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수지 3화 [장편] 수지

"네, 5500원입니다. 영수증 드릴까요? 네, 또 오세요"

불금을 맞이한 강남의 저녁은 인산인해 그 자체다. 11번 출구 올라가는데만 5분은 족히 걸리도록 사람이 미어 터지니까. 편의점 손님도 마찬가지다. 베테랑 유나씨가 함께 일하는데도 계산을 하기 위해 계속 줄을 설 정도다. 그 와중에도 튀김을 돌리고 아이스크림을 만들어야 한다. 땀이 비오듯 쏟아진다. 하지만 10시 반을 넘어서면 서서히 조금씩 손님이 줄어간다.

"저 먼저 들어가볼게요"
"네, 들어가세요"

유나씨도 퇴근하고 이제 혼자 일하는 시간. 이미 손님도 아까의 반의 반의 반. 조금은 한가해진 것을 느끼며 나는 진열을 조금 손본다. 그리고는 휴대폰을 한번 더 들여다본다. 유투브 알람을 설정해놓은 몇몇 BJ의 새 영상들이 올라와 있다. 영상을 볼 여유는 없지만, 한쪽 귀에 끼운 에어팟으로 소리는 들을 수 있다.

"후"

가게 안에서 떠들고 있던 10대 손님들마저 나가고, 이제 간신히 한숨 돌리며 카운터 의자에 털썩 앉는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다. 지친다. 시급 천원 더 준다는 말에 이 가게로 옮겼는데 후회가 된다. 너무 빡세다. 아니 그보다 스스로가 좀 한심하게 느껴진다.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에 편의점 알바나 한다는 지금 내 처지가. 같은 영어 스터디에 있던 윤정씨가 얼마 전에 대기업에 입사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어서 그런지도. 괜한 짜증이 솟구친다.

"어서오세요"

그 찰나에 들어온 손님들. 금요일 밤, 한껏 화려하게 꾸민 여자들이다. 번화가 편의점에서 일하는 작은 보람이다.

"아 목마르다"
"혜미 넌 뭐 마실거?"
"난 제로 콜라"
"야, 그냥 콜라를 끊어"
"아 난 제로 콜라가 제일 맛있엉!"

나는 힐끗 그녀들을 바라보다 다시 휴대폰으로 눈길을 돌린다. 편의점 알바를 시작한지 어느새 9개월째. 나는 아직도 은평구에서 강남까지 출퇴근하며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다. 엄마한테는 영어 학원 때문에 겸사겸사 여기서 일한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9개월 전의 그 우연한 만남, '수지'와의 인연 때문에 시작한 알바다. 그냥 우연히라도 또 마주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뭐, 지금에 와서는 포기한 상태로 그냥 정말로 학원 가까워서 일하는 거나 마찬가지지만.

카톡을 열어본다. 반 년도 넘게 지난 그 날, 주말에 같이 영화 보자고 한 이래로 수지의 연락은 똑 끊겼다. 주말에 영화 뭐 보냐는 질문, 내일 바쁘냐는 질문, 그리고 세 통의 전화와 무슨 일 있냐는 카톡 등등 내가 보낸 모든 카톡 메세지는 그렇게 1이 사라지지 않았다.

'또 휴대폰을 잃어버렸던 것일까'

그리고는 어느 날 갑자기 알 수 없음으로 사라져 버린 그녀의 계정과 프로필 이미지. 귀여우면서도 도발적인 눈빛을 가졌던 수지. 그녀는 그렇게 신기루처럼 사라졌고, 난 짧게 꾸었던 단꿈에서 그렇게 깨어났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나는 여전히 그녀가 살고 있는 강남 근처의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술에 꼻은 그녀를 데려다 주러 갔던, 수지네 집 앞까지도 몇 번이나 가서 기다려봤다. 다섯 번? 여섯 번? 열 번? 그러나 참 뭐가 타이밍이 그리도 안 맞았는지 그때마다 수지는 집에 없었다. 그리고 사실 두려웠다. 만약 마주치더라도, 내가 무슨 명목으로 그녀 앞에 나타날까. 잘해봐야 눈치없는 놈, 보통은 스토커일텐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후로는 한번도 집 근처로 찾아간 적이 없다.

"수지, 넌?"
"난 지그램"

그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지?'

딱 보면 알 것 같았지만 그럴 리 없다. 비슷한 느낌이긴 한데 솔직히 긴가민가하다. 이미 반 년도 한참 더 된 일이다. 사람 얼굴 기억을 잘 못 하는 나는 '쟤인가?' 싶으면서도 확신은 없다. 가슴이 두근두근 뛴다. 아니 쟤가 맞다 하더라도 내가 뭘 어쩐단 말인가.

"장미나, 아 빨리 골라!"

짜증을 내는 단발머리의 그녀. 목소리 톤에서 조금 더 확신이 들지만 정말 맞을까. 셋은 시끌시끌 떠들더니 곧 카운터로 음료 하나씩을 들고 다가왔다.

"계산해주세요"
"네"

카드를 내미는 단발머리. 원래대로라면 앞에 그냥 꽂으면 된다고 안내하겠지만 굳이 카드를 받아서 슬쩍 이름부터 확인한다. 편의점 형광등 불빛에 힐끔 비친 영문자 JUNG. 그래 맞어. 정수지였지. 맞는 것 같다. 손이 떨린다. 미친 놈, 하고 속으로 스스로에게 욕을 하며 바코드기로 음료들을 찍고 다시 한번 슬쩍 그녀가 내 얼굴을 알아봐주길 기대한다.

"6300원입니다"

그러나 수지는 휴대폰에 눈길이 가 있다. 오히려 그녀 옆의 친구들이 내 굼뜬 동작에 짜증을 내는 느낌. 나는 마음 속 깊이 한숨을 내쉬며 결제를 진행하고, 영수증이 필요한지를 묻는다. 휴대폰에 눈을 고정한 채로 고개만 흔드는 수지.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조금 떨리는 내 목소리. 병신 같다.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근 반 년을 그리워 한 사람이 눈 앞에 있는데, 나는 입을 열지 못한다. 왜? 아니 알아보면 또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렇게 그녀들이 가게를 떠난다. 아니 그 직전.

"저, 혹시 정수지?"

그리고 내 질문에 셋이 일제히 나를 돌아다본다. 둘은 '너가 뭔데? 얘 이름을 알아?' 하는 황당한 표정, 하나는 놀람과 반가움이 뒤섞인 표정.

"어?!"

…를 상상해보지만 그저 나는 입도 뻥긋 못한 채 그녀들을 그렇게 떠나보낸다. 문이 닫히며 딸랑~ 하는 소리가 망상 속에서 나를 깨운다.








수지 







"수지 넌 어때?"

혜미의 질문에 난 혀를 찬다.

"재미없어. 알잖아, 우리 과 애들 싹 다 병신들인거"
"어? 수지 너 복학했어? 왜?"
"아빠 땜에. 유학가던지 복학하던지 둘 안 하면 호적에서 파버리겠다잖아"
"차라리 유학 오지"
"아 싫어 그것도. 나 예전에 유학 준비하다가 완전 고생한거 몰라?"
"아 맞어. 그랬지 참"

한국에 간만에 돌아온 미나의 생일 때문에 모처럼 강남역에서 만난 우리 셋. 1차로 장원닭갈비, 2차로 YA라운지, 3차로 커피비니에서 배를 가득가득 채운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근황을 업데이트 한다.

"너 그럼 아직도 여기서 자취해?"
"어, 집세는 내는데, 거의 요즘에는 아빠집에서 자. 옆집에 왠 미친 아저씨가 이사왔는데 맨날 밤에 막 쌍욕을 하고 소리를 질러. 무서워 죽겠어. 집주인한테 말해도, 집주인이 건물에 같이 사는 것도 아니고 관리인 아저씨는 경비실에서 10시면 자기 바빠."
"뭐야 그게"
"여튼 그래서 걍 아빠집에서 잘 때가 많아. 주중에는 학교 다니고 주말에는 아빠 갤러리 출근하고"

문득 미나가 묻는다.

"너 아직 재혁 오빠 만나?"

그 말에 혜미가 풋하고 웃는다. 아 짜증나.

"그 새끼랑 끝난게 언젠데. 그 바람둥이 새끼"

그러자 혜미가 부연한다.

"근데 너가 그때 좀 그렇긴 했어. 오빠랑 헤어지면서 그 뭐야, 이상한 찌질이 사진 인스타랑 카톡 프로필에 올리고 막 그때 우리 실시간으로 막 난리났잖아"
"찌질이?"
"뭐랬지? 후보선수? 아아, 선수교체! 막 선수교체라고 태그 쓰면서 남자 사진 올려서 막 우리 난리났잖아. 재혁 오빠에서 실시간으로 갈아탄거냐고. 수지 너 완전 멋있다고"
"뭐래"

미나는 그 이야기에 귀를 쫑긋하며 "뭐야, 나만 모르는 대박사건? 나 업데이트 하나도 안 됐어. 빨리빨리 털어" 하면서 보챈다. 혜미는 이야기를 야무지게 정리한다.

"재혁 오빠가, 수지 두고 또 바람 피웠는데 이번에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어"
"뭐? 둘? 세 다리 걸친거야?"
"아니, 쓰리썸"
"헐 대에박!"

미나의 경악에 "조용해 미친 년아" 하고 혜미가 뻥 터지며 입을 막는다. 나도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진다.

"첨엔 그렇게 수지가 차였거든? 맞지?"
"아니거든?"
"미친 너 차인거 맞잖아. 여튼, 근데 그 다음 날에 수지 얘가 다른 남자를 바로 꼬셔서 인스타에 '선수교체' 라면서 딱 사진 업댓한거야"
"오 뭐야 수지 너 대박 멋있다!"

미나는 연신 내 팔뚝을 내려친다.

"그래서 재혁 오빠 완전 빡쳐서 다음 날 수지한테 와서, 그 재혁 오빠가 막 그 남자 뭐냐고 난리난리 피우고 얘 폰 까보라고 그러고 완전 상난리 피웠어."
"정말? 재혁 오빠가? 그 쿨맨이?"
"어. 그날 수지랑 막 싸우다가 수지 휴대폰 막 던지고 난리 났었대"
"뭐야, 재혁 오빠 완전 찌질이네. 세상 쿨내는 혼자 다 풍기고 다니더니. 그럼 그 새 남자는? 지금도 만나?"
"아니. 그냥 그걸로 끝이지."

…그러고보니 그 남자 이름이 뭐였더라.

"근데 그럼 그 남자는 누구였어? 그 새 남자는?"

미나의 질문에 나는 대답이 궁해졌다. 그렇다고 진짜 아무나 만나서 대충 장난 좀 친거라는 말을 하자니 내가 쓰레기가 되는 느낌이었다.

"아는 오빠 있어. 아무한테나 돈 막 퍼주는 남자"

처음 만난 날, 아무 꺼리낌 없이 나한테 택시비로 없는 돈 2만원을 아낌없이 퍼준 남자. 맞긴 맞잖아. 혜미는 내 말에 크게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돈 잘 쓰는 남자가 최고지"

미나는 "야, 너네 진짜 더러워" 하며 빵 터진다.

"이제 슬슬 일어나자"




"조심해서 가"
"어, 우리 쑤, 또 봐"
"응"

카페를 나와 둘을 먼저 택시 태워 보내고 나도 아빠 집으로 가려고 세 번째 택시를 잡으려던 찰나, 뭔가 아까부터 아랫배가 살살 아프더라니 설마설마하던 중에 생리가 터졌다. 아차 싶었다.

'아…'

마침 가방도 바꾼 차에 비상용도 안 챙겨왔는데.

"아…"

어쩔 수 없이 그냥 강남집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에 생리대가 남아있던가? 이미 강남집에 안 들어간지 거의 몇 달 째라 확신이 없다. 어쩔 수 없이 아까 들린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찐따 같이 생긴 알바생이 날 보자마자 당황스러워 한다. 뭐야. 짜증나게. 설마 뭐 나 좀 상태 이상한가? 싶어서 서둘러 진열대 너머로 몸을 숨긴다. 아니, 나 오늘 블랙진이라서 뭐 티가 날 것도 없다. 일단 안도의 한숨을 쉬며 생리대를 집는다. 피곤하다. 계산을 위해 생리대를 올려놓고 지갑을 꺼낸다.

"저기요"

알바생이 말을 건다. 뭔데.

"혹시 수지…씨?"

어?

"나 알아요?"

카운터의 알바생 얼굴을 그제서야 똑바로 본다. 그리고 어디선가 본 느낌을 받는다. 누구더라. 분명히 본 얼굴인데.

"나에요, 호민이. 고호민. 그, 나 옷 사줬잖아요"

아, 그 찌질이. 아니, '돈 잘 쓰는 남자'.





생각보다 시큰둥한 표정의 수지. 하긴, 그게 정상이지 싶긴 한데.

"아, 잘 지냈어요?"

꽤나 건조한 말투의 그녀. 나는 단박에 아까의 용기가 사그라듬을 느끼며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그냥 뭐. 수지씨도 잘 지냈어요?"
"그냥 그랬어요"

어색함 그 자체. 나는 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그녀가 집어든 물건을 바코드로 찍는다. 아니 그보다, 이거 생리대네. 아, 괜히 말 오래하면 안되겠구나 싶었다.

"카드주세요. 얼른 결제해드릴게요"

그리고 그 말에 수지가 피식 웃었다.

"맞어, 이런 남자였어"
"어?"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마치고 꼼꼼히 화장을 지운 뒤, 혜미한테 연락했다.

"나 좀 전에 그 오빠 만났어"
"누구?"
"찌질이"
"찌질이? 재혁 오빠?"
"아니이! 그, 선수교체남"
"어? 진짜? 뭐야, 우리 보내고 따로 만난거야?"
"아니 그런건 아니구, 우연히 만났어"

혜미도 요즘 남자 안 만나지 좀 오래되서 남자 이야기만 나오면 귀가 쫑긋한다.

"그래서? 지금 너네 집에 같이 있는거야? 대박! 꺄!"
"무슨 소리야, 그냥 잠깐 길에서 봤어. 진짜 우연히"
"아! 좀만 늦게 올걸. 궁금하다. 맞어, 그 사람 뭐하는 사람이야?"

그러나 편의점 알바생이라고 말하기는 좀 그랬다.

"그냥 쉬면서 집안 일 돕는다나 봐"
"딱 너랑 같은 과네. 그 오빠는 연애 안 한대?"
"어, 아마도?"
"뭐야 왜 단정을 못 해. 그거부터 물어봐야지"
"됐어"
"여튼, 뭐야 우리 쑤지 그럼 간만에 다시 연애질 하는거? 막 운명의 스트릿 로맨스?"
"됐거든요?"
"야, 너 지금 딱 걸렸어. 우리 딱 보내자마자 남자 만나고, 어? 그 남자 만나고 나한테 바로 자랑하고. 너 완전 이거 딱 너 연애 시작할 때 느낌인데?"

아니, 죽어도 그럴 일은 없다. 하지만 굳이 그럴 말로 꺼낼 이유도 없다.

"됐거든? 여튼, 집에 잘 들어간거지?"
"어어 나 이제 씻고 잘래. 안농"
"응"

전화를 끊고, 아까 호민과의 대화를 떠올려 본다. 눈치도 둔한 주제에 묘하게 쓸데없는 곳에서 친절하다. "20원은 안 받을게요" 라며 검은 봉투에 담아주는 것도 그냥 웃기다. 뒤늦게 요즘 정말 잘 지냈냐는 말에 또 신나서 장황하게 말을 하려길래 말을 끊고 번호만 받았다.

[ 찌질이 ] 로 저장을 하려다가 그냥 [ 호민 오빠 ] 로 저장했다. 찌질이로 저장하면 진짜로 이름 까먹을 거 같아서. 사실 성은 이미 까먹었다. 뭐였더라.

"사실 그 뒤에 일이 조금 있어서, 연락을 못 했어요. 미안해요" 라는 나의 사과에 "아니요, 괜찮아요. 그냥 저는 그, 옷이 너무 고마워서 뭐라도 답례를 하고 싶었는데 그게 안되서 제가 미안했어요" 라며 또 정색하는 그.

"후우"

그냥 요즘 맨날 학교-아빠집-학교-아빠집-갤러리의 뻔한 일상만 보내던 도중 만난 우연한 인연.

"근데 그럼 아까 나 본 거 아니에요? 그때는 왜 인사 안 했어요?"
"그냥, 좀 말걸기가 그래서요.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흔하디 흔한 찌질남. 그러나 처음부터 지금까지 묘하게 이 남자에게서는 정을 느낀다. 확실히. 뭐지. 그리고 그 바보 같은 순진함에 또 왠지 장난을 치고 싶어진다.

'아'

학교 애들한테 보여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1학년 1학기, 기대 속에 시작한 대학 생활은 시작부터 꼬였다. 첫 MT에서 술기운에 얼떨결에 분위기 맞춘다며 승락하고만 한 머저리의 고백. 술자리에서의 작은 이벤트라고 생각했던 그 헤프닝을, 머저리는 물론이요 과 전체가 진지하게 받아들인 상황.

그 와중에 이어진 몇 차례의 짧은 만남, 그리고 머저리에 의해 황당하게 폭로된 사생활. 어느새 과에서는 '걸레', '오다리' 같은 별명과 눈총이 이어졌다. 그래서 결국 휴학을 하고 떠난 도피성 유학. 물론 그것도 일이 꼬여서 처절하게 실패했지만.

그리고 1년 반만의 복학이다. 죽기보다 싫은 복학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문득 지금 누군가 내 곁에서 나를 무조건적으로 믿어주고 이해해 줄 사람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생 때의 첫 사랑 준영을 떠올리는 내가 잠시 싫어졌다.

'또 그런 과에 끌리는거야? 또 찌질이냐고'

카톡 프로필의 이 어이없이 싱글벙글 웃고 있는 사진부터 그냥 웃겼다. 그게 꼭 싫다는건 아니지만.




보통 같으면 야간 알바가 끝나면 파김치가 되어 3호선 전철 안에서 꾸벅꾸벅 졸며 가겠지만 오늘의 나는 쌩쌩하다. 왜냐하면 강남 편의점에서의 '존버'가 대성공한 셈이었으니까. 결국 수지를 만났으니까, 그리고 다시 번호까지 얻었으니까. 기적이었다.

"기적이야 기적"

눈을 지그시 감으며 전철 시트에 몸을 깊숙히 기댄다. 물론 잘 안다. 그렇다고 내가 뭐 걔랑 어떻게 진지하게 잘 되길 기대하는 것은 김치국 마시는 것을 넘어서 아예 배추농사부터 미리 하는 짓에 가깝다는 것을.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정말 좋았다. 괜히.

< 계속 >


[공지] '생각보다 짧은 시간, 새 표지' 판매 시작 책판매

안녕하세요, 스타일박스입니다.

지난 2011년, 그동안 써왔던 글 중에서 마음에 들었던 내용 일부를 담아 출판했던 '생각보다 짧은 시간'은 제 개인적인 큰 기대와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의 응원에도 불구하고 아쉽게 많은 재고를 남긴 바 있습니다. 

그게 조금 속상하기도 했고, 부끄럽기도 해서 이후에도 구매를 문의해주시는 분들께 알음알음 한두권씩 판매는 해왔지만 마침 책의 코팅 겉표지가 모두 소진되고 난 이후에는 한동안 판매를 중단했습니다.

이후에도 정말로 많은 분들이 구매를 문의주셨지만, 새 표지를 추가로 찍는 것도 번거로운 일이고 다시 판매를 하는 것도 민망한 일이다 싶어서 그대로 제 안의 흑역사로 덮어두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진짜로 요즘도 구매 문의가 들어온다고.


그러다 요 얼마 전, 인터넷조차 안되는 먼 아프리카 대륙 오지로 한달 가까이 떠나시는 분이, 그 심심함을 달래고 싶다며 '생각보다 짧은 시간'의 구매를 요청해오셨습니다. 그 메일을 받았을 때의 느낌은 마치 "무인도에 떠날 때 뭘 들고갈래?" 할 때 제 책을 들고 가겠다는 답변을 들은 느낌이라 큰 감동이었습니다. 그래서 겉표지도 없는 책을 아쉬운대로 곧바로 보내드렸습니다. (물론 그 분은 존나 후회하겠지. 하고 많은 책 중에 하필 똥글 책을 골라가다니…ㄲㄲㄲ)

그리고 그에 탄력을 받아 곧바로 새 표지를 제작하였습니다. 

< 생각보다 짧은 시간, 2019 '인연' 에디션 >입니다. 타이틀 위에는 출간 이후 지난 8년간의 소회를 담은 소제목을 간단하게 사족으로 붙였고, 책 날개에는 개인적인 감회도 덧붙였습니다. 

물론 책 표지만 바꿔 씌운 것으로, 책의 내부는 당연히 기존과 완벽하게 똑같습니다. 부관참시 에디션, 예토전생 에디션, 반찬재활용 에디션이라고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입니다. 겉표지만 새로 씌운 책이니까요.

하지만 혹시라도 기존에 꼭 구매를 하고 싶었는데 기회가 닿지 않아 구매하지 못하셨던 분이나 누군가의 흑역사를 소장하고 싶으신 분, 돈이 썩어 넘치는 분, 호구인증을 하고 싶으신 분이 계시다면 어쩌면 진짜 마지막이 될 수도 있을 이번 기회를 잡아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부디 부탁 드립니다. 저도 이제 방 안을 가득 채운 책박스 더미를 치우고 사람답게 다리 뻗고 자고 싶습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싸인본을 원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책의 안쪽에 싸인을 남겨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원하시는 분은 주문시 함께 말씀해주세요. 참고로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스타일박스 싸인은 좀 거시기합니다. 

아울러 책은 7월 한달간 본 블로그에서 선 주문을 받은 후 7월 말 일괄배송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문은 아래의 박스 내용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 책을 구매하고 싶으신 분은-
1. (배송료 없음) 권당 10,000원을 입금계좌 : 국민은행 580901-01-187313 고용환 앞으로 입금해주시면 됩니다. 
2. 위 계좌로 입금하신 후 [ 받으실 주소(우편번호 첨부 권장)와 받으실 분 성함, 연락처, 기타 남기실 말(싸인본 요청 등)]을 비밀 댓글로 달아주시면 됩니다. 배송은 (아마도) 우체국 택배로 해드립니다. 

* 2권 구매시 2만원, 3권 구매시 3만원입니다. 해외배송(단, 배송비 발생)도 가능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잘 부탁 드립니다. 



- 책 속에서 - 
빛 바랜 쥐색 정장 안으로 땀이 줄줄 흐르는 가운데 동준은 끄트머리가 군데군데 해진 소매로 연방 이마의 땀을 훔친다. 제가 그리 더울진대 몸이 골골한 마누라는 또 얼마나 더울런지. 

"다 왔어. 저 있잖아"

손가락으로 가리킨 저 편에 떡하니 오 병원이 있다. 

"어휴…"

마누라는 또 현기증이 오는지 잠시 쉬어가자는 듯 동준의 팔을 그 가는 손목으로 잡아 끈다. 

"허, 다 왔구만…"

차라리 시원하니 병원에 가서 쉬는게 낫지 싶건만 한 걸음 한 걸음이 힘든 모양이다. 속이 탄다. 담배라도 한 대 태웠으면 좋겠건만 주머니에 딸랑 빌려온 돈 10만원은 당최 병원비로도 부족하지 싶으니 담배 따위로 하릴 없이 태울 돈이야 있을 리 없다. 

"가자, 쉬어도 병원에서 쉬는게 나아"

가로수 밑에 서있어봐야 바람 한 점 없는 숨막히는 여름 땡볕 아래 비척비척 땀이나 치솟지 얼른 들어가자고 재촉하니 그제서야 "알았어요" 하면서 마누라는 동준의 손을 잡고 그 힘없는 걸음을 내딛는다. 

'지미 덥기는 오라지게 덥네'

그냥 반팔 입고 올 거를 괜히 그래도 병원 같은 데서 얕보이면 바가지 쓰지 싶어서 딱 한벌 있는 낡은 정장을 입고 왔더니 땀에 목욕을 할 지경이다. 안되겠다 싶어서 마이를 벗어 손에 들고 가는데 그제사 시원한 바람이 한 줄기 불어오니 한숨 돌린다. 

(후략)

- 본문 중에서. 96p < 생각보다 짧은 시간. 땡볕 2011 >

"너 그 남자랑 잤어?"

새삼스러운 질문에 다들 눈을 흘겼지만 그래도 직접 본인의 말로 듣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

"하, 그건 당연한거 아니니?  하 정말이지… 그 남자 서른 하나야. 몸도 운동 많이 해서 군살 하나 없고 탄탄해. 배에 왕자도 있어. 우리 남편 뱃살, 완전 나 임신 막달 찼을 때도 그 정도는 아니었어. 그런 남편 배 보다가 그런 남자랑 자려니까 글쎄… 어머어머 어쩌면 그리도… 정말 너무너무 최고야 
진짜"

마치 꿈이라도 꾸는 듯한 그녀의 표정과 제스쳐에 이번엔 진희의 얼굴에 이채가 돈다. 

"그렇게 잘해?"

(후략)

- 본문 중에서. 51p < 생각보다 짧은 시간. "나 요즘에 애인 사귀잖아" >


혐식주의자 망상

"여러분이 드시는 것은 '폭력'입니다"

그들의 주장에 절반은 코웃음을 쳤고, 절반은 화를 냈으며, 그 어느 쪽에도 포함되지 않은 극소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채식주의자 식당에 들어가 식물을 먹지 말자면서 소리를 지르고 촬영을 막는 자들에게 "신체접촉 하지 마세요, 카메라 건드리지 마세요" 하며 경고하는 모습은 온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풀떼기만 쳐먹자더니, 한 수십 년 전에 지들 선배들이 한 일 고대로 돌려받네. 꼴 좋다"

극히 일부의 잡식주의자 노인들은 그런 식으로 낄낄대며 통쾌해했지만, 그들의 조롱은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이미 육식은 세상에서 사라진 식성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혐식주의자





2010년대 후반부터 유럽을 시작으로 곧 전 세계에 들불처럼 번진 레디컬 채식주의 운동. 사육 과정에서의 동물학대와 도축에 대한 동물생존권을 기치로 하여 시작된 소수 주장이었지만 생각보다 오래지 않아 그 주장은 힘을 받기 시작했다.

"채식주의는 돈이 됩니다"

인종 및 성별, 동성애 등, 기존의 소셜운동권 세력이 선점한 프레임이 공고해지고 주류의 위치에 올라와 더이상의 신선함을 찾기 어려워짐에 따라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 헤메이던 세계의 운동권 단체들이 찾아낸 키워드는 '채식'이었다.

'기존 사회에 충격을 줄 수 있을 정도의 센세이셔널함, 왠지 모를 진보적 이미지, 소수자 위치이기는 하나 적당히 힘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는 깔려있는 저변, 동물생존권 및 동물학대 등 적당히 그럴싸한 명분, 대기업이나 부자들에 대한 저항자적 포지션, 기존 소셜 운동권 세력과의 연대가 가능한 정치적 호환성' 등, 완벽하게 그들이 추구하던 키워드 그 자체였다.

"정말 왜 이런 키워드를 이제까지 놀려두고 있었는지 모르겠다니까, 퍼펙트해"

게다가 타이밍도 좋았다. 지지세력을 얻기 위한 세계적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윤리가 아닌 경제적 이유에서.

"우리도 고기를 먹게 해달라"

전세계 인류가 90억을 돌파한 것은 물론, 중국 및 인도 등 전통적 인구대국의 경제력이 상승함에 따라 세계의 육류 소비량 역시 엄청난 속도로 늘어났다. 그러나 한 마리의 소를 키우는데 들어가는 직접적, 사회적 비용은 결코 작지 아니한 것이었고, 그 많은 수요는 공급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수준이었다. 서서히 오르기 시작한 세계 육류시장의 물가 머지않아 폭발적인 수준으로 상승했고 어느새 서민들은 소, 돼지는 물론이요 닭조차 좀처럼 먹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부자만을 위한 고기, 꺼져라!"

식량공급의 위기가 도래하자 정치인들은 부단한 수를 썼지만, 애시당초 수요공급의 문제를 정치가 해결할 수는 없는 법. 수많은 부작용만을 발생시킨 채 결국 그들은 채식주의 운동을 해결사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소 한 마리를 키우기 위해 소비되는 물자가 얼마인지 아십니까?"
"우리 꿀꿀이, 꽥꽥이, 음메음메를 지켜주세요"
"여러분이 먹는 것은 폭력입니다!"

일부 소수자들의 사상, 소셜 소수자들의 레디컬 운동이던 채식주의가 어느새 사회적 교양운동이 되고 세력화가 되었으며 곧 정부의 정책이 되었다. 그런 급격한 변화에 기존 육류 소비자들은 당황하며 반박을 시도했지만 '기득권', '변화를 거부하는 꼴통'으로의 프레임이 씌워졌다.

"캬, 뜨신 흰 쌀밥에 말이야 고깃기름 자글자글 흐르는 구운 스팸 이렇게 딱 얹어서 계란후라이랑 뜨악 캬~"
"저기요, 죄송한데 채식주의자 앞에서 그런 말 하시는거 식희롱인거 아시나요?"
"뭐? 아니 무슨, 이건 그냥 내 취향이고 내 개인적인 취향인데"
"그걸 입 밖으로 내는게 문제라구요"
"아니 무슨 미친"
"미친건 그쪽이구요"

사회적인 오랜 통념을 깨는 것에는 분명히 많은 저항이 있었다. 그러나 그 주장에는 생각보다 적지 않은 힘이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유난히 까탈스러운 사람들의 정신나간 헛지랄"이었고, 누군가에게는 "그동안 인지하지도 못했던 스스로에 대한 반성이 필요한 끔찍한 사회적 폭력"이었다.



"물론 일부 사육장 환경이 매우 열악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네, 인정하셨고요. 소나 돼지의 축사 때문에 오염되는 환경비용이 얼마인지는 아십니까?"

'아니 상식적으로…'하는 식의 일반론을 들고 어설프게 비거니즘에 저항한 이들은 곧 처참한 패배와 손가락질을 마주해야 했다. '불편의 시선'으로 보노라면 이미 그동안의 육식이 저지른 죄악(?) 자체가 결코 적지 않았으니까. A.I에 대한 로봇인권이 서서히 거론되는 시기에 동물들의 목숨은 분명히 쉽게 묵과하기 어려운 가치였다. 게다가 백년 전의 인종 이슈까지 예시에 섞여들자 더이상 육식은 공적인 자리에서 대놓고 말하기 어려운 위치에 이르렀다.

"시청자 여러분, 지금으로부터 약 백여년 전 우리의 선조들은 아프리칸 어메리칸들을 돈을 주고 사고 팔았으며 그들의 목숨값을 자산가치로 매겼습니다. 우리와 같은 존재로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소비하고 소모해야 할 자원으로만 따졌을 뿐입니다. 우리와 똑같이 심장이 뛰고, 생각을 하며,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들을 말입니다. 우리는 그런 선조들의 사상을 잘못된 것으로 가르치고 반성해왔습니다. 자 이제 우리를 돌아봅시다. 지금 우리는 동물들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이상입니다"

몇몇 진보적 성향의 정당과 단체들이 비거니즘을 주요한 가치로 내세웠고 이후 오랜 싸움 끝에 드디어 꽤 큰 목소리로 받아들여 지게 되었다. 곧 여야를 막론한 주요 정치인들, 사회적 명망 있는 이들이 비거니즘 지원을 주장하고 그들을 위한 사회적 배려와 지원이 이어졌다. 청소년 급식이나 군대 메뉴에서도 채식이 주류가 되었다.

"한정된 자원 안에서, 잡식 메뉴와 채식 메뉴를 따로 준비하기가 쉽지 않아요. 비용적으로도 그렇고 시간적으로도 그렇고. 결국 그럼 못 먹는 사람이 있는 메뉴를 버리는게 현실적이죠. 우리 학교도 채식주의 식단만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일부 지식인들과 여전히 육류를 원하는 이들은 '채식의 위험성'과 '육류 선택의 자유'를 주장하며 싸웠지만 이미 대세는 넘어간지 오래였다. 애시당초 환경오염과 가격폭등을 이유로 선진국 및 중진국 서민들의 육류 소비가 2000년대의 1/10 수준으로 줄어든 상황에서 더이상 육류에 대한 옹호를 주장하는 목소리는 많지 않았다.

소비의 경험이 사라지자 입맛 역시 변했고, 정책 및 사상, 교육이 가미된 사회적 입맛의 변화는 선진국을 중심으로 중진국, 후진국으로 이어져 결국 전체 수요의 감소로 이어졌다. 취향의 변화는 단기적 수요 감소 그 이상의 힘을 갖고 있었다. 결국 사람들은 서서히 육류 소비를 줄이다 못해 터부시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또 수십 년이 흘렀다.




"아니 그럼 채식을 안 하면 뭘 먹고 살라는건데?"

채식주의자들의 분노에 대해 혐식주의자들은 "인공합성 사료"를 대안으로 내밀었다. 식물의 희생이 없는, 순수 인공단백질과 무기질 합성체로 제조된 '인간 사료'는 이미 소수자들의 훌륭한 대안이었다.

"이 다큐멘터리를 보아주세요. 우리가 식물의 잎사귀나 줄기를 꺾을 때 식물에서는 강력한 경계 호로몬이 발산되고 분명한 전기적 신호와 충격이 줄기와 뿌리, 잎파리까지 전달됩니다. 그리고 제발 < 잎, 줄기, 뿌리 그리고 삶 > 이 책을 보아주세요!"

혐식주의자들이 채식주의 식당에 함부러 쳐들어가 소리를 지르고 시위 영상을 온라인에 올리는 이들을 향해 네티즌들은 많은 분노와 코웃음을 표풀했다.

[ 저거 주장한 사람 트윗스타북에 들어가보니까 한 3개월 전 쯤에 '아 당근쥬스 너무 맛있다' 써놓은 내용있던데? ]
[ 맛없는 합성사료는 지들이나 쳐먹으라고 해. 아 고사리 살살 녹는다 ]
[ 응 오늘 밤은 새싹무침비빔밥, 어린 새싹 개꿀맛 완전 조타 ]
[ 저거 영업방해 아님? ]
[ 거대 팜과 플랜트에서는 하지도 못하면서, 꼭 저런 영세한 식당 들어가서 저 난리더라 ]
[ 님? 님님? 님들 작년에 비빔밥 스까묵은 사진 개털림요ㅋㅋㅋㅋ 얼른 사진 내려요ㅋㅋㅋ ]

혐식주의자들의 주장을 사람들은 그저 황당하다는 듯 조롱과 비아냥으로 흘러 넘겼지만, 그들은 진지했다.

[ 역사상 단 한번도 조롱이 진실된 주장을 이긴 적은 없습니다. 우리는 식물생존권을 주장합니다 ]
[ 제가 그때 먹은 당근쥬스는 당근 원액주스가 아니라 '당근향 쥬스'였고, 비빔밥이 아니라 비빔맛밥입니다. 물론 그것도 이제는 먹지 않고 있구요 ]
[ 제발 제 작은 티끌이 아니라, 제가 말하는 목소리에 집중해주세요. 식물도 우리의 친구입니다 ]

물론 그들의 '진지함'은 '순진함'과는 또 별개였지만.

"아니 정부에서 비거니즘에 40조를 지원하면 뭐하냐고. 그거 다 지들 카르텔에만 지원되는데. 그리고 다들 지들끼리 인맥이잖아. 새로운 먹거리 찾아야지"
"근데 나 정말 앞으로 채식 안 하고 살 수 있을까? 월급날에 쟁반 샐러드 안 먹고 어떻게 버팀? 해초무침은? 아 진짜"
"야, 요즘에 초무침 맛 합성사료 나온거 몰라? 과일맛도 종류별로 다 있어. 걍 뿌려 먹어"
"아 그래? 좋아 그럼"
"원영이 선배, 지금 행복당에 있잖아. 연락해볼까?"
"이건 기회야. 우리가 선점해야 된다고"
"오케이!"
"더이상 언니들이 허용한 혐식주의는 없어. 이제 우리들의 시대야"
"응!"

…그들의 운동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 끝 -

맹목에 대한 이야기 망상

1. 두발자유화

중학교 시절, 남학교였던 우리 학교는 학생들의 머리길이 규정에 대해 꽤나 엄격했다.

종종 아침 등교시간에 난데없이 진행되는 두발단속. 교문 앞에 서있던 학생주임과 담당 교사는 등교하는 학생들을 죽 살펴보다가 '학교에서 규정한 길이 이상의 앞머리, 옆머리를 한 학생을 발견하면' 그를 불러 그 자리에서 바리깡으로 앞머리부터 정수리를 지나 뒷머리까지 그대로 죽 밀어버렸다. 그들은 그것을 '고속도로를 낸다'고 부르며 웃곤 했다.

머리카락을 죽 밀려버린 학생은 당연히 하루종일 친구들과 다른 교사에게 웃음거리가 되고, 다음 날 스포츠 스타일을 넘어 사실상 반삭발 상태로 머리를 밀고 와야한다. 단속하는 교사에 따라, 단속당한 학생의 평소 이미지에 따라 다소간의 '깊이 차이'는 다를 수 있으나 어쨌거나 일단 '고속도로'를 당하면 그렇게 몇 달을 인내의 시간으로 보내야 한다. 특히 졸업앨범에 멋진 사진을 남기고 싶다며 서너달 전부터 머리길이를 길게 관리하던 내 친구 동철이는 몇 차례의 경고를 끝에 결국 '본보기'로 그렇게 머리를 박박 밀렸다. 그는 반삭발로 졸업앨범을 찍게 되었다. (여담으로 녀석은 졸업앨범을 받은 그 자리에서 찢어버렸다)

애시당초 '두발길이 단속을 통해 학생들을 그 본연의 본분에 맞는 행실로 계도한다'라는 두발단속의 목적과 방식도 그 실효성에 큰 의문이지만 설령 그걸 인정하더라도 두발단속에 그토록이나 강한 억지력을 동원해야 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또 그 놈의 '계도'와 '반 강제로 머리를 밀어야 했던 학생의 감수성' 중 과연 어떤 것이 더 중요한 것일까.

그리고 '평소에 꽤나 착실하게 학교생활을 하던 녀석이 주말에 미용실을 가지 못한 죄로 머리가 죽 밀리고는 이후로 꽤나 교사들에게 삐딱한 시선을 갖게 된 케이스'처럼 두발단속의 원래 목적과 결과가 완벽히 주객전도 된 케이스에 이르러서는 어떠한 결론을 내면 좋을까.

하지만 여기에서 내가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두발단속'에 참여한 교사들의 입장이다. 학생들의 머리를 그렇게 죽 밀어버리며 그들은 속으로 어떤 생각을 했을까.

1. 비록 내가 이 학생에게 욕을 먹을 지언정, 이 아이를 옳은 길로 이끌기 위해 나는 녀석의 머리를 박박 밀어버린다.
2. 요놈 봐라 요놈, 내 그러니까 전부터 머리카락 규정대로 잘 자르고 다니라고 했지? 낄낄낄 요 놈아 시원하냐?
3. 뒷머리가 규정보다 0.5cm 기네? 그러니 고속도로 내야겠네

…등등등, 과연 그들은 어떤 생각으로 바리캉을 들고 사춘기 소년들의 머리카락에 접근했던 것일까. 그리고 만약 그 중에 3번에 가까운 이가 있다면, 그는 '두발단속의 목적과 실효성, 그리고 그 부작용'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고민을 했으며 어떤 논리로 바리깡을 쥔 손에 힘을 주게 되었을까.



2. 절대악 논쟁

대학교 시절,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알게 된 임 모는 꽤 흥미로운 사람이었다. 남들은 대학 내내, 아니 평생 한번 건드려 보지도 않을 것 같은 두꺼운 인문학 서적들을 기꺼이 탐독하는 소위 '골방철학자' 같은 이미지를 가진 이였다. (때문에 실제로 만나보았을 때는 의외로 평범한 외모에 오히려 조금 실망했을 정도로)

그는 종종 뜬금없는 철학적 질문(?)을 나에게 던지곤 했는데, 한번은 "절대악의 존재"에 대해 물었다. 그리고 나는 그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분명히 극단적인 악은 존재할 수 있겠지만, '절대악'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순수한 악은 존재할 수 없을 것 같다. 세상 대부분의 일은 양면성을 갖기 마련인데 그 양면 모두에게 절대적 악으로 규정지어지는 것 자체가 어려울 것 같고, 시대와 사상에 따라서 한때는 절대적 가치를 지니는 것이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 될 때도 있고 그 반대가 되기도 하는데 그 모두를 초월해 악으로 존재하는 것은 역시 어려우며, 극단적인 악인이나 악행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와의 관계에 따라 아주 작게나마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기도 하며, 하다못해 '반면교사'로서도 그 가치가 극소하게나마 존재할 수 있는데 과연 그 모든 관계와 조건에서 순수히 악으로 규정되는 절대악이 존재할 수 있을까?'

라는, 역시 그의 취향에 맞춘 다소 철학적인(?) 답변을 했다. 그 사이사이에 '살인-전쟁터에서의 전투, 왕조시대의 가치-민주주의 시대의 가치, 역사 속 끔찍한 악인으로 손꼽히는 이들에 대한 의외의 면모' 등등을 언급하면서. 사실 나는 그의 의견 역시도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아무래도 철학을 좋아하는 이답게 굉장히 다각적인 면에서 접근하는 사고를 감안하건데), 의외로 그 반대였다.

"저는 절대악의 존재를 믿습니다"

나는 혹시 종교적인 이유에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물었지만 그건 또 아니란다. 그래서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물었고, 그는 몇 가지의 '우리나라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일반적으로 부정적으로 언급되는 몇 가지 집단-종교, 정치 등의-'을 그 예로 들었다. 사실 깊이(?)에 개인적으로 조금 실망했는데, 굉장히 깊이 있는 어떤 철학적 의견을 기대했지만 그가 주장한 내용들은 사실상 일반론이었다. '그들은 이러이러한 잘못들을 저질렀으므로 절대악이다' 같은.

그가 내놓은 주장들은 물론 상식적인 차원에서의 부정평가였으므로 당연히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의 평소 언행과 사상에 비추어 보건데 "절대악"이라는 표현을 쓰기에는 조금 과한 면이 있는 것 같다고 언급했다. 단어의 정의를 어떻게 규정하는가 하는 토론의 기본 문제를 환기하고 싶기도 했고, 그가 '절대악'이라고 단언한 집단들이 종종 행하는 어떤 '보여주기식 선행'만 놓고 보아도 이미 절대악은 아니지 않는가 하는 의문도 부연해서.

그러자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그들이 행하는 어떤 보여주기식 선행도 결국에는 큰 거악을 실행하기 위한 준비 절차이므로 악행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나는 그에 대해서 "무슨 그들이 만화 속 악당도 아니고 정말 순수히 악행만을 위해 집단을 구성한 것이 아니지 않는가. 네가 말하는 '거악'조차도 그저 단순히 사상적, 종교적 입장차이일 수 있고, 또 그런 이유로 그들을 절대악으로 규정한다면 그들과 반대되는 입장에 있는 이들은 절대선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서 결국 그 지점부터는 옳고 그름을 논하기 어려운 어떤 사상논쟁으로 흐르게 되어 이야기가 공전하게 되었다.

뒤돌아보면 조금 아쉬운 흐름인데(차라리 '보여주기식 선행을 정말 악행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가' 같은 부분에서의 논쟁이 더 흥미로웠을것 같아서), 어쨌거나 어떤 이상론적 관점에서의 절대악이 아니라 실존하는 집단을 절대악이라고 규정짓고 이를 가는 그의 모습은 꽤 깊게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의외로 그런 이들이 매우 흔하다는 사실을 조금 더 나이 먹고 깨달았을 때는 더 충격이었다.



3. 책임의 문제

몇 년 전의 일인데, 신문 귀퉁이에 실린 한 칼럼 기사였던 것 같다. 평생을 교회의 전도사로서 활동하며 수백 명의 지인들과 행인들을 교인으로 만든 이의 이야기였다. 그랬던 그가, -보통의 케이스와는 정 반대로- 인생 말년에 접어들어서는 오히려 종교의 무의미함을 느끼고 자연인으로서의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단다. 당연히 종교 활동은 접었고, 현재의 삶에 만족한다는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다)

회의주의에 가까운 내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일생 말년의 그 모습은 보통의 나였다면 "그래, 그게 맞는거지" 하고 박수를 쳤을지도 모르지만, 문득 그가 평생동안 교회로 이끈 수백 명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이 미치자 그의 의견이 궁금한 한편으로 조금 화까지 났다.

'평생동안 옳다고 믿어온 어떤 행동을 인생 말년에 완벽하게 뒤집는' 모습 그 자체는 보통의 용기로는 하기 어려운-다들 인지부조화를 일으키기 마련이니까-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홀가분해진 듯한 그 모습은 역으로 생각해보면 그가 끌어들인 수백 명의 교인들에 대해서는 굴레를 씌운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물론 그가 아무리 인도했다고는 하나 결국 교인이 되는 것은 그 본인들의 선택이었을테니 책임을 무겁게 지우기는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만약 그것이 교회가 아니라 다단계나 어떤 잘못된 사상의 집단의 경우였다면? (물론 다단계는 보통 아예 엿 먹이려고 인도하는 것이니 조금 옳은 예가 아닐지 모르지만, 때로는 그 본인조차 너무나 완벽하게 넘어가서 정말 좋은 거라고 생각해서 지인들에게 추천하는 경우들도 있으니까)

본의 아니게, 혹은 한때는 큰 확신을 갖고 옳은 일이라 생각하며 행해왔던 일들이 뒤늦게 보았더니 그렇지 않았을 때, 그 지나온 일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이번에는 반대로 자신이 교회로 이끈 교인들을 찾아다니며 "교회 믿지 말아라" 하고 권유해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이 터무니 없다고 생각된다면 처음에 교회를 권유할 때 행한 권유는 터무니 '있는' 행위였을까.



4. 악인과 그들의 결과물


종종 인성과 능력이 정확히 비례하지 않는 경우들을 우리는 너무나 흔하게 본다. 가까운 예로 '능력은 좋은데 성격이나 인성은 개차반인 직장 동료나 지인'들의 모습 같은.

나는 그들이 다소 밉상이고 속으로 쌍욕을 할 지언정, 결과물이 썩 괜찮다면 그 능력의 결과물들에 대해서만큼은 인정을 하는 편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고방식은 연예인이나 운동선수, 더 나아가서는 정치인이나 역사 속 인물에 대해서도 보통 그렇게 평가하는 편인데, 이에 대해 질색팔색을 하는 주변 사람들을 꽤 많이 보았다.

"네? 이번에 XXX, 그 사고친거 몰라요? 완전 쓰레기잖아요!"

그러한 반응에 대해 나는 "아니 그건 아는데, 그 인성이 쓰레기더라도 이 노래 자체는 좋지 않아요?" 하고 되물었는데, 그런 나의 모습에 더 이해가 어렵다며 정색하는 모습에서 당혹감을 느끼는 것이다.

물론 음악이나 문학처럼, 어느 정도 취향의 영역에 있는 것들은 그 제작자 자체가 싫어졌다면 결과물도 같이 싫어질 수 있다는 심정적인 부분이야 충분히 이해하지만, 더 나아가

"어떻게 쓰레기가 만든게 쓰레기가 아닐 수 있어요?" 하는 주장에 대해서는 고개가 갸우뚱 해지는 것이다.

사실 여기서도 그 '쓰레기'의 기준이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이지만, 어쨌거나 역사 속 인물들의 숨겨진 추한 모습(소아성애 논란이 있는 간디부터, 우리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작품들을 남겼지만 사생활에서는 불륜이나 각종 범죄를 저지른 수많은 예술가들, 우리의 일상을 위대하게 만든 수많은 과학자, 철학자들의 너무나 많은 부끄러운 이야기들에 이르기까지)을 감안해보면

"어떻게 쓰레기가 만든게 쓰레기가 아닐 수 있어요?" 라는 주장은 간단히 반박이 가능하다고 생각이 되는 것이다.

하다못해 "(쓰레기로 욕을 먹는 이들의)사고치기 전 인기와 작품에 대한 평가(순위 등)"를 감안해보면 역시 "쓰레기가 만들어서 쓰레기인데 왜 예전에는 그렇게 인기를 끌었대요?" 하고 되묻고 싶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다만 거기까지 생각하노라면 또 '제품의 문제가 아닌, 기업 그 자체나 제품 외적인 문제로 인해 발생하는 불매운동' 같은 개념으로 접근한다면, 그리고 그것에 대해 어떠한 '사회정의' 같은 개념을 연결지어 생각한다면 그 질색팔색의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기는 하다. 단지, 그 질색팔색의 범위가 너무나 주관적이며 자기편의적인 것 같다는 인상을 받을 뿐이다.



5. '옳음'에 대한 이야기

여지껏 인터넷에서 본, 가장 공감하면서도 역시 그 이행에는 어려움을 느끼는 댓글 중의 하나가 이거다.

"사람이 아무리 자기가 옳다는 확신을 가져도, 때로는 자기가 틀린 것이 아닌가 생각도 좀 해보고 남의 말도 진지하게 들어보고 해야 된다. 나이를 먹을 수록 더욱 더"

사실 나는 거의 모든 인간사 논쟁과 세상의 갈등이 저 문장들로 간단히 정리된다고 본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 라는 말처럼(딱 맞는 비유는 아니지만) 그 어떤 주장이라도, 억지나 의도적인 왜곡이 아닌 한, 진실되게 목소리 높이는 주장이라면 분명히 그 나름대로 최소한의 당위는 갖고 있다고 본다.

누군가들의 주장과 의견이 정말 터무니 없고 미친 소리 같아도, 내 의견을 잠시만 내려놓고 곰곰히 듣고 있다보면 분명 그들이 그런 주장을 하는 데에는 최소한 '그렇게 된 이유'라도 존재하기 마련인 것이다. (뭐, 그러한 당위가 결국 목소리와 행동으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변질되는 경우도 많지만)

게다가 '스스로가 남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할수록', '우리가 저들보다 정의롭다고 생각할수록', '내 주장이 그들의 주장보다 더 가치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할수록' 정말 그것이 그러한가에 대한 반문은 더욱 더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맹목(盲目)의 우에 빠져 헛소리를 진지하게 떠드는 나의 모습만큼 추한 것도 드무니까. 마치 이 글처럼 말이다.

가면 : 3화 소설

아라를 만나기 두 달 전 즈음, 나는 사실 가영에게 이별을 이야기 했었다.

"우리 그만하자"
"뭘?"
"그만 만나자"

모처럼 집 근처에 생긴 파스타 맛집에서 점심을 먹고, 동네 한 바퀴를 함께 산책한 직후에 내가 한참을 주억거리다 어렵게 꺼낸 난데없는 이별 통보. 가영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왜?" 하고 물었다.

글쎄. 뭐라고 이유를 말하면 좋을까.

가영이 너가 나를 안 좋아하는 것 같아서?
우리 집안 형편상, 멀리 생각해보아도 아무래도 결혼은 틀린 것 같아서?
아직까지도 주변 사람들에게 숨기는 연애가 힘들어서?
이제 이런 힘든 연애 관두고 그냥 나를 좋아해주는 아라와 만나고 싶어서?

한참이나 대답을 망설이던 나는 "너 나 안 좋아하잖아" 하면서 힘없이 웃었다. 무어라 잔뜩 퍼부을 준비를 하는 듯 하던 가영은 그 말에 할 말을 잃은 듯 그저 입을 몇 번이나 벌렸다가 닫으면서 "참 나" 하면서 할 말을 열심히 찾는 듯 했다.

솔직히 힘든 연애였다. 애정의 농도가 다르고 표현의 강도차이가 현격했으며 내 스스로 보아도 그녀가 나와 진지하게 미래를 꿈꾸는 것 같다고는 생각되지 않은 그런 연애. 혼자 애쓰고 혼자 고민하고 혼자 서운해하는 그런 외톨이의 연애.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정말로 힘이 빠졌다. 그리고 내 스스로가 불쌍해졌다.

"그래서 헤어지자는거야?"

나의 긴 한숨은 긍정의 답을 대신했다.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정말 최선을 다했던 내 자신에 대한 배려였다. 이제는 미련을 버리고, 나를 조금 더 아껴주기로 했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얼마를 그렇게나 바닥만 보고 있었을까.

'마지막이구나'

하는 생각에, 예쁜 가영이 얼굴이나 마지막으로 머릿 속에 새겨두고자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가영이는 두 눈 가득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었다.







가면 : 3화







아라와 벌거벗고 자던 것이 걸린 그 순간, 나는 츄리닝 바람에 옷도 간신히 걸친 채로 밖으로 나갔다. 가영이는 큰 길을 향해 저 앞에서 울면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가영아"

하고 부른 순간 돌아본 그녀의 모습은, 몇달 전 그 모습과 참 똑같았다. 두 눈 가득 눈물이 차오르다 못해 줄줄 흐르는 그 모습. 무어라 말을 하면 좋을까. 이번에는 내가 할 말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러자 가영이 말했다.

"개새끼야"

그리고 가영이 눈물을 닦고 똑바로 말했다.

"왜 그랬어 왜!"

차라리 거기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나는 변명을 했다. 그것도 최악의 변명을.

"너 나랑 마지막으로 잔 게 언제인 줄 알아? 아, 지난 달에 잔거 빼고. 그 이전에 말이야. 기억 나? 난 기억도 안 나."
"뭐?"
"나도 기억 안 나. 너 나 안 좋아하잖아. 나도 힘들었어, 힘들었다구. 나도 사람인데, 혼자만 하는 연애 같은거, 감당하기 힘들어. 그래, 나 쓰레기 맞고 인정하는데, 너도 잘한거 없어. 나 최선을 다했다고 너한테. 근데 너는 아니었잖아. 저번에 내가 먼저 처음으로 헤어지자고 했을 때, 니가 수백번도 넘게 헤어지자고 하던거 매번 붙들고 빌던 내가 처음으로 너한테 헤어지자고 했을 때, 너 그때 뭐랬니. 이제는 너가 잘한다고 했잖아. 근데 너 하나도 안 바뀌었어. 나 너무 힘들었다고"
"그래서 바람을 피운거야? 너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해?"

그래, 사실 그 타이밍에 할 말은 아니었지. 하지만 나는 당혹스러운 나머지 그렇게 쓰레기 같은 자기합리화를 시도했고, 가영은 어처구니 없어했다.

"변명이라기보다…"

그때 손에 들고 나온 휴대폰에서 아라의 전화가 울렸다. 그것을 본 가영은 "약!" 하고 비명과도 같은 고함을 지르면서 내 손에서 휴대폰을 낚아채서 바닥에 던져 깨버렸다.

"야…"
"뭐!"

박살이 난 휴대폰을 망연자실 바라보는 찰나, 저쪽에서 아라가 힘없이 걸어왔다. 나와 가영 모두가 이 막장 드라마와도 같은 상황에 얼굴을 쓸어내리는 순간, 아라는 처음으로 가영에게 말을 걸었다.

"가영씨, 나랑 잠깐 이야기 좀 해요"

당황스러웠다. 그래, 가영이야 뭐 그렇다고 쳐도, 아라는 날 뒤도 안 보고 버릴 줄 알았다. 그렇잖는가. 자기는 세컨드였던 사실을 알게 된 그녀가 무슨 할 말이… 아. 혹시 가영에게 나 만나지 말라는 말을 하려는건가.

"너는 무슨 말을 또 하려고? 니가 왜 끼어드는데"

그러자 아라가 세상 슬픈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 나는 더이상 말을 걸 수 없었다. 그러나 가영도 아라와 말을 섞고 싶은 기분은 당연히 아니었겠지.

"하"

가영은 헛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젓고는 큰 길 직전의 골목 한 켠에 세워둔 자신의 차를 향해 걸어갔다. 나와 아라 모두 가영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곧 차에 올라 시동을 건 그녀는 무서운 눈으로 아라와 나를 쏘아보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넌 꺼지고, 너 여기 타. 이야기 좀 해"

나에게 타라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아라는 "가영씨, 나도 할 말이 있어서 그래요. 잠깐 나랑 이야기 좀 해요" 하고 가영에게 부탁했다. 가영은 "넌 다른 남자 뺏은 더러운 년 주제에 나랑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그러는건데? 미친 년이 진짜. 야, 너 안 타?" 하고 나에게 말했다.

내가 아라를 한번 흘낏 보고 차를 향해 걸어가자 이번에는 아라가 내 팔을 붙잡았다.

"너 저 차 타면 나랑 끝이야"

선택의 기로. 아라도 가영도 나를 쳐다보았다. 보통, 이런 경우가 있나?




결론적으로 말해 나는 가영의 차를 타지 않았다. 최악의 순간에서 떠오른 이기적인 생각.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 양다리를 걸친 이상, 나는 당연히 그 둘 모두를 잃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뜻밖에 그녀들은 나를 사이에 두고 경쟁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주어진 기회에서 나는 조금 더 실리적인 선택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간단했다. 가영의 성격상, 내가 바람 피운 것을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에야 아라에게만큼은 뺏기기 싫어서 나와 이야기를 하자고 했지만, 아마 감정이 진정되면 나를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라는 조금 다를 것이라 생각했다. 지난 반 년간 붙어 지내면서, 아라는 나에게 줄곧 말해왔다. 자기가 만났던 남자 중에 내가 최고라고. 만나자마자 헤어지자고 했던 놈이 뭐가 좋냐고 자조적으로 미안함을 내비쳤으나 아라는 그저 좋다고 했다. 뭐, 다 떠나서 만나서 지난 6개월간 반 동거하며 지낸 상황이니 육체적으로든 감정적으로든 가장 뜨거울 때 아니겠는가. 한번 정도는 용서 받을 수도 있을거라는 철저히 확률적인 생각으로 아라의 곁에 섰다.

"… …"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가영에게 너무나도 큰 상처였으리라. 근 3년 가까이, 강아지처럼 자신만을 철저히 바라 보아주고 참아주고 좋아 어쩔 줄을 몰라하던 남친이 바람을 피운 것도 모자라, '당연히' 자신의 차에 탈 줄 알았던 그가 다른 여자 곁에서 겸언쩍은 표정으로 자신에게 선을 긋는다니.

가영은 끝내 울음을 다시 한번 터뜨리며 차를 몰고 큰 길로 나갔고, 그 와중에 나는 또 '저러다가 사고라도 나면' 하며 그녀를 걱정했다. 아라는 아무 말도 없이 서있다가 내 손을 잡았다.

"이야기 좀 해"




방으로 돌아와 나는 아라에게 지난 3년 간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아라는 묵묵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너 저번에, 아니 처음에. 나랑 잘 때 전화와서 이력서 봐준다고 했던 여자애. 걔가 가영이었지?"
"어"

아라는 아무 말 없이 다가와 침대에 걸터앉아 나에게 말했다.

"고마워"

고맙다니 뭐가. 그저 내 품에 기대는 아라가 고마웠다. 그리고 가영이에 대한 미안함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다음 날 저녁, 약간의 야근으로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보니 아라는 이미 편의점 출근을 하고 난 이후였다. 나는 멍하니 컴퓨터를 켰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너무 혼란스럽고 피곤했다. 양다리는 끝났다. 나는 아라를 골랐고, 나는 청춘의 순정을 바쳤던 가영을 그렇게 놓아버렸다. 허무했다.

'흐'

참 징하게 힘들었던 연애였다. 아니 '힘들었다'고 하기에는 사실 너무 즐거웠지만 바로 그렇게 너무 즐거웠기에 힘들었다. 나는 가영이 곁에만 있어도 좋았고, 가영이가 한번 웃어주면 너무 행복했다. 내가 그 어떤 맛있는 것을 먹는 것보다 가영이가 맛있게 먹는게 좋았고, 그녀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했다. 그렇게 그저 마냥 걔가 애틋하게 좋았다.

진심을 준 상대였다.

바로 그래서 더 힘들었다. 가영이가 화를 내면 나는 사과하기 바빴고, 설령 억울하고 서운한게 있어도 내가 한번 더 참고 혼자 스트레스 받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가영이를 잃는게 두려웠고, 그녀에게서 버려질까봐 걱정됐다.

헤어지자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나에 대한 마음이 깊지 않았던, 그리고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확실히 그리 미덥지 않은 남자였던 나는 그녀에게 '아쉬운' 남자였을테니.

그리고 매번 나는 매달렸다. 앞으로 잘하겠다, 노력하겠다, 내 앞날에 대한 비전을 설명하고, 지나간 시간들, 내가 정말 최선을 다해서 그녀를 즐겁게 해주고자 했던 시간들을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정으로 달랬고 울음으로 매달렸다. 자존심도 뭐도 없었다. 그저 어린 아이처럼 그녀의 곁에 있고 싶었다. 정말 최선을 다했다.

어쩌면 내가 그리 많은 연애를 해보지 못했기에 그랬던 것인지도 모른다. 호구의 연애, 바보의 연애. 밀당은 커녕 오로지 퍼주기 바빴던 연애. 물론 어느 순간 그러다가 나를 돌아보면 참으로 허무했던 그런 연애. 혼자만의 연애. 참으로 지독한 마음 고생을 계속했던 연애.

그랬던 연애가 그렇게 끝이 났다. 사실 아라와 본격적으로 양다리를 걸치기로 한 순간 어쩌면 예정된 결말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라도 마찬가지였지만, 가영과도 결코 좋은 끝이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당연히 나도 알았으니까.

"후우"

피곤했다. 습관처럼 로그인을 하고, 메일함에 들어갔다. 그러자 놀랍게도 가영에게 메일이 와 있었다. 무슨 내용일까. 가슴을 두근거리며 열람했다.




지금 어떤 말을 꺼내면 좋을지,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사실 나는 모르겠어.
그저 끝없는 악몽을 꾸는 듯한 어둠 속에서 끔찍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뿐이야.
어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 속에서 너를 떠나 집으로 돌아와 혼자 미친사람처럼 뜬 눈으로 이렇게 하루를 보냈어...

그리고 문득 깜빡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떴는데, 마치 그 모든 일들이 꿈이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너에게 물어보고 싶었어.
이거 정말 꿈 아니냐고.

너무 늦은 것이 아니냐고 말해도 할 말은 없지만, 이제서야 나는 너를 바라보아. 진심으로.
너 어제 "나랑 언제 잠 잤는지 기억이나 나느냐"고 물었지? 그래.
정말 그랬더라. 내가 너를 너무... 외롭게 만들었던 것 같아.
알아. 그것 뿐만이 아니라, 내가 너를 너무 가혹하게 몰아붙였던 것도. 마음적으로든 뭐든.
너를 인정해주지 않았던 많은 기억들... 그 기억들이 너무 후회스러워.

다만 변명을 해보자면, 나는 너가 지금의 너보다 더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을거라고 믿어서 그랬어.
변명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진심이야.

그리고 나는 이 어둠의 터널이 어쩌면 우리의 마지막이 아닐 수도 있다고 믿어.
너를 보고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지만 무서워. 니가 걔를 데리고 나타나는 것은 아닐지.
그럴 생각이라면 그냥 나타나지 않아도 좋아. 이 편지를 지워도 돼.
...아직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많아.

너와 꼭 마무리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다. 이번 주말에라도....




인터넷 창을 끄고 나는 끅끅 거리며 울었다. 가영이가 어떤 마음으로 이 메일을 썼을지를 생각하자 내 마음까지 찢어질 것만 같았다. 미친 놈, 머저리. 정신나간 새끼. 나를 저주하고 또 저주했다.

그리고 눈물을 닦고는 일요일 오후 2시에 만나자고 답장을 보내 약속을 잡았다. 이번 주는 마침 아라가 일하는 편의점의 여자애 하나가 관두는 바람에 주말에도 풀타임으로 근무하기로 한 것이라 시간도 딱 좋았다.

일요일 2시. 마음에 다시 한번 새겨놓고는, 나는 방청소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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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 : 2화 소설

"그거 에픽 템 먹을 생각 아니라면 굳이 거기에 시간 버릴 필요 없어요"
"그쵸? 그냥 제껴도 되죠? 오케이, 오늘 걍 그럼 바로 렙업만 쭉쭉 달린다"

그때 그 시절, 정모의 성지 '민토'에서 우리는 곧잘 정모를 가졌었다.

"페가님 요새 새벽에도 계속 접속해 계시던데"
"저 휴학했걸랑요. 아 근데 모드님 좀 늦으시네, 3시까지 모이기로 해놓고선 지금 거의 4시가 다 되어가는데"
"우리 여기 몇 시까지 예약해놨어요?"
"5시요"

흔한 온라인 게임 동호회의 정모. 키 작고 배 나온, 혹은 키만 멀대같이 큰 멸치, 혹은 키 작은 멸치, 혹은 거북목의 체크남방 입은 돼지들의 그렇고 그런 구질구질한 모임. 그러나 오늘은 묘한 긴장감과 함께 다들 어딘가 '조금은' 멋을 부린 듯한 느낌이 난다. 안경 대신 렌즈를 낀 '페가수스' 상철, 새 유니클로 남방을 사 입은-그러나 XL 스티커를 깜박하고 떼지 않아 조금 망신을 산- 'k86huns' 재훈, 세미정장을 걸친 '랜드로어' 동원, 닥터마틴으로 키를 2cm 키우고 미묘하게 더운 날씨에 가죽재킷을 걸친 나.

"누가 모드님한테 연락 좀 해보세요"

그렇다. 오늘은 길드의 유일한 여자 멤버 '아라모드'가 무려 대구에서 상경해서 처음으로 정모에 참석하는 날. 길드장이었던 나의 지시에 옳다꾸나 동원이 서둘러 그녀에게 전화를 건다. 영철이 재훈에게 "님도 아라모드님 연락처 알아요?" 하고 속삭인다. 동원의 전화기 너머로 전화 발신음만이 계속 울리는 가운데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

"쨘! 늦어서 죄송해요. 버스를 놓치는 바람에 다음 버스 타느라고 조금 늦었어요"

대구 사투리가 살짝 섞인, 애교 넘치는 목소리의 긴 생머리 금발 엘프 여신은 과연 '아라모드'라는 우아한 닉네임에 걸맞는 외모였다. 새하얀 피부에 보조개 쏙쏙 들어가는 얼굴, 큰 눈에 러블리한 목소리. 다들 "우아아아아!" 하는 함성과 함께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연창이 곧바로 터져나온다.



…나의 회고에, 아라는 웃었다.

"영호님 기억에서 제가 너무 미화된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진짜 그때 최고였어요. 솔직히 편견 있잖아요. '이쁜 여자가 게임을 왜 해? 그 시간에 밖에 나가서 잘생긴 남자들이랑 놀지' 같은. 근데 제 그 고정관념을 처음으로 깬 게 아라님이었어요"

과거 이야기는 우리 둘의 관계를 매우 빠르게 진전시켜주는 효과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그 다음 말에 나는 어떤 '확신'과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근데 솔직히 당시에 저도 기대 하나도 안 했거든요. 게임동호회 남자들 다 뻔하니까. 근데 영호님 처음 보고 조금 두근두근했어요. 맨날 게임 속에서만, 그리고 게시판에서 글로만 봤던 분이었으니까. 근데 생각 이상으로 좀 괜찮았던? 그리고 더 놀랬던 건, 지난 주에 봤을 때, 엄청 시간이 자났는데도 전이랑 비교해서 하나도 안 변한거에요. 아니 오히려 더 젊어진 느낌?"

그도 그럴 것이 그 몇 년 사이 가영을 통해 나름대로 가꾸어진 나였으니까.

"하하, 부끄럽네요"

지난 주, 아라와의 첫 데이트 이후 근 일주일만에 나는 또 그녀를 만났다. 가영에게는 "승준이 좀 만나고 올게" 하고 적당히 둘러대고 말이다. 두번째 데이트 역시 영화, 밥, 카페의 코스였다.

"저 공포영화 좋아하는데"
"아 그래요? 마침 잘 됐네요"

정확히 말하자면 공포보다는 호러SF 영화였다. 하지만 깜짝깜짝 놀라는 장면들이 있었고, 나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덥썩 잡았다. 아니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게까지 놀랄 장면도 아니었지만 일부러 잡았다. 보드라운 손. 여자친구가 아닌 다른 여자의 손. 5년 전 또래들 사이에서 '엘프' 칭호를 가졌던 여자의 손.

솔직히 말해 그 순간부터는 영화에 전혀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저 온 신경이 아라의 손에 다 가있었다. 아라는 내 손을 굳이 뿌리치지 않았다. 영화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 우리는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영화 재밌었죠?"

나의 어색한 질문에 아라는 대답 대신 묘한 미소를 짓더니, 영화관을 나와서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왜 내 손 계속 잡고 있었어요?"

아무리 내가 찌질이라고 해도, 이미 가영과의 오랜 연애로 이럴 땐 어떤 말을 해야하는지에 대해 통달한 나였다. 구태여 어설픈 변명 따위를 할 이유가 없었다.

"좋아해서요"

아라는 빙긋 웃었다. 솔직히 말해 첫 데이트 때 어느 정도 간을 다 봤다고 생각했다. 이만하면 간이 맞는다. 아니 더 졸이면 오히려 짤 판이다. 그녀가 거절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 만나요. 오늘부터"

조금은 낯 간지러운 말. 아라는 영화관 옆 골목에서 담배를 입에 물더니 "나 담배 피워도 괜찮죠?" 하고 묻는다. 아라가 담배를 피우는지는 몰랐었다.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요"

아라는 담배연기를 길게 뿜더니 말했다.

"좋아요. 솔직히 나 지금 너무너무 좋아요. 근데 우리 이제 말 놓는걸로?"
"그래"

나 역시 뛸듯이 좋았다. 하지만 역시 첫 데이트와 마찬가지로 나는 머릿 속에서 가영이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은 어쨌든 기뻤다.






가면 : 2화





"그래서 둘이 뭐했어?"

전화기 너머 가영의 질문에 나는 적당히 둘러댔다.

"간만에 만나서 둘이 고기 구워 먹었지. 아 근데 승준이 그 새끼 요즘 영 컨디션이 별로더라고"
"왜?"
"계약직 끝나고 이제 정규직 전환시켜준다고, 분명히 지난 달까지 그렇게 말해놓고선 이번 달에 갑자기 그게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거야. 부장 새끼가. 그래서 빡돈거지"
"와 그 회사 미쳤네. 근데 그런 회사 많대 요즘에"
"그러게. 말로만 들었는데 진짜로 있더라고 그런 회사"

사실은 며칠 전에 전화로 주고 받은 이야기. 그게 어느새 승준과의 만남에서 있었던 일로 탈바꿈 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그리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고, 가영은 곧 "나 네일 했어. 사진 봐봐" 하면서 카톡으로 이미지를 보냈다.

"오 이쁘다"

하지만 가영의 긴 손가락과 화려한 네일아트를 보면서도, 나는 수수한 아라의 그 보드라웠던 손을 떠올렸다.

"뭐야 반응이 시큰둥한데? 별로야?"

리액션의 크기에도 민감한 가영. 나는 서둘러 "아니, 이쁘다고. 근데 내가 뭐 네일이 이쁜지 어떤지 아나" 하면서 둘러댄다. 가영은 "확!" 하고 군기를 또 잡더니 "내일 우리 뭐해?"하고 묻는다. 뭘하면 좋을까.

"영화볼까"

그러나 의외로 영화에 대해서 별 불만이 없다.

"뭐 볼건데"
"공포영화"

공포영화라는 말에 가영이 놀랜다.

"왠 공포영화? 나 공포영화 싫은데"
"아냐, 재밌어. 아니 재밌대"
"알았어"

순순히 오케이 하는 가영. 나는 아라와 함께 본 영화를 다시 보기로 했다. 기억력이 그리 좋지 않은 나로서는 그렇게 혼란을 줄이는 것이 그나마의 '발각될 가능성'을 줄이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아 재미 하나도 없잖아. 무섭기만 해. 기분만 찝찝해. 공포영화 좋아하는 변태들이 제일 싫어"
"그러게"

나는 시큰둥하게 가영의 말에 맞장구쳤다. 영화를 보고 나오자 무엇을 하기에도 애매한 오후 4시 반. 무엇을 하면 좋을까.

"운동하러 가자"
"응? 운동? 니가 왠일로"

당시 '운동'은 가영이 나에게 섹스를 먼저 제안할 때의 은어였다. 계산해보니 700일 이래로 근 석 달만의 제안이었다.

"가자. 오늘 날씨 덥잖아. 시원한 에어컨 밑에서 쉬자"
"좋아"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가영과의 섹스가 뜸해졌었다. 물론 언제나 섹스에 굶주렸던 나는 항상 그녀와의 관계를 원했지만 가영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섹스를 기피했었고, 언젠가 내가 정색을 했던 날 그녀는 더욱 더 그 이상의 정색을 해왔다. 사실 입장을 바꿔놓고 보면 이해가 안 가는 바도 아니었다.

"아…"

나는 조루였다. 삽입으로 3분 넘기는 것이 어려웠다. 그러다보니 초조한 마음에 오히려 애무도 더 제대로 할 줄을 몰랐다. 몸만 달구어 놓고 본 게임에서 못하면 더 힘들어진다는 생각에서였다. 더 오래 하려고 머릿 속에서 천천히 숫자를 세보기도 했고, 아예 실제 허리 흔드는 속도를 줄이기도 해봤고 체위를 자주 바꾸기도 해봤지만 역시나 그리 오래 가지 않아 몰려오는 쾌감에 금방 사정을 했고 그렇게 어색한 타이밍, 아쉬운 순간에 끝난 이상 나는 묘하게 그녀 앞에서 작아지곤 했다.

"가영아"
"알았어, 어휴"

그래도 아직 팔팔하던 시절이라 잠시 쉬었다가 다시 시동이 걸리면 2차전을 뛰기도 했지만 어느새 가영이와의 만남도 3년 차에 접어드는 상황이었던만큼 재시동이 예전같지 않았다.

"…그냥 됐고, 영화나 보자. 아까 사온 과일 좀 씻어줘"
"어"

대실 시간 3~4시간 중에 애무와 본 게임, 뒷처리까지 다 합해 30분도 안되는 짧디 짧은 해피타임이 지나가고 우리는 정말로 시원한 에어컨 바람 아래에서 영화로 시간을 떼웠다. 가방 속에서 울리는 아라의 전화를 무음으로 바꿔놓은 채로.




"자기야, 혹시 강아지 키울 생각 없어?"

죽었다 깨나도 나에게 애칭 같은 것을 사용한 적이 없는 가영과 달리, 사귀기로 한 직후부터 나를 '자기'로 부르는 아라. 그녀의 권유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개는 귀찮잖아. 그리고 원룸에서 어떻게 개를 키워. 못해"

하지만 아라는 몇 번이고 권했다.

"근데 진짜 이런 개 없다니깐? 아는 오빠가 키우다가 갑자기 유학가게 되어서 분양하게 된 강아지인데, 너무 똑똑하고 절대 안 짖어. 그리고 똥오줌도 너무 잘 가리고, 막 귀찮게 조르지도 않아. 이런 개는 정말 없어"
"아 참"

…그렇게 딱 2주일만 시험삼아 길러보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우리 '반디'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세상에 이보다 더 똑똑하고 착한 개가 있을까. 구르라면 구르고 춤추라면 춤추고, 이건 정말 천재견이었다. "리모콘" 하면 리모콘을 입에 물고 오는 이 사랑스러운 요크셔에게 나는 흠뻑 빠졌다. 가영이도 마찬가지였다.

"얘 진짜 똑똑하다. 근데 어디서 난거야?"
"어? 아아, 그거. 예전에 알고 지내던 여자애가 있는데, 걔가 아는 오빠가 유학가게 됐다고, 분양할 곳 찾다가…"
"아는 여자애? 누구?"
"지민이라고 있어"
"지민이?"
"거 왜 예전에 내가 재훈이가 뭐 물어보다가 싸대기 맞고 친해진 애 얘기 한번 했잖아"
"아아, 그 도끼병? 근데 니가 걔를 어떻게 알아?"
"아 그냥 재훈이 통해서 분양할 사람 찾다가 나한테까지 순번이 온거지"
"그래. 나는 또 아는 여자애라고 하길래 뭔 소린가 했지. 여튼 배변패드 사왔어"
"올, 고마워"

가영이는 처음에 잠깐 의심을 했지만 순간적으로 적당히 잘 둘러낸 덕분에 더이상은 의심하지 않았다. 과연 여자의 촉. 어설프게 '아는 여자애' 라는 단어 하나에 갑자기 깊게 파고 든다. 이후 나는 괜히 긁어 부스럼이 될 것 같은 이야기는 더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



며칠 뒤, 주말이 되자 아라가 우리 집에 반디를 보러 온다며 강아지 간식 이만큼과 함께 찾아왔다.

"자기야, 우리 둘둘이건데, 반디 주려고 내가 이만큼 가져왔어"
"오, 넘 좋다"

아라는 내 방을 휘 둘러보다가 "방은 작은데 그래도 디게 아늑하다. 우리 집은 투룸이라서 집은 큰데, 룸메가 넘 집을 엉망진창으로 써서 오히려 생활공간은 더 좁은 느낌이야" 하면서 벌러덩 침대에 누웠다.

"아라야"
"응?"

사귀기로 한 지 9일째 되던 날. 나는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개었다. 그리고 로맨틱하다기보다는 에로틱한 키스를 이어나갔다. 내가 찌질했던 어떤 시절, 혼자 속으로만 짝사랑했던 여자. 그런 여자와 몇 년 뒤 인연이 되어 나누는 야한 키스. 그것은 무서울 정도의 흥분을 불러왔지만 마음 속 한 켠에서 큰 불안함과 미안함을 유발했다. 조루에 대한 걱정.

"왜 안 서?"

너무 그 불안이 컸던 탓이었을까. 아니면 가영에 대한 미안함 탓이었을까. 나의 성기는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고, 당황했을 아라는 나에게 웃으며 물었다. 뭐랄까…불안과 의심의 눈빛 같은 것이었다면 어쩌면 더 위축됐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라는 여유있게 나의 팬티를 벗기며 적극적으로 다가왔다. 그제서야 제대로 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하아…"

환희의 순간, 나는 묘한 뿌듯함을 느꼈다. 어째서였을까. 채 3분을 넘기기 힘들었던 가영과 달랐다. 아라와 할 때는 20분이고 30분이고 달릴 수 있었다. 그리고도 곧바로 부활하는 나의 쥬니어. 그래, 이게 섹스지. 이거였지. 근 십여년 전의 첫 경험 때도 그랬다. 그래, 나는 원래 조루가 아니었다. 심인성 조루. 무언가의 압박, 스트레스, 관계에서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상하관계에 의한 위축. 그 모든 것이 나의 멘탈을 흔들었고, 나는 그렇게 작아졌던 것이다.

"사랑해 영호야"

흥분이 채 식기 전, 내 품에 안겨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아라. 그녀는 가영과 달랐다.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나에게 은근한 애정을 눈빛에서부터 발산하고 있었고, 계속 나에게 멋지다, 좋다, 잘한다 등의 칭찬을 입에 붙이고 살았다. 표현하는 사랑.

"나도 우리 애기 사랑해"

닭살 돋는 말. 가영과의 관계에서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말. 하지만 어렵지 않았다.

"응"
"근데 나 어떻게 하지? 나 또 흥분했는데?"
"또? 너 진짜 변강쇠 아니니"

수컷으로서 그보다 기분 좋은 칭찬이 또 있을까. 침대에서 네 번의 사랑을 나누고, 더워서 냉장고를 연 순간 나는 책상 한 켠에 놓아둔 무음의 내 휴대폰을 확인했다. 부재 중 전화 네 통. 가영이었다. 사실 나는 아라가 강아지 간식만 주고 바로 갈 줄 알고, 따로 가영에 대한 변명거리를 준비해두지 않았었다. 즉, 이러다가 가영이 혹시라도 우리 집에 들이닥치기라도 한다면? 게다가 첫 전화는 무려 45분 전에 왔었다. 혹시 모른다. 그녀가 지금 우리 집으로 오는 중인지도. 그렇게 공포에 사로잡힌 나는 참 미련하게도, 그 자리에서 전화를 받았다.

"어, 가영아"

다른 여자의 이름에 이번에는 아라의 귀가 쫑긋하는 것이 느껴진다. 담배 연기를 내뿜는 소리가 분명히 아까에 비해 작다.

"어어, 뭐 좀 하느라고. 왜"

가영은 무척이나 짜증이 난 목소리였지만, 게임 곧 "나 이력서 수정한 것 좀 도와줘" 하며 부탁을 해온다.

"나 지금 좀 바쁜데, 일단 이메일로 보내놔. 어어. 어어"

전화를 끊었지만 아라의 눈빛이 분명히 조금 전과 다르다.

"누구?"

나는 이번에는 아라에게 또 거짓말을 한다.

"아, 가영이라고 아는 여자애있는데, 이번에 취업준비하면서 이력서 좀 봐달라고 해서"
"그걸 왜 자기가 봐주는데?"
"그냥 그나마 내가 대기업 계열사에서라도 일하고 있으니깐"

아라는 무언가 뭐라 말을 더 하려고 했지만 그저 "아무 여자한테나 다 잘해주지 마" 하고 한 마디 하고 끝이었다. 나는 알겠노라며 침대를 향해 달려갔다.

"우리 한판 더 하자!"



섹스에 대해 자신감을 찾은 나는 곧 가영에게도 그 '내공'을 시험하고 싶었다. 섹스는 멘탈스포츠, 라는 명언을 새삼 되새긴 나는 그동안 잃은 자존심을 회복하고 싶었다. 물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심적인 이유라면 분명히 이번 일을 계기로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영화 틀어봐"

…결과는 절반의 성공이었다. 분명 효과가 있었다. 예전에 가영이와의 플레이 타임이 보통 순수 5분 넘기가 어려웠다면 이번에는 10분 정도를 한 느낌이었다. 뉴 레코드. 그러나 가영을 충분히 만족(?)시키기에는 다소 부족한 플레이 타임이었던 것 같다. 단지 가영도 "오늘 평소랑은 좀 다르네?" 하고 은근하게 물어볼 따름이었다.



"아라야"
"응?"

그 즈음해서 나는 중심을 찾고 싶었다. 연애 3년 차의 여자친구, 가영에 대한 의리와 순정을 떠올렸다. 순간의 탈선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 아라는 분명히 매력적인 여자고, 솔직히 객관적으로 보아도 저런 '미소녀'가 나같은 찌질이를 좋아해준다는 자체가 뭔가 인생에 한두번 찾아올까 말까한 어떤 '기회'라는 생각은 했다. 또 최근들어 왠지 묘하게 관계가 좋아지긴 했지만 그 전까지 나를 정말 수없이 비참하게 만들었던 가영에 대한 서운함이 여기까지 상황을 몰고 온 것이라는 변명도 스스로에게 해보았다. 하지만 어쨌거나 더이상은 안된다고 생각했다.

"할 말이 있어"
"뭔데?"

어느 평일의 밤. 가영이 생리라며 피곤하다고 일찍 자겠다던 그 날 밤, 나는 집에 아라를 불러 질펀하게 섹스를 했다. '안전한 날'이라는 말에 더없이 짜릿한 경험까지 해가며. 사실 정말로 정리를 하려고 했다면 그 전에 했어야 할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한심한, 정말 더럽고 비열한 인간이었다.

"우리 그만 만날까"

아마 아라에게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말이었을게다.

"왜"

나는 내 진실된 속 마음과 구라를 적당히 섞어서 말했다. 사실 바로 얼마 전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그래서 그 과정에서 아라 너를 만난 것인데 아직 마음 속에서 그녀가 잊혀지지 않는다. 그래서 너를 더이상 만날 수 없을 것 같다, 라는 개소리를.

"그래"

아라는 슥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입었다. 굴욕적이었을 것이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모든 것을 준 남자에게 버려지는 순간의 고통.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혹시 마음 속에서 걔가 정리가 되면, 연락해"

그렇게 문을 나섰다. 아마 문을 나서면서 울었을 것이다. 나도 울었다. 가영이 그 년이 뭐가 좋다고. 맨날 나를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인데. 병신. 그냥 갈아타면 되는데. 아니, 근데 그럼 또 나를 바라보며 3년을 참아준 가영이는 뭔데. 그래, 둘 모두에게 미안했다.




아마 보통의 연애담이었다면 거기에서 모든 것이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아라는 조금 달랐다. 뒤늦게 알았지만 그녀에게는 많은 속사정이 있었고, 그런 그녀에게 나는 정말로 신선한 남자였던 것이다.

"자아, 묵자 묵자. 내 특제 김치찌개야. 엥? 너 표정이 왜 그래"
"나 남자가 해준 요리 처음 먹어봐. 감동해서"
"엥? 전 남친들은 그런거 안 해줬어?"
"대구 남자들은 주방에도 안 간다고. 그리고 서울 올라와서도 쓰레기 같은 놈들만 만나서"
"에휴, 너도 어지간한 병신 자석이었구나. 병신 같은 남자들만 척척 달라붙는"

…그리고 아라 입장에서도, 차라리 지금 만나고 있는 여자가 있어서 버린다고 했으면 차라리 쉽게 포기했겠지만, 나는 분명히 그녀에게 헤어진 여자 때문이라고 말을 한 만큼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을 것이다.

"영호야"

바로 다음 날 새벽. 아라는 내 방에 들어왔다. 그리고 내 침대 속으로 파고 들었다. 속옷 속으로 과감히 뻗는 그 보드러운 손길을 나는 뿌리치는 대신 그저 신음성과 함께 눈을 감을 따름이었다.




그렇게 본격적인 양다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분명 당시의 내 저울추는 가영에게 기울어 있었다. 지난 3년간이라는 시간의 무게, 함께 전 직장동료로서 일해온 우정의 무게, 실직-백수-어머니의 사고-가영이네 집의 사기 등 함께 이겨내 온 힘든 시간의 전우애가 있었다.

아라가 아무리 예쁘고 매력적이며 '첫 사랑'에 가까운 어떤 오랜 인연에 대한 애틋함이 있다 한들, 또 침대에서 엄청난 순종과 환상적인 속궁함을 보인다 해도 어쨌든 당시의 나는 그저 그녀를 '언젠가는 버려야 할 인연'이라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자기야, 나 오늘도 이 집에서 자도 돼?"
"어어, 그래"

그렇게 일주일에 최소 3~4일은 아라가 내 집에서 자고 갔다. 여자친구가 있는 놈이 자기 원룸에 다른 여자를 데리고 잔다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었지만 사실 꼭 그렇지도 않았던 것이… 기본적으로 가영은 내 집에 오면 개 냄새가 나고, 개털 때문에 답이 없다는 이유로 집에 오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곧 아라가 스스로 완벽한 환경까지 조성해주었기 때문이다.




"자기야, 나 알바 자리 구했어"
"편의점?"
"응. 심야근무 할거야. 그럼 돈도 1.5배 주지롱! 낮에는 자고 밤에 일하면 돼"
"오 대박인데?"
"주 7일 근무라는게 최악이긴 한데, 어쩌겠어"
"엥?"

아라는 그 무렵, 다니던 에이전시 회사를 관두고 편의점 알바를 시작했다. 지나친 격무와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해 회사를 관둔 아라는 카드값도 그렇고 월세도 그렇고, 급한 마음에 편의점 심야 알바 자리를 구했다. 물론 나는 쾌재를 불렀다. 스케쥴이 드디어 딱 맞춰졌다.

"어, 가영아. 나 일 끝났어. 어어 그럼 너네 집 근처에서 저녁 먹자. 오케이"

밤 11시부터 아침 10시까지 일하는 아라는, 집에 돌아오면 정신없이 자기 바빴다. 가뜩이나 잠이 많은 그녀가 심야 근무까지 하니 눈을 뜨는 것은 보통 오후 8시~9시 전후한 시간이었다. 그 시간이면 나는 가영과 저녁을 먹고 가벼운 커피 한잔을 하고 오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아니면 아예 일찍 집에 와서 아라를 깨우고 저녁을 차려줄 수도 있는 시간이고 말이다.

"아라야 밥 먹자. 내가 밥 차려줄게"
"우응, 응, 오늘 반찬은 뭐야?"

…그렇게 6개월을 살았다. 단언컨데, 당시의 나는 동네 반경 5Km 이내에서 가장 섹스를 많이 한 남자였을 것이다. 아라와 나의 궁합은 환상적이었고-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신혼생활을 시작하는 부부처럼 미친듯이 즐겼다. 나의 스킬은 뒤늦게 엄청나게 향상됐고 그 도전정신과 실험정신을 아라는 받아주었다. …물론 그만큼 내 업보도 쌓였겠지만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언제나와 같이 아라와 함께 저녁을 먹고, 언제나와 같이 섹스를 하고, 노곤한 몸으로 둘이 끌어안고 아라의 출근 전까지 두 시간 정도 잠을 자던 금요일 밤.

"아 왜 전화를 안 받는데!"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가영. 그녀는 "오늘 엄마네 집에서 자고 올거야" 라던 말과 달리, 저녁을 먹다가 엄마와 싸워서 그냥 집으로 향했고, 그 과정에서 맞장구를 쳐줄 남자친구에게 몇 통이고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아 짜증을 폭발시키며 남친의 집으로 향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벌거벗은 채 다른 여자와 끌어안고 자고 있던 더러운 남자친구의 모습일 뿐이었다.

"미친 쓰레기 같은 새끼!"

가영은 욕과 함께 현관문을 박차고 나섰고, 나는 그제서야 허둥지둥 옷을 주섬주섬 입으며 아라를 뒤에 남긴 채 가영의 뒤를 쫒아나섰다. 머리가 핑핑 돌기 시작했다. 그저 달콤하기만 했던 쾌락의 시간은 끝이었다. 아직 잠에서 덜 깨어 현실과 꿈의 구분이 모호한 그 순간, 나는 제발 이것이 악몽이길 바라며 몇 번이나 눈을 질끈 감아보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이미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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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 소설

"애기야 밥 먹자"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씻고 강아지 밥을 준다. 아, 방금 전에 말한 '애기'는 강아지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강아지 이름은 둘둘이다.

"둘둘이도 밥 먹어"

하얀 푸들. 사실 나는 강아지 중에서 푸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둘둘이만큼은 예외다. 이 놈은 정말 똑똑하니까. 꼬리를 좋아라 흔들며 밥을 먹는다.

"왔어?"

아라는 부스스한 얼굴로 화장실에서 간신히 세수만 하고 식탁에 앉는다. 푸석푸석한 피부. 건조한 목소리와 부은 눈.

"왜? 나 새삼 보니 너무 못 생겼어?"

얼굴을 매만지며 하는 자조적인 농담. 나는 웃으며 "아니, 완전 이쁜데? 우리 애기가 세상에서 제일 이쁘지" 하고 그녀의 앞으로 계란말이를 슥 내민다.

"얼른 먹어. 그래야 이따 약 먹지"
"응"

아라의 피부는 이제 새하얗다 못해 파리하다. 하루종일 집에만 있은 탓이다. 식사도 꼭 내가 있을 때만 한다.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은 잘해야 담배 사러 나갈 때 정도. 그때도 항상 마스크에 선글래스, 후드티에 에어팟은 필수다. 대인기피증, 공황장애, 우울증, 특발성 혈소판 감소증, 갑상선 항진증, 부정맥, 자가면역성 각막 알레르기, 편두통, 두통, 불면증, 빈혈, 피부 소양증 등등, 그녀가 겪고 있는 병들만 해도 열 가지가 넘는다. 물론 먹어야 하는 약도 한가득이다. 그녀도 나도 두렵다. 맨날 그렇게 한주먹씩 약을 먹어도 과연 간에 무리가 가지 않을런지. 게다가 그녀가 앓고 있는 병 상당수에 효과 있는 약물이 그나마 스테로이드다. 빌어먹게도.

"밥 먹고 요 앞에 산책 나갈까"

나의 제안에 아라는 의외로 순순히 "그러자"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로서는 근 3일 만의 외출이다. 아라의 대인기피증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나와 함께 있을 때는 그나마 덜한데, 혼자 있을 때는 이제 외출을 점점 덜하고 있다. 창도 하루종일 암막 커튼을 치고 어두운 방에서 휴대폰만 바라볼 뿐이다.



"많이 춥다. 그래도 둘둘이 데리고 나올걸 그랬나?"

검은 후드에 검은 롱패딩, 검은색 에어포스를 신은 채 마스크를 챙긴 아라. 긴 앞머리로도 가리지 못하는 예쁜 눈매가 여전히 나를 설레이게 한다.

"아냐, 둘둘이 산책은 아까 내가 시켰어. 두부 사러 나갔다 오면서"
"그렇구나"

아파트 근처 산책로를 따라 20분쯤 걸은 후, 그녀는 담배를 한 대 피웠다.

"이제는 그냥 담배는 못 피우지?"
"응, 전자담배 피우다가 그냥 담배 피우면 너무 독하고 맛도 이상해서 못 피우겠어"

아라가 먼 산을 바라보며 내뿜는 담배연기는 항상 묘하게 쓸쓸하다.

"들어가자"
"응, 춥네"

하루 반나절을 자고 일어나서 휴대폰으로 각종 모바일 응모 이벤트를 하고, 인터넷 유머 사이트들에 올라온 베스트글을 거의 다 읽고, 심심할 때면 심즈나 동물의 숲을 한다. 그리고 하루종일 굶거나 혹은 내가 사다놓은 혹은 만들어 놓은 요리를 먹고, 약을 먹고 약기운에 취해 또 자다가 일어나 일어나 퇴근한 나를 맞이한다. 함께 저녁을 먹고 이렇게 산책을 하거나, 영화를 보거나 한다. 그리고 둘둘이와 잠시 놀아주다가 밤이 되면 약을 먹은 뒤, 끌어안고 잔다.

그게 우리의 평화다. 어떨 때면 아라가 빵을 굽거나 푸딩을 만든다. 정작 식사 솜씨는 엉망이지만, 이런 제과 제빵은 제법 솜씨가 좋다.




그러나 가끔 심하게 잠을 자지 못하는 어떤 기간이 되면 아라는 심한 우울증과 공황장애에 시달린다. 거의 36시간을 피곤해 죽을 것 같아하면서도 잠을 자지 못하고 불안한 마음에 이상증세를 보이며 피가 날 때까지 몸을 긁거나 손톱을 물어뜯는다. 약에 취해 자거나 기절하듯 갑자기 쓰러져 잔다. 기면증처럼.

그 즈음이 되면 우리의 관계는 살얼음을 걷는 것과 같다. 연인의 싸움을 넘어 쌍욕과 처절한 저주의 말이 오가고, 자살 위협과 자학, 자해의 쇼가 밤마다 서로를 할퀸다. 며칠 간의 그 지옥과 같은 기간이 지나고, 이윽고 싸우다 지쳐 누군가 회한의 눈물을 흘리거나 비로소 서로의 감정을 부드럽게 움직이는 어떤 대화의 물꼬를 트기 시작하면 뒤늦게 화해무드가 펼쳐진다.

무한의 싸이클, 5년이 넘게 이어지고 있는 이 동거생활은 언제나 그랬다. 그 주기는 보름이 넘을 정도로 길 때도, 3일 단위일 때도 있었다. 그리고 간만에 그 싸이클이 도래했다.

"그냥 나 죽어버릴래"

무슨 지랄을 했는지 바닥에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아라. 가만히 보니 허벅지에서 뚝뚝 피가 흐르고 있었다. 소름이 돋았다. 설마 하혈이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저번처럼 성기에…. 내 낯빛까지 변해가며 당황하자, 아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냥 허벅지 심하게 긁었더니 살점이 조금 떨어져 나가서 피가 난거야. 닦으면 돼. 사타구니 조금 쓰린 정도야"

나는 얼른 주방으로 달려가서 새 독일행주를 들고 왔다. 그리고 그녀에게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봐봐"
"됐어"
"보라고, 벌려봐"
"됐다고!"

이쯤해서야 그녀는 말을 듣지 않는다. 차라리 빠른 포기가 나을 수도 있다. 나는 바닥에 얌전히 행주를 내려놓는다. 아라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한다.

"그냥 나는 너한테 도움이 안되는 인생이야. 매일 그 년이 생각나. 그리고 요즘 더 생각이 나"

나는 한숨과 함께 얼굴을 쓸어내린다.

"야, 그게 도대체 몇 년 전 이야기야"

하지만 아라는 서글픈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눈빛이 묘하다. 슬픈 눈빛일까, 나를 경멸하는 눈빛일까, 잡아달라는 눈빛일까.

"너한테는 지난 이야기지만 나는 아직도 귓 가에 생생해. 그리고 밤에 잘 때가 되면 머리 위에서 나를 내려다 봐. 얼마나 무섭고, 싫은지 몰라"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내가 바람 피웠던거, 그것도 3년이나 피운 거 정말 죽도록 미안한데… 이제는 잊을 때도 됐잖아. 아니 니 말대로 평생 나 원망하고 그래도 좋은데, 이제 자학은 안 해도 되잖아"

아라는 입술을 바르르 떨다가 말했다.

"누구는 하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나 너 처음 만났을 때 이 정도는 아니었어. 너 때문에 이렇게 된거야. 너랑 그 년 때문에, 니 두 년놈 때문에"

내가 대답 대신 또 그냥 얼굴을 쓸어내리고 있자 아라는 털썩 바닥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말해줄까. 내가 진짜 왜 이렇게 됐는지?"

나는 정말 몰랐다. 니가 왜 이렇게 됐는지.

"그 년 때문이야"

나는 그저 내가 피운 바람 때문에, 그리고 그 수습 과정에서 내가 우유부단 했던 것 때문에, 그게 아라에게 상처를 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다 그 년 때문이라고"

아라의 눈빛에서 원망을 본다. 좌절을 본다. 슬픔과 원한을 본다. 한없이 가라앉아 버릴 것만 같은 깊은 어둠을 본다.

"너는 몰랐다고 할 지도 모르겠지만, 그래, 차라리 몰랐기를 바래. 니가 알면서도 가만히 그 년을 그렇게 냅둔거면 내가 너무 괴롭잖아"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그 순간까지도 몰랐다.

"너 그 년이랑 만날 때, 걔가 나한테 연락한거 알아?"
"뭐? 언제?"

무슨 소리야.

"매일. 매일 매일. 무시무시한 쌍욕, 너 내가 입 거친거 알지? 근데 나는 비교도 안 돼. 그 년은 어디서 본 적도 없는 더러운 욕을, 하루에 50통도 넘게 보내고, 너 잘 때 니 자는 사진, 니 옷 벗은 사진, 니가 쓴 콘돔 사진까지 매일 매일 나한테 보낸거 알아? 아냐고"

웃으면서 이야기 하던 아라의 얼굴은 어느새 차갑게 굳더니 눈물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했다. 그녀의 눈물보다, 그녀의 말이 더 당황스러웠다.

"무슨 소리야. 가영이 걔가 너한테 그런 문자를 보냈다고? 정말이야?"

아라는 급기야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정말 몰랐냐, 정말 몰랐냐고"

정말 몰랐다.

"나는 니가 참으라고 해서 참았어. 그 년이랑 한번만 더 싸우고 지랄하면 그냥 둘 다 버리겠다는 니 말, 니 그 말이 무서워서… 아니 그냥 나한테만 두 년 다 버린다면서 그 년한테 가버릴까봐 그게 무서워서 그냥 혼자 꾹 참았다고. 내리 3년을. 알아? 그 년이 온갖 쌍욕과 조롱을 나한테 퍼부을 때, 나만 참았다고."

나는 정말 몰랐다. 모른다고 그 업이 사라지지야 않겠지만.




가면





가영과 나는 사내커플이었다. 작은 마케팅 회사에서 청춘남녀들이 하루종일 가족보다도 더 오래 바쁘게 일하다보면 불꽃 같은 우정이 생기거나 전장 속의 사랑이 싹트기 마련이다. 우정과 사랑의 수식어가 바뀐 것 같아도 사실이 그렇다.

동갑내기 그녀는 적어도 당시의 나보다는 이래저래 더 우월한 여자였다. 그녀가 엄청 우월했다기보다는 내가 부족한 형태로. 지질한 너드같은 나와는 다른, '보통에서 살짝 그 위를 넘나드는' 계급의 사람이었다. 사랑에 무슨 조건이 있겠느냐만 적어도 결혼을 서서히 생각할 나이의 남녀에게는 그렇지 않다. 나는 그래서 사실 딱지 맞을 것을 예상하고 고백했다. 오히려 속으로는 '그래, 차라리 딱지 맞고 이제 쿨하게 정말 열심히 다른 여자애 알아보자' 라고 생각했었다. 그게 정말 그 1년 동안의 허무한 짝사랑을 끝낼 방법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좋아, 대신 다른 사람한테는 절대 비밀이야. 말하는 순간 바로 난 회사 관두고 너랑 헤어질거야. 난 사람들이 뒤에서 너랑 나 두고 수근거리는거 죽기보다 싫어"

예상하지 못한 전개에 당황했지만 나로서는 정말 기쁜 대답이었다. 물론 다른 누군가들에게 자랑할 수 없다는 것은 마음 한 켠이 조금 쓸쓸해지는 이야기였지만 상관 없었다. 오히려 '나만의 연예인'이나 다름 없었던 그녀를 그렇게 나의 곁에 둘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녀는 상상 이상으로 철저했다. 사내커플은 결국 누군가에게 들키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는 들키지 않았다. 심지어 가장 가까이서 일하는 이들조차 짐작도 하지 못했다. 우리는 단 한번도 단 둘이 같은 시간에 퇴근한 적이 없었고, 같은 회사를 다니는 기간 동안 둘이 같은 시기에 휴가를 쓴 적도 없다. 그녀가 좋아하던 해외여행도 오로지 금요일 밤에 가서 일요일 밤, 월요일 새벽에 들어오는 것이 다였다.

그 철저함 이면으로, 다른 이들이 우리를 연인으로 생각하기에 우리는 너무 갭이 컸다. 지금의 내 모습만 아는 사람이라면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당시의 나는 분명한 찌질이였다. 외모도, 생각하는 것도 관심사도 수준도. 돌이켜 생각해보면 가영이 나를 받아준 이유조차 궁금할 정도로. 그저 어쩌면 여자들 일생에 한두번쯤 찾아오는 '착하고 못난 똥차와 사귀는 시기'였는지도 모른다.

대신 나는 정말 그녀에게 순정을 바쳤다. 가영이 화를 내도, 짜증을 내도, 못되게 굴어도 나는 혼자 분을 삭힐 지언정 마냥 그녀를 즐겁게 하기 바빴다.

갑자기 그 한참 이후의, 언젠가의 술자리에서 어느 직장 여자 동료가 술에 취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솔직히 지금 남편 처음 만났을 때는 외모도 취미도 말하는 것도 뭐 여자 챙기는 것도 다 엉망진창이었어요. 내가 너무 외로워서 그냥 만나보자고 했는데, 딱 알잖아요. 이 이 남자 연애경험 별로 없구나 싶은거. 연애 못하는 티도 많이 났고, 지금도 그렇지만 사람이 너무 꾸밀 줄도 모르고. 근데 어느 부분에서 마음이 열렸냐면… 한번은 내가 그냥 그만두자고 하면서 막 되게 모질게 가슴에 상처주는 말을 했어요. 정나미 떨어지고 그냥 돌아서게 하려고. 안 그러면 이 남자한테서 미안해서 나도 못 헤어질 거 같애서. 근데 그렇게 막 되게 모진 말을 했는데, 그래서 막 그게 분명히 그 사람한테도 상처가 됐는지 눈물 흘리고 손까지 떨리는거 보이는데도… 끝까지 나한테 '그래도 나한테는 니가 제일로 이뻐서 사귀는 내내 즐거웠어. 나같은 놈이랑 사귀어줘서 고마워. 행복해라' 하면서 돌아서는데… 그리고 막 자기 감정 주체 못하고 얼굴 막 쓸어내리면서 가는데 아 그 뒷 모습이 진짜…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거에요. 내가, 내 주제에… 내가 정말 내 스타일의 마음에 드는 남자 만난다고 해서 내가 이 남자처럼 나한테 잘할 그럴 사람이 또 있을까? 뭐 연애 감정 좀 지나면 본성 나오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그 누가 이 남자만큼 나한테 무식하게 잘해줄까 싶더라구요. 그래서 다시 불러서 잡았죠"

…나는 그 이야기를 듣는데 마치 내 이야기를 남에게서 듣는 것 같았다. 그 정도로 나 역시 가영에게 잘했다. 한달 월급 160만원 받던 시절에 카드값만 180만원을 썼다. 데이트 비용이 그랬다. 물론 가영에게는 가급적 티도 안 냈다.

그래도 즐겁고 행복했다. 호구의 연애란 그런 것이 아니던가. 마치 부모의 그것마냥 사랑하는 그녀가 무엇을 해도 좋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것. 하지만 그 행복함은 매번 오래가지 않았다. 내 딴에는 정말 최선을 다해 하는 연애였지만 그것이 가영의 눈에는 언제나 부족했던 것이다.

내가 모처럼 정성을 다해 고른 그 선물도 가영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고, 내가 모처럼 차려입은 옷도 가영에게는 패션 테러였으며, 내가 모처럼 찾아본 데이트 코스는 그녀에게 뻔하고 지루한 곳이었다.

"… …"

돌아오는 길의 택시 안은 언제나 조용했다. 데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연인들의 아쉬운 조잘거림 대신 침묵이 그 자리를 곧잘 대신했다. 나의 손길마저 부정한 채 그저 멍하니 차창 밖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내가 느낀 감정은 2년에 걸쳐 서서히 초조함에서 당혹감, 외로움에서 자괴감으로 바뀌어 갔다.

그것이 정점이 된 계기는 언젠가 명동에서 우연히 만난, 가영의 사촌오빠였다.

"어! 가영아!"
"어?! 형석 오빠!"

데이트를 하던 중, 횡단보도를 건너려 대기하던 중 갑자기 옆에서 가영을 보고 아는 척을 하는 왠 훤칠한 남자. 누군가 싶어 어리둥절하고 있는 찰나 먼저 사근사근하게 "아, 가영이 사촌 오빠에요. 둘은… 남자친구?" 하고 씩 웃는 그. 사촌오빠라는 말에 경계심을 풀며 씩 웃고는 악수를 나누기 직전 가영의 말.

"아니야, 남친은 무슨. 그냥 친구야"

쑥쓰럽게 웃으며 악수를 내밀던 나의 표정은 빠르게 굳어갔고, 뒤늦게 다시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웃어지지 않았다. 눈치 빠른 사촌 오빠는 "어어, 그래요. 어쨌든 둘이 재미나게 놀아요" 하고 금방 사라졌다. 횡단보도를 건너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려고 했지만 머릿 속에서 "그냥 친구야" 라는 말은 쉬이 떠나지 않았다.

차라리 그때 화를 냈다면 어땠을까. 가영은 이후에 들린 식당에서 평소답지 않게 "그냥, 이모가 알면 이러쿵 저러쿵 막 어른들한테도 말하고 그럴 거 같아서 그랬어" 등의 말로 애써 수습하려 했고, 나도 "그래, 뭐 당황스러울만해" 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결국 그 날은 도저히 감정조절이 되지 않아 저녁식사 후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의 나는 참 외로웠다. 지난 2년간의 연애가 송두리채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그 무렵이었던 것 같다.




"거의 우리 5~6년 만 아니에요? 아니 더 됐나?"

대학교 시절, 죽어라 열심히 활동했던 길드의 유일한 여자 멤버, 아라였다. 단 한번의 오프라인 정모에서 은근한 썸과 아쉬움을 남긴 채 헤어졌던 우리는 아주 뜻밖에 역시나 함께 활동했던 멤버 재훈을 통해 만날 수 있었다. 셋이 보기로 해놓고 정작 재훈이 다른 급한 약속으로 빠졌지만, 확신컨데 나와 아라는 아쉬워하는 대신 오히려 기뻐했던 것 같다.

"영화요? 좋아요! 뭐 볼까요? 보시고 싶은거 보세요. 저는 다 좋아요"

신선했다. 언제나 까다로운 취향에 맞추어 신중히 고르고 까탈스러운 재가를 거쳤어야 했던 가영과는 많이 달랐다. 내가 원하는 것을 존중하는 그녀의 모습은, 어쩌면 연인 사이에서 당연토록 누렸어야 할 그 무엇이었을런지도 모른다. 물론 그저 오랫만에 만난 '아는 여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사이에 여자친구까지 투영해서 비교하는 내 모습이 무척이나 한심하고 못났지만, 그만큼 그런 감정에 목말랐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정말 재밌었어요. 우리 조만간 또 봐요!"

밥 먹고 커피 마시며 대화하고 영화 보고 헤어지는, 가영이의 표현을 빌어 "연애 못하는 것들이나 하는 뻔하고도 재미없는 데이트 코스"에 정작 나 이상의 묘한 긴장과 설렘을 온 몸으로 표현해주는 아라가 좋았다. 단언컨데, 가영과의 연애 중에 단 한번도 받아본 적 없는 어떤 그런 행복 어린 표정과 시선이 좋았다.

"그래요"

이제 인사를 하고 집을 향해 돌아서야 할 타이밍에 서로 뭔가 묘하게 아쉬어서 미적대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들뜬 내 마음. 반나절 내내 두근거리는 마음에 어떤 확신을 쏟아내는 아라의 말.

"아, 근데 혹시 요즘에 만나시는 분 있으세요?"

물론 그 말에 나는 "아니요. 있으면 좋겠죠. 저 요즘 엄청 외로워요" 하고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대답했고, 밝아지는 아라의 표정을 보며 나는 우습게도 가영의 얼굴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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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들 소설

아들이 누운 병원 간이침대의 머리 맡에서 나는 잠든 아들의 목에 수건을 감는다. 이 늙은 애미의 힘만으로는 저 성난 것의 힘을 이길 수 없다. 약에 취해 잠든 아들의 목에 수건을 감고 마음을 독하게 먹는다.

'이 애미도 곧 따라갈거니까, 울지 말고 기달리고 있어'

눈을 질끈 감으며 있는 힘껏 수건에 체중을 실어 잡아당긴다. 곧장 눈을 뜬 아들은 컥컥 거리며 아둥거린다. 자식의 명을 끊는 이 지독한 애미를 원망하거라. 니는 죄가 없다. 내가 잘못해서 너를 그리 낳은 내 죄다. 니 죄까지 모조리 내 가지고 지옥 갈라니까 너도 이 지랄맞은 곳에서 밤마다 무섭고 외롭다고 울지 말고 천국가거라. 아들아 미안하다. 이 애미가 미안하다.

"아들 미안해"

어두운 병실 가득한 헐떡이는 소리. 그 영원과도 같은 고통 속에서 버둥대던 아들의 몸짓이 갑자기 축 늘어진다. 이 모진 어미는 그럼에도 한참을 더 수건에 몸을 지탱한다. 급기야 뚜둑이는 소리와 함께 자식의 명이 온전히 끊어졌음을 느낀다. 그 소리에 내 몸의 힘도 사르르 흩어지며 울음이 터진다. 모든 것이 끝났다. 아들 사랑해.

"엄마가 미안해 아들"

바닥에 주저앉았다. 자그맣게 터져나온 울음은 어느새 40년 한이 담긴 통곡이 되었고, 닫힌 병실의 문이 열림과 동시에 간호사의 비명도 울려 퍼졌다.






우리 아들 






"아이고 참 순하다. 애기가 어쩜 울지도 않누"

아들은 순했다. 갓난쟁이를 시장통 그 시끄러운 곳에 업고 가도 생전에 한번 우는 일이 없었고 그저 이 애미 등에서 그저 조용히 잠자다가 밥을 주면 곱게 먹고 이쁜 똥을 쌌다. 남편 복 없는 년은 자식 복도 없다는 말이 나한테는 틀린 말이라고 믿었다.

"근데 애가 너무 좀 심하게 조용한거 아녀?"

어느 날이었다. 순영 엄마가 한 말에, 내심 마음 속 걸리던 생각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덕이는 울지 않았다. 그리고 이 어미와 눈을 맞추지 않았다. 엄마, 하는 한 마디도 늦었다.

"엄마"

라는 그 말에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다음 말이 늦어도 너무 늦었다.




'병신을 낳은 병신'이라는 말에 내 눈알이 돌았다. 시장통에서 칼춤을 추고, 찾아간 시댁에서는 피눈물을 흘렸다. 천애고아는 세상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었다. 무능한 애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마음을 독하게 먹는 것 뿐이었다.

"걱정말어, 엄마만 믿어"

애기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누워서 버둥이며 하루종일 천장을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다. 일을 하고 돌아와 집에서도 부업을 하며 하루 4시간 반을 자면서 그리 낮인지 밤인지 도저히 구분이 되지 않는 하루하루를 멍한 머리로 살았다.

"우르르르르, 까꿍! 까꿍!"

머리 맡에 달아놓은 모빌에도, 책에도 인형에도 아들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오로지 "엄마" 한 마디. 밥도 똥도 잠도 그저 "엄마" 한 마디. 그래서 그 말은 더 특별했고, 엄마를 더 강하고 아프게 했다.



"엄마"
"응, 엄마가 일 다녀왔으니까 우리 애기 밥 먹자"
"엄마"
"어이구 우리 애기 오늘은 똥 가렸네. 잘했어"
"엄마"
"그려그려 우리 아들, 피곤하지? 엄마가 넨네코코 해줄테까 푹 자자"

8살 아들을 재우고 스탠드 하나에 피곤한 눈을 부비며 쇠꼬챙이로 손가락 마디 하나만한 미니 파이프에 쇠찌꺼기를 걸러낸다. 하루 온종일 일하고 그 피곤한 눈으로 이 피곤한 짓을 새벽 1시까지 매일해야 된다. 눈에 핏발이 서고 손가락은 쇠독이 올라 짓무르지만 그래도 이걸 하면 아들 분유 한 통이 더 생기고 아들의 상담비가 생긴다.

"아들"

엄마도 점점 말이 없어진다.

"아들"

엄마가 배고플 때면, 엄마가 힘들 때면, 엄마가 죽고 싶을 때면 그 말을 마음 속으로 몇 천 몇 만번을 더 떠올렸다.

"아들"




"많은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병신이라도 좋으니까 아프다, 배고프다, 엄마 나 머리가 아파요, 다리가 아파요, 이렇게 말이라도 못하는 거에요?"

나의 말에 의사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저 언제나처럼 "지켜봅시다" 하고 약을 내어준다. 나는 이미 이 약에 효과가 없음을 알면서도 아들을 다그쳐서라도 꼭 먹인다. 단 한 끼도 거름이 없이.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을지 모르니까.





"으어어어어!"

다른 것은 하나도 안 닮은 것이 힘과 등치만 지 아비를 그리도 닯았는지 15살 놈이 어지간한 어른만하다. 병원 한번 가기가 벅차다. 어르고 달래고 안고 졸라서 간신히 버스에 태워도 난동을 부리는 통에 연신 고개를 숙이고 말리고 야단이 난다. 택시를 타면 결국 기사가 내리라고 소리를 칠 때까지 난리를 피운다.




"으가가아아!"
"아이고 이 눔아, 이 눔아!"

아들을 아침마다 의자에 사지를 묶어놓고 출근하는 어미의 마음. 하루종일 불안하고 걱정되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건만 오늘도 그 무식한 힘으로 의자를 반쯤 부수고 그 짐승 같은 힘으로 온 방안을 다 부수고 찢었다.

"이 눔아"

아들의 어깨를 내려치면서도 미안하다. 얼마나,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었을꼬. 애미가 죄인이다.




몇 번이고 자살을 마음 먹었다. 임신한 나를 두고 그 놈이 떠났을 때도, 시댁 아닌 시댁에서 소금세례를 받고 피눈물을 흘렸을 때도, 눈밭에서 굴렀을 때 그냥 그렇게 모질게 놔두고 올 것을 다짐했을 때도, 둘 다 냉골방에서 열이 펄펄 끓으며 사경을 헤멜 때도, 그 모든 시간 속에서 죽음을 항상 염두에 두었고 그럼에도 미련하게 참고 또 참으며 버텼다.

"아들"

나이 서른을 바라보는 다 큰 아들의 똥칠한 벌거벗은 몸을 씻기며 "시원해?" 하고 이 어미는 또 웃는다. 시원해서 좋다고 "헤"하고 웃는 그 얼굴은 세 살 때나 서른이나 하나도 다름이 없었다. 어쩌다 고기반찬이라도 올려주면 무어라 무어라 알 수 없는 말을 웅얼거리며 좋아한다. 어미는 굶어도 너는 배불렀으면 좋겠다. 이 모자란 것보다 딱 하루만 더 살았으면 좋겠다. 




"여기에 지장 찍으세요"

손이 달달 떨린다. 참담한 마음에 할 말도 없지만 이대로 또 쫒겨나면 이제는 또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아들이 잘한 것도 없지만, 아들도 온 몸이 다 상했다. 얼마나 두들겨 맞고 얼마나 괴롭힘을 당했는지, 이 미련한 놈이 저 남자 간호사의 얼굴을 보는 순간 또 오줌을 지린다.

"어머니, 저희도 최대한 사정을 봐드리고 싶은데, 저희가 아무리 병원이라고 해도 되는 일이 있고 안되는 일이 있거든요"

지장을 찍으며 힘이 빠진다. 그럼에도 그저 이 모지리 아들은 엄마랑 집에 간다고 좋아한다.




이제는 다 틀렸다고 생각했다. 갈 병원도 없고 돈도 없다. 이 늙은 몸은 하루가 다르게 쇠해가고, 이 미련한 놈도 나 죽고나면 그 무슨 꼴을 당할지도 모른다. 흉흉한 소문도 들었다. 무료 요양소에서는 이런 젊은 장애인들 장기를 빼가는 놈돌도 있다고. 아니더라도 딱 죽지 않을 만큼만 먹을걸 주고 밤낮으로 때려 부려먹는다는 말도 들었다.

아니다 아니다 아닐 것이다 생각해도 이제는 내가 죽고 나면, 그때는 우리 아들 뜨신 밥 한 끼 멕여줄 사람이 없구나 하는데 생각이 닿는 순간 한없이 눈물이 흘렀다. 다 이 어미 탓이다. 진즉에 차라리 둘이 콱 죽어 버렸으면 덜 힘들어도 됐을텐데, 내가 니한테 덜 모질었어도 됐을텐데.

평생의 삼분지 이를 아들 뒷수발 들며 살았고, 아들은 평생을 그저 밧줄에 칭칭 묶여 살았다. 그것이 사람인가 짐승인가. 개도 이만치 묶여 살지는 않았을거다.

'그래'

딱 한번만 더 모질어지기로 했다. 딱 한번만 더. 이미 골수천번도 넘게 모질게 먹었던 마음, 딱 한번 더 모질어지면 된다. 그때는 더이상 이 애미를 원망하지도 않아도 된다 아들. 미안하다 아들. 죽어서 만나자 아들. 아니, 다음 생에는 나보다 좋은 부모 만나서 건강한 정신에 건강한 육신 물려받고 부디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아들. 미안해 아들, 사랑해 아들.

"애가 잠을 못 자는데, 진정제 투약 좀 해주세요"
"에휴, 네 알겠어요"

아들, 미안해. 정말 미안해.

공유오피스 소설

말로만 듣던 힙한 공유오피스에 사무실을 얻었다. 물론 독립 사무실도 아니고 그냥 임자 따로 없이 테이블만 빌리는 것인데 월 35만원의 비용은 조금 애매한, 아니 분명 비싼 감이 있기는 했지만 칙칙한 동네 사무실을 떠올려면 이 곳은 너무나 멋지고 힙한 곳이었다.

'게다가'

커피도, 맥주도 공짜라는 점에서 충분히 돈 값 한다고 느꼈다.

'하루에 커피 두 잔, 맥주 두 컵만 마셔도…'

그렇게 애써 합리화했다. 그만큼 마음에 들었다. 깔끔하고 멋진 설비도 설비였지만 그보다 더욱 마음에 든 것은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에너지였다. 아니 그 사람들 그 자체였다. 어디 뉴욕이나 LA 어딘가의 글로벌 사무실에서 일할거 같은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하나 같이 에어팟에 스타일리시한 패션, 애쉬 염색을 하고 흥겹게 몸을 흔들며 맥북으로 열심히 무언가의 일들을 하는 모습들은 과연 멋짐 그 자체였다. 이렇게 힙한 곳에서 이렇게 힙한 사람들과 힙하게 일을 할 수 있다니. 정말 35만원이 아깝지 않았다.

"나 패스트워크스페이스에 사무실 잡았어"

여친 주리한테 자랑했다. 여친은 "정말?" 하며 놀라워했다. 사실 여친 성격상 시큰둥해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나 아는 언니도 거기에서 서너달 정도 잠깐 일했었대. 엄청 멋있는 곳이라면서. 오빠 부럽다" 하면서 부러워했다. 더 신이 났다.






공유오피스





조금 우습고 허세스럽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괜히 거기에 찌질한 모습으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한동안 살까 말까 고민하던 에어팟도 사고 신발도 사고 나 역시 최대한 멋을 부리고 사무실에 들어섰다. 오전 10시 반, 의외로 밤에 비해 사람들이 오히려 더 적었다. 하긴, 이런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아침형 인간보다는 저녁형 인간들이 더 많겠지 하고 생각했다.

"음"

음악을 들으며 일을 하려니 확실히 신나고 좋긴 한데 집중력이 떨어진다. 커피 한잔 마시고 할까, 생각하던 차에 '아 맞다 공짜지!' 하는 생각에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 카운터 쪽으로 걸어가노라니 그냥 맥주 한잔을 마시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그렇게 하고자 마음 먹고 그쪽으로 걸어가니 아직 오전인데도 연거푸 잔을 비우고 있는 잘생긴 또래 하나가 보인다. 옷 차려입은게 그야말로 이 공유 오피스의 화신 같다. 스타일리시하다.

"어, 못 보던 분인데. 새로 계약하신거에요?"

놀랍게도 그가 나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규진이라고 이름을 밝힌 그는 나보다 한 살 위였다. 여기 강남점이 생기자마자 입주해서 벌써 1년 넘게 일을 했다고 했다. 무슨 일을 하나고 했더니 디자인 일을 한다고 했는데 자기는 잡스럽게 이 일 저 일 다 한다고 했다. 로고 디자인부터 웹디자인, UI, UX까지 다. 실력이 어마어마하신 거 같다고 하니 사실은 실력은 쥐뿔 없고 그냥 엄청 빨리 일을 쳐내주는 바람에 오래 거래하면서 일거리 던져주는 분들이 좀 있을 뿐이란다.

"그쪽은 무슨 일 하세요?"

자그마한 소품 관련 쇼핑몰 창업 준비한다고 하니 고개를 끄덕이더니 혹시 일거리 생기면 말만 하라고 번호 교환을 하잔다. 이 사무실에 친구 하나쯤 만들어 두는 것도 좋을 거 같고, 디자인쪽으로 이 일 저 일 다 할 줄 아는 사람 주변에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어느새 카톡 친추까지 했는지 [ 안녕하세요 ] 하고 말까지 건다.

"오, 여친 분 엄청 이쁘시네. 잘 어울린다. 몇 살이에요? "
"헤헤, 올해 서른이에요"
"우왁? 정말? 완전 동인이네. 한 20대 중반? 초반까지 봤어요"
"여친 들으면 기뻐서 춤 추겠네요"
"하하, 여튼 수고하시고, 이따 또 봐요"

그가 손을 흔들길래 조금 아쉬운 마음에 물었다.

"아 들어가세요?"
"그건 아니고, 그냥 답답해서 좀 나가서 스케이트 보드 좀 타고 올라구요"
"오 그렇구나"
"그럼 이따 봐요"
"네"

그리고 자기 자리로 가서 슥 스케이트 보드를 꺼내들고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그 모습은 남자가 봐도 멋있었다. 게다가 이 사무실에는 저런 좀 뭔가 일도 잘할거 같고 놀 줄도 알 것 같은 스타일의 사람이 최소 몇 십 명은 된다. 이 넘치는 에너지는 정말 최고다.



"어, 나도 안에 들어가 볼 수 있어?"
"그럼"
"대박"
"대신 나랑 같이 들어가야 돼. 미팅한다는 명목으로는 입실이 가능하지만, 아무나 들어 올 수 있어서야 관리가 안 될거 아냐"
"그렇구나"

며칠 뒤 토요일, 사무실을 방문한 주리는 안에 들어오더니 신이 나서 여기저기 사진을 찍는다.

"나 인스타에 올리고 싶어"
"그래"
"저거도 공짜라며? 커피"
"응, 공짜. 맥주도 공짜야"
"진짜 좋다"

함께 커피 한잔씩을 마시며, 마주보는 카페 테이블에 앉아 조금 수다를 떨고 있노라니 누가 아는 체를 한다. 규진이 형이다. 벌써 우리는 며칠 만에 제법 친해졌다.

"안녕! 어? 오늘은 여친도 함께 왔네? 안녕하세요"

규진이 형이 인사를 하며 우리 테이블에 합석을 한다. 주리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누구…?" 하고 묻다가 곧 "아! 같이 친해졌다고 하던 그 분?" 하고 묻는다. 규진이 형은 곧바로 "맞아요, 그 분이에요" 하고 씩 웃는다. 핸섬한 그 미소에 나까지 조금 으쓱해진다.

"여기 오늘 처음 와봤는데, 디게 분위기 멋있네요"
"그쵸? 그래서 저도 반해서 계속 여기에서 일하고 있어요"

그렇게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규진이 형은 "그럼 두 분 재밌게 노세요" 하고 좌르르 바닥에 스케이트 보드를 굴리며 저쪽으로 사라졌다. 이렇게 이 안에서 저런걸 타는건 당연히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관리자 안 보는 데서야 누가 뭘 어쩌겠는가.

"저 사람이구나."
"응, 잘 생겼지?"
"아니"

하지만 주리는 고개를 저었다.

"좀 사람이 어설프게 날티 나. 내 취향 아냐. 별로"
"그래도 좋은 사람이야. 그 오픈 이벤트 페이지 디자인한거도 저 형이 공짜로 해준거야"
"난 그거도 디자인 별로던데"
"그래"

주리가 조금 규진이 형에 대해 경계하고 불편해하는 기색이길래 나는 얼른 다른 주제로 대화를 돌렸다. 주리는 곧 또 다른 힙한 분위기의 사람들과 공간을 보며 기분을 풀었다.





"사실 창업이라는게, 리스크 생각하면 안 하는게 정답이긴 하죠. 아무리 힘들고 뭐 같아도 한달 20일만 어떻게든 버티면 알아서든 월급 통장에 딱딱 돈 꽂히니까. 당장 직장인 아니면 우린 진짜 집 얻을 전세대출도 힘들잖아요"

오늘은 초소형 스타트업에 대해 여섯 명이 함께 진행하는 미니 세미나를 들었다. 뻔한 이야기들이 많긴 했지만 그래도 다들 대기업에서 한자리씩 하다가 뜻이 있어 박차고 나온 사람들이라 그런지, 같은 말을 해도 훨씬 설득력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래봐야 평생 그랜저 이상 못 끌어요. 그게 현실이죠. 적당히 대기업 다니다가 가정 꾸리고 소나타 내지 그랜저 몰고 아들 딸 하나 낳아서 어떻게 어떻게 아둥바둥 살아봤자 딱 그게 한계라는거죠. 그나마도 엄청 잘 풀린거고, 잘 안 풀리면 훨씬 그거보다 피곤해지는거고.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사람의 꿈이 작아져요. 그냥 현실에 적당히 만족하게 된다는거죠. 절약, 자식, 부양, 학원비, 가장, 이런 단어에 치여 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나도 그렇게 점차 현실에 안주하게 되는게 싫어서… 아니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똑같이 그냥 그렇게 평생 기획서나 만들면서 9시 출근 8시 퇴근 반복하며 연봉 200 남짓 오르면 만세하고 싶어지는 그런 중소기업 또 찾아다니는게 무서워지고 싫어졌다. 그 싫어진 그게 설령 진짜 인생의 정답이라 할지라도 조금 뭔가 나에게 마지막 희망을 주고 싶었다.

'너 그렇게 평생 샐러리맨으로 살다가 끝내고 싶은거야?'

그 돌파구로 찾은게 조금 우습지만 이 짓이었다. 뭐 이것도 벌써 2주가 넘었는데 쇼핑몰 기획서만 몇 페이지 넘기지도 못했다. 그러던 차에 미니 세미나를 한다고 하길래 무슨 이야기들 하나 싶어 참여해봤는데 저 탈모끼 보이는 체크 남방의 힙스터 아재 말에 새삼 공감했다.

한참을 듣고 있노라니 어느새 소리도 없이 뒤에 나타난 규진이 형이 내 손목을 슥 끌어당기고는 구석으로 돌아가서는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저런거 듣지마. 도움 하나도 안 되고 시간만 잡아먹어. 저 사람들 뭔가 좀 뜻 있고 깨어있고 잘난거 같지? 다 그냥 지금 하는 일 답 안 나올 거 같으니까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단합대회 하는거야. 저 사람들 저거 코드 맞잖아? 맨날 그룹 지어 다니면서 술 마시고 점점 더 망가져. 그러다 창업자금 올인나면 그렇게 허무하게 하나둘씩 흩어지고. 최악이야 저런거"

규진의 말에 뭔가 마음 한 구석이 찔린 기분이라 부끄러우면서도 민망했다. 그리고 그 날은 결국 짐을 일찍 챙겨서 집으로 돌아갔다.




"한달 또 연장한다고? 이주일이면 다 한다고 하지 않았어?"

주리는 입술을 빼쭉한다.

"막상 해보니까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고. 디자이너도 없고, 혼자 구현해보려니까 영 후진거 같고 그래서, 다시 갈아엎고 엎고 하다보니 좀 시간이 더 걸리네"
"맨날 여기서 이쁜 여자들 보느라 눈 돌아가서 그런거 아냐? 보니까 엄청 꾸민 언니들도 있더만. 그 사람들 여기서 진짜 일하는거 맞긴 맞어? 남자 꼬시러 온 여자들 같애"
"엥? 어디어디?"
"오빠!"

내 너스레에 주리는 주먹을 쥐어보이더니 피식 웃는다.

"아 놔 진짜"
"야, 내가 다른 여자한테 눈이나 돌릴 남자냐? 너나 여기 맨날 와서는 외국인 백인 잘생긴 남자들 쳐다보지 마라"
"여기 잘생긴 남자가 어딨냐?"
"여깃…"

"저요!"

내가 농담을 하려던 차에 어느새 규진이 형이 끼어든다. 주리는 "둘 다 미친 거 아니에요?" 하며 웃는다. 처음에는 이렇게 불쑥불쑥 끼어드는 것에 불편해하던 그녀도 어느새 능청맞은 규진의 성격 탓에 제법 친해졌다.

"근데 뻥 안치고 여기 미친 사람이 절반은 넘을걸. 새벽 2시 넘어가면 비정상들 너무 많아. 특히 약간 취한 외국인들."
"규진 오빠도 그 중 하나 아니에요?"
"하하, 근데 맞음. 그리고 너도 마찬가지잖아"
"난 아님. 형만 미침"
"사실 나도 아님"
"둘 다 똑같이 미쳤어"



즐겁긴 했다. 그러나 문제는 일의 진도가 정말 안 나갔다. 2주면 될 것이라던 내 쇼핑몰은 기획부터 싹 뜯어고치고 요즘 최신 트랜드를 반영한 디자인의 시안만 계속 고를 뿐이었다. 맥주가 늘었다. 내일, 내일, 그리고 내일. 새벽이 되면 어느새 관리자들이 퇴근하고 금요일 저녁에는 외국인들이 많은 밤에는 무려 파티 분위기가 되기도 한다. 처음에는 다른 한국인들처럼 쭈뼛대며 잘 끼지 못했던 나는 어느새 규진이 형 덕분에 그들 사이에 낄 수 있었고 패션 쇼핑몰 창업준비를 한다던 지혜 누나, 나연이와도 친해졌다.

"어어, 잘 자"

그 무렵이었다. 일의 진도 문제로 몇 번 주리와 크게 싸운 이래로 나는 마음을 쉽게 잡지 못했고, 그때마다 주리는 조금씩 나에게서 마음이 멀어지는 것을 대놓고 보여주고 있었다. 아직 잘 리가 없는 시간인데도 그녀는 잔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고 그녀의 인스타며 뭐며 뒤늦은 시간에 업데이트 되는 것 때문에 나는 불만이 커지기도 했다.



"나연이가 너 좋아하는거 같더라"
"에? 정말요?"
"저번에 지혜랑 셋이라 같이 저녁 먹었거든? 근데 그때 나연이가 너 안 오냐면서 너 귀엽다고 했어"
"에이, 난 또. 귀엽다는 정도야 뭐"

규진이 형은 픽 웃으며 물었다.

"야, 난 또는 뭔데? 그럼 나연이가 너 진심 좋아한다고 하면?"
"그럼 뭐…"
"피팅모델 하던 애들이라 몸매 끝내주긴 하지"
"그쵸"
"여튼 조심해라. 그런 애들 은근 발라당 까져서 어느 날 갑자기 훅 들어온다. 한눈 팔지 말고 조심해라"
"에이 걔가 미쳤대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조금 설레이긴 했다. 괜히 더 신경쓰이고.



"야, 너 밤새 뭐했냐? 왜 전화도 안 하는데?"

금요일 밤, 파티를 하며 새벽까지 놀다가 커피 테이블 옆에서 눈을 떠보니 이미 아침 6시 40분. 그러나 지난 밤 9시에 아는 언니랑 밥 한 끼 먹고 온다던 주리는 밤새 연락이 없었다.

"그러는 오빠는?"

차마 밤새 사무실에서 파티하다가 밤새우고 새벽에 취해 쓰러져 잤다는 말은 못하고 그냥 "나는 어제 피곤해서 일찍 잤어. 근데 너는 들어가면서 연락이라도 해야 되는거 아냐?" 하며 따지기 바빴다.

"나도 그래. 일찍 들어왔는데 오빠 피곤할까봐 전화 그냥 안 한거야"
"뭐? 그래, 그건 좋다 이거야. 너 요즘 내 전화 왜 잘 안 받냐? 저녁에 걸면 한 10번 걸면 제때 받는거 한 서너번이나 되냐?"
"아 진짜 왜 그래? 백수생활 길어지더니 아주 미친거야?"
"야!"



그 날, 크게 싸웠다. 그리고 그 날이 기점이었다. 화해는 했지만, 주리의 마음은 점점 나에게서 빠르게 멀어져갔다. 그리고 나를 만날 때마다 불평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거 할건데. 하긴 하는거 맞아? 하루에 한 페이지씩만 했어도 지금 기획이 문제가 아니라 창업해서 팔고 있겠네"
"후우 야"
"그리고 씻긴 씻는거야? 뭐하는데 진짜. 팔꿈치에 때 이거 뭔데"
"아 진짜 쫌 너 쪽팔리게 할래?"

사무실까지 와서 다른 사람들 많은데서 싸우는건 무척 피곤하고 부끄러웠다. 커뮤니티 매니저가 와서 주의를 부탁드릴 정도였다. 나는 "야, 이럴거면 그냥 오지마" 하고 말해버렸다. 실언이었다. 그 날 이후로 주리는 정말로 이 사무실에 오지 않았다. 물론 다행히 며칠 뒤 화해를 하기는 했지만 그 날 이후로는 "별로 가고 싶지 않아" 하며 사무실쪽으로는 오지도 않았다. 생각해보면 엄청 저렴하게 데이트를 할 수 있었던 나날이었구나 하고 작고 찌질한, 후회 아닌 후회를 할 따름이었다.




이상기미는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지 않던 주리의 휴대폰에 비번이 걸리더니, 급기야는 섹스 빈도가 크게 낮아졌다. 한동안 스트레스를 핑계로 내가 잦은 섹스를 요구하기는 했지만 묵묵히 받아주던 그녀가 어느 날인가부터 그저 고개를 저을 따름이었고, 모텔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주말 이틀 모두를 만나지 못했던 어느 주말을 기점으로 나는 그녀에 대한 불안을 점차 의혹으로 키워나갔다. 내가 이름을 잘 모르는 친구들과의 만남이 늘어났고, 언젠가부터 백화점에서 속옷 매장에서 한참을 고민하던 평소답지 않은 모습에 나는 진한 의혹을 느꼈다. 그저 그녀는 "마음에 드는데 비싸서 고민한 것일 뿐"하고 말했을 따름이지만.

급기야 도저히 참치 못한 어느 날, 나는 몰래 미리 봐두었던 그녀의 폰 비번을 풀고 휴대폰을 뒤지기 시작했다. 흔적을 지운 것인지, 내가 헛다리를 짚은 것인지 별 크게 문제될만한 것은 없었지만 한가지 걸리는게 있었다.

임규진.

지난 주말, 그와 주리가 세 차례 연락을 한 기록이 있었다. 그것도 그냥 전화도 아니고 카톡 전화로. 나름 우리 사무실의 터줏대감이던 그는 지난 한달 전 즈음부터 갑자기 안 보이기 시작했다. 당연히 나랑도 엮일 일이 없었고. 우리는 친하기는 했지만 사무실에서만의 관계였다. 그런 그가 왜 주리와 연락을 했을까. 그리고 왜 그 전의 둘의 모든 대화 기록은 삭제되어 있었으며, 어제 내 폰이 꺼져서 주리의 폰으로 잠깐 지도 좀 찾으려니 왜 그렇게 정색을 했을까.

나는 조용히 주리의 폰을 내려놓고 침대에 다시 누웠다.




"솔직히 오빠 그 신발이랑 그 바지 너무 안 어울려. 너무 겉멋만 부리는거 같아. 그리고 나 이제 좀 신뢰를 못 하겠어. 세상에 쇼핑몰 하나 기획한다면서 벌써 반년이야. 준비를 하기는 하는거야? 그냥 거기에서 사람들이랑 어울려 놀고 먹는게 전부 아냐? 창업 자금 남기는 했어?"
"야, 4천 준비해서 고작 사무실 임대로 6개월에 2백 좀 넘게 쓴게 그리 문제냐? 그리고 2주만에 뚝딱 어설프게 시작했다가 한 큐에 말아먹느니 6개월 걸려서 이 사람 저 사람, 여기 안에 성공한 스타트업 출신들, 대기업 출신들, 외국계 기업 다니던 사람들한테 돈 주고도 못 들을 정보랑 조언 받으면서 신중을 기하는게 어느게 더 잘하는 일일까?"
"아니 맨날 말로는 그러는데 정말 하기는 하는거 맞아? 오빠 일하기는 해?"
"기획안 보여줄까? 지금 버전만 30가지가 넘어"
"아 근데 왜 안 하는데 그럼!"

주리는 초조해했다. 사실 진짜 초조한 사람은 나인데. 그녀가 나의 창업에 관심과 우려를 보내는 만큼, 나도 그녀의 정조와 식어가는 사랑에 대한 초조함이 절박했다. 강남 사무실에서 의왕시까지 뒤를 밟는 것도 피곤한 일이었고 그저 '설마'하는 의심만 가진 채 내 안의 불안함만 극대화 될 뿐이었다. 사실 내 미래에 대한 불안도 마찬가지였고.




"후, 끝났다"

솔직히 나도 어처구니 없지만 8개월차 계약을 마치고 딱 5일 더 지났을 무렵, 드디어 정식 넘버링 '5'의 타이틀을 달고 최종버전의 기획안이 완성됐다. 톡 까놓고 말해 처음 버전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는 디자인이지만, 멀고 먼 길을 돌아 온 것이었기에 처음의 나와 지금의 나는 꽤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다. 그렇지 않다면 대가가 너무 컸다. 근 8개월치의 임대료도 그렇고, 여기에서 사용한 밥값만 해도 그렇고, 무엇보다 주리도 그렇고.

"관두자"

그녀의 이별 선언에 나는 잡을 수 없었다. 주리가 그저 나에게 실망해서 떠난 것인지, 내 의심처럼 다른 무언가의 '의혹'이 있던 것인지, 규진이 처음에 주리에게 보였던 어떤 관심이 정말 단순한 관심종자의 그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인지 수많은 의혹만 남았을 뿐 결국 밝혀내진 못했다. 그냥 그것을 내가 정신 차리는 계기로 삼기로 했을 뿐이다.




"공백기간이 거의 1년 가까이 있는데, 이 시기에는 무엇을 했나요?"

면접관의 질문에 나는 잠시 주저하다가 솔직하게 답했다.

"개인사업을 준비했었습니다"
"어떤 사업이죠?"
"쇼핑몰입니다."
"잘 안 됐나보죠? 지금 이렇게 면접을 보는거 보면"
"네, 그렇습니다"

또 다른 면접관이 웃으며 농담을 던진다.

"그럼 우리 회사 다니다가 또 돈 모이면 다시 창업한다고 훌쩍 나가버리는거 아니야? 창업하는 사람들 많이들 그러던데"

다른 면접관들도 와 하고 웃는다. 나도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너무 제대로 쫄딱 망해서 절대 그런 일은 이제 없습니다. 호되게 데어봤습니다. 돈도 잃고, 여자친구도 잃고 해서요. 이제는 정말 회사 뿐입니다"

'이제는 정말 회사 뿐이다' 라는 멘트가 면접관인 임원들의 마음에 들었는지, 나는 결국 재취업에 어렵게 성공했다.





입사 전날 밤, 나는 오래간만에 어렵게 주리의 연락처로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주리가 받았다. 나는 어렵사리 입을 열고, 근황을 전했다. 돈은 거의 다 잃었지만 다행히 그럭저럭 괜찮은 회사에 재취업 했다고. 모든게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겨우 마지막에 지푸라기라도 잡은 느낌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간신히 멈추었다.

"잘됐네. 축하해"

조금 힘 빠진 목소리. 사실은 하고 싶은 말이 더 있었다. 다시 만나고 싶다고.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고. 이제는 어쩌면 정말 네가 바라는, 그런 조금 안정적인 그런 남자가 되었다고.

"그래, 고맙다"

하지만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했다. 그저 나 역시 무미건조한 말을 건냈을 뿐. 그러나 나는 다시 한번 용기를 내기로 했다.

"주리야, 나 말인데…"
"오빠"

그래, 다 알아. 그래도 나는 평생 후회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시 우리 시작해보면 안될까"

한참동안의 정적이 지나간 후, 주리는 물었다.

"오빠는 내가 좋아?"

나 역시 즉답 대신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야 어렵게 메인 목을 조용히 풀어넘기고 대답했다.

"어"

그리고 역시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주리의 대답 대신 전화가 끊어졌다. 곧바로 다시 걸었지만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답이 돌아올 뿐이었다. 배터리가 다 된 것일까. 나는 그 날 밤새 다시 그녀의 전화를 기다렸지만 전화는 걸려오지 않았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첫 출근을 하며 그녀에게 나는 문자 메세지를 남겼다.

[ 주리야 내가 간밤에 괜히 짜증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다. 힘내고, 언젠가 다시 인연 닿게 되면 그때는 부디 웃는 얼굴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행복해라 ]

답장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나는 그래도 괜찮다. 정말 괜찮다. 첫 출근, 다시 힘을 내자. 내야한다.

- 끝 -


술 김에 소설

8시 40분, 사무실을 마지막으로 나선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피곤에 절어 눈 앞이 어둡다. 눈을 주무르며 서둘러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어 큰 길로 나선다. 싸늘한 날씨와 함께 그리 춥지도 않다는 것을 동시에 느끼며 봄이 왔다고 생각한다.




술 김에 




오늘 저녁은 여느날과 같이 햄버거다. 햄버거를 포장해 나오자 어느새 비가 거의 그쳤다. 아직도 방울방울 비가 내리기는 하지만, 우산을 쓰기보다는 그저 비에 조금 젖고 싶다.

새삼스레 외로움을 느낀다. 나이 마흔 여섯의 솔로. 아니 노총각. 간만에 술이 당긴다. 하지만 마실 사람을 찾는 대신 찬장에 넣어놓은 위스키 한 병을 떠올린다. 지난 번 일본 출장 때에 사들고 온 것.

"흐"

그렇게 집에 와서는 뜨신 물에 샤워를 하고는 TV를 보며 주접을 떤다. 별로 웃기지도 않은 시트콤 재방 장면을 보며 피식 웃고는, 햄버거를 베어문다. 그리고 콜라 한 모금, 그리고 위스키 스트레이트 한 잔을 들이킨다. 기분이 씁쓸하면서도 좋다.

"후우"

햄버거를 다 먹고는 그 포장지를 적당히 구겨 방 한 켠에 버린다. 말없이 채널을 계속 돌린다. 재미있는 것은 나오지도 않고, 엉뚱한 현대 사회 관련 다큐멘터리를 10분만 멍하니 보다가 다시 채널을 돌린다. 그리고 또 한잔 위스키를 홀짝.

그러다보니 문득 언젠가의 젊은 날이 떠오른다. 그때도 지금과 비슷했다. 30대 후반의 어느 날, 4년 만난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한 2년을 더 밤만 되면 바보처럼 징징 대던 시절. 평생 가장 많이 술을 마시던 시절.

얼른 잊고 싶었는데 어째 그게 잘 안되던 그 시절. 그녀를 잊고 싶어서 비만 오면 슬픈 노래를 마시며 술을 들었다. 그래, 노래를 마시며 술을 들었다. 언제나 혼자. 그리고 그 이후로는 길게 연애를 해본 적이 없다. 잘해야 몇 달 남짓. 그나마도 이제는 끊긴지 오래.




또 빙신같이 나이 쳐먹고 옛날 생각하다가 울었다. 회사에서는 권고 사직 통보를 받았다. 재취업이 가능할까 두렵고 창업을 하자니 다 말아먹고 다시 모아놓은 돈 4천만원이 전부인데 무엇을 하면 좋을까 망설여진다.

그냥…

만약 그 애랑 잘 만나서 연애를 성공하고 결혼을 하고 오손도손 살았다면, 매일 아침 같은 해를 보며 침대 옆에서 새근새근 자는 그녀를 그렇게 매일 볼 수 있었다면 지금의 나는 조금 다르지 않을까 하는, 또 해서는 안되는 생각을 해버렸다.

한 잔이 가볍게 또 들어간다.

알딸딸하고 얼큰하다. 피식 웃음이 나오고, 기분이 다시 좋아진다. 손바닥으로 눈물을 또 슥 닦고, 나이 쳐먹고 참 나도 애 같구나 하는 생각에 다시 한번 피식 피식 웃는다.

TV를 끄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는다. 제목도 가물가물한 연애노래 한 구절을 흥얼거리다가 몸을 일으켜 채워놓은 한 잔을 들이킨다. 내일 출근을 잠시 걱정하다, 어차피 권고 사직 통보 받은 마당에 무슨 눈치를 보랴 싶어 배게 속에 더욱 머리를 깊이 묻는다.

'헤어지고 넌 내 생각 한번이라도 해본 적 있냐'

물을 수 있다면 묻고 싶다. 문득 몸이 자주 아프던 그녀가 새삼 걱정된다. 나도 그녀도 나이를 더 먹었으니 더 자주 아플텐데. 지금쯤은 누군가의 아내가 되어, 지켜줄 누군가가 있다면 차라리 좋겠다.

나보다는 그 사람이 너를 더 잘 지켜줄테니까.

자주 머리가 아프다고 했던 너, 충치가 생겼는데도 병원비 걱정에 겁을 내던 너, 내가 돈 대신 내줄테니 억지로 가라고 떠밀어서 겨우 치료 받고도 나에게 계속 미안해하던 너, 심장이 안 좋던 너, 자주 토하던 너, 자주 손이 시큰거린다던 너, 뭐만 먹었다면 소화 안된다고 힘들어 하던 너, 허리디스크에 고생하던 너.

참 지랄맞게도 자주 아팠구나 하면서도 그 상황상황마다 옆에 자주 있어주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고 미안하다. 아직까지도.

"흐"

사실 얼굴도 희미한 10년 전 연인에 무슨 애틋함이 그리 있을까. 생각해보면 그리 애틋한 사람도 아니다. 고비고비마다 씁쓸해지는 기억이 더 많은 그런 흔해 빠진 못난 남자의 연애 실패담.

"괜찮아"

…그렇게, 지난 10년간 수도 없이 되뇌인 그 의미없는 말을 오늘도 또 중얼거리며 눈을 감는다. 언젠가 영원히 눈 뜨지 않을 그런 날일 고대하며.




띵 띠리릿띠 띳띳띳띳띠- 띠리딧띠 띳띳띳띳 띠-

기분좋게 언제나처럼 잠이 들려고 하는 순간, 경박한 전화벨 소리가 잠을 깨운다. 이 시간에 내 휴대폰에? 의아해하며 휴대폰을 확인하자 모르는 번호다.

"누구세요"
"나야"

여자다. 익숙하게 "나야" 라고는 하는데 모르는 목소리다.

"전화 잘못 거신거 같은데요"

이 나이쯤 되면 희미한 기대조차 버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상대는 "임주원씨 휴대폰 아니에요?" 하며 내 이름을 묻는다. 누구지.

"맞는데 그 쪽은 누구신데요"

제기랄 술을 너무 과하게 마셨다. 머리가 알딸딸하고 핑 돈다. 눈 뜨기조차 힘들고 겨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게 전부다.

"오빠 진짜 나 몰라? 나 승연이야"

안다. 작년 가을에 잠깐 만났던 돌싱.

"어, 간만이야"

별로 반갑지는 않다. 정이 붙기도 전에 헤어졌으니까. '만남을 지속할 이유를 못 찾겠다'라는 기가 찰 이유로 나를 찼으니까. 뭐 솔직히 애 딸린 돌싱이 나라고 그리 애틋할 리가 있겠는가. 차라리 잠이나 더 잤으면 좋았겠구나 싶은 그런 허무함이 내 입맛을 다시게 한다.

"오빠"
"용건이 뭔데"

제발 시시하거나, 아니면 너무 지랄맞은 이유라서 내가 움직어야 되는 그런 이유만 아니길.

"…혹시 돈 좀 있어?"

시발.

"야, 너는 니가 찬 남자가 니한테 돈을 꿔줄거라고 생각하고 돈을 빌리는거냐?"

술에 취해 꼬인 혀가 이제 간신히 조금씩, 아니 여전히 꼬인다. 하지만 승연은 울먹이며 말한다.

"애가 아퍼. 근데 돈이 없어"

시발. 시발, 시발.

"야"
"알아, 오빠 진짜 미안해. 이런 전화 경우 없는거 아는데, 정말…아는데…"

코가 시큰하다. 시발.

"야, 아 시발. 아이 씨발"
"미안해"

냉정해져야 되는데, 내가 인생이 꼬인 이유가 바로 이건데. 오지랍 부리면 안되는건데.

"뭐 어떻게 아픈데"

씨발!

"애가 신장이 안 좋대. 하나는 아예 기능을 잃었고, 남은 하나도…"
"아…"

되돌아보면 내가 이 지랄로 인생을 조진거다. 정말로. 스물 세살에 취객 도와주다 시비 붙어서 폭행죄로 빨간 줄이 갔고, 서른 셋에 동생 사업에 급전 필요하다고 돈 5천 빌려줬다가 싹 날리고, 서른 여덟에 윤지 그 년이랑 헤어진 것도 결국 오지랍 부리다가 뭐 그리 된거 아닌가.

그런데 또 돈을 빌려준다고?

뱃 속으로 쌍욕이 불같이 치솟아 오르지만 애시당초 어차피 조진 인생, 착한 일 조금 더 해두면 지옥 갈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낮출 수 있겠지.

"병원이 어딘데"
"서울대병원"
"너 진짜 철판 깔았구나. 쯥"

지금 꽤 취했는데 갈 수 있을까 싶으면서도, 힐끔 눈을 떠서 보니 1/3병도 안 깠네. 생각보다는 덜 마셨다. 몸을 일으킨다. 냉장고로 가서 생수 500미리 한 통을 그대로 비운다. 그리고는 바로 또 화장실로 어기적 어기적 가서 방광을 비운다.

'뭐하는 짓이지'

스스로에게 적당한 답도 찾지 못하면서 주춤주춤 옷을 챙겨입는다. 그리고 집을 나서 택시를 잡는다. 비 온 뒤라 날씨가 꽤나 쌀쌀하다. 조금 두툼한 재킷을 입기를 잘했다.

"서울대병원이요"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하는 나. 머리가 빙글빙글 돈다. 잘하는 짓일까. 아니. 곧바로 답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구질구질 애 딸린 돌싱녀와 다시 엮이는 자체가 미친 짓이고, 거기에 돈 없다고 돈까지 부어주려는 이 짓은 정말로, 정말로 단언컨대 세상 어디에도 없을 호구 짓이라는 것을 안다. 정말 잘 안다.

'하지만'

사람이 이렇게 외로워지다 보면, 세상 어디엔가 내가 쓸모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반갑게 느껴진다.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하고, 내 무엇이 필요하다고 하면 그것을 한없이 퍼주고 싶어지는 것이 그런 외로운 호구의 마음이다.

'알아, 안다고'

승연과 엮이고 싶은 생각 별로 없다. 처음에 애가 있다는 사실을 숨긴 것은 이해했지만, 어쨌든 애가 있다는 사실을 안 이상 나도 그녀에게 꽤 차갑게 대했고 그녀도 그 이후로 아마 나와 두어번 더 만나고 "나를 만날 이유가 없다"며 나를 찬 거니까.

생각해보면 내가 좀 거시기한 건가 싶지만 어쨌거나 사람 마음 다 똑같은거 아닌가.

'시발'

이 와중에도 병원비가 얼마나 나올까 걱정하는 나는 도대체 뭘까. 그저 화려한 밤의 간판불빛들을 머릿 속에 아로새기며, 그렇게 택시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는 이 답없고 미래 없는 인연에 내 돈 쏟아부을 생각을 하고 있다.

오백만원까지라면 기부하는 마음으로, 천만원까지라면 연애 다시 시작한다, 그 이상이라면 그냥 단칼에 거절이라고 마음 속으로 조건 걸면서. 시발.

- 끝 -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들 망상

가끔 고가의 현대미술 작품에 관한 기사가 이슈가 되면 의례 비판적인, 아니 그것을 넘어 거의 비아냥 수준의 댓글들이 뒤따른다.

척 보아도 아름답다, 멋지다, 어떻게 그렸을까, 어떻게 깎았을까 같은 감탄이 흘러나오는 고전 미술과 달리 이게 뭘 말하고 싶은지조차 이해가 쉽지 않은 불친절한 현대미술이 문외한들에게 쉽게 이해 받기란 당연히 어려울 것이다. 애시당초 미술품이라는 것이 정량적인 가치 평가가 어려운 것이다보니 가끔 전문가들마저 속아 넘어가는 도발이나 미술적 실험에 의해 더욱 더 그러한 비판의 목소리는 설득력마저 얻는다.

그러나 관점을 살짝 다르게 접근해보면 재미있는 부분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현대미술은 눈속임이야, 장난이야, 허세질이야"라고 비판하는 네티즌의 삶 속으로 들어가보자.

오늘도 그는 인터넷의 수많은 글들을 읽으며 분노하고 낄낄댄다. 고가의 현대 미술품을 보며 "저거는 나도 만들겠네" 하며 혀를 찬다. 그리고는 즐겨 방문하는 유머 사이트에 접속한다. 조금 눈팅을 하노라니 요즘 한창 이슈가 된 한 인터넷 밈(meme)을 활용한 드립에 빵 터졌다. 방청소를 하러 들어왔던 엄마가 묻는다.

"뭐가 그렇게 웃기냐? 엄마도 같이 좀 웃자"

함께 웃고 싶긴 한데 설명이 어렵다. 이 밈을 설명하자니 그 밈이 형성되기까지의 흐름을 모조리 설명해야 할 판이다. 내가 즐겨하던 게임에 이런 캐릭터가 나오는데, 이 캐릭터의 명대사가 이거고, 이걸 이용해서 누군가가 인터넷에 꾸준글을 써왔는데 그걸 또 다른 누군가가 절묘하게 활용한 드립을 쳐서 대박이 된데다 이제는 전혀 다른 맥락과 상황에서 그 드립이 활용된다, 라는 것을 설명하기도 번거롭고 그걸 설명한다고 해봐야 그 전후 맥락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숙련이 없는 엄마가 웃을 성 싶지도 않다. 실제로 몇 번 비슷한 사례를 장황하게 설명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그게 뭐 웃기다고" 하는 시큰둥한 반응만 얻었다.

"아 엄마는 몰라도 돼. 어차피 설명해도 몰라"

엄마는 입을 삐쭉 대밀며 "그게 뭐 재밌는거라고" 하며 혀를 차며 문 밖으로 나선다. 그 말에 울컥한 그는 "뭘 모르니까 재미가 없지" 하고 닫힌 문 뒤로 중얼거린다. 그리고 마침 생각난 김에 그 밈의 유래가 된 게임의 후속작을 켠다. 마침 엊그제 출시해서 곧바로 질렀다.

…아마 방금 전 상황과 대사를, 조금 전 그가 비판했던 미술품의 작가와 미술 전문가가 보고 들었다면 "그래! 그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고전 미술에서 현대 미술로 넘어가면서, 수많은 작가들의 실험과 도전, 그리고 어떠한 분명한 경향성에 대한 도전과 참신한 아이디어에 대한 맥락적 이해가 없이 감흥이 있을 리 없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에 대한 새삼스러운 해설이다. 또한 이것은 세상 모든 '프리미엄'에 대한 존중이고 접근의 기본방식이기도 하다. 누군가에게는 똑같은 그저 "비싼 한끼 식사"일 뿐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치열한 고민 끝에 완성된 완벽한 맛의 성찬을 멋진 공간에서 기분좋게 접하는 시간"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비싼 천 쪼가리"가 누군가에게는 "누구나 생각했지만 그 이전의 누구도 감히 접근하지 못했던 색다른 감각적 도전"이기도 한 것이다.

식재료의 선택과 조리법, 색다른 재료와의 조합, 코스에서의 순서, 플레이팅에 대한 예술적 고민, 기존의 틀에 대한 비틀기 등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접근이 가능하다면 파인다이닝에서의 식사도 마치 게임의 챕터 리뷰하듯 즐겁게 접근이 가능할 것이며, 사실 그 모든 것에 대한 이해가 없다 한들 타인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만 있어도 "비싸빠졌네"보다는 "맛있다" 라는 순수한 평이 가능할 것이다.

물론 세상 모든 감흥도 결국 '어쨌든 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라는 생각에 모처럼 살짝 열어가던 마음의 문을 굳게 걸어잠그기도 하지만, 그러한 거리감을 그저 삐딱한 심보의 탈을 쓰고 욕하기에 앞서서 "왜 누군가들은 그것에 그리도 열광을 할까" 하는 최소한의 존중을 갖춘다면 훨씬 더 나은 교양과 이해의 폭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게임과 만화 보는게 뭐 그리 나쁜 거라고 그렇게들 나쁘게만 보시나요?" 라고 울먹이며 항변하면서도, 현대 미술과 패션, 해외여행, 순문학 등 또다른 취미-문화에 대해 편견 어린 몰이해와 조롱, 비난을 미친듯이 쏟아내는 '어린 꼰대'들은 한번쯤 스스로의 모습들을 뒤돌아 볼 필요가 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이의 연인, 배우자, 가족, 친구의 취미와 문화생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고. 나 역시도.

거악토론 소설

"정말 이대로 우리 괜찮은 겁니까?"

지옥 만마전 긴급 정무회의. 일만에 이르는 거악의 정점들이 준엄히 자리잡은 가운데, 최근 불거지고 있는 '인간계에 대한 악행총량 역전상황'에 대해 열띈 논쟁이 이어지고 있었다.

"모처럼 지상에 크게 헬게이트가 열렸다고 해서 '어디 간만에 한번 인간들 맛 좀 보고 올까?' 하며 기분좋게 현장에 나가보면, 세상에, 여기 계신 상급악마님들 한창 뛰어다니던 현역 시절보다 더 지독한 놈들이 일 저질러놓고 웃고 있습니다. 요즘 정말 일하다 보면 진짜 도저히 안 믿겨서 '저거 인간 맞나? 혹시 지금 우리 윗 분 중에 누가 지금 강림하신건가?' 싶어서 몰래 속삭여 본 적도 있을 정도입니다"

현장의 심각한 상황을 알리기 위해 참고인 격으로 초대받아 불려나온 현장 실무 악마들이 하나둘씩 증언을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우선 제 생각으로는 교육이나 메뉴얼부터가 너무 실무와 괴리되어 있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저희 지금 교과서 보면 '신앙심이 약한 이들부터 탐색을 시작하라'하고 되어 있는데, 아시다시피 현장에서는 정 반대로 실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신앙심 제일 투철해 보이는 놈들부터 찾아보면 지독한 놈들 하나둘씩 나온다'라고요. 이게 악마학교랑 현장 실무랑 완전히 이렇게 괴리되어 있다보니까, 막 3백년씩 교육 받고 오신 꼬리 긴 분들이 오히려 현장 바로 투입된 최하급악마들보다도 일을 더 못하는 웃기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단 말입니다"

다들 보고 들은 것이 있다보니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옆에 있던 또다른 다른 악마가 입을 열었다.

"그것도 문제고, 개인적으로 매니저 업무도 함께 하다보니 느끼는게, 지금 무서운 속도로 영혼회수율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예전 같으면 1년에 악마 한 명당 막 수백개씩 영혼 회수해 왔는데 요즘 솔직히 1년에 두세건 계약도 어렵습니다. 예전 같으면 간절히 '그 양반'한테 기도하다가 도저히 안 이뤄지니까 욱하는 마음에 악마한테 비는 인간들이 있었잖습니까? 근데 이제는 사람들이 기도 자체를 안할 뿐더러, 더 심각한게 신념 자체가 없다보니 기도빨이 우리한테까지도 안 전해지는 겁니다. 인간들 정신이 너무 심하게 나약해져서, 이제는 우리들 악마들조차도 기원을 느끼지 못하는 상황인거죠"

그 말에는 정말 다들 "아" 하는 탄성을 느낄 정도로 공감했다. 하지만 그 말에는 지옥국 정책과장을 맡고 있는 상급 악마가 반박했다.

"에, 저도 그 상황에는 어느 정도 공감을 합니다만, 인간들 정신이 나약해지고 황폐해질수록 타락하기 쉽다, 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악마학개론 첫페이지에 나오는 아주 기본적인 내용입니다. 말씀하셨다시피 영혼의 직접 회수율이 떨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에 반비례해서 사후에 바로 우리 지옥으로 들어오는 폐급 인간쓰레기들은 지난 100년 전에 비해서 거의 스물다섯배가 됐거든요? 그 부분은 정책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의도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 부분에 대한 점은…"

그 말이 신호탄이 되었다. 지옥국 내정을 맡고 있는 또 다른 하급악마가 갑자기 흥분하며 그의 말에 반박했다.

"형벌국에서 일하고 있습니다만, 바로 그 부분이 지금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지금 정책적으로 너무 과도하게 인성 쓰레기 인간들을 양산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지금 어느 정도냐면, 지옥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인간들이 너무 많아서 200명 정원인 유황탕에 지금 15,000명이 넘게 집어놓고 있습니다. 이러다보니 유황탕 온도가 낮아져서 그냥 온천욕 시켜주는 상황이 되고 있구요, 고문악마들은 지금 5년째 파업 중입니다. 지금 감시탑에서 농성하는 것에 지금 그 누구도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고 있는…"

예민한 사회적 이슈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갑자기 여기저기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회의를 주최한 벨제뷔트가 "그만" 하며 좌중을 조용히 시켰다. 모두가 조용해지자 재무국의 상급 악마 하나가 우려의 발언을 시작했다.

"제가 느끼는 한가지 아쉬운 점은 우리가 인간 국가 사이의 행복격차 벌린다는 명목 하에 일부 국가들에 대한 유혹부양책을 장기간 실시하고 있는데, 이게 다소 과한 부분이 있는 것은 아닌가 부분입니다. 요즘 선진국에서 태어나는 인간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아주 시시한 걱정들을 하고 삽니다. 끽해야 남보다 더 잘 살려면 어떻게 해야하나, 뭘 더 쳐먹으면 맛있을까, 뭘 하면 더 멋져보이나, 내 탐욕을 끝까지 채우려면 어떻게 해야하나, 하는 고민들을 하고 살죠. 물론 이 과정에서 정말 유달리 대단한 데미데블들이 탄생하기도 합니다만 큰 고생들을 안 하다보니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는 끔찍한 짓을 분명 덜하고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예전처럼 빵 한 조각 때문에 사람 죽이고 이런거 보기 힘들단 말입니다"

나이 든 악마들이 그의 말에 크게 공감을 했다. 재무국 악마는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저희 재무국이 올 하반기부터 슬슬 자본계 실무진 통해서 금리인상 시작하고 경기압박 시작했는데요, 문제는 인간계 파견나가 있는 자본계 실무진들도 각자의 입장이 있고, 인간들도 아시아 금융위기다, 서브프라임이다 하면서 겪은게 있다 보니까 예전처럼 일사분란하게 도미노식으로 세계경제 박살내는게 잘 안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럼 당연히 이게 정책쪽 악마 실무진들이랑 연계를 해서 미리 다 넘어갈 수 있도록 딱 세팅이 되어야 하는데 이 부분에서 엇박자 나는 부분이 아주 많습니다."

난데없이 한방 얻어맞은 인간정치국 악마들이 손을 번쩍 들며 반박을 했다.

"에, 저는 미주권 정치계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지금 말씀하신 부분, 일견 공감되는 부분도 있는데요 다만 이게 전부 저희 측 문제가 아니라는 점은 지금 확실히 밝혀두고 싶습니다. 이게 지금 다른 분들도 오해하고 계시는데, 이를테면 이겁니다. 무슨 우리 악마계 애들이 일을 엉망으로 해서 손발이 안 맞아서 딱딱 필요한 정책이 추진 안된다? 그럼 이런 생각들을 왜하냐, '인간 정치인들은 모두 우리 입김 하에 일하는 애들이다' 이렇게 생각하시는데, 우리 그렇게 일 안 한지 50년도 넘었습니다."

정치국 악마들이 크게 공감하며 웃기 시작했다.

"옛날에는 그랬죠. 네로부터 히틀러도 그랬고. 권력 가진 또라이 대가리에 이상한 생각 박아놓고 일 크게 치루게 만드는거. 지금도 그렇게 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일 안 합니다. 왜냐? 그런 식으로 하다가 못 써먹게 된 정책들이 지금 몇 갭니까? 군국주의, 전체주의, 독재 뭐 이런거 이제 어지간한 인간 나라들은 최소한 교육적으로는 그런거 하면 안된다고 가르치거든요? 물론 지금도 옛날식으로 일하는 계발도상국 파견 악마들은 그렇게 하지만, 대가리 굵은 선진국에서는 그런거 잘 안 통하거든요. 이미 극우, 극좌 이거 다이렉트로는 둘 다 다 안 통합니다. 아예 그래서 저희가 아 이거 자꾸 이러다가 하나둘씩 막히면 나중에 정작 필요할 때 못 써먹겠다 싶어서 아예 정책을 바꾼게 이겁니다"

그는 머리 위에 링을 슥 그렸다.

"저쪽 애들 맨날 입에 발린 말들 하잖습니까. 지들도 못 지키는 말들. 남한테 싫은 소리 하지마라, 남 존중해라, 소수자 무시하지마라, 건전하게 살아라 이런거. 이거 캠페인들 하는거 보고 딱 떠올린게 이겁니다. 그럼 아예 우리가 이거 역으로 완전 미친듯이 밀어주자, 어디 정말 제대로 되기는 하나 보자. 당연히 안되죠. 인간들이 그게 가능하면 지옥이 어떻게 있겠습니까. 바로 역풍 불고 대립 세력 일어나고 이제 그런 말들 하는거 자체가 특정 세력으로 규정되고 눈치보이게 만들었죠. 자, 그럼 이제 판이 어떻게 돌아가냐, 신개념 극단적 대립구도 완성입니다. 이제 이쪽 당이 하는 일은 저쪽 당은 무조건 눈 감고 반대하는거고, 반대도 마찬가지고. 옛날에는 그게 신분 단위로 대립했다면 이제는 아예 사상적으로 완전히 쪼개놓은거죠. 그러다보니까, 물론 말씀하신 것처럼 일사분란한 정책 추진이 잘 안되는 면이 있습니다만 사실 그거로 인한 손해보다는 극단적 대립으로 인한 인간세계의 사회적 소모가 훨씬 더 크거든요"

정치국 악마가 자못 자랑스럽다는 듯 말했지만, 너무 깊이 들어간 이야기여서 그런 것일까. 좌중이 잠깐 조용해졌다. 하지만 곧 또 다른 실무 악마가 보다 실무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무회의 같은 말씀 와중에 이건 너무 지엽적인 이야기가 아닐까 싶어 조금 그렇긴 한데 굳이 또 말씀 드려보자면 요즘 저희 악마들이 현장에서 느끼는 또 다른 어려움은… 인간들 너무 똑똑해진거 아닌가 하는 부분입니다. 아까 영혼회수율 이야기도 나와서 말인데, 예전 같으면 떡밥만 던져도 바로 말장난에 속아서 영혼만 날리는 인간들 많았는데 요샌 아니거든요. 어찌나 영악한지 계약 꼼꼼히 살피고 말장난 같은거 다 잡아내고 그래서 옛날처럼 말장난 그런거 안 통하거든요. 오히려 계약 이행하다가 우리가 인간 말장난에 속아서 재산 털리고 영혼 회수도 못하고 인생 조지는 악마들이 지금 하나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근 수십 년간 크게 불거진 문제를 들고 나오자 다른 악마들도 고개를 새삼 끄덕였다.

"근데 이게 왜 그렇게 됐냐? 바로 우리 악마들이 데미데블 좀 만든답시고 사기 기법 전수하고 그 놈들로 크게 한탕 땡기게 만들고 이러다보니 피해 입은 인간들이 점점 안 속으려 진화한거거든요. 쌍끌이 어망으로 어족자원 박살내는 짓이랑 뭐가 다릅니까 이게. 어느 정도냐면, 중점 공략지역 '대한민국' 같으면 진짜 한 집 건너 한 집 꼴로 사기경험 있는 수준입니다. 아니 정도껏 해야죠. 물론 다들 실적 문제가 걸려 있으니 영업방식 쉽게 바꾸기 어렵고, 환경적으로 특정범죄들이 유리한 나라들이 있긴 한데 그래도 이런 식으로 일하다보면 점점 일하기 더 어려워질 겁니다"

다양한 의견들이 정말로 기탄없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현재 지옥국의 정무적 문제점부터 현장의 고충까지. 모두가 지옥의 발전과 거악의 승리를 위한 충심 어린 의견들이었다. 흐뭇한 얼굴로 좌중을 훑던 최고장관 벨제뷔트는 문득 아무 말 없이 앉아있던 무력부 악마들을 향해 물었다.

"무력부 쪽에는 별 의견 없는가"

지옥 악마회에서 항상 으뜸 발언권과 위상을 가진 무력부. 인간의 전쟁을 부추기고 그들을 타락시킴은 물론 궁극적으로는 언젠가 있을 선과 악의 최종 결전, 아마겟돈을 준비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가진 지옥에서 가장 중요한 부서. 헛기침을 하며 잠시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던 무력부 악마들이었지만, 그 중 프로파간다 임무를 맡고 있는 무력부 홍보부 하급 악마 하나가 그들을 대신해 대답했다.

"우선 현재 수행 중인 대형 전쟁 리스트로는 아프간 전쟁, 이라크 전쟁, 보코하람 반란, 시리아 내전이 있으며 중소형 전장으로는 소말리아 내전, 터키-PKK 분쟁, 와지리스탄, 멕시코 마약전쟁, 리비아 대전, 예멘 내전, 시나이 반란, 남수단 내전 등이 있습니다. 현재 대형 전장은 몇 군데 추가로 준비 중입니다만 정책적 고려가 필요한 부분이 있으며…"

하지만 벨제뷔트는 혀를 찼다.

"그런 것을 묻는 것이 아닌데"

그러자 하급악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압니다. 그러나 저희가 답변 드리고 싶은 부분은 사실 다른 쪽에 있습니다. 이제 예전과 같은 대형 전쟁이 발생하면 핵무기 사용이 불가피하고, 그때의 인명피해는 복구가 쉽지 않은 수준으로 인류의 숫자가 격감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 경우 일시적으로는 망자들이 늘어나겠지만 우리가 아마겟돈을 대비하여 지속적으로 준비해야 할 타락한 영혼들의 숫자를 보자면 장차적으로 손해일 것입니다. 현재처럼 서서히 인간들 전체가 타락해나가는 쪽이 우리의 궁극적 목적에는 보다 유리합니다."

'궁극의 악은 전쟁'이라고 믿는 원로 악마들 사이에서 "크흠" 하는 불편한 헛기침들이 터져 나왔고, 반대로 사상전쟁을 수행 중인 문사철 악마들은 꼬리를 흔들며 그의 말을 반겼다. 사실 저러한 발언이 무력부에서 먼저 나왔다는 것이 매우 놀라운 일이지만 지옥의 정책은 이미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었다.

"너무 우울한 말씀들만 터져 나오는 것 같아서 저희가 기분 좋은 소식 하나만 알려드리겠습니다"

무력부 첩보실 상급악마 하나가 좌중의 분위기를 수습하듯 슥 일어났다.

"작년 기준 현재 지옥으로 편입한 타락한 인간의 숫자는 약 5천 9백만명으로, 작년 대비 3% 증가한 수준입니다. 그에 반해 천국으로 입성한 인류는 12명으로, 현재 지난 100년 통합 채 1,000명이 안되는 상황입니다. 인류의 타락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수준이며 이러한 추세가 100년만 더 유지된다면 이제 아마겟돈에서도 우리가 확실히 유리한 숫자가 됩니다."

전쟁 수행의 최종적인 무기는 결국 머릿수. 타락한 영혼이 많으면 많을수록, 악의 군세는 강성해질 것이며 싸움의 치열함은 더욱 격렬해질 것이다. 모두가 흐뭇하게 웃는 가운데, 신학부 종교심판관 악마가 물었다.

"음, 그렇다면 오히려 조금 위험한 상황 아닐까요. 인간이 타락에 끝에 이르면 또 한번 대홍수가 있을지 어찌 압니까"

대청소. 그 말에 다들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 못했다는 듯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의외로 첩보실 상급 악마는 빙긋 웃었다.

"이미 지금도 우리가 머릿 수에서는 압도적이라 전력에서 크게 불리한 것은 없는 수준입니다. 지난 100년간 인류의 타락은 도를 넘어선 수준이니까요. 게다가 대홍수급의 재앙이 일어나면 그때 일어날 인류의 아귀다툼과 타락은 정말 볼만할 것입니다. 꾸준히 타락하여 140억의 영혼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한방에 70억 받느냐 수준의 차이일 뿐, 우리 입장에서는 크게 나쁠 것 없는 딜입니다. 그리고 '그 분'도 옛날에 소돔, 고모라 인구 한 오백명 죽이는 것은 쉬워도, 지금처럼 한방에 70억 죽이는 것은 부담이 있을 겁니다"

모두가 그 말에 안심하며 빙긋 웃었고, 앞선 수많은 토론내용의 우려를 일시에 잠재우는 인류의 끝없는 타락이 가져올 미래 전장의 승기에 만족해했다.

"그럼, 기분좋게 오늘의 회의는 여기에서 끝내기로 하고, 오늘 나온 다양한 의견들은 각 부처 상급악마들이 실무에 반영하여 올해는 더이상 '인간보다 착한 악마'니,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인간보다 더 나쁜 짓을 할 수 있습니까' 같은 부끄러운 소리는 하지도 듣지도 말도록 합시다. 이상!"

벨제뷔트의 회의 종료 선언과 함께 모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바쁘게 인간계로 흩어졌다. 그들은 오늘도 내일도 먼 미래도, 인류의 곁에서 그들의 죄악을 부추기며 영원한 구원에서 멀어지게 할 것이 틀림없다. 언제나 성실히 그래왔듯이.

- 끝 -

"또 도박이야? 진짜 미쳤어?" 소설

이제는 숫제 비명에 가까운 선아의 악. 나 역시 "별거 아니라고! 그냥 잠깐 재미로 한거야, 10만원도 안 했어" 하고 말해보지만 입 다물고 있는 것만 못하다. 결국 집안 살림이 이것저것 아주 골고루 박살이 나고 아랫집에서 신고한 경찰이 출동하고 나서야 간신히 진정이 된다.

"죄송함다"

피로에 절은 목소리로 간신히, 경찰 출동에 구경나와 나를 벌레보듯 쳐다보는 아파트 같은 복도의 동네 사람들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내고 나는 그렇게 현관문을 닫는다. 후. 이미 이틀밤을 새며 꾼들과 밤새도록 달린 나는 죽도록 피곤하다. 선아와의 싸움까지 견뎌낼 체력과 정신머리는 없다. 바로 네 시간 전, 1억 3천까지 올려놓았던 도박빚을 마지막 한방으로 역전시켜 제로로 만들고 심지어 두둑하게 재미까지 본 이 세기의 도박사, 리빙 레전드 오원욱의 전설을 어디 알릴 곳이 없다는 것이 그저 아쉬울 뿐.

"뭐야"

잠시 선 잠이 들었다가 눈을 뜬 내 앞에는 커다란 캐리어에 백팩까지 맨 선아의 모습이 보인다. 잠에 취한 나는 "뭐냐고" 하고 목소리를 다시 높여보지만, 선아는 나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다 그저 "잘 살어" 하는 한 마디와 함께 문을 나섰다. 잡아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차마 잡을 낯이 없었다.




원점 




장담컨데 선아만큼 나를 좋아해 준 여자는 없다고 확신한다. 아닌 말로다가 여자가 남자한테 해줄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준 여자다. 마음으로든 육체적으로든. 그거면 된거다? 아니. 내츄럴 본 쓰레기인 나는 바람까지 피워댔다. 한번은 다른 년을 임신, 낙태까지 시켰다. 솔까 내 애 아닌 것 같긴 해도, 어쨌거나. 안다. 어쨌든 나는 답 없는 쓰레기라는거. 얼마든지 욕해도 상관없다.

그런데 제 3자가 들어도 욕 나올 그런 나같은 개쓰레기를 정작 당사자인 선아는 이해해줬다. 왜냐고 묻는다면 사실 나도 할 말이 없다. 나도 모르거든. 알랭 들롱이 그랬다던가. 온갖 바람을 다 피우고 다녀도 여자들이 이해해주고 줄줄히 따랐다고? 근데 그건 알랭 들롱의 이야기다. 그 놈은 그러고도 남을 만큼 잘 생겼지만 나는 그게 아니란 말이다.

게다가 그게 끝이 아니라 선아는 내 도박빚 6천을 갚아주고 차를 사주고 오갈 데 없어진 나를 동거까지 시켜줬다. 세상 다시 없을 성녀다. 성녀. 물론 나라고 해서 일방적으로 받기만 한 건 아니고.




"갈 데 없으면 여기서 당분간 살아도 돼"
"정말요?"
"사고만 안 치면"

정확히 13년 전. 우리는 채팅앱으로 만났다. 모처럼 가랑이 사이 간질간질하던거 싸게 좀 풀 요량으로 조건만남 방을 열고 기달렸는데 나온게 바로 선아였다. 근데 암만 인간매립지 오원욱이래도 딱 봐도 민짜, 그것도 좀 놀게 생긴 애도 아니고 눈도 못 마주치면서 "미안해요" 연발하는 애는 '이거 아차하면 좆되겠는데?' 싶어 고대로 스돕하고 자세히 캐물어봤다. 역시나 그거였다. 쓰레기 애비의 개지랄 피해서 가출한 불쌍한 핏덩이. 나와 같은 부류의 짐승이다. 타고난 개악질은 아니고, 본성은 괜찮은데 환경이 폐끕이라 인생 좆된 애들.

"야, 밥이나 먹자"

떡은 집어치우고 그냥 옆 앞 맥데리아 햄버거를 사줬다. 세상 천지에 나는 싸구려 새우버거를 그리 맛나게 쳐먹는 애는 지금도 본 적이 없다.

"야 그러다 체해, 미친 년아. 안 뺏어먹을테니까 천천히 먹어. 쪽팔려 븅신아. 하나 더 사줘? 뭔 거렁뱅이처럼 쳐먹어 기집애가"
"미안해요"

그렇다고 내가 무슨 키다리 아저씨도 아니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아름다운 이야기처럼 그렇게 이 아이를 신주단지처럼 소중히 보살피고 지켜줘가며 오늘날까지 데리고 있었느냐 하면 그건 당빠 아니다. 나도 생각은 있어서, 아는 형님 때문에 즐겨 다니던 바닷가이야기 게임장에 취업을 시킬라고 그랬던거다. 일단 팔다리가 길쭉길쭉한게, 사이즈는 좀 나왔거든.

"야, 와꾸 나오네. 거봐, 이거지"
"저 근데 진짜 이런 데서 일해도 되요?"
"안되는게 어딨어. 야, 현재그룹 정병철은 니 나이에 현재그룹 세웠어"
"진짜요?"
"아 따지지마, 대충 그렇다고"

대졸 초임 애들이 어중한한 중소기업 들어가서 월급 180만원 받고 일하던 시기에 나는 선아를 게임장에 취업시켜서 260에 팁까지 추가로 받는 일자리를 소개시켜 줬다. 물론 그리고 먹여주고 재워준다는 핑계 하에 150을 떼갔고, 나는 그걸 요긴하게 생활비로 썼다. 선아가 좀만 더 약아 빠졌어도 그냥 그 담달에 튀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애가 멍청한건지 착한건지 나한테 그리 돈을 상납하면서도 걔는 내 곁에 있었다. 하기사 지가 튀면 그런 돈을 어디가서 벌겠으며 또 누가 재워줄까. 나보다 더한 쓰레기가 얼마나 많은데.



"그럼 닌 결국 중졸이네?"
"오빠는요"
"나? 난 고퇴지"
"뭐래, 그게 그거지"
"그래도 나는 3학년 2학기 때 짤렸던 거지만 니는 이제 2학년 올라가는건데 완전 끕이 다르지. 군대로 치면 병장이 의가사 전역한 거랑 일병이 탈영한 수준의 차인데"

당시만 해도 나는 그저 한달에 말밥이나 한 30만원 주고 다니는 칠칠이였다. 온갖 도박 종류를 다 좋아하긴 해도, 쩐이 없어서 뭐 제대로 판에 끼지도 못하고, 그냥 제법 그렇게 순수하게 놀았다.

그러니까 선아가 열심히 벌어서 나한테 떼이는 백오십 중에 삼십은 말밥 주고 이십은 술담배로 날리고 오륙십은 떡치는데 쓰고 나머지는 밥 쳐먹는데 썼다. 물론 나 혼자 먹는거. 가끔 잔돈 생기면 그걸로는 머리 파마하고 옷 사입고. 그리고 진짜 생활비는 선아가 벌어오는 돈으로 우리 둘이 먹고 살고.

"근데 너는 나 안 무섭냐? 딱 봐도 난 존나 쓰레긴데"
"안 무서워요"
"나 여자들 그냥 막 따먹고 바로 버려. 세 번 떡치는 애가 없어. 레알 폐급 괴물이야"
"조룬가 보네"
"뭐?"

선아는 생각보다 빠르게, 스펀지처럼 좍좍 이쪽 세계 스타일을 흡수했다. 애교도 배웠고, 화끈한 말발과 너끈한 넉살도 갖췄다. 어설픈 동네 똥양아치인 내가 멋적을 정도로.  

"이제 어떻게 해요?"
"뭘 어떻게 해. 알바해야지"

선아가 일하던 업장이 단속으로 문을 닫았다. 아는 사람 통해 구왕동쪽에 있는 다른 가게에 취업시킬 수도 있었겠지만 소문이 좆같아서 안 보냈다. 물장사 권유해서 팔아 먹는다는 소문이 있어서. 

"돈이 안되요"
"원래 그런거야 븅신아"

한달에 근 300만원을 훨씬 넘게 벌던 선아는 생각보다 편의점 알바 일에 적응을 잘 못했다. 월 300 넘게 벌다가 꼴랑 60 받고 일하려니 어디 일할 맛이 나겠는가. 그렇다고 민짜를 술장사 보낼 수는 없었고, 마침 눈에 들어온게 전화방이었다.

"야, 이게 좀 좆같긴 한데, 어차피 니는 나랑 살면서 오염되서 어지간한 폐급 더러운 이야기는 좆도 아닐거야"
"아 제발 말할 때 그 놈의 좆 좀 그만"
"오케이, 그래. 바로 그거라고"

암만 해도 바닷가 이야기만큼의 효율이 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생활비 만큼은 벌어올 수 있는게 선아였다. 게다가 꾸준히 일 잘한다고 사장님한테 30만원씩 추가금까지 받아왔다. 선아는 전화방에서 2년을 더 일했다. 남들은 좆같아서 하루하고 관두는 곳을.

"야 근데 그 사장님이 너한테 집적댈라고 돈 더주는거 아냐?"
"사장님 여자에요"
"아 그래? 존나 착한 여자네. 돌싱? 이쁘냐? 오빠가 한번 들이대볼까?"
"환갑 넘었어요"
"시발. 잠깐, 아아! 그 너 데려다 줬을 때 그 존나 독하게 생긴 아줌마가 사장이야? 난 그때 거기 뭐 아래 다방 아줌마가 알바 뛰러 올라온 줄 알았네. 그랬구만"
"근데 더 놀라운거 사장님이 간드러지는 목소리 하면 아저씨들 완전 미쳐요"
"그 바닥이 원래 그래. 나 저번에 세방이 새끼랑 놀았던 노도 아줌마 있잖아, 어째 와꾸가 묘하게 애매하다 싶었는데 목주름이 시발이라 물어보니 옘병 나이가…"

어쨌거나 선아가 벌어오는게 생활비였고, 그 돈으로 반지하 월세방에서 우리 둘의 기묘한 동거가 유지되는 거였다면 내 직업은 좀 쌩뚱맞은 거였다. 아니, 나 답다고 해야되나. 하우스 뽀이였다. 선아 앞에선 뭔 달건이라도 되는 양 허세를 부렸지만 실상은 딱 그 수준.

"야, 욱아 니 오늘 함 낄래?"
"제가요?"

가끔 팁이나 좀 받고, 쓰레기들 뒤 좀 닦아주고 그게 일상이었다. 근데 내가 하우스의 패밀리들하고 좀 선을 두면서도 가까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내가 하우스 사장 아들의 친구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 아들이 사람 하나 반 병신 만든거 대신 죄 뒤집어 쓰고 학교까지 잘려준 의리있는 시다바리.

"아이다 댔고, 오늘 먼저 가봐라"
"예"

나는 학교 다닐 적에, 용범이와 친하게 지냈다. 정확히 말하자면 똘만이에 가까웠지만 어쨌거나 대외적으로는 친구였다. 집이 도박장 하우스 운영하는 새끼였으니 우리 또래가 뭐 나이다스 신발 한 켤레에 벌벌벌 떨 때에 이미 안마를 다닌 애다. 그 옆에서 콩고물도 많이 떨어졌고, 그래서 시다바리 노릇까지 해가며 잘 같이 다녔는데, 어느날 용범이랑 그 애비 새끼가 하루는 나를 불러다 놓고 제안을 해왔다.

"용범이가 사고를 하나 쳤는데, 딸내미 하나를 반 빙신 만들어 가지고…"
"원욱아"

이 병신새끼가 별 이유도 없이 길가던 여자애를 후드려 까고 얼굴을 아예 갈아버렸단다. 대신 그 조건은 현찰 3천. 같이 일하는 건달 애들한테 떠넘기면 되는거 아니냐니까 걔들이 들어가면 일이 커지고, 또 여자애가 자기한테 가해한 사람이 교복 입은 학생이라는걸 아는 상황이라 구라도 어설프게 칠 수가 없는 것이란다.

"그럼 그렇게 할게요"

솔직히 나야 일이 어긋나도 초범이고, 당장 돈이 급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라 간경화 투석에 돈이 지랄 같이 들어갔기 때문에. 그리고 역시나 예상대로 나는 학교에서 잘리고 보호처분 8호, 소년원 20일 처분을 받았다. 소년원에서 나온 직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남은 돈은 없었다. 어쨌거나 그 이후로 나는 소년원에서 나온 뒤로도 요 하우스에서 꽤 오래 일을 했다. 삼촌들도 내가 의리 있는 새끼라고 다들 좋아했다.



"이 오빠가 얼마나 귀신 같은 감을 가진 줄 아냐?"
"뭐 맨날 돈 잃으면서"
"야, 아홉 번 잃어도 한번 따면 싹 본전 복구하는게 내 스타일이야"

언제 한번 선아랑 같이 경마장에를 갔었다. 그리고 그 날이 내 인생의 대박이 트인 날이었다. 선아가 이름만 보고 건 똥말이 쌍승대박이 터져 만마권이 됐다.

나는 당장 하우스부터 관뒀다. 사유는 적당히 데리고 다니던 여자애를 임신시켜서, 걔네 집에 데릴사위 들어간다는 핑계였다. 사실 혹시 막 무슨 건달들 관둘 때처럼 무섭게 잡을까봐 좀 센 핑계를 댄건데, 다들 낄낄대며 돈까지 쥐어주며 좋게좋게 보내줬다. 은근히 시원섭섭했다. 그리고 더이상 엮이기 싫기도 했고 집값도 더 싼 경기도 외곽으로 이사를 했다.



기천만원, 솔직히 지금 눈으로 보면 전혀 큰 돈이 아니지만 적어도 떼깔을 바꾸기에는 충분한 돈이다. 특히 그건 남자보다 여자한테 더 크게 작용한다. 선아를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바꿔봤다. 새삼 선아가 여자로 보였다. 그때 문득 깨달았다. 그녀는 근 3년을 내 옆에 있어준 여자라는걸. 물론 그에 대한 내 첫 반응은 동물적이었다.

"야, 마셔"
"오빠 나 취했어요"
"아 마셔"

그렇게 데리고 잤다. 

"혹시 나 처녀 아니라서 실망했어요?"
"뭐래 븅신이. 설마 처녀였으면 그걸로 나 옭아맬라고 그랬냐?"
"아니요, 뭐래 진짜. 븅신은 지가 븅신이네"
"너 은근 말이 점점 짧아진다? 야, 한번 잤다고 나랑 뭐 연애라도 하는걸로 착각하면 니 곤란하다? 나 완전 미친 차가운 남자야"
"아 병신"

진짜 웃기기도 한게, 지금 눈으로는 절대 큰 돈이 아닌데, 그때 나는 그게 엄청 큰 돈이어서 막 인심이 엄청 후해졌었다.

"야, 너 검정고시 학원 다녀라"
"왜요"
"뭐가 왜요야. 나중에 니가 자식 낳았는데, 어? 엄마도 중졸이고 아빠도 중졸이면 씨발, 애새끼가 바로 포기하고 저기 달건이들 있는데 생활하러 들어가지 않겠냐? '행님들 안녕하심까, 오늘부터 저 식구 하겠씀돠' 이러면서"
"내가 중졸인건 그렇다고 치고 왜 내 애기 아빠가 중졸이에요?"
"뭐?"
"헐, 오빠 나랑 결혼하고 싶어요?"
"아니 씨발 그냥 예가 그렇다는거지, 뭔 내가 니랑…"

어쨌거나 선아는 그렇게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나도 그 돈으로 면허를 땄고, 한동안 사치도 부렸다. 그리고 커플반지도 했다. 돈 아까워서 18K로.



"오빠 싸인 코싸인이 뭔지 알어?"
"들어봤어"
"뭔데? 말해봐봐"
"아 들어만 봤다고"
"존나 웃겨"
"그럼 닌 로얄 스트레이트 플래쉬가 뭔지 아냐?"
"또 도박 이야기네"

뒤늦게 알았지만 선아가 극도로 혐오하는게 바로 도박이었다. 그 애비가 도박으로 폐인된 케이스라. 그래서 사실 내가 도박장 뒤 봐주고 다니고, 도박으로 돈 다 쳐날리는걸 극도로 혐오했다고 하는데, 그게 연인 관계로 발전되자 점점 태클을 걸어왔다.

"야, 오빠가 어디 잃는거 봤냐"
"어 많이 봄. 진짜 한번만 더 했단 봐. 남은 천만원 싹 다 불태울테니까"

슬금슬금 돈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불과 1년 반 만에. 4천을 더 썼다. 씀씀이가 커지니 돈 나가는게 무서웠다. 선아는 똑똑한 애였다. 검정고시를 금방 떼더니 어디서 경리부기를 배워와서는 시와공단에서 취업까지 했다.

"얼마준대?"
"점심 나오고 저녁 나오고 220만원"
"괜찮은데?"

선아가 점점 사회인으로 성장할 무렵, 그 즈음해서 나는 슬슬 다시 병신병이 도지고 있었다. 하루종일 늦잠 자고 일어나서는 오전 나절 리지니 좀 하다가 나가서 당구장 갔다가 밤에 술 한병 땡기고 들어오는 그런 생활. 물론 역시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은 선아였고 그 와중에 슬금슬금 빠져나가는 돈들은 경마로 번 돈들이었다. 게다가 당구장에서 우연히 만난 질 안 좋은 무리 덕분에 맨날 이기지도 못하는 내기볼링에 빠졌다가 그 후에는 외노자들 끼는 하우스에 끼어서는 결국 도박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오빠 어제 거기 또 갔지"
"안 갔거든?"
"뭐가 안 가. 갔잖아"
"아 씨발 안 갔다고!"

갔다. 사실 이 무렵의 내가 왜 그랬는가에 대해서는 나도 잘 이해가 안 가는데, 정확하게 말하기는 좀 뭣해도 점점 어려운 환경을 딛고 일어서는 선아를 보며 느끼는 묘한 열등감이랄까, 그런 의식이 나를 사로잡은 것이 아닐까 싶다.

"그보다 어제 회식 때 옆에서 낄낄댄 새끼 누구야?"
"아 상무님이라고 말했잖아. 그 분 결혼해서 애가 셋이야. 그리고 대머리야"
"말만 그렇고 젊은 새낀 줄 어떻게 알아"
"아 쫌!"

도박장 가는 걸로 바가지를 긁히면 곧바로 회사에서의 행실이 어쩌고 하면서 선아의 직장생활을 욕했다. 물론 선아가 바람 같은 것을 피우는 애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 반복하던 나의 억지주장은 점점 나 스스로를 세뇌하기 시작했다.

"야, 폰 까봐"
"아 왜 또 그러는데"
"까보라면 까봐"

그리고 또 스스로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 괜히 행패를 부리고 지랄을 놨다. 심지어 술김에 선아 회사동료한테 전화를 걸어서 욕을 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선아는 세 번을 이직을 했다. 나 때문에. 내 억지와 내 행패 때문에. 사실 그 즈음해서는 날 떠날만도 하건만 의외로 선아는 어느 시점이 되면 "그래, 오빠 말대로 그냥 관둘게, 알았어" 하며 순순히 회사를 관뒀다. 내 억지에 질리기도 했겠지만, 사실 뒤늦게 듣기로 회사에서의 성희롱과 은근한 추행이 지랄맞은 정도였다고.



"오빠 어제 내 통장 손댔어?"
"어? 아, 어어. 그랬나?"
"제대로 말해. 손 댄거야?"
"조금 빌렸어"

슬금슬금 도박에 잠식되어 가던 나는 어느새 가진 돈을 다 까먹고 도박장에서 빌린 돈으로 도박질을 해댔다. 그때까지도 선아 돈에는 일절 손을 댄 적이 없었지만, 그 빚이 더이상 감당이 안되자 결국 선아 통장에 손을 댄 것이다. 죽어라 모은 2천만원이었다.

"오빠 그 돈이 무슨 돈인지 알아?"

그냥 막연히 큰 돈 모으려고 모은 돈인 줄 알았다. 내가 멋적게 무슨 돈이냐고 물었지만 선아는 그때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 나중에 들었지만 선아는 내 아이를 갖고 싶었단다. 물론 그 이야기 뒤늦게 듣고는 그저 "어린 마음에 했을 법한 생각이네" 하며 무신경하게 흘려 넘겼지만, 속이 꽤 쓰리긴 했다.



그러나 선아 돈 2천으로는 부족했다. 애초에 원금 5천에 한달 이자로만 400만원이 붙는 미친 고리였기에 비상상황이었다. 나는 세번째 협박을 받은 시점에서 그 사실을 선아에게 털어놓았다. 선아는 그 말에 긴 장탄식을 흘렸다. 그리고 그 이틀 후에 삼천만원을 구해왔다.

"너 이 돈 뭔데"
"내 인생 이제 오빠가 책임져야 된다 진짜"
"뭔데"

선아는 내 생각보다 독한 아이였다. 그리고 내 생각보다도 나와 삶의 결이 비슷한 아이였다. 전에 다니던 회사의 사장 새끼가 꽤나 양아치였던 것이, 비지니스랍시고 바이어 상대하는 룸에 선아를 데려 갔었단다. 언니들은 언니들대로 따로 부르고. 바이어가 선아를 맘에 들어하니까 눈으로는 선아를 보면서 옆의 언니들을 주무를 수 있게 배려한 것이었다. 선아 이 등신 같은 년은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대신 거기 쳐 앉아있었던 거고.

…어쨌거나, 그 날 그 엽기적인 접대의 현장에서 그 룸의 마담이 대차게 그 자리에서 상황을 웃어 넘기던 선아를 눈여겨 보고 명함을 줬었단다.

"알아. 버리고 싶겠지만, 갖고 있어 봐봐. 너 그 명함 몇 천만원짜리다?"

마담의 예언대로 선아는 결국 근 3개월 만에 그 번호로 연락을 해서, 마이킹을 땡겨 쓴 거다. 세상 어느 미친 가게가 일 시작도 안 한 생초짜한테 그런 식으로 떼주냐고, 그것도 뭔 3천을 해주냐고 혹시 무슨 개막장 업소 같은데 등록한거 아니냐며 내가 더 놀래서 되물었지만 선아는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당장 빚부터 갚아" 하며 돈을 내밀었다. 그리고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서워서 선아에게 자세히 묻지 못했다.

"산호아파트 110동 305호요"

그리고 정말로 그 뒤로 나는 그 도박장을 끊었다. 배달 일을 나갔다. 선아는 룸에서 일을 시작했고, 4천 마이킹 빚에 짓눌리기 시작했지만 아직 22살의 꽃다운 나이와 일찍부터 다방면의 쓰레기들을 골고루 겪은 커리어는 그녀가 빨리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도왔다.

"힘들지"
"오빠가 더 힘들지"

아직 요령이 없어서 술에 절어 들어오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안 좋았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고는 그냥 마사지와 콩나물국이 전부였다. 사실 나도 배달 일이 꽤나 고되었지만 선아한테 하소연할 입장은 아니었다.

솔까 어디 선릉 업소도 아니고 이런 수도권 외곽 룸빵에서 4천 마이킹 잡혔으면 이거 완전 평생 노예계약 아닌가 싶어 겁이 나기도 했지만, 선아는 언제나 내 예상 밖에 있었다.

"이달에만 300 갚았는데?"
"뭐?"

암만 찌질한 동네라도 그 나름의 동네 병원, 한의원, 건물주 등 부자들은 있기 마련이고 그들의 유흥에 있어서 22살에 말 잘하는 동네 이쁜이는 확실히 매리트가 있었다. 물론 사람 욕심이 말 통하면 손 잡고 싶고, 손 잡으면 뽀뽀하고 싶고 뽀뽀하면 떡치고 싶은게 마음이니 2차의 유혹은 항상 있었지만 선아는 그것만큼은 피했고, 오히려 그게 더 할아재들 몸을 닳게 해서 에이스로 자리 잡는데 큰 도움이 되었단다. 뭐 항상 좋게좋게 좋은 일만 있던 것은 아니었겠지만.

"오빠 우리 이제 서울로 이사 가자"

선아는 24살의 생일에 그 말을 했다. 왜냐고 심드렁하게 묻자 그녀는 "나 이제 돈 더이상 안 갚아도 돼" 하면서 살짝 눈물을 비쳤다.그 말에 나는 가타부타, 농담도 안 하고 "그러자" 하고 대답했다. 뭐하고 먹고 살면 될까 내 머릿 속에 새로운 고민이 자리 잡을 만큼의 시간이 흘렀을 무렵 선아가 먼저 말했다.

"나 스카웃 됐어. 우리 돈 걱정하지 말자 이제"

그 무렵해서 선아는 가슴 수술을 하고자 했다. 보통 정상적인 남자라면 여기에서 "뭔 수술이야" 하며 펄쩍 뛰는 척이라도 했겠지만 나는 아무소리 하지 않았다. 선아는 피식 웃었다.

"우리 오빠 쿨하네"
"…나 원래 쿨하잖아"

다시 서울로 이사를 왔다. 선아는 강남 병원에서 가슴을 키웠고, 그 외에도 무슨 쁘티 시술인지 뭔지를 이것저것 받았다. 그리고 우리는 1년 가까이를 그렇게 무탈하게 살았다. 언젠가의 싸움을 하기 전까지는.

"아 지루하다"

리지니를 싹 다 접은 나는 서울에 와서는 꽤 할 일이 없었다. 헬스장에 다니는게 유일한 내 일과였다. 선아는 헬스가 적성에 안 맞는다며 수영으로 몸 관리를 했다. 그러다가 나는 우연찮게 같이 운동하던 5살 연하 지혜와 친해졌고, 지금의 화려해진 선아와 달리 선아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수수하면서도 톡톡 튀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묘한 데자부를 느꼈다.

"정말? 오빠 완전 미친 동안이네. 그럼 오빠 여친 있어요?"
"없는데. 왜? 니가 내 여친 해줄라고?"
"와 방금 전 말 완전 아저씨 같았음. 팍 식는다"
"아, 때려치워. 어차피 기대도 안 했어"
"구라치시네"
"사실 쪼끔함"

매일 같이 헬스장에 출근 도장을 찍으며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졌고 함께 식사를 하고, 영화를 보며 데이트를 했다. 어차피 선아는 저녁 시간에 출근하면 전화 안 되는 일이 허다했고, 반대의 경우도 "어 간만에 게임 좀 달리느라. 요즘 랭킹전 시즌이잖아" 하며 대충 넘겼다.



그러기를 석 달. 너무 꼬리가 길었던 탓일까. 언젠가 지혜네 집에서 자고 아침에 들어온 날 무표정한 얼굴로 화장대 앞에서 화장을 지우며 기다리고 있던 선아는 나에게 물었다.

"오빠 지난 주 금요일 밤에 뭐했어?"
"금요일? 몰라? 기억 안 나는데. 왜?"

선아는 피식 웃으며 "맛있는거 먹었는데 왜 기억 못해?" 하며 물었다. 그리고 난 알았다. 걸렸다는 사실을. 지난 주 금요일은 선아와 초밥집에 간 날이다. 인당 11만원짜리. 나는 순순히 털어놓았다.

"어, 초밥 먹었어"
"누구랑?"
"여자애랑"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화장품병이 내 얼굴로 날아들었다. 겨우 피했다. 내가 어지간한 쓰레기짓을 해도 조금 뭐라 하다가 곧 "그래 오빠 말이 맞는거 같다" 하며 이해해주던 선아다. 그런 그녀가 나에게 달려들었다. 미친듯이 달려드는 그녀의 모습에서 나는 한을 느꼈다. 그저 분해서, 화가 나서 하는 짜증이 아닌, 인생의 회한이 담긴 어떤 그런 분노.

결국 목부터 팔까지 오만 곳을 다 할퀴고, 선아도 손톱이 두 개나 부러지고 그녀 스스로가 탈진할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진정이 됐다. 할 말이 없었다. 예전과 달랐다. 어느새 나는 선아 하나 덕분에 먹고 사는 놈팽이가 되어 있었고, 선아가 떠난다면 지금처럼 아무 일도 안 하고 용돈만 200 받는 이 꿈같은 생활은 불가능할 것이 틀림 없었으니까. 아니 뭐 먹고 살 수는 있을까.

하지만 곧 선아는 뭐가 그리도 우스운지 깔깔대며 한참을 웃었다. 그리고는 날 보며 말했다.

"그래, 오빠 용서해줄게"

하지만 그 이유는 내가 생각한 것과 달랐다.

"어차피 내가 오빠를 무슨 낯으로 욕하겠어. 안 그래?"

내가 주억거리자 선아는 말했다.

"나 요즘 2차 나가"
"뭐?"

반응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짐작은 했다. 애초에 가슴 수술을 받아야겠다고 한 순간부터 각오한 일이다. 언젠가는 올 일이라고. 그리고 새삼스럽지만 회고해보니 우리가 마지막으로 잔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난다. 결국 나는 여자친구가 몸 팔아서 벌어온 돈으로 다른 여자랑 먹고 자고 한 것이다.

"미안해. 정리할게"

그렇게 말하면서 그 자리에서 번호 차단걸고 [ 나 여친 있었어. 미안하다. 걸렸다 ] 하고 문자를 보냈다. 그러나 선아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내 휴대폰을 뺏어서 바로 창 밖으로 던졌다.

"새 폰 사줄게. 다시는 그러지마"



…보통, 대가리가 멀쩡한 새끼 같으면 거기에서 박수치며 절하고 여친 앞에 조아려 살겠지만, 다들 알다시피 나 정도의 폐급 쓰레기가 그럴 리가 있는가. 한 6개월을 조신하게 쥐죽은 듯 살았지만, 애시당초 여친이 2차 나간다는 소리를 듣고 멘탈 멀쩡한 새끼가 어디 있겠는가. 변명이라면 변명이지만 여튼 그랬다.

"씨발"

새벽 2시, 3시. 연락이 되지 않으면 가슴이 뛰고 잠이 오지 않았다. 술을 마시고 호흡을 가다듬어도 머릿 속에는 선아가 다른 새끼랑 더럽게 뒹구는 모습만 생각났다. 그 돈으로 이렇게 먹고 산다는걸 알면서도. 자제력이 무너진 나는 집안 살림을 다 때려부수었다. 결국 주민신고를 받고 경찰이 출동해서야 나 혼자만의 파괴적 난동이 진정됐다.

"새로 사자"

피곤한 얼굴로 돌아온 선아는 그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어주었다. 그리고 그 미소에 알 수 없는 서러운 눈물을 흘린게 나다. 쪽팔리게.

그대로라면 나 스스로가 미쳐버릴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다시 도박에 손을 댔다. 자금은 있었다. 선아는 돈을 잘 벌어왔다. 나는 선아가 돈을 모으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게 무슨 생각으로 모으는 돈인지는 이미 한번 들었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그 돈에 손을 댔다.

"그랬구나"

선아는 두 번 용서해주지는 않았다. 이틀 사이에 3천을 6백만원으로 만들어 온 나를 본 선아는 "일 다녀올게" 하고 다시 나가서는 일주일간 연락을 끊었다. 나도 집 안에만 있지는 않았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꼴랑 사백을 들고 마카오로 떴다. 도박장에서 만난 괴짜 영일이 아재와 함께.



"니 꼰대네 하우스 때문에 신세 조진 인간이 몇인데, 니가 도박으로 신세 조졌다고 억울해하면 우짜노"
"아 시발 누가 우리 꼰대야. 그 사람 우리 꼰대 아니에요. 친구네 애비지"

그런 말이 있잖는가. 사람은 살면서 몇 번 기회가 온다고. 내 첫 번째 기회가 선아였다면 두번째 기회가 이 영일이 아재다. 나름 잘나가던 중소기업 대표까지 하던 양반이 역시나 도박에 맛들려서 재산 잃고 마누라 잃고 신세 조진 양반인데, 역시나 맨손으로 기업을 일군 사람 특유의 근성으로 이번에는 도박을 파서 경지에 오른 양반이다.

나는 전혀 몰라봤는데, 왕년에 용범이 아버지 하우스에서 노름질 하던 양반이 엉뚱한 곳에서 "니 왕년에 그 뽀이하던 아 아이가?" 하면서 알아본거다. 하여간 사업머리 있는 양반들의 눈썰미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게 도대체 몇 년 전 일이며 몇 번이나 심부름 했다고 그걸 알아본단 말인가.

"거 얼굴 하나 기억한다고 츤재문, 어림없다. 세상에 츤재들 많다. 많아. 근데 그 머리를 제대로 된데 못 써서 다 망하는기라"

그래, 그리고 그 말에 드디어 기억이 났다. 이 사람이 나를 기억하는 이유를. 이 사람 타짜다. 근데 기술 쓰는 타짜가 아니라 대가리 굴리는 타짜.

"아저씨 우리 바람 좀 쏘이고 옵시다"
"어데"
"마카오"

그러나 정작 마카오에 도착하자 그는 껄껄대며 내 머리통을 쳤다.

"뭔 소리고. 니 영화 보고 햇소리 하나?"
"못해요?"
"하고 못하고가 아니라 시스템이 다 막힜다. 먼 70년대 이야기를 하고 있노 모지리야"

카드카운팅이나 뭐 그런거는 이미 옛날 옛적에 다 막혀서 해봤자 손해란다. 그리고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카지노를 수학적으로 보믄 말이다, 목표값을 정하고 1/2 승률을 가진 게임을 골라 잡아 모든 판을 더블업으로 하는게 그게 최적 루트인기라. 쉽게 말해서 연전연승 아니면 오링, 딱 둘이다"
"그거 그거, 그거잖아요. 두 배 두 배 늘려가는거"
"마팅게일 그기 말고, 그냥 무식하게, 오링 아이면 고! 그렇게 간다꼬. 완저히 머 헷까닥한 방식으로다가"
"아 망할"

내가 그 말을 들으려고 꼰대를 비행기까지 태워 여기까지 날아왔단 말인가. 하지만 보람이 없는건 아니었다.

"드 가자, 낸 여기 VIP 카드있다. 닌 내 아들이라 케라"

카지노로 향하며 그가 말했다.

"월래애, 카지노에서 즐대로 손대면 안되는 게임이 바카라야. 와? 이건 절대 못 이긴다카이. 게임 룰 자체가 승률상 젤로 불리하게 맨들어진기다. 근데 유일하게 또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바카라야. 왜냐? 깨끗하게 운영된다는 전제 하에, 유일하게 기술이 필요없는 도박이그든? 목표값 낮춰서 맥시멈 1억 잡고 더블업 계속해서 딱 10배만 뿔려서 가자카이"
"그게 말이 되요?"
"니 가위바위보 열번 연속 이겨 본 적 읍나? 확률 생각하문 하면 안되지. 근데 되는 날이 있다 안 카나? 그기랑 똑같은기라"
"아저씨는 있어요?"
"내는 평생 가위바위보 져 본 역사가 없다. 그리고 이기 그거보다 쉽다카이. 내 믿어라"

…그냥 미친 개헛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돈 다 날리면 마카오 앞바다에서 뛰어내릴 각오를 했다. 정말로. 사실 마카오로 간 진짜 이유가 그거였다. 한국에서 자살하면 어떻게든 그 소식이 선아한테 전해질 거 같아서.



"봤제?"

싱긋 웃는 영일이 아저씨. 그는 웃으며 정장 포켓을 두드린다.

"내 평생 소원이 이기 다시 한번 입어 보는 거였던기라. 고맙데이"

그는 이겼다. 오백만원으로 1억 6천을 만들어 냈다. 다섯 판 만에. 그리고 사실 자기 폐암 4기라고 이제 곧 죽을거라며 입을 턴다.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리고는 덤으로 요구한게 그냥 정장 한 벌이었다.

"어차피 죽을 놈이 돈이 무슨 소용이고. 그냥 염할 때 안 쪽팔릴 옷 한벌 마련했으니 난 됐다"
"그럼 이거는 장례비 쓰세요. 육천."
"지랄도, 뭔 피라미드 만들끼가"

현찰 1억을 마련한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선아의 집으로. 문을 여는 순간 집이 텅 비어있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놀랍게도 문을 열자 선아가 있었다. 그것도 내 사진 꺼내보면서 울고 있었다. 시발. 세상에 이렇게 사랑스러운 여자가 어찌 또 있단 말인가.

"미안하다 선아야"
"밥은 먹었어?"
"아니"
"밥 차려줄게"

항상 그랬다. 나는 그랬다. 살면서 위기에 빠질 때마다 어떻게든 기회가 생겨났고, 나는 거기에 올라타기만 하면 됐다. 그리고 두 번째로 삶의 큰 돈을 쥐어 본 나는 결코 전과 같지 않았다. 물론 선아 눈에는 이미 현찰 1억은 별로 큰 돈도 아니었지만 적어도 나는 그녀의 아버지와는 달랐다.

"나는 필요할 때 돈 만들어 오잖아. 되는 놈이라고."
"정말 마지막이야. 정말 마지막"
"그래"

그 말을 하고도 나는 바람을 두 번 더 피웠고 도박을 세 번 더 했다. 횟수가 아니라 사람이 두 명이었고, 도박도 횟수가 아니라 큰 판 기준으로.



내 나이 마흔. 선아는 어느새 네일아트 샵의 어엿한 대표가 되었다. 장사도 나름 잘되어 자리를 잘 잡고 있고, 나는 여전히 뻘짓들을 해댔다. 그리고 급기야 오늘 선아는 집을 나섰다. 물론 이것 역시 수십 번 겪은 일이긴 한데, 알다시피 매번 겪는 똑같은 일도 어느 순간에는 '이거 아닌데' 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때가 오늘이었다.

"후"

방 안에서 담배를 피우며 멍하니 천장을 바라본다. 선아. 만약 그녀가 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은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 까놓고 말해서 지금보다 나은 인생을 살았을 거라는 생각은 별로 안 든다. 우리 같은 새끼들은 분명히 그런게 있거든. 어떤 굴레에 대한 속박.

이거 하면 좆될텐데, 이 새끼랑 엮이면 안되는데, 하는걸 알면서도 어째 기어코 엮이고야 마는 것. 대놓고 피해도 어느 순간 정신차려 보면 엮여있는 것. 어쩌면 그게 바로 팔자인지도 모른다. 내가 아니었더라도 분명 선아는 또 어떤 병신새끼 만나서 지금처럼, 혹은 지금보다도 더 좆같은 삶을 살았을거다. 그래,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내 마음이 편하지 않다.

"어쩌겠냐 시팔"

일어나 잠바를 다시 걸쳤다.




"선아야"

캐리어까지 끌고 나가길래 어디 멀리나 갔을까 싶었는데 그녀는 고작해야 집 근처 하천변에 앉아 있었다. 습관인지 직업병인지 단어한 자세로 앉은 뒷모습이 어찌도 그리 처연해 보이는지. 참 마누라한테 못 할 말이다만, 어째 왕년에 한가락 하던 술집 여자들이 은퇴하고 홀로 된 모습들은 하나같이 그리도 안쓰러워 보일까. 누구 말로는 그게 다 업이라던데. 젊었을 때 다른 년들 집구석에서 속 태운 업보라고.

선아는 내 목소리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멍하니 물 흐르는 모습만 보고 있었다. 나는 굳이 더이상 말을 걸지 않고, 한참을 그렇게 노을이 다 져갈 무렵이 되어서야 선아는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아직도 가끔 생각한다? 만약에 내가 오빠 처음 만난 날, 오빠를 안 만났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 말이야"

어쩌면 나와 그리도 같은 생각을 할까.

"그런데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딱히 더 잘됐을거 같지가 않아. 집으로 돌아가서 정신 나간 아버지한테 맞아죽던지 아니면 조금 더 일찍 술 팔고 몸 팔던지 둘 중 하나였겠지. 배운거 없는 중졸 여자애가 얼굴 하나 믿고 집 나와서 혼자 뭘 했겠어. 보나마나 뻔한거지"

음.

"그래서 그냥 이제껏 참고 살았어. 다 내 업보고, 그나마 그래도 이렇게 먹고 살고는 있는 것도 다 오빠 덕분이다 하는 생각으로 말이야"

나는 그저 묵묵히 들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욕심이 생기더라고. 나도 평범하게, 남들처럼 남편이랑 그냥 평범하게 살면 안될까, 남편은 도박하고 나는 몸 파는 그런거 말고 말이야. 그래서 가게도 연 거고, 오빠 참 무던히도 달랬던거고. 어떻게 한번에 사람이 바뀔까 싶어서 참고 또 참았던거고."
"이제 못 참겠니"

나는 어렵게 물었다. 선아는 대답을 하는 대신, 그냥 손으로 입을 가릴 뿐이었다. 속이 텅 비는듯한 허전함을 느끼며 무언가 말을 하려던 순간,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당연히 못 참지. 그냥 때려죽이고 싶지. 그걸 뭐하러 물어."
"음"
"오빠 두고 내가 떠나서 산다면 지금보다야 낫겠지. 속 썩을 일도 들할테고. 안 그래? 그리고 내가 뭐 쓸만한 남자 하나 못 구하겠어?"

시발.

"오빠는 딱 봐도 아니거든. 돈이 있어 뭐가 있어, 건들건들 양아치삘 나면서도 진짜 건달도 아니고 재주도 없고, 이제 나이 더 먹으면 완전 평생 혼자 골골하다 죽을 팔자지. 끽해야 어디 만나도 못 생기고 다 늙은 멍청한 여자 하나 만나서 둘이 시팔조팔 욕만 하면서 지랄 같이 살겠지"
"야"

담배를 입에 문 그녀는 피식 웃으며 내 얼굴을 바라본다. 나도 피식 웃었다.

"그래도 오빠는 내가 제일 힘들 때 같이 해준 사람이잖아. 그 생각해보니 또 불쌍하더라. 알아서 잘 살면 모르겠는데, 보나마나 거지처럼 살거 뻔하고. 왠지 모르겠는데 그건 싫더라고."
"동정하냐?"
"그리고 뭐 딴 새끼 만난다고 나라고 뭐가 그렇게 다를까 싶어. 제일 어려울 때 함께 한 사람 내다 버리고, 다른 남자 만나 살면, 뭐가 그렇게 다를까. 내가 잘나봐야 뭐 얼마나 더 대단한 남자 만나겠으며, 그런 새끼 만난다고 해봐야 몇 년 지나고 애정 식으면 그때도 즐거울까. 그때가서 오빠 웃는 얼굴 생각나면 어떻게 하나, 그런 생각 들더라. 모지리 같은 오빠지만, 나보고 맨날 이쁘다고 말해주는건 오빠가 최고잖아"

빙신.

"멍청한 년, 다른 좋은 놈 만나 살면 당연히 행복하겠지. 나보다야.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또 피식 웃은 선아는 담배를 다시 한번 맛있게 빨더니 아직 반도 안 피운 담배를 던져버린다.

"오빠 들어가자. 오늘 치킨 시켜먹자"

나는 또 주춤 일어서며 캐리어를 잡아들고 짐짓 허세를 부려본다.

"다시 한번 또 나갔단 봐라"
"다시 나가면?"

잠시 할 말을 찾던 나는 어렵게 대답했다.

"다시 찾아와야지. 그거 내 전공이잖아"

깔깔 웃은 선아는 내 팔짱을 낀다.

"그래, 잃으면 다시 따와야지. 맨날 오빠 잘하는게 그거잖아"
"야, 저기 치킨, 네래 치킨 먹을래?"
"맘대루. 사실 난 다 그냥 그래"

이제 간신히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나 하는 생각에 한숨 돌리며, 늘어선 가로등 저 너머 언덕 위 우리 집 아파트 단지를 바라본다. 이번에야말로 손 딱 씻고 진짜 제대로 일자리를 찾아봐야지, 하는 기약없는 다짐을 다시 품으며.

- 끝 - 

영춘화 소설

오늘도 날이 찹다 못해 성이 날 지경으로 얼어 붙었다. 미투리에 둘두리 천대기를 말아 그 안에 솜을 덧댄다 허여도 당최가 찬 것은 세상 도리가 없다. 하지만 진정으로 얼어붙은 것은 요 벌겋다 못해 시퍼런 발이 아니라 내 마음 속이 틀림없다.

"에효효"

입김 화하게 퍼지는 이 질다란 한숨 속으로 내 식허먼 속이 다 빠져나간다. 아랫마을 학동에 창녕이가 성례를 치룬다고 들었다. 처가에서 조막만하기는 혀도 곡식 잘 여무는 진또배기 뙤기 밭꺼정 뗘준단다. 데릴사위 6년 지랄도 이만하면 성공이다. 섁시 점순이는 키는 딸따름해도 야무지고 왈개한 것이 은근히 나 같은 무딘 무똑똑이조차 "고런 것이 참맛인데" 하고 입맛 다시게 만드는 앙증한 야무짐이 있건만 이 아쉬움은 무엇에 대야할지 모르겠다. 남의 처자를 탐나는 것 같아 참담하기도 하고 남새스럽건만 결단코 그런 것은 아니고 단지 외로움이 고만큼 작지 아니하다는 왈이다.

하기사 겉보리 서말만 있어도 처가살이는 안 한다는데 6년을 그 재랄맞은 선빙장 밑에서 반 머슴살이 한 창녕이 생각을 한다면야 나는 차마 진즉에 못참고 뛰쳐나갔을 거라 고개를 주억거리게 되긴 하여도, 결과적으로 고 놈은 마누라에 집에 땅뙤기까지 얻었고, 암만 딸내미라 혀도 떡두깨비 같은 손주 폭하니 품에 안기주믄 그 마름 빙장이 난중에 관리하는 재산 반의 반, 아니 십분지의 일만이라도 사위한테 일 알려주지 않고 배기겠느냔 말이다. 그렇담 단박에 창녕이는 손에 흙 묻힐 일 없이 손구락질만으로도 평생 배 곯 일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그걸 생각하면 역시나 배가 아니 아플 수가 없다.

"시버럴 것"

당최가 이럴 바엔즉 콱 뒈지고 싶다 하는 생각꺼정 드는 것은 나에게는 그런 빌어먹을 일이 일어날 일은 하늘이 무너져도 없을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생전에 여 골막촌은 무신 놈의 양기가 그리도 센 땅인지 근 수십년이 낳았다 하면 아들이요 딸내미는 구경이라도 할라치면 산을 하나 반은 넘어야 한다. 그나마도 이젠 뭐가 없지만서도. 아 오죽하면 다들 눈이 벌개져 학동의 오종종이 점순이 소식이 예까지 들어오냔 말이다. 지미럴거.

오종이 왈도 일리가 있는 것이, 세상에 무덤뙤기는 둘째치고 조상 이름은 알아야 제사라도 지낼 것 아닌가. 지집이 있기는 해야 뭔 연적질을 하건 장개를 가건 할텐데 여는 당최가 고추밭만 줄엉줄엉이다. 그렇다고 이 골막촌 거렁뱅이들이 뭔들 넘의 재산이 있어 저 먼즉에서 색시를 모셔오겠는가. 정 붙일 인연 자체가 없는 황무한 땅이 그러한 것이니 세상 아쉬울 것은 오로지 나이 급한 나 뿐이다. 그리하여 더욱 더 작년 설 즉에 겪은 그 쪼간이 나는 여지껏 생각이 간절하다. 하늘도 무심하지.






영춘화 





작년 설 즈음의 일이다. 큰 눈 오기 전에 나무 잔태기도 좀 줘오고 겸사겸사 고려엉겅키라도 혹 캐올까 해 올랐다가 갑자기 눈이 크게 쏟아짐에 식급히도 오도방정 떨며 산에서 내려오는 길이었다. 그러던 차에 시커먼 남녀가 눈에 흙에 걸뱅이 꼴이 다 되어 산자락 내다 보이는 막고바우 근처에서 오돌돌이 떨고 있는 것이 아닌가. 딱 봐도 차림이 골막촌 사람은 진즉에 아니고 낯설기에 뉘신가하여 유심히 바라보노라니 부지불식간에 처자랑 눈이 마주쳤다. 머리도 안 올렸고 앳띈 것이 언뜻 봐도 또래인데 참 곱다.

"크흠"

괜히 멋적어 헛기침을 하고 슥 눈 돌리고 지나가려는데 마주친 눈매도 그리하고 가까이 갈수록 흘깃흘깃 그 태가 흐뭇하다.

"얘"

가까이 가니 그 아이가 나를 부른다. 옆에 있는 남정네는 무엇일까, 행색을 보아하니 그 애비 또래인데 설마하니 기둥서방은 아닐테지.

"내 말이 안 들리니?"
"뭐요"

나도 모르게 퉁명스럽다. 이번에는 옆의 사내가 조심스레 묻는다.

"혹 이 근방에 잠시 쉴 곳, 묵을 곳이 있나?"
"얼마나유?"

내 말에 사내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 하나 곧 "짧게는 며칠, 길면 봄까지면 더 좋고" 하고 대답한다. 며칠이면 몰라도 봄꺼정 있는다는 말에 나는 학동에 주막보다도 얼마 전 장사 치러 비어있는 달맥이 할매집을 생각했다. 내가 생각해도 용한 대답이다.

"동리에 빈 집이 하나 있긴 한듸"

사내도 기집애도 얼굴이 환하니 밝아진다. 허나 이제와 생각하니 둘 다 짐이라고는 보따리 두 개가 전부다. 함께 산을 내려가며 묻노라니 둘은 역시나 애비자식 관계로, 그 외의 것은 먼저 입을 열지는 않는다. 그제사 혹여 나쁜 짓이라도 하고 도망 다니는 거 아닌가 싶긴 했지만서도 버럭 겁이 난 관계로 구태 묻지는 않았다. 와중에 뜬금없이 기집애는 지 애비가 있는데도 서슴없이 자꾸 말을 편히도 건다. 그에 나도 편케 답한다.

"옷 얇은데 안 춥니"
"안 춥다"

내가 앞장을 서고 다음으로 기집애가 따르고 그 뒤에야 담뱃대 꺼내 문 애비가 따른다. 이것부터가 거꾸로다.

"너어 밥은 먹었니"
"이제 내려가 먹을거다"

잠시 말이 끊어진 기집애는 다시 싹싹하게 묻는다.

"원래 그리 말이 안 기니"

넘이랑 말할 일이 잘 없어서 모르겠다. 묵묵히 있노라니 이제사 그 애비가 헛기침을 하는데 기집애가 못마땅해 그러는 것인지 담배가 매워 그런 지는 모르겠다. 허나 기집애는 계속 묻는다.

"너 동리 사람들은 어떠니"
"마을은 작은데 사람 좋다 다들"
"다행이다"

여자애가 괄괄하면서도 다정한 것이, 왈자구나 싶으면서도 은근 그 사근한 맛에 히죽히죽 입이 벌어진다.

"너 이름이 뭐니"
"동이. 만동이"

나도 너 이름은 무엇이니 묻고 싶지만 그 애비가 그 등 뒤에 있으니 묻는 것이 조심스럽다. 하지만 처지가 그래서인지 관심이 없는 것인지 그는 역시 아무 말이 없다.

"내 이름은 금이야"

금이. 마음 속으로 한번 조용히 불러본다. 그리고 그즘하여 뒤늦게 심사가 불편해진 그 애비가 "어여 가자" 하며 가볍게 꾸짖는다. 그러나 그리 역정이 묻어있는 것은 아니고, 애시당초 금이 얘가 크게 아비를 무서워 하는 것 같지가 않다. 먼즉에 애비보다도 먼자 나에게 말을 건 것도 금이 아니었던가.

"장은 어디에 서니"

몇 달을 살려면 구해야 할 것이 많지 싶어 재 너머 삼일장, 두엇거리 오일장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이윽고 마을 어귀에 도착하여 석이 할아범한테 사정을 구하니 혼쾌히 응락한다. 실은 할아범 아니고서야 출신 불분명한 외지인을 마을 들이는걸 누가 좋아하며 누가 허락하겠는가. 역시나 사람 좋은 어르신이 제일이다.

"그럼 글피에 장 서면 같이 가기로 하고, 일단 급한 것은 거기 놔뒀어유"
"고마워, 동아"

금이가 지 애비를 대신해 대답하고는 얼기설기한 것이 이미 문 같지도 않은 서릿문을 닫는다. 직전에 집 나간 며느리가 혹여라도 돌아와서 물건 달랠까봐 장리 치르고도 그 집 물건은 다들 고대로 냅뒀는데 철이 바뀌어도 안 돌아오는 것을 보면 달맥이 할마이 집에 사람 들어올 일은 없고, 항차에 동리에 사람은 연즉 죽어나가도 암도 들어올 일 없는 골막동이니 걱정 많은 석이 할아범은 그저 사람 들왔다는 사실이 흐뭇한 것이다. 실은 나도 흐뭇하고.

"젖은 나무는 무엇에 쓰는데"
"말리면 그만이지."
"그래"

다음 날로 금이와 나는 동무가 되어, 길 가르쳐준담서 함께 장 가는 길을 곁으로 다녀오고 그 집로 집에다 나무까지 해다줬다. 눈에 젖은 나무지만 우리 집 부뚜막에서 연 이틀 말리면 어떻게든 잠시롱 땔감은 되어 줄 것이고, 이틀치는 우리 집 것을 조금 덜어다 주었다. 아무렴 푸줏간 주인은 풀만 먹고 나뭇꾼 부뚜막엔 이파리만 불탄다지만 까짓거 줄 때는 인심 좋게 주는 것이 사람 도리란 것이다.

"봄 되면 이 근방이 다 영춘화 천지인데, 그 노란 천지가 매화, 함박보다 예쁘단다"

사실 어찌 영춘화가 매화나 함박보다 예쁘겠냐만, 금이가 봄에 떠날지도 모른다 하니 마음이 급하여 그저 매화보다도 영춘화가 나는 더 예쁜 것이다. 그저 영춘 한 줄기 꺾어다가 금이 머리에 씌우면 그보다 예쁜 것이 없을 것만 같다.

"고맙다"

금이는 무슨 일이든 연방 고마워라 했다. 하기사 세상 천지에 길 한번 물어봤다고 집이 생기고 쌀까지 퍼다주고 춥다고 나무까지 해다 바치니 싫을 이유가 있으련만 실인즉 나는 그저 금이랑 말이라도 섞어보는 것이 참으로 몸 닳도록 기분 좋은 것이다. 어제 온 종일 함께 쏘다녔다니 어머니도 히죽한 것이 버럭 혹여 동리에 소문이라도 내고 다닐까 의심되어 내가 부러 주의를 주었다.

"알았다 알았다 이 놈아"

단단히 입막음을 시켰지만 혹시라도 또 노파가 어디 가서 정말 소문이라도 냈다가는 금이도 불편할테고, 봄에 떠날 양반들이 당장 떠나버릴 수도 있을 것이고 그랬다가는 이 아들 몽달귀신 되는 꼴 보게 될 거라고 다시 한번 단단히 주의를 주니 그제서야 은근 역정이 난 어머니는 혀를 찬다. 허나 중요한 것은 우리 엄씨가 아니라 내 금이 아니던가. 그래, 내 금이.

"요래 납자닥한 돌짜구를 들추면?"
"에그"
"옳거니"

그 다음 날에는 금이가 지 아비 출타해 혼자 심심하다고 조르는 통에, 엄니한테는 나무하러 간다고 하고는 함께 산에를 올랐다. 소막산 연천을 살짜기 지나 비탈 오를라치는 바로 그트막에 겨울 개골이 잡기 참으로 좋은 명당이 있다. 돌짜구를 열면 여는대로 동면 들어간 개골이 천지다. 욕심낼 것은 없고 딱 궈먹을 세 마리만 잡았다. 기분좋아 흐흐하며 으쓱하노라니 불쑥 금이가 내 손을 잡는다.

"고만잡자. 너 손 많이 차지?"

내 뭉툭한 손에 고운 손이 얹혀지니 번뜩하니 눈이 떠지다가 그 노골함에 손이 다 녹는다. 금이 손은 어찌 이리도 보드라운지 여기에 댈라치면 내 손은 차마 발이라 하기에도 댈 것이 못 된다.

"왜?"

묻기는 또 무엇이냐. 내 얼굴 벌개지는 것이 정말 몰라 묻는 것인지, 아는데 빼꼼하니 한발 빼는 것인지 멍하던 차에 또 한번 은근하니 묻는 금이의 말이 내 가심을 두드린다.

"동이 니가 있어 든든해"

참으로 아마도 이 곳이 축축하니 밑겨운 개천 근방이 아니라 어디 폭신하고 키 높은 풀숲이었다면야 참으로 좋았으련만, 단벌이 분명한 금이의 옷마저 생각한 그 마음에 그저 나는 와락 안는 것이 전부였다. 허나 금이를 품에 안으니 참으로 포근하고 가슴 한 구석 간질간질함이 마치 곧 터져버릴 것 같아 그 알 수 없는 기분에 눈 앞이 다 아찔했다.

"나만 믿어"

이제와 생각해보면 무엇을 신용하고 또 무엇을 어찌하겠다는 말인지도 맥락 없지만 그때는 그런 마음만이 그저 가득했다. 얼마를 그리 둘이서 안고 있었을까. 답답하다는 말에 얼른 또 놀라 허둥지둥 떨어져 손잡고 개골이만 주워 내려오니, 그리 길지 못한 내 삶에 가장 행복한 순간이 있었다면 필시 그때가 틀림없다.




"뭐여"
"나도 어쩔 수가 없어"

허나 삶이란 항상 그런 것이다. 좋은 일이 하나 생기면 반드시 나쁜 일이 두엇은 족히 생기는 것이라고. 오종이 고 놈 말은 참 허투로 듣기에도 소름 돋으리만치 맞는 말이 많다. 이번 일도 그랬다.

"그럼 어디로?"
"나도 몰러"

출타했다 3일 만에 돌아온 금이 아버지는 다짜고짜 그날 밤으로 떠나야 한다고 준비하라고 하고서는 또 어디를 급하게 다녀온다고 했다는데, 아니 봄까지 있을 수도 있다던 양반이 꼬박 엿새만에 떠난다니 금이 만큼이나 나도 경황이 없다. 나는 도무지 이렇게 금이를 보낼 수가 없을 것만 같다.

"금아"
"동아"

그저 서로 이름만 불러 보았음이며 고작해야 며칠의 정인데 어찌 이리도 마음이 아픈 줄을 모르겠다. 분하면서도 쌀쌀하고 아프면서도 괴로운 마음이 그만 번뜩 금이를 데리고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만 든다.

"혹시 우리 도망치지 않으련?"
"어디루"

지금도 후회되는 것은, 차라리 그때 아무 데나 씨불기고 그냥 냅다 가자고 꼬셨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은 것인데 고지식한 나는 그저 순순히도 "그것은 잘 모르겠지만" 하고 말을 흐렸으니 금이도 잠시 동했던 마음이 가라 앉았으리라.

"그럼 아부지는. 안돼"
"그려"

실은 나도 엄니를 생각하면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단지 객기를 부려본 것에 불과한 것이다. 고개가 떨궈지고 깊숙하니 마음 한 구석이 베인 듯 아픈 것이 그 얼얼함은 그 옛적 쓰러지는 나무 뒷퉁에 대가리 맞은 것보다 심하다. 그래도 불쑥하니 떠오르는 분함에 "봄까지만 있으면 안되나?" 하고 재차 물었지만 그저 금이는 고개만 젓는다.

"그럼 기달류. 내 줄 것이 있으니"
"뭐를"

나는 그저 힘차게 내달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암 것도 없구나 서글픈 마음에 그저 뭐라도 쥐어주고 싶은 것이 내 마음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씨암닭을 잡을까 싶었지만 그걸 들고 가라고 할 수도 없고, 자시고 가라고 하기에는 그 애비가 따를 성 싶지가 않다. 말랭이라도 뭐가 좀 있으면 가져다 줄까 했지만 우리 살림에 만들면 먹기 바쁘지 남겼을 리가 없다. 간신히 떠올린 것이 고작해야 남겨둔 씨감자 몇 알인데, 그걸 또 보따리에 싸서 다시 들고 부리나케 뛰노라니 발걸음도 마음도 어찌 그리도 무거운지 모르겠다. 꼭 다리가 천근이고 가슴이 만근만도 같다.

"왜 울어. 울기는"

보자기를 받자마자 금이가 눈물을 줄줄 흘리는 것이 그만 시큰하여 내까정 울음이 번진다. 나는 그것을 아부지랑 같이 떠나는 길에 먹으라고 들고 온 것인데 금이는 "아부지는 밤에 온댔어" 하면서 그 자리에서 둘이 먹자며 감자를 굽는다.

"동아"

부뚜막 앞에서 벌개진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다 그만 픽 웃은 우리는 그렇게 또 손을 잡는데, 마음이 그리도 아픈데 어찌 손은 또 이리도 달 수 있는지 모르겠다.

"금아"
"응"
"만시, 혹여라도 여참으로 돌아올 수 있으문, 그때는 꼭 같이 살자"

타닥타닥 타오르는 불씨를 바라보며 다짐인 듯 부탁인듯 하는 내 말에 금이의 대답없음에 슬쩍 고개를 돌리니 얼굴 가리고 우는 그 모습이 다시 한번 내 심장이 철렁한다. 나는 아파도 너는 안 아팠으면 좋겠다. 금이의 등을 쓸어내리며 달래주고는 어느새 다 구워진 감자를 꺼냈다. 그렇게 반나절을 감자 까먹으며 도란도란 둘이 실없는 이야기 나누노라니 기어코 그 아버지가 오고야 말았다.

"그래, 고맙다 동아"
"조심혀 가세유"

나는 여지껏 그 양반이 항시 뭐가 그리도 급한지는 알 수 없다. 금이도 말을 해준 적이 없고, 묻지도 않았으되 그저 알 것이 아니구나 할 따름이다. 단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니라는 답이 두려우면서도 떠나는 뒷등에 물어보았다.

"언제든 돌아는 오쥬?"

금이 아버지는 답이 없었지만, 금이는 답했다. 봄 되면 꼭 돌아올 거라고.



도주라도 하듯 그리 급히 둘이 떠난 뒤로 내 속은 허하다 못해 병이 도지기 직전으로, 봄이 되어 영춘화 피고 매화 피고 심지어는 오뉴월 작약까지 지 이름맨큼 함박하니 흐드러지게 피고 지고 어느새 가을 지나 겨울마저 다 지나갈 무렵이 되었건만 역시나 금이는 돌아올 줄을 모른다.

그저 오늘처럼, 이리 나무하다 괜시리 막고바우 옆에서 얼찍하니 저 산자락 아래 내려다보며, 길가로도 괜스레 기웃거리다 혼자 내려갈 따름이다. 혹시라도 금이가 왔다가 길 못 찾고 그냥 엉딴데 갈까뱀시로.

"지미"

하필이면 발싸개마저 축축하니 오그라드는 발가락새로 찬기운이 도져 감각 없을 지경이 되어 손가락으로 살곰하니 만지노라니 간신히 피가 돈다.

"얼타면 발가락 떨어지겄구먼"

그리 혼자 혀 차고 세워놓은 등지게 다시 메는 순간 나는 봤다. 노란 옷 입은 금이를. 금이 닮은 영춘화를. 둘 중에 그 무엇을. 헛거를 본 것이 아닐까 싶어 나는 고만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제발 그것이 금이이길 빌며 그렇게 눈을 살곰하니 떠본다. 어제처럼, 그제처럼.

- 끝 -

"헤어지자" 소설

최후의 최후까지 미뤄왔던 그 한 마디. 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돌아오는 대답. 헤어지자는 말에 이렇게까지 쿨하게 대답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그래"

답변까지 1초.

눈물 한 방울, 서운함 1그램조차 없는 지나치게 드라이한 이별의 순간. 만난 기간 4년, 가져다 바친 데이트 비용 수천, 싸우고 빌고 화해하고 마음 졸인 마음고생 4년, 함께 한 즐거운 추억 속 사진 수백 수천 장. 그 모두가 그 한 마디에 아스라히 잿가루처럼 사라진다.

"하아"

허탈하지만 무슨 말을 더해야 할까.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나. 무어라 한 마디 쏘아주고 싶기도, 아니면 영원히 기억될 가슴 시린 한 마디, 아니면 슬픈 기억으로 남아 그나마 나를 위로해줄 한 마디? 그러나 그 어떤 말도 지금의 내 감정을, 그리고 그 허무함을 대변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렇게 몇 분의 시간이 흘렀을까. 나도 그녀도 이제 더이상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볼 힘이 없다. 아니 적어도 나는. 어쩌면 그녀는 지루함과 피곤함을 느끼고 있을지 모른다. 거기에 생각이 이르자 피식 웃음이 나온다.

"왜"

내 웃음에 그녀가 반응한다. 무어라 대답하면 좋을까. 생각은 이미 책 한 권을 쓰고도 남지만 서로가 주고 받은 말은 휴대폰 문자 메세지 하나를 다 채우지 못한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 관계의 근원적인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나랑 사귀면서, 나 사랑하기는 했냐"

세상에서 가장 바보 같은 질문. 그러나 어쩌면 지난 몇 년의 시간을 그나마 위로 받을 수 있는 한 마디. 영혼이 없어도 좋고, 진심 따위 남겨 있지 않아도 좋다. '사랑했지' 아니 그냥 '응'이라도 좋다. 나는 그 한 마디를 듣고 싶었다.

"모르겠어"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또 한번 내 가슴을 쓸쓸하게 한다. 그렇구나. 만약 반대였다면 어땠을까. 아마 나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노라고 확답할 수 있으며, 그 사랑하는 마음은 세상을 다 채우고도 모든 것을 불태울 수 있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만약 너를 위해서 죽으라면 죽었을 것이며, 아니 관두자. 어쨌거나 돌아온 답은 그랬다. 나는 또 한번 웃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왜 웃냐고 물었지만 나는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스스로가 불쌍했다.

"차라리 조금 일찍 말해주지 그랬냐.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없었으면서 왜 내 곁에 있었는데"

역시 묻는 것이 비참한 찌질한 질문이다. 하지만 묻고 싶었다. 이번에는 그녀도 답이 없었다.

"그냥 내가 잘해줘서? 호구처럼 다 가져다 바치고 그래서? 버리기는 아깝고 그래서 그냥 적당히 옆에 두고 싶었던거야? 마음에도 없었으면서?"

결국 이렇게 흘러가는건가. 찌질하고, 별로 타격도 가지 않는 짜증나는 질문으로 영원히 좆같은 기억만 남기고 이렇게 병신 같은 이별을 맞이하는 그런 흐름?

"나…"

나의 공격에 그녀는 어렵게 입을 연다. 무슨 말이 나올까. 미안해? 나 그냥 갈게? 아니면 욕 한 마디? 뭘까.

"괜찮아, 말해. 내가 찌질하다고 말하고 싶어? 말해, 욕해도 돼"

눈물이라도 흘리지는 않을까 기대했다. 그냥 헤어지면서 눈물 한 방울 정도는 보여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지난 시간들,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아니 사랑도 안 했다고 했지. 그래. 뭘 바라겠냐. 병신새끼. 스스로가 비참했다.

"갈게. 잘 지내"

흐. 엇갈리는 마음. 아니아니, 엇갈리기는 한건가. 정말로 궁금했다. 슬픈 것인지, 아픈 것인지, 고통스러운지, 해방감이 드는 마음인지. 그녀의 마음은 지금까지도 단 10cm 속을 들여다 볼 수가 없다. 이 와중에 저 말은 어떤 감정에서 어떻게 나온 말일까. 도저히 모르겠다.

"하아"

이 와중에도 묻고 싶다.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지금 니 감정은 어떤지, 내가 헤어지자고 하는데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그래' 라는 말을 하는 과정은 어떤 것인지, 지난 시간들에 대한 감흥이 고작 그 정도였는지, 내가 정말로 그렇게나 매력없고 의미없는 사람이었는지, 너에게 묻고 싶었다. 묻고 싶지 않았지만, 사실 물으면 안되는 질문이지만, 궁금해서 미쳐버리기 전에 묻고 싶었다.

"넌 내가 헤어지자고 하니 기분이 어때? 그냥, 속 시원해? 요만큼이라도 슬프기는 해?"

급기야 병신같이 눈물이 차오른다. 아 시발. 떨리는 목소리를 숨긴다고 숨겼지만 늦었다. 그녀의 표정에 아주 작은 낭패감이 떠오른다. 아니, 떠올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별 변화도 없다.

"나 가볼게"

그녀는 그렇게 가방을 들고 일어선다. 드라이하고 담백하다. 그 이상의 어떤 표현도 붙이기 어려울만큼. 내 연애는 그렇게 끝났다. 다 부숴버리고 싶을 만큼 아찔한 화가 치솟고 스스로의 헛수고가 분했다. 뒤늦게 찾아온 이 감당하기 어려운 분노에 손이 부르르 떨렸고, 그런 나를 힐끔힐끔 바라보는 다른 테이블 너머의 시선들이 분했다. 차오르는 눈물을 그렇게 간신히 삼키며 길게 한숨을 내쉰다.

"후우"

그렇게 한 템포를 넘기자 마냥 다 허무했다. 다른 애들과 다르다. 저 년은 나한테 뒤늦게 다시 연락을 해오지도 않을 것이다. 내가 어느 날 미쳐서 하면 몰라도. 세상에 이런 병신 같은 이별이 또 있을까. 내 호구 같은 연애는 그렇게 허무하게 끝났다. 다시는 이런 연애 따위 안 하겠다는 허무한 다짐만을 남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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