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지자" 소설

최후의 최후까지 미뤄왔던 그 한 마디. 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돌아오는 대답. 헤어지자는 말에 이렇게까지 쿨하게 대답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그래"

답변까지 1초.

눈물 한 방울, 서운함 1그램조차 없는 지나치게 드라이한 이별의 순간. 만난 기간 4년, 가져다 바친 데이트 비용 수천, 싸우고 빌고 화해하고 마음 졸인 마음고생 4년, 함께 한 즐거운 추억 속 사진 수백 수천 장. 그 모두가 그 한 마디에 아스라히 잿가루처럼 사라진다.

"하아"

허탈하지만 무슨 말을 더해야 할까.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나. 무어라 한 마디 쏘아주고 싶기도, 아니면 영원히 기억될 가슴 시린 한 마디, 아니면 슬픈 기억으로 남아 그나마 나를 위로해줄 한 마디? 그러나 그 어떤 말도 지금의 내 감정을, 그리고 그 허무함을 대변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렇게 몇 분의 시간이 흘렀을까. 나도 그녀도 이제 더이상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볼 힘이 없다. 아니 적어도 나는. 어쩌면 그녀는 지루함과 피곤함을 느끼고 있을지 모른다. 거기에 생각이 이르자 피식 웃음이 나온다.

"왜"

내 웃음에 그녀가 반응한다. 무어라 대답하면 좋을까. 생각은 이미 책 한 권을 쓰고도 남지만 서로가 주고 받은 말은 휴대폰 문자 메세지 하나를 다 채우지 못한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 관계의 근원적인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나랑 사귀면서, 나 사랑하기는 했냐"

세상에서 가장 바보 같은 질문. 그러나 어쩌면 지난 몇 년의 시간을 그나마 위로 받을 수 있는 한 마디. 영혼이 없어도 좋고, 진심 따위 남겨 있지 않아도 좋다. '사랑했지' 아니 그냥 '응'이라도 좋다. 나는 그 한 마디를 듣고 싶었다.

"모르겠어"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또 한번 내 가슴을 쓸쓸하게 한다. 그렇구나. 만약 반대였다면 어땠을까. 아마 나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노라고 확답할 수 있으며, 그 사랑하는 마음은 세상을 다 채우고도 모든 것을 불태울 수 있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만약 너를 위해서 죽으라면 죽었을 것이며, 아니 관두자. 어쨌거나 돌아온 답은 그랬다. 나는 또 한번 웃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왜 웃냐고 물었지만 나는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스스로가 불쌍했다.

"차라리 조금 일찍 말해주지 그랬냐.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없었으면서 왜 내 곁에 있었는데"

역시 묻는 것이 비참한 찌질한 질문이다. 하지만 묻고 싶었다. 이번에는 그녀도 답이 없었다.

"그냥 내가 잘해줘서? 호구처럼 다 가져다 바치고 그래서? 버리기는 아깝고 그래서 그냥 적당히 옆에 두고 싶었던거야? 마음에도 없었으면서?"

결국 이렇게 흘러가는건가. 찌질하고, 별로 타격도 가지 않는 짜증나는 질문으로 영원히 좆같은 기억만 남기고 이렇게 병신 같은 이별을 맞이하는 그런 흐름?

"나…"

나의 공격에 그녀는 어렵게 입을 연다. 무슨 말이 나올까. 미안해? 나 그냥 갈게? 아니면 욕 한 마디? 뭘까.

"괜찮아, 말해. 내가 찌질하다고 말하고 싶어? 말해, 욕해도 돼"

눈물이라도 흘리지는 않을까 기대했다. 그냥 헤어지면서 눈물 한 방울 정도는 보여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지난 시간들,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아니 사랑도 안 했다고 했지. 그래. 뭘 바라겠냐. 병신새끼. 스스로가 비참했다.

"갈게. 잘 지내"

흐. 엇갈리는 마음. 아니아니, 엇갈리기는 한건가. 정말로 궁금했다. 슬픈 것인지, 아픈 것인지, 고통스러운지, 해방감이 드는 마음인지. 그녀의 마음은 지금까지도 단 10cm 속을 들여다 볼 수가 없다. 이 와중에 저 말은 어떤 감정에서 어떻게 나온 말일까. 도저히 모르겠다.

"하아"

이 와중에도 묻고 싶다.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지금 니 감정은 어떤지, 내가 헤어지자고 하는데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그래' 라는 말을 하는 과정은 어떤 것인지, 지난 시간들에 대한 감흥이 고작 그 정도였는지, 내가 정말로 그렇게나 매력없고 의미없는 사람이었는지, 너에게 묻고 싶었다. 묻고 싶지 않았지만, 사실 물으면 안되는 질문이지만, 궁금해서 미쳐버리기 전에 묻고 싶었다.

"넌 내가 헤어지자고 하니 기분이 어때? 그냥, 속 시원해? 요만큼이라도 슬프기는 해?"

급기야 병신같이 눈물이 차오른다. 아 시발. 떨리는 목소리를 숨긴다고 숨겼지만 늦었다. 그녀의 표정에 아주 작은 낭패감이 떠오른다. 아니, 떠올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별 변화도 없다.

"나 가볼게"

그녀는 그렇게 가방을 들고 일어선다. 드라이하고 담백하다. 그 이상의 어떤 표현도 붙이기 어려울만큼. 내 연애는 그렇게 끝났다. 다 부숴버리고 싶을 만큼 아찔한 화가 치솟고 스스로의 헛수고가 분했다. 뒤늦게 찾아온 이 감당하기 어려운 분노에 손이 부르르 떨렸고, 그런 나를 힐끔힐끔 바라보는 다른 테이블 너머의 시선들이 분했다. 차오르는 눈물을 그렇게 간신히 삼키며 길게 한숨을 내쉰다.

"후우"

그렇게 한 템포를 넘기자 마냥 다 허무했다. 다른 애들과 다르다. 저 년은 나한테 뒤늦게 다시 연락을 해오지도 않을 것이다. 내가 어느 날 미쳐서 하면 몰라도. 세상에 이런 병신 같은 이별이 또 있을까. 내 호구 같은 연애는 그렇게 허무하게 끝났다. 다시는 이런 연애 따위 안 하겠다는 허무한 다짐만을 남기고.

여자친구랑 하고 싶은거 망상

- 주말 느즈막하게, 큼지막한 노계로 백숙 푹 삶은 다음, 감자도 삶아서 소금에 찍어 먹으면서 약간 어두운 방 안에서 오래된 음악 들릴락말락하게 틀어놓고 옛날 영화 나른하게 보기 

- 피곤하다고 졸립다는 여친 낮잠 재우고 혼자 방 안에서 글 쓰다가, 슬슬 일어날 즈음에 두부찌개 끓여서 일어나면 같이 먹기 

- 눈 펑펑 내리는 날 같이 손잡고 걸어다니면서 서운했던거, 미안했던거 이야기 해보기. 단 지나치게 최근 이야기는 금지. 

- 둘 다 별로 안 좋아하는,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즐겨 먹는 음식 같이 도전해보기

- 둘의 미래에 대한 연간 플랜 함께 짜보기

- 제주도 올레길이나 남산 순환산책길 같은 장거리 산책길 최소 2시간 이상 함께 천천히 걷기 

- 둘의 사진으로 함께 한 시간들에 대한 동영상 만들어 관람하고 쿨하게 삭제하기 

- 아침부터 하루 왠종일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쇼핑하고 필요하다면 헤어샵이나 메이크업샵, 피부과에 들러서 제대로 단장하기 

- 하루 날잡고 서로 읽을 책 가져오던가 서점 가서 좋아하는 장르 책 각각 사서 죽 독서하고 줄거리 실감나게 들려주기

- 아침종일, 어느 한쪽이 항복할 때까지 하다 쉬다 하다 쉬다 하며 체력 올인 날 때까지 섹스하기. 그리고 진쪽이 소원 하나 들어주기  

- 서로 헤어졌다고 상상하며 상대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 써보기. 그리고 거기에서 나온 이야기들 진지하게 생각해보기  

- 서로의 한 10번째 취미생활 같이 해보기 

- 토요일 어느 낮에 꽤 멀리 차 타고 나가면서 괜히 휴게소 두 세 군대 들려서 이것저것 사먹고 부대끼는 배 안고 한참 더 내려가다가 대충 충남~전북 어드메의 바닷가에서 바닷바람 잠깐 쏘이고 다시 빠꾸해서 돌아와 피곤에 쩔어서 정신없이 자다가 새벽에 일어나 폭풍폭풍하기 

- PC방 가서 요즘 핫한 온라임 게임 최소 10개 레벨 이상 함께 올리며 그 와중에 라면 및 만두 등 간식 배불리 쳐먹기  

- 싸구려 권투 글러브(최소 12온스) 및 헤드기어 사서 방에서 3R 권투하기   

- MBC 또는 BBC 명작 자연다큐멘터리 3개 구해다놓고 치킨 및 피자 뜯으며 끝까지 보기

- 나는 여자인 척, 여친은 남자인 척 하며 랜덤채팅 사이트에서 상대 꼬셔보기(단, 섹스어필은 반칙)  

- 최소 1시간 동안 전신 마사지 해주기

- 나이 쳐먹을만큼 쳐먹고 이런 초딩 저학년 연애장 같은 망상글 안 쓰도록 제대로 연애하기  

'생각보다 짧은 시간2'를 낼까 생각 중인데요 망상


믿기지 않는데 벌써 이게 7년도 더 된 이야기. 그리고 찍어낸 책의 절반도 못 팔았다는(많이 찍지도 않았는데) 사실은 눈물나게 슬픈 이야기. 그러면서도 또 2를 찍어볼까 고민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소식.

판로(카드결제), 폰트, 디자인, 배송, 신작 내용의 비율 등 지적된 모든 문제를 싹 해결한 2를 준비하고는 있지만 애초에 '2'라는 타이틀을 다는 것부터 고민인 이 저주받은 책을 찍어내고 싶은데, 혹시 나온다면 살 사람 있을까요?

혹시 썩어 남아도는 돈을 투자하여 이 시대 마지막 표현의 자유와 똥글문화의 정수를 화려하게 꽃피워 보실 분?


- '똥글문화의 정수를 꽃피운다' 하니까 문득 어울리지도 않게 떠올린 꽃 이야기 -

위의 화분과 바알간 느낌의 꽃은 나름 무난해 보이는 겉모양과 달리, 꽃향기가 아주 역한 식물입니다. 시체 썩는 냄새에 가까울 정도로 역겨운 냄새라고 합니다. 그래서 '시체꽃'이라는 불유쾌한 별명까지 갖고 있죠. (정식명칭은 좌:titan arum, 우:Rafflesia)

하지만 그 덕분에 파리나 딱정벌레 등 온갖 역겨운 냄새를 좋아하는 벌레들을 불러모으고, 그 덕분에 꽃가루를 퍼뜨려 수정시킨다고 하는군요. 벌이나 나비가 아닌, 파리와 딱정벌레가 어울리는 그런 꽃.

웃기지만 저는 바로 그래서 이 꽃들이 좋습니다.

상기한 이유로 다른 꽃들처럼 향기롭지도 않고, 덕분에 사람들에게 사랑받지도 못하지만 그래도 그 나름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자신이 필요로 하는 목적(수정)을 묵묵히 달성해내고는 쿨하게 썩어 사라지는 모습이 저에게 묘한 감동까지 전해주니까요. 

당장 이 블로그의 프로필 사진을 장식하고 있는 무궁화(예전에는 분홍색 무궁화 이미지를 사용했습니다만, 작년에 흰 무궁화로 바꿨습니다)도 사실 진딧물 등 해충 잘 끼기로 유명한 꽃이죠. 오죽하면 벌레가 너무 잘 끼니 국화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소리까지 있었을 정도로요. 그러나 그럼에도 여전히 당당히 이 나라의 나라꽃으로 그 자태를 뽐내고 있다, 라는 사실을 함께 떠올려보면 역시나 묘한 감회에 젖게 됩니다.

세상에는 분명 장미나 백합처럼 아름다운 사람도 많지만, 그보다 이름없는 들풀이나 흔해 빠진 야생화에 가까운 분들도 많을 겁니다. 아마도 훨씬 더 많이. 게다가 개중에는 저처럼(?) 역겨운 냄새의 시체꽃이나 다가서기 힘든 선인장 같은 분들도 있을테구요.

그러나 저는 그 모두를 응원하고 싶습니다. 장미의 화려함만큼이나 코스모스의 수수함도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벌레가 끼고도 까딱않고 꽃을 피워내는 무궁화도 멋지다고 생각하며, 처절하게 그 목적을 달성해내는 시체꽃의 장렬함도 좋아하니까요. 그리고 저처럼 시체꽃의 장렬함에 새삼 주목해주는 사람들이 세상에 조금만 더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많아도 곤란하겠지만.

예감 소설

나는 형광등 불빛이 싫다.

"아 김형 뭐해"
"아아, 화장실 좀"
"에헤이, 이 양반"

길게 뿜어낸 뽀오얀 담배연기에 흐려지는 형광등 불빛은 그나마 좀 짜증이 덜하다. 목을 뒤로 크게 젖히며 그 뻐근함을 달래다 형광등 눈부심에 또 눈살을 찌푸리고 만다. 세상에 어느 시대 하우스인지 여기는 아직도 이래 눈 다 배리는 시스템으로 침침하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 물론 잔챙이들 판이고 나도 잔챙이니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지마는.

"싸겠네 싸겠어, 한판 돌리고들 계십쇼"

흐름을 바꿀 때가 됐다. 저리는 다리를 주무르며 일어나, 어슬렁 어슬렁 문을 나서서 화장실로 향한다. 옆 방의 여사님들 또 깔깔대며 "났네 났어"하고 박수 치는 모습이 그저 우습다. 같은 노름판도 어째 다 늙은 고추밭과 덜 늙은 조개뻘은 느낌부터가 다르다. 지 돈 놓고 치는 놈과 남의 돈 놓고 치는 것들의 차이일 것이다. 혀를 끌끌 차고는 화장실로 들어가 바지 자크를 내린다.

"후우우"

장 사장인가 하는 그 새끼가 자꾸 이빨 세간에 낀거 뺀답시고 쯥쯥거리는 소리가 역겁고 거슬린다. 거기에 신경이 쓰여 자꾸 판이 개처럼 흘러간다. 나라고 코 안 후비는건 아니지만.

"시발, 왜 이러냐고"

오줌발이 마른다. 하여간에 누군가들에게는 당연히 해야하고 아무렇지 않은 평범한 일들이 누군가에게는 미치도록 어렵다. 나이 마흔 다섯에도 중심 못 잡고 흔들리는 내 인생이 그렇고, 노름이 그러하며, 이 오줌발이 또 그렇다. 개좆같이.

"아 쫌 씨발"

하여간에 내 팔자는 항시 뭘 사소한 것을 해도 그저 큰 마음 먹고 겨우겨우 정신 집중을 해야 간신히 진행이 가능하며, 그러면서도 결국에는 역시나 실패하고야 마는 것이다. 뭔 짓을 해도.

"허"

그런데 또 그렇다고 쉽게 포기할 수도 없는 것은, 뭐같이도 망가져가다가도 어쩔 때는 일이 기가 막히게 잘 풀려나가는 것이다. 드디어 오줌발이 가늘게 시작해서 점점 굵어진다. 방광이 비어가며 기세 좋게 뿜어져 나간다. 그래, 이거지. 다만 이런 발작성의 기쁨은 역시나 지속될 리가 없고 않고 그저 순간순간 찬란하게 빛난 기억만을 남길 뿐이다. 그저 그 이후의 삶에서 그것을 끝없이 되새김질하고 다시 꺼내들 좋은 맛땅콩이 될 뿐.

"아 시발 이건 또 왜 이래"

세면대에 물이 안 나온다. 어디부터 무슨 이야기를 하다 이렇게까지 흘러왔는지는 모르겠는데 어쨌거나 물이 안 나온다. 짜증나게. 물이 튄 자국들을 봐서는 물이 좀 전까지도 나왔던 거 같은데. 왜 이건 물이 안 나와?

"에에이 시벌"

세수 한번 하고 다시 딱 정신을 차려야 되는데 물이 안 나오니 짜증이 난다. 아무래도 오늘은 영 끗발이 안 붙는 날인가 보다. 재수가 오질나게 없다. 휴지로 슥 손에 묻은 오줌방울 닦아버리고는 "딱 한 판만, 흐름만 보고 일어나자" 중얼거리고는 화장실을 나서 다시 내 개대가리 몽롱하게 만드는 형광등 불빛 아래 눅눅한 방석 위로 자리 잡는다.



"크흡, 크르릅"

남 드럽다고 욕한지 10분이 안 됐건만 자꾸 내 목에선 가래가 끓는다.

"퉤"

아까 사과 깎아먹은 접시 위에 농도 짙은 굴 한 사라 뱉어놓고는 패를 집어든다. 휴지로 덮을까도 싶건만 그냥 접시를 내 엉덩이 뒤로 돌린다. 패는 개패다. 뻐근해지는 뒷걸미에 딱 1초 정신을 정신을 다른 세계로 흘려보냈다가 서서히 내 대가리 속으로 돌려놓는다.

"아… 시발. 오늘은 그냥 좆이네 좆!"

힘차게 좆!을 외치며 패를 내리친다. 그러나 또 쌌다.

"에헤, 시발"

쨍하니 눈을 침침하게 하는 형광등 불빛에 그렇게 어렵게 빌린 400이 또 허무하게 날아가 버리는 것을 멍하니 깨닫는다. 그래 내 돈 깨지는걸 남의 일 보듯 동태눈으로 게슴츠레 하게 보다가 그렇게 판을 접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 갑니다"

골 깨지고 등 돌리는 놈한테는 안부인사도 고깝게 들리는 법인라 다들 책 잡히기 싫어선지 별 말들이 없다. 나는 그 소심함들이 웃겨 픽 웃고는 마이를 챙긴다. 그리고는 현관을 나서며 뒤늦게 뽀찌라도 좀 달라고 할걸 그랬나 후회하다가 가오 생각에 어깨 으쓱하며 구두나 똑바로 고쳐 신는다.

"춥구만"

대가리 속으로 이제 다음 주에는 또 어디서 돈을 마련해 오나, 그래야 성주 돈이라도 좀 메꿔놓을텐데 하고 걱정이 되면서도 왠지 그리 썩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것을 보면 분명 어디선가 돈이 또 생기기는 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언제나 그렇듯이 근거야 없지만서도, 그냥 그런 기분 좋은 예감이 든다. 어느새 첫 눈이 소복하게 쌓였다.

낙지볶음밥 소설

온 세상이 환하다 못해 찬란히 빛나던 그 여름날. 내리쬐는 태양볕에 편한 차림으로 나온 그녀.

"그 옷 잘 어울린다. 이쁘다"
"이거? 맨날 집에서 입는 옷인데? 완전 구린 옷인데"

빛바랜 자주색의, 누가 보아도 그냥 집에서만 입었을 법한 보푸라기 일어난 티셔츠였지만 그냥 그 편한 모습이, 나에게 보여주는 그 꾸미지 않은 모습이 좋았다.

"사실 나 오늘 머리도 안 감았다?"
"으이구, 자랑이다"

깔끔 떠는 누군가들이라면 조금 실망스러울 수도 있을 말이련만, 나는 그녀의 그런 소탈한 모습이 더 좋았다. 이제 서로가 모든 것을 다 보여줄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는 증명처럼 느껴져서.

"엄마가 옷 다 빨아버렸어. 그래서 이거 입고 나온거야. 나 오늘 완전 구리지?"
"이쁘기만 하구만 뭐. 얼른 밥 먹자"

사실 그 옷은 그리 예쁘지 않았다. 당연히. 그냥 촌스러운 디자인의 낡은 티셔츠일 뿐인데. 그렇지만 그녀가 입어서 예뻤다. 얼굴도, 옷도 다. 그냥 나한테는 다 한없이 예쁘게만 느껴졌다. 행동 하나하나가 다 귀여웠고, 더 챙겨주고 싶었다.

그녀는 그 옷을 꽤 오랫동안 입었다. 3년, 아니 4년? 어쩌면 그보다 더.

언젠가의 전화로 "그 옷 말이야. 니가 좋아했던 옷, 빨래했는데 찢어졌어"하고 그녀가 보고할 때까지. 사실 난 그 '좋아했던 옷'이라는 말이 어떤 옷을 칭하는지도 몰랐다. 그저 "아 그래? 아깝네. 내가 또 이쁜 옷 사줄께"하고 맞장구 쳤을 뿐.

그로부터 한참 후에야 "근데 요즘 왜 그 자주색 티셔츠 안 입어?"하는 내 질문에 "저번에 찢어졌다고 했잖아"라는 답을 들었을 때야 깨달았다. 무심한 척 해도, 내 칭찬 한 마디 한 마디를 신경쓰고 있었구나, 하고.

"어디 갈까"
"코코스 가자"

그녀 집 근처, 동네의 뜬금없는 올드한 분위기의 경양식 레스토랑. 어처구니 없게도 음악은 힙합 음악이 나오는.

"뭐 먹을거야?"
"낙지볶음밥"

사실 물어볼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메뉴는 항상 똑같았다. 나는 김치볶음밥, 그녀는 낙지볶음밥. 사실 코코스의 음식은 지나치게 기름이 과해서 별로 맛있지 않았다. 단지 음악과 배경의 언밸런스가 묘하게 마음에 들었고, 그녀가 맛있게 먹는 모습이 좋았을 뿐이다.

"와, 맛있겠다"

기름 범벅의 느끼한 김치볶음밥. 그 나름의 맛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좋아하는 맛은 아니다. 그녀의 낙지볶음밥도 마찬가지였다. 역시나 기름 범벅의 맛.

"가끔 와서 이 기름진 맛 먹으면 너무 행복해. 특히 이런 날"

바로 그 행복해 하는 얼굴이 좋았다.

"이 가게 엄청 오래된 가게야. 내가 여기 처음 이사왔을 때도 있었어. 거의 한 10년 된 가게야"
"좋구나"

그래, 사실 너와의 사랑도 그 이상으로 오래가길 빌었다.

자국 소설

"에이 씨팔!"

큰아버지는 현관문을 세게 걷어차고 나갔다. 발로 걷어차인 현관문 가운데는 움푹 패였고, 폭풍이 지나고 난 듯 엉망이 된 집구석에서 어린 여동생은 눈물을 훔치며 찢기고 내팽겨쳐진 캐릭터 달력을 집어 방으로 들어갔다. 겨우 조용해진 거실에서 큰아버지의 고함과 폭언에 시달리던 아버지는 목의 할퀸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휴지로 닦아내고 있었다.

"후"

울다 못한 엄마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긴 한숨을 내쉬며 갑자기 장농 한 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뻔했고, 갑자기 화가 오른 아버지는 다시 방으로 뛰어들었다.

"에이 씨발!"
"너 그냥 나랑 이혼해"

그녀가 장농에서 꺼낸 것은 언젠가의 이혼 서류였다. 엄마의 목소리는 결연했다. 가정은 파탄 직전에 이르고 있었다. 이미 지난 번 일로 부부의 결혼 패물은 모두 사라졌다. 그 흔한 은가락지 하나 없어졌다. 아버지는 몰래 또 큰아버지에게 도장을 찍어주었고, 뒤늦게 그것을 안 엄마는 큰아버지를 소환해 해명을 듣고자 했다. 하지만 역시나 앞뒤 맞지 않는 거짓말에 엄마도 감정이 격해졌고, 아버지도 어느 시점이 지나자 그제서야

"나한테 한 말이랑 다르잖아. 무슨 소리야 또 그게"

하며 멍청하게도 자신이 또 한번 속았음을 가족 앞에서 인증했다. 나이 쉰을 슬슬 바라볼 두 어른의 거친 몸싸움을 어린 아이들이 울며 지켜봤고, 그 둘을 말리던 엄마는 아예 그 둘이 보는 앞에서 집문서를 찢어버렸다. 어차피 이미 그 권리는 남의 것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래도 말을 듣지 않자 식칼을 꺼내들고 그냥 다 죽자는 엄마의 행동에 그제서야 형제는 싸움을 멈추었다. 이후에도 한참이나 이어진 엄마의 광기 어린 퍼포먼스에 뒤늦게서야 그 나이 먹은 괴물은 현관 옆 벽지에 긴 할퀸 핏자국과 흉측한 발자국을 현관문에 남긴 채 우리 집을 떠났다.

감정이 가라앉자 엄마는 차분하게 이혼을 요구했다. 아버지는 한참 동안의 설득 끝에 좌절감마저 느끼며 급기야 그녀 앞에 맹세했다. 형제애와 가족에 대한 책임감의 기로에서, 드디어, 드디어 그 후자의 중요성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만약 5년 만, 아니 반 년 만이라도 먼저 그것을 깨달았다면 온 가족의 미래가 훨씬 더 긍정적으로 변했겠지만 적어도 나로서는 아라를 고아원으로 보내지 않을 수 있게 된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했다. 그리고 그 미련하고도 폭력적인 기억은 그에게 어떤 자국으로 남았다.




자국




"와, 대박이네"

앨범을 넘기며 마음 속 한 구석이 쓸쓸해졌다. 입으로는 가영이의 어린 시절 모습을 찬양했지만, 그보다 진정으로 마음을 건드렸던 것은 가족여행 사진들이었다.

"여긴 어디야?"
"태국"

그 흔한 해운대, 그 흔한 제주도, 그 흔한 경포대, 그 흔한 63빌딩 가족사진 하나 없는 우리 집. 물론 나는 당연히 그 모든 것과 전 세계 곳곳을 수도 없이 싸돌아 다녀봤지만 그 모든 것은 연인 혹은 혼자 떠난 여행이었다.

"좋았겠네"
"응 정말 재밌었어. 이때만 해도 할아버지 살아계실 때였는데"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난데없이 눈물을 글썽이는 가영. 당황스럽고 귀여웠지만, 나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느낀다. 일가친척의 이야기에 그리움과 행복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는 사실이. 얼른 휴지를 뽑아들어 닦아주며 "어휴, 눈물도 많다" 하며 피식 웃으면서 마음 한 구석이 괜히 아프다. 화목한 가족여행이라.

"오빠는 가족여행 다닌 곳 중에 어디가 제일 좋았어?"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가영이가 의문을 품을 정도의 어색한 긴 뜸을 들인 끝에 "우리 집은 나 빼고는 다들 여행을 싫어해서, 중학교 때 이후로 가족여행 다닌 기억이 없어" 하고 대답한다. 그녀는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모든 것에 앞서 이렇게 상대의 말을 순수하게 믿을 수 있는 구김살 없는 마음이 부럽다. 우울한 상념에 빠질 것 같아 화제를 전환한다.

"가영아, 출출한데 우리 피자 시켜 먹을까?"
"좋아!"



그녀의 집에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많은 생각들을 했다. 큰아버지가 우리 집에 지운 빚만 아니었다면, 그랬더라면 정말 많은 것들이 달라졌을텐데.

아버지의 엔터프라이즈, 옛날 사진 속 어머니 가슴팍의 화려한 브로치, 내 유년기 마당의 그네, 마당의 미끄럼틀. 앨범 속 사진으로만 확인 가능한 그 행복했던 나날들은 결코 그 이후로 이어지지 못했다. 가족 행복을 담보로 한 부부의 헌신과 희생은 다행히도 수렁에 빠질 뻔한 가족 모두의 인생을 구원하고 정상 궤도로 올려놓기는 했지만 그 대가로 감내해야 했던 것도 있었던 것이다.

"엄마"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별 일은 아니고 그냥. 뭐하는데. 병원 간다고? 어. 아냐 진짜 그냥 한거야"

밥은 먹었냐, 뭐 힘든 일 있냐, 가영이랑은 잘 지내냐 등등등, 언제나와 같은 그녀의 관심사.

"아니 그냥. 뉴스보다가 사기꾼 뉴스가 보이길래, 문득 영감 생각나서"

그러자 엄마는 한숨부터 내쉰다. 그러고서는 "니 애비가 바보 짓만 안 했어도… 그래도 니 애비 그 이후로 평생을 죽어라 일했잖냐. 빚 싹 다 갚고 그 말단에서 거기까지 올라간거 생각해보면 니 애비도 대단한 양반이야. 사람이 모질지 못하고 정이 많아서, 그리고 순진해서 뭘 몰라서 그랬던거지. 그러니 니도 정신 똑바로 챙기고 돈 날리는거, 보증 스는거 이러는 거는 꿈도 꾸지 말어. 하긴 뭐 니는 약아빠져서 걱정이 없는데, 아라 걔가 걱정이지. 기집애가 지 애비 닮아서 귀가 얇아서" 하며 한바탕 교양을 하신다.

"아 알았어 알았어. 또 잔소리. 됐고, 몸 잘 챙겨. 영감 또 혹시 뭔 허튼데 도장 안 찍어주나 감시 잘하고"

그 말에 장 여사는 "그랬다가는 아주 내가 손가락을 다 짤라다 내버리지 뭐" 하며 웃는다. 그래, 이제는 그녀도 그 긴 어둠의 시간을 두고 웃을 수 있다. 우리 가족은 그 시간들을 이겨낸 것 같다. 꽤 오랜 시간 가족 개개인에게 각자의 입장에 어울리는 고통을 안긴 깊은 상처였지만, 이제는 모두 극복하여 아문 흉터자국에 불과하다.

저녁이 머지않은 늦은 오후의 따뜻한 햇볕을 정수리로 받으며, 가영이의 무어라 무어라 하는 카톡에 대답을 하는 대신 나는 조금은 편안해진 마음으로 버스 안의 짧은 수면을 만끽한다.

- 끝 -

회복 실화

블로그에 글을 안 올린지 두 달이 넘었다. 이 글의 제목 때문에 오해했을 수도 있겠지만 어디 아파서 그런 것은 아니다. 일종의 슬럼프가 왔다. 언제나 스스로에게 하던 말인 '전성기도 없었는데 슬럼프는 또 뭐냐' 하고 비웃었지만 사람이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된다. 글이 안 나온다.

'어?'하고 간만에 신호가 와서 변기에 앉았지만 여전히 똥은 끄트머리만 나올락말락하다 결국 나오지 않는 좆같은 마른 변비. 마치 그처럼 '어?'하고 좋은 아이템이 떠올라 블로그에 접속해 글을 끄적이다가 겨우 두어단락 쓰다가 결국 맥이 딱 끊긴다. 하. 시펄.

두 달 동안 손을 놓고 있었냐면 또 그렇지는 않은 것이, 쓰다가 만 글만 30개쯤 된다. 기본적으로 나는 전문적으로 글을 배운 적이 없다. 그 흔한 '글 쓰는 법' 책조차 본 적이 없다. 기초를 쌓고 체계적으로 글을 만드는 타입이 아니라, 순전히 감으로 죽 써내려가며 시원하게 싸는 타입이라 더욱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모른다. 똥 잘 싸고 싶어서 똥을 공부하는 인간은 없는 것처럼, 나에게 글은 그와 같았던거다.

그리고 진짜 문제점은 다른 곳에 있는데, 근본적으로 똥은 지극히 은밀하고 프라이빗 할수록 잘 나오는 법이다. 설령 스캇물 비디오를 찍어 파는 인간이라고 할 지라도 그 똥싸는 모습을 아는 사람에게 보이고 싶어하는 인간이 얼마나 있을까. 그런데 이 블로그는 기본적으로 내 주변에도 아는 사람들이 있다보니 나도 모르게 표현이나 흐름에 있어서 자꾸 위축이 되고 마는 것이다. 게다가 사회 분위기도 영 거시기하고 말이지.

특히나 '찌질하고 빌빌거리는 인간군상'에 관한 글을 쓰고 있노라면 어느새 '아 쫌 구리네' 하는 생각에 똥을 다 싸지도 않았는데 물을 내려버리고 만다. 그리고 대충 휴지로 닦고 마무리를 해버린다.

하지만 굉장히 새삼스레 오늘 나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진짜 찌질한 것은 '찌질한 인간군상의 글을 쓰는 나'가 아니라 '찌질한 인간군상의 글을 쓰는 자신의 모습이 찌질하게 보인다고 생각하는 그 모습'이 찌질한 것이다. 애시당초 나는 그리 대단히 잘난 사람이 아니다.

변비를 치료하는 방법은 그저 똥 마려울 때 바로바로 화장실 가서 싸고, 그 똥이 얼마나 쾌변인가를 생각하는 대신 그냥 조금이라도 싸면 좋고 아니면 마는 것이라 했다. 슬럼프 탈출을 위해 당분간은 나도 그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근데 참고로 나는 변비는 아니다. 오히려 너무 자주, 잘 싸서 문제인 사람이다)

어차피 나는 잃을 것이 없다. 나는 문단의 대가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촉망 받아가며 큰 기대를 받는 사람도 아니다. 그저 시원하게, 쾌변의 기분을 만끽하듯 싸면 되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 슬럼프를 탈출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 글변비를 탈출하는 방법이리라 확신한다.

밥도둑과 밥경찰 소설

여기는 냉장고 교도소. 오늘도 그 안의 온갖 흉악한 밥도둑놈들이 하릴없이 수다로 시간을 때우고 있다.

"야, 너는 근데 여기 왜 들어왔냐? 내가 진짜 한달째 여기 들락거리면서도 구운 스팸이 들어오는건 첨 봤다. 스팸은 무조건 한끼컷 아니냐?"

밥절도 미수 혐의로 체포되어 냉장고에 갇힌 깻잎절임 할배가 새로 들어온 구운 스팸을 향해 물었다. 스팸은 쑥쓰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다 "갈비찜에 밀렸어요" 하고 대답했다. 그 말에 칸 안의 모두가 "하여간에 굽는 놈 위에 비싼 놈이라니까" 하고 낄낄댔다. 그러나 그 작은 소란에도 불쾌한 심기를 감추지 못한 밥강도 장조림이 말했다.

"다들 조용히 안 하냐? 시끄러워 뒤지겠네 진짜"

그러나 그 아래 칸에 조용히 있던 '대도' 간장게장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따 이제는 여 냉장고서 지방 허옇게 말라붙은 퇴물도 어깨 힘 팍 주는구마잉, 재미쓰브러. 나가 이 집게발로 좍좍 결대로 찢어벌랑게"

장조림과 간장게장. 각각 육고기파와 해산물파의 행동대장격인 둘이 으르렁 대자, 냉장고 안에는 새삼 한기가 돌았다. 그러나 타파 사무실 안에 있던 가지무침 아재가 소리쳤다.

"어디 도동노무 쉐리들이 입을 열고 있어? 엉?"

가지무침. 냉장고에 한번 들어갔다 나오는 순간 시퍼러죽죽해져 다시는 젓가락 댈 일이 없어지는 반찬계의 로보캅, 식탁 위의 투갑스, 밥상적 더티 해리. 이 밥경찰이 타파통을 쾅쾅치며 소리치자 이제는 냉장고의 위잉- 하는 모터 소리만이 작게 울릴 뿐이었다.

그러나 문짝 한 켠에서 조용히 있던 고추장 성님이 "거 좀 대충 삽시다, 원 지랄들도" 하며 무게를 잡았다. 고추장 성님. 그가 누군가. 육백년 전 임진란과 함께 일본에서 전래된 이래 한반도 밥상을 주름잡은 밥피아, 고추 가문의 적장자로, 그저 그가 한번 몸을 발랐다 하면 그 어떤 난다긴다하는 반찬들도 그저 그의 영향력 아래 지배받게 되는 거물. 쌈장, 초고추장 등의 형제들도 다들 한가락 하는 밥도둑 지원책들 아닌가.

특히 그의 진정한 힘은 참기름을 동원해 밥경찰 가지, 밥형사 고사리 같은 경찰측 인물들은 물론, 밥찰청장 오이지마저도 주무르는 강력한 영향력에 있었다.

무엇보다 아무리 맛이 없다한들, 하다못해 '버려져서라도' 냉장고를 탈출할 수 있는 다른 반찬들과 다르게, 먹히기 전까지는 이 지옥같은 냉장고를 벗어날 수 없도록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장류'라는 사실이 다른 반찬들에게 새삼 엄청난 위압감으로 다가오기 마련이었다.

다들 조용히 입을 다문 그 순간, 장조림이 코를 킁킁대며 입을 열었다.

"어? 이거 무슨 냄새야"

다들 코를 킁킁댄 순간, 스팸이 말했다.

"똥국이다!"

그러자 옆에 있던 밥매치기 오뎅볶음이 스팸의 기름친 몸을 툭 치며 웃었다.

"미친 놈아, 뜬금없이 밥모총장이 왜 와. 여기가 무슨 군부대냐. 찌개파 아냐. 된장 성님"
"아, 그렇구나"

둘의 조잘거림을 뒤로 하며, 문쪽 윗줄의 대머리들이 자세를 잡기 시작했다. 계란파 애들이었다.

"아따 간만에 된장 성님 오셨구마잉. 오늘 또 한번 주인 아재 아가리 속에서 뜨겁게 섞여 부러야제"
"시벌 또 가오 떨어지게 후라이, 쓰니싸이드 안 허고 스크램블인가 뭔가 쳐하면 피곤헌디"
"뭔 소리여, 남자는 찜이제"
"왐마? 계란은 말이제, 계란말이!"

그 어느 때보다 왁자지껄한 그들의 수다였음에도, 그 어느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계란파… 밥카르텔 '치킨' 가문의 막내아들들인 그들은 과연 냉장고 안, 식탁 위의 그 어떤 반찬들과 어울려도 전혀 밀리지 않고 항상 충실히 밥을 해치워내는 똘똘한 녀석들인고로, 그 누구도 시비를 걸지 않았다. 고추장 성님은 특히나 자애로운 얼굴로 녀석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근데 전부터 궁금했는데, 찌개파 된장 형님이랑 똥국 밥모총장은 어쩌다 그렇게 다른 길을 가게 된 건가요? 원래 같은 집안 아니에요?"

스팸의 질문에 늙은 대도 '깻잎절임' 할배가 실실 웃으며 대답했다.

"둘이 원래 쌍둥인데, 저 찌개파 된장이는 욕심이 많어. 그래서 지가 두부며 팽이버섯이며 버섯이며 싹다 가져다가 쫄여대니 밥도동놈이 된거고, 똥국이는 그냥 시벌 맹물에 된장이나 있는대로 풀어다가 다시다도 없이 마냥 끓이니까는 짜든가 싱겁든가 맛이라고는 쥐좆만큼도 없어진거고. 그러니 된장 가문 출신 주제에 훔치라는 밥은 못 훔치고 외려 그릇에 퍼놓은 밥도 다시 돌려놓는 밥경찰, 밥군대 짓을 하게 된건데, 이게 수십년을 그 짓을 하니 이제는 짬밥으로도 그냥 밥모총장이 된거지. 아마 얼마 뒤면 먹방부장관도 할걸"
"안타깝네요"

하지만 깻잎절임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사내가 거까지 가봤으면 멋있는거 아냐? 똥국이 딱 나서면 그 뒤에 조기튀김에, 코다리에 해물비빔에, 아주 쟁쟁하잖아? 얘들만 믿고 있으면 대한민국에 쌀 부족할 일은 영원히 없겠구나 생각도 딱 들고."

그리고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냉장고 문이 활짝 열리고, 역시나 계란파 넷이 자유의 몸이 되었다.

"하 부럽네"

다시 냉장고 문이 닫기고, 잡범 멸치볶음이 탄식을 쏟아냈다. 갓 볶아진 직후에는 화려하게 고슬고슬한 밥을 쓸어가며 아주 잠깐 빛나지만, 한번 냉장고 속에 들어가면 어지간해서는 잘 나갈 수도 없고, 나간다 해도 젓가락질의 성은은 입기 어려운 그의 탄식이었기에 모두들 씁쓸하게 혀를 찼다. 특히나 그가 그 다음 말에 모두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꿀맛무죄, 노맛유죄네 염병할"

밥을 아무리 많이 훔쳐대도 맛만 있으면 아예 냉장고에는 잘 들어오지도 않고, 들어온다 하더라도 곧바로 빠져나가는가 하면, 밥은 생전에 딱 한 숟갈만 훔쳐도 맛이 없다는 이유로 한번 냉장고에 구속되면 쉬어 터져나가다 못해 곰팡이 피는 날까지 냉장고 속에 쳐박히거나 그저 밥상만 들락거리는 신세가 되어버리는 노맛반찬들의 신세.

"에휴"

다들 긴 한숨을 또 한번 내쉬었다. 특히나 지난 주에, 세상에 '보스' 양념치킨이 냉장고에 들어왔을 때는 다들 기겁을 했다. 아예 쌀을 밀어내고 식사를 대신하다 못해 '치밥'이라는 형태로 밥알까지 싹싹 털어가던 악질밥기꾼이 냉장고행이라니?

"오오냐, 세상이 이제야 제대로 돌아가나보다, 영양가가 중요하지, 어? 맛이 중요해? 망할 통풍 유발자 새끼"

하며 마늘쫑 특별밥검사가 통쾌하다는 듯 이를 북북 갈았음에도 그러나 허무하게 다음 날 아침 유유히 냉장고를 빠져나가 전자렌지 호텔로 가는 양념치킨의 모습을 보고 다들 온갖 욕을 다 했었다.

그러나 그때였다.

"야, 잠깐만. 이거 또 무슨 냄새야? 어?"
"잠깐만 잠깐만!"
"오, 삼겹살 냄새다"

삼겹살 냄새가 풍기자, 신선칸 한 구석에서 다 죽어가던 특수밥강도 상추와 깻잎이 갑자기 일어나 부둥켜 안고 울기 시작했다.

"오 이대로 뒤지는 줄 알았는데"
"아 진짜…상추 형님…"
"야 시발 진짜 뒤지라는 법은 없구나"

혼자서는 그 무엇도 하지 못하는 쩌리들이지만, 대한제육회와 연줄이 있는 그들은 쌈밥특별법에 의거하여 구제될 것이 분명했기에 다들 부러워하는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밥 다됐다"

주인 아지매의 목소리에 냉장고의 모두는 긴장하기 시작했다. 이제 냉장고의 문이 열리면 다시 한번 세상의 빛을 볼 수가 있으니까. 잠시 후 냉장고 문이 열리고, 하나둘씩 식탁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와"

깻잎절임 할배가 놀랍게도 1순위로 뽑혀 나갔고, 역시나 상추와 깻잎이 뒤따라 나간 고추장 성님과 함께 자유의 몸이 되었다. 오뎅볶음이 식탁으로 향하고, 그 아래칸의 장조림과 간장게장이 조금 긴장을 시작했다. 나름 밥털이계의 거물들인데 식탁으로 향하지도 못하면 쪽팔린 일. 그러나 역시나 둘은 곧바로 식탁으로 향했다. 또 놀랍게도 특별밥검사 마늘쫑이 식탁으로 향하자 구운스팸은 놀라 "와, 마늘쫑 저 분이…" 하며 감탄했지만, 옆에 있던 양파절임이 피식 웃으며 말을 걸었다.

"어차피 잠깐 나갔다 들어오는거야. 우리 같은 밥찰은 짬년퇴직 당할 때까지 그냥 쭉 냉장고 왔다갔다만 하는 거라고"
"그렇군요"



한편 구운 스팸은 반나절만에 꽤나 꾸덕꾸덕해진 자기 몸을 보며 '과연 내가 입 속으로 들어가는 날이 올까' 하며 불안함을 느꼈다. 어쨌거나 다른 양반들은 그래도 다들 제 모습을 그대로 갖추고 있는데, 자기만 불과 반나절만에 초라해진 느낌이다.

'시발'

게다가 자존심이 상했다. '깻잎절임' 할배도 그러지 않았던가. 냉장고 생활 한달만에 구운 스팸이 냉장고 들어오는 것은 처음 봤다고. 부끄러웠다. 왜 나만. 아까 냉장고 문이 살짝 열렸을 때 식탁 위로 힐끔 보인 연쇄쌀인마 김자반을 보노라니 억울하기까지 했다. 왜 나만 냉장고에 쳐박혀야 하나. 나보다 더 악질적으로 밥을 털어댄 놈들도 많은데.

'끝난건가'

스스로가 새삼 비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집은 벌써 아침에는 갈비찜, 점심에는 삼겹살을 먹었다. 저녁에 뭘 먹을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또 말라 비틀어진 스팸을 다시 기름 둘러 굽기까지 하면서 되살려줄까? 게다가 냉장고 안에 반나절 있는 동안 스멀스멀 배어버린 김치냄새에는 덜컥 겁까지 났다.

'나 완전히 좆된거 아닐까'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지만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이대로 하루 이틀 더 말라가다가, 비참하게 쓰레기통으로 짬 당하는게 마지막은 아닐까. 허무했다. 풍운의 꿈을 안고, 통조림 속에서 뜨겁게 열처리까지 견뎠는데. 누군가의 뱃 속으로 들어가 영양분이 되는 영광을 누리고 싶었는데.

'흑…'

구운 스팸은 자기도 모르게 비참한 기름을 흘렸다. 아니 이젠 스스로를 '구운 스팸'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했다. '말라 비틀어진 스팸'이 보다 정확한 이름이리라.

"얘들아"

냉장고 문이 다시 열리고, 고추장 성님이 들어왔다. 전체 450g에서 그동안 먹을만큼 먹고 오늘 추가로 또 100g이 덜어져 이제 150g만이 남았지만, 그래고 최소 몇 주, 어쩌면 몇 달은 더 냉장고에 갇혀 있어야 되는 분량.

"다시 오셨습니까 형님"
"아 뭐."

씁쓸하게 웃는 고추장의 모습. 위압적으로 느껴졌던 그의 모습도, 새삼 가까이에서 보니 초라하게 느껴졌다. 과거의 영광은 지나갔다. '양푼에 비빔밥'으로 남은 찬밥 전부와 식탁의 잔반을 쓸어담던 그 시절은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 완전히 기업화 된 떡볶이 산업의 '쌀떡볶이'가 아니었더라면 밥피아 고추장 가문 자체가 이미 한참 전에 쌀도둑 명가로서의 위상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것도 업소용으로 납품되는 14kg 대용량 엘리트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지, 사실 저런 식의 어중간한 가정용 고추장은 냉장고 한켠에 쳐박혀 언제 불려질지도 모르는 처량한 신세로 지내는게 대부분 아닌가. 가끔 지보다도 어린 풋고추한테 찍히기나 하고 말이다. 쪽팔리게.

'하'

우울해졌다. 구운 스팸은 고개를 떨구고, 이대로라면 자기도 계란옷을 입기 전에는 사람 입 속에 들어갈 일 없겠다고 생각했다. 1500원 어육소세지들이나 하는 짓을 '스팸' 씩이나 되어서 해야한다니 기가 찼다. 그때였다.




"이거 고추장 버리자"

37살 백수인 이 집 큰 아들의 목소리. 정말로 냉장고 안의 모두가 깜짝 놀랐다. 아직 고추장의 형기는 150g 가까이 남았다. 그런데 출소라니? 고추장 본인도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툭하면 "아 반찬 이거 쉬었네" 식으로 깔끔을 떨어 수많은 반찬들을 짬시킨 밥법원장 큰아들의 양형사유가 들려왔다.

"이거 봐. 아까 재영이가 여 고추장통에다가 고기를 찍더라고. 이거이거 기름칠을 해놔서 이거 다 허옇게 말라붙어 굳었잖아. 드럽게"

오늘 이 집에 손님으로 온 둘째 아들의 어린 막내딸이 고추장에 잔뜩 묻힌 삼겹살 기름. 그것이 냉장고 안에서 허옇게 말라붙은 것이었다. 확실히 좀 보기에는 영 그렇긴 했지만, 식통령 아주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애기가 먹다 그런게 뭐. 그럼 거기만 걷어내면 되지"

그럼에도 큰아들은 완고했다.

"아 싫어. 걍 버려"
"에휴 유난도 유난도. 알았어, 이따 장 보러 갈 때 새로 고추장 사올게. 버려"
"오케이, 굿바이"

최종 선고가 났다. 고추장의 짬보석을 위한 냉장고 집행정지였다. 기적이었다. 물론 어느 반찬에게 있어서 '짬보석을 위한 냉장고 집행정지'는 치욕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이 추운 냉장고 안에서 기나긴 세월을 묵어야만 했던 고추장에게 있어서는 드디어 주어진 자유였다.

'와'

고추장이 영어의 몸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본 구운 스팸은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또 한번의 기적이 일어났다.

"아 맞다"

고추장을 버리기 위해 냉장고를 열었던 큰아들이, 스팸 구워놓은 것을 발견하고는 손가락으로 녀석을 집어먹기 시작한 것이었다.

"밥이랑 먹어, 그 짠 걸 그냥 먹니"

식통령의 제지에도 그는 막무가내였다.

"괜찮어, 맛있어"

냉장고 안에서 식어 빠지고 말랐어도 그래도 과연 스팸은 스팸. 큰아들은 냉장고 문을 열고 선 채로 남은 네 조각의 구운 스팸조각을 완식했다. 구운 스팸의 꿈은 결국 이뤄진 것이다.



"흐흐, 흐흐흐, 잘됐구만, 잘됐어"

열무김치를 꺼내기 위해 식통령이 잠깐 연 틈으로 그 모습들을 모두 지켜보고 있던 냉장고 옆 건물의 김치트라즈 김치전용수용소의 쉰김치 수용소장은 뜨거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지금은 개과천선하여 번듯한 밥무부 소속이지만, 한때는 그에게도 화려한 밥도둑의 시절이 있었다. 김장날 수육과 함께 제대로 한탕 하던 시절을 떠올리면, 역시나 한물 간 밥도둑들이 꿈꾸는 냉장고 탈옥의 꿈에서 짜릿함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형님"

그때 쉰김치에게 연락이 왔다. 참기름군이었다.

"어, 왠일이야"

물론, 쉰김치에게 참기름이 연락 왔다는 자체만으로 무슨 의도인지 감이 잡히는 일이었지만, 애써 쉰김치는 떨리는 목소리로 모른 척 했다. 그러자 참기름이 낄낄댔다.

"참 형님도. 이제 뭐 밥무부 소속됐다고 저 피하시는거에요?"
"으흠, 아니 내가 피하긴 뭘."

참기름은 미끌미끌 한참을 딴 소리만 하며 이야기를 돌리다가 드디어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형님, 제대로 한탕합시다. 이미 팀은 다 꾸려놨어요"
"누구"
"누구긴 누굽니까. 백설탕이, 참치, 마늘, 고추, 깨 다 팀 완성시켜놨어요. 형님만 오시면 됩니다. 볶음김치 한판 제대로 뛰어서 딱 두 공기만 텁시다. 그리고 딱 손 터는걸로"

전설의 밥행털이 팀, 볶음김치. 하루하루 무의미하게 보내던 쉰 김치에게는 짜릿한 제안이었다. 물론 그에게는 그 외에도 '김치볶음밥' 등의 보장된 미래가 있기는 했지만 그런 단독밥상보다는, 역시나 밥상 위에서 다른 쟁쟁한 반찬들을 제껴가며 새하얀 흰밥을 털어대는 그 화려한 짜릿함이 매력적이었다.

"후, 그래. 근데 다른 애들은 몰라도 참치 걔는 전과 있잖아. 고추 그 새끼도 좀 꺼림칙한데가 있고"

누가 뭐래도 볶음김치의 예술은 '결백'에 있었다. 백설탕, 마늘, 깨, 참기름 등, 누가 봐도 밥도둑이라고는 상상도 못할 평범한 소시민들이 쉰김치와 한 팀이 되었을 때 지독한 밥도둑, 밥행털이로 변신한다는 것이 매력인데, 굳이 참치나 고추 같은 밥도둑 전과 있는 놈들과 함께 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그도 그런데요, 형님, 목표가 최소 밥 한 끼 반입니다. 만전을 기하자는거죠. 식감이랑 고기 먹는다는 정서적 쾌감 때문에라도 참치 끼운거고, 또 고추 걔가 그래도 끼어들어야 더 맛나잖아요. 인정하시잖아요"
"후, 그래 알았다. 언제냐?"
"당장 오늘 저녁입니다. 아침에 갈비찜, 점심에 삼겹살 먹어서 얘네 오늘 완전 뱃 속 니글니글 할 겁니다. 저녁에 우리 딱 출동하면, 게임 끝이죠. 두 그릇 보장합니다"

쉰김치의 잎사귀가 실룩였다.

"흐, 그래. 알았다. 이따보자"
"예 형님"

…그렇게, 오늘도 밥도둑들은 화려한 한탕의 꿈을 꾼다. 포만과 과식을 기원하며.

< 끝 >

"세호야, 나 그냥 다 솔직히 이야기 할께" 소설

수영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눈이 예쁘다는 생각은 많이 했지만, 오늘따라 정말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몇 번을 주저주저 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나 사실 술 마셨어. 근데 술은 먹었지만 정신 말짱해. 그냥 살짝 알딸딸한 기분 막 들까말까 하는 그런 느낌이야. 그러니까 말할게. 나 말이야, 이제 좀 힘들어…솔직히 너무 많이 힘들어, 힘들다구!"

마지막 말을 하면서 겨우겨우 울음을 억누르는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내가 무어라 하기 전에 속사포 같이 수영의 다음 말들이 터져나왔다.

"그래, 알아. 나는 니한테 많이 부족한 사람이야. 너처럼 잘생기고 멋있는 남자애가, 나같이 안 이쁘고 뚱뚱한 여자애랑 사귀어 주는거, 그거 되게 힘든거 알아. 막 사람들이 수근거리고 그런거… 그런거…나 진짜 잘… 알어. 아냐, 괜찮아"

그녀의 터져버린 울음을 달래주려고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어 들자 수영은 손을 내저으며 손으로 눈물을 훔쳤다.

"근데 세호야.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니가 바라는 이상형의 사람은 될 수 없어. 변명이든 포기든 게으른 여자든, 뭐라고 생각해도 좋아. 그냥 그게 사실이야. 어, 나 살 못 빼. 니한테는 운동 간다고 하고서 안 가고 집에서 그냥 잔 날도 많고, 꾹 참았다가도 결국 못 참고 새벽에 라면 끓여먹고 그런 날도 많어"

알고 있었어. 그냥 모른 척 했을 뿐이지. 물론 굳이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수영은 어느새 울음을 그쳤고, 콧물을 훌쩍였다.

"막 영화 같은데 보면 그런 말 나오잖아. 있는 그대로 사랑해달라고. 옛날에는 그게 나는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됐어. 너랑 사귀면서 나는 그 말이… 되게 많이 이해가 됐어. 너무 가슴 아프게 이해됐어. 그리고 너무 속상하더라. 너무… 너무 속상했어"

다시 울음이 터진 그녀.

"그냥… 아주 가끔씩이라도… 니가 나 예쁘다고 말해주면, 나 되게 기분 좋아서 막 며칠동안 그 말만 생각하고 그랬어. 나 진짜 그랬어…니가 막 모진 말 해서 진짜진짜 힘들 때도, 그 예쁘다고 말해준 기억 생각하면서 겨우 달래고 그랬어"

눈물을 뚝뚝 흘리는 수영.

"니가 들으면 웃겠지만, 나도 가끔 거울보면서 내가 이쁘다고 생각할 때가 가끔 있는데 그럴 때 너한테 셀카 보내고 그랬거든. 근데 너 그때마다 살 빼라고 놀렸잖아. 흐. 나 그 말 들으면 그 사진들 다 바로 지웠어. 근데 나도 여자야. 이쁘다는 소리 듣고 싶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남자친구한테는 그런 말 듣고 싶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나 놀려도, 너는 내 편이었으면 좋겠구… 니는 나… 안 놀렸으면 좋겠어. 다른 사람들 욕 백마디보다, 니가 놀리는 한 마디가 더 아파"

한참을 말이 없던 그녀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의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는 니 눈에 안 차는거지. 너가 그랬지. 살만 빼면 이쁠거라고, 왜 안 빼냐고. 내가 그 말 너한테 돌려줄까? 너 조금 더 좋은 회사 가서 월급 더 많이 받으면 더 좋을텐데 왜 니 스스로도 비전 없다는 회사 오래 다녀? 너 영어만 잘하면 훨씬 더 좋은 회사 갈 수도 있는데 왜 영어 공부 안 해? 그냥 그런거야. 노력하면 되는데… 노력이 힘든거라고. 나 이 말 너한테 처음하지? 근데 이 말… 지난 3년간 니가 나 놀릴 때마다 맨날 가슴 속에서 혼자 떠들었어. 맨날. 나한테 정 떨어지지? 그래, 알아"
"아니야, 정이 왜 떨어져"

나는 처음으로 입을 열어 변명했지만, 수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 세호 너도 내가 더 예쁘면 좋겠지. 인정해. 근데 더이상 니가 하는 말 때문에 스트레스랑 상처 안 받을래. 너랑 헤어지면… 분명히 다시는 너처럼 멋있고 좋은 남자친구 못 사귈거야. 이런 나를 누가 좋아해주겠어. 근데… 아는데… 나 너무 힘들어… 이제 그냥 다 포기할래. 평생 혼자 살아도 돼. 다시 누구한테 사랑 못 받아도 돼"

그 말을 마친 수영은 한참을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만 줄줄 흘렸다.

"…알아. 맘에 안드는 나를 꾹 참고 사귀어준거. 그래, 고마워. 정말 고마워. 세호야 정말 고마워"
"수영아"
"나 마지막으로 조금만 더 말할게"

수영은 오래 서있는게 힘들었던지 계단에 앉으며 말했다.

"나는…진짜 니한테 최선 다했다? 머 결과적으로 내가 어떻게 뭘 더 했더라면 더 잘했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매 순간 나는 너한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다 했어. 너 먹고 싶은거, 갖고 싶은거 들으면 기억해뒀다가 내가 다 챙겨줬잖아. 너 기분, 감정 많이 살피고… 니가 가끔 나한테 모진 말해도 그냥 혼자 씁쓸하게 웃어 넘기거나 뒤에서 혼자 욕은 할 지언정 그냥 받아들였어. 정말로. 그냥 니가 좋았으니까. 그래서 싸우면 니가 떠나기라도 할까봐 혼자 맨날 참았어"

예전 생각이라도 하는 것일까. 수영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세호야, 사실은 그냥 오늘 좋은 말만 하고 갈랬는데 결국에 디게 못난 말만 많이 했다. 미안해. 그냥 잊어버려…. 넌 정말 좋은 애구, 정말 고마워. 진짜 잘생겼네 우리 세호. 알지? 내가 니… 진짜 진짜 많이 좋아한거. 진짜 많이 좋아했는데… 너무 좋아해서… 평생 너 옆에서 있고 싶었는데… 안되겠어. 미안해. 내가 너무 아프고 힘들다. 사실 더 참아보려고 했는데… 그냥 엊그제 싸우면서 니가 그 말 했잖아. 니만 아니었어도, 그 말. 그래. 내가 아니면, 나같은 여자 아니었으면 너는 더 예쁘고 니가 좋아하는 여자 만날 수도 있었는데…"
"수영아, 그런 소리가 어딨어. 그리고 그건 내가 화나서…"
"더 니 마음에 드는 그런 여자 만나서 연애 할 수도 있었는데, 나같은 못난 년 만나서… 하아… 짜증나고 후회하는거… 이제 그만해도 돼. 좋은 여자 만나. 너는 정말 할 수 있잖아"
"수영아"
"너한테 혼나고 싶지 않았어. 너한테 예쁘고 좋은 사람이고 싶었어. 근데 그러지 못해서 미안해"

수영이는 그 말과 함께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손으로 닦아내며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큰 눈의 예쁜 얼굴.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나를 향해 웃어주던 이 예쁜 미소를, 맨날 나를 위해 지어주던 이 예쁜 미소를… 나는 제대로 바라봐주지 않았다는걸.

"세호야, 나 집에 갈게"
"수영아 잠깐만, 잠깐만 기회를 줘"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수영이는 고개를 저으며 손을 슬그머니 뺐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에서, 이제는 그만하고 싶다는 고통이 느껴졌다면 내 착각일까.

"좋은 사람 만나. 나보다 더 착하고, 예쁘고, 더 잘해주는, 너한테 더 도움이 되고 다른 사람한테 안 부끄러운 그런 여자친구 만나. 비꼬는거 아냐, 정말루. 잘 지내. 고마웠어. 평생 못 잊을거야. 너같은 사람. 넌 내 최고 자랑거리였어…"

그 말과 함께 수영은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 같은 가벼운 목례와 함께 저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차마 수영을 못 잡고 바닥에 주저 앉았다. 그리고 뒤늦게 지난 시간들을 떠올렸다.

그녀에게 모멸감이 드는 폭언을 던져댄 기억, 솔직히 부끄럽다는 말까지 했던 기억, 몇 시간이나 걸려 만들어 온 케이크를 "단걸 왜 먹어!" 소리치며 던져버린 기억… 좋은 기억들도 많았는데 후회스러운 기억들, 상처 준 기억들만 떠올랐다. 차마 다른 누구한테 말하기도 부끄러운 추한, 더 한 기억들도 많았다.

왜 그리도 그렇게 모질게 굴었을까. 그렇게 내가 좋다고 좋다고 하는 사람한테 나는 왜 그리도 못되게 굴었을까. 내가 조금만 더 좋게좋게, 좋은 말로 대해줬더라면 수영이가 그렇게 많은 상처를 안 입었어도 됐을텐데. 도대체 왜 그랬을까. 왜.

"하아아…"

결국 나라는 쓰레기의 본성이, 나 좋다고 다 응석 받아주는 사람이 나타나자 드러났을 뿐인거다.

"한번만 더…"

그래도 수영이를 붙잡고 싶었다. 안다. 나한테는 그런 자격이 없다는 것을. 하지만 알 수 있었다. 이번에 너를 놓치면, 평생 후회할 것이라는 것을. 헤어지면, 설령 너보다 더 예쁜 여자를 나중에 만날 수 있을지 몰라도, 적어도 너보다 더 나한테 잘해줄 여자를 만날 가능성은 없다는 사실을.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저 앞에, 울며 걸어가는 수영이의 안쓰러운 뒷모습이 보였다. 울지마 수영아. 내 안에서… 니가 나같은 놈을 버리고 정말 좋은 남자를 만나 행복하게 연애하길 진심으로 바라는 나와, 너처럼 착하고 좋은 여자를 놓치기 싫다는 이기적인 내가 충돌했다. 그러면서 더욱 내 발걸음은 더 빨라졌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수영아"





로봇소시아 소설

"뭐? 여성형? 왜 여성형을 사?"
"아니…뭐, 그냥 보통 여성형 많이 사니까"
"무슨 소리야, 내 주변에는 다 남성형 샀어. 여성형 사고 싶으면, 결혼 관두고 그냥 덕후새끼들처럼 혼자 살어"
"야 무슨…"

전자제품 시판장에서 벌어지는 한 예비 신혼부부의 실랑이. 영업사원은 은근슬쩍 끼어들어 상황 정리를 한다.

"네, 예전에는 여성형 모델을 많이 사셨는데, 요새는 남성형 모델을 많이들 구입하십니다. 집안에 방범보안 측면에서도 아무래도 남성형 모델이 있는게 더 든든하고, 또 남편 분들 입장에서도 좋은 친구도 되구요. 보통 남자분들 조금만 나이 드셔도 주말에 친구 분들 뵙기 어렵잖아요. 바빠서. 그럴 때 낚시친구도 되어주고 운동 상대도 되어주고. 아내 분 경호원 역할도 되구요"

영업사원의 말에 남자가 조금 불만인 듯 반박했다.

"그건 여성형 모델도 되는거 아닌가요"
"네, 기능적으로는 똑같습니다. 그건 그런데 사람 심리라는게, 더 덩치도 크고 아무래도 남자처럼 생긴게 더 심리적으로 위압감을 주긴 하니까요"

그 말에 남자는 힐끗 옆에 서있는 남성형 도우미 로봇을 쳐다본다. 180cm 중후반대의 훤칠하고 탄탄한 몸매를 가진 이 남성형 모델이, 아무래도 저 여리여리한 160 중후반대의 여성형 모델보다야 더 경호 역할에 어울려 보인다는 것은 분명했다.

"커스터마이징 기능이 있어서, 외모도 마음대로 결정하실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 다리 부분 파츠를 교체해서, 키도 원하신대로 설정 가능합니다."

남자는 아쉬운듯이 귀여운 여자 로봇을 지그시 훑다가 다시 힐끗 남자 로봇의 아랫도리 부분을 손으로 툭 치고 물었다.

"그럼 이 놈도 거시기가 달려있나요"
"아 쫌!"

여자는 민망하다는 듯 남자의 팔뚝을 잡아챘지만, 영업사원은 빙긋 웃는다.

"네, 베드도우미 기능도 내장되어 있습니다. 다만 세이프 모드를 이용하면 배우자 분이 잠금 모드로 두실 수 있고, 성기는 물론 침실서비스 기능 자체를 모두 잠금으로 두실 수 있습니다. 안마, 마사지 기능 같은 것도. 또… 이건 기본형이라서 단일 성별 모델이지만, 옵션 추가하시면 남성형도 여성기 모드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원 별…"

남자와 여자 모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너털웃음을 터뜨렸고, 영업사원은 여전히 그 영업 스마일로 말을 이어나갔다.

"오늘 구매하시면 72개월 전액 무료 할부도 진행 가능합니다."






로봇소시아






사람들이 크게 인식하기 이전부터 이미 대단위 공장에는 로봇이 꽤 높은 비중으로 도입이 되어 있었다. 당장 오늘도 시위에 나와 피켓을 들고 소리치는 사람들조차도 이미 젊었던 시절에 로봇이 30% 정도 가조립한 자동차를 탔던 사람들이다.

어쨌거나 2050년 일본 소프트쿱스의 인간형 도우미 로봇 출시는 사람들 인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건으로, 엄청난 사회적 논란을 야기했다. 튜링 테스크를 통과한 도우미 로봇, 그 자체로 이미 강력한 반려자 후보에 올라선 셈이니까. 이미 평생 독신이 전체의 25%에 육박하던 사회 속에서 '내 이상적인 외모로 커스터마이징 된 말 잘 듣는 로봇 반려자'는 꿈에 그리던 환상의 구현과 다름 없었다.

"지랄들 하네"

물론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출시 초기에는 루저들의 장난감, 이상성욕자들의 초고가 섹스토이라는 식의 비아냥이 이어졌다.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고, 해킹을 통한 범죄 활용 가능성 등의 문제가 불거지기도 했다.

하지만 곧 차세대 인간형 스킨 및 보안기능 등 다양한 기능이 지속적으로 업데이트 되면서 기업과 가정에서 새삼 주목받았다. 24시간 활동 가능한 인간형 경비로봇은 수요가 엄청났다. 기존의 인공지능 탑재 보안 CCTV나 비인간형 경비 로봇에 비해서 의전, 도어맨, 보디가드 등 훨씬 다양한 일을 할 수 있었고, CCTV + 보안인력보다 경비로봇 쪽이 장기간의 전체 유지비나 효과면에서나 훨씬 경쟁력이 있었으니까.

일반 가정에서도 육아 및 가사, 반려동물 돌보미를 대신해 주는 집사로서의 역할과 보안기능이 매우 주목 받았다. 곧 중산층 이상의 가정이나 신혼부부들 사이에서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정부에서도 "육아 도우미로서의 로봇이 출산 권장에 도움이 된다" 라며 저출산대책으로 정부 지원금을 고려할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이미 그 시점에서 전체 노동시장에서의 로봇 점유율은 15%가 넘은 상태였다. 이미 지난 수십 년간 키오스크 및 서비스 머신들이 대체한 일자리만 수백 만개였지만 역시 '인간형 로봇'에게 빼앗기는 일자리는 더욱 민감하게 체감되었다. 그때부터 서서히 로봇사회에 대한 본격적인 논쟁이 시작되었다.





"에이 씨"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집에 돌아오던 길에 나는 짜증이 단단히 났다. 결국 남성형 모델을 사기로 했기 때문이다. 선수금 2천에 48개월 할부. 그 돈이면 중형 세단도 한 대 살 돈인데. 어쩐지 왠일로 로봇 도우미를 사러 가자고 한다 했다. 남성형 도우미를 사러 갈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안 했다.

"아 괜히 샀나"

기분도 영 찝찝했다. 무슨 내가 여성형 모델 산다니까 펄펄 뛰어놓고서는, 정작 남성형 모델 커스터마이징 할 때는 아주 눈이 돌아가서 세팅하는게 영 보기도 좀 그랬다. 키는 187에 얼굴도 지 취향으로 꾸미더니만 가슴도 탄탄하고 빨랫판 같은 복근에 말벅지에, 그 놈의 거시는 뭔 말만한 걸 달려고 하길래 한 소리 했더니 그제서야 눈치 보며 기본형으로 한단다. 지랄마라, 내가 그거 망가지는 그 날까지 비번 풀어주기는 할 줄 아나.

"그래도 뭔 수가 있겠지"

공장초기화를 시킨다거나 루팅을 한다거나. 직접이야 못해도 어디가서 돈 주고서라도 하면 그만 아닌가. 그래서 찝찝했다. 그 마음을 달래러 집 근처 호프에 들어섰다. 그리고 거기서 우연히 기범이 형을 만났다. 하기사 우연은 아니지. 이 형이 술집에 있는게.




"야, 잘했어. 바람 방지 대책으로 그거만한게 없댄다. 니가 언제까지 와이프랑 물고 빨고 할 거 같냐? 딱 1년이야 1년. 니네 연애도 오래했잖아. 애 낳으면 할거 같냐? 안 해. 그리고 애 낳으면 여자 어떻게 된다? 푹 퍼져. 푹 퍼지고 나이 먹어서 뒤늦게 덤벼들면 니만 피곤해진다고. 그렇다고 니가 안 자준다? 그럼 백프로 바람 나는거야. 그게 프로세스야 프로세스. 아 밖에 나가서 딴 놈들이랑 자 제끼다가 눈 맞아서 이혼서류 들이미는 것보다야 백배 낫지. 안 그래?"

듣고보니 일리가 있는 듯 하여 형도 그럼 집에 남성형 모델 있냐고 물으니까 고개를 젓는다.

"내 집구석에 그런거 있는거 나는 못 보지. 내 성격에는. 근데 나도 예전에는 있었어, 기집애 로봇. 그, 나 족발집 할 때. 마누라랑 둘이 밖에서 온종일 일하고 오면 방구석에 살림은 누가 해. 와이프가 지랄해서 그때 한 대 샀는데 살림도 시키고 일 바쁘면 와서 일 시키고, 좋았지. 근데 이게, 기집 모델 사놓으니까 우리 마누라도 그걸 질투하더라고. 기집들은 원래 그런거야. 세상 만물에 질투를 다 한다니까. 니가 방구석 변기통을 좋아한다고 하면 변기통도 깨부술게 여자라 이거야"

픽 웃다가 물었다.

"그거 좋아요? 여성형 로봇, 그거"

기범이 형은 낄낄댄다.

"좋지. 마누라랑 못하는거 다 해볼 수 있다고. 딱 요래 엎드려 놓고, 후장에다가…"
"아 형님"

원체 목소리 큰 양반이 흥분해 목소리가 더 커졌다. 형을 제지하자 더 낄낄대며 "생각해보니 좋긴 좋네. 남자 로보트" 하며 나를 놀린다.

"야, 혹시 아냐? 덕분에 너도 새로운 세계에 눈 뜰지? 내 아는 새끼 중에도 호모가 하나 있는데 걔들이 한번 딱…"
"아 진짜 생각할수록 망한거 같아요"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 더 짜증이 난다. 로봇은 다다음 주에 온다는데. 벌써 여자친구는 미러비젼에 글이랑 커스텀 모델 카탈로그 영상 띄우고 난리 났다. 댓글을 보니 더 열불이 난다.

seju0426 : 어머 우리 수진이ㅋㅋ신혼여행 때 장난 아니겠네ㅋㅋㅋ불나겠어ㅋㅋㅋㅋㅋㅋㅋ
dz_k2041 : 부럽다 야ㅋㅋㅋㅋ 근데 누구 닮은거 아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어? 난 딱 바로 누구 생각나는데?ㅋㅋㅋㅋ
jiyhek : 언니들 짖궂어ㅋㅋㅋㅋㅋㅋㅋㅋㅋ
il_dh : 야 로보트 언니 좀 빌려줘ㅋㅋㅋ이 돌싱 언니 외롭다고ㅋㅋㅋㅋㅋㅋㅋ
ezy_ezy : ㅋㅋ대박ㅋㅋ이름은 뭘로 붙일거야?

뭐 의례 하는 소리인건 안다만 역시나 호구짓 했나 싶다. 그리고 농담인거 알면서도 누구 닮은거 아니냐는 말에 화가 치솟는다. 뭐 전 남친이라도 닮은건가. 일단 나랑은 전혀 다르게 생긴 모델이니. 확 기분이 잡친다. 이래서 비인간형 모델을 사는 사람들이 있는거구나 싶기도 하고.

그냥 집안 일 하는 로봇이니 좋게좋게 생각하기로 하자, 내가 지금 로보트에 질투하는건가, 싶어 어처구니 없기도 하다가 또 문득 '지는 되면서 왜 나는 안된다는건가' 하는 마음에 불끈 화가 치솟는다. 지 말로는 여자는 자제심이 있지만 남자는 그런게 없어서 사놓으면 결국 자기한테 소홀히 하고 로보트한테 빠질거라나? 원 지랄도.




정부는 뒤늦게 로봇세와 로봇 총 한도제, 서비스업 내 특수업종에 대한 로봇채용 금지 등의 정책과 규제를 발표했지만, 이미 사람들은 로봇의 맛을 본 상황이었다. 일반 가정에서 이미 도우미 로봇의 유용함을 체험한 기업가들은 자신들이 운영하는 기업체에도 로봇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했다.

"초기 비용이 좀 부담되기는 한데, 3교대 돌릴거 한 놈이 다 해치우니까 금방 본전 뽑고 이익 뽑죠. 그리고 자꾸 공장 생산현장 이야기 들먹이는데, 그런 식이면 음식점이랑 편의점 키오스크, 서빙머신도 없애야지. 무인 여객기, 무인 화물차도 따지고 보면 로봇 아냐? 왜 자꾸 생산 현장만 갖고 그 난리인데. 요즘에 건설현장도 죄 무인 로봇차가 다 하잖아. 그리고 이것도 다 국산이야 국산. 나는 애국자라고!"

게다가 로봇세나 로봇 총한도제 도입 역시 대현 중공업과 오성 다이너믹스 등 국내 로봇 관련 기업들의 경쟁력만 꺾을 뿐이라는 여론의 반대에 밀려 법안이 상당히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이에 대해, 당정청은 여야 합의를 거쳐, 기본소득제 도입 및 실시에 대한 최종적인 검토를…"

그러나 이미 상황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로봇이 노동시장을 잠식해 들어가자 빈부격차가 위험한 수준으로 벌어졌다. 물론 우리나라만의 상황은 아니었다. 전 세계 선진국 거의 전부가 자본주의 시장경제 도입 이래 최대 폭으로 빈부격차가 벌어진 상태였다. 단순히 부의 차이만 큰 상황이 아니었다. 소득분위 하위 30%는 이미 생계가 무너진 상태였고 전국적인 슬럼화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에 따라 일부 선진국에서 이미 도입되어 운영 중이던 기본 소득제를 정부에서도 검토하기 시작했다.




"태종이 너무 나무래지마 엄마. 요즘 애들 얼마나 힘든 줄 알아? 한 해에 15만명 애들이 사회에 나오는데 일자리가, 일 같지도 않은 일자리까지 다 합쳐서 딱 7천개래. 일자리가 없는게 정상이지. 아 알아. 그럼. 나도 잘하지. 여튼 태종이 너무 괴롭히지 말고. 알았어. 어. 엄마도 쉬어"

수정이는 전화를 끊고 한숨을 푹 쉬었다. 동생 이야기인가.

"왜"
"태종이 말이야. 애가 일자리도 없고, 비전도 없고 하니까 자꾸 우울해하고 마음을 못 잡고 밖으로 돈대."
"수리 공장 들어갔다고 하지 않았어?"
"의무고용 4개월만 채우고 바로 짤렸대"
"진짜 요즘 애들 다 어떻게 살라는건지 모르겠네"




소득을 기준으로 전체 분위 하위 60%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소득별 차등을 둔 기본소득제가 도입되었다. 그러나 그 금액은 결코 크지 않았다. 엄밀히 말해서 밥만 먹고 살기에도 벅찬 수준의 금액이었다. 이에 사람들은 다시 가족 단위로 뭉치기 시작했다.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40만원으로는 먹고 살기도 힘들었지만, 네 사람에게 주어지는 160만원으로는 어떻게든 최소한의 규모 경제를 발생시킬 수 있었으니까. 무조건적인 다산을 통해 소득창출을 계획하는 이들도 많아졌다.

"관리소에서 알려드립니다. 오늘 저녁은 검은콩밥, 된장찌개, 멸치볶음, 시금치무침, 계란후라이, 이상입니다"

가족 구성원수가 많지 않은 서민들이나 노인들 사이에서는 공동생활체 형태의 또다른 생활양식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서민 아파트 한 동의 전원이 경제공동체로 묶이는 것이었다. 이 역시 한 명의 40만원으로는 먹고 살기 힘들어도, 사십명의 1600만원으로는 한달 생활이 가능해지는 것은 물론 심지어 로봇 도우미까지 하나 장기 대여하여 집안 살림을 시키는 것까지 가능했으니까. 정부과 금융권에서도 이러한 삶의 양식에 대한 지원에 나섰다.

그래도 문제가 나아지지 않자 정부에서는 외국의 경우를 참고해 '10대 규제직종'이라고 하여 특정 분야의 직종에 대해 아주 특수한 예를 제외하고는 로봇 채용을 20% 미만으로 줄이도록 했다. 주로 예술과 환경미화, 특수기술, 단순 노무 직종 위주의 규제였지만 그래봐야 120만개도 안되는 일자리였고, 이 역시도 편법으로 빠져나갈 방법이 얼마든지 있어 그다지 효과적이지는 않았다.

"승만씨는, 다음 주 수요일까지만 나오면 돼"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진학을 하지 않는 이들에게 시행되는 '의무근로' 역시, 기업에서는 6개월 이상 채용시 발생되는 다양한 의무 탓에 나라에서 규정한 최소한의 인간 의무고용 기간 4개월만 채우면 곧바로 사람을 자르고, 남은 1년 중 8개월을 로봇으로만 굴렸다. 기업 입장에서는 각종 리스크나 비용을 감안할 때 사람은 아예 없는 편이 나았다.




"고마워. 아무 것도 없는 나를 골라줘서"
"무슨. 그런 말 하지도 마. 넌 충분히 자격 있는 사람이야. 나야말로 내 청혼 받아줘서 고마워"

어제 그제 꽁했던 마음이, 수정의 말 한 마디에 너그럽게 풀렸다. 하루종일 돌아다닌 탓인지 아니면 호텔 욕조의 거품목욕에 몸이 풀린 것인지 수정은 금방 잠에 빠져 들었다. 그러나 나는 잠이 오지 않는다. 호텔 빌딩 140층 전면유리로 내다보이는 이 넓은 서울의 전경에 새삼 압도되어 잠이 들만하면 다시 번쩍 정신이 든다.

"후…"

사실 나처럼 외모도 보잘 것 없는 놈이 수정이와 같은 끝내주는 미인을 아내로 맞이하게 된 것은 그저 오로지 '내가 직업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영업을 제외한 2년 이상 근속 취업률 4% 시대의 우리 사회에서 공기관, 그것도 경제정책 관련 공기업에 다니는 나는 학창 시절의 그 모든 설움을 입사 한달 만에 모두 씻어낼 수 있었다.

"후후"

어머니 말로 선 자리가 30군데에서 들어왔단다. 고르고 골라 나선 다섯 번의 맞선 자리에서 두 명의 여자와 그 날 잤다. 냉혹하다 못해 잔인하고 더럽기까지 한 취업시장과 점차 '생존을 위한 다산 계획'이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한 사회 풍조, 그리고 그 과정에서 출산비용의 부담을 기피하는 기업의 형태가 합쳐져, 여자들에게는 남자들보다 더한 취업 디스토피아가 펼쳐졌다. 그러다보니 일부의 여자들은 '육탄공격'까지 서슴치 않으며 미래를 계획하는 경우가 있었다. 물론 취업에 성공한 여자라면 마찬가지로 수많은 남자들의 대시를 받았다.

어쨌든 그 둘 중 하나가 수정이었다. 사실 수정이와 연애를 시작한 이후로는 더이상 한번도 선을 본 적이 없지만, 지금도 만약 선을 본다면 얼마든지 또 다른 여자들과 잘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요즘 세상이었다. 나로서는 직업 그 자체가 벼슬이나 마찬가지니까.

"음…"

하지만 바로 그 점이 걱정이었다. 만약 내가 어떤 이유로든 회사에서 잘린다면? 당장 우리 둘의 생활비 330만원야 젖혀 놓더라도, 그 외에 우리 집 80만원, 수정이네 80만원 부쳐주는 돈만 끊겨도 당장 수정이는 나를 떠나 다른 남자를 찾으러 갈지도 모른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수정이를 제외한 수정이네 세 식구는 사실상 내가 부쳐주는 돈 80만원으로 지금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기본소득 120만원은 빌려쓴 돈 갚는데 들어간다고 했다. 원칙적으로야 기본소득은 금융기관이나 사채업자들이 절대 손대면 안되는 돈이지만 어디 우리 사회에서 그게 씨알이나 먹힐 원칙인가.

"수정아 잠깐만"
"우웅"

나는 결국 잠을 자는 대신 몸을 일으켜 책상으로 향했다. 핸드북을 켰다. 홀로비전에 비쳐지는 월요일의 보고 문서를 새삼 훑기 시작했다. 각각 KDDI와 NGTI에서 올린 식료지원제와 대환금융론인데, 어차피 둘 다 막대한 정부 예산이 필요한 제도다. 이미 기본소득제만으로도 부담을 느끼고 있는 정부의 재정지출에 또 하나의 무거운 짐을 얹는 일이 되겠지만, 어느 정치인도 미래의 빚보다는 당장의 한 표에 매력을 느끼기 마련이니까. 그래도 괜찮다. 2035년 리디노미네이션 대실패의 무거운 짐을 지고도 불과 10여 년 만에 금방 회복한 우리나라다. 어떻게든 되겠지.




"오빠 오빠, 이거 봐봐"

예상보다 빨리 배송이 이루어져, 일단은 로봇을 수정이네 집으로 배송시켰다. 수정이도 좋아하고, 수정이네 가족도 일단 결혼하기 전까지 로봇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면 두루두루 좋은 일이니까. 또 잘난 사위 '능력'도 자랑할 겸. 수정이네 가족이 수발 드는 로봇 보며 좋아하는 모습을 수정이의 채널폰을 통해 보니 나까지 흐뭇했다.

"좋네"

나는 한참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문득 우리 집 생각도 났다. 또 수정이 어머님도 결국 우리 결혼해서 로봇 데려가면 얼마나 허전할까 싶기도 했다.

"수정아"
"응"
"그 로봇, 그냥 너네 집에 두고 쓸래? 어머니 쓰시게"
"뭐?"

수정이는 당황하는 표정이었다. 조금은 감동할 줄 알았지만, 그보다 "그럼 우리 결혼하면 나는?" 하고 되묻는데서 과연 수정이 답다 싶어서 혼자 웃었다.

"우리는 그냥 대여해서 쓰고. 우리 집에도 대여 한대 돌리고"
"대여하는건 얼만데?"
"구 모델은 15만원쯤? 신 모델은 20만원에서 50만원쯤 할거야"
"한달에?"
"어"

내 말에 수정이는 잠시 고민하는 눈치였지만 "아냐, 오빠 생각 너무 고마운데, 그냥 이거 우리가 쓰고, 우리 집은 됐어" 하며 고개를 지었다.

"왜"
"왜긴. 오빠 이미 지금도 우리 집에 돈 많이 부치는데 뭘 또 그래. 이거 달달이 얼마나 나가는건데. 오빠 어머니 아프시니까 오빠 집에만 대여하던지"
"정 뭐하면 그냥 우리가 그거 쓰고, 우리 집이랑 니네 집에 대여 모델을 보내던가. 돈 부담되는거야, 우리가 조금 줄이면 되지"

그 말에 수정이는 다시 또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여튼 좀 더 생각해보자" 하면서 대답을 피했다. 부담스러웠는지도 모르겠다. 동정처럼 느낀 것은 아닌가 싶어 괜한 말을 꺼냈나, 싶기도 하고.

"어이고 장 서방!"
"아 예 어머니"
"엄마는 서방은 무슨 서방이야. 아직 우리 결혼 안 했어"
"아 뭐 한거나 다름없지. 근데 이거 진짜 좋네, 좋아. 재밌어"

채널폰 너머로 어머님이 신나서 좋아라 하는 모습을 보니 그저 나까지 흐뭇했다. 그리고 그날 밤, 수정은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오빠"
"어"
"아냐"
"뭐?"
"아니야"
"뭔 말을 하려다 말아. 빨리 말해"
"진짜 아냐"

그녀가 이렇게 말을 계속 빼는 것을 보고 난 눈치챘다.

"왜? 비번 풀어줘?"

내 말에 수정이는 "으흥" 하며 부정도 긍정도 아닌 코웃음만 흘린다.

"근데 싫다"
"아앙"
"됐어, 꿈도 꾸지마, 그거 합금에 녹 슬 때까지 암호 안 풀어준다"
"치"

수정이는 내 말에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그냥 황당해서 웃음이 터졌다. 내가 다시 전화를 걸었다.

"야, 그렇다고 끊냐? 그리고 좀 이상하잖아. 내가 어? 내 손으로 그 놈 암호 풀어주는게"

수정은 대답 대신 잠시 말이 없어졌고, 곧이어 로봇의 음성으로 "이런 행동은 옳지 않아요" 하는 거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말에 나도 수정이도 빵 터졌다.

"야, 너 지금 뭐했길래 로보트가 그런 말을 해"
"아 진짜 이거 대박이다"

나는 한참을 더 웃다가 앱을 통해 놈의 세이프 모드를 해제했다. 내 손으로 내 여자친구와 잘 남자로봇의 비번을 풀어준다는게 좀 이상했지만, 생각해보면 내가 내 손에 딜도 들고 있는거랑 무슨 차이가 있을까 싶기도 하여 그렇게 풀어줬다. 뭐, 나는 나대로 나중에 여자 모델 사던가, 빌리던가 하지 뭐.

"헐, 오빠 비번 풀었어?"
"어, 근데 어떻게 알았어"
"얘 지금 완전 화났는데"
"야이"

나는 잠시 뭘 어떻게 할까 하다가 그냥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핸드북을 통해 여성형 모델들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뭐 까짓거 72개월 풀할부 끊으면 되는거 아닌가. 내가 감당 못할 돈도 아니고. 연말 보너스도 있을테고. 쓰다가 중고로 팔아도 그만이고. 어차피 팩토리 리퍼해서 싹 초기화 할텐데.

"흠"

한편으로 달달이 150 남짓한 돈으로 생활하는 엄마, 아빠 생각에 씁쓸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당장은 내 삶의 즐거움이 효보다 더 끌렸다.

"와, 이거 뭐야"

한국에서는 아직 불법이지만, 해외에서는 이미 실존하는 유명인의 스킨으로 교체하는 교환 파츠도 시판 중이었다. 엘리자베스 요한슨 얼굴 스킨도 있었다.

"오 도대체 근데 Y컵은 뭐지. 이건 뭐 그냥 개그로 만든건가"

그렇게 스크롤을 좀 더 내리노라니, 다시 수정이에게 전화가 왔다.

"왜?"
"왜냐니"
"안 해?"
"아 싫어. 생각해보니까, 내가 얘랑 자면 오빠 분명히 여자 로봇 살 거 같아서"

…가끔은 여자의 예감이 두렵기까지 하다.

"진짜 괜찮아? 나 괜찮어. 나 쿨한 사람이야. 쟤는 사람이 아니잖아"
"아 됐다고. 기분 나뻐. 이거 다시 비번 채워"
"뭐래"
"나중에라도 여자 로봇 집에 들였다간 잘라버릴 줄 알어"
"어휴 이런"

그녀의 '자제심' 운운 이야기는 인정해줘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수정의 말대로 다시 놈을 세이프모드로 전환했다.

"후회하지 마라"
"됐거든?"

그리고 새삼, 수정이에 대해 꽤 믿어도 될 여자라는 생각을 했다. 뭐, 로보트랑 잠깐 재미 좀 본다고 믿네 안 믿네 이야기 하는 것도 웃긴 일이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이제 결혼까지 이주일. 부디… 우리의 미래가 밝기를 기도했다.

'참'

22세기가 코 앞이고, 로봇이 진짜 집에서 사람을 돕는 시대가 와도, 우리들은 여전히 상상 속의 초월자를 그리며 막연한 소원을 빈다는 사실에 새삼 혼자 '아직도 갈 길이 멀구나' 하며 피식 웃었다.

< 끝 >

"나 앞머리 잘랐는데 어때, 이뻐?" 망상

갑작스럽게, 대뇌 사령부의 긴급 회의가 소집되었다. 주말 오후의 늦잠에 기분좋은 휴식을 취하던 뇌세포들은 여자친구의 사진 첨부된 카톡 메세지 한 방에 전력으로 일어나 언어중추석에 안착했다. 갑자기 일어난 통에 모두들 각성을 위한 카페인 한방울이 간절했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우선 비상대응팀은 바로 즉응해"
"이미 대응했습니다"
"좋아"

이미 오랜 연애를 통해 자율신경계와 일체화 된 혓바닥과 손가락팀은 놀랍게도 대뇌가 본격적인 반응을 하기도 전에 마치 파블로프의 개새끼마냥 [ 헐 대박! 뭐야, 넘 이쁜데? 미용실 바꾼거야? 넘 이쁘다ㅋㅋㅋ ] 라는 답문으로 즉각적인 대응을 했다. 물론 대뇌 사령부의 뉴런들은 썩 만족스럽지 않은, 그다지 세련되지 못한 리액션이라 평가했지만 그 즉응성만큼은 인정했다.

게다가 의외로 그녀는 그런 반응이 기뻤던지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뭐래ㅋㅋㅋ ] 하면서 좋아했다. 초탄 명중이 확인된 이상 연타를 집어넣을 찬스였다.

"오버 회로 가동 허가합니다"

좌뇌 본부의 허가에 곧바로 우뇌 본부도 결과를 산출해왔다.

[ 존예보스네 진짜ㅋㅋㅋ ]

'존예보스'라는, 37세의 김박스로서는 사용하기 민망한 유행어휘탄이 발사되었고, 뒤늦게 좌뇌 본부 측에서 '민망함' 경고를 보내왔지만 이미 오른손은 타이핑을 마치고 메세지를 입력한 후였다.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렇게 좋아? ]

하지만 다행히도, 정말 다행히도 여친은 스스로도 이번 머리가 맘에 들었던지 꽤 노골적이고 민망한 찬양에도 좋아라하는 리액션을 보내왔다. 이제 모두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감을 잡았다.

"조금 무리수를 띄워봐도 될까요"

이때 아재 참모총장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그러자 모두가 침을 꼴깍 삼켰다. 아재 참모총장. 그가 누구던가. 물론 그도 한때는 빛나는 말재주를 뽐내던 전설적인 뉴런이었다.

한소영, 이연진, 김은우, 임아라, 추가영, 강가람, 채아리, 윤소미…등등 아군의 스펙으로는 난공불락이라 평가되었던, 도도함으로 무장한 수많은 강적들을 빛나는 말재주 하나만으로 무장해제 후 품 안으로 끌어 들었으며, 2006 입사면접, 2009 정리해고 눈물쇼, 2010 전세보증금 반환 전투 등 인생의 주요 장면마다 어마어마한 능력으로 모두를 이끈 그였다.

하지만 그 역시 늙었고, 감은 무뎌졌다. 아니 완전히 썩어 쉰내가 풀풀 나기 시작했다. 최근 그가 입안한 작전은 매번 괴멸적인 갑분싸를 자초했고 연전연패를 자초했다. 2015 조 이사 앞 실언사건, 2016 여친 친구 모임 참사, 2017 동창회 갑분싸 사건, 2018 땅콩크림 고지전 등… 그의 참패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이불킥이 난사되었던가.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역시 난세를 위해 태어난 영웅이었다. 지난 1월 지역사 사장단 회의에서 최 전무님의 실언에 심각해진 분위기를 어이없는 아재개그 한방으로 뒤집어 내는 기지를 발휘했으며, 여친의 이별 선언 앞에 멘탈이 박살나 모든 뇌세포가 눈물만 줄줄 흘리는 절망적 상황에서 터뜨린 한 마디로 영원한 사랑을 재고백 받지 않았던가.

"승인합니다"

좌뇌 본부에서는 아재 참모총장의 작전계획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지만, 원로에 대한 대우는 어쩔 수 없었다.



[ ㅋㅋㅋㅋㅋ존예보스래ㅋㅋㅋ먼가 말투가 오빠답지 않아ㅋㅋㅋ ]

재차 보내온 사진과 멘트 앞에 아재 참모총장의 집속탄이 투하되었다.

[ 응 완전 존예보스야 ]
[ 존예총통 ]
[ 존예황제 ]
[ 존예우주총황제 ]
[ 존예차원지도자 ]
[ 존예극원신, 존예궁극신, 존예정신집결적영혼만트라빛신, 존예존예불… ]

…발사된 멘트 리스트를 보고 모든 뉴런들이 혼이 빠져나가는 듯한 충격에 경악을 금치 못하며 비명을 지르고 마른세수에 머리를 감싸쥐었지만, 앞머리 때문에 어려보여진 덕분인지 여친은 여전히 기분이 좋은 듯 했다.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아재 참모총장은 여전히 흐뭇한 얼굴로 민망함으로 초토화 되는 대화창을 바라 보며 작전계획을 계속 실행했다. 그 민망함은 이제 모두가 "그만 그만 그만"을 연달아 외치게 할 지경이었다.

[ 마하존예존예심경 여신자재보살섹시 아재아재흥분아재 색즉예쁨공즉보스 존예존예 바라존예 여신심타심즉 완벽짱예여신발발타 사바하… ]

그러나 저런 추태에도 여전히 여친은 그저 신나서 필터 카메라로 찍은 사진만 연달아 보내오고 있었다. 그랬다. 그녀는 언제나 그랬다. 스스로의 기분이 나쁘면 어떤 말도 용서치 않았지만, 스스로의 기분이 좋다면 그 어떤 말에도 그저 웃어주었다.

"흐흐, 어떻습니까. 끝내주지요?"

마지막 아재 참모총장의 자화자찬이 끝나자 다들 겨우 한숨 돌렸다는 얼굴로 다시 상황을 주시했고, 뒤늦게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침착한 목소리로 '연애세포' 뉴런이 손을 들었다.

"목소리 좀 들려줄까요?"

과연, 길게 오가는 텍스트 중심 대화를 좋아하지 않는 여친의 패턴을 완벽히 읽고 있는 연애세포 사령관다운 작전 입안이었다.

"승인합니다"

곧바로 전화통화가 시작되었다.



"…어, 나 이제 머리 다 잘랐고, 옷 좀 보려구"

그녀의 말에 실시간으로 각급 뉴런 참모진들의 대응 답변안이 입안되었다. 연애세포 사령관은 서둘러 그들의 작전안을 훑어보았다.

1. 어떤 옷 보게?
2. 밥은? 배 안 고파?
3. 근데 너 이번 달 카드값 간당간당하다고 하지 않았냐? 옷을 또 사?
4. 사진 봤는데 너 오늘 머리 넘 이쁘다. 오늘 데이트 할까? 나 지금 씻고 나갈게
5. 나도 머리 잘라야 하는데
6. 머리는 잘 잘랐는데 너 근데 평소 옷이랑은 좀 안 어울리네. 그래 얼른 옷 사라

연애세포 사령관에게 일임된 선택 권한. 어떤 작전안을 고를까 선택하면서 내심 '세상에…' 싶은 소름돋는 핵전쟁 유발 멘트들이 중간중간 섞여 있었다.

"우리 안에 스파이가 있다"

라고 항상 주장하던 누군가의 명언이 새삼 연애세포의 뇌리를 스쳤다. 확실히 "연애 때문에 매달 카드값이 폭발한단 말입니다!" 라는 재무부 뉴런들이나 "제발 좀 여자만이 해답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리세요!" 라는 항문-직장 신경조직, "연애 하나만 포기해도 연간 최소 50일 이상의 진짜 여가와 1,286시간의 게임 플레이 타임, 366시간의 야구관람 시간이 확보되는데 도대체 왜?" 라고 주장하는 맨케이브 뉴런 등, 수많은 내부의 스파이들은 언제든 다 된 연애에 재를 뿌리고도 남을 쓰레기들이었다.

어쨌든 황당한 표정을 애써 감춘 그는 무난하게 [ 밥은? 배 안 고파? ] 를 골랐다. 사실 그 본인이 입안한 [ 사진 봤는데 너 오늘 머리 넘 이쁘다. 오늘 데이트 할까? 나 지금 씻고 나갈게 ] 를 선택하고 싶었지만, 육체사령부에서 어렵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 그저께 회식과 어제 새벽까지 게임 달린 이유로 몸 상태 안 좋음 ]

"밥은? 배 안 고파?"

그러자 여친이 말했다.

"아냐, 밥은 그냥 안 먹을래. 나 요즘 살쪄서, 살 빼야 돼"




…대뇌사령부의 모두가 '이런 분위기라면 이번 주말에는 모처럼 또 뜨거운 밤을 보낼 수 있겠다'며 축하의 말을 주고 받고 있던 와중, 난데없이 데프콘2가 발령되었다.

[ 나 요즘 살쪄서, 살 빼야 돼 ] [ 나 요즘 살쪄서, 살 빼야 돼 ] [ 나 요즘 살쪄서, 살 빼야 돼 ] [ 나 요즘 살쪄서, 살 빼야 돼 ] [ 나 요즘 살쪄서, 살 빼야 돼 ] [ 나 요즘 살쪄서, 살 빼야 돼 ] [ 나 요즘 살쪄서, 살 빼야 돼 ] [ 나 요즘 살쪄서, 살 빼야 돼 ] [ 나 요즘 살쪄서, 살 빼야 돼 ] [ 나 요즘 살쪄서, 살 빼야 돼 ] [ 나 요즘 살쪄서, 살 빼야 돼 ] [ 나 요즘 살쪄서, 살 빼야 돼 ]

대뇌사령부 대형모니터를 가득 채우는 전쟁 발발의 선전포고. 어떤 대답을 하던 결국 싸움이 터진다는 그 말에 다들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 어어…"

게다가 답변의 타이밍이 지나가고 있었다. 3...2...1... 이건 더 최악이었다. 그저 흔하게 내뱉는 "에이, 니가 살을 왜 빼" 라거나 "야, 너는 살쪄도 이뻐, 걱정마" 같은 류의 대응이라도 했더라면 다소 간의 분쟁 유발 가능성은 있을 지언정, 무사히 넘어갈 방법이라도 있었지만, 좋은 답변을 고른답시고 당황한 나머지 귀중한 골든 타임을 그렇게 흘려보냈다.



"… …"
"… …"
"…나 진짜 살쪘지?"

차가워진 분위기.

"아, 아니. 무슨 니가 살이 쪄"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근데 왜 내 말에 대답을 못해. 살쪘으니까 그런거지. 나 머리 자르니까 더 돼지 같아 보이나 보네"
"아니야, 무슨 말이야 그게. 너 지금 완전 이뻐"

대화 참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아냐, 오빠는 좀 솔직해져야 돼. 내가 요즘 살찌고 그러면 오빠가 솔직하게 말을 해줘야 내가 노력을 하지. 맨날 말로만 이쁘다 이쁘다 하면 내가 오빠를 신뢰할 수가 없잖아"
"아, 아니니까 아니라고 하지. 너가 살이 찌면 찐다고 말을 하지."
"언제? 오빠가 언제 나한테 살쪘다고 말했는데? 어?"

아니, 아니야. 제발.

"오빤 맨날 그렇다니깐. 다른 여자애들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오빠가 솔직하게 말해주는게 좋아. 말해봐. 나 요즘 진짜 살이 찌긴 쪘어. 근데 머리까지 자르니까 더 그래보이는거야. 그치?"

어…그런가.

"아닌데, 내가 봤을 때는 아닌데. 야, 그보다 너 밥은 먹었냐? 배 안 고파?"
"오빠, 말 돌리지마."
"어?"
"이래서 내가 오빠랑 진지한 대화를 못해. 맨날 이런 식이잖아"

정색하는 그녀. 전쟁이 발발했고, 대뇌 사령부는 모두 아랫 입술을 깨물며 전원 결전을 준비했다. 한편으로 연애 세포는 전쟁의 허망함을 떠올렸다. 매 싸움마다 스트레스로 인해 사망하는 뇌세포가 도대체 얼마인가.

'만약 그들이 온전히 스스로의 미래와 발전을 위해 사용될 수 있었다면, 나의 미래는 얼마나 창창해질 것이란 말인가'

언젠가의 이별을 겪은 날, 스트레스로 인해 파괴되어 가던 한 추억을 담은 뇌세포도 죽기 직전 연애세포 사령관 앞에서 이런 유언을 남겼었다.

"사령관님, 저는…보다 더 멋지게 살고 싶었어요. 그저 이런 쳐먹고 낄낄대는 시시한 기억이 아니라, 인류의 미래나 평화통일, 질병 극복, 우주 탐험…같은…보다 멋진…더 보람찬…그런 데이터를 담고 싶었…습니다…"

그 세포에게 연애세포 사령관이 해줄 수 있는 말이라고는 그저 이런 위로 뿐이었다.

"휴지와 콘돔 속으로 사라져 간 수많은 정자들을 떠올려보게. 그들이야말로 얼마나 많은 꿈과 기대를 갖고 태어 났겠는가. 그들에 비하면 그래도 자네는 멋진 삶을 산 것일세. 자신의 삶을 후회하지 말게"




…그녀가 집에 도착한 오후 2시부터 간헐적으로 이어진 말싸움 통화는 새벽 3시 반을 넘겨서야 끝이 났다. 물론 마지막은 언제나와 같은 여친의 울음이었고, 대뇌 사령부 전원은 뇌세포 2만 8천개의 스트레스성 사망이라는 괴멸적인 통보만 받고 침통함 속에서 한숨 돌렸다.

한소영, 이연진, 김은우, 임아라, 추가영, 강가람, 채아리, 윤소미 등등, 언젠가 만취했던 날 서로 웃으면서 털어놓은 지난 연애사 속 상대들이 이번에도 여지없이 여친의 입을 통해 '죽일 년, 살릴 년' 탄이 되어 뇌세포들을 집중 폭격했고, '오빠는 그 년들한테는 안 그랬을거면서…' 또는 '하이고, 그래. 그런 어리고 이쁜 년들 만나다가 나같은 이제 다 늙은 년 만나서…' 등의 신도림 조약을 어긴 폭언들이 터져 나오면서, 깊은 우울함과 좌절만이 또 한번 대뇌 사령부 전체에 큰 상처만을 남았다.

"후, 다들 수고 했습니다. 이제 쉬십시다"

좌뇌 사령부가 최종적으로 금번 전투의 종료를 선언했다. 물론 연애세포 사령관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이대로 넘어가면 당장 내일 일요일은 물론이거니와 다음 주 초반까지 피곤해 집니다. 미안하다는 카톡 한 통, 승인 요청 바랍니다"
"지금 간신히 전투 마무리 됐습니다. 설건드렸다가 말싸움 재발하면, 누가 책임집니까"

육체 사령부에서는 그냥 좀 적당히 하고 자자는 의견을 내왔다. 항상 이런 식이다. 그 놈의 만성피로와 노쇄한 몸을 핑계로 매번 연애를 망치는 답답한 의견만을 보내왔다. 물론 육체 사령부 측에서는 반대로 연애 세포 사령관을 향해 "나이 쳐먹고도 지가 아직 20대인 줄 아는 머저리" 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었지만.

"이제 시간도 기회도 얼마 없습니다. 이번 연애도 망쳐서, 평생 혼자 살 생각 하십니까? 그러다 진짜 평생 손양만 고생합니다"

연애세포 사령관이 독설을 내뿜자, 육체 사령관은 껄껄 웃었다.

"허허, 참 웃기는 소리도. 좋습니다. 이번 연애 성공해서 결혼까지 갔다고 칩시다. 연애 성공해서 결혼하면 뭐, 손양이 그때는 고생 안 할 것 같습니까? 남의 부대 걱정하지 마시고, 제발 본인 일이나 잘 하십시다. 왜 항상 그 놈의 연애질 때문에 우리가 고생해야 되는지 참"
"그럼 아예 대놓고 거세하시던가! 지금 대뇌 사령부랑 아랫도리 사령부랑 조직이 이원화 되어서 얼마나 피차가 고생 많습니까!"
"여기서 그 얘기가 왜 나와!"

가장 민감한 주제가 튀어 나왔다. 대뇌 사령부와 아랫도리 사령부의 갈등…. 그랬다. 당연히 조직체계상 대뇌 사령부는 이 김박스 신체와 정신 전체의 최상위 조직체임에 틀림없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조직체계도상의 일일 뿐, 실질적으로 아랫도리 사령부는 신체 전체의 예산 및 에너지를 절대적으로 소모하고 있는 실세 조직이었다.

"피곤 타령 맨날 하는데, 그 놈의 딸딸이만 좀 덜치고 일찍일찍 자기만 해도 피로는 3일 내로 싹 사라지겠구만"

오죽하면 뉴런 사이에서도 "이쯤해선 생각을 머리로 하는게 아니라 거시기로 하는거네" 같은 자조적인 말들이 나올 지경이었기에, 연애세포 사령관의 그 말은 아랫도리 사령부로서도 꽤 찔리는 말이기는 했다. 그러나 육체 사령관도 할 말은 많았다.

"무슨 꼭 우리가 나쁜 놈들처럼 이야기 하는데…자율신경계 군단 애들 항상 지멋대로 움직이는거 알지? 뜬금없이 대포동 발사대에 올리고, 아침마다 올리고, 어? 그게 우리 잘못이야? 우리도 그거 때문에 아주 죽겠어. 그리고, 뭐, 딸딸이…말 잘했네. 막말로 딸딸이가 우리가 좋아서 쳐? 거 번연계 쾌락중추부에서 내려온 명령 따라서 하는거 뿐인데. 거세를 할게 아니라 아예 니네 그 애들을 잘라버려"
"번연계 애들 자르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그걸 아는 놈이 거세를 하라고 해? 너야말로 거세하면 무슨 변화 생기는 줄은 알고 하는 말이야? 애초에 뭔 연애세포 따위가 이리 설치는지 원"

하지만 치열한 말다툼이 되어가는 상황을 "그만 그만 그만 그만!" 하고 정리한 대뇌 피질 원수는 조용히 결론지었다.

"뭐 안 하던 짓도 아니고…, 아쉬운 놈이 우물 파야지.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카톡 보내고… 다들 이제 자자. 그만들 해"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고단한 대뇌사령부의 하루가 마감되어 가고 있었다. 이미 새벽 4시에 이른 시간. 각각의 조직들은 취침 모드에 들어갔고, 수면 여단은 세포 복구를 위해 빠르게 전신 전개 단계에 접어들었다. 물론 수면 여단 내 독립 군무원 조직 '드림웍스' 팀도 새로운 작품의 상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여전히 대뇌사령부는 이렇게 열심히, 바쁘게 일할 것이다. 김박스의 오늘을 위해, 내일을 위해. 연애세포 사령관 역시 눈을 붙이며 문득 그냥 입에 붙은 사랑가, '사랑의 횃불'을 새삼스레 읇조리며 눈물 한 방울과 함께 잠에 빠져들었다.


"아름다운 이 연애를 지키는 우리
사나이 욕망으로 오늘을 산다
여친의 불벼락을 무릅쓰면서

탈솔로 행복미래번식을 위해

전우여 이 연애는 내가 지킨다
사랑의 횃불 아래 목숨을 건다"


- fin -

서툰 사람 소설

나는 서툰 사람이다. 스스로 생각해보아도 거의 모든 일에 서투르다. 그래서 그 나이대에 당연히 할 줄 알아야 하거나 해냈어야 하는 일들을 매번 제 때 못하고 한참 뒤늦게서야 겪고, 배웠다. 그나마도 익숙해지는 데에는 남의 곱절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미정 어머니, 미정이가 학습이 많이 더디네요. 집에서 어머니가 많이 도와주세요"
"아니 너는 무슨 자전거 하나를 이렇게 못 타. 지금이 며칠째야 도대체. 아빠 하는데로 이렇게 타보라고. 어어어어! 야, 관둬 그냥"
"아하핫, 서미정! 너 화장 일부러 그렇게 한거야? 나 진짜 깜짝 놀랐네. 이게 뭐야. 너 화장 처음 해봐?"

나로서는 의도하지도, 생각치도 않았던 오해도 참 많이 받았다. 그것은 인간관계나 업무, 사생활에 관해서도 다를 바가 없어서 곤혹스러운 일도 참 많았다.

"서미정, 너 표정이 왜 그래? 그게 그렇게 불만이야? 어? 아니긴 뭐가 아냐. 표정이 이미 딱 그런데"
"미정씨, 나 엿 먹이려고 일부러 이러는거에요? 아니면 뭐 회사 다니기 싫어서 태업하는거에요?"
"선배, 저한테 서운한거 있으면 그냥 말로 하셨으면 좋겠어요. 저 불편한거 싫어해요."

그런 나를 극복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도 하고, 마음 속 깊이 어딘가를 향해 간절히 빌어보기도 하고, 애써 아닌 척 그렇지 않은 척 가장도 많이 해봤지만… 대부분의 경우 결과는 매번 나의 참담한 부끄러움으로 끝나곤 했다. 아무리 애써도 어느 순간이 되면 남들이 나를 업수이 여기고, 나에 대한 예의나 존중 따위는 사라진 채 접근해왔다. 다른 사람에게는 안 그런 사람들조차도.

"미정씨는 왜 아무 말도 안해요? 아, 왠지…미정씨는 모쏠?"
"차라리 모르면 그냥 모른다고 해. 아 진짜, 이러면 이래서 문제고 저러면 저래서 문제고. 이거 어쩌니. 갑갑하네 증말"
"미정씨는 참 성실하기는 한데 말이야…하, 참. 그냥 이거 아영씨한테 맡기고, 미정씨는 이거 해요"

노력해서 무언가를 시도해 내 딴에는 '제법 이 정도면 그럭저럭'하고 생각했던 것들이 남의 눈에는 여전히 보잘 것 없고 형편 없는 것에 그쳤고, 어딘가를 향해 간절히 '대단한 것은 바라지도 않을테니 그냥 딱 남만큼, 부끄러움 당하지 않을 만큼만' 하고 바랬던 것은 수치스러운 결과만 잔뜩 안겨주었다. 평정과 보통을 가장했음에도 그것은 남들에게는 어설픈 허세로 밖에 비쳐지지 않았고 집요한 누군가들에게 그러한 허장성세는 오히려 톡톡한 망신을 위한 보기 좋은 표적에 지나지 않았다.

"근데 오늘 옷 일부러 그렇게 입으신 거에요?"
"이건 근데 뭐야? 누가 뭐 만들다 만건가? 아…이거 미정씨거야? 흠, 뭐 괜찮네"
"그거 반대로 쥐셨어요. 그리고 아까 그거도, 이렇게 하는거에요. 안 해보셨어요?"

수많은 대실패 끝에 남들의 조롱과 동정 속에 겨우겨우 무던함을 가장하고, 괴로운 표정을 감추고 혼자 힘없이 이불 속으로 들어와 눈을 감노라면, 그제서야 참고 참았던 눈물이 귓가를 향해 또르르 흐르는 그런 일상도, 이제는 눈물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많이 겪었다.

'그냥 확 사라지고 싶다'

같은 실수, 같은 실패를 겪어도 항상 나는 더 참담했고, 더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 실수를 저지른 사람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때 그 사람이 그렇게까지 했을까? 그 생각이 나를 너무나 괴롭게 했다. 왜 나만 이래야 할까, 왜 다들 나한테만? 서운함과 억울함에 남들을 원망하고 탓하다가도, 결국 그 마지막 화살이 향하는 방향은 나 자신이었다.

달리기는 매번 꼴등, 말주변도 없고 눈치도 부족하고 외모도 못났고 잘하는 것도 없고 성격도 내성적이고 집도 가난하고 재미도 자신감도 없고 약하고 피곤하고 외로웠다. 그래, 나는 항상 외로웠다. 물론 내 곁에도 좋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나의 서투름 때문에, 나의 나약함 때문에 그들도 그리 오래지 않아 내 곁에서 떠나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떠나갔다기보다는 서서히 나와의 인연이 옅어진 것이지만 그것을 다시 붙잡을 능력도 힘도 없었던 나로서는 그저 입을 꾹 닫고 그들이 다시 돌아와주길 은근하게 바라는 것이 전부였다.

물론 그래서 가끔 그들이 모처럼 간만에 시간을 쪼개어 나와 함께 해주었을 때는 정말 온 힘을 다해 그들과의 인연에 정성을 기울였지만 역시나 서투른 나로서는 그것이 부담이 되어버리거나 쓸데없는 오해를 유발하거나 하는 식으로, 역효과만 유발하곤 했다.

"그냥 넌 조금… 뭐라고 해야되나, 사람을 부담스럽게 만들어"

그러한 내 모든 것들, 나의 한심함과 부족함이 너무 아쉽고 서운하고 속상하고 답답해서 참 많은 시간을 괴로워했다. 사실 지금도 애써 아닌 척 하지만, 사실은 나도 정말 잘하고 싶다. 남들처럼 멋있게 척척, 착착해내고, 일이 안 예상처럼 안 풀려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멋있게 해결해내고, 일이 꼬여도 역시 운 좋게 술술 풀어나가는 그런 재주와 운과 능력이 갖고 싶었다. 정말로. 지금 당장 영혼을 바쳐서라도.






서툰 사람






"아, 너무 우울한 이야기죠…"

또 이런 식이다. 나도 모르게 신세한탄 같은 말을 소개팅 자리에서 해버렸다. 하마터먼 눈물까지 찔끔할 뻔 했다. 멍청이. 그렇게 오바하지 말자고 다짐하고 또 했는데. 다행히 남자는 "아니요, 괜찮습니다. 솔직해서 너무 좋은걸요. 그리고 저도 많이 공감해요. 저도 비슷한 고민 많이 하거든요" 하며 맞장구를 쳐준다.

긴 어색함. 회사의 주연 과장님이 주선한 소개팅 자리였다. 한번도 소개팅 해본 적 없다는 내 말에 놀라며 "그럼 더 주선해봐야겠네. 만나봐" 하며 알아봐 준 자리.

"여기 커피 맛있네요"

또 대화의 공백이 길어지자 나도 모르게 당황해서 초조한 나머지 아무 말이나 하기 시작한다. 남자는 내 말에 빙긋 웃더니 "네, 맛있네요" 하고 받아준다. 나의 '아무 말'에 그저 별 뜻 없이 쳐주는 맞장구지만, 그 부드러운 포근함이 나는 참 좋았다. 누군가의 말에서 묘한 조롱이나 무시, 동정이 느껴지지 않고, 이렇게 순수하게 포근함을 느낀 적이 도대체 얼마만인지…. 뭐, 내 피해의식인지도 모르지만.

남자의 별 뜻 없는 맞장구에도 그런 감정을 느끼는 내 자신이 문득 안쓰럽고 한심하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기쁜 것은 기쁜 것이다. 나도 그의 미소처럼이나 평소에도 화사한 봄날의 미소를 짓고 싶었다. 물론 내가 웃어봐야 어색하게 찡그린 미소겠지만.

그렇게 우리는 식사도 없이 카페에서 저녁 7시까지 무려 5시간 동안이나 수다를 떨었다. 어제 저녁부터 굶었던 터라 너무 배가 고팠지만, 남자는 식사 제안은 하지 않았고 그렇게 역 앞 카페에서 우리는 커피만 마시고 헤어졌다. 얼른 집에 가서 밥 먹어야지 하는 생각만으로 나는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자 문득 그제서야 '그때 그 말은 하지 말걸' 이나 '아, 이때 이렇게 대답했으면 좋았을걸' 하는 후회가 많이 떠올랐다.



"언니, 그 남자 어땠어?"

내 첫 소개팅이라는 말에, 자기가 먼저 신이 나서 코디도 도와주고 화장도 도와준 재희. 집에 도착했다는 카톡에 재희가 전화를 걸어와 물었다. 나는 조금 생각하다가 "서로 대화 많이 하고, 공감 가는 부분도 많았던 것 같아. 조금, 좋은 느낌인지도 모르겠어" 하고 대답했다. 재희는 "정말? 와, 너무 잘됐다" 하고 웃더니 물었다.

"그럼 애프터는? 언제 보기로 했어?"
"응?"
"남자가 다시 또 보자고 안 했어?"
"어…어. 그러네"

그랬다. 그냥 "오늘 너무 즐거웠어요. 미정씨 같은 분하고는 정말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는 근사한 마지막 말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 말이 그저 예의 차린 거절의 멘트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순간 '좋은 느낌인지도 모르겠다' 라고 대답한 나 스스로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무안했다.

잠깐의 침묵 후 재희는 "뭐…, 요즘에는 애프터 신청 바로바로 안 하고 나중에 따로 하기도 한다더라. 요즘 남자들 면전에서 까이는거 디게 무서워하잖아" 하고 어색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사실 그때도 정말 그래서 그런거면 좋겠다 하고 바라면서도 "뭐, 또 연락하겠지. 마음 있으면" 하고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감정을 숨겼다. 아니 숨긴다고 숨겨지지도 않지만. 그리고 '마음 있으면' 이라는 말을 할 때 왠지 가슴 한 켠이 쿡 하고 아팠다.

"그래, 여튼 재밌었다니 다행이야. 그럼 또 연락할께"
"응, 아 그리고 소개팅 이것저것 도와줘서, 고마워"
"에이, 고맙긴. 잘 안되도, 너무 우울해하지마. 내가 또 알아봐줄께. 아영 언니네 회사에도 좋은 남자 많대"
"하하, 아니야"

괜히 어설픈 인사 몇 마디를 더 주고 받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혼자 얼굴을 쓸어내리며 나의 눈치없음과 사회성 부족을 욕했다. 그랬다, 그렇지. 그 말은 거절의 말이지, 어떻게 그 말을 "좋은 인연이 되자" 라는 말로 듣는가. 머저리. 그리고 그 와중에 내 뱃 속은 빨리 밥을 넣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맹렬한 경고음을 알렸다. 그것도 한심했다.




엄마가 집에서 보내온 집 된장으로 된장찌개를 끓였다. 그러나 끓이면서 멍하니 딴 생각을 하다가 그만 불 올려놓은 것을 깜박하고 쓰레기 분리수거와 빨래까지 걷어놓고서야 국물이 다 졸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머저리"

나의 서투름과 부족함에 다시 한번 나를 저주하게 됐다. 이제는 스스로 자기 밥상 하나 차리는 것도 못하는 모지리가 됐나. 자꾸 스스로가 한 "좋은 느낌인지도 모르겠어" 라고 재희한테 했던 말이 생각난다. 부끄러워 죽을 것만 같다. 다 졸아서 된장액기스가 되어버린 탄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어보고 또 다시 스스로를 향해 욕을 했다. 나는 이제 내가 밉다.




일손이 부족하다는 명목 하에 오늘은 사무실이 아닌 1층의 생산 라인에서 돕게 되었다. 사람이 자꾸 나가는지, 요즘 자주 있는 일이다. 멍하니 라인에서 하루종일 똑같이 부품을 결합했다. 단차가 잘 맞지 않은 부품은 손톱으로 꾹 눌러가며 조립을 해야 했기에 검지 손톱이 얼얼하고 아팠다.

그저 멍하니 하루종일 같은 일을 하는 것이지만, 어쩌면 그래서 이 얼얼한 작은 통증이 그나마 나의 잠도 깨워주고 나도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자각을 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이 일을 오래하다 보면, 옆의 숙희 언니처럼 저렇게 굳은 살도 생기고, 손 마디마디도 굵어지는건가, 하는 생각도 해보고.

"자기 어제 소개팅 한다고 하지 않았어?"

점심을 먹고 라인에 다시 서노라니 그녀가 물었다. 나는 새삼 왜 그걸 떠벌렸을까, 하고 막심한 후회를 했지만 그때는 나도 모르게 꽤 들떴던 모양이다.

"그냥 잘 안됐어요"
"왜? 남자가 별로야?"

아니, 그렇지 않다. 착하게 생긴 인상에, 에, 키는 조금 작고, 배도 조금 나왔고… 조금 객관적인 기준에선 그저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웃는 얼굴이 좋았다. 환하게 웃는 그 얼굴이 참 나는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나를 너무 동정하지도, 너무 차갑게 굴지도 않아서 좋았다.

"아니요, 그냥…"

무언가 그를 욕하지 않고, 나도 초라해지지 않는 답을 머릿 속으로 찾았다. 하지만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잘 안됐어요"

겨우 한숨 토하듯이 그 말을 뱉어내자 언니는 "그래, 아니면 마는거지. 소개팅인데 뭐" 하고 대수롭지 않다는 양 넘긴다. 그리고 그렇게 대화가 끊겼다. 숙희 언니도 말을 그렇게 잘하는 타입은 아니다.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고. 내가 왜 소개팅 한다는 말은 꺼냈을까 하고 다시 한번 후회하며, 어색한 분위기에서 침묵의 시간이 길어졌다.




끝날 무렵 숙희 언니가 기분도 꿀꿀할텐데 저녁 같이 먹을까? 하고 제안했지만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거절하고 집에 왔다. 피곤했다. 밥 차릴 힘도 없어서 그냥 윗도리만 간신히 벗고 침대에 누웠다. 딱히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나는 왜 사는 걸까.

천장을 바라보다 몸을 일으켰다. 커피를 마셔야겠다. 다시 벗어놓은 옷을 입으려다. 그냥 편한 검정 고무줄 치마와 검정 티로 갈아입고, 파란 가디건을 걸쳤다. 색이 참 안 어울렸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고집을 부리고 싶어졌다. 나에 대한 심술인지도 모르겠다.

"후"

슬리퍼를 신으려다 다시 로퍼에 오른발을 끼워넣다가 다시 신발을 벗고 가디건을 벗어 제끼고 그냥 아디다스 바람막이를 걸쳤다. 파란 운동화를 신었다.

"뭐 하나 제대로 된게 없냐. 옷 하나도"

그냥, 걸어서 1분 거리의 동네 카페에 하나 아무렇게나 대충 입고 갈 곳도 참 이렇게 이상하게 어울리지도 않게 간다. 참 센스도 없고, 모자라다. 나는 내가 정말 정말 싫다. 정말 싫다.





카페에 비치된 여행 잡지 한 권을 넘겨보며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다섯 테이블 있는 이 작은 카페에 손님은 나 하나 뿐이다. 예전에는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지만 맞은 편 골목 입구에 큰 커피샵이 하나 생기고 여기 손님이 많이 줄었다. 주인 아저씨의 우울한 표정이 점점 더 우울해지는 느낌이다.

카페의 통유리 너머로 비가 한두방을 묻어나기 시작하고, 가로등빛이 서서히 빗줄기에 번져보일 무렵 나는 커피를 다 마셨다. 하루종일 내 전화기는 울리지 않는다. 며칠에 한번씩 아는 동생들이나 언니들의 안부 카톡 정도. 사실 그것도 내 책임이다. 먼저 말을 걸고, 먼저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쓸쓸했다. 그래도 예전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요즘의 나는 고독사에 대해 문득 걱정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루종일 전화를 하는 사람은 엄마 뿐이다. 만약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욕실에서 넘어져 뇌진탕이라도 온다면 나는 그렇게 죽는 사람이 될 것이다. 아니, 사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문득 그냥 지금 누군가와 연애 이야기, 화장품 이야기, TV프로 이야기, 다이어트 이야기, 회사 이야기를 주고 받고 싶었다. 아니아니, 그냥 주말 동안 누군가들을 만나서, 수다를 떨고, 남친이랑 여행도 가고, 그래, 그런 것들을 해보고 싶다. 올해 나이 31살, 이제 몇 년 후면 점점 더 힘들어지겠지.

비 때문에 센치해진 탓일까. 지나치게 우울함 속으로 빠져든다. 난 아무렇지도 않다.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다. 이대로 살다 혼자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애완동물은, 아니 반려동물은 잘 간수할 자신이 없다. 나 스스로도 잘 못 챙기는 인간이 말도 안 통하는 짐승에게 잘할 것 같지가 않다. 그래서 키울 수가 없다. 그리고 막연한 생각이지만 정말로 죽는 날까지 모태솔로로 죽지야 않겠지. 아니, 모르지만. 어쨌든.

다시 여행잡지에 눈길을 둔다. 히말라야 산맥의 사진이 멋있어 보였다. 훌쩍 떠나고 싶어졌다. 쉬고 싶었다. 근데 한편으로는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차라리 그럴 돈 있으면, 그 돈으로 성형이나 하면. 그럼 조금은 사정이 낫지 않을까. 얼굴에 칼 대는건 무섭지만.




[ 미정씨 ]

조금 울적해져 창 밖을 바라보노라니 카카오톡으로 메세지가 날아왔다. 소개팅의 그 남자, 영석씨였다.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는지, 테이블을 툭 쳐서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 했다.

[ 오늘 출근 잘 하셨죠? 저녁 드셨어요? ]
[ 안녕하세요, 네, 근데 저녁은 아직 안 먹었어요 ]

답장을 보내고 나는 휴대폰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허둥대는 내 모습에 사장님이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지만 나는 다시 휴대폰으로 눈길을 돌린다.

하지만 대화는 그걸로 끊어진다. 거의 30분 가까이 답장이 없다. 무언가 답장을 보낼까 하다가, 마땅한 말도 생각이 안나고, 빈 커피잔을 놓고 너무 오래 있는 것 같아서 자리에서 일어난다.

"수고하세요"
"예, 또 오세요"

무미건조한 주인 아저씨의 목소리. 그 또 오세요, 라는 말이 괜히 이상하게 들린다. 마치 '허튼 생각하지 말고 솔로의 세계에 머무르세요' 같은 말로. 점점 내가 이상해지는 것 같다.




비를 몇 방울 맞고 집에 들어와 옷을 다 벗고 팬티만 입은 채로 휴대폰만 챙겨 침대에 눕는다. 새삼 아직 내가 안 씻었다는 사실을 떠올렸지만 귀찮았다. 불도 켜지 않은 채, 비구름에 어두컴컴해진 방에서 혼자 휴대폰 불빛만을 바라본다. 그렇게 1시간쯤 지났을 무렵, 그에게서 또 카톡이 왔다.

[ 죄송해요, 제가 지금 회사 회식 중이라서;;; 그보다 혹시 이번 주말에 시간 되세요? 영화 어떠세요? ]

솔직히 기뻤다. 나 되게 비참한 방식으로 까인게 아니라, 그냥 순수히 남자가 미쳐 말을 못 꺼낸 것 뿐이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나 애프터 신청 받았다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서운했다. 뭐가 서운한지는 모르겠지만 서운했다. 답장이 늦어서? 그 날 말을 안 해서? 그 때문에 내가 입장이 난처해져서? 그리고 웃겼다. 새삼스레. 남자에 목을 매는 그런 내가 아닌데.

[ 네, 어떤 영화 보고 싶으세요? ]
[ 미정씨 보고 싶은 영화요. 뭐 보고 싶으세요? ]

사실 극장 간지 너무 오래되서 무슨 영화가 있는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본 영화가…글쎄. 그냥 영화 앱으로 업데이트까지 한 끝에 볼만한 영화를 골라본다. 남자는 [ 좋아요 ] 하고 대답하더니 [ 그럼 예매해놓을게요 ] 라며 은연 중에 데이트 약속을 확정 짓는다. 사실 난 시간도 날짜도 어디서 볼지도 이야기 안 했는데.



"그래, 다 케바케라니까. 응응, 재미나게 봐"
"어어~"

재희에게 자랑 아닌 자랑을 했다. 만나러 가도 될까, 하는 식으로. 전화를 끊고 나서 내가 너무 티나게 이야기 한 거 같아서 바보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뭘 입고 가지, 하는 걱정을 했다. 내일은 옷을 사러 가야겠구나, 생각했다. 속옷도 사야되나, 하고 생각했다가 스스로의 바보같음에 빵 터졌다. 그렇게 혼자 미친 사람처럼 히히대다가 몸을 일으켰다. 씻기로 했다.



다음 날의 퇴근길에는 옷 매장에 들렀다. 옷 사는 것도 엄청 간만이다. 하도 간만에 왔더니 뭐가 이쁜 줄도 잘 모르겠다. 이 옷 저 옷 입어봤지만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오늘따라 매장에 사람이 많아 여러 번 이것저것 입어보기도 어려웠다. 다들 참 옷도 잘 입고 이쁘다는 생각을 해봤다. 나만 촌스럽고 못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조금은 자신을 갖기로 했다. 결국 옷은 못 샀다. 아직 화요일도 있고, 수요일도 있고 뭐 시간은 많았으니까.




"흠"

집에 와서 데이트 코디, 여친룩, 소개팅 패션 등 다양한 키워드로 검색해봤지만 다들 20대 초중반의 날씬하고 예쁜 사람들 패션만 보여 도움이 안 됐다. 저런 애들이야 무슨 옷을 입는들 안 예쁠까. 입술만 깨물다 옷장을 열고 다시 이 옷 저 옷을 살펴봤지만 그나마 제일 나은 옷이 저번 소개팅 때의 그 원피스였다. 재희도 그게 제일 낫다고 했다. 또 입고 갈까도 생각해봤지만 역시 그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숨이 나왔다.

"옷이 없냐…"

탄식을 하며 더 찾다가, 얇은 가죽재킷을 하나 찾았다. 그러고보니 작년에 잘 입고 다녔는데. 지금 입기는 조금 더울지도…, 싶어서 휴대폰으로 날씨를 봤다. 주말 날씨는 조금 흐리다고 했다. 아주 못 입을 성 싶지는 않았다. 그럼 이걸 플랜B로 하고 내일, 모레 또 옷을 보기로 했다.




결국에는 금요일 저녁에 내가 못 참고 [ 저희 영화 언제 볼까요? ] 하고 먼저 말을 걸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남자는 [ 아, 제가 깜박했네요. 토요일 12시 영화에요. 신촌에서 뵈어요 ] 하고 답장을 했다. 아, 조금 더 늦게 만나면 좋았을텐데. 결국 맘에 드는 옷을 못 사서 내일까지 좀 봤으면 싶었는데. 어쩔 수 없었다. 가죽재킷을 입기로 했다.

"내일 안 덥기를"




…더웠다. 어제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내일은 오전에 비도 오고 바람도 분다는데. 내일 입으면 딱일텐데. 아침까지 바람막이랑 고민하다가 그냥 이걸 입었는데 후회했다. 아니 뭘 입었어도 사실 후회했겠지만. 재킷을 벗어 손에 들고 있는데도 더웠다.

[ 어디세요? ]

벌써 11시 40분인데. 12시 영화라고 안 했나. 설마 밤 12시 영화는 아니겠지. 전화를 했는데 꺼져 있었다. 카톡을 보냈다. 날이 더워서 땀이 조금씩 났다. 땀냄새 날까 두려웠다. 시간이 애매해서 카페에서 기다리기도 조금 그랬다.

"하아"

조금 더 기다리노라니 어느새 11시 58분. 영화는 이미 늦었네 싶었다. 입술을 쭈욱 내밀었다가 '딱 1분만 더' 하고 생각하며 전화를 또 걸었다. 역시 꺼져 있었다. 설마 늦잠 자는 걸까. 그럴 수도 있지, 싶었다. 그리고 설마 이렇게 바람 맞는건가 하고도 생각했다. 그 역시 그럴 수 있지, 싶었다. 내 인생이 그렇지 뭐, 하는 생각에 조금 쓸쓸해졌다. 다리가 아팠다. 힐을 안 신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남자가 키가 작으니까, 신으면 안 좋아하겠지 싶어서.




"어디세요?"

남자에게 전화가 걸려온 것은 1시간이 더 지나서였다. 오후 1시가 다 되어서 공중전화로 걸려온 전화. 조금 화도 났고 '내 인생이 그렇지 뭐' 하는 마음에 우울한 먹구름도 마음 속에 가득했지만 그보다는 어쨌든 일단 반가웠다.

"미안해요, 제가 사고가 나서요"
"사고요?!"

오다가 다 와서 횡단보도에서 오토바이랑 접촉사고가 났다고 했다. 하필이면 전화기를 떨어뜨려서 망가진 통에 전화를 걸 수가 없었다고. 번호를 외우고 있는 것도 아니라서, 건너건너건너 통해서 번호를 알아내느라 시간도 걸렸다고 했다.

"많이 다치신거에요?"
"아니에요, 다리만 조금…"
"어느 병원이에요? 입원한거에요?"

남자가 조금 우물쭈물하다가 "아, 그럼 여기 신촌 세브란스 병원인데 오시겠어요?" 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알겠노라며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




10분 정도 거리길래 택시 타기도 민망해서 걸었더니, 너무 더웠다. 또 급한 마음에 서둘렀더니 땀이 줄줄 났다. 이미 화장도 무너졌을 것 같고, 망한 데이트였다. 그래도 괜찮았다. 나 때문에 사고를 당한 것 같았다. 그래, 나 때문이다. 속상했다. 나같은 사람이랑 어울리니까 이런 일이 일어난거다. 순간 울컥했다. '왜 나만' 하는 생각이 머릿 속에 가득 찼다. 그냥 평범하게 데이트 하는 것도 잘 안되는 나다. 머피의 법칙, 징크스, 불운 뭐 그런 단어들이 생각났다.

글썽글썽한 눈물을 물티슈로 조심스레 닦고 휴대폰을 보았더니 다행히 화장은 크게 번지지 않았다. 병원에 들어서자 조금 시원했다. 화장실에서 화장을 고치고, 전화를 걸려는 순간 아차 싶었다. 어디서 만나기로 한지 정하지 않았구나, 싶었다.

'멍청이'

그러다가 어차피 그가 다시 전화를 하려면 공중전화로 가야겠지, 싶어서 두리번 거리며 검색하려는 순간, 다시 전화가 왔다.

"응급실 앞에서 기다릴게요"




"아…"

남자는 발목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깁스를 한 거냐고 물었더니 그냥 붕대만 한 거라고 했다. 재차 부러진거냐고 물었더니 그냥 가볍게 삐끗한 정도라며 걷는 것도 괜찮다고 했다. 조금 절뚝이기는 했지만.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미안하다고 했다. 그는 "미정씨가 왜 미안해요" 하고 웃으며 물었다.

"저 만나러 오시다가 다치신 거잖아요. 미안해요"

그 말에 그는 환하게 웃으며 "아니에요, 무슨 말이에요 그게. 오히려 제가 늦어서 미안해요. 영화도 못 보고… 그보다 배고프죠? 밥 먹어요 우리" 하고 제안했다. 다친 다리로 멀리가기 미안해서 그냥 병원 푸드코트에서 먹자고 했다. 이번에는 남자가 다시 미안하다고 했다.




"사실은, 오면서 케이크랑 꽃다발도 샀는데, 넘어지면서 하필 쓰레기봉투 있는데로 떨어뜨려서 다 망가지고 뭐 그래서, 케이크는 버렸고 꽃다발도 요거 한 송이만 따로 빼왔어요"

남자는 가방에서 장미꽃 한 송이를 꺼냈다.

"고마워요. 근데 꽃다발 받아야 할 사람은 영석씨 같은데요. 문병 받게"
"하하, 그러네요"

영석씨는 순두부찌개를, 나는 치즈 함박 스테이크를 골랐다. 밥이 나오자 허기가 졌던 우리는 둘 다 정신없이 밥을 먹었다. 사실 아직도 조금 어색한 감이 없진 않아서 더 밥 먹는데 집중한 것도 있었다. 반쯤 먹었을 무렵, 영석씨가 말했다.

"사실…저도 소개팅 같은걸 많이 안 해봐서, 아니 안 해봐서, 당연히 머리로는 애프터 신청을 해야 되는거 아는데도 막상 헤어질 때 깜박했어요"

어색하게 웃던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 소개팅 때 미정씨가 막 어렸을 적부터 일이 잘 안 풀리고 뭔가 남들보다 늦고 그런 이야기 했던 거요, 그 이야기 들으면서 되게 공감도 가고, 제가 더 잘해주고 싶기도 하고, 음, 그런 마음이 들었었거든요"

그랬나.

"아까도 저 다친거 보자마자 미정씨가 자기 때문에 저 다쳤다고 미안하라고 한거, 그 말 들으면서 뭔가 가슴 여기가 디게 뭉클하면서 아프기도 하고, 막 좀, 그랬어요"
"왜요"
"그냥 보통은, 1시간씩 연락도 없는데 기다리지도 않지만 그랬다고 해도 디게 화날거 같은데, 화도 안 내고 또 병원까지 와서는 또 자기 때문이라고 하고. 그냥 그거 보면서 미정씨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그 마음을 조금 알 것 같았어요. 옛날부터 그런 자기…비하? 고찰? 후회? 뭐 그런 마음 같은게 참 많은 사람이겠구나 싶기도 하고. 아니 이건 좀 아닌가. 여튼 저도 좀 그런 면이 있어서, 정말 놀랐거든요"

이번에는 내가 가슴이 뭉클하면서 쿠욱 아팠다.

"…"
"어쨌든 그랬어요. 그리고 진짜…미안하고, 고마워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냥… 세상에 한 명 정도는,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아까 조금 울어두어서 눈물이 나오진 않았다. 같은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니 정말 좋았다. 

"우리 밥 먹어요 밥"
"아, 네"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는 밥을 먹으라는 내 말에 어색하게 또 웃으며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의 환한 얼굴을 보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어쩌면 이 사람을 사랑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그리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정말정말 이번 만큼은 서툴고 불행하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아니, 이제는 누군가에게 그렇게 소원처럼 비는게 아니라, 스스로 꼭 그렇게 제대로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 사람한테만큼은.   



< 끝 >

모니터 저 너머의 사람 소설

언제나와 같은 아침, 나는 출근하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포털의 뉴스를 보며 스윽 하루의 이슈를 훑는다. 다이나믹 코리아답게 '대충 보자' 라고 생각했음에도 도저히 클릭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쇼킹한 뉴스들이 몇 개씩이나 있다. 그것도 매일매일. 정말 대단한 나라다.

"와 이건 뭐…"

진짜 미친거 아닌가 싶은 뉴스 몇 개를 클릭하며 다이어리에 오늘의 이슈 몇 개를 적어놓는다. 회사의 SNS 담당자로서, 이렇게 하루하루의 이슈를 정리해놓으면 나중에 생각보다 꽤 도움이 된다. 이슈 중심의 아이디어 짜내기도 쉽고, 써먹기 좋은 드립도 쉽게 나오고.

당연히 댓글도 본다. 기사를 죽 보면서는 생각치도 못했던 문제나 색다른 방향에서의 접근도 많고 때로는 기사 보며 답답했던 내용에 대한 신랄한 사이다 같은 속풀이 댓글도 많으니까. 물론 안 보느니 못한 쓰레기 댓글도 많지만.

"응?"

근데 못보던 기능이 생겼다.

"작성자 프로필?"

닉네임 옆에 작게 그려진 초상화 아이콘에 마우스를 가져다대자 '작성자 프로필'이라는 문구가 뜬다. 뭔가 싶어 클릭하니…

[ Glassgun : 한승원, 42세,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84-5 (대치동) 디오하우스 402호, 액티브원(IT보안, 과장) 재직 중, 연봉 4400만원(세전), 기혼(임경아), 자녀 없음, 신장 176cm, 체중 74kg, 한국대학교 전자공학과 졸업 (기타 정보)]

같은 개인 프로필 내용이 다 보인다. 순간 기가 막혀서 마시고 있던 커피를 뿜었다. 당황하며 휴지로 책상을 닦아내고 다시 확인했다.

"뭐야 이거, 레이버 이 새끼들 미쳤나? 신상정보인데 이거. 법적으로 문제 있는거 아닌가?"

이토록 적나라하게 한 개인의 신상정보를 보는 기능을 만들다니. 심지어 밑줄이 그어진 링크를 타고 가면 그 회사나 배우자의 신상 역시도 그대로 보여졌다.

[ kalim0412h : 임경아, 39세,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84-5 (대치동) 디오하우스 402호, 열림출판사(출판사, 과장) 재직 중, 연봉 3700만원(세전), 기혼(한승원), 자녀 없음, 신장 167cm, 체중 56kg, 단원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기타 정보)]

"이거 뭐지 진짜, 근데 레이버 이 새끼들이 연봉 정보는 어떻게 알았대. 키랑 체중은? 이거 본인이 입력하는건가?"

그때였다. 혼자 기가 막혀하며 중얼중얼 대자, 옆 자리의 제아 주임이 "대리님 뭘 그렇게 혼자 중얼중얼 거리세요" 하며 웃는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아니 레이버 이 놈들 미쳤나봐요" 하고 제아 주임에게 말했다.

"아니 레이버 지금 뉴스 댓글창에, 아이디 옆에 작성자 프로필이라는 버튼 누르면, 그 사람 신상정보가 다 보이는 미친 기능이 생겼네? 이거 완전 난리 날 거 같은데?"
"네에?"

제아 주임은 기가 막혀하며 내 모니터를 흘낏 보다가 다시 자기 키보드를 다다다 타이핑 한다. 나는 혀를 차며 다른 사람들의 프로필들을 훑어봤다. 하… 다들 이렇게나 사는구나, 와 이 사람은 연봉이 3억이 넘네, 오, 박사 학위자네? 하면서 하면서 보고 있노라니 제아 주임이 다시 말을 건다.

"대리님, 어떤 거에요? 안 보이는데"

나는 가르쳐 주려고 일어나 제아 주임 자리로 갔다. 스크롤을 내리고 댓글 아이디 옆의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이거요. 완전 미친거 같지 않아요?"

하지만 나의 말에 제아 주임은 "뭐가요?" 하고 되물었다. 나는 모니터를 가리키며 "이거요 이거, 여기 연봉, 주소, 나이, 뭐 신상 다 보이잖아요" 하고 피식 웃으며 말했지만 제아 주임은 "네?" 하고 그저 되묻는다. 나는 답답함에 "이거요 이거" 하며 모니터의 프로필 박스 영역을 손가락으로 짚었지만 여전히 그녀는 무슨 헛소리 하느냐는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 본다.

"응?"

일단 옆 자리의 태민 과장님한테 말을 걸었다.

"과장님 이거 좀 보세요"

저혈압인지 아침마다 기분이 영 다운되어 있는 그는 "뭐가" 하면서 고개를 돌린다.

"이거요, 프로필 써있는 박스요"

과장님은 "뭐? 광고? 이거?" 하며 엉뚱한 소리를 한다. 아니 이 사람들이 지금 나를 놀리나 싶어서 "이거 이거요 이거. 프로필 기능" 하면서 손톱으로 찍는다. 그러나 여전히 무슨 헛소리냐는 식으로 못 알아먹다가 "아 뭐냐고" 하며 짜증까지 부린다. 제아 주임도 "뭐에요, 재미없어" 하면서 나를 실없는 사람 취급한다.

나는 코웃음을 치며 자리로 돌아온다. 뭐야 시발. 눈깔이 삐었나. 기분마저 나빠졌다. 짜증나서 혀를 끌끌차며 자리로 돌아와 업무를 시작한다. 회사 페이크북 계정에 접속한다.

"어?"

놀랍게도, 회사 페이크북 계정의 댓글을 남긴 고객의 이름 옆에도 프로필 기능이 달려 있었다. 방금전 레이버의 그것과 같은 UI의. 클릭을 해보니 이것 역시 개인의 신상 정보를 그대로 담고 있는 말도 안되는 기능이었다.

'뭐지'

전혀 다른 두 회사에 이런 동일한 UI의 동일한, 그것도 어떻게 보아도 법적으로 문제 있는 기능이 동시에 들어간다는건 말이 안된다. 내가 지금 뭐 헛거를 보고 있나, 꿈인가, 싶어 눈도 비벼보고 꿈에서 깨어자 하며 번쩍 눈을 떠보기도 하지만 그대로다. 이건 꿈이 아니다.

"해킹인가"

아 망할. 뭔가 애드온 형식의 랜섬웨어나 바이러스 툴 같은게 깔려서 보이는건가. 그걸 또 좋다고 이것저것 클릭해댔으니. 병신. 이상한 뭔가에 감염되었나 싶어 나는 재빨리 바이러스 검사부터 돌렸다. 하지만 간이검사 결과에는 뭐 뜨는게 없었다. 하긴 이미 감염됐으면 소용 없겠지. 아니 애초에 이런 듣도보도 못한 미친 툴이 깔렸다면 업데이트도 안 한지 오래된 이 회사 똥컴 백신 따위에 체크될 리가 없지. IT 일을 맡고 있는 재원씨에게 전화했다.

"재원씨, 나 컴퓨터가 좀 이상한데… 어어, 아니, 사이트의 유저 정보나 뭐 댓글창 이런게 보면, 그 유저에 대한 신상정보가 고스란히 노출되는 이상한 현상이 보이거든? 응, 뭐 랜섬웨어나 이런거 아닌가 싶어서. 잠깐만 와서 봐줘, 어어"

전화를 끊자, 옆에 있던 제아 주임이 피식 웃으며 말한다.

"아 대리님, 진짜, 재미도 없는 장난 왤케 오래 쳐요"
"장난 아닌데, 내 자리에서 보세요 그럼"

나는 다시 모니터를 가리켰지만, 제아 주임은 내 모니터를 보고서도 말한다. "너무 진지하길래 또 속았네, 아 보이긴 뭐가 보여요!" 하며 웃는다. 그리고 나는 그제서야 지금 좀 상황이 이상함을 느낀다. 제아 주임도, 태민 과장님도 장난이 아니다. 나만 보인다. 잠시 후 온 재원씨도 "뭐 말씀하시는거에요?" 하며 당황한다. 제아 주임이 "아 대리님이 장난친 거에요. 미안해요" 하며 그를 돌려보낸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자리에 앉는다. 그런데 지금도, 내 눈에는 개개인의 프로필과 신상정보가 그대로 보인다. 뭐야 이거.






모니터 저 너머의 사람 






인터넷 웹사이트 뿐만이 아니었다. 휴대폰의 메신저, 온라인 게임 속 아이디, 심지어 백업용으로 항상 찍어두는 거래처 명함의 이미지 파일에서도 그 상대의 프로필이 뜨며 보였다. 점심시간에 날아온 여친 소원의 카톡 옆 프로필 정보 보고는 놀라서 사레까지 들렸다. 휴대폰을 들여다 본다.

[ happy2lo : 장소원, 27세, 안양 동안구 경수대로 14-77 (호계 3동) 신월아파트 210동 702호, 삼원통상(무역, 사원) 재직 중, 연봉 2900만원(세전), 미혼(남친:조유민), 자녀 없음, 신장 163cm, 체중 57kg, 대원대학교 중국어과 (기타 정보)]

'뭐야 시발'

심지어 적힌 정보들은 사실이었다. 연봉이랑 체중까지는 몰랐지만. 나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기타 정보 탭을 눌렀다. 그러자 놀랍게도 카테고리 탭들이 보였다.

[신체] [성격] [재산] [인간관계] [히스토리] [심리상태] [소셜포지션] [성격] 등등등… 제일 앞에 있던 [신체]탭을 누르자 그녀의 몸에 대한 세부적인 정보들이 보였다.

키, 몸무게, 각종 건강상태, 운동능력, 신체 사이즈, 지능, EQ 등등. 모든 정보가 다 있었다. 난 소원이가 100미터 달리기 24초라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운동신경 둔한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그보다 변비와 치질도 있었다. 뭐 그거야 알고 있었지만. 신체 사이즈는 뭐 서로 볼 거 못 볼거 다 본 사이에 궁금할 것도 없지. 근데 지능에는 놀랐다. 141이라니. 몰랐다. 근데 왜 그렇게 멍청하지.

혼자 피식 웃다가 슬슬 다른 탭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히스토리…그 맨날 툭하면 이야기 하던 '재성 오빠', 사귄 적 없다더니 사귀었네 뭐. 나 말고 사귄 남자가 총 5명이구나. 첫 경험은 스무살, 대학 선배 규영. 모르는 이름이다. 25세 이후로는 나와만 만났구나. 그래 우리 벌써 2년 다 되어가네. 나에 대한 감정이 '사랑하지만 권태기에 접어드는 것이 아닌가 혼란을 느끼는 중'이라고 기록된 부분이 좀 씁쓸했지만.

재산은 볼까말까 고민하다 열었다. 1,200만원. 그래도 열심히 모았네. 한달에 60만원씩 적금 붓는구나. 인간관계… 아영이, 진아, 소미, 세미, 재원, 상원, 경호… 익숙한 그녀의 친구 이름들과 내 친구들의 이름들. 이어서 김대권, 윤지호, 송민섭 등등등. 들어본 것도 같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남자 이름들도 엿보인다. 심지어 그에 대한 감정상태까지 표시되고 있다. 다행히도 크게 신경쓸만한 남자는 없는 것 같다.

성격 탭이 있는데도 심리상태 탭이 따로 또 있는 것은 뭔가, 싶어 심리상태를 열어보니 놀랍게도 현재의 심리상태가 실시간으로 기록되고 있었다. 아쉽게도 문장형태는 아니고 그냥 [짜증 +2(32)], [분노 +7(66)] 등의 순간순간의 감정들이 보인다. 지금 뭔가 열 받고 있는 모양이다. 피식 웃었다.

소셜포지션은 뭔가 싶어 열어보니 직장 및 사회에서의 소속된, 혹은 되었던 단체나 집단, 동호회, 인터넷 사이트 등이 죽 나열되어 있었다. 일화여고, 대원대학교, 삼원통상, 안양 몽키띠모임, 여성세계, 소울앤커피, 카시오스타… 뭐, 그렇고 그런 사이트들.

"재밌네"





이게 꿈인지 아닌지 싶어 몇 번을 스스로 몸을 꼬집어 봤다. 이게 참 디게 영화에서도 보기 싫은 클리셰인데, 이게 지금 꿈인가 아닌가 믿기지 않는 상황에서는 확실히 그거만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더라. 그리고 매번 아팠다. 그리고 내가 미쳐버린 것은 아닌가 싶어 천천히 스스로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회사 끝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한숨 푹 잤다. 밤 11시 반에 눈을 번쩍 떴다. 허둥지둥 휴대폰을 확인했지만 역시나 프로필 보기 기능은 그대로 있었다.

"후"

이게 뭘까.

"초능력?"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 아닌가. 세상 모든 사람들의 개인정보를 나는 볼 수 있다. 인터넷을 통해서. 문득 언젠가의 과학잡지에서 봤던 우주론 하나가 떠올랐다.

"시뮬레이션 우주론"

쉽게 말하자면 내가 게임 속 캐릭터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우주 전체가 말이다. 그 게임 속, 그 세계관에서 정교하게 시뮬레이션 되고 있는 캐릭터는, 자기 자신이 누군가에 의해 창조된 하나의 캐릭터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까.

내가 만약 스타크래프팅의 마린이라면, 그리고 사실 내 모든 생각과 감정과 감각과 내 주변의 모든 것이 아주 지극히 정교하게 시뮬레이션 된 무엇이고 그렇게 누군가의 조종 하에 움직이고 생각하는 것이라면, 나는 그것이 내 생각이라고 생각하며 그렇게 살아가겠지. 누군가 "너는 그저 게임 속 캐릭터일 뿐이야" 라고 말해줘도 "응 그래" 하고 웃어 넘길 뿐이겠지. 그게 사실인데도.

…그런데 만약 진짜 내가 바로 지금 그런 것이라면? 지금 이 터무니 없이 말도 안되는 현상도 설명이 된다. 나를 조종하는 누군가가 일부러 나라는 캐릭터를 해킹 했거나 혹은 시스템에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한 것이라면 말이다. 일종의 버그 플레이가 되는 것이겠지.

"아…뭔 개소리냐"

스스로에게 긴 한숨을 내쉰 나는 어쨌거나 다시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았다.

"아참! 오 맞네"





레이버 뉴스 메인 화면에 뜬 흔한 가십성 기사. 인기 걸그룹 팝스걸즈의 소영과 인기 남성 R&B 듀오 데이웍스의 준이 사귄다는 기사. 둘은 소속사의 말을 빌어 "좋은 선후배 관계일 뿐"하고 밝혔지만 임마, 너네는 나한테는 안돼.

데스패치 저리 가라의 정보력을 얻은 나다. 곧바로 팝스걸스 소영의 뉴스타그램에 접속했다. 역시나 아이디 옆에 프로필 보기 기능이 있었고, 곧바로 클릭했다.

[ s0sopop : 전소영, 19세, 서울 강남구 논현로 227길 13 (논현동) 예지빌 202호, 소라 엔터테인먼트(연예기획사, 사원) 재직 중, 수익미배분, 미혼(남친 : 오혁준), 자녀 없음, 신장 161cm, 체중 44kg, 서원예고 재학 중(기타 정보)]

"거봐! 사귀는거 맞네! 둘이 잠은 잤나?"

곧바로 기타 정보의 히스토리 항목을 봤다. 현재까지 오혁준과의의 성관계 2회.

"캬! 했네 했어! 했네! 어이 했어! 얼씨구, 했구나! 고딩이랑 했구나!"

뭐, 내가 그다지 좋아하는 그룹도 아니고 그저 웃기고 재밌었다. 문득 이 능력으로 연예부 기자를 하면 나는 진짜 연예 기사로 퓰리처상 탈 수도 있는 미친 기자 되겠다 싶어 낄낄 웃었다.

"아니지"

아예 정치계로 나아가서 정치인들 약점 잡고 뒤흔들면 세상 무서울 것이 없으리라. 아니, 뭐 그랬다가는 목숨이 위태롭겠지만. 어쨌거나, 거기서 삘 받은 나는 거의 2시간을 탑 연예인들 히스토리를 뒤지고 다녔다. 세상에 이런 재주로 그딴 짓을 한다는게 누구 눈에는 한심하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쩌겠는가. 내 능력 내가 이렇게 쓰겠다는데.





"진짜 대박이다"

별별 더러운 일들이 다 있었다. 걸그룹과 보이그룹 멤버들끼리의 얽히고 얽힌 지저분한 치정관계와 스와핑, 온갖 변태적인 성관계들, 탑모델 송민영이 한국발전당 대선후보 서원섭 그 늙은이 애까지 낳아준 것도 그렇고, 역시나 UN미디어 사장 조섹스 그 새끼가 자기 기획사 아이돌 에이스 멤버들 거의 다 건드린 것도 그렇고… 김정아 나간 이유도 결국 그 변태 새끼의 끝없는 요구 때문이라는 사실에 내가 다 속상했다. 진짜 좋아했는데. 내가 요즘 최애하는 토마토 다영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도 솔직히 좀 충격이었고.

거기서 삘 받은 나는 카시오톡이나 페이크북을 통해 내 주변 사람들의 신상도 거의 다 까봤다. 회사 사람들, 친구들, 전 여친들…

그리고 세상에 멀쩡한 사람이 생각보다 드물다는 사실도 알았다. 태민 과장은 지금 내연녀를 두고 바람 피우면서 임신 중인 자기 마누라 툭하면 때리는 인간 쓰레기였고, 권제아 주임은… 도벽이 있었다. 회사 여직원들 화장품을 꽤나 훔친 듯 하다. 에휴. 내 전에 회식자리에서 잃어버린 갤럭시스7도 저 년이 훔쳐간 거였다. 시발. 그 폰에 별별 자료들 다 있었는데.

뿐만 아니었다. 친구 놈들도 치정관계로 엃긴 경우가 꽤 있었고, 특히 상원이 이 새끼가 나랑 소원이랑 술자리에서 나 자리 비운 사이에 소원이 뉴스타그램 아이디 따고 DM으로 꽤나 지분대다가 바람 피우자는 제안까지 했었다는 사실에 소름과 분노를 함께 느꼈다. 소원이 언제부턴가 상원이가 나오는 자리는 피하는게 그 이유였었다. 시발. 개새끼. 나한테 소원이 그 사실을 숨긴 것에도 짜증과 분노를 느꼈지만, 또 한편으로는 나와 상원의 친구관계 때문에 그런 것이겠지 하는 생각에 혀를 차며 넘어가기로 했다. 어쨌거나 상원이 이 새끼는 다음에 한번 날잡고 골통을 깨버려야겠다.

전 여친년들도 참 개짓거리 많이 한 것을 발견했다. 나 몰래 다른 놈들과 자고 다닌 것도 그렇고, 효영이 이 년의 나에 대한 평가가 '키스 더럽게 못하는 찐따 새끼'로 기록된 것에선 그냥 허탈하게 웃었다. 시발. 그래 니는 그렇게 깨끗하게 잘해서 양다리까지 걸쳤냐.

뭐랄까,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크나큰 실망감까지 느껴지는 수많은 내 주변인들의 기록을 훑어보다가 차마 두려워서 부모님 신상은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리고는 한참 이것저것 둘러보다가 정치, 경제인들에게까지 관심이 갔다. 국내 정치인부터 워싱턴의 현자, 위버 피렌까지. 영어가 짧아서 그 냥반들의 생각을 깊숙히 알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단지 가상화폐가 내년부터는 진짜 장난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 정도나 얻어본 정도.




"뭐야 이 새끼는"

다음으로 내가 한 일은 예전에 블로그나 커뮤니티에 내가 쓴 댓글과 게시글 찾아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달린 다른 사람들의 댓글보기. 이게 꿀잼이었다.

"얼척이 없다, 얼척이 없어"

지난 주에 IT기업들의 불합리한 인사관행에 대해 나와 밤새도록 토론했던 유저 tguys 이 새끼는 나이 마흔 넘게 쳐먹도록 평생 회사는 커녕 알바조차 해본 적 없는 방구석 히키코모리 백수였고, 예전에 한번 나와 정치관을 이유로 토론한 이래 수시로 악플 달아대는 찌질이 ss2000 이 새끼는 19살짜리 고딩이었다. 지 말로는 40대 중소기업 오너라더니. 사실 몇몇 놈 수준이 아니었다. 게시판 리스트 따라서 죽 훑어보노라니…

한 절반은 대학생인데, 연애하고 있는 놈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남은 절반의 절반은 평범한 직장인. 개중에 드물게 대기업 직장인이 있고, 더욱 드물게 전문직이 한 서너 페이지에 한 명 정도 보일 정도. 평범한 직장인이라고 해도, 생각보다 적당히 벌만큼 버는 사람들이 드물었다. 겨우 연봉 3천 버는 사람이 한 페이지당 서너명도 안된다.
그리고 남은 인원은 좀… 뭐 백수 찐따라던지, 뭐 그런 양반들. 아 고도 비만 환자는 왜 그리 많던지. 솔직히 놀랐다. 나도 똥배 나온 놈이지만, 우리나라 비만지수 낮은 나라 아니던가. 아니면 이런 사람들이 인터넷을 유달리 많이 하는 것이던지.

어째 연애 중, 혹은 기혼자로 뜨는 비율이 너무 적길래 좀 이상해서 3페이지 째부터는 히스토리도 훑어봤는데, 정말이지 놀랐다. 모태솔로나 나이 먹을만큼 먹고도 연애 경험이 거의 없는 케이스가 30%는 충분히 넘어보였다. 모쏠 그거 다 드립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다. 찐따라서 하릴없이 인터넷이나 주구장창하고, 또 인터넷이나 주구장창 하다보니 사회성 개나 주고 점점 더 찌질이가 되어가는 것일까. 뭐, 이런 생각도 꼰대적인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모니터 저 너머의 사람'들은 생각만큼 보편적인 사람들의 비율이 높지 않았다. 뒤늦게 새삼스러운 현자타임이 온다.




"생각보다 별 것 없네"

세상에 대한 치트키. 마치 온 세상에 대한 black sheep wall 치트키를 쓴 기분이고, 물론 지금도 들여다보자면 한도 끝도 없이 들여다 볼 거리가 널려있는 셈이지만 그만큼 빠르게 무언가를 상실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능력을 바탕으로 쉽게 돈을 벌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에 조금은 두근거렸지만.

연애… 휴대폰이든 모니터든 무언가의 화면 너머로 인터넷 정보창을 통해서만 이 치트를 사용할 수 있다는게 좀 아쉽지만 어쨌거나 최소한 누군가가 나를 좋아하거나 혹은 짜증을 느끼거나 하는 것을 나는 이제 거의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아, 혹시 나 좋아하는 사람 있나? 싶어서 당장 내 인간관계 탭을 보노라니 역시나 우리 엄마와 아빠, 소원이 압도적인 수치로 나를 좋아하고, 호감 정도의 레벨로 회사 인사팀 승아씨와 민 팀장님이 있었다. 물론 둘의 호감 수치는 사랑이 아니고 그냥 순수히 호감. 뜬금없이 누군가가 뒤에서 나를 보며 두근두근할 그런 사람이 있을 리도 없지만 있기를 기대한 내가 좀 무안했다.

"쩝"

다시 나를 들여다 본다.

[ GTman009 : 조유민, 32세, 서울 구로구 경인로 61길 25 (천왕동) 아트빌 102호, 대명비전(SI, 대리) 재직 중, 연봉 3100만원(세전), 미혼(여친:장소원), 자녀 없음, 신장 172cm, 체중 66kg, 원흥대학교 환경공학과 졸업 (기타 정보)]

기타 정보 내역을 훑어 보노라면 그 정확하면서도 신랄한 평가들에 웃음마저 나온다. 근데 말이다. 정말로 이런 세세한 디테일은 누가 만들었을까. 그럴싸하지 않나. 심지어 GTman009 저 아이디는, 내가 쓰는 몇 가지 아이디 중에 제일 자주 활용하는 아이디이고, 그걸 클릭하면 내가 사용하는 인터넷 모든 웹사이트 아이디가 주르륵 뜬다. 이런 미친 디테일이라니. 이 세계관 전체를 만들고, 그 디테일을 다듬었다는 것은 얼마나 고생스러운 일이었을까. 심지어 캐릭터 하나하나마다 이 정도의 섬세한 디테일과 지속적인 상호 연계와 감정선까지 구현한다는 것은 정말로 놀랍다. 이 모든 것을 시뮬레이팅 하는 시스템의 연산 능력은 도대체 어느 정도일까.

한두 사람이 만든 것은 아닐 것이다. 수없이 많은 이들이 달라붙어서 구현했겠지. 아니, 어쩌면 그냥 지금의 우리 시대 컴퓨터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능력을 가진, 사실상 '신'이라 불러도 할말 없을 정도의 어떤 위대한 연산능력을 가진 컴퓨터가… 실시간으로 시뮬레이팅을…

아니. 꼭 그럴까.

생각해보면 그렇다. 이를테면 피파 게임을 생각해보면, 그리고 그 안의 캐릭터들을 떠올려보면 결국 그 놈들은 꽤 리얼한 축구를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캐릭터들이 뜬금없이 게임 속에서 전투기를 몰고 다니지는 않는다. 그냥 제작한 놈은 축구장과 각각 녀석들의 축구하는 모습만 리얼하게 구현하면 그만이다.

마찬가지다.

나라는 인간도 결국 그냥 평범하게, 아주 단편적으로… 그냥 사무실에 앉아 일하고, 연애하고, 뭐 그런 류의 디테일만 구현하면 그만이다. 내가 뜬금없이 항공기를 몬다거나 그럴 일은 없으니….

아니지, 애초에 그 정도까지는 이미 게임엔진 차원에서 구현이 된 셈일게다. 마치 게임 GRA5처럼. 적어도 내가 나라는 인간의 현실세계에서 할 수 있다고 믿는 대부분의 것들까지는 실제로 구현이 가능할 것이다. 생각보다 엄청난 자유도 아닌가.

단지, 내가 불가능하다고 믿는 것, 이를테면 차원을 뛰어넘는다거나 우주 끝이 어떻게 생겼는지 관찰한다거나 하는 것까지는 구현이 되어 있지 않을 것이다. 음, 오케이, 이건 좀 말이 되는 것 같다. 실제로 피파 게임 속 축구선수 놈들은 F-15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겠지.





웅웅- 우우웅- 웅웅- 우우웅-

전화가 울린다. 소원이다.

"어, 소원아. 퇴근했어?"
"응, 오늘은 좀 늦게 퇴근했어"

그녀의 예쁜 목소리와 함께 전화기 너머로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 깔깔대며 웃는 여자애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참 새삼스레 이 모든 디테일을 구현한 이 세상의 창조자에게 감탄을 느낀다.

"피곤하지? 저녁은 어떻게 했어? 배 안 고파?"
"아 괜찮아. 아까 한 네 시쯤에 민아 언니랑 나가서 커피 한잔 마셨어. 집에 가서 밥 먹으면 돼. 근데 오빠, 뉴스 봤어?"
"무슨 뉴스?"
"인천 여자아이 납치사건, 그거 애기 목소리 녹음된거 공개된거"
"뭐? 아이 목소리 공개를 했어?"
"어 이따 봐봐. 애기 목소리가 막 너무, 그 엄마랑 이야기 하는거 나 듣고 울었어"
"하…"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내 능력의 위대함을 떠올렸다. 유괴사건. 나는 범인을 지목할 수 있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이미 사건은 공개수사로 전환된 상태였다. 난 최대한 정보를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나의 능력은 '온라인상에서 누군가와의 연결고리'를 찾아야 한다. 그래야 타고 넘어가고 넘어가고 하는 것이다. 생각보다 쉬웠다. 아이가 재학 중인 석원 초등학교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홈페이지 학교 소개란 메인 페이지의 교장 이미지와 그 옆의 "바르게 크는 어린이" 라는 교훈 옆에 교장 선생님의 프로필 보기가 떴다.

[ Presidentk : 고원구, 56세, 인천 연수구 비류대로 1길 15 (선학동) 선학아파트 110동 505호, 선학 초등학교(교육, 교장) 재직 중, 연봉 10,200만원(세전), 기혼(한기숙), 자녀 고동욱, 고동민, 고선아, 신장 169cm, 체중 85kg, 서울종합교육대학교 교육학과 졸업 (기타 정보)]

곧바로 [기타 정보]-[인간관계] 항목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최근 이슈가 되고 있다보니 담임 교사로 보이는 31세의 여자 선생님 '최송혜'가 높은 [짜증] 과 [우려] 관계로 이어져 있었고, '최송혜'를 따라가다보니 드디어 피해 어린이 '안유진' 양이 떴다. 오케이.

'어…'

그러나 안유진의 프로필은 회색빛으로, 접근 금지 상태로 되어 있었다. 클릭이 되지 않는다. 이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아마 죽었을거야"

네 말에 소원은 "아니야, 아까 오빠 기사 안 봤어? 엄마랑 통화하는 음원이 있었다니까?" 하고 반박했다. 나도 이미 열 번도 넘게 돌려봤지만, 사실 그건 정상적으로 이야기가 오간 대화라고 볼 순 없었다. 그저 엄마 살려줘, 엄마 무서워 하고 우는 아이의 목소리에 자지러지는 엄마의 비명 소리에 불과했으니까. 아이의 목소리 쯤은 죽이기 전에 녹음해놨으면 그만인 것이다. 아니면 뭐 그때까지만 해도 살아 있었지만 그 이후에 죽였다던가.

"오빤 꼭 그러더라. 세상 만사가 시니컬해"

갑자기 대화가 가라앉는다. 소원이는 뭔가 내가 자신의 의견에 동조해주지 않으면 꽤 감정 상태가 급변한다. 슬몃 웃으며 컴퓨터로 새삼 소원의 프로필에서 [심리상태] 탭을 본다.

[ 짜증 +30(79) ], [ 분노 +54(74) ], [ 서운 +22(65) ], [ 나른함 -40(11) ]

…아니 세상에 그저 지 말 지 편 한번 안 들어줬다고 이렇게 감정이 급변하나. 결국 전화는 대충 수습하고 얼버무리며 끊었다. 아니 그보다 잠깐만. 유괴범죄는 보통 면식범 아니던가? 아닐 수도 있지만, 나는 다시 담임교사 최송혜를 따라 가서, 인간관계 탭에서 피해 어린이 안유진의 엄마, 윤석희를 따라간다. 그리고 윤석희의 [ 인간관계 ] 탭에서 어떤 힌트를 얻었다.




[ PEPPA77 : 윤재승, 41세, 인천광역시 연수구 해돋이로 56번길 28 (송도동), 무직, 연 수입 22만원, 기혼(이혼소송 중:도윤아), 자녀 없음, 신장 177cm, 체중 81kg, 명진전문대학교 기계학과 중퇴 (기타정보) ]

바로 납치 아동의 어머니, 윤석희의 오빠 윤재승. 그의 윤석희에 대한 감정은 놀랍게도 [ 분노 ] 와 [ 증오 ] 로 가득차 있었다. 처음에는 아이를 똑똑히 간수 못했다고 분노하는 그런 식의 짜증인가 했지만, 히스토리 항목을 읽어보니 윤재승이 윤석희의 돈을 약 5천만원을 빌려썼고, 그 빚을 갚으라는 윤석희와의 갈등이 꽤 골이 깊어보였다. 특히 잦은 독촉에 결국 아내가 못 참고 이혼을 요구했고 그것을 거절당하자 아내는 이혼소송까지 낸 상태.

"흠"

이 정도 갈등이라면 당연히 경찰도 최우선 용의자로 올릴 것 같은데, 못 잡은게 이상하다 싶다가 윤재승의 현재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주소란을 클릭하니 과연 현재 위치로 표기 되었다.

"전남 함평까지 갔네 이 놈. 번개 같구나"

아까 기사에서는 대포 휴대폰의 전파발신지 추적을 통해 파주시로 추정하던데. 빠르게 움직인 모양이다.

"…아니야"

그러나 마음을 돌렸다. 이걸 제보하는 것도 조금 마음에 걸린다. 어떻게 알게된 제보냐고 경찰이 연락이나 문의라도 들어오면? 무속인이라고 둘러댈까. 미친 놈이 되겠지. 게다가 지금의 이 '인생 버그 플레이'를 오래 즐기고 싶은데 굳이 눈에 띄는 플레이를 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잠시 망설이다, 그냥 입을 닫기로 했다. 어차피 아이는 이미 죽었고, 범인은 경찰이 알아서 잡을 것이라 믿으니까.




"배고프다"

조금 마음이 찜찜해졌지만, 이게 최선이라 생각했다. 나는 다시 내 프로필의 기타 항목을 클릭했다. [성격] 탭을 클릭하자 과연 '게으르고 소심함'이라는 언급이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

어쨌거나…

인생 치트키를 얻어 활성화를 시켰다. 아니아니, 어느 날 갑자기 치트키가 '켜졌다'. 나는 이제 무엇을 하면 좋을까. 연예인 루머 뒷조사부터, 정재계의 핵심 비밀을 틀어쥐거나, 바르지 못한 범죄자들을 실시간으로 추적할 수 있는 힘. 이 세상 전체에 대한 정보를 가진 나는 전성기의 애드거 후버보다도, 미국 에셜런 프로젝트보다도 더 위대한 정보능력을 가진 사람이 됐다.

"흐흐"

물론 그런 힘을 갖고도 고작해야 연예인 가십이나 훑고 다닌 내 모습이 새삼 조금 웃겼지만, 뭐 어쩌겠는가. 내가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보니, 궁금한 것도 그 정도 수준인 것 뿐이다.

그보다 내 '초능력'의 기반이 내 상상대로 '시뮬레이션 우주' 같은 것이라, 누군가가 해킹을 했다거나 혹은 시스템의 오류 같은 이유로 나에게 부여된 힘이라면… 버그가 픽스되거나 해킹이 밴되는 상황이 온다면 나라는 인간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이 모두가 지금 내가 꾸는 꿈에 불과한 것이라면? 혹은 내가 무언가의 과대망상 증후군, 뭐 그런 정신병에 걸린 것이라면?

더 나아가…

'모니터 저 너머의 사람'이라는 것이, 그저 단순히 나랑 인터넷 같이 한 사람들을 넘어서… 지금 일종의 차원 벽 바깥에서 나를 조종하거나 만들어 낸 누군가들, 그리고 나를 지켜볼 수 있는 누군가들이라면, 그래서 나의 모든 생각과 일상이 까발려지고 있는 것이라면… 이런 혼자만의 망상 같은 생각마저 모조리 유출되고 있는 것이라면?

'어이 다 알고 있다고, 그만 쳐다봐! 부끄러워!'

혼자 마음 속으로 외쳐본다. 이거 무슨 초딩이나 중딩 때나 하던 짓 같은데. 어쨌거나 내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사람들이, 그저 주변의 친구들이 아닌 모니터 너머의 어떤 초월적인 존재들이라면… 그럼 그가 컴퓨터를 끄거나 혹은 뭐 게임을 종료하거나, 아니 이런 경우에는 그저 리부팅하면 나는 그 시점에서 재시작하겠지. 아예 캐릭을 삭제한다면, 그때 나는 죽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가만히 지켜보는 어떤 시뮬레이션 형식의 그 무엇일까.

"…검증할 방법도 없잖아."

나는 스스로를 타이르고, 복잡한 머리를 가라앉히며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내가 할 일이 생각났으니까.

"야, 나도 사생활 좀 갖자"

또 혼자 '누군가들'을 향해 중얼거려 본다. 아니, 인정하기로 했다. 만약 정말로 그런 세상이라면 내가 뭐 어쩐다고 어쩔 수 있는게 아니잖는가. 나는 과감히 바지를 내렸다. 그리고 슬슬 고추를 주물거리며 시동을 건다. 마우스는 익숙한 손길로 어떤 폴더를 향한다.

"그래, 딸 좀 치자고"

나는 가볍게 콧바람을 내쉬며 힘차게 avi 파일을 더블클릭했다.

- 끝 -

하늘색 소설

아침부터 무척 바빴다. 지난 밤 혜주와 크게 싸우고 늦게 잔 탓에 늦잠을 자버렸다. 눈을 뜨니 이미 8시 40분이었다. 아침 9시 반에 예정되어 있던 부서간 회의에 준비했어야 할 우리 팀의 보고서가 생각났다. 전화로 연경씨에게 부탁해서 간신히 보고서 자체가 빵꾸나는 최악의 상황은 피해냈다.

"후, 이런거는 진짜 좀 아니지 않아?"

그러나 연경씨가 출력한 것은 최종본이 아니었다. 수정의 수정을 거듭한 보고서의 최종본이 아닌, 그 전전 버전의 '파일명만 최종'이었던 버전을 들고 들어갔던 팀장님은 하필이면 사장님까지 참석한 회의에서 제대로 망신을 당했다. 그 '또라이'에게 찍힌 이상 올해의 승진도 물 건너갔을지 모른다.

그 사람 좋은 팀장님에게 따로 불려가서 한참 한 소리를 들었다. 한 소리 들은게 싫은게 아니라, 그나마 회사에서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에게 실망감을 주고 곤란하게 만든 것이 죄송스러웠다. 몇 번이고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지만, 팀장님 역시 상한 속을 쉽게 진정하지 못하는 기미였다. 실제로 비슷한 케이스의 상황에서 안산 지점으로 날아간 기획 1팀 조 팀장의 케이스도 있지 않은가.

언제나의 농담 한 마디 없이 아침부터 모니터만 보고 일만 했다. 경원 주임이 "너무 그렇게 신경쓰지 마세요. 팀장님 뒤끝 없으신거 아시잖아요" 하고 커피 한잔으로 나를 달랬지만, 사실 아침의 일보다 혜주와의 일이 마음을 더 무겁게 한다.





점심시간에 대한 기대와 약간의 허기가 기분을 조금 전환케 하는 오전 11시 39분. 화장실에 다녀와 자리에 앉으니 휴대폰에 혜주의 카톡이 와있다.

"흠"

반가움과 답답함, 두려움과 피곤함이 나를 휘감는다. 내용을 확인하니 다행히도(?) 어제의 싸움과는 상관없는, 혜주 어머니가 지방에서 우리 집으로 옥수수 보내주신다는데, 집 주소를 불러달라는 내용의 혜주와 혜주 어머니가 나눈 대화의 캡쳐 이미지였다. 나는 피식 웃으며 집 주소를 적어서 답장을 보냈다.

"식사하러 가요"

경원 주임과 연경씨가 다가왔다.

"어어"

휴대폰을 들고 가려다가, 배터리가 4% 밖에 안 남아있길래 충전줄을 꽂고 두고 나갔다.





내가 아침부터 시무룩해있자, 경원 주임이 "쭈꾸미 먹으러 갈까요? 매운거?" 하고 제안해온다. 그러자고 하며 걷노라니 연경씨가 "죄송해요, 저 때문에 아침부터…" 하고 사과해 온다.

"아냐, 연경씨가 무슨 잘못이야. 최종에 최종, 최종에 진짜 최종, 보고서 파일명을 이딴 상황으로 몰고 가는 저 윗 사람들이 문제지" 하고 웃어 넘겼다. 아니 정말로 연경씨가 무슨 잘못인가.

마침 쭈꾸미를 먹으러 가자 줄이 길다. 그냥 다른데 가서 먹을까 했는데 그냥 경원 주임이 먹자고 해서 기다려서 먹었다. 스- 스- 하고 매운 입을 달래가며 먹는다. 점심 메뉴치고는 조금 과하게 매운 것 아닌가 싶지만 정신없이 먹고 나오니 확실히 스트레스도 짜증도 한결 낫다.

셋이 커피 한잔씩을 테이크아웃해서 회사로 향한다. 이제야 조금 얼굴이 풀린 것 같다며 웃는 경원 주임의 말에 나도 피식 웃었다. 조금 부끄러워 말을 덧붙였다.

"아침에 그거 때문에 그런게 아니에요. 여자친구랑 어젯 밤에 한바탕 싸워서 그래요. 그게 좀 신경쓰여서"

곧바로 연경씨와 경원 주임이 왜 싸웠냐며 물어온다.

"대단한건 아니고, 그냥 성격 차이지 성격 차이. 그냥 나는, 원래 조금 상대가 마음에 안 드는게 있어도 말 안 하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낸건데… 그게, 기분이 많이 나빴던 모양이에요. 그걸로 이래저래 싸우다가 싸움이 커졌지"

구태어 자세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 적당히 두루뭉술하게 말했다. 그러자 경원 주임이 말했다.

"차라리 바로바로 말하지. 나도 남자친구랑, 아니 이젠 남편이지. 하하하, 웃지 말아요. 7년 연애하고 결혼하면 이래" 하며 말실수를 수습하는 그녀. "아직도 남편이 아니라 남자친구 같으신가봐요" 하고 연경이 거들자 경원 주임은 더 크게 웃으며 "어! 진짜 그래. 결혼하니까 오히려 더 막 풋풋하다니까" 하면서 신혼의 위력을 뽑낸다.

"어쨌든, 사람마다 다르긴 한데, 남자들 마음 속에 꽁하니 갖고 있다가 갑자기 토해내면 우리도 당황스럽다니까. 대리님 그런 타입 아니잖아요. 아마 여자친구 분도, 당황스러워서 더 화를 낸 걸거에요. 그냥 오늘 이따가 가서 미안하다고 하고 털어버리세요" 하며 조언한다.

"응, 그래야죠" 하며 씁쓸하게 웃는 나.




오자마자 휴대폰부터 확인했지만 답장이 없다. 1도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다시 일에 집중한다. 일이 많다. 소정 대리가 관두고 나서 인원 충원은 이뤄지지 않았고 나는 사실상 두 사람 몫의 일을 하고 있다. 물론 이미 일이 많아 한 사람이 관둔건데-그것도 대리 급의 일이-, 그걸 두 사람 몫을 하려니 완벽히 될 리 없다. 몇몇 업무는 완전히 뒷전으로 미뤄졌고, 당장 급한 일부터 쳐내기 바쁘다.

그 와중에 보고를 위한 보고는 끝이 없고, 5월의 신사업건으로 지사들에게서 오는 문의는 갈수록 많아진다. 그러나 당장 본사에서도 현재 결정된 사안이 없다. 지사는 답답해하고, 본사는 초조해하며, 임원들은 히스테리에 절어있다.

몇 건의 급한 결제서류를 팀장님에게 전달하고, 몇 번의 자잘한 수정 끝에 그의 결제가 진행된다. 보고서가 빨리 돌아오길 고대한다. 하지만 아마도 결제판은 최소한 3~4일은 지나서야 돌아올 것이다. 그 사이 나는 지사들에 입을 꽤나 털어야 할 것이고.

그런 와중에 3시가 넘은 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신사업에 관한 부가 기획안에 손을 댄다. 오늘은 야근이 확정적이다. 당장 다음 주까지 이 문서가 통과되어야 한다. 피로와 스트레스가 나를 압박한다. 뒤늦은 양치를 하려다가, 그냥 커피가 먼저 마시고 싶다.

"후"

탕비실에서 커피믹스를 한잔 만다. 카누가 있음에도 지금은 믹스타임이다. 뒷목이 뻐근하다. 뒷골이 지끈지끈한 것은 근 한달이 넘게 나를 괴롭히고 있다. 커피믹스의 탓일까. 뱃살이 계속 늘고 있다. 아니, 핑계다. 그냥 나잇살이겠지. 회계팀 주연씨가 탕비실에 들어왔다가 인사한다.

"피곤해보이세요"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말하는 그녀. 나는 웃으며 "피곤해 죽겠어요" 하고 순순히 시인한다. 그녀도 그 말에 웃으며 "진짜 집에 가고 싶어요"하며 공감한다. 커피잔을 들고 자리로 돌아온다. 보고서에 들어갈 숫자를 다듬는다. 기초 자료는 똑같은데 목표와 기준점의 장난질로 성과와 기대치가 휙휙 변한다. 참으로 잔망스런 장난질이 아닐 수 없다. 한참을 작성하고 있노라니 혜주의 카톡이 또 와있다. 이미 35분 전에.

[ 잠깐 전화 좀 해 ]





옥상으로 올라와 혜주에게 전화를 건다. 전화를 받는 그녀. 착 가라앉은 목소리. 어제부터 몸살 기운 있더니, 그녀와의 싸움보다 그녀의 몸상태가 걱정된다.

"미안해"

우선은 미안하다는 말부터. 어쨌든 나도 그녀도 서로 상처주는 말을 주고 받았으니까. 나 나름의 이유, 그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한들 그것 자체는 틀림이 없다. 무언가 말을 잇고 싶었지만 선뜻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다시 한번 사과를 하기로 했다.

"어제 말이 너무 과했어. 미안해"

…사실, 여기서 그냥 "나도 미안해" 한 마디만 돌아오면, 나는 그걸로 기쁘고 정말로 기분 좋게 하루의 감정을 대전환할 수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런 일은 없다. 아니 아주 오래 전에는 그녀가 먼저 사과를 했다. 매번. 나는 항상 그녀라는 왕국의 왕이었고, 나는 절대적이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물론 모두 나 때문이다.

"그만하자"

전화기 너머에서 흘러나온 말은 차가운 한 마디. 급속도로 짜증과 피곤이 온 몸을 휘감는다. 당장 집에 가고 싶다.

"혜주야"

이름을 부르긴 했으나 이을 말이 마땅찮다.

"어제 일은, 내가 잘못했어. 뭐, 어쨌거나 나도 니 감정을 조금 더 신경을 썼어야 되는데, 그게 나도 잘 안돼는게…"
"됐고, 시간을 좀 갖자"
"혜주야"

한참을 아무 말이 없던 그녀는 "나 전화 오래 못해. 바쁘고 힘들어. 퇴근하면 전화 안 받을거니까 전화하지 말고. 여튼, 난 대충 마음 정했어. 그리 알아" 하며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는다.

"하…"

짜증과 실망감, 분노와 허무함이 온 몸의 모든 힘을 다 빼앗아 간다. 씨발. 단 한번을 좋게좋게 풀지를 않는다. 뭐가 그리 힘들고 짜증이 날까. 싸우면 자기만 힘든가. 후. 세상이 다 회색빛, 그것도 창백한 회색빛이다. 미세먼지 탓인지, 내 마음이 우울한 탓인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얼굴을 새삼 쓸어내린다.

뭐가 그리도 매번 이런 식일까.

"참 시팔…"

니나 나나, 그냥 이러니저러니 해도 서로 위한 마음이 결코 가볍지 않은데 왜 이렇게 매번 싸움만 했다하면 이리도 속을 다 태우고 뒤집어 놓아야만 풀릴까. 그냥 적당히 하룻밤 자고 일어나서 미안하다, 나도 미안해, 우리 오늘 저녁 맛있는거 먹을까, 하고 치워버리면 안되나. 그게 그렇게도 어려운 것일까.

"참, 진짜…"

속상하고 답답한 마음에 울컥한다. 옥상 정원 한 구석의 벤치에 주저 앉는다. 다들 이렇게 사나. 아니면 나만 이 모양인가.

"쯥"

헤어지고 관두지 뭐, 하고 생각하다가도 이제와서 솔로되면 그 다음이 너무 까마득하고 피곤하다. 아니, 애초에 별로 그러고 싶은 생각도 안 든다. 다음은 없다. 그냥 연애 따위 자체도 피곤하다. 참, 세상 일이 다 쓸데없이 어렵다. 회사의 보고서도, 어차피 다 뻔한 이야기 모두가 다 아는 이야기 구태어 그걸 몇 번이고 헤집어서 똑같은 이야기 분칠만 새로 해서 내놓는걸 그리도 지랄들이다.

"아 씨팔 진짜"

하나가 안 풀리니 그냥 다 속이 뒤집히고 다 때려치워버리고 싶다. 일은 좆터지게 많고 연봉은 오를 기미도 없으며 다들 잘만 사는데 나만 도태되어가는 기분이다. 옥상에서 내려다보이는 저 많은 빌딩 숲 속에서 나 혼자만 병신인 느낌이다. 시계를 본다. 어느새 4시다.

"아 진짜 씨발…"

벤치에서 일어서자 화단 저 너머에 인사팀장님과 유통실장님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 내 목소리를 들었을까. 주둥아리 조심을 새삼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쩌라고' 하는 막무가내적 생각이 나를 뒤덮는다.




오후 7시 반, 애 있는 직장맘 몇 명만이 퇴근을 한 채, 모두가 야근 중이다. 사무실의 형광들 불빛이 나의 마음을 싯누렇게 누른다.

"저녁, 어떻게 할까요. 주문할까요?"

연경씨의 말에 팀장님도 경원 주임도 "괜찮아", "난 안 먹을래" 하며 고개를 젓는다. 이쪽도 아까 둘이 뭔 일이 있었는지 영 분위기가 별로다.

"어떻게 할래요, 시켜먹을래요? 나가서 뭐 먹을래요. 아니면 1층에 카페 가서 간단히 때울래요?"

내 제안에 연경이 동의하며 "아, 그럼 카페가요. 팀장님 커피도 안 드세요?" 하고 묻는다. 그러나 팀장도 경원도 이번에도 고개를 젓는다. 1층 카페에 둘이 내려와 커피를 마시노라니 연경이 말한다.

"대리님 아까 잠깐 TF 회의 들어갔을 때, 팀장님이랑 경원 주임님이랑 둘이 따로 비상계단에서 무슨 이야기 하고 왔는데, 그 이후로 둘이 분위기 싸해요"
"왜?"
"모르겠어요. 근데 느낌으론, 되게 안 좋은거 같아요."
"뭐가"
"경원 주임님 아까 화장실에서 우는거 봤거든요"
"뭐?"

느낌이 쌔하다.

"관두라고 한거 아냐?"
"저도 그게 걱정되는데 괜히 좀 물어보기가 뭐해서…"
"허…참."

이미지에 안 맞게 아포카토에 샐러드까지 시켰는데, 영 맛이 없다. 입맛이 별로다.




"나 먼저 들어가요"

9시 반, 팀장님이 퇴근하고 나도 슬슬 피곤을 이기기 힘들다. 컴퓨터를 끌까 하는데 경원 주임이 의자를 돌리며 말했다.

"저 관둘까봐요"
"엥?"

지금 팀장님과 경원 주임이 상당히 안 맞는 타입이긴 했다. 둘 다 일도 곧잘하고 성격도 좋은 사람들이지만, 팀장님은 뒤끝은 없는 대신에 욱하면 조금 심하게 사람을 몰아붙이는 면이 없잖아 있는 타입이고, 경원 주임은 반대로 정말 밝아보이지만 은근하게 서운한걸 쌓아두는 타입. 그런 와중에 팀장님도 무슨 일이 있는지 요 한동안 내내 히스테릭한 상황에서 경원 주임에게 최근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심하게 준 모양.

그러다가 아까 급기야 잠깐 6시 넘어서 잠깐 경원 주임이 요즘 바빠서 못 본 장을 뒤늦게 보느라고 온라인으로 쇼핑을 하다가 팀장님이 그 모습을 보고 뭐라고 한 듯 하다.

"원래 안 그런 사람도 괜히 그런 날이 있을 수 있죠. 근데 같은 여자끼리 생리대 사는 것까지 뭐라고 하는건 진짜 좀 아니지 않아요?"
"헐"

경원 주임은 손부채질까지 하면서 말을 잇는다.

"아니 지가 보고서 내일 아침까지 내라고 해서, 내가 알겠다고 하고 잠깐 5분 짬내서, 진짜 잠깐 뭐한 걸로 그러면 나도 할 말 많지. 자기도 맨날 툭하면 중간에 커피 마시러 가서 30분씩 때우다 오고 이러는거 뻔히 아는데. 누가 안 한 대냐고. 일 다 하는건데, 왜 사람한테 그런 무안을 줘. 그게 뭐라고 진짜"

말을 하다가 혼자 북받치는지 경원 주임은 눈물까지 글썽인다. 나는 티슈를 뽑아 건내며 목소리를 줄이자고 작게 말했다. 다행히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퇴근을 했다.

"그리고 그거 알아요? 나 올해 인사고과 완전 최악인거? 저번에 점심시간에 인사평가 해놓은거 보고 진짜, 내가 얼척이 없어서…"
"어떻게 봤어요?"
"저번에 윤팀 막 몸살 났다고 병원 다녀오고 그랬을 때 있잖아요. 내가 자기 아프다고 쌍화탕까지 점심시간에 사왔는데, 인사평가 서류 뽑아놓은거 책상에 있는거 살짝 봤단 말이에요. 근데 나 뭐라고 한 줄 알아요? 하, 진짜 얼척이 없어서. 그냥, 내가 일을 디게 못한대요"

음, 우리 회사에서 경원 주임이 일을 못한다고 하면 공감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물론 꼼꼼함이라는 면에서 우리 팀장님을 따라갈 사람은 세상에 없기에 그녀의 눈에는 경원 주임이 눈에 덜 찰 수도 있겠지만, 같은 기준이라면 나는 정말 박살나겠구먼.

"모르겠어요 진짜. 맨날 왜 그러는지"

확실히, 팀장님이 유난스러울 정도로 경원 주임을 미워하는건, 아니 미워한다고까지 말하긴 뭣해도 조금 거리를 두는 것은 제 3자인 내가 봐도 느껴질 정도. 확실하게는 몰라도, 조금 성격적으로 왜 안 맞는지는 조금 알 것도 같지만.

"그냥 관둘까봐. 어쩌겠어. 싫다는데. 버텨봐야 나만 힘들고 나만 피곤하지. 이 회사에서 내가 갈 다른 팀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말로만 그러는건지, 진짜 관둬야겠다고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며칠 전부터 그녀가 휴대폰으로 사람인 사이트를 보고 있는 것은 몇 번 봤다.




집으로 향하는 전철 안. 혜주는 아까부터 연락이 없다. 먼저 미안하다고 또 카톡을 보내봤지만 읽지도 않는다. 피곤하다. 10시가 어느새 넘었다. 씻고 뭐하고 하면 벌써 11시가 넘겠지. 삶이 고단하다. 너무 피곤하다. 멋있게 살고 싶은데, 아니, 그냥 평범하게라도 살고 싶은데 나이는 차고 돈은 없고 미래도 불투명하다. 비전도 없고 꿈도 없다.

"하"

만에 하나 회사를 관두기라도 하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니 답이 없다. 그러나 나도 어느새 나이가 많이 찼다. 그렇다고 승진 코스에 올라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회사에서 내가 10년 후에 임원이 되고 그렇게 버티고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 때의 미래에는 혜주가 내 옆에 있을까.

많은 생각이 나를 스쳐지나가며 미안하다는 생각이 새삼 든다. 차라리 나보다 잘난 놈 만나서 사귀면, 사장님 사모님 노릇까지야 못해도 그냥 평범하게 서울 어디에 아파트라도 얻어서 중형차 타고 주말마다 장 보면서, 애 하나 낳고 그냥 그렇게 남들처럼 평범하게는 살 것 아닌가. 못난 년도 아닌데. 나같은 새끼 만나서… 그게 무슨 죄란 말인가. 씨발. 그냥 내가 못난게 죄지.

마음이 무겁다.

모르겠다. 무슨 재미로 내가 살아가고 있는지. 잘 살아가고는 있는건지. 너무, 피곤하다. 자리에 앉고 싶다. 선 채로 잠시 눈을 감는다. 아까 회사 옥상에서 바라본 하늘이 떠오른다. 미세먼지로 뒤덮인, 우중충한 빛의 하늘색. 그게 나의 하늘색이다.

혜주와 화해만 한다면 다시 푸르디 푸른 맑은 하늘이 될텐데. 하지만 과연 나에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 나는 가만히 눈을 감으며, 어느새 이번 역이 내릴 역이라는 사실을 안내방송을 통해서야 알았다. '내릴 역'. 그녀라는 열차에서도 내릴 타이밍일까. 흐, 오바는 말자.

"흐"

내일은 화요일이다. 정말로 피곤한 월요일이 아닐 수 없다. 내일도, 모레도… 이번 주는 정말 피곤할 것 같다. 누군가 제발 내 힘이 되어준다면, 아니, 그냥… 아니다. 차라리, 혼자가 편할지도 모르겠다. 그냥 사라지고 싶다.

가즈아 소설

"후…"

반년 넘게 끊었던 담배에 다시 손을 댔다. 정확히 말하자면 금연한다고 서랍 속 깊숙히 묻어뒀던 담배가 어느새 내 손에 들려있었다. 흐름이 안 좋았다.

"아, 진짜"

우리나라 정부가 2개의 부실 거래소 폐쇄와 수익의 60%에 달하는 양도소득세 부과 정책 발표를 한 날, 중국 정부가 해외로 나간 중국계 채굴 업자 및 업체의 중국 내 자산에 대해서까지 몰수를 포함한 강력한 추가제제를 진행할 것이라는 확인되지 않은 뉴스까지 전해졌다.

이미 거기까지만 해도 상승세였던 흐름이 꺾이고 베인코인의 2.5만선이 뚫리는 등 투자 심리에 부정적인 영향이 간 상황이었건만, 그날 오후 시총 3위였던 니어코인의 하드포크가 뜻밖에 실패로 돌아갔다는 루머가 돌기 시작했다. 설마설마 하는 상황 속에 결국 세 시간 후 니어코인의 공식 트위터에 실패 소식이 떴고 전체 장 분위기가 삽시간에 싸해지기 시작했다.

"이 놈들은 왜 또 이래"

이어 하락과 횡보를 거듭하던 그 며칠 후, EU 차원의 암호화폐 규제 조치가 발표되었다. 특히 프랑스의 경우 1인당 거래금액 제한 같은 조치까지 부가되어 논란을 일으킨 통에 더욱 분위기가 안 좋아졌다. 그 즈음하여 나스닥의 베인코인 옵션 만기일이 도래함에 따라 대거 몰린 숏 포지션의 마진 거래가 장에 추가적으로 부정적인 부담을 주었다. 근 1년 만에 1베인코인당 2만 달러가 무너졌고, 장의 분위기가 차갑게 바뀌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뭐?!"

그 이틀 후, US디터로 발행된 금액 전체에 대한 일시적 지급 보증 유예 소식이 시장에 타격을 입혔다. 그 이유가 알려지지 않아 흉흉한 루머들이 도는 가운데, 시장에 결정타가 터졌다. 미국 최대 암호화폐 거래소인 코인베이직의 해킹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확인된 피해 규모만 1천 8백억 달러가 넘는, 현 시점에서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악재였다. 모든 지표가 사상 유래 없는 속도와 규모로 일제히 급선직하했다.

차갑게 얼어붙던 시장 분위기에 이미 휘청대던 1만 6천선이 단번에 무너졌고, 채 두 시간이 지나지 않아 9천선이 무너졌다. 공포가 모두를 휘감았고, 가뜩이나 "요즘 왜 이러냐?" 싶던 구름 낀 분위기가 삽시간에 지옥으로 변했다.

"아…"

코인 시장이 진짜 망하려는 것인지, 하필이면 그 타이밍에 이미 1년 반 이상 미뤄졌던 JN모건의 암호화폐 거래소 오픈이 결국 취소되었다는 오피셜 소식이 발표되었고 그 영향으로 최후의 보루로 일컬어진 7천선에서의 반등이 실패했다. 시세가 무서운 속도로 추락했고 급기야 영원히 오지 않으리라 누구나 확신했던 3천선이 붕괴됐다. 헤더리움의 성장이 채 끊나지 않은 가운데 코인판의 기축통화, 베인코인이 무너지는 것은 공멸을 뜻했다.

사람들은 이제 하락이 문제가 아니라, 코인 시장의 존립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이미 5천선의 붕괴에 코인 관련 포럼과 커뮤니티에선 "낙동강 방어선이 뚫렸다…" 소리가 힘없이 터져나온 상태였고, 상황이 심각해지자 그동안 수많은 최악의 상황에 단련되었던 역전의 존버족들조차 마지막 패닉셀에 참여했다. 코인 시장 자체가 최후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하"

베인코인 갤러리 및 국내외 암호화폐 관련 모든 커뮤니티에서 "나 이제 어떻게 하냐…" 라는 곡소리가 이어졌고 안티 암호화폐쟁이들의 풍악이 울려퍼졌다. 지난 12년 간 일절 흔들리지 않던 결사적인 신앙적 존버족들조차 "10%라도 건져야지…" 와 "10% 건지나 그냥 버리나…" 에서 갈등이 이어졌다.

"아"

골이 지끈지끈했다.

"하, 진짜 아 이건 뭐…"

2천 7백을 찍고 있던 내 코인 투자 평가액은 그 사이 800만원, 아니 350만원이 되어 있었다. 진작에 현금화 좀 해놓을 것을, 후회가 머리를 채우기 시작했고, 감히 던질 생각조차 들지 않는 압도적인 하락장에 나는 일곱 대째의 줄담배를 입에 물었다. 진정하기 위해 떨리는 손으로 물을 한잔 마시고 왔더니 평가액은 19만원으로 추락한 상태였고, 나는 컵을 벽에 던져버렸다.






가즈아 



by stylebox 




꿈이었다. 코인 시장이 딱 일주일만에 붕괴되는 무시무시한 꿈이었다. 온 몸이 다 축축했다. 눈을 뜨자마자 습관처럼 벽 모니터를 보며 실시간 시세를 확인했고, 여전히 내 평가액이 5억 언저리에 있다는 사실에 안심했다.

"후우… 꿈자리 사납네. 어후"

꺼끌한 입맛을 다시며 침대에서 일어나 새삼 방 안을 둘러보았다. 지난 주에 새로 이사한 송파구의 28평 아파트였다. 전세이긴 해도, 어쨌든 내 평생에 한강 이남 아파트에 살게 될 줄은 누가 알았으랴. 아직 짐도 채 안 풀었는데, 이번 주말에는 꼭 다 풀어야지 하고 다짐해본다.

"크흠"

어쨌거나 이제는 출근할 시간이다. 새삼 침대 옆 협탁에 올려놓은 신형 그렌디아의 차 키가 눈에 들어왔다. 저 놈도 당연히 코인 덕분에 산 거다. 그리고는 화장실 문 앞에 붙여놓은 최민구의 합성 포스터를 보며 오늘도 외친다.

"가즈아!"





"대리님, 헤더리움 다음 달에 진짜 5백만원 갈까요?"

아영씨가 출근하자마자 인사와 함께 그 큰 눈으로 생글생글 웃으며 묻는다. 작년 초, 코인 정보를 몇 개 흘려줬더니 과감하게도 결혼 자금으로 모아놓은 3천을 들입다 투자해서 그걸 5배로 불렸단다. 결혼 자금 불렸으니 호텔에서 결혼식 하는거냐고 웃으며 물었더니 "이제는 남자만 찾으면 되요" 하는 말에 빵 터졌더랬지.

그 이후로는 나를 무슨 코인의 신처럼 모시며 얼굴 볼 때마다 코인 정보를 묻는데, 그때마다 그녀의 옷과 악세서리가 명품으로 바뀌는 것을 확인하며 새삼 흐뭇한 웃음을 짓게 된다. M&H, SAZA에서도 세일기간이 아니면 옷을 안 산다고 했던 그녀였는데.

"뭐, 가긴 갈거야. 시간이 얼마나 걸리냐가 문제지"
"정말요?"
"…그렇다고 너무 무리한 투자는 하지 말고"

사실 그녀 말고도 사무실에 나 덕분에 꽤 돈 번 사람들이 있다. 다들 베인코인이 난리라는 것은 알았지만 직접 뭘 해보기는 두려웠던 차에 내가 점심시간이나 퇴근 시간에 막간을 이용해서 조금 가르쳐줬더니 쌈짓돈으로 시작해서 은근히들 용돈들 좀 번 모양이다. 적게는 30만원에서 많게는 수천만원까지. 아영씨는 그 중에서도 유달리 더 대박이 난 케이스고.

베인코인의 3만불 돌파 및 헤더리움 ETF 승인과 함께 코인 시장이 대상승장에 돌입한 덕분에 나도 대박이 났고, 그녀들도 대박이 났다. 회사에는 그냥 가볍게 차 한 대 뽑을 정도 벌었다고 말해뒀지만 사실 내가 번 돈은 총 11억 8천만원이었다.





"븅신들, 이런거에 돈 빨리는 호구도 있냐"

베인 코인이 채 1달러가 안되던 시절, 나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그 정보를 들었었다. 꽤 전문적이고 흥미로운 내용이 적힌 게시물이었지만, 온갖 찬미와 미사여구 때문에 오히려 신뢰가 안 갔다.

단지 베인코인으로도 결제할 수 있다는 스트리밍 포르노 사이트의 주소를 얻은 것은 꽤 기쁜 소득이었다. 하드코어 장르의 야동이 꽤 많은 사이트였다. 바로 즐겨찾기 해뒀다. 그게 내 첫 베인코인과의 만남이었다.

"와"

이윽고 몇 년이 흐른 시점에 다시 소식이 들려온 베인코인은 어느새 30만원이 되어 있었다.

"이거 뭐야 진짜…"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때까지도 베인코인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블록체인이니 뭐니 하는 기술은 개념조차 잘 이해가 가지 않았고 제대로 들여다 볼 생각도 없었다. 그냥 글로벌 버전 도토리라는 생각만 했을 뿐이지. 그렇지만 요는 엄청난 속도로 가격이 올랐다는 거였고, 그때 내가 단돈 10만원만 넣었더래도 그게 3천만원이 됐을거라는 생각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렇지'

누구나 인생에는 기회가 세 번 온다지 않는가.

"오케이"

그래서 차세대 베인코임이라고 일컬어진 헤더리움에 10만원을 투자했다. 이후 정신없이 석 달이 흘렀고, 문득 생각이 나서 접속해보니 거래소의 내 헤더리움은 개당 9천원짜리가 7만원이 되어 있었다. 10만원이 80만원이 넘는 돈이 되어 있던 것이다.

'헐'

믿기지 않는 숫자에 나는 입이 떡 벌어졌고, 마침 술값에 빵구났던 카드값을 그렇게 갚았다. 성공한 투자였다. 그러나 그 두 달 후 나는 땅을 쳤다. 개당 7만원짜리가 31만원이 되었으니까. 그래, 베인코인 그 천원짜리가 100만원이 되는 것을 보고서도 헤더리움을 고작 10배에 만족했나.

그래서 결단을 내렸다.

곧바로 은행에 가서 대출 3천을 땡겨서 들이부었다. 10만원만 투자했으면 3천을 벌었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걸 벌었다고 치기로 하고 후회를 없앴다. 이제는 조금 공부도 했다. 여전히 이해 가지 않는 부분이 많았지만, 적어도 무슨 의도에서 이게 그렇게 학자들과 개발자들에게 주목 받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나보다 더 똑똑한 실리콘 밸리와 뉴욕 금융가의 빠끔이들이 손을 댄다는데 내가 그들의 안목을 부정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3천만원이 딱 3개월만에 1억 7천만원이 됐고, 2년 반 만에 11억 8천이 됐다. 끝과 끝을 오가는 미친 시장에서 네 번의 지옥과 다섯 번의 천국을 맛 보며.




퇴근길, 테헤란로의 빌딩 숲을 가르며 새 차 냄새를 만끽한다. ZZ코인을 잠깐 만져서 14억까지 갔지만, 헤더리움 골드의 시세 추락 & 에이저, 덴츄, 블루펄스 같은 잡코인 투자 실패, PNP, COCOIN 같은 거래소 코인 투자 실패가 이어지며 2억을 날렸다. 그러자 조금은 현자 타임이 온 나는 그 시점에서 리프레시를 위해 절반 정도를 현금화를 하여 차와 아파트를 구한 것이다.

"차가 막히네"

내가 조금만 더 빨리 성공했더라면, 그랬더라면 희수와도 그렇게 헤어지지는 않았을텐데 하는 생각에 눈 앞의 신호를 놓칠 뻔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지금처럼 여유 있는 싱글이 차라리 더 내 삶의 풍요를 보장했다. 그리고 어쨌든 그녀는 잘 되지 않았던가. 애도 낳았다는데.





"으아아~ 넘나 좋다"

거실에는 2천만원짜리 초대형 TV를 틀어놓고 영화 보다가, 치킨에 피자에 이것저것 잔뜩 배달음식 시켜놓고 배 터지게 먹다가 다시 컴퓨터로 시세창 좀 보다가 다시 통장 확인하고… PS5와 스위치와 수많은 게임들을 쌓아놨다. 어제는 즈팀에서 한번에 300만원어치 게임을 질렀다. 운동화도 조던 시리즈만 13켤레를 샀다. 거기에 주말에는 돈 걱정 없이 쇼핑하고, 여기저기서 인심 턱턱 쓰고.

"너무 좋다"

사실은 회사를 다닐 이유가 없었다. 이미 돈은 큰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나를 안다. 최소한의 브레이크가 없다면 아마 나는 선을 벗어나 일탈하고 말 것이다. 그렇게 현실감을 잃고 나면 나의 투자촉도 사라질 것이다. 적어도 최소한 다른 사람들의 삶을 곁에 두어야 투자심리라던가, 버블의 끝이 어디인가에 대한 감도 잡힐 것이고. …고작 10억에 만족할 수는 없으니까.




"나 뭐라고 욕해도 좋은데, 근데 차라리 나 이렇게라도 해결하고 싶어"

희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너도 알잖아. 우리 집 사정 많이 어려운거. 얼만지 말해줄까? 한달에 이자만 550만원이 나간다? 원금 말고, 이자만. 엄마 입원도 해야 되는데, 못 하고 있어…돈 벌어야 되니까. 온 가족이 돈 벌어서 빚 갚아야 되니까!"

여유 있게 말하던 목소리는 어느새 울음이 섞였고, 그녀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나는 콧김을 내뿜으며 그저 듣고만 있었다.

"그냥…내가 그 사람 만나면, 나 하나만 눈 꼭 감고 살면, 그럼 되거든. 상가 명의 내 명의로 해준대. 솔직히 이런 사람, 이런 기회가 어딨어. 완전 호구지 호구. 머리 좀 까지고 결혼 좀 해봤으면 어때. 나도 연애 해봤잖아. 쌤쌤이지"

온 몸을 휘감는 패배감. 희수가 물었다.

"너 한달에 500만원씩 꼬박꼬박 우리 집에 보내줄 수 있어? 매달. 말해봐. 말해봐. 그럼 내가 너랑 결혼해줄게, 아니 할께"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어쩌면 분노한 목소리로, 어쩌면 간절히 바라는 목소리로 말하는 그녀. 당시의 내 급여는 171만원이었고, 500만원이라는 돈은 도저히 대답할 수 없는 숫자였다. 아니 몇 번인가 내가 말했던, 그녀도 나도 믿지 못할 그 지킬 수 없는 허풍을 지금 또 칠 수는 없었다.

"투잡이든 쓰리잡이든, 해서 줄 수 있어? 없잖아. 아니 애초에 니가 왜 그렇게 해야돼. 니 빚도 아닌데. 그렇잖아. 또 니가 그렇게 힘들게 번 돈, 우리 집에 보내서 빚쟁이들 주면 내 기분은 어떨까? 그치?"

아무 말도 하지 못한 나를 보며 희수는 눈물을 닦고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니 잘못 없어. 그냥… 우리가 때가 아니었다고 생각하자. 대신에, 다음에… 다음에 언젠가 다시… 음… 우리가 만날 인연이 되면… 그때는 정말 더 잘해줄게. 더 많이 잘해주고 싶었는데… 내가 너무 힘들어서 많이 못 해줬어. 그게… 참 미안했어…"

주루륵 흐르는 내 눈물을 닦아준 그녀는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감추며 내 대답도 듣지 않은 채로, 다시 그녀가 사는 집 건물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그 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참 많이도 울었다. 만약 돈을 벌 기회가 온다면, 그래서 그녀의 한을 풀어줄 수 있다면 내 영혼을 팔아서라도 벌 거라고 다짐했다. 뭐, 결국 이렇게 벌고 난 시점은 모든게 끝나버린 너무 늦은 시점이지만.





"예예, 아니 무리하게 버티지 마시고, 그냥 에어드랍만 받으면 바로 처분하고 나오세요. 제가 아까 그 선동이 형한테도 말 들은게 있는데, 지금 추세선이 너무 좀 그렇다고, 너무 티나게 작전 같다고, 예 괜히 무리하지 말자구요. 예예, 그럼 또 보다가 뭐 건 생기면 말씀해주세요. 네에"

자칭 '왕개미'들끼리 주고 받는 정보들. 잘해봐야 아마추어 차트쟁이, 보통은 그저 다른 놈들보다 눈치코치 조금 빠르고 조금 더 대담한 놈들에 불과한 찌질이들이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의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 뿐이지만, 세상 뭐든 그렇듯이 감 좋고 운 좋은 놈들이랑 함께 뭘 하면 확실히 성과가 좋다.

전화를 끊고 모니터를 좀 보다가 다시 침대에 눕자, 이번에는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용돈 보내준 거 고맙다는 전화였다. 얼마 전부터 집에 50만원씩 보내고 있다.

"용돈 보내준거 고마워. 잘 쓸게. 니도 돈 없을텐데…"
"아 걱정말고 써"

집에는 사실 내가 대박을 터뜨렸다고 말하지 않았다. 말해봐야 괜히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들로 걱정이나 하고, 재수 없으면 사기꾼이나 돈 냄새 맡은 아귀 같은 친적들 중의 누군가가 덤벼들지도 모른다. 세상이 다 그런거 아닌가.

그저 일시불로 3천, 이후로는 한달에 드리는 용돈만 50만원으로 늘렸을 뿐이다. 집에는 주식 투자 좀 했던게 잘 됐다고 뻥을 쳤다. 그래도 걱정하길래 "아 진상전자에 투자한거야. 진상전자. 여기 주식이 망할 정도면 뭐 다른 놈들은 멀쩡하겠어? 그러니까 걱정을 하덜덜 말어" 하고 말았다.




"그래도 엄마는 진심으로 하는 걱정이기라도 하지"

하지만 다른 놈들은?

"미친 새끼들이지"

코인 시장으로 재미를 살짝 본 초창기, 주변 친구 몇 놈과 인터넷 커뮤니티로 알던 몇 놈에게 나름의 요령과 코인 투자의 의의를 좀 가르쳐 줬다. 그런데 그게 독이 되어 돌아왔다.

하라는대로 안 하다가 다 털어먹은 놈, 그래도 나 덕분에 몇 백은 벌었을텐데 무슨 불만인지 궁시렁대고 내 욕을 하고 다니는 놈, 하랄 때 안하더니 뒤늦게 도박이네 사기네 하면서 나를 죽도록 미워하며 3년째 헛소리 하고 다니는 놈까지.

아니 뭐, 사람 마음이라는게 나 때문에 돈 털어먹은 놈이야 그럴 수 있다지만, 하랄 때 안 해놓고 뒤늦게 나를 사기꾼으로 매도하는 놈들은 뭔가. 3년째 게시판에서 여전히 사기네 뭐네 하면서 난리다. 언젠가는 이거 다 거품 꺼지고, 그땐 다들 죽는거라고.

"아예 인디언 기우제를 지내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하기사 그 마음 모를 것은 아니다. 나 역시도 처음에 '그때 큰 돈 집어 넣었으면' 하는 후회에 속이 꽤나 쓰렸으니까. 이미 늦었다는 생각에 '가질 수 없다면 부숴버리겠어' 하는 심리가 드는 놈도 있겠지. 단지… 인터넷에서 저 난리 굿을 피우며 "코인지옥 도박사범" 타령을 3년 동안 할 시간에 알바라도 해서 그 돈으로라도 투자를 했으면 지금쯤 아무렴 몇 백인들 손에 못 쥐었을까.

"당연히 언젠가는 꺼지겠지"

지난 12년간 매 순간 그 이야기가 나왔다. 그 놈의 버렌 워핏 할배 이야기도. 그러나 부침은 있었을 지언정, 여전히 코인 시장은 성장 중이다. 언젠가는 이 대세 상승장도 끝나고 한동안 재미없을지도 모른다. 정말로 그들의 말따라 망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건 당연한 것 아닌가. 요는 그러니까 지금 당장 재미 좋을 때 뛰어들어 벌면 되는 것 아닌가.




"이해는 가요 저는 솔직히"

아영씨, 혜란씨와 함께 점심을 먹는 도중 혜란이 말했다.

"우리 아버지 친구 분 중에, 진짜 사업 잘하시는 분이 있거든요. 막 큰 사업을 하는 건 아닌데, 유행하는 장사는 다 손대서 성공을 하는 거에요. 불닭, 찜닭 장사부터 봉팔비어, 쥬디, 명예 핫도그, 홍콩 카스테라, 24시간 곱창 뭐 그런거. 그래서 아버지가 맨날 너는 참 대단하다 어떻게 그렇게 사람들 마음을 귀신같이 잘 아냐 칭찬했는데, 그 아저씨 말이 그게 아니래요."

재미있는 이야기다.

"그 아저씨 말이 '나는 유행하는걸 미리 알고 하는게 아니라, 유행을 한다는게 보이면 빨리 손을 대는거'래요. 사람들이 '아 이거 괜찮네, 이거 요즘 유행인가 보네' 하는걸 먼저 캐치해야 되는 부분도 분명히 있지만…돈 못 버는 사람은 그걸 알고도 미적미적 대다가 결국 안하던가 너무 늦게 손을 대는거죠. 근데 아저씨는 그걸 딱 일주일 내에 도장까지 찍는거래요. 그러면 유행이 오래가면 대박이 터지는 거고, 아니더라도 손해가 크진 않다는거죠. 한창 붐이니까. 근데 그거 아무나 못하는거잖아요. 그게 성공하는 사람하고 아닌 사람 차이 아닌가 싶어요"

꽤 깊이 있는 통찰 아닌가.

"와 혜란씨 사업해야겠네"

내가 웃으며 칭찬하자, 혜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작년에 한창 유행했던거 있잖아요. 초미니 샐러드. 그거 제가 붐 일어나기 전에 미리 추천하고 아빠도 이거 장사 되겠네, 하고 생각은 했는데… 아버지는 결국 안 했어요. 이게, 여유 자금이 있는 사람하고 아닌 사람은 좀 다르잖아요. 이 돈을 쓸 수 있나 아닌가가"
"그렇지"
"저는 코인투자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그리고 반대로 여유 자금이 엄청 많은 사람이면 굳이 위험한 코인투자 할 필요가 없는거구"
"그렇네"

묘하게 뼈가 있는 말이라 이해가 가면서도 씁쓸해졌다. 물론 아영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걔가 원래 그런 애에요"

아영은 혀가 꼬인 목소리로 또 한잔을 들이키곤 말했다.

"걔네 아버지, 인도네시아에서 요트 사업 크게 하시는 분이에요. 그니까 우리 앞에서는 무슨 아부지가 소시민이라서 투자 안 한 거처럼 말했지만, 실제로는 돈이 많아서 그런 푼돈 사업은 할 필요가 없다 이거에요"

그랬구나. 하기사 묘하게 귀티 난다고는 생각했더랬다.

"저번에 은영씨 결혼식 때는 버키니 백 들고 왔었어요. 집도 블랙스톤레전드 혼자 살구 있구. 차도 세 대랬나. 솔직히 회사 왜 다니는지 몰라"

문득, 요 한동안 돈 좀 벌었다고 그녀 앞에서 깝죽대지는 않았나 뒤돌아 보게 된다. 혼자 그렇게 말 없이 곰곰히 생각해보노라니, 아영이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대리님은 안 외로우세요?"

아 그랬나. 그러고보니 요 한동안 그녀가 묘한 신호를 보내긴 했었지. 조금 고민했지만, 딱히 거절할 이유도 생각나지 않았다. 하기사 이쁘고 똑똑하고 내 말이라면 껌뻑 죽는데 싫을 이유가 뭐가 있는가. 마지막으로 한번 더 '뭐 별 일 없겠지?' 생각을 해봤다.

'응, 오케이'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바의 상들리에 불빛이 조금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나는 그녀에게 얼굴을 가까이 했다. 그리고는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

'우선 오산에서 출퇴근 하는 그녀에게 우리 집 방 하나를 쓰라고 주고, 출퇴근을 내 차로…아니, 아예 아영이는 집에서 쉬라고 하지 뭐. 그래, 그렇게 동거를 시작하자. 그리고 투자금은 합치자. 어, 내 투자금 총액이 지금 19만원이니까…엥? 19만원? 뭔 소리야. 내 투자금이 지금 얼만…'






…눈을 떴다. 바닥에는 깨진 컵조각이 널부러져 있었고, 사방으로 튄 물이 벽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나는 방바닥에 쓰러진 채 였다. 정신이 조금 들었다. 아까 순간적으로 너무 화를 내서 그대로 쓰러진 모양이다. 뒷통수가 욱씬 아팠다. 넘어지며 머리를 찧은 모양이다. 뇌진탕이 크게 안 온게 다행이다. 타고난 돌머리가 이럴 때는 도움이 되는 모양.

'꿈 속의 꿈이었나'

그 새하얀 인테리어의 깔끔한 새 아파트 대신, 5.5평짜리 좁은 원룸과 싯누런 형광등 불빛이 나를 재빨리 현실로 데려다 주었다. 나는 지끈지끈한 뒤통수를 조심스레 매만지며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후우"

개당 4만원까지 떨어졌던 베인코인은 다시 150만원대를 향하고 있었고, 헤더리움도 13만원을 향하고 있었다. 19만원까지 추락했던 나의 평단가도 지금 260만원을 돌파했다. 시장은 딱 4년 전으로 돌아간 셈이었다.

"흐흐, 흐흐흐"

나는 실없이 웃었다. 꿈에서 본 아영씨가 왠지 낯이 익어 한참을 생각해봤더니, 어제 실업수당 타먹으러 다녀온 상담원 얼굴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가 차서 또 웃었다.

"괜찮아, 괜찮다고! 야, 괜찮아"

스스로를 다독이는 말과 함께 얼른 여기저기 게시판과 지표들을 훑기 시작했다. 사상 최대 폭락의 상황에 게시판이 절망으로 뒤덮여 있었지만, 빠른 반등에 만세를 외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오, 그래, 그래"

그 사이 베인코인은 300만원을 넘어가고 있었고, 그 무서운 기세에 더이상 추매할 돈이 없다는게 한스러울 뿐이었다. 물론 게시판에서는 데드캣이다, 일시적인 기술적 반등일 뿐이다, 마지막 설거지다 어쩐다 하는 말들이 또 나오기 시작했지만 괜찮다고 나를 다독였다. 딥블루곡스 사태 때도, 중국발 하락장 때도 다 망하는 줄 알았잖는가.

"안 망한다고! 망해도 안 망해!"

타는 목마름을 느끼며 주변을 돌아보다, 문득 방문 앞에 붙어있는 포스터에 눈이 멈췄다. 그래, 바로 이거지. 나도 그 박력 있는 최민구 사진처럼 크게 외쳤다.

"가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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