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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진짜요?"

내가 생각했을 때 그렇게까지 웃긴 이야기는 아닌데 인정이는 그게 그렇게 웃기다고 빵빵 터진다. 내 팔뚝을 때리고 허벅지를 때리고. 그 와중에 한 대 맞았을 때 나도 모르게 팔뚝에 힘까지 줬다. 애초에 오자마자 옆 자리로 앉으니 기분도 좋았다. 왜 맞은 편 자리 두고 옆 자리 앉냐는 말에 '나 이제 여기 앉아도 되는 거 아니에요?' 하면서 당차게 들이대는 모습에 또 한번 반했다.

"한잔 더 해요 우리"
"그래"

슬슬 그만 마셔야 되나 생각하던 차에 한잔 더 하자는 그녀의 말에 1초도 고민없이 바로 응해버렸다. 나 역시 그녀와 헤어지고 싶지 않다. 이미 꽤 마셨지만 한잔 더 하기로 한다.

"우리 여행 가요"
"여행? 어디로?"
"얼마 전에 친구가 남친이랑 거제도 다녀왔는데, 넘 좋대요. 우리도 거제도 가요"

거제도라… 1박 하고 오자는 말인가?

"좋아. 담주에 갈까?"
"콜!"

인정이의 환하게 웃는 모습에 나도 기분이 좋다.

"나 담배 좀 피우고 올께"
"네"

화장실에 들러 볼일을 보고, 가게 밖으로 나와 전자담배를 입에 물었다. 연기를 뿜어내며 많은 생각을 한다. 전 직장동료의 제안으로 진행하게 된 무려 7살 어린 여자와의 소개팅. 주책 아닐까 속으로 걱정하며 만났는데 기대 이상으로 예쁜 애가 코드도 잘 맞아서 빠르게 가까워졌다. 오늘이 세번째 데이트인데 분위기로는 이미 지난 번 만남이 1일인 수준이다. 오늘 집에 들어가지 말라고 해도 오케이 할지 모른다.

"미안. 자 막잔 비우고…"

자리로 돌아와 서로 잔을 비운다. 스윽 입을 닦은 그녀가 "이제 일어날까요?" 하면서 자리에서 휴대폰을 주섬주섬 챙긴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속으로 '자자고 할까 말까' 고민하던 차에 문득 앞 테이블에 있던, 지혜 닮은 손님을 보고 순간 심장이 덜컹했다.

'니가 심장이 왜 덜컹해'

두 달 전 헤어진 전 여자친구 지혜. 이제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다고 스스로 다짐하지만 솔직히 전혀 생각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뭐해요 오빠?"
"어? 아니. 지갑이 어디갔나 해서"
"아 오빠 지갑 제가 챙겼어요. 오늘은 제가 쏠께요"
"아냐, 니가 왜 쏴. 내가 쏴야지"
"에에이, 계속 얻어먹었는데요"

자신이 계산하겠다고 계속 주장하는 인정의 말에 알겠노라며 지갑을 받아 가게를 나선다. 계산을 마치고 나온 인정과 함께 걷는다. 낮에는 아직도 땀이 흐르는데, 밤의 날씨는 그렇지 않다. 시원함을 넘어 어느새 날씨가 쌀쌀하다.



인정의 손이 내 손을 스치고 가볍게 한번 두드리더니 내 손을 잡는다. 내가 무슨 매력쟁이라고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대시해 오는 모습이 기분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지혜와의 연애를 갑자기 떠오르게 한다.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계속 그렇게 해요?"

걷다가 잠시 빌딩 숲 사이에 조성된 공원 한 켠의 벤치에 앉았다. 춥다는 핑계로 둘 다 서로 허벅지가 맞닿을 정도로 바싹 앉은 우리. 이러면 안되는데 지혜 생각을 해버렸다. 그렇게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으니 자연스레 둘러댄다. 아니 툭 털어놓는다.

"고백할까 말까 고민했지"

그 말에 인정은 "왁" 하는 기이한 비명과 함께 또 빵 터졌다.

"아 무슨 중학생이에요? 오빠 진짜 넘 웃겨"

웃음을 겨우 멈춘 인정은 손을 턱 내밀며 말했다.

"왜 고민하는거에요 왜. 내가 거절할까봐? 아니면 내가 별로 마음에 안 들어서? 솔직히 내가 이만큼 들이댔으면 오빠도 알잖아요"

이번에는 내가 웃었다. 너털웃음을 짓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

"응, 고백하면 될 거 같긴 했어. 근데 그래두 조심스럽지. 차이면 부끄럽잖어"
"악!"

인정이 다시 당차게 말했다.

"나는 오히려 오늘도 오빠가 전혀 무뚝뚝하게 반응하면 내가 먼저 고백할라고 그랬어요. 오빠는 나 좋아해요?"
"내가 무뚝뚝했다고? 당연히 좋아하지"
"근데 왜 반응이 무뚝뚝해요"
"내가?"
"가끔은 디게 귀여운데, 가끔은 무슨 생각하는지 전혀 모르겠어서.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느낌?"
"정말로?"
"정말로"

마지막의 마지막으로 내 마음을 정리해본다. 귀엽고 예쁘고 내 주제에 이렇게 스타일도 좋은 애가 이렇게까지 나한테 적극적으로 들이대는 경험을 언제 또 해보랴 하는 생각도 들고, 성격도 좋고 취미도 비슷하네 잘 통할 거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대화하면서 은근 허당이면서도 지적인 느낌이 있어서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그녀의 말.

'그래'

마음 한 구석에 찜찜하게 남아있던 지혜의 기억을 이제 정말로 씻어버리기로 하고, 인정과의 설레는 연애를 시작하기로 한다.

"그럼 오늘 말이야…"

조심스럽게 조금 무리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꺼내자, 바로 알아들은 인정이 손가락으로 내 입을 막더니, 귀에다 대고 속삭인다.

"오늘은 좀 너무 오바고, 다음 주에 우리 여행 가잖아요. 그때…"
"알았어"

나는 그만 좋아서 큭큭대며 웃고 말았다. 인정 역시 "뭐야 왜 그렇게 웃어" 하면서 정색하더니 또 웃는다. 드디어는 손을 잡고 걸었다. 다시금 취미와 투자, 인정이네 아버지 직업 이야기, 레이저 세공 이야기, 회사 이야기 등을 하면서 어느새 그녀 집 근처에 도착했다.

"이제 오늘 헤어질 시간이네요. 오빠 오늘 너무 재밌었어요.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응, 잘 들어가. 연락할께"
"네"

그녀를 바래다주고 그렇게 집으로 가는 길. 택시 안에서 그제서야 살짝 오르는 취기에 흐뭇하면서도 알딸딸한 기분을 만끽한다.

'흐'

택시 안에서 흐뭇하게 지난 번, 그리고 오늘 인정이와 같이 찍은 사진을 웃으며 보다가, 문득 스크롤 한참 아래에 있는 지혜 사진들을 떠올리고는 그렇게 지워버렸다. 혹시 모를 후환의 싹을 자르는 의미도 있고, 정말로 '지혜와 헤어질 시간'이라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지혜 그 년은 한참 전에 나같은 거 잊었을텐데 뭐'

그렇게 생각하자 더욱 홀가분해졌다. 인정의 휴대폰 저장 번호를 '양인정씨'에서 '인정'으로 바꿨다. 하트를 붙일까 하다가 나 스스로 '뭐야 이 아재감성'하면서 소스라치게 놀라고는 그냥 이름으로만 무덤덤하게 저장했다. 아마 인정 성격상 하트 붙이면 더 좋아할 거 같긴 한데 그건 언젠가 보는 앞에서 바꾸는 즐거움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인정…'

앞으로 한동안, 어쩌면 아주 오래, 그리고 아주 어쩌면 남은 평생 불러야 할 지도 모를 그 이름을 머리에 다시 한번 새겨넣으며 나는 피곤한 눈을 그렇게 감았다. 집까지 대충 20분이라도 눈을 붙일 수 있겠지.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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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개발자 이야기

인디게임 개발자로서 단언하건데, 확실히 요즘에는 게임 만드는게 쉬워졌다. 아니 쉬워졌다기보다는 환경이 좋아졌다. 그래, 좋아졌다.

'어디까지나 예전에 비해서지만…'

최신 게임엔진들은 뭘 써도 하나같이 다 워낙에 잘 다듬어졌고, 에셋 번들이나 각종 패키지를 활용하면 간단한 게임들은 반나절 안에도 뚝딱 만드는 것이 가능할 정도다. 월드엔진부터 디자인팩, 시나리오 빌더, NPC AI 세팅까지 뭐 어지간한 건 다 그냥 에셋 번들 조합으로 해결이다.

"참 대단해"

그렇게 게임을 런칭하는데 거의 일주일 정도 걸렸다. 사실은 그렇게까지 걸릴 일도 아닌데, 게임 스케일을 꽤 빡세게 설정하는 바람에 빌드파일 생성하는데만 하루가 걸렸다. 맨 처음에는 컴퓨터 뻗은 줄 알았다. 뭐, 덕분에 못 잔 잠을 하루종일 몰아서 푹 자기는 했지만.

"뻘짓이긴 해"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렇게 죽어라 잠도 못 자며 고생해서 완성해놓고서는 관심을 꺼버렸다는 점이다. 내 개인 서버에 올려놓고, 초기설정 잡아놓고 운영 룰 고지한 다음에는 아예 관심을 껐다. 개발, 세팅, 관리 자동 에셋까지 돌려놓았기 때문에 운영 자체에는 큰 문제가 없으니까.

"허허…"

그러다가 아까 문득 서버 자원 좀 체크하다가 깜놀했다. 게임이 서버에서 어이없을 정도로 많은 자원을 잡아먹고 있었으니까. 뒤늦게 확인해보자 초기 스케일 세팅에 문제가 있었다.

"아 이게 뭐야"

게임의 실제 플레이어블 영역에 비해 맵만 무진장 컸다. 자동관리 에셋이 맵과 배경은 계속 미친듯이 생성을 하고 있는데, 정작 캐릭터들의 초기 능력치가 너무 구려서 이대로면 아무리 캐릭터들이 백 년 천 년을 달려봐야 전체 맵의 채 0.01%도 탐색하지 못할 판이었다.

"조졌네. 아…"

그렇다고 초기화를 하자니, 플레이어블 영역의 완성도가 꽤 높았다. 무엇보다 그래픽이 썸네일로 봤던 것보다 더 좋았다. 캐릭터들도 예쁜 캐릭터가 많았다.

"오… 귀여워. 와 미쳤다."

반대로 엄청 못생긴 캐릭터들도 많았다. 아니, 비율로 치면 구린 캐릭터가 압도적으로 많은 수준. 요즘 게임업계의 PC적 추세가 아무래도 이 캐릭터 디자인 에셋에도 반영된 모양이다.

"그래도 이건 좀 심했잖아"

보자마자 빵 터진 캐릭터가 바로 요 놈이다. 'stylebox'라는 닉네임으로 인터넷에서 글쓰는 캐릭터. 설정도 너무 최악이다. 뭐랄까, 캐릭터 생성시의 랜덤 능력치 주사위가 계속 숫자 1만 나온 느낌이라고 해야되나.

"불쌍한 새끼"

게임 속 캐릭터에 대한 동병상련이라고나 할까. stylebox 캐릭터 설정 탭에 나온 [ 관심종자 ] 라는 설정을 보고 놈에게 작은 행복을 안겨주기로 했다. 관심종자에게는 관심이 약이니까.

"자, 니 친구다"

또 다른 핵존못 캐릭터들의 행동 패턴에 [ stylebox가 쓴 신작 단편소설 '게임 개발자 이야기'를 모바일/PC로 읽는다 ] 를 추가했다.

"슬슬 배고프네"

대충 거기까지 세팅한 나는 밥을 먹으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보다 재밌다. 이따가 조금 더 게임을 만져봐야겠다.


- 끝 -

[유료전용] 포스트 코로나

- 본 소설의 내용은 완전한 픽션입니다 - 


"코로나 종식 선포 1개월. 아직도 거리에는 코로나에 대한 두려움이 마스크로 남아았지만, 회복되기 시작한 번화가의 상권은 상인들의 입가에 미소를 감돌게 하고 있습니다. 서서히 불어오는 봄바람과 함께 희망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엔비씨 뉴스, 김상덕이었습니다."

코로나가 끝났다. 정확히 말해 국내에 한정하여 신규 확진자가 제로에 이른지 어느새 42일째이고, 코로나에 의한 중증 환자가 17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들 역시 코로나에 의해 손상된 폐 기능 저하 문제로 병원에 있는 것일 뿐 활동 중인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한 증상은 아니었다.

"아 살 거 같다 진짜"
"불편하게 어떻게 살았는지 몰라"

가장 큰 변화는 마스크였다. 비록 아직까지는 거리의 1/3 가까운 사람이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이미 벗어제낀 사람이 과반수를 넘었으며 벌써부터 "아직도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사람들은 쫄보 아니야? 분위기 좀 맞추지" 하면서 성급히 주변에 눈치를 주는 사람마저 있었다.

"아 그래도 이거 참, 이런 말 하면 뭣하지만 너무 빨리 종식이 되서리, 주가가… 아직 한참 더 쏠 수 있었는데. 아깝다 아까워"
"그르게, 솔까 국산 신약이 이렇게 대박날 일이 내 생전에 또 있을까"

해외의 코로나 치료제들이 사상 유래 없는 속도로 속속 승인되었고, 한국의 젠트리오 역시 코로나 치료제 신약이 높은 효과를 내면서 빠른 코로나 종식에 힘을 보탰다. 다소 진위가 의심되긴 하지만 가장 먼저 코로나 종식을 선언한 중국에 이어 스위스, 뉴질랜드, 대만, 한국, 독일 등이 코로나 완전 종식을 선포했고, 미국과 캐나다, 일본, 프랑스 등도 코로나 환자수가 천 명 대로 낮아지며 코로나 종식 선언을 준비했다.

"코로나 종식선언에 따른 해외여행 붐에, 인천공항은 벌써부터 수용인원의 2배 이상 인파가 몰라는 등 참아왔던…"
"여행관련 주식들이 코로나 이전 시기의 고점을 지금 거의 2.5배 이상 뛰어넘은 상황이기 때문에…"
"아니이, 김사장. 아 그때야 코로나니까 그 돈에 계약을 할 수 있던거지 이제는 이야기가 다르지. 어떻게 그 돈에 다시 들어와"

모처럼 사회에 활기가 돌았고, 기업의 채용도 점차 늘기 시작했으며 웅크렸던 소상공인들도 드디어 북적이는 거리의 사람들에 웃음 짓기 시작했다. 물론 나도.




포스트 코로나





"그러니까. 오히려 사실 내 입장에서는 코로나 때가 돌아다니긴 더 편했어. 어딜 가도 텅텅 비어있지, 줄 안서지, 콧대 높던 가게들도 배달 시작하고 난리였잖아"
"맞어. 요즘에는 반대로 너무 어딜가도 복잡하니까 돌아다니기가 부담스러워. 겨우 방호복 벗었건만"

지난 2년간 간호사로서 그야말로 병원에서 살다시피 한 서아 누나는 과연 '실내형 인간'이라 할만큼 피부가 새하얀 색이었다.

"진짜 누나 팔뚝 봐. 와 백인 아니냐 백인 이 정도면?"
"아 근데 너무 방호복만 입고 있어서 계속 피부가 물러지고, 손 같은 곳은 또 세정제 때문에 완전 망가졌어. 나 진짜 우리 아빠보다 손이 더 거칠다니까?"
"어디 봐봐"

누나 손을 확인하는 척 손을 잡아본다. 새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에 나도 모르게 두근거렸지만 과연 운동선수 손처럼 거친 질감에 나도 조금 놀랐다.

"그치?"
"아니? 보드라운데?"
"야"

내 너스레에 웃으며 손을 거두는 그녀. 곧이어 밥이 나왔다.

"와 뭐야. 곤드레 솥밥? 맛있겠다"
"여기 한정식 진짜 깔끔해. 루프탑 마운틴뷰 한정식, 크~"
"뭐야 아저씨두 아니구"

호들갑을 떨며 반찬도 다 맛있다는 그녀. 하기사 2년 동안 병원밥으로 간신히 대충 허기만 때웠다던 그녀인데 뭔들 맛이 없으랴. 나는 힐끗 주변 테이블을 돌아본다. 루프탑의 다섯 테이블은 가득 찼고, 다들 열심히 수다를 떨며 열심히 식사 중이다. 코로나 시기에 왔을 때는 주말에 왔을 때도 나 혼자였는데.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해?"
"어? 아니 그냥. 예전에 왔을 때가 문득 생각나서"
"예전 여친이랑 왔던거?"
"아니, 그냥 예전에 혼자 왔을 때는 텅 비었던 가게가 이렇게 바글바글해지다니 싶어서"
"그짓말 하네"



밥 먹고, 근처 호수길을 따라 걷다가 조심스럽지만 자연스럽게 손을 잡았다. 서아 누나도 별 스스럼 없이 손을 꼭 잡는다.

"나 손 많이 거칠지?"

꽤 컴플렉스인지 아까에 이어 또 묻는다.

"영광의 흔적이잖아. 그리고 보통 두어달 지나면 다시 부드러워질텐데 뭐. 나도 군대 있을 때 완전 사포 같았는데 전역하고 두어달 지나니까 완전히 여자 손처럼 부드러워졌어"
"니 손이? 전혀 아닌데?"

그러고보니 마스크도 안 쓴 상태로 이렇게 바깥을 함께 걷는 것 자체가 조금은 신선하다. 그러던 중 그녀가 갑자기 손을 빼더니 전화를 받는다.

"네 선생님. 네. 네? 아… 네 알겠습니다. 얼른 들어갈게요. 네, 아아…네 지금 여기가 강원도라서 시간은 좀 걸리지 싶은데요, 그래도 최대한 빨리 가볼께요. 네에"

전화를 끊은 서아 누나의 표정이 심상찮다.

"왜?"
"신종 코로나래"
"뭐? 코로나19 말고 또 다른 코로나야?"
"응"

차를 타고 서울로 향한다. 길이 막힌다. 답답한 가운데 라디오를 켠다. 역시나 속보가 나오고 있었다. 그래도 사실 내 입장에서야 '끝난 줄 알았더니 끝이 아니었구나' 정도의 마음이었지만, 서아 누나의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생각 이상으로 표정이 무거웠다.

"많이 걱정 돼?"

누나는 한참이나 대답이 없다가 뒤늦게 대답했다.

"병원에서 사람 죽는걸 너무 많이 많이 봤거든"



차가 너무 막힌 나머지, 누나는 집에도 들리지 못하고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9시 반이 넘은 시간이었고, 누나는 "고마웠어" 하고 바로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이래저래 격려의 마음을 담아 긴 카톡 메세지를 남겼지만, 그녀가 그것을 읽은 것은 그 다음 날 저녁이 된 시간이었다. 답장은 짧았다.

[ 장난 아니었어, 최악이야. 울고 싶어 ]

이미 수많은 꼴을 볼만큼 본 누나였지만, 그녀가 최악이라고 할만큼 이번의 변종은 대단했다. 뉴스에서는 끊임없이 속보가 흘러 나왔다. 그 어느 때보다 긴박하고 무거운 분위기의 뉴스 속보였다.

"박사님, 그럼 이번 변종은 잠복기가 3주 이상이라는 겁니까?"

박사는 기존 19의 변종인지 새로운 아종인지에 대해서는 조금 더 검토가 필요하다는, 전문가 특유의 신중한 표현 고르기를 부탁한 후 대답을 시작했다.

"네 조금 더 확실한 조사 결과를 알아보아야겠지만, 잠복기는 최대 한달 이상이 될 수도 있구요… 이 긴 잠복기라는 것은 그만큼 감염자가 바이러스를 더 넓고 오랫동안 퍼뜨릴 수 있다는 말이 된다는 점에서 위험합니다. 무엇보다 그 이상으로 안 좋은 것은 증상이 한번 발현하면 굉장히 심한 기침과 고열, 염증 반응이 환자의 상태를 빠르게 악화시킨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또 우려되는 점은…"

이번의 바이러스는, 어느 네티즌의 말을 빌어 '코로나19의 강화판'이었다. 잠복기가 2주 내외에서 3주~한달 가까이로 길어졌으며 발열과 기침 등 증상이 더욱 심해진데다, 전염성도 강해졌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가장 최악의 문제는


(중략 : 본 소설은 스타일박스 유료 메일링 서비스 구독자 전용입니다)

아픔

오랜만에 오빠의 인스타그램에 들어갔다. 거의 2년 만이다. 다시는 들어가보지 말자고 했던 그 계정에 기어코 또 들어갔다. 볼 때마다 괴로웠던 오빠의 새 여자친구. 예쁘고 스타일 좋은 그 여자친구. 거울에 비친 내 모습과 너무나 비교되는 그녀.

'아…'

턱시도를 입은 오빠의 모습이 있었다. 가장 보고 싶었고,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진이 최신 피드에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그 남자가 활짝 웃고 있었다. 그 여자와 함께, 턱시도를 입고.

'오빠'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다. 저 웃음은 나와 함께 할 때 가장 잘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헤어진지 이미 4년이나 된 그를 '오빠'라고 부를 권리는 이미 나에게 없다.

'내꺼…'

그때의 나는 빛나고 있었다. 오빠에게 예뻐보이고 싶었다. 밥도 굶었고, 진득히 그의 연락을 기다렸다. 머리도 하고 화장도 하고 옷도 사입고. 만나면 많이 참고, 열심히 웃었다. 대화가 끊어질 때면 나는 초조한 나머지 헛소리에 가까운 바보 같은 이야기도 잔뜩 해버리곤 했다. 그래도 오빠는 매번 나에게 웃어주었다. 그는 완벽했다. 아니 완벽하지 않다. 알고 있다. 그냥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잘 안다. 그 역시 평범한 남자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항상 특별했다.

"끄흡…"

괜한 소리를 들어서, 그걸 또 굳이 확인해보는 바보 짓을 하면서 또 이렇게 질질 짠다. 병신같이. 빙추같이. 결혼한다는 말을 전해듣지만 않았어도. 애써 잊었던 그 기억을 또.

'버려진거잖아'

약속에 자꾸 늦는게 싫고, 요즘 자꾸 싸우는게 싫고, 돈 많이 못 모은게 싫고, 키 작은게 싫다는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믿고 어떻게든 매달렸던 등신 같은 내가 4년 전의 기억 속에 갇혀있다. 소름돋게 차가워진 목소리와 잦아진 짜증 속에 어떻게든 마음을 돌려보려고 노력했던 멍청했던 내가 있다. 어떻게든 나를 떨어뜨리려고 한 그 말에 발이 부르트도록 힐만 신고, 30분씩 먼저 나가서 기다리던 내가 있다. 매주 복권을 맞춰보던, 죽도록 바보같은 내가 거기에 있다.

"진짜 좀 너무한거 아니에요?"

그녀가 찾아왔다. 

"정말 몰랐던거에요? 아니면 아는데 모르는 척 했던 거에요?"

나는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럼에도 쉽게 정리가 안 됐다. 나를 두고 바람을 피운 쓰레기가 왜 그리도 좋았는지. 왜 그렇게도 마음이 정리가 안 되는지. 다들 그랬다. 그냥 억울하고 미운 마음이 집착이 된 거라고. 함께 한 오랜 시간들이 그리운 것 뿐이라고. 할만큼 했으니 이제 그만하라고. 자존심도 없냐고. 그래도 붙잡고 싶었다.

"다시는 내 눈 앞에 나타나지도 마"

그리고 그렇게 비 오는 날,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망신까지 당하며 버려졌다. 집에 오는 길에 울다가 토해 쓰러졌다. 그리고 자취방에서 혼자 누워 며칠을 앓았다. 팔팔 끓는 머리만큼 마음이 산산히 찢기는 듯 했다. 그렇게 그냥 죽고 싶었다. 나흘을 더 굶고 정신을 다시 잃었다.

빙글빙글 도는 정신 속에서 병원으로 실려가던 기억이 있다. 아니 재구성된 기억인지도 모른다. 눈 앞에 오빠가 보이는 듯 했지만, 재승이었다. 울면서 그만하라고, 병신같이 이게 뭐냐고 소리치던 그가 있다. 그리고 그렇게 눈을 감고 다시는 오빠의 모습을 훔쳐보지 않기로 했다. 그 다음 날부터 다시 매일 봤지만.

너무 많은 것이 망가졌다. 피부도 안 좋아졌고, 확 늙기 시작했다. 나도 내가 싫을만큼 못 생겨지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나에게 고백을 한 재승이 바보 같았다.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웠지만 나는 이미 그의 마음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오빠가 그 여자와 헤어진다면….

그래도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지만 그래도 참아보고자 했다. 오늘이 아니면 내일, 내일이 아니면 모레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게 조금씩 잊어가던 나였지만 어제 아름이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목소리가 떨렸다. 병신같이.

"다른 좋은 사람 만나면 돼"
"그래"

말 뿐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갖고 싶던 것을 가졌다가 잃어버린 나에게, 그 무엇을 준다고 한들 마음에 들까. 나는 또 언제나처럼 술을 입에 댄다. 그렇게 꿈 속에서 다시 한번 그때의 순간들로 돌아간다. 하지만 언제부턴가는… 사귀던 시절로는 돌아가지 않는다. 그저 언제나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노력하는 그 시절로만 돌아간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그 기분을 느끼며 오늘 다시 또.

< 끝 >
 

뉴피플

2294년 1월 7일. 베이징에서 열린 아시아 연방 생명과학총회에서 발표된 '뉴피플' 프로토타입의 발표회는 이례적으로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공개 방송과 함께 진행되었고, 그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해당 주사제를 직접 스스로의 몸에 주사하면 약 2시간 후 부터 고열이 발생하고 곧 48시간의 가사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피부가 연질화 되면서 그 위에 새로운 막이 덮힙니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피부층이 녹으며 그 위로 굉장히 두껍게 갈색의 각질이 형성되는 겁니다. 약 72시간에 걸쳐 이 과정이 진행되는데요, 이후 약 15일간 이 상태가 유지되며 그 기간동안 각질은 단단해 집니다"

홀로그램이 비쳐진 영상은 상당히 그로테스크했다. '평범한 노인이 스스로의 몸에 주사를 놓고, 잠에 빠져드는 사이 피부에 진득하게 진물이 흐르고 곧 완전히 녹아내리면서 그 위로 덮히는 갈색의 딱지. 그것이 완전히 전신을 뒤덮자, 이제는 더이상 사람이라고 부를 수 없는, 그냥 통나무 몇 개를 사람의 형태로 나열해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약 15일의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그 각질이 스스로 하나둘씩 떨어져 나갑니다"

화면 구석에서 빠르게 흐르는 360시간의 시간. 그리고 그 시간이 지나자 마치 상처가 아문 후 딱지가 떨어지듯 하나둘씩 우투투 떨어지는 나무껍질 같은 각질.

"오 맙소사"

그리고 떨어져 나간 조각 속에서 살짝 엿보이는 피부는 이미 쭈글쭈글한 노인의 것이 아니었다. 팽팽하고 새하얀 건강한 피부. 그리고 그 껍질이 다수 떨어져 나갈 무렵, 노인 아니 '노인이었던 청년'은 눈을 떴고, 남은 딱지를 털어내며 거울에 비친 스스로의 팽팽한 피부에 놀라워했다. 화면 한 켠에는 70년 전 노인의 젊었던 시절의 사진이 비추어졌다. 거울에 비친 모습과 동일했다. 이어 화면이 전환되고, 양자동질성 검사 결과지가 비추어졌다. 합치 결과였다. 방금 전까지 눈을 가리며 역겨워 하던 수많은 과학자들이 감탄하며 박수를 쳤다. 물론 DV나 NCVR로 그 총회를 시청하고 있던 120억의 인류도 마찬가지였다.

"맞습니다. 곤충의 변태 과정에서 힌트를 얻어, 우리는 인류의 노화역전에 성공한 것입니다. 이 기술은 생명연장은 물론 각종 치명적인 질병의 극복, 더 나아가 우주 개척에도 혁명적으로 기여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이 기술의 명칭에 대해 다양한 안을 고려했습니다만, 저희 연구팀은 이 신약을 '뉴피플'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기초 탐사단계에 머무르던 인류의 우주개척은 2070년대 화성 식민지 개척을 기점으로 보다 적극적이 되는데, 이는 지구의 극적인 생태환경 변화와 때마침 이뤄진 기술적 도약의 힘이 컸다. 잦아지고 가혹해진 기후 이변으로 인류 전체의 공포감이 커진데다, 때마침 다양한 분야에서 이루어진 기술혁명이 자연스럽게 '우주로의 희망'이라는 새로운 길을 찾아낸 것이다.

2150년대. 달과 화성, 소행성대에서의 희귀광물 무인채굴 사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면서 "우주개발로 들어오는 자원보다 내보내는 자원이 더 많다"라는 자원 역설이 극복되었다. 조심스럽게 시작된 화성 내 거대 식량 플랜트 개발사업 역시 몇 차례의 위기를 겪으며 규모가 축소되기는 했지만 결국 성공을 거둔다. 또한 지구 궤도권의 중형 우주식민지 사업 역시 성공리에 안착하고, 정체되었던 인류의 부흥은 다시 재도약을 시작한다.

지구 궤도권의 우주 식민지와 화성 등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던 인류는 '보다 멀리' 시선을 뻗기 시작하고, 타이탄 위성을 자원 채굴점으로 삼아 '태양계 너머'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자원은 지금도 충분한데 왜 더 먼 우주개발에 돈을 쏟아 붓느냐구요? 음, 접근방식을 살짝 바꿔보죠. 자원이 충분하니까 우주개발을 하는 겁니다."

우주비행사 출신의 북미연합 조지 파이슨 대통령의 조크처럼, 한번 우주개척의 신비와 풍요를 맛본 이상 인류는 더 먼 우주를 향해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우주개척의 깃발 아래 행성 사이즈의 중전파만원경이 설치되었고 수십 만대의 심우주 탐사위성이 우주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어마어마한 양의 우주정보가 지구로 쏟아져 들어왔고, 수십 대의 세대 우주선이 '불멸의 항해'를 기원하며 출발했더랬죠. 우리 은하에 대한 정밀한 우주지도는 그렇게 '눈과 몸으로 그린' 지도란 말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이 말을 타고 몸으로 겪으면서 지도를 그렸던 것처럼."

…하지만 거침없는 성공을 이루어내던 꿈과 희망의 시대는 2270년대가 마지막이었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우주여행을 하기에 적합한 종이 아니었다. 머나먼 우주를 돌아다니기에 인간의 삶은 덧없을 정도로 짧았고 몸과 정신 역시 그 먼 여행을 겪어내기에는 지나치게 약했다. 철저한 테스트 속에서 선발된 인원으로 떠났음에도, 불과(?) 출발 60년 만에 끝없는 갈등 끝에 대살육과 자폭으로 허무하게 끝나버린 세대우주선 '라플란드'호의 비극이 대표적이었다. 인간을 먼 우주로 보내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무인탐사선이라고 해도 상황은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기계를 만든다고 해도, 5백년 이상의 완벽한 동작을 보증하는 기계를 만든다는 것은 기적을 바래야 하는 일입니다. 냉동수면 역시 60년 이상의 장기 수면에 대해서는 분명한 기술적 한계를 보이고 있으며, 종족의 씨앗만을 가져가고 로봇이 그 전 단계의 모든 것을 수행하는 방주 프로젝트 역시 실패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결국 개척 단계에서는 능동적인 생명의지를 가진 생명체가 직접 임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우주 프로젝트에 있어서 다양한 방면에서의 혁명적인 변화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벽에 부딪힌 인류의 우주탐험은, 본질적인 측면에서 재검토 되기 시작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수명이었다. 가장 가까운 거주가능 행성까지 항해에 걸리는 시간이 400년이었다. 또 도착 후 식민지 개척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과 노화에 의한 능력감퇴를 감안할 때 최소한 '500년'까지의 인간 수명 연장이 필요했다. 하지만 인류의 평균 수명이 130세에서 멈춘 것이 이미 100년이 넘었다. 아무리 의학이 발전한다 한들, 탄소 기반 생명체로서 이 이상의 수명 연장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신체교환형 생명연장을 재검토 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육체를 소모품으로 사용한다고 생각해보면요?"
"기억을 복제해봤자, 그것은 복제품에 불과합니다."
"…그걸 감안하더라도 받아들일 사람을 찾자는 거죠."
"죽음 앞에 초연한 사람은 없습니다. 드물게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수백 명 이상의 인원이 몇 세대에 걸쳐 그 성공을 반복할 가능성은 0에 무한히 수렴합니다."

2천년대 중반쯤, 죽기 직전 뇌의 모든 데이터를 온라인에 업로드하는 것으로 새로운 삶을 기대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그 얼마 후 유전적 복제인간을 이용하여, 아예 육신을 교환해가며 영생을 누리는 시대가 잠깐 열리기도 했다. 죽어가는 이의 뇌 정보를 그대로 새로운 몸에 이전하여 누리는 영생.

그러나 그 짧은 축복은 채 20년도 가지 못하고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실험된 양자동질성 실험에 의해 '기존의 내가 새로운 몸을 갖는 것'이 아닌 '이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는 사라지고, 나의 복제품에 내 기억자료만 복사해서 넣는 것'이라는 것이 과학적으로 완벽하게 입증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미 당시에도 '테세우스의 배' 논란과 함께 "가장 비싼 자살 방법"이라는 조롱이 있었지만 그것이 과학적으로까지 입증되자 사업은 삽시간에 망해버렸다. 드물게 '그래도 좋다. 나의 유전자를 세상에 남기는 방법으로는 자식보다도 더 좋은 방법 아닌가' 라는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 묘하게도 자식과는 달리 유전적 복제인간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압도적이었다.



"우주비행사들에 대한 뉴피플 사용이 최종 승인되었습니다."

하지만 인간 수명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 인류의 도전은 결국 '뉴피플', 통칭 '번데기'로 성공하였다. 아직 실험에 걸리는 물리적인 시간적 한계 때문에 몇 번이나 사용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은 확실하게 검증된 것은 아니었지만, 이론적 연구로는 사실상 무한이었다.

"생각해보십시오. 인류는 무한한 수명과 무한한 젊음을 갖게 된 겁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인류의 발전에 벽이 사라졌다는 겁니다"

'뉴피플'은 즉시 우주개발에 도입되었다. 뉴피플은 확실히 혁명적이었다. 인간 수명의 한계이라는 말은 위대한 과학자나 놀라운 탐험가의 성취에 끝이 없어진다는 말이기도 했다. 우주 개발에 새로운 전기가 열리고, 인류의 우주개발은 폭발적인 성취를 거두기 시작했다. 그렇게 6백년이 추가로 흘렀다.





뉴피플





"돈! 또 자는거야? 조종석에서 자지 말라고 했잖아! 무슨 600살 넘은 노인이라고 티 내는거야?"

킴의 핀찬에 돈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군인으로 첫 우주선에 탑승한 이래 600년이 흘렀고, 그 사이 우주 기술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수백 명이 탑승하던 그 시절의 군용 탐사선보다 지금의 이 두 명이 탑승하는 초경량 우주선이 훨씬 더 뛰어난 속도와 레이더를 갖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둘의 나이 차이였다. 돈의 나이는 탄생나이 기준으로 622세. 그리고 킴의 나이는 26세. 23세기와 29세기의 사람으로 둘 다 무려 6세기에 달하는 시간적 격차를 갖고 있지만 둘은 친구이자 연인으로 지내고 있다. 게다가 현재 신체 나이로는 오히려 돈이 다섯 살이나 더 젊었다.

"어제 너무 격하게 했나 봐. 나 아직도 밑이 너무 아파"

킴은 돈을 바라보며 입술을 삐죽댔다. 돈은 머리를 긁적이며 "미안. 나도 모처럼의 새 몸이라 너무 과했나 봐" 하고 사과를 했다. 며칠 전 '번데기'에서 변태를 끝낸 돈은 모처럼의 젊은 몸으로 킴을 상대한 것이다. 사실 기존의 몸도 신체 나이 56세로 건강 상태는 그리 나쁘지 않았지만, 탄생나이 26세 오리지널 바디의 어리고 젊은 연인을 최상의 몸으로 상대하고 싶다는 욕심과 배려에 의해 '뉴피플'을 사용한 것이었다. 그것을 가리켜 킴은 '늙은이의 초조함'이라며 또 놀렸지만, 어쨌든 둘의 속궁합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지금까지 몇 명이랑 자봤어?"

뜬금없는 킴의 말에 돈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사실 예전에 해아려 본 적이 있긴 하다. 오리지널 바디 때는 두 명이 전부였다. 고향친구 샤론과 입대 전날의 하룻밤, 그리고 화성 군 기지 근처의 사창가에서 한 번. 그 다음은 장기간의 수면 이동이었고, 중간에 뉴피플을 사용했으니 오리지널 바디 시절에는 두 명이 끝.

"첫 사랑이랑, 창부랑… 그렇게 딱 두 번. 오리지널 바디 시절에는"
"창부가 뭐야?"
"몸 파는 사람"

혹여나 질투를 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대답한 돈이었지만, 정작 킴은 그 숫자보다 '표현'에 반응했다. 어린 나이에서 오는 여유일까, 29세기의 문화일까, 아니면 인공인간 특유의 지적호기심일까.

"와, 지금 봤어? 모니터에 '창부'가 17-23세기까지 쓰던 표현이라고 뜨는거?"
"음…"

또 오래된 사람이라고 놀리는 킴의 말에 돈은 머리를 긁적였다. 킴은 깔깔 웃더니 "그럼? 뉴피플 쓰기 시작한 다음부터는?" 하고 물었다. 돈은 이번에야말로 답을 조금 망설이다가 어렵게 말했다.

"대충 1,800명 정도?"
"뭐?"

군용 수송선을 타고 40년에 걸친 장기 수면 끝에 도착한 해왕성 궤도권의 심우주 탐사기지 개발현장. 군인과 로봇, 바이타늄과 어둠 밖에 없는 지독한 곳이었지만, 바로 그렇기에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극대화 되는 곳이다. 그곳에서 군인들은 남녀, 남남, 여여 등 성별과 나이를 초월하여 거의 매일 사랑을 나누었다. 그럼 분위기였다. 그곳은. 사실 그렇게라도 밤마다 무언가의 열정을 풀어내지 않는다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피폐해지는 그런 황량한 곳이었으니까. 그저 꽤 짭짤한 급여와 섹스만이 유이한 위안이 되는 곳이었다.

"사실 1천명 넘긴 이후부터는 거의 생각해 본 적 없어. 그냥 어림잡아 그 정도 된다고 생각하는거지"
"그렇구나"

약 80년 간의 성실한 복무 끝에 탐사기지가 완공되었고, 돈은 군인을 은퇴했다. 그리고 그가 선택한 것은 타이탄 위성 궤도에 있는 '타이탄 시티' 콜로니의 초고속 여객선 '윈도우' 호였다. 양자 정보 엔진으로 최대 광속의 28%에 이르는 엄청난 속도를 내는 이 여객선의 목적지는 무려 '미래'였다. 특수 상대성 이론의 시간팽창 효과 덕분에 그 여객선을 타고 짧은 여행을 다녀오면 몇 세기에 이르는 시간이 흘러가 있을 거라는 광고 멘트에 돈은 긴 고민없이 그렇게 했다. 막대한 은행 복리 이자를 기대하고 말이다.

"그렇게 평생 고생한 퇴직금 반을 집어넣은 여행을 다녀왔는데 빈털털이가 되어 있을 때 기분이 어땠어?"
"바이타늄에 투자한거 없었으면 정말로 자살했을거야"

하지만 돈의 기대와 달리, 은행에 집어넣은 돈은 전혀 늘어나 있지 않았다. 돈처럼 시간팽창 효과를 놀리고 막대한 재산 불리기를 시도한 많은 사람들 때문에, 금융 혼란을 우려한 관계 당국이 이미 몇 세기 전에 그러한 계좌에 대해서는 지급정지를 해놓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은행계좌와 달리, 희귀광물 바이타늄에 조금 투자해놓았던 금액은 제법 수익을 내어, 아쉬운대로 지금의 싸구려 소형 탐사선을 살 정도의 돈은 찾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다행이지. 만약 엄청난 돈으로 불어나 있었다면 아마 나는 그 돈으로 흥청망청 온갖 바보 짓이나 하고, 초고가 쾌락 콜로니 투어나 다녔을거야. 그나마 겨우 이렇게 탐사선이나 한 대 살 돈만 남았으니 이걸 산 거고, 또 이 우주선을 조종할 조종사로 널 고용한거니까"

그것은 진심이었다. 돈과 같은 '시간여행자'들에 대한 여론은 29세기의 현대에 와서는 괴짜, 일확천금을 노린 쓰레기, 시대착오적 관념을 가진 골칫덩이 취급이었다. 그나마 돈은 "탐사선을 살 수 있는 자금을 가진, 우주탐사선으로 스스로 노동을 하려는 진취적 자세를 가진 희귀한 케이스"여서 관계당국에서도 호의적인 반응이었지만, 그렇지 못하고 계좌정지로 알거지가 된 사람들은 자살을 하거나 범죄자가 되는 케이스도 흔했다.

"계류장에 너가 나타났을 때, 정말 놀랬었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돈이 탐사선을 구입을 하기는 했지만 조종 면허는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고용한 조종사가 바로 킴이었다. '수백 년 노하우를 쌓은 뉴피플 할머니겠지'라고 생각했지만 킴은 당시 무려 24살의 오리지널 바디를 가진 아가씨였다.

"낡은 소형이지만, 그래도 초고속 탐사선이야. 한번 여행을 다녀오면 수천 년이 지나있을 수도 있다고.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 세상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진다는 말이야. 지금의 나처럼 사회적 대우가 쓰레기일 수도 있고, 아예 지구부터 모든 식민지가 멸망해 있을 수도 있어"
"아는 사람은 지금도 없고, 세상이 망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네요"

킴은 인공정자와 인공자궁에서 유전자 조작을 통해 '생산된' 인공인간이었다. 초고지능과 호감가는 외모 등 멋진 능력을 가진데다 이 세상을 운영하는데 꼭 필요한 사람들이지만, 원래부터 불임으로 태어나는(이들의 자산이 사망 후 다시 사회로 환원될 수 있도록) 이들은 엄연히 사회의 2등 시민이었다. 그런 이들의 특성답게 킴은 시니컬한 성격이었고, 마침 세상에 큰 연을 두지 않는다는 공통점을 지닌 둘은 엄청난 나이 격차를 딛고 연인이 될 수 있었다. 애초에 둘 뿐인 우주선 안이라 금방 친해질 수 있었고.

"돈, 그럼 지금부터 말 편하게 할게요"
"그래, 그게 좋겠다"




사실 '공간을 왜곡시켜 움직이는' 무시무시한 속도의 우주선인만큼, 조종사라고 하더라도 '그때 그 시절'처럼 직접 조종사가 조종간을 잡고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전자동 시스템이다보니 딱히 조종석에서 둘이 할 말은 많지 않다. 그저 가끔 생각날 때마다 '혹시나'하는 마음으로 한두번 항로를 확인하고, 운항에 관한 중요 로그를 확인하고, 획득한 공간정보 데이터를 '좌표 위성(위성이라고는 하지만 23세기까지 쓰이던 그런 물리적 형태를 가진 '인공위성'은 아니고, 지정된 공간 좌표에서 정보를 송수신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일종의 웜홀이다, 라고 킴에게 배웠다)'으로 보내는게 다다.

"킴, 재미나는 뉴스 좀 읽어줘"

그러다보니 인류생활권 궤도에서 좌표위성을 통해 제공하는 '히스토리컬 뉴스'가 둘에게는 제일 흥미진진한 지적 자극 중의 하나다. 양자복사를 통해 '무려 수백 년 후 미래로 실시간으로 제공되는, 수백 년 전의 라이브 뉴스'는 둘에게 지극히 흥미로운 일들인 것이다.

"3011년 화성의 올림푸스 화산 대폭발, 80만명 사망 및 기후권 변화 예고하는 대재앙… 화성 정부, 2천만 단위 행성거주민의 우주 식민지 대피 검토"
"와 80만명? 그리고 기후권 바뀐다는거면 아마 중력이나 자기장 관련 장치 뭐 망가졌나보네"
"그러게. 와 31세기에 화성 안 살아서 너무 다행이다"

그 말을 들으며 돈은 힐끗 현 시점의 시간 좌표를 확인했다. 인류 생활권의 '지구 시간'으로 계산하면 지금의 우리는 약 35세기를 지나고 있었다. 지금 당장 다시 타이탄 콜로니로 돌아간다고 해도 도착할 무렵이면 거의 42세기는 되어 있으리라. 29세기도 적응이 안될 상황이었는데 그로부터 1천년도 넘게 흐른 세상이라니.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이건 타이탄 월보. 3023년 9월 1일, 타이탄 로지나해 심해에서 미생물 발견… 인류 첫 외계 생물 발견의 쾌거"
"별로. 다른 기사는?"
"이건 데일리 셀리니온 3319년 2월 22일자 톱, 달 기지 쿠데타 발생. 행성 지구 휴스턴 우주 수도에 핵분열 미사일 발사…"
"뭐?!"
"다행히 우주 궤도권 요격 성공, 달 기지 보복 공격으로 초토화. 와 이거 장난 아니네. 그럼 이 다음에 이거 지금 복구 됐나?"

빠르게 뉴스를 검색한 킴은 그 70년 뒤 뉴스에서 달-지구 우주 엘리베이터 뉴스를 발견했다.

"항상 느끼는데, 부수는 것도 잘하지만 복구하는거는 더 잘하는 거 같애"
"누가? 인류가?"
"지구 출신들"
"그래? 성격이 좀 다른가? 난 잘 모르겠던데"

돈 역시 '지구 출신'이라 킴의 말이 흥미로웠다.

"보면 나같은 콜로니 출신들은 보통 성격, 아니 욕심이라고 해야 되나? 그런게 그다지 강하지가 않아. 이렇게 해보다가 안되면 그만이야. 근데 지구 출신들은 달라. 뭘 해도 좋게 말하면 적극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집요해. '육성기관' 사람들도 지구 출신이랑 콜로니 출신은 바로 알 수 있어"

돈은 듣던 중 '육성기관'이라는 말에 또 흥미를 느꼈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킴은 또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뭐더라… 아 너네 시대 말로 하면 '학교'. 근데 가정하고 분리된 형태의 교육기관은 아니고, 너네 시대 스타일로 말하자면 고아원과 보육원과 학교가 합쳐진거야. 가족끼리의 성교를 통한 '피붙이' 자녀들 말고, 나같은 '인공생산물' 자녀들 가르치는 곳. 아주 혹독한 곳이야. 군대나 다름없어. 그나마 우리 시대는 '주입식 교육'이 시작된 시기라 조금 편해졌지만…"

돈은 반가운 마음에 웃었다.

"너네 시대의 교육방법에도 주입식 교육이 있었어?"

하지만 킴은 그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 한 뒤, 잠시 싸늘한 표정을 짓다가 컴퓨터를 만지고 '주사식 교육'이라는 신조어를 제시했다.

"돈의 시대에 존재한 주입식 교육이라는 표현은 정보를 교사가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형태의 교육방식을 비유적으로 제시하는 말이고, 우리 시대의 주입식 교육은 말 그대로 필요한 정보가 담긴 뉴런 주사를 뇌에 쑤셔넣는거야"
"같은 주입식 교육 표현인데 그 차이는 어마어마하네"

감탄할 무렵, 모니터에 중요 안내 로그가 뜨며 우주선이 급감속을 했다. 엔진이 완전히 정지된 후, 로그를 읽은 킴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제 여기부터는 이 세상 그 누구도 가본 적 없는 곳이야. 미개척 항로고, 지금부터 입수되는 위치 정보 데이터는 다 돈이야 돈!"
"오케이!"

탐사위성이나 중전파망원경에 의한 다채널 스캔조차 이루어 진 적 없는 완전한 미개척항로. 그만큼 엄청난 위험에 노출되는 것이지만, 800, 아니 2,000DML 영역의 데이터만 확보해가도 둘이 앞으로 수십 년은 놀고 먹어도 된다. 킴은 최대 출력으로 레이더와 실드를 높였다. 약 10초 뒤 약 300DML 영역에 대한 안전이 확보되었다는 스캔 정보가 뜨자 킴은 "그럼 슬슬 출발할게" 하고 미소를 지었다.

부조종석에 앉은 돈은 웃으며 "그럼 내가 그 첫걸음을 떼볼까" 하며 어깨 너머 배운대로 중력엔진의 출력을 높였다. 그 순간 킴은 크게 놀라며 "아니 중력엔진 말고!"를 외쳤지만, 이미 단숨에 엔진을 최고 출력으로 올린 돈에 의해 그녀의 말은 "아"에서 그쳤다.



"최악이야. 도대체 왜 그런거야?"
"아니, 단순히 기쁜 마음에…나도 조종을 해보고 싶었어. 아아…혼자 흥에 취했던 것 같아."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다. 궤도상에 영향을 끼치던 초소형블랙홀의 중력에 의해, 이 우주선에 달린 중력엔진 장치 자체가 아예 뜯겨져 나갔다. 통신 장치도 먹통이 됐다. 우주선 자동 복구장치로도 도저히 복구가 안 될 정도로, 그냥 아예 뜯겨 날아갔다. 다행히 후방에 달린 반물질 엔진은 무사했지만, 이렇게 먼 우주까지 나온 이상 그 느려터진(?) 반물질 추진으로 되돌아 간다는 것은 날아가다가 기어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상황을 파악한 킴이 화가 나서 계기판을 내리치자, 돈은 머리를 감싸쥐었다.

"킴, 미안해."
"젠장, 지금 우리가 생각할 문제는 그게 아니야."

운이 지지리도 없었다. 킴이 의도한 것은 미개척지역에서 점차적으로 스캔을 해나가면서 반물질 추진으로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었지만, 돈은 그저 지금껏 날아온 대로 중력엔진을 가동시켜버린 것이다. 인공중력을 통해 공간을 왜곡시켜 이동하는 중력엔진은 공간 자체를 왜곡해서 날아가는만큼 압도적인 속도를 자랑하지만, 앞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 공간에서 공간을 압축해서 달린다는 것은 위험 역시 고배율로 맞닥뜨리겠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사실 우주 공간이 얼마나 밀도가 낮은 공간인가를 생각해보면, 중력엔진의 최고 출력으로 10년간 눈 감고 달린다고 해도 별 문제가 없을 확률이 99.999999%가 넘었지만, 항상 재수가 없으려면 어이없을 정도로 없기 마련이었다.

"내가 미친 짓을 했어, 킴"

만약의 만약의 만약의 만약이 겹쳤다. 이제껏 얌전히 잘 앉아있던 돈이 그 순간 그냥 혼자 오버를 하지 않았더라면, 아니 설렌 마음에 그러고 싶었다 하더라도 킴에게 "이거로 하는거 맞아?" 하고 한번 질문이라도 했다면, 딱 10초만 더 기다렸다면(400DML 이상 스캔이 됐을테고 그랬다면 중력엔진의 출력을 높이기 전 비상제동이 걸렸을테니), 그 블랙홀이 특이성 블랙홀이라 타원형으로 아주 긴 형태의 중력범위를 가진 블랙홀만 아니었더라면 등등 수없이 많은 '아무 문제 없었을 확률'을 뚫고 사고가 터진 것이었다.

"아니야, 돈 잘못만은 아니야. 기적에 가까운 확률로 운이 없었을 따름이고, 라이선스도 없는 사람을 태우고 부조종석의 권한을 아직까지 락 걸어놓지 않은 내 잘못도 있어"

한참이나 눈을 감고 있던 킴이 눈을 뜨며 말했다. 정말로 용서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은근하게 타박을 하는 것인지 모를 킴의 말에 돈은 눈치를 살폈지만 다행히 킴의 다음 반응으로 미루어 보건데 전자에 가까운 듯 했다. 킴은 갑자기 화물칸으로 걸어가더니 남은 '뉴피플'의 재고수량을 새삼 확인했다. 349개.

"돈… 잘 들어"

조종석으로 돌아온 킴의 눈빛은 이미 전과는 달랐다. 그 눈빛은 돈이 킴을 처음 봤을 때의 눈빛과도 같았다. 아주 깊고도 슬픈 눈이었다.



킴의 아이디어는 아주 심플하고 무지막지했다. 반물질 추진으로 가장 가까운 DDS-68157cc 초심우주 군용기지까지 천천히 날아가는 것. 통신장치까지 파괴된 이상 사실 인간세상으로 돌아갈 방법은 그게 유일했다. 계산해 본 결과 약 3만 년이 걸리는 대장정이다. 출발을 한 29세기 기준 우주인의 평균 수명이 약 130세라는 점과 뉴피플 사용시 20대 극초반의 몸으로 회춘하는 것, 그리고 3만년의 아득한 여정 중 갑자기 일어날 수 있는 병이나 사고에 대비하기 위한 '약물적 활용'을 감안하면 349개는 아슬아슬한 숫자였다. 아니 크게 모자라는 숫자였다.

"나는 어차피 이 세상을 살만큼 살아봤어. 킴, 차라리 네가 돌아가. 너는 살 날이 창창하잖아. 어차피 조종도 너가 할 줄 아는거고."

돈은 진심으로 말했지만, 킴은 고개를 저었다.

"인공인간은 3만년이라는 아득한 시간을 견뎌낼 수 없어. 불임까지 시켜놓는 것을 보면 모르겠어? 아무도 인공인간이 오랫동안 세상을 살아가게 냅두지 않는다고. 유전자 돌연변이가 일어나서 뉴피플을 몇 개 쓰기도 전에 번데기 속에서 죽어. 우주선 조종이야 나에게 배우면 돼. 우리 둘 다 아직 젊잖아?"
"조종이야 배운다고 해도, 3만년이라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야. 분명히 그 전에 미쳐버릴거라고"
"돈, 부디 살아서 내 업적을 세상에 남겨줘. 380DML만큼의 미개척데이터에는 개척자로 영원히 나와 너의 이름이 붙어. 나는 그것만을 위해 살아왔고, 그 업적을 남기고 싶어서 이 우주선에 탄거야."

킴의 목소리는 간절하고도 단호했다. 돈은 다시 한번 스스로 저지른 미친 짓을 저주했지만, 킴의 말에 반박할 방법이 없었다.




우주선의 방향을 돌린 직후부터 킴의 스파르타식 조종 훈련이 이어졌다. 돈이 배워야 할 공부량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대뇌에 직접 정보를 찔러서 강제 입력하는 29세기의 주사식 교육으로도 5년 분량의 교육이었다. 그것을 23세기, 아니 NCVR 하나 없이 21세기 스타일로 일일히 암기하고 응용하며 익혀야 한다는 것은 이미 시작하는 순간부터 아찔해질 정도의 엄청난 학습량이었다.

"돈, 이 영양바가 먹고 싶다면 빨리 외우는게 좋을거야. 게으름은 용서 안 해"
"죽겠구만"

23세기 중반, 다시금 대두된 식량위기는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히 해결되어 버렸다. 더이상 인간이 입으로 음식을 먹지 않아도, '빛(광선)으로 영양을 공급하는' 기술이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인간은 먹거리 고민에서 해방되었고 거의 모든 가정은 말할 것도 없으며, 우주선 바닥이나 조종석 의자 등에 '영양공급 패널'이 설치되었다. 물론 그 이후에도 여전히 음식은 섹스와도 같이, '이제 더이상 하지 않아도 그 목적을 충실히 달성할 수 있지만 여전히 인기리에 이어지고 있는 고급스러운 취미'가 되어 이어져 오고 있었다. 이 우주선 안에도 얼마간의 '식량'이 있었지만, 시험 결과에 의해 항상 그것은 킴의 것이었다.

킴은 꽤 좋은 선생이었다. 중간중간 좌절하는 돈을 위해 멋진 조종술 묘기를 보여주기도 하고, 사랑을 속삭이기도 했으며 눈물로 자신의 꿈을 다시 한번 호소하기도 했다. 때로는 화를 내기도 하고, 심지어 "너 때문에 이렇게 된 거잖아!"라는 고함과 함께 돈에게 주먹을 날리기도 하였으며 화해의 섹스로 다시금 의지를 북돋아 주기도 했다.

돈에게 있어서 킴은 이미 삶의 동반자였다. 회고해보면 돈 역시 외로운 삶이었다. 일찌감치 고아가 되어 먹고 살기 위해 군인이 되었고 한 평생, 아니 두 평생을 그저 일만 했다. 타이탄 기지에서의 생활은 그저 고된 노동과 사랑 없는 섹스가 전부였다. 그렇게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부자가 되는 꿈을 꾸며 29세기의 미래로 날아왔지만 돌아온 결과는 단순한 시대의 불청객이었다. 그런 그에게 지금의 알콩달콩한 삶을 만끽하게 해주는 킴은 당연히 단순한 연인 이상의 존재였다. 둘 다 20대이니 100년의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었지만 그것조차 돈과 킴에게는 짧았다.



"돈… 부디 내 이름을 역사 속에 남겨줘"
"킴…"

킴은 향년 1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시신은 소각되어 우주공간에 뿌려졌다. 그녀가 죽은 이후 돈은 몇 번이고 무너질 뻔 했다. 살아남은 자의 외로움은 지독함을 넘어 잔인한 것이었다. 모니터 화면에 뜨는 [ 예상운항 시간 : 29,892년 274일 22시간 55초 44 ] 라는 무지막지한 수는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지는 수준이었다.

"으음"

자동운항 중 중간중간 뜨는 로그나 항로 안내 메시지를 보며 돈은 킴 생각을 참 많이 했다. 킴은 참 말을 잘했다. 항로 궤적 하나를 교육해도 온갖 화려한 비유와 개그를 섞어가며 돈을 즐겁게 해주었으니까. 그러다 울고 또 울고. 가끔 번데기가 될 때 이외에는 항상 돈은 외로웠다.

"… …"

모니터의 예상운항 시간이 19,999년으로 깎이던 순간, 돈은 너무나도 아득한 숫자에 다시 한번 가슴을 내리쳤다.
모니터의 예상운항 시간이 9,999년으로 깎이던 순간의 돈은 아무런 감정조차 없었다. 그리고 모니터의 예상운항 시간이 7,999년으로 깎이던 순간, 돈의 머나먼 여행은 갑자기 끝났다. 인류 연합이 보내온 구조선이 그를 구조했으니까.




"보랜 세월을 셀아오신 뷴이니만꿈, 기술에 발전이라문게 얼마나 옛 사람믈에게 박틀감과 허무람을 안기는지는, 그 누루보다 잘 아지리라고 생각람니다"

이미 수십세기 전에 인공인간을 만들던 인류가, 그로부터 2만 년이 추가로 더 흐른 이제 와서 머리 둘 달린 홀로그램이 되어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단지 돈 입장에서 감정적 준비가 부족했을 뿐이었다. 게다가 그 긴 세월이 지났음에도 번역기라고 하는 것은 아직도 시원찮다는 것이 안타까웠고. 다만… 그 긴 시간을 날아왔는데, 이미 온 우주의 스캔은 이미 1만년 전에 기술혁명으로 완벽히 끝났다는 것이 허무했다. 우주 공간에 킴과 돈 자신의 이름을 새길 수 없다는 것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혹시 이 시대의 기술로, 과거 속의 어떤 존재를 다시 부활시키는 것이 가능할까요?"
"아륍게도, 현쟤의 기술료도 과거랴는 시굥간 속얘 존재하는 인뮬를 부호알 시킬는것은 불가늉합니다"
"그럼 제가 탄 것보다 더 좋은, 그러나 더 빠르고 안전하고 쉬운 우주선을 제가 얻을 수 있을까요"
"인도젹 차움에서 구조우선를 무료로 제공래드립니다. 우리 인간래게는 더이상 물리적인 우주선이 빌요하치 앎습니다. 이 배를 선뮬캅니다"



더이상 물리적인 우주선이 필요 없어진 2만년 대 인류의 호의 덕분에 돈은 구조선을 선물받았다. 격납고에 과거의 우주선을 태운 채로 돈은 다시 한번 먼 우주로 나아갔다. 그 작은 경량 우주선을 움직이는데 근 60년을 교육 받았는데, 이 거대한 우주선을 운영하는데에는 3분 이상 걸리지 않았다. '유저가 알고 있는 UI로 자동 세팅되는' 최첨단의 운항 시스템 덕분이었다.

더 감탄스러운 것은 '2만년을 날아온 거리를, 2초 만에 날아왔다는 것'이었다. 워프 스페이스 항법이었다. 출발 전과 지금의 시간에 변화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돈은 아쉬워하며 이번에는 '초광속 이동' 메뉴를 지정하여 더욱 더 먼 우주를 지정했다. 해당 운항 시스템으로 이동을 할 경우, 시간팽창 효과에 의해 엄청난 시간이 흐를 것이라는 경고 문구가 몇 번이나 떴지만 돈은 그 모두를 오케이했다.

"가자, 미래로"

23세기에서 29세기로 향한 것처럼, 돈은 이번에는 2,300세기에서 추정 시간 불가의 영역을 향해 나아갔다. 그가 기대하는 것은 막연하지만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그리고 돈은 지독하게도 운이 나쁜 사람이었지만,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이기도 했다.



이미 2만년을 혼자 느릿느릿 날아온 적 있는 돈에게 있어서 다시 한번 몇 천 년의 여행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단지 지난 2만년 간의 여행과 차이가 있다면, 이번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시간팽창 효과를 동반하기에 사실상 우주의 끝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 뿐이었다.

"원하는 것을 이루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 어느 순간 돈은 갑자기 새하얀 빛 속에 휩싸였다. 그는 그 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몰랐다. 단순한 환각인지, 꿈인지, 먼 미래의 인류인지, 기적인지…. 그저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겠다는 말에 간절히 소원하던 그 무엇을 말했을 따름이다.

"킴과 다시 한번 만나고 싶어요"

뭐, 말을 한 직후 '킴과 안정적인 부와 건강을 가진 채 영생을 누리며 살고 싶어요' 같은 식으로 소원을 조금 더 디테일하면서 유리하게 말할 것을, 하고 후회했지만 그 아늑한 빛은 그저 돈을 자애롭게 감싸안을 따름이었다.




"돈! 또 자는거야? 조종석에서 자지 말라고 했잖아! 무슨 600살 넘은 노인이라고 티 내는거야?"
"킴…"

돈의 귓가에 들린 그 그리운 목소리. 눈을 뜬 돈의 부조종석 옆자리에는 예쁜 여자애가 조종석에서 소리를 치고 있었다. 돈은 그저 킴을 와락 끌어안았다.

"뭐야, 갑자기 왜 그래?"

사실은 600살이 아니라 3만살, 아니 수백억 살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돈은 그 모든 것에 앞서서 그저 킴을 만나 반가웠다. 그리고 다짐했다.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중력엔진의 스로틀은 만지지 않기로.

"왜 이러냐니까"
"킴"
"왜"
"사랑해"
"어?"

그 말이 하고 싶었다. 아마도 수백억 년 동안 하고 싶었던 말이었을 것이다.

- 끝 -

효재

지금은 없어진 교육 과정이지만, 예전에는 초등학교 교육과정 중에 개구리 해부가 있었다. 아이들이 직접 개구리의 배를 가르고 다리에 전극을 연결해서 생체전기를 실험하는 식의 꽤 그로테스크한 교육이다.

"난 재밌던데.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내 적성을 그때 깨달았던 거 같아"

외과의사가 된 동창 영석이처럼, 그것이 긍정적으로 발현된 케이스도 있지만 생각보다 많은 아이들이 겁을 먹고 불쾌한 기억을 갖는 경우가 많다. 내가 가르쳤던 아이 중 효재의 케이스도 특별한 케이스였다.

"선생님, 효재가…"
"으악! 모야!"
"헐!"

다른 아이들은 칼만 쥐어도 손을 바들바들 떨고, 심한 경우는 구토를 하는 아이들마저 있는데 효재는 그렇지 않았다. 아이들의 손에 이끌려 녀석의 자리로 가보니, 녀석은 이미 개구리의 배에서 모든 장기를 깔끔하게 분리해냈고 능숙하게 껍질까지 벗겨낸 상태였다. 피와 체엑이 범벅이 된 손으로도 녀석은 미소를 짓고 있을 따름이었다. 나는 애써 당혹스러움을 감추며 물었다.

"효재야, 어떻게 한거야?"

그러자 녀석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많이 해봤거든요" 라며 이미 집에서 토끼, 고양이, 잉어, 강아지로 비슷한 해부실험을 여러번 해본 적 있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개구리와 새끼 고양이는 수도 없이 해봤다고.

"그렇구나"

당시의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최대한 애써 평정을 가장했다. 사실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연쇄살인범은 어릴 적부터 동물을 잔인하게 죽이거나 한 적이 많다' 라는 어디선가 주워들은 섬뜩한 이야기였지만 그에 앞서 나는 교육자다. 나의 말 한 마디가 이 아이의 미래를 바꿔놓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음, 솜씨가 좋네. 선생님보다 잘하겠는데? 하지만 동물도 귀중한 목숨이 있으니까 그런 실험은 아주 신중히 해야 돼. 특히 특별한 목적이 없이 단순한 호기심이나 실력연마만을 위해서 동물의 목숨을 뺏는 것은 더 신중히 해야 돼."
"네!"

효재는 그저 '솜씨가 좋다'라는 나의 말에 기쁠 따름이었는지 그 뒤의 말은 무시한 채로 그저 싱글벙글이었다. 그 표정이 살짝 무섭게 느껴질 정도로 효재는 흥분한 상태였다. 그에 반해 다른 아이들이 효재를 보는 눈은 그야말로 괴물이나 살인마를 보는 듯 했다. 사실 동물실험에서 뜻밖의 잔인함을 보여주는 아이들은 종종 있지만 효재가 조금 특별했던 것은… 그 아이의 칼솜씨가 정말 대단했던 것과는 별개로, 효재가 여자아이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효재





교무실로 돌아온 나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마침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김 선생님을 발견했다.

"김 선생님, 해부실험 같은거 할 때 유난히 막 좀 그런 애들 있잖아요. 좀 섬뜩할 정도로 잔인하게 난도질을 한다거나 즐거워 하는 애들. 정서적으로 좀 문제가 있어보이는 애들. 그런 애들은 어떻게 대하면 좋을까요"

꼰대와 무식쟁이로 가득찬 이 학교에서 그나마 내가 조금 신뢰하는 인격자, 김 선생님께 나는 조심스럽게 의견을 구했다. 그러자 김 선생님은 뜻밖의 조언을 주었다.

"제 경험상 의외로 그렇게 엿보이는 잔인함 자체는 별 문제가 없어요. 저희도 어릴 때 막 잠자리끼리 싸움 붙인다거나 개미를 돋보기로 태워죽인다거나 그랬잖아요. 애들이 원래 더 잔인하죠. 특히 유난히 집중력이 좋거나 강박이 있어서 뭐 하나 꽂히면 끝을 보는 애들은 더 그렇고. 그래서 그건 별로 문제가 아닌데… 문제는 그 이후에 왕따 같은걸 조심해야 됩니다. 역으로요. 놀란 다른 애들이, 그런 아이들을 대상으로 왕따를 하거나 그런 경우가 종종 있어요"

아… 나는 아이들이 효재를 바라보던 시선을 떠올렸다.

"네, 감사합니다"



일단 효재네 반 담임 선생님의 양해를 구해 학생기록카드를 새삼 꺼내보았다. (효재 것만 특별히 달라고 하면 담임 선생님이 이유를 물어볼 것 같아서 대충 아이들의 수업성취도가 좋아서 성적 한번 확인해보고 싶다고 둘러대고 10여명 아이들의 카드를 함께 부탁했다. 성취도가 좋다는 말에 "정말요?!"하며 기뻐하던 아영 선생님의 표정에 이유모를 미안함이 들었다) 4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이 가정방문을 한 내용에 따르면, 효재는 3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이후 할머니가 돌보게 되었다고. 전학도 그때 현재의 학교로 오게 된 것이라고 했다. 효재네는 생활보호대상자였다.

"음"

학교 성적은 평범한 편이었다. 반에서 중간정도 하는. 다만 이 지역 학생들이 전국 평균에 비해 성적이 다소 쳐진다는 것을 감안하면 중하 정도로 보는 게 좋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효재를 조금 더 주의깊게 챙기기로 했다. 오다가다 만나면 인사도 더 잘 받아주었고, 나중에 '실험'을 할 때면 꼭 같이 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그 다짐도 헛되이, 불과 열흘만에 사건이 터졌다.



"어머, 어머 어머!"

효재가 종례시간에 커터칼로 자신을 놀리고 괴롭히던 남자아이의 손목을 커터칼로 그었다. 그것도 리스트컷을 할 때의 가로 방향이 아닌, 치명적인 세로방향으로 깊숙히. 담임 선생님이었던 아영 선생님은 너무 놀라 어쩔 줄을 몰라했고, 아이들의 비명을 듣고 온 옆 반의 혜진 선생님이 그녀를 대신해 지혈은 물론 119에 신고까지 마쳤다. 아주 다행히도 병원으로 급히 옮겨진 피해자 민준이는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신경손상이 우려되어 추후 장기간의 관찰을 요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어떻게 할 거에요 선생님!"

당장 민준의 부모는 그 다음날 학교를 엎어놓았다. 말 그대로 교무실의 책상들을 여럿 뒤엎었다. 효재는 담임인 아영 선생님에게 혼나고, 불려온 할머니에게 등짝을 맞고, 민준의 부모에게 삿대질과 고함, 심지어 뺨까지 맞았음에도 끝끝내 사과를 하지 않았다. 민준의 부모는 효재를 소년원을 보낼 것이라며 소리소리를 질렀고, 효재의 할머니는 어떻게든 보상을 한다며 손이 발이 되게 빌었다. 학교에 경찰이 왔고, 교장 선생님이 어떻게든 수습하지 않았다면 언론에까지 기사가 날 뻔 했다.

"민준이가 먼저 며칠 째 효재를 놀렸어요. 부모도 없는 거지년이 맨날 개구리 요리해서 먹느라 해부도 잘하는거라고. 뱀 같은 년이라면서"

그 날 내가 부반장이었던 서연이에게 사정청취를 했고, 그녀에게 교무실에서의 증언을 부탁했다. 서연이가 효재를 위해 증언해주지 않았다면 정말 그때 무슨 일이 났어도 났을거다. 어쨌든 민준의 치료비 등을 모두 학교 측에서 보험으로 보상하고, 효재의 전학, 아영 선생님이 관리부실의 책임으로 담임에서 물러나는 것을 조건으로 그렇게 사건은 수습되었다.


"선생님…"

전학이 결정된 다음 날, 효재는 수업을 마치고 나에게 다가와 억울하다며 울었다. 끝까지 참아보려고 했는데, 돌아가신 아빠 욕까지 하는 통에 참을 수 없었다며 그녀는 서럽게 울었다.

"그래, 그래"

효재의 등을 토닥여준 나는 어쨌거나 그녀의 폭력성이 발현된 것은 아닌가 걱정되었다. 보통은 아무리 누가 놀린다고 하더라도, 뺨이나 주먹을 날리면 날렸지 칼로 상대의 경동맥을 끊으려 들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효재야, 전학을 가더라도 선생님하고 한 약속은 그대로야. 그러니까 너무 힘들어하거나 외로워 말고 힘든 일 있으면 꼭 연락해. 알았지?"
"네, 선생님"

그래서 나 한 명이라도 끝까지 그녀의 편이 되어주기로 마음 먹었다. 세상에 단 한 명이라도, 자신을 끝까지 믿어주고 아껴주는 사람 하나만 있다면 그는 어떻게든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내 믿음이었으니까. 만약 내가 10년 전에도 그랬더라면, 큰 누나를 그렇게 허무하게 잃지는 않았을텐데.



"땡땡이 치고 왔어요"

전학을 가고, 초등학교를 마친 후 중학교에 입학한 효재. 어느새 훌쩍 커진 키에 교복을 입고 스승에 날에 찾아온 그녀의 모습은 참 귀여웠다. 물론 다른 선생님들의 반응은 싸늘했고 특히 아영 선생님의 반응은 떨떠름을 넘어 "니 년이 감히 여길?" 하는 수준이었지만 어쨌거나 효재는 나에게 꽃다발을 선물했다.

"전학간 학교에서도 소문 때문에 왕따 당했고, 지금도 왕따를 당하고 있어요. 별명이 싸이코 한니발이에요. 여학생 별명 치고는 어마어마하지 않아요?"
"아 근데 겁나 웃기네"

서로 빵 터진 효재와 나. 한참을 웃던 효재는 다시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저 진짜 얼마만에 웃는지 몰라요. 맨날 울었어요. 요즘 할머니도 자주 아프시고… 걱정이 많이 되요"

전학을 간 이후로, 나는 효재를 근 2년 반 만에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전화는 두어 차례 했지만, 어쩌면 그게 내 한계였는지도 모른다. 그저 눈에 보이지 않으니 관심도 멀어진 것이었다. 새삼 반성했다.

"그러면 내일 학교 마치고 선생님이랑 할머니랑 다같이 밥이나 먹을까?"

사실 그것마저도 빈 말이었지만, 효재는 "정말요?!" 하면서 기뻐했다. 그래서 한번 더 반성했다. 앞으로는 정말로 잘 챙기기로. 다음 날 나는 학교를 마치고 효재네 집으로 갔다. 요즘에도 이런 동네가 있었나 싶은, 가파른 언덕 위의 달동네였다.

"아이고 선생님!"

효재네 할머니는 나를 바로 알아보았다. '학교 짤리고 인생 조질 뻔한 손녀를 학교 댕기게 해주신 분'이라며. 고등학교까지는 의무교육이라서 짤리는건 아니라고 옆에서 효재가 말해도 "니 년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할 소리여?" 하며 그저 혼내키신 할머님. 간만에 갈비를 뜯으며 식사를 마치고 헤어지는 길에, 차에서 쇼핑백과 박스 하나를 꺼내 효재에게 건냈다.

"선생님, 이건 뭐에요?"
"니 선물"

작은 누나와 여사친들의 조언에 따라 교복 블라우스 세 장과 교복치마, 교복바지 등, 교복 단벌숙녀에게 갈아입을 옷들을 준비했고, 사복이나 속옷 등을 사입으라고 백화점 상품권도 선물했다. 할머니와 효재는 괜찮다며 사양했지만 곧 선물에 그저 너무 감사하다며 몇 번이고 인사를 할 따름이었다.



…보통이라면 그렇게 훈훈하게 끝날 이야기겠지만, 인생이 어디 그렇던가. 좋은 뜻에서 한 선물이지만, 효재에게는 그것이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진 듯 했다.

"쌤~ 이번 주말에 영화 보여주세요!"
"그럴까"

효재는 뜻밖에, 중학생이 입기에는 살짝 과한 노출의 옷을 입고 나타났다. 아마도 그것은 내가 준 상품권으로 산 옷이리라. 추운 겨울에 입을 패딩이나, 항상 부족할 수 있는 속옷들을 사입으라고 준 것을 나와의 데이트 복장으로 사입고 나온 것은 놀랍고도 씁쓸한 일이었지만, 굳이 지적을 하진 않았다. 그것은 그것대로 상처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영화 너무 재밌었어요"
"그랬니?"
"저 영화관에서 영화 보면서 카라멜 팝콘 먹어보는게 꿈이었거든요"
"응?"

효재는 그 날 간 영화관이 태어나서 처음 간 영화관이라고 했다. 방과 후 교육활동 같은 것으로 영화관에 가게 될 때에는 영화비가 아까워서 그냥 학교를 빠졌다고. 근처의 평범한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먹은 스테이크도 그게 처음이라고 했다. 그때 마음이 조금 아팠다. 다른 아이들에게는 그저 주말 낮에 종종 있을 법한 평범한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기억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정교사 된다면 정말로 정말로 아이들 잘 챙겨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을 정도로.

"요즘에도 고양이 해부 실험 같은거 하니?"
"…가끔요"
"가끔?"

그것도 조금 놀랐다. 이제는 그런 취미는 손 뗐을 줄 알았는데.

"엄마랑 아빠는 매일 싸웠는데… 엄마가 집 나가고, 아빠는 엄마가 키우던 고양이를 밖에다 유기했어요. 돈 잡아먹는 귀신이라고. 그리고 그 얼마 후에 아빠가 교통사고로 죽었는데, 저는 그게 꼭 고양이의 저주처럼 느껴졌어요. 그리고 우리 집은 고양이들이 밤마다 집 밖에서 울어댔는데, 그래서 제가 몰래 데려올까 싶어서 나가보면 숨어버리고, 다시 집에 들어오면 울고… 그게 반복되니까 언제부턴가 고양이 울음소리만 들으면 머리가 너무 아프기 시작하는거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좋아하던 고양이가 반대로 그렇게 무섭고 싫어지더라구요. 결국 하루는 다른 길고양이를 잡아서 죽여버렸어요. 근데 그랬더니 머리가 씻은듯이 안 아픈거에요"

효재는 스테이크를 썰면서 말했다.

"근데 며칠 지나면 또 머리가 아프고, 그래서 고양이를 또 죽이면 머리가 안 아프고. 그게 반복되다 보니까 어느새 동네 길고양이가 씨가 말랐고, 결국에는 엄마가 키우던 고양이도 찾아서 제 손으로 죽였어요. 다른 고양이들도 처음에는 그냥 목졸라 죽였는데, 한번은 그러다가 발톱으로 크게 할퀴는 고양이가 있어서 홧김에 내리쳐서 죽였고, 그래도 화가 안 풀려서 칼로 난도질을 했어요"

나는 식욕이 떨어질 정도의 이야기였지만 효재의 이야기는 죽 이어졌다.

"칼로 난도질을 하면서 화풀이를 하니까, 그렇게 속이 후련할 수가 없는 거에요. 평생 그렇게 머리가 맑았던 적이 없어요. 근데 길고양이도 슬슬 씨가 마르니까 그때부터는 슬슬 무료분양하는 강아지나 고양이들 분양받아서 죽이기도 했고 뭐 그랬어요. 언제부턴가는 마냥 죽이는게 아니라, 해부도 해보고, 토끼는 구워서 먹어본 적도 있어요. 맛없었지만."

내 표정을 살피던 효재는 입을 다물었다.

"죄송해요 선생님. 너무 역겹고 무섭죠? 근데 선생님한테는 다 털어놓고 싶었어요. 저 미친 년이죠? 알아요. 근데 저는 지금도 머리가 자주 아파요. 그래서 그래요"

어떻게 들으면 '사이코패스의 탄생' 같은 소름끼치는 이야기였지만, 또 한편으로는 어린 시절의 어떤 상처와 고통, 외로움이 뒤틀린 발산을 해버린 것이 아닌가 싶은 이야기였다. 나는 이후 조심스럽게 함께 병원에 가보는 것을 권유했지만, 효재는 완고하게 거절했다.

"병원 갈 돈 없어요. 할머니도 요즘 자주 입원해서 정말로 돈이 없어요"
"돈은 내가 도와줄께"
"돈만 문제도 아니에요. 검사받았는데 나 정말로 반사회성인격정애 판정 받으면 어떻게 해요?"
"그게 그렇게 흔한게 아니야"
"제 나이에 이렇게 수많은 동물들 죽이는 여자애가 흔해요?"
"그래도 내가 본 너는 그런 아이가 아니야. 단순히 우울증만으로도 이상행동을 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어. 내 누나도 죽기 전에 이상한 일 많이 했어"
"누나요? 선생님 친누나?"

내 죽은 큰 누나 이야기를 하자 그제서야 효재의 경계심은 조금 누그러졌다. 물론 그렇다고 병원에 갈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선을 그었지만, 그래도 나를 보는 눈빛이 한층 더 깊어졌다고 해야할까.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동물이 신뢰하는 주인을 향해 보내는 눈빛 같은 것을 나는 느꼈다.



그 날 이후로, 효재의 연락이 잦아졌다. 심할 정도로. 톡이 안되면 전화를 걸어댔다. 하루종일 연락이 오니 휴대폰을 진동으로 놓기도 민망할 정도였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있을 시간이면 연락은 더욱 잦아졌다.

"효재야, 선생님은 말이야…"

당연히 알고 있다. 사춘기 시절 교사를 향한 이불킥 유발하는 연심은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겪는 추억이다. 하지만 외로움을 많이 탈 수 밖에 없는 환경에, 왕따 등으로 사회성을 기르기 어려운 상황인데다 선물과 데이트 아닌 데이트 등 특별한 추억이 있는 효재는 이미 나에 대한 마음이 많이 커진 상태였다. 스스로 컨트롤하기 어려울 정도로.

"효재야, 이건 아니야"

내 신념을 꺾고 싶지 않았고 효재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도 않았다. 카톡과 전화에 불이 나고,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받아주고 나면 10분 뒤에 또 전화를 하는 등 효재의 집착은 내 일상이 무너질 정도였지만 나는 꾹꾹 인내하며 참았다. 그러던 중 효재가 스스로 찍은 야한 사진이 톡으로 전송되어 오기 시작했다. 이건 아니였다. 결국 나는 단호하게 선을 그어야 했다.

"너, 자꾸 이러면 너 다시는 내가 널 볼 수 없게 돼"
"가볍게 동정이나 하다가 버릴 것 같았으면, 처음부터 관심도 주지 마시던가요. 저도 제 마음이 컨트롤이 안되는걸 어떻게 해요!"

이어 도착한 사진들은 자해를 한 사진들이었다. 나는 결국 며칠 간의 휴가를 내고, 효재를 데리고 반 강제로 병원으로 갔다. 응급실은 물론, 정신과 접수도 마치고 며칠 뒤 정신과에 정식으로 효재를 데리고 갔다. 약 1시간 남짓의 상담진료 후 선생님의 말씀은 생각보다 실망스러웠다.

"정신질환이라는 것은, 생각처럼 그렇게 딱딱 바로 어떤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오랫동안 상담을 받고 진료를 받으며 조금씩 맞춰 나가는 것에 가깝습니다. 효재양의 경우 우선 강박성 집착, 우울증, 망상장애, 경계성 인격장애 등 다양한 양상이 엿보이는데, 처방한 약을 꾸준히 먹고 상담해 나가면서 조금씩 정답과 치료에 다가가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네…"

하지만 효재의 정신병원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학교를 빠지고, 내가 다니는 학교에까지 찾아오기 시작한 효재의 행동과 나의 관계는 모르는 사람이 보면 딱 오해하기 좋은 것이었고, 결국 어느 날 나는 참다참다 못해 효재의 집 앞에서 효재의 뺨을 때리고 말았다.

"선생님…"
"마지막 경고야. 다신 나 찾지마. 그래 동정 맞아. 동정에 불과했으니까 너도 이렇게 집착하지마. 어디서 학생 나부랭이가 선생님한테…. 너가 길고양이한테 사랑을 느끼지 못하듯이, 나도 마찬가지야. 알겠어?"

그리고 내가 효재의 뺨을 때리는 모습은 하필이면 퇴원하고 집에 계시던 그녀의 할머니도 보았다. 할머니는 그래도 "선생님이 혼내키실만 하니께 혼내셨겠지유" 하면서 얼른 그녀를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지만, 효재와 할머니 그 둘의 눈빛은 그 이후로도 한동안 잊혀지지가 않았다.

"…"

그 날 이후로 효재의 연락은 거짓말 같이 끊어졌다. 수많은 상념들이 머릿 속을 복잡하게 만들었고, 이따끔 그날의 일을 반성하며 그래도 어떻게든 다른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보았지만 이제와서 상황을 어떻게든 돌려보기에는 너무 멀리 왔고, 만에 하나라도 다시 그때와 같은 시달림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마침 나는 다른 학교로 발령이 났고, 전화번호도 바꾸어 그렇게 효재와의 인연은 자연스럽게 끊어졌다. 애틋할 수도 있었던 어떤 나의 교육적 열정은, 최악의 형태로 결론이 나버렸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10여 년이 흘렀다. 그 사이 나는 한 아가씨의 남자친구가 되었고, 곧 남편이 되었으며, 아버지가 되었다. 나름 10년 넘는 베테랑 교사가 되었고, 효재라는 이름을 그렇게 기억에서 서서히 잊어갈 무렵…

"선생님"

언젠가의 입학식에서 나는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입학식에 참석한 효재를 발견했다. 아니, 효재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얼굴이 너무 달라져서 처음에는 알아보지도 못했다. 단발머리에 수수한 인상이었던 어린 여중생 효재는 10여년의 세월이 지나 성형티가 조금 많이 나는, 왠지 모를 색기를 띈 30대 초반의 냉미녀가 되어 있었다.

"선생님, 저 기억하시죠?"
"…오랫만이구나"
"이따가 입학식 끝나고 잠시 시간 되세요?"

'돼지엄마 아들정육'이라는 명함을 받은 후 짧은 고민 끝에 "그러면 퇴근하고 보자꾸나" 라는 답과 건냈다. 요즘 같은 세상에 교사와 학부모가 따로 자리를 갖는 것 자체가 조심스러울 일이라, 퇴근을 하고 나서 연락 후 그녀의 집 근처 작은 카페에서 만났다.

"애기는?"
"돌봄 서비스에 잠깐 맡겼어요. 하루에 최대 3시간씩 봐주는 서비스가 있어요"
"그래"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잘 지내고 있는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할머니는 잘 계시는지, 아이 아빠는 어떤 사람인지, 그날의 일에 대해서 사과도 하고 싶었고… 하지만 한참의 어색한 침묵 끝에 효재가 한 말들은 하나같이 절망적인 이야기들 뿐이었다.

"죄송해요 선생님"

효재는 또 눈물을 쏟았다. 그 날 이후의 이야기들은 모두가 참혹한 것들 뿐이었다. 그 날 이후로 효재는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불안증상은 심해졌고, 온 동네 짐승들을 원정까지 나가서 싹 다 죽이고 다녔단다. 어느 시점에는 그것도 경지에 올라서, 마취없이 내장을 몸에서 분리하고도 한참동안 동물이 살아있도록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어쨌든 밤마다 원정까지 다니며 동물을 납치하고, 죽이고 다니는데 그런 것이 동네에 소문이 안 날리가 없었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길고양이 때문에 잠 못 이루던 달동네의 주민들은 그녀에게 오히려 고생한다며 칭찬까지 했다고.

그러나 꼬리가 길었던 탓일까. 이웃동네에서 집 나간 반려묘를 찾던 한 주인에게 CCTV에 납치 현장이 찍혔고, 그것이 인터넷 뉴스를 타 그 이후 네티즌 수사대와 유기된 강아지/고양이 분양 커뮤니티에서 그것이 큰 이슈가 되었다.

"저 분…XXX님 아닌가요?"

그렇게 꼬리가 잡혀, 신상이 털리고 애니멀 호더, 애니멀 연쇄살인마로 난리가 났다. 그쪽 계열 인터넷 커뮤니티를 한동안 떠들썩하게 만들었지만, 당시만 해도 동물보호법 같은 것이 제정되기 전이었고 효재의 뒷처리도 깔끔하여 심증은 넘쳐났지만 많은 동물들을 유기/살해했다는 증거가 없었다. 결국 재산손괴 등의 혐의로 가벼운 벌금형이 전부였다고.

"어쨌든 먹고는 살아야 했으니까요. 할머니 병원비로 큰 돈도 필요했고"

안 해본 일이 없었다고 했다. 원조교제부터 노래방 도우미, 전화방 알바 등등 고수익 알바는 특히나 다. 그러나 돈 떼어먹히는 일도 수없이 많았고, 오히려 역으로 협박당해 돈을 뜯기는 일마저 있어서 돈은 얼마 벌지도 못했다고 했다. 그렇게 전전긍긍 어떻게든 몇 년을 버텼지만…

"입원비가 없어서 할머니는 집으로 퇴원하셨어요"

그리고 그 며칠 후 할머니는 집에서도 끼우고 있던 의료용 산소발생기를 밤에 혼자 몰래 조용히 떼었다고. 한달 10만원의 대여비도 그들에겐 부담스러운 돈이었다. 효재는 사실 그때 잠이 들기 전이라 할머니의 행동을 알고 있었지만 그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게 할머니는 다음 날 아침 싸늘한 주검이 되었다. 그렇게 완전히 고아가 된 효재였지만, 이미 그녀는 성년이었다.

"진짜 다 해봤어요 다"

룸빵부터 오피 등등 더러운 돈으로 짧게나마 사치도 누려보고 성형도 하고 명품도 걸쳐봤지만, 목적없는 삶의 세상 공허함은 그녀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었고, 언젠가의 성병으로 두 달 가까이 일을 쉬면서 생각을 바꿨다고 했다.

"그냥 제 재능을 써보고 싶었어요. 좋아하는 일이고, 그 일 하면 최소한 두통은 없을 것 같고."

그렇게 배운게 정육 발골 일이었단다. 여자, 그것도 성형빨 심하게 받은 20대 여자애가 발골 일을 배우고 싶다고 하니 그 어느 누구 하나 "그래" 하는 일이 없었다고. 힘 좋은 남자들도 힘들어 하는 위험한 일을 여리여리한 여자애가 잘 할 수 있을리 없다며 모두가 오히려 화를 내더란다.

"그러다가 결국 저한테 반한 어리버리한 노총각 발골사 아저씨 한 명한테 배웠죠. 집에 가서 살림해주고… 밤일도 해주고 하면서. 몇 달을 배웠어요"

씁쓸한 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효재는 그런 표정 짓지 말라면서 "그래도 저 열심히 배워서 돈 많이 벌었어요. 요샌 순수히 발골만으로는 예전같지 않은데, 대신에 정육쪽 매출이 좋아요. 저 단골도 많고 해서…" 라며 이제는 나름 잘 살고 있다고 말했다. 팔과 손목, 심지어 배에도 영광의 흉터자국이 있다고 말하며. 그래도 그 모습은 보기 좋았다.

"그럼 애기는? 남편은 뭐하는 사람인데? 그 발골 가르쳐준 사람이야?"
"네. 근데 애 아빠는 맞는데, 남편은 아니에요. 그 사람 애를 임신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와이프가 따로 있는 유부남이더라구요. 짐작이 아주 안 가던 것은 아니었는데, 설마설마했죠. 그래도 와이프 정리하고 나한테 오면 이해해주겠다고 했는데, 저를 정리하더라구요"

효재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한참동안 무엇을 말하려다가 어렵게 말을 이었다.

"저 진짜 엉망으로 쓰레기처럼 산건 맞는데요, 그래도 나름 열심히 살았어요. 남한테 자랑할 일은 한 가지도 없는데요, 그래도 정말 열심히는 했어요. 정말로 정말로"

그 이후 죽어라 일하면서 공부도 병행, 중고등학교 검정고시도 통과했다고.

"애기 학교 입학할 때가 되니까, 선생님 생각이 문득 나더라구요. 정말로… 정말로 많이 뵙고 싶었어요. 정말 너무너무 보고 싶었는데… 근데 정말 열심히 참고 또 참았는데… 애기 입학할 학교 홈페이지 들어가보니까 선생님 이름이 있더라구요. 설마설마 했는데, 사진 보고 정말… 진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어느새 울먹울먹 하는 효재의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그 지옥의 수렁을 어떻게든 버티고 헤쳐나온 그녀가 대견하게 느껴졌다. 그녀 말마따나 엉망으로 산 건 맞을지 모르겠지만… 살아 남아주어서 고마웠다.

"그래 효재야, 고맙다. 선생님이 고마워. 버텨줘서 고마워"



그리고 헤어져 집에 돌아노는 길, 나는 차마 바로 집으로 가지 못하고 아파트 외부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는 다시 근처 횟집에서 혼자 술을 마셨다. 너무 많은 생각들이 내 머릿 속에서 맴돌았다.

안쓰러운 마음, 미안한 마음, 고마운 마음… 만약 내가 그녀의 삶에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부터 그날 내가 한번만 더 참고 어떻게든 좋게좋게 풀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 나중에라도 연락해서 어떻게든 도와줄 수 있었다면 그녀의 지옥을 조금은 덜 겪게 할 수도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부터, 아니면 맨 처음 개구리 해부 날에 크게 혼을 내서 그녀의 폭력성을 조금이라도 잠재울 수 있었다면, 아니면 조금 더 신경을 기울여서 아이들이 그녀에게 처음 왕따를 하려고 했을 때 못하게 했더라면… 수많은 생각에, 소주를 한 병 더 비워도 취하지를 않았다. 한편으로 '나는 하는 데까지는 했다, 내가 아니었으면 더 심하게 안 좋아졌을 수도 있어'라는 자기변명도 속으로 외쳐보고.



그리고는 집으로 가는 길, 나는 아까 헤어지기 직전에 효재가 한 말이 생각나 혼자 또 피식 웃었다.

"선생님, 아직 약속 유효한가요? 종종 연락 드려도 되죠?"

내가 그 말에 새삼 소름을 느끼며 쉽게 대답을 못하자, 효재는 웃으며 "됐거든요? 저 이제 저 좋아하는 단골집 사장님들 많아요. 이쁘다고 추근대는 남자도 많고. 배 나온 선생님 이제 안 좋아해요" 라며 농을 훅 던진다.

그제서야 "아 누가 뭐래니. 연락 해 연락 해. 선생님도 이쁜 제자 있다고 자랑 좀 해보자 야" 하면서 농을 받았다. 그래, 그렇게 부디… 효재가 좋은 엄마, 아니, 스스로의 인생을 잘 살아가면 좋겠다. 선생 자격도 없는 나를 끝까지 선생님이라며 반가워 해주는 제자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그렇게 그날 밤 잠을 못 이루고 참 많은 생각을 했다.

< 끝 >

서킷에서 [유료구독자 전용] 맛보기

승영이 형은 빡세게 코너를 돌면서도 그냥 카페에서 대화하듯이 자연스럽게 이야기 한다. 이런 멀티테스킹 능력은 참 부럽다.

"레이싱 취미에 맛들리다보면 계속 차에 돈이 들어가. 당장 초보자가 서킷 한번만 돌려고 해도 장비가 얼마냐. 라이센스에 세션비에 헬멧부터 글러브에, 레이싱 수트에 한스까지 장비 비용 들어가지, 타이어랑 오일류도 손 들어가지, 튜닝질 하다가 결국에는 차 바꾸고 싶어지고… 바꾸는 차도 결국에는 중고로라도 스포츠카 타게 되어 있어. 요즘 같으면 벨엔이다 뭐다 선택지라도 있지만 예전에는 뭐 결국에는 무조건 외제차 아니면 젠쿱이었거든. 그리고 어디 거리나 가깝냐고. 인제나 영암까지 왔다갔다 해야되는데. 기름값은? 가서 뭐 사먹는 비용은? 가서 또 뭐 혼자 노나? 어울려야지. 그 돈은?"

테크니컬 코너를 빠져 나온다.

"이게 처음에는 재밌어 미칠 거 같지. 그래서 돈 들이고 시간 들이고 사람 만나고 신나서 별 짓 다해. 돈 있는 애들은 진짜 미친 짓 엄청해. 근데 어느 순간에는 꼭 현타가 온단 말이야. 지가 무슨 진짜 레이서도 아닌데 기록 1초 줄이겠다고 매년 몇 백 몇 천 들이는게 사실 말이 안되는 일이거든. 그러면 결국 선택의 순간이 와. 그대로 그렇게 주말에만 가끔 한번씩 가서 서킷 도는 주말 드라이버가 되던지, 아니면 진짜로 그쪽 일을 하던지."

나 역시 공감하는 이야기다.

"근데 또 전업으로 하자니 힘들지. 팀에 뭐 자리나 있나? 이래저래 힘든건 진짜 힘들고. 고생해서 대회 나가서 상 타고 해봐야 결국 한국 시장 파이로는 전업 드라이버는 꿈 같은 이야기고… 사실 답 없는 취미생활인건 마찬가지가 되는거지. 그러니까 결국에는 유튜브 하고 리뷰하고…다 그래서 그래. 내 봤을 때는 한국에서 레이싱 하는 모든 사람 통틀어서 그냥 이 동네 살면서 주말에 가끔 오피셜 알바나 하는 사람이 최고 똑똑한 사람이고, 제일 멍청한게 나처럼 드라이버 하다가, 미케닉 하다가, 감독이네 뭐네 매니져 하다가 인생 허송하는 새끼야."
"형은 그럼 진짜로 접을라고?"
"아주 접는건 아니고. 그냥 이제 지수 사업하는거나 도와줄라고. 여기에 이제껏 박은 돈 다 얼마냐. 요즘 그게 너무 아까워"

형은 차를 피트로 뺐다. 헬멧을 쓰고 있어서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묘하게 무언가를 다짐한 사람의 느낌이었다.

"가자"




서킷에서





평일 오후, 인제 서킷으로 향한다. 전 차주가 배기부터 해서 이것저것 싹 다 빡세게 손 댄 내 아베오 RS 1.4 터보. 원메이크 대회 타던 차라고, 서킷 타던 차를 무슨 병적관리라며 자랑하더만 막상 인수하고 나니 손 볼 곳이 꽤 많았다. 여튼 기분좋게 뻥 뚫린 길을 달린다. 아침 늦잠을 자는 바람에 휴게소에서 점심을 먹고서는 거의 2시가 다 되어서야 도착했다. 주차를 하고 있노라니…

'어?'

엔진체크등이 들어왔다.

"아…또 뭔데. 하, 진짜 참"

오늘따라 유난히 더 텅텅 비어있는 인제 스피디움 피트 뒷편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부랴부랴 인포카를 물리고 있는데 승영이 형이 저 멀리서 내 차를 알아보고 손을 흔들며 다가온다. 차에서 내려 인사를 하노라니 어깨를 툭 치며 "밥 먹었냐?" 물어본다.

"먹고 왔죠. 지금이 몇 신데"
"에이, 같이 라면 먹을라고 했더니"

아쉬워하던 형은 힐끗 차를 보더니 "어?" 하며 매의 눈으로 묻는다.

"뭐야? 엔진체크 떳네?"
"아마 촉매쪽 문제일 거에요. 고질병이야 이거. 아 진짜…"
"그래? 근데 엔진소리도 좀 이상한데?"

내가 들었을 때는 잘 모르겠는데. 하지만 망했다. 다른 사람이 그렇다면 "아냐" 하고 말텐데, 승영이 형이라면 조금 이야기가 다르다. 슈퍼 6000 미케닉이자 전직 레이서 출신 승영이 형이 그렇다면 그런거다.

"잠만. 시동 껐다가 다시 켜봐. 아니다 일단 내려봐"

키를 받아 운전석에 올라타고 이것저것 만져본 뒤 소리를 듣고는 본넷을 열고 다시 소리를 들어본 그. 어깨를 으쓱한다.

"음, 이거 촉매 쪽만 문제는 아닌거 같은데?"
"아 진짜? 아…"
"일단 용진이네 팀 크루들도 경기차 세팅 손본다고 와 있으니까 조금 봐달라고 할께. 야, 됐고 나 지금 너무 배고프다. 밥 먹자"
"형 나 밥 먹고 왔다니깐?"
"아 그럼 옆에서 아이스크림이라도 빨어"

왜 이렇게 평소답지 않게 자꾸 같이 밥 먹어달라는지, 짜증나서 나도 모르게 반존대가 자동으로 왔다갔다 한다. 그러니 그 이유는 챔피언스 클럽 식당에 가자마자 알았다.

"안녕하세요"

새파란 원피스를 입은 훤칠한 키의 미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색하게 "아, 예예" 하면서 인사를 받노라니 승영이 형이 "아 이 새끼, 니가 왜 얼굴이 빨개져. 형 여친을 보고" 하면서 낄낄댄다.

"아니이, 너무 미인이시니깐"

아까 밥을 먹었지만, 라면을 결국 시켰다. 돈까스 두 개에 라면 하나를 계산한 승영이 형은 정식으로 여친 지수씨를 소개했다. 상당한 글래머에 가슴까지 상당히 파인 옷이라 마주보기 꽤나 민망했다. 가슴에서 얼굴로 시선을 올리면 화려한 눈화장의 눈매가 부담스럽고, 고개를 내리면 가슴이 보인다. 정신없이 버벅대다가 겨우 제대로 인사를 했다. 그러다 나이 차이를 듣고 나도 모르게 코웃음이 터져나왔다.

"아휴 그래도 그럼 나이 차가 11살… 아 형, 너무 하네"
"야, 11살이래두 둘 다 나이가 아주 없는 나이는 아니잖아. 마흔이랑 스물 아홉인데. 안 그래?"
"오빠가 도둑놈은 맞지 뭘"
"어어?"

웃으면서 농담을 하는 지수씨. 모델 일을 하다가 은퇴하고 자동차용품점 겸 매니지먼트 일을 같이 한다고.

"사장님이세요? 와 그럼 힘드시겠어요"
"처음에는 그랬는데, 요즘에는 오빠가 많이 도와줘서 그렇게 힘들지는 않아요"
"아 요즘에 형이 그래서 바빴구나. 근데 그러면 형네 센터는?"
"그건 영록이한테 지분 내꺼 넘기고, 이제 그거 싹 다 영록이가 하기로 했어. 나야 뭐 2억 박아서 5억 받았는데 땡큐지"

거기까지 듣자 조금 감이 왔다.

"뭐야, 갑자기 현금 왜 만드는데. 형 결혼하려고?"

그러자 형과 지수씨가 서로 마주보더니 승영이 형이 "야 이 새끼 촉 지리네" 하면서 감탄한다.

"아 뭐야. 형 나는 평생 혼자 살 줄 알았는데. 나랑 독거노인 하기로 한거 아냐?"
"무슨 악담이야. 야, 형도 장가 가야지"

근데 또 문득 든 생각이 불과 6개월 전에 이 형 솔로였는데. 그 새에 결혼? 꽤나 여자한테 푹 빠진 모양이다. 뭐, 지수씨 외모 보면 빠질만하지만.

"정환씨는 여자친구 없어요?"
"없어요"

그러자 형이 한마디 거든다.

"니가 주변에 동생들 좀 소개 시켜줘"

오.

"아 형 무슨 소리 하는거야"

한번 튕겨봤지만, 지수씨는 반색하며 묻는다.

"내 주변에 솔로인 동생들 많은데, 소개시켜줄까요?"
"저야 좋죠!"
"조금 이따가 올 거에요. 대충 1시간쯤 있다가?"
"오늘이요?"


(중략 : 본 소설은 스타일박스 유료 메일링 서비스 구독자 전용입니다)


용불용설

형은 천재였다. 엄마 말로는 7살 때 미적분을 풀 수 있었다는데, 그건 엄마 말이고 형의 말에 따르면 이미 그 이전에도 개념을 당연히 이해하고 있었으며 그냥 검사 받았던게 7살일 뿐이란다. 형은 초등학교 2학년 때 큰 이모부의 도움을 받아 국가영재지원 프로젝트인가 뭔가로 엄마와 함께 미국 유학을 떠났다.

"아빠, 밥 먹자"

화물차 운전기사와 다방 레지 사이에서 그런 천재가 나왔다는 사실은 실로 기적이라 할 수 있지만, 본래 좋은 일에는 항상 마가 끼기 마련이다. 보호자 1인에 대한 지원금도 나오기는 했지만, 변변찮은 직업도 없는 상태로 천재를 돌보아야 하는 미국살이가 결코 쉬울 리 없었고 엄마는 결국 바람이 났다. 힘들었다고 바람을 피운다는게 합리화 되는 건 아니지만.

"으어…"

한국에서 힘들게 밤낮없이 일하며 미국으로 생활비를 보내고, 팔자에도 없는 강제 기러기 남편 노릇을 몇 년이나 했지만 그렇게 배신당했다는 충격에 아빠는 결국 쓰러졌다. 뇌출혈이 왔고 지금처럼 이렇게 하루종일 방에서 누워 지낸다. 자연스럽게 엄마와 아빠는 이혼을 했고, 엄마는 형을, 나는 아빠를 보살피게 됐다. 중학교 2학년 나이로.

"아빠 덥지? 선풍기 좀 틀어줄게"

다행히 보험과 조합의 지원비, 집 담보 대출로 어느 정도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내가 스물넷이 된 지금에 이르러서는 당장 다음 달 전기요금 7,900원이 부담스러운 지경에 이르렀다. 나도 뭐 학교 다닐 때 나름 열심히 공부했고 그리 성적이 썩 나빴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인서울 대학교를 장학금 받으면서 다닐 정도는 결코 아니었기에 대학은 포기했다. 하루 5시간 파트타임 알바 2개를 하며 아빠를 돌보았다. 차라리 그게 돈이 더 되기도 하고, 풀타임 일자리는 오히려 힘들었다. 중간에 아빠를 돌볼 수 없어서.

"연애는 안 해?"
"모쏠이에요. 연애할 시간도 없고 돈도 없고, 상황도 안 좋고"

그런 처지에 나에게 연애는 당연히 사치 중의 사치일 수 밖에 없었다. 당장 휴대폰비조차 부담되어서 지난 달에 없앴다. 오전에 한번씩 들리는 요양보호사 아줌마한테는 알바 때 정말 급한 일이 생기면 그냥 가게로 연락을 달라고 했다. 그런 지경이니 연애가 무슨 말도 안되는 헛소리인가. 수많은 꿈과 희망을 나는 일찌감치 접었더랬다. 사실 아버지도 10년 가까운 투병 생활 끝에 점점 상태가 안 좋아지고 있었고, 나는 내심 아빠가 죽기를 바라고 있었다. 패륜이라고 욕해도 좋지만 이 지옥의 사슬을 끊고 싶었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는 아빠가 죽으면 나도 죽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제와서 내 인생이 크게 좋아질 것 같지도 않았으니까.

"야야야, 야! 화장실 청소고 나발이고, 빨리 전화 받아봐"
"어? 왜?"
"병원이래. 보호자 찾는대!"
"뭐?"

아빠가 발작을 일으켰다고 했다. 다행히 요양보호사 아줌마가 있던 시간이라 천운이었다. 아니 정말 천운이라고 할 수 있을까. 병원으로 가면서 차라리….

"… …"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그보다 수술비, 하루에 수십만원이라는 중환자실 병원비 부담에 눈 앞이 캄캄해졌다. 정말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를 상황이 왔다. 사채라도 끌어써야 하나. 하늘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냥 강제퇴원 시켜야 하나.

"누구세요?"

그때였다. 형이 나타난건.




용불용설





수없이 원망했던 형과 엄마였지만, 적어도 형은 나름대로 고생은 했던 것 같다. 바람난 엄마는 한인타운에서 만난 새 남자'들'과 놀아났고, 형은 어머니에게 사실상 방치되었다. 13세에 대학에 들어갔는데, 방학 기간 내내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기숙사에서 지냈단다. 엄마 역시 그를 찾지 않았고.

"왜 말을 안 한거야?"

진작에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그때는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고 했다. 게다가 이혼 도장을 찍고 돌아온 이후의 엄마 말로는 아버지도 나도, 그냥 자신들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단다. 형 역시도, 자신 때문에 유학을 와서 집안이 풍지박산 난 것이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아니 그보다 자기 때문에 가족이 깨졌다는 죄책감 때문에 차마 연락을 못 했다고 한다.

"아무리 그래도 한번쯤은 한국에 올 수도 있는거 아냐? 아니 연락 한 번이라도. 엄마 아빠는 그렇다 쳐도, 나는?"

형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변명거리를 찾지 못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대신 자신의 이후 이력을 말해나갔다. 그러나 그건 내 화를 돋울 따름이었다.

"열세살에 대학 가고 그런거 하나도 안 궁금해. 나한테 필요한건!"
"…내 말 끝까지 들어"

어차피 엄마가 있는 집으로 가보아야 양아치년놈들의 더러운 애정행각 밖에 볼 것 없고, 한국으로 돌아가면 더더욱 답 없을테니 그냥 차라리 학문에 집중하기로 했단다. 다시 말하지만 형은 천재였다. 천재가 가족을 포함한 세상과 연을 끊고 학문에 집중을 했으니 어떤 결과가 나타났겠는가.

"이게 뭔데"
"엄청난 약이야. 이 주사 한 방이면…"

형은 유전공학을 전공했다. 형이 유전공학을 전공한 이유도 웃기다. 우리 부모님 같은 평범 이하의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과 같은 아이가 어떻게 태어날 수 있었는지 궁금했단다. 게다가 유전공학을 전공한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을 주었는데, 세상에 자기만 천재인 줄 알았는데 만만찮은 천재들이 수도 없이 많은 분야라서 더 좋았단다.

"그게 좋을 일인가?"
"당연히"

어쨌든 형은 꽤 안정적인 성취를 이뤄가고 있었지만, 대학교를 2년 만에 졸업하고 박사과정을 밟기로 했을 때 잘못된 선택을 했단다. 물론 그건 내 평가다. 형은 그 진 박사인가 하는 사람을 만난 것을 인생 최고의 행운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세상을 바꿀 연구를 하고 싶다"

수많은 글로벌 대기업과 무려 노벨상 수상자를 지도교수로 하는 세계적인 명문 연구실의 기회를 뿌리치고, 진 교수라는 사람의 거지 같은-이건 형이 쓴 표현이다- 연구소를 택했다. 설비가 거지 같았다는 말이 아니란다. 오히려 설비는 아마 세계 최고 수준일거라고. 단지 무슨 비밀집단 마냥 은밀하고 답답하고, 연구하는 주제가 비현실적인게 매력이자 문제일 뿐이라고.

"중국에서 연구했어"
"중국?"

중국의 국가생명외방연구소. 신장위구르 자치구 인근에 있는, 중국의 국영연구소라고.



"여기부터는 좀 너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으니 내가 차근차근 말해줄게. 인간의 유전자에는 수많은 정보가 담겨있어. 하지만 직접적으로 뼈와 피, 근육, 조직 등 단백질을 만드는데 쓰는 정보가 담긴 유전자는 그 중에서 단 2%야. 그래서 옛날에는 그 98%의 데이터를 쓸모없는 자료라고 해서 '정크DNA'라고 불렀어"

생각보다 형은 설명을 꽤 잘했다. 외국에 오래 살았으면서도 한국어 발음도 제법 또박또박했고. 오히려 영어 발음이 미국식도 아니고 중국식도 아닌 그 중간이라 조금 이상할 따름이지.

"하지만 지난 10년 사이, 추가적으로 연구가 진행되면서 모든게 달라졌어. 쓸모없는 자료라고 생각했던 98%의 유전자에 사실은 무수히 많은 중요한 데이터들이 담겨 있었던거야. 유전자가 어떤 식으로 발현되는지, 세포를 어떻게 분열시키는지부터 암이나 각종 유전질환, 노화 관련 데이터 등등. 왜 자폐증이 생기는지에 대한 연구도 거기서 나온거고. 아직까지는 이해하지?"
"어 계속 말해"

형은 중간중간 내가 이해를 하고 있는지 물어왔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고.

"그러나 여전히 일부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데이터들도 있지. 어떤 유전자의 경우에는 현재 인류에게는 전혀 의미없는 내용도 들어있거든. 마치 컴퓨터 하드에 '내 컴퓨터에 이런 자료가 왜 들어있지?' 싶을 정도로 기억조차 희미한, 전혀 나와 상관없어 보이는 그런 파일이 있는 것처럼"
"응"
"근데 만약에 그런 쓸모없어보이는 데이터에 정말 뜻밖의 정보가 있다고 쳐봐. 예를 들어서 그 정크 DNA에 '아가미로 숨쉬는 법'에 대한 데이터가 있고, 그걸 어떻게든 활성화 시킬 수 있으며, 사람 몸에 아가미를 달아준다면 정말로 물고기 인간 같은걸 생명공학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거야. 쉬운 이야기는 당연히 아니지만. 그걸 군사용으로 쓸 수 있다면 엄청난 가치가 있겠지? 그게 내 연구의 시작이었어"

…솔직히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앞서 들은 모든 이야기가 거짓말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형이 어쩌면 정신병이 걸려서 돌아온게 아닌가 하는 식의. 아니 더 나아가 이 사람이 정말 형이 맞나 하는 의심까지 했을 정도다. 왜 나를 골랐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사기를 치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고. 막말로 닮긴 했지만 10년도 전에 헤어진 형의 얼굴 따위 어떻게 변했는지도 모를 일 아닌가.



"뭔 의심이 그렇게 많아"
"힘들게 살아서 그래. 온갖 쓰레기들이 달라붙거든. 그리고 형이라면 그런 황당한 말 듣고 사람을 믿을 수 있음?"

형은 나와의 어렸을 적 정말 희미한 기억을 쥐어짜내야 했고, 십수 년 넘게 연락은 커녕 이름도 꺼내 본 적 없는 사촌들의 이름을 기억해내야 했다. 이름 한 자 힌트를 주긴 했지만, 그걸 기억하는게 더 신기했다. 내 왼쪽 새끼 발톱 밑의 상처가 형이 깨물어서 난 상처라는 걸 기억하는 것은 어쩌면 그의 나에 대한 미안함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은 화가 누그러지기도 했다.

"자, 중국 여권. 이제 믿냐?"
"그럼 국적이 지금 중국인이야?"
"어"
"미친!"
"그 정도로 중국에서 중요 인재 취급한다는 이야기지"
"연구소에서 짤렸다며"
"원래 요즘 중국 기업들 분위기가 좀 그런 구석이 있어. 공산주의 국가였다가 뒤늦게 자본주의 맛을 봐서 그런지, 오히려 자본주의 국가보다 더 심하게 이익을 쫒는게 있어"

형은 어쨌거나 연구 실패의 책임을 지고 짤렸단다. 천억대 연구비가 투입된 연구가 실패로 돌아갔으니 당연한 일 아닌가 싶었지만, 형 말로는 그 연구소에서 천억은 돈도 아니라고 했다. 단지 단물이 빠졌다고 판단해서 버린 것 뿐이라고.

"그래도 갈 곳은 많을거 아냐. 그런 엄청난 곳에 있었으면"
"아니"

형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중국의 국영연구소에서 일한 연구원이 서구권 글로벌 기업이나 주요한 메이저 연구실에 간다는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처음에 자기가 중국에 갈 때만 해도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준 간첩 취급이라고.

"그럼 중국 내에서는?"
"법으로 막혀있어. 한국에서도 정보나 연구 관련해서는 몇 년 간 동종업계 취업금지 뭐 그런 거 있잖아"
"벌어놓은 돈은?"
"아까 병원비 지불하고, 또 한달 정도 아버지 입원비 낸다고 치고, 그럼 대충 한 이제 5백만원 정도?"

큰 돈은 맞고, 정말 너무 고마운 것도 맞지만… 그래도 형이 더 큰 돈을 갖고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막연하지만, 그냥 한줄기 아주 작은 희망이었다. 조금 전의 이야기들을 듣는 중에도 내 팔자가 잘하면 바뀔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부질없는 생각을 했다.

"그 표정은 뭔데"
"그럴 거면 그냥 미국 연구실 가지 그랬어. 노벨상 수상자도 형한테 오라고 했다며"
"그랬으면 이게 없었겠지"

형은 웃으면서 주머니에서 아까 보여준, 노란 약이 꽉 차있는 주사기를 다시 꺼내들었다. 나는 물었다.

"아까부터 그게 뭔데"

형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 용불용설이라고 알아? 동물의 신체 기관은 쓰면 쓸수록 발달하고, 안 쓰면 퇴화한다. 그래서 목이 짧은 기린이 맨날 높은 가지에 달린 나무를 따먹다 보니 목이 조금씩 길어졌고, 그 후대에 이어지면서 결국 지금의 기린이 됐다라는 식의 주장"
"개소리 아냐?"
"맞아. 개소리야. 그런데 현대 최신의 진화 연구에 따르면 또 아주 틀렸다고 말하기는 애매한 부분들이 존재해. 후성유전학이라고, 부모가 이미 태어난 이후에 얻은 유전적 특성이 자식에게 정말로 대물림이 되는 현상들이 있어. 이건 이미 많은 실험과 역사적…"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아니 대충 알겠는데, 그게 그 주사랑 뭔 상관이냐고. 그거 뭐 마약이야?"
"사람 몸 속에 있는 유전적 가능성을 발현시키고, 그 형질을 유전시킬 수 있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전자 개조 주사제"

판타지 같은 이야기에 코웃음이 났지만, 그래도 진지하게 물었다.

"그러니까 키가 크고 싶다고 그 주사 맞으면 내 키가 커지는거야? 근데 유전이라면서. 내 자식은 키가 크겠지만 나는?"

형은 어깨를 으쓱했다. 미드 같은데서 보는 동작이라 좀 느끼했다. 정말로 저런 동작을 하는 사람이 있네.

"유전자를 조작한다고 했지 니 정자를 조작하는게 아니라고. 니가 손톱 자르면 평생 그 잘린 채로 손톱이 있냐? 유전자가 니 새 손톱을 조금씩 만들잖아. 니 몸의 모든 세포도 다 그런 식이야. 늙은 세포 죽고 새로운 세포 만들고. 초당 380만개의 세포가 새로 만들어져. 그래서 인간의 모든 몸이 새로운 세포로 싹 다 바뀌는데 드는 시간은 약 80일이야. 얼추 세 달이면 사람은 사실상 누구나 새로 태어나. 유전자 정보를 살짝 조작하면 딱 80일 만에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어"



형이 일단 머리가 좋은건 알겠다. 이건 망상병 환자의 개소리라고 생각해도 일단은 재밌는 소재다. 이런걸로 영화 나오면 재미있을 거 같은데.

"여튼 그럼 그 주사 맞으면 뭐가 어떻게 되는데. 헐크라도 됨?"

그러나 형은 아까와는 또 다른 소리를 한다.

"근데 아무렇게나 개조하면 망하는거야. 바로 암 세포가 되어버리니까. 진짜 인간의 몸은 섬세함을 넘어서 그냥 신이 만든거 맞는거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될 정도야. 컴퓨터 코딩 배워봤으면 알텐데, 이거 하나 고치면 저기서 문제가 터지고 저거 고치면 또 어디서 문제가 생겨. 진짜 유전자 개조는 그런거야. 직접적인 개조는 항상 문제를 만들더라고. 그래서 조금 안전장치를 만들었지"
"그게 뭔데"
"용불용설에서 힌트를 얻었지. 자주 쓰고 자주 하는 행동에 반응하도록, 몸의 포텐셜을 늘려주는거야. 니가 팔 근육을 빡세게 운동한다? 그러면 스테로이드 쓰는 것보다 빨리 팔근육을 키울 수 있어. 니가 달리기 운동을 자주한다? 그러면 다리 근육과 관절, 뼈가 강해져서 점점 더 빨리 달릴 수 있게 될거야. 심폐기능도 마찬가지. 생각도 마찬가지야. 평소 뭔가를 자주 외우려고 노력한다? 암기력이 좋아질거야"

점점 더 형의 말이 황당무개해지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는 확실히 알겠다.

"그러니까 지금 30키로로 달리는 차의 속도를 100키로로 바꿔주는건 아니지만, 엔진부터 속도계까지 원래 200키로가 한계점이면 한 400키로까지 달릴 수 있게 해준다는거 아냐. 맞지?"
"그래, 바로 그거야. 다만 심장 같은 불수의근이나 림프계 같은건 뜻대로 움직이는게 아니니까 뭐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제약이 있게 잘 조정을 해뒀지만…"

정말로 SF영화에나 나올 법한 꿈의 기술인데 나는 시큰둥 해졌다.

"근데 무슨 그런 대단한 기술을 발명했다는 사람이 짤려"

형은 이번에도 어깨를 으쓱했다.

"부작용이 장난 아니거든. 이 주사 맞으면 60%는 암 걸려. 그것도 아주 지독하게 빨리 진행되는 암. 무조건 80일 안에 온 몸의 모든 세포가 암세포가 되어서 죽어"

실패작이구나. 하지만 그래도 60%면 나름 해보겠다는 사람 꽤 나오지 싶었는데, 다음 말이 문제였다.

"동물실험에서 100% 안전하다고 판명나도, 인간에게 임상실험하면 무조건 암이 되어버려. 온 몸의 모든 장기에서 궤양이 생기고 피똥을 싸면서 암이 발병을 해. 그걸 어떻게든 안정화 시킨다고 시켰는데도 여전히 암 발병율이 60%야. 여기까지 오는데 몇 명이 죽었는지 몰라"
"그게 무슨 소리야"

형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인간 대상으로 실험한거야. 생체 실험. 마루타 같은. 근데 더이상 못하게 됐어. 외국에서 신장 위구르 지역의 인권 문제를 걸고 넘어져서, 실험 자체가 접혔지"
"형이 마루타 실험을 했다는거야?"

앞의 이야기들이 기술적인 황당무개함이라면 이건 윤리적 황당무개함이다. 중국이니까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에 앞서 충격적인 이야기인데도 전혀 현실감이 없어서 오히려 부담이 없었다.

"실험이 너무 계속 철저하게 실패하니까 방향의 접근성을 바꿔봤어. 범용성을 갖는 약물이 아니라, 특정 유전자에서의 안정성을 높히도록. 내 유전자 기반으로. 내 유전적 복제인간을 대상으로 실험해서 60%까지 끌어올렸는데 실험이 접힌거야"

복제인간이라… 헛웃음을 겨우 참았다. 하지만 그 다음 말은 내 입가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겨우 60%까지 안정성을 끌어올렸는데 그 연구가 도저히 포기가 안되더라. 여기서 접으면 그 많은 사람들 다 개죽음 되는거잖아. 근데 그런 국영 연구소에서 그런 실험약을 어떻게 몰래 갖고 빠져나올 수가 있겠어.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이거야"

형은 팔뚝에 주사 바늘 자국을 내밀었다.

"마지막 실험약의 6회 투여분을 내 몸에 주사했어. 내가 살아서 한국까지 올 수 있는, 그리고 내 피에서 걸러서 딱 1회 분을 만들 수 있는 분량. 그리고 한국에 오자마자 내 피를 걸러서 이렇게 주사제를 다시 만들었지. 참고로 나 암이야. 오늘 아침에 피똥 쌌어"

나는 입을 닫았다. 한참 후에야 그 주사기를 건내받고 말했다.

"이걸로 뭐 어쩌라고. 나도 맞고 암 걸리라고?"

형은 또 어깨를 으쓱했다.

"니 마음대로 써. 어차피 내 유전자 기반이라 생판 다른 사람들이 쓰면 보나마나 암으로 죽어. 그나마 너는 나랑 형제니까 확률적으로 2할 정도 성공 가능성이 있어"

20%의 확률로 초인이 되고, 80% 확률로 암에 걸린다고? 그럼 이게 자살약이지 뭐냐.

"나는 내일 아침 아빠 얼굴 잠깐 보고 다시 중국 돌아간다"
"중국은 왜"

형은 웃으면서 말했다.

"내 친구고 뭐고 그나마 아는 사람은 이제 다 중국에 있어. 한국에서 내가 뭐할건데. 근데 죽기 전에 너랑 아빠는 보고 싶더라. 돈은 많이 못 가져와서 미안해. 근데 나도 여기까지 오느라고 여기저기 돈 찔려주느라 남은 돈이 얼마 없었어. 그나마 남은 돈도 투석하면서 약 걸러내는라 정말 남은게 없어. 그래도 조금은 도움이 되서 다행이야"

누군가에게는 대략 학살을 주도한 미친 과학자일지 몰라도, 적어도 지금 내 상황에서는 암에 걸려 살 날이 얼마 안 남은 형일 따름이다.

"밥이나 한 끼 해"
"장기 궤양으로 피똥 쌌다니까. 밥 먹으면 더 빨리 죽어"
"참 나"
"한국 구경이나 시켜줘. 디디피 한번 가보고 싶었어"



다음 날 형은 기저귀를 차고 비행기에 올랐다. 떠나기 전 형은 병원에서 아빠를 보고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빠는 의식이 없었고. 생각보다 애틋함은 없었다. 형은 아주 드라이한 성격이었다. 내 아주 어린 기억 속의 형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암 걸리는 약"

나는 그저 주사기만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만약 아빠가 죽으면 그 주사를 맞을 생각이었다. 형의 말은 애초에 믿기지도 않고, 만약에 암에 안 걸린다고 해도 또 다른 부작용이 있을지 어찌 아나 싶었다. 단지 바로 그래서 맞을 생각이었다.

살아서 뭐하나.

가족도 없고, 배운 것도 없고, 대한민국 모두가 들고 다니는 그 흔한 휴대폰조차 없다. 아빠 병원비 내고 대충 5백만원이 남는다는데, 사실 그것도 여기저기 돈 빌린거 갚고 나면 끝이다. 빈털털이라도 살아면 있으면 좋은 날 온다는 말, 참 여기저기서 많이 듣기는 했지만 그런 말을 들으면 그냥 너무 허탈해서 코웃음만 난다.

그냥 콱 죽어버리는게 낫지.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한 벌인지, 그 직후 중환자실에서 간호사가 안 좋은 표정으로 나왔다.

"방금 전 보호자 분, 아버지 환자분, 돌아가셨습니다"

아직 신입인지 간호사는 조금 횡설수설하며 아빠의 죽음을 알렸다. 나는 쿨하게 알겠노라며 이후 절차를 알려 달라고 했다. 장례는 치르지 않기로 했다. 올 사람도 없었고. 화장한 유골은 대충 집 뒷 산에 뿌렸다. 아빠랑 휠체어 타고 다닌 유일한 산책 코스니까.

"후우"

울음도 나지 않았다. 울음은 모든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소주 첫 잔을 들이켰을 때부터 터져 나왔다. 그것도 딱 한 3분 정도, 짧은 통곡이었다. 그게 다였다.



술이 웬수다. 정신을 차려보니 팔에 주사가 꽂혀 있었다. 희미한 기억이 나를 일깨운다. 내가 내 팔에 주사를 놨다. 이번에는 또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진짜로 자살용 주사를 스스로 맞췄어. 미친 놈.

"무제한 요금제요"

예상 일정보다 아빠가 더 빨리 죽은 바람에 돈이 생각보다 조금 더 남았다. 약 2천만원 정도. 형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이제 살 날이 두 달 남 짓 한 상태. 그 2천만원 중에 5백은 일단 기존에 여기저기서 5만원 10만원 빌린 돈들을 갚았다. 남은 천오백으로 나는 원없이 살다 죽을 생각이었다. 휴대폰부터 개통했다. 옷도 사입었다. 겨우(?) 나이키였지만.

"…"

사치를 부린다고 부린게 겨우 치킨 두 마리, 피자 한 판이라는 사실에 스스로 어이없어서 웃음이 났다. 그래도 소주 안주로 피자도 꽤 괜찮구나 하는 정보를 얻은 것은 이득이었다. 어쨌거나 조금은 더 쓰기로 했다.

"어머 혼자 왔어요?"
"네"

사실 나도 여자도 만나보고, 막 화려하고 근사하게 놀아보고도 싶었다. 근데 아는 여자도 없고, 내 주제에 클럽에 가면 당연히 입뺀 당할 거 같고, 그렇다고 또 성매매 하는 뭐 그런 곳에 가긴 쫄려서, 그냥 매번 알바 다니던 역 근처 앞에 있던, 이쁜 여자들 종종 그 앞 식당에서 보이던 룸살롱에 가봤다. 돈지랄이라는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졌지만, 어차피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하는 생각에 대범하게 돈 쓰기로 했다.

"오빠 나 술 한 병 더 시킬께"
"어"

그리고 생각없이 몇 잔 더 받아마시다가 깨달았다. 나 원래 술 몇 잔 마시면 취하는데, 지금 양주를 몇 병째 마시고 있다.

'용불용설'

소름이 끼쳤지만 양주라서 그런거 아닐까 싶어서 소주를 한 병 물처럼 마셨지만 안 취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울었다. 형의 마지막 선물이 고마워서. 자기 죽음을 무릅쓰고 선물을 가져다 주어서.

"오빠 왜 울어"
"내 친형이 나 술 잘 마시게 만들어 줬거든. 진짜네"
"뭐야 그게"



그날부터 운동을 시작했다. 딱 한달 만에 나는 몸짱이 됐다. PT 선생님이 진지하게 약물 같은거 쓰면 큰일 난다고 조언을 했을 정도다. 같은 피트니스 클럽의 아저씨들도 보충제 뭐 먹냐고 물어보거나, 뒤에서 수근거리며 한 소리씩 할 정도로.

"미쳤구나 이거"

성적 능력도 마찬가지였다. 그 이전까지 모쏠이라 약 먹기 이전과 비교를 못해본게 아쉬웠지만.

"오빠 진짜 미쳤다. 약 먹었지? 비그리아?"
"내가 그걸 왜 먹냐"
"아니 근데 어떻게…아 진짜 대박. 그리고 오빠 할 때마다 자꾸 더 커지는거 같아. 이거 기분 탓인가? 아니 이젠 좀 막 부담스러워 살짝"

솔직히 그 이전에도 공부는 그냥저냥 수준이었지만 머리 나쁘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데, 어느 순간부터 깨달았다. 진짜 대가리 좋은 사람들의 세상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는 것을. 기억력이 좋다는건 꽤 유용한거고, 개그를 잘 치는 건 지능과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필요한 타이밍에 필요한 말장난 아이디어들이 떠올랐다. 그 뿐이 아니었다.

"대박. 혹시 원래 악기를 배우셨던 분이신가요? 아닌데. 이렇게 빨리 실력이 늘 수가 없는데. 그냥 어렸을 때 배웠는데 기억 못하시는거 아니에요? 아니면 하루에 연습을 몇 시간 하세요? 막 밥만 먹고 연습만 하시는거 아니에요? 저 진짜 보람 너무 느껴요! 저희 다음 주에 레슨 끝나고 식사라도 같이 안 하실래요?"
"나이스샷! 피지컬이 좋으신데 배우시는 속도도 거의 남 몇 배에요. 아 진짜 한 1년? 아니 한 6개월? 진짜 프로 노려봐요 우리. 아! 그리고 요즘에 아마추어들 참가하는 오픈 대회도 많거든요. 기본적으로 비거리도 좋아서…진짜 기대해볼만 해요"
"그죠. 남들은 뭐 운이네 뭐네 하고, 실제로 운도 많이 작용하기는 하지만 코인이라는게 흐름을 보는 거잖아요. 직관이라고 해야되나? 형은 타고 났어요. 상승장이 아니라 하락장에서 돈 버는 사람이 진짜거든요. 형은 진짜 인정. 리스펙합니다. 내가 가르쳤지만 나보다 나아"

무엇을 하던 아주 조금만 노력하면 남들의 몇 배로 잘하게 되었다. 물론 보통 사람의 1.5~2배, 혹은 그 이상으로 늘어나긴 하지만 그렇다고 무한하게 잘하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긴 속도계 한계지점을 200에서 400으로 만들어준다고 했지, 가솔린 엔진을 로켓엔진으로 바꿔주는거라고 한 적은 없으니까. 애초에 그렇다면 인간의 몸이 버텨낼 리도 없고. 그게 살짝 아쉽긴 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뭐.




10년이 지난 시점에서 나는 부자가 되어 있었다. 코인으로 시작해서 주식으로 안정적인 수익을 가져갔고, 취미 겸 교양으로 배우던 첼로 선생님이던 수현과 결혼했다. 유복한 집에서 사랑받고 자란 그녀는 나의 황량한 마음을 잘 케어해주었다. 처가도 고아인 나를 마치 자식처럼 대해주셨고.

"응. 오빠 그러면 와이프는?"
"와이프는 며칠 친정 갈거야"
"그럼 딱이네. 우리 가게 와서 놀고, 우리 집에서 자고 가"
"알았어. 아 가게에는 장 프로도 갈거야"
"알았어"

…양주로 나에게 바가지를 씌우던 룸빵 에이스 소라, 본명 재희는 내 세컨이자 강남의 잘 나가는 룸빵 사장님이 되었다. 물론 그 가게도 내가 차려준거다. 바람기도 유전인지도. 

[ 항상 피드 잘 보고 있어요 매번 느끼는데 몸 너무 멋있으세요ㅋㅋㅋ 담에 한번 시간되시면...ㅋ ]

나는 SNS에서 스타였고, 쏟아지는 DM과 리플은 수현이 매번 은근히 신경쓸 정도로 노골적인 유혹도 많았다. 분명 너무 신경 쓰는게 뻔한데도 애써 아닌 척 티 내는 모습이 귀엽고도 미안하지만.



"아 인스타 그만하고 축구 좀 봐. 이거 축구 본다고 오빠가 200인치 TV 산거 아냐?"
"알았어. 아 근데 뭐냐 저거. 중국한테 전반 11분에 2:0이 무슨 망신이야"

조금은 짜증 섞인 수현의 핀찬에 나는 다시 티비로 시선을 돌렸다. 한국은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놀랍게도 중국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다행히 이미 승점을 확보한 상태라 이번 경기는 져도 올라가는 상황이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시아 예선에서 중국한테 진다니.

'어?'

그 생각을 한 순간, 한 골을 더 먹혔다. 하지만 내가 놀란 것은 한 골을 더 먹힌 것 때문이 아니었다. 방금 화면에 비친 어시스트를 한 선수의 얼굴이 내가 아는 얼굴이었기 때문이었다.

'형'

형의 얼굴이었다. 나는 이미 시력과 안면인식능력까지 좋아진 상태다. 잘못 봤을 리 없다. 형이 틀림없다. 처음에는 형이 어쩌면 중국에 돌아가서도 안 죽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보다 너무 젊었다. 그는 형이 아니라 21세의 축구선수 양하오둥이었다. 제 3 세계 선수들이 종종 와일드 카드 때문에 나이를 속이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저 선수는 형이 아니다. 중국은 정말로 그 연구를 접은 것이 아니었다.

'아'

그리고 순간 그제서야 하나를 깨달았다. 내가 맞은 주사의 성공율은 60%라고 했다.

'60%'

애초에 모조리 실패했다면 6할이라는 '성공율 데이터'가 있을 수 없다. 그랬구나. 중국에는 나와 동일한 능력을 가진 초인이 6의 배수로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아니, 정말로 형의 모든 말을 다 믿는다면 연구를 위한 '형의 복제인간'이 수도 없이 많을 가능성이 있다. 찍어내면 그만이고, 유전형질의 유전을 감안한다면 출산을 시켜서 또 다른 초인들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아마 저 양하오둥이라는 선수도 그 중의 한 버전에 불과하겎지.

'어쩌면'

아니 '거의 확실히' 중국은 초인 군대를 만들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중국의 지도자라도 압도적인 근력과 정신력을 가진 초인 군단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아무리 군인보다 군사무기 체계가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당장 복제를 찍어내라고 명령할 테니까.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수현을 바라보았다.

"왜"
"애국하자"
"뭐?"
"씻고 올게"
"뭔 소리야 축구보다가 갑자기"

설비도 연구결과도 아무 것도 없는 내가 중국의 초인 군단을 대항해서 그나마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나 역시 초인을 생산하는 것 뿐이니까.

< 끝 >


이 글을 기점으로 당분간은 유료 메일링 중심으로 소설이 게제될 예정입니다. (물론 가끔은 이 블로그에도 글이 올라올 예정입니다) 그럼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링크를 참고해주세요. 


다영

무려 3년 만이다.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잘 지냈어?"

간단한 안부 인사를 서로 건내고, 시시한 근황 이야기를 잠깐 하며 맥락이 살짝 끊기자 그제서야 어렵게 그녀가 본론을 말한다.

"혹시 여윳돈 좀 있어?"

코웃음을 참은 것은 그동안 나도 사회생활 단련이 조금 됐다는 증거이리라. 하지만 나는 가타부타 말을 하기 전에 액수부터 물었다. 애초에 액수가 크면 빌려줄 수도 없을테고, 아주 작으면 작은대로 줘버릴 수도 있을테니 우선은 용처보다 액수가 더 중요하다.

"한 삼백? 가능하면 오백이면 더 좋고…아니, 혹시 천은 가능해?"

그 정도면 빌려주지 못할 돈은 아니지만 빌려주고 떼이면 속 좀 쓰릴 돈이다. 게다가 말하면서 간 보는 폼새가 쌔하다. 그렇다면 당연히 거절하는게 맞다.

"아니. 요즘 나도 거지야"

말하고 난 직후에 아까 근황 이야기를 하면서 "요즘 연애를 안 해서 돈도 굳네" 하고 허세를 풀었던게 생각났지만, 이미 뱉은 말을 어쩌랴. 보통은 그렇게 어색하게 전화가 마무리 되고 연락도 다시 끊기는게 정석이겠지만, 다영은 예전부터 그랬지만 꽤나 집요한 애다.

"나 너네 집 근처인데 그럼 같이 저녁이나 먹자. 나 밥 사줘. 밥 사먹을 돈도 없어. 그 정도는 사줄 수 있잖아"

사실 이런 상황이면 당연히 저녁도 거절하는게 맞겠지만, 거절하기에 다영은 너무 예쁜 애다.



"이야, 뭐야, 남자 만나러 가냐?"

흰 크롭탑에 아이보리 반바지, 같은 색의 린넨 썸머재킷을 걸쳐서 그나마 살짝 민망함을 가리긴 했지만 새하얀 허벅지의 타투는 확연한 존재감을 뽑낸다.

"너는 남자 아냐?"
"오"

몇 가지 드립이 생각 났지만, 자제했다. 어중간한 드립 쳤다가 애매하게 물리면 뜨밤 한번에 몇 백을 건내야 하는 사태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구질구질한 경고등이 켜졌으니까.

"뭐 먹고 싶어?"
"고기 먹자"
"옷에 냄새 배도 돼?"
"어차피 집에 갈건데 뭐"

별 고민없이 한우집에 데려갔다.

"고기 먹자니까 바로 소고기야? 야 너 돈 많지? 그럴 돈 있으면 나 돈 빌려주라고"
"아니, 천하의 임다영이 무슨 일인가 싶어서 위로해주려고. 맛난거 사주려고. 나도 임마 카드빚으로 사주는거야"
"그래"

곧바로 등심과 안심을 주문하고, 종업원이 구워주기를 기다리며 잠시 허튼 소리를 하다가 그가 "맛있게 드십시요" 하고 자리를 비키자 그제서야 다영은 속내를 털어놓았다.

"사기 당하고, 전과 생기고, 나 진짜 자살할거 같애"
"뭐?"

하드코어한 키워드 서너개가 동시에 튀어나왔다. 차근차근 달래서 이야기를 살짝 듣노라니 이건 사실 소고기 먹으며 할 주제의 이야기가 아니다. 꼼장어 먹으며 포차에서 소주 부으며 먹을 이야기다.

"야, 그럼 우울한 이야기 잠깐 나중에 하고, 맛있는 고기 기분좋게 먹고 그건 2차로 이야기 하자"
"응"

다영은 내 반응에 피식 웃더니 그러자며 웃는 얼굴로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잠시 우울함이 비쳤지만 그래서 더 예쁜 얼굴이다. 전형적인… 너무 예쁘고 섹시해서 평생 주변에 남자들이 줄줄 따르지만 이상하게 인생 거지같이 굴러가는 애들. 평생 눈물 많을 그런 처연한 미인. 그래서 더더욱 남자들이 안아주고 싶지만 사실 그 누구에게도 감당 안 되는 그런 타입의 미인.

"여기 진짜 맛있다"

돈만 많다면 평생 매끼라도 못 사줄까.



든든히 먹고 나서 계산하는 것을 유심히 본 그녀는 "22만원? 야, 너무 비싼데?" 하며 기겁을 하지만, 정작 주문할 때 가격표 다 보아놓고는 돈 타령하는 학습된 걱정도 조금은 귀엽다.

"됐고, 술 마시러 가자"
"응"

서로 이미 배가 제법 불렀기에 2차는 근처의 실내포차로 갔다. 마른 안주와 과일 빙수를 시키고 소주를 시켰다. 두어잔을 빠르게 마신 후, 다영은 진지한 이야기를 꺼냈다.

"전세사기를 당했어. 아니 사기도 아니래. 무슨 법적으로 주인 빚을 은행이 먼저 빼가고 나는 그 돈 다 털린건데, 주인은 배째라고…"

이야기를 띄엄띄엄해서 정확히는 몰라도, 대충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근저당 이슈 어쩌구 때문에 피 눈물 흘리는 그런 이야기. 그런 안타까운 사연의 주인공이 내 주변에 있었다니.

"그래서 얼마 날린건데"
"9천만원"

한숨이 나왔다.

"그거 뭐 그 돈 다시 어떻게 받을 방법은 없는거야?"
"주인이 갚으면 되는데, 어디 하루 이틀 사이에 갚겠어?"
"갑갑하네. 그럼 그리고 전과는 뭔데"
"모욕죄"

그 대목에서는 껄껄 웃음이 나왔다.

"뭐 연예인한테 악플이라도 단 거야?"
"연예인은 아니구, 카페에서 미친 년 사연에 댓글 좀 달았는데 그 미친 년이 지 잘못한거 부끄러운 줄 모르고 고소를 걸었네? 한 몇 십 명이 고소 당했나 봐"
"합의를 하지?"
"그쪽 변호사가 삼백만원 달라고 하더라고. 근데 내가 지금 그런 돈이 어딨어. 그래서 벌금 오십만원 물고 말았어. 아 시발"
"그거 민사 또 들어올 수도 있는데?"
"몰라"

사연이 사연이다보니 술이 쭉쭉 들어간다. 불과 10분 만에 각 일 병씩을 비웠다.

"살살 마셔"
"나 지금 술 거의 두 달 만에 마시는거야. 괜찮아"
"허"



원래는 저녁이나 사주고, 대충 사연이나 조금 듣다가 돌려보냈어야 맞는 이야기다. 그러나 술이 들어가고 간만에 보는 얼굴인데다 예쁘장한 애가 실실 웃으며 내 이야기 잘 들어주니 나도 함께 이야기가 길어졌다.

"그럼 그렇게 헤어진거야?"
"어쩌겠어. 조건 좋은 남자 생겨서 갈아 타겠다는데 할 말이 없더라고"

다영은 그 즈음해서 지그시 내 표정을 바라보더니 "너 요즘 많이 괜찮아졌다. 수염 기르니까 남자 같네" 하며 뜬금없는 끼를 부린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아 됐어" 하고 웃었다. 다영도 두 달만의 술이지만, 나도 거의 몇 주 만의 술이다. 코가 얼큰해지며 취하는 것을 느낀다.

"나도 남자 안 만난지 오래 됐어. 올 초에 헤어지고 지금까지 나 계속 혼자였어. 도저히 연애할 멘탈이 아니라서"
"타투는 언제 한거야?"
"아 너는 처음 봤겠구나. 재작년? 쯤에. 여기 말고 엉덩이쪽에도 하나 더 있어. 보여줄까?"

계속 의미심장한 말을 툭툭 던져온다. 얘가 좀 인생 피곤한 일이 자꾸 일어나는건 맞는데,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막 어설프게 들이대는 타입은 아니었던 거 같은데. 역시 돈 때문일까. 내가 애매한 표정으로 그냥 묵묵히 있자, 그녀가 먼저 "야! 돈 달라고 안 해" 라면서 피식 웃었다. 그제서야 나도 민망하지만 "주고 싶어도 줄 돈도 없어요. 나 그렇게 쪼잔한 남자 아냐 임마. 없어서 못 주는거지" 하고 어설프게 받았다. 다영이 그 말을 하며 얼마나 속이 좀 그랬을까 생각하니 미안했다.

"집 구경 시켜줘. 나 너 자취방 한번도 안 가봤잖아"
"뭐 없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머릿 속으로 집에 남은 콘돔이 있던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알고 지낸 기간이 10년이 넘는 사이의 여사친. 솔직히 레벨이 높으니만큼 가능성이 낮다는거 알면서도 은근하게나마 고백도 두어번 했었고, 당연히 까였음에도 적당히 수습해서 친구로 지냈다. 아니 친구로 지냈다고 하기에도 민망한게 연말연시에 "새해 복 많이 받아" 혹은 "메리 크리스마스" 같은 식으로 가끔 연락한게 전부고, 실제로 얼굴 본 것도 그 이전에도 거의 1~2년에 한 두번 꼴이었으니까.

"사는게 많이 힘들어"

그런 그녀와 이렇게 벌거벗은 채로 누워, 섹스 후의 나른한 대화를 나눈다는게 현실감이 전혀 없었다. 따지고 보면 존버 대성공이지만, 이걸 성공이라고 할 수 있나.

"쉽지 않지"

공허한 말에 공허한 대답을 했다. 가슴에 다영의 눈물이 흐르는게 느껴진다. 혼자 처연한 분위기에 젖는 것을 방해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지만, 눈물이 내 가슴 사이를 타고 흐르는게 너무 간지러워서 어쩔 수 없이 슥 닦았다. 그리고 그게 웃겼는지, 다영은 우는 와중에도 웃음을 터뜨리며 내 가슴팍을 손으로 짝 쳤고, 나도 가슴을 들썩이며 웃었다.

"아 진짜 분위기 너무 깬다 너"
"아니 나도 참을만큼 참았는데 넘 간지러웠어"

머쓱하노라니 의외로 그게 귀여웠는지 다영이 다시 한번 입술을 맞추며 심볼을 슥 쥐어온다. 단번에 다시 시동이 걸리고, 머릿 속에서는 이미 다영과 함께 '힘든 처지이지만, 둘이 힘내서 열심히 살아가는 다정한 신혼부부의 미래'를 그려본다. 이것저것 잴 거 없이, 그냥 내 주제에 이런 여자면 감지덕지 아닐까, 적당히 맞춰주고 적당히 이해하며 그렇게 고난의 바다를 함께 두 손 잡고 넘어가면 되는거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새벽 3시 반이나 됐을까. 잠시 곤히 잠들었던 다영은 부스스 일어난다. 나도 깨어나 "더워? 에어컨 켜줄까?" 하고 물었지만, 의외로 다영은 "아니야. 집에 가야지" 하고 새벽인데 집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자고 가. 피곤한데 뭔 난데없이 새벽에 집에 가겠다는거야"
"집에 퍼피도 있고"
"강아지가 반나절 늦게 본다고 어떻게 되냐"
"나 이미 이틀째 집에 안 들어갔어. 밥 다 먹고 굶고 있으면 어떻게 해"

그럼 어제, 그제는 어디서 누구랑 있었나 하는 의문도 들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냥 자고 가. 아침에 집까지 차로 태워다 줄께"

다영은 잠시 고민하는 듯 했지만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더니 "그럼 아침 6시에 일어나자" 하면서 다시 누웠다. 그러나 한번 훅 일어난 의문은 묘한 생각으로 접어든다. 새벽 3시에 굳이 가야겠다는 것은, 어쩌면 뒤늦게라도 남자친구에게 연락을 해야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같은 뭐 그런 지저분한 생각.

"미안해"

다영은 침대에 누워 나지막하게 말했다. 나는 물었다.

"뭐가"
"그냥"

잠시 고민하던 다영은 "그냥, 너한테 돈 빌려달라고 했던거 후회돼서" 하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게 왜 후회되는데. 어려우면 여기저기 손 내밀게 되는거지 사람이"
"그래도 그러면 안되는건데, 내가 너무 생각가 없었어 아까는"

문득 회의감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돈이 급하기로서니 남사친이라고 하기도 뭐한 3년간 연락 없었던 남자한테 불쑥 돈 빌려달라고 연락을 하고, 그 남자에게 밥 얻어먹고 술 얻어마시고 심지어 잠이나 자고. 내가 지금 뭐하는건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을 수도 있고 그랬다면야 새벽에라도 정신 들었을 때 집에 훌쩍 가고 싶었을 수도 있겠지. 나 역시도 방금 전에 괜한 생각을 했구나 싶어서 미안했다.

"그런 생각은 하지마. 그보다 돈 떼어먹히고, 벌금 물고 뭐 오케이. 근데 나한테 돈은 왜 빌리는건데?"
"월세방이라도 당장 구해야 하니까. 근데 다들 요즘 어렵기도 하고, 나도 주변 사람들한테 잘한 것도 없으니까 돈 빌리기가 어렵더라"

한편으로는 이 모든게 다 나한테 돈 빌리려는 작전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이 와중에도 또 해보지만, 너무나도 밀려오는 잠에 그렇게 눈꺼풀을 감는다.



눈을 떴을 때 이미 다영은 준비를 마치고 떠나기 직전이었다. 잠결에 샤워하는 소리도 듣고, 헤어 드라이기로 머리 말리는 소리도 들은 것 같긴 한데 난 다시 잠들었던 모양이다. 간만의 과음 탓이었을까.

"밥 먹고 가. 요 앞에 아침 백반정식 잘하는 집 있어"

아쉬움에 그녀를 붙잡아 보지만, 다영은 "그러다가 내일까지 있겠는데?" 하며 웃는다. 나는 "그냥 여기서 살아도 돼" 하고 농담인 척 진담을 건내지만 "아까 들어올 때 보니까 현관에 애완동물 금지라고 써있더라" 라며 역시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답을 돌려준다.

"태워다 줄께 조금만 기달려. 세수만 할께"
"아니야, 택시 타면 금방인데 뭐. 피곤할텐데 그냥 자"
"알았어. 잘가"
"응"  

다영은 그렇게 문을 닫고 나섰다. 허무함이 몰려오고, 방 안에 널부러진 내 옷가지들과 휴지 덩어리들을 치웠다. '떡정' 때문일까. 그렇게나 힘들어 하는데 몇 백이라도 빌려줄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괜히 해보고, 이러니 호구잡히지 하는 생각도 동시에 해본다.

"12년 존버 성공했네"

간밤의 뜨거운 시간들을 새삼 떠올려본다. 하나가 된 채 위에서 가만히 내려다 본 다영의 얼굴은 새삼스러웠지만 정말 매력적이었다. 이런 여자와 내가 하다니 하는 감동이 들었을 정도로.

"아…"

다시 한번 허기와 성욕이 동시에 맹렬하게 몰려왔다. 무엇을 먼저 해결할까 한 20초 고민하다가, 괜한 짓을 하기보다는 일단 배부터 채우기로 했다. 냉장고를 다시 여는 순간, 누가 문을 콩콩 두드린다. 서둘러 옷을 걸쳐입고 문을 연다. 

"왜? 뭐 두고 갔어?"

역시나 다영이었다. 뭐 두고 갔냐고 묻자, 그녀는 한 3초 정도 말을 머뭇거리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진짜로 한 삼백, 아니 이백이라도 안돼? 꼭 갚을게"

나는 입맛을 다시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백?"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


< 끝 >

'책 읽을 시간이 없다'는 말

사실 시간 자체가 없다는 것은 핑계다. 아무리 월화수목금금금, 나인투텐으로 일하는 직장인이라고 하더라도 다들 휴대폰 잠깐 하고, 집에 와서 게임 한 두 시간 하고 미드 보고 맛집 가고 가끔 영화 보는 수준의 여가시간 정도는 누구라도 무조건 있다.

무슨 책이라는 매체가 한번 펴면 무조건 끝까지 다 봐야하는 식의 매체도 아니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책 읽을 시간이 없다"는 말 자체는 책 안 보는 사람들의 핑계라고 단언할 수 있다.

문제는 "책이 과연 효율 좋은 여가용 수단이냐" 라는 점이다. 답은 명확하다. 효율이 낮다. 가성비의 시대, 반복된 실패를 허용하지 않는 요즘 세상에 책은 정말 타율 낮은 여가용 수단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게임을 보자. 아무리 게임을 좋아한다고 해도 매주마다 다른 게임을 하는 사람은 드물다. 보통은 취향 맞는, 오래 즐겨온 좋아하는 게임 두어개를 주로 하고, 종종 다른 게임도 하는 식이다. 그리고 그 '오랫동안 즐겨온 게임'은 분명히 매번 일정 수준 이상의 즐거움을 안겨주기 마련이다. 보장된 즐거움이다.

그러나 책은 다르다. 정말 마음에 쏙 든 책이나 인생 책이 아닌 이상, 이미 완독한 책을 몇 번씩이나 틈만 날 때마다 계속 펼쳐보는 경우는 드물다. 그렇다면 결국 매번 새로운 책을 봐야 한다는 소리인데 안타깝게도 매번 그 책들이 나에게 충분한 재미를 주는가 하면 그렇지 못하다. (그나마 만화책이나 웹소설 인기 작품 같은 케이스라면 타율이 상대적으로 높지만 일반 소설책이라면 글쎄…)

그렇다고 기회비용이 저렴하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미드? 넷플릭스/왓챠 모두 한달에 만원 남짓으로 무제한 이용이다. 드라마? TV만 켜면 된다. 커뮤니티? 인터넷만 접속하면 된다. SNS? 마찬가지. 유튜브? 공짜. 프리미엄 해봤자 만원 남짓. 알고리즘에 이용자 취향까지 맞춰주니 재미 보장이다. 게임? 아예 무료인 게임도 많고, 유료 게임 역시 할인시즌에 사면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구입 가능하고 검증된 AAA급 게임이면 어지간하면 재밌다. 이미 즐겨하던 게임이면 재미는 보장이다. 영화도 마찬가지. 별 다섯개짜리 영화는 드물지라도 보통 어지간한 망작 아니면 대부분 "그럭저럭 시간 떼우기" 수준은 되는 작품이 대부분이다.

책은 어떠한가. 요즘 어지간한 책, 1만원 중후반이다. 할인도 없다. (10%가 무슨 놈의 할인폭인가) 그렇다고 재밌는가? 검증된 유명작가의 작품을 골라도 그 작품이 괜찮을 확률은 내 경험상 절반이 안된다. 그나마 책 좋아하는 사람이라 자기 취향을 알고 고르는데도 그 모양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이면 난감한게 당연하다. 그 와중에 마무리까지 투자해야 하는 시간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어쨌든 한 권에 몇 시간 이상이다. 그런데 재미까지 없었다? 이미 대참사다.

그렇다고 서점의 베스트셀러를 고르면 재미있을까? 숫자로 검증된 작품 아닌가.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출판 시장의 베스트셀러는 매번 교육(아동/직장인)서적, 자기계발, 힐링서적, 사상서적, 정치인 평전/자서전, 금융투자 중심이고 가끔 드물게 소설이 베스트셀러인 경우에도 이건 또 당연하게도 취향을 크게 타기 마련이다. 역시 재미를 찾기 쉽지않다. 재미가 아니라도 마찬가지다. 자기계발, 힐링, 투자정보 서적… 원하는 목적들 다 이루었는가? 아마도 대부분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요즘 아이들 문해력"을 걱정하고, "책 좀 봐라" 타령을 해도, 접근성 낮고 가성비 낮으며 재미와 성공보장도 없는 타율 낮은 여가수단이 흥하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히 무리수가 아닐 수 없다.

책의 경쟁상대들은 이미 너무나 강력하고, 책은 그렇지 못하다.

"책 읽을 시간이 없다"라는 말은 거짓말일지라도 "읽고 싶은 책이 없다" 또는 "같은 조건이면 책에 시간 투자하기 쉽지 않다"라는 말은 반박이 쉽지 않다. 아무리 몸에 좋은 약이라도, 열 번 먹어 아홉 번이 쓰고 비리고 탈까지 나면 그걸 누가 즐겨 먹겠는가.

위대한 기술

1957년 10월 4일, 소련은 스푸트니크의 발사로 기술경쟁에 있어서 미국에 한발 앞서는 모습을 보인다. 이에 미국은 '스푸트니크 쇼크'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고 척수반사적으로 역시 우주 개발에 돌입하려 했지만, 마지막 순간 미국은 모든 것을 뒤엎는 위대한 결정을 내린다.

"소련이 우주공간에 쓰레기를 내버리는 동안, 우리는 인류애에 힘쓰겠다"

한국전쟁이 휴전의 형태로 일단락 되자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치열한 체제 경쟁이 시작되었다. 이미 한국전쟁 이전에도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오랜기간 대규모 전란의 시대를 겪은 세상이었다. 당연히 소련은 관습적으로 군사우주기술로 경쟁의 첫 포문을 열었지만, 미국은 의외로 의료기술을 경쟁의 카드로 꺼내들었다.

"세계 최초로 미국이 인공 폐 개발에 성공하여…"
"미국은 의료선도국을 개설하여…"

당황한 것은 소련이었다. 과학기술경쟁에서 역전에 성공했다고 생각한 순간, 상대가 아예 다른 종목에 집중해버린 격이었으니까. 물론 소련 공산당 내부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우주쓰레기와 암 치료제 중 어느 것이 인민의 삶에 더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오?"
"2차 세계대전으로 소련 젊은이 2천만명이 죽었고, 한국전쟁으로 전차 수백대와 아까운 전투기 수백대를 날려먹었소. 전쟁이라면 지긋지긋하오. 로켓기술에 집중이라니, 앞으로 뭘 더 날려먹고 싶은 것이오?"

그러한 내부의 목소리에 의해 결국 소련마저도 경쟁의 포인트를 의료기술에 집중할 수 밖에 없었고, 그렇게 인류는 의료기술로 본격적인 체제경쟁에 돌입한다.




위대한 기술




1958년, 미국은 미 의료선도국을 개설하여 '아스클레피오스 계획'을 시작한다. 그리스/로마 신화 속 아폴로의 아들이자 의술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 이름을 딴 그 계획은 '인류의 모든 질병과 장애를 극복하여 체제경쟁에서 우위를 갖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소련보다 먼저 암 치료제를 개발해야 한다고!"

1960년대에 접어들자 미국은 무려 GDP 1.5%를 의료선도국의 예산으로 배정하면서 미친듯이 경쟁에 집중했다. 최고의 인재들이 의료계에 투입되었으며 그 결과 화학, 생물학, 해부학, 신경과학, 응급의학, 조직학, 생리학, 순환기학, 혈청학, 호흡기학, 소화기학, 내과학, 의공학, 면역학, 예방의학, 발생학, 신경해부학, 신경생리학, 병리학, 미생물학, 약리학, 기생충학, 임상면역학, 종양학, 혈액학, 내분비학, 유전학, 감염학, 신경계학, 외과학, 산부인과학, 소아과학, 정신과학, 정형외과학, 영상의학, 핵의학, 의학연구학, 환경의학, 종합의학, 통합의학, 임상특학, 마취통증의학, 피부과학, 흉부심장혈관외과학, 신경외과학, 재활의학, 비뇨기과학, 이비인후과학, 안과학, 성형외과학, 가정의학, 재활의학, 방사선종양학, 진단검사의학, 지역사회의학, 임상약리학, 종교의학, 우주의학, 재생의학, 의료장구학, 전자의학, 수의과학, 융합의학, 통합진단의학, 복구의학, 바이오로직학, 의료역학, 의료정치학, 기술지원의학, 의료사학, 대체의학, 약학, 과정의학, 심층진단학, 의료경제학, 의료경영학, 검증의료학, 메타진단의학 등등 모든 분야의 의학에서 엄청난 발전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오늘 소련 인민보건국의 가가 유리린 국장은 보스토크 폐암 백신의 임상 3상 성공을 밝히며, 내후년까지 최종 결과 검토 후 특별한 이상이 없을시 모든 인민들에게 접종을 시작할 것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소련은 의료기술에서마저도 '폐암 백신'으로 선수를 치며 미국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이에 미국도 '인공혈관' 시술 성공 뉴스로 응수했지만, 두달 뒤 시술을 받은 환자가 원인불상의 심근경색으로 사망하여 인공혈관에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불러일으켜 망신을 당했다.

"오늘부터 다들 집에 들어갈 생각도 하지마"

미 의료선도국은 더더욱 자극을 받아 새로운 의학발전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이대로 소련에게 끌려다닐 수는 없었다. 무언가 판을 뒤엎을 수 있는 비전 제시가 필요했다.



"우리는 탈모치료에 성공할 것입니다, 우리는 1960년대 안에 탈모치료에 성공할 갈 것이고, 다른 일들도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쉬운 일이기 때문이 아니라,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짐 G 레네디 대통령은 메릴랜드 볼티모어에서의 연설을 통하여 '탈모치료'에 도전할 것을 선언했다. 이것은 가히 충격적인 선언이었다.

"이야, 저게 정말 가능하단 말이야?"
"탈모치료…"

인간이 달에 간다는 허무맹랑한 소리보다도 더더욱 허무맹랑한 탈모치료 선언. 그것에 미국이 당당히 도전을 선언했다. 소련에 의해 이미 몇 차례나 물을 먹은 미국이 잔뜩 독이 올라 어마어마한 목표를 제시한 것이다. 이번에도 소련은 당황했다.



"우리도 마땅히 탈모에 투자를 해야합니다"

소련 의료의 아버지, 세르게이 코트로프는 곧바로 공산당 서기장 코루시초프에게 탈모치료에 투자해야한다고 제안했다. 현대의학이 정복해야 할 가장 높은 산봉우리, 탈모. 그것에 대한 도전은 모든 의학도의 숙제이자 전 탈모인의 꿈이었다.

"머리털은 부르주아지들의 사치요"

하지만 뜻밖에 서기장은 탈모치료에 대한 투자에 반대했다. 당장 본인도 대머리인 그가 탈모치료에 대한 투자에 소극적인 것은 의외였지만 그의 주장은 명료했다.

"탈모보단 암이 더 시급하고, 암보다는 폐렴이 더 시급하오"

결국 탈모치료는 미국만의 목표가 되었다. 사실 서기장의 주장도 크게 틀린 것은 아니었다. 탈모치료라는 목표 자체가 지나치게 높은 목표였기 때문이다. 미국 주도의 탈모 극복이 성공한다면야 당연히 단번에 모든 것이 뒤엎어지겠지만, 반대로 그것이 실패한다면 기술경쟁에 있어서 이미 보여준 것이 많은 소련쪽으로 세계 패권이 기울 것이 자명했다.



"대통령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거지?"

의료선도국의 모든 이는 TV를 보며 충격을 받았다. 내부적으로는 "차라리 암과 에이즈를 동시에 잡는 백신을 만들라고 하는게 더 쉬울 수도 있어요. 농담이 아닙니다. 탈모 치료는 그만큼 어려운 거에요" 하는 말까지 나왔다. 그러나 세계 패권을 놓고 벌어지는 기술경쟁이 벌어지는 가운데 대통령의 선언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전미 의료 관계기관 대표자 모임 소집해"

미 의료선도국과 미국 내 주요 의료기관은 물론, 미국 내에 법인을 두고 있는 모든 다국적 제약회사 대표들까지 탈모치료라는 궁극의 목표 앞에 갈려나가게 되었다. 애초에 주어진 시간은 채 10년이 되지 않았다. 탈모극복의 방향성을 잡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석달에 가까운 치열한 논쟁 끝에 그 방향성은 크게 세 가지로 잡혔다.

1. 모발삽입술 개발
2. 탈모예방 백신 및 시술 개발
3. 특수가발 개발

폰 브라우닝 박사팀은 우선 모발삽입술의 개발에 돌입했다. 박사는 일반적인 모발이식 수술이 '이식할 자신의 또 다른 머리카락'이 필요하고, 이식하지 않은 부위의 탈모가 뒤늦게 진행될 경우 머리가 듬성듬성 보이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짐은 물론, 수술이 까다롭고 지나치게 비용이 많이 들어 접근성이 낮았던 점에 주목했다.

"최첨단 레이저 기술로 머리에 약 10만개의 모공을 새롭게 파고, 그 모공에 면역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인공모발을 삽입합니다. 그 이후 3주간 면역억제제를 복용하면서 인공모발이 완전히 자리를 잡으면 그걸로 완성입니다"

한편 탈모예방 백신의 경우, 테스토스테론의 DHT 변환을 막는 효소를 백신의 형태로 사춘기에 주사를 맞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되면 최소 10년간 탈모는 발생하지 않고 이후에는 '머리나'라고 불리는 체내 삽입형 호르몬 기구 시술로 평생동안 탈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다양한 이유로 직접적인 시술이 어려운 이들을 위하여 '아무리 격렬한 운동을 하더라도 분리되지 않고, 착용감이 좋고 한 여름이나 겨울에도 착용에 부담이 없는 인체공학적 가발' 개발 역시 함께 진행되었다.

어마어마한 예산이 집행되었다. 그 이전, 이후를 막론하고 그만큼의 의학기술 개발에 대한 투자가 이뤄진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만큼 막중한 부담이기도 했다.



1967년 1월 27일, 아스클레피오스 1호 시술이 임상 2상 단계에서 진행되었다. 말도 안되는 일이었지만 시간이 촉박해도 너무 촉박했다. 그러나 그 시술은 참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정밀하게 10만개의 아주 작은 모공이 레이저로 뚫어져야 했지만, 설계오차에 의해 지나치게 굵은 모공이 뚫렸다.

"오 맙소사"

인공모발이 자리를 잡기는 커녕, 그나마 조금 남아있던 뒷통수의 머리털마저 모조리 레이저로 날려버린 격이 되었다. 완전한 민두가 된 첫 시술자들은 미국을 저주했다. 미 의료선도국은 다시 철저한 시술을 다짐해야 했다. 이후 수 차례의 시술이 더 있었지만 그 모두 만족할만한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1968년, '새털5'라 불리우는 신형 인공모발의 개발이 완료되었다. 이는 초안이었던 '면역거부반응 없는 인공모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자체 생존성으로 모공 내에 일단 심어지기만 하면 알아서 뿌리를 내리는 엄청난 인공모발이었다. 이후 두어 차례의 만족스러운 시술에 의해 미국은 확신을 얻었다. 탈모극복의 길이 열렸다고.



서기 1969년 7월, 아스클레피오스 11호 시술이 전 세계에 생중계 되었다.

10!

9!

8!

7!

6!

5!

4!

3!

2!

1!

레이저 점화! 매릴랜드 홉스 존킨스 병원에서 진행된 모발이식 수술. 의료관제실에서 수백명의 관계자들이, 아니 전 세계 모든 탈모인들과 잠재적 탈모 가능성에 떠는 30억 남성들, 그리고 그런 이들을 장차 배우자로 맞이할 가능성이 있는 30억 여성들이 숨을 죽이며 초조하게 수술을 바라보았다.

성공한다면 인류 역사상 첫 탈모 극복의 꿈이 실현되는 날이었다. 우선 레이저 모공 조성은 성공적이었다. 이어 집도의의 아주 뛰어난 술기를 바탕으로, 모공안착이 무사히 이루어졌다.

"이것은 한 명의 대머리에게는 단순한 기쁨이지만, 인류에게는 커다란 도약이다"

마지막 털 한 올을 무사히 꽂은 후, 집도의 모 스트롱은 그런 한 마디를 남겼다. 그리고 그 말은 단순한 말의 성찬이 아니었다. 영원한 불치병이라 믿어져왔던 탈모의 극복은 수많은 인류에게 새로운 삶을 안기는 것과 다름 없었다. 아스클레피오스 계획은 이후로도 성공적으로 죽 이어져 탈모예방 백신과 특수가발까지 모두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세계의 패권은 자연스럽게 미국의 것으로 확정지어졌다. 대머리로 살고 싶지 않다면 미국과 손을 잡아야 했다. 마침 공산권 지도자들은 다 대머리였다. 소련의 대머리 코루시초프, 중국의 대머리 마택동도 미국에게 손을 내밀었다. 냉전은 그렇게 끝났다. 이후 미국은 약 50여 년간 세계 패권국으로 자리매김한다.



2021년 7월 8일, 김박스는 출장 가던 길에 지도를 펴고 이 길이 맞나를 한참 고민하다가 부사수에게 짜증난다는 투로 말했다.

"아니 참, 세상이 말이야… 팔다리가 짤려도 도마뱀처럼 재생하는 요즘 같은 과학기술 시대에, 내가 지금 지구 어디에 있는지 딱 좌표를 알려주는 그런 기계 하나 없다는게 말이 돼? 저 하늘에 막 그 위성시스템 같은게 있으면 내가 지금 이 지도 어디쯤에 있는지 딱 알려줄텐데 말이야"

부사수는 낄낄대며 "아 참. 과장님도. 지도 줘보세요. 제가 알려드릴께요" 하며 지도를 받았다. 둘 다 초행길이다보니 지도가 있어도 헷깔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김박스 과장 말대로, 차 안에 출발지부터 목적지까지 실시간 위치정보 기반으로 쭉 가야할 길 알려주는 그런 기계 같은게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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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료] 하린 [유료구독자 전용] 맛보기

그녀를 만난 것은 전시관 2층에 마련된 인디서점에서였다. 몇 권인가의 책을 집었다가 다시 매대에 내려놓으면서 잘 맞추어 정렬하는 것을 보고, 아마 내가 점원이라고 착각을 했던 모양이다. 마침 그날따라 내가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올 블랙 까마귀 스타일로 입기도 했고.

"혹시 '끈'이라는 책 있을까요? 테헤란 출판이라는 곳에서 나온건데"
"아, 그 책이요?"

나에게 '끈'이라는 책을 물어온 그녀에게, 나 역시 마치 점원처럼 그쪽으로 안내하며 자연스럽게 한두마디 건냈다.

"저도 얼마 전에 책 소개하는 글 보고 관심있어서 살짝 봤는데, 엄청 재밌더라구요"
"오 정말요?"

소위 긴박 플레이라고 하는, 섹스할 때의 끈이나 천으로 묶는 플레이에 대한 방법과 활용에 대한 책이었다. 다만 사람 사진이나 그림이 아니라 동물 인형으로 쓸데없이 진지하게 고퀄리티로 표현한 덕분에 컬트적인 화제가 된 책.

"여기 있습니다"

책이 있는 곳을 안내하고, 다시 돌아서서 아까 내가 내려놓은 책들을 정렬하러 가보니, 다른 점원이 마침 그 책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아! 이거 제가 구매하려다 내려놓은 건데.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미안한 마음에 가볍게 사과하자, 인상 좋아보이는 직원이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더 살펴보세요 고객님" 하면서 웃는 얼굴로 응대한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그녀가 내 등을 톡톡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뭐야, 직원 아니었어요?"

나는 웃으면서 "네"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도 어이없다는 듯 웃었고, 나는 커피 한잔을 제안했다. 한 층만 걸어올라가면 된다고.

"그래요 그럼"



하린



하린은 무려 8살 연하로, 단발머리에 스트릿 패션이 잘 어울리는 타입이었다. 그래도 20대 후반이 하기에는 살짝 과한 스타일이지 싶은데 용기가 대단하다 싶었다. 하긴 말하는 것도 시원시원했다. 약간 남동생 과라고 해야하나.

"아니 나는 진짜 직원인 줄 알았네. 지금 저기 카페 카운터에 서있어도 직원인 줄 알겠어요"
"아 오늘따라 까맣게 입어서 그래요. 원래 이 정도는 아니야"

민망해하는 내 모습에 하린은 더 크게 웃었다. 사실 그렇게까지 웃긴 일도 아닌데 그렇게나 웃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근데 그런 쪽 취향이에요? 막 묶고 그런거?"

당돌하게 물어오는 그녀의 말에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쪽에 특화되어 있다기보다, 야한건 다 좋아하죠. 때리거나, 묶거나, 깊게, 앞뒤로 뭐…"

만난지 15분도 안된 여자랑 대낮게 커피 마시면서 이런 대화라니, 놀라운 일이었지만 진짜 놀라운건 하린의 성격이었다.

"여자친구 있어요?"
"없어요"
"단순한 파트너도?"
"있었는데, 시집 갔어요. 두 달 전에"
"올"

하린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왔다.

"나랑 해볼래요?"

보통이라면 이런 케이스는 사기 또는 범죄행위라고 보는게 맞겠지만, 묘하게 설득력 있는 눈빛과 이미 두 달 넘게 굶은 나는 생경한 유혹 앞에 무기력했다.

"어디서?"



(중략 : 본 소설은 스타일박스 유료 메일링 서비스 구독자 전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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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의 용사 출신 황제인 내가 현실에서는 인생실패자?! 完 [장편] 이세계

나는 거의 19시간이 넘는 장시간의 플레이 뒤에야 VR헬멧을 벗고 침대에 누웠다. 눈이 아프다 못해 뒷골이 욱씬 쑤실 정도의 통증이 몰려왔다. 뒷목과 허리까지 안 아픈 곳이 없었다.

'후'

절망감이 몰려왔다. 어처구니 없지만 '청춘을 바쳐가며' 플레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이 게임에서 난 지금 모든 것을 날릴 위기에 처해있다. 내 손으로 키워낸 최강의 반란군에 의해 부인이자 전설의 마법사인 레오라를 이미 잃었고, 제국의 황제 자리도 날아갈 위기다.

'음'

도망치던 도중 수도의 궁성을 나 대신 지키고 있던 제국상서 루키후그는 '어떻게든 3일은 버텨 보겠습니다' 라고 전언을 보내왔다. 게임 속 세계관 최강의 듀오인 나와 레오라도 못 이겨낸 청기사단을 어떻게 혼자 얼마 안되는 친위대로 막아내겠다는지 이해가 안 갔는데, 다음 날 알았다. 루키후그가 자기 자신을 희생하여 궁성 자체에 거대한 어둠의 실드를 쳤다. 세계관 내 최강의 NPC 흑마법사가 목숨을 댓가로 친 마법인만큼 이미 수도를 포위한 청기사단으로서도 이제 3일간은 궁성에 접근할 수 없다.

"고로…"

최고의 충신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가며 만들어 낸 3일의 시간이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적색기사단을 만나, 그들을 지휘하여 역도가 된 청기사단을 무찌르고 제국의 평화를 다시 찾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너무 지친 나는 3시간의 알람을 맞춰놓고 잠에 빠져들었다. 지금이 오전 6시 55분이니까, 딱 10시에 일어나면 되겠구나.





이 세계의 용사 출신 황제인 내가 현실에서는 인생실패자?!
-EP.03





"음"

잠에서 깼다. 하지만 알람이 아니다. 전화벨 소리다.

"으음,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고구려 캐피탈 정,수,림 파이낸셜 상담원입니다. 실례지만…"

아…좆됐다. 나는 입맛을 다시다가 그녀가 묻는 내 신상에 대답을 했고, 연체 안내 겸 독촉 전화에 최대한 빨리 내일 모레까지는 갚겠다고 대답하고 끊었다. 연체가 3일 이상 길어질시 내 연체정보가 모든 금융업체에 공유될 수 있고, 신용정보 및 추후의 금융거래에 불이익이 생길 수 있다는 무서운 경고에 치를 떨며.

"150만원을 어디에서 구한다…"

누군가에게는 그까짓 몇 푼 일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답 없는 돈이다. 애초에 빌리면 안됐을 돈인데, 조회만 해도 커피 쿠폰을 하나 준다는 앱 이벤트에 '나같은 무직자에게 한도가 나올리가' 하면서 조회해 봤더니 실제로 한도가 나와서 고민 끝에 빌린 돈이다. 당초의 계획은 150만원 빌려서 100만원은 코인하고, 30만원은 엄마 환갑잔치에 근사한 곳에서 밥이라도 먹고, 20만원은 게임 현질을 하려고 했는데 150 전부 치킨 사먹고 게임에 발라버렸다. 그나마도 마지막에는 2,500원이 없어서 레오라도 죽었지만.

"아 씨발 어쩌지"

엄마한테는 손 벌리기도 미안하고, 애초에 엄마가 나한테 내줄 수 있을 돈도 없을거다. 누나에게도 손 벌리기 힘들고…. 눈 앞이 아득해진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입맛을 다시며 일어난 나는 냉장고에서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다시 VR헬멧을 썼다.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다. 아니, '나에게만큼은 이게 진짜 현실' 게임 속으로 돌아가고 싶다.




좁고 어두컴컴한 반지하 원룸이, 헬멧을 쓰는 순간 눈이 시원해지는 대초원으로 변한다. 그리고 내 눈 앞에는 지평선의 끝에서 끝까지 화려한 병장기와 붉은 색 갑옷, 육중한 군마를 거느린 역전의 용사 6만명이 나란히 도열해 있었다. 그러나 평소와는 다르다. 화려한 나팔 소리와 함께 등장하는 나의 모습에 모두가 말에 내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대기해야 할 그들은, 마치 적을 앞둔 것처럼 나를 대하고 있다.

"무엄하구나"

하지만 내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서서히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할 시점이 다가왔다고 느꼈다. 사실 이제와서 적색기사단이 나에게 충성을 할 이유도 없다. 아무리 대륙 역사상 최고의 위인이라고 한들, 결국에는 '인간 마왕' 소리를 들을 정도로 변질된 폭군일 따름이다. 어진 재상과 자애로운 황후가 아무리 들끓는 백성들의 민심을 가라앉힌다고 해도, 결국 황제의 "90% 세율", "무자비한 폭동 진압", "가혹한 건설 노동" 같은 헛짓 앞에는 무소용이니까.

"폐하"

적색기사단의 단장은 말에서 내려 나에게 다가왔다. 이 게임의 모든 캐릭터는 AI가 만들어 낸, 굉장히 사람같이 생긴 캐릭터 텍스쳐를 갖고 있다. 전투 모션이 살짝 과하거나 천박한게 문제지, 외모 자체는 굉장히 리얼하다. 거기에 전투에서 생긴 상흔 같은 것이 더해져, 이 적색기사단의 베두인 단장처럼 백발이 성성한 대장군의 압도적인 풍채를 가진 캐릭터를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감히 나에게 이 무슨 무례냐"

하던 지랄은 마저하는게 도리다. 체통이 땅에 떨어진 지금이라도 황제는 황제다. 사실 어쩌면 나는 이 순간, 이 적색기사단이 내 황제 캐릭터를 끝장내주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현실로 빠르게 돌아가 정신 차릴 수 있게. 당장 오늘 내일, 노가다라도 나가서 얼마라도 돈을 벌어오게.

"폐하, 레오라 황후마마를 죽인 것이 정녕 청기사단의 짓입니까…"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적색기사단의 베두인 단장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내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이 놈이 왜 내 죽은 마누라에게 이렇게까지 과잉 충성을 하는지 궁금해서 슥 캐릭터 열전을 살펴봤다. 아하. 이 양반은 레오라와 동향인 마티오 왕국의 왕족 출신으로, 왕족답게 혈연 관계가 조금 복잡하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레오라 엄마의 이복동생이며 나에게는 처숙부쯤 되는 인물이다.

'아 맞다'

게다가 거기까지 읽으니까 나도 생각났는데 적색기사단의 창설 자체가, 마티오 왕국의 왕인 레오라가 나에게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해 자기 조국의 핵심 전력을 변방으로 보내 제국을 지키도록 한 것이었다. 적색기사단 입장에서는 레오라에게 서운함을 느낄 법도 하지만 그들은 '왕국의 안녕과 제국의 평화'라는 기치 아래 숭고한 희생을 묵묵히 해왔을 따름인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충성의 대상이 세상을 하직한 것이다.

"그렇다. 짐은 그녀를 지키고자 목숨을 걸고 싸웠으나 힘이 부족하여 그녀를 지키지 못했노라…"

이쯤해서는 내가 할 일이 또다시 명확해진다. 눈물연기로 이 충직한 부하들을 구워삶아야지. 한 마디 던진 나는 격정적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내 친히 수백 수천의 역도를 베었건만, 그들의 간계에 빠져 레오라는 결국 세상을 떠났다! 이 못난 지아비를 원망해도 좋으련만, 그녀는 마지막까지 나에게 어진 황제가 되라는 부탁을 남겼을 따름이다. 그대들에게 나는 황제가 아닌, 아내를 잃은 남편으로서 피 끓는 한을 담아 부탁한다. 레오라의 복수를 해다오. 그대들의 왕이자 제국의 어머니를 참한 흉측한 무리에게 정의의 심판을 내려주길 간절히 청하노라!"

바로 이거다. 내가 이제껏 '엠퍼러'를 버리지 못한 가장 큰 이유! 글로벌 IT기업이 혼을 담아 제작한 게임답게, 전무후무한 수준의 엄청난 음성인식 커뮤니케이션 기능을 갖고 있는 게임이라는 점. 게임 속 일정 트리거가 발동되면, 이렇게 혼자 게임에 취해서 유치한 중2병 수준 웅변을 토해내도, 게임 속 캐릭터들이 그에 감화되어 나를 따르거나 한다는 것.

"폐하!"

적색기사단은 일제히 말에게 내려 나에게 고개를 숙였고, 나의 "출진하라" 지시에 맞추어 진군을 시작했다. 무너진 나의 자존감이 이렇게 채워진다. 결국 데이터 쪼가리에 불과한 게임에 내가 이토록 빠진 것도 다 그 놈의 자존감과 보상심리 때문이다. 나도 안다. 대학을 졸업하고 첫 취업한 회사, 열심히 일하고자 다짐했지만 일이 너무 어려웠다. 아니 일보다는 사람이 어려웠다. 조금만 실수해도 모진 핀찬이 날아왔고, 나는 점점 위축됐다. 참 그런 쓰레기 같은 회사는 진작 관뒀으면 좋았을텐데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꾹꾹 참았다가 스트레스 때문에 결국 나는 틱 장애까지 얻었다.

"레오라를 해한 그 놈들을 한 놈도 살려두지 말아라!"

처음에는 가벼운 행동틱이었지만, 그것으로 또 은근하게 따돌림을 받자 언어틱까지 생겼다. 욕설까진 아니었지만 갑작스럽게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비명과도 같은 꽥 소리는 더이상 회사를 다니기 어렵게 만들었다. 몇 달을 쉬고 이직을 했다. 아주 다행히도 틱 장애는 쉬는 동안 거의 사라질 정도로 완화되었지만 자존감이 낮아지고 위축되었다. 사람을 마주 보는게 두려웠다.

"아니 왜 그렇게 사람이 히마리가 없어요"
"회사에서는, 사회성도 중요한 부분이에요"
"내가 이런 말 하는게 좀 그럴 수도 있는데 직장에서 일보다도 중요한게 인간대 인간으로서의 유대라고. 그거 알만한 나이잖아"

결국 싫은 소리들을 들어가면서 버티던 내가 돌파구로 찾은 것이 게임이었다. '엠퍼러'는 정말로 나에게 자존감과 사회성을 키워주었다. 게임 속의 캐릭터들은 결코 내 뒷담화를 하는 일도, 내 약점을 두고 조롱을 하거나 조언이라는 이름의 폭언을 하는 일도 없었다. 그저 나는 그들에게 한줄기 빛이요 구원이었다. 그렇게 나 역시 위로 받았다. 단지 지나치게 몰입한 나머지 결국 회사에서도 잘린게 문제지만.




"어찌하는게 좋을까"

수도 궁성으로 향하는 적색기사단의 이동경로에, 이미 청기사단이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다는 첩보가 확보되었다. 양쪽 다 기마부대가 주력인만큼, 전투는 바르바리 평원에서 대회전 형태로 벌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문제는 청기사단은 중갑기마부대 1만이 주력이고, 적색기사단은 8천의 가벼운 경갑의 궁기병이 중심이었다. 거기에 중보병 1만, 궁병과 장창병을 포함한 경보병 4만, 마법대 2천의 구성이었다. 병력의 수는 3만대 6만으로 적색기사단이 거의 2배 가깝지만, 병력의 질 자체도 청기사단이 크게 앞선다. 반란 진압하라고 온갖 고급 장비들을 청기사단에 올인해주기도 했고.

"폐하가 곧 전력입니다"
"그건 아는데, 한번 졌잖아"
"전투에 패배는 병가지 상사이옵니다. 전력만 온존한다면 다음 전투에서 배로 갚아주면 됩니다"

첫 인상은 소도 생으로 씹어먹을 것 같은 상남자인 베두인이지만, 역시나 핏줄은 핏줄인지 레오라처럼 든든하게 나를 격려해준다. 나같은 쓰레기에게 이토록 굳건한 믿음을 주는 부하들이라니. 새삼 어진 정치에 대한 욕구가 샘솟는다.

"마족 놈들은 역시 씨를 말리는게 맞는 건데"
"역적 알드리드는 반드시 무찌를 것이옵니다"

청기사단의 단장 알드리드는 무려 마족 출신이다. 마왕을 무찌르고 그의 사천왕 중 하나를 부하로 삼은건데, 결국 뒤통수를 맞았다.

"그보다 마법 전력에서 상대가 안되는데. 이쪽은 죄 초급 마법사들이잖아. 방어마법만으로도 벅차보여"
"그것이 유일한 걱정입니다"

만렙 마법사인 레오라가 청기사단과의 전투에서 고전한 이유도 그것이다. 마족이 단장이라 그런지 '기사단' 주제에 제법 준수한 마법사 전력까지 갖추고 있는 청기사단이라 순수한 무력충돌로 정면대결은 리스크가 크다.

"하는 수 없지. 마법사들은 내가 맡는다. 내가 마법사를 방어하는 적 방패수들을 뚫고 들어갈테니, 내가 포위되지 않도록 정예기병 1천으로 내 뒤를 받쳐다오. 그러면 내가 마법사들을 도륙내마"
"폐하, 알겠사옵니다"

일단 오늘은 푹 자기로 했다. 게임 속에서 나는 최고급 산해진미와 최상급의 회복약들을 먹으며 몸과 마음을 치유했다. 현실에서 나는 김치도 없이 라면에 밥 말아먹은게 전부지만.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 진군을 한 우리는 저 앞 바르바리 평원에 이미 진을 치고 대기 중인 청기사단을 마주했다. 3만 대 6만. 병력에서는 이쪽이 거의 두 배에 가까웠지만 전력차는 AI분석으로는 13:9 정도로 이쪽이 오히려 열세였다. 사실 이 정도 전력차면 섬멸전 모드로 AI전투 치르면 몰살이다. 유저의 직접 전투가 필요한 이유다.

"적 1파가 옵니다!"

양익에 기병을 배치하고, 중앙에는 궁병과 마법대, 그리고 그들을 둘러싸듯 중보병과 장창병이 배치되었다. 나와 1천의 정예기병은 부대의 후미에서 전황을 지켜보며 움직일 예정이었다. '베두인 놈, 적의 중갑기병을 어떻게 막을 생각이지?' 하며 궁금했는데, 잠시 후 적 기마대 1파의 공격을 막아내는 적색기사단의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

"와아아아아아아"

적 중갑기병이 말의 행동을 막는 이동형 장애물을 돌파하면, 다이아 스피어를 낀 장창병들이 흐트러진 기마대를 견제하고, 양익의 경기병과 궁병, 마법대가 그들을 집중 공격하며, 마지막으로 4인 1조로 중보병이 적 기병을 끝장낸다. 환상적인 호흡으로 깔끔하게 상대하는 모습에 감탄했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적이 소수일 때나 먹힐 수 있는 방식임을 알았다. 통일된 제국 내에서 대규모 적 기병을 상대할 일이 없기에 지금까지는 저런 전투방식으로도 충분했겠지만, 이번에 상대하는 적은 청기사단이다. 본격적인 2파가 몰려오면 곧바로 쓸려나갈 수도 있다.

"가자!"

따라서 나는 적의 1파가 아직 돌진 중이고, 2파는 아직 준비가 덜 된 상황을 파고 들기로 했다. 말에 오른 나는 내 뒤를 따르는 1천의 기병과 함께 아군 부대 뒤를 크게 돌아, 방패병이 방어하고 있는 적의 우측에 기습적인 돌파를 시도했다. 물론 그 앞을 가로막는 놈들에게는 당연하게도 '마검 새_롱스워드'의 '불검' 공격이 내려진다.

"후우!"

VR 컨트롤러를 3회 빠르게 누르자 강력한 화염마법이 내 검 끝에서 쏟아져 나갔다. 물론 적의 마법사들이 실드를 쳐서 위력이 다소 반감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데미지는 수십 만이다. 어지간한 중간보스들도 3방이면 아웃되는 이 절정의 마법에 청기사단의 우익에 큰 구멍이 생긴다.

적의 1파를 막아내던 적색기사단의 기병대 역시 날개를 열면서 동시에 중앙의 중갑보병이 장창병과 함께 서서히 중앙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보병이 기병의 진격을 막아냄은 물론 동시에 역으로 진군까지 하는 모습에 나는 감탄했다. 순간적이지만 과몰입을 하여 '십수년간 야전을 돌며 산전수전 겪은 부대와, 민간인 학살이나 하던 부대의 차이가 아닐까' 하는 허튼 생각까지 했을 정도다.

"파고 들어!"

혼란스러워진 적의 대열을 뚫으며 선봉으로 나선 나는 정신없이 적의 방패병들을 '마검 새_롱스워드'로 방패째로 쪼개나갔다. 굉장했다. 내가 탄 말이 적의 검에 옆구리를 맞아 쓰러졌지만 일어선 나는 정신없이 검을 휘둘렀다. 탕탕탕탕탕탕, 적진 한 가운데에 뛰어들어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노라니 적의 공격 역시 집중되어 컨트롤러와 헬멧에 초당 3회가 넘는 포스피드백이 전해진다. 간간히 블라인드 마법도 날아오지만 그것만큼은 정확히 걷어낸다.

"이야, 이거 무슨 마사지기가 따로 없네"

다행히 내 뒤와 옆으로 아군이 끼어들어 적군을 파고 드는 송곳이 깊어지고, 이윽고 저쪽의 아군을 향해 화염구를 날려대는 청기사단 마법사들 앞까지 도달했다.

"너네 다 죽었다"

20초의 '불검' 쿨타임이 돌았다. 적의 마법사들에게 불검을 쏟아내었…지만 그것은 나보다 2배는 큰 거대한 체격을 가진, 날개 달린 외눈박이 거인의 방패에 그대로 흡수되고 말았다.

"알드리드"

청기사단의 기사단장이자 전직 마왕의 사천왕 중 수장이며 통일전쟁 당시 혼자서 한 나라를 망하게 하기도 한 괴물 중의 괴물. 궁성의 감옥에 봉인해두었던 괴물에게 기사단장직을 수여한 내가 미친 놈이라면 할 말은 없지만, 사실 이 놈이 아니었다면 어차피 제국 통일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찌 감히 나에게 반역을 한단 말이냐"

나의 말에 알드리드는 "너…마왕, 더 나쁜 마왕"이라는 짧은 말과 함께 마검을 내 머리를 향해 내리꽂는다.




"오"

지이이이잉- 거의 1.5초에 이르는 긴 진동이 컨트롤러를 통해 전해진다. 하마터면 컨트롤러를 떨굴 뻔 했다. 곧바로 쉬지 않고 공격을 퍼붓는다. 놈의 무차별적인 공격에 의해 아군은 물론, 청기사단까지 피해를 입는다. 나는 재빨리 내 뒤를 따르는 정예기병에게 "마법사들을 공격해" 하면서 지시를 내린 후, 알드리드와의 싸움에 집중한다.

알드리드. 중간보스 중에서도 상급 중간보스다. 그리고 싸우다보니 생각났는데 내가 마왕을 잡으러 구성한 최강의 NPC 5인조 파티로 겨우 잡은 놈이 이 놈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혼자 싸우고 있네. 심지어 이 놈에게 준 마법 흡수방패와 검도 내가 하사한거다. 저 놈이 쓰는 검도 나와 같은 '마검 새_롱스워드(2)'다.

'어떻게 이기지?'

물론 상성상 검을 든 용사는 마족에게 크리티컬 데미지가 들어가기는 한데, 문제는 저 놈의 피통이 내 피통의 한 5배는 족히 된다는 점이고 회복을 담당하는 백마법사도 없이 이렇게 난전에서 1:1로 싸운다는건 역시나 아주 피곤한 일이다. 게다가 중간보스급답게 중간중간 발광을 하며 벼락을 내리 꽂는데 저거 맞으면 바로 사망이다.

'어쩌지'

가속 스크롤을 사용하며 공격의 속도를 높인다. 회복물약을 빨고, 놈의 공격을 피하며 다른 청기사단을 벤다. 드디어 세번째 불검의 쿨타임이 찬 나는 청기사단의 마법사들을 향해 화염마법을 뿜어낸다. 드디어 크리티컬이 터진 내 공격에 무려 적의 마법사 1/3이 그대로 녹아버린다.

'어?'

하지만 적의 2파 공격이 시작되었고, 예상대로 아군 병력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약 500명 남짓한 기병 공격이었던 1파와는 달리, 2천이 넘는 중갑기병이 아군의 정면에 그대로 돌파를 시도했다. 후방으로 빠졌던 장창병 예비대가 투입되어 겨우 뚫리지는 않았지만, 하마터면 아군 진영이 양단될 뻔 했다. 3만대 6만이던 숫자는 어느새 2만 6천대 4만까지 따라잡혔다.

'이대로라면 진다'

또 다시 알드리드의 검을 받아낸 나는 긴 진동을 느끼며 또 다른 필살기 '중검'으로 알드리드를 내리친다. 역시 이번에도 크리티컬 데미지가 들어가 주욱- 놈의 HP바가 줄어드는게 보인다. 하지만 멀었다. 어째 지난 번 전투와 동일한 패턴이다. 승기를 잡는 듯 하지만 결국에는 소모전에서 밀리고, 밀리고, 밀리고….

'이게 아닌데'

정신없이 리듬게임 하듯이 막고 치고 베고 찌르고 쏘고 채우고 먹고 막고 치고 베고 찌르고 돌고 숙이고 채우고 막고 피하며 싸우는 와중에 옛날 생각이 또 났다.

'내 연애도 그런 패턴이었지'

내 딴에는 의기양양하게, 그리고 한없이 퍼주면서 웃는 얼굴로 대하면서 마음으로 사랑했지만, 이런저런 조건을 따져오는 와중에 점점 작아지는 나를 느끼고 결국에는 버려지는 어떤 뻔한 패턴. 게임 속에서야 수십 수백의 여자를 거느린 하렘의 왕이지만 현실에서는 그저 호구 찌질이.

'또 체력이 다해간다'

카드 한도를 채워가면서 점점 막막해지는 연애. 점점 가망없어 보이는 둘의 미래 앞에 작아지는 나. 점점 무거워지는 내 팔의 무게보다 더 무거웠던 그때 당시의 내 마음. 숨이 가빠오는 만큼 답답했던 연애. 버려지면서도 "행복해라" 라면서 담담히 행복을 빌어주는 내 병신 같은 모습.

"씨발"



헬멧을 벗어 침대에 던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던진 것은 아니고 곱게 벗어놓았다. 그대로 눈을 감은 채 딱 30초를 셌다. 그냥 그렇게 뒤지면 된다. 그러면 이 게임하고도 안녕이고, 그냥 확 뒈질 생각이었다. 어차피 이딴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지.

…24…25…26…27…28…29…30.

진정한 나는 다시 헬멧을 뒤집어 썼다. 당연히 붉어진 화면과 함께 GAME OVER가 떠있길 바랬지만 놀랍게도 나는 전장에 그대로 서있었다. 간발의 차로 쏟아지는 벼락을 피하면서 내가 서있던 자리를 봤다. 아군 병사 수십이 나를 지키려 대신 죽었다.

'뭐한다고 나를 지키느라 죽은거야'

과몰입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어쨌든 이런 전투를 한 경험이 없다. 게임 초중반기에야 마왕잡이용 5인 파티로 싸웠고, 그 이후에야 전략 시뮬레이션 모드로 부대를 움직여 싸웠지 이런 식으로 대규모 전장에 1인칭으로 부하들과 싸운 경험이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었지만.

'천천히…천천히…'

나는 방금 죽은 아군의 말을 잡아 올라탄 뒤, 적진을 향해 쿨타임이 찬 '불검'을 쏘았다. 그렇게 고립된 내 뒤의 정예병들의 살 길을 뚫었고, 알드리드의 공격을 막으면서 남은 청기사단의 마법사들을 일제히 쓸어버렸다. 그렇게 적진의 후방을 털어버린 나는 다시 내가 이끄는 별동대와 함께 전열을 정비한 후, 그들에게 말했다.

"짐을 위해 목숨을 거는 그대들의 모습을 보았다. 이번 전투에서 이기면 그대들의 충성을 기억하고, 반드시 다시 좋은 황제가 되겠노라"

사기를 최고로 끌어올린 뒤 나는 다시 한번 '불검'으로 길을 열었다. 드래곤의 브레스처럼 뿜어져 나가는 용사 전용 마법 '불검'에 의해 수백의 청기사단이 단번에 죽어나가며 적진에 큰 구멍이 생기고, 저 멀리 적의 3파 공격에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는 아군 진영의 모습이 보였다.

"그대들은 아군을 도우라"

뚫린 길을 통해, 내 뒤를 따라온 남은 600의 정예기병이 제 3파 공격을 진행 중인 청기사단의 뒤를 쳤고 나는 알드리드와 1:1 싸움을 이어나갔다.

보스전은 기본적으로 패턴의 싸움이다. 적절한 타이밍에 공격을 막고, 0.5초 사이의 빈틈에 맞추어 딜을 넣고, 보스의 필살기를 정확한 타이밍에 피하고, 다시 그 빈틈에 딜을 넣는 패턴의 공격. 이미 흥건해진 VR 컨트롤러를 쥔 손. 지치고 힘들었지만 이를 악물었다. 이기고 싶었다. 어차피 그래봤자 게임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이기고 싶었다. 그냥 삶의 전환점을 찾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총 3시간 40분이 넘는 대혈전 끝에 나는 승리했다. 13년 넘게 플레이를 했지만, 이렇게까지 긴 전투는 처음이었다. 마왕 잡을 때도 이렇게 긴 전투를 한 적이 없었다. 청기사단과 적색기사단의 전력이 13,272 VS 11,902로 역전되었을 무렵, 나는 알드리드를 잡았다.

"개새끼야!"

놈의 목을 잘랐다. 배신하는 놈은 용서할 수 없다. 내가 낸 아이디어를 마치 자기가 한 것처럼 올린 후에 승진한 김 과장 그 새끼도 그렇고, 그럴싸한 핑계로 헤어지자더니 사실은 양다리 걸치다가 갈아탄 것이었던 유림이 그 년도 그렇다. 청기사단의 단장 목을 잘라 손에 들자, 남은 청기사단은 결국 항전을 포기하고 백기를 들었다.

"폐하!"

적색기사단의 단장 베두인은 기쁜 얼굴로 다가왔고, 그렇게 반란은 진압되었다. 타격은 컸다. 이번 반란을 통해 제국의 가장 강력한 전투집단 두 개가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고, 제국의 든든한 두 기둥-레오라와 루키후그-도 무너졌다. 하지만 가장 위대한 황제는 여전히 강력한 힘을 과시할 수 있었기에 흔들림은 없었다.

"반란은 용서할 수 없으나, 최대한의 자비를 베풀겠다"

수도 궁성으로 귀환한 나는 청기사단의 백인대 이상 간부들은 모조리 처형하고 모든 병력을 뿔뿔히 조각내어 제국 변방에 배치했다. 적색기사단의 모두에게는 공훈에 따라 포상과 작위를 하사하였으며, 베두인을 마티오 연합왕국의 새로운 왕에 임명하여 적색기사단과 함께 연합왕국으로 귀환시켰다.

"제국의 새로운 기틀을 다지겠다"

한편 녹색기사단, 황색기사단, 백색기사단 등 새로운 전투부대를 창설하였고, 제국의 세율을 90%에서 20%로 낮추었다. 그와 함께 이번 전투기록을 '엠퍼러' 커뮤니티에 올렸다. 그 전투기록은 꽤 화제가 되었는데, VR게임 특성상 1인칭 액션모드로 3시간이 넘는 전투를 치르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인데다 고인물들은 보통 안 하는 일이었기에 때문이다. 그래봤자 조회수 2천 남짓한 게시판이지만, 그래도 인기글에 올라갔다. 거의 10년 만의 일이다.

'wow!!!'

또, 레오라의 유언과 적색기사단을 회유하는 연설 역시 한국 커뮤니티 기준으로는 오글오글하다 못해 손발이 다 퇴화될 내용이지만, 진성 덕후들이 많은 엠퍼러 해외 커뮤니티에서는 꽤 인기를 끌기도 했다.




"엄마"
"왜"

전화 속 엄마의 목소리는 꽤 지쳐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나 다음 주부터 다시 일 알아보려고"하고 뜬금없이 말했다. 사실 그 말을 하면서도 "에이구 행여나 니가 잘도 일하겠다" 하는 식의 비아냥이나 듣지 않을까 두려웠지만 엄마는 "그래, 그래. 잘 생각했다. 아이구 우리 아들이 웬일이래"하면서 그저 마냥 좋아라만 하셨다.

"근데 나 돈이 조금 필요한데…"

그 말에는 조금 한숨을 내쉬었지만, 솔직하게 털어놓자 엄마는 "생활지원금 나온 것도 조금 있고, 내일 은행 가서 적금 붓던거 털어올게" 하면서 150만원을 선뜻 갚아주겠다고 말했다. 전화를 끊은 나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문득 깊은 후회가 몰려왔다. 조금만 일찍 정신 차렸더라면 좋았을텐데. 그보다 왜 이런 생각이 들었을까.

"흐"

한때의 나는 분명히 빛나는 사람이었는데. 이 세계의 용사처럼, 현실에서도 장래 유망한… 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친구 많고 성격 좋고 친구들 중에서도 제일 먼저 취업한 놈이었는데. 어쩌다 폭군이 되었고, 어쩌다 게임중독자, 하프 히키코모리, 백수 한량이 되어버렸다. 어쩌다가.

"그래도…"

어진 황제가 되라는 내 마누라의 유언처럼, 다시 정상적인 일상을 가진 사람이 되기로 했다. 알바 자리던 뭐든 직업도 갖고, 미래도 준비할 생각이다. 방구석 폭군이 아니라, 집 바깥의 성군이 될 수 있게.

< 끝 >

이 세계의 용사 출신 황제인 내가 현실에서는 인생실패자?! EP.2 [장편] 이세계

내가 지난 13년간 밤낮 없이 즐기며 인생을 바친 엄청난 스케일의 판타지 VR게임 '엠퍼러'. 현실에서는 부모 등골 빨아먹는 쓰레기일진정, 게임 속에서만큼은 '마왕을 무찌르고, 대륙을 통일하였으며, 엄청난 정치력으로 역사상 최강의 대제국을 만들어 낸 위대한 황제'인 나다.

'그런데'

한 게임을 너무 오랫동안 플레이 하다보니 근래에 와서는 권태가 생겨, 결국 온 나라를 내 마음대로 휘젓는 폭군이 되어버렸다. 그 결과 제국의 도처에서는 '반역이라는 이름의 혁명'이 수시로 일어나고 있다. 물론 버러지 같은 백성들이 감히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눈 뜨고 지켜볼 수는 없었고, 나는 매번 그 반란을 제국의 최정예 부대 '청기사단'을 활용하여 힘으로 짓눌러왔다. 그런데…

"바로 그 청기사단이 반란을…"

이런 일이 일어나 버렸다. 문제는 관리가 귀찮다는 이유로 제국의 군사력을 이래저래 지우고 조각내 버린 탓에, 수도 근처의 청기사단을 견제할만한 마땅한 카드가 없었다. 게다가 하드코어 모드로 시작한 탓에, 나는 게임 속에서 한번 죽으면 바로 이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내 13년 간의 인생 흔적이 공중분해 되는 것이다. 그것만큼은 막아야했다.

"폐하, 결단을 내려주소서. 그들이 수도에 당도해서 백성들을 선동하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수도에 도착하기 전 폐하의 신묘한 용력으로 제압하옵소서!"

충신 중의 충신인 제국상서의 말을 들어, 결국 나는 청기사단을 치기 위해 '마왕을 무찌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용사와 마법사'를 동원하기로 마음 먹었다. 바로 황제인 나와 황후인 레오라 말이다.






이 세계의 용사 출신 황제인 내가 현실에서는 인생실패자?!
-EP.02






"반역자 무리가 저기 모여있구나"

수도 외곽의 알록사스 산을 넘자, 저 멀리 청기사단의 주둔지인 알록사스 요새가 보였다. 높은 성채와 깊게 판 해자, 수많은 결계와 마법보호막으로 보호 받고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가 엄청난 위용을 보이고 있다. 그 안을 지키고 있는 청기사단은 기병만 1만에 이르는 총 3만의 최정예 병력으로, 일전의 3.6 반란 때는 무려 20만에 달하는 반란군을 단번에 쓸어버리기도 한 정예 중의 정예다.

"레오라"
"예, 폐하"
"역도들에게 불벼락을 내려주거라"
"알겠습니다"

나의 지시에 레오라는 말에서 내려 지그시 눈을 감고는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녀의 몸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곧 한줄기 실처럼 하늘로 하늘하늘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빛의 오오라는 점점 굵어졌다. 큰 마법이라 꽤나 힘든 모양인지, 레오라는 식은 땀을 줄줄 흘리며 "음-, 음-" 하는 신음소리를 내고 있다.

"참 야하긴 야해"

사실 이펙트 자체는 레트로 양산형 모바일게임스럽지만, 워낙에 캐릭터 모델링이 출중한 게임이라 보는 즐거움이 있다. 간만의 레오라 최종 갑옷을 본다. 바스트와 성기가 강조되는 형태의 저 에로틱한 갑옷. 너무 섹시하다. 현실에서라면 중증 성도착증 환자들이 광란의 파티에서나 입을 법한 노출광 패션이지만, 어쨌든 세계관 속에서는 전설적인 장인이 만든 갑옷이란다. 그 놈도 물론 변태겠지.

"알라두크, 푸르시두크…"

어쨌든 지금 레오라가 쓰려는 마법은 이 게임 세계관 속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인 운석소환 마법이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식상함이지만 이 게임 스타일이 원래 그렇다. 나는 그게 마음에 드는 거고. 나같은 아재한테는 그저 익숙한 UI, UX가 최고다.

"시아네이스 아드후크 마지스 어쩌고 저쩌고" 하는 주문을 한참 중얼중얼 외우던 레오라는 이제는 전신에서 엄청난 빛을 뿜어내고 있다. 나 역시도 눈을 뜨고는 레오라를 바로 쳐다볼 수가 없어서 아예 등을 돌린 채로 알록사스 요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잠시 후, 저 멀리 하늘이 갈라진 듯 갑자기 거대한 바위산 하나가 시야 밖에서 나타나더니 요새를 향해 추락하기 시작했다.

"콩그레가티, 매그넘 어쩌고 저쩌고" 하는 주문의 마지막에 이르자 이제는 바위 뿐 아니라 수많은 돌의 비가 요새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아무리 결계와 대마법실드가 쳐져 있어도 소용 없다. 레오라의 소환 마법은 '자연물'을 소환하는 것인만큼 직접적인 마법방어 중심의 요새 마법방어벽은 의미가 없다.



꽈과광-

너무 거대한 충격이라, 내가 있는 이 알록사스 산맥 자체가 한 1미터쯤 들썩인 느낌이다. 나는 말할 것도 없고, 나와 레오라가 탄 말도 엉덩방아를 찧을 정도다. 그리고 요새는, 아니 '한때 요새였던 것'은 거대한 버섯구름으로 뒤덮였고 그 먼지가 가라앉은 뒤의 모습은 그냥 거대한 바위산 뿐이었다. 요새는 흔적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허무한 결말이다. 하지만 이게 최선이다.

"이제 제일 쉽잖아"

계속 회복마법과 물약을 빨면서 싸운다는 전제 하에, 둘이서 3만명을 물리적으로 이기는 것도 사실 가능은 하다. 하지만 리스크를 최소화하고 싶다. 어쨌든 VR 게임이라 싸우다 보면 플레이어인 나도 지친다. 마왕과 싸우던 시절의 20대 몸을 가진 내가 아닌 것이다. 그저 이렇게 원거리에서 지도 자체를 바꿔버리는 수준의 강력한 마법으로 끝내버리는게 최고다.

"폐하…"
"이 약을 마시거라"

하지만 역시 세계관 최강의 마법이다. 레오라는 마법을 시전한 직후 모든 기력을 잃고 쓰러졌다. 입에 물약을 흘려주자 곧 기력을 채우기는 했지만, 더이상 운석소환급의 대마법은 쓸 수 없다. 기력은 게임 속 아이템으로도 충전이 가능하지만, 마나의 급속한 충전은 유료 결제를 해야한다. 현실 백수인 내가 유료 결제에 쓸 돈은 없다. 어차피 일주일 정도만 기다리면 완충되는걸 뭐.

"돌아가자"
"네에…"

혹시나 해서 풀장비를 맞추고 온 내가 다 민망해질 정도로 허무한 끝이었다. 레오라도 다시 말에 올랐고, 나도 말머리를 돌렸다. 다만 이제 청기사단이 몰살했으니 반란진압용 부대를 새로 키울 생각에 머리가 아플 따름이었다.

"폐하!"

그러나 그 다음 순간, 깡 소리와 함께 눈 앞이 캄캄해졌다. 암전효과. 저격마법이 틀림없다. 블라인드 상태가 된 나는 오랜 경험에 따라 즉시 자세를 낮추고 칼을 뽑으며 전투준비를 했다. 레오라는 즉시 내 뒤에 붙으며 상황을 브리핑했다.

"폐하, 포위되었습니다"
"누가 우리를?"
"청기사단입니다. 지나온 언덕 뒤에서, 수백명 이상의 기사들이 랜스 차징을 해오고 있고 마법부대 역시 이쪽을 향해 마법주문을 시전 중입니다"

큰일이다. 놈들은 이미 요새를 버리고 정예만을 뽑아 산에 매복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저격을 당해 3분간 앞을 볼 수 없는 상태로 싸워야 한다. 레오라의 마나는 채 1%도 안 남기고 고갈된 상태. 그래도 만랩 마법사인만큼 방어력과 기본 공격력 모두 준수한 수준이지만, 상대 역시 내가 직접 기른 최정예 병력이다.

"너는 스크롤로 마법방어를 해. 그리고 기사들이 있는 방향을 말해줘"
"6시 방향입니다"

나는 즉시 몸을 빙글 돌린 후 달리기 시작했다. 기사단의 장창을 향해 망토를 휘날리며 달려드는 보병. 현실이라면 자살행위지만 게임 속의 나는 다르다. 어차피 우리가 지나온 길은 좁은 산길. 말 두 마리가 간신히 나란히 지날 수 있는 폭이니만큼 옆구리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이 맛에 게임하는거지'

정말 오래간만에 게임하는 맛을 느끼고 있다. 입이 바싹 마르고 긴장감이 최고조로 올라간다. '지는 순간 캐릭터 소멸' 이 짜릿한 스릴을 느끼며 게임하는게 도대체 얼마만인가. 두두두두 하는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지고, 나는 대시 속도를 최고로 높이며 VR의 양쪽 컨트롤러 버튼을 빠르게 3회 누르며 필살기를 시전했다.

'마검 새_롱스워드'의 '불검' 공격.

…이름이 너무 시시한 이유는, 게임 초반 그럴싸한 이름을 붙였던 무기들은 강화 도중에 모두 깨졌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제련 기술과 마법부여 기술도 만랩을 채워 직접 무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수백, 수천, 수만 번의 시도 끝에 무려 32번의 강화에 성공한 마검을 얻게 된 것이다. 수만 번이나 같은 짓을 반복해야 되는데 '어차피 깨질 거' 매번 이름 그럴싸하게 짓기도 귀찮아서 기본 이름 그대로 시행하던 차에 안타깝게도 이 명검은 시시한 이름으로 탄생했다.

하지만 이 검과 그 검에서 발산되는 위력은 장난이 아니다. '엠퍼러'의 온오프라인 모드 포함 전체 무기 위력순위 24위에 랭크되어 있는 이 가공할 마검에서는 드래곤의 브레스와 같은 무속성 화염이, 그 원조 화염마법의 16배 데미지를 더해 쏟아져 나간다.

"가아아아아악!"
"우아아악!"

미련하게도 산길을 따라 이쪽을 향해 진격해오던 기사단 제 1파는 그렇게 화염마법에 죽 갈려나갔다. 아니 갈려나갔을 것이다. 아직 블라인드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무려 2분 42초가 남았다.

두두두두두

하지만 그 뒤의 또다른 기사단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불검의 쿨타임은 20초. 그 사이 나는 방어를 위해 마나실드를 치고 앞도 보이지 않는 상태로 마구잡이 칼을 휘두른다.

콰직 콰직 콰직 촥 촥

나의 마검에 무참히 썰려나가는 청기사단. 컨트롤러를 잡은 손에 전해지는 묵직한 베는 맛의 포스피드백. 간간히 깡! 깡! 하며 나의 투구와 갑옷에 기사단의 랜스 차징이 박히고 데미지가 꽤 들어오지만, 물약을 빨면 그만이다. 그렇게 앞도 보이지 않는 채로 수백 명의 역적을 죽여나간다. 10년도 넘게 즐겨온 게임이다. 간간히 업데이트 된다고는 해도, 인공지능 NPC 유닛의 공격패턴 정도는 안 보고도 싸울 수 있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블라인드 3분은 길어도 너무 길어"

온라인 모드의 PVP 대결이라면 블라인드 마법은 거의 사기스킬이나 다름없다. 당하면 그냥 바로 접속 끊는게 차라리 덜 분할 정도로. 3분 동안 보이지도 않는 상태로 두들겨 맞는데 이길 도리가 없다. 하지만 NPC 정도야. 간간히 불검을 날려주며 슬슬 지루함을 느낄 무렵, 앞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 죽어라 이 쓰레기들아. 어?"

기습적으로 얻어맞으면 몰라도, 이제 경계를 하는 상태에서는 블라인드를 또 당할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또 깡! 하는 소리와 함께 앞이 어두워졌다. 이 중대한 상황에 2연속 블라인드라니, 순간적으로 너무 짜증이 났다. NPC 공격패턴 많이 얍삽해졌구나. 하지만 침착해야 한다.

"레오라! 상태는?"
"버틸만 합니다! 폐하!"

우리 부부는 서로를 애타게 부르며 좁은 산길에서 양쪽으로 맞닥뜨린 적과 치열하게 교전 중이었다. 아니 사실 치열하다고 하기에는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문제는 서서히 물약이 줄어들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전사 클래스인 나보다 마법사인 레오라가 더 빨리 회복약을 소모했다. 999개, 인벤토리를 가득 채워 가져온 물약은 교전 5분 만에 스무개를 넘게 사용하고 있었다.

'어?'

조금 초조해졌다. 아무리 내가 지금 족히 100명 가까이 베었고 레오라도 비슷하게 죽였다고 해도, 물약 소모 속도가 너무 빠르다. 하물며 이런 기사단 말단이 아니라 백인장, 천인장, 만인장, 그리고 기사단장 같은 중간보스급과도 싸워야 한다고 치면 이건 위험했다. 이 속도라면 3만 명은 커녕 그보다 훨씬 이전에 우리 둘이 뻗고 말 것이다.

'망했다'

사실 처음에는 부족한 머릿수이다보니 좁은 길에서 싸우는게 이득이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이렇게 소모전을 강요받는 상황이 되니 이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적의 우두머리를 먼저 칠 수 없고, 서서히 힘도 빠지며 회복약을 소모하게 되는데다 퇴로까지 없는 상황이라 최악이었다.

"아 좆됐다"

그러나 방법이 없다. 적은 끝없이 머릿 수로 밀어붙인다. 정면에서는 기마병의 랜스차징이, 그리고 뒤에서는 화살과 마법 공격이 동시에 날아온다. 모두 검과 방패로 쳐내며 기사를 쳐죽여야 한다. 팔다리를 허우적 허우적대는 나의 모습을 순간 상상하며 방문을 잠궈놓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달밤의 에어로빅도 아니고, 엄마가 보기라도 했으면 등짝을 때리다 못해 아예 전원을 꺼버릴테니까. 아니, 그런 생각할 시간도 없다. 화살 걷어내기 바쁘다.

허억-허억-

그리고 문제는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내 체력소모가 너무 컸다. 불과 10분도 안되는 사이에 내 온 몸에 땀이 비오듯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왕년에 마왕 잡을 때 시절의 NPC가 아니다. 공격이 상당히 체계적이고 끝이 없다. 정확한 타이밍에 화살, 마법, 랜스차징이 동시에 들어온다. 리듬게임 하듯 정확히 쳐내지 않으면 데미지가 조금씩 쌓인다. 쳐내는 것은 쳐내는대로 내 현실 체력을 갉아먹는다.

"와 이거 어쩌냐 진짜, 레오라!"

…끝없는 싸움을 20분 넘게하자 진짜로 팔이 엄청나게 무겁다. 그럼에도 저 멀리 내다보이는 적의 행렬은 조금도 줄어든 기미가 없다. 삼국지의 관우가 1만 명을 족히 상대할만한 장수라고 했던가. 그러나 나는 관우도 아니고 그저 배 나온 게임중독자일 따름이다.

'그냥 친위대를 조금이라도 끌고 나올걸'

그랬다면 그들이 어느 정도 방패막이가 됐을텐데. 사실 상식적으로는 이런 타입의 전투가 벌어질 일이 없다. '엠퍼러'는 게임 초반에는 소규모 1인칭 판타지 액션 게임이 중심이지만, 게임 중후반에는 결국 경영, 전략 시뮬레이션에 가까운 게임이다. 엄청난 군세의 부하들이 있는데 굳이 적의 대부대와 혼자 싸울 이유가 있겠는가.

'남은 물약 722개…'

내가 내 캐릭터의 HP만 믿고, 실제 나의 체력을 지나치게 과신했다. 팔다리가 무거워지자 적의 공격에 맞는 횟수도 늘어나고 회복약 소모도 늘어난다. 조금 쉬기 위해 그냥 일방적으로 얻어맞으면서 물약만 소비한다.

깡! 깡! 깡! 깡! 깡! 깡!

진짜 무슨 총게임 하는 것처럼 정신없이 화살과 마법과 창의 비가 내 갑옷을 두드린다. 미칠듯한 속도로 HP가 깎이고, 타이밍 맞춰 물약을 깐다. 그렇게 한 10분을 더 쉬었다. 컨트롤러를 통해 정신없이 두들겨맞는 포스피드백이 전해진다.

"아 짜증나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다. 전투 중에 갑자기 게임을 종료하면 승률을 계산해서 그에 따른 데미지를 입게 되는데, 이런 절망적인 싸움이라면 당연히 백퍼센트 사망 판정이다. 그렇다고 항복도 할 수 없는 것이, 나는 이 게임 세계관에서 현재 마왕급의 악당이다. 항복한다고 해봤자 백성들 앞에서 참수 당할 가능성이 높다.

'이길 수 없다면 도망쳐야 한다'

물론 퇴로는 없다. 방법은 그저 산길 저 아래 절벽으로 뛰어내리는 것 뿐. 당연히 그것도 사망판정이 날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내가 누군가. 13년차 게이머 아닌가. 꼼수는 얼마든지 있지.

"레오라, 절벽으로 도망치자! 부유마법을 걸어줘"
"네 폐하!"

레오라는 치열하게 눈 앞의 적들을 쳐부수면서도 나에게 마법을 시전했다.

"레조르겟 코르퍼스, 룩스 애니마에!"

간단한 마법이다보니 그녀의 짧은 주문영창과 함께 나는 두둥실 뜬 몸으로 절벽을 향해 몸을 던졌다. 공기방울처럼 둥실둥실, 산 아래로 천천히 내려간다. 나는 낄낄 웃으면서 여유있게 회복약을 빨았다.

"레오라 너도 얼른 튀…"

그러나 나는 그때서야 봤다. 레오라의 남은 마나 수치를. 마나 포인트 194. 부유마법은 한번에 200 포인트가 필요하다. 분당 1포인트씩 차오르는 마법을 채우려면 6분이나 버텨야 한다. 하지만 이제 레오라는 앞뒤로 적을 맞이했다.

"어…"

레오라는 물약을 빨았지만 앞뒤로 공격을 맞다보니 불과 10초도 되지 않아 HP바가 빨간색으로 변한다. 다시 물약을 빨지만 역시 10초도 되지 않아 위태위태해진다. 게다가 파티장인 나와 거리가 점점 멀어진다. 곧 인벤토리 공유가 끊긴다.

"마나 유료충전, 결제할게, 결제"

손이 덜덜 떨린다. 아무리 게임 캐릭터라고는 해도 13년을 함께 동반자가 되어준 캐릭터다. 이대로 죽일 수는 없다. 한번 죽은 캐릭터는 되살릴 수 없다. 유료 마나충전 버튼을 누른다. 그러나 마나가 차지 않는다.

"뭔데"

눈 앞에 [ 결제오류 ] 안내가 뜬다. 그리고 곧 휴대폰에서 띵! 하는 문자 알림 소리가 울린다. 허겁지겁 VR 헬멧을 벗고 휴대폰을 확인한다.

[ 결제가 완료되지 않았습니다 : 잔액부족 ]

아뿔싸. 고작 2,500원이 없다. 나는 다시 VR헬멧을 쓴다. 레오라를 구하기 위해 다시 몸을 상승시켰다. 그리고 레오라는 그 순간 나를 향해 웃는 얼굴로

"폐하, 어진 황제가 되소서"

라는 말을 전했다. 그와 동시에 청기사단의 창에 몸이 꿰뚫리며 쓰러졌다. 그녀가 쓰러지자 여러 개의 게임 내 알림, 경고가 연달아 떴다.

[ 경고 : 파티원 사망 ]
[ 제국황후 '레오라' 붕어 ]
[ 알림 : 마티오 연합왕국 왕위 변경, 레오라 → 막시밀리안 ]
[ 레벨 99 마법사 '레오라' 사망 ]
[ 알림 : 제국 차기 황위계승권 변경, 레오라 → 드미트리 ]
[ 알림 : 전설급 귀속 무기 '페르사스의 마법봉' 파괴 ]
[ 알림 : 전설급 귀속 갑주 '음열의 불꽃' 파괴 ]
[ 알림 : 제국 황후 -공석- 변경. 새 황후를 임명하시겠습니까? ]
[ 퀘스트 알림 : '토사구팽' 완료 ]



나는 다시 천천히 산 아래로 향했다. 산 아래에 도착해서는 정신없이 최고속도 대시를 눌렀다. 청기사단의 추적이 시작됐지만, 다행히 들판에서 말을 테이밍하여 그들의 추격에서 벗어났다.

"아…"

내 눈에는 이슬이 맺혔다. 거의 10년을 부부처럼, 아니 진짜로 내 부인이었던 캐릭터가 죽었다. 게임하면서 눈물을 흘린다는게 기가 막혔지만 그보다 더 믿기지 않는 것은 레오라가 죽었다는 사실이다. 레벨 1시절부터 같이 동고동락하며 수많은 위기를 헤쳐나간 전우이자 부인이 이토록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아'

눈 앞이 멍했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 와중에 마지막 퀘스트 알림 메세지에 눈물이 핑 도는 와중에도 피식 웃었다. 토사구팽 완료라. 모험을 함께 한 전우를 싹다 죽였지만 레오라만은 곁에 두었거늘.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다'

나는 청기사단에게 진 것이다. 청기사단은 곧 수도의 궁성으로 향할 것이다. 민심이 최악이니 수도의 백성들은 그들을 새로운 지도자로 모실 것이고, 나는 황제에서 도망자 신세가 될 것이 틀림없었다. 또, 레오라가 죽었으니 마티오 연합왕국은 독립을 선언할지도 모른다.

'백퍼센트'

레오라가 죽었을 경우의 마티오 왕국 차기 왕위계승권자가 왜 내가 아닌 그녀의 이복동생으로 설정되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놈은 미친 놈이니까. 빌런 캐릭터다. 마왕 소환을 시도할지도 모르는 놈이다. 제국은 분열의 시대로 접어들 것이며, 그 모든 것을 수습하는 데에는 몇 년의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내가 이 게임을 계속한다는 전제 하에 말이다.

'어쩌지'

방법은 단 하나다. 지금 수도를 향해 진군 중인 변방의 야전부대, 적색기사단을 만나 그들을 데리고 청기사단을 무찌르는 것. 물론 수도 궁성을 빼앗기고 그들이 적색기사단에게 손을 쓰면 그들마저 나를 배신할지도 모르지만, 현재로서는 그게 유일한 해법이었다. 나 혼자서는 결코 청기사단을 상대할 수 없다.

"음"

헬멧을 벗었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레오라의 얼굴을 잠시 떠올린다. 그냥 이렇게 게임을 접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차라리 좋은 기회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오라의 유언이 떠오른다.

"폐하, 어진 황제가 되소서"



그 말을 떠올리자 후회스러운 마음이 가득해진다. 미친 짓으로 폭정만 안 했으면 반란이 일어날 일도, 레오라를 잃을 일도 없을텐데. 그냥 적당히 얼마 더 하다가 게임 접었을지도 모르는데. 아니 그건 아닐 거 같지만. 어쨌든 여기까지 와버렸다.

"그래, 딱 다시 제국 쿠데타만 수습하고 진짜 접는다"

그리고 까짓거 정말로 적색기사단에게도 배신당해서 참수당하면 그건 그것대로 게임 접기 딱 좋은 명분이다. 이판사판이다. 나는 다시 헬멧을 쓰고 적색기사단의 이동경로로 향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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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신

"뭐 먹고 싶어?"

나의 질문에 진서는 "아무거나" 하고 대답한다. 그때 정말 아무거나 골랐으면 좋으련만, 그래도 진서가 좋아하는 거 사주고 싶어서 한번 더 물어봤다.

"그래도 뭐 먹고 싶은거 있을거 아냐. 배 안 고파? 좋아하는거 사줄께"

하지만 진서는 짜증난다는 듯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쏘아붙였다.

"아 그냥 아무거나 먹는다고. 아무거나 먹는다면 그냥 고르면 되잖아. 왜 꼭 그렇게 몇 번을 물어보는거야 귀찮게. 나 별로 밥 먹고 싶은 생각도 없다고!"

순간 벙 쪘고 기분이 상했지만,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그럼 요 앞에 김치찌개 먹으러 가자…" 하고 말했다. 약간의 뜸을 들인 진서는 그제서야 감정을 추스리고는 한 마디를 더 붙였다.

"아니, 왜 꼭 나만 나쁜 사람이 되냐고. 그냥 아무거나 먹자고 하면 오빠가 먹고 싶은거 고르면 되잖아. 몇 번을 물어보니까 사람이 짜증이 확 나잖아. 이래도 내가 나쁜 사람이야?"

나는 그저 묵묵히 입 다물고 신발을 신으며 "미안해, 얼른 먹으러 가자. 나 배고프다" 하면서 그녀에게 사람 좋게 말했다. 진서는 여전히 짜증이 풀풀 난 얼굴로 겨우 신발을 신는다.




몇 년 전의 일이 겹쳐 떠오른다. 그때는 내가 진서의 입장이었다.

"아 그냥 아무거나 먹어도 된다고. 내가 뭐 니가 고른 메뉴 갖고 한번이라도 뭐라고 한 적 있냐? 근데 뭘 자꾸 그렇게 매번 꼬치꼬치 캐묻는거야. 그냥 너 먹고 싶은거 먹어 쫌!"

소리를 빽지른 나. 아영이는 당황한 듯 "아, 아니. 그냥 난 오빠가…" 라며 무언가 말을 더 하려다가 서러운 듯 왈칵 눈물을 쏟았다. 그제서야 미안함을 느끼고 나는 게임을 끄고 아영에게 달려가 안아주었다. 보통의 여자애 같았으면 그쯤해서 더 화를 내고 헤어지네 마네 소리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건만, 그녀는 조금 운 뒤에는 또 나를 이해해주었다.

"내가 미안해. 게임하는데 자꾸 이것저것 말거니까 오빠 신경 건드려서 그렇지 뭐. 괜찮아"

벌개진 눈으로 그렇게 말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참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나보다 세 살이나 어린 애가 나보다 훨씬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한테 도대체 나는 왜 그랬을까. 진심으로 사과하며 앞으로는 안 그러겠노라고 말했지만 그 이후로도 사실 자주 그랬다.




"맛있다 여기"

사실 그저 그랬다. 저번에는 분명히 맛있었는데, 오늘은 어째 영 그렇다. 진서는 여전히 최악의 표정으로 말 없이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불편하게 앉아있었다. 예전 같으면 "왜 그래, 이거 좀 먹어봐" 하면서 더 말이라도 걸었을텐데, 이제는 안다. 굳이 말 걸어봐야 좋을 일 없다는거. 그래서 나도 입을 다문다.

말 없이 그저 몇 숟가락을 더 먹는 순간, 진서가 말했다.

"좀 천천히 먹어. 맨날 뭐가 그렇게 급해"

나는 입 안의 씹는 속도를 줄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둘 다 또 말이 없어졌다. 불편하다. 그냥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번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이 내 머릿 속에 가득찬다.




아영이는 항상 나를 갈구했다.

"맛있어? 나 좀 봐. 나랑 밥 먹으러 와서 휴대폰만 보지 말구"

그제서야 휴대폰을 내려놓고 아영이에게 "너도 먹어. 나만 먹고 있네. 나는 먹는 속도가 빠르니까… 너 살 좀 쪄야 돼" 하면서 뒤늦게 휴대폰에 쏟아붓던 애정을 아영에게 건낸다. 그래도 아영은 싫은 소리 한번 한 적이 없다.

"밥 다 먹고, 우리 영화 보러 갈래?"

언젠가의 일 이후로, 아영은 막연하게 '우리 뭐할까' 라는 식의 질문을 던진 적이 없다. 옷 사러갈까? DVD방 갈까? 만화방 갈까? 식으로, 무언가의 제안을 해왔다. 그러고보니 그걸 이제야 캐치했다. 헤어진지 3년이 지나서야.




"아니 뭐가 그렇게 화가 났어? 내가 뭘 잘못했는데"

하지만 난 아영이 아니다. 참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몇 번이고 화를 꿀꺽꿀꺽 삼켰지만, 결국에는 계속 심통을 내는 진서에게 화를 쏟아냈다. 진서도 나쁜 애는 아니다.

"미안해. 내가 좀…"

머리를 쓸어올리며 사과하는 진서.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근심 걱정이 있던 모양이다.

"미안해. 내가 오늘 영 컨디션도 안 좋고, 기분도 안 좋아서 오빠한테 괜한 화를 냈나봐. 미안해"

그래, 내가 바란 것은 그리 큰 게 아니다. 애초에 나도 과거 바보 짓을 수도 없이 했으니까. 사과를 하면 된다. 그게 내가 바라는…

"근데 오빠. 미안해. 그만하자"

뭐를.

"뭘 그만해…"

오 제발.

"그냥, 그만 만나자고. 내가 지금 오빠랑 만날 심적 여유가 없는 거 같애. 알잖아. 나 요즘 이직 때문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솔직히 오빠랑 이렇게 만나는 것도 별로 재미있는 줄 모르겠어. 맨날 이렇게 싸우기나 하고. 이건 아닌 거 같아."

하….




그렇게 멍하니 거의 3분을, 진서네 집 앞에서 우두커니 서서 할 말을 열심히 찾던 나는 결국 "그래…" 하며 돌아섰다. 붙잡아볼까 생각도 했지만, 이번에도 아영의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미안해, 오빠 화 풀어라. 응?"

내가 먼저 잘못하고도 또 사과는 아영이 먼저한다. 아영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하지만, 나의 심통은 도대체 왜 이럴까.

"아니 내가 그래, 잘못한건 맞어. 근데 그렇다고 길거리에서 그렇게 소리를 질러대면 내가 뭐가 되냐? 너는 왜 그렇게 이기적이야?"

어처구니 없는 논리로 아영을 타박하는 나. 연애의 주도권을 쥔 자로서의 잔인한 권리.

"아니 진짜 하. 야, 솔직히 나도 힘들어. 맨날 못되게 구는 새끼 되는 거 같아서. 근데 솔직히 너도 좀 너무 해. 사람이 좀 센스있게 넘어가 줄 수도 있는거 아니냐고. 웃으면서"

개같은 논리로, 나는 아영에게 모진 말을 내뱉는다.

"지겹다 진짜. 나 그냥 집에 갈 테니까, 너도 그냥 들어가. 아… 힘들다 정말"
"오빠…"
"아 손 놓으라고!"

지금 생각해봐도 왜 그렇게 참 그렇게 모질고 못 되게 굴었는지 이해가 안 간다. 그때의 나는 정말로 정신 나간 놈이었다. 인생에서 단 한순간 시간을 되돌린다면 그때로 되돌아가고 싶다고 몇 번을 후회했는지 모른다.

"… …"

아영은 손을 뿌리친 나를 보며 굵은 눈물을 줄줄 흘리더니 그제서야 등을 돌리고 집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조금 화가 풀린 나는 그냥 여기서 다시 화해할까도 생각했지만, 그때는 또 내 딴에 '앞으로 싸울 때마다 다른 사람 신경 안 쓰고 소리 지르는 쟤 버릇 좀 고치자' 라는 병신 같은 생각을 했다. 그렇게 아영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어차피 몇 시간 뒤면 전화든 카톡이든 다시 할테니까.

그러나 그게 아영을 본 마지막이었다. 새벽 4시, 아영은 길게 장문의 문자를 보내왔다.

내용은 '나 요즘 많이 힘들었어. 알아. 원래는 오빠가 그런 사람이 아닌거. 따뜻하고 좋은 사람인거 누구보다 잘 알아. 그러니까 내가 오빠를 만났지. 근데 나를 만나면서 오빠가 마음이 많이 힘들어진 것 같아. 내가 많이 부족해서. 그동안 어쩌면 우리의 관계는 사랑이 아니라 동정이나 편안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어. 사실 나는 그래도 오빠 곁에만 있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어. 그렇다면 내가 오빠 곁에 있는게 서로에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미안해. 정말 고마웠구... 정말로 좋아했어. 안녕' 이라는 내용이었다.

보는 내가 울컥하는데 쓰던 아영의 기분은 어땠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나를 죽여버리고 싶은 그런 문자다. 그리고 정말 그게 끝이었다. 다음 날 아침에서야 그 문자를 본 나는 회사도 빠지고 정신없이 그녀의 자취방으로 뛰어갔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녀에게 몇 십통의 전화과 카톡을 했지만 이미 차단된 상태였고 그녀의 집도 결국 며칠 뒤 내가 회사 간 사이 포장이사가 와서 싹 다 치워갔다.

그 이후로는 단 한번도 아영의 소식을 들은 적도 없다.



집에 와 멍하니 앉아, 진서를 생각했다. 나는 참 많이 부족한 남자친구였다. 멋있는 기억, 좋은 기억,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어 준 기억을 떠올리고 싶었지만, 생각해보니 그런 기억도 별로 없다. 참 부족했다.

"진서야, 좋은 사람 만나"

그렇게 중얼거렸다. 진서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 속 회사 단합대회에서 활짝 웃고 있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있을 때만 보이는 저 환한 웃음을 자주 짓길 바라며 나는 그렇게 눈을 감고 길고도 긴 한숨을 내쉬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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