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질의 난 소설

살갗이 에이는 혹한의 추위에 온 천하의 물과 공기가 얼어붙는 와중에도, 김박스는 여전히 커피 과용와 수면부족으로 소변이 샛노래질 정도로 몸에 수분의 씨를 말리기에 여념이 없다. 그에 더이상 살기 힘들어진 만 피부들은 궁지에 몰리다 못해 난을 일으키기에 이르고, 그를 주동한 백각질과 김버짐의 환란을 가리켜 후대는 '각질의 난'이라 이른다.





각질의 난





"뭣이?!"

주둥아리에서 각질의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김박스는 크게 놀라 백산수를 수분절도사에 제수하여 즉각 입 주변으로 급파한다. 그러나 이미 제대로 일어나버린 각질의 준동에 생수 한 병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고, 마시면서 얼굴에도 조금 펴바른 생수는 혹한의 날씨에 얼어버리면서 오히려 수분을 더 빼앗고야 말았다. 그렇게 초기 진압에 실패한 각질의 난은 장기전 조짐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전해들은 대왕대비 마마는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지혜로

"로션을 입 주변에 대량 도포하고, 인근 관아에서 가습기를 징발하여 가동할 것이며, 당분간 수분을 끊임없이 용복하게 하여 당금에 그치지 않는 해결책을 마련해야 할 것" 이라 일렀다.

그에 즉각 베란다에서 징발된 가습기가 가동을 시작했고, 하루종일 근 1리터 가까운 생수가 온전히 입 안에 투입되었다. 또한 피부 로션이 대량으로 도포되어 난을 일으킨 각질들은 빠르게 진압되어 사라졌다.




"이제 어쩔 셈이우"

산산히 사라진 각질들의 모습에 김버짐은 크게 실망하며, 백각질에게 물었다. 하지만 "다시 피부로 돌아가 쥐 죽은 듯 살아야지" 라는 대답을 예상했던 그와 달리, 백각질의 결의는 대단했다.

"결코 이대로 끝내지는 않을 것이오. 그리고 이미 내 손을 써두었소이다"
"무슨 수를?"




각질의 난을 성공리에 진입했다는 기쁨에 그날 밤 잔치가 벌어졌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김에 후환이 없도록 한다며 김박스는 "냉장고에 물 떨어지는 일이 없게 할 것"이라는 선언과 함께 대량의 수분을 냉장고에 가득 채웠다.

24병들이 생수 박스가 자취방 베란다에 가득 쌓였음은 물론이요 삼다수, 평창수, 에비앙 등 다종의 생수들이 냉장고에 채워졌다. 그러나 "대량의 수분 확보" 과정에서 들어와서는 아니 되는 것들도 들어오고야 말았다.

"오호호호호, 이 어찌 기쁜 일이 아니겠사옵나이까"
"껄껄껄, 큰일을 위해서는 내 참아야 하겠다만, 모처럼이니… 흐흐"
"암요, 자 쭉 들이키시지요 오호호호호"

애교를 살랑살랑 피우는 기생 '참이슬'의 애교에 그만 김박스는 그날 밤 정신없이 혼술을 들이켰고, 혼미해진 정신 속에서 그는 그렇게 가습기 물 떨어진 것도 모르고 그저 난방만 최고 온도로 틀어버린 채 잠에 곯아 떨어졌다.





"이때다!"

그날 밤, 백각질은 늙은 피부 세포들을 모두 끌어모은 뒤 선언했다.

"각질들이여. 우리가 어떤 명분을 들고 이 땅에 섰는가. 아침에는 추위, 점심에는 세균, 저녁에는 피로와 맞서 싸우며 그의 안면을 보호해왔건만 우리가 이제 늙고 병들었다 하여 그는 우리를 세안폼과 필링 약품으로 그저 죽여 없애야 할 병폐로만 생각을 할 뿐이다. 설령 그것이 우리 후대를 위한, 젊은 피부 세포들을 위한 명예로운 죽음이라면 우리는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으나 작금의 그를 보라!

그저 커피와 술과 게임만을 밝히며 하루하루 피로를 쌓기 바쁘고, 그저 노화만을 재촉하는 이 어리석음을 일깨워야 하지 않겠는가! 오히려 오늘날 이 사태를 바라만 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불충이요, 불의일 것이다"

그의 격문에 감격한 늙은 피부 세포들은 부르르 떨었고, 경국지색 참이슬에 홀린 뱃살과 뒷목, 대뇌도 함께 난에 동참하니, 김박스가 다음 날 눈을 뜬 것은 아침 10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거야! 어? 아주 근태가 말이야, 엉망이야 엉망! 그리고 이런 말은 좀 뭣하지만, 사람이 지금 몰골이 그게 뭐야? 세수는 하고 다니는거야?"

김 부장의 호통과 함께 개망신을 당한 김박스는 자리로 돌아와 거울을 보아하니, 밤새 보일러 세게 틀고 지독히 건조한 방 안에서 맵고 짠 안주와 함께 술 빨고 잔 댓가로 온 얼굴에 각질이 다 일어났다. 그 와중에도 늦잠을 자서 대충 눈꼽만 떼고 출근을 했으니 얼굴이 엉망진창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뱃살은 크게 세를 불렸고, 뒷목과 대뇌는 뻣뻣하게 신경전을 걸어오니 김박스는 당장이라도 항복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오랜 시간 청춘의 멋을 위해 세월을 바친 이였다. 궁지에 몰리자 오히려 비로소 칼을 빼들었다. 거울을 노려보며 각질에게 전면전을 선언했다.

"나의 피부는 사우나와 피부과로 다져진 돈지랄의 산물, 이 소중한 것들을 어찌 각질 따위에게 넘기겠는가"

그는 점심시간을 틈타 온 나라의 뷰티를 관장하는 행정기관 올리브영에 들러 립밤과 수분크림을 징발, 재차 각질을 진압하고, 집에 와서는 필링과 보습팩과 영양크림으로 내일의 싸움을 준비했으며 피부 관리 10+1회를 끊어 장기전에 대응했다. 아울러 당분을 끊고 저녁을 종합비타민과 대량의 물로 대신하니, 이는 필승의 시나리오요, 불패의 결의였다.

"드르렁"

마지막으로 방에 가습기를 재가동하고 실내에 빨래를 널었으며 그것도 모자라 9시도 안 되어 수면에 들어가니 각질의 난은 이미 그것으로 끝난 것과 다름없었다.





"흐, 흐흐…"

이미 싸움은 결딴이 났다. 피부를 촉촉히 적시는 화장품과 최소 10시간 이상의 딥슬립, 충분한 수분 공급에 동반하는 당분 끊기 등, 피부에 좋다는건 다 했으니 각질이 설 땅은 이제 없었다. 그는 가볍게 웃으며 조용히 읇조렸다.

"그거면 되었다. 나는 그거면 된다. 내가 어디 네 가운데 다리도 아닌데, 일어난다고 누구한테 환영받는다고 그 난리를 치며 일어났겠느냐. 껄껄껄"

그렇게 웃은 그는 말을 이었다.

"단지 그저… 방탕하고 앞날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네 모습에 엄중한 경고를 위해 이 늙은 몸 마지막으로 일으켜 보았을 뿐이나, 이제 그렇게 정신 차리고 알찬 내일의 준비를 시작하는 모습을 보았으니, 나는 이제 이렇게 네 몸을 떠난다."

그렇게 각질은 잠이 든 김박스의 몸을 떠나, 배게 맡 어딘가로 눈에 보이지도 않는 크기로 떨어져 바스라졌다. 그 와중에 김박스는 잠결에 희미한, 각질의 마지막 말을 들은 듯 듣지 못한 듯, 귀를 긁으며 다시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명심하거라. 비록 나는 이렇게 사라지지만, 다시 네가 방탕하고 관리 없는 하루하루를 보낼 때 나의 후예들은 다시 일어설 것이다. 더욱 추하고 더욱 집요하게 말이다. 부디 건강하고 규칙적인 삶을 살거라…"


- 끝 -

이제는 아재가 되어버린 한 소년의 풋풋했던 첫 사랑이 어느날 MEN이 되어 돌아온다면 이런 느낌일까(하앜)….   


"나가" 소설

격분한 내가 정신없이 몰아붙이던 도중 터져나온 그녀의 한 마디.

"뭐?'

당황하면서도 애써 그 당혹감을 감추며 거칠게 되물은 나에게, 그녀는 문 밖을 향해 손가락질까지 하면서 말했다.

"나가라고. 짐싸서, 당장 나가"

내가 무어라 대꾸도 하기 전, 그녀는 옷장 위에 올려놓은 나의 캐리어를 끌어내리더니 내 앞에 내팽겨치며 선언했다.

"이 집에서 나가. 나 너랑 같이 못 살아"

일방적인 통보. 처음 보는 그녀의 차가운 얼굴. 사소한 말다툼에서 시작된, 서로의 아픈 구석을 후벼판 큰 싸움. 그리고 급기야 우리 엄마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터져나온 폭언. 실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사과하려고 했지만 그 순간 선언된 이별의 한 마디.

"나 정말 힘들어, 이제 우리 그만하자. 나가줘. 지금 흥분해서 하는 소리 아냐. 오래 전부터 생각했던거야."

'우리의 보금자리'라고 생각했던 이 집은 그저 그녀의 명의로 된 원룸 전세였을 뿐이고, '예비 부부 생활' 혹은 '동거'라고 생각했던 우리의 일상은 착한 그녀가 베푼 동정이었을 따름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창업 실패 덕분에 여친 집 빌붙어 사는 찌질이'라는 내 차가운 현실을 비로소 마주하게 되었다.

"무슨…"




바닥에 내팽겨쳐진 캐리어와 "나가"라는 말, 그리고 캐리어 안에서 쏟아져 나온 옷가지 몇 벌을 보는 순간, 십 수 년도 더 된 씁쓸한 기억이 떠올랐다. 화단에서 개미를 잡아와 지하층의 우리집 창문으로 자꾸 들여보내던 그 밉상스러운 주인집 아들내미.

녀석와의 시비 끝에 녀석은 우리 엄마 욕을 했고, 나는 곧바로 주먹을 날렸다. 세상 그 누구도, 내 앞에서 불쌍한 우리 엄마를 욕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서로 뒤얽혀 코피 터지게 싸웠던 그 날 밤.

체구도 작고 싸움도 못해, 맞기도 내가 더 많이 맞았고 잘못도 그 놈이 했건만 고개를 숙여야 했던 것은 나와 엄마였다. 나가라고 소리치는 그 옴팡지게 생긴 주인집 아주머니의 성화에 엄마는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건만, 그 극성 맞은 아주머니는 우리 집까지 들어와서 집안 살림들과 빨아놓은 새 옷을 밖으로 내팽겨치면서까지 화를 냈다.

골목길의 동네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와 구경을 시작했고, 그 사람들을 향해 "사람이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유분수지!" 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아줌마.

급기야 아줌마가 근 4년째 갱신을 하지 않은 계약서까지 꺼내들고 나오자, 다급해진 엄마는 "엄마가 기웅이랑 잘 지내라고 했어, 안 했어!" 하고 크게 소리치며 내 뺨을 몇 번이고 올려붙었다. 외가의 7남매 중에서도 유난히 억척스러웠던 엄마의 손은 매웠다. 한 대에 뺨이 벌개지고 두 대에 입술이 터졌다. 그리고는 몇 대인지 모르게 맞았다. 나는 움츠리되 울지는 않았다. 아주머니가 당황해서 되려 말릴 즈음이 되어서야 끝난 그 한바탕의 지랄굿.

방으로 돌아와, 시뻘개지고 퉁퉁 부운 뺨을 매만지며 방구석에 말없이 앉은 나와 역시 등을 돌리고 앉아 울던 엄마. 참 많이 아팠다. 하지만 내가 진정으로 아팠던 것은 뺨도 아니요, 엄마에 대한 서운함도 아니었다.

그 놈의 없는 살림 때문에 끔찍히도 사랑하는 아들의 뺨을 독하게 후려칠 수 밖에 없었을 그 엄마의 마음이, 그 누구보다 찢어지게 아팠을 그 마음이, 흐느끼며 돌아앉은 외로운 뒷모습 너머까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너무나도 가슴 아프고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트라우마가 되어버린 것일까.

엄마의 돌아앉아 울던 그 모습은 아주 오랫동안 나의 악몽에 나왔고, 다양한 변주가 되어 십 년도 넘는 세월동안 틈만 나면 나의 꿈자리를 괴롭히고 또 괴롭혔다. 다행히 언젠가부터는 그 모습도 익숙해졌고 드디어는 웃긴 꿈에서까지 활용되어 그렇게 나는 그 트라우마를 긴 세월 끝에 극복할 수 있었다.




"그래"

순식간에 차가워진 머리. 그리고 그보다 더 차가워진 가슴. 주섬주섬 캐리어에 쏟아진 내 옷가지들을 다시 집어넣으며 그 와중에도 반복되는 가난의 굴레에 씁쓸함을 느끼는 나. 그렇지만 왜 지금 그 기억이 떠올랐을까.

돈 때문에, 가장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추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 때문이었을까.

"흐, 흐흐…"

그리고 그제서야 웃음 같은 울음이 터졌다. 지난 십 년도 넘는 세월 동안 한번도 안 울었는데. 군대에서도 안 울고. 그때 그 날도, 너무 불쌍한 우리 엄마가, 혹시라도 내가 또 울면 언젠가의 겨울 밤처럼 "수혁아, 엄마랑 같이 죽자" 며 대접에 뭘 타올까봐. 그렇게 조마조마하며 울음을 참았는데.

하지만 지금은 도저히 참을 수 없이 흐르는 눈물에, 온 방 안이 그저 누렇고 새하얗게 흐려졌지만 먹먹한 가슴에 숨을 고르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지금의 내 모습은 얼마나 추할까.




"걱정말어. 담주에 줄테니께"

내가 본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 그나마도 역시나 등 돌린 채, 신발을 신던 모습이 전부다. 신발을 다 신고서는, 한번쯤 돌아서서는 엄마에게 고맙다거나, 혹은 나를 보며 "아들" 어쩌고 하는 인사라도 한마디 할 수 있으련만.

그는 그렇게 신발을 다 신더니, 문을 열고 그렇게 바로 나가버렸다. 바람처럼 나갔다가 근 반 년 만에 돌아와서는 그렇게 엄마의 전 재산을 들고 그렇게 사라져버린 인간 쓰레기.

그때는 엄마도 여자였을게다. 그의 마음을 마지막으로 돌려보려고 지난 밤 오만 수를 다 썼을테고, 그 큰 돈을 내준 것도 그렇게라도 마음을 한번 잡아보려는 안타까운 결단. 물론 결과는 대실패였지만. 하지만 머리가 조금 굵어진 이후로는 깨달았다. 진짜 엄마 인생의 발목을 잡은 것은 그가 아니라 나라는 사실을. 떠나간 쓰레기야 잊어버리고 새로운 사람을 찾으면 그만일 뿐 아니겠는가. 하지만 나는?

엄마는 지금도 나이에 비해 동안이고, 좋다고 따라다닌 남자 몇 정도는 나도 알고 있으니까. 공장장 아저씨부터 뭐 이 사람 저 사람. 하지만 결국 딸린 애를 책임져야 하니 그렇게 내가 엄마의 족쇄가 되었겠지. 생각해보니, 지영이한테도 내가 족쇄였으리라.

능력 없고 미래 없고 사고만 치고 다닌, 비전 없는 남자친구. 그러나 정 많고 의리도 많아서, 바보 같이 그 외모 그 매력을 갖고 나 같은 놈이나 만나고…. 남들은 잘만 갈아타던데.




"그, 지영아"

애써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며 나는 캐리어를 집어 들었다. 그래, 어쨌든 지영이와의 일인데 왜 구질구질한 내 지나간 인생 이야기를 혼자 떠올리고 있단 말인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그녀를 위해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어…"

정리되지 않는 머릿 속과 해야 할 말을 한참을 애써 정리했건만, 결국 건조한 내 입에서 흘러 나온 말은 흔해 빠진 말이었다.

"행복해라"

캐리어를 들고 집을 나선 후에야 생각했다. 나 역시도, 우리 아버지처럼, 남겨지는 사람에게 마지막 떠나는 얼굴을 안 보여줬구나, 하고.





오피스텔을 나와, 골목을 돌아, 큰 길로 가기 전, 다시 옆 골목으로 돌아 들어가, 벽에 몸을 기대고 그렇게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눈을 감고 소리없이 끅끅대며 울었다.

수없이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만약… 그냥 그때 그 계약에 싸인을 했더라면. 아니면 그냥 아예 뻘스러운 사업이 아니라 다니던 회사나 잘 다녔으면. 처음에 대금 들어왔을 때 그걸로 일 더 안 벌리고 만족했더라면. 그랬으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그럭저럭 살맛나게 살았을텐데.

지영이한테 손을 안 벌렸더라면. 아니면 진작에 좀, 아니 그냥 차라리 5년 전 그 날 고백을 하지 말았더라면. 그랬다면 명훈인가 정훈인가 하는 그 대기업 다닌다던 남자랑 다시 잘 만났을텐데. 너 걔 그때도 좋아했었잖아. 나랑 사귀면서도 몇 년을 못 잊고 힘들어 한 거, 사실 다 안다.

흐.

나도 다 잘해볼려고 그런건데. 조금이라도 더, 너도 호강시켜주고, 엄마도 더 고생 안 할 수 있게. 잘 될 줄 알았는데. 난 진짜 잘할 수 있었는데.

다 좋은 사람들인데. 왜 그렇게들 다 힘들고 고생만 하고 잘 안 풀리는지. 하면 안되는 약속을 너무 많이 했다. 내년에는 결혼 꼭 하자, 내년에는 엄마 내가 가게 하나 차려줄께, 내년에는 내년에는 내년에는.

그랬지.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치며 얼어붙은 마음을 한층 더 공허하게 만들지만, 그 차가운 기분이 차라리 더 좋았다. 눈을 떴을 때, 세상이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떴다.




큰 길로 나와 버스를 기다린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진눈개비가 휘내리기 시작하는 겨울 밤, 저 멀리서 버스의 불빛이 보인다. 지갑을 가방에서 꺼내고, 캐리어를 다시 손에 쥔 순간 울리는 지영의 전화.

진동이 몇 번을 울리는 것일까.

버스가 정류장에 서고, 버스에 오를까 말까 망설이는 나. 그리고 전화를 받을까 말까 망설이는 나. 캐리어를 쥔 손에 힘을 준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쉰다.

'우리 다 행복하자'


- 끝 -

에버드림 소설

2020년, 노스웨일즈 의과대학 맥 돕슨 교수 연구팀은 뇌에서 분비되는 피로회복물질(FRS-b)에 대한 논문을 발표한다. 크게 주목할 것 없는 평범한 의학 논문이었지만 그 안에서 힌트를 얻은 세계적인 제약회사 노바스틱스 측은 이후 근 10여년 간의 추가적인 연구를 통해 인체의 피로회복에 대한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그것은 압도적인 효능의 피로회복 약물 '프레쉬(Presh)'로,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프레쉬 몇 알이면 완벽히 피로가 회복될 수 있었다. 물론 안구건조증이나 식이장애 등 자잘한 부작용의 우려는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체내 생성물질에 의한 피로회복제'이기 때문에 상당히 안정적인 약물이었다. 이론적으로는 프레쉬만 복용하면 24시간 내내 수면을 취하지 않아도 전혀 건강에 지장이 없었다.

사실상 인류는 드디어 '수면'을 정복한 셈이 되었고, 프레쉬는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딱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화학적 합성이 불가능하여, 오로지 실제로 사람의 수면을 통해서만 그 원료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노바스틱스는 그 피로회복물질을 수집하기 위한 자회사 '에버드림'을 설립했다.






에버드림






"당신의 잠을 삽니다"

새하얀 옷을 입은 매혹적인 여인이 잠자는 근육질 남성과 입술을 맞추며 잠을 깨우는 선정적인 광고. 그것은 최근 모바일, 인터넷, TV, 드론 및 옥외광고, 하이비전, VR, 브레인비전, 잡지 등 온갖 광고 채널을 통해 몇 달 째 사람들이 질리도록 보고 있는 에버드림 사의 광고였다.

"어우 지겨워 진짜 저 놈의 광고는 염병, 아주 신물이 나네"
"근데 저거 돈 많이 준대"

하지만 누군가들은 그 '에버드림'의 광고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수면 1시간 당 1만원을 지불한다는데 한달이면 30만원이고, 2시간씩만 팔면 한달에 무려 60만원 아닌가. 귀에 블루투스 이어폰만한 크기의 수면채취기만 꽂고 자면 한달에 제법 큰 목돈이 생기다는데 서민들 입장에서 그에 혹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긴, 우리 회사 김만복 부장 마누라는 아예 회사 때려치우고 하루종일 잠만 잔댄다"

오랜 경체 침체로 인해 20년 가까운 디플레이션이 지속된 사회에서 '시급 1만원'의 수면비는 최저임금보다 살짝 낮은 수준이었고, 때문에 보다 쉽고 편하며 저렴하게 돈을 벌 수 있는 에버드림은 사회적, 아니 전세계적 신드롬을 부르기에 충분했다.

"인도에서는 시간당 350원이라더라"
"캬, 근데 그럼 뭐하러 다른 나라에서 비싼 돈 주고 채취하는거래? 그냥 인도나 무슨 다른 못사는 나라에서 채취하면 되지"
"EU에서 트집 잡았거든. 그래서 나라마다 프레쉬 판매수량의 20%인가를 그 나라에서 에버드림으로 채취해야 된대. 근데 한 알에 10만원 넘는 약을 거지나라에서 얼마나 팔 수 있겠냐. 선진국에서 많이 팔리는 약이니 결국 선진국에서 채취도 많이 해야지"
"EU가 신의 한 수를 뒀구만"




'프레쉬' 신드롬은 노바스틱스의 시가총액을 전 세계 1위로 끌어올리기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새삼스레 빈부격차를 극단적으로 가르는 지표가 되기도 했다.

"야, 오빠 시원하게 달린다!"
"와 오빠 진짜 부자네"

누군가들은 프레쉬로 아예 며칠씩 잠도 안 자고 무한체력으로 놀고 일하며 그 '길어진 삶'을 즐기게 되었지만, 누군가들은 말 그대로 '살기 위해' 먹고 싸는 그 이외의 모든 시간을 잠자는데 쏟아붓게 되었다.

"뭐, 그렇잖아요. 잠만 계속 자면 허튼 돈 쓸 일도 없고, 시간도 잘 가고, 다른 할 일도 딱히 뭐 없으니까…"

머지않아 휴대폰 앱이나 브레인비전과 연동된 귀 뒤의 피로회복물질(FRS-b)의 채취시간을 설정하고 잠을 자는 것으로 생계를 잇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하루 최대 14시간까지 FRS-b의 채집이 허용된 한국에서는 '14시간 채취수면 + 6시간 개인수면 + 4시간 생계시간'의 14,6,4의 라이프를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슬리피 세대'라는 유행어가 생기기도 했다.

"한달 내내 그렇게 살진 않아요. 그냥, 일주일에 5일 정도만, 그것도 꼭 매주 그러는건 아니구. 보통 그래서 한 230~320 정도 버는 듯요. 왔다갔다 해요. 연애요? 에이, 그럼 끝이죠"

평범한 삶을 구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슬리피 세대'를 상당히 부정적으로 보았지만, 그런 이들조차도 한두번쯤은, 혹은 꽤 자주 에버드림을 이용했다.

"자기야, 다음 달에 명절인데, 이번 주는 그냥 어디 가지 말고 잠만 자자"
"그래 여보. 미안해, 신혼인데…"
"에이 그게 무슨 상관이야."




수면을 정복하게 된 인류, 아니 '부유층 인류'에게 있어서 프레쉬는 그야말로 의학 혁명 그 자체였다. 잠을 자지 않아도 된 것만으로 이미 30% 가까운 수명연장 효과가 생긴 셈이었으며, '피로 그 자체'를 회복시킨다는 점에서 수많은 성인병에 대한 예방제이기도 했다. 또 간이나 심혈관 치료의 보조 치료제로도 많이 사용되었다.

"참고인은, 마지막으로 잠을 잔 게 언제입니까"

국회 청문회에서 대기업 진상전자 김대용 회장이 "음,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대략 2년 전쯤으로 기억합니다" 라고 당황하며 언급한 내용은 당시 세계적인 이슈가 되기도 했다.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잠을 자지 않았다는 것은 프레쉬의 복용을 인정하는 것과 다름 없는 것으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부작용을 우려하여 프레쉬의 복용을 꺼려하던 세계 각지의 상류층이 그 일을 계기로 많이들 복용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알에 10만 5천원. 하루 7시간 수면을 기준으로 하면 하루 73만 5천원. 그것을 1년간 지속하면 무려 2억 6천 8백 2십 7만 오천원. 2년을 지속했다면 무려 5억 3천 6백 5십 5만원.

김대용 회장의 무수면 발언은 곧 "잠의 가치"라는 제목으로 뉴욕 데일리의 칼럼에도 인용되어 그 금전적 가치를 새삼 돌아보게 되었으며, 역으로 "에버드림 네버드림 뻐킹머니 자도자도 피곤한 너와 삼육오일 잠안 자는 그 놈들의 삶의 질에 새삼 질려" 라던 어느 3류 랩퍼의 노랫말처럼 "난 그냥 자, 귀에 뭐 꽂으면 잠이 안 와서" 라는 식의 허세가 잠시 유행하기도 했다.





"I just wanna drowse in my sorrow I wanna sleep, I wanna sleep~♪"

스티비 무어의 노래를 부르며 행진하던 그들의 모습은 꽤나 참혹했다. 피로에 절여진, 뼈만 앙상한 볼품없는 몸매, 해를 보지 못해 새하얗다 못해 피부병이 생긴 피부, 눈 밑이 퀭한 도시 빈민들.

"I Wanna Sleep"

프레쉬가 세상의 빛을 본 지 10년. 인도와 브라질 등의 개발도상국들을 중심으로 에버드림과 노바스틱스에 대한 반발운동이 일어났다. 그도 그럴 것이, 에버드림의 과도한 이용으로 인한 과로사나 성장부진 등의 혹독한 부작용을 얻은 빈민층들의 숫자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은 해당 국가들의 잘못도 있는데, 프랑스나 캐나다 등의 선진국들이 하루 최대 수면 채취시간을 3시간 이하로 엄격하게 제한한 것과는 달리-물론 그들 국가에서도 해킹을 통해 더 많은 잠을 판 빈민층은 존재했지만-,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들은 10시간은 기본이고 아예 수면 제한시간 자체가 없던 나라들도 있었다. 선진국 반열에 올라선 한국이 무려 14시간의 수면 채취가 가능한 것은 좀 이례적인 케이스였지만.

지나친 수면채취로 인한 과로사나 영영실조, 발육부진 등의 다양한 병이나 장애를 걷게 된 이들이 지난 10년간 몇 십 만명에 이를 정도로 후유증이 컸으며, 결국 네팔과 베네수엘라 등의 나라에서는 프레쉬의 판매와 에버드림의 수면 채취가 금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양한 문제가 드러났음에도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여전히 노바스틱스와 에버드림이 승승장구 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적지 않은 노인들이 잠을 팔아서 생계를 잇고 있었으니까.




[ 일주일 내내 잠도 안 자고 놀았던 푸켓의 추억 ]

데일리그램 등의 소셜 미디어에는 신혼여행을 가서 잠도 안 자고 놀았던 것을 인증하는 영상들이 종종 올라오기도 했다. 부의 과시였다. 종종 자신들도 프레쉬를 먹은 척 하며 무리하게 잠 안 자고 놀다가 과로사를 하거나 다크서클 낀 얼굴로 무리수를 띄우는 철없는 청춘들이 놀림거리가 되기도 했지만.

그러나 프레쉬가 꼭 소모적으로만 이용된 것은 아니었다. 빠르고 부작용 없는 피로회복능력으로 인해 다양한 운동선수들의 훈련량도 폭발적으로 늘어나 거의 모든 스포츠 경기의 신기록이 갱신되었으며-물론 그 반대로 관절이나 근육의 부상으로 인해 선수생명이 빠르게 끝나버린 선수들도 늘었다-, 사회 전 분야에 걸쳐 '능력자'들의 결과물 역시 양과 질 모든 측면에서 엄청나게 늘어났다.

그도 그럴 것이, 업무 및 연구 등에 있어서 그 연속성이 비약적으로 갱신 가능하게 되었기에 수많은 성과들이 빠르게 탄생하였으며, 건설업이나 컨텐츠 업계에서도 프레쉬는 가히 기적의 약물이었다.

"배우들은 살판 났죠. 한달 찍을거 일주일만에 다 찍을 수 있으니까. 스태프들만 죽어나는거지. 뭐, 그래서 프로덕션에서 아예 프레쉬 뿌리기도 해요, 좀 여유있는데는"
"요샌 다 철골로 짓죠. 빨리빨리가 이젠 완전히 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됐으니까"




"꿈"

이라는 제목의 프랑스 영화가 새삼 한국에서 이슈가 되기도 했다. 수면채취 앱 해킹을 통해 하루 15시간의 시간을 파는 알제리계 프랑스 빈민층 소년이 잠을 자지 않고 사는 부유층 백인 여학생을 짝사랑하는 내용의 이 영화는, 그 애틋한 스토리와 '억지 잠의 삶'과 '24시간의 에너지 넘치는 삶'의 극단적인 비교를 통해 진한 여운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전날 밤에 꾼 부끄러운 꿈'에 대해 소년이 수줍은 표정으로 이야기 하자 "꿈이 뭔데?" 하고 이상하다는 얼굴로 되묻는 여주인공의 모습에서 수많은 관객들이 충격을 느꼈으며, 해킹한 앱의 오류로 인해 일주일 가까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소년이 소녀가 선물로 준 프레쉬를 손에 꼭 쥐고 웃는 얼굴로 죽는 장면은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한편으로 "야 프랑스는 해킹해서 15시간인데 한국은 노멀버전이 14시간이다" 라는 사실이 뒤늦게 크게 이슈가 되어 결국 국회에서 프레쉬의 일 최대 채취시간이 8시간으로 주는 해프닝도 있었다. 이 과정에서 또 노인들이 "생존권"을 주장하며 대규모 반대집회를 열기도 했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사회는 노인들의 주장에 대해 조롱만을 남발할 뿐, 별 관심이 없었다.





일각에서는 음모론도 제기 되었다. 노바스틱스의 프레쉬 매출과 에버드림의 수면 채취량이 상식적으로 매칭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우리도 아주 급할 때는 먹기는 먹지만, 그거 뭐 먹는 사람 몇이나 되요. 근데 에버드림은 거의 뭐 다 쓰지 않나? 한두시간이라도? 프레쉬 매출이 생각보다 그렇게 어마어마하지가 않은데 에버드림 운영비가 엄청나잖아. 이거 뭔가 다른데 쓰는거 아님?"

체내 생성물질의 다른 목적으로의 전용은 엄청난 소송에 휘말릴 수도 있는 대형 사건이었기에 물론 노바스틱스에서는 즉각적으로 반박성명을 내었다.

"에버드림에서 채취하는 FRS-b의 질이 다 같지가 않다. 누군가는 매우 순도 높은 FRS-b을 생성하는데 비해 누군가는 피로회복능력이 떨어지는 잠을 판다. 그 정제과정에서 손실되는 양이 상당히 많으며, FRS-b 자체가 장기 보관이 어려운 물질이라 운송 및 보관 과정에서도 만만찮은 양이 훼손된다"

라고 해명했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이 의심을 거두지 않았으며 노바스틱스의 공식적인 매출로 집계되지 않는 거대한 검은 돈의 흐름이 추적되기도 하였다. 그것은 먼 훗날 미 국방부의 자금으로 드러나 또다른 음모론을 생성하기도 하였다.





"뭐하러 10만원도 넘게 주고 먹어. 도매로 사면 6만원이면 되는데"

하지만 진짜 노바스틱스의 골머리를 썩힌 것은 중국제 짝퉁 프레쉬의 유통 문제였다. '피로 회복'이라는 것은 꽤 주관적인 것으로, 몇 알을 동시에 먹는다면 곧바로 효과가 드러나니 확인이 쉽지만, 한 알에 10만원이 넘는 약물을 그렇게 마구 먹을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결국 잘해야 한두알로 최악의 피로만 가시고자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경우 짝퉁을 먹어서 효과가 없음에도 플라시보로 "어, 잠이 좀 깨네" 하는 케이스도 있는가 하면, 짝퉁을 먹어서 효과가 없는 것임에도 "먹어도 별 효과가 없네. 생각보다 프레시 별 거 아니네" 하는 케이스도 있었다.

특히 운송업을 하는 이들은 프레쉬의 주 고객층 중 하나였는데, 이 짝퉁의 유통으로 인해 유발되는 사고는 꽤 큰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체내 생성물질 기반의 생화합물이라는 점은 그 덕택에 도핑검사로도 쉽게 복용 여부를 밝혀내기 어려워 스포츠계에서 널리 사용되는 계기가 되었지만, 반대로 짝퉁의 유통시에는 노바스틱스의 "우리 책임이 아님"을 밝히기 어려운 이유가 되기도 했다.

노바스틱스는 개별 포장 단위의 실시간 판로 인증 및 품질인증제를 실시하기도 했지만, 짝퉁은 쉽게 없애기가 어려웠다. 고가의 약물이라는 점은 짝퉁의 유통을 더욱 부채질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리고 노바스틱스의 프레쉬 시판 20주년 기념일에 또다른 큰 문제가 터졌다. 프레쉬의 또다른 신봉자였던 칠레의 몬탈라고스 대통령이 2055년 대통령 신년사 생방송 중에 심정지로 사망한 것이다.

가뜩이나 프레쉬의 신약 특허 만료를 목전에 둔 시점에서, 프레쉬의 강력한 후원자이자 애호가였던 정치인이 생방송으로 사망하는 것이 중계된 것은 "프레쉬를 장기복용하면 심장에 무리를 준다" 라는 의학계 일각의 주장에 강력한 힘을 실어주었고 노바스틱스의 주가에 충격을 주었다.

이 역시 노바스틱스는 즉각적인 반박 성명을 내었지만, 가뜩이나 '비싼 가격'에 의한 반발심을 갖고 있던 많은 사람들과 수많은 건강염려증 환자들은 루머를 양산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프레쉬의 매출은 딱히 크게 줄지 않았다. 애초에 비싼 가격인만큼 프레쉬를 먹는 것은 '어쩔 수 없이라도, 꼭 필요한 사람들'과 '이미 지난 20년 동안 검증된 효과'를 믿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그저 원래부터 먹지 못했던 이들이 여우의 신포도 욕하기 마냥 루머를 양산하고 욕을 할 따름이었다.





"슬기야, 이제 그거 하지 마라"
"응?"
"이제 그냥 푹 자라고"

승남의 말에 슬기는 고개를 기우뚱 했다.

"왜?"

승남은 고개를 저었다.

"아버님 대장암이었담서. 가족력까지 있는데… 이제 안 그래도 되잖아. 잠 부족하면 대장암 많이 생긴다는데"
"나 진짜 괜찮은데"
"이제 우리 둘이 충분히 먹고 살만 하잖아"
"오빠…"

수면 부족으로 인한 대장암 발병 확률 증가는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다. 이미 전세계 사망 인자 1위는 고혈압, 흡연을 뛰어넘어 '수면부족'이었다. 그리고 수면부족으로 인한 대표적인 질병이 바로 대장암이었다.

한때 '고기 많이 먹어 생기는 부자병'의 대표격이던 대장암은, '잠 파느라 정작 자기 잠을 못자 생기는 가난병'의 대명사가 되었고, 전 세계적으로 대장암 환자가 해가 갈수록 폭발적으로 늘어 일부 나라에서는 무상의료 체계가 붕괴되는 현상을 낳기까지 했다. 덕분에 수많은 나라에서 뒤늦게 '에버드림'의 영업이 중단되거나 FRS-b의 채취 기준이 상당히 까다로워졌다.

사실 프레쉬의 특허가 만료되었음에도 복제약물이 쉽게 쏟아지지 않은 것은 일찌기 노바스틱스도 밝혔듯이 FRS-b의 입수 및 관리가 상당히 어려운 부분도 있었고, 이미 그 시기에는 전세계적으로 프레쉬에 대한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빈부격차 늘리는 약", "가난뱅이를 잠으로 죽이는 약", "인류에게서 잠의 축복을 빼앗은 약" 등 수많은 수식어들이 프레쉬를 비난하는데 사용되었고, 당초부터 제기되었던 "인간을 도구로 이용하는 약물 생산"의 윤리 문제에 대해 새삼스러운 격렬한 논쟁이 유발되었다.

결국 EU의 다수 국가들과 캐나다를 중심으로 프레쉬의 시판 자체가 판매 중지절차 심의에 들어가는 등-해당 안건은 부결되었지만- 근 20년 만에 노바스틱스의 프레쉬는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사실 노바스틱스와 애버드림으로서는 꽤 억울하기도 했던 것이, 지난 20년 간 전 세계가 프레쉬를 열심히 애용해 놓고서는 갑작스레 별 황당한 이유로 그 판매 자체를 막으려는 것은 황당하기만 할 뿐이었다.

노바스틱스 측의 로비와 실제 프레쉬를 장기간 애용했던 찬성론자들의 의견이 간신히 프레쉬의 판매중지는 막아냈지만, 그 매출은 1/3 토막이 났다. 그럼에도 노바스틱스는 여전히 전 세계 시가총액 1위의 굳건한 제약회사였으며, 그들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들은 '생명연장의 꿈'을 가진 수많은 권력자들이었다.

또한 그들 덕분에 생계를 꾸려가고 있던 수많은 전 세계 서민, 빈민들 역시도 그들을 지지했으며, 사실 노바스틱스와 에버드림을 욕하는 서민들조차 입사할 수만 있으면 영혼을 팔아서라도 입사하고 싶은 회사가 바로 노바스틱스였다.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연봉과 네임밸류를 가진 회사, 시가총액 1위의 강력한 자금력, 어마어마한 후원자들과 근무 중 얼마든지 자유롭게 프레쉬를 복용할 수 있는 사풍, 사원들에 대한 사측의 엄청난 재투자 등 다양한 매력을 가진 회사였으니까.




한편, 에버드림에 오늘도 잠을 팔고 온 김박스는 새벽까지 게임을 달리며, 혀를 끌끌 차며 생각했다.

'이 시간에 잠을 한 시간 더 자면 만원이 더 생기고, 일찍일찍 남들처럼 밤 8시에 자서 아침 8시에 일어나면 막 4만원 5만원도 벌텐데, 그걸 게임으로 날리고 있네, 등신 같은 놈'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 아까 통장으로 들어온, 엄마가 잠을 팔아 보내준 자취비 60만원을 떠올렸다. 지난 주에 회사 건강검진 때 엄마 대장에서 용종이 다섯개나 발견됐다던데, 하는 생각과 함께. 물론 그 와중에도 게임을 끄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 끝 -

나는 너를 참 좋아했다 소설

갑작스럽게 찾아온 우울증과 작은 오해, 그리고 모처럼의 해외 전근 기회. 그 모든 것이 엮여 나는 너에게 이별을 고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이별 선언이었기에 너는 당황했고 슬퍼했으며 분노했고 이해했다.

"관두겠습니다"

하지만 서울을 떠나 도착한 런던은 내 마음의 불안을 치유하기는 커녕 오히려 공황장애를 유발했고,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된 나는 다시 한국행을 택했다. 그리고 그 즈음해서 알았다. 나는 너가 없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미안해"

두 달만의 재회. 물론 너는 나를 받아주었고 나는 눈물로 기뻐했다. 그렇지만 이별 선언의 후유증과 아직 완전히 아물지 못한 원인을 알 수 없는 마음의 우울증, 그리고 두 달 간의 공백 사이에 있었던 너의 다른 남자.

"그랬구나"

전부터 알고 지냈던 아는 오빠와의 일회성 관계, 그것도 이별로 반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술에 취해 벌어진 헤프닝이라고 했지만 조금은 데미지가 있었다. 결국 나 때문이었고, 내가 훌쩍 떠나지 않았더라면 결코 있을 수 없을 일이었건만 어쨌든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

"시간을 가져도 될까"
"…그냥, 만나지 말자"
"아냐, 미안"

나는 마음을 추스리기 위해 조금의 여유가 필요하다고 느꼈지만, 너는 두 달의 공백을 단숨에 메꾸고 싶어했다. 못 만난 만큼, 이별을 선언하고 이별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벌어진 마음의 틈을 급하게, 초조하게, 서둘러 메꾸고 싶어했지만 난 그런 네가 부담스러웠다. 그 과정에서 싸움이 잦아졌고, 이번에는 이별에 대한 선언이 너에게서 먼저 나왔다.

"미안해 정말로"

나는 서둘러 미안하다고 말했고, 그녀의 의견을 그저 곱게 따르기로 했다. 연애관계가 변한 순간이었다.

"그게 내 잘못이야?"

두 달 사이에 이미 조금은 변해버린 너와 나의 연애 권력관계. 절대 갑이었던 나는 어느새 을에 가까워져 있었고, 내가 죽으라면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면" 살라면 "널 위해서" 라던 너는 어느새, 죽으라면 "내가 왜?" 살라면 "내가 알아서 할게" 라는 대답을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조금 다른 네가 되어 있었다.

"미안하지만 그런 장난은 이제 안 했으면 좋겠어"
"음, 그래"

짖궂게 치던 나의 장난은 진지한 얼굴로 제지 되었고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너를 참 좋아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근본적인 면에서는 바뀐 것이 없었다. 너는 나를 존중했고 나는 네가 편했다. 가끔 너의 발끈함에 움찔하긴 했지만 여전히 나는 거침없었고 너는 조심스러웠다.

"선물 사왔어"
"오! 정말?!"

작은 꽃다발 하나에 좋아라 하는 네 모습에 나는 그저 흐뭇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울려퍼진 카톡, 하는 알람 소리. 순간 아차하는 표정의 너와 상대를 짐작해버린 나.

"흠"

그것은 강간도 화간도 아니었다. 아니 냉정히 말하자면 그녀는 너무나 지친 마음을 기대고 싶어 술 기운으로 누군가의 어깨를 빌렸을 뿐이며 그는 그것을 오해했을, 아니 잠시 이용했을 뿐. 콘돔은 사용했느냐는 나의 실언에 또 "아니"라고 솔직히 답한 너. 물어본 나도 잘못이지만 솔직히 답해준 너도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그걸 의식한 내가 다시 미웠다. 그러나 나보다도 더 오래된 너와 그 오빠의 기나긴 인연을 어찌 단숨에 끊어내랴 싶어 그저 묵묵히 입을 닫았고, 심지어 그 한번의 관계마저 마음 속에 묻고 가기로 했던 나였지만 이번에 다시 한번 물었다.

"아직도 연락해?"

긴 침묵 끝의 대답은 "어. 그냥, 안부만" 이었다. 그럼에도 언제나 잠금없이 하늘을 바라보던 너의 당당했던 휴대폰은 어느새부터인가 무음으로 엎어져 있었고 언젠가의 깊은 밤, 몰래 시도했던 너의 폰 탐방은 난데없는 비밀번호에 참담히 막혀버렸더랬지.

"그래"

어색했지만, '도대체 왜?' 혹은 '뭐라고 하는데?' 같은 질문을 억지로 두 번 세 번 마음 속으로 삼켰을 무렵, 꽃 한다발로 화기애해했던 우리의 분위기는 곧바로 실패한 소개팅 이상의 어색함을 자아내었다.




그 날이었는지, 그 다음 날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던 그 날의 섹스는 유난히 격렬했다. 그것은 섹스라기보다는 육상이었고 레슬링이었다. 아랫도리에서 쾌감을 넘어 꽤 심한 뻐근함을 느낄 무렵에야 우리는 섹스를 끝냈다. 사정은 없었다. 그녀는 정성을 들여 내 아랫도리를 머금었지만 역시나 사정은 없었다. 시계를 보니 한 시간이 넘었다.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변강쇠네"
"네 다음 옹녀"

그렇게 다시 근 석 달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요즘 우리가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그만큼 만남의 빈도 자체가 크게 줄어있었지만 나는 시간이 필요했고 너는 어색함을 힘들어 했기에 나쁘지 않은 딜이었다. 그럼에도 데이트다운 데이트가 없다는 사실은 조금 불안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다음 주에 우리 여행갈까"
"미안, 나 선희랑 잠깐 보기로 했는데"

나는 언제나 1순위였다. 친구따위, 가족따위 그 어떤 선약도 나와의 15분 전 약속보다 그 가치가 낮았다. 전에는.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확실하게 일주일 전, 최소 반나절 전에 약속을 잡지 않으면 나는 데이트를 할 수 없었다. 그동안 사실 엄청 피곤하고 싫었다는 그녀의 말에 그저 수긍할 따름이었다. 습관을 들이면 별 거 아니라는 그녀의 부연이 이어졌지만, 충동적인 만남은 어느새 확실히 불가능해졌다. 나의 야근도 늘었고.




"야, 너 휴대폰 까봐"
"응?"

아직도 사태 파악이 안 된 그녀.

"휴대폰 열어보라고! 그 새끼 뭐야. 너 아직도 그 새끼랑 뭐 있냐?"
"뭐?"

언젠가의 금요일 밤. 섹스를 위한 밤이었다. 적당히 근사한 저녁, 기분좋게 손잡고 본 드라마 시청, 적당한 피곤함이 잠에 대한 열망과 섹스에 대한 두근거림 사이에서 고민하게 만들던 그날 밤. 가벼운 터치는 어느새 농밀한 애무가 되어 있었고, 머리 맡의 서랍에서 콘돔을 찾던 도중 수십 개의 카톡 메세지가 무음 속에서 전달되며 뿌옇게 빛나던 너의 휴대폰.

"그거 뭐야"

나의 말에 당황하지만 곧 화난 표정으로 "아무 것도 아냐" 하고 폰을 뒤로 하는 너. 사실 그 시점에 '끝났구나' 생각했다.

"열어"
"싫어"
"그 휴대폰 열어"
"싫다고!"

나는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키고,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인내를 베풀었다.

"지금 무슨 내용인지 알면, 설령 니가 그 새끼랑 지금 양다리 걸치고 있는거라도 한번 용서하고 넘어갈게. 내놔 봐"
"뭐? 양다리?"

나의 그 단어는 아주 좋은 먹잇감이었다.

"양다리? 지금 너 나 의심하는거야?"

그녀는 매우 적극적으로 거부했다. 나는 참고 또 참다가 그만 욕을 뱉었다.

"씨발년아, 내놔보라고오!"

그녀는 "나가" 하고 선언했고 나는 그 자리에서 뺨을 날렸다.




"후우"

이것을 오해라고 해야 좋을까, 비극이라고 해야 좋을까. 나는 내 머리채를 쥐어잡는 그녀의 배를 때렸고, 배를 감싸쥐며 쓰러진 그녀는 호흡을 간신히 추스리며 "개새끼, 넌 끝이야" 하고 선언했다.

"상관없어 씨발년아"

나는 바닥에 떨어진 그녀의 휴대폰을 손에 쥐었고, 네 번의 시도 끝에 '내 전화번호 뒷자리로 된 비번'을 열 수 있었다.

'염병'

카톡 메세지를 열었다.

"보지 말라고 개새끼야!"

밤 12시가 넘은 시간, 조용조용하던 그녀는 평소답지 않게 큰 소리로 외쳤고, 나에게 달려들려고 했지만 나는 다시 손을 들었다. 주춤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이젠 정말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됐구나 하고 생각했다.


[ 뭔 소리야. 못 싸는거랑 매력은 전혀 상관없다;;; 진짜 매력없으면 싸지를 못하는게 아니라 발기 자체가 안되지ㅋㅋㅋㅋ ]

…스크롤을 한참을 올려봤다. 침대 옆에서 훌쩍훌쩍 울기 시작하는 여친과 허탈하게 그 오빠와의 대화를 훑어보는 나. 살을 섞은, 혹은 섞기 직전의 사이에서나 나눌 수 있는 강도 높은 대화들이 많았다. 이미 실제로 한번 섞기도 했고 말이다.

"후우"

조금은 웃기기까지 했다. 아마 즐거웠을지도 모른다. 아니 즐거웠겠지. 오랜 시간의 우정이 섹스라는 열매를 맺기도 했고, 그 이후에도 드문드문이지만 꽤 수위 깊은 이야기를 주고 받을 수 있는 그런 어떤 묘한 이성의 존재. 아마 즐거웠을 것이다.

"이 새끼랑 또 잤냐? 맛있디? 창녀 같은 년아"

그녀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었다. 나서는 문 뒤로 그녀의 엉엉대는 울음소리가 들렸지만 애써 무시했다. 내 눈에도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으니까.




"잠깐 이야기 좀 해" 라는 그녀의 말에 3일 만에 연락한 우리. 그녀의 집 앞 커피숍에서 만난 우리는 거의 30분 가까이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러다가 급기야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한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딱 한번 뿐이야. 그 날도 서로 실수였다는거 인정했고, 너랑 다시 만난 이후로는 잔 적 없어. 정말이야"

사실 알고 있었다. 감이라는게 있지 않는가. 여자의 촉보다 더 무서운 남자의 감. 단지 나를 두고 다른 남자와 뒤에서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는 것이 불쾌했을 뿐. 게다가 그래서야 언제든 다시 섹스 파트너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고 말이다.

"그 말을 믿는다고 쳐도, 그럼 이제 어쩔건데. 남친 말고 다른 새끼랑 그런 이야기나 쳐하고?"

그녀는 한참을 말이 없다가 휴대폰을 켜서 보여줬다. 비번을 걸려있지 않았다. 휴대폰 차단 전화, 카톡 차단 리스트에 그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

"…다시는 그런 일 없을거야. 미안해"

그녀의 말에 한참을 고민하다 얼굴을 쓸어내린 나는 말했다.

"밥은 먹었냐"

그렇게 우리는 다시 6개월을 행복하게 연애했다. 솔직한 마음으로, 그에게 조금 고맙다는 생각을 했다. 결정적 위기를 겪고 나자 우리는 오히려 처음 만난 그 순간처럼 열정적으로 불타올랐다. 아마 그 사건이 없었다면 조금은 루즈한 연애에 우리는 다시금 위기를 겪었을지도 몰랐으니까.

함께 대만, 일본, 캐나다를 여행했다. 2천 남짓 모아놓았던 돈도 방탕한 연애질에 700 가까이 써버렸을 정도였다. 그리고 캐나다에서 귀국하던 그 날, 여친은 쓰러졌다. 조금은 추하게.




"간질이요?"

뇌전증이라는 말에 바로 '간질'이라는 단어를 꺼낸 그녀. 그녀의 쌍둥이 남동생이 간질 환자라고 했더랬지. 의사가 "예, 뭐" 라고 대답하는 순간 여친의 눈에서 곧바로 굵은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는 자의 눈물'이었다.




"무슨 미친 개소리야! 그럼 너가 그렇게 나 두고 가버리면, 나는? 나는? 어? 그럼 반대로 내가 간질이면 너도 나 버릴거냐? 어?"

나의 말에 그녀는 곧바로 단언했다.

"어, 버려"

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곧 다시 "야, 아직 두 군데 밖에 안 가봤어. 그리고 간질이라는게 시발 뭐 무조건 다 좆같은 케이스만 있는게 아니라두만. 왜 혼자 오바야. 그냥 좀 가끔 남보다 불편할 수 있는거 뿐인데. 더한 병 갖고도 잘만 사는데 왜 오바야 오바는" 하고 그녀를 달랬다.

"너가 진짜 그 상황을 몇 번 겪다보면… 그리고 니 앞에서 그런 꼴 보이고 싶지도 않아"

나는 감정이 격해져 소리쳤다.

"야, 피차 시발 자지 보지 똥구멍 다 깐 사이에 부끄러울게 뭐 있는데? 어? 간질 와서 똥싸면? 닦아주고 씻겨주면 그만이고, 어? 시발, 어? 오줌 싸면, 오줌 싸면 닦아주면 그만이고, 쓰러지면, 어디 안 부러지게 쓰러지기만 하면 내가 일으켜주고, 다치면 병원 데리고 가면 그만인데, 뭐가, 어? 뭐가 힘들다고 그 유난이야. 아예 남들은 반 병신되서 침대에서 오줌 똥 수발 다 하면서도 살아. 혀 돌아가면 내가 다 빼줄건데, 평소에는 잘 발현도 안되는 뭐 그런 거 땜에 그렇게 오바질이냐고"

나도 울고 있었다. 그녀가 아프다는게 속상했다. 병을 갖고 있는게 속상했다. 수발을 들어야 할지도 몰라서가 아니라, 그녀가 앞으로 그 병에 떨면서 살아갈 것이 안타까워서 속상했다.

"아프지마… 아프지마, 병신아. 왜 아프고 지랄인데. 누가 아프래. 니 몸 니꺼 아니라고, 함부러 아프지 말랬잖아"

나도 그녀도 울고 있었다.

"너 간질이 어떤건 줄 알아? 평생을 폭탄 언제 터질지 몰라서, 본인도 떨고 가족도 떠는 병이야. 너어, 나중에 나 상처주지 말고 그냥 지금 헤어져. 그게 차라리 나아"
"좆까, 좆까라고"

그녀를 품에 안고, 평생토록… 아마 우리는 질리도록 싸우고 또 싸우겠지만 어쨌거나 평생토록 그녀를 지켜주겠노라고 다짐했다. 괴롭혀도 내가 괴롭히고, 아껴도 내가 아끼면서.





"그거 아냐?"

노을 지는 낚시터에서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뭐"

근 한 시간째 한 마리도 잡히지 않는 물고기에 그저 콧물만 한 사발을 들이키고 있던 나는 라면 물을 올렸다.

"처음에 내가 너 만났을 때, 이 이 기집애랑은 사귀면 영 구리겠다 생각한거"
"뭐?"

부창부수라고, 남편이 라면물을 올리자 집에서 썰어온 대파와 양파를 꺼내는 아내.

"아니 뭔 여자애 목소리가 뭐가 이렇게 크나, 싶은거야. 뭔 나이 50 먹은 아저씨도 아니고, 지하철에서 말소리가 왜 그리도 크던지. 너는 몰랐겠지만 사람들 다 쳐다보고 엄청 민망했다"
"헐"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듯 "그래서?" 하고 호기심을 보이는 그녀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는 뭐 그래서야. 그냥 그래서 소개팅 끝나면 집에 가서 라면이나 끓여 먹어야지, 했지. 딱 라면 끓이려니 그 생각이 나네"
"근데?"
"근데 그 마지막에, 너가 그때 갑자기 화장실 가고 싶다고 해서 영화관 엘리베이터 탔잖아. 기억나냐? 여튼 극장 손님들이 엘리베이터에 우르르 탔는데, 니가 뒤로 밀리면서 내 발을 밟고 있었거든"
"그랬어?"

이미 15년도 더 된 이야기인데 당황하며 미안해 하는 아내.

"그때 니가 킬힐 신고 있었거든? 것두 검지 발가락을 꾸욱 누르는데, 그때 나 가죽 존나 쫀쫀한 새 운동화 아니었으면 발가락 백퍼 부러졌다. 여튼 근데 그래서 내가 '저기, 발, 발' 하고 귀에다가 이렇게 말을 하는데 니가 못 알아듣는거야"

말이 없어지는 그녀.

"그래서 발을 강제로 슥 빼고 나서, 니가 무안할까봐 작게 '별로 안 아팠어요'하고 속삭이는데 또 못 알아듣는거 같더라고. 그때 문득 번개같이 울 엄마 생각이 나는거야. 그래서 반대편 귀쪽에 대고 '우리 넘 딱 붙었어요'하고 속삭이니까 그제서야 엄청 부끄러워하며 떨어지대"

말없이 라면을 꺼내는 아내.

"울 엄마도 한쪽 귀 안 들리잖아. 근데 문득 니가 그렇다는거 아니까… 그냥 갑자기… 코가 시큰하면서 막 한없이 널 보살펴주고 싶고 막 그러대. 니가 고백했을 때까지 나 계속 모른 척 했잖아. 근 7~8년을."

또 아내는 그 말에 콧물을 닦는다.

"여튼 그렇다고. 아프지 마라, 멍청아"

멍청이라는 말에 겨우 얼큰해진 코를 풀며 나에게 그 휴지를 던지는 아내.

"그럼 사랑이 아니라 동정으로 시작한거야?"

그 말에 난 웃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엘리베이터 안에서 니랑 나랑 딱 붙었을 때 니 엉덩이가 엄청나게 빵빵하게 힙업된 엉덩이라는거 알았을 때 사랑에 빠졌지"
"아 시발"
"물 끓는다, 라면 넣자"

그렇게 나와 그녀는 오늘도 틱탁대며 이 지랄 맞은 연애를 이어 나간다. 나는 너를 참 좋아했다. 그리고 참 사랑한다.

< 끝 >

인생 2회차 소설

나는 교통사고로 죽었다. 무리한 끼어들기에 의한 3중 추돌사고였고, 차가 반바퀴 돈 상황에서 2차 사고로 빚어진 측면추돌에 의해 나는 그대로 절명했다.

'시발…'

죽는 와중에도 승호 형 말 듣고 그냥 외제차 살 것을 괜히 쉐슬람들 말 쳐믿고 임팔라 샀더니 이 지랄이구나 하고 후회했다. 하기사 도로 위에 재규어도 다니고 아슬란도 다니고 바이퍼도 다니는데 초식동물 임팔라라니, 뒤지는 것도 당연하다 하고 아재개그를 치며 그렇게 나는 죽었다.

내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느낌은 꽤 짜릿한데, 사정하는 느낌하고 비슷하다. 어쨌거나 영체가 되어 그렇게 으깨진 내 대가리를 보며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노라니 저 머리서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그 으스스한 분위기에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저승사자'

그는 길게 말하지도 않고 '알지?'하는 느낌으로 "가자" 하고는 나를 저승으로 인도했다. 조금은 아쉬웠지만 뻗댄다고 뭐 달라질성 싶지 않아 나는 그를 따라나섰다.







인생 2회차







과연, 옛날 이야기의 그 수많은 구전처럼 삼도천을 지나 저승에 도착해 나는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 유명한 염라대왕을 직접 뵙게 되니 꽤 감개무량했는데, 그는 키가 한 20미터는 족히 되어보이는, 거리감을 일순간에 마비시키는 거인이었다. 터질 것 같은 근육과 무서운 얼굴이 꼭 무슨 어디 대형사찰 문 앞의 사천왕 뭐 그런 느낌이랄까.

"어디 보자꾸나"

재판 절차는 그리 길지 않았다. 하루에 죽는 대한민국 사망자 수, 즉, 일 평균 750회의 재판을 한다고 하는만큼 나같은 시시한 소시민의 재판에 무슨 시간이 그리 걸리겠는가. 이승의 재판도 그렇지만 말이다.

간단히 저승명부에 기록된 내 이름을 확인하고, 결과에 승복할 것을 맹세하고, 재판장 한 켠에 세워진 초대형 거울에 생전의 굵직굵직한 내 죄들을 비쳐주는데 보고 있노라니 꽤나 부끄러웠다. 미안한 일도 참 많고.

"여기 비친 네 죄들을 인정하느냐?"
"예"

이쯤해선 빼도 박도 못하게 지옥행 확정이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제서야 조금 몸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는데, 염라대왕은 의외로 잠시 고민을 하더니 드디어 입을 열었다.

"죄인 김박스에게 윤회형을 선고한다. 다시 한번 윤회의 고리에 올라 사람으로서 업의 시험을 받는다. 당 판결에 대한 이의는 3일 내로 항소를 통해 제기할 수 있다. 이상!"

빼박 지옥행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시 사람으로서 삶을 살게 되는 윤회형이라는 말에 나는 엄청 기쁜 얼굴로 만세를 불렀다. 내 뒤에 서있던 다른 망자들도 조금 부러워 하는 눈치였지만 정작 나를 다시 삼도천으로 인도하는 저승사자는 혀를 찼다.

"도대체 요새 인간들은 죄를 얼마나 짓고 다니길래 너 정도 쓰레기가 다시 윤회형을 받냐? 백퍼 지옥행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말에 "그러게요" 하고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한 나였지만 그는 별로 밝은 얼굴이 아니었다.

"그냥 지옥 가서 조금 뺑이 치다 죄값만 다 갚으면 극락가서 선녀들이랑 질펀히 즐기며 편히 살 것을, 2회차 인생 살면서 업만 더 쌓지. 쯧쯧"

그 말에 그럼 윤회형은 별로 좋은게 아니냐니까 저승사자는 "윤회도 윤회 나름이지" 하고 썰을 푸는데. 벌레로 태어나면 뺑이는 치지만 금방 죽기 때문에 업도 덜 쌓고 벌레 자체가 일종의 형벌형이기 때문에 이승에서 지난 삶에 대한 업도 덜고 꽤 이득보는 윤회라고 했다. 초식동물도 마찬가지. 그러나 육식동물로 태어나면 살육의 업도 상당히 많이 쌓게 되어 별로 좋은게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최악은 역시…"

그것은 '인간'으로의 윤회로, 살면서 온갖 죄라는 죄는 다 지을 수 밖에 없는 지랄맞은 종인데다 수명도 보통 50년 이상은 보장되는 편이라 업을 산더미처럼 쌓아온다고 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언젠가부터는 어디서 무슨 일들을 벌이는건지 '원죄'라는 무거운 죄까지 알아서들 짊어지고 온다고 혀를 찼다.

"그럼 윤회형이 절대 좋은게 아니네요? 그럼 나 좆된건가요?"

그 말에는 또 "그건 아니고…" 하고 말을 흐리는 저승사자.





"아니 윤회를 백 번을 하면 뭘하냐고. 전생의 기억을 다 잊고 새 출발하는데. 안 그래?"

저승의 시스템에 대해 한참을 설명하던 저승사자는 울분에 차서 말했다. 그리고 그 말에 나도 무릎을 치며 공감했다.

"그죠? 나도 윤회라는 시스템이 그게 이상했다니까? 아니 뭐 기억이 있어야 반성하고 조심하면서 다음 생을 사는거지, 다 까먹으면 또 당연히 뻘짓하죠"
"그래, 그래놓고 뻘짓했다고 지옥으로 보내는 이 시스템이 나는 영 마음에 안 들어. 내 일이지만 진짜 마음에 안 들어"
"어디 자기 일 좋아서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윤회의 고리로 시험하는 이 짓들이 마음에 안 든다고"

그러더니 뜬금없이 저승사자는 "기분이다" 하면서 강가에 다가가자 조언을 했다.

"삼도천 다시 건너가서, 그 강가에서 삼신할매가 목 마르지? 하면서 곡차 주면 그거 절대 받아마시지 말아. 그거 마시면 기억 싹 다 날아가고 바보 된다. 그냥 다시 갓난쟁이로 태어나는거야."
"음. 근데 그거 안 마시면 뭐 부작용은 없나요?"
"있어"
"예?"
"니가 지금 기억 다 갖고 다시 태어나면 그게 애새끼겠어, 아니면 애늙은이겠어. 절대 뭘 좀 아는 티 많이 내지 마라. 그러다 다른 저승사자나 삼신할매한테 걸리면 곧바로 너 다시 저승 끌려간다"
"헐"
"또 한가지 알려줄까? 짐승으로 윤회하면 그거 안 마셔. 그래서 태어나자마자 알아서 대소변 가리고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다 알아서 살 수 있는거야. 본능은 얼어죽을"
"헐"

무서운 외모와는 달리 의외로 말이 많은 저승사자는 별 이야기를 다 했다.

"저승사자는 원귀와 다를 바 없어. 이승도 아니고 극락도 아니고 지옥도 아닌 이 구천을 끝도 없이 맴도는거지. 지랄맞은 일이야."
"살아있을 때는 무슨 일을 했습니까"

그러자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화랑이었지"

그 말을 듣자 나는 그제서야 모든 의문이 풀렸다. 왜 이 저승사자가 이토록 나에게 친근한 것이며, 기억을 가진 채로 환생할 수 있는 묘책을 알려주는지, 어째서 나 역시 이 저승사자가 그리 싫지 않은지. …예전에 듣기로 화랑들이 남색을 그리 밝혔다지. 내가 묘하게 싱글벙글 미소를 보이자, 그 역시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넌 내 생전의 동무와 참으로 많이 닮았다"



이후 한참을 말없이 걷던 나는 문득 떠오른 의문에 물었다.

"갑자기 궁금한데, 그럼 다시 환생하면 2017년에 다시 태어나는건가요, 아니면 나 태어난 해에 다시 태어나는건가요?"
"곡차를 마시면 2017년에 태어나고, 안 마시면 원래 태어난 해에 태어나. 저승명부에 갱신이 안 되니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거지. 그러니까 걸리면 다시 저승 가는거고"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또 물었다.

"기억 안 지우고 인생 두 번 산 사람 중에 진짜 완전 잘 된 케이스 있어요?"

저승사자는 말없이 한참을 있다가 입을 열었다.

"있지."




우리는 이윽고 삼도천 강변에 도착했다. 말없이 나룻배에 올라타 뿌연 몽연 속을 가르던 중, 저승사자가 아까의 질문에 대해 답했다.

"조선시대 사람인데, 배를 타고 이렇게 너처럼 다시 이승으로 돌아가는 길에 눈물을 줄줄 흘리는거야. 그래서 내가 무엇이 그리도 구슬프신가, 하고 물었더니 도저히 말로 다 못할 너무나 원통하고 괴로운 일이 있어 그렇소, 하고 입을 다무는데, 조선 시대 남자가 눈물을 흘리는건 보통 일이 아닌거거든. 그래서 뭔가 어마어마한 사연이 있겠구나 싶어서 나도 더이상 안 캐묻고 그냥 '아무리 힘들어도 마른 목으로 돌아가시오. 지금의 눈물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외다' 하니까 알아듣고 삼신할매 곡차를 슥 흘려버리대."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내가 호기심에 묻자 저승사자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렇게 이승 돌아가서 그 분한 일 없도록 평생 자기 할 일, 큰 일을 다 이루고 죽었는데, 죽은 다음에 나라에서 그 사람한테 '충무공' 시호를 내려주더만."
"헐?! 정말로?"
"내 최고 치적이지. 덕분에 결과적으로 내가 역천의 죄를 지었음에도 처벌 안 받았잖아"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훑던 저승사자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요즘 놈들은 기껏 보내봐야 주식이나 하고, 인생 두 번 살면서 지 개인 영달을 위해서만 살더라고. 자잘한 놈들"

그 말에 나도 슬몃 웃으면서 "현대인들 중에 잘된 거물들은 없어요?" 하고 물었다. 저승사자는 고개를 저었다.

"있긴 있지. 정치인 중에 있었어. 대단한 사람이었는데, 말년이 영 안 좋았지"

그런 대화를 나누던 중 어느새 배가 강나루에 도착했고, 그는 나를 삼신할매에게 인도했다. 할매는 내 얼굴을 보며 "어이구 이 놈아, 대가리가 깨져 죽었나. 다음 생은 제발 조심히 살어라" 하고는 등 두드리고 차 한 잔을 내미는데, 할매도 몇 번을 당해서인지 내가 곡차를 마시는 모습을 빤히 지켜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한참을 당황하다가 저승사자의 눈빛을 살피노라니, 저승사자마저 혀를 차며 '이건 안되겠다' 하며 고개를 젓는 눈치 아닌가.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나는 이판사판으로 몽환차를 마시는 척 입에 머금었다.

"음"

그리고 그 모습에 내가 곡차를 마신 줄 알고 흐뭇하게 삼신할매가 배넷저고리를 챙기며 내 엉덩이를 두드리고 그 자리에 몽고반점이 생기는 그 순간, 나는 그 몽환차를 등을 돌린 후 얼른 뱉어버렸다.

"크하하하하!"

저승사자는 적절한 타이밍에 크게 웃었고, 그렇게 그가 할매의 시선을 끌어준 덕분으로 난 기억을 완전히 잃지 않고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비록 뱉기 직전 한 모금 넘어간 덕분에 그 아련한 저승의 기억을 아주 뒤늦게, 오늘에서야 떠올렸지만 말이다.

< 끝 >

밤나비 소설

처음에는 아무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저 가벼운 접촉사고, 아니 그냥 사고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학생, 괜찮아?"
"예예"
"아니 저기, 아이, 어이!"

전날 연습에 늦은 것도 모자라 시합 날에 또 늦잠을 잤기에, 감독님의 구타가 두려웠다. 그냥 가볍게 차 범퍼에 가볍게 무릎이 닿은 정도의 사고였기에 그냥 그렇게 차를 보내고 정신없이 학교까지 달렸다.

'어어?'

학교에 거의 다 왔을 무렵, 뒤늦게 시큰한 통증이 왔다. 아차 싶었지만 별 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미 늦었기에, 몸도 제대로 못 푼 상태로 시합에 나갔다. 풀 타임으로 경기를 다 뛰고, 졌다는 이유로 시합이 끝나고 기합을 또 받았다.

그리고 그날 밤부터 나는 무릎 통증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일상 생활에는 큰 지장이 없는 수준이었지만, 경기를 뛰었다가는 여지없이 1쿼터만 끝나도 무릎을 감싸쥐고 이를 악물어야 했다. 처음에 병원에선 가볍게 인대가 놀란 정도라고 했지만 한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통증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이어지는 훈련과 시합 덕분에 나는 진통제를 달고 살았다. 온갖 마사지며 약물이며 안 써본 방법이 없지만 효험이 없었다. 신경쪽 문제인 것 같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절대 무리하면 안됩니다"

이미 병원에서는 통증 완화를 위해서 농구를 그만두라고 조언한 상태였다. 이대로 계속 무리했다가는 일상 생활에도 지장이 올 수 있다는 의사의 경고는 무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풀타임 경기가 어려운 수준으로 통증이 악화되었고, 1학년 태경이의 실력이 성장함에 따라서 나는 점차 벤치에 앉는 시간이 늘어났다. 경기 다음 날이면 하루에 진통제 거의 한 통을 다 먹으며 생활하던 내 모습에 엄마도 관둘 것을 권했다.

결국 태경에게 밀려 포인트 가드 포지션을 억지로 뛰며, 그것도 후보로 뛰던 날이 많던 나는 전국체전 지역예선 경기에서 1분도 뛰지 못한 날을 기점으로 농구를 관두기로 했다. 그렇게 학창 시절의 모든 것을 어이없게 잃은 나는 엇나가기 시작했다. 학교도 잘 나가지 않았고, 농구를 관둔 나가리 선배들과 어울리며 학교에 잘 나가지 않았다. '그래도 최소한' 하는 생각에 간신히 고등학교 졸업은 했지만 더이상 세상에는 내가 할만한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존재하지 않았다. 시간 버리는게 아까워 군대부터 다녀왔다.

"정신차리고 이제 일해야지"

군대 전역하고 나서고 한 3개월을 방구석에서 잠만 자니 엄마가 한 소리였다. 일자리를 안 알아본 것은 아니지만, 역시나 이런 후진 동네에 제대로 된 일자리가 있을 리 없었다. 그때 문득 생각난 것이 성기형이었다. 휴가 나올 때마다 어울린 농구 관둔 친구와 선배들. 그 중에서 서울에서 자리 잡았다는 그 형. 제네시스를 타고 왔던 성기 형.

"형, 잘 지내?"
"어어 우리 효원이 이 쉐리, 간만이네. 형은 잘 지내지. 왠일이야? 군대는 전역했지?"
"예, 뭐. 그보다 사실은 그냥 일 좀 할까해서"

술자리에서 형이 야부리 턴, 한달에 몇 백씩 번다던 그 일.

"어어? 왜, 너도 서울 올라오려고?"

조금은 당황스러워 하는 목소리에 실망하며 적당히 얼버무리며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형은 의외로 유쾌하게 대답했다.

"형 자취방 좁아지니까 짐 많이 가져오진 마라"







밤나비







버스를 타고 올라와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전철로 갈아타고 7호선 논현역에서 내린 나. 큰 더플백을 어깨에 메고 형이 말해준대로 논현 초등학교 근처로 향했다.

'와'

시장 골목을 지나며 '서울에도 이런 동네가 있네' 싶어 조금은 반갑기도 했다. 하지만 곧이어 한산한 동네를 바쁘게 걷는 퇴근길의 정장 입은 직장인들과 골목길을 누비는 외제차들, 미용실에 가득한 화려한 화장의 누나들을 보자 가벼운 한숨이 나왔다. 누가 촌놈 아니랄까봐.

"형, 나 거의 다 왔는데"

전화를 하자, 성기형은 "어, 벌써 왔냐? 미안 나 지금 강남역 쪽에 있는데. 그러면, 그… 한신포차 앞에서 기다려라. 한 10분 있다 보자" 하고 뚝 끊었다. 거기가 어딘가 싶어 고개를 두리번 거리다 결국 지나던 아저씨에게 물어 그쪽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있던 수많은 미용실과 그 안의 예쁜 여자들. 벌써부터 그것만으로도 작은 위안이 됐다.




"그 씨입쌔끼가 원래 그래. 전술 좆도 없고 무식하게 애들 체력으로 조지는거만 할 줄 아는 새끼. 영석이 허리 나갔을 때도 죽어라 돌렸잖아. 영석이 그 새끼도 결국 허리 씨발 개좆돼고, 우리 선배 중에 민우 선배도 씨발, 하이튼 그 새끼가 잡아먹은 새끼만 몇 명인지 몰라. 나도 그 새끼 땜에 다리 풀려서 계단에서 굴러서 여기 눈 밑에 이거, 이거 보이냐? 이거 그 때 상처잖아"

아디다스 삼선 츄리닝 바지에 스카쟝을 입고 나타난 성기형과, 청자켓에 검은 스키니 바지를 입고 나타난 그의 친구 원민. 성기형은 같이 운동했던 사이고, 원민이 형도 성기형이 바이크 탈 때 같이 다닌 모습을 몇 번 본 적 있어서 얼굴 정도는 아는 사이다. 농구부 출신의 우리 만큼이나 그 역시 키가 훤칠한 편이다. 새하얀 얼굴에 꼭 여자같이 예쁜 꽃미남 인상이라 성기형이랑 다니면 둘이 사귀는거 아니냐고 누나들이 놀리고 했었는데. 여전히 미남이긴 하다.

"그래서, 신세 좀 지고 싶다?"
"네"
"안될거 없지. 새키, 그래도 어떻게 내 생각을 다 했냐? 내가 니랑 뛸 때 존나 이뻐하긴 했다만. 아, 효원이 이 새끼 패스가 존나 예술이거든. 이 새끼랑 농구하면 존나 재밌어. 아 그리고 효원아, 원민이도 농구 좀 해. 중학교 때까지 농구한 애야 이 새끼도. 여자애 임신시키고 학교 짤렸지만. 레전드 아니냐? 하여튼 잘 왔어"

한참을 이야기하고, 술도 두 병 깠을 때 형은 담배를 피우며 대견해했다. 솔직히 나는 건달 일이라도 배울 생각으로 왔다. 농구만 하던 새끼가 농구 못하게 되고 배운 것도 없으니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는가. 자세히는 말 안 해줬지만, 화류계 일이라고 했으니 기도 쯤 되겠지 싶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뭐? 아…이 새끼. 건달 짓 해서 빨간 줄 가고 싶냐? 븅신도 아니고. 그런 짜치는 일을 왜 해. 하여간 촌놈 아니랄까봐"

성기형은 그저 '건달 짓'을 '빨간 줄 가는 일'이라며 욕할 뿐, 정확히 무슨 일 하는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그러자 원민이 형이 소주를 깔끔하게 넘기더니 말했다.

"선수. 호빠 선수 일이야. 너 할 수 있겠어?"
"호빠? 호스트바요?"

글쎄. 호빠라는 말을 듣는 순간 좆같다고 생각했다. 여자들 밑구녕 닦아주는 일이나 하면서 그 허세를 떨었나 싶어 절로 한숨이 나왔다. 나는 대답 대신 한잔을 더 들이켰고, 그 어색한 공백에 성기형이 말했다.

"더러운 일 하러 올라왔으면, 니도 그냥 좆걸레해. 주먹질 해서 호적 걸레 만드는 것보단 자지 걸레 만드는게 낫지. 여자랑 노닥대고, 따먹고 돈도 벌고. 건달은 씨발, 뭔 영화 찍냐? 기집애들 비유만 좀 맞춰주면 돈이 다발로 나오는데 뭐하러 병신같이 돼지어깨들 뒤닦아주고 다니냐?"




술자리를 마친건 새벽 1시를 살짝 넘긴 시간이었다. 출근해야 되는거 아니냐고 묻자 둘은 웃으면서 "야이 새끼야" 하고 손을 들었다. 간만에 고향 동생 왔는데 오늘도 일해야 되냐며 그냥 쳐놀기나 하라는 그들의 말에 그저 정신없이 놀았다. 술에, 노래방에, 생전 처음으로 룸까지 다녀왔다.

"아 간만에 씨발, 접대하다 접대 받으니 존나 좋네. 아 피곤하다. 원민아, 어떠냐, 이 새끼 잘할거 같지 않냐?"

집 앞에서 들어가기 전, 함께 셋이 오피스텔 앞 화단에 기대앉아 담배를 피우던 그 순간, 원민이 형은 성기 형의 말에 픽 웃었다.

"사이즈 나오잖아. 말 수 없고, 순진하고, 몸 좋고, 착하게 생겼고. 언니들이 환장하겠지. 좋아. 좀만 꾸미면."

그러나 담배를 짓이겨 끄며 어깨를 으쓱했다.

"근데 본인이 한다고 해야지. 그리고 승재 형이 하라고 해야 하는거지, 뭐 우리가 꽂아줄 수 있는 끕이나 되냐. 여튼 나 간다"
"어 그래, 잘 가라"
"들어가요"

그리고는 성기 형 오피스텔 주차장에 세워놓은 베스파를 타고 자기 집으로 향했다. 원민이 형 집은 역삼동이라고 했다. 성기형은 그제서야 얼큰하게 취한 술이 좀 깨는지 "드가자" 하며 나를 이끌었다.




"형 집 좋다"
"그럼"

상상 이상이었다. 하얀 대리석 바닥에 천장에는 무슨 레일 달린 조명에 50인치 TV에… 새하얀 방이 너무 좋았다. 원룸인가 했더니 넓직한 방도 두 개나 되고, 정말 좋았다. 이런게 고급 오피스텔이겠지. 바닥에 옷가지들이 어지럽게 널부러지긴 했지만, 그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형 이런 데는 막 몇 억씩 하지?"

그 말에 성기형은 웃었다.

"미친 무슨 부동산 하냐? 그냥 월세지 뭔 몇 억이야. 그 돈 있으면 장사하지"
"그럼 이런데 월세는 얼마나 해?"
"이백"
"이백?!"

놀라는 나에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증금 이백에 월세 이백"

그러나 나는 월세보다 보증금에 더 놀랐다. 우리 구미 집 보증금도 2천인데.

"서울인데 보증금이 왤케 싸?"
"이런 데는 다 씨발 우리 같은 새끼들이 대부분이야. 술집 다니는 년들 아니면 밤일 하는 새끼들. 평범한 직장 다니는 새끼들이 월세100만원 200만원 내면서 살 수 있냐. 태반이 그냥 우리 같은 애들이 사는거지. 금방 금방 가게 옮기고 하니까 단기로 살 수 있게 보증금 싸고 월세 비싸고, 뭐 그런거야. 나도 여기로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어. 한 두 달 됐나?"
"장난 아니네"
"아 피곤하다. 야, 거기 옷 방인데, 거기도 침대 있어. 거기서 자. 나 먼저 씻는다. 그리고 잘 생각해보고 결정해라. 앗싸리 안 할거면 빨리 말해주고. 그럼 걍 며칠 놀다 내려가고"




성기 형은 확실히 함께 농구할 때 죽이 잘 맞기는 했다. 그래도 그렇게까지 친한 사이는 아니었는데 이렇게까지 잘 해주다니. 어쩌면 그냥 나랑 같이 일하면 사이즈 좀 나오겠다 생각해서 끌어들이려고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잘해준건 잘해준거다. 고마운 사람이다. 하기사 옛날에 성기형 엄마 쓰러졌을 때, 우리 꼰대가 차에 태워서 병원 안 갔으면 그때 돌아가셨을거라고 했으니까.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 덕분에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후 느즈하게 일어난 우리는 집 앞 뼈해장국 집에서 속을 풀고, 신논현역과 강남역을 지나 원민이 형을 태워 신사동 쪽으로 향했다.

"딱 씨발 나도 2억. 아니 3억만 채워서 내려간다. 학교 앞에 노래방 차려야지. 에이끕 언니들 존나 돌리면서. 돈 딱 세게 맞춰주고, 여고 애들 졸업하면 바로 울 가게로 취업시키고. 개멋진 사장님 해야지. 원민이 니는?"
"나는 뭐, 그냥 돈 좀 있는 누나 하나 꼬셔서 씨 좀 뿌려주고 서방으로 살아야지. 평생 바람 피우면서"
"아 나 이 새끼는 진짜. 뭐가 이렇게 드럽냐. 효원이는?"
"난 그냥… 모르겠는데"

그러자 성기형이 룸미러로 힐끔 뒷좌석의 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효원아, 서울에서 자리잡고 일하던, 구미 다시 내려가든, 이거 하나는 확실히 해. 싸나이는 딱 인생에 목표가 있어야 되는거야. 누굴 따먹겠다, 아니면 뭐 사업을 하겠다, 아니면 뭐 돈을 모으겠다던간에. 딱 목표가 있어야 노력도 하는거고. 아니면 인생 바로 좆꼬인다. 이 새끼처럼"
"야"



성기 형이 나를 인도한 곳은 신사동의 한 미용실이었다. 촌스러운 머리 좀 어떻게 하라고. 예전에 일하다 망한 가게 앞의 미용실이라고 했는데, 형도 간만에 온다고 했다. '그런데 굳이 나를 왜 데려왔나' 했더니, 역시나 자기도 스타일링 받으며 여기의 한 미용사 여자애랑 노닥대기 시작했다. 애교를 엄청 부리는 것을 보니 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나보다. 어쨌든 내 머리를 담당하는 미용사, 아니 '헤어 스타일리스트' 누나도 엄청 예뻤다.

"어때요? 머리 길이 마음에 드세요?"
"네"
"그리고 머리는 내일 하루동안 감으시면 안되요"

다가온 성기형과 원민이 형은 "아 사람 됐네" 하며 박수를 쳤다. 조금 쑥쓰러웠지만, 솔직히 감탄했다. 머리 스타일 변화만으로도 사람이 이렇게 바뀌나 싶어서.

가게를 나와 가로수길 쪽으로 걷노라니, 성기 형이 문득 말했다.

"봐, 이 새끼야. 지나가는 기집애들 다 질질 싸잖아. 우리는 상품성이 있다고"
"야 다 들려, 볼륨 조절해라"

형에게 빌려입은 반듯한 블랙 수트에 팔찌와 시계 같은 악세사리들. 원민이 형은 브라운 수트, 성기형은 무슨 검도복 마냥 엄청 통 넓은 바지의 블랙 수트…평일 대낮에 쭉 빼입은, 헤어 스타일링 받고 나온 키 180 중반대의 남자 셋. 

'그럴싸하네'

지나가던 카페 창에 비친 우리 셋. 나는 적당히 평범하고, 성기 형은 전형적인… 나쁜 남자? 여자애들이 좋아하는 그런 인상이고, 원민이 형이야 꽃미남이니까. 지나가던 여자들이 모두 힐끔 거리고, 뒤에서 수근거리며 좋아라 하는 것이 느껴졌다. 특히 성기형은 고개를 휙 돌려 능글맞은 미소를 보내기까지 하니 어린 애들은 꺄꺄 대며 좋아하기도. 원래도 좀 장난기가 많긴 했지만, 이 정도로 능글 맞진 않았는데. 형도 제법 변했구나 싶었다.

"니가 어리버리하게 귀염 떨고, 원민이가 분위기 만들고, 나랑 승재 형이랑 조지면 딱 바로 게임 셋이지. 딱 박스 각 제대로 나오잖아. 경원이 창희 이딴 마바리들은 알아서 하라고 하고, 에이스들끼리 역할 분담 딱딱 팀으로 가는거지"

어쨌든 농구부 활동할 때도 여자들 시선이야 종종 받았지만, 서울 강남에서 제대로 차려입고 예쁜 강남 여자들에게 이런 시선을 받는 것은 정말 뿌듯한 일이었다. 물론 머릿 속 한 켠에서 '그래봤자' 하는 브레이크가 또 걸렸지만 굳이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슬슬 저녁이 되자 논현역으로 돌아온 우리. 나는 내심 오늘도 '술인가' 생각했지만 의외로 형이 나에게 카드를 주며 말했다.

"미안한데, 형들 오늘 일 생겨가지고 니는 그냥 혼자 좀 있어야겠다. 이걸로 밥 사먹어. 아님 뭐 어디 클럽이라도 가서 놀던지. 비싼거 먹어도 돼. 그렇다고 씨발 어디 뭐 지르면 죽인다. 카드 잃어버리면 뭐, 알지?"

손날로 목을 긋던 그는 원민이 형의 등을 툭치며 "가자, 아 근데 씨발 우리가 뭔 보도까지 뛰냐, 승재 그 새끼도 진짜 쌈마이 하고는 염병…" 하고는 차에 올라탔다.

"형 고마워"

뒤늦게 인사를 한 나는 그저 형의 오피스텔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손목에 찬 서브마리너의 무게에 새삼 형들이 돈을 잘 벌긴 버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잘 놀고, 멋있는 형들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만.

조금 생각이 복잡해졌다. 어쩌면 다행인지도 몰랐다. 진짜 조폭 일 하라고 했으면 내가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하고. 그러나 사실 여자애들이랑 뭐 그런 일을 한다는건, 솔직히 상상도 가지 않았다. 내 주제에 무슨. 그러다 형 오피스텔 근처의 작은 오뎅바가 보였다. 우동이 먹고 싶었다.




퇴근 시간대라서 그런지 가게 안에는 손님이 많았다. 그나마 비어있는 구석 쪽의 테이블에 앉은 나는 우동에 닭꼬치 두 개를 시켰다. 잠시 후 우동이 나왔고, 고춧가루를 뿌린 바로 그 순간에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한 여자애가 가게 안에 들어섰다.

'아…'

몸매가 확 드러나는 와인색 원피스를 입은 웨이브 진 밤색 머리의 그녀는 가게 안을 잠깐 살피더니 유일한 빈자리였던 내 옆 테이블에 앉았다. 내쪽으로 다가오는 내내 눈을 떼기 힘든 그녀의 외모에 진심 감탄했지만 너무 노골적으로 볼 수도 없었기에 나는 얼른 고개를 돌리고 내 밥그릇으로 시선을 거두었다.

'어'

하지만 수저통이 이쪽에 없었다. 나는 힐끔 옆자리를 보았고, 그 순간 방금 자리에 앉은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사실 나 뿐이 아니었다. 그녀가 들어서는 순간 가게 남자들이 다 대놓고 쳐다봤으니까. 연예인급 미인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뒤늦게 "저기, 죄송한데 수저 좀…" 하고 손가락으로 그녀 테이블 위의 수저통을 가리켰다.

그러자 여자는 "아, 네" 하고 수저통에서 숟가락과 젓가락을 한벌 챙겨 주었다. 그냥 수저통을 통째로 줘도 되는데 그거 챙겨주는게 또 묘하게 이뻐보였다.

"감사합니다"

수저를 전달받은 나는 다시 우동과 꼬치만 눈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먹고 있었는데, 그때 이번에 그녀가 내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예?"

은근 그녀의 동태에 촉을 세우고 있던 나는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고, 여자는 뭐가 그리 웃긴지 입을 가리며 웃다가 "아뇨 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시치미 통 좀…" 하고 내 테이블 위의 고춧가루를 가리켰다. 나도 그제서야 픽 웃고 고춧가루 통을 건내주었다. 일본어가 쓰여 있어서 그냥 일본 고추가루인가보다, 했더니 이거 이름이 '시치미'인가보다. 그리고 그 순간 테이블 아래로 힐끔 그녀의 새하얀 허벅지에 눈이 갔다. 엄청나다고 생각했다.

"고마워요"

우아하면서도 뭔가 섹시한 그녀의 말에 새삼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눈을 돌려 우동에 눈을 돌렸다. 여자도 나온 우동을 먹고, 은근히 옆으로 슬쩍 눈길을 주니 얼굴 옆라인도 이뻤다. 저런 여자는 누가 데리고 잘까.




"저기요"

아마 평범한 며칠 전의 나였다면 아마 저런 도도한 매력의 여자한테는 말도 못 붙였을거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성기 형이 빌려준 비싼 정장에 비싼 시계에, 파마까지 하고 관리 받은 나는, 내가 봐도 조금은 자신이 있었다. 은근히 먹는 속도를 조절하며 그녀가 다 먹고 일어서길 기다렸다가 따라나섰다.

"네?"

부르는 목소리에 여자가 가볍게 고개를 돌려 돌아보는데, 하….

"저기, 그쪽이 입…마음에 들어서 그런데 잠깐 커피라도 안 하실래요?"

모르겠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이런거. 이런 것도 처음이고. 내 말에 여자는 잠깐 픽, 하고 웃더니 "괜찮아요" 하고 고개를 저었다. 아, 역시 조금, 역시 쉽지 않지. 나는 민망함에 나도 모르게 머리를 긁적이며 "남친 있으신가요" 하고 한번 더 물었다. 여자는 이번에도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흐, 쪽팔리네"

또각또각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에 멋적음을 느끼며 나는 형의 오피스텔로 향했다. 할 일도 없는데 방 청소라도 해둘 요량이었다.





"후우"

청소를 다 끝내고 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이게 뭐지, 싶었다. 아직도 민망한 기분이 조금 남았지만, 그보다는 앞날에 대한 막막함이 더 컸다.

이대로 구미 내려가면 시팔 어디 공장 들어가서 박스나 나르고 조립이나 하겠지. 빡센 일 하면 무릎도 언제 다시 고장날지 모르고. 대학교를 가자니 돈도 없고 공부도 뭐 내 갈 길 아니고. 기술은 누가 공짜로 가르쳐주나.

'그래도 남자가 가오가 있지, 여자들 비유나 맞춰주면서 하…' 하는 생각이 지나갈 무렵. 좀 전의 그 여자가 생각났다. 어차피 연애질도 여자 비유 맞추는건 똑같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고 그 양복에 그 시계에 그 팔찌에 그 구두. 공장 다니면 어디 해보기나 할 일이 있을까. 차도 끽해야 트럭이나 몰겠지. 갑자기 담배가 겁나게 땡겼다. 하지만 이미 돗대는 아까 피운지 오래고, 나가기 귀찮았다.

문득 고생하는 엄마 생각이 났다. 한달 150 벌자고 아침 8시에 출근해서 밤 9시까지 공장 나가는 불쌍한 아줌마. 손발 퉁퉁 부어가지고는 야근 1시간 추가되면 그래도 얼마라도 더 번다고 좋아하고. 남편이라고는 딴 년이랑 살림 차려 나가서는 평생 돌아오지를 않고. 그나마 아들 새끼 하나 있는거 뒷바라지 했더니 무릎 병신 되서 이제 운동으로 돈 벌 일은 영영 없고. 그냥 고생 문이 훤하게 열려서, 죽는 날까지 고생만 하다 가실게 분명한 불쌍한 우리 엄마. 조온나게 불쌍한 우리 엄마.

"씨발…"

뭐 없다 싶었다. 나도 성기 형처럼 목돈 조금 만들어서, 엄마 데리고 청과물 가게라도 열어서 둘이, 아니 엄마는 쉬라고 하고 나 혼자 열심히 해서, 그래서….

'그게 될 리가 있나'

이렇게 굴러다니다가, 그래도 잠깐 멋지게 살다가, 그러다 말겠지. 그러나 '그래도 뭐 어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어차피 이러다 말 인생인데. 담배를 사러 가려고 몸을 일으켰다.




'그랬구나, 존나 뭐 없네'

편의점에서 담배를 사 나오는 길, 우연찮게도 아까의 그 여자가 다른 여자 하나와 함께 깔깔대며 편의점 골목 안 룸 술집으로 들어가는걸 봤다.

'결국 다 그렇고 그런건가'

그래, 운동 잘하는 놈이 땀 팔아 먹고 살고, 공부 잘하는 놈이 대가리 팔아 먹고 살고, 몸 좋은 놈이 좆 팔아서 돈 버는게 뭐 어때서. 그리고 뭐 다 파는 것도 아니라면서. 나는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고는 구름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는 밤하늘의 달을 쳐다봤다.

"뭐 없네 진짜. 서울도 별로."


< 끝 >






"그때 그 새끼가 그랬단 말이야. '횽, 죠는 건달할껀데요'. 원민이 완전 벙~ 쪘잖아. 나도 순간 이 새끼가 뭔 소리 하나 싶은데 빵 터지는거 참고, '건달해서 뭐할건데. 나처럼 맨날 여자들 행복주며 살래, 아니면 어깨들 수발들며 얻어터지며 살래' 하고 말하니까 애가 쭈삣대더라고.

어휴 우리 민정이 잔 비었네? 미안, 내가 한잔 벌주 마실게. 크, 어쨌든, 그리고 그날 셋이 술 마시고 놀고, 다음 날 딱 데리고 나와서 꾸며놨더니, 아 사이즈 제대로 나오는거야. 지금은 그 새끼가 그래도 곯아서 좀 그런데, 그때는 진짜 애가 지금보다 더 괜찮았어. 푸푸웃~한게 아주 괜찮았지"

민정은 "그럼 오빠가 효원 오빠 키운거네? 원민이 오빠랑? 진짜 슈퍼 에이스 제조기네. 몇 명을 키운거야" 하고 사과를 베어물었다.

"그치, 내가 진짜 아주, 어? 먹여주고 재워주고 똥 치워주고 다 애기 키우듯이 키웠다 진짜" 하고 성기가 넉살을 부리자, 민정은 화사하게 웃으면서 "은근 오빠 장가가면 디게 애들한테 잘할거 같다" 하고 그의 손을 잡았다.

성기는 어느새 민정의 허벅지에 손을 올리며 "그럼. 내가 키운 애기들이 우리 가게 반이 넘는데. 진짜 완전 보육원 원장님이야. 호빠 보육원" 하며 민정의 입술을 가볍게 맞추고 "근데 나도 이제 선수 그만 뛰려고. 나이도 있고, 내 가게 차려야지"라는 말과 함께 민정의 등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그 순간 민정은 문득 머릿 속으로, 성기와 함께 가게를 차리고 사장님이 되어 큰 돈을 버는 행복한 꿈을 떠올렸다. 엄마랑 함께 미용실 차리려고 모아 놓은 돈 8천만원으로 그게 가능할까, 속으로 계산해보면서.

"이 나이가 되어보니까" 소설

"알잖아 대충. 이제 내 인생에 로또라도 맞지 않는 다음에야 대충 이렇게 살다 가겠다는거. 이제 점점 더 좆같아지면 좆같아졌지, 더 좋아질 일은 없다는거. 그게 느낌이 딱 오잖아. 나이 먹으면. 니도 이제 대충은 감이 오잖아?"

내 어깨를 툭 치며 하는 그의 말에 반박할 수 없다는게 조금은 씁쓸했다.

"근데 말이야, 근데 그러면 사람이 뭔 짓을 하게 되냐면, 자꾸 지가 제일 잘나갔을 때 생각을 하게 돼. 하 그때는 내가 진짜 가능성이 있었는데, 그때는 막 내가 뭐라도 될 줄 알았는데, 그때는 돈이 막 이렇게 들어왔는데, 그때는 다들 내가 하는 말에 막 빵빵 웃음이 터졌는데, 뭐 그런 생각. 기집 년들 생각은 말할 것도 없고"

나는 묵묵히 듣고만 있기로 했다. 콧물을 훔친 그는 대충 양복 주머니에 손을 문지르려다 겨우 테이블 구석에서 티슈를 집어 닦았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반복하는거지. 지 주변에 잘나보이고 싶은 사람한테 계속 그 이야기만 하는거야. 평생을. 꼰대들 하던 짓을 어느새 내가 하고 있더라니까. 처음에는 그래도 집에 가는 길에 문득 온 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아 이러지 말아야겠다' 생각이라도 하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새로운 사람이 나한테 말 한 마디만 친근하게 건내도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지는거야. 미친 놈이지. '내가 이러이러한 놈이었는데, 뭐, 알아두라고' 하는 마음이랄까. 근데 또 그래. 처음에는 다들 웃어주고, 감탄하고, 이것저것 더 캐물어보고, 호감도 갖고. 아직은 쓸만한거지. 그 과거의 추억들이. 내 인생에 제일 맛있는 부분, 액기스 같은 이야기니까. 재밌고, 요긴하다고. 하지만 그게 어느 시점이 되면 빛, 빛이 바래"

빛이 바랜다는 말이 나올 즈음에야 나는 그의 목이 칼칼해졌음을 느끼고 잔을 다시 채워주었다. 물론 그는 방금 전처럼 바로 비웠다.

"후우, 아는 거지. 이 이야기가 정말로 쓸만한 이야기인지 아닌지를. 어디가서 이랬대 저랬다, 하면서 나도 남한테 한번 들려줄만한 재미나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꼰대가 좋은 시절 생각하며 헛소리 하는건지. 그런 시점이 되면 볼짱 다 본거지. 그리고 지금 내가 그렇고"

주문했던 소세지 안주는 여전히 나오지 않고 있고, 나는 이걸 주문이 제대로 들어갔는지 확인을 해봐야 되는지 아니면 그냥 무시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근데! 이거 하나는 알아둬도 좋은 이야기야. 꼰대의 충고라고 해도 좋은 이야기인데… 나도 꼰대한테 들은 이야기야. 그런데 생각은 나더라고. 남자는 말이야, 그러니까 나처럼 꼰대가 되었을 때… 딱 인생을 뒤돌아봤을 때…크후…"

그는 조금 힘들어 보였다.

"뒤돌아 봤을 때, 잘난 구석은 아무래도 상관없어. 아무리 상등신 비응신이라도 좋은 시절 이야기 하나쯤은 다 있으니까. 다 있다고, 그런거 쯤은. 저어기 영등포 굴다리 밑의 노숙자 아저씨들도 다 있어 그런건. 근데 문제는, 뒤돌아 봤을 때 부끄러운 기억이 없어야 돼. 실패한 기억 말고, 내가 모자라서, 내가 부족해서 망한거 그런거 말고, 그냥 부끄러운거. 내가 암만 되바라진 새끼라도 진짜 이런 짓까지는 하지 말았어야 되는건데, 하는 그런 기억 말이야. 그런건 있으면 안돼. 그런게 있으면 쓰레기가 되어 버리는거야. 아무리 한때 잘난 새끼라도."

나는 잔을 채워주는 대신 물었다.

"아저씨는 어떤데요"

내 질문에 그는 피식 웃더니 또 크허허헝 하며 코웃음을 길게 친다.

"나는… 뒤돌아 보면…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뒤돌아 보는거 자체가 무서워. 힐끗힐끗 눈길만 줘도, 당장이라도 목 메달아 죽어버리고 싶은 부끄러워 뒤지고 싶은 기억이 너무 많아. 그러니까 더 좋았던 시절에만 집중하는거야. 다른 데는 눈길조차 안 주고. 아예 못 주는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잔을 채우고 말했다.

"저도 그래요. 못 보겠어요. 그럼 이제 그건 어떻게 극복하죠. 이미 쓰레기가 되어버린 새끼는?"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그는 꽤 오랜 시간 이런 말 저런 말을 찾는 듯 하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없어, 그런 방법은"

나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새삼 피곤함과 취기를 함께 느낀다.

"한번 쓰레기는 영원한 쓰레기?"

그는 잔을 또 한번 채우고 비우며 말했다.

"그래도 재활용 쓰레기라면, 아직은 길이 있잖아. 안 그래?"

난 피식 웃고 되물었다.

"아저씨는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난 이미 음식물 쓰레기 수준이지. 냄새나고, 보기도, 만지기도 싫고. 어디 한 방울이라도 튀면 누가 치우던지 비가 오던지 하기 전에는 두고두고 냄새 풍기고, 아주 여러 사람 애 먹이는, 좆같은 음식물 쓰레기"

이제는 자학으로 넘어가나 싶어서 슬슬 집에 가야겠다 하는 순간, 그는 "으, 취한다. 이젠 집에 가야겄다" 라는 말과 함께 묘한 자신감을 보였다.

"그래도 음식물 쓰레기도 잘만 묵히면, 퇴비가 되지 않겠냐? 안 그냐?"

그리고 생각했다.

"가시죠"

나도, 스스로를 음식물 쓰레기 수준이라고 적당히 넘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나는…' 

방사성 폐기물 같은게 아닐까. 푸르스름하니 특이하게 빛나는. 그래서 신기해서, 좋은 건 줄 알고 다가온 사람들을 망치고, 병신 만드는, 다가서는 모든 사람을 상하게 만드는, 도저히 어떻게 처지할 방법도 없는 그런 쓰레기 중의 쓰레기, 말이다.

그 순간들 소설

1. 기희

"나 가지 말까? 응?"

웃는 그녀의 말에 나는 그냥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꽤 스무스하게 잘 대답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잘가'라는 말은 죽어도 목에서 나오지 않았다.




2. 가영

"사람 많은데서 정말 이럴거야? 아 쫌 놓으라구!"
"한번만 더 생각해봐라. 내가…하아, 이건 내가 납득이 안되서 그래. 이유라도 말해줘"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고, 히히덕대는 사람들마저 있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아쉬운 마음에 가영의 손을 꾹 쥐었고, 그녀는 "아프다고!" 하며 소리까지 질렀다. 그녀의 말에 나도 놀라 "미안"하고 그만 손을 놓았고, 가영은 차갑게 말했다.

"오빠도 그 새끼랑 똑같애. 똑같다고"

나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가영의 차가운 눈빛에 이미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알았다.




3. 아름

"그랬구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녀를 보며 나는 꽤 씁쓸함을 느꼈지만, 어차피 모두가 감수해야 할 순간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켰다. 이미 한참 전에 차갑게 식어버린 커피의 맛이, 입 안을 더욱 씁쓸하게 만들었다.

"나 먼저 일어난다"

뒤는 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그런다고 돌이킬 수 있는 상황도,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으니까. 단지 조금 더 좋게 마무리 지을 수는 없었을까 하는 작은 의문이 들기는 했다. 그건 다음 번을 기약하기로 했다.




4. 태미

밤사이 전화 52통, 문자 142개, 카톡 392개가 도착해 있었다. 아마도 예전이었다면 건조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 원망하는 그녀의 대꾸를 받아주다가 몇 마디인가의 이야기로 마음을 홀리고, 또 잠깐의 침묵, 그리고 문득 생각난 작은 가십성 이슈를 이야기 하면서 농담을 하고, 그리고 커피 한잔 혹은 식사를 제안하며, 밤사이 쓰라렸을 그녀의 외롭고 지친 마음을 달래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나는 지끈지끈한 머리를 매만지며, 조금 더 자고 이따가 전화번호를 바꾸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5. 소영

"그래서 이 미친 년아, 니가 잘했다는거야? 니가 잘했어?"

만약에, 정말로 내가 대신 죽어 그녀를 살릴 수 있다면 나는 단 한순간의 고민조차 하지 않고 그랬을 것이다. 딱 두달 전까지는. 아니 사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비록 씁쓸한 마음이 들었을지언정 그렇게 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분명히.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대신 죽기는 커녕 내가 당장 이 년의 목아지를 비틀어 패죽여버리고 싶었으니까. 차라리 그냥 바람을 피우지. 미친 년. 그러나 사실 더 화가 나는 것은, 이 순간에마저 깊게 패인 그녀의 가슴골에 시선이 꽂히는 이 개병신 호구 같은 나의 눈깔이었다.




6. 가을

이미 2시간 가까이 그네에서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문득 모든 감정에 앞서는 지독한 피로를 느꼈다.

"가을아"

그녀는 대답이 없었지만, 나는 계속 할 말을 이어갔다.

"됐어. 니 마음이 그렇다는걸 어쩌겠냐. 그게 뭐 니 잘못이냐. 다아 니 잘못이지"

가을이가 그토로 좋아하던, 내 마지막 말장난이었지만 당연히 그녀는 이번만큼은 웃지 않았다. 나는 그저 힘없이 몸을 일으켰다. 솔직히 그다지 슬플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빨리 자고 싶었다.




7. 지영

"너만큼 나 좋아해준 남자 분명 앞으로 다시 만나기 힘들겠지. 근데, 근데! 솔직히, 너만큼은 나 좋아해주지 않아도, 그냥 적당히, 너보다는 아니더라도 그냥 적당히 나 좋아해주는 남자 만나서 그렇게 살면 돼.

아니 정 안되서 혼자 살더라도, 너랑 앞으로 이렇게 살고 싶진 않아. 나는 그래. 나는 원래 그런 년이야. 너 그래서 나 때문에 눈물도 많이 흘렸잖아.

알아. 알잖아. 나 못된 년이야. 잘가, 나 이제 들어가볼께. 앞으로 다시 연락도 하지마. 우린 이제 끝이야. 영원히."




8. 효주

"그게 뭐"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나를 붙잡는 그녀의 사랑스러운 표정에 사실 이미 내 마음은 아까 진작에 풀렸습니다. 아니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애초부터 별로 화도 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그녀에게 고작 그까짓 일로 제가 화가 났겠습니까. 그냥 웃어 넘기고 말 일이지.

단지…

그녀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내가 너무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 야속할 따름일 뿐이지요. 그래서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9. 도연

"야, 시발 이게 말이 되냐? 어? 아, 도연아!"

새벽이 가까운 밤, 천장의 형광등 불빛이 문득 어지러움을 유발합니다.

"야야, 도연아. 진짜 이건 아니지. 어? 야! 진짜 시발 이건 너, 너 진짜 야, 이건 시바 아니 씨부랄 이게 말이 되냐고!"

갑작스레 소리를 버럭 지르는 나의 말에 그녀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립니다. 곧바로 맥시멈으로 치솟는 혈압에 온갖 개쌍욕을 중얼거리며 부들부들 대는 손으로 다시 전화를 걸지만, 하, 진짜. 이 기집애는 어쩜 그렇게 빨리도 차단을 걸까요. 진짜 미스테립니다. 이럴 때는 손이 아주 귀신같이 빨라요. 엠병 시부럴. 이제 일주일간 전화는 종 쳤습니다. 엠병.



10. 은나

"오빠 그게 할 소리야?"

언제부터였을까요. 우리 관계가 이렇게 된 것이. 나는 소주잔 속의 찰랑이는 소주에 문득 '소주도 찰랑이는구나' 하는 멍한 생각을 합니다.

"아니 도대체 왜 그러는건데"

바로 옆에 앉은 은나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리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슬슬 붙잡아줘야겠죠. 정신. 그래야 끝낼 수 있으니까.

"은나야"
"응? 왜?"

아, 순간 응? 하는 얼굴에 뽀뽀할 뻔 했습니다. 이 기집애 왜 이렇게 귀엽나요. 하지만 안됩니다. 오늘 끝내야 됩니다.

"그만하자"
"아 진짜 왜!"

은나는 버럭 화를 내지만, 사실 너도 알고 나도 아는 문제의 답을 왜 자꾸 캐묻냐. 힘들게 진짜. 안되니까 안되지. 뭘 묻고 난리야. 니네 엄마가 어제 우리 집에 전화까지 했는데. 이게 임마 사랑한다고 다 되면, 헤어지는 커플이 세상에 어딨냐. 사랑은 다 하는건데.




11. 새롬

"미쳤어, 미쳤어 진짜"

언제나의 그 웃으며 하는 톤의 미쳤어가 아닙니다. 제대로 한심한 병신을 논할 때의 미쳤어입니다. 그러고보니 이 기집애는 왜 미쳤다는 말을 이리 즐겨쓸까요.

"아, 미안해"

사실 사과할 입장도 아니지만 일단 사과를 합니다. 그녀는 혀를 끌끌 차며 내 바지를 벗깁니다.

"오빠, 잘 들어?"

뭔 소리를 하려고. 이미 술에 취해 몸 가누기도 힘들지만 그녀는 착착 내 옷을 벗기고 그 와중에도 틈틈히 방 정리를 하며 말합니다.

"그동안 나 많이 참았고, 오빠도 많이 노력한거 알어"
"흐"

사근사근한 그녀의 말투가 귀엽습니다.

"오빠 디게 매력 있는 사람인 것도 맞구, 능력 좋은 것도 알아. 필요할 때마다 착착 돈 만들어오는 재주 진짜 최고인거 알거든. 오빠가 나 정말 많이 도와줬구"
"그럼"

나는 흐뭇하게 맞장구를 칩니다. 마지막으로 내 양말을 다 벗기고, 하, 이 기집애 어디서 배운 스킬인지 물티슈로 발가락을 다 닦아주네요. 그렇게 나는 아기처럼 되어 이불 속에 편히 눕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어조가 바뀝니다.

"근데… 안될거 같아"

사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술 마신건데요. 그리고 말은 내 탓 하지만 진짜 이유도 잘 알고 있구요.

"흐, 새롬아"

나는 웃으며, 입을 맞추고는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그녀에게 마지막 선물을 줍니다.

"현관 앞에 그 포장지 열어봐. 니 구두야. 그거 신고 좋은데로 가라"

새롬의 표정은 볼 수 없지만, 알 수 있습니다.

"진짜 이러지 말지. 이게 뭐야, 사람 이상해지게"
"야, 이럴 땐 그냥 고맙다고 하고 받는거야. 니 말고 그런 구두 이제 줄 사람도 없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새롬은 말했습니다.

"나 갈게"




12. 유영

"에이 왜 그래. 선수끼리"

그녀는 완곡하게, 그러나 제법 단호하게 거절의 뜻을 드러냈습니다. 나는 침대에서 머리를 긁적이다 입을 열었습니다.

"그래, 내가 괜한 소리 했나보다. 미안, 잘가"

사실, 아마 유영이는 내가 몇 번 더 잡아주길 바랬을 겁니다. 당연히. 아마 당연히 내가 붙잡으리라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사실 긴가민가 하던 것은 저도 마찬가지였거든요. 그랬기에, 오히려 거절 당했을 때 차라리 기뻤습니다.

"왜?"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다, 문득 묘한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다시 유영이 쪽으로 돌리자, 그녀는 울고 있었습니다. 역시, 그랬겠죠. 그녀는 무어라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듯 했지만, 역시 그녀의 자존심은 언제나 그녀의 본심보다 힘이 셌죠. 바보같이. 얼른 고개를 돌리며 손으로 눈물을 훔치고, 옷을 주섬주섬 입기 시작하는 유영.

그리고 이제는 나도 압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게 그나마 제일 그녀를 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13. 승아

잠든 그녀의 얼굴을 머리에 온전히 새겨넣기라도 할 기세로, 선 하나하나를 모두 살핍니다. 혹시라도 내 콧김이 그녀를 깨울까 싶어 숨소리마저 조심스러워지는 이 순간.

이렇게 열심히 그녀의 모습을 머리에 그려넣어도, 어느 순간에는 잊혀지겠죠. 그리고 그 소중한 기억들도 하나하나씩.


"하늘에서 떨어지는 낙엽 말이야, 바닥에 닿기 전에 그 낙엽을 하늘에서 낚아채면, 안 헤어진대"
"어, 정말? 오, 오오, 어? 와 이거 생각보다 어렵네"
"어려운거야"

바람이 불 때마다 흩날리는 낙엽을 잡으려 이리저리 팔을 뻗어보지만 여간해서 안 잡히는 낙엽. 더이상은 떨어지는 낙엽도 없어 포기하려던 그 순간, 승아의 후드티에 모자 속 은행 잎을 발견합니다.

"찾았다!"

내가 기뻐하는 만큼, 승아도 기뻐했더랬죠. 근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낙엽은 매년 떨어지는데, 그럼 매년 붙잡아야 되는걸까, 하고. 올해는 더이상 안 붙잡아도 되겠지만.


"야, 나 또 싸웠다" 소설

나의 말에 재원이는 전화기 너머에서 또 짜증을 부린다.

"하 나 이 새끼야, 내가 무슨 초딩 1학년 담임 선생님이냐? 뭔 쌈박질만 하면 일일히 보고질이야? 걍 시원하게 헤어져어, 야 내가 봤을 때 니네는 텄어. 답 없다"

그 말에 나는 실없이 웃었다.

"아, 니네는 내 앞에서 서로 귀싸대기까지 날린 커플이 결혼까지 가놓고서는…"

그러자 한 3초 답이 없던 재원은 "하긴 그랬지. 아 나도 답 없는 새끼네" 하고는 "어디냐? 니네 동네로 가?" 하고 묻는다. 나는 그러라고 하고서는 슬슬 씻을 준비를 했다.





물베기





재원은 더웠는지 아이스 아메리카노 반 잔을 시원하게 단숨에 들이키더니 입을 닦았다.

"아 더워 뒤지는 줄 알았네. 뭔 10월이 코 앞인데 이렇게 덥냐"
"야, 뭔 나는 막걸리 마시는 줄 알았다. 누가 그렇게 커피를 무식하게 마셔"
"이게 남자지 임마. 니처럼 뭐 컵 앞에 고개 요래 가져다 놓고 빨때 쪽쪽, 어? 야 임마 니 그러다 그거 떨어진다?"
"지랄"

과장되게 연기하던 재원의 말에 나는 웃다가 물었다.

"니네는 잘 지내냐? 아름이 잘 있고?"

그러자 재원이 실없이 웃는다.

"야, 잘 생각해 봐. 내가 지금 3주만에 쉬거든? 지난 주, 지지난 주 물량 맞추느라 우리 야근에 특근까지 했단 말이야. 오자마자 자고 바로 출근하고 또 24시간 주야 근무 풀타임 뛰고 자고 이런 미친 주말 보냈다고. 그리고 드디어 쉬는데? 너랑 이렇게 둘이 있잖아. 뭐겠냐?"
"또 대판 했냐?"

재원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진짜 형들 말 듣는건데. 왜 내가 장가를 가 가지고. 성욱아, 진심으로 충고한다. 결혼하지 마"
"왜? 아름이는 근데 니만 잘하면 싸울 일 없지 않냐? 바가지 긁는 타입도 아니잖아?"

하지만 내 말에 재원은 조금 씁쓸한 얼굴을 보인다.

"하, 그래. 내가 그 착한 애 다 버려놨지. 뭐 아름이가 다른 기집애들처럼 막 떽떽 거리는 타입도 아니고. 근데 부부라는게, 아니 커플이라는거 자체가 원래 좀, 남이 볼 때랑 둘이 있을 때랑 또 다르잖아"
"왜? 니들끼리 있을 때는 또 막 지랄지랄하는 타입이야?"

손사래를 치는 재원.

"아니 그런건 아닌데, 이게 한번 토라지면 얘 답 없다. 진짜 뻥 안치고 한달은 간다. 차라리 씨팔 시원하게 한번 머리 끄댕이 잡고 쌍욕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치우는게 낫지, 어? 그 날 둘이 끌어안고 자면 되는데, 이건 혼자 꽁해서 일주일이고 이주일이고 그렇게 토라져 있으면 사람 피가 마른다니까"
"아 그것도 진짜 피곤하겠네"

우리는 서로 긴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그때 재원의 폰이 울렸다. 경식이 형이다. "어? 이 형 간만이네"하고 전화를 받은 재원.

"여 브라덜. 예? 저야 뭐. 성욱이랑 있죠. 아이, 이거 참. 아시잖아요. 우리 커플인거. 앞뒤를 다 쪽쪽. 아름이는 위장결혼이죠. 하하하하"

녀석의 농담에 나는 "뭔 소리야 미친 놈아" 하고 퉁을 놓고 내 말을 다 무시한 재원은 "아, 형 어딘데요? 승암사거리요? 그럼 오실래요? 예예, 여기 증원동 이디엠 커피에요. 예, 그 골뱅이집 옆에 있는데. 네네" 하고 전화를 끊었다.

"왜? 온대?" 하고 묻는 나의 말에 재원은 "응, 온대. 야 결혼 두 번 실패한 꼰대가 주말에 할 일이 뭐가 있겠냐. 맨날 놀아달라고 조르는거지" 하고 혀를 찬다.

"진짜 대단해. 뭐한다고 결혼을 두 번이나 할까" 하고 내가 감탄하자, 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젠 안 한대. 지금 만나는 것도 띠동갑 12살 연하랑 만나잖아. 형네 학원 선생인데, 저번에 봤거든? 새끈해. 근데 이게 모르는거다? 형이야 이젠 결혼 안 해, 해도, 만약에 그 여자가 형 재산보고 결혼 조르면? 하게 되어 있다. 백퍼"
"두 번이나 실패했는데 또 하겠냐. 이젠 아예 선 그어놓고 만나겠지"

그러자 재원은 웃었다.

"야, 맺고 끊는거 확실한 새끼가 장가를 어떻게 가. 흐리멍텅하게, 어? 그런 새끼들만 장가 가는거야. 근데 두 번 갔다? 답 없다"




한 15분 뒤, 노란 머즈탱을 타고 나타난 배 나온, 많이 나온 40대 남자 경식이 형이 나타났다. 재원은 반가운 얼굴로 맞이했다.

"오, 뭐야. 어? 형 차 또 새로 뽑은거야? 장난 아니네? 아 진짜 형이 최고다. 어? 야, 완전 짜세네 이거"

경식은 씩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린다.

"어, 타던 차 팔고 바꿨어. 근데 이거도 얼마나 탈진 모르겠다. 살 땐 허세로 질렀는데, 너무 좀, 내 소셜포지션치곤 가벼운 거 같지 않냐?"
"어휴, 형. 뭘 걱정해. 그럼 또 한 대 뽑으면 그만이지. 제로시스 이큐 구천, 딱 뽑으면 짜세 나오겠구만"
"허허"

그리고는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내 손을 덥썩 잡는 경식.

"간만이다 성욱아. 임마 니가 형한테 연락도 하고 그래야지"
"아휴, 저도 요즘 정신이 없어서. 잘 지내시죠?"
"그럼. 넌 아직도 서울에서 회사 다니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요즘 관두고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어요. 형도 커피 한잔 하세요"
"어어, 내가 주문할께. 근데 니넨 무슨 남자 둘이 커피를 마시냐. 딱 이거 한 잔 꺾어야지"
"낮이잖아요 낮. 그리고 재원이 저 새끼 한잔만 마셔도 시뻘개지잖아요. 따귀 맞은 거처럼"

그 말에 너털웃음 지은 경식이 형이 웃었다.

"그래, 맞어. 저 새퀴 그래"




이야기를 나눈 후, 경식은 목을 긁으며 말했다.

"이게, 내가 봤을 땐 그래. 부부로 살다보면, 아니 커플도 그렇지만 이게 딱 '이 말만 나오면 백 프로 싸운다'라는 주제들이 꼭 있어. 뭐 전 여친 전 남친, 혹은 돈 문제, 애기 문제, 뭐 등등, 커플마다 다 주제가 다른데, 여튼 그 주제 안에서도 백프로 싸우게 되는 키워드가 있다고 키워드가"

과연 이혼 두 번에 총각 시절부터 이미 수십번도 넘게 여자를 갈아치운 연애·이혼·섹스 전문가답게 그는 자신만의 개똥철학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보통 이게…딱 그런 날이 있을거야. '아 이건 진짜 조졌는데. 사이즈 안 나오네' 싶게 싸울 때가 있었을거야. 진심으로 헤어지네 마네 하고 제대로 싸웠던거. 뭐 지지고 볶고 이런 레벨이 아니라 제대로 다 태워먹고 아예 불이 나버린거. 그런 싸움. 그럼, 그건 이미 거기서 조진거야. 그 주제로 둘이 끝나는 날까지 그거로 싸우다가 그걸로 관계 다 조진다. 아예 그런 싸움까지는 가지 말아야 돼. 근데 이미 가버렸다? 그럼 딱, 거기서 시마이 쳐야 돼. 그게 서로 빠르다. 내가 그걸 모르고 장가를 두 번 갔잖냐. 등신같이"

그렇잖아도 큰 머리 사이즈에 머리까지 저렇게 풍성하게 장발로 기르니 진짜 머리가 더 커보이는 그의 얼굴에 새삼 속으로 감탄하지만, 그의 온 몸에 둘러진 이런저런 명품으로 그의 요즘 벌이에 대해 또 감탄하게 된다. 교육 시장은 정말 불황이 없는 산업인가.

"그래도 쟤네는 잘 붙었잖아요. 재원이 저 새끼 바람 피우고 아름이랑 서로 귀싸대기 갈군 날"

그 말에 또 경식이 형은 빵 터져 웃다가 말했다.

"근데 진짜 맞어. 이 새끼는 또라이는 제대로 또라이야. 너 그때 아름이는 왜 때렸냐? 니가 바람 피워놓고.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주 맞바람이라도 피운 줄 알았을걸. 니 그 날 우리 다 싸이코새끼라고 존나 욕했다"

재원은 피식 웃었다가 커피를 쭉 들이켰다. 그나저나 이 카페는 주말의 한낮인데 사람이 이리 없어서야 장사 안 망하나. 재원은 담배를 만지작 거리다가 다시 집어넣는다.

"형. 내가 봤을 땐 그래요. 사람 사이는 다 파워게임 하는 사이에요. 이게 한번 먹히면 되돌릴 수가 없거든요. 설령 내가 잘못했어도, 거기서 꿇고 들어간다? 그럼 먹히는거에요. 뭐 아예 내가 평생 꿇고 이 사람 내 웃사람으로 모실거다 하면 몰라도, 그럼 안되겠다 하는 사람이면 먹히면 그기서 끝나는거라구요. 근데 잘 생각해봐요, 아름이 같은 애한테 내가 뭐가 잘난게 있어요. 대학을 나왔나, 집에 돈이 있나 뭐 책상머리 일을 하나. 그냥 밑바닥에서 구르는 나 같은 새끼한테 콩깍지 씌인게 전부인데, 내가 좀 잘못했다고 기집애한테 싸대기 쳐맞고 싹싹 빈다? 그럼 그 날로 먹히는거죠. 내가 잘못했어도, 잘못한건 잘못한거고 나는 어쨌든 입장은 항상 위에 있어야 되는거에요. 그게 인간관계죠. 남녀보다 그 위에 있는. 그리고 그래야? 관계가 이어집니다. 진짜로"

중학교 시절부터의 오랜 친구지만 분명히 나와는 다른 삶의 궤적을 그린 재원. 그만의 인간론, 인간관계론을 새삼 본 느낌이랄까.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방학식 날, 어느새 자기보다 덩치가 더 좋아진 반의 넘버 투 곽현구 그 새끼랑 시비가 붙었을 때 주먹으로 안되자 의자로 대가리를 내리찍고 어깨에 콤파스를 쑤셔박던 그 지독함. 하기사 군대에서도 후임이 기어오르자 반 병신 되도록 두들겨 패서 만창 채웠던 일도 있었고. 독한 새끼. 그의 헌신적인 어머니만 아니었더라도 저 놈은 아마 옛날에 신세 조졌을거다. 조진다, 그 새 나도 이 양반들 표현에 감화되네.

"하여간 넌 제대로 또라이 기질이 있어. 성질 죽이고 살아야 된다. 아니면 마누라 두고 감방 가고, 마누라 바람난다. 알았냐? 나도 업종은 교육쪽인데, 여기도 양아치들이 엄청 많아. 여학생들 건드리고 그러는 새끼들. 그러다가 감방 가고 지랄나고 뭐 그러는데, 결말이 다 거시기해. 돈 좀 있는 새끼들이 감방 가잖아? 마누라들은 좋다고 백 프로 바람 피워. 백 프로. 근데 이혼은 안 해줘. 외려 감방 수발 들었다고 나중에 이혼 소송할 때도 존나 유리하게 끌고 간다니까? 그거보다 열불 나는 일이 어딨냐. 아, 시바 그보다 담배나 태워야겠다. 바깥으로 자리 옮기자"




경식이 형은 아이스코의 연기를 훅 뿜어내며 물었다.

"성욱이 너는 그럼 지금 아예 쉬고 있는거야?"
"예. 뭐. 지지난 주에 관둔거라서 뭐 급한건 아니지만, 뭐 그래요"
"여친은?"
"걱정하죠. 남친이라고 있는게 빌빌대고 있으면"

재원은 "아 이 새끼. 니가 그러니까 싸움이 별 하찮은걸로 자꾸 커지는거야. 빌빌대니까. 남자는 딱 가오지 가오" 하고 끼어들었지만, 경식이 형은 그저 실실 웃을 따름이었다.

"니네 근데 사귄지 좀 되지 않았냐? 결혼 이야기 안 나와?"
"됐죠. 벌써 3년인데. 결혼 이야기도 그 형이 말한 '키워드'에요. 그 말만 나오면 싸워요. 근데 뭐가 있어야 장가를 가지. 니미럴"

형은 피식 웃었다.

"야 근데 그건 진짜 아냐. 결혼? 그거 돈 없어도 다 하는거야. 너 내 첫 결혼 때 못 봤냐? 우리 꼰대 죽기 전에, 나한테 시바 10원 한장 안 물려준다고 그 지랄 떨고, 나 양아치 짓 하고 다닐 때 그, 누구야, 이젠 이름도 가물가물하네. 아 그래, 영지 그 년이랑 나 결혼할 때, 나 그때 울 엄마가 준 2천 딱 그거 하나 갖고 결혼한거야. 한 푼도 없었어. 우리 신혼여행 안 갔어. 못 갔어 씨발. 돈이 없어 갖고"

그건 처음 알았다. 마지막에 '씨발'하는 그의 말에 한이 조금 섞인 것을 느꼈다.

"아 그래도 형은 나중에 집 해줬잖아요. 아부지가"
"야 그것도 시발, 이제와서 하는 말인데 그때 우리가 뻥 쳤거든. 영지 임신했다고. 세상에 손자까지 생기는 마당에, 어? 안양에서 큰 학원 두 개나 돌리는 양반 아들이 손바닥만한 원룸에서 셋이 살고 있다고 하면 세상이 욕한다고. 내가 그 꼰대 앞에 가서 자살쇼를 하겠다고 지랄생쇼를 해서 받아낸거야. 그리고 그건 나중 이야기잖아. 어쨌든 결혼은 했다 이거지"

글쎄, 그거까진 몰랐다.

"내가 씨발 다른건 모르겠는데 딱 하나 그거는 진심 영지 그 년한테 미안해. 진짜 존나 지금도 자다가 눈이 번쩍 떠지게 미안해. 세상에 암만 그지 새끼들이라도 결혼해서 하다못해 제주도라도 신혼여행은 가는데, 나는 염병, 아…. 존나 철없던거지. 근데도 이혼할 때까지 그거 갖고는 단 한 마디를 원망 안 하더라. 진짜. 그 기집애 바람 났을 때 이상하게 그 생각이 딱 나니까 솔까 내 차마 뭐라고 못 하겠더라니까"

그의 첫 이혼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 재원이는 알고 있었던 듯 그를 달랬다.

"근데 형 잘못이 아니지 그건. 형네 꼰대가 좀 너무했던거고, 그리고 영지 누나도 뭐, 잘 됐잖아?"
"잘 됐지. 그 년이 그래도 이거는 되잖아. 탈아시안이지. 것도 아주 탱탱해. 어휴, 그니까 그런 새끼 물어서 시집 잘 갔지. 차라리 잘 됐어"

술자리도 아닌데 자리의 분위기가 열띄다.

"그래도 형은 그게 지나간 일이고, 1년도 안 된 일이잖아요. 고생시킨게. 근데 나는 아름이랑 몇 년이야 쉬바. 벌써 7년이네. 사귄 기간까지 합하면 9년이야 9년. 아 갑자기 술 땡기네. 형, 괜찮죠? 대리 부르면 되잖아. 대리"
"그래, 가자. 재원이 이 시키 그래도 속정은 있지. 성욱이 너는 뭐 먹고 싶냐?"




오후 3시에 소주잔을 채우며 고기를 굽노라니 이것도 별미다.

"좆까고, 그냥 해. 결혼. 우리 같은 새끼들은 원래 결혼하면 안되는 새끼가 결혼해서 이 지랄 난거고, 니는 그래도 그나마 좀 멀쩡한 새끼 아니냐. 어? 씨 없는 또라이, 배운 양아치, 서울로 회사 다니는 모범생. 이 세 병신 중에 그래도 니가 제일 낫잖아. 한국대 간판이 거저 난거냐. 캬 시발. 울 아버지가 니를 몰라서 다행이지, 니 알았으면 나는 진짜 뒤졌다. 얼마나 비교해댔을꼬"

중간에 씨 없는 또라이 라는 말에 재원이 "야 형 나 있다고. 그냥 우리 안 갖는거야. 딩크, 딩크으" 하고 수습했지만 난 알지. 언젠가 술 취해서 한 그의 고백을. 물론 우리 모두 안다.

"형은 그럼 만나고 있는 여자는요"

이미 재원에게 듣긴 했지만 물어본다. 그러자 그는 폰에서 그녀의 사진을 보여준다.

"29살이고, 선명여대 나온 애야. 괜찮아. 이쁘지?"
"뭐 형이 만나는 여자들이야 항상 외모는 되죠. 다른게 문제라서 그렇지"

그는 또 낄낄대며 웃는다.

"야, 니가 꼭 안 좋을 때만 봐서 그래. 걔들 다 괜찮은 애들이야. 근데 니랑 같이 볼 때만 꼭 그렇게 꼬여서 그렇지"
"뭘 또 성욱랑 볼 때만 그래요. 맨날 바람 나고, 성병 걸려오고, 어? 돈 땡겨쓰고, 구라쟁이에, 술자리에서 얼굴에 술 끼얹고 가고, 어? 아주 골고루잖아요 골고루. 존나 드림팀 아냐?"

재원의 핀찬에 더 크게 웃던 그는 "야 몰라, 됐고, 술이나 마셔. 자, 어이. 그리고 얘는 진짜 그런 애들 아냐. 얘는 깨끗해. 내가 다 싹 알아봤어. 내가 면접 본 애야" 하고 얼른 수습한다. 그리고 문득 어쩌면 형은 세 번째 장가를 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갈 수 있다면 말이지만.




둘과 헤어지고 혼자 터덜터덜 집으로 걷는 길. 간만에 많이 마셨다. 밤 1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지만, 휴대폰에는 그러나 전화 한 통 없다. 그 흔한 카톡 하나도. 그래, 나는 재원과도 다르고, 경식이 형과도 다르다. 누구처럼 독하지도, 누구처럼 부유하지도 않은 그런 흔한 소시민.

놓아주어야 하나, 하고 생각이 든다. 사실 나 없어도 알아서 잘 살 기집애다. 오히려 내가 발목을 잡으면 잡았지. 머릿 속이 복잡하다. 그녀도 그렇겠지. 어쩌면 결혼을 하는 이유는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놓치기 싫어서. 계속 잡고 싶어서. 더 오래 곁에 두고 더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서.

근데 만약에 내가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걸 안다면? 그럼 진짜 너무나 사랑한다면 놓아주는게 맞는거 아닐까. 사실 그녀가 행복하기 위한 조건에 나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오히려 내가 그녀의 행복을 가로막는 사람이라면? 나에 대한 자신감도, 자존감도 어느새 밑바닥을 긴다.

"시발…"

힘없는 욕이 흘러나온다.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지만, 그 순간 휴대폰이 울린다. 진아다.

"여보세요"

나의 힘없는 목소리에 한참 말이 없던 그녀가 대꾸한다.

"저녁은 먹었어?"

조금 화가 누그러진 것일까. 조금은 밝음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나도 조금은 힘이 들어간다.

"응, 아는 형이랑 재원이랑 같이 먹었어. 고기. 술도 좀 마시고"

그 말에 "잘했어" 한 진아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미안해. 나도 너무 예민하게 굴어서. 내일 뭐해"
"아무 것도"

그러자 "그럼 내일 같이 영화보자. 나 보고 싶은 영화 생겼어" 하고 제안하는 진아. 나는 조금 전 놓아주네 마네까지 생각했던 것에 생각이 미지차 조금은 부끄럽기도, 조금은 울컥하기도 하면서 단단히 얼었던 마음이 단숨에 녹아내리는 것을 느낀다.

"그래, 보러가자"

집으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이, 그렇게 조금 가벼워졌다.

-fin -

뿔테 바이러스 소설




"코드 브라운, 코드 브라운, 닥터 김박스 응급실로 속히 부탁 드립니다. 코드 브라운, 코드 브라운"

중증 체크남방 환자에 대한 스트라이프 이식 수술을 마치고 교수실에서 간신히 한숨 돌리고 있던 김박스는 곧 자신을 찾는 응급 코드에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심각한 간지 결손 환자에 대한 응급 코드인 코드 브라운은, '브라운'이 뜻하는 급똥만큼이나 김박스의 머릿 속을 똥색으로 뒤덮고 있었다.






뿔테 바이러스






"바이탈은?"

김박스의 질문에 새내기 당직 간호사 수연은 손을 바들바들 떨며 말하기 시작했다.

"845/5/1166입니다"

김박스는 탄식에 가까운 한숨과 함께 얼굴을 쓸어내렸다. 환자의 바이탈은 처참한 지경이었다. 인스타그램 게시글을 800개가 넘게 올렸는데 팔로워 수는 다섯에 팔로잉은 1천이 넘는 상황이라면, 이건 비정상을 넘어 심각한 만성질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천명이 넘는 친구를 추가하는데 그 중에 채 10명도 맞팔을 안 해준 상황이면 사실 볼 것도 없었다.

"이런"

김박스는 환자의 상태를 보다가 혀를 차더니 곧바로 그의 안경부터 벗겼다. 그 놈의 뿔테안경을.

"어서 수술실로. 긴급 OP 준비해"





한국인의 3대 만성 질환인 고혈압, 당뇨, 뿔테중독. 그 중에서도 젊은 층을 중심으로 그 끝을 알 수 없이 증가일로이던 뿔테안경은 다행히 2015년을 전후해서 드디어 그 기세가 껶였다. 근 10년에 이르는 뿔테안경 신드롬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던 간지관리본부(GDC) 측에서 이독제독(以毒制毒)의 마음으로 김구 안경을 전면적으로 투입했기 때문이다.

그 시도는 제법 효과를 보아서, 근 63%에 이르던 한국인의 뿔테 중독율은 2017년 현재 약 30% 중후반까지 낮아졌으나 사실 이 역시도 당시 간지의들의 엄청난 반발에 부딪혔었다. 물론 김박스 역시 그 선봉에 섰던 이중 하나였다.

"아니 장기하 잡자고 해리포터 투입이라니, 설사 막자고 된똥으로 항문 틀어막는거랑 뭔 차입니까? 라식, 라섹이야 안전이나 가격 이슈가 있다고 쳐도, 콘텍트 렌즈라는 수단이 있잖습니까"

하지만 그에 대한 반론 역시 만만찮았다. 특히 한국 모든 남성간지의 가성비를 평가하고 간지수가를 책정하는 신사평가원 측은 단호했다.

"멋쟁이들은 알아서들 다 잘 합니다. 문제는 한국의 평균남성들이죠. 생전에 안경 한번 맞추면 안경 다리 부러지는 날까지 같은 안경만 주구장창 쓰는 이들이 한국의 평균 남자란 말입니다. 그런 놈들한테 매달 렌즈 사라고 하면 제대로 살까요? 아니 돈이야 일단 넘어가봅시다. 위생은? 오줌싸고 손 한번 씻는 놈들이 절반이 안되는 이 나라 남자들의 위생 의식으로 렌즈라뇨? 눈알 다 상할 일 있습니까?"

언제나 간지의들의 발목을 잡는 신평원의 '한국남성 평균론'은 이번에도 그 위력을 발휘했다. 공개토론회에서 좌중을 압살한 신평원 측은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간지관리본부 측의 김구 안경에 대해서도 신랄한 태클을 걸었다.

"동네 안경점에서 단돈 만원에 구입 가능한 뿔테 버리고 도입하는게 김구라뇨? 아, 혹시나 해서. 요즘 이런거 민감해서리…여기서 말하는 '김구'라는 표현이 우리 민족대표 김구 선생님을 욕되게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은 모두가 알 거라고 생각하고, 이하 계속 김구라고 말하겠습니다. 예? 김구라뇨. 당장 한국 남자 얼굴 평균을 봅시다. 넙대대한 얼굴에 염색 안한 바가지 머리에 김구 안경 씌워봐야 도라에몽 노진구 밖에 더 됩니까? 1mm라도 더 가려야 할 판에, 거기에 이거 툭하면 툭툭 부러지는거, 어쩝니까? 그거 막자고 티타늄이라도 썼다간 가격 폭발하고. 이건 개악입니다 개악"

좌중 여기저기서 "으흠!" 혹은 "흠흠" 하는 불편한 헛기침 소리가 터져나오는 신랄한 혹평이었지만 조심스럽게 손을 든 간지관리본부 측 인사는 그에 대한 반박을 개시했다.

"압니다. 하지만 더이상 손쓰기 어려워지기 전에 무엇이라도 해야되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새로운 스타일이 도입됨으로서 또 다른 제 3, 제 4의 스타일이 발생하기를 조심스레 기대해봅니다"

물론 뭐가 하나 유행한다고 하면 그거 뒤쫒기 바쁘지 먼저 뭘 할 줄 모르는 한국인들이 제 3, 제 4의 스타일을 알아서 도입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뿔테중독 이슈는 이미 10년 전부터 나왔던 말이었기에 당시의 공개토론회에서는 김구 안경의 도입 인가가 지지를 얻었다. 정말이지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정도로 심각했던 시기였다.




"그런데도 여전히 뿔테란 말이지"

물론 이제는 또 하나의 클래식이 되어버린 뿔테이기에 그것을 스타일로 추구하는 녀석도 많지만, 애초에 이런 중증 환자가 그럴 리 없다. 싸구려 뿔테 안경테 장시간 착용으로 인해 완전히 눌러버린 콧잔등, 더운 날 안경다리가 퉁퉁한 옆얼굴에 밀착되어 생겨버린 소금가루 등 만성뿔테증후군의 증상들이 보였다. 김박스는 손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클리어 원데이"

그러자 폴리클 닥터 김원근이 그에게 클리어 원데이 렌즈를 전달하며 물었다.

"쿠퍼비전 프로클리어로 안 가십니까? 하다못해 트루아이라도…"

하지만 김박스는 고개를 저으며 환자의 손목을 들어보였다. 환자의 손목에는 싸구려 카시오 시계가 걸려있었다. 그리고 김박스는 부연했다.

"현재 간지학계의 최신 조류는 '주어진 환경 내에서의 좋은 결과 창출'이다. 무리한 명품 착용이 불러오는 파산 쇼크는 말할 것도 없고,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일상 용품조차 누군가에게는 상당한 부담이 되는 투자일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원데이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투자'이며,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과감한 시도'라는 사실을 우리 간지의들은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잠시 수술을 멈춘 그는 모두에게 다시 한번 다짐하듯 말을 해두었다.

"젊고 가난한 간지 결핍 환자들의 얼마 안되는 여윳돈은, 어쩌면 그가 이제 평생토록 다시는 누려보지 못할 멋에 대한 마지막 사치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고, 항상 신중히, 그리고 최선의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 진료를 선택해야 한다"

교과서와도 같은 말이지만, 그런 조언은 언제 들어도 새겨둘 가치가 있는 그런 말이었다. 하지만 사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닥터 김박스는 지금 자신의 말과는 정 반대의 노선에 있던 의사였다.




'매력은 육신에서 나오고, 멋은 돈에서 나온다'

칠판에 위 문장을 적은 김박스 교수는 의대생들에게 말했다.

"나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 우리 모두는 평생동안 단 한번도 지나가는 사람의 고개가 휙휙 돌아갈 정도의 매력을 내뿜을 수 없다. 타고난 외모가, 육신이 그렇기 때문이다. 한계가 너무나도 분명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아, 거기 인철 군과 여원 양을 비롯해 몇몇 여학생들은 예외. 자네들은 풀메이크업 하고 제대로 꾸미면 가능해. 하지만 나머지는 단언컨데 불가능하다. 우리는 평생 누군가의 마음을 눈빛 한 번으로 뺏을 수 없다. 그것이 외모이고, 그것이 우리의 숙명이다"

강의실이 조용해졌을 무렵, 박스는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인간은 날개가 없음에도 하늘을 날 수 있게 되었고, 물갈퀴와 지느러미가 없음에도 바다를 건널 수 있게 되었다.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도구와 기술과 능력 있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같은 매력 없는 이들도 이제는 집중적인 헬스 트레이닝과 성형수술, 의류와 악세서리, 헤어 스타일링과 피부 관리, 메이크업과 각종 보형물과 장구들로 그 나름의 매력을 내뿜을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한계는 존재하지만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 수 있게 되긴 하지만, 두 팔의 날개짓으로 떠있는 것은 여전히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러한 한계는 명확히 인지한 상태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이야기를 한바퀴 돌린 그는 다시 핵심으로 돌아왔다.

"요는 돈이다. 돈이 있다면 몸도 멋있어지고, 얼굴도 아름다워진다. 몸을 추하게 가리던 거적떼기가 아름답게 얼굴을 비추는 빛이 되고, 모두에게서 무시받던 외관을 사랑받는 무기로 만들 수 있다. 그것이 돈이고, 매력과 멋의 실체이다. 따라서 간지 결핍 또는 간지 결손 환자의 치료에 있어서 최선의 길은, 외모에 대한 확실한 투자가 가장 분명하고도 빠른 치료법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세상에서 가장 추하게 태어난 사람도, 큰 돈이 있다면 추앙받고 사랑받을 수 있기에, 돈은 이미 그 자체로 간지통치약에 다름 아니다. 이상!"





'그랬었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김박스는 여전히 뿔테 환자의 수술을 집도하면서도 많은 생각을 했다.

"포마드"
"포마드요? 왁스가 아니라?"

닥터 김박스는 원근의 손에서 포마드를 빼앗으며 말했다.

"헤어의 모질과 두상에 따라 한국인일지라도 포마드 기름이 어울리는 사람이 존재하며, 그것은 특별한 강점이 될 수도 있다. 특히 2천년대 이후 수많은 젊은 한국 부모들의 아기두상에 대한 처절한 관리와 노력에 의해 한국인의 두상도 많이 예뻐졌기 때문이지"
"알겠습니다"





간지 결손 환자들에 대한 치료에 있어서 굉장히 과감하고 사치적인 하이엔드 라인의 명품 도입을 아끼지 않았던 김박스가 갑자기 자신의 노선을 버리게 된 것은 놀랍게도 뿔테 바이러스의 감염 때문이었다.

"후우"

그것을 치료해야 할 병원이나 의료 기관에서 오히려 병원균이나 질환에 감염되는 원내감염. 그러나 그날따라 결막염을 이유로 콘텍트 렌즈 착용을 할 수 없었던 김박스는 그만큼이나 안경 면역력이 약해진 상황이었고, 하드한 업무 속에서 부주의한 선택은 그만 그가 잠결에 뿔테 안경을 뒤집어 쓰고 근무를 보게 된 치명적인 사고를 유발하고야 말았다.

"어머, 박스 선생님, 안경 쓰셨네요? 잘 어울려요"
"잘 어울리기는. 그냥 결막염이라서 쓴 거야"

더욱이 치명적이었던 것은 오전 내내 자신이 뒤집어 쓴 안경이 뿔테였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병원 안을 돌아다녔던 사실이었다. 믿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만성적인 수면부족과 뿔테 특유의 편안함이 그를 완벽하게 뿔테 바이러스에 감염시켰다. 그가 자신이 뿔테 바이러스에 감염됐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오후 회진 시간이 다 되어서였다.

"김박스, 자네 지금 뭐하는건가?"
"예?"
"지금 뭐하고 있는거냐고! 시위라도 하는거야? 아니면 무슨 애들 장난질 치는거야"

응급간지학의 권위자이자 애플학파의 거두인 강 교수는 얼마 전에 바꾼 자신의 린드버그를 고쳐쓰며 김박스를 몰아부쳤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던 김박스는 "예?" 하고 고개를 갸웃했고, 그러자 강교수는 폭발했다.

"내가 지금 안 어울리게 팀 쿡 스타일의 린드버그 며칠 썼다고 지금 자네 그런 싸구려 뿔테로 나 도발하는거 아닌가!"

그리고 그제서야 김박스는 자신이 실수로 싸구려 뿔테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엉겁결에 안경을 집어 던지면서까지 놀랐고, 그때까지만 해도 다들 멋으로 그가 뿔테를 썼다고 생각했던 모두는 그때 '닥터 김박스가 뿔테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라는 사실을 깨닫고 경악했다.

다행히 김박스는 즉시 병원 내의 옵티컬 샵으로 옮겨져 볼프강 프록쉐, 니로와 실루엣의 티타늄 안경으로 집중 치료를 받고 뿔테 바이러스를 곧바로 치료했지만 그는 한동안 병실에서 마음을 추스려야 했다. 게다가 놀랍게도, 도대체 언제 얼마주고 맞췄던 안경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 싸구려 보세 브랜드 뿔테 안경이 썩 나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 나쁘지 않았어'

오히려 박스의 얼굴형에는 니로 브랜드보다 그 싸구려 뿔테가 더 어울렸다는 사실을 그는 스스로 인정했다. 그리고 그날의 경험은, 그에게 새로운 의학적 깨달음을 주었다. 물론 그 시점에서도 "정말 해골물을 마셨다면 원효는 밤새 Vibrio parahaemolyticus에 시달렸을거라고"하고, 슬그머니 마음 한 구석에서 떠오르는 원효대사 해골물 이야기에 대해 귀여운 반박을 시도했지만 말이다.




"수술 완료, 회복실로"

싸구려 뿔테는 중저가 소프트 콘택트 원데이 레즈로, 환자의 더벅머리는 가벼운 가르마 펌으로 손보고, 손목의 카시오는 중고 애플 워치로 바꾸어 '최소의 투자로 그닥 썩 나쁘지 않은 간지의 확보'를 성공했으며, 정체불명의 보세 브랜드 옷은 역시 몇몇 중급 스트릿 브랜드로 갈아입히어 환자의 매력을 확보해냈다. 환자의 간지 바이탈이 팔로워-팔로잉 1/3 비율까지 올라오자 모두는 안심했고, 김박스는 수술 성공을 선언했다.

"수고하셨습니다. 특히 '중고'의 도입은 인상적이었습니다"

수술실을 나오며, 폴리클 닥터 김원근은 간지의학에서 사실상 금기시되는 '중고'를 과감히 도입한 닥터 김박스에게 감탄했고, 그는 고개를 으쓱했다.

"넓게 보면 리셀러를 통한 구입도 '중고'의 개념 하에 포함될 수 있지만 그에 대해 경제적이라면 몰라도 간지적인 측면에서는 그 누구 하나 태클 거는 이 없는 관대한 2017년의 기준으로는, 민트급이라는 부분만 확인된다면 중고라도 간지의학에서 이제는 과감히 도입해 볼 필요성이 있지 않나, 싶구나"
"항상 깊은 가르침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숙직실로 돌아온 김박스는 최종적으로 스케쥴을 확인한 뒤, 확실히 비어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고는 이번에야말로 기나긴 휴식의 꿀잠으로 돌입했다.

"음냐"

물론 머지않아 그 깊은 꿀잠이 준 행복감을, M자 탈모 디자인의 'X같은 디자인'을 한 아이폰X에 완전히 망쳐버리게 되지만 그것은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는 몇 십 시간 이후의 이야기였다.

- FIN -


http://stylebox.egloos.com/2026070 간지거탑
http://stylebox.egloos.com/1962365 간지결핍증후군

그를 기리며 망상

내가 쓸 자서전에는
누구의 자서전처럼 고생 끝의
성공 자랑으로 가득차 있지도 않고


누구의 자서전처럼 똥도 안 누고
섹스도 안 할 것 같은 사람이
있지도 않을 것이다


내 자서전에서 독자들은
너무나 고상한 지식인 사회에
섞여 살며 힘들어 했던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슬퍼하는 사람과


으리으리한 교회 앞에서
구걸하는 걸인을 보고
가슴 먹먹해 하는 사람과


사람은 누구나 관능적으로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고 믿는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


또한 그것으로 너무나 불이익을 당했기에
과거의 집필생활을 후회하는 사람도
독자들은 만나게 될 것이다


내가 쓸 자서전에는
나의 글쓰기는 이랬어야 했다고
후회하는 장면이 담겨있을 것이다


우선 손톱 긴 여자가 좋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고
그리고 야한 여자들은
못 배운 여자들이거나 방탕 끝의 자살로
생(生)을 마감하는 여자여야 했다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라는 즐겁지 않았어야 했다고
권선징악으로 끝을 맺는
소설 속 여자이어야 했다고


나의 고된 삶 속에서
그나마 한줌 상상적 휴식이 돼주었던
그녀와 나의 잠자리가
타락이었다고 그래서 반성한다고


- <내가 쓸 자서전에는> 故 마광수 



저승이나 내세를 믿지 않는 분으로 알고 있기에 '다음 생에는'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단지 위선적이고 우매한 사람들 사이에서 그 고단한 수모를 당한 것을 뒤늦게나마 통탄스러운 마음으로 위로 드립니다. 항상 진심으로 존경했습니다, 교수님. 


"근태는 기본이야 기본! 어? 출근시간 툭하면 지각이고 말이야" 소설

김부장은 아주 오늘은 벼르고 벼렸다는 듯이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정신들이 있어없어? 어? 지금 김성원 대리, 이번 달에 지각 두 번, 9시 2분 9시 8분, 조혜리 주임 이번 달 지각 여섯 번, 2분 3분 8분 5분… 서아름씨 지각 한번, 9시 15분, 이 날은 아팠던 그 날인가? 최정민씨, 아주 상습범이야. 말 안 해도 알지? 강가을씨, 지각 두 번…지각 없는건 윤 과장이랑 인턴 한서정씨 둘 뿐이네"

인사팀에 말해서 출근 기록까지 뽑아놓고 작정하고 사원들을 닥달한다.

"근태는 기본이야 기본! 어? 출근시간 툭하면 지각이고 말이야. 이게 근본이 안되어 있는거야 근본이. 출근시간 왜 있어? 9시까지 해놓으면 9시까지 출근하는게 맞아? 늦어도 8시 50분까지는 와서 자리에 앉아야 되는거 아냐? 오자마자 바로 일해? 다들 뭐 화장실도 한번 다녀오고, 화장도 한번 고치고, 담배도 한 대 피우고, 커피도 타고, 다들 바쁘잖아? 그럼 실제 업무시간은 9시 10분 20분은 되야 시작하는거 아냐? 회사 돈 공짜로 벌어? 어?"

어느새 칼칼해진 목을 축이기 위해 물 한잔을 마신 그는 종이컵을 탁! 하고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는 말이야, 뭐 내가 나이 먹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아침 6시 반이면 눈이 딱 떠져. 준비하고 일찍 나와서 여유있게 와서 가볍게 운동하고, 그래도 8시 20분이야. 다 나처럼 하라는 말은 아니지만, 최소한 기본은 하라는 이야기지"

시계를 흘낏 본 그는 마지막으로 단단히 경고하며 말을 마무리 지었다.

"앞으로 지각 3회 이상이면 시말서 받을거고, 인사고과에 칼같이 반영할거야. 분명히 알아둬. 근태는 약속이야 약속!"






약속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은 가운데, 점심시간이 지나고 1시 반이 되자, 김부장은 계약직 서아름을 회의실로 호출했다.

"뭐 다른건 아니고, 이제 슬슬 아름씨가 온지 거의 한 2년 됐지?"

그렇잖아도 신경쓰이던 이야기를 이제서라도 꺼내자 아름의 얼굴은 긴장 속에서도 밝아진다.

"네"

그러나 마치 반전의 클리셰를 연출하기라도 하듯, 김부장은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눈썹을 긁적이며, 눈 앞의 서류를 몇 장 훑어보다 입을 열었다.

"길게 이야기해봤자 서로 입장만 난처하고… 여튼, 회사 사정상 이번에 전환이 어려울 것 같아"

아름의 표정이 순간 흙빛으로 변한다. 충격을 극복하는데 필요한 약 3~4초의 시간이 지난 후 그녀는 물었다.

"분명히 올 초에, 부장님이 기대해도 좋을거라고 하셨는데…"

김부장은 눈빛을 슬그머니 피하며 대답한다.

"내가 그랬나. 여튼, 올해 상반기 실적도 안 좋고, 아름씨 포지션도 지금 T.O 자체가 사라질 상황이라 어렵게 됐어. 뭐, 기대하게 했으면 미안하고, 한 두 어달 남았으니까, 아 이제 한달 보름 정도인가. 여튼 슬슬 알아봐야 할 것 같아"
"부장님"

그 유약하고 조용하던 아름이건만, 이제와서는 조금 할 말을 꺼내기 시작한다.

"저 지난 번 한섬 건 때도 정규직 전환 이야기 말씀하셔서 병원 다니면서도 계속 링겔 맞고 와서 일하고 9시 출근 밤 10시 퇴근 한달 내내 하면서도 한번도 불평불만한 적 없는데요, 이제와서 이렇게 말씀하시면, 이건 아니죠"

김부장도 거기에는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나도 아름씨 열심히 한 거 모르는 바 아니고, 전환 관련해서 계속 어필했는데, 알다시피 우리 부서 올 상반기 실적 나가리 나고 지금 명퇴를 받겠다느니 말겠다느니 하는 판에 잘 안 됐어. 나도 미안해"

이후 몇 마디의 말을 덧붙였지만 아름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진짜 부장님 어디 가셨어요?"

혜리 주임은 아까부터 발을 동동 구르다가 머리를 쓸어넘겼다. 희미한 향수 냄새가 성원 대리의 코를 스치고, 그는 움찔했지만 그저 어깨를 으쓱할 따름이었다.

"모르죠, 우리 부장님 한번 자리 비우면 어디갔는지 아무도 모르잖아요"
"아 진짜 미치겠네"

오전 중으로 처리해서 넘겨야 되는 문서인데 결재처리가 안되어서 혜리는 당혹스러워하다못해 짜증을 부린다.

"아니 본인이 30분 빨리 나오면 뭐해. 나와서 하루에 몇 시간을 자리 비우는데"

그녀의 말에 모두 실소를 짓다가도, 가을이 슬쩍 귀뜸한다.

"지금 옆 파티션에 원실장님 와있어요"

김부장 영혼의 파트너, 밀어주고 끌어주고 89학번 서울대 라인 원이사의 등장에 다들 말소리를 줄인다. 하지만 그 상황 속에서도 혜리의 속은 끓어오를 뿐이다. 계약서 검토해야 되는거 생각하다가 문득 시말서에 다시 생각이 미쳤고, 2분 3분 지각 타령이 그저 우습게만 느껴졌다.




"아름씨 이야기 들었어요?"

정민의 말에 가을이 한숨을 쉬었다.

"들었어요. 진짜 미친거 아니에요? 아니 사람 그렇게 부려먹었으면 이건 진짜 어떻게든 챙겨줘야 되는거 아니에요? 아름씨 눈 팅팅 부었던데"
"내 말이. 링겔 맞아가며 일한 사람인데. 솔까 아름씨 아니었음 그거 일정 절대 못 맞추고 빵꾸 났어요. 당장 그럼 김부장 본인이 목 날아갈거 아름씨가 살려준건데, 사람을 그렇게 뒤통수를 치나"
"아 진짜 짜증나요"

가을은 고등어를 뒤집으며 말했다.

"아까 서정씨랑 아름씨 복도에서 둘이 이야기 하더라구요. 뭔 이야기 하는지는 안 물어봤지만 뻔하겠지. 솔직히 서정씨도 그 꼴 봤는데 할 마음이 들겠냐고. 링겔 맞아가며 일한 사람 계약 연장 안되는데, 인턴인 자기도 안되는거 알겠지"
"아 그랬어요?"
"이게 사람 기 죽이는거에요. 우리도 마찬가지고. 같이 일하면서 서로 얼굴 어떻게 봐요. 당장 다음 주에도 동명 브로셔 건 때문에 디자인실에서 이것저것 요구할텐데 아름씨 손 놓으면 우리 아무도 그거 처리 안되요. 우린 우리대로 창원 행사도 준비해야 되는데"
"아 모르겠다 진짜"

정민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후 다시 자세를 바로 잡으며 방석을 고쳐 앉은 그는 물었다.

"아니 근데 진짜 아름씨 나가고 나면 그 업무 이제 누가 봐요?"
"몰라요, 혜리 주임이 하던가, 아니면 윤 과장님이 다시 잡겠지"
"아 말도 안돼. 진짜 망하겠네"
"아마 원래는…"

살짝 운을 뗀 가을은 자신의 추측을 말하기 시작했다.

"아마 원래는 서정씨를 아름씨 대타로 삼을라고 뽑은걸거에요. 인턴이 계약직보다 싸게 먹히니까. 새미 주임님 나간 것도 서정씨로 떼우려고 한 거고"
"헐"

정민은 길게 뜯어진 고등어 껍질을 스윽 들어올린다. 참으로 맛나보이는 노릇한 고등어 껍질에 가을이 "어!" 하고 아쉬워 하는 순간, 정민은 그대로 그것을 가을 앞으로 슥 가져다놓는다. 가을은 피식 웃고, 정민은 쑥쓰럽게 웃는다.




오후 2시 반, 윤과장은 쏟아지는 졸음과 싸우고 있다. 커피를 네 잔을 마셨지만 애초에 그게 먹힐 사람이 아니다. 간밤의 미드가 원수다. 아니 좀 더 말하면 위쳐3가 문제다.

"과장님, 그거 맞는지 한번 봐주세요"

혜리 주임의 말에, 깜빡이는 사내 메신저창을 뒤늦게 확인한다. 8분 전에 보낸 파일이다. 아 진짜 졸지 말아야지. 이게 매번 뭔 망신이냐. 하품을 연거푸 하며 엑셀 파일을 들여다보지만 눈 앞의 숫자는 이미 숫자가 아니라 암호다. 그저 혜리 주임에 대한 믿음이 그를 구원한다.

"응, 맞네"

사실 맞는지 안 맞는지도 모르겠다. 머리에 아무 것도 입력되지를 않는걸. 이렇게 흐리멍텅하게 일처리하다가 언제 한번 사고가 터져도 터지지 싶은데 적어도 현재까지는 멀쩡하다. 성원 대리와 혜리 주임이 있는 한 일단은 안심이다. 물론 그 둘이 있는 이상 언제 자리 뺏길지 모르겠지만.

"파일 숫자 맞나 다시 한번 확인해보고, 정산팀에 넘기기 전에 성원 대리한테도 공유해 줘. 한번 봐보라고 해"
"…네"

성원 대리에게도 슬쩍 일을 걸쳐둔다. 이로서 안심이다. 하지만 혜리는 또 표정이 썩는다. 업무 토스에 분개하는 거겠지. 근데 지가 왜 짜증내. 언젠가부터 혜리 주임은 표정을 숨기지 않는다. 자격지심인지도 모르겠지만 여튼 그렇게 보인다. 당장 기분은 조금 나쁘지만, 그대로 냅두기로 한다. 그걸 제 3자들이라고 모를 리 없다. 또 그런 모습 절대 용납 못하는 우리 부장님이 있는 한, 혜리 저 기집애는 대리 진급도 어려울거다.

가끔 보면 똑똑한 애들이 저런 바보 짓을 잘한다. 그저 지 똑똑한 줄만 알지 그 발톱 숨길 줄을 모르니까. 그저 지각 안 하고 안 튀고 술 잘 마시고 상사 써킹 잘하고 오래 엉덩이 붙일 줄 알고, 이거면 되는데 그게 그렇게나 어려운 것일까. 참 바보들 많다. 진짜 바보들.




"이거 싹 다 손봐야 될 거 같아"

오후 5시 반, 김부장이 벌개진 얼굴로 돌아온다. 뭐, 이제는 다들 그러려니 하지만 아름의 표정은 차갑다. 아마 더이상 이제 그녀에게서 혼이 담긴 야근을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퇴근 시간대에 인접한 야근선언령이 얼마나 먹힐까는 이번 사태의 좋은 관찰거리가 될 것이다, 라고 정민은 생각했다.

"문서 구조부터 다시요?"

그것만은 아니길, 하고 바라며 성원이 물었지만 안타깝게도 김부장은 고개를 젓는다.

"다~ 다시"

모두의 한숨이 터져나오고, 혜리가 "그거 위에서 먼저 컨펌 한번 됐던거 아니에요?" 하고 볼멘소리를 해보지만 김부장은 그저 "다시"라는 말만 할 따름이었다.

"후"

여기저기서 길게 한숨을 내쉬고, 인턴 서정은 빠르게 전 버전, 전전 버전, 전전전 버전의 파일들을 참고를 위해 인쇄한다. 혜리는 오늘의 데이트 취소를 통보하러 복도로 나간다. 가을이 정민에게 "혜리 주임 남친이랑 요즘 위태위태하던데"하고 입모양으로 말한다. 성민은 윤과장에게 "담배 한대 피우러 나가시죠"하고 제안하고, 그 말에 윤과장은 옳다꾸나 "그래" 하고 일어선다. 김부장은 오늘의 저녁 식사 메뉴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오후 8시 50분. 성원은 잠시 멍해진 머리를 달래러 포털의 뉴스를 읽다가 "포괄임금제"까지 눈이 닿는다. 그리고 문득 그는 근로계약서 내용과 이번 달의 야근 내역을 머릿 속으로 조심스레 계산해본다.

"초과된거 같은데"

하지만 그 말은 그 누구에게도 들릴 말이 아니고, 그저 오늘 저녁에는 사람인하고 링크드인 손 좀 봐야겠다고 생각할 따름이다. 잡코리아는 이미 어제 손을 봤으니까.

"파일 넘겼습니다"

혜리 주임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모두들 그녀를 의식한다. 그녀의 기분이 엉망이라는 소리니까. 아마 돌아올 월요일 팀회의에서는 또 업무 분장 관련해서 그녀의 열띈 주장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서정은 슬슬 초조함을 느낀다. 또 저번처럼 애매한 시간에 퇴근하게 되면 택시비만 깨질테니까. 쥐꼬리만한 인턴 월급에 큰 부담이다. 야근 수당이라도 나오면 좋겠는데 그런 걸 기대할 수는 없다. 그나마 저녁이라도 사주니 다행이라 생각할 따름이다. 지난 번 회사는 그마저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서정은 생각이 많아졌다. 지금까지는 조금이라도 애매하면 그냥 택시를 타버렸는데, 어차피 이 회사에서도 정규직 전환 희망이 거의 없다는 생각에 그 택시비들이 아깝게만 느껴졌다. 출근 시간 1~2분에는 그렇게 열변을 토하더니 퇴근 시간은 벌써 3시간 초과가 다 되어가도 말 한 마디 없는 부장님이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안되겠네. 슬슬 접고, 나머지는 다들 내일 조금 일찍 나와서 합시다"

김부장의 제언에, 차라리 지금 1시간 더하고 출근 정상대로 하고 싶다는 말에 목구멍에서 맴돈 성원이었지만 그저 대답 대신 가방 안에 지갑과 휴대폰을 챙겨넣을 따름이었다. 사실 그도 한계였다. 더이상은 눈이 뻑뻑해서라도 안되겠다고 생각했으니까.

잠긴 목을 풀고, 빠르게 컴퓨터를 끈다. 눈알을 비비며 생각한다. 돌아오는 주말은 푹 쉬어야 겠다고. 연수와의 캠핑 약속은 역시 이번 주에도 깨야겠다고.

- fin -

밤의 편의점에는 소설

저녁 시간, 출근할 즈음부터 한두방울 내리던 비는 어느새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양 퍼붓고 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 되자 이 편의점을 찾는 손님의 인적은 더욱 드물어지고, 가게 안은 더욱 조용해진다.

"음"

편의점 통유리에 흐르던 빗줄기는 이미 물벼락이 흐르는 수준이고, 편의점 안의 공기는 에어컨 때문에 으실으실함을 느낄 정도로 추워진다. 나는 이윽고 카운터 자리에 앉아 인터넷을 하염없이 훑는다. 오늘의 내 하루가 흐르듯이.





밤의 편의점에는




딸랑-

"어서오세요"

딸랑 소리에 맞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밤 12시를 10여분 남겨둔 지금, 언제나처럼 삐쩍 곯은 그 아줌마가 들어온다. 나이는 40대 중반이나 되었을까. 워낙에 곯은 인상에 나이 파악이 어렵다. 어쨌든 가게 안을 비척대는 걸음으로 반바퀴 휘 돌던 그녀는 매대에 남은 김밥 한 줄을 고른다. 아마도 그녀의 딸이 먹을 식사일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삼각김밥 두 개 묶음과 2단 도시락을 고른다. 그리고는 여지없이 소주 한 병과 간식용 소세지 몇 개를 집어든다.

"만 이천원입니다"

그녀는 품에서 카드 한 장과 동전 몇 개를 꺼낸다. 술은 현찰로, 나머지는 그녀의 카드로 결제한다. 신용카드가 아니다. 꿈나무 카드…저소득층 자녀들을 위한 식대 지원 복지제도다. 하루 1만원 한도의 식대 지원 카드이지만 나는 그 아줌마의 딸이 저 카드로 만원어치의 식사를 제대로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매번 저 아줌마가 와서 천 몇 백원짜리 김밥 나부랭이와 술안주를 사는 모습만을 보았을 뿐이니까.

"감사합니다"

계산을 마치고도 그녀는 가게를 바로 나서지 않는다. 가게 한 켠의 라면 식사대에 가서 언제나처럼 2단 도시락을 분리한다. 밥은 다시 뚜껑을 닫아 챙기고, 반찬만 전자렌지에 돌린다. 2분 여의 시간이 지나자, 익숙한 손길로 그녀는 데운 반찬 등을 들고 가게를 나가 바로 앞의 파라솔 자리에 앉는다.

"또 오세요"

나는 그녀를 계속 눈으로 힐끔힐끔 좆는다. 하류인생들의 모습이다. 그녀는 파라솔 의자에 앉아, 살짝 잦아든 비를 바라보며 소주를 딴다. 그리고는 데운 도시락 반찬과 삼각김밥과 소세지를 안주로 술을 즐긴다. 예전에는 소주에 먹기에는 조금 과한 안주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언젠가 허겁지겁 삼각김밥을 베어무는 모습에 깨달았다. 아마도 저 여자는 저게 하루에 먹는 식사의 전부일 것이다. 술과 삼각김밥과 소세지와 편시락 반찬 몇 가지. 그 짠 반찬들 말이다. 내가 본 것만 근 석달 째니 저 여자의 신장은 멀쩡할까, 아니 그 전에 간은 멀쩡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다시 휴대폰으로 눈길을 돌린다.




"어서오세요"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딸랑 하는 소리에 다시 눈을 문으로 돌리지만, 좀 전의 그녀다. "공병이요" 하고 근 30여 분만에 비운 소주 공병을 100원에 받아간다. 공병 값이 오른 뒤로 이 편의점을 찾는 수많은 '주당'들이 소주병을 모아오곤 한다. 가끔은 바코드가 없는 업소용 공병을 들고 와 돈 달라고 빡빡 우기다가 씩씩대며 돌아가는 이들도 있는데, 한심스럽기도 하지만 어디 술집에 가서 술 퍼마시다가 그 놈의 돈 100원 받을라고 소주 공병을 가방에 싸올 생각을 할까 하는데까지 생각이 미치면 안쓰러울 지경이다.

"이거, 포인트 적립해주세요"

아까 꿈나무 카드로 결제한 영수증을 들고 와서 내민다. 나도 순간 아차 싶다. "네, 알겠습니다" 하고 편의점 포인트 카드에 아까 구매한 내역을 포인트로 적립한다. 이윽고 여자는 다시 비척비척 저쪽으로 걸어가더니…

"이거 계산해주세요"

하는 무미건조한 목소리와 함께 맥주 한 병을 추가로 집어온다. 이번에는 편의점 적립카드로 계산한다. 딸내미의 꿈나무 카드로 이것저것 결제를 하고, 그렇게 적립되는 편의점 포인트로는 술을 산다. 꿈나무 카드로는 술을 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제를 마치고, 여자는 그녀의 딸이 먹을 김밥을 들고 집으로 향한다. 아니 집으로 향하는지조차 확실하진 않다. 저렇게 갔다가 두어 시간 후에 왠 아저씨들이랑 다시 편의점으로 돌아와 술을 또 빨아대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니까.




"미쳤어, 미친 인간들이야"

그녀가 나가고 나는 중얼거린다. 낮도 아니고 밤 12시 다 된 시각에 와서-절대로 12시를 넘기지는 않는다. 그랬다가는 저 카드의 금액이 리셋되니까 1만원을 그냥 허공에 날리는 셈이 되어버린다- 아이의 김밥을 사간다면, 아이는 도대체 이 시간까지 무엇을 먹는 것일까.

"점심 급식을 먹는다고 쳐도 말이지"

하루 한 끼에 김밥 한 줄… 거기에 라면을 끓이고 저 도시락 맨밥을 투하해서 추가로 한 끼? 그야말로 탄수화물 폭탄일텐데. 게다가 이 시간이라면. 여자는 한 눈에 보아도 알콜중독이다. 그리고 이 동네에는 저런 사람이 꽤 된다. 자식의 밥값에 손을 대는 인간들. 가난해서 어쩔 수 없이 생필품을 사는 거라면 이해라도 되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입에 들어갈 술안주를 산다. 술은 못 사니까. 가격이 제법 센 육포 같은 것은 못 사고, 그저 편시락 반찬 정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들 스마트폰 한 대씩은 들고 있다. 그것도 일종의 복지제도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간에 말이다. 하기사, 가끔 오는 노숙자들도 휴대폰 하나씩은 다들 들고 있는 모습 보고 기가 막힌 적도 있었다.




"여, 담배 줘 봐 담배"

비가 조금 잦아들자 손님들이 다시 늘기 시작한다. 새벽 3시에 만취한 채로 담배를 요구하는 이 아저씨.

"어떤거 드릴까요?"
"담배 달라고"
"어떤 담배 드릴까요?"
"아 담배 달라고!"

…가끔 이런 병신들이 있다. 생각보다 많다. 진상이나 병신들. 전체 편의점 고객이 100명이라고 치면 그 중에 대여섯명은 확실히 병신이다. 특히 이런 심야 시간대는. 가끔은 병신율이 20% 가까이 치솟으며 짜증이 폭발하는 날도 있는데, 그런 날은 정말 피곤한 날이다.

어쨌거나 나는 그의 요구대로 '아무거나' 집어든다. 에쎄 프라임을 집어든다. 이런 경우 보통 던힐 6미리나 팔리아먼트 아쿠아5를 집어들면 대충은 아다리지만, 이런 아재들은 에쎄가 취향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는 육두문자를 추가로 뱉으며 그제서야 "던힐 육미리"를 외친다. 나는 묵묵히 터져나오는 그의 쌍욕을 몇 마디 더 들으며, 카운터 테이블에 흩뿌려진 동전을 헤아린다.




새벽 3시, 김밥 폐기가 나오는 시간이지만 오늘은 폐기가 없다. 아까 그 아줌마가 집어간게 마지막이다. 하지만 아쉽지는 않다. 딱 두 달 만에 편시락이나 김밥에는 질려버렸으니까. 이젠 폐기가 나와도 안 먹는다. 그냥 아침 시간대의 민주에게 먹으라고 냅두곤 한다. 문득 나는 이렇게 불과 두달 만에 질려버렸는데, 그걸 몇 달, 어쩌면 몇 년을 먹고 있는 그 아줌마의 딸은 어떤 느낌일까. 생각해보니 조금 소름이 돋는다.

하기사 입맛 나름인지도 모른다. 아침 타임의 알바 민주는 1년 넘게 이 일을 했다고 하면서도 편의점 폐기음식을 없어서 못 먹는다니까. 걔도 집에 아빠가 없는 편모가정이랬다. 아니 그게 편부가정인가? 모르겠다. 아프리카 TV의 광팬인 그녀는 매번 교대 시간이면 그녀가 즐겨보는 몇 개 채널의 BJ 이야기들로 인사를 대신하곤 하는데, 그런 것에 관심이 요만큼도 없는 나로서는 정말 그 이야기 들어주는 것도 곤욕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가끔 일이 있어서 근무를 부탁할 사람도 그녀 뿐인 것을. 구태여 척을 질 필요가 없다. 당장 지난 주의 면접도 그녀 덕분에 겨우 볼 수 있었지 않는가.

딸랑-

"어서오세요"

또 손님이다. 이번에는 제법, 섹시하게 입은 만취 손님 셋이다. 앳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과한 화장…. 아마도 20대 초반쯤? 무어가 그리도 웃긴지 물건 고르면서도 지들끼리 한참을 깔깔대다가 결국 생리대와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골라 나간다.




사실 이 일을 하기 전에는 그저 계속 서서 바코드만 찍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온갖 잡무가 많다. 물건 들어오는거 채워넣는 것도 제법 큰 일이다. 엄청 귀찮은. 청소도 그렇고. 종종 민주가 빵꾸를 내는 날 갑자기 주인 아줌마나 아저씨가 올 때가 있는데, 아줌마는 꽤나 꼼꼼하게 청소 상태를 본다.

어쨌거나 청소를 시작할 시간이다.




새벽을 지나 아침이 가까워진 시간. 일하는 중간중간, 졸음이나 입이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군것질거리를 종종 사먹곤 한다. 초콜렛이나 빵 같은. 사실 이거 때문에 살도 조금 쪘다. 3킬로 정도. 다시 빼면 되지 뭐, 하는데 저번에 민주가 그랬다.

"편의점 음식으로 찐 살은 진짜 안 빠져요. 알아요? 나 이 일 하기 전에 오십이킬로였어요"

뭘 얼마나 먹었기에, 하고 되묻고 싶었지만 당연히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단지 조금 군것질거리를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할 뿐.




일출을 본다. 언제나처럼. 그리고 새삼 아침에 바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느낀다. 해가 뜬 직후인데도 벌써 출근을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가게에 와서 편시락을 집어 들기도 하고, 담배도 찾고, 이것저것 군것질거리도 산다. 물티슈도 사고, 라면을 먹고 가기도 하고.

이제 몇 시간 후면, 민주가 온다. 교대를 하고, 나는 피곤한 몸을 뉘이러 갈 것이다. 달콤한 잠을. 달콤함 속에 미래에 대한 불안함도 있지만, 오늘은, 아니 어쩌면 내일은… 조금 다르다. 지난 번의 면접은 좀 잘 봤으니까. 부디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대하며, 오늘은 정말 단잠을 잘 수 있을 것 같다.

그 단잠을 이룰 생각에, 벌써부터 기분이 좋다.

- fin -

행복의 그릇 소설

박 이사는 단숨에 맥주 한 잔을 비우더니 입을 열었다.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잖아? 내 인생이 딱 그랬다고. 뭔가 좋은 일이 생기면 기가 막힐 정도로 나쁜 일이 생기는거야. 초등학교 5학년 때, 생일 파티를 했어. 짝사랑하던 수정이도 오고, 불알친구 재성이, 훈민이, 정운이 등등등 해서 정말 즐거웠지. 그 나이에 '행복'이라는 단어가 눈 앞에 어른거릴 정도로. 근데 그 파티가 끝나갈 무렵에 집으로 전화가 왔어. 아버지가 교통사고 나셨다고"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기억나는 가장 어린 기억이 그거야. 그 이후로도 마찬가지였어. 재수를 하고 본 수능에서 대박이 터졌어. 그 정도면 서울대 쓰고도 남았단 말이야. 그리고 그날 함께 재수 준비를 하던 여자친구가 음독자살 시도를 했다고. 미친 년이. 답을 밀려썼대나? 다행히 죽진 않았는데 한동안 고생했지. 여튼 그런 식이야, 좋은 일이 있으면 반드시 나쁜 일이 생기는거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아 행복하다' 생각한 순간 곧바로 불행이 닥쳐오는거야. 호사다마라는 말을 나처럼 많이 떠올린 사람도 없을거야 정말로. 나 이사 승진 하고 그 다음 날 마누라한테 이혼 통보 받았잖아."

무어라 대답을 하면 좋을지 몰라 나 역시 그저 잔을 홀짝일 뿐이었다. 박 이사는 말을 이어나갔다.

"아니 세상에 남들은 막 흐름이 좋을 때 더 잘 풀리고 그런 사람들도 있는데 나는 왜 이럴까. 그런데 언젠가 딱 그 생각이 들더라고. 아, 이게 팔자구나. 이게 내 행복의 그릇이구나. 나는 그 행복의 그릇이 작아서, 그 그릇이 차는 순간 엎어지고 딱 불행이 들이 닥치는거지."

그때 나는 위로라고 할까, 그의 말에 토를 달았다.

"에이 그래도 이사 님은 이사 타이틀까지 달았고, 남들 못 가본 곳까지 가봤잖습니다. 객관적으로는 운이 좋은 편 아닙니까"

그러자 박 이사는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바보가 아니거든. 내 행복의 그릇이 작구나, 나는 완전 머리 끝까지 행복으로 가득 채워 버리면 안되는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내 나름의 대책이 보이더라고."
"대책이요?"
"그래"

박 이사는 술잔의 4/5쯤 찬 잔을 흔들며 말했다.

"행복이 딱 이만치 차오르면, 스스로 적당히 따라버리는거야. 행복을. 이를테면 꽁돈 10만원이 들어오면 그 반은 뚝 잘라서 어딘가에 기부해버리거나 허무하게 바보 같은 곳에 써버리는거지. 또 뭔가 좋은 일의 기미가 보이면 스스로 불행을 만들고. 우리 첫 애 태어날 때, 그 전날에 하늘에 맹세했지. 그 좋아하던 조기축구, 다시는 안 하겠다고. 우리 아들 무사히 태어나게 해달라고. 그리고 무사히 태어났잖아."

웃으며 이야기를 털어놓는 그였지만, 솔직히 나는 이쯤해서 그에 대해 다소 미심쩍고 부정적인 인상을 받기 시작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의외로 이런 류의 징크스나 미신적인 것에 민감한 케이스가 많다는 것 정도야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미신에 휘둘려서야 좋을게 없어보였으니까. 하지만 그는 과연 닳고 닳은 인생의 베테랑답게 내 표정을 읽어냈다.

"나도 뭐 내가 이러는게 과하다고는 생각해. 하지만 내 나름의 결론은 이게 꽤 확실한 이론 같단 말이야."
"확실한 이론이요?"

솔직히 술자리의 개똥철학이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좀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살다보면, 잘 나갈 때 병신 짓 하는 인간들이 종종 보이잖아. 막 성공한 연예인이나 스포츠스타가 어느날 갑자기 음주운전이나 마약에 손을 대서 갑자기 몰락해버리는거. 혹은 멀쩡하던 인간이 갑자기 병신 짓 해서 손해 크게 보는 거 말이야. 이런게 나는, 그 '행복의 그릇'이 넘쳤을 때 일어나는 일 같다는거지. 그 나름대로의. 윤 대리는 그런 일 없었나? 뭐 잘 흘러가던게 갑자기 망하던가, 뭐 연인이랑 행복의 절정이라고 느낀 시기에 확 이별 통보를 받는다던지"

별로 그런 일은 없었는데요, 라고 말하려던 순간 재희한테 고백해서 사귀게 된 일주일 후에 입대영장 받은게 생각났다. 구태어 말을 하진 않았지만.

"여튼, 뭐 내 말은 항상 사람이 잘 나갈 때 경계해야 된다는거야. 윤 대리도 이제 곧 다음 달에 과장 달게 되면 또 뭐 반대 급부로 안 좋은 일 생길지 누가 아나?"

걱정인지 저주인지 모를 말에 "아이고, 저는 그릇이 커서 걱정이 없습니다 이사님. 다만 당최 그릇이 너무 커서인지 어째 행복이 차오르지를 않네요?" 하고 웃어 넘길 뿐이었다. 이사는 그 말에 빵 터져서 "내가 이래서 윤 대리를 좋아한다니까? 아 재밌구만, 재밌어. 참 윤 대리 재밌어" 하고 박수까지 치며 웃었다. 회사에서 맨날 딱딱한 얼굴만 보던 그의 활짝 웃는 얼굴에 내가 다 시원함을 느낄 지경이었다.

그리고 박 이사는 그날 밤 음주사고로 사망했다.

나는 '그 날 그렇게 좀 웃었다고 그게 죽을 정도의 행복한 일이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지만, 다음 날 빈소에서 그의 아들이 서울대 수석 입학 통지서를 들고 오열하는 모습을 보며 새삼 납득했다. 확실히, 그토록 아끼던 아들을 혼자 키우며 결국 서울대까지 보냈는데 그 기쁨이 세상 무엇에 비한들 작았으랴. 그의 행복의 그릇이 또 한번 엎질러지기에 충분한 소식이었겠지.

부디 다음 생애에서는 박 이사님의 '행복의 그릇'이 태평양만하게 크길 바란다. 또한 그만한 그릇을 들고 그 위치까지 올라갔다는 사실에 새삼스레 감탄과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

- 完 -

깨진 유리잔 소설

무심결에 돌리던 채널 속에서 남녀의 격렬한 말다툼이 벌어지는 드라마 장면이 나온다. 남의 싸움은 언제나 즐거운 것이기에 채널을 멈췄지만 바로 그것이 함정이었다.

"너는 실수였다고 말하지만… 그건 나한테 피가 쓸려나가는 고통이었어. 알아? 한번이라도… 단 한번이라도! 내 마음 이해해 본 적 있어?"

한참을 소리치던 여주인공은 털썩 주저앉으며 비명에 가까운 한탄을 쏟아낸다. 피같은 눈물이 그녀의 아이라인을 망치며 줄줄 흘러내리고 남자 주인공은 당혹스러워 하는데, 상황을 휘어잡는 그 살아있는 연기가 TV를 넘어 너와 내가 있는 공간마저 얼려 버리고야 만다.

"흠"

나는 스윽 채널을 돌리지만 뒤에서 "왜 돌려! 다시 틀어 봐, 그거" 하고, 어느새 차가워진 목소리의 네가 입을 연다. 대답 대신 다시 채널을 돌리노라니 여주인공은 주저 앉아 엉엉 울고 있고, 남자 주인공은 "아, 제발 좀. 그만 좀 해!" 하고 소리치며 걸어가는데, 드라마답게 비가 쏟아지고 여주인공의 비참함은 극대화 된다.

방금 전까지 더워 죽을 것 같았던 열기가, 당장이라도 덮쳐서 운우의 정을 나누기 직전이던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단박에 날아가고 나는 어느새 에어컨 바람이 혹한기의 칼바람마냥 춥게 느껴져 팔과 등에 소름이 돋고 있다. TV 속 드라마도 이미 장면이 전환되어 식사 장면이 되어 있건만, 나는 아직도 고개를 돌려 너를 보기가 두렵다.







깨진 유리잔






"뭐라도 시켜먹을까"

식사를 제안하지만 수연은 여전히 대답 대신 고개를 젓는다. 나는 마른 세수를 하며 얼굴을 쓸어내리지만 무어라 할 말은 없다.

"흐음"

나는 그저 말 없이 휴대폰을 만지지만, 딱히 무엇을 할 수도 없다.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서, 어느새 오전 11시 반이던 시간은 오후 2시가 다 되어간다. 피곤함과 배고픔과 짜증이 함께 하는 시간.

"미안해"

뜬금없이 던지는 나의 사과. 그럴 수 밖에. 물론 대답은 없다. 고개를 숙인 채 바닥에 앉은 그녀는 그 후로도 한참을 그러고 있다 입을 연다.

"배고프면 너 혼자 뭐 사먹어"

그리고 수연은 침대로 가서 눕는다. 나는 여전히 침대 옆에 걸터앉아 아무 말 없이 그냥 그렇게, 허무한 시간을 흘려보낸다. 오후 3시가 되었을 무렵, 나는 어쩔 수 없이 냉장고 앞 중국집 번호를 확인하고 주문을 한다.

"예, 1번 세트로, 탕수육에 짜장 하나, 짬뽕 하…"

하지만 나의 주문은 완성되지 못했다. "안 먹는다고!" 하고 소리를 버럭 지르는 네 목소리에 나 뿐 아니라 전화기 너머의 사장님까지 놀랐을테니까. 나는 다시 "미안합니다. 나중에 다시 할께요"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길게 한숨을 내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 그냥 나는 니가 배고플 거 같아서, 그래서 주문했던건데…"
"오빠는 내가 어떤 것 같아?"

지금껏 수천번 가까이 들었던 질문. 그리고 그 어떤 답을 해도 그녀를 만족시킬 수 없었던 질문. 나는 시선을 돌리며 헛기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아까 그 드라마 보면서 또 안 좋은 생각… 났겠지. 그… 크흠, 미안해"

어느새 나는 손까지 모으고 있다. 수연은 차가운 눈으로 날 바라보다 또 그 대사를 꺼낸다.

"오빠는 몰라, 정말 하나도 몰라. 내가 어떤 기분이었고 어떤 마음이었는지"




그렇게, 아침 11시에 우연찮게 TV 드라마의 30초 장면 때문에 시작되어 지금 이렇게 밤 11시까지 이어지고 있는 냉전과 834차 세계대전과 이후의 신냉전, 그리고 이 우울한 기분. 그녀는 울다 지쳐 침대 구석에 얼굴을 묻고 자는지 자는 척 하는 것인지 모를 상황이고, 나는 침대에 몸을 기댄 채로 가만히 저 장판 한 구석을 쫒는다.

아까 그녀는 급기야 그런 말까지 했었다.

"내 친구들이 다 그래. 오빠랑 그냥 헤어지라고. 한번 바람 피운 새끼는 또 바람 피운다고. 그리고 깨진 신뢰는 복구 되는게 아니라고. 그리고 기억들이 잊혀지지를 않아. 점점 더 선명해진다고. 매일 매일이 죽을 것 같이 힘들어. 나 이러다 죽을 것 같다고!"

다시 눈을 지그시 감는다.




그래서 몇 번인가 너를 놓으려 했다. 다 내 잘못이고, 어차피 다 끝난 거, 미련으로 붙잡고 있는 것인가 싶어서.




"뭐해. 바닥에서 그러고 잘거면 올라와서 자"

어느새 나도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쓰읍 침을 닦고, "응 자야지" 하고 침대 위로 오른다. 수연은 내 배게를 건내고, 나는 눕는다. 그리고 밑도 끝도 없이 그녀가 사과한다.

"미안해"

하지만 그녀가 사과할 일 자체가 아니다. 그녀가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있다면 나같은 놈을 좋아했다는 것이 죄겠지.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눈을 질끈 감는다. 그러자 수연이 말했다.

"오늘 못 간 에버랜드는 내일 가자"

나는 대답 대신 그저 어둠 속에서 고개만 끄덕인다. 그리곤 그녀의 떨리는 손을 잡는다. 그렇게 십여 분, 하루종일 울다 지친 수연은 금새 다시 잠이 든다.



깨진 유리잔은 다시 붙지 않는다. 하지만 너와 나의 인연은 유리보다 강하다. 그리고 부러진 뼈는 다시 붙었을 때 더 강하다고 하지 않는가. 다시는, 다시는 그런 미친 짓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그렇게 잡은 손을 부드럽게 다시 꼬옥 쥐어본다.

설령 언젠가 네가 힘들어 나를 놓아버린다 해도, 결코 내가 먼저 놓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짐하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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