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툰 사람 소설

나는 서툰 사람이다. 스스로 생각해보아도 거의 모든 일에 서투르다. 그래서 그 나이대에 당연히 할 줄 알아야 하거나 해냈어야 하는 일들을 매번 제 때 못하고 한참 뒤늦게서야 겪고, 배웠다. 그나마도 익숙해지는 데에는 남의 곱절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미정 어머니, 미정이가 학습이 많이 더디네요. 집에서 어머니가 많이 도와주세요"
"아니 너는 무슨 자전거 하나를 이렇게 못 타. 지금이 며칠째야 도대체. 아빠 하는데로 이렇게 타보라고. 어어어어! 야, 관둬 그냥"
"아하핫, 서미정! 너 화장 일부러 그렇게 한거야? 나 진짜 깜짝 놀랐네. 이게 뭐야. 너 화장 처음 해봐?"

나로서는 의도하지도, 생각치도 않았던 오해도 참 많이 받았다. 그것은 인간관계나 업무, 사생활에 관해서도 다를 바가 없어서 곤혹스러운 일도 참 많았다.

"서미정, 너 표정이 왜 그래? 그게 그렇게 불만이야? 어? 아니긴 뭐가 아냐. 표정이 이미 딱 그런데"
"미정씨, 나 엿 먹이려고 일부러 이러는거에요? 아니면 뭐 회사 다니기 싫어서 태업하는거에요?"
"선배, 저한테 서운한거 있으면 그냥 말로 하셨으면 좋겠어요. 저 불편한거 싫어해요."

그런 나를 극복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도 하고, 마음 속 깊이 어딘가를 향해 간절히 빌어보기도 하고, 애써 아닌 척 그렇지 않은 척 가장도 많이 해봤지만… 대부분의 경우 결과는 매번 나의 참담한 부끄러움으로 끝나곤 했다. 아무리 애써도 어느 순간이 되면 남들이 나를 업수이 여기고, 나에 대한 예의나 존중 따위는 사라진 채 접근해왔다. 다른 사람에게는 안 그런 사람들조차도.

"미정씨는 왜 아무 말도 안해요? 아, 왠지…미정씨는 모쏠?"
"차라리 모르면 그냥 모른다고 해. 아 진짜, 이러면 이래서 문제고 저러면 저래서 문제고. 이거 어쩌니. 갑갑하네 증말"
"미정씨는 참 성실하기는 한데 말이야…하, 참. 그냥 이거 아영씨한테 맡기고, 미정씨는 이거 해요"

노력해서 무언가를 시도해 내 딴에는 '제법 이 정도면 그럭저럭'하고 생각했던 것들이 남의 눈에는 여전히 보잘 것 없고 형편 없는 것에 그쳤고, 어딘가를 향해 간절히 '대단한 것은 바라지도 않을테니 그냥 딱 남만큼, 부끄러움 당하지 않을 만큼만' 하고 바랬던 것은 수치스러운 결과만 잔뜩 안겨주었다. 평정과 보통을 가장했음에도 그것은 남들에게는 어설픈 허세로 밖에 비쳐지지 않았고 집요한 누군가들에게 그러한 허장성세는 오히려 톡톡한 망신을 위한 보기 좋은 표적에 지나지 않았다.

"근데 오늘 옷 일부러 그렇게 입으신 거에요?"
"이건 근데 뭐야? 누가 뭐 만들다 만건가? 아…이거 미정씨거야? 흠, 뭐 괜찮네"
"그거 반대로 쥐셨어요. 그리고 아까 그거도, 이렇게 하는거에요. 안 해보셨어요?"

수많은 대실패 끝에 남들의 조롱과 동정 속에 겨우겨우 무던함을 가장하고, 괴로운 표정을 감추고 혼자 힘없이 이불 속으로 들어와 눈을 감노라면, 그제서야 참고 참았던 눈물이 귓가를 향해 또르르 흐르는 그런 일상도, 이제는 눈물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많이 겪었다.

'그냥 확 사라지고 싶다'

같은 실수, 같은 실패를 겪어도 항상 나는 더 참담했고, 더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 실수를 저지른 사람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때 그 사람이 그렇게까지 했을까? 그 생각이 나를 너무나 괴롭게 했다. 왜 나만 이래야 할까, 왜 다들 나한테만? 서운함과 억울함에 남들을 원망하고 탓하다가도, 결국 그 마지막 화살이 향하는 방향은 나 자신이었다.

달리기는 매번 꼴등, 말주변도 없고 눈치도 부족하고 외모도 못났고 잘하는 것도 없고 성격도 내성적이고 집도 가난하고 재미도 자신감도 없고 약하고 피곤하고 외로웠다. 그래, 나는 항상 외로웠다. 물론 내 곁에도 좋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나의 서투름 때문에, 나의 나약함 때문에 그들도 그리 오래지 않아 내 곁에서 떠나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떠나갔다기보다는 서서히 나와의 인연이 옅어진 것이지만 그것을 다시 붙잡을 능력도 힘도 없었던 나로서는 그저 입을 꾹 닫고 그들이 다시 돌아와주길 은근하게 바라는 것이 전부였다.

물론 그래서 가끔 그들이 모처럼 간만에 시간을 쪼개어 나와 함께 해주었을 때는 정말 온 힘을 다해 그들과의 인연에 정성을 기울였지만 역시나 서투른 나로서는 그것이 부담이 되어버리거나 쓸데없는 오해를 유발하거나 하는 식으로, 역효과만 유발하곤 했다.

"그냥 넌 조금… 뭐라고 해야되나, 사람을 부담스럽게 만들어"

그러한 내 모든 것들, 나의 한심함과 부족함이 너무 아쉽고 서운하고 속상하고 답답해서 참 많은 시간을 괴로워했다. 사실 지금도 애써 아닌 척 하지만, 사실은 나도 정말 잘하고 싶다. 남들처럼 멋있게 척척, 착착해내고, 일이 안 예상처럼 안 풀려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멋있게 해결해내고, 일이 꼬여도 역시 운 좋게 술술 풀어나가는 그런 재주와 운과 능력이 갖고 싶었다. 정말로. 지금 당장 영혼을 바쳐서라도.






서툰 사람






"아, 너무 우울한 이야기죠…"

또 이런 식이다. 나도 모르게 신세한탄 같은 말을 소개팅 자리에서 해버렸다. 하마터먼 눈물까지 찔끔할 뻔 했다. 멍청이. 그렇게 오바하지 말자고 다짐하고 또 했는데. 다행히 남자는 "아니요, 괜찮습니다. 솔직해서 너무 좋은걸요. 그리고 저도 많이 공감해요. 저도 비슷한 고민 많이 하거든요" 하며 맞장구를 쳐준다.

긴 어색함. 회사의 주연 과장님이 주선한 소개팅 자리였다. 한번도 소개팅 해본 적 없다는 내 말에 놀라며 "그럼 더 주선해봐야겠네. 만나봐" 하며 알아봐 준 자리.

"여기 커피 맛있네요"

또 대화의 공백이 길어지자 나도 모르게 당황해서 초조한 나머지 아무 말이나 하기 시작한다. 남자는 내 말에 빙긋 웃더니 "네, 맛있네요" 하고 받아준다. 나의 '아무 말'에 그저 별 뜻 없이 쳐주는 맞장구지만, 그 부드러운 포근함이 나는 참 좋았다. 누군가의 말에서 묘한 조롱이나 무시, 동정이 느껴지지 않고, 이렇게 순수하게 포근함을 느낀 적이 도대체 얼마만인지…. 뭐, 내 피해의식인지도 모르지만.

남자의 별 뜻 없는 맞장구에도 그런 감정을 느끼는 내 자신이 문득 안쓰럽고 한심하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기쁜 것은 기쁜 것이다. 나도 그의 미소처럼이나 평소에도 화사한 봄날의 미소를 짓고 싶었다. 물론 내가 웃어봐야 어색하게 찡그린 미소겠지만.

그렇게 우리는 식사도 없이 카페에서 저녁 7시까지 무려 5시간 동안이나 수다를 떨었다. 어제 저녁부터 굶었던 터라 너무 배가 고팠지만, 남자는 식사 제안은 하지 않았고 그렇게 역 앞 카페에서 우리는 커피만 마시고 헤어졌다. 얼른 집에 가서 밥 먹어야지 하는 생각만으로 나는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자 문득 그제서야 '그때 그 말은 하지 말걸' 이나 '아, 이때 이렇게 대답했으면 좋았을걸' 하는 후회가 많이 떠올랐다.



"언니, 그 남자 어땠어?"

내 첫 소개팅이라는 말에, 자기가 먼저 신이 나서 코디도 도와주고 화장도 도와준 재희. 집에 도착했다는 카톡에 재희가 전화를 걸어와 물었다. 나는 조금 생각하다가 "서로 대화 많이 하고, 공감 가는 부분도 많았던 것 같아. 조금, 좋은 느낌인지도 모르겠어" 하고 대답했다. 재희는 "정말? 와, 너무 잘됐다" 하고 웃더니 물었다.

"그럼 애프터는? 언제 보기로 했어?"
"응?"
"남자가 다시 또 보자고 안 했어?"
"어…어. 그러네"

그랬다. 그냥 "오늘 너무 즐거웠어요. 미정씨 같은 분하고는 정말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는 근사한 마지막 말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 말이 그저 예의 차린 거절의 멘트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순간 '좋은 느낌인지도 모르겠다' 라고 대답한 나 스스로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무안했다.

잠깐의 침묵 후 재희는 "뭐…, 요즘에는 애프터 신청 바로바로 안 하고 나중에 따로 하기도 한다더라. 요즘 남자들 면전에서 까이는거 디게 무서워하잖아" 하고 어색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사실 그때도 정말 그래서 그런거면 좋겠다 하고 바라면서도 "뭐, 또 연락하겠지. 마음 있으면" 하고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감정을 숨겼다. 아니 숨긴다고 숨겨지지도 않지만. 그리고 '마음 있으면' 이라는 말을 할 때 왠지 가슴 한 켠이 쿡 하고 아팠다.

"그래, 여튼 재밌었다니 다행이야. 그럼 또 연락할께"
"응, 아 그리고 소개팅 이것저것 도와줘서, 고마워"
"에이, 고맙긴. 잘 안되도, 너무 우울해하지마. 내가 또 알아봐줄께. 아영 언니네 회사에도 좋은 남자 많대"
"하하, 아니야"

괜히 어설픈 인사 몇 마디를 더 주고 받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혼자 얼굴을 쓸어내리며 나의 눈치없음과 사회성 부족을 욕했다. 그랬다, 그렇지. 그 말은 거절의 말이지, 어떻게 그 말을 "좋은 인연이 되자" 라는 말로 듣는가. 머저리. 그리고 그 와중에 내 뱃 속은 빨리 밥을 넣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맹렬한 경고음을 알렸다. 그것도 한심했다.




엄마가 집에서 보내온 집 된장으로 된장찌개를 끓였다. 그러나 끓이면서 멍하니 딴 생각을 하다가 그만 불 올려놓은 것을 깜박하고 쓰레기 분리수거와 빨래까지 걷어놓고서야 국물이 다 졸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머저리"

나의 서투름과 부족함에 다시 한번 나를 저주하게 됐다. 이제는 스스로 자기 밥상 하나 차리는 것도 못하는 모지리가 됐나. 자꾸 스스로가 한 "좋은 느낌인지도 모르겠어" 라고 재희한테 했던 말이 생각난다. 부끄러워 죽을 것만 같다. 다 졸아서 된장액기스가 되어버린 탄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어보고 또 다시 스스로를 향해 욕을 했다. 나는 이제 내가 밉다.




일손이 부족하다는 명목 하에 오늘은 사무실이 아닌 1층의 생산 라인에서 돕게 되었다. 사람이 자꾸 나가는지, 요즘 자주 있는 일이다. 멍하니 라인에서 하루종일 똑같이 부품을 결합했다. 단차가 잘 맞지 않은 부품은 손톱으로 꾹 눌러가며 조립을 해야 했기에 검지 손톱이 얼얼하고 아팠다.

그저 멍하니 하루종일 같은 일을 하는 것이지만, 어쩌면 그래서 이 얼얼한 작은 통증이 그나마 나의 잠도 깨워주고 나도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자각을 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이 일을 오래하다 보면, 옆의 숙희 언니처럼 저렇게 굳은 살도 생기고, 손 마디마디도 굵어지는건가, 하는 생각도 해보고.

"자기 어제 소개팅 한다고 하지 않았어?"

점심을 먹고 라인에 다시 서노라니 그녀가 물었다. 나는 새삼 왜 그걸 떠벌렸을까, 하고 막심한 후회를 했지만 그때는 나도 모르게 꽤 들떴던 모양이다.

"그냥 잘 안됐어요"
"왜? 남자가 별로야?"

아니, 그렇지 않다. 착하게 생긴 인상에, 에, 키는 조금 작고, 배도 조금 나왔고… 조금 객관적인 기준에선 그저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웃는 얼굴이 좋았다. 환하게 웃는 그 얼굴이 참 나는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나를 너무 동정하지도, 너무 차갑게 굴지도 않아서 좋았다.

"아니요, 그냥…"

무언가 그를 욕하지 않고, 나도 초라해지지 않는 답을 머릿 속으로 찾았다. 하지만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잘 안됐어요"

겨우 한숨 토하듯이 그 말을 뱉어내자 언니는 "그래, 아니면 마는거지. 소개팅인데 뭐" 하고 대수롭지 않다는 양 넘긴다. 그리고 그렇게 대화가 끊겼다. 숙희 언니도 말을 그렇게 잘하는 타입은 아니다.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고. 내가 왜 소개팅 한다는 말은 꺼냈을까 하고 다시 한번 후회하며, 어색한 분위기에서 침묵의 시간이 길어졌다.




끝날 무렵 숙희 언니가 기분도 꿀꿀할텐데 저녁 같이 먹을까? 하고 제안했지만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거절하고 집에 왔다. 피곤했다. 밥 차릴 힘도 없어서 그냥 윗도리만 간신히 벗고 침대에 누웠다. 딱히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나는 왜 사는 걸까.

천장을 바라보다 몸을 일으켰다. 커피를 마셔야겠다. 다시 벗어놓은 옷을 입으려다. 그냥 편한 검정 고무줄 치마와 검정 티로 갈아입고, 파란 가디건을 걸쳤다. 색이 참 안 어울렸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고집을 부리고 싶어졌다. 나에 대한 심술인지도 모르겠다.

"후"

슬리퍼를 신으려다 다시 로퍼에 오른발을 끼워넣다가 다시 신발을 벗고 가디건을 벗어 제끼고 그냥 아디다스 바람막이를 걸쳤다. 파란 운동화를 신었다.

"뭐 하나 제대로 된게 없냐. 옷 하나도"

그냥, 걸어서 1분 거리의 동네 카페에 하나 아무렇게나 대충 입고 갈 곳도 참 이렇게 이상하게 어울리지도 않게 간다. 참 센스도 없고, 모자라다. 나는 내가 정말 정말 싫다. 정말 싫다.





카페에 비치된 여행 잡지 한 권을 넘겨보며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다섯 테이블 있는 이 작은 카페에 손님은 나 하나 뿐이다. 예전에는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지만 맞은 편 골목 입구에 큰 커피샵이 하나 생기고 여기 손님이 많이 줄었다. 주인 아저씨의 우울한 표정이 점점 더 우울해지는 느낌이다.

카페의 통유리 너머로 비가 한두방을 묻어나기 시작하고, 가로등빛이 서서히 빗줄기에 번져보일 무렵 나는 커피를 다 마셨다. 하루종일 내 전화기는 울리지 않는다. 며칠에 한번씩 아는 동생들이나 언니들의 안부 카톡 정도. 사실 그것도 내 책임이다. 먼저 말을 걸고, 먼저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쓸쓸했다. 그래도 예전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요즘의 나는 고독사에 대해 문득 걱정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루종일 전화를 하는 사람은 엄마 뿐이다. 만약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욕실에서 넘어져 뇌진탕이라도 온다면 나는 그렇게 죽는 사람이 될 것이다. 아니, 사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문득 그냥 지금 누군가와 연애 이야기, 화장품 이야기, TV프로 이야기, 다이어트 이야기, 회사 이야기를 주고 받고 싶었다. 아니아니, 그냥 주말 동안 누군가들을 만나서, 수다를 떨고, 남친이랑 여행도 가고, 그래, 그런 것들을 해보고 싶다. 올해 나이 31살, 이제 몇 년 후면 점점 더 힘들어지겠지.

비 때문에 센치해진 탓일까. 지나치게 우울함 속으로 빠져든다. 난 아무렇지도 않다.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다. 이대로 살다 혼자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애완동물은, 아니 반려동물은 잘 간수할 자신이 없다. 나 스스로도 잘 못 챙기는 인간이 말도 안 통하는 짐승에게 잘할 것 같지가 않다. 그래서 키울 수가 없다. 그리고 막연한 생각이지만 정말로 죽는 날까지 모태솔로로 죽지야 않겠지. 아니, 모르지만. 어쨌든.

다시 여행잡지에 눈길을 둔다. 히말라야 산맥의 사진이 멋있어 보였다. 훌쩍 떠나고 싶어졌다. 쉬고 싶었다. 근데 한편으로는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차라리 그럴 돈 있으면, 그 돈으로 성형이나 하면. 그럼 조금은 사정이 낫지 않을까. 얼굴에 칼 대는건 무섭지만.




[ 미정씨 ]

조금 울적해져 창 밖을 바라보노라니 카카오톡으로 메세지가 날아왔다. 소개팅의 그 남자, 영석씨였다.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는지, 테이블을 툭 쳐서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 했다.

[ 오늘 출근 잘 하셨죠? 저녁 드셨어요? ]
[ 안녕하세요, 네, 근데 저녁은 아직 안 먹었어요 ]

답장을 보내고 나는 휴대폰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허둥대는 내 모습에 사장님이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지만 나는 다시 휴대폰으로 눈길을 돌린다.

하지만 대화는 그걸로 끊어진다. 거의 30분 가까이 답장이 없다. 무언가 답장을 보낼까 하다가, 마땅한 말도 생각이 안나고, 빈 커피잔을 놓고 너무 오래 있는 것 같아서 자리에서 일어난다.

"수고하세요"
"예, 또 오세요"

무미건조한 주인 아저씨의 목소리. 그 또 오세요, 라는 말이 괜히 이상하게 들린다. 마치 '허튼 생각하지 말고 솔로의 세계에 머무르세요' 같은 말로. 점점 내가 이상해지는 것 같다.




비를 몇 방울 맞고 집에 들어와 옷을 다 벗고 팬티만 입은 채로 휴대폰만 챙겨 침대에 눕는다. 새삼 아직 내가 안 씻었다는 사실을 떠올렸지만 귀찮았다. 불도 켜지 않은 채, 비구름에 어두컴컴해진 방에서 혼자 휴대폰 불빛만을 바라본다. 그렇게 1시간쯤 지났을 무렵, 그에게서 또 카톡이 왔다.

[ 죄송해요, 제가 지금 회사 회식 중이라서;;; 그보다 혹시 이번 주말에 시간 되세요? 영화 어떠세요? ]

솔직히 기뻤다. 나 되게 비참한 방식으로 까인게 아니라, 그냥 순수히 남자가 미쳐 말을 못 꺼낸 것 뿐이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나 애프터 신청 받았다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서운했다. 뭐가 서운한지는 모르겠지만 서운했다. 답장이 늦어서? 그 날 말을 안 해서? 그 때문에 내가 입장이 난처해져서? 그리고 웃겼다. 새삼스레. 남자에 목을 매는 그런 내가 아닌데.

[ 네, 어떤 영화 보고 싶으세요? ]
[ 미정씨 보고 싶은 영화요. 뭐 보고 싶으세요? ]

사실 극장 간지 너무 오래되서 무슨 영화가 있는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본 영화가…글쎄. 그냥 영화 앱으로 업데이트까지 한 끝에 볼만한 영화를 골라본다. 남자는 [ 좋아요 ] 하고 대답하더니 [ 그럼 예매해놓을게요 ] 라며 은연 중에 데이트 약속을 확정 짓는다. 사실 난 시간도 날짜도 어디서 볼지도 이야기 안 했는데.



"그래, 다 케바케라니까. 응응, 재미나게 봐"
"어어~"

재희에게 자랑 아닌 자랑을 했다. 만나러 가도 될까, 하는 식으로. 전화를 끊고 나서 내가 너무 티나게 이야기 한 거 같아서 바보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뭘 입고 가지, 하는 걱정을 했다. 내일은 옷을 사러 가야겠구나, 생각했다. 속옷도 사야되나, 하고 생각했다가 스스로의 바보같음에 빵 터졌다. 그렇게 혼자 미친 사람처럼 히히대다가 몸을 일으켰다. 씻기로 했다.



다음 날의 퇴근길에는 옷 매장에 들렀다. 옷 사는 것도 엄청 간만이다. 하도 간만에 왔더니 뭐가 이쁜 줄도 잘 모르겠다. 이 옷 저 옷 입어봤지만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오늘따라 매장에 사람이 많아 여러 번 이것저것 입어보기도 어려웠다. 다들 참 옷도 잘 입고 이쁘다는 생각을 해봤다. 나만 촌스럽고 못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조금은 자신을 갖기로 했다. 결국 옷은 못 샀다. 아직 화요일도 있고, 수요일도 있고 뭐 시간은 많았으니까.




"흠"

집에 와서 데이트 코디, 여친룩, 소개팅 패션 등 다양한 키워드로 검색해봤지만 다들 20대 초중반의 날씬하고 예쁜 사람들 패션만 보여 도움이 안 됐다. 저런 애들이야 무슨 옷을 입는들 안 예쁠까. 입술만 깨물다 옷장을 열고 다시 이 옷 저 옷을 살펴봤지만 그나마 제일 나은 옷이 저번 소개팅 때의 그 원피스였다. 재희도 그게 제일 낫다고 했다. 또 입고 갈까도 생각해봤지만 역시 그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숨이 나왔다.

"옷이 없냐…"

탄식을 하며 더 찾다가, 얇은 가죽재킷을 하나 찾았다. 그러고보니 작년에 잘 입고 다녔는데. 지금 입기는 조금 더울지도…, 싶어서 휴대폰으로 날씨를 봤다. 주말 날씨는 조금 흐리다고 했다. 아주 못 입을 성 싶지는 않았다. 그럼 이걸 플랜B로 하고 내일, 모레 또 옷을 보기로 했다.




결국에는 금요일 저녁에 내가 못 참고 [ 저희 영화 언제 볼까요? ] 하고 먼저 말을 걸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남자는 [ 아, 제가 깜박했네요. 토요일 12시 영화에요. 신촌에서 뵈어요 ] 하고 답장을 했다. 아, 조금 더 늦게 만나면 좋았을텐데. 결국 맘에 드는 옷을 못 사서 내일까지 좀 봤으면 싶었는데. 어쩔 수 없었다. 가죽재킷을 입기로 했다.

"내일 안 덥기를"




…더웠다. 어제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내일은 오전에 비도 오고 바람도 분다는데. 내일 입으면 딱일텐데. 아침까지 바람막이랑 고민하다가 그냥 이걸 입었는데 후회했다. 아니 뭘 입었어도 사실 후회했겠지만. 재킷을 벗어 손에 들고 있는데도 더웠다.

[ 어디세요? ]

벌써 11시 40분인데. 12시 영화라고 안 했나. 설마 밤 12시 영화는 아니겠지. 전화를 했는데 꺼져 있었다. 카톡을 보냈다. 날이 더워서 땀이 조금씩 났다. 땀냄새 날까 두려웠다. 시간이 애매해서 카페에서 기다리기도 조금 그랬다.

"하아"

조금 더 기다리노라니 어느새 11시 58분. 영화는 이미 늦었네 싶었다. 입술을 쭈욱 내밀었다가 '딱 1분만 더' 하고 생각하며 전화를 또 걸었다. 역시 꺼져 있었다. 설마 늦잠 자는 걸까. 그럴 수도 있지, 싶었다. 그리고 설마 이렇게 바람 맞는건가 하고도 생각했다. 그 역시 그럴 수 있지, 싶었다. 내 인생이 그렇지 뭐, 하는 생각에 조금 쓸쓸해졌다. 다리가 아팠다. 힐을 안 신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남자가 키가 작으니까, 신으면 안 좋아하겠지 싶어서.




"어디세요?"

남자에게 전화가 걸려온 것은 1시간이 더 지나서였다. 오후 1시가 다 되어서 공중전화로 걸려온 전화. 조금 화도 났고 '내 인생이 그렇지 뭐' 하는 마음에 우울한 먹구름도 마음 속에 가득했지만 그보다는 어쨌든 일단 반가웠다.

"미안해요, 제가 사고가 나서요"
"사고요?!"

오다가 다 와서 횡단보도에서 오토바이랑 접촉사고가 났다고 했다. 하필이면 전화기를 떨어뜨려서 망가진 통에 전화를 걸 수가 없었다고. 번호를 외우고 있는 것도 아니라서, 건너건너건너 통해서 번호를 알아내느라 시간도 걸렸다고 했다.

"많이 다치신거에요?"
"아니에요, 다리만 조금…"
"어느 병원이에요? 입원한거에요?"

남자가 조금 우물쭈물하다가 "아, 그럼 여기 신촌 세브란스 병원인데 오시겠어요?" 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알겠노라며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




10분 정도 거리길래 택시 타기도 민망해서 걸었더니, 너무 더웠다. 또 급한 마음에 서둘렀더니 땀이 줄줄 났다. 이미 화장도 무너졌을 것 같고, 망한 데이트였다. 그래도 괜찮았다. 나 때문에 사고를 당한 것 같았다. 그래, 나 때문이다. 속상했다. 나같은 사람이랑 어울리니까 이런 일이 일어난거다. 순간 울컥했다. '왜 나만' 하는 생각이 머릿 속에 가득 찼다. 그냥 평범하게 데이트 하는 것도 잘 안되는 나다. 머피의 법칙, 징크스, 불운 뭐 그런 단어들이 생각났다.

글썽글썽한 눈물을 물티슈로 조심스레 닦고 휴대폰을 보았더니 다행히 화장은 크게 번지지 않았다. 병원에 들어서자 조금 시원했다. 화장실에서 화장을 고치고, 전화를 걸려는 순간 아차 싶었다. 어디서 만나기로 한지 정하지 않았구나, 싶었다.

'멍청이'

그러다가 어차피 그가 다시 전화를 하려면 공중전화로 가야겠지, 싶어서 두리번 거리며 검색하려는 순간, 다시 전화가 왔다.

"응급실 앞에서 기다릴게요"




"아…"

남자는 발목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깁스를 한 거냐고 물었더니 그냥 붕대만 한 거라고 했다. 재차 부러진거냐고 물었더니 그냥 가볍게 삐끗한 정도라며 걷는 것도 괜찮다고 했다. 조금 절뚝이기는 했지만.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미안하다고 했다. 그는 "미정씨가 왜 미안해요" 하고 웃으며 물었다.

"저 만나러 오시다가 다치신 거잖아요. 미안해요"

그 말에 그는 환하게 웃으며 "아니에요, 무슨 말이에요 그게. 오히려 제가 늦어서 미안해요. 영화도 못 보고… 그보다 배고프죠? 밥 먹어요 우리" 하고 제안했다. 다친 다리로 멀리가기 미안해서 그냥 병원 푸드코트에서 먹자고 했다. 이번에는 남자가 다시 미안하다고 했다.




"사실은, 오면서 케이크랑 꽃다발도 샀는데, 넘어지면서 하필 쓰레기봉투 있는데로 떨어뜨려서 다 망가지고 뭐 그래서, 케이크는 버렸고 꽃다발도 요거 한 송이만 따로 빼왔어요"

남자는 가방에서 장미꽃 한 송이를 꺼냈다.

"고마워요. 근데 꽃다발 받아야 할 사람은 영석씨 같은데요. 문병 받게"
"하하, 그러네요"

영석씨는 순두부찌개를, 나는 치즈 함박 스테이크를 골랐다. 밥이 나오자 허기가 졌던 우리는 둘 다 정신없이 밥을 먹었다. 사실 아직도 조금 어색한 감이 없진 않아서 더 밥 먹는데 집중한 것도 있었다. 반쯤 먹었을 무렵, 영석씨가 말했다.

"사실…저도 소개팅 같은걸 많이 안 해봐서, 아니 안 해봐서, 당연히 머리로는 애프터 신청을 해야 되는거 아는데도 막상 헤어질 때 깜박했어요"

어색하게 웃던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 소개팅 때 미정씨가 막 어렸을 적부터 일이 잘 안 풀리고 뭔가 남들보다 늦고 그런 이야기 했던 거요, 그 이야기 들으면서 되게 공감도 가고, 제가 더 잘해주고 싶기도 하고, 음, 그런 마음이 들었었거든요"

그랬나.

"아까도 저 다친거 보자마자 미정씨가 자기 때문에 저 다쳤다고 미안하라고 한거, 그 말 들으면서 뭔가 가슴 여기가 디게 뭉클하면서 아프기도 하고, 막 좀, 그랬어요"
"왜요"
"그냥 보통은, 1시간씩 연락도 없는데 기다리지도 않지만 그랬다고 해도 디게 화날거 같은데, 화도 안 내고 또 병원까지 와서는 또 자기 때문이라고 하고. 그냥 그거 보면서 미정씨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그 마음을 조금 알 것 같았어요. 옛날부터 그런 자기…비하? 고찰? 후회? 뭐 그런 마음 같은게 참 많은 사람이겠구나 싶기도 하고. 아니 이건 좀 아닌가. 여튼 저도 좀 그런 면이 있어서, 정말 놀랐거든요"

이번에는 내가 가슴이 뭉클하면서 쿠욱 아팠다.

"…"
"어쨌든 그랬어요. 그리고 진짜…미안하고, 고마워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냥… 세상에 한 명 정도는,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아까 조금 울어두어서 눈물이 나오진 않았다. 같은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니 정말 좋았다. 

"우리 밥 먹어요 밥"
"아, 네"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는 밥을 먹으라는 내 말에 어색하게 또 웃으며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의 환한 얼굴을 보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어쩌면 이 사람을 사랑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그리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정말정말 이번 만큼은 서툴고 불행하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아니, 이제는 누군가에게 그렇게 소원처럼 비는게 아니라, 스스로 꼭 그렇게 제대로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 사람한테만큼은.   



< 끝 >

모니터 저 너머의 사람 소설

언제나와 같은 아침, 나는 출근하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포털의 뉴스를 보며 스윽 하루의 이슈를 훑는다. 다이나믹 코리아답게 '대충 보자' 라고 생각했음에도 도저히 클릭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쇼킹한 뉴스들이 몇 개씩이나 있다. 그것도 매일매일. 정말 대단한 나라다.

"와 이건 뭐…"

진짜 미친거 아닌가 싶은 뉴스 몇 개를 클릭하며 다이어리에 오늘의 이슈 몇 개를 적어놓는다. 회사의 SNS 담당자로서, 이렇게 하루하루의 이슈를 정리해놓으면 나중에 생각보다 꽤 도움이 된다. 이슈 중심의 아이디어 짜내기도 쉽고, 써먹기 좋은 드립도 쉽게 나오고.

당연히 댓글도 본다. 기사를 죽 보면서는 생각치도 못했던 문제나 색다른 방향에서의 접근도 많고 때로는 기사 보며 답답했던 내용에 대한 신랄한 사이다 같은 속풀이 댓글도 많으니까. 물론 안 보느니 못한 쓰레기 댓글도 많지만.

"응?"

근데 못보던 기능이 생겼다.

"작성자 프로필?"

닉네임 옆에 작게 그려진 초상화 아이콘에 마우스를 가져다대자 '작성자 프로필'이라는 문구가 뜬다. 뭔가 싶어 클릭하니…

[ Glassgun : 한승원, 42세,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84-5 (대치동) 디오하우스 402호, 액티브원(IT보안, 과장) 재직 중, 연봉 4400만원(세전), 기혼(임경아), 자녀 없음, 신장 176cm, 체중 74kg, 한국대학교 전자공학과 졸업 (기타 정보)]

같은 개인 프로필 내용이 다 보인다. 순간 기가 막혀서 마시고 있던 커피를 뿜었다. 당황하며 휴지로 책상을 닦아내고 다시 확인했다.

"뭐야 이거, 레이버 이 새끼들 미쳤나? 신상정보인데 이거. 법적으로 문제 있는거 아닌가?"

이토록 적나라하게 한 개인의 신상정보를 보는 기능을 만들다니. 심지어 밑줄이 그어진 링크를 타고 가면 그 회사나 배우자의 신상 역시도 그대로 보여졌다.

[ kalim0412h : 임경아, 39세,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84-5 (대치동) 디오하우스 402호, 열림출판사(출판사, 과장) 재직 중, 연봉 3700만원(세전), 기혼(한승원), 자녀 없음, 신장 167cm, 체중 56kg, 단원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기타 정보)]

"이거 뭐지 진짜, 근데 레이버 이 새끼들이 연봉 정보는 어떻게 알았대. 키랑 체중은? 이거 본인이 입력하는건가?"

그때였다. 혼자 기가 막혀하며 중얼중얼 대자, 옆 자리의 제아 주임이 "대리님 뭘 그렇게 혼자 중얼중얼 거리세요" 하며 웃는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아니 레이버 이 놈들 미쳤나봐요" 하고 제아 주임에게 말했다.

"아니 레이버 지금 뉴스 댓글창에, 아이디 옆에 작성자 프로필이라는 버튼 누르면, 그 사람 신상정보가 다 보이는 미친 기능이 생겼네? 이거 완전 난리 날 거 같은데?"
"네에?"

제아 주임은 기가 막혀하며 내 모니터를 흘낏 보다가 다시 자기 키보드를 다다다 타이핑 한다. 나는 혀를 차며 다른 사람들의 프로필들을 훑어봤다. 하… 다들 이렇게나 사는구나, 와 이 사람은 연봉이 3억이 넘네, 오, 박사 학위자네? 하면서 하면서 보고 있노라니 제아 주임이 다시 말을 건다.

"대리님, 어떤 거에요? 안 보이는데"

나는 가르쳐 주려고 일어나 제아 주임 자리로 갔다. 스크롤을 내리고 댓글 아이디 옆의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이거요. 완전 미친거 같지 않아요?"

하지만 나의 말에 제아 주임은 "뭐가요?" 하고 되물었다. 나는 모니터를 가리키며 "이거요 이거, 여기 연봉, 주소, 나이, 뭐 신상 다 보이잖아요" 하고 피식 웃으며 말했지만 제아 주임은 "네?" 하고 그저 되묻는다. 나는 답답함에 "이거요 이거" 하며 모니터의 프로필 박스 영역을 손가락으로 짚었지만 여전히 그녀는 무슨 헛소리 하느냐는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 본다.

"응?"

일단 옆 자리의 태민 과장님한테 말을 걸었다.

"과장님 이거 좀 보세요"

저혈압인지 아침마다 기분이 영 다운되어 있는 그는 "뭐가" 하면서 고개를 돌린다.

"이거요, 프로필 써있는 박스요"

과장님은 "뭐? 광고? 이거?" 하며 엉뚱한 소리를 한다. 아니 이 사람들이 지금 나를 놀리나 싶어서 "이거 이거요 이거. 프로필 기능" 하면서 손톱으로 찍는다. 그러나 여전히 무슨 헛소리냐는 식으로 못 알아먹다가 "아 뭐냐고" 하며 짜증까지 부린다. 제아 주임도 "뭐에요, 재미없어" 하면서 나를 실없는 사람 취급한다.

나는 코웃음을 치며 자리로 돌아온다. 뭐야 시발. 눈깔이 삐었나. 기분마저 나빠졌다. 짜증나서 혀를 끌끌차며 자리로 돌아와 업무를 시작한다. 회사 페이크북 계정에 접속한다.

"어?"

놀랍게도, 회사 페이크북 계정의 댓글을 남긴 고객의 이름 옆에도 프로필 기능이 달려 있었다. 방금전 레이버의 그것과 같은 UI의. 클릭을 해보니 이것 역시 개인의 신상 정보를 그대로 담고 있는 말도 안되는 기능이었다.

'뭐지'

전혀 다른 두 회사에 이런 동일한 UI의 동일한, 그것도 어떻게 보아도 법적으로 문제 있는 기능이 동시에 들어간다는건 말이 안된다. 내가 지금 뭐 헛거를 보고 있나, 꿈인가, 싶어 눈도 비벼보고 꿈에서 깨어자 하며 번쩍 눈을 떠보기도 하지만 그대로다. 이건 꿈이 아니다.

"해킹인가"

아 망할. 뭔가 애드온 형식의 랜섬웨어나 바이러스 툴 같은게 깔려서 보이는건가. 그걸 또 좋다고 이것저것 클릭해댔으니. 병신. 이상한 뭔가에 감염되었나 싶어 나는 재빨리 바이러스 검사부터 돌렸다. 하지만 간이검사 결과에는 뭐 뜨는게 없었다. 하긴 이미 감염됐으면 소용 없겠지. 아니 애초에 이런 듣도보도 못한 미친 툴이 깔렸다면 업데이트도 안 한지 오래된 이 회사 똥컴 백신 따위에 체크될 리가 없지. IT 일을 맡고 있는 재원씨에게 전화했다.

"재원씨, 나 컴퓨터가 좀 이상한데… 어어, 아니, 사이트의 유저 정보나 뭐 댓글창 이런게 보면, 그 유저에 대한 신상정보가 고스란히 노출되는 이상한 현상이 보이거든? 응, 뭐 랜섬웨어나 이런거 아닌가 싶어서. 잠깐만 와서 봐줘, 어어"

전화를 끊자, 옆에 있던 제아 주임이 피식 웃으며 말한다.

"아 대리님, 진짜, 재미도 없는 장난 왤케 오래 쳐요"
"장난 아닌데, 내 자리에서 보세요 그럼"

나는 다시 모니터를 가리켰지만, 제아 주임은 내 모니터를 보고서도 말한다. "너무 진지하길래 또 속았네, 아 보이긴 뭐가 보여요!" 하며 웃는다. 그리고 나는 그제서야 지금 좀 상황이 이상함을 느낀다. 제아 주임도, 태민 과장님도 장난이 아니다. 나만 보인다. 잠시 후 온 재원씨도 "뭐 말씀하시는거에요?" 하며 당황한다. 제아 주임이 "아 대리님이 장난친 거에요. 미안해요" 하며 그를 돌려보낸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자리에 앉는다. 그런데 지금도, 내 눈에는 개개인의 프로필과 신상정보가 그대로 보인다. 뭐야 이거.






모니터 저 너머의 사람 






인터넷 웹사이트 뿐만이 아니었다. 휴대폰의 메신저, 온라인 게임 속 아이디, 심지어 백업용으로 항상 찍어두는 거래처 명함의 이미지 파일에서도 그 상대의 프로필이 뜨며 보였다. 점심시간에 날아온 여친 소원의 카톡 옆 프로필 정보 보고는 놀라서 사레까지 들렸다. 휴대폰을 들여다 본다.

[ happy2lo : 장소원, 27세, 안양 동안구 경수대로 14-77 (호계 3동) 신월아파트 210동 702호, 삼원통상(무역, 사원) 재직 중, 연봉 2900만원(세전), 미혼(남친:조유민), 자녀 없음, 신장 163cm, 체중 57kg, 대원대학교 중국어과 (기타 정보)]

'뭐야 시발'

심지어 적힌 정보들은 사실이었다. 연봉이랑 체중까지는 몰랐지만. 나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기타 정보 탭을 눌렀다. 그러자 놀랍게도 카테고리 탭들이 보였다.

[신체] [성격] [재산] [인간관계] [히스토리] [심리상태] [소셜포지션] [성격] 등등등… 제일 앞에 있던 [신체]탭을 누르자 그녀의 몸에 대한 세부적인 정보들이 보였다.

키, 몸무게, 각종 건강상태, 운동능력, 신체 사이즈, 지능, EQ 등등. 모든 정보가 다 있었다. 난 소원이가 100미터 달리기 24초라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운동신경 둔한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그보다 변비와 치질도 있었다. 뭐 그거야 알고 있었지만. 신체 사이즈는 뭐 서로 볼 거 못 볼거 다 본 사이에 궁금할 것도 없지. 근데 지능에는 놀랐다. 141이라니. 몰랐다. 근데 왜 그렇게 멍청하지.

혼자 피식 웃다가 슬슬 다른 탭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히스토리…그 맨날 툭하면 이야기 하던 '재성 오빠', 사귄 적 없다더니 사귀었네 뭐. 나 말고 사귄 남자가 총 5명이구나. 첫 경험은 스무살, 대학 선배 규영. 모르는 이름이다. 25세 이후로는 나와만 만났구나. 그래 우리 벌써 2년 다 되어가네. 나에 대한 감정이 '사랑하지만 권태기에 접어드는 것이 아닌가 혼란을 느끼는 중'이라고 기록된 부분이 좀 씁쓸했지만.

재산은 볼까말까 고민하다 열었다. 1,200만원. 그래도 열심히 모았네. 한달에 60만원씩 적금 붓는구나. 인간관계… 아영이, 진아, 소미, 세미, 재원, 상원, 경호… 익숙한 그녀의 친구 이름들과 내 친구들의 이름들. 이어서 김대권, 윤지호, 송민섭 등등등. 들어본 것도 같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남자 이름들도 엿보인다. 심지어 그에 대한 감정상태까지 표시되고 있다. 다행히도 크게 신경쓸만한 남자는 없는 것 같다.

성격 탭이 있는데도 심리상태 탭이 따로 또 있는 것은 뭔가, 싶어 심리상태를 열어보니 놀랍게도 현재의 심리상태가 실시간으로 기록되고 있었다. 아쉽게도 문장형태는 아니고 그냥 [짜증 +2(32)], [분노 +7(66)] 등의 순간순간의 감정들이 보인다. 지금 뭔가 열 받고 있는 모양이다. 피식 웃었다.

소셜포지션은 뭔가 싶어 열어보니 직장 및 사회에서의 소속된, 혹은 되었던 단체나 집단, 동호회, 인터넷 사이트 등이 죽 나열되어 있었다. 일화여고, 대원대학교, 삼원통상, 안양 몽키띠모임, 여성세계, 소울앤커피, 카시오스타… 뭐, 그렇고 그런 사이트들.

"재밌네"





이게 꿈인지 아닌지 싶어 몇 번을 스스로 몸을 꼬집어 봤다. 이게 참 디게 영화에서도 보기 싫은 클리셰인데, 이게 지금 꿈인가 아닌가 믿기지 않는 상황에서는 확실히 그거만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더라. 그리고 매번 아팠다. 그리고 내가 미쳐버린 것은 아닌가 싶어 천천히 스스로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회사 끝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한숨 푹 잤다. 밤 11시 반에 눈을 번쩍 떴다. 허둥지둥 휴대폰을 확인했지만 역시나 프로필 보기 기능은 그대로 있었다.

"후"

이게 뭘까.

"초능력?"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 아닌가. 세상 모든 사람들의 개인정보를 나는 볼 수 있다. 인터넷을 통해서. 문득 언젠가의 과학잡지에서 봤던 우주론 하나가 떠올랐다.

"시뮬레이션 우주론"

쉽게 말하자면 내가 게임 속 캐릭터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우주 전체가 말이다. 그 게임 속, 그 세계관에서 정교하게 시뮬레이션 되고 있는 캐릭터는, 자기 자신이 누군가에 의해 창조된 하나의 캐릭터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까.

내가 만약 스타크래프팅의 마린이라면, 그리고 사실 내 모든 생각과 감정과 감각과 내 주변의 모든 것이 아주 지극히 정교하게 시뮬레이션 된 무엇이고 그렇게 누군가의 조종 하에 움직이고 생각하는 것이라면, 나는 그것이 내 생각이라고 생각하며 그렇게 살아가겠지. 누군가 "너는 그저 게임 속 캐릭터일 뿐이야" 라고 말해줘도 "응 그래" 하고 웃어 넘길 뿐이겠지. 그게 사실인데도.

…그런데 만약 진짜 내가 바로 지금 그런 것이라면? 지금 이 터무니 없이 말도 안되는 현상도 설명이 된다. 나를 조종하는 누군가가 일부러 나라는 캐릭터를 해킹 했거나 혹은 시스템에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한 것이라면 말이다. 일종의 버그 플레이가 되는 것이겠지.

"아…뭔 개소리냐"

스스로에게 긴 한숨을 내쉰 나는 어쨌거나 다시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았다.

"아참! 오 맞네"





레이버 뉴스 메인 화면에 뜬 흔한 가십성 기사. 인기 걸그룹 팝스걸즈의 소영과 인기 남성 R&B 듀오 데이웍스의 준이 사귄다는 기사. 둘은 소속사의 말을 빌어 "좋은 선후배 관계일 뿐"하고 밝혔지만 임마, 너네는 나한테는 안돼.

데스패치 저리 가라의 정보력을 얻은 나다. 곧바로 팝스걸스 소영의 뉴스타그램에 접속했다. 역시나 아이디 옆에 프로필 보기 기능이 있었고, 곧바로 클릭했다.

[ s0sopop : 전소영, 19세, 서울 강남구 논현로 227길 13 (논현동) 예지빌 202호, 소라 엔터테인먼트(연예기획사, 사원) 재직 중, 수익미배분, 미혼(남친 : 오혁준), 자녀 없음, 신장 161cm, 체중 44kg, 서원예고 재학 중(기타 정보)]

"거봐! 사귀는거 맞네! 둘이 잠은 잤나?"

곧바로 기타 정보의 히스토리 항목을 봤다. 현재까지 오혁준과의의 성관계 2회.

"캬! 했네 했어! 했네! 어이 했어! 얼씨구, 했구나! 고딩이랑 했구나!"

뭐, 내가 그다지 좋아하는 그룹도 아니고 그저 웃기고 재밌었다. 문득 이 능력으로 연예부 기자를 하면 나는 진짜 연예 기사로 퓰리처상 탈 수도 있는 미친 기자 되겠다 싶어 낄낄 웃었다.

"아니지"

아예 정치계로 나아가서 정치인들 약점 잡고 뒤흔들면 세상 무서울 것이 없으리라. 아니, 뭐 그랬다가는 목숨이 위태롭겠지만. 어쨌거나, 거기서 삘 받은 나는 거의 2시간을 탑 연예인들 히스토리를 뒤지고 다녔다. 세상에 이런 재주로 그딴 짓을 한다는게 누구 눈에는 한심하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쩌겠는가. 내 능력 내가 이렇게 쓰겠다는데.





"진짜 대박이다"

별별 더러운 일들이 다 있었다. 걸그룹과 보이그룹 멤버들끼리의 얽히고 얽힌 지저분한 치정관계와 스와핑, 온갖 변태적인 성관계들, 탑모델 송민영이 한국발전당 대선후보 서원섭 그 늙은이 애까지 낳아준 것도 그렇고, 역시나 UN미디어 사장 조섹스 그 새끼가 자기 기획사 아이돌 에이스 멤버들 거의 다 건드린 것도 그렇고… 김정아 나간 이유도 결국 그 변태 새끼의 끝없는 요구 때문이라는 사실에 내가 다 속상했다. 진짜 좋아했는데. 내가 요즘 최애하는 토마토 다영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도 솔직히 좀 충격이었고.

거기서 삘 받은 나는 카시오톡이나 페이크북을 통해 내 주변 사람들의 신상도 거의 다 까봤다. 회사 사람들, 친구들, 전 여친들…

그리고 세상에 멀쩡한 사람이 생각보다 드물다는 사실도 알았다. 태민 과장은 지금 내연녀를 두고 바람 피우면서 임신 중인 자기 마누라 툭하면 때리는 인간 쓰레기였고, 권제아 주임은… 도벽이 있었다. 회사 여직원들 화장품을 꽤나 훔친 듯 하다. 에휴. 내 전에 회식자리에서 잃어버린 갤럭시스7도 저 년이 훔쳐간 거였다. 시발. 그 폰에 별별 자료들 다 있었는데.

뿐만 아니었다. 친구 놈들도 치정관계로 엃긴 경우가 꽤 있었고, 특히 상원이 이 새끼가 나랑 소원이랑 술자리에서 나 자리 비운 사이에 소원이 뉴스타그램 아이디 따고 DM으로 꽤나 지분대다가 바람 피우자는 제안까지 했었다는 사실에 소름과 분노를 함께 느꼈다. 소원이 언제부턴가 상원이가 나오는 자리는 피하는게 그 이유였었다. 시발. 개새끼. 나한테 소원이 그 사실을 숨긴 것에도 짜증과 분노를 느꼈지만, 또 한편으로는 나와 상원의 친구관계 때문에 그런 것이겠지 하는 생각에 혀를 차며 넘어가기로 했다. 어쨌거나 상원이 이 새끼는 다음에 한번 날잡고 골통을 깨버려야겠다.

전 여친년들도 참 개짓거리 많이 한 것을 발견했다. 나 몰래 다른 놈들과 자고 다닌 것도 그렇고, 효영이 이 년의 나에 대한 평가가 '키스 더럽게 못하는 찐따 새끼'로 기록된 것에선 그냥 허탈하게 웃었다. 시발. 그래 니는 그렇게 깨끗하게 잘해서 양다리까지 걸쳤냐.

뭐랄까,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크나큰 실망감까지 느껴지는 수많은 내 주변인들의 기록을 훑어보다가 차마 두려워서 부모님 신상은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리고는 한참 이것저것 둘러보다가 정치, 경제인들에게까지 관심이 갔다. 국내 정치인부터 워싱턴의 현자, 위버 피렌까지. 영어가 짧아서 그 냥반들의 생각을 깊숙히 알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단지 가상화폐가 내년부터는 진짜 장난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 정도나 얻어본 정도.




"뭐야 이 새끼는"

다음으로 내가 한 일은 예전에 블로그나 커뮤니티에 내가 쓴 댓글과 게시글 찾아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달린 다른 사람들의 댓글보기. 이게 꿀잼이었다.

"얼척이 없다, 얼척이 없어"

지난 주에 IT기업들의 불합리한 인사관행에 대해 나와 밤새도록 토론했던 유저 tguys 이 새끼는 나이 마흔 넘게 쳐먹도록 평생 회사는 커녕 알바조차 해본 적 없는 방구석 히키코모리 백수였고, 예전에 한번 나와 정치관을 이유로 토론한 이래 수시로 악플 달아대는 찌질이 ss2000 이 새끼는 19살짜리 고딩이었다. 지 말로는 40대 중소기업 오너라더니. 사실 몇몇 놈 수준이 아니었다. 게시판 리스트 따라서 죽 훑어보노라니…

한 절반은 대학생인데, 연애하고 있는 놈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남은 절반의 절반은 평범한 직장인. 개중에 드물게 대기업 직장인이 있고, 더욱 드물게 전문직이 한 서너 페이지에 한 명 정도 보일 정도. 평범한 직장인이라고 해도, 생각보다 적당히 벌만큼 버는 사람들이 드물었다. 겨우 연봉 3천 버는 사람이 한 페이지당 서너명도 안된다.
그리고 남은 인원은 좀… 뭐 백수 찐따라던지, 뭐 그런 양반들. 아 고도 비만 환자는 왜 그리 많던지. 솔직히 놀랐다. 나도 똥배 나온 놈이지만, 우리나라 비만지수 낮은 나라 아니던가. 아니면 이런 사람들이 인터넷을 유달리 많이 하는 것이던지.

어째 연애 중, 혹은 기혼자로 뜨는 비율이 너무 적길래 좀 이상해서 3페이지 째부터는 히스토리도 훑어봤는데, 정말이지 놀랐다. 모태솔로나 나이 먹을만큼 먹고도 연애 경험이 거의 없는 케이스가 30%는 충분히 넘어보였다. 모쏠 그거 다 드립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다. 찐따라서 하릴없이 인터넷이나 주구장창하고, 또 인터넷이나 주구장창 하다보니 사회성 개나 주고 점점 더 찌질이가 되어가는 것일까. 뭐, 이런 생각도 꼰대적인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모니터 저 너머의 사람'들은 생각만큼 보편적인 사람들의 비율이 높지 않았다. 뒤늦게 새삼스러운 현자타임이 온다.




"생각보다 별 것 없네"

세상에 대한 치트키. 마치 온 세상에 대한 black sheep wall 치트키를 쓴 기분이고, 물론 지금도 들여다보자면 한도 끝도 없이 들여다 볼 거리가 널려있는 셈이지만 그만큼 빠르게 무언가를 상실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능력을 바탕으로 쉽게 돈을 벌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에 조금은 두근거렸지만.

연애… 휴대폰이든 모니터든 무언가의 화면 너머로 인터넷 정보창을 통해서만 이 치트를 사용할 수 있다는게 좀 아쉽지만 어쨌거나 최소한 누군가가 나를 좋아하거나 혹은 짜증을 느끼거나 하는 것을 나는 이제 거의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아, 혹시 나 좋아하는 사람 있나? 싶어서 당장 내 인간관계 탭을 보노라니 역시나 우리 엄마와 아빠, 소원이 압도적인 수치로 나를 좋아하고, 호감 정도의 레벨로 회사 인사팀 승아씨와 민 팀장님이 있었다. 물론 둘의 호감 수치는 사랑이 아니고 그냥 순수히 호감. 뜬금없이 누군가가 뒤에서 나를 보며 두근두근할 그런 사람이 있을 리도 없지만 있기를 기대한 내가 좀 무안했다.

"쩝"

다시 나를 들여다 본다.

[ GTman009 : 조유민, 32세, 서울 구로구 경인로 61길 25 (천왕동) 아트빌 102호, 대명비전(SI, 대리) 재직 중, 연봉 3100만원(세전), 미혼(여친:장소원), 자녀 없음, 신장 172cm, 체중 66kg, 원흥대학교 환경공학과 졸업 (기타 정보)]

기타 정보 내역을 훑어 보노라면 그 정확하면서도 신랄한 평가들에 웃음마저 나온다. 근데 말이다. 정말로 이런 세세한 디테일은 누가 만들었을까. 그럴싸하지 않나. 심지어 GTman009 저 아이디는, 내가 쓰는 몇 가지 아이디 중에 제일 자주 활용하는 아이디이고, 그걸 클릭하면 내가 사용하는 인터넷 모든 웹사이트 아이디가 주르륵 뜬다. 이런 미친 디테일이라니. 이 세계관 전체를 만들고, 그 디테일을 다듬었다는 것은 얼마나 고생스러운 일이었을까. 심지어 캐릭터 하나하나마다 이 정도의 섬세한 디테일과 지속적인 상호 연계와 감정선까지 구현한다는 것은 정말로 놀랍다. 이 모든 것을 시뮬레이팅 하는 시스템의 연산 능력은 도대체 어느 정도일까.

한두 사람이 만든 것은 아닐 것이다. 수없이 많은 이들이 달라붙어서 구현했겠지. 아니, 어쩌면 그냥 지금의 우리 시대 컴퓨터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능력을 가진, 사실상 '신'이라 불러도 할말 없을 정도의 어떤 위대한 연산능력을 가진 컴퓨터가… 실시간으로 시뮬레이팅을…

아니. 꼭 그럴까.

생각해보면 그렇다. 이를테면 피파 게임을 생각해보면, 그리고 그 안의 캐릭터들을 떠올려보면 결국 그 놈들은 꽤 리얼한 축구를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캐릭터들이 뜬금없이 게임 속에서 전투기를 몰고 다니지는 않는다. 그냥 제작한 놈은 축구장과 각각 녀석들의 축구하는 모습만 리얼하게 구현하면 그만이다.

마찬가지다.

나라는 인간도 결국 그냥 평범하게, 아주 단편적으로… 그냥 사무실에 앉아 일하고, 연애하고, 뭐 그런 류의 디테일만 구현하면 그만이다. 내가 뜬금없이 항공기를 몬다거나 그럴 일은 없으니….

아니지, 애초에 그 정도까지는 이미 게임엔진 차원에서 구현이 된 셈일게다. 마치 게임 GRA5처럼. 적어도 내가 나라는 인간의 현실세계에서 할 수 있다고 믿는 대부분의 것들까지는 실제로 구현이 가능할 것이다. 생각보다 엄청난 자유도 아닌가.

단지, 내가 불가능하다고 믿는 것, 이를테면 차원을 뛰어넘는다거나 우주 끝이 어떻게 생겼는지 관찰한다거나 하는 것까지는 구현이 되어 있지 않을 것이다. 음, 오케이, 이건 좀 말이 되는 것 같다. 실제로 피파 게임 속 축구선수 놈들은 F-15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겠지.





웅웅- 우우웅- 웅웅- 우우웅-

전화가 울린다. 소원이다.

"어, 소원아. 퇴근했어?"
"응, 오늘은 좀 늦게 퇴근했어"

그녀의 예쁜 목소리와 함께 전화기 너머로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 깔깔대며 웃는 여자애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참 새삼스레 이 모든 디테일을 구현한 이 세상의 창조자에게 감탄을 느낀다.

"피곤하지? 저녁은 어떻게 했어? 배 안 고파?"
"아 괜찮아. 아까 한 네 시쯤에 민아 언니랑 나가서 커피 한잔 마셨어. 집에 가서 밥 먹으면 돼. 근데 오빠, 뉴스 봤어?"
"무슨 뉴스?"
"인천 여자아이 납치사건, 그거 애기 목소리 녹음된거 공개된거"
"뭐? 아이 목소리 공개를 했어?"
"어 이따 봐봐. 애기 목소리가 막 너무, 그 엄마랑 이야기 하는거 나 듣고 울었어"
"하…"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내 능력의 위대함을 떠올렸다. 유괴사건. 나는 범인을 지목할 수 있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이미 사건은 공개수사로 전환된 상태였다. 난 최대한 정보를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나의 능력은 '온라인상에서 누군가와의 연결고리'를 찾아야 한다. 그래야 타고 넘어가고 넘어가고 하는 것이다. 생각보다 쉬웠다. 아이가 재학 중인 석원 초등학교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홈페이지 학교 소개란 메인 페이지의 교장 이미지와 그 옆의 "바르게 크는 어린이" 라는 교훈 옆에 교장 선생님의 프로필 보기가 떴다.

[ Presidentk : 고원구, 56세, 인천 연수구 비류대로 1길 15 (선학동) 선학아파트 110동 505호, 선학 초등학교(교육, 교장) 재직 중, 연봉 10,200만원(세전), 기혼(한기숙), 자녀 고동욱, 고동민, 고선아, 신장 169cm, 체중 85kg, 서울종합교육대학교 교육학과 졸업 (기타 정보)]

곧바로 [기타 정보]-[인간관계] 항목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최근 이슈가 되고 있다보니 담임 교사로 보이는 31세의 여자 선생님 '최송혜'가 높은 [짜증] 과 [우려] 관계로 이어져 있었고, '최송혜'를 따라가다보니 드디어 피해 어린이 '안유진' 양이 떴다. 오케이.

'어…'

그러나 안유진의 프로필은 회색빛으로, 접근 금지 상태로 되어 있었다. 클릭이 되지 않는다. 이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아마 죽었을거야"

네 말에 소원은 "아니야, 아까 오빠 기사 안 봤어? 엄마랑 통화하는 음원이 있었다니까?" 하고 반박했다. 나도 이미 열 번도 넘게 돌려봤지만, 사실 그건 정상적으로 이야기가 오간 대화라고 볼 순 없었다. 그저 엄마 살려줘, 엄마 무서워 하고 우는 아이의 목소리에 자지러지는 엄마의 비명 소리에 불과했으니까. 아이의 목소리 쯤은 죽이기 전에 녹음해놨으면 그만인 것이다. 아니면 뭐 그때까지만 해도 살아 있었지만 그 이후에 죽였다던가.

"오빤 꼭 그러더라. 세상 만사가 시니컬해"

갑자기 대화가 가라앉는다. 소원이는 뭔가 내가 자신의 의견에 동조해주지 않으면 꽤 감정 상태가 급변한다. 슬몃 웃으며 컴퓨터로 새삼 소원의 프로필에서 [심리상태] 탭을 본다.

[ 짜증 +30(79) ], [ 분노 +54(74) ], [ 서운 +22(65) ], [ 나른함 -40(11) ]

…아니 세상에 그저 지 말 지 편 한번 안 들어줬다고 이렇게 감정이 급변하나. 결국 전화는 대충 수습하고 얼버무리며 끊었다. 아니 그보다 잠깐만. 유괴범죄는 보통 면식범 아니던가? 아닐 수도 있지만, 나는 다시 담임교사 최송혜를 따라 가서, 인간관계 탭에서 피해 어린이 안유진의 엄마, 윤석희를 따라간다. 그리고 윤석희의 [ 인간관계 ] 탭에서 어떤 힌트를 얻었다.




[ PEPPA77 : 윤재승, 41세, 인천광역시 연수구 해돋이로 56번길 28 (송도동), 무직, 연 수입 22만원, 기혼(이혼소송 중:도윤아), 자녀 없음, 신장 177cm, 체중 81kg, 명진전문대학교 기계학과 중퇴 (기타정보) ]

바로 납치 아동의 어머니, 윤석희의 오빠 윤재승. 그의 윤석희에 대한 감정은 놀랍게도 [ 분노 ] 와 [ 증오 ] 로 가득차 있었다. 처음에는 아이를 똑똑히 간수 못했다고 분노하는 그런 식의 짜증인가 했지만, 히스토리 항목을 읽어보니 윤재승이 윤석희의 돈을 약 5천만원을 빌려썼고, 그 빚을 갚으라는 윤석희와의 갈등이 꽤 골이 깊어보였다. 특히 잦은 독촉에 결국 아내가 못 참고 이혼을 요구했고 그것을 거절당하자 아내는 이혼소송까지 낸 상태.

"흠"

이 정도 갈등이라면 당연히 경찰도 최우선 용의자로 올릴 것 같은데, 못 잡은게 이상하다 싶다가 윤재승의 현재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주소란을 클릭하니 과연 현재 위치로 표기 되었다.

"전남 함평까지 갔네 이 놈. 번개 같구나"

아까 기사에서는 대포 휴대폰의 전파발신지 추적을 통해 파주시로 추정하던데. 빠르게 움직인 모양이다.

"…아니야"

그러나 마음을 돌렸다. 이걸 제보하는 것도 조금 마음에 걸린다. 어떻게 알게된 제보냐고 경찰이 연락이나 문의라도 들어오면? 무속인이라고 둘러댈까. 미친 놈이 되겠지. 게다가 지금의 이 '인생 버그 플레이'를 오래 즐기고 싶은데 굳이 눈에 띄는 플레이를 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잠시 망설이다, 그냥 입을 닫기로 했다. 어차피 아이는 이미 죽었고, 범인은 경찰이 알아서 잡을 것이라 믿으니까.




"배고프다"

조금 마음이 찜찜해졌지만, 이게 최선이라 생각했다. 나는 다시 내 프로필의 기타 항목을 클릭했다. [성격] 탭을 클릭하자 과연 '게으르고 소심함'이라는 언급이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

어쨌거나…

인생 치트키를 얻어 활성화를 시켰다. 아니아니, 어느 날 갑자기 치트키가 '켜졌다'. 나는 이제 무엇을 하면 좋을까. 연예인 루머 뒷조사부터, 정재계의 핵심 비밀을 틀어쥐거나, 바르지 못한 범죄자들을 실시간으로 추적할 수 있는 힘. 이 세상 전체에 대한 정보를 가진 나는 전성기의 애드거 후버보다도, 미국 에셜런 프로젝트보다도 더 위대한 정보능력을 가진 사람이 됐다.

"흐흐"

물론 그런 힘을 갖고도 고작해야 연예인 가십이나 훑고 다닌 내 모습이 새삼 조금 웃겼지만, 뭐 어쩌겠는가. 내가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보니, 궁금한 것도 그 정도 수준인 것 뿐이다.

그보다 내 '초능력'의 기반이 내 상상대로 '시뮬레이션 우주' 같은 것이라, 누군가가 해킹을 했다거나 혹은 시스템의 오류 같은 이유로 나에게 부여된 힘이라면… 버그가 픽스되거나 해킹이 밴되는 상황이 온다면 나라는 인간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이 모두가 지금 내가 꾸는 꿈에 불과한 것이라면? 혹은 내가 무언가의 과대망상 증후군, 뭐 그런 정신병에 걸린 것이라면?

더 나아가…

'모니터 저 너머의 사람'이라는 것이, 그저 단순히 나랑 인터넷 같이 한 사람들을 넘어서… 지금 일종의 차원 벽 바깥에서 나를 조종하거나 만들어 낸 누군가들, 그리고 나를 지켜볼 수 있는 누군가들이라면, 그래서 나의 모든 생각과 일상이 까발려지고 있는 것이라면… 이런 혼자만의 망상 같은 생각마저 모조리 유출되고 있는 것이라면?

'어이 다 알고 있다고, 그만 쳐다봐! 부끄러워!'

혼자 마음 속으로 외쳐본다. 이거 무슨 초딩이나 중딩 때나 하던 짓 같은데. 어쨌거나 내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사람들이, 그저 주변의 친구들이 아닌 모니터 너머의 어떤 초월적인 존재들이라면… 그럼 그가 컴퓨터를 끄거나 혹은 뭐 게임을 종료하거나, 아니 이런 경우에는 그저 리부팅하면 나는 그 시점에서 재시작하겠지. 아예 캐릭을 삭제한다면, 그때 나는 죽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가만히 지켜보는 어떤 시뮬레이션 형식의 그 무엇일까.

"…검증할 방법도 없잖아."

나는 스스로를 타이르고, 복잡한 머리를 가라앉히며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내가 할 일이 생각났으니까.

"야, 나도 사생활 좀 갖자"

또 혼자 '누군가들'을 향해 중얼거려 본다. 아니, 인정하기로 했다. 만약 정말로 그런 세상이라면 내가 뭐 어쩐다고 어쩔 수 있는게 아니잖는가. 나는 과감히 바지를 내렸다. 그리고 슬슬 고추를 주물거리며 시동을 건다. 마우스는 익숙한 손길로 어떤 폴더를 향한다.

"그래, 딸 좀 치자고"

나는 가볍게 콧바람을 내쉬며 힘차게 avi 파일을 더블클릭했다.

- 끝 -

하늘색 소설

아침부터 무척 바빴다. 지난 밤 혜주와 크게 싸우고 늦게 잔 탓에 늦잠을 자버렸다. 눈을 뜨니 이미 8시 40분이었다. 아침 9시 반에 예정되어 있던 부서간 회의에 준비했어야 할 우리 팀의 보고서가 생각났다. 전화로 연경씨에게 부탁해서 간신히 보고서 자체가 빵꾸나는 최악의 상황은 피해냈다.

"후, 이런거는 진짜 좀 아니지 않아?"

그러나 연경씨가 출력한 것은 최종본이 아니었다. 수정의 수정을 거듭한 보고서의 최종본이 아닌, 그 전전 버전의 '파일명만 최종'이었던 버전을 들고 들어갔던 팀장님은 하필이면 사장님까지 참석한 회의에서 제대로 망신을 당했다. 그 '또라이'에게 찍힌 이상 올해의 승진도 물 건너갔을지 모른다.

그 사람 좋은 팀장님에게 따로 불려가서 한참 한 소리를 들었다. 한 소리 들은게 싫은게 아니라, 그나마 회사에서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에게 실망감을 주고 곤란하게 만든 것이 죄송스러웠다. 몇 번이고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지만, 팀장님 역시 상한 속을 쉽게 진정하지 못하는 기미였다. 실제로 비슷한 케이스의 상황에서 안산 지점으로 날아간 기획 1팀 조 팀장의 케이스도 있지 않은가.

언제나의 농담 한 마디 없이 아침부터 모니터만 보고 일만 했다. 경원 주임이 "너무 그렇게 신경쓰지 마세요. 팀장님 뒤끝 없으신거 아시잖아요" 하고 커피 한잔으로 나를 달랬지만, 사실 아침의 일보다 혜주와의 일이 마음을 더 무겁게 한다.





점심시간에 대한 기대와 약간의 허기가 기분을 조금 전환케 하는 오전 11시 39분. 화장실에 다녀와 자리에 앉으니 휴대폰에 혜주의 카톡이 와있다.

"흠"

반가움과 답답함, 두려움과 피곤함이 나를 휘감는다. 내용을 확인하니 다행히도(?) 어제의 싸움과는 상관없는, 혜주 어머니가 지방에서 우리 집으로 옥수수 보내주신다는데, 집 주소를 불러달라는 내용의 혜주와 혜주 어머니가 나눈 대화의 캡쳐 이미지였다. 나는 피식 웃으며 집 주소를 적어서 답장을 보냈다.

"식사하러 가요"

경원 주임과 연경씨가 다가왔다.

"어어"

휴대폰을 들고 가려다가, 배터리가 4% 밖에 안 남아있길래 충전줄을 꽂고 두고 나갔다.





내가 아침부터 시무룩해있자, 경원 주임이 "쭈꾸미 먹으러 갈까요? 매운거?" 하고 제안해온다. 그러자고 하며 걷노라니 연경씨가 "죄송해요, 저 때문에 아침부터…" 하고 사과해 온다.

"아냐, 연경씨가 무슨 잘못이야. 최종에 최종, 최종에 진짜 최종, 보고서 파일명을 이딴 상황으로 몰고 가는 저 윗 사람들이 문제지" 하고 웃어 넘겼다. 아니 정말로 연경씨가 무슨 잘못인가.

마침 쭈꾸미를 먹으러 가자 줄이 길다. 그냥 다른데 가서 먹을까 했는데 그냥 경원 주임이 먹자고 해서 기다려서 먹었다. 스- 스- 하고 매운 입을 달래가며 먹는다. 점심 메뉴치고는 조금 과하게 매운 것 아닌가 싶지만 정신없이 먹고 나오니 확실히 스트레스도 짜증도 한결 낫다.

셋이 커피 한잔씩을 테이크아웃해서 회사로 향한다. 이제야 조금 얼굴이 풀린 것 같다며 웃는 경원 주임의 말에 나도 피식 웃었다. 조금 부끄러워 말을 덧붙였다.

"아침에 그거 때문에 그런게 아니에요. 여자친구랑 어젯 밤에 한바탕 싸워서 그래요. 그게 좀 신경쓰여서"

곧바로 연경씨와 경원 주임이 왜 싸웠냐며 물어온다.

"대단한건 아니고, 그냥 성격 차이지 성격 차이. 그냥 나는, 원래 조금 상대가 마음에 안 드는게 있어도 말 안 하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낸건데… 그게, 기분이 많이 나빴던 모양이에요. 그걸로 이래저래 싸우다가 싸움이 커졌지"

구태어 자세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 적당히 두루뭉술하게 말했다. 그러자 경원 주임이 말했다.

"차라리 바로바로 말하지. 나도 남자친구랑, 아니 이젠 남편이지. 하하하, 웃지 말아요. 7년 연애하고 결혼하면 이래" 하며 말실수를 수습하는 그녀. "아직도 남편이 아니라 남자친구 같으신가봐요" 하고 연경이 거들자 경원 주임은 더 크게 웃으며 "어! 진짜 그래. 결혼하니까 오히려 더 막 풋풋하다니까" 하면서 신혼의 위력을 뽑낸다.

"어쨌든, 사람마다 다르긴 한데, 남자들 마음 속에 꽁하니 갖고 있다가 갑자기 토해내면 우리도 당황스럽다니까. 대리님 그런 타입 아니잖아요. 아마 여자친구 분도, 당황스러워서 더 화를 낸 걸거에요. 그냥 오늘 이따가 가서 미안하다고 하고 털어버리세요" 하며 조언한다.

"응, 그래야죠" 하며 씁쓸하게 웃는 나.




오자마자 휴대폰부터 확인했지만 답장이 없다. 1도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다시 일에 집중한다. 일이 많다. 소정 대리가 관두고 나서 인원 충원은 이뤄지지 않았고 나는 사실상 두 사람 몫의 일을 하고 있다. 물론 이미 일이 많아 한 사람이 관둔건데-그것도 대리 급의 일이-, 그걸 두 사람 몫을 하려니 완벽히 될 리 없다. 몇몇 업무는 완전히 뒷전으로 미뤄졌고, 당장 급한 일부터 쳐내기 바쁘다.

그 와중에 보고를 위한 보고는 끝이 없고, 5월의 신사업건으로 지사들에게서 오는 문의는 갈수록 많아진다. 그러나 당장 본사에서도 현재 결정된 사안이 없다. 지사는 답답해하고, 본사는 초조해하며, 임원들은 히스테리에 절어있다.

몇 건의 급한 결제서류를 팀장님에게 전달하고, 몇 번의 자잘한 수정 끝에 그의 결제가 진행된다. 보고서가 빨리 돌아오길 고대한다. 하지만 아마도 결제판은 최소한 3~4일은 지나서야 돌아올 것이다. 그 사이 나는 지사들에 입을 꽤나 털어야 할 것이고.

그런 와중에 3시가 넘은 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신사업에 관한 부가 기획안에 손을 댄다. 오늘은 야근이 확정적이다. 당장 다음 주까지 이 문서가 통과되어야 한다. 피로와 스트레스가 나를 압박한다. 뒤늦은 양치를 하려다가, 그냥 커피가 먼저 마시고 싶다.

"후"

탕비실에서 커피믹스를 한잔 만다. 카누가 있음에도 지금은 믹스타임이다. 뒷목이 뻐근하다. 뒷골이 지끈지끈한 것은 근 한달이 넘게 나를 괴롭히고 있다. 커피믹스의 탓일까. 뱃살이 계속 늘고 있다. 아니, 핑계다. 그냥 나잇살이겠지. 회계팀 주연씨가 탕비실에 들어왔다가 인사한다.

"피곤해보이세요"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말하는 그녀. 나는 웃으며 "피곤해 죽겠어요" 하고 순순히 시인한다. 그녀도 그 말에 웃으며 "진짜 집에 가고 싶어요"하며 공감한다. 커피잔을 들고 자리로 돌아온다. 보고서에 들어갈 숫자를 다듬는다. 기초 자료는 똑같은데 목표와 기준점의 장난질로 성과와 기대치가 휙휙 변한다. 참으로 잔망스런 장난질이 아닐 수 없다. 한참을 작성하고 있노라니 혜주의 카톡이 또 와있다. 이미 35분 전에.

[ 잠깐 전화 좀 해 ]





옥상으로 올라와 혜주에게 전화를 건다. 전화를 받는 그녀. 착 가라앉은 목소리. 어제부터 몸살 기운 있더니, 그녀와의 싸움보다 그녀의 몸상태가 걱정된다.

"미안해"

우선은 미안하다는 말부터. 어쨌든 나도 그녀도 서로 상처주는 말을 주고 받았으니까. 나 나름의 이유, 그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한들 그것 자체는 틀림이 없다. 무언가 말을 잇고 싶었지만 선뜻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다시 한번 사과를 하기로 했다.

"어제 말이 너무 과했어. 미안해"

…사실, 여기서 그냥 "나도 미안해" 한 마디만 돌아오면, 나는 그걸로 기쁘고 정말로 기분 좋게 하루의 감정을 대전환할 수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런 일은 없다. 아니 아주 오래 전에는 그녀가 먼저 사과를 했다. 매번. 나는 항상 그녀라는 왕국의 왕이었고, 나는 절대적이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물론 모두 나 때문이다.

"그만하자"

전화기 너머에서 흘러나온 말은 차가운 한 마디. 급속도로 짜증과 피곤이 온 몸을 휘감는다. 당장 집에 가고 싶다.

"혜주야"

이름을 부르긴 했으나 이을 말이 마땅찮다.

"어제 일은, 내가 잘못했어. 뭐, 어쨌거나 나도 니 감정을 조금 더 신경을 썼어야 되는데, 그게 나도 잘 안돼는게…"
"됐고, 시간을 좀 갖자"
"혜주야"

한참을 아무 말이 없던 그녀는 "나 전화 오래 못해. 바쁘고 힘들어. 퇴근하면 전화 안 받을거니까 전화하지 말고. 여튼, 난 대충 마음 정했어. 그리 알아" 하며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는다.

"하…"

짜증과 실망감, 분노와 허무함이 온 몸의 모든 힘을 다 빼앗아 간다. 씨발. 단 한번을 좋게좋게 풀지를 않는다. 뭐가 그리 힘들고 짜증이 날까. 싸우면 자기만 힘든가. 후. 세상이 다 회색빛, 그것도 창백한 회색빛이다. 미세먼지 탓인지, 내 마음이 우울한 탓인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얼굴을 새삼 쓸어내린다.

뭐가 그리도 매번 이런 식일까.

"참 시팔…"

니나 나나, 그냥 이러니저러니 해도 서로 위한 마음이 결코 가볍지 않은데 왜 이렇게 매번 싸움만 했다하면 이리도 속을 다 태우고 뒤집어 놓아야만 풀릴까. 그냥 적당히 하룻밤 자고 일어나서 미안하다, 나도 미안해, 우리 오늘 저녁 맛있는거 먹을까, 하고 치워버리면 안되나. 그게 그렇게도 어려운 것일까.

"참, 진짜…"

속상하고 답답한 마음에 울컥한다. 옥상 정원 한 구석의 벤치에 주저 앉는다. 다들 이렇게 사나. 아니면 나만 이 모양인가.

"쯥"

헤어지고 관두지 뭐, 하고 생각하다가도 이제와서 솔로되면 그 다음이 너무 까마득하고 피곤하다. 아니, 애초에 별로 그러고 싶은 생각도 안 든다. 다음은 없다. 그냥 연애 따위 자체도 피곤하다. 참, 세상 일이 다 쓸데없이 어렵다. 회사의 보고서도, 어차피 다 뻔한 이야기 모두가 다 아는 이야기 구태어 그걸 몇 번이고 헤집어서 똑같은 이야기 분칠만 새로 해서 내놓는걸 그리도 지랄들이다.

"아 씨팔 진짜"

하나가 안 풀리니 그냥 다 속이 뒤집히고 다 때려치워버리고 싶다. 일은 좆터지게 많고 연봉은 오를 기미도 없으며 다들 잘만 사는데 나만 도태되어가는 기분이다. 옥상에서 내려다보이는 저 많은 빌딩 숲 속에서 나 혼자만 병신인 느낌이다. 시계를 본다. 어느새 4시다.

"아 진짜 씨발…"

벤치에서 일어서자 화단 저 너머에 인사팀장님과 유통실장님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 내 목소리를 들었을까. 주둥아리 조심을 새삼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쩌라고' 하는 막무가내적 생각이 나를 뒤덮는다.




오후 7시 반, 애 있는 직장맘 몇 명만이 퇴근을 한 채, 모두가 야근 중이다. 사무실의 형광들 불빛이 나의 마음을 싯누렇게 누른다.

"저녁, 어떻게 할까요. 주문할까요?"

연경씨의 말에 팀장님도 경원 주임도 "괜찮아", "난 안 먹을래" 하며 고개를 젓는다. 이쪽도 아까 둘이 뭔 일이 있었는지 영 분위기가 별로다.

"어떻게 할래요, 시켜먹을래요? 나가서 뭐 먹을래요. 아니면 1층에 카페 가서 간단히 때울래요?"

내 제안에 연경이 동의하며 "아, 그럼 카페가요. 팀장님 커피도 안 드세요?" 하고 묻는다. 그러나 팀장도 경원도 이번에도 고개를 젓는다. 1층 카페에 둘이 내려와 커피를 마시노라니 연경이 말한다.

"대리님 아까 잠깐 TF 회의 들어갔을 때, 팀장님이랑 경원 주임님이랑 둘이 따로 비상계단에서 무슨 이야기 하고 왔는데, 그 이후로 둘이 분위기 싸해요"
"왜?"
"모르겠어요. 근데 느낌으론, 되게 안 좋은거 같아요."
"뭐가"
"경원 주임님 아까 화장실에서 우는거 봤거든요"
"뭐?"

느낌이 쌔하다.

"관두라고 한거 아냐?"
"저도 그게 걱정되는데 괜히 좀 물어보기가 뭐해서…"
"허…참."

이미지에 안 맞게 아포카토에 샐러드까지 시켰는데, 영 맛이 없다. 입맛이 별로다.




"나 먼저 들어가요"

9시 반, 팀장님이 퇴근하고 나도 슬슬 피곤을 이기기 힘들다. 컴퓨터를 끌까 하는데 경원 주임이 의자를 돌리며 말했다.

"저 관둘까봐요"
"엥?"

지금 팀장님과 경원 주임이 상당히 안 맞는 타입이긴 했다. 둘 다 일도 곧잘하고 성격도 좋은 사람들이지만, 팀장님은 뒤끝은 없는 대신에 욱하면 조금 심하게 사람을 몰아붙이는 면이 없잖아 있는 타입이고, 경원 주임은 반대로 정말 밝아보이지만 은근하게 서운한걸 쌓아두는 타입. 그런 와중에 팀장님도 무슨 일이 있는지 요 한동안 내내 히스테릭한 상황에서 경원 주임에게 최근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심하게 준 모양.

그러다가 아까 급기야 잠깐 6시 넘어서 잠깐 경원 주임이 요즘 바빠서 못 본 장을 뒤늦게 보느라고 온라인으로 쇼핑을 하다가 팀장님이 그 모습을 보고 뭐라고 한 듯 하다.

"원래 안 그런 사람도 괜히 그런 날이 있을 수 있죠. 근데 같은 여자끼리 생리대 사는 것까지 뭐라고 하는건 진짜 좀 아니지 않아요?"
"헐"

경원 주임은 손부채질까지 하면서 말을 잇는다.

"아니 지가 보고서 내일 아침까지 내라고 해서, 내가 알겠다고 하고 잠깐 5분 짬내서, 진짜 잠깐 뭐한 걸로 그러면 나도 할 말 많지. 자기도 맨날 툭하면 중간에 커피 마시러 가서 30분씩 때우다 오고 이러는거 뻔히 아는데. 누가 안 한 대냐고. 일 다 하는건데, 왜 사람한테 그런 무안을 줘. 그게 뭐라고 진짜"

말을 하다가 혼자 북받치는지 경원 주임은 눈물까지 글썽인다. 나는 티슈를 뽑아 건내며 목소리를 줄이자고 작게 말했다. 다행히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퇴근을 했다.

"그리고 그거 알아요? 나 올해 인사고과 완전 최악인거? 저번에 점심시간에 인사평가 해놓은거 보고 진짜, 내가 얼척이 없어서…"
"어떻게 봤어요?"
"저번에 윤팀 막 몸살 났다고 병원 다녀오고 그랬을 때 있잖아요. 내가 자기 아프다고 쌍화탕까지 점심시간에 사왔는데, 인사평가 서류 뽑아놓은거 책상에 있는거 살짝 봤단 말이에요. 근데 나 뭐라고 한 줄 알아요? 하, 진짜 얼척이 없어서. 그냥, 내가 일을 디게 못한대요"

음, 우리 회사에서 경원 주임이 일을 못한다고 하면 공감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물론 꼼꼼함이라는 면에서 우리 팀장님을 따라갈 사람은 세상에 없기에 그녀의 눈에는 경원 주임이 눈에 덜 찰 수도 있겠지만, 같은 기준이라면 나는 정말 박살나겠구먼.

"모르겠어요 진짜. 맨날 왜 그러는지"

확실히, 팀장님이 유난스러울 정도로 경원 주임을 미워하는건, 아니 미워한다고까지 말하긴 뭣해도 조금 거리를 두는 것은 제 3자인 내가 봐도 느껴질 정도. 확실하게는 몰라도, 조금 성격적으로 왜 안 맞는지는 조금 알 것도 같지만.

"그냥 관둘까봐. 어쩌겠어. 싫다는데. 버텨봐야 나만 힘들고 나만 피곤하지. 이 회사에서 내가 갈 다른 팀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말로만 그러는건지, 진짜 관둬야겠다고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며칠 전부터 그녀가 휴대폰으로 사람인 사이트를 보고 있는 것은 몇 번 봤다.




집으로 향하는 전철 안. 혜주는 아까부터 연락이 없다. 먼저 미안하다고 또 카톡을 보내봤지만 읽지도 않는다. 피곤하다. 10시가 어느새 넘었다. 씻고 뭐하고 하면 벌써 11시가 넘겠지. 삶이 고단하다. 너무 피곤하다. 멋있게 살고 싶은데, 아니, 그냥 평범하게라도 살고 싶은데 나이는 차고 돈은 없고 미래도 불투명하다. 비전도 없고 꿈도 없다.

"하"

만에 하나 회사를 관두기라도 하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니 답이 없다. 그러나 나도 어느새 나이가 많이 찼다. 그렇다고 승진 코스에 올라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회사에서 내가 10년 후에 임원이 되고 그렇게 버티고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 때의 미래에는 혜주가 내 옆에 있을까.

많은 생각이 나를 스쳐지나가며 미안하다는 생각이 새삼 든다. 차라리 나보다 잘난 놈 만나서 사귀면, 사장님 사모님 노릇까지야 못해도 그냥 평범하게 서울 어디에 아파트라도 얻어서 중형차 타고 주말마다 장 보면서, 애 하나 낳고 그냥 그렇게 남들처럼 평범하게는 살 것 아닌가. 못난 년도 아닌데. 나같은 새끼 만나서… 그게 무슨 죄란 말인가. 씨발. 그냥 내가 못난게 죄지.

마음이 무겁다.

모르겠다. 무슨 재미로 내가 살아가고 있는지. 잘 살아가고는 있는건지. 너무, 피곤하다. 자리에 앉고 싶다. 선 채로 잠시 눈을 감는다. 아까 회사 옥상에서 바라본 하늘이 떠오른다. 미세먼지로 뒤덮인, 우중충한 빛의 하늘색. 그게 나의 하늘색이다.

혜주와 화해만 한다면 다시 푸르디 푸른 맑은 하늘이 될텐데. 하지만 과연 나에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 나는 가만히 눈을 감으며, 어느새 이번 역이 내릴 역이라는 사실을 안내방송을 통해서야 알았다. '내릴 역'. 그녀라는 열차에서도 내릴 타이밍일까. 흐, 오바는 말자.

"흐"

내일은 화요일이다. 정말로 피곤한 월요일이 아닐 수 없다. 내일도, 모레도… 이번 주는 정말 피곤할 것 같다. 누군가 제발 내 힘이 되어준다면, 아니, 그냥… 아니다. 차라리, 혼자가 편할지도 모르겠다. 그냥 사라지고 싶다.

가즈아 소설

"후…"

반년 넘게 끊었던 담배에 다시 손을 댔다. 정확히 말하자면 금연한다고 서랍 속 깊숙히 묻어뒀던 담배가 어느새 내 손에 들려있었다. 흐름이 안 좋았다.

"아, 진짜"

우리나라 정부가 2개의 부실 거래소 폐쇄와 수익의 60%에 달하는 양도소득세 부과 정책 발표를 한 날, 중국 정부가 해외로 나간 중국계 채굴 업자 및 업체의 중국 내 자산에 대해서까지 몰수를 포함한 강력한 추가제제를 진행할 것이라는 확인되지 않은 뉴스까지 전해졌다.

이미 거기까지만 해도 상승세였던 흐름이 꺾이고 베인코인의 2.5만선이 뚫리는 등 투자 심리에 부정적인 영향이 간 상황이었건만, 그날 오후 시총 3위였던 니어코인의 하드포크가 뜻밖에 실패로 돌아갔다는 루머가 돌기 시작했다. 설마설마 하는 상황 속에 결국 세 시간 후 니어코인의 공식 트위터에 실패 소식이 떴고 전체 장 분위기가 삽시간에 싸해지기 시작했다.

"이 놈들은 왜 또 이래"

이어 하락과 횡보를 거듭하던 그 며칠 후, EU 차원의 암호화폐 규제 조치가 발표되었다. 특히 프랑스의 경우 1인당 거래금액 제한 같은 조치까지 부가되어 논란을 일으킨 통에 더욱 분위기가 안 좋아졌다. 그 즈음하여 나스닥의 베인코인 옵션 만기일이 도래함에 따라 대거 몰린 숏 포지션의 마진 거래가 장에 추가적으로 부정적인 부담을 주었다. 근 1년 만에 1베인코인당 2만 달러가 무너졌고, 장의 분위기가 차갑게 바뀌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뭐?!"

그 이틀 후, US디터로 발행된 금액 전체에 대한 일시적 지급 보증 유예 소식이 시장에 타격을 입혔다. 그 이유가 알려지지 않아 흉흉한 루머들이 도는 가운데, 시장에 결정타가 터졌다. 미국 최대 암호화폐 거래소인 코인베이직의 해킹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확인된 피해 규모만 1천 8백억 달러가 넘는, 현 시점에서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악재였다. 모든 지표가 사상 유래 없는 속도와 규모로 일제히 급선직하했다.

차갑게 얼어붙던 시장 분위기에 이미 휘청대던 1만 6천선이 단번에 무너졌고, 채 두 시간이 지나지 않아 9천선이 무너졌다. 공포가 모두를 휘감았고, 가뜩이나 "요즘 왜 이러냐?" 싶던 구름 낀 분위기가 삽시간에 지옥으로 변했다.

"아…"

코인 시장이 진짜 망하려는 것인지, 하필이면 그 타이밍에 이미 1년 반 이상 미뤄졌던 JN모건의 암호화폐 거래소 오픈이 결국 취소되었다는 오피셜 소식이 발표되었고 그 영향으로 최후의 보루로 일컬어진 7천선에서의 반등이 실패했다. 시세가 무서운 속도로 추락했고 급기야 영원히 오지 않으리라 누구나 확신했던 3천선이 붕괴됐다. 헤더리움의 성장이 채 끊나지 않은 가운데 코인판의 기축통화, 베인코인이 무너지는 것은 공멸을 뜻했다.

사람들은 이제 하락이 문제가 아니라, 코인 시장의 존립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이미 5천선의 붕괴에 코인 관련 포럼과 커뮤니티에선 "낙동강 방어선이 뚫렸다…" 소리가 힘없이 터져나온 상태였고, 상황이 심각해지자 그동안 수많은 최악의 상황에 단련되었던 역전의 존버족들조차 마지막 패닉셀에 참여했다. 코인 시장 자체가 최후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하"

베인코인 갤러리 및 국내외 암호화폐 관련 모든 커뮤니티에서 "나 이제 어떻게 하냐…" 라는 곡소리가 이어졌고 안티 암호화폐쟁이들의 풍악이 울려퍼졌다. 지난 12년 간 일절 흔들리지 않던 결사적인 신앙적 존버족들조차 "10%라도 건져야지…" 와 "10% 건지나 그냥 버리나…" 에서 갈등이 이어졌다.

"아"

골이 지끈지끈했다.

"하, 진짜 아 이건 뭐…"

2천 7백을 찍고 있던 내 코인 투자 평가액은 그 사이 800만원, 아니 350만원이 되어 있었다. 진작에 현금화 좀 해놓을 것을, 후회가 머리를 채우기 시작했고, 감히 던질 생각조차 들지 않는 압도적인 하락장에 나는 일곱 대째의 줄담배를 입에 물었다. 진정하기 위해 떨리는 손으로 물을 한잔 마시고 왔더니 평가액은 19만원으로 추락한 상태였고, 나는 컵을 벽에 던져버렸다.






가즈아 



by stylebox 




꿈이었다. 코인 시장이 딱 일주일만에 붕괴되는 무시무시한 꿈이었다. 온 몸이 다 축축했다. 눈을 뜨자마자 습관처럼 벽 모니터를 보며 실시간 시세를 확인했고, 여전히 내 평가액이 5억 언저리에 있다는 사실에 안심했다.

"후우… 꿈자리 사납네. 어후"

꺼끌한 입맛을 다시며 침대에서 일어나 새삼 방 안을 둘러보았다. 지난 주에 새로 이사한 송파구의 28평 아파트였다. 전세이긴 해도, 어쨌든 내 평생에 한강 이남 아파트에 살게 될 줄은 누가 알았으랴. 아직 짐도 채 안 풀었는데, 이번 주말에는 꼭 다 풀어야지 하고 다짐해본다.

"크흠"

어쨌거나 이제는 출근할 시간이다. 새삼 침대 옆 협탁에 올려놓은 신형 그렌디아의 차 키가 눈에 들어왔다. 저 놈도 당연히 코인 덕분에 산 거다. 그리고는 화장실 문 앞에 붙여놓은 최민구의 합성 포스터를 보며 오늘도 외친다.

"가즈아!"





"대리님, 헤더리움 다음 달에 진짜 5백만원 갈까요?"

아영씨가 출근하자마자 인사와 함께 그 큰 눈으로 생글생글 웃으며 묻는다. 작년 초, 코인 정보를 몇 개 흘려줬더니 과감하게도 결혼 자금으로 모아놓은 3천을 들입다 투자해서 그걸 5배로 불렸단다. 결혼 자금 불렸으니 호텔에서 결혼식 하는거냐고 웃으며 물었더니 "이제는 남자만 찾으면 되요" 하는 말에 빵 터졌더랬지.

그 이후로는 나를 무슨 코인의 신처럼 모시며 얼굴 볼 때마다 코인 정보를 묻는데, 그때마다 그녀의 옷과 악세서리가 명품으로 바뀌는 것을 확인하며 새삼 흐뭇한 웃음을 짓게 된다. M&H, SAZA에서도 세일기간이 아니면 옷을 안 산다고 했던 그녀였는데.

"뭐, 가긴 갈거야. 시간이 얼마나 걸리냐가 문제지"
"정말요?"
"…그렇다고 너무 무리한 투자는 하지 말고"

사실 그녀 말고도 사무실에 나 덕분에 꽤 돈 번 사람들이 있다. 다들 베인코인이 난리라는 것은 알았지만 직접 뭘 해보기는 두려웠던 차에 내가 점심시간이나 퇴근 시간에 막간을 이용해서 조금 가르쳐줬더니 쌈짓돈으로 시작해서 은근히들 용돈들 좀 번 모양이다. 적게는 30만원에서 많게는 수천만원까지. 아영씨는 그 중에서도 유달리 더 대박이 난 케이스고.

베인코인의 3만불 돌파 및 헤더리움 ETF 승인과 함께 코인 시장이 대상승장에 돌입한 덕분에 나도 대박이 났고, 그녀들도 대박이 났다. 회사에는 그냥 가볍게 차 한 대 뽑을 정도 벌었다고 말해뒀지만 사실 내가 번 돈은 총 11억 8천만원이었다.





"븅신들, 이런거에 돈 빨리는 호구도 있냐"

베인 코인이 채 1달러가 안되던 시절, 나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그 정보를 들었었다. 꽤 전문적이고 흥미로운 내용이 적힌 게시물이었지만, 온갖 찬미와 미사여구 때문에 오히려 신뢰가 안 갔다.

단지 베인코인으로도 결제할 수 있다는 스트리밍 포르노 사이트의 주소를 얻은 것은 꽤 기쁜 소득이었다. 하드코어 장르의 야동이 꽤 많은 사이트였다. 바로 즐겨찾기 해뒀다. 그게 내 첫 베인코인과의 만남이었다.

"와"

이윽고 몇 년이 흐른 시점에 다시 소식이 들려온 베인코인은 어느새 30만원이 되어 있었다.

"이거 뭐야 진짜…"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때까지도 베인코인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블록체인이니 뭐니 하는 기술은 개념조차 잘 이해가 가지 않았고 제대로 들여다 볼 생각도 없었다. 그냥 글로벌 버전 도토리라는 생각만 했을 뿐이지. 그렇지만 요는 엄청난 속도로 가격이 올랐다는 거였고, 그때 내가 단돈 10만원만 넣었더래도 그게 3천만원이 됐을거라는 생각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렇지'

누구나 인생에는 기회가 세 번 온다지 않는가.

"오케이"

그래서 차세대 베인코임이라고 일컬어진 헤더리움에 10만원을 투자했다. 이후 정신없이 석 달이 흘렀고, 문득 생각이 나서 접속해보니 거래소의 내 헤더리움은 개당 9천원짜리가 7만원이 되어 있었다. 10만원이 80만원이 넘는 돈이 되어 있던 것이다.

'헐'

믿기지 않는 숫자에 나는 입이 떡 벌어졌고, 마침 술값에 빵구났던 카드값을 그렇게 갚았다. 성공한 투자였다. 그러나 그 두 달 후 나는 땅을 쳤다. 개당 7만원짜리가 31만원이 되었으니까. 그래, 베인코인 그 천원짜리가 100만원이 되는 것을 보고서도 헤더리움을 고작 10배에 만족했나.

그래서 결단을 내렸다.

곧바로 은행에 가서 대출 3천을 땡겨서 들이부었다. 10만원만 투자했으면 3천을 벌었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걸 벌었다고 치기로 하고 후회를 없앴다. 이제는 조금 공부도 했다. 여전히 이해 가지 않는 부분이 많았지만, 적어도 무슨 의도에서 이게 그렇게 학자들과 개발자들에게 주목 받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나보다 더 똑똑한 실리콘 밸리와 뉴욕 금융가의 빠끔이들이 손을 댄다는데 내가 그들의 안목을 부정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3천만원이 딱 3개월만에 1억 7천만원이 됐고, 2년 반 만에 11억 8천이 됐다. 끝과 끝을 오가는 미친 시장에서 네 번의 지옥과 다섯 번의 천국을 맛 보며.




퇴근길, 테헤란로의 빌딩 숲을 가르며 새 차 냄새를 만끽한다. ZZ코인을 잠깐 만져서 14억까지 갔지만, 헤더리움 골드의 시세 추락 & 에이저, 덴츄, 블루펄스 같은 잡코인 투자 실패, PNP, COCOIN 같은 거래소 코인 투자 실패가 이어지며 2억을 날렸다. 그러자 조금은 현자 타임이 온 나는 그 시점에서 리프레시를 위해 절반 정도를 현금화를 하여 차와 아파트를 구한 것이다.

"차가 막히네"

내가 조금만 더 빨리 성공했더라면, 그랬더라면 희수와도 그렇게 헤어지지는 않았을텐데 하는 생각에 눈 앞의 신호를 놓칠 뻔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지금처럼 여유 있는 싱글이 차라리 더 내 삶의 풍요를 보장했다. 그리고 어쨌든 그녀는 잘 되지 않았던가. 애도 낳았다는데.





"으아아~ 넘나 좋다"

거실에는 2천만원짜리 초대형 TV를 틀어놓고 영화 보다가, 치킨에 피자에 이것저것 잔뜩 배달음식 시켜놓고 배 터지게 먹다가 다시 컴퓨터로 시세창 좀 보다가 다시 통장 확인하고… PS5와 스위치와 수많은 게임들을 쌓아놨다. 어제는 즈팀에서 한번에 300만원어치 게임을 질렀다. 운동화도 조던 시리즈만 13켤레를 샀다. 거기에 주말에는 돈 걱정 없이 쇼핑하고, 여기저기서 인심 턱턱 쓰고.

"너무 좋다"

사실은 회사를 다닐 이유가 없었다. 이미 돈은 큰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나를 안다. 최소한의 브레이크가 없다면 아마 나는 선을 벗어나 일탈하고 말 것이다. 그렇게 현실감을 잃고 나면 나의 투자촉도 사라질 것이다. 적어도 최소한 다른 사람들의 삶을 곁에 두어야 투자심리라던가, 버블의 끝이 어디인가에 대한 감도 잡힐 것이고. …고작 10억에 만족할 수는 없으니까.




"나 뭐라고 욕해도 좋은데, 근데 차라리 나 이렇게라도 해결하고 싶어"

희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너도 알잖아. 우리 집 사정 많이 어려운거. 얼만지 말해줄까? 한달에 이자만 550만원이 나간다? 원금 말고, 이자만. 엄마 입원도 해야 되는데, 못 하고 있어…돈 벌어야 되니까. 온 가족이 돈 벌어서 빚 갚아야 되니까!"

여유 있게 말하던 목소리는 어느새 울음이 섞였고, 그녀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나는 콧김을 내뿜으며 그저 듣고만 있었다.

"그냥…내가 그 사람 만나면, 나 하나만 눈 꼭 감고 살면, 그럼 되거든. 상가 명의 내 명의로 해준대. 솔직히 이런 사람, 이런 기회가 어딨어. 완전 호구지 호구. 머리 좀 까지고 결혼 좀 해봤으면 어때. 나도 연애 해봤잖아. 쌤쌤이지"

온 몸을 휘감는 패배감. 희수가 물었다.

"너 한달에 500만원씩 꼬박꼬박 우리 집에 보내줄 수 있어? 매달. 말해봐. 말해봐. 그럼 내가 너랑 결혼해줄게, 아니 할께"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어쩌면 분노한 목소리로, 어쩌면 간절히 바라는 목소리로 말하는 그녀. 당시의 내 급여는 171만원이었고, 500만원이라는 돈은 도저히 대답할 수 없는 숫자였다. 아니 몇 번인가 내가 말했던, 그녀도 나도 믿지 못할 그 지킬 수 없는 허풍을 지금 또 칠 수는 없었다.

"투잡이든 쓰리잡이든, 해서 줄 수 있어? 없잖아. 아니 애초에 니가 왜 그렇게 해야돼. 니 빚도 아닌데. 그렇잖아. 또 니가 그렇게 힘들게 번 돈, 우리 집에 보내서 빚쟁이들 주면 내 기분은 어떨까? 그치?"

아무 말도 하지 못한 나를 보며 희수는 눈물을 닦고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니 잘못 없어. 그냥… 우리가 때가 아니었다고 생각하자. 대신에, 다음에… 다음에 언젠가 다시… 음… 우리가 만날 인연이 되면… 그때는 정말 더 잘해줄게. 더 많이 잘해주고 싶었는데… 내가 너무 힘들어서 많이 못 해줬어. 그게… 참 미안했어…"

주루륵 흐르는 내 눈물을 닦아준 그녀는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감추며 내 대답도 듣지 않은 채로, 다시 그녀가 사는 집 건물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그 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참 많이도 울었다. 만약 돈을 벌 기회가 온다면, 그래서 그녀의 한을 풀어줄 수 있다면 내 영혼을 팔아서라도 벌 거라고 다짐했다. 뭐, 결국 이렇게 벌고 난 시점은 모든게 끝나버린 너무 늦은 시점이지만.





"예예, 아니 무리하게 버티지 마시고, 그냥 에어드랍만 받으면 바로 처분하고 나오세요. 제가 아까 그 선동이 형한테도 말 들은게 있는데, 지금 추세선이 너무 좀 그렇다고, 너무 티나게 작전 같다고, 예 괜히 무리하지 말자구요. 예예, 그럼 또 보다가 뭐 건 생기면 말씀해주세요. 네에"

자칭 '왕개미'들끼리 주고 받는 정보들. 잘해봐야 아마추어 차트쟁이, 보통은 그저 다른 놈들보다 눈치코치 조금 빠르고 조금 더 대담한 놈들에 불과한 찌질이들이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의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 뿐이지만, 세상 뭐든 그렇듯이 감 좋고 운 좋은 놈들이랑 함께 뭘 하면 확실히 성과가 좋다.

전화를 끊고 모니터를 좀 보다가 다시 침대에 눕자, 이번에는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용돈 보내준 거 고맙다는 전화였다. 얼마 전부터 집에 50만원씩 보내고 있다.

"용돈 보내준거 고마워. 잘 쓸게. 니도 돈 없을텐데…"
"아 걱정말고 써"

집에는 사실 내가 대박을 터뜨렸다고 말하지 않았다. 말해봐야 괜히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들로 걱정이나 하고, 재수 없으면 사기꾼이나 돈 냄새 맡은 아귀 같은 친적들 중의 누군가가 덤벼들지도 모른다. 세상이 다 그런거 아닌가.

그저 일시불로 3천, 이후로는 한달에 드리는 용돈만 50만원으로 늘렸을 뿐이다. 집에는 주식 투자 좀 했던게 잘 됐다고 뻥을 쳤다. 그래도 걱정하길래 "아 진상전자에 투자한거야. 진상전자. 여기 주식이 망할 정도면 뭐 다른 놈들은 멀쩡하겠어? 그러니까 걱정을 하덜덜 말어" 하고 말았다.




"그래도 엄마는 진심으로 하는 걱정이기라도 하지"

하지만 다른 놈들은?

"미친 새끼들이지"

코인 시장으로 재미를 살짝 본 초창기, 주변 친구 몇 놈과 인터넷 커뮤니티로 알던 몇 놈에게 나름의 요령과 코인 투자의 의의를 좀 가르쳐 줬다. 그런데 그게 독이 되어 돌아왔다.

하라는대로 안 하다가 다 털어먹은 놈, 그래도 나 덕분에 몇 백은 벌었을텐데 무슨 불만인지 궁시렁대고 내 욕을 하고 다니는 놈, 하랄 때 안하더니 뒤늦게 도박이네 사기네 하면서 나를 죽도록 미워하며 3년째 헛소리 하고 다니는 놈까지.

아니 뭐, 사람 마음이라는게 나 때문에 돈 털어먹은 놈이야 그럴 수 있다지만, 하랄 때 안 해놓고 뒤늦게 나를 사기꾼으로 매도하는 놈들은 뭔가. 3년째 게시판에서 여전히 사기네 뭐네 하면서 난리다. 언젠가는 이거 다 거품 꺼지고, 그땐 다들 죽는거라고.

"아예 인디언 기우제를 지내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하기사 그 마음 모를 것은 아니다. 나 역시도 처음에 '그때 큰 돈 집어 넣었으면' 하는 후회에 속이 꽤나 쓰렸으니까. 이미 늦었다는 생각에 '가질 수 없다면 부숴버리겠어' 하는 심리가 드는 놈도 있겠지. 단지… 인터넷에서 저 난리 굿을 피우며 "코인지옥 도박사범" 타령을 3년 동안 할 시간에 알바라도 해서 그 돈으로라도 투자를 했으면 지금쯤 아무렴 몇 백인들 손에 못 쥐었을까.

"당연히 언젠가는 꺼지겠지"

지난 12년간 매 순간 그 이야기가 나왔다. 그 놈의 버렌 워핏 할배 이야기도. 그러나 부침은 있었을 지언정, 여전히 코인 시장은 성장 중이다. 언젠가는 이 대세 상승장도 끝나고 한동안 재미없을지도 모른다. 정말로 그들의 말따라 망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건 당연한 것 아닌가. 요는 그러니까 지금 당장 재미 좋을 때 뛰어들어 벌면 되는 것 아닌가.




"이해는 가요 저는 솔직히"

아영씨, 혜란씨와 함께 점심을 먹는 도중 혜란이 말했다.

"우리 아버지 친구 분 중에, 진짜 사업 잘하시는 분이 있거든요. 막 큰 사업을 하는 건 아닌데, 유행하는 장사는 다 손대서 성공을 하는 거에요. 불닭, 찜닭 장사부터 봉팔비어, 쥬디, 명예 핫도그, 홍콩 카스테라, 24시간 곱창 뭐 그런거. 그래서 아버지가 맨날 너는 참 대단하다 어떻게 그렇게 사람들 마음을 귀신같이 잘 아냐 칭찬했는데, 그 아저씨 말이 그게 아니래요."

재미있는 이야기다.

"그 아저씨 말이 '나는 유행하는걸 미리 알고 하는게 아니라, 유행을 한다는게 보이면 빨리 손을 대는거'래요. 사람들이 '아 이거 괜찮네, 이거 요즘 유행인가 보네' 하는걸 먼저 캐치해야 되는 부분도 분명히 있지만…돈 못 버는 사람은 그걸 알고도 미적미적 대다가 결국 안하던가 너무 늦게 손을 대는거죠. 근데 아저씨는 그걸 딱 일주일 내에 도장까지 찍는거래요. 그러면 유행이 오래가면 대박이 터지는 거고, 아니더라도 손해가 크진 않다는거죠. 한창 붐이니까. 근데 그거 아무나 못하는거잖아요. 그게 성공하는 사람하고 아닌 사람 차이 아닌가 싶어요"

꽤 깊이 있는 통찰 아닌가.

"와 혜란씨 사업해야겠네"

내가 웃으며 칭찬하자, 혜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작년에 한창 유행했던거 있잖아요. 초미니 샐러드. 그거 제가 붐 일어나기 전에 미리 추천하고 아빠도 이거 장사 되겠네, 하고 생각은 했는데… 아버지는 결국 안 했어요. 이게, 여유 자금이 있는 사람하고 아닌 사람은 좀 다르잖아요. 이 돈을 쓸 수 있나 아닌가가"
"그렇지"
"저는 코인투자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그리고 반대로 여유 자금이 엄청 많은 사람이면 굳이 위험한 코인투자 할 필요가 없는거구"
"그렇네"

묘하게 뼈가 있는 말이라 이해가 가면서도 씁쓸해졌다. 물론 아영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걔가 원래 그런 애에요"

아영은 혀가 꼬인 목소리로 또 한잔을 들이키곤 말했다.

"걔네 아버지, 인도네시아에서 요트 사업 크게 하시는 분이에요. 그니까 우리 앞에서는 무슨 아부지가 소시민이라서 투자 안 한 거처럼 말했지만, 실제로는 돈이 많아서 그런 푼돈 사업은 할 필요가 없다 이거에요"

그랬구나. 하기사 묘하게 귀티 난다고는 생각했더랬다.

"저번에 은영씨 결혼식 때는 버키니 백 들고 왔었어요. 집도 블랙스톤레전드 혼자 살구 있구. 차도 세 대랬나. 솔직히 회사 왜 다니는지 몰라"

문득, 요 한동안 돈 좀 벌었다고 그녀 앞에서 깝죽대지는 않았나 뒤돌아 보게 된다. 혼자 그렇게 말 없이 곰곰히 생각해보노라니, 아영이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대리님은 안 외로우세요?"

아 그랬나. 그러고보니 요 한동안 그녀가 묘한 신호를 보내긴 했었지. 조금 고민했지만, 딱히 거절할 이유도 생각나지 않았다. 하기사 이쁘고 똑똑하고 내 말이라면 껌뻑 죽는데 싫을 이유가 뭐가 있는가. 마지막으로 한번 더 '뭐 별 일 없겠지?' 생각을 해봤다.

'응, 오케이'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바의 상들리에 불빛이 조금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나는 그녀에게 얼굴을 가까이 했다. 그리고는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

'우선 오산에서 출퇴근 하는 그녀에게 우리 집 방 하나를 쓰라고 주고, 출퇴근을 내 차로…아니, 아예 아영이는 집에서 쉬라고 하지 뭐. 그래, 그렇게 동거를 시작하자. 그리고 투자금은 합치자. 어, 내 투자금 총액이 지금 19만원이니까…엥? 19만원? 뭔 소리야. 내 투자금이 지금 얼만…'






…눈을 떴다. 바닥에는 깨진 컵조각이 널부러져 있었고, 사방으로 튄 물이 벽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나는 방바닥에 쓰러진 채 였다. 정신이 조금 들었다. 아까 순간적으로 너무 화를 내서 그대로 쓰러진 모양이다. 뒷통수가 욱씬 아팠다. 넘어지며 머리를 찧은 모양이다. 뇌진탕이 크게 안 온게 다행이다. 타고난 돌머리가 이럴 때는 도움이 되는 모양.

'꿈 속의 꿈이었나'

그 새하얀 인테리어의 깔끔한 새 아파트 대신, 5.5평짜리 좁은 원룸과 싯누런 형광등 불빛이 나를 재빨리 현실로 데려다 주었다. 나는 지끈지끈한 뒤통수를 조심스레 매만지며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후우"

개당 4만원까지 떨어졌던 베인코인은 다시 150만원대를 향하고 있었고, 헤더리움도 13만원을 향하고 있었다. 19만원까지 추락했던 나의 평단가도 지금 260만원을 돌파했다. 시장은 딱 4년 전으로 돌아간 셈이었다.

"흐흐, 흐흐흐"

나는 실없이 웃었다. 꿈에서 본 아영씨가 왠지 낯이 익어 한참을 생각해봤더니, 어제 실업수당 타먹으러 다녀온 상담원 얼굴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가 차서 또 웃었다.

"괜찮아, 괜찮다고! 야, 괜찮아"

스스로를 다독이는 말과 함께 얼른 여기저기 게시판과 지표들을 훑기 시작했다. 사상 최대 폭락의 상황에 게시판이 절망으로 뒤덮여 있었지만, 빠른 반등에 만세를 외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오, 그래, 그래"

그 사이 베인코인은 300만원을 넘어가고 있었고, 그 무서운 기세에 더이상 추매할 돈이 없다는게 한스러울 뿐이었다. 물론 게시판에서는 데드캣이다, 일시적인 기술적 반등일 뿐이다, 마지막 설거지다 어쩐다 하는 말들이 또 나오기 시작했지만 괜찮다고 나를 다독였다. 딥블루곡스 사태 때도, 중국발 하락장 때도 다 망하는 줄 알았잖는가.

"안 망한다고! 망해도 안 망해!"

타는 목마름을 느끼며 주변을 돌아보다, 문득 방문 앞에 붙어있는 포스터에 눈이 멈췄다. 그래, 바로 이거지. 나도 그 박력 있는 최민구 사진처럼 크게 외쳤다.

"가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 끝 >

섹토피아 소설

서기 2099년, 보다 진보된 인공지능과 미디어의 발달은 드디어 뇌파간섭을 통한 가상현실 체험을 완성시켰다. 이제는 누구라도 작은 캡슐룸 안에 들어가 눕기만 하면, 자신이 원하는 환상을 뇌파자극을 통한 오감체험으로 완벽하게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성공한 사업가, 우주체험, 포르노, 콘서트 중인 인기 아이돌, 오지 탐험, 공룡 시대, 올림픽, 정치적 승리, 전쟁과 전투, 익스트림 스포츠, 역사 체험 등 다양한 망상과 꿈이 투영되어 사람들을 만족시켰고, 그 환상적인 체험은 현실의 고단함에 대한 위안을 넘어 유토피아의 현실강림에 이르렀다.

이미 실현된 로봇에 의한 인류의 노동해방으로 인해 몇 푼 안되는 기본소득만으로 살아가야 했던 30억의 선진국 빈민들에게 이 가상현실 체험은 사실상 삶에 유일하게 주어진 엔터테인먼트나 마찬가지었다. 열풍이나 현상이라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온 세상이 가상현실 체험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사회 갈등에 골머리를 앓던 정치인들은 그 모습에 박수를 쳤으며, 소비가 사라진 시대의 자본가들에게는 마지막 여흥의 투자기회가 찾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상현실 기술은 인류의 모든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가상현실의 대중화에 이은 보급과 제작 사업은 인류의 마지막 문화 사업으로 빛났으며 그에 따라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투자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초창기 시절 책장만 했던 거대한 크기의 체험 머신은 불과 15년 사이 'D밴드'라 불리는 머리띠 형태의 개인화 뇌파 모바일 머신으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섹토피아





"T, 이거 공유해줄까"

묘한 미소를 띈 제이의 말에 나는 불안을 느꼈다. 녀석이 저런 표정을 지을 때면 언제나 짖궂음을 넘어 범죄에 가까운 장난을 저지를 때가 많았으니까.

"뭔데. 새 에프코어 시리즈?"

얼마 전부터인가 제이의 봉긋 솟아오르기 시작한 가슴을 보며 새삼스레 그녀의 성별을 되새긴 나였었지만, 묘하게도 제이의 시청각적 취향만큼은 또래 남자아이들의 그것을 능가하는 데가 있었다.

"아니"
"뭔데"

제이는 대답 대신 핸드 제스츄어로 내 D밴드에 자료를 전송해주었고, 지난 번처럼 또 바이러스 자료가 아닐까 걱정하면서도 나는 그 파일을 엑세스 했, 아니, 하려 했다.

"아, 토미! 잠깐만!"

나를 언제나의 애칭인 'T'가 아닌 '토미'라 불렀을만큼 다급한 제이의 목소리에 이번에도 또 큰일날 뻔 했다고 속으로 한숨 내쉰 나는 물었다.

"왜? 이거 또 불법 자료야?"
"어. 온라인 보안 관련 메인터넌스 모듈 몇 개 끄고 실행해야 돼. 큰일난다. 경찰 온다."

글쎄. 이 계집애는 도대체 어디서 이런 불법 자료들을 마구 구해오는 것일까. 아니, 애초에 '만약'에 대한 경계심 자체가 없는 것일까.

"나 그럼 안할래. 저번처럼 또 해킹 당해서 수리하다가 뭐 잘못되서 경찰서 소환되고 내 머신 다 스캐닝 당하고 그러면 진짜… 그냥 자살하고 만다"
"아니, 걱정마. 이번건 깨끗해. 이미 해리 오빠가 다 체크해봤대. 확실해. 그보다, 이거 그거야"
"뭐"
"시에나 밀크 의료 데이터를 D밴드 컨텐츠화 한거야. 완전 미친 자료야"
"뭐라고?"

시에나 밀크. 내가 그녀의 이름을 떠올리자마자 D 밴드에 연동된 관련 ICCDB 자료가 주르륵 내 각막 렌즈 한쪽 구석에 아로새겨져 뇌로 전달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굳이 살펴볼 것도 없었다. 우리 또래 남자애들, 아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몸 건강한 남성들 중에 그녀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누가 있겠는가.

무대 위에서 격렬한 안무와 함께 흔들어 대는 그 완벽한 몸매와 귀여우면서도 섹시한 마스크, 놀라운 가창력은 그녀를 단숨에 세계적 스타로 만들었고, 사춘기의 우리들은 그녀에게 열광하는 것도 모자라 그녀와 닮은 포르노 IVR를 찾아 뇌파를 지져대기 바빴다. 물론 깔끔한 뒷처리를 위한 콘돔젤을 미리 바르는 것은 필수적인 단계였고 말이다.

"HVRI로 전신 다 들여다 본 의료 데이터로 만든거야"
"미쳤다…"

D밴드는 우리 신체의 오감을 뇌파 자극이라는 형태를 통해 가장 완벽하게 재현해낸다. 우리의 눈, 귀, 코, 입, 피부 등 외부에서 전달되어 오는 모든 현실 자극 감도를 낮추고, 대신 뇌파를 조종해서 가상 현실의 그것으로 우리의 의식을 완벽하게 속인다. 맛, 풍경, 향, 촉감까지.

즉, 나는 그저 침대에 누워 침을 줄줄 흘리고 있을 뿐이지만, 나의 뇌는 내가 실제로 격렬한 축구경기를 뛰는 것으로 착각을 일으켜 다리가 뻐근하고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뛰는 수준의 매우 리얼한 오감 자극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이걸 얼마나 더 리얼하고 환상적으로 표현하느냐와 그 밸런스의 중요성이 바로 D밴드 컨텐츠 제작자들의 가장 큰 고민과 역량의 차이이기도 하다.

"그럼 거시기까지 완전히 다 구현되어 있겠네?"
"당연하지. 털 하나하나까지 다 완벽하게"

우리 시대의 연예인들에게 신체적 프라이버시란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노출 영화라도 찍었다가는 베드신의 리얼한 체험을 위해 신체 구석구석에 대한 초정밀 풀스캔 3D 데이터는 물론이요 몸 여기저기의 냄새까지도 수집되어 컨텐츠에 반영되니까.

물론 유저들의 환상을 위해서 어느 정도의 몸매 보정 같은 데이터 미화가 이뤄지고, 포르노 컨텐츠가 아닌 이상 당연히 은밀한 부위에 대한 터치나 과도한 수준의 접촉은 불가능하다. 애초에 데이터가 구현되어 있지 않으니까. 설령 요즘 영화들 추세처럼 그런 부분까지 애써 구현해 놓았다 하더라도 사실 의미가 없다. 포르노 영화가 아닌 이상 그런 부분은 처음에 영화를 찍을 때부터 스캔하지 않으니까. 결국 더미 데이터일 뿐이다.

하지만 의료용 데이터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암세포나 신경 손상을 찾기 위해 HVRL로 신체 세포 하나하나까지 모조리 스캐닝하는 의료용 HVR 데이터라면, 그녀의 속살을 넘어 발바닥 주름 갯수까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마. 하지만 글쎄.

"어쩐지 용량이 말도 안되게 크더라. 야, 근데 그런 데이터를 어떻게 구했는데? 의료 데이터가 그렇게 허술하게 돌아다니겠냐. 비슷한 다른 누구거나, 조작된 거겠지"

나의 말에 제이는 "아 맞다고! 베를린 그룹 애들이 해킹한거래. 나도 아까 돌려 봤는데, 몸에 난 점 위치들이랑 배꼽모양까지 다 똑같더라" 하고 반박했다. 비교자료를 묻는 내 질문에 밀크가 출연했던 다른 영화들과 뮤직 비디오를 마구 전송한 제이. 그쯤해선 나 역시 검증 대신 그저 "사실이면 진짜 완전 대박인데" 하고 탄성을 내었을 뿐이다. 사실 연예인, 게임, 해킹에 관한한, 제이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그럼 이거 어떻게 하면 돼? 밀크랑 섹스체험 하려면? 이걸 그대로 적용할 수가 있어?"

나의 말에 제이는 몇 개의 추가 설치 프로그램들과 해킹법이 적힌 문서를 D밴드로 전송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D밴드로 조심스레 현재 엄마와 동생의 위치를 확인해봤다. 어니댜고 묻는 내 질문에 엄마는 짧게 세라 아줌마의 집이라고 답했고, 동생은 학원 좌표를 전송했다. 오케이, 그럼 적어도 두어 시간은 이제 온전히 나만의 시간이다.

"룰루루루루루"

내 방 침대에 누워 시원하게 바지를 벗고, 책상 서랍 깊숙한 구석에서 콘돔젤을 꺼냈다.

"음"

적당히 손바닥에 따른 콘돔젤로 거시기 주변을 적당히 코팅하면, 그 주변에 얇은 막이 형성되어 정액의 흩뿌림을 막아주고 상대의 성감을 높여준다. 원래의 목적은 지난 세기 내내 사용된 고무나 실리콘 콘돔보다 양측 모두에게 더 리얼한 쾌감을 전달하고 보다 안전한 섹스를 경험해 줄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는데, 솔직히 쾌감 차이는 내가 실제 섹스 경험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단지 젤 형태로 굳어버리기에 사정 이후에 정액이 따로 흘러내리거나 할 우려가 없어서, D밴드 포르노를 볼 때 그 뒷처리가 손쉽다. 마스크팩 버리듯이 슥 뜯어버리면 그만이니까.

"오오"

그보다, 시에나 밀크의 의료 데이터를 해킹용 포르노 툴에 얹어서 가동한 체험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이전에도 다른 포르노 배우들의 데이터를 인기 연예인으로 합성해서 꽤 리얼하게 구현한 유저 MOD들은 몇 번 본 적은 있지만, 역시 '실제'의 데이터는 차원이 달랐다.

음성, 촉감, 냄새, 탄력, 맛, 온도까지 완벽하게 실제의 그것과 같게 구현된 가상 현실 속에서 나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다양한 변태적 플레이를 즐겼다. 시간이 조금 더 있으면 좋겠지만, 두 어시간이 흐르자 동생의 메신저가 "오빠, 나 지금 가는데 저녁 좀 차려놔" 하며 말을 걸었고, 나는 그제서야 서둘러 마무리 짓고 뒷처리를 해야했다.




"장난 아니지? 이 새끼 하루만에 얼굴 쾡해진 것 봐"

나보다 제이가 먼저 신이 난 얼굴로 나를 놀렸다. 나는 "야, 쌩쌩하거든?" 하고 그녀의 말을 받은 뒤, "근데 데이터도 데이터인데, 그 프로그램은 뭐야? 완전 뭐 별별 기능이 다 있던데?" 하고 물었다.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DCP인가 뭐래든가, 여튼 원래는 의료용 분석툴인데 그걸 해킹해서 D밴드 체감 머신에 연동시키고 그걸 초보자들도 쉽게 운용할 수 있게 간소화 시키고 지들이 만든 새 포르노용 UI 모드 얹은거야. 만든 새끼들 진짜 천재야 천재"

제이 같은 해킹 초고수가 천재라고 인정할 정도면 그 새끼들은 정말 프로페셔널 초고수 해커일 것이다. 그러나 이게 원래 산업용 프로그램이라는 사실에 조금 섬뜩해진 나는 다시 물었다.

"진짜 뭐 문제 없는거지? 니야 원래 이런거 잘 아니까 알아서 뭐 문제 생겨도 잘 피하겠지만 나는 진짜… 또 실수로 보안 프로그램 잘못 띄우고 긴급 점검 들어오고 그러면 진짜 나 집에서 쫒겨나고 난리나. 진짜 문제 없는거지?"

그 말에 제이는 잠시 말이 없다가 "만약에 경찰에 걸리게 되면, 무조건 깜빵행이야.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하고 무겁게 말했다. 이미 실행 로그 다 남았을텐데. 나는 "야!" 하고 소리쳤지만, 제이는 웃으며 말했다.

"근데 걸리긴 왜 걸려. 이게 스텔싱이 얼마나 잘 된 해킹 프로그램인데. 최소한 2년은 걱정없다. 내가 보장한다" 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하, 진짜….

"그래도 만약에, 어?"
"T, 됐어. 만에 하나 억에 하나라도 잘못되면 내가 니 대신 감방 갈게. 됐냐?"

씩 웃는 제이의 얼굴은 그녀를 미워할 수 없게 한다. 그녀가 레즈비언만 아니었어도 진작에 고백했을텐데. 아니, 그랬더라도 내가 고백할 수 있었을까. 어쨌거나 부치 성향의 그녀와 내가 잘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단백질만으로 75%? 밀크 얘는 고기 진짜 좋아하나보네. 변비 안 오나 이러면"

이 해킹된 프로그램에는 정말 별 기능이 다 있었다. 어쨌거나 의료용 분석툴을 기반으로 한 프로그램 아닌가. 시에나 밀크의 체내에 남은 음식물과 분변에 대한 스캐팅 데이터를 통해 그녀의 지난 며칠 간의 식사와 몸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근데 진짜 이거 걸리면 감방 가겠는데…"

아무리 요즘 D밴드 컨텐츠들이 막장일로로 치닫는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영상 제작자들과 법률의 통제 하에 다듬어지는 '가상현실 데이터'일 따름이다. 그저 내 뇌파를 자극해서 그럴싸하게 가짜 촉감, 가짜 냄새의 자극으로 내 뇌를 속이는 것 뿐이니까. 하지만 이건 다르다. 살아있는 한 인간의 육체에 대한 모든 민감 정보를 담고 있는 자료 아닌가.

극단적으로 말해서, 내가 해리 형 같은 유전자 은행의 연구원쯤 된다면 이 데이터 안의 유전 정보를 E셀 같은데 담아 빈 수정란에 코딩해서 바로 시험관 아기로 공여해서 시에나 밀크 복제인간을 탄생시킬 수도 있다. 물론 자세히는 몰라도 나름대로 그런 미친 짓을 막기 위한 시스템들이 있긴 하겠지만 여튼 이론적으로 말이다.

"어…잠깐만"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나는 어떤 미친 생각을 떠올리고야 말았다.



< 계속 >

각질의 난 소설

살갗이 에이는 혹한의 추위에 온 천하의 물과 공기가 얼어붙는 와중에도, 김박스는 여전히 커피 과용와 수면부족으로 소변이 샛노래질 정도로 몸에 수분의 씨를 말리기에 여념이 없다. 그에 더이상 살기 힘들어진 만 피부들은 궁지에 몰리다 못해 난을 일으키기에 이르고, 그를 주동한 백각질과 김버짐의 환란을 가리켜 후대는 '각질의 난'이라 이른다.





각질의 난





"뭣이?!"

주둥아리에서 각질의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김박스는 크게 놀라 백산수를 수분절도사에 제수하여 즉각 입 주변으로 급파한다. 그러나 이미 제대로 일어나버린 각질의 준동에 생수 한 병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고, 마시면서 얼굴에도 조금 펴바른 생수는 혹한의 날씨에 얼어버리면서 오히려 수분을 더 빼앗고야 말았다. 그렇게 초기 진압에 실패한 각질의 난은 장기전 조짐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전해들은 대왕대비 마마는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지혜로

"로션을 입 주변에 대량 도포하고, 인근 관아에서 가습기를 징발하여 가동할 것이며, 당분간 수분을 끊임없이 용복하게 하여 당금에 그치지 않는 해결책을 마련해야 할 것" 이라 일렀다.

그에 즉각 베란다에서 징발된 가습기가 가동을 시작했고, 하루종일 근 1리터 가까운 생수가 온전히 입 안에 투입되었다. 또한 피부 로션이 대량으로 도포되어 난을 일으킨 각질들은 빠르게 진압되어 사라졌다.




"이제 어쩔 셈이우"

산산히 사라진 각질들의 모습에 김버짐은 크게 실망하며, 백각질에게 물었다. 하지만 "다시 피부로 돌아가 쥐 죽은 듯 살아야지" 라는 대답을 예상했던 그와 달리, 백각질의 결의는 대단했다.

"결코 이대로 끝내지는 않을 것이오. 그리고 이미 내 손을 써두었소이다"
"무슨 수를?"




각질의 난을 성공리에 진입했다는 기쁨에 그날 밤 잔치가 벌어졌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김에 후환이 없도록 한다며 김박스는 "냉장고에 물 떨어지는 일이 없게 할 것"이라는 선언과 함께 대량의 수분을 냉장고에 가득 채웠다.

24병들이 생수 박스가 자취방 베란다에 가득 쌓였음은 물론이요 삼다수, 평창수, 에비앙 등 다종의 생수들이 냉장고에 채워졌다. 그러나 "대량의 수분 확보" 과정에서 들어와서는 아니 되는 것들도 들어오고야 말았다.

"오호호호호, 이 어찌 기쁜 일이 아니겠사옵나이까"
"껄껄껄, 큰일을 위해서는 내 참아야 하겠다만, 모처럼이니… 흐흐"
"암요, 자 쭉 들이키시지요 오호호호호"

애교를 살랑살랑 피우는 기생 '참이슬'의 애교에 그만 김박스는 그날 밤 정신없이 혼술을 들이켰고, 혼미해진 정신 속에서 그는 그렇게 가습기 물 떨어진 것도 모르고 그저 난방만 최고 온도로 틀어버린 채 잠에 곯아 떨어졌다.





"이때다!"

그날 밤, 백각질은 늙은 피부 세포들을 모두 끌어모은 뒤 선언했다.

"각질들이여. 우리가 어떤 명분을 들고 이 땅에 섰는가. 아침에는 추위, 점심에는 세균, 저녁에는 피로와 맞서 싸우며 그의 안면을 보호해왔건만 우리가 이제 늙고 병들었다 하여 그는 우리를 세안폼과 필링 약품으로 그저 죽여 없애야 할 병폐로만 생각을 할 뿐이다. 설령 그것이 우리 후대를 위한, 젊은 피부 세포들을 위한 명예로운 죽음이라면 우리는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으나 작금의 그를 보라!

그저 커피와 술과 게임만을 밝히며 하루하루 피로를 쌓기 바쁘고, 그저 노화만을 재촉하는 이 어리석음을 일깨워야 하지 않겠는가! 오히려 오늘날 이 사태를 바라만 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불충이요, 불의일 것이다"

그의 격문에 감격한 늙은 피부 세포들은 부르르 떨었고, 경국지색 참이슬에 홀린 뱃살과 뒷목, 대뇌도 함께 난에 동참하니, 김박스가 다음 날 눈을 뜬 것은 아침 10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거야! 어? 아주 근태가 말이야, 엉망이야 엉망! 그리고 이런 말은 좀 뭣하지만, 사람이 지금 몰골이 그게 뭐야? 세수는 하고 다니는거야?"

김 부장의 호통과 함께 개망신을 당한 김박스는 자리로 돌아와 거울을 보아하니, 밤새 보일러 세게 틀고 지독히 건조한 방 안에서 맵고 짠 안주와 함께 술 빨고 잔 댓가로 온 얼굴에 각질이 다 일어났다. 그 와중에도 늦잠을 자서 대충 눈꼽만 떼고 출근을 했으니 얼굴이 엉망진창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뱃살은 크게 세를 불렸고, 뒷목과 대뇌는 뻣뻣하게 신경전을 걸어오니 김박스는 당장이라도 항복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오랜 시간 청춘의 멋을 위해 세월을 바친 이였다. 궁지에 몰리자 오히려 비로소 칼을 빼들었다. 거울을 노려보며 각질에게 전면전을 선언했다.

"나의 피부는 사우나와 피부과로 다져진 돈지랄의 산물, 이 소중한 것들을 어찌 각질 따위에게 넘기겠는가"

그는 점심시간을 틈타 온 나라의 뷰티를 관장하는 행정기관 올리브영에 들러 립밤과 수분크림을 징발, 재차 각질을 진압하고, 집에 와서는 필링과 보습팩과 영양크림으로 내일의 싸움을 준비했으며 피부 관리 10+1회를 끊어 장기전에 대응했다. 아울러 당분을 끊고 저녁을 종합비타민과 대량의 물로 대신하니, 이는 필승의 시나리오요, 불패의 결의였다.

"드르렁"

마지막으로 방에 가습기를 재가동하고 실내에 빨래를 널었으며 그것도 모자라 9시도 안 되어 수면에 들어가니 각질의 난은 이미 그것으로 끝난 것과 다름없었다.





"흐, 흐흐…"

이미 싸움은 결딴이 났다. 피부를 촉촉히 적시는 화장품과 최소 10시간 이상의 딥슬립, 충분한 수분 공급에 동반하는 당분 끊기 등, 피부에 좋다는건 다 했으니 각질이 설 땅은 이제 없었다. 그는 가볍게 웃으며 조용히 읇조렸다.

"그거면 되었다. 나는 그거면 된다. 내가 어디 네 가운데 다리도 아닌데, 일어난다고 누구한테 환영받는다고 그 난리를 치며 일어났겠느냐. 껄껄껄"

그렇게 웃은 그는 말을 이었다.

"단지 그저… 방탕하고 앞날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네 모습에 엄중한 경고를 위해 이 늙은 몸 마지막으로 일으켜 보았을 뿐이나, 이제 그렇게 정신 차리고 알찬 내일의 준비를 시작하는 모습을 보았으니, 나는 이제 이렇게 네 몸을 떠난다."

그렇게 각질은 잠이 든 김박스의 몸을 떠나, 배게 맡 어딘가로 눈에 보이지도 않는 크기로 떨어져 바스라졌다. 그 와중에 김박스는 잠결에 희미한, 각질의 마지막 말을 들은 듯 듣지 못한 듯, 귀를 긁으며 다시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명심하거라. 비록 나는 이렇게 사라지지만, 다시 네가 방탕하고 관리 없는 하루하루를 보낼 때 나의 후예들은 다시 일어설 것이다. 더욱 추하고 더욱 집요하게 말이다. 부디 건강하고 규칙적인 삶을 살거라…"


- 끝 -

이제는 아재가 되어버린 한 소년의 풋풋했던 첫 사랑이 어느날 MEN이 되어 돌아온다면 이런 느낌일까(하앜)….   


"나가" 소설

격분한 내가 정신없이 몰아붙이던 도중 터져나온 그녀의 한 마디.

"뭐?'

당황하면서도 애써 그 당혹감을 감추며 거칠게 되물은 나에게, 그녀는 문 밖을 향해 손가락질까지 하면서 말했다.

"나가라고. 짐싸서, 당장 나가"

내가 무어라 대꾸도 하기 전, 그녀는 옷장 위에 올려놓은 나의 캐리어를 끌어내리더니 내 앞에 내팽겨치며 선언했다.

"이 집에서 나가. 나 너랑 같이 못 살아"

일방적인 통보. 처음 보는 그녀의 차가운 얼굴. 사소한 말다툼에서 시작된, 서로의 아픈 구석을 후벼판 큰 싸움. 그리고 급기야 우리 엄마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터져나온 폭언. 실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사과하려고 했지만 그 순간 선언된 이별의 한 마디.

"나 정말 힘들어, 이제 우리 그만하자. 나가줘. 지금 흥분해서 하는 소리 아냐. 오래 전부터 생각했던거야."

'우리의 보금자리'라고 생각했던 이 집은 그저 그녀의 명의로 된 원룸 전세였을 뿐이고, '예비 부부 생활' 혹은 '동거'라고 생각했던 우리의 일상은 착한 그녀가 베푼 동정이었을 따름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창업 실패 덕분에 여친 집 빌붙어 사는 찌질이'라는 내 차가운 현실을 비로소 마주하게 되었다.

"무슨…"




바닥에 내팽겨쳐진 캐리어와 "나가"라는 말, 그리고 캐리어 안에서 쏟아져 나온 옷가지 몇 벌을 보는 순간, 십 수 년도 더 된 씁쓸한 기억이 떠올랐다. 화단에서 개미를 잡아와 지하층의 우리집 창문으로 자꾸 들여보내던 그 밉상스러운 주인집 아들내미.

녀석와의 시비 끝에 녀석은 우리 엄마 욕을 했고, 나는 곧바로 주먹을 날렸다. 세상 그 누구도, 내 앞에서 불쌍한 우리 엄마를 욕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서로 뒤얽혀 코피 터지게 싸웠던 그 날 밤.

체구도 작고 싸움도 못해, 맞기도 내가 더 많이 맞았고 잘못도 그 놈이 했건만 고개를 숙여야 했던 것은 나와 엄마였다. 나가라고 소리치는 그 옴팡지게 생긴 주인집 아주머니의 성화에 엄마는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건만, 그 극성 맞은 아주머니는 우리 집까지 들어와서 집안 살림들과 빨아놓은 새 옷을 밖으로 내팽겨치면서까지 화를 냈다.

골목길의 동네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와 구경을 시작했고, 그 사람들을 향해 "사람이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유분수지!" 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아줌마.

급기야 아줌마가 근 4년째 갱신을 하지 않은 계약서까지 꺼내들고 나오자, 다급해진 엄마는 "엄마가 기웅이랑 잘 지내라고 했어, 안 했어!" 하고 크게 소리치며 내 뺨을 몇 번이고 올려붙었다. 외가의 7남매 중에서도 유난히 억척스러웠던 엄마의 손은 매웠다. 한 대에 뺨이 벌개지고 두 대에 입술이 터졌다. 그리고는 몇 대인지 모르게 맞았다. 나는 움츠리되 울지는 않았다. 아주머니가 당황해서 되려 말릴 즈음이 되어서야 끝난 그 한바탕의 지랄굿.

방으로 돌아와, 시뻘개지고 퉁퉁 부운 뺨을 매만지며 방구석에 말없이 앉은 나와 역시 등을 돌리고 앉아 울던 엄마. 참 많이 아팠다. 하지만 내가 진정으로 아팠던 것은 뺨도 아니요, 엄마에 대한 서운함도 아니었다.

그 놈의 없는 살림 때문에 끔찍히도 사랑하는 아들의 뺨을 독하게 후려칠 수 밖에 없었을 그 엄마의 마음이, 그 누구보다 찢어지게 아팠을 그 마음이, 흐느끼며 돌아앉은 외로운 뒷모습 너머까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너무나도 가슴 아프고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트라우마가 되어버린 것일까.

엄마의 돌아앉아 울던 그 모습은 아주 오랫동안 나의 악몽에 나왔고, 다양한 변주가 되어 십 년도 넘는 세월동안 틈만 나면 나의 꿈자리를 괴롭히고 또 괴롭혔다. 다행히 언젠가부터는 그 모습도 익숙해졌고 드디어는 웃긴 꿈에서까지 활용되어 그렇게 나는 그 트라우마를 긴 세월 끝에 극복할 수 있었다.




"그래"

순식간에 차가워진 머리. 그리고 그보다 더 차가워진 가슴. 주섬주섬 캐리어에 쏟아진 내 옷가지들을 다시 집어넣으며 그 와중에도 반복되는 가난의 굴레에 씁쓸함을 느끼는 나. 그렇지만 왜 지금 그 기억이 떠올랐을까.

돈 때문에, 가장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추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 때문이었을까.

"흐, 흐흐…"

그리고 그제서야 웃음 같은 울음이 터졌다. 지난 십 년도 넘는 세월 동안 한번도 안 울었는데. 군대에서도 안 울고. 그때 그 날도, 너무 불쌍한 우리 엄마가, 혹시라도 내가 또 울면 언젠가의 겨울 밤처럼 "수혁아, 엄마랑 같이 죽자" 며 대접에 뭘 타올까봐. 그렇게 조마조마하며 울음을 참았는데.

하지만 지금은 도저히 참을 수 없이 흐르는 눈물에, 온 방 안이 그저 누렇고 새하얗게 흐려졌지만 먹먹한 가슴에 숨을 고르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지금의 내 모습은 얼마나 추할까.




"걱정말어. 담주에 줄테니께"

내가 본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 그나마도 역시나 등 돌린 채, 신발을 신던 모습이 전부다. 신발을 다 신고서는, 한번쯤 돌아서서는 엄마에게 고맙다거나, 혹은 나를 보며 "아들" 어쩌고 하는 인사라도 한마디 할 수 있으련만.

그는 그렇게 신발을 다 신더니, 문을 열고 그렇게 바로 나가버렸다. 바람처럼 나갔다가 근 반 년 만에 돌아와서는 그렇게 엄마의 전 재산을 들고 그렇게 사라져버린 인간 쓰레기.

그때는 엄마도 여자였을게다. 그의 마음을 마지막으로 돌려보려고 지난 밤 오만 수를 다 썼을테고, 그 큰 돈을 내준 것도 그렇게라도 마음을 한번 잡아보려는 안타까운 결단. 물론 결과는 대실패였지만. 하지만 머리가 조금 굵어진 이후로는 깨달았다. 진짜 엄마 인생의 발목을 잡은 것은 그가 아니라 나라는 사실을. 떠나간 쓰레기야 잊어버리고 새로운 사람을 찾으면 그만일 뿐 아니겠는가. 하지만 나는?

엄마는 지금도 나이에 비해 동안이고, 좋다고 따라다닌 남자 몇 정도는 나도 알고 있으니까. 공장장 아저씨부터 뭐 이 사람 저 사람. 하지만 결국 딸린 애를 책임져야 하니 그렇게 내가 엄마의 족쇄가 되었겠지. 생각해보니, 지영이한테도 내가 족쇄였으리라.

능력 없고 미래 없고 사고만 치고 다닌, 비전 없는 남자친구. 그러나 정 많고 의리도 많아서, 바보 같이 그 외모 그 매력을 갖고 나 같은 놈이나 만나고…. 남들은 잘만 갈아타던데.




"그, 지영아"

애써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며 나는 캐리어를 집어 들었다. 그래, 어쨌든 지영이와의 일인데 왜 구질구질한 내 지나간 인생 이야기를 혼자 떠올리고 있단 말인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그녀를 위해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어…"

정리되지 않는 머릿 속과 해야 할 말을 한참을 애써 정리했건만, 결국 건조한 내 입에서 흘러 나온 말은 흔해 빠진 말이었다.

"행복해라"

캐리어를 들고 집을 나선 후에야 생각했다. 나 역시도, 우리 아버지처럼, 남겨지는 사람에게 마지막 떠나는 얼굴을 안 보여줬구나, 하고.





오피스텔을 나와, 골목을 돌아, 큰 길로 가기 전, 다시 옆 골목으로 돌아 들어가, 벽에 몸을 기대고 그렇게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눈을 감고 소리없이 끅끅대며 울었다.

수없이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만약… 그냥 그때 그 계약에 싸인을 했더라면. 아니면 그냥 아예 뻘스러운 사업이 아니라 다니던 회사나 잘 다녔으면. 처음에 대금 들어왔을 때 그걸로 일 더 안 벌리고 만족했더라면. 그랬으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그럭저럭 살맛나게 살았을텐데.

지영이한테 손을 안 벌렸더라면. 아니면 진작에 좀, 아니 그냥 차라리 5년 전 그 날 고백을 하지 말았더라면. 그랬다면 명훈인가 정훈인가 하는 그 대기업 다닌다던 남자랑 다시 잘 만났을텐데. 너 걔 그때도 좋아했었잖아. 나랑 사귀면서도 몇 년을 못 잊고 힘들어 한 거, 사실 다 안다.

흐.

나도 다 잘해볼려고 그런건데. 조금이라도 더, 너도 호강시켜주고, 엄마도 더 고생 안 할 수 있게. 잘 될 줄 알았는데. 난 진짜 잘할 수 있었는데.

다 좋은 사람들인데. 왜 그렇게들 다 힘들고 고생만 하고 잘 안 풀리는지. 하면 안되는 약속을 너무 많이 했다. 내년에는 결혼 꼭 하자, 내년에는 엄마 내가 가게 하나 차려줄께, 내년에는 내년에는 내년에는.

그랬지.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치며 얼어붙은 마음을 한층 더 공허하게 만들지만, 그 차가운 기분이 차라리 더 좋았다. 눈을 떴을 때, 세상이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떴다.




큰 길로 나와 버스를 기다린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진눈개비가 휘내리기 시작하는 겨울 밤, 저 멀리서 버스의 불빛이 보인다. 지갑을 가방에서 꺼내고, 캐리어를 다시 손에 쥔 순간 울리는 지영의 전화.

진동이 몇 번을 울리는 것일까.

버스가 정류장에 서고, 버스에 오를까 말까 망설이는 나. 그리고 전화를 받을까 말까 망설이는 나. 캐리어를 쥔 손에 힘을 준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쉰다.

'우리 다 행복하자'


- 끝 -

에버드림 소설

2020년, 노스웨일즈 의과대학 맥 돕슨 교수 연구팀은 뇌에서 분비되는 피로회복물질(FRS-b)에 대한 논문을 발표한다. 크게 주목할 것 없는 평범한 의학 논문이었지만 그 안에서 힌트를 얻은 세계적인 제약회사 노바스틱스 측은 이후 근 10여년 간의 추가적인 연구를 통해 인체의 피로회복에 대한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그것은 압도적인 효능의 피로회복 약물 '프레쉬(Presh)'로,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프레쉬 몇 알이면 완벽히 피로가 회복될 수 있었다. 물론 안구건조증이나 식이장애 등 자잘한 부작용의 우려는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체내 생성물질에 의한 피로회복제'이기 때문에 상당히 안정적인 약물이었다. 이론적으로는 프레쉬만 복용하면 24시간 내내 수면을 취하지 않아도 전혀 건강에 지장이 없었다.

사실상 인류는 드디어 '수면'을 정복한 셈이 되었고, 프레쉬는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딱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화학적 합성이 불가능하여, 오로지 실제로 사람의 수면을 통해서만 그 원료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노바스틱스는 그 피로회복물질을 수집하기 위한 자회사 '에버드림'을 설립했다.






에버드림






"당신의 잠을 삽니다"

새하얀 옷을 입은 매혹적인 여인이 잠자는 근육질 남성과 입술을 맞추며 잠을 깨우는 선정적인 광고. 그것은 최근 모바일, 인터넷, TV, 드론 및 옥외광고, 하이비전, VR, 브레인비전, 잡지 등 온갖 광고 채널을 통해 몇 달 째 사람들이 질리도록 보고 있는 에버드림 사의 광고였다.

"어우 지겨워 진짜 저 놈의 광고는 염병, 아주 신물이 나네"
"근데 저거 돈 많이 준대"

하지만 누군가들은 그 '에버드림'의 광고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수면 1시간 당 1만원을 지불한다는데 한달이면 30만원이고, 2시간씩만 팔면 한달에 무려 60만원 아닌가. 귀에 블루투스 이어폰만한 크기의 수면채취기만 꽂고 자면 한달에 제법 큰 목돈이 생기다는데 서민들 입장에서 그에 혹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긴, 우리 회사 김만복 부장 마누라는 아예 회사 때려치우고 하루종일 잠만 잔댄다"

오랜 경체 침체로 인해 20년 가까운 디플레이션이 지속된 사회에서 '시급 1만원'의 수면비는 최저임금보다 살짝 낮은 수준이었고, 때문에 보다 쉽고 편하며 저렴하게 돈을 벌 수 있는 에버드림은 사회적, 아니 전세계적 신드롬을 부르기에 충분했다.

"인도에서는 시간당 350원이라더라"
"캬, 근데 그럼 뭐하러 다른 나라에서 비싼 돈 주고 채취하는거래? 그냥 인도나 무슨 다른 못사는 나라에서 채취하면 되지"
"EU에서 트집 잡았거든. 그래서 나라마다 프레쉬 판매수량의 20%인가를 그 나라에서 에버드림으로 채취해야 된대. 근데 한 알에 10만원 넘는 약을 거지나라에서 얼마나 팔 수 있겠냐. 선진국에서 많이 팔리는 약이니 결국 선진국에서 채취도 많이 해야지"
"EU가 신의 한 수를 뒀구만"




'프레쉬' 신드롬은 노바스틱스의 시가총액을 전 세계 1위로 끌어올리기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새삼스레 빈부격차를 극단적으로 가르는 지표가 되기도 했다.

"야, 오빠 시원하게 달린다!"
"와 오빠 진짜 부자네"

누군가들은 프레쉬로 아예 며칠씩 잠도 안 자고 무한체력으로 놀고 일하며 그 '길어진 삶'을 즐기게 되었지만, 누군가들은 말 그대로 '살기 위해' 먹고 싸는 그 이외의 모든 시간을 잠자는데 쏟아붓게 되었다.

"뭐, 그렇잖아요. 잠만 계속 자면 허튼 돈 쓸 일도 없고, 시간도 잘 가고, 다른 할 일도 딱히 뭐 없으니까…"

머지않아 휴대폰 앱이나 브레인비전과 연동된 귀 뒤의 피로회복물질(FRS-b)의 채취시간을 설정하고 잠을 자는 것으로 생계를 잇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하루 최대 14시간까지 FRS-b의 채집이 허용된 한국에서는 '14시간 채취수면 + 6시간 개인수면 + 4시간 생계시간'의 14,6,4의 라이프를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슬리피 세대'라는 유행어가 생기기도 했다.

"한달 내내 그렇게 살진 않아요. 그냥, 일주일에 5일 정도만, 그것도 꼭 매주 그러는건 아니구. 보통 그래서 한 230~320 정도 버는 듯요. 왔다갔다 해요. 연애요? 에이, 그럼 끝이죠"

평범한 삶을 구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슬리피 세대'를 상당히 부정적으로 보았지만, 그런 이들조차도 한두번쯤은, 혹은 꽤 자주 에버드림을 이용했다.

"자기야, 다음 달에 명절인데, 이번 주는 그냥 어디 가지 말고 잠만 자자"
"그래 여보. 미안해, 신혼인데…"
"에이 그게 무슨 상관이야."




수면을 정복하게 된 인류, 아니 '부유층 인류'에게 있어서 프레쉬는 그야말로 의학 혁명 그 자체였다. 잠을 자지 않아도 된 것만으로 이미 30% 가까운 수명연장 효과가 생긴 셈이었으며, '피로 그 자체'를 회복시킨다는 점에서 수많은 성인병에 대한 예방제이기도 했다. 또 간이나 심혈관 치료의 보조 치료제로도 많이 사용되었다.

"참고인은, 마지막으로 잠을 잔 게 언제입니까"

국회 청문회에서 대기업 진상전자 김대용 회장이 "음,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대략 2년 전쯤으로 기억합니다" 라고 당황하며 언급한 내용은 당시 세계적인 이슈가 되기도 했다.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잠을 자지 않았다는 것은 프레쉬의 복용을 인정하는 것과 다름 없는 것으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부작용을 우려하여 프레쉬의 복용을 꺼려하던 세계 각지의 상류층이 그 일을 계기로 많이들 복용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알에 10만 5천원. 하루 7시간 수면을 기준으로 하면 하루 73만 5천원. 그것을 1년간 지속하면 무려 2억 6천 8백 2십 7만 오천원. 2년을 지속했다면 무려 5억 3천 6백 5십 5만원.

김대용 회장의 무수면 발언은 곧 "잠의 가치"라는 제목으로 뉴욕 데일리의 칼럼에도 인용되어 그 금전적 가치를 새삼 돌아보게 되었으며, 역으로 "에버드림 네버드림 뻐킹머니 자도자도 피곤한 너와 삼육오일 잠안 자는 그 놈들의 삶의 질에 새삼 질려" 라던 어느 3류 랩퍼의 노랫말처럼 "난 그냥 자, 귀에 뭐 꽂으면 잠이 안 와서" 라는 식의 허세가 잠시 유행하기도 했다.





"I just wanna drowse in my sorrow I wanna sleep, I wanna sleep~♪"

스티비 무어의 노래를 부르며 행진하던 그들의 모습은 꽤나 참혹했다. 피로에 절여진, 뼈만 앙상한 볼품없는 몸매, 해를 보지 못해 새하얗다 못해 피부병이 생긴 피부, 눈 밑이 퀭한 도시 빈민들.

"I Wanna Sleep"

프레쉬가 세상의 빛을 본 지 10년. 인도와 브라질 등의 개발도상국들을 중심으로 에버드림과 노바스틱스에 대한 반발운동이 일어났다. 그도 그럴 것이, 에버드림의 과도한 이용으로 인한 과로사나 성장부진 등의 혹독한 부작용을 얻은 빈민층들의 숫자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은 해당 국가들의 잘못도 있는데, 프랑스나 캐나다 등의 선진국들이 하루 최대 수면 채취시간을 3시간 이하로 엄격하게 제한한 것과는 달리-물론 그들 국가에서도 해킹을 통해 더 많은 잠을 판 빈민층은 존재했지만-,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들은 10시간은 기본이고 아예 수면 제한시간 자체가 없던 나라들도 있었다. 선진국 반열에 올라선 한국이 무려 14시간의 수면 채취가 가능한 것은 좀 이례적인 케이스였지만.

지나친 수면채취로 인한 과로사나 영영실조, 발육부진 등의 다양한 병이나 장애를 걷게 된 이들이 지난 10년간 몇 십 만명에 이를 정도로 후유증이 컸으며, 결국 네팔과 베네수엘라 등의 나라에서는 프레쉬의 판매와 에버드림의 수면 채취가 금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양한 문제가 드러났음에도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여전히 노바스틱스와 에버드림이 승승장구 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적지 않은 노인들이 잠을 팔아서 생계를 잇고 있었으니까.




[ 일주일 내내 잠도 안 자고 놀았던 푸켓의 추억 ]

데일리그램 등의 소셜 미디어에는 신혼여행을 가서 잠도 안 자고 놀았던 것을 인증하는 영상들이 종종 올라오기도 했다. 부의 과시였다. 종종 자신들도 프레쉬를 먹은 척 하며 무리하게 잠 안 자고 놀다가 과로사를 하거나 다크서클 낀 얼굴로 무리수를 띄우는 철없는 청춘들이 놀림거리가 되기도 했지만.

그러나 프레쉬가 꼭 소모적으로만 이용된 것은 아니었다. 빠르고 부작용 없는 피로회복능력으로 인해 다양한 운동선수들의 훈련량도 폭발적으로 늘어나 거의 모든 스포츠 경기의 신기록이 갱신되었으며-물론 그 반대로 관절이나 근육의 부상으로 인해 선수생명이 빠르게 끝나버린 선수들도 늘었다-, 사회 전 분야에 걸쳐 '능력자'들의 결과물 역시 양과 질 모든 측면에서 엄청나게 늘어났다.

그도 그럴 것이, 업무 및 연구 등에 있어서 그 연속성이 비약적으로 갱신 가능하게 되었기에 수많은 성과들이 빠르게 탄생하였으며, 건설업이나 컨텐츠 업계에서도 프레쉬는 가히 기적의 약물이었다.

"배우들은 살판 났죠. 한달 찍을거 일주일만에 다 찍을 수 있으니까. 스태프들만 죽어나는거지. 뭐, 그래서 프로덕션에서 아예 프레쉬 뿌리기도 해요, 좀 여유있는데는"
"요샌 다 철골로 짓죠. 빨리빨리가 이젠 완전히 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됐으니까"




"꿈"

이라는 제목의 프랑스 영화가 새삼 한국에서 이슈가 되기도 했다. 수면채취 앱 해킹을 통해 하루 15시간의 시간을 파는 알제리계 프랑스 빈민층 소년이 잠을 자지 않고 사는 부유층 백인 여학생을 짝사랑하는 내용의 이 영화는, 그 애틋한 스토리와 '억지 잠의 삶'과 '24시간의 에너지 넘치는 삶'의 극단적인 비교를 통해 진한 여운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전날 밤에 꾼 부끄러운 꿈'에 대해 소년이 수줍은 표정으로 이야기 하자 "꿈이 뭔데?" 하고 이상하다는 얼굴로 되묻는 여주인공의 모습에서 수많은 관객들이 충격을 느꼈으며, 해킹한 앱의 오류로 인해 일주일 가까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소년이 소녀가 선물로 준 프레쉬를 손에 꼭 쥐고 웃는 얼굴로 죽는 장면은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한편으로 "야 프랑스는 해킹해서 15시간인데 한국은 노멀버전이 14시간이다" 라는 사실이 뒤늦게 크게 이슈가 되어 결국 국회에서 프레쉬의 일 최대 채취시간이 8시간으로 주는 해프닝도 있었다. 이 과정에서 또 노인들이 "생존권"을 주장하며 대규모 반대집회를 열기도 했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사회는 노인들의 주장에 대해 조롱만을 남발할 뿐, 별 관심이 없었다.





일각에서는 음모론도 제기 되었다. 노바스틱스의 프레쉬 매출과 에버드림의 수면 채취량이 상식적으로 매칭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우리도 아주 급할 때는 먹기는 먹지만, 그거 뭐 먹는 사람 몇이나 되요. 근데 에버드림은 거의 뭐 다 쓰지 않나? 한두시간이라도? 프레쉬 매출이 생각보다 그렇게 어마어마하지가 않은데 에버드림 운영비가 엄청나잖아. 이거 뭔가 다른데 쓰는거 아님?"

체내 생성물질의 다른 목적으로의 전용은 엄청난 소송에 휘말릴 수도 있는 대형 사건이었기에 물론 노바스틱스에서는 즉각적으로 반박성명을 내었다.

"에버드림에서 채취하는 FRS-b의 질이 다 같지가 않다. 누군가는 매우 순도 높은 FRS-b을 생성하는데 비해 누군가는 피로회복능력이 떨어지는 잠을 판다. 그 정제과정에서 손실되는 양이 상당히 많으며, FRS-b 자체가 장기 보관이 어려운 물질이라 운송 및 보관 과정에서도 만만찮은 양이 훼손된다"

라고 해명했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이 의심을 거두지 않았으며 노바스틱스의 공식적인 매출로 집계되지 않는 거대한 검은 돈의 흐름이 추적되기도 하였다. 그것은 먼 훗날 미 국방부의 자금으로 드러나 또다른 음모론을 생성하기도 하였다.





"뭐하러 10만원도 넘게 주고 먹어. 도매로 사면 6만원이면 되는데"

하지만 진짜 노바스틱스의 골머리를 썩힌 것은 중국제 짝퉁 프레쉬의 유통 문제였다. '피로 회복'이라는 것은 꽤 주관적인 것으로, 몇 알을 동시에 먹는다면 곧바로 효과가 드러나니 확인이 쉽지만, 한 알에 10만원이 넘는 약물을 그렇게 마구 먹을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결국 잘해야 한두알로 최악의 피로만 가시고자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경우 짝퉁을 먹어서 효과가 없음에도 플라시보로 "어, 잠이 좀 깨네" 하는 케이스도 있는가 하면, 짝퉁을 먹어서 효과가 없는 것임에도 "먹어도 별 효과가 없네. 생각보다 프레시 별 거 아니네" 하는 케이스도 있었다.

특히 운송업을 하는 이들은 프레쉬의 주 고객층 중 하나였는데, 이 짝퉁의 유통으로 인해 유발되는 사고는 꽤 큰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체내 생성물질 기반의 생화합물이라는 점은 그 덕택에 도핑검사로도 쉽게 복용 여부를 밝혀내기 어려워 스포츠계에서 널리 사용되는 계기가 되었지만, 반대로 짝퉁의 유통시에는 노바스틱스의 "우리 책임이 아님"을 밝히기 어려운 이유가 되기도 했다.

노바스틱스는 개별 포장 단위의 실시간 판로 인증 및 품질인증제를 실시하기도 했지만, 짝퉁은 쉽게 없애기가 어려웠다. 고가의 약물이라는 점은 짝퉁의 유통을 더욱 부채질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리고 노바스틱스의 프레쉬 시판 20주년 기념일에 또다른 큰 문제가 터졌다. 프레쉬의 또다른 신봉자였던 칠레의 몬탈라고스 대통령이 2055년 대통령 신년사 생방송 중에 심정지로 사망한 것이다.

가뜩이나 프레쉬의 신약 특허 만료를 목전에 둔 시점에서, 프레쉬의 강력한 후원자이자 애호가였던 정치인이 생방송으로 사망하는 것이 중계된 것은 "프레쉬를 장기복용하면 심장에 무리를 준다" 라는 의학계 일각의 주장에 강력한 힘을 실어주었고 노바스틱스의 주가에 충격을 주었다.

이 역시 노바스틱스는 즉각적인 반박 성명을 내었지만, 가뜩이나 '비싼 가격'에 의한 반발심을 갖고 있던 많은 사람들과 수많은 건강염려증 환자들은 루머를 양산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프레쉬의 매출은 딱히 크게 줄지 않았다. 애초에 비싼 가격인만큼 프레쉬를 먹는 것은 '어쩔 수 없이라도, 꼭 필요한 사람들'과 '이미 지난 20년 동안 검증된 효과'를 믿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그저 원래부터 먹지 못했던 이들이 여우의 신포도 욕하기 마냥 루머를 양산하고 욕을 할 따름이었다.





"슬기야, 이제 그거 하지 마라"
"응?"
"이제 그냥 푹 자라고"

승남의 말에 슬기는 고개를 기우뚱 했다.

"왜?"

승남은 고개를 저었다.

"아버님 대장암이었담서. 가족력까지 있는데… 이제 안 그래도 되잖아. 잠 부족하면 대장암 많이 생긴다는데"
"나 진짜 괜찮은데"
"이제 우리 둘이 충분히 먹고 살만 하잖아"
"오빠…"

수면 부족으로 인한 대장암 발병 확률 증가는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다. 이미 전세계 사망 인자 1위는 고혈압, 흡연을 뛰어넘어 '수면부족'이었다. 그리고 수면부족으로 인한 대표적인 질병이 바로 대장암이었다.

한때 '고기 많이 먹어 생기는 부자병'의 대표격이던 대장암은, '잠 파느라 정작 자기 잠을 못자 생기는 가난병'의 대명사가 되었고, 전 세계적으로 대장암 환자가 해가 갈수록 폭발적으로 늘어 일부 나라에서는 무상의료 체계가 붕괴되는 현상을 낳기까지 했다. 덕분에 수많은 나라에서 뒤늦게 '에버드림'의 영업이 중단되거나 FRS-b의 채취 기준이 상당히 까다로워졌다.

사실 프레쉬의 특허가 만료되었음에도 복제약물이 쉽게 쏟아지지 않은 것은 일찌기 노바스틱스도 밝혔듯이 FRS-b의 입수 및 관리가 상당히 어려운 부분도 있었고, 이미 그 시기에는 전세계적으로 프레쉬에 대한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빈부격차 늘리는 약", "가난뱅이를 잠으로 죽이는 약", "인류에게서 잠의 축복을 빼앗은 약" 등 수많은 수식어들이 프레쉬를 비난하는데 사용되었고, 당초부터 제기되었던 "인간을 도구로 이용하는 약물 생산"의 윤리 문제에 대해 새삼스러운 격렬한 논쟁이 유발되었다.

결국 EU의 다수 국가들과 캐나다를 중심으로 프레쉬의 시판 자체가 판매 중지절차 심의에 들어가는 등-해당 안건은 부결되었지만- 근 20년 만에 노바스틱스의 프레쉬는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사실 노바스틱스와 애버드림으로서는 꽤 억울하기도 했던 것이, 지난 20년 간 전 세계가 프레쉬를 열심히 애용해 놓고서는 갑작스레 별 황당한 이유로 그 판매 자체를 막으려는 것은 황당하기만 할 뿐이었다.

노바스틱스 측의 로비와 실제 프레쉬를 장기간 애용했던 찬성론자들의 의견이 간신히 프레쉬의 판매중지는 막아냈지만, 그 매출은 1/3 토막이 났다. 그럼에도 노바스틱스는 여전히 전 세계 시가총액 1위의 굳건한 제약회사였으며, 그들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들은 '생명연장의 꿈'을 가진 수많은 권력자들이었다.

또한 그들 덕분에 생계를 꾸려가고 있던 수많은 전 세계 서민, 빈민들 역시도 그들을 지지했으며, 사실 노바스틱스와 에버드림을 욕하는 서민들조차 입사할 수만 있으면 영혼을 팔아서라도 입사하고 싶은 회사가 바로 노바스틱스였다.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연봉과 네임밸류를 가진 회사, 시가총액 1위의 강력한 자금력, 어마어마한 후원자들과 근무 중 얼마든지 자유롭게 프레쉬를 복용할 수 있는 사풍, 사원들에 대한 사측의 엄청난 재투자 등 다양한 매력을 가진 회사였으니까.




한편, 에버드림에 오늘도 잠을 팔고 온 김박스는 새벽까지 게임을 달리며, 혀를 끌끌 차며 생각했다.

'이 시간에 잠을 한 시간 더 자면 만원이 더 생기고, 일찍일찍 남들처럼 밤 8시에 자서 아침 8시에 일어나면 막 4만원 5만원도 벌텐데, 그걸 게임으로 날리고 있네, 등신 같은 놈'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 아까 통장으로 들어온, 엄마가 잠을 팔아 보내준 자취비 60만원을 떠올렸다. 지난 주에 회사 건강검진 때 엄마 대장에서 용종이 다섯개나 발견됐다던데, 하는 생각과 함께. 물론 그 와중에도 게임을 끄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 끝 -

나는 너를 참 좋아했다 소설

갑작스럽게 찾아온 우울증과 작은 오해, 그리고 모처럼의 해외 전근 기회. 그 모든 것이 엮여 나는 너에게 이별을 고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이별 선언이었기에 너는 당황했고 슬퍼했으며 분노했고 이해했다.

"관두겠습니다"

하지만 서울을 떠나 도착한 런던은 내 마음의 불안을 치유하기는 커녕 오히려 공황장애를 유발했고,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된 나는 다시 한국행을 택했다. 그리고 그 즈음해서 알았다. 나는 너가 없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미안해"

두 달만의 재회. 물론 너는 나를 받아주었고 나는 눈물로 기뻐했다. 그렇지만 이별 선언의 후유증과 아직 완전히 아물지 못한 원인을 알 수 없는 마음의 우울증, 그리고 두 달 간의 공백 사이에 있었던 너의 다른 남자.

"그랬구나"

전부터 알고 지냈던 아는 오빠와의 일회성 관계, 그것도 이별로 반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술에 취해 벌어진 헤프닝이라고 했지만 조금은 데미지가 있었다. 결국 나 때문이었고, 내가 훌쩍 떠나지 않았더라면 결코 있을 수 없을 일이었건만 어쨌든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

"시간을 가져도 될까"
"…그냥, 만나지 말자"
"아냐, 미안"

나는 마음을 추스리기 위해 조금의 여유가 필요하다고 느꼈지만, 너는 두 달의 공백을 단숨에 메꾸고 싶어했다. 못 만난 만큼, 이별을 선언하고 이별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벌어진 마음의 틈을 급하게, 초조하게, 서둘러 메꾸고 싶어했지만 난 그런 네가 부담스러웠다. 그 과정에서 싸움이 잦아졌고, 이번에는 이별에 대한 선언이 너에게서 먼저 나왔다.

"미안해 정말로"

나는 서둘러 미안하다고 말했고, 그녀의 의견을 그저 곱게 따르기로 했다. 연애관계가 변한 순간이었다.

"그게 내 잘못이야?"

두 달 사이에 이미 조금은 변해버린 너와 나의 연애 권력관계. 절대 갑이었던 나는 어느새 을에 가까워져 있었고, 내가 죽으라면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면" 살라면 "널 위해서" 라던 너는 어느새, 죽으라면 "내가 왜?" 살라면 "내가 알아서 할게" 라는 대답을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조금 다른 네가 되어 있었다.

"미안하지만 그런 장난은 이제 안 했으면 좋겠어"
"음, 그래"

짖궂게 치던 나의 장난은 진지한 얼굴로 제지 되었고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너를 참 좋아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근본적인 면에서는 바뀐 것이 없었다. 너는 나를 존중했고 나는 네가 편했다. 가끔 너의 발끈함에 움찔하긴 했지만 여전히 나는 거침없었고 너는 조심스러웠다.

"선물 사왔어"
"오! 정말?!"

작은 꽃다발 하나에 좋아라 하는 네 모습에 나는 그저 흐뭇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울려퍼진 카톡, 하는 알람 소리. 순간 아차하는 표정의 너와 상대를 짐작해버린 나.

"흠"

그것은 강간도 화간도 아니었다. 아니 냉정히 말하자면 그녀는 너무나 지친 마음을 기대고 싶어 술 기운으로 누군가의 어깨를 빌렸을 뿐이며 그는 그것을 오해했을, 아니 잠시 이용했을 뿐. 콘돔은 사용했느냐는 나의 실언에 또 "아니"라고 솔직히 답한 너. 물어본 나도 잘못이지만 솔직히 답해준 너도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그걸 의식한 내가 다시 미웠다. 그러나 나보다도 더 오래된 너와 그 오빠의 기나긴 인연을 어찌 단숨에 끊어내랴 싶어 그저 묵묵히 입을 닫았고, 심지어 그 한번의 관계마저 마음 속에 묻고 가기로 했던 나였지만 이번에 다시 한번 물었다.

"아직도 연락해?"

긴 침묵 끝의 대답은 "어. 그냥, 안부만" 이었다. 그럼에도 언제나 잠금없이 하늘을 바라보던 너의 당당했던 휴대폰은 어느새부터인가 무음으로 엎어져 있었고 언젠가의 깊은 밤, 몰래 시도했던 너의 폰 탐방은 난데없는 비밀번호에 참담히 막혀버렸더랬지.

"그래"

어색했지만, '도대체 왜?' 혹은 '뭐라고 하는데?' 같은 질문을 억지로 두 번 세 번 마음 속으로 삼켰을 무렵, 꽃 한다발로 화기애해했던 우리의 분위기는 곧바로 실패한 소개팅 이상의 어색함을 자아내었다.




그 날이었는지, 그 다음 날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던 그 날의 섹스는 유난히 격렬했다. 그것은 섹스라기보다는 육상이었고 레슬링이었다. 아랫도리에서 쾌감을 넘어 꽤 심한 뻐근함을 느낄 무렵에야 우리는 섹스를 끝냈다. 사정은 없었다. 그녀는 정성을 들여 내 아랫도리를 머금었지만 역시나 사정은 없었다. 시계를 보니 한 시간이 넘었다.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변강쇠네"
"네 다음 옹녀"

그렇게 다시 근 석 달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요즘 우리가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그만큼 만남의 빈도 자체가 크게 줄어있었지만 나는 시간이 필요했고 너는 어색함을 힘들어 했기에 나쁘지 않은 딜이었다. 그럼에도 데이트다운 데이트가 없다는 사실은 조금 불안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다음 주에 우리 여행갈까"
"미안, 나 선희랑 잠깐 보기로 했는데"

나는 언제나 1순위였다. 친구따위, 가족따위 그 어떤 선약도 나와의 15분 전 약속보다 그 가치가 낮았다. 전에는.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확실하게 일주일 전, 최소 반나절 전에 약속을 잡지 않으면 나는 데이트를 할 수 없었다. 그동안 사실 엄청 피곤하고 싫었다는 그녀의 말에 그저 수긍할 따름이었다. 습관을 들이면 별 거 아니라는 그녀의 부연이 이어졌지만, 충동적인 만남은 어느새 확실히 불가능해졌다. 나의 야근도 늘었고.




"야, 너 휴대폰 까봐"
"응?"

아직도 사태 파악이 안 된 그녀.

"휴대폰 열어보라고! 그 새끼 뭐야. 너 아직도 그 새끼랑 뭐 있냐?"
"뭐?"

언젠가의 금요일 밤. 섹스를 위한 밤이었다. 적당히 근사한 저녁, 기분좋게 손잡고 본 드라마 시청, 적당한 피곤함이 잠에 대한 열망과 섹스에 대한 두근거림 사이에서 고민하게 만들던 그날 밤. 가벼운 터치는 어느새 농밀한 애무가 되어 있었고, 머리 맡의 서랍에서 콘돔을 찾던 도중 수십 개의 카톡 메세지가 무음 속에서 전달되며 뿌옇게 빛나던 너의 휴대폰.

"그거 뭐야"

나의 말에 당황하지만 곧 화난 표정으로 "아무 것도 아냐" 하고 폰을 뒤로 하는 너. 사실 그 시점에 '끝났구나' 생각했다.

"열어"
"싫어"
"그 휴대폰 열어"
"싫다고!"

나는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키고,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인내를 베풀었다.

"지금 무슨 내용인지 알면, 설령 니가 그 새끼랑 지금 양다리 걸치고 있는거라도 한번 용서하고 넘어갈게. 내놔 봐"
"뭐? 양다리?"

나의 그 단어는 아주 좋은 먹잇감이었다.

"양다리? 지금 너 나 의심하는거야?"

그녀는 매우 적극적으로 거부했다. 나는 참고 또 참다가 그만 욕을 뱉었다.

"씨발년아, 내놔보라고오!"

그녀는 "나가" 하고 선언했고 나는 그 자리에서 뺨을 날렸다.




"후우"

이것을 오해라고 해야 좋을까, 비극이라고 해야 좋을까. 나는 내 머리채를 쥐어잡는 그녀의 배를 때렸고, 배를 감싸쥐며 쓰러진 그녀는 호흡을 간신히 추스리며 "개새끼, 넌 끝이야" 하고 선언했다.

"상관없어 씨발년아"

나는 바닥에 떨어진 그녀의 휴대폰을 손에 쥐었고, 네 번의 시도 끝에 '내 전화번호 뒷자리로 된 비번'을 열 수 있었다.

'염병'

카톡 메세지를 열었다.

"보지 말라고 개새끼야!"

밤 12시가 넘은 시간, 조용조용하던 그녀는 평소답지 않게 큰 소리로 외쳤고, 나에게 달려들려고 했지만 나는 다시 손을 들었다. 주춤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이젠 정말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됐구나 하고 생각했다.


[ 뭔 소리야. 못 싸는거랑 매력은 전혀 상관없다;;; 진짜 매력없으면 싸지를 못하는게 아니라 발기 자체가 안되지ㅋㅋㅋㅋ ]

…스크롤을 한참을 올려봤다. 침대 옆에서 훌쩍훌쩍 울기 시작하는 여친과 허탈하게 그 오빠와의 대화를 훑어보는 나. 살을 섞은, 혹은 섞기 직전의 사이에서나 나눌 수 있는 강도 높은 대화들이 많았다. 이미 실제로 한번 섞기도 했고 말이다.

"후우"

조금은 웃기기까지 했다. 아마 즐거웠을지도 모른다. 아니 즐거웠겠지. 오랜 시간의 우정이 섹스라는 열매를 맺기도 했고, 그 이후에도 드문드문이지만 꽤 수위 깊은 이야기를 주고 받을 수 있는 그런 어떤 묘한 이성의 존재. 아마 즐거웠을 것이다.

"이 새끼랑 또 잤냐? 맛있디? 창녀 같은 년아"

그녀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었다. 나서는 문 뒤로 그녀의 엉엉대는 울음소리가 들렸지만 애써 무시했다. 내 눈에도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으니까.




"잠깐 이야기 좀 해" 라는 그녀의 말에 3일 만에 연락한 우리. 그녀의 집 앞 커피숍에서 만난 우리는 거의 30분 가까이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러다가 급기야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한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딱 한번 뿐이야. 그 날도 서로 실수였다는거 인정했고, 너랑 다시 만난 이후로는 잔 적 없어. 정말이야"

사실 알고 있었다. 감이라는게 있지 않는가. 여자의 촉보다 더 무서운 남자의 감. 단지 나를 두고 다른 남자와 뒤에서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는 것이 불쾌했을 뿐. 게다가 그래서야 언제든 다시 섹스 파트너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고 말이다.

"그 말을 믿는다고 쳐도, 그럼 이제 어쩔건데. 남친 말고 다른 새끼랑 그런 이야기나 쳐하고?"

그녀는 한참을 말이 없다가 휴대폰을 켜서 보여줬다. 비번을 걸려있지 않았다. 휴대폰 차단 전화, 카톡 차단 리스트에 그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

"…다시는 그런 일 없을거야. 미안해"

그녀의 말에 한참을 고민하다 얼굴을 쓸어내린 나는 말했다.

"밥은 먹었냐"

그렇게 우리는 다시 6개월을 행복하게 연애했다. 솔직한 마음으로, 그에게 조금 고맙다는 생각을 했다. 결정적 위기를 겪고 나자 우리는 오히려 처음 만난 그 순간처럼 열정적으로 불타올랐다. 아마 그 사건이 없었다면 조금은 루즈한 연애에 우리는 다시금 위기를 겪었을지도 몰랐으니까.

함께 대만, 일본, 캐나다를 여행했다. 2천 남짓 모아놓았던 돈도 방탕한 연애질에 700 가까이 써버렸을 정도였다. 그리고 캐나다에서 귀국하던 그 날, 여친은 쓰러졌다. 조금은 추하게.




"간질이요?"

뇌전증이라는 말에 바로 '간질'이라는 단어를 꺼낸 그녀. 그녀의 쌍둥이 남동생이 간질 환자라고 했더랬지. 의사가 "예, 뭐" 라고 대답하는 순간 여친의 눈에서 곧바로 굵은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는 자의 눈물'이었다.




"무슨 미친 개소리야! 그럼 너가 그렇게 나 두고 가버리면, 나는? 나는? 어? 그럼 반대로 내가 간질이면 너도 나 버릴거냐? 어?"

나의 말에 그녀는 곧바로 단언했다.

"어, 버려"

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곧 다시 "야, 아직 두 군데 밖에 안 가봤어. 그리고 간질이라는게 시발 뭐 무조건 다 좆같은 케이스만 있는게 아니라두만. 왜 혼자 오바야. 그냥 좀 가끔 남보다 불편할 수 있는거 뿐인데. 더한 병 갖고도 잘만 사는데 왜 오바야 오바는" 하고 그녀를 달랬다.

"너가 진짜 그 상황을 몇 번 겪다보면… 그리고 니 앞에서 그런 꼴 보이고 싶지도 않아"

나는 감정이 격해져 소리쳤다.

"야, 피차 시발 자지 보지 똥구멍 다 깐 사이에 부끄러울게 뭐 있는데? 어? 간질 와서 똥싸면? 닦아주고 씻겨주면 그만이고, 어? 시발, 어? 오줌 싸면, 오줌 싸면 닦아주면 그만이고, 쓰러지면, 어디 안 부러지게 쓰러지기만 하면 내가 일으켜주고, 다치면 병원 데리고 가면 그만인데, 뭐가, 어? 뭐가 힘들다고 그 유난이야. 아예 남들은 반 병신되서 침대에서 오줌 똥 수발 다 하면서도 살아. 혀 돌아가면 내가 다 빼줄건데, 평소에는 잘 발현도 안되는 뭐 그런 거 땜에 그렇게 오바질이냐고"

나도 울고 있었다. 그녀가 아프다는게 속상했다. 병을 갖고 있는게 속상했다. 수발을 들어야 할지도 몰라서가 아니라, 그녀가 앞으로 그 병에 떨면서 살아갈 것이 안타까워서 속상했다.

"아프지마… 아프지마, 병신아. 왜 아프고 지랄인데. 누가 아프래. 니 몸 니꺼 아니라고, 함부러 아프지 말랬잖아"

나도 그녀도 울고 있었다.

"너 간질이 어떤건 줄 알아? 평생을 폭탄 언제 터질지 몰라서, 본인도 떨고 가족도 떠는 병이야. 너어, 나중에 나 상처주지 말고 그냥 지금 헤어져. 그게 차라리 나아"
"좆까, 좆까라고"

그녀를 품에 안고, 평생토록… 아마 우리는 질리도록 싸우고 또 싸우겠지만 어쨌거나 평생토록 그녀를 지켜주겠노라고 다짐했다. 괴롭혀도 내가 괴롭히고, 아껴도 내가 아끼면서.





"그거 아냐?"

노을 지는 낚시터에서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뭐"

근 한 시간째 한 마리도 잡히지 않는 물고기에 그저 콧물만 한 사발을 들이키고 있던 나는 라면 물을 올렸다.

"처음에 내가 너 만났을 때, 이 이 기집애랑은 사귀면 영 구리겠다 생각한거"
"뭐?"

부창부수라고, 남편이 라면물을 올리자 집에서 썰어온 대파와 양파를 꺼내는 아내.

"아니 뭔 여자애 목소리가 뭐가 이렇게 크나, 싶은거야. 뭔 나이 50 먹은 아저씨도 아니고, 지하철에서 말소리가 왜 그리도 크던지. 너는 몰랐겠지만 사람들 다 쳐다보고 엄청 민망했다"
"헐"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듯 "그래서?" 하고 호기심을 보이는 그녀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는 뭐 그래서야. 그냥 그래서 소개팅 끝나면 집에 가서 라면이나 끓여 먹어야지, 했지. 딱 라면 끓이려니 그 생각이 나네"
"근데?"
"근데 그 마지막에, 너가 그때 갑자기 화장실 가고 싶다고 해서 영화관 엘리베이터 탔잖아. 기억나냐? 여튼 극장 손님들이 엘리베이터에 우르르 탔는데, 니가 뒤로 밀리면서 내 발을 밟고 있었거든"
"그랬어?"

이미 15년도 더 된 이야기인데 당황하며 미안해 하는 아내.

"그때 니가 킬힐 신고 있었거든? 것두 검지 발가락을 꾸욱 누르는데, 그때 나 가죽 존나 쫀쫀한 새 운동화 아니었으면 발가락 백퍼 부러졌다. 여튼 근데 그래서 내가 '저기, 발, 발' 하고 귀에다가 이렇게 말을 하는데 니가 못 알아듣는거야"

말이 없어지는 그녀.

"그래서 발을 강제로 슥 빼고 나서, 니가 무안할까봐 작게 '별로 안 아팠어요'하고 속삭이는데 또 못 알아듣는거 같더라고. 그때 문득 번개같이 울 엄마 생각이 나는거야. 그래서 반대편 귀쪽에 대고 '우리 넘 딱 붙었어요'하고 속삭이니까 그제서야 엄청 부끄러워하며 떨어지대"

말없이 라면을 꺼내는 아내.

"울 엄마도 한쪽 귀 안 들리잖아. 근데 문득 니가 그렇다는거 아니까… 그냥 갑자기… 코가 시큰하면서 막 한없이 널 보살펴주고 싶고 막 그러대. 니가 고백했을 때까지 나 계속 모른 척 했잖아. 근 7~8년을."

또 아내는 그 말에 콧물을 닦는다.

"여튼 그렇다고. 아프지 마라, 멍청아"

멍청이라는 말에 겨우 얼큰해진 코를 풀며 나에게 그 휴지를 던지는 아내.

"그럼 사랑이 아니라 동정으로 시작한거야?"

그 말에 난 웃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엘리베이터 안에서 니랑 나랑 딱 붙었을 때 니 엉덩이가 엄청나게 빵빵하게 힙업된 엉덩이라는거 알았을 때 사랑에 빠졌지"
"아 시발"
"물 끓는다, 라면 넣자"

그렇게 나와 그녀는 오늘도 틱탁대며 이 지랄 맞은 연애를 이어 나간다. 나는 너를 참 좋아했다. 그리고 참 사랑한다.

< 끝 >

인생 2회차 소설

나는 교통사고로 죽었다. 무리한 끼어들기에 의한 3중 추돌사고였고, 차가 반바퀴 돈 상황에서 2차 사고로 빚어진 측면추돌에 의해 나는 그대로 절명했다.

'시발…'

죽는 와중에도 승호 형 말 듣고 그냥 외제차 살 것을 괜히 쉐슬람들 말 쳐믿고 임팔라 샀더니 이 지랄이구나 하고 후회했다. 하기사 도로 위에 재규어도 다니고 아슬란도 다니고 바이퍼도 다니는데 초식동물 임팔라라니, 뒤지는 것도 당연하다 하고 아재개그를 치며 그렇게 나는 죽었다.

내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느낌은 꽤 짜릿한데, 사정하는 느낌하고 비슷하다. 어쨌거나 영체가 되어 그렇게 으깨진 내 대가리를 보며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노라니 저 머리서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그 으스스한 분위기에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저승사자'

그는 길게 말하지도 않고 '알지?'하는 느낌으로 "가자" 하고는 나를 저승으로 인도했다. 조금은 아쉬웠지만 뻗댄다고 뭐 달라질성 싶지 않아 나는 그를 따라나섰다.







인생 2회차







과연, 옛날 이야기의 그 수많은 구전처럼 삼도천을 지나 저승에 도착해 나는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 유명한 염라대왕을 직접 뵙게 되니 꽤 감개무량했는데, 그는 키가 한 20미터는 족히 되어보이는, 거리감을 일순간에 마비시키는 거인이었다. 터질 것 같은 근육과 무서운 얼굴이 꼭 무슨 어디 대형사찰 문 앞의 사천왕 뭐 그런 느낌이랄까.

"어디 보자꾸나"

재판 절차는 그리 길지 않았다. 하루에 죽는 대한민국 사망자 수, 즉, 일 평균 750회의 재판을 한다고 하는만큼 나같은 시시한 소시민의 재판에 무슨 시간이 그리 걸리겠는가. 이승의 재판도 그렇지만 말이다.

간단히 저승명부에 기록된 내 이름을 확인하고, 결과에 승복할 것을 맹세하고, 재판장 한 켠에 세워진 초대형 거울에 생전의 굵직굵직한 내 죄들을 비쳐주는데 보고 있노라니 꽤나 부끄러웠다. 미안한 일도 참 많고.

"여기 비친 네 죄들을 인정하느냐?"
"예"

이쯤해선 빼도 박도 못하게 지옥행 확정이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제서야 조금 몸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는데, 염라대왕은 의외로 잠시 고민을 하더니 드디어 입을 열었다.

"죄인 김박스에게 윤회형을 선고한다. 다시 한번 윤회의 고리에 올라 사람으로서 업의 시험을 받는다. 당 판결에 대한 이의는 3일 내로 항소를 통해 제기할 수 있다. 이상!"

빼박 지옥행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시 사람으로서 삶을 살게 되는 윤회형이라는 말에 나는 엄청 기쁜 얼굴로 만세를 불렀다. 내 뒤에 서있던 다른 망자들도 조금 부러워 하는 눈치였지만 정작 나를 다시 삼도천으로 인도하는 저승사자는 혀를 찼다.

"도대체 요새 인간들은 죄를 얼마나 짓고 다니길래 너 정도 쓰레기가 다시 윤회형을 받냐? 백퍼 지옥행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말에 "그러게요" 하고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한 나였지만 그는 별로 밝은 얼굴이 아니었다.

"그냥 지옥 가서 조금 뺑이 치다 죄값만 다 갚으면 극락가서 선녀들이랑 질펀히 즐기며 편히 살 것을, 2회차 인생 살면서 업만 더 쌓지. 쯧쯧"

그 말에 그럼 윤회형은 별로 좋은게 아니냐니까 저승사자는 "윤회도 윤회 나름이지" 하고 썰을 푸는데. 벌레로 태어나면 뺑이는 치지만 금방 죽기 때문에 업도 덜 쌓고 벌레 자체가 일종의 형벌형이기 때문에 이승에서 지난 삶에 대한 업도 덜고 꽤 이득보는 윤회라고 했다. 초식동물도 마찬가지. 그러나 육식동물로 태어나면 살육의 업도 상당히 많이 쌓게 되어 별로 좋은게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최악은 역시…"

그것은 '인간'으로의 윤회로, 살면서 온갖 죄라는 죄는 다 지을 수 밖에 없는 지랄맞은 종인데다 수명도 보통 50년 이상은 보장되는 편이라 업을 산더미처럼 쌓아온다고 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언젠가부터는 어디서 무슨 일들을 벌이는건지 '원죄'라는 무거운 죄까지 알아서들 짊어지고 온다고 혀를 찼다.

"그럼 윤회형이 절대 좋은게 아니네요? 그럼 나 좆된건가요?"

그 말에는 또 "그건 아니고…" 하고 말을 흐리는 저승사자.





"아니 윤회를 백 번을 하면 뭘하냐고. 전생의 기억을 다 잊고 새 출발하는데. 안 그래?"

저승의 시스템에 대해 한참을 설명하던 저승사자는 울분에 차서 말했다. 그리고 그 말에 나도 무릎을 치며 공감했다.

"그죠? 나도 윤회라는 시스템이 그게 이상했다니까? 아니 뭐 기억이 있어야 반성하고 조심하면서 다음 생을 사는거지, 다 까먹으면 또 당연히 뻘짓하죠"
"그래, 그래놓고 뻘짓했다고 지옥으로 보내는 이 시스템이 나는 영 마음에 안 들어. 내 일이지만 진짜 마음에 안 들어"
"어디 자기 일 좋아서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윤회의 고리로 시험하는 이 짓들이 마음에 안 든다고"

그러더니 뜬금없이 저승사자는 "기분이다" 하면서 강가에 다가가자 조언을 했다.

"삼도천 다시 건너가서, 그 강가에서 삼신할매가 목 마르지? 하면서 곡차 주면 그거 절대 받아마시지 말아. 그거 마시면 기억 싹 다 날아가고 바보 된다. 그냥 다시 갓난쟁이로 태어나는거야."
"음. 근데 그거 안 마시면 뭐 부작용은 없나요?"
"있어"
"예?"
"니가 지금 기억 다 갖고 다시 태어나면 그게 애새끼겠어, 아니면 애늙은이겠어. 절대 뭘 좀 아는 티 많이 내지 마라. 그러다 다른 저승사자나 삼신할매한테 걸리면 곧바로 너 다시 저승 끌려간다"
"헐"
"또 한가지 알려줄까? 짐승으로 윤회하면 그거 안 마셔. 그래서 태어나자마자 알아서 대소변 가리고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다 알아서 살 수 있는거야. 본능은 얼어죽을"
"헐"

무서운 외모와는 달리 의외로 말이 많은 저승사자는 별 이야기를 다 했다.

"저승사자는 원귀와 다를 바 없어. 이승도 아니고 극락도 아니고 지옥도 아닌 이 구천을 끝도 없이 맴도는거지. 지랄맞은 일이야."
"살아있을 때는 무슨 일을 했습니까"

그러자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화랑이었지"

그 말을 듣자 나는 그제서야 모든 의문이 풀렸다. 왜 이 저승사자가 이토록 나에게 친근한 것이며, 기억을 가진 채로 환생할 수 있는 묘책을 알려주는지, 어째서 나 역시 이 저승사자가 그리 싫지 않은지. …예전에 듣기로 화랑들이 남색을 그리 밝혔다지. 내가 묘하게 싱글벙글 미소를 보이자, 그 역시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넌 내 생전의 동무와 참으로 많이 닮았다"



이후 한참을 말없이 걷던 나는 문득 떠오른 의문에 물었다.

"갑자기 궁금한데, 그럼 다시 환생하면 2017년에 다시 태어나는건가요, 아니면 나 태어난 해에 다시 태어나는건가요?"
"곡차를 마시면 2017년에 태어나고, 안 마시면 원래 태어난 해에 태어나. 저승명부에 갱신이 안 되니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거지. 그러니까 걸리면 다시 저승 가는거고"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또 물었다.

"기억 안 지우고 인생 두 번 산 사람 중에 진짜 완전 잘 된 케이스 있어요?"

저승사자는 말없이 한참을 있다가 입을 열었다.

"있지."




우리는 이윽고 삼도천 강변에 도착했다. 말없이 나룻배에 올라타 뿌연 몽연 속을 가르던 중, 저승사자가 아까의 질문에 대해 답했다.

"조선시대 사람인데, 배를 타고 이렇게 너처럼 다시 이승으로 돌아가는 길에 눈물을 줄줄 흘리는거야. 그래서 내가 무엇이 그리도 구슬프신가, 하고 물었더니 도저히 말로 다 못할 너무나 원통하고 괴로운 일이 있어 그렇소, 하고 입을 다무는데, 조선 시대 남자가 눈물을 흘리는건 보통 일이 아닌거거든. 그래서 뭔가 어마어마한 사연이 있겠구나 싶어서 나도 더이상 안 캐묻고 그냥 '아무리 힘들어도 마른 목으로 돌아가시오. 지금의 눈물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외다' 하니까 알아듣고 삼신할매 곡차를 슥 흘려버리대."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내가 호기심에 묻자 저승사자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렇게 이승 돌아가서 그 분한 일 없도록 평생 자기 할 일, 큰 일을 다 이루고 죽었는데, 죽은 다음에 나라에서 그 사람한테 '충무공' 시호를 내려주더만."
"헐?! 정말로?"
"내 최고 치적이지. 덕분에 결과적으로 내가 역천의 죄를 지었음에도 처벌 안 받았잖아"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훑던 저승사자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요즘 놈들은 기껏 보내봐야 주식이나 하고, 인생 두 번 살면서 지 개인 영달을 위해서만 살더라고. 자잘한 놈들"

그 말에 나도 슬몃 웃으면서 "현대인들 중에 잘된 거물들은 없어요?" 하고 물었다. 저승사자는 고개를 저었다.

"있긴 있지. 정치인 중에 있었어. 대단한 사람이었는데, 말년이 영 안 좋았지"

그런 대화를 나누던 중 어느새 배가 강나루에 도착했고, 그는 나를 삼신할매에게 인도했다. 할매는 내 얼굴을 보며 "어이구 이 놈아, 대가리가 깨져 죽었나. 다음 생은 제발 조심히 살어라" 하고는 등 두드리고 차 한 잔을 내미는데, 할매도 몇 번을 당해서인지 내가 곡차를 마시는 모습을 빤히 지켜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한참을 당황하다가 저승사자의 눈빛을 살피노라니, 저승사자마저 혀를 차며 '이건 안되겠다' 하며 고개를 젓는 눈치 아닌가.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나는 이판사판으로 몽환차를 마시는 척 입에 머금었다.

"음"

그리고 그 모습에 내가 곡차를 마신 줄 알고 흐뭇하게 삼신할매가 배넷저고리를 챙기며 내 엉덩이를 두드리고 그 자리에 몽고반점이 생기는 그 순간, 나는 그 몽환차를 등을 돌린 후 얼른 뱉어버렸다.

"크하하하하!"

저승사자는 적절한 타이밍에 크게 웃었고, 그렇게 그가 할매의 시선을 끌어준 덕분으로 난 기억을 완전히 잃지 않고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비록 뱉기 직전 한 모금 넘어간 덕분에 그 아련한 저승의 기억을 아주 뒤늦게, 오늘에서야 떠올렸지만 말이다.

< 끝 >

밤나비 소설

처음에는 아무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저 가벼운 접촉사고, 아니 그냥 사고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학생, 괜찮아?"
"예예"
"아니 저기, 아이, 어이!"

전날 연습에 늦은 것도 모자라 시합 날에 또 늦잠을 잤기에, 감독님의 구타가 두려웠다. 그냥 가볍게 차 범퍼에 가볍게 무릎이 닿은 정도의 사고였기에 그냥 그렇게 차를 보내고 정신없이 학교까지 달렸다.

'어어?'

학교에 거의 다 왔을 무렵, 뒤늦게 시큰한 통증이 왔다. 아차 싶었지만 별 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미 늦었기에, 몸도 제대로 못 푼 상태로 시합에 나갔다. 풀 타임으로 경기를 다 뛰고, 졌다는 이유로 시합이 끝나고 기합을 또 받았다.

그리고 그날 밤부터 나는 무릎 통증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일상 생활에는 큰 지장이 없는 수준이었지만, 경기를 뛰었다가는 여지없이 1쿼터만 끝나도 무릎을 감싸쥐고 이를 악물어야 했다. 처음에 병원에선 가볍게 인대가 놀란 정도라고 했지만 한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통증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이어지는 훈련과 시합 덕분에 나는 진통제를 달고 살았다. 온갖 마사지며 약물이며 안 써본 방법이 없지만 효험이 없었다. 신경쪽 문제인 것 같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절대 무리하면 안됩니다"

이미 병원에서는 통증 완화를 위해서 농구를 그만두라고 조언한 상태였다. 이대로 계속 무리했다가는 일상 생활에도 지장이 올 수 있다는 의사의 경고는 무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풀타임 경기가 어려운 수준으로 통증이 악화되었고, 1학년 태경이의 실력이 성장함에 따라서 나는 점차 벤치에 앉는 시간이 늘어났다. 경기 다음 날이면 하루에 진통제 거의 한 통을 다 먹으며 생활하던 내 모습에 엄마도 관둘 것을 권했다.

결국 태경에게 밀려 포인트 가드 포지션을 억지로 뛰며, 그것도 후보로 뛰던 날이 많던 나는 전국체전 지역예선 경기에서 1분도 뛰지 못한 날을 기점으로 농구를 관두기로 했다. 그렇게 학창 시절의 모든 것을 어이없게 잃은 나는 엇나가기 시작했다. 학교도 잘 나가지 않았고, 농구를 관둔 나가리 선배들과 어울리며 학교에 잘 나가지 않았다. '그래도 최소한' 하는 생각에 간신히 고등학교 졸업은 했지만 더이상 세상에는 내가 할만한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존재하지 않았다. 시간 버리는게 아까워 군대부터 다녀왔다.

"정신차리고 이제 일해야지"

군대 전역하고 나서고 한 3개월을 방구석에서 잠만 자니 엄마가 한 소리였다. 일자리를 안 알아본 것은 아니지만, 역시나 이런 후진 동네에 제대로 된 일자리가 있을 리 없었다. 그때 문득 생각난 것이 성기형이었다. 휴가 나올 때마다 어울린 농구 관둔 친구와 선배들. 그 중에서 서울에서 자리 잡았다는 그 형. 제네시스를 타고 왔던 성기 형.

"형, 잘 지내?"
"어어 우리 효원이 이 쉐리, 간만이네. 형은 잘 지내지. 왠일이야? 군대는 전역했지?"
"예, 뭐. 그보다 사실은 그냥 일 좀 할까해서"

술자리에서 형이 야부리 턴, 한달에 몇 백씩 번다던 그 일.

"어어? 왜, 너도 서울 올라오려고?"

조금은 당황스러워 하는 목소리에 실망하며 적당히 얼버무리며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형은 의외로 유쾌하게 대답했다.

"형 자취방 좁아지니까 짐 많이 가져오진 마라"







밤나비







버스를 타고 올라와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전철로 갈아타고 7호선 논현역에서 내린 나. 큰 더플백을 어깨에 메고 형이 말해준대로 논현 초등학교 근처로 향했다.

'와'

시장 골목을 지나며 '서울에도 이런 동네가 있네' 싶어 조금은 반갑기도 했다. 하지만 곧이어 한산한 동네를 바쁘게 걷는 퇴근길의 정장 입은 직장인들과 골목길을 누비는 외제차들, 미용실에 가득한 화려한 화장의 누나들을 보자 가벼운 한숨이 나왔다. 누가 촌놈 아니랄까봐.

"형, 나 거의 다 왔는데"

전화를 하자, 성기형은 "어, 벌써 왔냐? 미안 나 지금 강남역 쪽에 있는데. 그러면, 그… 한신포차 앞에서 기다려라. 한 10분 있다 보자" 하고 뚝 끊었다. 거기가 어딘가 싶어 고개를 두리번 거리다 결국 지나던 아저씨에게 물어 그쪽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있던 수많은 미용실과 그 안의 예쁜 여자들. 벌써부터 그것만으로도 작은 위안이 됐다.




"그 씨입쌔끼가 원래 그래. 전술 좆도 없고 무식하게 애들 체력으로 조지는거만 할 줄 아는 새끼. 영석이 허리 나갔을 때도 죽어라 돌렸잖아. 영석이 그 새끼도 결국 허리 씨발 개좆돼고, 우리 선배 중에 민우 선배도 씨발, 하이튼 그 새끼가 잡아먹은 새끼만 몇 명인지 몰라. 나도 그 새끼 땜에 다리 풀려서 계단에서 굴러서 여기 눈 밑에 이거, 이거 보이냐? 이거 그 때 상처잖아"

아디다스 삼선 츄리닝 바지에 스카쟝을 입고 나타난 성기형과, 청자켓에 검은 스키니 바지를 입고 나타난 그의 친구 원민. 성기형은 같이 운동했던 사이고, 원민이 형도 성기형이 바이크 탈 때 같이 다닌 모습을 몇 번 본 적 있어서 얼굴 정도는 아는 사이다. 농구부 출신의 우리 만큼이나 그 역시 키가 훤칠한 편이다. 새하얀 얼굴에 꼭 여자같이 예쁜 꽃미남 인상이라 성기형이랑 다니면 둘이 사귀는거 아니냐고 누나들이 놀리고 했었는데. 여전히 미남이긴 하다.

"그래서, 신세 좀 지고 싶다?"
"네"
"안될거 없지. 새키, 그래도 어떻게 내 생각을 다 했냐? 내가 니랑 뛸 때 존나 이뻐하긴 했다만. 아, 효원이 이 새끼 패스가 존나 예술이거든. 이 새끼랑 농구하면 존나 재밌어. 아 그리고 효원아, 원민이도 농구 좀 해. 중학교 때까지 농구한 애야 이 새끼도. 여자애 임신시키고 학교 짤렸지만. 레전드 아니냐? 하여튼 잘 왔어"

한참을 이야기하고, 술도 두 병 깠을 때 형은 담배를 피우며 대견해했다. 솔직히 나는 건달 일이라도 배울 생각으로 왔다. 농구만 하던 새끼가 농구 못하게 되고 배운 것도 없으니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는가. 자세히는 말 안 해줬지만, 화류계 일이라고 했으니 기도 쯤 되겠지 싶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뭐? 아…이 새끼. 건달 짓 해서 빨간 줄 가고 싶냐? 븅신도 아니고. 그런 짜치는 일을 왜 해. 하여간 촌놈 아니랄까봐"

성기형은 그저 '건달 짓'을 '빨간 줄 가는 일'이라며 욕할 뿐, 정확히 무슨 일 하는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그러자 원민이 형이 소주를 깔끔하게 넘기더니 말했다.

"선수. 호빠 선수 일이야. 너 할 수 있겠어?"
"호빠? 호스트바요?"

글쎄. 호빠라는 말을 듣는 순간 좆같다고 생각했다. 여자들 밑구녕 닦아주는 일이나 하면서 그 허세를 떨었나 싶어 절로 한숨이 나왔다. 나는 대답 대신 한잔을 더 들이켰고, 그 어색한 공백에 성기형이 말했다.

"더러운 일 하러 올라왔으면, 니도 그냥 좆걸레해. 주먹질 해서 호적 걸레 만드는 것보단 자지 걸레 만드는게 낫지. 여자랑 노닥대고, 따먹고 돈도 벌고. 건달은 씨발, 뭔 영화 찍냐? 기집애들 비유만 좀 맞춰주면 돈이 다발로 나오는데 뭐하러 병신같이 돼지어깨들 뒤닦아주고 다니냐?"




술자리를 마친건 새벽 1시를 살짝 넘긴 시간이었다. 출근해야 되는거 아니냐고 묻자 둘은 웃으면서 "야이 새끼야" 하고 손을 들었다. 간만에 고향 동생 왔는데 오늘도 일해야 되냐며 그냥 쳐놀기나 하라는 그들의 말에 그저 정신없이 놀았다. 술에, 노래방에, 생전 처음으로 룸까지 다녀왔다.

"아 간만에 씨발, 접대하다 접대 받으니 존나 좋네. 아 피곤하다. 원민아, 어떠냐, 이 새끼 잘할거 같지 않냐?"

집 앞에서 들어가기 전, 함께 셋이 오피스텔 앞 화단에 기대앉아 담배를 피우던 그 순간, 원민이 형은 성기 형의 말에 픽 웃었다.

"사이즈 나오잖아. 말 수 없고, 순진하고, 몸 좋고, 착하게 생겼고. 언니들이 환장하겠지. 좋아. 좀만 꾸미면."

그러나 담배를 짓이겨 끄며 어깨를 으쓱했다.

"근데 본인이 한다고 해야지. 그리고 승재 형이 하라고 해야 하는거지, 뭐 우리가 꽂아줄 수 있는 끕이나 되냐. 여튼 나 간다"
"어 그래, 잘 가라"
"들어가요"

그리고는 성기 형 오피스텔 주차장에 세워놓은 베스파를 타고 자기 집으로 향했다. 원민이 형 집은 역삼동이라고 했다. 성기형은 그제서야 얼큰하게 취한 술이 좀 깨는지 "드가자" 하며 나를 이끌었다.




"형 집 좋다"
"그럼"

상상 이상이었다. 하얀 대리석 바닥에 천장에는 무슨 레일 달린 조명에 50인치 TV에… 새하얀 방이 너무 좋았다. 원룸인가 했더니 넓직한 방도 두 개나 되고, 정말 좋았다. 이런게 고급 오피스텔이겠지. 바닥에 옷가지들이 어지럽게 널부러지긴 했지만, 그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형 이런 데는 막 몇 억씩 하지?"

그 말에 성기형은 웃었다.

"미친 무슨 부동산 하냐? 그냥 월세지 뭔 몇 억이야. 그 돈 있으면 장사하지"
"그럼 이런데 월세는 얼마나 해?"
"이백"
"이백?!"

놀라는 나에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증금 이백에 월세 이백"

그러나 나는 월세보다 보증금에 더 놀랐다. 우리 구미 집 보증금도 2천인데.

"서울인데 보증금이 왤케 싸?"
"이런 데는 다 씨발 우리 같은 새끼들이 대부분이야. 술집 다니는 년들 아니면 밤일 하는 새끼들. 평범한 직장 다니는 새끼들이 월세100만원 200만원 내면서 살 수 있냐. 태반이 그냥 우리 같은 애들이 사는거지. 금방 금방 가게 옮기고 하니까 단기로 살 수 있게 보증금 싸고 월세 비싸고, 뭐 그런거야. 나도 여기로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어. 한 두 달 됐나?"
"장난 아니네"
"아 피곤하다. 야, 거기 옷 방인데, 거기도 침대 있어. 거기서 자. 나 먼저 씻는다. 그리고 잘 생각해보고 결정해라. 앗싸리 안 할거면 빨리 말해주고. 그럼 걍 며칠 놀다 내려가고"




성기 형은 확실히 함께 농구할 때 죽이 잘 맞기는 했다. 그래도 그렇게까지 친한 사이는 아니었는데 이렇게까지 잘 해주다니. 어쩌면 그냥 나랑 같이 일하면 사이즈 좀 나오겠다 생각해서 끌어들이려고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잘해준건 잘해준거다. 고마운 사람이다. 하기사 옛날에 성기형 엄마 쓰러졌을 때, 우리 꼰대가 차에 태워서 병원 안 갔으면 그때 돌아가셨을거라고 했으니까.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 덕분에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후 느즈하게 일어난 우리는 집 앞 뼈해장국 집에서 속을 풀고, 신논현역과 강남역을 지나 원민이 형을 태워 신사동 쪽으로 향했다.

"딱 씨발 나도 2억. 아니 3억만 채워서 내려간다. 학교 앞에 노래방 차려야지. 에이끕 언니들 존나 돌리면서. 돈 딱 세게 맞춰주고, 여고 애들 졸업하면 바로 울 가게로 취업시키고. 개멋진 사장님 해야지. 원민이 니는?"
"나는 뭐, 그냥 돈 좀 있는 누나 하나 꼬셔서 씨 좀 뿌려주고 서방으로 살아야지. 평생 바람 피우면서"
"아 나 이 새끼는 진짜. 뭐가 이렇게 드럽냐. 효원이는?"
"난 그냥… 모르겠는데"

그러자 성기형이 룸미러로 힐끔 뒷좌석의 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효원아, 서울에서 자리잡고 일하던, 구미 다시 내려가든, 이거 하나는 확실히 해. 싸나이는 딱 인생에 목표가 있어야 되는거야. 누굴 따먹겠다, 아니면 뭐 사업을 하겠다, 아니면 뭐 돈을 모으겠다던간에. 딱 목표가 있어야 노력도 하는거고. 아니면 인생 바로 좆꼬인다. 이 새끼처럼"
"야"



성기 형이 나를 인도한 곳은 신사동의 한 미용실이었다. 촌스러운 머리 좀 어떻게 하라고. 예전에 일하다 망한 가게 앞의 미용실이라고 했는데, 형도 간만에 온다고 했다. '그런데 굳이 나를 왜 데려왔나' 했더니, 역시나 자기도 스타일링 받으며 여기의 한 미용사 여자애랑 노닥대기 시작했다. 애교를 엄청 부리는 것을 보니 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나보다. 어쨌든 내 머리를 담당하는 미용사, 아니 '헤어 스타일리스트' 누나도 엄청 예뻤다.

"어때요? 머리 길이 마음에 드세요?"
"네"
"그리고 머리는 내일 하루동안 감으시면 안되요"

다가온 성기형과 원민이 형은 "아 사람 됐네" 하며 박수를 쳤다. 조금 쑥쓰러웠지만, 솔직히 감탄했다. 머리 스타일 변화만으로도 사람이 이렇게 바뀌나 싶어서.

가게를 나와 가로수길 쪽으로 걷노라니, 성기 형이 문득 말했다.

"봐, 이 새끼야. 지나가는 기집애들 다 질질 싸잖아. 우리는 상품성이 있다고"
"야 다 들려, 볼륨 조절해라"

형에게 빌려입은 반듯한 블랙 수트에 팔찌와 시계 같은 악세사리들. 원민이 형은 브라운 수트, 성기형은 무슨 검도복 마냥 엄청 통 넓은 바지의 블랙 수트…평일 대낮에 쭉 빼입은, 헤어 스타일링 받고 나온 키 180 중반대의 남자 셋. 

'그럴싸하네'

지나가던 카페 창에 비친 우리 셋. 나는 적당히 평범하고, 성기 형은 전형적인… 나쁜 남자? 여자애들이 좋아하는 그런 인상이고, 원민이 형이야 꽃미남이니까. 지나가던 여자들이 모두 힐끔 거리고, 뒤에서 수근거리며 좋아라 하는 것이 느껴졌다. 특히 성기형은 고개를 휙 돌려 능글맞은 미소를 보내기까지 하니 어린 애들은 꺄꺄 대며 좋아하기도. 원래도 좀 장난기가 많긴 했지만, 이 정도로 능글 맞진 않았는데. 형도 제법 변했구나 싶었다.

"니가 어리버리하게 귀염 떨고, 원민이가 분위기 만들고, 나랑 승재 형이랑 조지면 딱 바로 게임 셋이지. 딱 박스 각 제대로 나오잖아. 경원이 창희 이딴 마바리들은 알아서 하라고 하고, 에이스들끼리 역할 분담 딱딱 팀으로 가는거지"

어쨌든 농구부 활동할 때도 여자들 시선이야 종종 받았지만, 서울 강남에서 제대로 차려입고 예쁜 강남 여자들에게 이런 시선을 받는 것은 정말 뿌듯한 일이었다. 물론 머릿 속 한 켠에서 '그래봤자' 하는 브레이크가 또 걸렸지만 굳이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슬슬 저녁이 되자 논현역으로 돌아온 우리. 나는 내심 오늘도 '술인가' 생각했지만 의외로 형이 나에게 카드를 주며 말했다.

"미안한데, 형들 오늘 일 생겨가지고 니는 그냥 혼자 좀 있어야겠다. 이걸로 밥 사먹어. 아님 뭐 어디 클럽이라도 가서 놀던지. 비싼거 먹어도 돼. 그렇다고 씨발 어디 뭐 지르면 죽인다. 카드 잃어버리면 뭐, 알지?"

손날로 목을 긋던 그는 원민이 형의 등을 툭치며 "가자, 아 근데 씨발 우리가 뭔 보도까지 뛰냐, 승재 그 새끼도 진짜 쌈마이 하고는 염병…" 하고는 차에 올라탔다.

"형 고마워"

뒤늦게 인사를 한 나는 그저 형의 오피스텔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손목에 찬 서브마리너의 무게에 새삼 형들이 돈을 잘 벌긴 버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잘 놀고, 멋있는 형들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만.

조금 생각이 복잡해졌다. 어쩌면 다행인지도 몰랐다. 진짜 조폭 일 하라고 했으면 내가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하고. 그러나 사실 여자애들이랑 뭐 그런 일을 한다는건, 솔직히 상상도 가지 않았다. 내 주제에 무슨. 그러다 형 오피스텔 근처의 작은 오뎅바가 보였다. 우동이 먹고 싶었다.




퇴근 시간대라서 그런지 가게 안에는 손님이 많았다. 그나마 비어있는 구석 쪽의 테이블에 앉은 나는 우동에 닭꼬치 두 개를 시켰다. 잠시 후 우동이 나왔고, 고춧가루를 뿌린 바로 그 순간에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한 여자애가 가게 안에 들어섰다.

'아…'

몸매가 확 드러나는 와인색 원피스를 입은 웨이브 진 밤색 머리의 그녀는 가게 안을 잠깐 살피더니 유일한 빈자리였던 내 옆 테이블에 앉았다. 내쪽으로 다가오는 내내 눈을 떼기 힘든 그녀의 외모에 진심 감탄했지만 너무 노골적으로 볼 수도 없었기에 나는 얼른 고개를 돌리고 내 밥그릇으로 시선을 거두었다.

'어'

하지만 수저통이 이쪽에 없었다. 나는 힐끔 옆자리를 보았고, 그 순간 방금 자리에 앉은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사실 나 뿐이 아니었다. 그녀가 들어서는 순간 가게 남자들이 다 대놓고 쳐다봤으니까. 연예인급 미인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뒤늦게 "저기, 죄송한데 수저 좀…" 하고 손가락으로 그녀 테이블 위의 수저통을 가리켰다.

그러자 여자는 "아, 네" 하고 수저통에서 숟가락과 젓가락을 한벌 챙겨 주었다. 그냥 수저통을 통째로 줘도 되는데 그거 챙겨주는게 또 묘하게 이뻐보였다.

"감사합니다"

수저를 전달받은 나는 다시 우동과 꼬치만 눈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먹고 있었는데, 그때 이번에 그녀가 내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예?"

은근 그녀의 동태에 촉을 세우고 있던 나는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고, 여자는 뭐가 그리 웃긴지 입을 가리며 웃다가 "아뇨 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시치미 통 좀…" 하고 내 테이블 위의 고춧가루를 가리켰다. 나도 그제서야 픽 웃고 고춧가루 통을 건내주었다. 일본어가 쓰여 있어서 그냥 일본 고추가루인가보다, 했더니 이거 이름이 '시치미'인가보다. 그리고 그 순간 테이블 아래로 힐끔 그녀의 새하얀 허벅지에 눈이 갔다. 엄청나다고 생각했다.

"고마워요"

우아하면서도 뭔가 섹시한 그녀의 말에 새삼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눈을 돌려 우동에 눈을 돌렸다. 여자도 나온 우동을 먹고, 은근히 옆으로 슬쩍 눈길을 주니 얼굴 옆라인도 이뻤다. 저런 여자는 누가 데리고 잘까.




"저기요"

아마 평범한 며칠 전의 나였다면 아마 저런 도도한 매력의 여자한테는 말도 못 붙였을거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성기 형이 빌려준 비싼 정장에 비싼 시계에, 파마까지 하고 관리 받은 나는, 내가 봐도 조금은 자신이 있었다. 은근히 먹는 속도를 조절하며 그녀가 다 먹고 일어서길 기다렸다가 따라나섰다.

"네?"

부르는 목소리에 여자가 가볍게 고개를 돌려 돌아보는데, 하….

"저기, 그쪽이 입…마음에 들어서 그런데 잠깐 커피라도 안 하실래요?"

모르겠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이런거. 이런 것도 처음이고. 내 말에 여자는 잠깐 픽, 하고 웃더니 "괜찮아요" 하고 고개를 저었다. 아, 역시 조금, 역시 쉽지 않지. 나는 민망함에 나도 모르게 머리를 긁적이며 "남친 있으신가요" 하고 한번 더 물었다. 여자는 이번에도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흐, 쪽팔리네"

또각또각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에 멋적음을 느끼며 나는 형의 오피스텔로 향했다. 할 일도 없는데 방 청소라도 해둘 요량이었다.





"후우"

청소를 다 끝내고 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이게 뭐지, 싶었다. 아직도 민망한 기분이 조금 남았지만, 그보다는 앞날에 대한 막막함이 더 컸다.

이대로 구미 내려가면 시팔 어디 공장 들어가서 박스나 나르고 조립이나 하겠지. 빡센 일 하면 무릎도 언제 다시 고장날지 모르고. 대학교를 가자니 돈도 없고 공부도 뭐 내 갈 길 아니고. 기술은 누가 공짜로 가르쳐주나.

'그래도 남자가 가오가 있지, 여자들 비유나 맞춰주면서 하…' 하는 생각이 지나갈 무렵. 좀 전의 그 여자가 생각났다. 어차피 연애질도 여자 비유 맞추는건 똑같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고 그 양복에 그 시계에 그 팔찌에 그 구두. 공장 다니면 어디 해보기나 할 일이 있을까. 차도 끽해야 트럭이나 몰겠지. 갑자기 담배가 겁나게 땡겼다. 하지만 이미 돗대는 아까 피운지 오래고, 나가기 귀찮았다.

문득 고생하는 엄마 생각이 났다. 한달 150 벌자고 아침 8시에 출근해서 밤 9시까지 공장 나가는 불쌍한 아줌마. 손발 퉁퉁 부어가지고는 야근 1시간 추가되면 그래도 얼마라도 더 번다고 좋아하고. 남편이라고는 딴 년이랑 살림 차려 나가서는 평생 돌아오지를 않고. 그나마 아들 새끼 하나 있는거 뒷바라지 했더니 무릎 병신 되서 이제 운동으로 돈 벌 일은 영영 없고. 그냥 고생 문이 훤하게 열려서, 죽는 날까지 고생만 하다 가실게 분명한 불쌍한 우리 엄마. 조온나게 불쌍한 우리 엄마.

"씨발…"

뭐 없다 싶었다. 나도 성기 형처럼 목돈 조금 만들어서, 엄마 데리고 청과물 가게라도 열어서 둘이, 아니 엄마는 쉬라고 하고 나 혼자 열심히 해서, 그래서….

'그게 될 리가 있나'

이렇게 굴러다니다가, 그래도 잠깐 멋지게 살다가, 그러다 말겠지. 그러나 '그래도 뭐 어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어차피 이러다 말 인생인데. 담배를 사러 가려고 몸을 일으켰다.




'그랬구나, 존나 뭐 없네'

편의점에서 담배를 사 나오는 길, 우연찮게도 아까의 그 여자가 다른 여자 하나와 함께 깔깔대며 편의점 골목 안 룸 술집으로 들어가는걸 봤다.

'결국 다 그렇고 그런건가'

그래, 운동 잘하는 놈이 땀 팔아 먹고 살고, 공부 잘하는 놈이 대가리 팔아 먹고 살고, 몸 좋은 놈이 좆 팔아서 돈 버는게 뭐 어때서. 그리고 뭐 다 파는 것도 아니라면서. 나는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고는 구름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는 밤하늘의 달을 쳐다봤다.

"뭐 없네 진짜. 서울도 별로."


< 끝 >






"그때 그 새끼가 그랬단 말이야. '횽, 죠는 건달할껀데요'. 원민이 완전 벙~ 쪘잖아. 나도 순간 이 새끼가 뭔 소리 하나 싶은데 빵 터지는거 참고, '건달해서 뭐할건데. 나처럼 맨날 여자들 행복주며 살래, 아니면 어깨들 수발들며 얻어터지며 살래' 하고 말하니까 애가 쭈삣대더라고.

어휴 우리 민정이 잔 비었네? 미안, 내가 한잔 벌주 마실게. 크, 어쨌든, 그리고 그날 셋이 술 마시고 놀고, 다음 날 딱 데리고 나와서 꾸며놨더니, 아 사이즈 제대로 나오는거야. 지금은 그 새끼가 그래도 곯아서 좀 그런데, 그때는 진짜 애가 지금보다 더 괜찮았어. 푸푸웃~한게 아주 괜찮았지"

민정은 "그럼 오빠가 효원 오빠 키운거네? 원민이 오빠랑? 진짜 슈퍼 에이스 제조기네. 몇 명을 키운거야" 하고 사과를 베어물었다.

"그치, 내가 진짜 아주, 어? 먹여주고 재워주고 똥 치워주고 다 애기 키우듯이 키웠다 진짜" 하고 성기가 넉살을 부리자, 민정은 화사하게 웃으면서 "은근 오빠 장가가면 디게 애들한테 잘할거 같다" 하고 그의 손을 잡았다.

성기는 어느새 민정의 허벅지에 손을 올리며 "그럼. 내가 키운 애기들이 우리 가게 반이 넘는데. 진짜 완전 보육원 원장님이야. 호빠 보육원" 하며 민정의 입술을 가볍게 맞추고 "근데 나도 이제 선수 그만 뛰려고. 나이도 있고, 내 가게 차려야지"라는 말과 함께 민정의 등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그 순간 민정은 문득 머릿 속으로, 성기와 함께 가게를 차리고 사장님이 되어 큰 돈을 버는 행복한 꿈을 떠올렸다. 엄마랑 함께 미용실 차리려고 모아 놓은 돈 8천만원으로 그게 가능할까, 속으로 계산해보면서.

"이 나이가 되어보니까" 소설

"알잖아 대충. 이제 내 인생에 로또라도 맞지 않는 다음에야 대충 이렇게 살다 가겠다는거. 이제 점점 더 좆같아지면 좆같아졌지, 더 좋아질 일은 없다는거. 그게 느낌이 딱 오잖아. 나이 먹으면. 니도 이제 대충은 감이 오잖아?"

내 어깨를 툭 치며 하는 그의 말에 반박할 수 없다는게 조금은 씁쓸했다.

"근데 말이야, 근데 그러면 사람이 뭔 짓을 하게 되냐면, 자꾸 지가 제일 잘나갔을 때 생각을 하게 돼. 하 그때는 내가 진짜 가능성이 있었는데, 그때는 막 내가 뭐라도 될 줄 알았는데, 그때는 돈이 막 이렇게 들어왔는데, 그때는 다들 내가 하는 말에 막 빵빵 웃음이 터졌는데, 뭐 그런 생각. 기집 년들 생각은 말할 것도 없고"

나는 묵묵히 듣고만 있기로 했다. 콧물을 훔친 그는 대충 양복 주머니에 손을 문지르려다 겨우 테이블 구석에서 티슈를 집어 닦았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반복하는거지. 지 주변에 잘나보이고 싶은 사람한테 계속 그 이야기만 하는거야. 평생을. 꼰대들 하던 짓을 어느새 내가 하고 있더라니까. 처음에는 그래도 집에 가는 길에 문득 온 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아 이러지 말아야겠다' 생각이라도 하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새로운 사람이 나한테 말 한 마디만 친근하게 건내도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지는거야. 미친 놈이지. '내가 이러이러한 놈이었는데, 뭐, 알아두라고' 하는 마음이랄까. 근데 또 그래. 처음에는 다들 웃어주고, 감탄하고, 이것저것 더 캐물어보고, 호감도 갖고. 아직은 쓸만한거지. 그 과거의 추억들이. 내 인생에 제일 맛있는 부분, 액기스 같은 이야기니까. 재밌고, 요긴하다고. 하지만 그게 어느 시점이 되면 빛, 빛이 바래"

빛이 바랜다는 말이 나올 즈음에야 나는 그의 목이 칼칼해졌음을 느끼고 잔을 다시 채워주었다. 물론 그는 방금 전처럼 바로 비웠다.

"후우, 아는 거지. 이 이야기가 정말로 쓸만한 이야기인지 아닌지를. 어디가서 이랬대 저랬다, 하면서 나도 남한테 한번 들려줄만한 재미나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꼰대가 좋은 시절 생각하며 헛소리 하는건지. 그런 시점이 되면 볼짱 다 본거지. 그리고 지금 내가 그렇고"

주문했던 소세지 안주는 여전히 나오지 않고 있고, 나는 이걸 주문이 제대로 들어갔는지 확인을 해봐야 되는지 아니면 그냥 무시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근데! 이거 하나는 알아둬도 좋은 이야기야. 꼰대의 충고라고 해도 좋은 이야기인데… 나도 꼰대한테 들은 이야기야. 그런데 생각은 나더라고. 남자는 말이야, 그러니까 나처럼 꼰대가 되었을 때… 딱 인생을 뒤돌아봤을 때…크후…"

그는 조금 힘들어 보였다.

"뒤돌아 봤을 때, 잘난 구석은 아무래도 상관없어. 아무리 상등신 비응신이라도 좋은 시절 이야기 하나쯤은 다 있으니까. 다 있다고, 그런거 쯤은. 저어기 영등포 굴다리 밑의 노숙자 아저씨들도 다 있어 그런건. 근데 문제는, 뒤돌아 봤을 때 부끄러운 기억이 없어야 돼. 실패한 기억 말고, 내가 모자라서, 내가 부족해서 망한거 그런거 말고, 그냥 부끄러운거. 내가 암만 되바라진 새끼라도 진짜 이런 짓까지는 하지 말았어야 되는건데, 하는 그런 기억 말이야. 그런건 있으면 안돼. 그런게 있으면 쓰레기가 되어 버리는거야. 아무리 한때 잘난 새끼라도."

나는 잔을 채워주는 대신 물었다.

"아저씨는 어떤데요"

내 질문에 그는 피식 웃더니 또 크허허헝 하며 코웃음을 길게 친다.

"나는… 뒤돌아 보면…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뒤돌아 보는거 자체가 무서워. 힐끗힐끗 눈길만 줘도, 당장이라도 목 메달아 죽어버리고 싶은 부끄러워 뒤지고 싶은 기억이 너무 많아. 그러니까 더 좋았던 시절에만 집중하는거야. 다른 데는 눈길조차 안 주고. 아예 못 주는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잔을 채우고 말했다.

"저도 그래요. 못 보겠어요. 그럼 이제 그건 어떻게 극복하죠. 이미 쓰레기가 되어버린 새끼는?"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그는 꽤 오랜 시간 이런 말 저런 말을 찾는 듯 하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없어, 그런 방법은"

나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새삼 피곤함과 취기를 함께 느낀다.

"한번 쓰레기는 영원한 쓰레기?"

그는 잔을 또 한번 채우고 비우며 말했다.

"그래도 재활용 쓰레기라면, 아직은 길이 있잖아. 안 그래?"

난 피식 웃고 되물었다.

"아저씨는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난 이미 음식물 쓰레기 수준이지. 냄새나고, 보기도, 만지기도 싫고. 어디 한 방울이라도 튀면 누가 치우던지 비가 오던지 하기 전에는 두고두고 냄새 풍기고, 아주 여러 사람 애 먹이는, 좆같은 음식물 쓰레기"

이제는 자학으로 넘어가나 싶어서 슬슬 집에 가야겠다 하는 순간, 그는 "으, 취한다. 이젠 집에 가야겄다" 라는 말과 함께 묘한 자신감을 보였다.

"그래도 음식물 쓰레기도 잘만 묵히면, 퇴비가 되지 않겠냐? 안 그냐?"

그리고 생각했다.

"가시죠"

나도, 스스로를 음식물 쓰레기 수준이라고 적당히 넘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나는…' 

방사성 폐기물 같은게 아닐까. 푸르스름하니 특이하게 빛나는. 그래서 신기해서, 좋은 건 줄 알고 다가온 사람들을 망치고, 병신 만드는, 다가서는 모든 사람을 상하게 만드는, 도저히 어떻게 처지할 방법도 없는 그런 쓰레기 중의 쓰레기, 말이다.

그 순간들 소설

1. 기희

"나 가지 말까? 응?"

웃는 그녀의 말에 나는 그냥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꽤 스무스하게 잘 대답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잘가'라는 말은 죽어도 목에서 나오지 않았다.




2. 가영

"사람 많은데서 정말 이럴거야? 아 쫌 놓으라구!"
"한번만 더 생각해봐라. 내가…하아, 이건 내가 납득이 안되서 그래. 이유라도 말해줘"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고, 히히덕대는 사람들마저 있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아쉬운 마음에 가영의 손을 꾹 쥐었고, 그녀는 "아프다고!" 하며 소리까지 질렀다. 그녀의 말에 나도 놀라 "미안"하고 그만 손을 놓았고, 가영은 차갑게 말했다.

"오빠도 그 새끼랑 똑같애. 똑같다고"

나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가영의 차가운 눈빛에 이미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알았다.




3. 아름

"그랬구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녀를 보며 나는 꽤 씁쓸함을 느꼈지만, 어차피 모두가 감수해야 할 순간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켰다. 이미 한참 전에 차갑게 식어버린 커피의 맛이, 입 안을 더욱 씁쓸하게 만들었다.

"나 먼저 일어난다"

뒤는 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그런다고 돌이킬 수 있는 상황도,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으니까. 단지 조금 더 좋게 마무리 지을 수는 없었을까 하는 작은 의문이 들기는 했다. 그건 다음 번을 기약하기로 했다.




4. 태미

밤사이 전화 52통, 문자 142개, 카톡 392개가 도착해 있었다. 아마도 예전이었다면 건조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 원망하는 그녀의 대꾸를 받아주다가 몇 마디인가의 이야기로 마음을 홀리고, 또 잠깐의 침묵, 그리고 문득 생각난 작은 가십성 이슈를 이야기 하면서 농담을 하고, 그리고 커피 한잔 혹은 식사를 제안하며, 밤사이 쓰라렸을 그녀의 외롭고 지친 마음을 달래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나는 지끈지끈한 머리를 매만지며, 조금 더 자고 이따가 전화번호를 바꾸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5. 소영

"그래서 이 미친 년아, 니가 잘했다는거야? 니가 잘했어?"

만약에, 정말로 내가 대신 죽어 그녀를 살릴 수 있다면 나는 단 한순간의 고민조차 하지 않고 그랬을 것이다. 딱 두달 전까지는. 아니 사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비록 씁쓸한 마음이 들었을지언정 그렇게 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분명히.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대신 죽기는 커녕 내가 당장 이 년의 목아지를 비틀어 패죽여버리고 싶었으니까. 차라리 그냥 바람을 피우지. 미친 년. 그러나 사실 더 화가 나는 것은, 이 순간에마저 깊게 패인 그녀의 가슴골에 시선이 꽂히는 이 개병신 호구 같은 나의 눈깔이었다.




6. 가을

이미 2시간 가까이 그네에서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문득 모든 감정에 앞서는 지독한 피로를 느꼈다.

"가을아"

그녀는 대답이 없었지만, 나는 계속 할 말을 이어갔다.

"됐어. 니 마음이 그렇다는걸 어쩌겠냐. 그게 뭐 니 잘못이냐. 다아 니 잘못이지"

가을이가 그토로 좋아하던, 내 마지막 말장난이었지만 당연히 그녀는 이번만큼은 웃지 않았다. 나는 그저 힘없이 몸을 일으켰다. 솔직히 그다지 슬플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빨리 자고 싶었다.




7. 지영

"너만큼 나 좋아해준 남자 분명 앞으로 다시 만나기 힘들겠지. 근데, 근데! 솔직히, 너만큼은 나 좋아해주지 않아도, 그냥 적당히, 너보다는 아니더라도 그냥 적당히 나 좋아해주는 남자 만나서 그렇게 살면 돼.

아니 정 안되서 혼자 살더라도, 너랑 앞으로 이렇게 살고 싶진 않아. 나는 그래. 나는 원래 그런 년이야. 너 그래서 나 때문에 눈물도 많이 흘렸잖아.

알아. 알잖아. 나 못된 년이야. 잘가, 나 이제 들어가볼께. 앞으로 다시 연락도 하지마. 우린 이제 끝이야. 영원히."




8. 효주

"그게 뭐"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나를 붙잡는 그녀의 사랑스러운 표정에 사실 이미 내 마음은 아까 진작에 풀렸습니다. 아니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애초부터 별로 화도 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그녀에게 고작 그까짓 일로 제가 화가 났겠습니까. 그냥 웃어 넘기고 말 일이지.

단지…

그녀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내가 너무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 야속할 따름일 뿐이지요. 그래서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9. 도연

"야, 시발 이게 말이 되냐? 어? 아, 도연아!"

새벽이 가까운 밤, 천장의 형광등 불빛이 문득 어지러움을 유발합니다.

"야야, 도연아. 진짜 이건 아니지. 어? 야! 진짜 시발 이건 너, 너 진짜 야, 이건 시바 아니 씨부랄 이게 말이 되냐고!"

갑작스레 소리를 버럭 지르는 나의 말에 그녀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립니다. 곧바로 맥시멈으로 치솟는 혈압에 온갖 개쌍욕을 중얼거리며 부들부들 대는 손으로 다시 전화를 걸지만, 하, 진짜. 이 기집애는 어쩜 그렇게 빨리도 차단을 걸까요. 진짜 미스테립니다. 이럴 때는 손이 아주 귀신같이 빨라요. 엠병 시부럴. 이제 일주일간 전화는 종 쳤습니다. 엠병.



10. 은나

"오빠 그게 할 소리야?"

언제부터였을까요. 우리 관계가 이렇게 된 것이. 나는 소주잔 속의 찰랑이는 소주에 문득 '소주도 찰랑이는구나' 하는 멍한 생각을 합니다.

"아니 도대체 왜 그러는건데"

바로 옆에 앉은 은나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리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슬슬 붙잡아줘야겠죠. 정신. 그래야 끝낼 수 있으니까.

"은나야"
"응? 왜?"

아, 순간 응? 하는 얼굴에 뽀뽀할 뻔 했습니다. 이 기집애 왜 이렇게 귀엽나요. 하지만 안됩니다. 오늘 끝내야 됩니다.

"그만하자"
"아 진짜 왜!"

은나는 버럭 화를 내지만, 사실 너도 알고 나도 아는 문제의 답을 왜 자꾸 캐묻냐. 힘들게 진짜. 안되니까 안되지. 뭘 묻고 난리야. 니네 엄마가 어제 우리 집에 전화까지 했는데. 이게 임마 사랑한다고 다 되면, 헤어지는 커플이 세상에 어딨냐. 사랑은 다 하는건데.




11. 새롬

"미쳤어, 미쳤어 진짜"

언제나의 그 웃으며 하는 톤의 미쳤어가 아닙니다. 제대로 한심한 병신을 논할 때의 미쳤어입니다. 그러고보니 이 기집애는 왜 미쳤다는 말을 이리 즐겨쓸까요.

"아, 미안해"

사실 사과할 입장도 아니지만 일단 사과를 합니다. 그녀는 혀를 끌끌 차며 내 바지를 벗깁니다.

"오빠, 잘 들어?"

뭔 소리를 하려고. 이미 술에 취해 몸 가누기도 힘들지만 그녀는 착착 내 옷을 벗기고 그 와중에도 틈틈히 방 정리를 하며 말합니다.

"그동안 나 많이 참았고, 오빠도 많이 노력한거 알어"
"흐"

사근사근한 그녀의 말투가 귀엽습니다.

"오빠 디게 매력 있는 사람인 것도 맞구, 능력 좋은 것도 알아. 필요할 때마다 착착 돈 만들어오는 재주 진짜 최고인거 알거든. 오빠가 나 정말 많이 도와줬구"
"그럼"

나는 흐뭇하게 맞장구를 칩니다. 마지막으로 내 양말을 다 벗기고, 하, 이 기집애 어디서 배운 스킬인지 물티슈로 발가락을 다 닦아주네요. 그렇게 나는 아기처럼 되어 이불 속에 편히 눕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어조가 바뀝니다.

"근데… 안될거 같아"

사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술 마신건데요. 그리고 말은 내 탓 하지만 진짜 이유도 잘 알고 있구요.

"흐, 새롬아"

나는 웃으며, 입을 맞추고는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그녀에게 마지막 선물을 줍니다.

"현관 앞에 그 포장지 열어봐. 니 구두야. 그거 신고 좋은데로 가라"

새롬의 표정은 볼 수 없지만, 알 수 있습니다.

"진짜 이러지 말지. 이게 뭐야, 사람 이상해지게"
"야, 이럴 땐 그냥 고맙다고 하고 받는거야. 니 말고 그런 구두 이제 줄 사람도 없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새롬은 말했습니다.

"나 갈게"




12. 유영

"에이 왜 그래. 선수끼리"

그녀는 완곡하게, 그러나 제법 단호하게 거절의 뜻을 드러냈습니다. 나는 침대에서 머리를 긁적이다 입을 열었습니다.

"그래, 내가 괜한 소리 했나보다. 미안, 잘가"

사실, 아마 유영이는 내가 몇 번 더 잡아주길 바랬을 겁니다. 당연히. 아마 당연히 내가 붙잡으리라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사실 긴가민가 하던 것은 저도 마찬가지였거든요. 그랬기에, 오히려 거절 당했을 때 차라리 기뻤습니다.

"왜?"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다, 문득 묘한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다시 유영이 쪽으로 돌리자, 그녀는 울고 있었습니다. 역시, 그랬겠죠. 그녀는 무어라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듯 했지만, 역시 그녀의 자존심은 언제나 그녀의 본심보다 힘이 셌죠. 바보같이. 얼른 고개를 돌리며 손으로 눈물을 훔치고, 옷을 주섬주섬 입기 시작하는 유영.

그리고 이제는 나도 압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게 그나마 제일 그녀를 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13. 승아

잠든 그녀의 얼굴을 머리에 온전히 새겨넣기라도 할 기세로, 선 하나하나를 모두 살핍니다. 혹시라도 내 콧김이 그녀를 깨울까 싶어 숨소리마저 조심스러워지는 이 순간.

이렇게 열심히 그녀의 모습을 머리에 그려넣어도, 어느 순간에는 잊혀지겠죠. 그리고 그 소중한 기억들도 하나하나씩.


"하늘에서 떨어지는 낙엽 말이야, 바닥에 닿기 전에 그 낙엽을 하늘에서 낚아채면, 안 헤어진대"
"어, 정말? 오, 오오, 어? 와 이거 생각보다 어렵네"
"어려운거야"

바람이 불 때마다 흩날리는 낙엽을 잡으려 이리저리 팔을 뻗어보지만 여간해서 안 잡히는 낙엽. 더이상은 떨어지는 낙엽도 없어 포기하려던 그 순간, 승아의 후드티에 모자 속 은행 잎을 발견합니다.

"찾았다!"

내가 기뻐하는 만큼, 승아도 기뻐했더랬죠. 근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낙엽은 매년 떨어지는데, 그럼 매년 붙잡아야 되는걸까, 하고. 올해는 더이상 안 붙잡아도 되겠지만.


"야, 나 또 싸웠다" 소설

나의 말에 재원이는 전화기 너머에서 또 짜증을 부린다.

"하 나 이 새끼야, 내가 무슨 초딩 1학년 담임 선생님이냐? 뭔 쌈박질만 하면 일일히 보고질이야? 걍 시원하게 헤어져어, 야 내가 봤을 때 니네는 텄어. 답 없다"

그 말에 나는 실없이 웃었다.

"아, 니네는 내 앞에서 서로 귀싸대기까지 날린 커플이 결혼까지 가놓고서는…"

그러자 한 3초 답이 없던 재원은 "하긴 그랬지. 아 나도 답 없는 새끼네" 하고는 "어디냐? 니네 동네로 가?" 하고 묻는다. 나는 그러라고 하고서는 슬슬 씻을 준비를 했다.





물베기





재원은 더웠는지 아이스 아메리카노 반 잔을 시원하게 단숨에 들이키더니 입을 닦았다.

"아 더워 뒤지는 줄 알았네. 뭔 10월이 코 앞인데 이렇게 덥냐"
"야, 뭔 나는 막걸리 마시는 줄 알았다. 누가 그렇게 커피를 무식하게 마셔"
"이게 남자지 임마. 니처럼 뭐 컵 앞에 고개 요래 가져다 놓고 빨때 쪽쪽, 어? 야 임마 니 그러다 그거 떨어진다?"
"지랄"

과장되게 연기하던 재원의 말에 나는 웃다가 물었다.

"니네는 잘 지내냐? 아름이 잘 있고?"

그러자 재원이 실없이 웃는다.

"야, 잘 생각해 봐. 내가 지금 3주만에 쉬거든? 지난 주, 지지난 주 물량 맞추느라 우리 야근에 특근까지 했단 말이야. 오자마자 자고 바로 출근하고 또 24시간 주야 근무 풀타임 뛰고 자고 이런 미친 주말 보냈다고. 그리고 드디어 쉬는데? 너랑 이렇게 둘이 있잖아. 뭐겠냐?"
"또 대판 했냐?"

재원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진짜 형들 말 듣는건데. 왜 내가 장가를 가 가지고. 성욱아, 진심으로 충고한다. 결혼하지 마"
"왜? 아름이는 근데 니만 잘하면 싸울 일 없지 않냐? 바가지 긁는 타입도 아니잖아?"

하지만 내 말에 재원은 조금 씁쓸한 얼굴을 보인다.

"하, 그래. 내가 그 착한 애 다 버려놨지. 뭐 아름이가 다른 기집애들처럼 막 떽떽 거리는 타입도 아니고. 근데 부부라는게, 아니 커플이라는거 자체가 원래 좀, 남이 볼 때랑 둘이 있을 때랑 또 다르잖아"
"왜? 니들끼리 있을 때는 또 막 지랄지랄하는 타입이야?"

손사래를 치는 재원.

"아니 그런건 아닌데, 이게 한번 토라지면 얘 답 없다. 진짜 뻥 안치고 한달은 간다. 차라리 씨팔 시원하게 한번 머리 끄댕이 잡고 쌍욕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치우는게 낫지, 어? 그 날 둘이 끌어안고 자면 되는데, 이건 혼자 꽁해서 일주일이고 이주일이고 그렇게 토라져 있으면 사람 피가 마른다니까"
"아 그것도 진짜 피곤하겠네"

우리는 서로 긴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그때 재원의 폰이 울렸다. 경식이 형이다. "어? 이 형 간만이네"하고 전화를 받은 재원.

"여 브라덜. 예? 저야 뭐. 성욱이랑 있죠. 아이, 이거 참. 아시잖아요. 우리 커플인거. 앞뒤를 다 쪽쪽. 아름이는 위장결혼이죠. 하하하하"

녀석의 농담에 나는 "뭔 소리야 미친 놈아" 하고 퉁을 놓고 내 말을 다 무시한 재원은 "아, 형 어딘데요? 승암사거리요? 그럼 오실래요? 예예, 여기 증원동 이디엠 커피에요. 예, 그 골뱅이집 옆에 있는데. 네네" 하고 전화를 끊었다.

"왜? 온대?" 하고 묻는 나의 말에 재원은 "응, 온대. 야 결혼 두 번 실패한 꼰대가 주말에 할 일이 뭐가 있겠냐. 맨날 놀아달라고 조르는거지" 하고 혀를 찬다.

"진짜 대단해. 뭐한다고 결혼을 두 번이나 할까" 하고 내가 감탄하자, 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젠 안 한대. 지금 만나는 것도 띠동갑 12살 연하랑 만나잖아. 형네 학원 선생인데, 저번에 봤거든? 새끈해. 근데 이게 모르는거다? 형이야 이젠 결혼 안 해, 해도, 만약에 그 여자가 형 재산보고 결혼 조르면? 하게 되어 있다. 백퍼"
"두 번이나 실패했는데 또 하겠냐. 이젠 아예 선 그어놓고 만나겠지"

그러자 재원은 웃었다.

"야, 맺고 끊는거 확실한 새끼가 장가를 어떻게 가. 흐리멍텅하게, 어? 그런 새끼들만 장가 가는거야. 근데 두 번 갔다? 답 없다"




한 15분 뒤, 노란 머즈탱을 타고 나타난 배 나온, 많이 나온 40대 남자 경식이 형이 나타났다. 재원은 반가운 얼굴로 맞이했다.

"오, 뭐야. 어? 형 차 또 새로 뽑은거야? 장난 아니네? 아 진짜 형이 최고다. 어? 야, 완전 짜세네 이거"

경식은 씩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린다.

"어, 타던 차 팔고 바꿨어. 근데 이거도 얼마나 탈진 모르겠다. 살 땐 허세로 질렀는데, 너무 좀, 내 소셜포지션치곤 가벼운 거 같지 않냐?"
"어휴, 형. 뭘 걱정해. 그럼 또 한 대 뽑으면 그만이지. 제로시스 이큐 구천, 딱 뽑으면 짜세 나오겠구만"
"허허"

그리고는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내 손을 덥썩 잡는 경식.

"간만이다 성욱아. 임마 니가 형한테 연락도 하고 그래야지"
"아휴, 저도 요즘 정신이 없어서. 잘 지내시죠?"
"그럼. 넌 아직도 서울에서 회사 다니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요즘 관두고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어요. 형도 커피 한잔 하세요"
"어어, 내가 주문할께. 근데 니넨 무슨 남자 둘이 커피를 마시냐. 딱 이거 한 잔 꺾어야지"
"낮이잖아요 낮. 그리고 재원이 저 새끼 한잔만 마셔도 시뻘개지잖아요. 따귀 맞은 거처럼"

그 말에 너털웃음 지은 경식이 형이 웃었다.

"그래, 맞어. 저 새퀴 그래"




이야기를 나눈 후, 경식은 목을 긁으며 말했다.

"이게, 내가 봤을 땐 그래. 부부로 살다보면, 아니 커플도 그렇지만 이게 딱 '이 말만 나오면 백 프로 싸운다'라는 주제들이 꼭 있어. 뭐 전 여친 전 남친, 혹은 돈 문제, 애기 문제, 뭐 등등, 커플마다 다 주제가 다른데, 여튼 그 주제 안에서도 백프로 싸우게 되는 키워드가 있다고 키워드가"

과연 이혼 두 번에 총각 시절부터 이미 수십번도 넘게 여자를 갈아치운 연애·이혼·섹스 전문가답게 그는 자신만의 개똥철학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보통 이게…딱 그런 날이 있을거야. '아 이건 진짜 조졌는데. 사이즈 안 나오네' 싶게 싸울 때가 있었을거야. 진심으로 헤어지네 마네 하고 제대로 싸웠던거. 뭐 지지고 볶고 이런 레벨이 아니라 제대로 다 태워먹고 아예 불이 나버린거. 그런 싸움. 그럼, 그건 이미 거기서 조진거야. 그 주제로 둘이 끝나는 날까지 그거로 싸우다가 그걸로 관계 다 조진다. 아예 그런 싸움까지는 가지 말아야 돼. 근데 이미 가버렸다? 그럼 딱, 거기서 시마이 쳐야 돼. 그게 서로 빠르다. 내가 그걸 모르고 장가를 두 번 갔잖냐. 등신같이"

그렇잖아도 큰 머리 사이즈에 머리까지 저렇게 풍성하게 장발로 기르니 진짜 머리가 더 커보이는 그의 얼굴에 새삼 속으로 감탄하지만, 그의 온 몸에 둘러진 이런저런 명품으로 그의 요즘 벌이에 대해 또 감탄하게 된다. 교육 시장은 정말 불황이 없는 산업인가.

"그래도 쟤네는 잘 붙었잖아요. 재원이 저 새끼 바람 피우고 아름이랑 서로 귀싸대기 갈군 날"

그 말에 또 경식이 형은 빵 터져 웃다가 말했다.

"근데 진짜 맞어. 이 새끼는 또라이는 제대로 또라이야. 너 그때 아름이는 왜 때렸냐? 니가 바람 피워놓고.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주 맞바람이라도 피운 줄 알았을걸. 니 그 날 우리 다 싸이코새끼라고 존나 욕했다"

재원은 피식 웃었다가 커피를 쭉 들이켰다. 그나저나 이 카페는 주말의 한낮인데 사람이 이리 없어서야 장사 안 망하나. 재원은 담배를 만지작 거리다가 다시 집어넣는다.

"형. 내가 봤을 땐 그래요. 사람 사이는 다 파워게임 하는 사이에요. 이게 한번 먹히면 되돌릴 수가 없거든요. 설령 내가 잘못했어도, 거기서 꿇고 들어간다? 그럼 먹히는거에요. 뭐 아예 내가 평생 꿇고 이 사람 내 웃사람으로 모실거다 하면 몰라도, 그럼 안되겠다 하는 사람이면 먹히면 그기서 끝나는거라구요. 근데 잘 생각해봐요, 아름이 같은 애한테 내가 뭐가 잘난게 있어요. 대학을 나왔나, 집에 돈이 있나 뭐 책상머리 일을 하나. 그냥 밑바닥에서 구르는 나 같은 새끼한테 콩깍지 씌인게 전부인데, 내가 좀 잘못했다고 기집애한테 싸대기 쳐맞고 싹싹 빈다? 그럼 그 날로 먹히는거죠. 내가 잘못했어도, 잘못한건 잘못한거고 나는 어쨌든 입장은 항상 위에 있어야 되는거에요. 그게 인간관계죠. 남녀보다 그 위에 있는. 그리고 그래야? 관계가 이어집니다. 진짜로"

중학교 시절부터의 오랜 친구지만 분명히 나와는 다른 삶의 궤적을 그린 재원. 그만의 인간론, 인간관계론을 새삼 본 느낌이랄까.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방학식 날, 어느새 자기보다 덩치가 더 좋아진 반의 넘버 투 곽현구 그 새끼랑 시비가 붙었을 때 주먹으로 안되자 의자로 대가리를 내리찍고 어깨에 콤파스를 쑤셔박던 그 지독함. 하기사 군대에서도 후임이 기어오르자 반 병신 되도록 두들겨 패서 만창 채웠던 일도 있었고. 독한 새끼. 그의 헌신적인 어머니만 아니었더라도 저 놈은 아마 옛날에 신세 조졌을거다. 조진다, 그 새 나도 이 양반들 표현에 감화되네.

"하여간 넌 제대로 또라이 기질이 있어. 성질 죽이고 살아야 된다. 아니면 마누라 두고 감방 가고, 마누라 바람난다. 알았냐? 나도 업종은 교육쪽인데, 여기도 양아치들이 엄청 많아. 여학생들 건드리고 그러는 새끼들. 그러다가 감방 가고 지랄나고 뭐 그러는데, 결말이 다 거시기해. 돈 좀 있는 새끼들이 감방 가잖아? 마누라들은 좋다고 백 프로 바람 피워. 백 프로. 근데 이혼은 안 해줘. 외려 감방 수발 들었다고 나중에 이혼 소송할 때도 존나 유리하게 끌고 간다니까? 그거보다 열불 나는 일이 어딨냐. 아, 시바 그보다 담배나 태워야겠다. 바깥으로 자리 옮기자"




경식이 형은 아이스코의 연기를 훅 뿜어내며 물었다.

"성욱이 너는 그럼 지금 아예 쉬고 있는거야?"
"예. 뭐. 지지난 주에 관둔거라서 뭐 급한건 아니지만, 뭐 그래요"
"여친은?"
"걱정하죠. 남친이라고 있는게 빌빌대고 있으면"

재원은 "아 이 새끼. 니가 그러니까 싸움이 별 하찮은걸로 자꾸 커지는거야. 빌빌대니까. 남자는 딱 가오지 가오" 하고 끼어들었지만, 경식이 형은 그저 실실 웃을 따름이었다.

"니네 근데 사귄지 좀 되지 않았냐? 결혼 이야기 안 나와?"
"됐죠. 벌써 3년인데. 결혼 이야기도 그 형이 말한 '키워드'에요. 그 말만 나오면 싸워요. 근데 뭐가 있어야 장가를 가지. 니미럴"

형은 피식 웃었다.

"야 근데 그건 진짜 아냐. 결혼? 그거 돈 없어도 다 하는거야. 너 내 첫 결혼 때 못 봤냐? 우리 꼰대 죽기 전에, 나한테 시바 10원 한장 안 물려준다고 그 지랄 떨고, 나 양아치 짓 하고 다닐 때 그, 누구야, 이젠 이름도 가물가물하네. 아 그래, 영지 그 년이랑 나 결혼할 때, 나 그때 울 엄마가 준 2천 딱 그거 하나 갖고 결혼한거야. 한 푼도 없었어. 우리 신혼여행 안 갔어. 못 갔어 씨발. 돈이 없어 갖고"

그건 처음 알았다. 마지막에 '씨발'하는 그의 말에 한이 조금 섞인 것을 느꼈다.

"아 그래도 형은 나중에 집 해줬잖아요. 아부지가"
"야 그것도 시발, 이제와서 하는 말인데 그때 우리가 뻥 쳤거든. 영지 임신했다고. 세상에 손자까지 생기는 마당에, 어? 안양에서 큰 학원 두 개나 돌리는 양반 아들이 손바닥만한 원룸에서 셋이 살고 있다고 하면 세상이 욕한다고. 내가 그 꼰대 앞에 가서 자살쇼를 하겠다고 지랄생쇼를 해서 받아낸거야. 그리고 그건 나중 이야기잖아. 어쨌든 결혼은 했다 이거지"

글쎄, 그거까진 몰랐다.

"내가 씨발 다른건 모르겠는데 딱 하나 그거는 진심 영지 그 년한테 미안해. 진짜 존나 지금도 자다가 눈이 번쩍 떠지게 미안해. 세상에 암만 그지 새끼들이라도 결혼해서 하다못해 제주도라도 신혼여행은 가는데, 나는 염병, 아…. 존나 철없던거지. 근데도 이혼할 때까지 그거 갖고는 단 한 마디를 원망 안 하더라. 진짜. 그 기집애 바람 났을 때 이상하게 그 생각이 딱 나니까 솔까 내 차마 뭐라고 못 하겠더라니까"

그의 첫 이혼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 재원이는 알고 있었던 듯 그를 달랬다.

"근데 형 잘못이 아니지 그건. 형네 꼰대가 좀 너무했던거고, 그리고 영지 누나도 뭐, 잘 됐잖아?"
"잘 됐지. 그 년이 그래도 이거는 되잖아. 탈아시안이지. 것도 아주 탱탱해. 어휴, 그니까 그런 새끼 물어서 시집 잘 갔지. 차라리 잘 됐어"

술자리도 아닌데 자리의 분위기가 열띄다.

"그래도 형은 그게 지나간 일이고, 1년도 안 된 일이잖아요. 고생시킨게. 근데 나는 아름이랑 몇 년이야 쉬바. 벌써 7년이네. 사귄 기간까지 합하면 9년이야 9년. 아 갑자기 술 땡기네. 형, 괜찮죠? 대리 부르면 되잖아. 대리"
"그래, 가자. 재원이 이 시키 그래도 속정은 있지. 성욱이 너는 뭐 먹고 싶냐?"




오후 3시에 소주잔을 채우며 고기를 굽노라니 이것도 별미다.

"좆까고, 그냥 해. 결혼. 우리 같은 새끼들은 원래 결혼하면 안되는 새끼가 결혼해서 이 지랄 난거고, 니는 그래도 그나마 좀 멀쩡한 새끼 아니냐. 어? 씨 없는 또라이, 배운 양아치, 서울로 회사 다니는 모범생. 이 세 병신 중에 그래도 니가 제일 낫잖아. 한국대 간판이 거저 난거냐. 캬 시발. 울 아버지가 니를 몰라서 다행이지, 니 알았으면 나는 진짜 뒤졌다. 얼마나 비교해댔을꼬"

중간에 씨 없는 또라이 라는 말에 재원이 "야 형 나 있다고. 그냥 우리 안 갖는거야. 딩크, 딩크으" 하고 수습했지만 난 알지. 언젠가 술 취해서 한 그의 고백을. 물론 우리 모두 안다.

"형은 그럼 만나고 있는 여자는요"

이미 재원에게 듣긴 했지만 물어본다. 그러자 그는 폰에서 그녀의 사진을 보여준다.

"29살이고, 선명여대 나온 애야. 괜찮아. 이쁘지?"
"뭐 형이 만나는 여자들이야 항상 외모는 되죠. 다른게 문제라서 그렇지"

그는 또 낄낄대며 웃는다.

"야, 니가 꼭 안 좋을 때만 봐서 그래. 걔들 다 괜찮은 애들이야. 근데 니랑 같이 볼 때만 꼭 그렇게 꼬여서 그렇지"
"뭘 또 성욱랑 볼 때만 그래요. 맨날 바람 나고, 성병 걸려오고, 어? 돈 땡겨쓰고, 구라쟁이에, 술자리에서 얼굴에 술 끼얹고 가고, 어? 아주 골고루잖아요 골고루. 존나 드림팀 아냐?"

재원의 핀찬에 더 크게 웃던 그는 "야 몰라, 됐고, 술이나 마셔. 자, 어이. 그리고 얘는 진짜 그런 애들 아냐. 얘는 깨끗해. 내가 다 싹 알아봤어. 내가 면접 본 애야" 하고 얼른 수습한다. 그리고 문득 어쩌면 형은 세 번째 장가를 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갈 수 있다면 말이지만.




둘과 헤어지고 혼자 터덜터덜 집으로 걷는 길. 간만에 많이 마셨다. 밤 1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지만, 휴대폰에는 그러나 전화 한 통 없다. 그 흔한 카톡 하나도. 그래, 나는 재원과도 다르고, 경식이 형과도 다르다. 누구처럼 독하지도, 누구처럼 부유하지도 않은 그런 흔한 소시민.

놓아주어야 하나, 하고 생각이 든다. 사실 나 없어도 알아서 잘 살 기집애다. 오히려 내가 발목을 잡으면 잡았지. 머릿 속이 복잡하다. 그녀도 그렇겠지. 어쩌면 결혼을 하는 이유는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놓치기 싫어서. 계속 잡고 싶어서. 더 오래 곁에 두고 더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서.

근데 만약에 내가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걸 안다면? 그럼 진짜 너무나 사랑한다면 놓아주는게 맞는거 아닐까. 사실 그녀가 행복하기 위한 조건에 나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오히려 내가 그녀의 행복을 가로막는 사람이라면? 나에 대한 자신감도, 자존감도 어느새 밑바닥을 긴다.

"시발…"

힘없는 욕이 흘러나온다.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지만, 그 순간 휴대폰이 울린다. 진아다.

"여보세요"

나의 힘없는 목소리에 한참 말이 없던 그녀가 대꾸한다.

"저녁은 먹었어?"

조금 화가 누그러진 것일까. 조금은 밝음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나도 조금은 힘이 들어간다.

"응, 아는 형이랑 재원이랑 같이 먹었어. 고기. 술도 좀 마시고"

그 말에 "잘했어" 한 진아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미안해. 나도 너무 예민하게 굴어서. 내일 뭐해"
"아무 것도"

그러자 "그럼 내일 같이 영화보자. 나 보고 싶은 영화 생겼어" 하고 제안하는 진아. 나는 조금 전 놓아주네 마네까지 생각했던 것에 생각이 미지차 조금은 부끄럽기도, 조금은 울컥하기도 하면서 단단히 얼었던 마음이 단숨에 녹아내리는 것을 느낀다.

"그래, 보러가자"

집으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이, 그렇게 조금 가벼워졌다.

-fin -

뿔테 바이러스 소설




"코드 브라운, 코드 브라운, 닥터 김박스 응급실로 속히 부탁 드립니다. 코드 브라운, 코드 브라운"

중증 체크남방 환자에 대한 스트라이프 이식 수술을 마치고 교수실에서 간신히 한숨 돌리고 있던 김박스는 곧 자신을 찾는 응급 코드에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심각한 간지 결손 환자에 대한 응급 코드인 코드 브라운은, '브라운'이 뜻하는 급똥만큼이나 김박스의 머릿 속을 똥색으로 뒤덮고 있었다.






뿔테 바이러스






"바이탈은?"

김박스의 질문에 새내기 당직 간호사 수연은 손을 바들바들 떨며 말하기 시작했다.

"845/5/1166입니다"

김박스는 탄식에 가까운 한숨과 함께 얼굴을 쓸어내렸다. 환자의 바이탈은 처참한 지경이었다. 인스타그램 게시글을 800개가 넘게 올렸는데 팔로워 수는 다섯에 팔로잉은 1천이 넘는 상황이라면, 이건 비정상을 넘어 심각한 만성질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천명이 넘는 친구를 추가하는데 그 중에 채 10명도 맞팔을 안 해준 상황이면 사실 볼 것도 없었다.

"이런"

김박스는 환자의 상태를 보다가 혀를 차더니 곧바로 그의 안경부터 벗겼다. 그 놈의 뿔테안경을.

"어서 수술실로. 긴급 OP 준비해"





한국인의 3대 만성 질환인 고혈압, 당뇨, 뿔테중독. 그 중에서도 젊은 층을 중심으로 그 끝을 알 수 없이 증가일로이던 뿔테안경은 다행히 2015년을 전후해서 드디어 그 기세가 껶였다. 근 10년에 이르는 뿔테안경 신드롬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던 간지관리본부(GDC) 측에서 이독제독(以毒制毒)의 마음으로 김구 안경을 전면적으로 투입했기 때문이다.

그 시도는 제법 효과를 보아서, 근 63%에 이르던 한국인의 뿔테 중독율은 2017년 현재 약 30% 중후반까지 낮아졌으나 사실 이 역시도 당시 간지의들의 엄청난 반발에 부딪혔었다. 물론 김박스 역시 그 선봉에 섰던 이중 하나였다.

"아니 장기하 잡자고 해리포터 투입이라니, 설사 막자고 된똥으로 항문 틀어막는거랑 뭔 차입니까? 라식, 라섹이야 안전이나 가격 이슈가 있다고 쳐도, 콘텍트 렌즈라는 수단이 있잖습니까"

하지만 그에 대한 반론 역시 만만찮았다. 특히 한국 모든 남성간지의 가성비를 평가하고 간지수가를 책정하는 신사평가원 측은 단호했다.

"멋쟁이들은 알아서들 다 잘 합니다. 문제는 한국의 평균남성들이죠. 생전에 안경 한번 맞추면 안경 다리 부러지는 날까지 같은 안경만 주구장창 쓰는 이들이 한국의 평균 남자란 말입니다. 그런 놈들한테 매달 렌즈 사라고 하면 제대로 살까요? 아니 돈이야 일단 넘어가봅시다. 위생은? 오줌싸고 손 한번 씻는 놈들이 절반이 안되는 이 나라 남자들의 위생 의식으로 렌즈라뇨? 눈알 다 상할 일 있습니까?"

언제나 간지의들의 발목을 잡는 신평원의 '한국남성 평균론'은 이번에도 그 위력을 발휘했다. 공개토론회에서 좌중을 압살한 신평원 측은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간지관리본부 측의 김구 안경에 대해서도 신랄한 태클을 걸었다.

"동네 안경점에서 단돈 만원에 구입 가능한 뿔테 버리고 도입하는게 김구라뇨? 아, 혹시나 해서. 요즘 이런거 민감해서리…여기서 말하는 '김구'라는 표현이 우리 민족대표 김구 선생님을 욕되게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은 모두가 알 거라고 생각하고, 이하 계속 김구라고 말하겠습니다. 예? 김구라뇨. 당장 한국 남자 얼굴 평균을 봅시다. 넙대대한 얼굴에 염색 안한 바가지 머리에 김구 안경 씌워봐야 도라에몽 노진구 밖에 더 됩니까? 1mm라도 더 가려야 할 판에, 거기에 이거 툭하면 툭툭 부러지는거, 어쩝니까? 그거 막자고 티타늄이라도 썼다간 가격 폭발하고. 이건 개악입니다 개악"

좌중 여기저기서 "으흠!" 혹은 "흠흠" 하는 불편한 헛기침 소리가 터져나오는 신랄한 혹평이었지만 조심스럽게 손을 든 간지관리본부 측 인사는 그에 대한 반박을 개시했다.

"압니다. 하지만 더이상 손쓰기 어려워지기 전에 무엇이라도 해야되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새로운 스타일이 도입됨으로서 또 다른 제 3, 제 4의 스타일이 발생하기를 조심스레 기대해봅니다"

물론 뭐가 하나 유행한다고 하면 그거 뒤쫒기 바쁘지 먼저 뭘 할 줄 모르는 한국인들이 제 3, 제 4의 스타일을 알아서 도입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뿔테중독 이슈는 이미 10년 전부터 나왔던 말이었기에 당시의 공개토론회에서는 김구 안경의 도입 인가가 지지를 얻었다. 정말이지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정도로 심각했던 시기였다.




"그런데도 여전히 뿔테란 말이지"

물론 이제는 또 하나의 클래식이 되어버린 뿔테이기에 그것을 스타일로 추구하는 녀석도 많지만, 애초에 이런 중증 환자가 그럴 리 없다. 싸구려 뿔테 안경테 장시간 착용으로 인해 완전히 눌러버린 콧잔등, 더운 날 안경다리가 퉁퉁한 옆얼굴에 밀착되어 생겨버린 소금가루 등 만성뿔테증후군의 증상들이 보였다. 김박스는 손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클리어 원데이"

그러자 폴리클 닥터 김원근이 그에게 클리어 원데이 렌즈를 전달하며 물었다.

"쿠퍼비전 프로클리어로 안 가십니까? 하다못해 트루아이라도…"

하지만 김박스는 고개를 저으며 환자의 손목을 들어보였다. 환자의 손목에는 싸구려 카시오 시계가 걸려있었다. 그리고 김박스는 부연했다.

"현재 간지학계의 최신 조류는 '주어진 환경 내에서의 좋은 결과 창출'이다. 무리한 명품 착용이 불러오는 파산 쇼크는 말할 것도 없고,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일상 용품조차 누군가에게는 상당한 부담이 되는 투자일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원데이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투자'이며,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과감한 시도'라는 사실을 우리 간지의들은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잠시 수술을 멈춘 그는 모두에게 다시 한번 다짐하듯 말을 해두었다.

"젊고 가난한 간지 결핍 환자들의 얼마 안되는 여윳돈은, 어쩌면 그가 이제 평생토록 다시는 누려보지 못할 멋에 대한 마지막 사치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고, 항상 신중히, 그리고 최선의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 진료를 선택해야 한다"

교과서와도 같은 말이지만, 그런 조언은 언제 들어도 새겨둘 가치가 있는 그런 말이었다. 하지만 사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닥터 김박스는 지금 자신의 말과는 정 반대의 노선에 있던 의사였다.




'매력은 육신에서 나오고, 멋은 돈에서 나온다'

칠판에 위 문장을 적은 김박스 교수는 의대생들에게 말했다.

"나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 우리 모두는 평생동안 단 한번도 지나가는 사람의 고개가 휙휙 돌아갈 정도의 매력을 내뿜을 수 없다. 타고난 외모가, 육신이 그렇기 때문이다. 한계가 너무나도 분명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아, 거기 인철 군과 여원 양을 비롯해 몇몇 여학생들은 예외. 자네들은 풀메이크업 하고 제대로 꾸미면 가능해. 하지만 나머지는 단언컨데 불가능하다. 우리는 평생 누군가의 마음을 눈빛 한 번으로 뺏을 수 없다. 그것이 외모이고, 그것이 우리의 숙명이다"

강의실이 조용해졌을 무렵, 박스는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인간은 날개가 없음에도 하늘을 날 수 있게 되었고, 물갈퀴와 지느러미가 없음에도 바다를 건널 수 있게 되었다.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도구와 기술과 능력 있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같은 매력 없는 이들도 이제는 집중적인 헬스 트레이닝과 성형수술, 의류와 악세서리, 헤어 스타일링과 피부 관리, 메이크업과 각종 보형물과 장구들로 그 나름의 매력을 내뿜을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한계는 존재하지만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 수 있게 되긴 하지만, 두 팔의 날개짓으로 떠있는 것은 여전히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러한 한계는 명확히 인지한 상태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이야기를 한바퀴 돌린 그는 다시 핵심으로 돌아왔다.

"요는 돈이다. 돈이 있다면 몸도 멋있어지고, 얼굴도 아름다워진다. 몸을 추하게 가리던 거적떼기가 아름답게 얼굴을 비추는 빛이 되고, 모두에게서 무시받던 외관을 사랑받는 무기로 만들 수 있다. 그것이 돈이고, 매력과 멋의 실체이다. 따라서 간지 결핍 또는 간지 결손 환자의 치료에 있어서 최선의 길은, 외모에 대한 확실한 투자가 가장 분명하고도 빠른 치료법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세상에서 가장 추하게 태어난 사람도, 큰 돈이 있다면 추앙받고 사랑받을 수 있기에, 돈은 이미 그 자체로 간지통치약에 다름 아니다. 이상!"





'그랬었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김박스는 여전히 뿔테 환자의 수술을 집도하면서도 많은 생각을 했다.

"포마드"
"포마드요? 왁스가 아니라?"

닥터 김박스는 원근의 손에서 포마드를 빼앗으며 말했다.

"헤어의 모질과 두상에 따라 한국인일지라도 포마드 기름이 어울리는 사람이 존재하며, 그것은 특별한 강점이 될 수도 있다. 특히 2천년대 이후 수많은 젊은 한국 부모들의 아기두상에 대한 처절한 관리와 노력에 의해 한국인의 두상도 많이 예뻐졌기 때문이지"
"알겠습니다"





간지 결손 환자들에 대한 치료에 있어서 굉장히 과감하고 사치적인 하이엔드 라인의 명품 도입을 아끼지 않았던 김박스가 갑자기 자신의 노선을 버리게 된 것은 놀랍게도 뿔테 바이러스의 감염 때문이었다.

"후우"

그것을 치료해야 할 병원이나 의료 기관에서 오히려 병원균이나 질환에 감염되는 원내감염. 그러나 그날따라 결막염을 이유로 콘텍트 렌즈 착용을 할 수 없었던 김박스는 그만큼이나 안경 면역력이 약해진 상황이었고, 하드한 업무 속에서 부주의한 선택은 그만 그가 잠결에 뿔테 안경을 뒤집어 쓰고 근무를 보게 된 치명적인 사고를 유발하고야 말았다.

"어머, 박스 선생님, 안경 쓰셨네요? 잘 어울려요"
"잘 어울리기는. 그냥 결막염이라서 쓴 거야"

더욱이 치명적이었던 것은 오전 내내 자신이 뒤집어 쓴 안경이 뿔테였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병원 안을 돌아다녔던 사실이었다. 믿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만성적인 수면부족과 뿔테 특유의 편안함이 그를 완벽하게 뿔테 바이러스에 감염시켰다. 그가 자신이 뿔테 바이러스에 감염됐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오후 회진 시간이 다 되어서였다.

"김박스, 자네 지금 뭐하는건가?"
"예?"
"지금 뭐하고 있는거냐고! 시위라도 하는거야? 아니면 무슨 애들 장난질 치는거야"

응급간지학의 권위자이자 애플학파의 거두인 강 교수는 얼마 전에 바꾼 자신의 린드버그를 고쳐쓰며 김박스를 몰아부쳤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던 김박스는 "예?" 하고 고개를 갸웃했고, 그러자 강교수는 폭발했다.

"내가 지금 안 어울리게 팀 쿡 스타일의 린드버그 며칠 썼다고 지금 자네 그런 싸구려 뿔테로 나 도발하는거 아닌가!"

그리고 그제서야 김박스는 자신이 실수로 싸구려 뿔테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엉겁결에 안경을 집어 던지면서까지 놀랐고, 그때까지만 해도 다들 멋으로 그가 뿔테를 썼다고 생각했던 모두는 그때 '닥터 김박스가 뿔테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라는 사실을 깨닫고 경악했다.

다행히 김박스는 즉시 병원 내의 옵티컬 샵으로 옮겨져 볼프강 프록쉐, 니로와 실루엣의 티타늄 안경으로 집중 치료를 받고 뿔테 바이러스를 곧바로 치료했지만 그는 한동안 병실에서 마음을 추스려야 했다. 게다가 놀랍게도, 도대체 언제 얼마주고 맞췄던 안경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 싸구려 보세 브랜드 뿔테 안경이 썩 나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 나쁘지 않았어'

오히려 박스의 얼굴형에는 니로 브랜드보다 그 싸구려 뿔테가 더 어울렸다는 사실을 그는 스스로 인정했다. 그리고 그날의 경험은, 그에게 새로운 의학적 깨달음을 주었다. 물론 그 시점에서도 "정말 해골물을 마셨다면 원효는 밤새 Vibrio parahaemolyticus에 시달렸을거라고"하고, 슬그머니 마음 한 구석에서 떠오르는 원효대사 해골물 이야기에 대해 귀여운 반박을 시도했지만 말이다.




"수술 완료, 회복실로"

싸구려 뿔테는 중저가 소프트 콘택트 원데이 레즈로, 환자의 더벅머리는 가벼운 가르마 펌으로 손보고, 손목의 카시오는 중고 애플 워치로 바꾸어 '최소의 투자로 그닥 썩 나쁘지 않은 간지의 확보'를 성공했으며, 정체불명의 보세 브랜드 옷은 역시 몇몇 중급 스트릿 브랜드로 갈아입히어 환자의 매력을 확보해냈다. 환자의 간지 바이탈이 팔로워-팔로잉 1/3 비율까지 올라오자 모두는 안심했고, 김박스는 수술 성공을 선언했다.

"수고하셨습니다. 특히 '중고'의 도입은 인상적이었습니다"

수술실을 나오며, 폴리클 닥터 김원근은 간지의학에서 사실상 금기시되는 '중고'를 과감히 도입한 닥터 김박스에게 감탄했고, 그는 고개를 으쓱했다.

"넓게 보면 리셀러를 통한 구입도 '중고'의 개념 하에 포함될 수 있지만 그에 대해 경제적이라면 몰라도 간지적인 측면에서는 그 누구 하나 태클 거는 이 없는 관대한 2017년의 기준으로는, 민트급이라는 부분만 확인된다면 중고라도 간지의학에서 이제는 과감히 도입해 볼 필요성이 있지 않나, 싶구나"
"항상 깊은 가르침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숙직실로 돌아온 김박스는 최종적으로 스케쥴을 확인한 뒤, 확실히 비어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고는 이번에야말로 기나긴 휴식의 꿀잠으로 돌입했다.

"음냐"

물론 머지않아 그 깊은 꿀잠이 준 행복감을, M자 탈모 디자인의 'X같은 디자인'을 한 아이폰X에 완전히 망쳐버리게 되지만 그것은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는 몇 십 시간 이후의 이야기였다.

- F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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