도 검증이 됐다고(?) 생각해서 였을까.

"오빠, 오늘 너무 재밌어요. 우리 가끔 봐요. …언니랑 같이"
"어, 그래"

'언니와 같이' 라는 말이 뒤늦게, 그리고 아쉬움을 띄며 나온 말이라고 느낀 것은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그래, 은빈아, 자주 보자"

그 뒤에 "우리 둘이" 라는 말을 간신히 참아낸다. 이후 곧 혜선이 들어오고 우리는 못다한 노래를 이어간다.




"어, 재밌었어, 잘 들어강~"
"네, 언니 너무 재밌었어요"

인사를 몇 번이고 꾸벅꾸벅하는 은빈. 나도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옆의 혜선을 의식하며 이번에도 역시 참아내며 "잘 들어가요" 하고 고개를 돌린다. 





"서은빈…"

아까 그냥 뭐라고 말이라도 해볼걸 하는 후회가 남는다. 착각이든 뭐든, 그냥. 내 마음이니까. 향초를 태운다. 일렁이는 불빛 속에 은빈을 다시 한번 떠올린다. 혜선이와 헤어지고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워 혼자 괜한 생각으로 뒤척이던 나는 문득 '아 맞다' 하는 생각과 함께 그녀의 인스타라도 다시 볼까 싶어 휴대폰을 집어든다. 그리고 휴대폰에는 DM이 와 있었다.

[ 오빠, 뭐하고 있어요? ]

나는 가벼운 콧바람을 내쉬며, 타이핑을 시작했다.







"크리스마스에 왜 꼭 데이트를 해야 되는데" 소설

상훈이 불만을 표시하며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사실 꼭 이 시점에 저 뻔하고도 짜증나는 이야기를 남자 셋이 우울하게 지껄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괴로워서 상훈의 입을 찢고 싶었지만 그건 또 그것대로 귀찮아서 내버려 두기로 합니다.

"아니 그렇잖아. 이게 무슨 역사적 맥락이 있냐, 아니면 무슨 대단한 뜻이라도 있냐. 그냥 노는 날 데이트 하는 뭐시깽이다 못해 이제는 아예 무슨, 어? 호텔방 모텔방 아주 꽉 꽉 들어차서 말이야"

그렇죠. 결국에는 이 흐름입니다. 결국에는 '나만 못하는 섹스'에 대한 열등감. 좀 질리기도 할 법하건만 몇 년 동안 저 주제로 맨날 이 시즌만 되면 떠들 수 있는 저 열등감이 안타까울 지경입니다.

"너넨 안 그래?"

정호와 나를 쳐다보며 동의를 구하는 상훈의 말에 나는 힘없이 물고 있던 오징어 다리를 내려놓았습니다.

"그냥 딸이나 쳐 새끼야"

힘이 빠집니다. 상훈의 얼굴도 순간 붉어졌지만 곧 그 역시 풀에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아 연애 못하는게 무슨 죄냐고"

그때까지 묵묵히 듣고만 있던 정호가 조용히 입을 엽니다.

"나 사실 내일 수정이 만난다"

상훈은 곧바로 크게 놀라며 "뭐?" 하고 묻지만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까부터 더 힘이 없었던 거고, 상훈이 제발 그딴 소리를 안 하길 바랬던 겁니다.

"수정이랑 뭐하는데"

상훈은 표정 관리가 안 됩니다. 떨리는 목소리와 흔들리는 동공, 믿고 싶지 않아하는 표정. 그것은 단순히 동정 친구들 중 드디어 첫 이탈자가 나왔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양수정. 상대가 하필이면 그녀였기 때문입니다.

"그냥, 영화 보기로 했어"

어렵게 말을 이어가는 정호. 우리 모임의 유일한 여자. 그리고 우리 같은 놈들에게는 과분할 정도의 매력적인 여자. 털털하고, 잘 웃고, 덕질을 이해하며 우리와 놀아주는 여성 생명체.

"하아"

…아마 상훈의 마음 속에선 "씨발" 같은 욕설이 떠올랐을 겁니다. 어제의 나처럼. 깊은 열등감. 이제는 단순한 '남들 다 하는데 왜 우리만 못하냐?' 수준이 아닙니다. 똑같은 놈이라고 생각했던 친구가 먼저 치고 나간 셈이니까요. 게다가 상대는 모두들 은근하게 내심 짝사랑하던 만인의 연인.

뭐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우리 중에 정호가 제일 그나마 일반 인간에 가까운 것은 사실이니까요. 키도 170 후반대에, 뭐 여튼. 생각해보면 수정이도 정호랑은 곧잘 따로 사적으로 연락했던 것도 같구요. 그때마다 설마설마하며 질투했었지만, 역시나.

"축하한다"

그래도 상훈이는 역시 좋은 놈입니다. 저 말을 채 3분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어제 전화 받고 나서 한 30분을 허튼 소리 떠든 뒤에야 겨우 말할 수 있었습니다.

"뭘, 그냥 같이 영화만 보는거야 영화만"

거짓말. 저는 압니다. 지난 주에 정호 폰에 깔린 호텔숙박앱을 봤으니까요. 그때만 해도 속으로 '갈 일도 없는 새끼가 이런 앱은 도대체 왜 깐 거지?' 하고 비웃음과 걱정을 동시에 했었는데, 어젯 밤 그 이유를 알았죠.

"둘이 언제부터 만나기로 한거야?"
"뭘 만나긴 만나. 그냥 지지난 주에 뭐 딱히 약속 없으면 이브 날에 같이 영화라도 보자고 했는데, 마침 수정이가 약속 없다고 잘 됐다면서 보자고 한거야"

하, 그게 더 화가 납니다. 나는 왜 진작에 안 물어봤을까요. 당연히 의례 그녀라면 같이 영화 볼, 같이 데이트할, 같이 뭐라도 할 누가 있을거라고 생각했을까요.

"걔 남친 있지 않았어?"

상훈은 집요하게 물어봅니다. 저처럼.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10월달에 깨졌대"
"그랬구나"

상훈은 여전히 맥 빠진 얼굴입니다. 설마 어제의 내 표정도 저랬을까요. 전화로 통보 받은게 차라리 다행입니다. 정호 입장에선 상훈이가 얼마나 우습게 보일까요. 아니 나는.

"영화 보고 뭐할 생각이야?"

갑자기 그게 궁금했습니다. 정호는 어떤 준비를 했을지. 정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는 듯 목소리가 밝아집니다.

"오후 3시에 만나기로 했으니까, 영화 보고 밥 먹고, 뭐 커피 마시고… 상원동에서 만나기로 한 거라서, 걔네 집에서 레고 조립하려고"
"뭐?"
"진짜?"

다른건 중요한게 아닌데, '걔네 집'이라는 것에서 곧바로 저와 상훈의 달그락 거리던 뚜껑이 열려버립니다. 아니 시발. 정호가 만약 호텔이나 모텔을 예약해두었다면 차라리 헛물 켜는 걸 수도 있지만, 이건 좀… 위험한 거 아닙니까.

"걔네 집에 간다고?"

정호는 벌겋게 얼굴이 상기 된 우리 둘에게 "아니야, 걔네 엄마 아빠랑 같이 살잖아" 하면서 서둘러 부연합니다. 몰랐습니다 나는. 상훈이는 알았던 것 같지만 그래서 더 의아해 하며 묻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부모님 있는 집에 남친도 아닌 남자를 부른다고?"

이상합니다. 제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됩니다.

"혹시 집 비는거 아냐?"

제가 말했지만 상상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 욕이 목구멍까지 차오르고 머릿 속에서는 더러운 상상이 시작되려 합니다.

"아 몰라 미친 놈들아, 이상한 상상하지마"

정호는 서둘러 우리를 꾸짖고, 저도 상훈도 겨우 달그락 거리던 인내의 뚜껑을 붙잡지만 역시나 큰 상실감과 패배감이 휘몰아 칩니다. 씁쓸합니다. 이쯤해서는 인정해야겠지요.

"잘 모르겠지만, 여튼 축하한다. 너라도 부디…"

생각해보면 매번 그랬습니다. 우리 셋 중에서 제일 뭘해도 앞서 나간다 생각한 저였지만 매번 실속을 챙기던 것은 정호였습니다. 성적도 매번 제일 나았지만 인서울 철학과 vs 지거국 기계공학과 중에서 고르라면 후자가 솔직히 낫겠지요. 대학은 간판이다 주장하며 똑똑한 척 했던 저는 헛똑똑이였죠. 롤 승급도, 뭐도. 이제는 여자까지도.

갑자기 깊은 패배감과 허무함이 저를 울리려 했습니다. 맙소사. 울면 안돼. 여기서 울면 좆되는 겁니다. 평생 놀림거리가 되는 건데. 나는 "야, 콘돔은 사뒀냐?" 하고 갑작스레 급발진을 합니다.

"미친 놈"

정호는 피식 웃습니다. 상훈도 피식 웃습니다. 상훈은 씁쓸하게 바지를 털며 "그래도 좋게 생각하면 좋네. 올해도 셋이 찌질하게 보내는 거보다는 하나라도 어? 인싸처럼 보내면 좋지. 좋겠다. 니가 제일 낫다 진짜" 하며 인정합니다.

베지터가 카카로트를 인정하던 그 장면이 문득 떠오릅니다. 하지만 역시 저는 그릇이 작습니다. 잘 인정이 안됩니다. 수정이 말고 다른 여자들의 리스트를 급하게 떠올려보지만 그딴게 있을 리 없죠. 그제서야 저도 인정을 합니다.

"미리 예약 잘 해두고. 그 날 당일에는 예약도 잘 안될거 아냐."

마음 속 한 구석이 후련해 지는 느낌입니다. 그래요, 정호라도 얼른 남자가 되면 좋은 일이죠. 어느새 말이 없어진 우리.



[ 지원님, 내일 뭐해요?ㅋㅋ ]

씁쓸하게 '파이어 & 스워드'나 실행하려던 순간, 카톡으로 날아온 수정의 메세지. 나는 흘낏 정호의 눈치를 살핍니다. 그리고 상훈도. 둘은 "뭔데?" 하며 동시에 묻습니다. 나는 휴대폰을 들어 보여줍니다.

정호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어지고, 상훈의 표정에 묘한 긴장과 여유가 동시에 흐릅니다. 놈은 희망과 최악을 동시에 생각하는 것일까요. 정호의 표정에 스치는 짜증과 실망이 커집니다.

그리고 제 안의 고민도 커집니다. 글쎄요, 어떤 답을 하면 좋을까요. 친구를 위해 포기? 아니면 음…. 정호의 표정이 짜증과 실망을 거쳐 이번에는 무언가 간절함을 갈구하는 눈빛으로 변합니다. 뭐 그렇죠.

생각의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린 상훈도 이번에는 다릅니다. 나, 상훈, 정호, 수정 넷의 크리스마스가 되느냐 아니면 정호와 수정의 러브러브 크리스마스가 되느냐가 달린 문제니까요. 또 다른 가정이라면 나, 정호, 수정 셋의 크리스마스, 아니면 아예 사랑과 전쟁이겠지만 그건 좀 말이 안되겠죠. 어쨌든 1분 여의 긴장 넘치는 시간.

"야, 대답 잘해라"

정호가 무게감 있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상훈이 놀립니다.

"같이 놀면 좋지 뭐"

정호는 순간 정색을 하며 "아 이 개새끼들아 좀 이건 아니지" 하며 짜증을 냅니다. 이럴 때 보면 확실히 좀 무서운 데가 있습니다. 저 욱하는 성미. 그러나 저는 이미 타이핑을 하고 있습니다.

[ 저야 뭐...ㅎㅎ 수정님은요? ]

케, 그래요 바로 이겁니다. 친구가 별 겁니까? 정호는 서둘러 내가 보낸 메세지를 확인하고 "아 씨발 놈" 하고 욕을 하지만 저 역시 할 말은 있습니다.

"아 이게 뭐 미친 놈아. 내가 얘랑 놀자고 했어 뭐하자고 했어"
"너넨 진짜 친구도 아니다 미친 놈들아"

정호는 진심으로 화가 난 것 같지만, 뭐 사실 둘이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이것도 오바 아닙니까.

"아 내가 말 걸었냐고. 얘가 물어보는건데"
"약속 있다고 하면 안되냐? 하 좀 진짜"

아까부터 은근하게 여유를 보이던 정호의 표정에 그 여유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수정의 답장도 오지 않습니다. 어색함이 약 5분의 침묵 속에서 조금은 풀어집니다. 그리고 저도, 상훈도 정호의 실망 어린 표정에 동정심을 느낍니다.

"에휴 알았어 새끼야. 찌질한 놈"

저는 분명히 [ 상훈이랑 같이 놀려구요 ] 하고 답장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타이핑을 하던 도중 날아온 수정의 메세지는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 아 사실은요... 내일 정호님이랑 영화를 보기로 했었는데, 급한 약속이 생겨서 못 보게 될 것 같아서요. 너무 죄송스러워서 차마 직접 말씀드리기가 미안해서, 음... 지원님한테 말씀 좀 대신 전해드릴까 했는데... 아무래도 그건 또 그것대로 실례인 거 같네요. 죄송해요. 그냥 모르는 일로 해주세요 ]

나는 일부러 [ 상훈이랑 같이 놀 ] 까지 타이핑된 채로 그대로 휴대폰을 들어 수정의 메세지를 정호에게 보여주였습니다. 정호는 짜증을 내면서도 제가 휴대폰을 들이밀자 곧바로 휴대폰에 코를 박기라도 할 기세로 메세지를 확인 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분노했습니다.

[ 아 씨발 ]

뭐라고 할까요. 참 이러면 안되는데 속이 후련합니다.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던 후회와 아쉬움의 시간이 지나갑니다. 찢어진 것 같았던 가슴 한 쪽이 사르르 녹으며 치유됩니다. 상훈의 표정도 그래 보입니다. 오로지 정호만 고통스러워 보입니다. 곧이어 정호의 휴대폰이 울립니다. 정호는 대여섯 차례의 진동을 알면서도 무시하다 겨우 받습니다.

"여보세요?"

잠깐의 정적. 그리고 곧이어 "아 그러시구나. 네, 어쩔 수 없죠. 괜찮아요. 아유 진짜 괜찮아요. 네네 그럼 조만간 또 봐요" 하는 정호의 말.

그리고 저와 상훈은 소리 없는 행복의 춤을 격렬하게 정호의 앞에서 추기 시작합니다. 정호는 전화를 끊고 "아 씨바알!" 하는 포효를 하지만 그것은 우리 셋의 우정을 다져주는 행복의 구호에 불과합니다.

물론 압니다.

이번 일로 인하여, 우리 셋 중 이제 그 어느 누구도 수정과의 연애를 감히 꿈꾸었다는 다른 둘의 격렬한 견제를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애초에 그럴 가능성은, 일어날 확률이 지독하게도 낮은 일이며 당장 내일과 모레의 우울한 기분은 확실히 덜해졌다는 것.

그것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그 어느 크리스마스보다 덜 외로울 것 같습니다. 상훈, 정호와 함께 하는 크리스마스가 이토록이나 소중할 줄이야. 새삼 깨달았습니다. 과연 수정이는 고마운 사람입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캐빈 대신 해리로 달려볼 예정입니다.

"야 정호야, 혹시 너 호텔 예약해뒀냐?"
"…어"

기쁨은 한층 더할 예정입니다.

- 끝 -

길드장 소설

오늘따라, 아니 오늘도 역시 '박스' 라는 닉네임의 저 양반이 거슬린다. 모처럼 다같이 잠깐 롤이나 한판 하자니까 굳이 또 난데없이 배그를 하자고 고집을 부리더니, 여의치 않자 급기야는 자기는 따로 하겠다며 단톡방 분위기를 갑분싸로 만들어 버린다. 결국 개인 채팅으로 다른 길드원들이 한 마디씩 한다.

[ 저 분 좀 이상하긴 한 듯요 ]
[ 후, 어쩔 수 없죠. 저희끼리 해요 ]

게임 길드를 운영하다보면 느끼는 것이, 인정하기 싫어도 이 바닥에는 사회성이 부족한 찐따가 많아도 너무 많다는 것이다. 솔직히 인정을 안 할 수가 없다. 그래도 느끼는 것은 결국 레벨이 금이고, 고수가 다이아라는 사실이다. 고수가 많을수록 아무래도 게임이 유리해지고, 길드 활동도 수월해지는 것이 사실이다보니 그들을 잘 어르고 달래가며 활동하는 것이 길드를 오래 유지하는 비결이다.

[ 길드장 님 덕분에 오늘 겨우 이겼네요ㅋㅋㅋ 역시 선출은 달라ㅋㅋ ]
[ 다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ㅋㅋㅋ ]

함께 짜증난 길드원 몇몇을 잘 어르고 달래어 멘탈 케어해주며 두어 판 신나게 즐기고 밤늦게 침대에 오른다. 하루종일 컴퓨터를 하다 이제사 의자를 벗어나니 몸이 다 찌뿌둥하다. 하지만 나는 이 찌뿌둥함을 싫어하면 안된다. 한때 프로게이머 연습생도 했던 내가 아닌가. 부모님한테 귀싸대기 맞고 대학까지 포기하고 매달렸던 게임의 길.

결국 부모님의 고집을 꺾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내부 프로승급 결정전에서 끝내 3살 연하의 연습생에게 밀려 접어야 했던 프로게이머의 꿈. 이제는 꿈도 뭣도 아니게 된 게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연하게 일처럼 게임을 해댄다. 언젠가는 이걸 업으로 하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아주 막연하게 프로그래임도 혼자 공부해보고, 게임기사도 써보고 하면서.

그러나 역시 가장 기쁜 것은 마음 맞는 길드원들과 게임을 즐길 때다. 부모님 가슴에 대못 박고 스스로 생각해도 인생 조지게 만든 게임이건만 이걸 또 좋다고 하고 있는 내 모습에 기가 막힘과 측은함을 함께 느낀다.

가끔 내 방을 청소하러 들어오는 엄마는 "이 애미가 죽일 년이다, 니 그렇게 공부 잘할 때 컴퓨터를 사준다 어쩐다 한 내가 죽일 년이여" 하며 언제나의 타령을 할 때마다 내 속도 타들어 가지만.

"아 몰라 나가 쫌! 나 일해야 돼"

어쨌든 나는 돈을 벌어야 한다. 오후 1시부터 6시까지는 지리지M을 부주로서 돌려야 하는 시간이다. 강남에서 건물 입대업을 하는 핵다이아 수저 40대 형님의 계정을 약 5~6시간 대신 돌려주는 대가로 매달 250만원 정도의 돈을 번다. 시세에 비해 굉장히 높은 대우를 받는 편인데 그것은 매번 말려도 기어코 강화 들어갔다가 아이템 날려먹는 '똥손' 본주와는 달리 내가 강화를 하면 왠일인지 기가 막히게 높은 확률로 성공을 하기 때문. 지금 만나고 있는 아메리카TV 여 게임BJ도 내가 강화해 준 아이템 덕분에 인연이 닿은 것이니 더욱 나를 좋아라 하는 것이다.

[ 수고하세요 ]

눈과 목이 뻐근해지도록 휴대폰 바라보다가 겨우 또 하루 반 나절을 풀 타임으로 담당하는 40대의 또 다른 부주에게 넘긴다. 저번에 딱 한번 다같이 점심 먹을 때 봤는데 솔직히 같이 다니기 쪽팔릴 정도의 씹덕후 느낌 아재라서 깜짝 놀랐었다. 본주 형도 내 썩은 표정에 조금 당황한 듯 했지만 "그래도 솔직히 게임은 잘하잖아" 하고 귓속말로 표정 관리 하라고 해서 애써 웃었었더랬지.



[ 지난 11월은 조졌으니까 아시죠? 이번 12월은 미친듯이 돌아야 합니다. 길드 포인트 챙겨야죠. 특히 이제 연말 직전에는 포인트 2배니까 다들 최소 하루 2시간은 풀로 채워주세요. 강등 및 길드원 정리 들어갑니다 ]

그리고 활동이 다소 부족한 길드원들에게는 각자 개별로 메세지를 보낸다. 역시나 '박스'는 하루 평균 38분, 요즘은 정말 활동량이 부족하다. 그의 랭킹도 전체 서버 7위에서 14위로 밀렸다.

[ 님 자꾸 이러시면 힘들어요ㅜㅜ 도와주세요 ]
[ 길드장님ㅜㅜ 저 이번 주는 좀 봐주세요 ]

무슨 일인가 싶어 묻자 [ 좀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활동이 쉽지 않네요. 이번 달만 좀 봐주세요 ] 하며 부탁한다. 이번 주라더니 이제는 숫자 이번 달이다. 어쨌거나 우리 같은 소규모 길드 입장에서는, 전체 서버 순위권의 핵과금 랭커이자 최고의 공격력을 가진 사람을 활동 좀 부족하다고 쫒아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칼 같이 처분한 다른 길드원들과는 차별을 두어 용서했다. 당장 다음 주가 길드전이니.



[ 박스님 뭐임? 완전 오늘 개트롤짓 하는데요 ]
[ 아 씹 가끔 그러더니 오늘 또! 아 진짜 우리끼리 할 때면 몰라도 오늘은 아니잖아! ]
[ 아 C1발 미1친거 아님? ]
[ 저 분 짤라요 ]
[ 길드장님 뭐함요 ]

'박스'가 사고를 쳤다. 길드전에서 완전히 미친 트롤짓을 했다. 종종 우리끼리 놀 때 그럴 때가 있긴 했지만 이건 길드 순위 결정전이다. 그런데 'ㅋㅋㅋㅋ'하는 메세지와 함께 의도적인 팀킬을 하지를 않나, 같은 편 진입경로를 막고 서 있지를 않나. 가뜩이나 운영진의 차별대우와 정모 불참, 묘하게 거슬리는 언행에 은근히 미운 털 박힌 그였기에 길드원들이 난리가 났다. 그나마 부길드장 '핸섬맨'이 애써 침착을 유지하며 그들을 달랬지만 기어코 초대 길드원 '부산_721'님이 총대를 메고 나섰다.

[ 길드장 입장에서 박스인가 뭔가 하는 그 인간을 감싸고 도는 이유는 충분히 알겠지만, 지금 길드 자체가 원칙도 없고 불공평하게 운영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 같습니다. 이번에는 그리고 단순히 트롤짓이 아니라 우리한테 온갖 욕까지 하면서 플레이 했구요. 만약에 이번에도 그냥 넘어가면 그냥 나도 탈퇴할랍니다 ]

그리고 다른 길드원 전부가 다 동의했다. 심지어 핸섬맨까지도. 게다가 상황이 이 지경까지 왔음에도 끝내 단톡방에 쌓이는 메세지를 확인하지 않는 유일한 1이 바로 '박스'였다.

[ 신중히 고려하겠습니다 ]



내 입장에서는 생각이 조금 달랐다. 박스 같은 네임드 랭커 하나만 있다면 결국 떨거지 몇 백명 모으는 것은 순식간이다. 게다가 피차 마찬가지지만 무과금 유저들로는 한계를 느꼈다. 지난 11월의 길드전에서도 숫적 우위가 있었음에도 결국 번번히 아작난 이유도 저 부산_721같은 물만랩 무과금 유저들 때문이니까.

[ 제 생각은 여러분과 조금 다르네요 ]

결국 나는 지난 3년 간의 쌓아온 길드원들과의 우정을 저버렸다. 마침 어제 박스와의 전화 통화에서도 그가 앞으로 다시 열심히 할 거라는 선언을 들었으니까. 온갖 폭언을 들었다. 게임 사이트 게시판에도 안 좋은 글들이 좀 올라왔다. 뭐 별 반응이 없긴 했지만. 그래도 나는 박스가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70명을 꽉 채웠던 길드가 단 이틀 만에 14명으로 줄어 들었다. 물론 남은 유저 대부분은 오랜 길드원이 아니라 네임드인 박스의 개인 팬들. 그러나 그러고도 박스는 거의 2주일 가량을 접속하지 않았다. 길드랭킹도 추락했다. 2서버 10위 권이던 길드 랭킹은 50위권으로 추락했다.




"형, 지금 전화 가능하세요?"
"뭔데, 나 지금 바쁜데"

바쁘기는, 또 이 한낮 다 된 시간까지 여자 끼고 침대 위에 있겠지. 하지만 애써 모르는 척 하고 다급하게 형에게 말을 전한다.

"조금 중요한 일이라"
"뭔데?"
"저 방금 계정 접속했는데요"
"어"
"그 찐따가 황금궁 12강 팔아버렸 다는데요"
"뭐?"

심드렁하던 전화 너머에서도 소리를 지르는 것이 느껴진다.

"아이 씨박 미쳤나. 왜? 왜 팔았대! 야 그거 현찰 1억 오천짜리야"
"갑자기 진홍쪽에서 기습 PVP 들어와서 싸우다가 연달아 두 번 죽어서 대응하려다 그랬다는데요. 글구 거래 급하게 올리려다가 실수로 천오백에 거래했대요"
"아 염병, 지랄났네. 아 씨발! 아 병신새끼가 진짜!"
"완전 미쳤죠? 저도 지금 너무 빡치는데 아 진짜 어쩌죠 이 병신을"
"후우"

전화기 너머에서 말이 없어진다. 본주 형이 레알 빡쳤을 때의 반응이다. 저번의 아침 알바도 딱 이렇게 짤렸다. 그러나 나는 내심 잘됐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이렇게 된 김에 내가 좀 저녁 담당 시간을 늘리고 월급 좀 더 올려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형, 근데 있잖아요"
"야 잠깐만"

잔뜩 빡친 본주 형은 그러나 잠시 숨을 고른 뒤에 갑자기 목소리를 깔며 말했다.

"야, 너 근데 니가 그 형한테 병신 병신할 입장이야?"

그 순간 뭔가 꼬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직후 그 이유를 알았다.

"그 새끼 우리 친형이야. 병신인 것 맞는데, 니가 병신 병신 할 입장은 아니지. 안 그래?"

몰랐다.

"아, 그랬구나. 형, 아, 제가 죄송해요. 실수를 했네요"

나는 정말로 방바닥에 주저 앉았다. 무슨 실수를 한건가 싶다.

"너 저번에도 한번 내 앞에서 형 보고 표정 개썩는거 내가 한번 뭐라고 하지 않았냐? 너 진짜 어디 가서는 내 욕할거 같다?"
"아니요, 그런게 아니라"
"아 됐고"

눈 앞이 캄캄해졌다.

"당분간 쉬어라. 나도 황금활 날리니까 좆도 할 맛 안 난다야. 그거 시발 12강짜리 어디가서 뭐 구할 수나 있겠냐? 없네. 없어. 경매장에도 없어. 하, 10강짜리도 없어. 아 시발 좀 쉬어야겠다. 다른 거 좀 하면서. 일단 이 달 월급은 입금해줄테니까, 담달부터는 다른 일 알아봐"

그렇게 끊어졌다. 다시 전화를 할까 했지만 손이 떨려서 차마 버튼 누를 용기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멍하니 노을 질 때까지 방 안에 있다가 겨우 간신히 정신 차리고 박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길드라도 살려야 하니까. 다시 활동을 부탁 드린다고. 네임드 박스 중심으로 공격형 길드 만들어서 12월 길드전 3위 안에만 들면 잘하면 아마추어 상금대회도 나갈 수 있고, 캐리비안 길드 걔네처럼 스폰서라도 붙으면 당장 뭐가 좀 어떻게 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이번에도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미안하지만 다시 사정이 생겨서 활동이 어려울 것 같다고. 나는 좋게좋게 그를 달래다가 결국 계속 힘들 것 같다고 하는 그에게 싫은 소리를 해버렸다. 그러자 박스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한데요, 왤케 징징대요? 아니 이게 뭐 프로게이머 구단이야 뭐야. 그냥 길드잖아요. 그냥 나는 좀 혼자 뛰기 불편해서 고기방패들 좀 필요해서 좆밥 길드 활동한 건데, 이젠 날 보고 이거해라 저거해라 난리야. 다들 캐릭에 돈 천도 안 바른 거지길드 주제에. 안 그래요?"

내가 울먹이듯 숨소리가 거칠어지자 그도 당황한 듯 좋게좋게 타이르기 시작했다.

"알죠, 내가 지금 말이 좀 심했네. 여튼 길드장님 고생한거 알고, 그동안 재밌긴 했는데, 나도 이제 당분간 아버지 가게 물려 받을거 따라 다녀야 되서 바쁠거 같아서 그래요. 연말에는 또 좀 그렇잖아요, 친구들도 만나고 여친이랑 놀기도 해야지. 다른 때는 몰라도 클스마스 이럴 때는 여자애들 민감하니까. 님도 좀 길드 기왕 이렇게 된거 좀 쉬면서 숨도 고르고 해요. 그리고 어차피 나도 이제 부주들한테 돈 못 줘요. 아버지가 가게 물려 받으라는데 이제 용돈 막 못 땡겨쓰지. 혼자 이 똥손으로 돌려야 돼. 저번에 봤잖아요 개 트롤 짓한거. 그게 진짜 나에요"

할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랬구나.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랬구나. 그래 가끔 박스가 이상한 짓을 할 때가 있긴 있었다. 그게 진짜 이 새끼였구나.

"그럼 수고하시고, 좀 쉬어요. 그럼 안녕"

[ '박스' 님이 길드에서 나갔습니다 ]

심지어 길드 탈퇴까지 해버렸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난 그 자리에서 흥분을 참지 못하고 대가리를 바닥에 짓찧어버렸다. 머리에 아득한 통증과 함께 숨조차 쉬기 힘든 코의 시큰함이 느껴졌다. 눈 앞이 빙글 돌면서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뇌진탕일까. 대가리가 깨진 것일까. 아니면 바닥이 깨진 것일까.

몸이, 시야가 거꾸로 돌며 통증 대신 기분 좋은 얼큰함이 머리를 중심으로 전신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랬다. 사실 알고는 있었다. 어차피 아무리 흙수저들이 24시간 게임을 한다고 해도 절대 금수저 캐릭터들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은. 그건 당연했다. 실력도 부주들을 통해서 위장할 수 있다는 것도 잘 알았고. 당연히 하루에 두어시간 잠깐씩 하는 본주들이 반나절 이상을 게임하는 부주보다 나을 리가 있나.

하지만.

내가 진정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냥 막연하게나마, 게임으로 언젠가는 다시 내가 그럴싸한 밥벌이를 할 길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엄마, 아빠가 틀렸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적어도, 남들만큼은 이걸로 먹고 산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물론 알고 있었다. 그런 길 중에도 쉬운 길은 없다는 것을. 그러나 이런 식으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언젠가는 멋지게 업계의 일원이 되어, 지금 이 시기의 나를 귀엽게 돌아봐 주고 싶을 뿐이었다. 절망의 파도가, 그리고 현실의 썰물이 내 안에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가고 있었다.

나는 이제 아무 것도 아니다. 게임에 미쳐서 대학까지 포기한 게임중독 인간쓰레기일 따름이다. …엄마 아빠의 그 말이 옳았다.

- 끝 -

고질병 소설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세용이는 무어라 말을 몇 번이나 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하다가, 겨우 간신히 생각을 정리한 듯 말했다.

"아름아"
"왜"

그리고 솔직히 속으로 조금 쫄렸다. 그저 내 말이라면 껌뻑 죽고, 흥분하면 말도 버벅이는 그이지만, 세용이가 저렇게 차분하게 나름의 생각을 정리할 때의 말은 언제나 내 정곡을 찔러왔으니까.

"니 말도, 맞는 말인데, 그렇지만…근데…"
"뭐"

나도 모르게 또 삐딱선. 저렇게 괴로워하며 겨우 말을 '토해내는' 그를 또 몰아붙인다. 미안함이 가슴 속을 파고 들지만, 잘못을 인정하기가 두렵다.

"그냥 나는 너가 미안하다는 한 마디만 하면 됐어"

순간 무거워지는 공기. 과거형의 말이 두렵다.

"다신 안 그런다고 말하면, 그걸로 괜찮다고 다짐했어. 나도… 많이 힘들지만 그럴라고, 여기 나온거야. 근데 너는 어쩌면…어쩌면…참 너는 어쩌면…"

저 울보. 또 눈물을 글썽인다. 혼자 북받혀 우는 눈물. 그리고 항상 나까지 미안함에 글썽이게 만드는 저 빙신같은 눈물. 저 바보 같은 눈물. 벌써 나도 찔끔한다.

"그냥 미안하다고 말하면 되잖아. 그게 그렇게 어려워?"

어려워. 나는 그 말이 안 나가. 미안해 세용아. 근데 정말로 나는 그게 그렇게 어려워. 어느새 내 입은 얼어붙은 듯 말이 나오지 않는다.

"크흠"

간신히 눈물을 닦아내며 코와 가래를 들이마시는 저 멍충이.

"알았어, 괜찮아. 내가 널 모르냐"
"…"

그렇게 그는 또 한번 큰 답답함을 혼자 먹어치운다. 말로 그를 짓누르고, 사랑을 무기로 휘두르며, 기어코 분함과 억울함에 그의 눈물까지 터뜨리게 만들었지만 내 속도 결코 편하지 않다. 내가 싫어진다. 내 자신에 대해 화가 치솟는다. 죽일 년. 쳐죽일 년. 미친 년.

'미안해'

마음 속으로 작게 말한다. 그리고 새삼 두려워진다. 언제까지 세용이가 나를 참아줄까. 이러다 어느날 갑자기 확 돌아서면 어쩌나.

"밥은 먹었어? 배고프지"

저 바보는 또 어느새 그 화난 말투를 지우고 다정하게 묻는다. 저 머저리.

"안 먹었어"

사실 저 다정한 말투에 가슴이 아리고 눈물이 왈칵하는데 또 쌀쌀맞게 대답한다. 그래도 웃는 세용.

"먹으러 가자. 나도 배고파"
"생각없어"
"그래도 가자"

그는 내 손을 잡아 이끈다. 항상, 싸워서 이기고도 마음에서 진 느낌이다. 이러다 정말 내가 더 많이 좋아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언제나처럼 모질게 굴다가 확 세용이 마음이 확 돌아서면 어쩌나. 나도 이젠…. 아니, 어쨌든.

"뭐 먹을건데"

내 질문에 또 혼자 마음이 풀어진 이 멍청이는 "너 먹고 싶은거" 하고 대답한다. 나는 그저 미안한 마음만 가득하다. 그리고 저 쪽을 가리킨다. 그가 좋아하는 메뉴를 고른다.

"김치찌개 먹으러 가자. 순이네"
"어 좋아"

나도 안다. 아무리 세용이라도, 그가 아무리 나 밖에 모르는 바보라도, 이렇게 사람 마음 속에 칼을 마구 찔러넣다가는 언젠가 크게 후회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아무리 내가 말로 그를 짓눌러도 결국은 매번 지는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사과 대신 억지와 적반하장으로 소리만 치며 상황을 넘기는 이 '말로 다 해결하려는' 고질병은 정말 나쁜 습관이라는 것을.

"춥지"

그가 껴오는 깍지를, 오늘은 받아준다. 그의 미련한 사랑을 이렇게 오늘도 나는 받아준다. 언젠가 그가 흘린 모든 눈물을 열 배로 내가 흘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하며.

- 끝 -

아재증후군 소설

스타일병리학과 김박스 교수의 강의는 언제나처럼 자신의 경험에 입각한 사례와 그에 대한 소견으로 마무리 된다.

"현대의학의 도움을 받는다 하더라도, 결국 병마와 싸우는 것은 환자 자신이다. 아무리 의사가 적절한 처방을 하고 치료를 실시한다고 해도, 환자 본인이 치료나 교정의 의사가 없거나 부족하다면 결국 그 효과는 제한적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폐 질환이 있는 환자가 흡연을 고집한다거나, 대사증후군이 있는 이가 생활습관을 바꿀 의지가 없는 경우가 대표적으로 그러하다"

김박스 교수는 잠시 좌중을 둘러보다가 입을 다시 열었다.

"하지만 현실을 놓고 보았을 때 의사가 그들의 삶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매우 적고, 또 환자 역시도 자신의 삶을 갑자기 바꾸기는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 예를 들어 의사 그 자신의 삶을 놓고 보아도 과연 '푹 자고, 잘 먹고, 운동 열심히 하며, 항상 긍정적인 마인드로 사는' 의사가 몇이나 될 것이며, 문제를 체감한들 그 패턴을 실제로 바꾸는 것이 가능한 의사가 얼마나 될까?"

강의실의 모두는 씁쓸한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김박스는 언제나와 같은 한 마디로 강의를 마무리 지었다.

"따라서 의사가 현재의 의료환경에서 환자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의 진료는 결국 '외과는 솜씨, 내과는 독설'이라는 것이 내 결론이다"





아재증후군





김박스 교수는 자신의 앞에 앉은 환자에게 몇 가지 문진을 시작했다.

"아직까지는 그래도 본인이 '아저씨' 소리 들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죠?"
"본인의 개그감각이, 백점 만점에 그래도 최소한 60점 이상, 컨디션 좋을 때는 70점은 넘는다고 생각하죠?"
"귀여운 부하 여직원들과 이야기를 할 때 자기도 모르게 텐션이 오른다거나, 혹은 기분이 좋아지죠?"
"어쨌든 현재 본인의 나이에 비해서 본인의 생각이나 사고는 젊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등등, 몇 가지의 질문에 환자는 모두 그에 대해 "그렇습니다" 혹은 "네 좀 그런 편이죠…" 또는 "예전에는 분명 그저 그랬던 것 같은데, 요즘에는 확실히 좀 그렇습니다" 같은 류의 대답을 해왔다.

"아재증후군입니다"

김박스의 말에 환자는 혀로 입술을 적시며 잠시 당황하더니 곧 "네, 역시 그렇군요" 하며 수긍했다. 사실 이런 솔직한 환자들의 경우에는 보통 치료에도 협조적이며, 그 예후도 좋은 편이다. 이후의 치료 방법과 시술 일정을 간단히 체크하고 일단은 "말 수 줄이기"를 처방한다.

그러나 언제나와 같이, 쉬운 환자 다음에는 까다로운 환자가 나타난다.

"전 그래도 정말로 객관적으로 평균보다는 그 한참 위라고 생각하는데요. 지금 만나고 있는 애도 그렇고, 어떤 라이프 스타일이나 삶을 대하는 자세, 관심사라거나 외모도 그렇고요"

아재증후군의 제 2형 증상으로, 제 1형 아재증후군이 보통 전형적인 '아저씨'들에게서 보이는 무너진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도피성 현실감각 저하-즉, 환자 본인도 자신의 현실을 알고 있지만 애써 부정하는-증상이라면, 제 2형 아재증후군은 '관리하는 나 자신'에 대한 과도한 자신감-강력한 자아도취-으로 균형감각이 깨지는 경우가 곧잘 그 원인이 된다.

"상대의 미소 속에 어느 정도의 진심이 담겨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특정한 상대가 아닌, 보다 대중적인 기준으로 본인의 현재를 평가한다면 어떨까요"
"나 자신에서 껍질을 살짝만 벗겨내고 생각해보기로 하죠"

김박스도 몇 가지의 추가적인 질문을 더 했지만, 환자는 그때마다 꽤 일리있는 항변을 해왔다. 그리고 듣다듣다 환자는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이 꽤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선생님, 제가 아재증후군이라고 이미 결론을 내리고 접근하시는 것 같은데, 좀… 글쎄요. 후, 글쎄요… 이건 좀 아닌 것 같군요"

김박스 역시도 매우 곤란하다는 듯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몇 가지 검사를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이 제 2형 아재증후군은 의사 입장에서도 매우 진단과 처방이 어렵고, 실제 일부 국가에서는 아예 병리적인 접근 자체를 주저하는 경우도 있다. 기본적으로 아재증후군이 무엇인가. '자신의 현실과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여, 주변에 다양한 이상행동으로 피해를 끼치는 노화 속의 한 병리적 증상' 아닌가.

나이에 맞지도 않고 상대가 부담스러워하는 터무니 없는 로맨스를 혼자 꿈꾼다거나, 자신의 사회적 입지를 악용하여 주변 사람에게 다양한 정신적 민폐를 끼치는 이상행동(아재개그, 잦은 비위생적인 행위, 철면피 또는 파렴치, 성적 이상행동, 지나치게 까다롭거나 소심해지거나 하는 정서불안 등)을 하는 짓 등이 결국 정신질환으로 인정되어 WHO에 의해 질병코드가 등록된 것인데…

제 2형 아재증후군은 그런 면에서는 조금 미묘한 점이 있었다. 확실히 주변에서 보기에는 이미 '저래봐야 아저씨인데' 싶은 주책이며 그로 인해 주변에 다양한 민폐를 끼치는 자아도취성 정서장애 증세이지만, 어쨌든 그 자신에 대한 노력과 관리가 이어지고 있는데다 그 덕택에 환자 본인과 그 주변의 일부 코드가 맞는 이에 대해서는 전혀 피해를 끼치지 않는 안정적인 유대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에 이를 정말 병리적 증상으로 바라보아야 하는가는 학계에서도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 이 사례가 바로 좋은 예인데, 이 환자는 40대 중반에 접어든 돌싱 사장님이다. 애는 없고. 현재 근 5년간 이어오고 있는 헬스와 자전거 타기, 수영으로 탄탄한 몸매를 유지해오고 있고 사회적으로도 충분히 안정된 사람이야. 사회 문제에도 관심이 많고, SNS 활동이나 온라인 활동도 적극적이고, 젊은 취향의 취미생활로 20대들과도 교류하며 젊은 감각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지."

잠시 말을 쉰 김박스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객관적으로는 40대 이혼남이니 조건만 들으면 누가 봐도 아저씨지. 거기다가 자기 관리에 대한 부심이 지나쳐서 종종 젊은 남자 사원들한테 운동 하라고 구박하고 오지랍까지 부리는 꼰대짓까지 생각하면 더할 나위 없는 아재인 것은 맞아. 본인은 아저씨 소리 듣기 싫어한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여기서 김박스는 다시 의문을 던졌다.

"그러나 어쨌든 스타일이 좋고 외모도 훌륭한데다 사회적 조건도 충분히 갖출만큼 갖췄어. 신선함만 제외하면 어설픈 20대보다는 훨씬 매력적인 사람이지. 실제로 주변 몇몇 이성과는 묘한 성적 긴장감도 충분히 형성할 정도이고. 약간의 꼰대 기질과 어쩔 수 없이 스며든 약간의 환경적 사상 한계점만 제외한다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아저씨'와는 실제로 크게 다른 사람이야. 이런 사람의 정서를 병리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과연 맞는 일일까? 개인주의적 관점에서 본다면 확실히 무리가 따르는 일이고, 몇몇 서구 나라에서는 때문에 이 제 2형 아재증후군은 아예 질병으로 취급하지 않는 나라들도 많아. 이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지?"

강의실이 순간 조용해졌지만, 한 여학생이 번쩍 손을 들었다.

"저는 여전히 제 2형 아재증후군도 충분히 병리적 증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아재증후군이 질병으로 규정된 것은, 자기객관화 실패가 주변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결국 자기 자신에게 가장 큰 피해로 돌아가는 정서적 이상증상이기 때문입니다. 설령 제 2형 아재증후군에 해당하는 이들의 행동이 당장은 1형 증후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증상이 양호하다고는 하나, 결국 언젠가 피해자는 발생할 수 밖에 없고 그때의 피해는 오히려 1형보다도 더 돌이킬 수 없이 큰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김박스는 그녀의 답변에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exactly"




김박스는 '심박계를 여러개 붙인 채로,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은 제 2형 아재증후군 의심환자'에게 문진을 계속했다.

"지금 본인은 18살 차이의 연하 여자친구와 말이 잘 통한다고 생각한다고 이미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의 퇴사한 부하직원 아영, 유라, 소영과의 관계가 시작 이전에 처참하게 깨진 것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환자가 답변을 하기도 전에 심박계가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환자는 무어라 조리있는 답변을 하려 했지만 곧 한숨을 쉬며 "카사노바도 모든 여자와 다 잘 된 것은 아니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면서 흔해 빠진 변명을 했다. 이어 "그리고 같은 20대끼리도 성격따라 환경따라 말이 잘 안 통하는 경우도 있구요" 하면서 역시 흔한 변명을 이어갔다. 하지만 가타부타 말없이 김박스는 문진을 계속했다.

"분명 요즘에도 핫한 걸그룹 신곡들은 많이 듣고 있음에도, 본인의 노래방 선곡 업데이트는 이미 8년 전에 끊긴 것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분명 젊고 어린 여자들과도 말이 잘 통한다고 했으면서, 20대 후반에서 30대 초중반 여직원들과의 대화가 20대 초반 여직원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애시당초 여자를 만나는 루트 자체가 자신이 운영하는 회사 또는 유흥업소가 대부분이라는 사실 자체가 상당히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일련의 미투 사태들을 보면서 묘한 공포를 느낀 경험이 있습니까"
"'취향이 올드하다' 소리를 듣기 싫어서 과도하게 젊은 친구들의 취향을 의식한다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주변 또래와 다른 삶을 추구하는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에 높은 점수을 주면서도 가끔 현자타임이 오지 않습니까"
"실패한 개그를, 성공한 다른 개그에 대한 기억으로 지우며 애써 부정하지만 분명 그 실패한 순간에 느낀 어떤 소름과 적막, 이후의 억지반응들을 보면서 더 큰 비참함을 느낀 적 없습니까"

…수없는 질문에 드디어 환자는 감은 눈에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그리고는 갑자기 큰 소리를 지르며 자기 뺨을 후려치는 자해를 이어갔다.

"맞습니다. 저는 아저씨 맞아요! 맞습니다! 맞다구요! 저는 아재에요 아재! 그것도 철없이 20대들과 놀고 싶은 똥아재요! 나는 아재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지만 사실은 그냥 흔한 아재들보다 더욱 나쁜, 쓰레기 같은 아재 맞다구요!"

환자는 뒤이어 우어어 하는 고함까지 지르고 격렬한 발작을 시작했지만, 김박스 교수의 노련한 손길로 곧바로 입에 투입된 아재용 신경안정제 '우황청심환' 덕분에 그는 다시 매우 안정적으로 본래의 상태로 돌아갔다.

어린 시절 크게 놀랐을 때마다 할머니가 한번 씹은 뒤 입에 넣어주던 그때 그 시절의 추억과 '아 맞어, 이런 것을 먹어본 기억이 있는 한 나는 결코 아재임을 부정할 수 없어' 하는 깊은 회환의 눈물로 그는 그렇게 제 2형 아재증후군에서 드라마틱하게 상태가 호전될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요즘 저는 오랜만에 다시 연락한 친구들과 함께 골프, 낚시를 다니며 활기를 되찾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친구 소개로 비슷하게 나이 먹어가는 외로운 처지의 좋은 인연도 만나게 되었구요. 새삼 이 나이에 클럽 다닐라고 테이블 잡고 그랬던 기억들이 비로소 부끄럽게 생각이 듭니다. 이게 다 선생님 덕분 아니겠습니까, 허허"

몇 주 뒤, 이미 웃음소리마저 "허허"로 변한 그의 상태를 보며 김박스 교수는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김박스는 "우선 이번 주까지는 조금 더 낚시, 트로트, 바둑 채널을 보시고, 다음 주부터는 자동차 채널이나 야구 채널을 곁들여 보셔도 됩니다. 지금은 치료 때문에 연배에 비해 다소 과한 약을 쓰고 있는 것이니까요." 하고 구두 처방전을 곁들였다.

환자의 자동차 키에 달려있던 카카오 프렌즈 키링이 어느새 서비스 센터의 순정 70만 포인트 고객대상 증정품 키링으로 바뀐 것을 보며 김박스는 다시 한번 흐뭇한 미소를 짓고는 그렇게 환자를 돌려보냈다.

"다음 환…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어느덧 진료 시간이 끝났음을 깨닫고 김박스 교수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잠시 눈을 비비다가 노트북을 폈다. 그러나 노트북 속 논문 초록, 서론의 내용은 한 단락만 읽어보아도 방금 전의 진료와 전혀 반대되는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다.


"…아재증후군 치료에 있어서 현대의 치료법상 그 최선의 방법이 본인의 철저한 반성과 현실 자각에 있음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제 1형 아재군의 희귀 사례 및 제 2형 아재증후군의 일부 사례에서 관찰된 '젊은 감각을 가진, 분명히 정서적인 노화가 느리고 철저한 자기관리를 통하여 일련의 미래지향적 자아를 가질 수 있는 것으로 예측되는 소수의 케이스'마저도 결국 자아 파괴에 가까운 형태의 자기 반성만으로 접근해야 하는가는 여전히 큰 의문의 여지가 있다.

다수의 케이스에서 그들의 행동발생적 동기가 의외로 심히 불순한 것에 있음이 발견되었으며, 과정상의 과도한 자기애가 추가적인 정서적 불안정을 유발한다손 치더라도, 긍정적이며 지속적인 행동의 강력한 유인요소가 될 수 있다는 사실 역시 부정할 수 없다면 이 지점에 대한 보다 근본적이며 전면적인 재검토의 여지가 있다.

아래 14건의 케이스에서 공통적으로 관찰된 행동특성은…"



그렇다. 사실 김박스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단지 환자들의 빠른 사회화와 안정적인 치료, 그리고 심평원의 의료수가 이슈 때문에 획일화 된 '자아파괴'라는 방법으로 현재의 아재증후군 환자들을 진료하고는 있지만, 그는 여전히 탈아재에 대한 긍정론적 접근을 검토하고 있다.

언젠가는 자신 같은 못 생기고 센스없는 똥아재들도 총각, 아가씨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고 그들과 즐겁게 어울리며 긍정적이며 행복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으리라는 덧없는 꿈을 꾸고 있기에.

- 끝 -


노인과 정보의 바다 소설

그는 작은 블로그에 혼자 글을 쓰는 노인이었다. 팔십사일 동안 그는 글을 쓰고자 노력했지만 단 한 편도 완결짓지 못했다.

"망했군"

처음의 마흔 날 동안은 웃긴 글을, 나중의 마흔 날 동안은 슬픈 글을 쓰고자 했지만 결국 완결짓지 못했고,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가 이제는 틀림없는 최악의 슬럼프에 빠진 것이라고. 나름대로 글에 조예가 있다고 동네에서 일컬어지던 교회 집사 어른도 말했다.

"인간의 재능이란 마을의 우물과도 같아서, 펑펑 나올 때는 아무리 아낌없이 써도 부족함이 없지만 결국 한번 말라버리면 그 무슨 수를 써도 다시 예전처럼 차오르지 않아. 노인은 이제 끝났어"

동네의 작은 바에 들릴 때 비치는 노인의 얼굴에는 이미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길게 늘어진 다크 서클과 신경질적인 표정, 목과 손에 늘어진 주름, 파리한 안색과 늘어진 뱃가죽의 흉한 모습은 아무리 좋게 보아준다고 한들 그에게서 더이상 '작가' 특유의 이지적인 모습을 찾기 어려웠다. 유일하게 기대해 볼만한 것이라면 여전한 그의 유머러스한 눈빛이었으며, 그나마 흥미로운 것은 새삼 빳빳하게 잘 다린 와이셔츠의 깃 정도. 하지만 그마저도 낡디 낡아 소매에는 단추조차 사라진 상태였다.

그랬다.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낡고 지쳐 있었다.

"박스 할아버지"

가게 문을 닫고 함께 나선, 바의 젊은 사장이 말했다.

"돌아오는 주말에, 예전처럼 함께 하루종일 술 마시며 세상 모든 것에 대해 토론해볼까요?"

하지만 노인은 미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는 더이상 나같은 노인과 노닥거릴 필요가 없단다. 나에게서 배울만한 것은 모두 배웠고, 너는 이제 여자 뒤꽁무니를 열심히 쫒아다닐 시간이야."

사장은 어깨를 으쓱한 다음, 가게 옆 골목길 한쪽 벽에 바짝 붙여 세워놓은 스포츠카에 오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래도 알죠? 제가 박스 영감님 좋아하는거"
"알다마다"

노인은 골목길을 지나치며 인사 대신 손을 휘저었다. 마치 오케스트라 지휘라도 하는 양. 사실 그 나름대로 하트 모양의 손짓이었지만, 이미 만취한 노인의 휘적임은 그저 가냘픈 노인의 술주정에 불과했다.




노인은 새벽의 쓰레기차 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입 안을 헹구고, 세수를 한 뒤 혼자 다시 습관처럼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워드 프로세스에 글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지난 수십 년간 글을 써온 대가로 얻은 것이라고는 굽은 어깨와 거북목이 전부다.

"아니, 그건 아니야"

그의 글에 울고 웃었던, 감탄하고 공감했던 수많은 이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고 글 속의 주인공과 조연이 되어 주었던 무수히 많은 얼굴이 새삼 또 스쳐 지나간다. 노인은 더이상 아름답고 행복한 글을 쓰지 않는다. 시시한 이별의 글도 쓰지 못한다. 그 모든 감정의 편린들은 아주 오래 전의 것들이다. 바싹 마르고 건조한, 그러면서도 기묘하게 주름 사이에만 배어있는 축축하고 불쾌한 얼굴 기름처럼 지독한 외로움만이 그의 안에 매우 찝찝한 형태로 조금 남아 있을 뿐이다.

"커피라도 마실까"

지난 수십 년간, 하루에 네다섯잔도 연거푸 마셨던 그였다. 아침에 잠이 깨지 않아서, 술이 덜 깨서, 집중이 안 되서, 미팅을 위해서,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서, 밥을 먹었으니까 디저트로, 노곤하니까, 누군가의 진심을 듣기 위해서, 자초지종이 알고 싶어서, 뒤를 캐고 싶어서, 제대로 얼굴 보고 따져보기 위해서, 따로 은밀하게 이야기 하기 위해서, 여차하면 얼굴에 확 끼얹고 쌍욕을 퍼붓기 위해서, 비웃을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 꼭 한번 다시 보고 싶어서, 사과하고 싶어서, 새까맣게 잊고 싶어서. 그렇게 수도 없이 마셨고, 또 습관적으로 마셨던 커피.

젊었을 때는 여유가 되면 되는대로 그나마 사치를 좀 부려서 고급 원두도 종종 챙겨 마시곤 했지만, 지금 노인의 사정으로는 향이고 뭐고 느끼기도 힘든 몇 년 묵은 커피가루 내려 마시는 것조차 드문 일이었다. 그래도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선선한 가을의 새벽 바람은 산폐되고 눅눅한 커피의 묵은 향조차도 신선한 파나마 게이샤 원두의 그것을 연상케 만드는 마법 같은 힘이 있었다.

"오늘은 느낌이 좋네"

하루에 내뱉는 말의 거의 절반이 혼잣말인 지독한 외로움. 그러나 어쩐 일인지 오늘은 그 외로움조차 글쓰기에는 최적화 된 어떤 힘이 되는 듯 했다.



사실 노인에게 있어서 '글'이란 조금 특별한 그 무엇이었다. 정작 전업작가로서 활동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음에도 그는 십대 시절부터 줄곧 글을 써왔다. 욕심 많고 뽐내기 좋아하는 자신을 타인 앞에 확실하게 뽐낼 수 있는 몇 안되는 좋은 수단이었으며, 화려하면서도 곧잘 흔들리며 불안했던 씁쓸한 청춘의 고통을 완화하는 좋은 약이었다.

"흠, 뭘로 시작을 할까"

동이 트기 전, 노인은 음악을 재생했다. 사실 그는 글을 쓸 때 음악을 잘 듣지 않는 편이지만, 이런 날만큼은 음악을 그저 듣고 싶었다. 무슨 음악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젊은이들의 음악이면 족했다.




최근의 작은 경험들, 조금은 특별했던 어떤 순간의 기억들을 시작으로 소재를 만들어 간다. 겪었던 인물들을 갈아넣고 조금씩 변주하며 인물들의 틀과 살을 만들어 간다. 이제부터는 그들의 방식으로 대화를 시작하면 된다. 그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조금만 생각하면 앞으로의 비전도 완성된다.

노인은 생각했다. 나는 특별하지. 평생을 주변에 여자 없이 살았던 적이 없었다. 재주에 비해 넘쳐난 여복. 잘 풀리지 못한 것은 그저 조금 운이 없었을 뿐이다.

그때였다. 아이디어가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가끔 그런 날들이 있다. 젊었던 어느 순간에는 하루에도 서너개씩 떠올랐던 사고의 포인트들. 그저 그 근처 어딘가에 접안하고 정박하기만 해도 두뇌 어딘가 속에서 달려온 싱그러운 작품 아이디어들이 품 안에, 키보드 위에 폭신하니 포근하게 안겨오던 발상의 풍요.

그리고 그 수많은 흥미로운 아이디어들을 그저 낄낄대며 술자리에서 친구들과, 여자친구와의 농담 따먹기에 소모시키고 마지막까지 남은 몇 가지의 시시한 꺼리들만으로도 충분히 혼자 만족할만큼 글을 쓰던 젊었던 시절의 추억. 이제는 가끔 떠오른 그 무엇을 다시 기억해내기 위해 반나절을 고민한다.

다행히 오늘은 3분의 고민으로 다시 저 앞으로 발사된 아이디어의 총알을 쫒아가 잡아낼 수 있었다. 아까 마신 커피 카페인의 힘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이디어의 신선함에 흥분을 느낀다.

"이거 좀 대박인데"

노인은 또 중얼거린다.

"이거 정말 재밌겠는데"

그는 단숨에 커피를 반 잔 비워내고 열심히 타이핑한다. 시끄러운 청축 키보드 소리가 그의 외로움에 시끄러운 말동무가 되어준다. 마치 카페에서 웃어주기만 해도 혼자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끝없이 대화를 이어 나가던 사랑스럽던 옛 여자친구처럼.

"이거다"

대어가 문 릴이 정신없이 풀려나가듯 충만한 사고의 흐름은 연속적으로 흥미진진한 설정들을 창조해낸다. 이런 캐릭터라면, 이런 조건이라면, 이 놈이라면, 이 정도의 디테일이 곁들여 진다면, 웃음이 피식 흘러 나온다. 그래, 이거다.

"이거라고"

혼잣말이 너무 많아졌다. 단순히 늙고 외롭다는 것만으로는 변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쩌면 이것은 정신병의 전조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가볍게는 우울증, 크게는, 아니, 어쨌든. 하지만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정말 이미 미친 것이라고 해도.

"원래 그랬잖아"

무언가 간절히 갖고 싶은 것을 갖고 싶을 때는 다른 그 무엇도 신경쓰지 않았다. 항상. 간절히 갖고 싶었던 그녀를 위해 나의 미래 자원들이 모조리 박살나가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웃으며 기꺼이 감내했고, 확실히 조준한 목표가 생기면 내 몸체가 다 부서지고 박살나도 그저 일단 그곳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생각과 감내, 통증의 컨트롤은 항상 그 다음에 하기로 했다. 그저 '어떻게든'. 그 뒷 단어들조차 생각하지 않고 그저 '어떻게든'. 노인은 항상 그렇게 간절했다.

"그리고 원래 여자들은 그걸 귀신같이 알아채지"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다 포기하면서도 덤벼들 줄 아는 바보에 대한 감동, 그리고 바보가 되어버린 그에 대해 느끼는 실망의 교차 과정. 노인은 그렇게 모든 것을 가졌고 모든 것을 잃어왔다. 매번. 그게 그의 방식이었다.

"하"

그랬구나, 그래서 그랬어. 그걸 이제서야 깨달았네. 오늘은 글이 막혀있는 여든 다섯째 날이다. 허무하게 살아온 지난 시간에 비하면 85일이라는 시간은 얼마나 짧고 가벼운가.

"오케이"

노인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첫 갈등. 사실은 이런 부분이 포인트다. 공감대를 형성해 온 주인공의 첫 갈등. 첫 위기에 놓인 상황. 지나치게 특별하면 현실감을 잃고, 지나치게 평범하면 재미를 잃는다. 바로 그런 부분의 차이가 망작과 명작의 차이를 가른다.

"피식 웃게 만들 줄 아는 개그감각"

갈등을 봉합하며 주인공의 매력을 돋보이게 하는 작은 팁. 자, 주인공아, 여주인공의 마음을 녹여다오. 아름이의 성격을 부여받은 여주인공 현지. 과연 주인공의 심드렁한 한 마디에 현지는 빵 터지고 내 머릿 속 아름이도 "아 오빠!" 하며 웃는다. 스피커에서 흐르는 발랄하고 신나는 기타 리프에 나도 모르게 어깨를 흔들고 있다.

어느새 나는 내 나이를 잊는다. 늙고 노쇄한 육신의 짐을 잠시 키보드 위, 의자 위에 버려두고 수십 년 전 기억 속 신나는 음악에 어깨를 흔들며 허름한 작은 바에서 설레임을 느낀다. 눈 앞에는 쭉 뻗은 허벅지와 단아한 향수 냄새, 바알간 립스틱의 섹시함이 빛나는 아름이가 웃고 있다. 술과 음악에 취한다.

내 감은 눈에서는 눈물이 흐른다. 이별의 순간 너무나 고통스러워 하던 아름의 얼굴이 생생하니까. 찢겨져나가는 고통 속에서 그녀의 행복을 빈다는, 정말로 내가 했던 말인지 머릿 속에서 재구성된 말인지 구분되지 않는 어처구니 없는 멘트가 나의 대사로 작성되어 아주 고이 기억 속 한 켠에 애써 치워버렸던 열정을 되살려 버린다.

음악이 바뀌고 도도도도 세밀한 전자음이 과잉된 감정의 방향을 새롭게 제시한다. 잠시 멈추었던 나의 타이핑은 속도를 더해간다. 주인공은 조금 더 어른이 되어간다. 시시한 삶의 상처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깨달음을 느끼며 독자와 그 감정을 공유한다.

"후우"

긴 호흡과 함께 그렇게 단번에 두 단락을 날려버린다. 아깝지 않다. 좋은 글은 얼마나 많은 파트를 과감히 버릴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고 믿고 있는 노인으로서는 또 다른 흐름으로 문장들을 구성한다.

"어디 보자"

글의 서두가 완성됐다. 독자를 글로 빨아 들일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대가리. 여자의 얼굴, 남자의 키, 가볍게 읽고 또 읽는다. 몇 단어를 수정하여 더 부드럽게 만들고 반복되는 단어를 수정한다. 호흡을 조절하며 숨이 가쁜 사람도 쉽게 읽을 수 있게 조정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읽은 후, 노인은 단숨에 남은 커피를 다 마셔버린다.

"이거 정말 맘에 든다. 내가 봐도 재밌네. 표현이 좋아"

노인은 평생 자기 마음에 드는 글을 많이 써왔다. 애시당초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긴 했어도, 그보다는 자기 만족이 더 큰 목적이었다. 남이 무어라 평가하든 그것은 부차적인 것이었고, 일단 나한테 마음에 드는 글은 그걸로 좋았다.




"좋았어"

글의 초두와 말미를 잇는 복선을 몇 개 뒤늦게 삽입한다. 다행히 초반에 설정해 둔 몇 가지의 포인트가 있어서 확장하기에 좋았다. 일부 내용은 전체 흐름을 위해 대대적인 수정을 거친다. 아까운 부분들이 생겨나지만 그건 아래에 옮겨두고 일단은 과감히 날린다. 그렇게 다듬는다. 직접 대사를 읽어본다.

"흐"

내 호흡에 맞춰 표현을 조정하고, 더욱 현실감을 부여한다. 어느새 아침 햇살이 방 안에 드리우고 남보다 일찍 일어난 노인의 이로움이 더이상 압도적이지 않은 시간이 된다. 아침 식사를 기대하게 되지만 기억해보니 어제 저녁에 마지막 남은 계란 한 알마저 먹었다는 것을 떠올린다. 냉장고 안에는 더이상 단백질이 없다. 자연스럽게 '글의 완결'이라는 목표를 향해 과감히 배고픔이나 허기짐 같은 부가적인 이슈들을 저버리게 된다.

"다 썼나?"

사실 더 다듬자면 한참 더 다듬을 수 있을게다. 그러나 그런 정도의 꼼꼼함은 없다. 노인은 사실 그게 미완의 미학이고, 자기 글의 묘미라고 생각했다. 약간의 빈틈, 아주 약간의 설정충돌. 하지만 그 어느 인간도 철저히 자기 철학대로만 사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삶의 언젠가에는 자기가 한 말을 스스로 거스르고, 그러면서도 아무렇지 않게들 잘만 살아간다. 설정의 충돌이 아니라 진정한 현실감의 부여다.

"쩝"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마우스로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 읽기 시작한다.




혜영과 현지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 주인공에 대한 현지의 마음이 혜영과의 대화를 통해 드러나는 장면. 노인은 그 장면을 들어낸다. 독자의 감정을 극적으로 만들 수 있는 좋은 장면이지만 노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 장면을 지운다.

기십 년 전의 부탁이 떠올랐다. 이렇게 헤어지고 나면, 절대 자기 이야기로는 글 쓰지 말아 달라고 했던 소희. 그렇게 혜영이라는 캐릭터가 사라진다. 글의 많은 부분이 작살난다. 주인공의 초중반부 화려한 일상이 조금 더 무미건조해지고, 부산여행 준비하는 장면에서 혜영이에게 빌린 10만원의 알바비가, 그저 주인공이 저금통 뜯어 만드는 장면으로 바뀐다. 요즘 세상에 저금통이라, 말이 안된다 싶어서 중고 플스3를 파는 장면으로 넣지만 확실히 절절한 맛이 많이 사라진다.

"후우"

하나가 무너지니 연쇄적으로 무너진다. 아름과의 모텔 장면이 무의미 해진다. 혜영이 맛있는거 사먹으라고 챙겨준 알바비 10만원이 아름과의 모텔비로 변하는 장면의 잔인함이 감쇄되어 버린다. 어쩔 수 없이 주인공을 다른 장면에서 괜한 짜증을 내며 후배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나쁜 놈으로 만든다. 이 놈은 욕을 먹어야 한다. 이렇게 자신에게 소중한 무엇을 희생하는 애틋한 로맨티스트가 아니다. 혜영의 캐릭터를 지운 것이 전체 글을 망가뜨렸다. 완성은 지었지만.

"됐어, 이걸로 끝이야"




몇 군데를 수정했는지 모른다. 단언컨데 처음의 완성 초고가 지금의 이것보다 압도적으로 더 흥미로운 작품이다.

"퇴고가 아니라 퇴보를 해버렸구나"

노인은 주인공에게 말을 건다.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했느냐고. 정말 여자에 미쳤던 거냐고. 모처럼의 작품도 그 덕분에 이렇게 이상해지고 말지 않았느냐고 따졌다. 그러자 주인공은 노인의 입을 빌어 대답했다.

"그때는 그랬어"

무엇이 그랬다는지 알듯 모를듯한 대답이었지만 노인은 다시 긴 한숨과 함께 글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리며 작게 중얼 거렸다.

"다 내 잘못이야"




마침내 노인이 글을 올린 것은 어느새 새벽이 된 시간이었다. 무려 20시간의 집필이었다. 물론 중간에 유통기한 3일 지난 식빵 네 조각과 맹물을 먹은 시간, 허리가 너무 아파서 침대에서 세 시간 쪽잠을 잔 시간을 포함해서 말이다. 너무 늦은 시간이기에 댓글이 달리기기까지는 조금 여유가 있을 시간.

불과 하루가 지났을 뿐이지만 노인은 그보다 훨씬 더 늙은 모습이었다. 한층 더 굽은 어깨와 목, 아주 짙게 늘어진 다크서클과 쳐진 어깨가 그에게 쌓인 엄청난 피로를 증명했다. 노인에게 하루종일 쌓인 피로는 젊은이의 한달 수명에 비하면 좋을 그 어떤 것이리라. 노인은 침대까지 가는 것조차도 부담을 느끼며 곧바로 잠에 빠져 들었다. 분명히 일어났을 때 다시 전신의 격렬한 통증을 예상하며.




"참 기가 막히지. 어떻게 노친네가 매번 이런 글을 쓸 수 있는지 몰라"

블로그에 올라온 새 글을 보며 남자가 말했다. 바의 젊은 사장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마음만은 여전히 청춘이어서?"
"참, 하여간 대단해. 아 보면서 나도 눈물 찔끔했다니까. 옛날 생각나서, 참. 나도 그때 그러는게 아니었는데, 참."
"나중에 그 이야기 들려주세요"



그때도 여전히 노인은 오랫동안 빨지 않은 베개에 머리를 묻은 채로 곤히 자고 있었다. 노인은 첫 사랑과의 이별 후, 할아버지 제사 상에서 그녀와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빌던 그때 그 시절의 바보 같은 기억을 꿈으로 꾸고 있었다.

< 끝 >













여난(女難) 소설

"대리님 방금 전에, 뭐라고 하신거에요?"

근무시간. 작은 목소리로 살짝 웃음끼와 당혹스러움이 뒤섞인, 아주 미묘한 표정으로 나에게 속삭이는 소연씨.

"방금 전에요? 내가 뭐라고 했지? 아, 나랑 모티브 안 갈래요? 라고 했죠. 잠 너무 오는데, 커피 한잔 마시고 해요"

그러자 혼자 "아아" 하면서 발을 동동 구르며 웃는 그녀.

"왜요?"

당황해서 내가 묻자 "카페 가서 말씀드릴게요. 모티브 가요" 하며 먼저 일어서는 소연의 뒤를 따르며 지갑부터 챙긴다.




1층의 카페 '모티브'에 내려와서는 같이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씩을 받아들고 테이블을 마주보고 앉았다.

"아니 나는, 갑자기 대리님이 나한테 '나랑 모텔 안 갈래요?' 이러길래, 이거 뭐지? 했죠"

정말로 마시던 커피를 뿜을 뻔 했다.

"아니 무슨 소리에요. 모티브가 어떻게 모텔로 들려요! 이건 음란마귀 드립치기도 뭐할 정도네!"
"맞아요 나 요즘 음란마귀 들렸나봐요. 저번에는 아름 언니가 '유부초밥 먹으러 가자'라고 한걸 '고추…' 아 이건 대리님한테 말하긴 좀 그렇다. 여튼, 요즘 나 좀 그래요"
"일상생활 불가능 수준인데, 대체 왜 그러는거에요"

둘이 낄낄대고 있으려니 아름씨와 선화씨도 어느새 카페로 내려왔다.

"어허! 아니 이 싸람들이 근무시간에 카페에서 이런 땡땡이를?"
"언니들도 마찬가지잖아요"
"응 맞어"
"언니꺼는 내가 주문할게요. 아름 언니 뭐 마실거에요?"
"나 그냥 아아. 아냐 선화야 내 카드로 결제해"

소연, 아름, 선화. 우리 팀원들이다. 같은 여자이건만 "나는 외모도 경쟁력이라고 봐" 하면서 대놓고 외모 보고 뽑는 우리 선 매니저님의 취향에 따라 다들 한 미모 하는 직원들이다. 성격도 쿨하다 못해 형님 같은 그녀들. 물론 그런 만큼 다들 멋진 남자친구들이 있고.

"아니 아까 대리님이 나한테 대뜸 모텔 가자고 해서 깜짝 놀랐잖아."
"뭐?! 아니 대리님!"
"아냐! 무슨 소리야, 소연씨 말을 똑바로 설명해요!"
"어, 사실은 나한테 모티브 가자고 한건데 내가 모텔로 들어서."

소연의 부연에 아름은 한숨을 크게 쉬며 이마를 친다.

"야, 장소연, 진짜 너 왜 그래. 야, 너 남친한테 딱 전해. 다 이게 지금 사랑이 부족해서 그런거니까 만날 때마다 뽀뽀 열 번씩 해달라고"
"아유 언니. 뽀뽀 열 번이 뭐야. 약해, 그런 걸로는 안 돼"

나는 그녀들의 농담에 혼자 피식피식 웃는다. 다들 드립이 장사다. 아름은 내 눈치를 살피며 "대리님도 있는데 그럼 뽀뽀라고 하지 뭐라고 말해" 하며 또 웃는다.

"아 다들 왜들 그래. 진짜 좀 너무하네. 나 사내 고충위에 신고할래요"

내가 너스레를 떨자 소연이 또 한발자국 나선다.

"무슨위요? 나 지금 미쳤나봐, 또 말이 이상하게 들려"
"고'충'위! 사내 고충 위원회"
"아아"

그리고 그제서야 소연의 말을 이해한 아름이 웃으며 그녀의 팔뚝을 때린다.

"진짜 미친거야?"




퇴근 길, 후문 쪽의 주차타워 앞에서 차 꺼내는 것을 기다리고 있으려니 뒤늦게 소연이 나온다.

"어 대리님? 아직 안 가셨어요?"
"아 네. 차 빼느라고. 우리 주차타워 느려도 너무 느려."
"아 맞아요. 저번에 영업팀 조 과장님도 한 소리 하던데. 세상에 무슨 차 하나 빼는데 20분씩 걸린다고, 너무 짜증난다고"
"그러게요. 아 소연씨 집이 사당쪽이라고 했나? 태워줄까요?"

내 제안에 반색하는 소연.

"정말요? 좋아요!"




"우리 팀 다들 어디 산다고 했죠?"
"아름 언니는 건대쪽에 살고, 선화 언니는 목동 쪽이에요. 저는 사당에서 조금만 들어가면 돼요, 이따가 사당역 근처에서 세워주세요. 걸어가면 금방이에요"
"아 그렇구나. 네"

조금 더 가노라니 소연이 묻는다.

"대리님 여자친구 있다고 하셨죠? 몇 살이에요?"
"한 살 어려요. 서른 하나에요. 건축 일하고 있어요"
"건축이요? 설계 뭐 그런거?"
"네"
"와 멋있다"

나도 묻는다.

"소연씨 남자친구는요?"
"동갑인데, 코스포 다녀요. 그래서 일주일에 한번도 볼까말까. 맨날 지방 돌아다니고, 1년에 막 두 세달씩 출장 가고 그래요"
"와 힘들겠다. 그래도 연봉 장난 아니겠는데?"
"연봉도 연봉인데, 원래 집이 좀 살아요. 부모님이 뭐 사업하신다던가? 그럼 뭐해. 내 돈도 아닌걸"
"맛있는거 많이 사달라고 해요"
"그래서 이렇게 살쪘잖아요"
"에이 살은 무슨"

하지만 알고 있다. 수시로 바뀌는 소연의 가방과 구두 중에 상당수가 그녀의 남자친구에게 지분이 있다는 것을. 어쨌든 내 여자친구와 그녀의 남자친구, 결혼 이슈로 이야기가 돌다가 아름씨가 남자친구 쪽 집안의 반대로 결혼에 난항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를 넘어 소연이 자기는 나중에 결혼하면 애를 최소한 둘은 낳고 싶다는 이야기까지 흘러간 무렵, 그녀의 뱃 속에서 꽤나 요란한 꼬르륵 소리가 들려온다.

"어 배고픈가 보네. 나도 배고픈데. 우리 밥 먹고 들어갈래요?"

무안해할 것 같아서 건낸 빈 말인데, 소연은 "좋아요" 하며 가볍게 콜한다.

"저기 골목 앞에 파스타 맛집 있어요. 주인이 이태리에서 유학한 사람이라나봐요"
"올, 본토의 맛"

대학생 때 나름 맛집 파워블로거까지 했다던 소연의 추천이면 기대해 볼만하다 싶었다. 정말 맛있으면 다음에 가희랑 와야겠다고 다짐하며 가게 골목 안쪽 공터에 차를 세웠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보인 노을이 참 예뻤다.




"오 여기 진짜 맛있네. 스튜 정말 맛있다. 고기 스튜 이렇게 잘하는 곳 드문데"

소연이 "그쵸!" 하면서 맞장구를 친다.

"대리님도 은근 맛잘알이야. 미식가야, 저번에 '페이로드' 가서 미슐랭 밥 혼자 먹고 왔다는 이야기 듣고 딱 알아봤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거"
"아니 그냥 그건 그 날 여친이랑 싸워서 그렇게 된거에요"

그 말에 소연이 웃으면서 반박한다.

"아니 보통 사람 같으면 그럼 예약을 취소하지 굳이 가서 혼자 밥 먹는 경우는 없다구요"
"예약 잡느라 고생한게 아까워서"
"그러니까 미식가지. 근데 여친 분 진짜 그거 혼자 먹은거 알면 더 화날걸요? 완전 미쳤다고 할텐데"
"그래서 비밀로 하고 있어요"
"웃겨 진짜"

소연은 신이 나서 이것저것 맛집에 대한 썰과 정보를 푼다. 이 동네 맛집은 어디어디가 있으며, 다음에 여친이랑 꼭 어디어디 가보라는 둥, 자기 남친은 이런거 맛집 찾아다니는거 정말 귀찮아하고 이해 못한다고, 맨날 무슨 탕이나 먹자고 한다고 투덜대며.

"입맛 무난하면 좋죠"
"그렇지도 않아요. 약간 마마보이 끼도 있어서, 아직도 김치는 엄마표 김치 아니면 안 먹어요"
"흐, 나도 스무살 때까지 그랬는데"
"어떻게 고쳤어요?"
"군대 가서"
"아, 내 남친은 군대도 공익 다녀왔어요"

한참을 서로의 남친, 여친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새 우리 서로의 취미로 이야기가 넘어갔다. 소연은 전시나 공연 보러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지난 주에는 무슨 르네상스 위인들 전시를 보러 갔대나.

"갈릴레오 망원경 진짜 큰 거 봤는데 멋있더라구요"
"그렇구나. 나도 전시 같은거 좋아하는데, 좋은 전시 있으면 같이 보러 가요"

말을 하고 나서 뭔가 이상하게 들릴 수 있겠다 싶어서 '남친하고 같이' 하고 말을 덧붙이려다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하게 들릴 것 같아서 굳이 덧붙이지는 않았다.

"꼭 보러가요 꼭"

내가 빈 말을 많이 해서일까, 소연은 '꼭'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와서는 "잘 먹었습니다" 하며 "내일 모레 점심은 제가 쏠게요. 목요일에 선화 언니랑 아름 언니 둘 다 외근이잖아요" 하며 인사를 한다. 이직한 이래 근 삼주일만에 부쩍 가까워진 느낌이 좋다.

"좋아요. 그럼 잘 들어가고, 내일 봐요"
"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대리님"

걸어가면서 생긋 웃고 다시 한번 이쪽을 바라보는 모습이 참 귀여웠다. 차가운 인상의 가희와는 확실히 다른 이미지와 행동.




"응, 저녁은 먹고 들어왔어. 어? 스파게티. 아, 그냥 간만에 땡겨서. 어 그럼, 혼자 먹었지. 어어, 씻고 이따가 연락할게"

가희 성격에 회사 여직원이랑 밥 먹고 들어왔다면 불 같이 화를 낼 것 같아서 괜한 거짓말을 했다. 정작 지는 이 놈 저 놈 신경 거슬리는 놈들이랑 같이 밥 잘만 먹으면서 말이다, 라는 내 안의 핑계를 대며.

[ 소연 : 대리님 나 넘 배불러요ㅋㅋㅋ배 터질 것 같아요 ]

소연의 카톡 메세지. 나도 배가 많이 부르다. 애초에 파스타만 해도 양이 많은데다, 큼지막한 식전 빵에다가 화덕피자 맛있을 것 같다고 피자까지 시켜먹었더니 정말 나도 배 터질 것 같다.

[ 나 : 난 이미 터짐ㅋㅋㅋㅋㅋ ]
[ 소연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여친이 아닌 또래 여자와 이렇게 사담을 나누는 재미. 허튼 생각이 아예 안든다면 그것이야말로 거짓말이리라. 하지만 그저 친해지는 동료 관계일 뿐.




"다녀오겠습니다. 대리님 저희 근데 꼭 복귀해야 되나요? 지금 가면 암만 빨라도 오후 5시 전에는 못 오지 싶은데. 꼭 복귀해야 되요?"
"음, 모르겠네요. 차장님이랑 부장님 지금 다 안 계시네. 두 분도 아마 오늘 복귀 안 하실거 같은데. 그럼 그냥 거기 끝날 무렵해서 전화 한 통 주세요. 그냥 복귀 안 하고 바로 집에 가도 될 거에요. 뭐 크게 뭔 일 있겠어요? 끝나면 거기서 바로 퇴근해요"
"오? 그러다 내일 혼나면요"
"내가 책임질게요"
"정말요!?"
"끽해야 시말서 한 장 밖에 더 쓰겠어요?"
"올"

아름과 선화가 "올~" 하면서 엄지를 치켜들지만 사실 어제 물어봤다. 그냥 현지 퇴근하라는 허락 받아놨다. 소연도 옆에서 들었고. 그 모습을 보던 소연이 "어제 대리님이 물어봤어요. 그냥 부장님이 바로 퇴근하랬어요" 하고 끼어든다.

"아 뭐야, 난 왠일로 우리 대리님이 멋있나 했네"

아름의 독설에 "뭐라고? '왠'일'로'?" 하며 되묻자 그녀들은 그저 웃으며 "다녀오겠습니다" 하며 외근을 나선다.




"온지 얼마 안 됐는데, 여직원들하고 잘 어울리네"

현장에 잠깐 가야하는데 차가 말썽이라며 금요일에 차 좀 빌릴 수 있냐는 가희의 전화를 받느라고 1층으로 나온 차, 담배를 피우러 내려 와 있던 총무팀 박 과장님이 말을 건다.

"아 예. 안녕하세요. 네, 그냥 뭐, 어린 친구들이라 같이 일하기 재밌네요. 어려운 것도 있지만"
"흐, 좋을 때지. 아 잠깐만, 김 대리 여자친구 있나? 없으면 저 중에 하나 골라서 만나면 되잖아?"

아, 이런 꼰대.

"아니요 아니요, 여자친구 있습니다. 큰일나요. 그런 말씀 여자친구가 실수로라도 들었다가는 저 죽어요"

일부러 괜한 오바를 했다. 그러자 그는 히죽 웃고는 "에이, 김 대리 여친한테 꽉 잡혀지내네. 장가가면 바람도 못 피우겠어" 하고는 껄껄 웃는다. 여직원들과 즐겁게 일하는 모습에서 저런 부류의 꼰대들이 느낄 어떤 시샘. 그 부분에서 흘러나올 묘한 짖궂음을 그런 식으로 풀어준다.

"그럼 수고해요. 점심 맛있게 먹고"
"네, 과장님도 화이팅입니다"
"어이~"




점심시간. 오늘따라 소연이 왠지 화장에도 머리에도 옷에도 힘을 좀 준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내 착각일까.

"오늘 끝나고 어디 가요?"
"아니요, 바로 집에 가요"
"근데 오늘 뭔가 좀 멋있는데?"

내 말에 픽 웃은 소연이 "대리님이랑 단 둘이 점심 먹으니까요" 하고 농담을 건낸다. 농담이지만 기분 좋다. 이거야말로 박과장님에게 내가 한 말처럼, 소연이 알았다가는 "죽을 일" 지도 모를 일이지만.

"뭐 먹을까요?"

내 질문에 소연이 "저번에 아름이 언니랑 찾은 초밥집 있는데 거기가요. 맛있어요" 하며 안내한다.




"나 사실 좀 고민 있는데, 대리님한테 물어봐도 되요?"
"뭐든"

고개를 끄덕이자 소연이 잠시 고민하는 듯 하다가 말한다. 인당 18,000원짜리 초밥 세트가 나왔다. 직장인의 점심식사치고는 살짝 과하지만, 사실 구성으로 치자면 그저 그렇다. 단지 이 동네 가게 중에서는 그래도 그나마 먹을만한 스시야니까.

"지금 남친이 일하는 회사에, 좀 신경쓰이는 여자가 있는데요오"
"오우"

…그렇고 그런 이야기. 소연의 남친 주변에 여자가 붙은 것 같다는 이야기다. 다만 이미 예전에 한번 어설프게 의심했다가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어서 자기만 이상한 여자가 됐었는데, 요즘은 어째 아무리 생각해도 의심스럽다는 것.

"소연씨 그런데 원래 의심이라는게, 한번 꼬리에 꼬리를 물면 기가 막히게도 맞아 떨어져요. 진짜 그런 거 같다는 생각만 들고, 아귀가 착착 맞아 떨어지는 것만 같고. 원래 그래요. 이걸 전문용어로 뭐라고 하던데? 뭐래더라, 확증편향! 맞어. 한번 의심하면 그런 쪽으로만 뇌가 정보를 받아들인다나?"
"맞아요…근데 이건 진짜 좀 아… 대리님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죠?"
"알죠, 당연히"

머리가 꽤 복잡해보이는 그녀.

"여자의 촉, 남자의 감, 뭐 이런 이야기들 하고… 실제로 오래 만나온 커플은 그게 정확히 뭔지는 몰라도 이상한 낌새를 느끼면 바로 알아채잖아요. 어? 얘가 이런 애가 아닌데 오늘 왜 이렇게 자꾸 전화를 빨리 끊으려고 하지? 얘가 이 시간에 잔다고? 얘 목소리가 왜 이러지? 뭐 이런거부터… 뭐 안하던 짓을 한다거나, 그럴 시간이 아닌데 평소와 행동이 좀 많이 다르다던가. 다 느끼죠. 분명히 감은 무시 못하죠. 근데… 의심부터 하면 결국 오해만 쌓여요. 진짜 만에 하나 아니면 나만 완전 이상한 사람 되는거고."
"하…"

이 기름지고 맛나보이는 초밥을 앞에 두고 한숨만 길게 쉬는 소연.

"그냥 솔직하게 이야기를 해봐요. 만나서, 나 요즘 너 때문에 이러이러해서 엄청 신경 쓰인다, 그러니까 내 말 이상하게만 듣지 말고, 조금 진지하게 이야기 해달라고"
"왜 그런 이야기 안 해봤겠어요. 절대 그런거 아니라는데 뭐라고 하겠어요. 오히려 왜 또 그러냐는데"

하긴 그렇겠지.

"그럼 그냥 완전 믿어요. 믿음이 있으니까 만나온 거잖아요. 그리고 솔직히 바람 피우는 사람 많긴 한데, 또 의외로 드물기도 한게 바람이니까. 오해겠지, 하고 묻어두세요 그냥. 애초에 바람은 교통사고 같은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나 교통사고 두 번이나 났었는데"
"세 번은 안 나겠죠"

그 말에 어이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린 소연.

"얼른 먹어요. 이러다 생선 다 밥에 눌어 붙겠어요"
"대리님도 얼른 드세요. 고마워요, 이런 이야기 들어줘서"




"그런데 우리 회사도 너무 웃기지 않아요? 아무리 그냥 인사차 서류만 받아 오는거래도 사원급 두 명 달랑 보내는게 어딨어. 너무 막장이야. 내가 그 회사 사장이면 화날거 같아"
"내가 그 회사 사장이면, 아름씨 선화씨 둘이 오면 되게 좋아할거 같은데"

소연의 중얼거림에 내 심드렁한 한 마디. 그리고 그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기획팀 최 주임이 혼자 웃음 터뜨린다.

"와, 대리님 진짜 솔직하시다. 인정"
"아 남자들이란. 내가 이래서 못 믿어"

나와 최 주임을 보며 혀를 차며 손가락질 하는 소연.

"솔직한게 최고에요."

묘하게 뼈있는 한 마디씩을 주고 받은 우리는 다시 모니터를 바라본다. 하지만 소연은 자꾸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며 쉽게 집중하지 못한다.




"어, 대리님"
"아, 소연씨! 같이 갈래요? 태워줄게요. 같이 타고 가요"

비구름에 어두워진 퇴근 길, 주차 타워 옆에 서있노라니 이번에도 소연씨를 만났다. 솔직히 '괜찮아요' 할 줄 알았는데 이번에도 그녀는 스스럼이 없이 "고마워요 대리님" 하면서 내 옆에 선다. 정말 이제 빈 말은 하지 말아야겠다.

"하루종일 집중 못 하던데. 그렇게 불안해요?"
"네"

많이 좋아하는구나.

"소연씨가 그렇게 걱정하는거, 남자친구도 알아요?"

아, 이런. 괜한 질문을 했다 싶었다. 대답이 없다. 한참을 말이 없던 소연은 "대리님 말대로, 그냥 믿기로 했어요. 또 바람 나면 그땐 정말 내 잘못이겠죠. 내가 뭔가 부족한 사람이니까 그런 거겠죠" 하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그것대로 좀 아닌데. 그래서 나는 빈 말 하지 말자는 1분 전의 다짐을 뒤로 하고, 또 실없는 소리를 했다. 꽤나 위험한 실없는 소리를.

"정 그럼 먼저 바람 피워버려요. 그럼 안 억울하잖아요"

소연은 입을 삐죽 내밀며 "대리님, 나 화나면 무서워요" 하며 주먹을 움켜쥔다. 귀엽군.




오늘따라 차가 조금 막힌다.

"아까 아름 언니랑 통화했거든요? 지금 거기서 퇴근한다고"
"아아 맞다. 네, 뭐래요? 일은 잘 됐대요?"
"네. 가니까 거기 사장님이 회 사줬대요. 이미 밥 먹었는데도 오후 3시에 회를."
"헐! 진짜 내 말이 맞네. 이쁜 여직원들 가니까 그러는거봐. 와"

또 아차 싶었다. 가벼운 농담이라지만 결과적으로 자꾸 말 실수를 하는 느낌이다. 남자친구가 예쁜 직장동료에 눈이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는 의심을 하고 있는 사람 앞에서 외모에 흔들리는 남자 이야기를 자꾸하다니. 나는 헛기침을 했다.

"근데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왜요?"

아까부터 침체된 기분의 그녀가 처음으로 다소 밝은 톤의 목소리로 묻는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많이 걱정한 일들이, 실제로 안 좋게 벌어지는 일들은 거의 없더라구요. 진짜 안 좋은 일들은, 꼭 전혀 의심도 안 할 때 터지는 법이니까"

내 말에 대답이 없던 소연은 잠시 후 "고마워요 대리님. 자꾸 제가 신경쓰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하고 대답해왔다. 조금은 도움이 된 것 같아서 기뻤다. 그리고 그 무렵부터 막혔던 길도 조금씩 뚫리기 시작했다.




"어제 대리님 조언대로 그냥 완전 직설적으로 물어봤는데, 내가 막 말하다가 우니까 남친이 그 자리에서 카톡한거 다 보여주고 막… 그래서 나 다 풀렸어요"
"오 레알? 대박이네"

환해진 얼굴의 소연, 그리고 어리둥절한 아름과 선화.

"뭐야, 둘이 이제 연애상담까지 해? 대리님 완전 그거다. 그 뭐지? 친구 미만 연인 이상"
"반대 아냐?"

아름의 말에 선화가 치고 들어온다.

"남친하고 못하는 연애상담은 하는데, 막 친구보다도 못한 사이. 완전 딱인데요?"
"뭐야 말은 그럴 듯 한데, 여튼 어감 이상해, 구려"
"어 이상하긴 해요. 맞어, 나 저번에 인스타 하는데 대놓고 프로필에 FWB 써놓은 남자가…"
"악! 무슨 틸더야 뭐야"

아침의 카페. 다들 깔깔대며 커피 한잔씩을 들고 사무실로 올라간다. 수다를 떨며 환하게 웃는 그녀들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차에 그 머리카락 누구거야?"

금요일 밤, 차를 빌려쓴 가희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아, 이런.

"무슨 머리카락?"

당연히 소연의 머리카락인 것을 알면서도 잠깐 시간을 벌어본다. 솔직히 말하는게 좋을까, 구라를 치는게 좋을까. 이래서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는게 좋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나는 그게 잘 안된다. 망할.

"이거"

가희가 머리카락을 내민다. 그걸 또 가지고 왔니. 음, 색으로 보나 길이로 보나 무조건 소연의 머리카락이다.

"아, 우리 회사 여직원"
"뭐?"
"아 무슨 그런거 아냐. 저번에 회사 여직원이 자기 남친이랑 막 사이 별로라서, 엄청 정신 못 차리길래 퇴근하면서 잠깐 같은 방향이라서 데려다 준거야"
"오빠가 그 여자를 왜 챙기는데?"
"아 부하직원이니까. 하루종일 일도 못하고 정신 못 차리니까 내가 그럼 사수니까 챙겨야지. 아 그리고 걔 남친도 있어."
"오빠 지금 이직한지 얼마나 됐다고 여자 문제로 나 짜증나게 만들어? 그리고 언제 걔가 오빠 차에 탔는데?"
"아 그, 화요일에"
"화요일 언제"

후, 따지기의 무한루프에 빠져들어가는 느낌이다.

"아 화요일 퇴근길에"
"스파게티 먹은 날? 그 날 혼자 먹었다며"

이런건 쓸데없이 기억력이 좋다. 작년에는 내 생일까지 까먹은 주제에.

"걔 데려다 주면서 달래주고 오는 길에 밥 혼자 먹었다고"
"하"

진실의 함정에 빠질 뻔 했지만 나는 곧바로 구라의 2단 기어를 집어넣고 간신히 빠져나온다. 하지만 그 앞에는 진실의 과속방지턱, 블랙박스가 있었다.

"블박 까봐"
"야, 이가희"
"까보라고"

정색하는 표정의 이가희. 암만 생각해도 얘 학교 다닐 때 껌 좀 씹었을 것 같다.

"에효"

나는 가희를 데리고는 주차장까지 내려와서 기어코 그 자리에서 블랙박스를 조작했다. 화요일, 약 30분 남짓한 시간의 운행시간 중 몇 분간의 녹화된 영상들이 있었고 그 조그마한 블박의 스피커로는 대화가 잘 들리지 않았지만, 적어도 남친 운운하는 내용은 분명히 있었기에 적어도 내 말에서 상당한 부분의 의혹이 조각되어 가희는 심문을 중단했다.

"진짜 왜 그래? 뭐 좋은 아는 오빠 노릇이라도 하고 싶은거야? 회사에서?'

짜증은 여전히 상당한 수위로 배어있지만 적어도 아까만큼의 흥분한 기색은 다소 누그러든 눈치다. 사실 바람을 피운다는 전제라면 남친이 있던 없던, 오히려 그게 더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가희의 평가로는 내가 '골키퍼까지 제치고 골을 넣는' 수준의 골게터가 아니라는 것이겠지.

"아니, 너야말로 이상하게 생각하냐. 너는 회사 사람들이랑 상담 같은거 안해?"
"안해. 그리고 무슨 상담을 해도 무슨 연애상담 같은걸 하냐고. 오빠가 무슨 대학생이야? 동아리 회장이야?"
"참나"

동아리 회장이라는 말에 솔직히 공감이 가서 나 혼자 피식 웃음이 터졌다.

"왜 웃는데"
"동아리 회장 맞는거 같아서"

그리고 그 말에 가희도 할 말이 없었던지 "참" 하고 허탈하게 입맛을 다시다가 지도 웃겼는지 웃음을 흘린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는 적당한 진심과 적당한 사과를 섞어 말한다.

"미안해, 여튼 또래 그룹이라서 더 그런거 같아. 내가 좀 주책 부렸나봐. 안 그럴게, 선 잘 그을게. 그리고 넌 날 모르냐? 내가 미쳤다고 그 불여우 같은 것들이랑 연애질을 해? 그리고 너가 백배는 이뻐. 안심해도 돼"
"말 같지도 않는 말로 어설프게 넘기려고 하지마. 그리고 그 기집애 사진 좀 보여줘"
"사진이 어딨어"
"휴대폰에 번호 있을거 아냐. 그럼 카톡이라도 추가되어 있을거고"
"하 징그럽다 징그러워"

나는 당당하게 휴대폰을 내민다. 그러나 그 순간 머리 끝까지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꼈다.

'아뿔싸'

서로 배부르다고 이야기 나눈 카톡이 있지 않은가. 그것도 화요일에. 아 젠장, 진짜 뭣도 아닌 구라 하나로 이렇게까지 몰리게 되나. 짜증이 난다. 그냥 앞으로는 공기만 같이 쳐마셔도 같이 쳐먹었다고 솔직하게 불어야겠다.

"걔 이름이 뭔데?"

휴대폰을 뒤적이던 가희가 묻는다. 일이 괜히 더 커지기 전에 나는 서둘러 다른 이름을 댄다.

"윤선화"

아름이나 소연과는 그래도 제법 자주 이야기를 나누는데, 특히나 더 도도한 느낌의 선화는 그닥 카톡을 나눈게 없다.

"얘 머리카락 까만색인데?"

치밀하게 파고 들지만 "예전 사진이야. 지금은 염색했어" 하고 둘러댄다. 가희는 다소 찜찜한 듯 했지만 어쨌든 더이상은 파고 들지 않는다.

"하여간 한번만 더 차에 딴 년 머리카락 떨어져 있고 막 그랬단 봐. 그냥 그때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잘라 버릴거야"
"뭘 잘라"
"알면서 뭘 물어"



…불금이니 자고 가라고 했지만, 내일 또 현장 가야된다면서 피곤하다고 기어코 집으로 가버린 가희. 지난 주에도 현장 핑계대고 나 주말 내내 외롭게 한 주제에.

"후"

어쨌든 간만에 심장 두근거린 하루였다. 씻고 나니 가희의 카톡 상태명이 "지켜본다" 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껄껄 웃음을 터뜨리며 휴대폰을 던져놓고 침대에 누웠다.

"으 시발"

아주 약간의 설레임이 그만 본전도 못 찾고 아주 간만 콩알만해졌다. 총무팀 박 과장님이랑 농담처럼 한 이야기가 현실이 됐다. 망할. 하지만 그래도 나는 소연과 함께 나누었던 갈릴레이 이야기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고추는 선다'

- 끝 -

생각보다 짧은 시간, 100권 판매 돌파! 망상


구매해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나이트 드라이브 소설



새벽의 도로. 그럴싸한 드라이브 뮤직과 함께 나와 주리의 말이 잠시 끊어진다. 주리의 휴대폰이 간간히 빛나고, 악셀을 밟는 나의 발이 깊어질 무렵 나는 서서히 피곤과 밤에 취하기 시작한다.

I want to drive you through the night, down the hills
I'm gonna tell you something you don't want to hear
I'm gonna show you where it's dark, but have no fear

에어컨 바람이 싸늘함을 넘어 추위까지 느끼게 하지만 나도 주리도 에어컨을 끄지 않는다. 온 팔에 돋아나는 닭살과 함께 어느새 속도는 위험 수준을 넘기고야 만다.

"조금 줄여요"

주리의 핀찬에 그제서야 속도를 줄이고, 잠시 유치하게 혼자만의 기분에 취했던 바보 같은 나를 속으로 책망하며 "우리 뭐라도 마실까" 하고 별로 마음에도 없는 제안을 한다. 주리는 대답 대신 휴대폰을 갑자기 나에게 들어보인다.

[ 재호빠 ]

주리의 남자친구, 그리고 나의 오랜 동업자 재호. 나는 대답 대신 차의 속도를 높인다. 사실 목적지도 없으면서.






나이트 드라이브 






'첫눈에 반한다'라는 말을 나는 이제껏 외형에 관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외적으로 그리 특별할 것이 없는 나로서는 결코 겪을 리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주리의 견해는 달랐다.

"정말로 한번도 여자한테 잘 생겼다는 말 들어본 적 없어요?"
"그만해라잉"
"으악, 진짠데?"

재호가 거래처에 잠깐 다녀오겠다며 나간 사이에 가게에 방문한 그의 여자친구 주리. 한 시간 정도의 빈 시간 동안 우리는 다소간의 어색함 속에서도 빠르게 친해졌고 7살의 나이 차에도 오래 만난 친구처럼 금방 편히 웃을 수 있었다.

"저 오빠 재밌어"
"그치? 내가 맨날 재밌다고 했잖아. 엄청 웃기다고"
"야, 사람 앞에 놓고 쑥덕거리지 마라?"

재호의 등장이 아쉽게 느껴진 순간 등줄기를 타고 흐른 묘한 죄책감에 나는 혼자 실없이 웃었고, 어째서인지 나를 보며 또 묘하게 웃고 있던 주리의 모습에 묘한 가능성을 느낀 나.

그것은 평생 몇 번 밖에 느낀 적 없는, 아주 오래간만의 어떤 솔직하면서도 복잡한 감정이었다.

물 빠진 스키니 청바지에 연보라색 트랙탑, 블루블랙으로 염색한 아주 짧은 숏커트. 별로 대단할 것도 없고, 내가 어울리기에도 지나치게 어린 나이. 그저 재호와 만나다보니 우리 또래와도 잘 어울려주는구나 하고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려고 해도 어느새 카톡 메세지로 다가온 그녀.

[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
[ 재호빠 폰ㅋ 뭐해요? 아직 가게에요? ]
[ ㅇ ]
[ 뭐야 성의없게 ]
[ ㅋ ]
[ 이따 놀러가도 되요? ]

재호가 대학원 가는 날마다 꼭 연락을 미리하고 그를 피해 가게에 나타난 그녀. 세번째의 등장에 나는 혼자 속 끓이다 못해 결국 먼저 묻고 말았다.

"나랑 따로 동업하고 싶냐? 왜 꼭 내 동업자 없을 때 놀러오는데?"

직구로 묻고 싶은 마음을 돌리고 돌리고 돌려 비겁하게 물었지만 주리의 대답은 꽤나 직설적이었다.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거에요?"




10시 갓 넘긴 시점에 일찍 가게 문을 닫고 근처 분식집으로 자리를 옮긴 우리. 아니 그녀와 나. 둘 다 저녁을 거른 상태였기 때문에 떡튀순을 주문하려고 했지만 주리는 라면으로 족하다고 했다.

"아니 내가 먹고 싶다고"
"그냥 오빠도 라면 먹어요"

기어코 나에게도 라면을 강요한 그녀는 서로가 라면을 반쯤 먹었을 무렵 툭 털어놓듯이 말했다.

"오빠가 좋아요"

사실 나는 이런 류의 여자애들을 좀 겪어본 적이 있다. 기도 승도 전도 없이 갑자기 툭툭 자석 달라붙듯이 마음을 부딪혀 오는 아이들. 내가 대단한 뭘 한 것도 아닌데, 혼자 하트 뿅뿅이 되어서는. 심지어 남친까지, 그것도 오랜 동업자인 친구를 달고 부딪혀 온 경우는 처음이었지만.

"내가 널 만나면 재호가 날 죽이려고 할걸"

나는 '내가 널 만나지 말아야 할 내 안의 이유' 대신 외부의 이유를 들어 거절 아닌 거절을 했다. 확실히 단언컨데 나는 비겁한 타입의 인간이다.

"그럼 내가 재호 오빠 정리하면 되잖아요"
"그런 걸 정리라고 할 수 있냐?"
"아"

짜증난다는 류의 인상을 쓰는 주리. 아, 그렇구나. 아마 확신하건데, 재호 역시 주리가 저 코 끝을 찡그린 표정에 반했을거라 생각했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럼 말죠 뭐. 이렇게만 만나요. 가끔"

'그럼 말죠' 라는 말에 느낀 찰나의 아쉬움과 후회. 그리고 '이렇게만' 이라는 말에서 느낀 안도감과 더러운 충동.

"아니야"

아무리 순간의 충동으로 살아온 나였지만, 사랑 아닌 여자 때문에 손에 쥔 많은 것을 송두리채 박살내 버리기에는 내 나이도 이제는 어린 나이가 아니다.

그러자 말없이 라면 국물을 들이킨 그녀. 꿀꺽 꿀꺽 뭐야, 안 짜나, 꿀꺽. 무슨 라면 국물을 시원한 냉국이라도 되는 양 들이킨 주리는 그릇을 내려놓고는 "겁쟁이" 라면서 나를 몰아세웠다. 맞는 말이다. 겁쟁이.

아예 여지를 안 준 것도 아니고, 주리가 올 때마다 설레이는 표정으로 이것저것 시키지도 않은 음료를 내어주고 지난 십수 년간 여자 꼬실 때마다 써온 수많은 마음의 테크닉을 활용하가며 최대한 그녀를 기쁘게 한 나.

몰랐을 리가 없다.

재호 앞에서였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표현들을 통해, 잔잔하고 담백하면서도 은은하게 배어드는 감정의 얽힘을 유도한 나. 아마도 재호 같은 타입과는 다른 류의 어떤 부드러운 재미를 느꼈을 것이다.

"정말 후회 안 할 자신 있어요?"

조금은 귀여움까지 느껴지는 도발. 그리고 솔직하게 "아니, 당연히 후회할거야" 라며 답을 하는 나의 여유.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매번 이런 타입의 여자애들과 엮이곤 했다. 정말 매번.

곰곰히 생각해보건데 그녀들이 '남자'라는 성별에게서 항상 느껴온 어떤 전형성에서 묘하게 탈피한 모습에서 신선함들을 느낀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지만 달리 말하면 그것은 그만큼 순간의 콩깍지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너는?"

우습지만 나의 이 역질문에 꼬리 내린 애들은 한 명도 없다. 단 한 명도. 그리고 비겁한 나는 "그럼 니가 선택한 거니까, 절대로 후회하지마" 라는 말과 함께 그녀들을 집으로 들이곤 했지. 쓰레기처럼.




나의 08년식 랜서 에볼루션를 본 주리는 "와 차 진짜 못 생겼다" 하면서 아저씨 차라고 놀려댔다. 연식을 듣고는 헛웃음을 짓기까지.

"야, 그래도 이거 좋은 차야. 진짜로"
"수리비가 더 들어갈거 같은데"

아픈 구석을 찔렸지만 어쨌든 나는 변명 대신 여유있는 드라이브로 밤의 도로를 주행하기 시작했다. 답답함 도심을 벗어나 자유로와 통일로를 거쳐 다시 차를 돌려 인천공항 고속도로를 달렸다. 중간에 기름을 넣고 조금 오버했나 생각할 무렵 주리가 말했다.

"드라이브하니까 좋다"
"조금만 더 달리자"

그리고는 드디어 김포 어느 켠까지 다시 차를 몰고 와서는 차를 세웠다.

"안 졸려?"

슬슬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하는 무의미한 드라이브. 이게 뭘까. 연애도 아니고, 사랑의 도피도 아니고.

"오빠는 졸려요?"
"조금"
"그럼 잠깐 눈 붙여요"

창문을 내리고 어느새 완연한 가을의 날씨를 느끼게 하는 선선한 공기를 폐에 채우는 것도 잠시, 주리는 차에서 내려 담배에 불을 붙였다.

"오빠는 담배 안 피워요?"
"끊었어"
"정말요? 어떻게 사람이 담배를 끊어요?"
"난 끊을 수 있어. 섹스도 끊었어"

내 아저씨 같은 농담에 푸푸하며 실없이 웃는 주리.

"끊은게 아니라 끊어진거 아니에요? 아니 아예 이제는 잘 안서나? 아 그래서 담배 끊은거?"
"야"

슥 들이대보는데 한술 더 뜨며 치고 들어오는게 재밌다. 이런 느낌 얼마만인가. 하지만 난 찬물을 또 끼얹고야 만다.

"근데 너 재호랑은 뭐 문제 있어?"

그 말에 어깨를 으쓱한 주리는 담배를 다시 한 모금 깊게 빨아들였다.

"남 탓 하고 싶은거에요?"

역시 비겁했나.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는 않다. 너 앞에서는.

"그냥, 궁금해서"

사방에서 들려오는 가을 벌레들의 오케스트라. 주리는 머리를 쓸어올리며 말했다.

"모르겠어요. 나는 그냥 편하게 만나고 싶은건데, 재호 오빠는 자꾸 진지해지니까. 그래서 더 그런 것도 같고. 그리고 그런 걸 떠나서 오빠 같은 사람 궁금해서요"
"뭐가?"
"평생 결혼 안 할 거 같은 사람. 누가 뭐라고 안 하면 진짜로 인생에 계획 같은거 하나도 안 정하고 대충 막 살 거 같은 사람"
"내가 그런 이미지야?"
"아니에요?"

모르겠다. 어쩌면 이러다가, 아니 매우 높은 확률로 평생 독신은 각오하고 있었지만, 인생에 계획도 없이 살았던가. 분명 예전에는 아니었는데. 글쎄. 그런지도 모르지.

"모르겠네"
"근데 나도 그래요. 나도 꼭 그렇게 막 계획 따라서 살아야 되나 싶기도 하고. 그럴 나이가 아니라는건 아는데, 계획 따라 사는게 무슨 의미인가 싶고. 그럼 뭐가 크게 다른가 싶고. 안 그래요?"

나도 차에서 내려 밤의 가을 바람을 맞이하고 있었다. 때 아닌 인생 상담. 잘만 유도하면 이 일탈을 꿈꾸는 어린 양을 성실한 한 남자의 품으로 다시 곱게 돌려보낼 수도 있고, 또 모든 것을 파멸 속으로 날려버릴 것이 분명한 더럽고 짜릿한 인연 속으로 떠날 수도 있는 이 기묘한 갈림길에서 나는 주리의 얼굴을 달빛 아래서 또 보고야 만다.

이름도 기억 안 나는 고등학교 때의 역사 선생님이 그랬다. 절대로 달빛 아래에서 여자와 오래 이야기 하지 말라고. 천하의 못생긴 여자도 이뻐 보인다고. 그래서 자기가 평생 집에 들어갈 때마다 후회하며 살고 있다고. 아재식 쓰레기 농담 같은 이야기를 진지하게 신신당부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나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또 어기고야 만다. 하물며 주리만큼 예쁜 여자애라서야.

"주리야"

조금 운을 길게 뗀 어색한 부름. 분위기를 잡을 생각이었지만, 연애 감각이 녹슨 탓일까 내 방식이 후져진 것일까, 너무 뻔한 패턴에 주리는 피식 웃고 만다.

"우리 이제 어떻게 해요?"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해두고 싶어하는 주리의 질문. 그리고 여기까지 와서도 흘낏 손목시계의 시간을 확인하며 내적갈등에 대한 변명을 찾아보는 나.

"가자"

어디로 가냐는 주리의 연이은 질문에 나는 "어디긴, 자러 가야지. 안 졸려?" 하며 그녀를 차에 태운다. 어느새 밤 12시 반이 넘었다. 나는 서울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조금 눈이 뻑뻑해지는 것을 느끼며 음악을 튼다.



새벽의 도로. 그럴싸한 드라이브 뮤직과 함께 나와 주리의 말이 잠시 끊어진다. 주리의 휴대폰이 간간히 빛나고, 악셀을 밟는 나의 발이 깊어질 무렵 나는 서서히 밤에 취하기 시작한다.

I want to drive you through the night, down the hills
I'm gonna tell you something you don't want to hear
I'm gonna show you where it's dark, but have no fear

에어컨 바람이 싸늘함을 넘어 추위까지 느끼게 하지만 나도 주리도 에어컨을 끄지 않는다. 온 팔에 돋아나는 닭살과 함께 어느새 속도는 위험 수준을 넘기고야 만다.

"조금 줄여요"

주리의 핀찬에 그제서야 속도를 줄이고, 잠시 유치하게 혼자만의 기분에 취했던 바보 같은 나를 속으로 책망하며 "우리 뭐라도 마실까" 하고 별로 마음에도 없는 제안을 한다. 주리는 대답 대신 휴대폰을 갑자기 나에게 들어보인다.

[ 재호빠 ]

주리의 남자친구, 그리고 나의 오랜 동업자 재호. 나는 대답 대신 차의 속도를 높인다. 사실 목적지도 없으면서.




"내가 뭐 이 시간에 잘 사람인가? 어 잠깐 담배 사러 나왔어. 우리 윗 집 그 미친 년 땜에 이제 집에서 담배도 못 피우잖아. 응, 어. 가을이라 그런지 날씨 좋네. 오빠도 피곤하지. 응? 아니. 응, 그럼. 나도. 어, 어어, 그럼 잘 자"

모텔 주차장 앞. 차에서 내려 재호와의 짧은 통화를 마친 주리는 다시 나의 안색을 살핀다.

"화난 거에요?"
"아니"
"근데 표정이 왜 그래요"
"이 나이 쳐먹고 뒷감당 안 되는 짓을 또 벌이는 것 같아서"

또 라는 말에 푸푸하고 웃은 주리는 "올~ 처음이 아니시다?" 하며 내 옆구리를 푹 찌른다. 아주 오래 전의 일이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바뀐 입장이긴 했지만. 나는 머쓱하게 웃고는 주리의 손목을 잡았다. 그래, 길게 생각할 것 없다. 굴러 들어오는 떡을 거부할 이유가 없다.

"겁나요?"

솔직히 말해서 나 같은 타입의 인간은 세상에 별로 겁나는 것이 없다. 정말로. 아마도 주리도 마찬가지이리라. 그렇다고 이 망설임이 도덕율에 의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아니"

2억 2천만원짜리 섹스를 하게 될까봐 겁난다는 드립을 치고 싶었지만, 아무리 내 연애세포가 다 죽었다 해도 그 정도는 아니다. 물론 재호의 투자금 2억 2천만원이 떠오른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망설임은 어느새 주리의 손깍지가 날려버렸다.

"이제 고민 그만해요 고만"

그 말은, 재호가 평소 즐겨쓰던 말이라는 사실에 혼자 속으로 히죽 웃으며, 그렇다면 나는 어떤 말, 어떤 생각, 어떤 행동을 주리에게 흔적처럼 남기게 될까를 생각했다. 또 주리는 어떤 흔적을 나에게 남기게 될까를 생각하며.

- 끝 -

방구석 황제 소설

그는 스스로를 황제라고 칭했다. 6.5평 원룸 안에도 각 성의 관료들을 임명했으며 하늘 아래 부여된 모든 권력을 휘두르곤 했다.

"어찌하여 이리도 궁성이 어수선한 것이냐!"
"폐하, 죽을 죄를 지었사옵나이다, 즉시 치우도록 하겠사옵나이다"
"짐이 오늘 은혜를 베풀 것인즉, 즉각 청결히 치우도록 하라!"
"예! 폐하!"

…물론 저 모든 대사는 혼잣말이다. 혼자 무거운 음성으로 역정을 내고, 혼자 간들어진 음성으로 허둥지둥 대는 것이다. 즉 그는 황제이자 대소신료이었으며 백성이었다. 가장 위대한 자이자 가장 미천한 자이기도 했다. 오늘도 그는 혼자 크게 화를 낸 뒤 궁시렁대며 걸레질을 시작했다. 그때였다.

[ SB 알림 : 9월 5일 11:13 58091-**-*****213 새서민일자리지원 150,000원 입금, 잔액 152,200원 ]

띠링하는 알림과 함께 백수 청장년들을 위한 국가 복지 지원금이 입금되었다. 그는 뛸듯이 기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했다.

"부어라! 마셔라! 오늘은 좋은 날이 아니더냐, 왜 이리 풍악소리가 작은게냐, 풍악을 울려라, 풍악을 울려! 여봐라, 서둘러 대취타를 연주하라!"
"부로바, 대취타 연주해줘"

[ 베이버 뮤직에서 국립국악단, 대취타를 재생하겠습니다 ]

빠아아아~애애앵~

풍악이 울리기 시작하자 그는 진정으로 대취타에 맞춰 격렬히 춤을 추기 시작했다. 물론 박자도 분위기도 맞지 않는 엉터리 율동이었지만 알게 뭔가. 그는 황제인데.

"동방예의지국에서 황제의 나라로 조공을 보내와 이리도 국고가 풍족해지니 실로 기쁘구나, 태평성대로다 태평성대야, 이 모두 짐의 요순치세 덕분 아닌가! 좋다 오늘은 이 나라 만 백성에게 짐이 큰 포상을 내도록 하겠노라"
"폐하,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역시 그는 혼자 기분 내고 혼자 감읍하며 스스로이자 만 백성을 위한 거대한 축제를 계획했다.

"여보세요? 네, 여기 성운하우스 302호실인데요, 네, 후라이드 양념 반반에 콜라 세트로 해서 하나 보내주세요. 카드 결제할게요. 아 그리고 양념 좀 많이 부탁 드릴게요 네네 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고 그는 콧노래를 불렀다. 지난 달, 알바자리에서 짤린 뒤로 남은 돈도 똑 떨어진 상황에서 때마침 공돈이 들어왔다. 이거 다 쓰고 나면 이제는 진짜 뭘로 먹고 살지 암담한 상황이었지만 그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그는 지엄한 국체이자 제국 만인의 지존이니 결코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되었으니까.

'흔들리면 안된다'

부지런히 알바 채용 사이트를 뒤지지만 어째 마땅한 자리가 없다. 그는 혀를 찼다. 세상이 어찌 이리도 쓸만한 일자리가 없단 말인가.

"제국 상서는 즉시 들라!"
"부르셨사옵니까 폐하"
"짐이 민정을 살핀 결과, 백성들이 일할 자리가 없으니 이는 필시 그들의 곤궁함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상서는 어찌하여 백성들의 곤궁함을 살피지 못한 것인가! 백성들이 밥벌이를 하지 못하면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흔들리며 장차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이니 이는 짐의 시름이 깊어짐이며 그것은 불충이다. 그대는 서둘러 백성들의 어려움을 보살피도록 하라"

백성을 어루만지는 어진 황제의 사려. 하지만 제국상서 역시 고민이 깊었다.

"예 폐하…분부 받들겠사옵니다. 하오나 이에 부연을 하온즉, 작금의 불경기는 하루이틀 내로 해결이 가능한 문제가 아니며 장차적인 대비와 깊은…"
"네 이 놈이 감히! 짐의 말에…! 즉각 이 자를 끌고가 참형에 처하라"
"폐, 폐하!"

물론 그가 참형을 운운하며 극형을 내린다고 하여도 실제로 그 누군가가 끔찍한 일을 당하는 것은 아니다. 그 스스로가 황제이자 재상이고 내관이며 백성인데 누가 뭐 누굴 죽인단 말인가. 스스로 목을 자를 것도 아니고. 그러나 그렇게 누군가를 극형으로 끝내버린다는 말 한 마디만으로 어딘가 속이 좀 시원해지는 것이 있었다.

"폐하, 부디 자비를 베푸소서"

그러나 아무리 상상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한들, 누군가를 말 한 마디로 죽인다는 것도 지나치게 과하다는 생각에 그는 또 혼자 작게 황제 최측근의 내관을 흉내내어 간들어지는 목소리로 스스로에게 간언을 했다. 하지만 황제의 뜻은 확고했다.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는 결코 뜻을 이룰 수 없다. 때로는 지나친 수단이 가장 적당한 수단일 수도 있다. 만 백성을 위한 우리의 책무는 한 개인의 목숨값에 비할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이대로 하루하루 시간만 보내며 자기 자신을 돌보지 못한다면 살아 무엇한단 말인가.

띵동-

"네, 19500원입니다. 영수증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네 맛있게 드세요"

치킨이 도착했다. 그는 밥상을 펴고 앉아 치킨을 뜯기 시작했다. 달고 짜고 맵고 맛나다. 얼마만에 맛보는 치킨인가. 거의 한달은 넘었지 싶은데.

"폐하,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또 혼자 스스로에게 감사하고는 치킨에 열중했다. 한참 뜯으며 심심하다는 생각에 카톡을 확인하자 어제 밤에 성태가 보내온 게 있었다.

[ 살아있냐? ]

그는 답을 하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그런가, 살아있는가. 살아야있지. 당연히. 숨을 쉬고 먹고 싸며 생각을 하는데. 하지만 나이 스물아홉에 취업은 커녕 알바자리도 없고 여자친구도 없고 통장잔고는 쥐뿔 나라에서 준 돈과 부모님 흡혈로 먹고 사는 비루한 처지에 차마 살아있다는 답이 민망하게 느껴졌다.

결국 답장 대신 읽씹으로 살아있음에 대한 간접적 증명만을 남긴 채 치킨에 열중했다.

"본디 황제가 움직이면 국고가 축나기 마련이다. 만 백성이 힘든데 어찌 짐 혼자만 즐거움을 누리겠는가"
"기운을 차리소서 폐하"
"그래, 그렇기 위한 보양식 아닌가"

뱃살을 생각해보면 보양이 아니라 일주일쯤 굶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새삼 떠올리지만 그는 허튼 생각을 집어치우기로 했다.

"짐은 황제다!"

그리고 문득 생각이 닿았던 '여자친구'에 대해 씁쓸한 고찰을 하기로 했다. 황후를 맞이하고 싶다. 생각해보니 모쏠로 끝난 황제도 있던가? 있기야 있겠지 싶긴 한데, 우리나라 왕 중에 그런 케이스도 있었나? 아, 단종은 일찍 죽었으니, 혹시 하며 검색해보니 그도 왕후가 있었다.

"지미럴"

나이 스물도 안된 애송이들도 할건 다 했구만, 하는 생각에 새삼 시름이 깊어졌다. 사랑하는 왕후와 함께 국사를 논의하며 정답게 세자 생산행위에 임하는 막중한 책무를 도외시한 채, 허구헌 날 금발 오랑캐와 왜구의 나체처자 영상서화나 밝히는 스스로의 처참한 처지에 그만 깊은 비탄에 빠질 뻔 했지만 다시 한번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짐은 황제다"

일단 다 먹은 치킨을 치우고 손을 씻고는 컴퓨터 앞에 앉아 다시 알바자리를 알아본다. 별로 하고 싶지 않지만 버스 세 정거장 거리의 PC방 심야 알바자리 하나와 역 근처 마트 매대판매 알바 자리에 지원해 본다. 어쨌든 돈을 벌어야 한다. 국고가 바닥나면 황제고 나발이고 그 끝은 볼 것도 없으니까.

"어흠"
"폐하, 밤이 깊었사옵니다. 기침에 드소서"
"오늘 밤은 외롭구나"
"본디 높은 자리는 외로운 법입니다. 폐하의 마음이 약해져서는 결코 아니되옵니다"
"그냥 해 본 소리일 뿐이다."

그래놓고서는 또 게임과 인터넷을 하며 결국 새벽 2시가 넘은 시간이 되어서야 피곤에 절어 잠자리에 든다.

"오늘 하루 참 고되었구나"

그렇게 혼자 중얼거린 그는 드디어 잠자리에 든다. 언제 빨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아 쿰쿰한 냄새가 나는 베게보를 좀 빨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부디 내일 눈을 뜨면 좋은 소식이 들려오길 기대한다.

그렇게, 고단한 잠자리에서 그는 꿈을 꾼다.

어느 따스한 봄날, 황금색 천이 휘날리며 문무백관이 모인 자리에 우러러 서서 만인지상의 위상을 뽐내는 기쁨을 누리며, 끝없는 부와 사치를 즐기고 가슴 벅치도록 넘쳐나는 행복 속에서 최고의 재주를 가진 이들과 큰 일을 논하고 동작대를 지어 대교 소교 못지 않은 미인들과 향락과 거사에 임하는, 결코 현실에 오지 않을 아름다운 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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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생각보다 짧은 시간'은 어쩌면 이 시대에는 팔아서도, 사서도, 봐서도 안되는 몹쓸 책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것에 크게 개의치 않는 우리들이기에 근 10년의 긴 시간을 뛰어넘어 이렇게 다시 한번 여러분을 만나뵙니다. 

구매해주신, 관심을 가져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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