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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이글루스와는 달리 이미지(언니들)들을 충실히 넣어 더욱 현장감을 강화시켰습니다.
* 본 링크는 미성년자의 열람을 권장하지 않습니다.
한창 메이크업 중인 다은의 옆에서 유리가 물었다.
"언니, 혹시 돈 좀 있어?"
뷰러로 눈썹을 짚던 다은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없어"
다른 것은 몰라도 돈 문제에 관해서는 피차 칼 같은게 좋다. 아니 굳이 몸 팔고 술 마셔 몸 상해가며
여기서 일하는 이유가 다 무엇인가. 돈 때문 아닌가. 게다가 이 바닥에서 돈 문제로 엮였다가 좆 된
사람이 어디 한 둘인가. 서로 힘든 처지에 동병상련으로 피붙이처럼 친해진 사이에 돈 빌려줬다 싹
털리고 병신 소리들은 사람이 어디 한둘이어야지.
낙담한게 분명한 표정이지만 유리는 애써 서운한 표정을 감추며 "언니 오늘 화장 되게 잘 먹었다"
라면서 더 들이댄다. 다은은 픽 웃더니 물었다.
"뭐 땜에 그런데. 빽이라도 질렀어? 정 급하면 가게에 말해서 일수라도 땡겨쓰면 되잖아"
요즘 업계 추세처럼 야구장도 언니들에게 급전을 빌려줄 때는 마이킹보다는 일수쪽을 선호했다.
에이스급이라면 또 모를까, 안 팔리는 언니들 붙잡고 있어봐야 도움도 안 되고 괜히 큰 돈 내줬다
떼먹히기라도 하면 큰일인데 일수로 자근자근 갚아나가는 쪽이 가게 입장에서도 차라리 마음이
편하고 또 언니들도 더 열심히 일하게 되니까.
하지만 유리는 대답 대신 그냥 손톱 일어난 것을 다른 손으로 뜯으며 "아니 그냥, 함 물어봤어" 하고
말을 돌렸다. 다은은 왠지 좀 짜증이 났지만, 아 지가 됐다는데 그냥 신경 끄기로 했다. 유리 말대로
오늘은 왠지 화장이 되게 잘 먹었다. 며칠 전에 홈쇼핑에서 산 조성화 루니 기초 세트가 피부에 꽤
잘 맞는 모양이다. 요즘 피부가 썩어가는 것 같아서 고민이었는데.
'좋았어'
립스틱까지 쮸왑 바르고 났건만, 그때까지도 옆에서 유리는 메이크업도 안 하고 있었다.
"뭐해? 준비 안 하구. 일 안 할거야?"
유리는 그러나 대답 대신 그녀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말했다.
"언니 잠깐만, 나 할 말이 있어서 그래"
빈 룸으로 다은을 데리고 온 유리는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가볍게 연기를 뿜어내고 말했다. 초조한
모양인지 목소리까지 떨리고 있었다.
"하아, 언니, 나 진짜 딱 500만 해주면 안 돼?"
이렇게까지 간절하게 말하는데 사정이라도 들어봐야겠다 싶은 다은은 "왜 그러는데. 이유를 말해야
대답을 해줄거 아냐. 아니, 근데 나 진짜 나도 돈 없어. 이번에 나 전세 계약 돈 올려주고 하는 바람에
나두 진짜 겨우 이번 달 생활비 밖에 없어" 하고 대답했다.
유리는 담배를 짓이겨 끄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 그럼, 하아, 나 진짜 내가 이러는 애 아닌거 알잖아. 언니, 언니가 그럼 가게에 말해서 언니
이름으로 해서 돈 좀 빌려서 해주면 안 돼? 내가 진짜 다른건 몰라도 언니 돈부터 내가 먼저 꼭
갚을께. 나, 지난 달에 울 엄마 보증금 없어서 쫒겨나게 생긴거 그거 해주느라도 나도 더이상 가게
에서 못 빌려서 그래. 그리고…"
그제서야 그녀는 이유를 말했다.
"성윤이 이 새끼, 내 동생 성윤이가…"
(이어서 보러가기) - [박지성 상무의 강남 야구장]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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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페에 앉아 나는 커피, 그녀는 산타 비토리오 음료수를 마시며 잡지를 휘휘 넘기다가 그녀의 얼음잔에
남은 음료수를 한 모금 슥 마신 다음
"출출하지 않아?"
"응, 출출해. 밥 먹으러 갈까? 뭐 먹을래?"
"뭐든 좋아 누나. 돈 내는 사람이 먹고 싶은거 먹어야지"
"그럼 스파게티 먹으러 가자"
해서 먹고 있노라면 그녀는 남친으로부터 전화를 받을 겁니다.
"어? 어, 혜경이랑 만나서 놀고 있어. 응. 오빠 언제 끝나? 아 오늘 늦어? 그럼 못 보겠네? 어 알았어.
응 그럼 수고해"
하고 전화를 끊으면 나는 피식 웃으면서 그녀에게 묻겠지요.
"내가 혜경이야?"
그러면 그녀는 방긋 웃으면서 "어, 혜경아" 하고 웃겠죠. 돌돌 말아 스파게티를 입에 쏙 집어넣고 먹는
모습에 그만 나까지 피식 웃게 되는데 아 뭐 너무 빠져드는 것도 곤란하니까 적당히 데이트는 거기서
그만하고 본업에 충실하기로 합니다.
"가자"
그러자 그녀는 머리를 귀 뒤로 넘기더니 고개를 끄덕입니다.
"어 가자"
우리가 가는 곳은 언제나…
슈퍼카의 장점은 주목을 받는다는 것이지만, 단점도 주목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차에서 내려
발렛파킹을 위해 키를 넘겨주면 종업원은 언제나 묘한 시선으로 우리 둘을 바라봅니다. 순간
으쓱해지는 면도 있지만 그래봐야 내 차도 아닌 것을.
교외, 국도변에 뜬금없이 우뚝 서있는 이 러브호텔은, 의례 백화점 외부 엘리베이터들이 그렇
듯이 한쪽 면을 유리로 해서 바깥이 내려다보이는데, 아직은 눈이 간간히 덮힌, 그러나 어느새
봄볕이 그 눈을 사르르 녹이고 있는 주변의 한적한 풀숲이 인상적입니다.
"박스야"
"왜?"
"오늘은 좀 거칠게 해줘"
"알았어"
우리는 종종 이렇게, 그녀의 슈퍼카를 타고 이렇게 교외로 멋지게 드라이브를 나와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평일 낮의 뻥 뚤린 국도를 타고 풍광을 구경하면서 바람을 쐬노라면 이만큼
재충전이 되는 일이 없습니다.
나야 우울한 삶의 한줄기 빛이 되고, 그녀는 역시 무료한 삶에 짜릿한 자극이 되겠지요. 음,
우리가 만난 것은 그러니까 약 4개월 전, 까페에서 번호를 딴 연상의 그녀와 첫 데이트를 하는데
처음 만나자마자 그녀가 그러는 겁니다.
"미처 말 못했는데, 나 남친 있어"
피식 웃었죠.
"그게 뭐?"
그게 전부였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내가 인정하는 양다리를 그녀가 걸치게 된 것입니다. 그녀의
남친은 국내 유수의 대기업 핵심사업부에 재직 중인 30대 능력남으로, 집안도 교육자 집안이더군요.
"결혼할 남자로선 딱이지"
그녀의 평가대로 남자는 꽤 여자한테 헌신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반듯하고, 바르고, 착하고. 허나
그녀는 뭔가 부족했다고 합니다.
"나 과거 화려한 여자잖아"
대학원 재학 중에 전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일하던 남자와 잠깐 만났는데, 그 인연을 징검다리 삼아
현 야당 모 유력 의원의 세컨드로 2년 정도 있으면서 이래저래 많은 것을 선물로 받았다고 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슈퍼카라니, 그 놈도 참 어지간히 미친 놈이 틀림없습니다. 어쩌면 '진심'이었을지도.
어쨌거나 그렇게 과거 싹 정리하고 이제 슬슬 시집갈 준비를 하던 차에 지도교수 님의 소개로 만난
모교의 선배인 지금 남친과 만난거고 그렇게 내년 쯤에 결혼을 계획 중이라는데…
그거와는 별개로 잦은 야근과 주말 출근으로 그녀는 꽤 심심하던 차에 딱 내가 나타난 겁니다. 것두
'세컨드' 라는 사실에 아무런 부담을 느끼지 않는 한량이라니, 그녀 입장에선 그야말로 딱이겠죠.
"하아하아, 아학, 아…"
찌릿한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며 하복부의 경미한 경련까지 일으키고는 저는 절정을 느꼈습
니다. 그녀 역시 이미 땀에 젖은 채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좋았어. 엄청"
"나두, 누나 요새 운동해서 그런지 복근 엄청 섹시하다"
그녀는 내가 자신을 '누나'라고 불러주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첫째로 만에 하나 누가 아는 사람이
보더라도 그냥 '아는 동생'이라 둘러대기 좋아서고, 외동딸이자 주변에 항상 연상의 남자들 밖에
없던 그녀로서는 연하남을 만나는 것이 처음이라 그런지 누군가가 자신을 '누나'라고 불러주는
것이 그렇게 좋답니다.
한참을 그렇게 끌어안은 채로 있다가 저는 다시 그녀의 옆에 털썩 누웠습니다.
"넌 근데 일 안 해?"
그녀의 물음에 저는 입맛을 다시다 대답했습니다.
"이제 슬슬 다시 일해야지. 크레인 통관건 때문에 사우디까지 가서 한 석달 일했고, 그리고 지금
까지 5개월째 놀고 있는데, 이제 돈도 떨어져가"
그러자 그녀가 물었습니다.
"누나가 용돈 줄까?"
저는 순순히 응락했습니다.
"그럼 좋지"
그녀는 몸을 일으켜, 내 가슴팍 위에 슬쩍 기대더니
"얼마줄까? 얼마 필요해?"
"누나 주고 싶은만큼 줘. 어차피 난 돈도 그리 많이 필요없어. 그냥 뭐 자고, 헬스장 가서 하루
종일 운동하고, 밥 먹고, 가끔 이렇게 누나랑 데이트하고. 아니면 도서관 가서 책보고. 그게
전분데 뭘"
그러자 그녀는 "도서관 가서 책본다는 부분이 섹시하다" 라면서 "많이는 못 주구, 50 정도면 어때?"
하고 물었습니다. 50이라…
"많은데?"
그녀는 제 볼을 꼬집으며 말했습니다.
"좋으면 좋다고 말해. 으이그. 너보면, 꼭 예전에 나 같아"
"누나도 이랬어?"
"어. 그 선생님이…"
그녀는 그 유력 정치인을 꼭 '선생님'이라 칭했습니다.
"돈 준다고 할 때 나는 항상 빼지는 않았어. 근데 대신에 많이 바란 적은 한번도 없거든?"
"그런 사람이 포르쉐를 선물로 받냐?"
"그게 더 사람 맘을 동동 구르게 하는거야. 더 좋은거 해주고 싶고, 또 허세도 부려보고 싶고,
그러다보니까 무리를 해서라도 좋은거 해주고 싶어지는거지"
"와 누나 진짜 여우다"
"너도 만만찮어"
그러더니 그녀는 제 위로 올려왔습니다. 머리 맡에 올려놓은 콘돔 하나를 다시 포장을 까더니
"한번만 더 해" 하며 제 가슴팍에 두 손을 얹습니다.
"그래, 누나"
그리고 문득 나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이런 그녀를, 그녀의 '퍼스트' 남자친구는 마냥 그저
좋아라하고 또 얼마 후에 있을 생일에 또 근사한, 명품백이라도 선물을 하겠지요? 그렇게 날마다
야근과 주말 출근을 반복해가며 번 돈으로 말입니다.
'뭐 어때'
이렇게 내가 그녀의 우울함을 풀어주고, 그래서 아주 밝은 기운으로 가득찬 그녀가 남친에게 또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애정을 보내주면, 모두가 좋은거 아닐런지.
'그래, 그런거야'
일요일 밤, 희진이에게서의 카톡 한 마디. 하는 일 없이 그저 침대에 앉아 멍하니 휴대폰이나 만지고 있던
나로서는 고마운 메세지지만, 내용은 글쎄.
[ 왜? 무슨 일 있어? ]
그러자 그녀는 잠시 대답이 없다가 곧 답장을 했다.
[ 그냥요 ]
이쯤되면 전화로 물어보고 싶어진다.
"응 오빠. 굳이 전화는 안 해도 되는데"
"어, 왜? 무슨 일 있는거야? 왜 우울해? 걱정되서"
긴 우울증의 터널을 건너온 한 사람으로서 우울하다는 말을 들으면 어떻게든 돕고 싶어진다. 물론 대부분은
정말 우울해서가 아니라 그저 깊은 밤의 울적함에 젖어 칭얼대는 것에 불과하지만, 어쨌거나 나로서도 심심
하던 차에 말 벗이 생겼으니 좋은 일 아니겠는가.
"아니에요, 근데 오빠 나 걱정해준거에요? 고마워요"
"고맙긴. 왜 우울해, 옆에 남자친구가 없어서? 외로워?"
나의 말에 후후 웃던 그녀는 대답했다.
"그런가봐요. 아 근데 오빠 뭐하고 있었어요? 바쁜거 아니에요?"
"아니야. 안 바빠. 이 밤 중에 뭐 할 일이 있다고 바쁘겠니"
그러자 그녀는 잠시 대답이 없더니 곧 나에게 직설적으로 물었다.
"오빠, 오빠는 외로울 때 어떻게 해요?"
"딸딸이 쳐"
…라고 어지간하면 솔직하게 답해서 빵 터뜨리지만, 이제껏 남친을 딱 두 번 사귀어봤고 성에 대해서도
보수적인 편인 그녀에게는 한번 봐준다.
"그냥 뭐, 친구들이랑 놀고 그러지 뭐. 너 근데 정말 많이 외롭구나?"
"아니요, 그런건 아닌데 음"
어쨌거나 그런 와중에 나한테 말을 걸어주었다는건 기쁘다. 꼭 나 한 명한테 말 건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곧바로 들었지만 뭐 그러면 어떤가 싶기도 하고, 어쨌거나 말만 하면 되는거 아닌가.
"그럼 오빠가 너 안 외롭게 해줘?"
슥 물어보자 그녀가 곧바로 반응한다.
"어떻게요?" 하더니 또 "소개팅?" 하고 묻는다. 아예 나는 선택지 자체에 없나보구나. 조금은 슬픈 생각도
들었지만 난 쉽게 좌절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아니, 내가 직접 안 외롭게 해줄까"
그러자 이번에는 그녀도 내 말 뜻을 알아먹고는 또 흥흥거리며 웃더니 "싫어요" 하고 잘라말한다. 남한테
절대 싫어요 소리 못하는 기집애가 내 말은 또 단칼에 싫어요랜다.
"오빠랑은, 큭, 왠지 웃길 거 같애요"
서로 빈말 반 진담 반으로 하는 말들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씁쓸하다. 일전에 그 태진이라는 애랑
잠깐 같이 봤을 때는 지 또래들끼리 "태진이 어때?" 했을 때 "뭐, 매력있지" 하면서 지들끼리 수근대던 그
순간이 기억났다.
뭐 결국, 사귀고 싶은 남자랑 그냥 어울리는 남자는 다른 것이겠지. 허허. 아 물론 나라고 뭐 이 희진이랑
어떻게 막 해보고 싶고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자지 달린 남자로서 평소 친하게 지내는, 이쁘
장한 여자애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해 보는 것은 꼭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니겠지'
그녀에게 나란 존재는 어떤 존재일까. 그저 유경 언니, 상준 오빠, 형욱 오빠, 가은 언니 등과 함께 곧잘
자주 보는, 그리고 그 중에서 제일 만만하고 편한 오빠 중에 하나겠지. 흐흐.
'싫군'
문득 가슴이 싸하게 식어내렸다. 아까 깊은 밤 갑자기 날아온 카톡 메세지 하나에 그냥 뜬금없이 설레였던
마음이 식는다.
"흠, 뭐하냐"
별 의미없이 희진에게 물었다. 그러자 희진은 "걍 암 것도 안해요. 오빠는요?" 하고 또 왠지 별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거기서 나는 애써 힘을 내었다. 그래 뭐 씨발 같이 떡칠 사이는 아니더라도 그냥 주변에
두고 웃는 얼굴 감상하는 정도로선 나쁘지 않잖아.
"희진아, 뭐 곧 잘 되야. 남친도 곧 생기고, 주변 일도 잘 풀리고. 넌 이쁘고 착한데 뭐가 걱정이니 내가
걱정이지"
그리고 그 말을 하면서 왠지 힘이 빠졌다. 우울했다. 그렇다, 내가 우울해져버린 것이다. 나도 누군가를
설레이게 하는 남자이고 싶다.
"오빠 고마워요"
난 조금 피곤해졌다. 다 귀찮아졌다.
"그래, 그럼 맘 잘 수습하고 주말 늦은 시간인데 푹 잘자"
"오빠"
내가 전화를 끊으려는 멘트를 하자 그녀는 왠지 다급하게 날 불렀다.
"응?"
혹시 나는 우울한, 짜증이 난 내 마음을 들켰을까 봐 다시금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다시 안도한 듯 "아니에요" 하면서 "오빠 그럼 쉬세요" 하고 전화를 끊었다.
"후우"
나는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씨발.
'뭐야, 븅신같이'
호구 찌질이 새끼. 전화비가 아깝다. 뭐야 이게. 오지랍도 아니구, 염볭.
'됐어 다 집어치워'
왠지 모를 짜증이 내 안을 가득채운다. 그리고 그때 또 카톡 메세지 하나가 날아왔다. 부르를 진동 오는
휴대폰을 바로 받아 메세지를 확인했다. 희진이었다.
[ 오빠 혹시 나 땜에 괜히 우울해진거 아니죠? 그랬음 미안해요 글구 항상 고마워요 오빠 ^_^ ]
난 그 메세지를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아니야, 하고 대답을 하려다가 그냥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됐어'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내 연애, 아니 호구들의 최대 단점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깨닫는다.
'너무 상대의 마음을 맞춰주려고 해서 그래'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내가 하나를 해준다고 그녀의 호감도 하나가 올라가고, 내가 뭘 실수했다고
그녀의 호감이 하나 내려가는, 그런 방식이 아니다. 훨씬 더 비효율적이며 터무니없는 시스템으로
돌아간다. 물론 그렇다고 나같은 새끼가 어설프게 튕김질을 해봐야 상대 마음을 끌어당기기는 커녕
무한히 추락만 하겠지만…
'하하 씨발'
그냥 다 귀찮아졌다. 그리고 문득 생각해봤다.
'만약에 내가 희진이한테 고백해서 그렇게 사귀게 된다 치자. 근데 그럼? 그럼 뭐?'
그래봐야 깊은 밤에 매일 밤 전화하고 같이 데이트 좀 하고, 그러다 더 친해지면 뭐 거시기한 것도
하고, 그리고 가끔은 싸우기도 할테고, 가끔은 또 어디 여행가서 신나기도 하고, 어쩔 때는 또 서로
불타올라 막 한없이 설레이기도 하겠지만…
'에이 다 좆까'
별로, 그녀가 아깝다. 나같은 새끼한테 희진이 같이 이쁘고 착한 애라니. 에이 구려. 희진이가 너무
아까워. 그리고 귀찮다 솔직히.
'다 귀찮아'
나는 그렇게 불을 끄고 침대에 눕는다.
'정말 다 귀찮아'
"어 내 댕겨오께. 아 글고 나무 하믄서 막둥이 거 약될 거 약초 있음 좀 뽑아올테니께 탕재기도 좀
꺼내놓고"
"네에 서방님"
선녀는 집을 나서는 서방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화들짝 놀라며
입을 막았다. 만약 시어머니가 봤더라면 등줄기를 후려맞았을 일이다. 어디 기집이 재수없게스리
한숨을 쉬냐면서. 본인은 그렇게나 툭하면 날 보며 그렇게 한숨을 내쉬면서 말이다. 남편만 없으면
어김없이 시집살이가 시작된다.
"아 선녀야아, 뭐하는거여 시방, 어서 똥굿내가 풀풀 나는거 보니까네 아 막둥이 똥쌌나비다"
"네에 어머님"
서둘러 신혼방으로 들러 둘째 기저귀를 갈아입히고는 똥 싼 기저귀를 가져다 빨기 시작했다.
"아 아야, 아 짐 뭐하냐아. 아 배고파 죽갔다!"
"네에 어머님"
선녀는 빨던 기저귀를 내려놓고 서둘러 부뚜막으로 뛰어갔다. 그녀는 하루에 밥을 네 번 해야
했다. 아침에 남편 나무하러 가기 전에 한 그릇(겸 점심에 먹을 주먹밥), 나무하러 간 다음에
시어머니 먹을 한 그릇 겸 애기 밥, 그리고 저녁 먹을 남편, 시어머니 진지, 또 밤 자기 전 감자.
사실 아침에 그냥 남편 먹을 때 시어머니도 같이 먹으면 좋겠지만 꼭 아들 앞에선 입맛이 없어
안 먹는다고 해놓고는 남편만 나무하러 갔다하면 또 닥달이다. 말 그대로 시집살이, 홀로 아들
하나 키우면서 느꼈을 한을 자신에게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월강선녀로서 인간의 마음에 더
애틋하게 교감이 가능한 하선녀로서는 그 마음을 아주 이해 못할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제 아무리 식사를 오래하지 않아도 되는 선녀라고는 해도, 먹지 않고 고된 일만 계속
해서는 그 육신이 견디지를 못한다. 하늘나라에 있었다면 매년 하나씩 먹었을 천도복숭아도
못 먹은지 4년, 옥영고도, 환영단도, 기원소도 먹지 않고 아니 하다못해 쇠죽 한 그룻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고 그저 아침부터 밤까지 고되게 일하고, 또 무슨 이유에선지 제대로 먹이지도
못하면서 맨날 애를 보채는 남편과 그걸 또 못 견뎌하는 다음 날의 시어머니 바가지.
'힘들다'
천하의 선녀도 이 삶이 지긋지긋했다. 도망치고 싶었다. 솔직히 왜 환향선녀들이 그렇게 하늘
나라에서 천시받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하늘로 올라오는지 알 것 같았다. 인간 세상은 정말
사람이, 아니 선녀들은 더더욱 살 곳이 아니었다.
너무너무 힘들었다.
새복녘에 인(寅)시만 되면 간밤의 격한 '그것'으로 부서질 것 같이 힘든 몸으로 깨어지지 않는
눈꺼풀을 억지로 띄워가며 홀로 깨어, 아무리 속곳에 속바지를 껴입어도 찬 바람을 가릴 길
없는 홑겹짜리 기워입은 넝마조각 치마 저고리를 끙끙대며 입고는 몸이 덜덜 떨리는 차디찬
부뚜막에서 또 전날 앞산에서 주워온 잔솔가지 태워 밥을 얹힌다.
불 앞에서 꾸벅꾸벅 졸다 하마터면 아궁이에 얼굴을 묻을 뻔한 적이 몇 번인가. 너무 놀라고
힘들어 혼자 운 적이 몇 번인지 모른다.
그렇게 밥 다 짓고나면 아직도 컴컴한 집 뒷 편의 장독대에서 더듬더듬 냄새만으로도 장을
종지에 요만치 퍼담아 와 그렇게 조밥에 된장 하나로 남편 한 끼를 챙겨준다. 가난한 살림에
제대로 된 찬다운 찬을 만들 길이 없다. 하다못해 밤에 먹는 감자만 들 먹어도 찬이라도 좀
챙길 수 있을 듯 한데 시어머니의 유일한 식도락이 그것이라니 그건 남편도 완고하다.
가끔 아랫 마을에 길쌈하다주면서 얻어온 전이며 깻잎파리로 그래도 적당히 제대로 된 밥
이라도 한 그릇 챙겨먹이고 싶은데, 아무리 미운 남편이라도 챙겨먹이고 싶은데 이 효자 아들은
생전에 맛나는 것을 지 입으로 넣어 본 역사가 없다.
다 시어머니 입으로 들어간다. 기어코 아들 입에 시어머니가 떠먹여주면 몰라도 말이다.
조밥에 장 요만큼 싸서 주먹밥 해서 보재기에 싸 점심 챙기고 빨아놓은 웃도리와 발싸개 내주고
땀수건 챙겨서 지게에 요래 묶어놓고는 점심 보재기 딸려서 그래 남편 나무하러 보내놓고 나면…
깨어난 시어머니의 잔소리와 함께 시어머니 자실 아침을 새로 또 하고 그 와중에 집안청소에
막내 똥기저귀 빨고, 시어머니가 집 뒤에서 키로 웃집 농사지은거 대신 까불고 있을 때 틈틈히
남편 옷도 빨아널고 받아온 오 진사댁 길쌈도 글피까지는 해보내야 하니 정신없이 해놓고…
밥 다 되면 시어머니 불러다가 쉰 김치에 꽁보리밥, 된장 해서 한상 채려주고 그릇수저 설거지
하고 애 좀 봐주면서 아주 잠깐 쉬다 이제는 머리 다듬을 시간도 없이 막내 애 업곤 시어머니와
함께 재 너머 큰 외웃어르신네 밭 메는 일 하러간다. 가까운 친척도 아니고 촌수로 16촌이 넘어
가는 멀고 먼 친척이더마는 그래도 어쩌겠는가. 목구멍에 뭐라도 넘기려면 그래도 도와줄
사람은 예뿐인데.
일을 하면서도 막내는 막내대로 보채고 허리는 끊어질 듯 아프고 집에 두고온 큰 애는 잘
있을까 걱정도 되고 애 배고프겠다 싶어 남들 다 쉬며 새참 먹을 때 또 혼자서는 재를 넘어
다가 자기 몪 주먹밥 한 개를 먹여주고 쉴 새 없이 또 재를 넘어서는 일 도와주러 간다.
하루 해는 길어도 왜 그리긴지, 정말이지 혼이 빠지고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쯤에야 어느새
해가 뉘엇뉘엇 넘어가는데 돌아오는 길에 시어머니 다리 저는 모습을 보면 또 한숨도 눈물도
동시에 나고, 집에 와도 쉴 수는 없다.
해 넘어가기 전에 물 길어와야지, 서방님, 어머니 드실 저녁 밥 짓고 빨래해서 널어놓고
하루종일 손도 못 댄 바느질거리 두어벌 겨우 다 하고 정말이지 죽을만큼 고된 몸에 손발이
다 부들부들 떨린다. 심장은 펄떡펄떡 뛰고 죽을 것만 같은데 애는 또 밤새도록 울고 겨우
겨우 달래서 재워놓고 이제 정말로 정말로 자려고 하면 어느새 남편은 위로 타고 올라온다.
"서방님…"
"어허, 내 말했잖여. 아 셋을 낳기 전까지는 단 하루도 쉴 수 없으니 그리 알어"
"…네에"
그렇게 선녀는 눈을 질끈 감고 남편의 격렬한 '사랑'을 받아낸다. 너무 힘들고 눈물이 절로
나는 시간을 보내고나면 남편은 또 어느새 스르륵 내려와 곤히 잠에 빠진다.
뒷물을 하러 몸을 일으키니 정말로 손발 어디 마디마디 단 한 군데가 안 아픈 곳이 없다.
이러다가는 죽을 것만 같았다. 짐승같은 깊은 밤의 숨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은 어둠 속에서
뒷물을 하고 있노라면 온 세상이 다 무서웠다. 그리고 저 하늘의 달이 너무나, 정말 너무나
황홀하고 다시 가고 싶었다.
선녀는 두려웠다.
선녀는 본디 하늘의 존재. 인간세상에서 인간과 어울려 살 수는 있지만 인간 세상에서 죽으면
영원히 윤회의 기회를 얻지 못한다. 그걸 알면서도 꾹 참고 살려고 했지만, 이건 아니다. 이건
정말 아니다.
몇 달간 참아왔던 눈물을, 그녀는 또 한번 훌쩍이며 한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졸라볼 생각이다. 선녀옷을 입어보고 싶다고.
안다.
내가 떠나면 남편도 시어머니도 모두 엄청나게 슬퍼할 것을. 하지만 이대로라면 내가 먼저
죽을 것만 같다…
미안해요 낭군님…
죄송해요 어머님…
'여긴가'
집주인이 올해는 월세를 올려달라고 해서, 가뜩이나 부담되는 월세비에 더이상 올려주면서까지 살기는
힘들어 다른 집을 알아보기로 했는데…정말이지 집 구할 데가 없었다. 도저히 이 정도로 작은 곳에서는
못 살 것 같다, 싶은 집 아니면 곰팡이 흔적이 득시글한 오래된 집, 아니면 대낮에도 불을 켜야 살 수 있
는 채광이 안 좋은 반지하방 뿐이었다.
하지만 궁하면 통한다고 보따리 무역상 형식이형이 간만에 전화를 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집
이야기까지 나왔는데 아 옳거니, 딱히 갈 데 없으면 형이 마침 사업장 겸 쉐어하우스 겸 해서 살고있는데
정 갈 데 없으면 와서 살라는 것이다. 장소도 동대문 근처라서 지금 사는 곳과 그리 멀지 않고, 무엇보다
월세 대신 와서 일 좀 도와달라는게 아주 매력적이었다. 월세만 굳어도 초 대박 아닌가.
'…흠'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아주 솔직히 말해서 건물은 많이 낡은 건물이었다. 5층짜리 상가건물인데 벽은
좍좍 실금이 가있고, 저 위에 옥상은, 잘은 안 보이지만 슬레이트로 덮어놓은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도
없어서 형식이 형과 그 친구들이 살고있다는 3,4층은 걸어서 올라가야 했다. 이삿짐은 나중에 옮기기로
했는데 이래서야 정말 이사하는 것도 큰일이다 싶었다.
'1층은 전당포, 2층은 포목상'
왠지 입주한 가게들마저 왠지 추억의 그때 그 시절 느낌이라 찝찝했지만, 그래도 형식이 형을 믿기로
했다. 아무렴 패션디자인 전공한 사람이 후지게 살고 있겠는가, 라고 애써 위안을 하며.
"형, 나왔어"
잔뜩 녹이 슨 가느다란 철제 비상계단을 올라가면서 '아 이거 정말 내가 잘하는 짓일까' 싶기도 했지만
어쨌든 갈 곳 없는 놈한테 공짜로 집도 내준다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군데군데 녹슨, 미색 철제문을
두드리며 형을 부렀다. 초인종도 없네. 반응이 없어 잠시 기다리다 다시 또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누구
세요? 하는 여자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아…'
그대는 찌는 듯한 여름에 갑자기 불어온 아주 청량한 한줄기 바람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저기요?"
순간 멍해졌을 정도로 아주 청량한 미모의, 문을 열어준 그녀는 낯선 이가 문을 두드리더니 멍하니 얼
빠진 채 서있자 당혹스러웠던 모양이다.
"아, 미안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현준이라고 합니다. 형식이 형…이랑 아는 사이구요, 음, 저기,
뭐 그렇습니다"
어린 시절, 만화잡지 핀업 포스터에서 본듯한 또래 청소년 아이돌 느낌의 오목조목 귀엽게 생긴 그녀는
"아, 오늘 온다는 사람이 너구나, 반가워" 하면서 나를 알아보더니, "나는 형식이 오빠 여자친구야. 너
28살이라며? 난 너보다 한살 누나야. 아 맞다 내 이름은 한은지야" 하며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했다.
손이 보드러웠다. 어떻게봐도 한 23~24살 정도로 보이는데, 엄청 동안이구나.
상가건물이라 그런지 3층 안은 벽지도 바르지 않고 그저 벽에 하얀 페인트만 칠하고, 바닥도 그냥 장판이
아닌 돌바닥이었다. 천장 기둥에는 철제 조명이 몇 개 달려있었고, 얼추 우리 부모님 집만한, 그러니까 한
30평쯤 되어보이는 이 곳에 저쪽 벽을 따라 PC와 각종 문서가 난잡하게 쌓인 책상이 3개 놓여있었다.
방 중앙에는 유리 테이블과 소파가 놓여있었는데, 테이블, 소파 모두 따로따로 어디서 주워온 모양인지
유리테이블은 깨진 유리를 테이프로 붙여놓은 상태였고 소파는 2인용 소파가 2개, 1인용 소파가 한 개
였는데 모두 다 다른 소재, 디자인이었다. 누가봐도 어디 재활용 센터에서 주워온 느낌의.
왼쪽은 벽을 따라 죽 행거들이 놓여있었고 그 행거에 옷 수백벌이 걸려있었다. 그걸로도 모자라서 박스
와 보자기에 옷가지들이 잔뜩 쌓여있었다. 오른쪽은 그나마 깔끔하게 텅 비어있었지만 대신 벽면에 온갖
사이즈의 액자들에 의미를 알 수 없는 타이포 그라피 사진들이 들어가 있었다.
쉽게 말해서 꼭 무슨 빈티지 편집샵 느낌이었다.
"어때? 괜찮지?"
빈티지를 살짝 넘어 진짜로 빈(貧)해보이는게 좀 거시기 하긴 했지만 그래도 확실히 뭔가 되게 신선했다.
"네"
은지 누나는 "다들 지금 점심 먹으러 나갔어. 원래는 대부분 그냥 여기서 해먹는데, 지금 가스렌지가 고장
나서. 이따가 기사가 고치러 온대" 하면서 설명해주었다. 나를 처음 보는데도 아주 스스럼 없이 대하는게
참 시원시원한 성격이었다. 이렇게 예쁘고 붙임성도 좋은 여자랑 사귀다니, 형식이 형이 부러웠다.
"근데 그러면 잠자는 방은 윗층에 있어요?"
"어. 4층도 소개해줄께"
3층과는 달리 4층은 그래도 제대로 사람 사는 집처럼 꾸며져 있었다. 원래 이 건물 주인집이 살던 곳이라
했다. 굳이 말하자면 4베이 구조로, 저쪽 벽면에 방 넷이 주르륵 있었고 중앙에는 큼지막한 아일랜드 식탁이
놓인 거실, 그리고 입구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대형 냉장고와 함께 3구짜리 싱크대, 오른쪽은 화장실 겸
샤워실이 있었고, 세탁기가 놓여있는 작은 베란다가 있었다.
"어 저기 베란다 전망이 엄청 좋아"
그녀의 말처럼, 여기서 보아도 베란다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인상적이었다. 두 빌딩 사이로 저 멀리까지
바라다보이는 풍경이 참 좋았다.
"그러네요"
"근데 방은 좁아"
거실을 지나 방에 들어서자 과연, 침대 하나 책상 하나 작은 옷장 하나가 전부인 작은 방이었다. 다행히
천장이 꽤 높아서 숨 막힐 듯한 느낌은 없지만 그래도 움직임은 제한이 있었다.
"잠은 여기서 자도, 그외 다른 것들은 저기 식탁에서 하던가 아니면 아랫층에 내려와서 다들 해. 좁으니까.
답답하잖아. 그래도 창문 열면 좀 괜찮긴 해"
확실히 침대 머리 맡의 창문이 크고, 채광은 엄청 좋았다.
"이 방은 주은이라고 여자애가 쓰는 방이고, 이 옆 방이 니 방이야. 이거보다 좀 더 작아"
이 방보다 더 작다는 말에 살짝 긴장이 되었지만, 뭐, 문을 열어보니 그럭저럭이었다. 침대는 없었다.
"어때?"
"깨끗하고 맘에 들어요. 아 여기 사는 사람이 전부 몇 명이에요?"
"너까지 여섯 명. 저쪽 끝방을 나랑 오빠랑 쓰고, 이 옆방이 말한대로 주은이, 이 방이 너, 이 오른쪽 방은
또 커플이 살아. 다 우리 회사 식구들이야"
"아 혹시 이 방, 저 때문에 뺀 건가요?"
"아니야, 원래는 창고방으로 쓰던거야. 가끔 손님이나 친구들 오면 뭐 재우기도 하고 그랬는데… 아 너가
안 왔음 내 방이 됐을 예정인데, 너가 왔으니깐"
"…죄송해요"
"대신에 밥값만 제대로 해"
그러고보니 형식이 형이 나한테 뭔 일을 도와달라는건지 궁금하네. 솔직히 암만 그래도 뭐, 세를 놔도
돈 몇 십은 버는건데 공짜로 방을 준다는게 어디 쉬운 일인가. 어려운 일 시키면 걱정인데.
"아 걱정마, 설마 뭐 힘든 일 시키겠니? 얘 표정 바뀌는거 봐. 너 은근히 웃기는구나?"
은지 누나는 내 표정을 보면서 웃었다.
"미안해요"
"너 은근히 되게 귀엽다? 오빠가 너 챙기는 이유를 알겠어"
귀엽다라는 말이, 솔직히 싫지 않았다.
"아 현준이 왔네? 짐도 다 싸가지고 온거야?"
"아니에요, 일단은 몸만 왔어요. 짐은 다음 주에 옮기려구요"
"어 그래. 아아 다들 인사들 해. 내 고등학교 후배야. 뭐 바로 아는 사이는 아니고, 한다리 건너서 아는
사이인데 뭐…스물여덟살, 맞지? 어, 이현준이라고, 귀엽게 생겼지? 앞으로 당분간 우리랑 같이 먹고
자고 싸고 할테니까 친하게 지내. 아, 일은…너 회사 다니냐?"
아랫층으로 내려가자, 형식이 형은 회사동료 겸 하우스 메이트들과 식사를 마치고 와있었다. 그리고
형은 나를 그들에게 소개시켜주었다.
"그냥 프리랜서로 웹디자인일 해주고 있어요"
"오 웹디?"
웹디자인이라는 말에 키 크고 머리 뒤로 묶은 잘생긴 형…인가? 여튼 범상치 않은 인상의 훈남이
반응했다. 형식이 형은 이번에는 식구들을 소개했다.
"이쪽은 우선, 내 여자친구이자 영업실장 한은지. 영어도 잘하고 일본어도 잘해. 그리고 너보다 한살
많아. 아, 둘이 인사 했지?"
"네, 엄청 자상하게 여기 소개해주셨어요"
'자상하다'라는 말에 다들 풉 하고 웃었다. 은지 누나는 "왜들 그래?" 하면서 샐쭉했지만 형식이 형은
모르는 척 다음을 소개했다.
"이쪽은 오주은. 너랑 동갑이고 우리 회사 구매 담당. 얘가 일 잘 못하면 우리 회사 쪽딱 망할 수도
있지만 아직까진 완전 승승장구하고 있어. 아 얘도 일본에서 살다와서 일어 엄청 잘해. 근데 술 버릇
존나 안 좋으니까 얘랑 술 마시지마"
"아 사장님! 왜 그런 말을 해요, 나 안 그래. 안녕?"
그녀는 손을 잼잼하며 인사했다. 귀엽네. 뭐 은지 누나급의 미녀는 아니지만 나름 귀여운 구석이
있다. 옷도 약간 에스닉하게 입은게, 감각이 있어보였다.
그 다음은 아까 내가 웹디자인 일을 한다니까 반응했던 꺽다리형.
"여기는 봉주. 윤봉주고 나이는 나랑 동갑이야. 서른 셋. 아직 미혼! 근데 바람둥이! 우리 회사 온라인
관계된 일은 전부 얘 담당이야. 홈페이지부터 서버 관리까지 다. 완전 초인이니까 배울 거 있음 배워"
"반갑다"
"반갑습니다"
악수를 나눴고 다음은 키는 나보다 좀 작은, 한 170 초반? 쯤으로 보이는 안경 쓴 몸 단단해 보이는
남자였다. 이쪽은 딱봐도 나보다 나이가 있어보였다.
"아 이쪽은 수완가, 은배 형님. 나이는 올해로 마흔이고, 돌싱이야. 화려한 돌싱. 경력 13년차 무역의
달인! 무달!"
"강은배다. 잘 지내보자. 그냥 편하게 은배형이라고 불러. 여기선 다들 그냥 형동생하고 지내. 말도
편하게 해"
"네 반갑습니다"
그때 문득, 아까 은지 누나가 방 소개하면서 내 옆 방은 커플이라고 했던게 기억났다. 형식이 형
커플, 그리고 주은씨, 그러면 봉주형과 은배형이 커플?
"왜? 무슨 문제 있어?"
내 표정이 뭔가 기묘했던지, 형식이 형이 물었다.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호기심을 못 이겨 물어보았다.
"저기, 아까, 은지 누나가 방 소개시켜주면서… 제 옆 방은 커플이 산다고 했는데… "
"커플? 우리 커플?"
"아뇨"
다들 어리둥절해 있는데 은지 누나만 혼자 빵 터져서 어쩔 줄 모른다.
"뭐야?"
은지 누나는 "아이고 죽겠다" 하면서 소파에 몸을 굴려가며 웃었다. 한참을 웃다가 그녀가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얘 엄청 귀엽다. 아까, 내가 방을 소개시켜주면서 오빠들 방을 내가 커플이 산다고 했거든"
"야이!"
"야! 아 이게 한순간에 우릴 호모로 만들어버리네"
그러더니 봉주 형은 손을 내저었다.
"호모 아니거든? 난 멀쩡해"
"솔직히 근데 오빠 둘이 같이 자는거 좀 그렇긴 해"
주은씨까지 끼어들어서 둘을 몰아붙였다. 나중에 알고보니 은배 형님은 따로 집이 있어서 야근하는
날에만 여기서 자고 간다고 한다. 다만 봉주형이 선반 용도로 이층침대를 쓰는 덕분에, 그리고 창고
방에는 침대가 없으며 은배 형님이 허리디스크가 조금 있어서 바닥에서는 못잔다는 이유로 꼭 봉주
형의 이층침대에서 잠을 청하는 덕분에 다들 둘을 커플이라고 놀린다고.
"어쨌든 온 거 축하한다. 가끔, 너 할 일 하다가, 우리도 일손이 달리고 그럴 때가 많아. 그럴 때만 좀
너가 도와주면 고맙겠어. 그리고 언제든지 불편한거 있으면 말하구. 다 좋은 사람들이니까"
사실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이사를 완벽히 온 것이라기보다는, 살지 어떨지 결정하러 온 것이었는데
얼떨결에 이렇게 아예 도장을 쿵! 찍은 느낌이 되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난 이 집이 아주 마음에
드니까.
"네! 그럼 다들 잘 부탁드립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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