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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 : 6화 [장편] 가면

애초에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지만, 굳이 저질렀다면 양다리는 걸리지 않는 것이 제일이다. 솔직히 재미있는 것도 잠깐이다. 스케쥴 관리나 금전적 이중지출, 연락과 변명거리를 만드는 스트레스, 때때로 몰려오는 큰 회의감. 그런 의미에서 양다리는 '즐거울 때 적당히 재미보다가 한쪽을 정리하는 것'이 답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사실 시도를 안 한 것은 아니다. 첫 잠자리를 가진 직후 아라를 버리려고 했고, 중간에 아라와 관계가 깊어질 무렵 가영에게 이별을 이야기 했었다. 물론 그 '정리'의 시도는 모두 실패했다.

둘의 마음이 진심이었고, 그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어려웠다. 결국 길어진 꼬리에 의해 나는 양다리를 발각 당했다. 그리고 한번 용서를 받았음에도 또 걸렸다. 물론 양측 모두에게.

제때 정리하지 못했다면 걸린 다음에라도 마음 독하게 먹고 이별을 통보하면 그만인 것을 나는 이번에도 그러지 못했다. 아라를 정리할 생각을 할 참이면 가영과 싸웠고, 가영에게서 갈아탈 생각으로 마음을 굳히면 꼭 아라와 싸웠다. 단순한 연인의 싸움이 아니다. 바람 피운 개새끼, 다른 년 정리하지 못하는 병신에 대한 미움과 애증이 터지는 싸움이다.

우스운 일이었다. 꼭 한쪽을 골라야겠다고 마음 먹으면 그녀와 싸웠다. 결국 굳게 다잡았던 마음이 '아 얘는 안되겠다'하는 쪽으로 기울고 만다. 그래서 돌아서면 또 한쪽이 나에게 손을 내민다. 그 지랄을 3년을 했다.

물론, 둘 다 한꺼번에 정리할 생각을 안 한 것도 아니다. 그때마다 나는 잔인한 통보를 했다.

"가영이 이제 안 만날거야. 근데 너도 안 만날거야"

그런 말들. 반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런 통보를 하면 상대는 나에게 안겨왔다. 그저 내가 좋아서? 아마도 아닐 것이다. 상대에게 나를 뺏기기 싫은 마음이, 나를 좋아하는 마음보다 컸을지도 모른다. 참 지랄 맞고 지독한 연애였다.





가면 : 6화






나는 그렇게 두 여자 사이에서 몇 번이나 걸리고도 바람을 계속 피워댔다. 그 와중에 또 잘났다고 다른 여자들을 찝적대기도 했다. 나는 그런 새끼였다. 문득 스스로에게 놀랄 만큼 쓰레기 같은 놈이었지만 이미 양심이 마비된 상태였기에 그 사이사이의 씁쓸한 감정 따위는 '이러다 어떻게든 되겠지'하고 알 수 없는 혼잣말로 커버할 수 있었다. 그게 어느새 몇 년이나 흘렀다.

"우리 제주도 여행 가자"
"제주도?"

가영이 모처럼 함께 여행을 가자고 했을 때 내 머릿 속에 떠오른 생각은 제주도에 대한 행복한 기대감이 아니라 '아 아라에게 무슨 핑계를 대고 여행 다녀오지?' 였다. 가영도 돈 나갈 곳 많은 어려운 상황에서 사실 무리한 여행이었다. 실시간으로 마음이 떠나가는 쓰레기 남자친구의 마음을 붙잡아보고 싶은 실낱 같은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 가자"

가영의 말에 나는 일단 승락했다. 가영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정신차리고, 여행가서 좋은 추억도 만들고 다녀오면 아라도 정리해야지 하는 생각도 했다.

"…"

제주도에 도착해서 가영이 운전하는 차를 타며 나는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주도의 풍경은 좋았지만 솔직히 좋은지도 몰랐다. 그저 마음이 무거웠다. 아라가 생각났다. 단순히 아라가 좋아서 만은 아니었다. 속고 있을 아라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 그저 안쓰러웠다. 물론 가영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와 장난 아닌데?"

비싼 풀빌라였다. 가영이 "나 무리 좀 했지" 라고 자랑했을 정도였다. 한층 마음이 쓰렸다. 더 좋은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제주 해변에서 함께 해수욕을 하면서 그토록 좋아하는 표정을 보고 깨달았다.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이렇게 나를 좋아해주는 애한테. 사랑스러웠다. 미안했고 고마웠다.

"어 나 지금 일하고 있어. 어어 좋긴 좋은데 뭐 잘 모르겠어. 어 미안 나 들어가 봐야겠다. 끊어"

중간중간 몰래 아라에게 전화를 했다. 반가워하는 목소리에 또 마음이 아팠다. 무슨 놈의 마음이 그리 아프다면서 양다리를 걸치고 자빠졌냐 하면 할 말이 없지만 그 미안하고 애틋한 마음이 바로 한쪽을 쉽게 끊어내지 못한 이유라고 답하고 싶다. 밤에는 고급스파 욕조에서 놀고 다음 날 아침에 제주도 여행지를 돌아다녔다.

그때였다.

한적한 해안도로 한 켠에서, 갑자기 가영이 펑펑 울기 시작했다. 당황한 내가 "갑자기 왜 울어" 하고 묻자 가영은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울었다. 나 역시 입을 닫았다. 한참을 울던 가영이 말했다.

"니 표정이… 하나도 재미없어 하는 것 같아서. 그 여자 생각하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얼굴에 떠올랐던 것일까. 아라를 생각하며 근심걱정, 두 여자에 대한 미안함으로 가득찼던 마음이 그렇게 표현된 것이었을까.

"아니야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그런거 아니야"

애써 부정했지만 서로 만난지 몇 년이 되는 사이에 표정 하나, 말투 하나로도 서로의 기분이나 감정쯤 짐작 못할 리 없었겠지. 미안했다. 모처럼의 여행을 내가 망친건가 싶어서 자책감이 크게 들었다.

"아니야 그런거. 정말 아니야"

가영을 겨우 달래고 여행을 계속했다. 그 맛있는 제주갈치, 그 맛있는 제주통돼지를 먹고, 제주도로 시집와 50년 시집살이를 한 경상도 할머니의 사연 많은 백반집에서 밥을 먹고, 고기국수와 땡볕에 달궈진 감귤까지 먹고 다시 서울로 왔다. 여행은 즐거웠다. 단지, 가영에게 미안했고 아라에게 미안했다.




"…그게 뭐? 그 년이랑 제주도 여행 다녀온게 뭐 어떻다는거야. 어쩌다가 헤어진거냐고 물은건데"

내 회상에 아라는 답답하다는 듯이 다그쳤다.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할 따름이었다.

"기본적으로는 그렇게 쉽게 딱 헤어지자고 헤어진게 아니라는 말이야. 어쩌다 보니 우발적으로 일이 벌어진거지"
"그러니까 뭐가 어떻게 된 건데"

나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가영이에 대한 나의 마음도 사실은 어느 시점부터는 애증이었다. 오랜 기간 알아왔고, 서로 힘든 시간을 같이 보냈고, 서로를 깊게 이해한다고 생각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만큼 서로에게 상처도 많이 주었다.

"너도 잘못한 거 많잖아"
"뭐?"

정말 솔직히 말해서 가영이 나를 처음부터 미친듯이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건 내가 그랬을 뿐이다. 항상 끌려가는 연애를 했고, 지는 연애를 했다. 내가 더 좋아했으니까. 수시로 하는 헤어지자는 말과 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책망에 나는 점점 작아졌다. 변명에 불과하지만 그래서 더 흔들렸던 것이다.

'내 자리로 돌아가자, 이 무슨 미친 짓이냐'라는 생각에 여러 번 반성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바람으로 시작한 연애에 내가 진지해질 수 있을까? 조강지처라는 말도 있잖아?'라는 생각으로 나를 다그치기도 했다.

"그래 내가 헤어져 줄게"

가영의 집에서 밤새도록 싸우다가 지쳐서 이별통보와 함께 집에 오기도 했고, 또 그날 밤 달려온 그녀를 달래주기 위해 다시 그녀의 집으로 향하기도 했다. 사실 그때만 해도 나는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마 나는 얘랑 못 헤어질 것 같다. 칼로 물 베기라고, 이렇게 싸우고 화해하고 하면서 서로 마음의 문을 다시 열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겠지'라고.

하지만 그런 내 가벼운 생각과 달리 가영은 이미 상상 이상의 스트레스에 노출된 상태였다. 내가 처음 가영에게 바람을 들키고 가영은 한달 만에 무려 14kg이 빠졌다. 불면증이 생겼고 불안증이 생겼다.



"그리고 그 모든 불편한 마음을 나에게 쏟아내고 있었지"

내가 가영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아라가 끊고 들어왔다. 이제는 아라에게도 여유가 좀 생긴 것인지, 웃으며 이야기 한다.

"매일. 정말 매일 매일 미친 욕을 해대는거야. 무슨 걸레가 어쩌고 거시기가 어쩌고 창녀가 어쩌고. 나는 듣도보도 못한 욕도 잘하더라. 그리고 너랑 뭘 먹으면 그걸 자랑하고, 니 남친은 어디 갔냐고 나는 내 남친이랑 지금 맛있는거 먹는데 너는 뭐하냐고. 나 지금 호텔 왔는데 너 어디서 뭐하고 있냐고 조롱하고"

아라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코웃음을 흘리더니 이어 말했다.

"하루에 문자를 거의 몇 백 개를 보내는거야. 배터리가 빨리 닳을 정도였다니까. 너랑 있을 때도. 정말 넌 몰랐어?"
"몰랐어"
"하긴 니 벗은 사진도 보내던데. 어쨌든 지가 기분 나쁜 일이 있으면 뭔 또 미친 사람처럼 쌍욕을 하고, 지가 기분 좋으면 나 놀리는 문자 보내고. 맨날 무슨 더러운 년, 걸레가 어쩌고 갈보가 어쩌고. 그래서 내가 이렇게 된거야. 너랑 그 년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웃으며 말하던 아라가 갑자기 울컥하더니 파르르 떤다.

"나 이제 어디 길만 나가도 세상 사람 모두가 내 욕을 하는 것 같고, 환청도 들려. 나 밖에 나가는게 무서워. 나 너 만나기 전에 이러지 않았어. 나… 나… 나 어떻게 할거야"
"… …"
"니가 딱 한 마디만 해줬어도 이러진 않았을거야. 니가 그때 그 년 앞에서 욕 한 번만이라도 했어도 안 이랬을거라고"

울먹거리는 아라. 미안했다.




그 날은 뜻밖에 찾아왔다. 양다리가 N년 차에 접어든 어느 시기의 겨울이었다. 가영의 집에서 놀던 나는, 컴퓨터로 쇼핑을 하다가 휴면회원 해제가 잘 안된다는 이유로 쿠메팡 아이디 좀 빌려달라는 가영에게 대수롭지 않게 안 쓰던 아이디를 빌려주었다.

"…잠깐만 일로 와봐"

가영의 표정은 심상찮았다. 그리고 화면에 뜬 내용을 보고 아차 싶었다. '안 쓰던 아이디'가 아니었다. 오히려 '양다리 안 걸리려고 새로 만든 아이디'였다. 그 안의 쇼핑기록은 내가 아라에게 선물한 겨울용 여자 재킷이었다.

"너 아직도 걔 만나?"

나는 부정했다.

"아니 예전에 잠깐 좀 그럴 때 그랬던거지"
"너 이거 지지난 주에 쇼핑한건데?"

가영의 표정이 심상찮게 구겨졌다. 겨우 몇 달간 잠재웠(다고 생각했)던 가영의 분노가 깨어났다.

"야!"

비명과도 같은 탄식이 내 귀를 찢었다. 내 멱살을 잡고 눈물이 터져 흐르는 그녀.

"전화해. 지금 당장 전화해서, 그 년이랑, 나 보는 앞에서 헤어져"
"침착해. 아 그런거 아니라고. 그냥 헤어지고 나서 미안해서…"

어림도 없는 변명이었다. 악다구니 같은 비명과 내 머리를 쥐어뜯으려는 가영 앞에 나 역시 호통을 질렀지만, 지옥 같은 분위기 속에 결국 긴 한숨과 함께 나는 전화기를 들었다.

"아라야"

전화기를 스피커폰으로 강제로 바꾸는 가영.

"어 자기야. 왜?"

반가워하는 아라의 목소리. 하지만 나는 한없이 잔인한 말을 그녀에게 쏟아내었다.

"우리 헤어지자"

마치 미친 여자 같던 가영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변한다. 조금 안심하는 듯한 표정. 하지만 아라의 목소리는 그 반대로 너무나 동요하는 것이 느껴진다. 마치 '철렁'하며 아라의 간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기라도 한 것만 같다. 지금 내 머릿 속도 빙글빙글 돌고 있다.

"뭐? 왜? 갑자기 무슨 소리야. 혹시 옆에 걔 있는거야?"

아라는 당황하며 물었다. 아라 역시 가영을 의식하고 있었다. 나는 아랫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말했다.

"어. 지금 옆에 있어. 아라야, 미안해. 헤어지자"
"영호야, 그게 무슨 소리냐고. 갑자기 왜. 나 못 헤어져. 너랑 못 헤어진다고"

아라의 당황 속에 울먹임이 느껴진다. 목소리가 젖어간다.

"미안해. 헤어지자"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곧바로 아라의 전화가 돌아온다. 이번에는 가영이 그 전화를 받았다.

"야, 이 미친 년아. 남의 남자 탐내지 말고 꺼져. 영호는 내 꺼야. 너는 그냥… 잠깐 데리고 놀다 버려지는거야. 알겠어?"

가영의 잔인한 말에도 아라는 이미 울먹이고 있다.

"잠깐 영호 좀 바꿔주세요. 이거 영호 폰이잖…"

가영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아라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다급하게 외치는 그녀.

"나랑 잠깐만 이야기 해. 영호야, 영호야. 그럼 쟤한테 욕이라도 한 마디 해. 욕이라도 해달라고!"
"…"
"봤지? 영호라는 애는 이런 애야. 꺼져"
"영호야, 영호야!"

애타는 목소리를 무시하며 전화를 또 끊어버리는 가영.




두 여자의 갈등 속에 나는 그저 우두커니 서있었다. 한없이 잔인한 말을 하는 가영의 눈에도 승리의 기쁨보다는 고통이 느껴졌다. 내 가슴이 아팠다. 또 전화기 너머로 간절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 아라의 목소리는… 마치 실시간으로 아라가 부서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건 아니었다. 이건 정말 아니었다.

"잠깐만 보고 이야기 해. 영호야 잠깐만!"

간절하게 외치는 아라의 목소리에 나는 흔들렸다. 나는 가방을 메었다. 이번에는 가영이 흔들렸다. 울리는 전화기를 버려두고 내 팔을 붙잡았다.

"어디 가"

나는 거친 숨을 겨우 다스리며 입을 열었다.

"가영아, 나 잠깐만… 아라랑 이야기 하고 올게"
"안돼 가지마"

이번에는 다급한 가영의 울음이 터졌다.

"가지마. 나도 지금 힘들어. 제발 가지마"
"아니 나 잠깐만 아라 걔랑 이야기 하고 올게"
"가지마. 가지마"

가영은 눈물만 흘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엉엉 하는 울음이 터졌다. 마치… 이번에 떠나면 나를 다시는 못 볼 사람처럼.

"아니 왜 우는거야. 가서 잘 이야기 하고 바로 올게"
"가지 말라고. 가지마"

내 눈에도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안쓰러웠다. 그냥 가지 말까. 하지만 두려웠다. 마치 아라가 안 좋은 생각이라도 할 것 같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적어도… 이야기라도 하고 와야 할 것 같았다.

"가지마, 가지마. 나 너 없으면 안돼"

가영은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며 말했다. 어쩌면 지금 몇 년 간의 순간 중 가영이 나를 가장 간절하게 바라는 모습인지도 모른다. 내가 한없이 받고 싶었던 가영의 마음이었다. 만약 몇 년 전에 그녀가 나에게 조금만 더 사랑을 표현했더라면…

'아니'

아니, 그건 아니다. 나는 결국 유혹이 있으면 흔들렸을 쓰레기다. 가영에 대한 한없이 안타까운 마음과 오랜 연인으로서의 미안함이, 다시 차가운 자기비하에 그저 뒤덮힌다.

"나 이야기 하고 올게. 돌아올게"

나는 그렇게 문을 닫고 가영의 집을 나섰다. 문 너머에서 가영의 긴 울음이, 큰 통곡이 들려왔다. 1층에 내려와서도 들리는 큰 통곡이었다. 아마 그녀는 알았던 것 같다. 그렇게 나를 영원히 못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을.




[ 어디야 지금. 나 정말 죽을 것만 같아 ]

아라는 간절히 나를 찾고 있었다. 나는 아라에게 [ 너네 집 가는 중 ] 하며 달랬다. 한편으로 가영의 톡이 날아왔다.

[ 가지마 영호야,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

나는 가영의 톡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문득 몇 달 전에 가영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영호야, 사람이 인연을 끊어내는데 어떻게 좋게좋게 끝낼 수 있어? 결국 모진 놈, 나쁜 놈이 되어야 되는거야. 니가 걔한테 어떤 마음을 갖고 있던, 결국 헤어질 때는 모진 마음을 품어야 되는거야. 알겠어?"

당시 그 말은 내 폐부를 찌르는 말이었다. 가영은 알았던 것이다. 오랜 연인으로서 나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좋게좋게, 어떻게든 상처를 덜 주려고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내 모습을 보며, 그런 모진 마음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조언한 것이었다. 물론 모진 그 마음의 방향이 아라를 향하길 바랬겠지만.



[ 아니다. 차라리 그냥… 차라리 너 걔한테 가. 나 버리고 걔한테 가 ]

많은 생각 속에 아라의 집으로 향하던 중, 가영의 톡이 날아왔다. 나는 이번에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는 아라의 집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이미 얼굴이 눈물콧물로 범벅이 된 아라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 모습에 나는 울음을 터뜨리며 아라를 끌어안았다. 그 날 이후로 나는 가영을 만난 적이 없다. 내 휴대폰에서 가영의 전화번호와 카톡은 바로 차단되었고, 아라는 "그 년이랑 한번만 더 연락하면 나도 이제 너 다신 안 볼거야" 라며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그게 끝이었다.




"뭐야, 그게 끝이라고?"

아라는 의아해 하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물론 진짜 끝은 아니었다. 가영을 버리고 아라로 확고히 마음을 정했던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아침 출근길에 휴대폰을 본 나는 놀랐다.

[ 부재 중 전화(5) : 02-XXXX-YYYY ]

모르는 번호였지만 나는 그 번호를 안다. 가영의 집 근처 공중전화 번호다. 물론 그 번호를 알고 있는 이유는 예전에 한참 싸웠을 때, 가영이 홧김에 나를 차단했을 때 나도 그 공중전화를 몇 번이나 이용했으니까.

새벽에 걸려온 전화였다. 새벽 5시, 5시 10분, 5시 30분, 5시 45분, 6시 10분… 아마도 새벽에 잠들지 못한 가영이 너무나 큰 고통 속에서 엄청난 굴욕감과 배신감을 느끼면서도 겨우 손을 내민 전화였으리라. 어찌 내가 그것을 모르겠는가.

'미안해'

하지만 난 가영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이번에 또 연락하면 다시 그 삼각관계의 구렁텅이로 떨어질게 뻔하니까. 언젠가 또 이런 지옥을 모두에게 경험하게 만들테니까.



"그게 정말 끝이야?"
"아니"

그로부터 또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모르는 휴대폰 번호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거기 조영호씨 휴대폰 맞죠…?"
"네, 맞습니다. 누구세요?"
"네, 저 서가영 친군데요. 예전에 한번 같이 사당에서 밥 같이 먹었던"
"아~ 네네, 알죠"

하지만 반가움보다는 두려움과 걱정이 앞서는 전화. 그리고 갑자기 급발진 하는 그녀의 친구.

"저기요, 지금 가영이 상태가 어떤 줄 알아요?"

두려웠다. 어떤 상태인지. 뭐가 또 어떻게 됐는데. 예전처럼 출근길에 지하철에서 쓰러진건가. 아니면 또 어디 몸이 안 좋아져서 병원에 실려간건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 오세요. 지금 당장 여기 서연대 병원으로… 당장 오시라구요!"

하지만 지금 회사인데 어떻게 당장 가겠는가.

"죄송한데, 상황이 어떤지부터…"
"당장 오시라구요!"
"아니 그러니까, 상황을 설명해주세요. 지금 뭐가 어떻게…"
"정말 이런 말 하고 싶진 않은데, 쓰레기 같은 분이시네요"

그리고 전화가 끊어졌다. 나는 어리벙벙했다. 당장이라도 병원에 가야하나. 하지만 갈 수 없었다. 지금 가봐야 또 한번 지옥의 구렁텅이에 빠질 뿐이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다 나의 업보다. 하지만 마침 걸려온 아라의 전화에 나는 목소리의 물기를 지우고 웃으며 받았다.

"어, 아라야. 어어. 나? 점심 먹었지. 어."

그렇게 가영과 나의 인연은 정말로 그렇게 끊어졌다. 물론 아라에게는 아직 아니었지만.


< 다음 화, 마지막 7화에서 이어집니다 >


국밥 단편

미치도록 추운 날이다. 얼른 집에 가서 보일러 올리고 그냥 눕고 싶지만, 생각해보니 집에 뭐 딱히 먹을게 없다.

"후우"

언제나처럼 역 앞의 순대국집으로 향한다. 가게 안에 들어서자마자 뿌옇게 안경에 김이 서린다. 안경을 벗고 닦으며 "순대국 하나요" 주문하며 빈 자리에 앉는다.

"보통 하나?"
"네"
"여기 3번에 보통 하나!"

인상 좋은… 아니 솔직히 뭐 썩 그리 좋지는 않은 여자 사장님이, 내 테이블에 삶은 수저들이 잔뜩 담긴 수저통을 내려놓으며 주문을 받았다. 곧이어 물통과 김치, 깍두기 반찬이 나온다. 시큼한 냄새. 이 집 김치들은 내 취향은 아니다. 난 손도 대지 않는다. 물을 꼴꼴 따라 마시는데, 추운 날씨에 한 모금만 겨우 넘긴다.

가게는 두어 테이블을 빼고 비어있다. 오늘 유난히 사람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식때가 살짝 지나서 그런 것인지. TV에는 YTN 뉴스가 소리없이 흘러나오며 오늘도 무언가의 여야 갈등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휴대폰을 꺼내든다.

"흐음"

뭐 재미나는 것도 없다. 그냥 그렇다. 입맛을 다시며 인터넷이나 하노라니 곧 국밥이 나온다. 후우, 한 수저 떠먹으니 뜨끈하니 좋다. 휘휘 저으며 뜨거운 김을 빼고 순대부터 하나 베어 문다. 맛있다. 뻔히 아는 그 맛인데 역시나 맛있다. 그래도 서서히 입김 불어가며 먹는다. 후룹, 허허 후룹. 갑자기 뜬금없이 소주 한 잔도 땡기지만 배나 채우러 온 식당에서 순대국밥 팔천원에 소주 오천원까지 해서 쩜삼만원 채울 생각은 안 든다. 주문하려던 나를 겨우 말린다.

"허, 맛있네"

굳이 쓸데없는 혼잣말까지 해가며 먹는다. 정신없이 먹노라니 피곤한 가게의 형광등 불빛에 갑작스러운 노곤함이 쏟아진다. 집에 가면 오늘은 일찍 자야지. 그런데 집까지 가는 길이 너무 싫다. 얼굴을 두 손으로 쓸어내리며 마른 세수를 한다. 가벼운 한숨과 함께 수저를 다시 든다. 조금은 식어 딱 먹기 좋다. 애초에 이 집은 너무 뜨겁지 않게 내오는 게 마음에 든다.

순대국에 밥을 말아 먹으며 유튜브를 소리도 없이 본다. 에어팟은 배터리 충전하는게 귀찮아서 그냥 안 들고 다닌다. 순대국에 밥까지 말아먹었는데 어째 속이 조금 부족한 것도 같다. 한 그릇 더 말아먹을까 하다가 두둑한 뱃살 생각에 일단은 참아본다.

집에 가도 딱히 할 일은 없다. 아마 조금 뒹굴거리다가 휴대폰이나 하다가 잠이 들겠지. 집에 갈 때 귤이나 한 봉지 사가야겠다는 생각은 했다. 삶이 조금은 덧없다. 여름이랑 안 헤어졌더라면 내 삶이 뭐가 좀 달라졌을까. 근 1년째 이 지랄이다. 오늘도 공허한 생각 속에 뚝배기를 긁는다.

"계산이요."
"네 팔천원입니다. 영수증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계산을 마치고 가게를 나온다. 뱃 속에 뜨끈한 것을 채우니 추위가 덜하다. 집까지의 15분, 또 멍하니 걷는다. 추위도 모른다. 시간도 모른다. 오늘은 여섯시 반 칼퇴근을 하고 나왔는데 어째 일곱시 반이 넘었다. 입김을 의식하자 다시 춥다. 13번 마을버스가 지나간다. 저걸 타면 여름이네 집에 갈 수 있다.

'어?'

하지만 금새 정신 차리고 그저 발걸음만 옮긴다. 미친 짓을 할 이유가 없다. 이제와서 무슨 말을 하고 무슨 기대를 하는건데. 병신새끼. 코웃음이 다 난다. 어느새 집 앞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도 쌀쌀하다. 뭐라도 먹고 들어오길 잘했다. 서둘러 보일러를 켜고 옷을 벗으며 침대 속으로 들어간다. 그래, 다시 만나봐야 뭐 없지. 내일은 금요일이다. 일 끝나면 빨리 집에 와서 간만에 넷플릭스라도 좀 봐야겠다. 국밥 같은 내 팔자여.

[유료] 혜수 [유료구독자 전용] 맛보기

이 남자,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실 내 기준에서 이만하면 됐다고도 생각했다.

"혜수야, 나랑 결혼해주겠니"

그 말을 들을 때도 그다지 기쁘지는 않았다. 뜬금없는 고급 레스토랑에 정장까지 차려 입고 뭔가 혼자 한껏 들떠있는 모습에서 뭔가 오긴 왔구나 하는걸 이미 짐작했으니까. 커플링이 아니라 프로포즈 반지라는 것은 조금 의외였지만.

"좋아"

나는 20대 초반 대학생이 아니다. 불과 7개월 만의 프로포즈. 그다지 적절한 타이밍의 적절한 프로포즈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서른일곱의 나와 마흔 둘의 그. 아마 이 남자를 거절하고 나면 그 다음은 없거나 정말 받고 싶지 않은 상대의 반지일 것이다. 아마도 이 남자가 나의 마지노선. "불과 7개월"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7개월 간 만난 횟수가 채 스무 번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기훈은 항상 바쁜 남자였다. 작은 회사에서 차장으로 일한다는 그.

"고마워요"

그래도 다행이었다. 크게 흠이 있는 남자는 아니었다. 외적으로도 잘생긴 타입이 아닐 뿐, 못난 사람은 아니다. 아니 이목구비 자체는 매력적이었다. 성격도 수더분하고 성실한 성격과 자상한 면도 있는, 흔히 말하는 '결혼하기 좋은 남자'. 그렇다고 무슨 나도 '내 남자'를 이리재고 저리재며 흉보는 그런 나쁜 년은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자상하고 좋은 남자가 나한테 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다른 누군가라면, 분명히 이런 좋은 사람과의 인연을 간절히 바라며 행복하게 살길 바랄텐데'

가장 기뻐도 부족한 날, 나는 기훈의 웃는 얼굴을 보며 그 눈가의 주름살과 넓은 이마에 묘한 거리감을 느꼈다. 나쁜 년, 하고 나는 속으로 나를 욕했다.



혜수




나는 떠밀려가고 있었다. 회사 동료 가은의 뜬금없는 소개팅 제안. 내 나이가 몇 살인데 하며 거절했지만 정말 좋은 사람 한 분 소개시켜준다며 자기 다니는 독서모임에서 알게 된 그를 소개시켜 주었다. 소개팅에서 그를 처음 본 순간 나는 아랫 입술을 꾹 깨물었다. 울컥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 나도 잘 안다. 내 나이를. 하지만 반대머리를 소개팅에서 만난 것은 충격이었다.

"네 사실 저라도 놀랐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일 한다고 생각하시고 혜수씨 저랑 한 시간만 대화 나눠주시면 안될까요"

역지사지해보면 조금 비참함까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을 낮추는 정중한 말이었지만, 그 안에는 여유가 있었고 또 참 많은 고민이 있었을 말이었다.

"그거 엄청 연습한 말이죠? 다른 여자들한테도 다 써먹은 말이죠?"

겨우 멘탈을 수습한 내가 겨우 웃으며 한 말에 그도 조금은 자신감을 찾았다.

"세 번째 써먹은 멘트입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나는 그를 제대로 봤다. 이목구비는 오목조목했다. 키도 훤칠했고 몸매도 나이에 비해 다부졌다. 우리 회사 또래 남자들 생각해보면 더욱 그랬다. 아마 그가 머리카락 문제만 없었다면 솔직히 그는 나에게 기회가 오지 않았을 것이다.

"독서 좋아하신다고 들었어요"
"네, 혜수 씨는 책 좋아하시나요?"

네 라고 대답하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근 반 년 내에 읽은 책이 없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싶지만 책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니까.

"네, 좋아해요. 그런데 책 안 본지는 엄청 오래 됐네요. 기훈씨는 무슨 책 좋아하세요?"
"저는 무협소설 좋아합니다"

아….

물론 나도 한때 칙릿 소설 엄청 좋아했고, 아이돌 음악이나 장르 영화팬으로서 일부 사람들에 대한 편견 엄청나게 싫어하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소개팅에서 좋아하는 소설을 무협소설이라고 말하는 40대 남자를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 솔직히 코웃음을 참아낸 내가 대견했다. 그래도 다행히 남자의 다음 말에 이해는 했다.

"제가 출판사에서 일하거든요. 만화, 판타지, 무협소설… "
"아, 저는 무협소설 좋아하신다길래 약간 오타쿠 이런 쪽 생각했어요. 죄송해요"
"아아, 하하, 뭐 조금은 그런지도요"

그 즈음에서 대충 사이즈 나왔다고 생각했다. 그냥 오늘 집에 가서 얼른 푹 쉬고, 월요일에 출근하면 가은씨한테 밥 사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얼마 받은 거냐고 물어보면서. 하지만 기훈도 그리 멍청한 남자는 아니었다.

"그래도 분사하기 전의 모 기업이 컨텐츠 IP를 조금 갖고 있는 회사라서, 드라마 원작 작품도 조금 있고 얼마 전에는 상장하면서 회사도 상암 쪽으로 옮겼거든요, 왔다갔다 하느라고 너무 힘들어서 집도 그쪽으로 샀어요"
"어머, 자가세요?"

이러면 또 이야기가 살짝 다르지. 나를 뭐 속물이라고 해도 좋다. 단지 월세 95만원의 논현동 월세 라이프에 지쳤을 따름이다. 커피 다 마시면 헤어지고 혼자 영화나 볼까 하던 생각이 '지금 시간 애매한테, 그냥 둘이 저녁 조금 일찍 먹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까지는 고려해보기로 했다.


프로포즈에 응한 순간부터는 정말 물살에 떠밀리듯 진행이 되었다. 프로포즈를 받은 이후에야 난 내 친구들을 그에게 소개시켰다. 윤정이가 딱 보자마자 톡으로 < 야, 너 돈 빌려썼냐? > 라면서 묻길래 하마터면 커피 뿜을 뻔한 거 빼고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상견례 후 엄마가 조금 속상해 하는 바람에 진지하게 결혼 다시 생각해 볼까도 생각했지만 당장 나보다 엄마가 더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너는 하여간 명심해. 지금 남친 놓치면 넌 평생 혼자 사는거야"
"그게 뭐 어때서"
"정신차려"

결혼 준비는 시원시원하게 진행됐다. 기훈은 '네가 좋으면 나도 좋아' 모드였고, 나는 '이제와서 아무렴 어때' 모드였다. 웨딩드레스 입어보면서 솔직히 울 뻔 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너무 별로라서. 어차피 할 결혼, 조금 일찍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도 들었다. 기훈은 열심히 우와 우와하며 발연기 리액션을 해왔지만 그는 확실히 연기에는 소질이 없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나는 문득 그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뭐가?"
"못생긴 나한테 결혼해달라고 해서"
"뭐? 니가 왜 못 생겨"
"그냥 액면가가 그래"


둘의 첫 잠자리가 겨우 프로포즈 한달 전이라고 한다면 다들 믿을까. 빠른 프로포즈인 것도 있지만, 마흔 바라보는 남녀의 첫 잠자리가 만난 지 6개월만 인 것도 그가 많이 참아준 것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미친 생각인 거 나도 잘 아는데, 내가 아깝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분위기 잡아가는 게 싫었다. 나도 아줌마인 주제에 그가 아저씨처럼 분위기 잡아가는게 못마땅해서. 그의 입장에선 속으로 화도 많이 났으리라. 다 늙은 년이 뺀다며 속으로 욕할 법도 한데, 아니 실제로 욕했을지도 모르지만 기훈은 잘 참아주었다.

"사랑해"

그가 속삭이는 말에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진심에서 나와야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머리 속 한 켠에서 '사랑하지 않을 뿐이잖아'라는 말이 내 마음을 무겁게 했지만 그는 정말 진심이었다. 그는 정말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 라는 것을 그의 손길 하나하나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 따뜻한 손이 좋았다. 그래서 내 마음의 빗장을 열었다.

"사랑해"

정말 솔직히 말하지만 부끄러웠다. 사실은 내 군살을 그에게 보여주는 게 두려웠다. 20대 어느 날의 첫 경험보다 마음 속으로는 더 떨렸다. 버림 받을까봐. 별 거 없는 X이 쓸데없이 튕겼구나 하며 멀어질까봐. 그러나 기훈은 절대 그렇지 않았고, 최소한 그 두려뒀던 만큼은 믿음과 애정이 되어 그를 향했다.

누구의 표현을 빌어 '찍어내는 결혼식'이었다. 정말 별 것 없는. 발리로 떠난 일주일 간의 신혼여행은 좋았지만 사실 내 개인적인 평가로는 5년 전의 하와이가 더 내 취향이긴 했다. 포르쉐 오픈카 렌트는 좋았다.

"밥 먹었어?"
"아니"

배우자가 자가를 소유한 남자라는 것은 생각보다 큰 안정감을 주었다. 14평의 실 평수는 생각보다 작아서, 어떤 면에서는 차라리 전에 살던 논현동 9평짜리 원룸보다도 불편한 점이 있긴 했지만 내 집이 주는 안정감은 대단한 것이었다.

"내가 이 집에서 뭔 짓을 해도 쫒겨날 일은 없잖아. 그게 너무 좋아"
"그게 뭐야"
"나 스물일곱살 때 집주인 아줌마가 집세 4개월 밀렸다고 내 짐들 다 밖으로 끄집어 낸 적도 있었거든. 지금도 아주 가끔이지만 꿈에 나와. 너무 수치스럽고 죽고 싶었어"

생각해보니 10년 더 된 일이었다.


딱히 딩크로 약속을 한 것도 아니고 따로 피임을 한 것은 없었으며, 그가 그냥 밖에다 처리한 게 전부였지만 조절 기술이 좋은 편인지 우리는 2년 간 아이가 없었다. 종종 내가 "우리 불임인가봐" 하며 반은 장난, 반은 그의 의사를 묻는 질문을 했지만 그는 매번 "그럼 더 좋은거 아냐?" 하며 아무렇지 않을 따름이었다.

"소식은 없더냐"

물론 슬슬 시어머니와 친정에서 압박을 주긴 했지만 기훈이 더 그건 철저히 커버쳐주었다.

"내가 아들 겸 손주할테니 나만 이뻐해 줘"

아마 그 무렵이 내 삶에서 가장 안정적인 어떤 시점이었으라 생각한다.



캠핑 취미에 빠진 그는 매번 나를 캠핑에 데려갔지만, 겨울 캠핑은 정말 내 취향이 아니었다. 언젠가 한번 텐트 안에 일산화탄소가 차서, 내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산 경보기 아니었으면 둘 다 죽을 뻔 한 이래로 나는 한번도 그의 캠핑에 동행한 적이 없었다.

"미안해"

그게 내 잘못이었다. 어이없지만 미안하다는 말은 내가 하고 있었다. 가지 말라고 빌고 있었다. 그 여자랑 캠핑가지 말라며 나는 그를 붙잡고 있었다.



(중략 : 본 소설은 스타일박스 유료 메일링 서비스 구독자 전용입니다)

스타일박스 유료 메일링 서비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에서!

뷰티 코리아

잘생기고 예쁜 사람은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즐겁다. 물론 그들과 같이 어울려 놀고 더 나아가 사랑까지 나눌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일단은 보는 것 만으로 눈이 즐겁다. 때로는 질투나 열등감, 자신에 대한 자책 때문에 오히려 기분이 안 좋아지기도 하지만 우선은 보기 좋다는 말이다. 모든 것은 거기에서 출발했다.

"한민구, 187cm - 68kg, 평가단 외모 평가 트리플 에이, 정성 평가 B 이상, 뷰티코리안 인정"
"조아름, 169cm - 53kg, 평가단 외모 평가 더블 에스, 정성 평가 A 이상, 뷰티코리안 인정"

지극히 당연한 본능을 2030년대의 대한민국은 정책적으로 이용하기로 했다. 대통령 김박스 대선공약 "뷰티 코리아" 말이다.

"미남미녀는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즐겁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그들이 먹고 마시고 입고 즐기는 모든 것은 모두를 선망하게 하며, 그들의 행동은 유행의 원천이 됩니다. 미남미녀를 바라보면 볼 때마다 3초씩 수명이 늘어난다는 과학적인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인적자원을 최대한 활용할 필요와 의무가 있습니다. 이 나라는 기름 한 방울 나오지 않는 나라입니다. 부족한 자원은 수입을 하고, 있는 자원은 철저히 활용해야 합니다!"

미남미녀의 행동은 유행이 되고 경제효과를 불러 일으킨다. '더 나은 인간들'과 닮고 싶고, 그들처럼 되고 싶어하는 이들이 그들의 소비를 따라하고, 행동을 따라한다. 유인원 시절부터 인간의 본능이다. 그들의 존재는 주변을 즐겁게 하고, 세상을 행복하게 만든다. 그들은 외부에서 우리 사회로의 유입을 높이며 절망적인 출산율로 몰락해가는 한국의 관광자원이 되고 이민자 유입의 동력이 되며 출산율 전환의 실마리가 된다. 그들은 우리 사회의 보물이었다.




뷰티 코리아




"아후 피곤해"

국가지정미남 이하 '뷰티 코리아' 한민구는 오늘도 11시간의 의무 외부행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의무 활동시간 9시간에 추가활동 두 시간 분. 아마 이번 달 급여는 천만원을 돌파할 듯 하다. 재작년에 뷰티 코리아 심사에 떨어졌을 때 얼마나 상심했는지 모른다. 편의점 알바를 하면서도 매일 아쉬웠다. 그리고 작년, 코수술 대성공으로 뷰티 코리아에 선발된 그다. 몸은 고되지만, 그 이상의 보상이 있다.

[ 미남미녀의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자원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방구석에 틀어박혀 그 미모를 낭비한다고 생각하면 저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습니다 ]

대통령 당선연설의 그것처럼 뷰티 코리안들은 하루에 의무적으로 9시간 이상의 외부활동을 해야했다. 그들의 활동은 GPS 추적을 통해 기록된다. 월 급여는 1년 차에 1천만원, 2년 차에 800만원, 3년 차부터는 750만원으로 고정이다. 물론 근무 외 수당도 지급되며 번화가가 아닌 지방이나 외진 곳으로 움직일 때에는 약 5%의 추가수당도 주어진다. 서울이나 지방이나, 도시나 촌이나 미남미녀를 보면 행복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니까, '인적자원'은 잘 활용되어야만 했다.

"아…"

샤워를 하던 한민구는 얼굴이 조금 탔음을 느꼈다. 선크림을 그렇게 발랐지만, 가을 햇살에 하루 10시간도 넘게 바깥을 돌이다니는데 얼굴이 안 타는게 더 이상하다. 내일은 청담에 있는 피부과에 잠깐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무료다.

[ 미남미녀에게는 화끈한 급여 지급은 물론 물론, 모든 식사와 피부, 체형 관리 비용도 무료로 제공될 예정입니다 ]

아무리 식대가 무료라고 해도, 관리를 해야하니 식사를 마음껏 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관리비용은 공짜니까 좋다. 피트니스 클럽이나 병원도 자기 병원에서 뷰티코리안들을 관리한다고 하면 위신이 서니 서로 유치하려 경쟁이다. 옷도 어차피 "안녕하세요, 저 뷰티코리안인데요…" 하면 보통은 협찬이 된다.

"좋구만"

침대에 누워 그는 노곤함을 느낀다. 곧 잠이 올 것이다. 고된 하루지만 역시 즐겁다.



임서아는 오늘도 운동 중이다. 이대로라면 올해 말까지 65kg까진 뺄 수 있을 것 같다. 성공적인 추세다. "니가 살 빼서 뭐할건데. 뷰티코리아 하려고? 아서라. 어글리코리아 제도 신설되는거 아닌지나 모르겠다. 니 병원 영업질에 넘어가는거야" 라는 큰 오빠의 독설을 뒤로 하고, 그녀는 자신의 비만가족들과는 다르게 살고자 마음 먹었다. 식단 관리와 운동으로 이미 7kg 감량에 성공했다.

[ 가정 내 소비지출에서 교육 항목을, 뷰티 항목이 올해 처음으로 초월했습니다 ]

그녀는 런닝머신에 달린 TV의 뉴스보도를 보며 공감했다. 당장 서아 그녀 자신만 해도 작년까진 핸드크림 하나 사는 돈 아껴가며 공무원 시험에 올인하던 신세 아니던가. 하지만 시험은 떨어졌고, 그녀는 과감히 삶의 궤도를 바꾸기로 결심했다. 이미 상담도 받고 왔다.

"어머, 보세요. 지금 엑스레이에 찍힌 골격을요. 이게 서아 고객님 사진이고, 이게 작년 뷰티코리아 트리플에스 등급 받으신 저희 고객님 뼈 체형사진이거든요. 지금 서아 고객님은, 귀중한 자기 자신의 외모를 낭비하고 계신 거나 마찬가지에요. 저희 병원에 연계된 피트키스 클럽, 식단 관리사, 뷰티 스쿨 연계하시면, 저희가 30% 저렴하게…"

서아는 다시 한번 다짐했다. 당연히 1년 안에는 힘들겠지. 25년을 키워 온 살이니까. 하지만 내후년까지는 반드시 뷰티코리아에 도전할 거라고.



처음에는 여론의 강력한 비난에 직면했다. 외모지상주의라며 전 세계적인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대통령은 굳건했다.

[ 저를 욕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이 정책은 향후 우리 민족의 운명을 바꿀 정책입니다 ]

매번 랜덤으로 선발되는 국민투표단에 의해 뽑힌 1기 미남미녀들 3만 명이 전국 번화가는 물론 동네를 누비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눈이 즐거워졌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잘생기고 예쁜 사람들이 많았나?'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항상 어딜가도 미남미녀들이 북적대며 돌아다니면 그들을 보기 위해 길을 나서는 사람, 또 나서는 사람들을 따라 나서는 사람들이 생길 테니까.

"진짜 장사할 맛이 나!"
"돈도 돈인데 어휴, 나도 사람인데 그저 즐겁지!"

상인들의 매출도 수직상승했다. 6개월 뒤 이뤄진 2기 신청에는 무려 120만 명의 참가신청이 쏟아졌다. 그들에 의한 뷰티 시장의 폭발적인 성장이 있었고, 사회적으로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과 압력이 증가했다.

"선배님도 한번 나가보시죠"
"이 나이에 무슨"
"월 천만원인데 이게 연금복권보다 낫죠"

4기부터는 중장년, 노인 대상의 선발도 늘어났다. 꽃중년을 넘어 꽃할배, 꽃할매 뷰티코리아도 선발되었다. 더이상 노인들은 시들어가는 삶이 아니었다.

"한쿡, 정말 죠와요"
"최고의 나라, 한쿡!"

대통령은 말했다. '부족한 자원은 수입을 해야한다'. 석유와도 같다. 우월한 몸매, 완벽한 외모를 가진 뛰어난 인재들을 수입했다. 그네들 입장에서도 '오직 외모 하나만으로' 안정적인 고소득과 그 사회의 선망을 보장받을 수 있다면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전 세계 미남미녀들의 한국행 러시가 이어졌고, 뷰티코리아 선발에 대한 해외인원 참여인원은 무려 200만 명을 돌파했다. 물론 선발되면 그들에게는 한국 국적이 주어졌다.

"BEAUTY KOREA"

한국은 이제 전 세계에 '아름다움의 나라'로 통했다.



"외모지상주의 꺼져라!"
"시대착오적인 망국정책"
"FUCKING 'B' KOREA!"

당연히 시대착오적 정책과 흐름에 반발하는 자, 시위에 나서는 자들도 많았다. 전 세계적인 비난의 수위는 그저 높아만 갔다. 통일된 미적 기준에 대한 강요와 나날히 심해지는 사회적 압박, 아름다움에 집착하게 만드는 사회에 대한 내부적인 피로도 높았다.

"외모지상주의 정부는 물러가라!"

시위는 격렬했다. 김박스 대통령의 사진은 매 시위마다 불탔고 회의론도 심했다. 예산 압박도 상당했다. 아무리 뷰티 코리아로 관광수익이 늘었다고 해도, 70만의 고소득 준 공무원 조직을 유지한다는건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불과 4년 만에 국가부채가 그 이전 정부의 3배로 늘었다.



하지만 본디 우직하게 걷는 이에게는 동료가 생기기 마련이다. '아름다움의 강요를 거부하는 자들에 오히려 피로를 느끼던' 사람들이 점차 김박스 대통령의 주장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공부를 노력해서 대학에 가면 모두가 찬양하고 칭찬을 합니다. 그런데 외모를 노력하면 골이 비었다고 뒤에서 비아냥 거리기나 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너무나 쉽게 발견하곤 합니다. 과연 정말 일그러진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누굽니까?"
"아름다움은 권력입니다. 우리 모두가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외모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나쁜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은, 우리 모두의 본능이 악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톡 까놓고 말합시다. 살 좀 빼고, 관리 좀 하고, 피부나 스타일 좀 관리하자는 말이 정말 그렇게 듣기 싫고 귀찮다면, 그냥 그렇게 살면 됩니다. 근데 사실 '그런 외모'를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누굽니까? 바로 그런 본인 아닙니까?"

어쩔 수 없었다. 멋진 외모를 가진 선남선녀의 말과 행동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은 자연의 이치였다. "미친 나라"라고 손가락질 받던 대한민국의 평판에 점차 "자기주장 확실한 나라"라는 옹호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김박스 대통령의 대한민국은 그저 여론이 바뀌기만을 기다리는 나라가 아니었다.



"아름다움은 권력입니다. 그리고 권력은 절대로 가만히 갖고만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을 활용할 때 비로소 힘이 되는 것입니다"

전 세계에서 수집한(?) 70만 명의 미남미녀들은 한국의 핵심적인 인적자원이었다. 그 중에서도 국정원 특채로 비밀리에 선발된 SSS급 3,000명의 존재는 더욱 특별했다. 그들은 한국 정부를 위한 스파이가 되기도 했고, 세계 최우수 인재들을 한국으로 끌어오는 헤드헌터가 되기도 했다. 관광자원이었고, 외교적 카드였으며 무기였다.

"혐한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던 자선당 다니오카 간사장이 최근 한국계 여성과의 불륜으로 정치적 위기에…"
"세계적 IT기업 비전월드의 오너 쟈넷 로즈가 한국인 남성과 결혼을 발표하며 한화 8조원 규모의 투자를 한국에…"
"미 의회의 W-22 한국 도입 허용은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최우방국 파이브스타즈에도 판매하지 않았던…"
"사우디아라비아는 아시아 오일 허브로 한국을 지목하여…"

물론 그런 미남미녀를 활용한 로비와 첩보작전이 어디 한국에만 있는 것이겠느냐마는 확실히 한국은 조금 특별했다. 중국이나 러시아와 달리 친서방국가라는 비교적 안전한 국가적 배경, 한류 영화와 K-POP 열풍으로 어느 정도 조성되어 있던 '한국에 대한 친근하고 매력적인 대외적 이미지' 그리고 무엇보다 '아름다움에 미친 나라에서도 고르고 고른 인재'라는 이미지는 대한민국 국적의 선남선녀의 매력을 전 세계 상위 권력층에게 '보다 더 특별한 무엇'처럼 느껴게 만들었다.



하지만 빛이 있다면 반드시 어둠도 있기 마련이고, 두 명의 미인 곁에는 예닐곱명의 평범한 사람과 두엇의 못난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빛나는 둘에 대한 여덟의 선망은 아주 약한 선동에도 질투와 혐오로 변질되기 쉬운 것이다. 또 아무리 정부 차원에서 그들까지 아름답게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을 해도, 절대로 개선되지 못하는 부족함은 존재할 수 밖에 없었다. 

"최저외모제도"

때문에 정부는 아무리 '아름답지 못한 외모를 가진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이 그로 인해 도를 넘는 불이익을 받지 못하게 하고자 노력했다.

"이 정도로 낮은 콧대를 가지신 분은 보건소에서 정부지원으로 성형수술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유전적 장애를 가진 시민을 향해 조롱을 한 뷰티코리안 김승훈씨에 대해, 법원이 이례적으로 징역 4년의 선고를 내렸으며…"
"평가단 외모 G등급 이하에 대한 의류 바우처 한도가 다음 달부터 50만원으로 상향조절될 예정이며…"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뷰티 코리아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하위 20%의 불만은 깊어만 갔다. 아무리 평생을 노력해도 안되는 것은 안되는 법이니까. 타고난 체형의 한계, 키의 한계, 크기의 한계, 탄력의 한계, 노화 속도의 차이 등 '유전자 단계에서의 한계'에서 출발한 한계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로 인한 격차를 그저 깊이 절감하게 만들 뿐이었다.

"안다. 우리의 목소리가 당신들에게 어떻게 들릴지,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안다. 하지만 원한다. 당신들이 누리는 평범한 삶의 행복을"

그들의 목소리에는 절절한 분노와 간절함이 있었다. 그들의 외침은 울림이 있었다. 정부는 그들의 외침을 존중하여 뷰티코리아에 '미적 다양성 존중'을 이유로 다양한 부문의 미인 선발 항목을 새롭게 만들었다. 빅사이즈, 슈퍼스키니, 버튼아이, 커브드넥 등 새로운 뷰티코리아 기준이 생겨났고, 그들에게도 뷰티코리아와 같은 급여가 지급되었다. 당연히 그것만으로 해결될 일이 절대 아니었건만, 그들의 의견은 금방 분열되었다.

"아 억울하면 니들도 나처럼 더 못생겨지던가"
"꼭 어딜가나 어중한한 새끼들이 더 난리야. 아니 겁나 잘생기던가, 겁나 못생기던가, 나라가 길을 줬잖아.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사람이 사회 어디에서 성공하는거 본 적 있어? 억울하면 더 못생겨지던가!"

불만의 수위는 금새 잦아들었다. 뷰티코리아에 대한 가장 크리티컬했던 저항은 그렇게 금새 묻히고 말았다. 대통령 김박스의 뷰티 드라이브는 더욱 더 강화되었다.



그렇게 뷰티코리아 정책은 결과적으로 5년 만에 21세기 한국의 대전환을 이루는데 성공했다.

"그러한 결과로…"

꼭 뷰티코리아에 선발된 이들이 아니더라도, 그들에 영향을 받은 전국민이 외모 꾸미기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 관계로 전국민적 외모 레벨이 불과 5년 만에 급격히 향상되었으며 결혼 및 임신, 출산율이 급격히 올라갔다. 탐나는 것이 눈 앞에 있다면 갖고 싶어지는 것이 사람 마음이니까. 한국은 그야말로 전 세계 관광과 뷰티, 패션 산업의 메카가 되었으며 '아름다움에 올인하는' 풍조는 단순히 사람의 외모 뿐 아니라 산업의 디자인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디자인 경쟁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마치 1960~80년대 일본의 전자제품들이 전세계적으로 '일본의 기술'에 대한 환상으로 큰 매리트를 가졌다면, 이 시기의 한국 제품들은 디자인적으로 큰 강점을 가졌다.

"한국인, 예뻐요"

국뽕 채널 뿐 아니라 전 세계의 '글로벌 컬쳐' 주제에서 한국에 대한 외모찬양은 이제 지겨울 정도였다. 주변 동아시아 국가는 물론 전 세계에서 관광객이 매년 2억이 넘는 인원이 찾아왔다. 그저 '외모 관광'을 하기 위해.

"저는 이제 제 소임을 다하고, 다시 제가 있을 곳으로 돌아갑니다"

패러다임의 전환은 이루어졌다. 대한민국의 새로운 먹거리는 확보되었고, 그저 망국을 향해 달려나가던 대한민국의 현황은… 여전히 다양한 치명적 문제를 보유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일부 완화된 측면들이 있었다. 김박스 대통령은 성공적인 소방수였다. 그는 성공리에 여당 후보에게 차기 대권을 넘기고는 임기를 무사히 마쳤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대통령님"
"모실 수 있어서 정말 영광이었습니다"
"부디 건강하시길 응원합니다"

세계적 모델이자 배우들이기도 한 각부 장관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고향으로 향하는 그는, 차에 오르기 직전 차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 조금 씁쓸한 미소를 띄우다가 다시 모두에게 손인사를 하고는 차에 올랐다. 한참동안이나 말이 없던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박기사 님"

이제는 '전직 대통령'이 된 김박스. 그는 언제나처럼 존칭으로 기사에게 말을 걸었고, 기사가 "네" 하고 대답을 하자 물었다.

"대한민국은 이제 자타공인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었고, 지난 5년간 저는 그 나라의 수장이었습니다. 과연 저는 그 나라의 수장으로서 자격이 있었던 인물이었습니까?"

기사는 힐끗 룸미러를 통해 전직 대통령과 눈빛을 나누었다. 김박스의 질문은 진지했고, 그의 눈빛은 간절하기까지 했다. 자신의 지난 5년, 아니 지난 모든 정치생활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기도 한 질문. 하지만 사실 누가 보아도 김박스의 외모는 D 이상을 주기 어려웠다. 외모 때문에 평생 모쏠로 산 대통령 아닌가. 

한참이나 대답을 고르던 박 기사는, 이제 슬슬 침묵이 어색함이 되기 직전이 되어서야 입을 열 수 있었다.

"아니요, 절대"

그 말에 대통령은 피식 웃었고, 곧이어 쿠쿠쿠 하는 웃음을 넘어 크게 웃기 시작했다. 운전석의 박 기사 역시 한참을 웃었고, 곧이어 대통령은 언제나 즐겨 듣던 노래를 부탁하며 곤히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지난 5년 간의 피로를 씻어내기엔 한참이나 부족한 잠이었지만,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노인이 행복한 꿈을 꾸기에는 충분한 휴식이었다. 단지, 매번 이 노래를 그렇게나 틀어달라고 부탁하는데도 끝끝내 자신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하는 박 기사에게 아주 조금의 서운함을 느낄 따름이었다.

- 끝 -



"오토바이 때문에 헤어졌어요"

승남의 말에 김 과장도 웃었다.

"그렇다니까, 보통 여자들이 남친 취미 중에 제일 싫어하는게 바이크잖아. 위험하다고."

승남도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승남의 기억은 8개월 전의 어느 날로 돌아간다.




"쓰읍"

선진물산 건 불합격 메일이다. 혹시나 해서 헤드헌터한테 연락 왔던 IGM건 물어봤더니 역시나 불합격이란다. 지난 일주일간 아홉군데에 이력서를 넣었는데 두 군데 불합격, 나머지는 감감무소식. 나이 서른여덟의 백수는 입맛이 쓰다. 집에서 보내 온 홍삼포 때문만이 아니다. 당연히. 은영이 집에서도 슬슬 압박 심해지는 것 같은데, 당장 백수 새끼가 뭔 결혼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오후 1시 반, 점심시간 끝나고 돌아와 지금 한창 바쁠 때겠지. 전화를 하려다가 슬그머니 내려놓는다.

"핑계는 좋네"

혼자 중얼거린다. 사실 요즘 그녀와의 전화도 부담스럽다. 할 말도 없다. 일자리는 어떻게 되어가냐, 오늘 하루종일 뭐했냐, 내일은 뭐할거냐, 근데 나 집에서 슬슬 결혼 이야기 하는데 등등. 하나같이 부담스러운 말들 뿐이다. 그렇다고 친구들한테 전화하면 집 대출금 때문에 걱정이다, 차 괜히 샀다, 내년에 미국 본사 발령 난다 등등 부러운 이야기들 뿐. 나이는 먹을만큼 먹었는데 10년 전과 비교해서 내 손에 쥐고 있는게 없다. 내 장미빛 미래는 다 바래버린 것만 같다.

"아니다 아니다"

신경 좀 돌리려고 게임이나 한 큐 돌릴까 했는데 그냥 나도 모르게 마우스에서 진저리를 치며 손을 떼게 된다. 갑자기 영이가 소리치는 환청이 귀에서 들릴 것만 같다. 쓰읍. 다시 침대에 벌렁 누워 인터넷이나 보려니까 형이 톡을 해왔다. 생일 톡 선물을 보내도 쿨하게 씹는 아재가 왠일로 톡인가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

"어, 웬일이야. 어? 바이크? 아 크로스 커브. 어어, 알지. 그거 내가 구해다 준거잖아. 어. 레알? 진짜? 에이, 내가 돈이 어딨어. 백순데. 어? 진짜? 진짜로? 헐! 아, 어. 그럼 조심히 타야겠네. 완전 마실용으로. 어어, 오케이. 그럼 없는 돈이라도 마련해봐야지. 어어, 그럼 지금 바로 가면 돼? 어 형 고마워 바로 갈께"

검은 수염의 산타클로스, 내 호적메이트 노승철이 좋은 선물을 베풀었다. 간다 크로스커브 13년식. 진짜 존예롭다. 나한테 왜 주냐니까 형수 눈치 때문에 맡겨놓는 거란다. 절대로 주는거 아니고 몇 년만 맡아 놓으라는데 그게 버리는거지.

"어후"

근데 진짜 거의 십 년 만에 타서 그런가, 상태가 별로라서 그런가. 2시간 몰고 왔다고 가랑이가 뻐근하다. 기분좋게 지하실에 세워놓고 시계를 보니 저녁 5시 40분. 은영이의 연락은 오늘 하루종일 없다. 쩝.

"밥이나 먹을까"

집 앞 왕돈까스 집으로 갔다. 오늘 첫 끼다. 먹는 것도 없는데 배는 왜 나오는가. 한 끼 든든하게 배 채우고 집으로 돌아온다. 여전히 은영이 연락은 없다. 아까 바이크 타고 오기 직전에 보낸 "언제 끝남?" 메시지의 1은 그대로다. 바쁜 듯 하다. 괜히 마음이 무거워진다. 집으로 돌아와 게임을 켠다. 솔직히 별로 땡기지도 않지만 하게 된다. 답답하다.



"어, 지금 끝난거야?"

저녁 10시 16분, 은영의 전화가 걸려왔다. 아까 7시 반에도 전화했지만 안 받길래 야근하려나 했는데 아까 퇴근은 6시 반에 했단다.

"엥? 전화 왜 안 받았는데"

무거운 은영의 목소리에 내 목소리는 애써 밝아진다. 하지만 은영은 그저 "그냥, 피곤해서" 라는 풀 죽은 목소리 뿐이다. 나는 답답해 뒤질 것 같은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뭐라도 대화꺼리를 찾으려다 "아참, 나 오늘 형이 바이크 줬어. 그, 너도 예전에 형 인스타에서 봤던 노란 그 바이크 있잖아" 라며 대화 주제를 잡았다.

"어?"

하지만 은영은 차가운 분노가 은은히 실린 목소리로 "오토바이? 그걸 왜?" 하며 묻더니, 그냥 형이 처치곤란이라 잠깐 받아왔다고 대답하자 분노를 쏟아낸다.

"그거 탈거야?"

잠시 망설이다 "아니 그냥, 가끔 마실 나갈 때…" 하고 대답했다. 은영의 톤이 높아진다.

"오빠, 요즘 힘들 거 같아서 더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오빠 취직 안 할거야?"

나는 말이 없어진다. 하지만 은영은 잠깐 쉬더니 말을 쏟아낸다.

"그래 취업 쉽지 않겠지. 근데 요즘 오빠 하루종일 뭐해? 그냥 이력서 쓴다, 뭐 그거 말고 하루종일 뭐해? 나 만나면 맨날 잠이나 잘라고 하고. 그게 다잖아. 우리 데이트다운 데이트 해? 그리고… 하… 엄마가, 아니야. 여튼 모르겠어. 나도 답답하고 힘들어. 근데 오빠는 지금 오토바이… 도대체 왜 그러는거야. 지금 그럴 때야?"

순간 답답함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애써 어렵게 말을 이어나간다.

"아니이, 나도 막 그거 열심히 탈라고 그런게 아니라, 그냥 형이 잠깐 보관 좀 해달라고 해서. 뭐 가지고 있으면 잠깐 마실 다니기도 좋고, 바람 쏘이기도 좋고 그런거야. 너도 나랑 바이크 타는거 좋다고 했었잖아, 옛날에"
"오빠"

나도 숨이 가빠진다. 젠장.

"나도 힘들어. 그래, 너 회사 다니는거 지금 힘든거 알겠는데, 나도 지금 힘들다고. 벌써 몇 달째 노는건지 모르겠어. 주변 친구들은 다들 잘 되는데 나만 제자리에 멈춰있는 것 같고, 너 힘든거, 너랑 결혼하는 것도 지금 내가 일자리도 없으니까, 부담스럽…"
"뭐? 나랑 결혼하는게 부담스럽다고?"
"아니 그런 말이 아니잖아. 나 지금 백수잖아. 백수인데 결혼 이야기를 내가 뭐 어쩔 수도 없는거고"
"내가 오늘 결혼 이야기 꺼냈어?"
"아 쫌! 꼭 오늘만이 아니래도 말이야"

서로 말소리가 높아진다. 헛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다. 목이 탄다. 전화를 받은 채로 생수 한 병을 따서 꿀렁꿀렁 마신다. 하지만 잠시 말이 없어졌던 은영은 다시 입을 연다.

"나도 오빠 요즘 힘든거 알아서 뭐라고 하고 싶지 않은데, 나도 힘들다고. 그래도 그냥 다 넘어갔어. 오빠 요즘 집에서 게임만 하고 빈둥대는거? 괜찮아. 힘들게 일한거 알아. 잠깐 쉴 수도 있지"
"나 빈둥댄 적 없는데"
"오빠!"
"아니 아닌건 아니라고. 내가 뭔 게임을 그렇게 했다고 그러는거야"

안다 나도. 이 흐름에서 굳이 태클 걸 필요 없다는거. 하지만 참기가 힘들었다. 그냥 이 상황 좋게좋게 넘기고자 태클 안 걸면 나는 결국 은영의 머릿 속에서 '집에서 빈둥거리며 게임이나 죽어라 하는 한량'으로 남을 뿐이다. 아닌건 아닌 것이다.

"오빠 저번에도 집에 가면…"
"아 진짜. 그럼 너 우리 집 세 번 왔을 때 게임하는 모습 세 번 봤다고 내가 게임 돌이면, 너 옷 사는거 내가 열 번 넘게 봤으니 넌 쇼핑중독자야?"

결국 유치한 말싸움이 되어간다. 나이는 먹었는데 치졸한 자존심 싸움으로 되어버린다. 한번 굽히고 넘어갈 수도 있지, 그래. 근데 나도 지쳤다. 내 마음도 간절하지 않다. 너는 더욱 그렇겠지. 내가 얼마나 한심하게 보일까. 싫으면 떠나도 좋다. 너 속으로는 너 자신이 아깝다고 생각하잖아. 서로 답답하고, 어이없는 마음에 말이 사라진다. 애써 먼저 내가 다시 입을 연다.

"내가 말이 좀 그렇긴 했는데, 나도 네 말이 서운했다는 이야기야. 그냥 지금의 이야기만 하자. 나 그래, 오늘도 불합격 메일 받았어. 그리고 형도 자기 딴에 나 생각해서 바람이라도 쏘이라고 바이크 줬는거 아닌가 싶어. 너 싫으면 걍 나도 안 탈게. 그럼 되잖아"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는게 아니잖아"

그 이야기가 아니면 뭔 이야기. 뭐? 다시 결혼 이야기라도 하자고? 나 백순데 결혼 이야기를 해?

"무슨 이야기를 하자는건데"
"됐다"

맞구만. 나는 어렵게 입을 연다.

"나 지금 백순데 결혼을 어떻게 하냐고"
"누가 내일 당장 하자고 하는거야?"
"아니 내일 당장 아니더라도, 당장 내가 백수인데 뭔 이야기를 어떻게 하냐고. 상견례 자리에서 백수입니다, 하고 인사해?"
"오빠 뭐 평생 놀거야?"
"아니 그 말이 아니잖아. 최소한 나도 자리라도 잡아야 뭘 다리라도 뻗을 자세라도 좀 잡지. 너도 뭐가 그렇게 급한데"
"내가 왜 이러겠냐고!"

압박이 내 생각보다 더 거센 모양이다. 근데 요즘 엄마들이 그런가? 다들 결혼 안 하고 못하는게 대세 아닌가? 후, 그래 여자나이 서른여섯, 본인보다 부모님 입장에서 더 초조한 것도 이해가 안 갈 것은 아니다. 그래도 내가 못하는걸 어쩌란 말인가.

"그럼 내가 뭘 어째야 되는데. 너 데리고 간다고 뭐 부모님한테 확인서라도 써 드려야 돼?"
"오빠 말 조심해"
"아니, 나도 답답해서 그래. 내가 뭘 어쩌면 되냐고"
"됐어. 그냥 접어. 오빠랑 결혼 안 해. 그럼 되잖아. 나도 더이상 안 졸라"
"아니 그런 말이 아니잖아"
"그런걸 꼭 말로 해야 돼? 확신이 필요한 거라고"
"당장 내 다음 달 카드값도 확신을 못 하겠는데 백수가 결혼에 대한 확신을 어떻게 가져!"

그냥 말하다가 답답하고 화가 뻗쳐서 빽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은영의 목소리는 방금 전과 달리 차분해졌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한다.

"오빠 그냥 우리 헤어지자"
"뭐?"
"헤어져"

그리고 은영은 전화를 끊었다. 두어번 전화를 더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다음 날에도 전화를 받지 않았고, 그 다음 날도 마찬가지. 그 다음에는 나도 전화하지 않았다. 일주일 후 다시 전화를 했고, 우리는 두 번 더 만나서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지만, 그때도 나는 백수였고 상황이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8년 인연의 허무한 마지막이었다.




"그럼 노 과장도 바이크 탄다고 하니까 여자친구가 헤어지자고 했던거야?"

승남은 잠시 말을 뜸들이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바이크 때문에 헤어졌죠. 정말 싫어하더라구요"

그래, 바이크 때문에 헤어진거다. 은영과 나는. 그게 내가 유일하게 납득할 수 있는 이유다. 물론 그 바이크는 그 다다음 달의 카드값이 되어 사라졌지만 말이다.

- 끝 -

가면 : 5화 [장편] 가면

누군가 말했던가.

"개가 똥을 끊지"

그랬다. 개가 똥을 끊을 수는 있어도, 난봉꾼은 바람을 끊을 수 없다. 바람은 일종의 자극이다. 단순히 '일 더하기 일은 이'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연애를 배신하는 배덕감, 바람을 피우는 순간의 짜릿함, 그녀가 잠이 든 이후 뒤늦게 몰려오는 죄책감, 아침 저녁으로 다른 여자를 상대한다는 수컷으로서의 만족, 그 와중에 '그 누구도 나를 쉽게 놓지는 않겠구나'에 대한 안도감, 루즈해졌던 그녀와의 관계가 새롭게 느껴지는 어떤 자극들. 여자 하나 더 하기 하나는 쾌감 수백배다. 내 영혼을 타락시키는 대가로 얻는 수십 배 강한 자극이다. 아침에 가영이랑 자고, 저녁에 아라와 자는 하루는 그 무엇보다 만족스러운 하루니까. 나중에는 '아 한 명 정도… 3.5명 정도가 있으면 정말 딱이겠다' 라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가영아…"

그 더러운 쾌락의 모든 것을 하루 아침의 발각으로 단숨에 정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그때 내 머릿 속을 가득 채운 것은 '밑져야 본전'이라는 어이없는 논리였다. 가영이든 아라든, 설령 누가 헤어지자고 해도, 그녀에게 빌고 달래서 조금이라도 더 만날 수 있다면 이익 아니겠냐는 생각. 게다가 아무리 가영이라고 해도 하루 아침에 나를 정리하기가 쉬울 리 없다. 비록 짐을 싸서 내놓는 등의 행동과 말을 했지만 사랑과 정이라는 것이 어디 그리 쉽게 정리되는 것이던가.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나는 가영의 문 앞에 꽃다발을 놓았다. 오전 반차를 내고, 가영이 출근한 이후 그녀의 집에 들어가 집정리를 다 해놓기도 했다. 몇 번이고 용서를 구했다. 애초에 집의 비번을 안 바꾼 것만 보아도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생각보다 쉽게 가영은 나를 용서했다. 사실 나도 나였지만, 그녀 역시 집안 일과 직장 문제로 마음이 많이 힘들 때였다. 또, 아마 그녀도 알았을 것이다. 그녀가 정말 나를 버리는 순간, 나라는 인간은 곧바로 아라에게 가버릴 것을. 아마 그게 죽기보다 싫었을 것이다. 가영 입장에서는. 용서를 해준 가영은 나에게 정말 최선을 다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무렵의 나 역시도 분명 가영에게 조금 더 기울어 있었다.





가면 : 5화





"그거 조심해서 들어야 돼"
"어어"

가영은 내 생각보다 더욱 행동력이 좋은 여자였다. 그 이후 얼마 안 가 집을 빼고 왕십리로 이사를 했다.

"무서워"

뜻밖이었다. 가영은 아라가 무섭다고 했다.

"걔가 우리 집 앞에 몰래 서있다가 나를 찔러죽일 것만 같아. 무서워"
"그래…"

물론 그 시점까지 나는 아라를 여전히 만나고 있었다. 단지 나의 양다리 스킬이 더 교묘해졌을 따름이다.



전화를 두 대를 만들었다. 아무리 용을 써도, 결국 휴대폰 한 대로는 어떻게든 위험의 불씨를 만들기 마련이다. 물론 두 대를 만든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아무리 전화를 해도, 상대가 안 받으면 도대체 어디서 뭘 하는지 의심이 드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어어, 이제 슬슬 나도 저녁 먹어야지. 응. 너도"

정답은 루틴화였다. 인간도 결국은 동물이다. 연락을 하는 시간을 어느 정도 패턴화 시키면, 의례적으로 그 무렵의 연락만 잘 되는 이상 큰 의심은 하지 않기 마련이다. 게다가 몇 차례는 일부러 함정을 파기도 했다. 주말에 본가에 있거나, 혹은 늦게 야근을 하는 날 일부러 연락을 받지 않다가, 아라나 가영이 화를 내면 그제서야 실시간 인증샷을 보내며

"사람이 깜박하고 전화 못 받을 수도 있지, 제발 사람 의심 좀 하지 말라고!" 하며 버럭 화를 내기도 했다. 애초에 가영도, 아라도 잘 알고 있었다. 나라는 쓰레기는, 분명 헤어지는 순간 다른 여자에게 가서 만나자고 할 것이라는 것을. 그러니 쉽게 놓지도 못했으리라. 약이 올라서. (물론 나중에 질리게 되면 "그냥 차라리 너 가져" 하고 손을 놓을 수도 있겠지만, 당시에는 둘 다  그러기에 아직 나에 대한 미련이 남은 시기였다)

증거가 남는 것은 철저히 피했다. 바람은 항상 대수롭지 않은 작은 증거 때문에 걸린다. 작은 선물, 메모 한 장, 티켓, 영수증, 쓰잘데기 없는 사소한 문자 하나, 카톡 메세지 하나 등등. 진작에 찢어서 밖에 내버렸으면 될 일을, 어설픈 집착, 쓸데없는 미련으로 붙들고 있다가 며칠 동안의 죽네 사네 하는 지랄 같은 싸움으로 번지기 마련이니까. 수많은 삽질 끝에 주의력은 키우고, 미련은 없앨 수 있었다.

어설픈 동정 따위는 철저히 금물이었다. 난데없는 보상심리로 잘해주는 일 따위는 '나 지금 바람 피우고 있어'라는 인증과도 같으니까. 기억력도 좋아야 했다. 임기응변도 중요하다. 때때로 헷깔려서 헛소리를 할 때면 그것을 그럴싸하게 때워야 하기도 했다.

뭐 그래도 항상 완벽할 수는 없었다.

"아 이거 예전에 그랬던거야. 아 이게 내 가방에 왜 있는데 씨발"
"무슨 예전에 그런거야. 이거 지난 달에 나온건데. 제조일자를 봐"
"아 아니라고! 내꺼 아니라고. 니가 넣은거 아냐?"
"하! 방금 전에는 예전에 그런 거라더니, 이젠 니 것이 아니다?"
"아 진짜 미치겠네. 없는 말 지어내지 말고. 분명히 말하는데, 난 이거 몰라. 내 것도 아니고. 준호건가? 준호한테 전화 해볼께"

…그녀들이라고 어디 병신이라서 속아 넘어갔겠는가. 그냥 단지 믿고 싶었을 뿐이리라. 저 쓰레기가, 이미 몇 번이나 뒤통수를 친 쓰레기가, 제발 이번만큼은 아니길 하며 애써 모른 척, 정말 저 말도 안되는 주장을 그냥 믿고 싶어 믿는 수준에 이르렀을 뿐이리라. 아슬아슬한 연애는 계속 이어졌다. 나는 데이트를 할 때에도 수시로 화장실을 드나들어야 했다. 몰래 전화를 했어야 하니까.

"어, 나 원래 속 안 좋잖아"

그리고 나는 최대한 아라와 가영의 데이트를 철저히 다른 곳에서 했다. 아라와 강남에서 놀았다면, 가영과는 홍대에서 놀았다. 가영과 백화점 쇼핑을 하며 놀았다면, 아라와 놀이공원을 갔다.

"요즘…너 잘하는 것 같아"

역시 섹스는 멘탈 스포츠다. 연애 상대의 기분을 살피며, 혹시 만족하지 못할까 봐 내심 긴장하고 쫄리는 섹스가 아니라 순수히 내 쾌락 중심의 주도적인 섹스. 그 덕분인지 나의 잠자리 실력 역시 일취월장했다. 다른 누군가에게 내심 자랑하고 싶었을 정도로.



"이런 말, 내가 할 말이 아니긴 한데… 나는 그래도 아라 걔가, 어쩌면 우리 관계에 적당히 좋은 긴장을 불러온 측면도 있다고 봐"
"뭐?"

그런 연애가 몇 년 단위로 이어졌다. 종종 모든 것이 뒤집어질 기세로 싸우긴 했지만 또 아물기도 잘 아물었다.

"싸우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서로의 소중함을 걔를 통해서 깨닫게 됐잖아"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마라"

…그런 미친 발언을 내 입으로 꺼낼 정도로, 나와 가영의 관계는 많이 상처가 아물었다. 물론 그 가운데 싸우기도 크게 싸운 적도 많았다.

[ 가영아, 내가 모두 잘못했다. 이제 그만하자 ]

돌부처도 돌아앉게 만드는 것이 바람이라고 하던가. 때때로 "도대체 왜 그랬는데!"하는 가영의 히스테리가 극에 달할 쯤이면 나도 그녀도 한없이 지치기도 했다. 한번은 내가 모든 짐을 싸서 본가로 돌아간 적도 있었다. 그날 오후, 가영은 슬리퍼만 신은 채로 왕십리에서 수원까지 택시 타고 울며 불며 찾아오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가영은 분명 평소의 가영이 아니었다. 항상 똑부러지고, 콧대 높고, 자신만만하던 그녀가 아니었다. 그저 사랑하는 남친과 영영 헤어지게 될 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한없이 나약해진 소녀였을 따름이었다.

"미안해, 알았어, 다시는 너 버린다 어쩐다 안 할께. 사랑해. 정말 사랑해. 정말 미안해"

작아진 그녀를 품에 안고 두 손 꼭 잡은 채로 그녀의 작은 새 원룸에서 끌어안고 잤다. 밤이면 다시 어른이 되어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다. 다시 사이가 안정되고, 우리는 여행도 자주 갔다.

타이페이, 세부, 오사카…

그리고 그 모든 순간에 아라는 뒷전이었다.

'미안해'

처음부터 끝까지, 아라는 항상 뒷전이었다. 왜냐하면 이해해주는 여자니까. 그래도 용서해 주는 여자니까. 내가 못된 짓을 해도, 나쁜 말을 해도, 뻔히 의심되는 짓을 해도, 그럼에도 아라는 나를 이해해주었으니까.




"사실 나는, 너를 걔한테 뺏어온 다음에… 너랑 결혼하기로 하고, 결혼식 전날에 너와 그 년이 한 짓을 다 폭로하고 자살하려고 했어"

언젠가 아라가 한 말이다.

"…왜?"
"난 지는 걸 죽는 것보다 싫어해. 그 미친년한테는 지고 싶지 않았어"

나는 아라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한편으로는 아찔하기도 했다.

"너랑 그 년이랑 하던 지랄들을 생각하면 진짜…"




사실 숨긴다고 숨겼지만, 가영에게 아라를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몇 번인가 들킨 적이 있다. 그때마다 모든 것이 뒤흔들렸다. 사실 가영 입장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 울고 불고 난리 치는 것 이외에도 말이다.

"도대체 내가 뭘 어쩌면 돼?"
"시간을 좀 줘. 너는 나랑 항상 곁에 있었지만, 걔는 나랑 거의 이렇게 몇 년을 넘게 만났는데도 어디 제대로 된 데이트조차 한 적이 없어. 내 세컨이었잖아. 근데 결국 버림받는다고 해봐. 그게 심적으로 납득이 되겠어?"
"그럼 내가 뭘 어떻게 해야 되는데"
"나랑 걔랑 딱 일주일만, 딱 일주일만 같이 있다 올게"
"뭐?"
"정을 떼는 시간도 필요하잖아. 이별여행이라고 생각해 줘"
"미쳤어?"
"그래 미친 소리 맞는데, 걔 입장에서는 이미 미쳐도 할 말 없는 상황이잖아. 내가 잘했다는게 아니라, 그냥 상황이 그렇다고" 

…소중한 남자친구를, 양다리 걸치는 다른 여자에게 보내주는 일. 그런 호구짓을 나는 가영에게 요구했다. 그리고 그 일주일간 나는 아라와 모처럼 둘도 없는 데이트를 즐겼다. 가영과의 연락에 마음 졸이며 데이트 중에 별 병신 짓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마음 편한 일주일간의 밀회를. 물론 처음부터 헤어질 생각 따윈 없었다.

"그래도 부족한거야?"
"딱 일주일만 더"
"마지막이야. 정말 마지막이야. 나도 너무 힘들어. 못 견디겠어"
"알겠어. 정말 마지막이야. 그 이후에는 절대 이런 일 없어. 조금만 이해해줘 가영아"

그렇게 이주일간 나는 아라와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그게 끝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 '무리한 요구'를 난 아라에게도 했다.

"걔가 많이 아퍼"
"아프건 말건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좋든 싫든 7년 넘게 만난 사람이야. 너 때문에 자살한답시고 약물까지 몽창 먹기까지 했어"
"그런다고 사람 안 죽어. 그거 다 쇼야"
"그래도, 이건 아니야. 나 아무래도 걔 곁에서 좀 내가 있어줘야 할 것 같아"

말도 안되는 개소리.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런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해도, 아라는 들어줄 것이라는 것을.

"절대로…절대로 걔한테 사랑한다는 말만은 하면 안 돼. 절대로!"

아라는 몇 번이고 그렇게 주의를 주었지만, 나는 그날 바로 가영의 몸을 더듬으며 사랑타령을 하고 있었다.




몰래하는 양다리를 넘어서, '정을 떼고 오겠다'라는 명분으로 대놓고 허락받고 하는 양다리, 그리고 "이젠 다시 걔 만날 일 없을거야. 믿어줘"라며 다시 몰래하는 양다리. 그 지난한 시간들을 되돌아보니 어언 5년이었다. 나는 1, 2년도 아니고, 두 여자의 인생을 무려 5년이나 뒤흔들어 놓은 것이었다. 두 여자의,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미래를 준비했어야 할 5년을 그렇게 나는 뒤흔들어 놓았다.

물론 매 순간 내 머릿 속에는 '이러면 안돼. 제발 이러지마' 하는 양심의 소리가 울러 퍼졌지만, 도저히 둘 중 하나를 정리할 자신이 없었다. 그 여자 모두 나에게 진심이었으니까. 나도 그 둘에게 진심이었으니까.

"그냥 정 때문이었어", "그냥 솔직히 밤일 때문에 그랬지 뭐" 라는 말로 나는 내 사랑을 스스로 부정했고, 두 사람의 삶을 산산히 짓밟았다. 차라리 불륜이라면… 그래도 한때 사랑했던 사람과 한순간이나마 결혼이라는 골에 도달할 수 있었겠지만, 나는 그저 우유부단과 미욱한 정과 섹스에 대한 집착으로 두 여자의 미래를 그렇게 훼손해버렸다. 그리고 언젠가의 날. 아라는 처연하게 울며 모든 것을 고백했다.


"다 그 년 때문이라고"

아라의 눈빛에서 원망을 본다. 좌절을 본다. 슬픔과 원한을 본다. 한없이 가라앉아 버릴 것만 같은 깊은 어둠을 본다.

"너는 몰랐다고 할 지도 모르겠지만, 그래, 차라리 몰랐기를 바래. 니가 알면서도 가만히 그 년을 그렇게 냅둔거면 내가 너무 괴롭잖아"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그 순간까지도 몰랐다.

"너 그 년이랑 만날 때, 걔가 나한테 직접 연락한거 알아?"
"뭐? 언제?"

무슨 소리야.

"매일. 매일 매일. 무시무시한 쌍욕, 너 내가 입 거친거 알지? 근데 나는 비교도 안 돼. 그 년은 어디서 본 적도 없는 더러운 욕을, 하루에 50통도 넘게 보내고, 너 잘 때 니 자는 사진, 니 옷 벗은 사진, 니가 쓴 콘돔 사진까지 매일 매일 나한테 보낸거 알아? 아냐고"

웃으면서 이야기 하던 아라의 얼굴은 어느새 차갑게 굳더니 눈물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했다. 그녀의 눈물보다, 그녀의 말이 더 당황스러웠다.

"무슨 소리야. 가영이 걔가 너한테 그런 문자를 보냈다고? 정말이야?"

아라는 급기야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정말 몰랐냐, 정말 몰랐냐고"

정말 몰랐다.

"나는 니가 참으라고 해서 참았어. 그 년이랑 한번만 더 싸우고 지랄하면 그냥 둘 다 버리겠다는 니 말, 니 그 말이 무서워서… 아니 그냥 나한테만 두 년 다 버린다면서 그 년한테 가버릴까봐 그게 무서워서 그냥 혼자 꾹 참았다고. 내리 3년을. 알아? 그 년이 온갖 쌍욕과 조롱을 나한테 퍼부을 때, 나만 참았다고."

나는 정말 몰랐다. 모른다고 그 업이 사라지지야 않겠지만.




…내가 아라를 속이고 가영을 속이며 양다리를 즐기고 있다고 생각한 그때. 이미 그 두 여자는 또 다른 지옥 속을 헤메고 있었다.

[ 아우~ 아라야 니 남친은 어디갔니?ㅋㅋㅋ 난 지금 내 남친이랑 데이트 중인데? 아~ 넌 남친없지 참~ㅋㅋㅋㅋ ]

가영은 아라의 연락처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가영은 나 모르게, 아라에게 수도 없이 많은 폭언과 사진들을 보내고 있었다. 가영과 내가 데이트를 하는 날이면 먹는 것, 물건 산 것, 내 사진, 같이 끌어안고 있는 사진, 호텔방 사진 등등을 모두 찍어 문자로 아라에게 보내고 있었다. 심지어는 내 나체 사진이나 사용한 콘돔 사진까지.

[ 난 오늘 내 남친이랑 호텔에서 뜨거운 시간 보냈는데ㅋㅋㅋ 아라 넌 방구석에서 뭐하고 있니? 미친 년아?ㅋㅋㅋㅋ ]


나는 지금도 가영이 아라에게 왜 그런 도발을 했는지 모른다. 내가 아라와 당시 계속 만나고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 문자로 현타 오게 만들어서 아라가 스스로 포기하게 만들려고 한 것인지 아니면 아라 때문에 흔들린 나와 자신의 연애에 대한 분풀이였는지.

"… …"

내 기억 속의 가영은, 그냥 나에 의한 피해자일 뿐이었다. 섹스에 미친 병신새끼를 믿어준게 죄의 전부인 불쌍한 가영. 하지만 사실 그녀 역시도 분풀이의 린치를 아라에게 가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마저도 안쓰러운 일인지 몰랐다. 미친 병신같은 남친 때문에 그녀 역시도 반쯤은 미친 것이나 다름 없는 짓을 하고 있던 것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아라가 당한 고통이 너무 컸다. 가영도, 아라도 가면을 쓰고 있었다. 나 못지 않은 가면을. 서로가 가면 속에서 울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고통과 분노와 증오와 슬픔의 비명을. 그 누가 들어도 미친 년 소리가 절로 나올 미친 짓을 했고, 또 누군가는 그 고통 속에서 정말로 미쳐가고 있었다.




"미안해"

그 끝을 알 수 없는 아득한 심연을 들여다 본 기분이었다. 아라는 이어 말했다.

"니가 가영이를 정리하고 왔다고 했을 때도 처음에는 그래서 못 믿었어. 맨날 가영이 걔는 여전히 나에게 문자를 매일 수십통씩 보냈거든"
"내가 완전히 헤어지고 왔다고 한 다음에도?"
"어"
"그럼 언제부터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어?"

아라는 힘없이 웃었다.

"예전에는 맨날 너랑 같이 있는 인증샷을 보냈거든. 근데 언제부턴가는 그냥 문자만 오더라.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정말 너랑 헤어진게 아닐까 싶더라. 아! 참, 너는 나한테 지금까지 수도 없는 거짓말을 했지만 한번도 통한 적이 없어. 왠 줄 알아? 모두 다 가영이 걔가 니 사진을 보내왔거든. 난 남친이랑 맛있는거 먹는데 니 년은 뭐 먹고 있냐면서."

나도 할 말이 없었다. 그때 아라가 다시 물었다.

"다시 한번 말해봐. 근데 어쩌다가 헤어진거야"

나는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 진짜로 헤어진건 조금 우발적인 이야기야…"

< 계속 >

가면 : 4화 [장편] 가면

즐거웠다. 아침에는 이 여자, 저녁에는 저 여자를 탐하는 생활. 그랬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솔직히 그랬다. 심지어 허무한 원나잇도 아니다. 두 여자 모두와 사랑을 하고 있는 상황. 서로 다른 두 타입의 여자를 만나는 것은 즐거웠다.

단순히 성적으로 즐겁기만 한 것도 아니다. 놀랍게도, 이미 상당한 권태에 빠져들었던 가영과의 관계도 그 무렵에는 나쁘지 않았다. 뭐라고 해야할까…. 마냥 끌려다니기만 하던 가영에 대한 나의 집착(?) 아닌 집착이, 아라와의 관계 덕분에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연애의 기본은 밀당이라고 하던가. 그 와중에 그녀 앞에서 매번 작아지기만 하던 나의 자존감도 많이 회복이 되었다.

"잘 생겼어요"

생전에 들어본 적이 없던 말이다. 내가 "에이~" 하며 손사레를 쳐도 "정말인데. 눈 너무 이뻐요. 나보다도 이쁜 눈이야" 라면서 말해주는 아라의 칭찬은 나의 자존감을 북돋아 주었다. 거울 앞에서 꾸미는 시간이 늘었다.

"오~"

새 옷을 입고 아라를 만났을 때 그녀가 보여준 그 반응… 사실은 가영에게 듣고 싶었던 말과 표정이었다. 무척이나 듣고 싶었던 말들. 옷 예쁘다는 말, 잘 생겼다는 말, 같이 있어서 즐겁다는 말들. 연인에게 의례 하는 겉치레든, 그냥 빈 말이든 뭐든 상관없었다. 연인에게 듣고 싶었던 말들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 의미없어진 말들이다.





가면

- 4화 -




가영은 카페에 앉아 있었다. 떨리는 마음, 미안한 마음, 도망치고 싶은 마음 등 복잡한 마음으로 그녀가 앉아있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다행히 가게 안에 손님은 우리 뿐이었다. 우리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렇게 앉아있었다.

"…왜 그랬어"

긴 침묵을 깨고 벌써부터 울먹이는 말투로 가영이 말했다. 나는 구차한 변명 대신 미안하다고만 말했다. 가영은 울음을 터뜨렸다. 정말 한심한 이야기지만 그때 나는 처음으로 묘한 정복감, 승리감을 느꼈다. 내내 끌려다니던 연애, 그저 쩔쩔매기만 하던 연애에서 처음으로 그녀의 울음을 터뜨린 순간이었다.

"미안해…"

하지만 역시나 가영의 눈물을 보자 그제서야 진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도대체 왜 그런 것인가 하는 회한이 들었다. 그냥… 문득 찾아온 일탈이었는지도 모른다. 가영을 만나면서 나 역시도 속으로 많이 곯았다. 서운한 일들이 많았다.

'아니…그건 근본적인 이유가 아니야'

그냥, 솔직하게 말해서 새로운 여자가 나에게 호감을 보인다는 것, 그리고 그 여자와의 만남은 마치 '운명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모처럼의 재회였다는 것이… 날 설레게 만들었다.

"미안해"

나는 세번째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뒤늦게 눈물을 찔끔 보였다. 그 눈물만큼은 진짜였다. 미안했다. 가영은 품에서 새 휴대폰을 내밀었다.

"내가 휴대폰 던져서 망가뜨렸잖아. 이거 너 써"

휴대폰을 받아들었다. 이렇게까지 날 생각해주는데… 하는 생각에 또 한번 미안했다. 나는 속으로 마음으로 굳혔다. 가영에게 다시 돌아가기로. 그날 일에 대한 공허한 대화 몇 마디와 이야기를 나눈 후, 나는 다시 한번 다짐하듯 말했다.

"정말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거지?"

울먹이며 묻는 가영. 그랬다. 애초에 그랬어야 할 일이다. 나는 나의 순정을 스스로 망가뜨렸다. 하지만 그녀가 다시 기회를 주었다.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했다.

"다신 안 그럴게"



가영을 만나고 집에 돌아왔다. 맥이 탁 풀렸다. 마음을 다잡기로 했다. 중심을 찾고, 다시 돌아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바람을 피웠고 그것을 두 여자에게 들켰는데 두 여자가 모두 나를 용서했다. 놀랍게도 두 여자가 다 나에게 기회를 주었다.

내가 무슨 대단한 매력을 가졌다고?

정이 쌓여서, 너무 갑작스러운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동안의 관계에 대한 회고와 반성, 혹은 그저 놓는 순간 상대에게 뺏길 것이 분명해서?

그 어떤 이유든 내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어쨌든 너무 피곤했다. 집에 돌아와 눈을 감았다. 핑핑 도는 머릿 속과 믿기지 않는 현실 사이에서 이미 내 머릿 속은 과부하 상태였다. 잠을 자기로 했다.




…아마 보통이었다면 그쯤해서 정신을 차리고(?) 가영에게로 돌아가는 엔딩이 기다리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한숨 푹 자고 일어나, 휴대폰부터 확인을 하니 아라의 카톡이 몇 개 와 있었다.

[ 뭐하고 있어? 밥은 챙겨 먹었어? 난 고기고기 편시락 먹었어 ]
[ 오늘 손님 없어서 넘 편하다ㅋㅋ ]

아마 아라로서도 무척 혼란스러울 시기가 틀림없을텐데도, 애써 아무렇지 앟은 척 카톡을 보내오고 있었다. 그 순간 또 아라가 한없이 가여웠다.



아라는 나에게 많은 비밀을 털어놓았다. 어린 시절부터 겪은 가정폭력과 질 안 좋았던 전 남친들의 이야기. 그녀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어쩌면 그런 병신 쓰레기들이 있을까' 싶었지만 사실 그놈들보다 더한 쓰레기가 나 아닌가. 물론 가영에게도 그랬지만. 그러고보니 이제와서 아라에게 다시 헤어지자고 말하기가 버거웠다.

실리적인 측면에서의 걱정도 새삼 또아리를 틀었다. 설령 가영이 지금은 다시 나를 이해해준다고 치더라도, 그 딱 부러지는 성격이 평생 이 일을 없던 일로 하고 넘어갈 수 있을까. 사귀는 내내 나를 힘들게 하지는 않을까? 물론 가영이가 그럴 애는 아니지만… 아라라고 해서 또 항상 나를 이해해주라는 법도 없고.

'어쩌면 좋지?'

우유부단이라고 해도 좋고, 미련하다고 해도 좋지만 일단은 그랬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어졌다. 불과 반나절 전에 '이제는 가영에게로 돌아가야 할 때'라고 확신했던 내가 원룸 창문 밖으로 지는 노을 앞에 그저 어쩌면 좋을까 라는 생각만 하게 됐다.

"밥은 좀 먹었어?"
"입맛이 없어서, 아직"
"그래두 먹어야지. 기운 좀 차려. 걱정된다"

내가 저지른 일 때문에 그랬을 지언정 가영이 힘없이 밥도 안 먹고 있다는 말에 마음이 아렸다. 그리고 전화를 끊고 또 애써 나를 위해 생글대는 아라의 목소리를 듣고 나면 가슴이 아팠다.

'병신새끼'

스스로를 욕했지만 도무지 선택을 할 수가 없었다. 생각이 돌고돌다 나중에는 '왜 문명사회는 일부이처제를 허용하지 않는 것인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런 망상까지 하다가 드디어는 나도 배가 고팠다. 햇반을 데워 밥을 먹었다. 아라가 자기는 안 먹는다며 한 보따리 챙겨준 참치캔을 따서 먹으며. 가영이가 사다준 물컵에 물을 마시며.



그 이틀 뒤, 나는 아라를 안았다. 어쩌면 나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여자로서의 위기감 때문이었을까. 평소보다 더 애틋한 느낌이었다. 또 그로부터 한달 여의 시간이 흐른 후, 이번에 나는 가영을 안았다. 그녀야말로 나를 완전히 잃을 뻔 했다는 생각 때문인지 더욱 적극적인 느낌이었다. 아라를 만나기 전, 한달에 한번을 할까 말까했던 가영과 나는 빈도가 잦아졌다. 아라와의 관계 역시 더 잦아졌다.

그 와중에 웃기는 것이라면, 아라를 품에 끌어안을 때 가영을 생각하며 미안함을 느꼈고, 가영을 품에 안으며 아라의 외로움을 걱정했다는 사실이다.

"무슨 생각해?"
"아무 생각도 안 해"
"…"
"아니, 멍 때릴 수도 있잖아"
"…"

한번도 가영과의 일에 대해 캐묻지 않았지만, 아라는 종종 수시로 그런 질문을 했다. 아마도 내가 그녀 생각을 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사랑해"

그래도 시간보다 좋은 약은 없었다. 한 달, 두 달의 시간이 흐르자 그토록 암울했던 시간은 기억에서 아주 천천히 사라지기 시작했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공포와 놀라움을 겪을 일도 없었다.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은 채. 물론 둘 중 하나를 정리해야지, 정리해야지 마음 속에 큰 돌덩이가 자리잡고 있었지만 감히 그것을 캐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어쩌면 나는 그저 '그러다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 '어떻게든 되겠지'는 생각보다 그리 멀지 않은 시간에 다시 찾아왔다. 그 때 그 날로부터 몇 달 쯤 지났을 때였으리라.




"하!"

어느 금요일 밤, 몇 달 만에 가영이 내 원룸에 찾아왔다. 몇 달만의 일이었다. 불과 10분 거리에 떨어진 가영의 원룸이었지만, 그녀는 내 원룸에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평생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그 광경을 또 볼까 봐 걱정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영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날도 나는 아라와 벌거벗은 채로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

믿고 다시 한번 기회를 준 남친이, 또 다시 그때 그 여자와 함께 이불 속에 누워있는 모습을 본 가영의 기분은 도대체 어땠을까. 감히 짐작도 가지 않는다.

"잠깐만요"

가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돌아나섰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라가 그녀를 따라나섰다.

"가영씨, 잠깐 이야기 좀 해요"
"너랑 할 이야기 없어"

아라가 그때 가영과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나는 모른다. 단지 아라는 필사적으로 가영과 뭔가 이야기를 하고 싶어했고, 가영은 그러나 말조차 섞고 싶지 않아했다.

나는 뒤늦게 참담한 마음과 빙글빙글 도는 머리를 붙잡고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둘이 건물 복도에서 실랑이를 할 동안 나는 천천히 옷을 입었다. 마음이 무거웠다. 사실 언젠가 찾아올 일이긴 했다. 그저 하루하루 미루고 있었을 뿐. 대가를 치를 순간이 다시 찾아왔을 뿐이다.



짝.

나는 가영에게 뺨을 맞았다. 그녀는 참 손이 매웠다. 건물 앞에서 가영이 말했다.

"니 짐 다 싸놓을테니, 30분 있다가 내 집에 있는 니 짐, 다 가져가"

가영의 통보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미 정리했다며 아라와 가영 모두를 속이던 나는 다시 한번 최악의 형태로 둘을 배신한 셈이었다. 울면서 가영은 집으로 향했고, 나는 멍하니 서있었다.



짝.

이번에는 아라가 내 뺨을 때렸다. 그 와중에도 뒤집어 쓰고 나왔던 돗수 없는 안경이 날아갔다. 다 틀린 것일까.

'내가 지금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일까'

아라는 물론 매력적이고, 나에게 과분한 착한 애다. 아마 얘랑 헤어진다면 다시 이런 애랑 만나기 힘들겠지. 하지만 그건 가영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평생의 짝이 될 수도 있는 여자인데'

부모님의 병환과 경제적 몰락. 서로가 가장 힘든 시기를 함께 위로하며 버틴 사람이다. 내가 정말 비루할 때 나를 케어했고, 나 역시 그녀에게 최선을 다했다. 심지어 바람을 피웠어도 나를 용서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런 그녀를 나는 또 배신했다. 그리고 이렇게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다. 길게 한숨을 쉬는 그 순간, 아라는 내 안경을 집어 들었다.

"미안해"

그 와중에도 내 뺨을 때렸다며, 미안하다며 나를 달래는 아라.

"가지마. 걔네 집 가지 말라고"

아라는 나에게 말했다. 나는 무너져 내리는 정신줄을 겨우 붙잡으며 대답했다.

"가야지. 걔 집에 있는 내 짐 가져와야지"

그러자 이번에는 아라가 말했다.

"같이 가"
"혼자 다녀올게"
"같이 가!"

나는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또 비정한 생각을 했다. 어차피 가영은 이대로 끝이다. 그렇다면 아라라도 붙잡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 같이 가. 근데 일단은 문 앞에 서있어. 너까지 걔네 집에 들어갈 필요는 없잖아"



가영은 내 짐을 깔끔하게 내 가방과 종이백 등등에 담아 문 앞에 내놓았다. 나는 아라와 함께 그 짐을 들고 집으로 향했다. 참담한 기분이었다. 정말 일을 크게 그르친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조강지처 버리면 안된다던데'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났고, 한편으로는 애써 '아라도 조강지처야' 하면서 나를 달랬다.

하지만 집에 거의 다 온 순간, 나는 갑자기 주저앉았다. 그렇게 힘들게 시작했고 어렵게 이어온 연애가 정말로 이렇게 끝나는구나 하는 실감이 집 앞에 거의 다 와서 느껴졌다. 바로 옆에 아라가 내 짐을 함께 들어주고 있었음에도.

'다 놓아버리고 싶다'

그리고 내가 주저 앉은 그 순간 아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가"

나는 그저 눈을 질끈 감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렇게 힘들면 가. 내가 사라지면 되잖아. 너네 둘 다시 만나면 되잖아…"

아라도 울고 있었다. 그랬다. 가영에게도 그렇지만, 아라에게도 나는 다시 없을 나쁜 놈이다. 여친이 있었음에도 속이고 만나서는, 몇 번 잠자리만 하고서는 헤어지자고 하질 않나, 몇 달을 양다리를 걸치지를 않나, 분명히 정리하겠다고 해놓고서는 몇 달이 지나도록 계속 속이고는, 이제는 아예 지 여친이랑 헤어졌다고 제자리에 주저앉아 울먹이는 병신 짓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라 입장에서도 정이 떨어질 만 했다.

"아니야, 그냥 너무 스트레스가 커서 그랬을 뿐이야"

나는 짐을 다시 들고 일어섰다. 그리고 아라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을 잡는 대신 다시 한번 싸대기를 날려도 할 말이 없건만, 아라는 그저 "미안해. 때려서" 하고 재차 사과를 할 따름이었다. 설령 그것이 '이 와중의 착한 척'이라고 해도 상관은 없었다. 두 여자한테 싸대기를 맞고, 오래 사귄 여친과 헤어지는 순간의 무너지는 멘탈을 잡아주었으니까.

"아라야, 내가 미안해. 잘할께"

나는 그렇게 아라의 손을 꼭 잡았다. 우리는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그 날의 일은 일단락 되었다. 하지만 그게 끝은 아니었다. 아라와 나와 가영의 삼각관계는 그게 겨우 시작이었다.

"다신 바람 안 피울거지?"
"어"

두 여자의 삶을 지옥으로 몰고 간… 착한 척, 순둥이인 척, 그저 유쾌한 척 가면을 쓴 진정한 쓰레기의 이야기는 이제 겨우 시작했을 따름이었다.

< 계속 >

"혹시 돈 좀 있어?"

내 나이 서른 여섯.

"얼마나?"

여자친구는 지갑을 꺼내며 물었다. 아니, 지갑으로 될 일이 아니다.

"이천만원"

지갑 속 만원짜리를 꺼내던 여자친구는 지갑을 닫고 물었다.

"이천? 그 돈을 왜?"

몇 가지의 이유를 준비했었는데, 결국에는 코인 이야기를 꺼냈다.

"투자를 조금 했었는데, 잘 안 됐어. 근데 조금만 투자를 더 하면 될 것도 같거든"

물론 씨알이 먹힐 리가 없다. 아니 그보다 여자친구의 표정이 차갑게 식는다.

"오빠 그럼 이제 혹시 돈 하나도 없는거야?"

결혼 이야기를 목구멍 너머로 삼키는 듯한 여친. "이제 우리 결혼해야 되는데?" 라는 다음 질문이 나왔을 타이밍이었지만 나오지 않는다.

"하나도 없는건 아닌데… 지금은 쓸 수 없는 돈이지. 근데 이제 곧 오를테니까, 지금 물타기를 좀 해야…"

머리까지 긁으며 하는 말에 여친은 하… 하며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내쉰다. 불과 10분 전까지 날씨 좋은 날 교외 카페에서의 나른한 데이트가, 이별을 고민하는 연인들의 싸늘한 오후로 공기가 바뀌었다. 귀신 같은 타이밍에 해도 구름 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손에 든 커피를 말 없이 몇 번 마시던 그녀는 "삼백 만원 정도는 있는데…" 라며 말을 꺼낸다. 나는 그냥 씁쓸하게 웃으며 "아니야, 그냥 괜찮아" 하며 말을 접었다.

"집에 가자"



조금 더 이야기를 하자는 여자친구에게 '머리가 복잡해. 나중에 이야기 더 하자'라는 말로 집 앞에 내려주고는 나 역시 집으로 돌아왔다.

불도 켜지 않은 방, 구부정하게 앉아 내 콧바람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한 방 안에서 우두커니 몇 시간을 벽만 바라보고 있노라니 여자친구에게 카톡들이 날아왔다. 이런저런 긴 장문의 내용을 담은 카톡과, 마지막의 한 마디.

[ 시간을 조금 갖자 ]

나는 대답 대신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그렇게 벌러덩 뒤로 누웠다. 어두운 방 안의 휴대폰 불빛에 그렇잖아도 눈이 뻐근하던 차였다.

"후우…"

이렇게 하나는 해결됐다. 혹시라도 이 멍청한 기집애가 돈을 어디서 마련해서 진짜 빌려주겠노라고 할까봐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아까 삼백이라도 빌려주겠노라는 말에 식겁을 했네.

착한 년.

콧바람이 떨린다. 잘 가. 미안해. 빙글빙글 도는 머리 속에서, 사흘 전 엄마의 전화가 떠오른다.

"니 애비가 또 그 코인인지 뭔지 지랄을 해가지고, 집에 사채빚 갚으라고 독촉장이 왔다. 어쩌냐 이거. 구천만원이 넘어…"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다. 이것만큼은 나도 해결할 방법이 없다. 또 아버지의 '그 병'이 시작된 거다. 보증, 사업, 도박, 주식… 이제는 뒤늦은 코인으로 전 재산 다 까먹기. 평생 낫지 않는 불치병.

모르겠다. 어두운 방 안에서 눈을 감고 어디론가의 우주 속으로 빠져든다. 다행히 내일은 일요일이다. 나는 긴 잠에 빠져들기로 한다.

[유료] 감염 [유료구독자 전용] 맛보기

김박스가 눈을 뜬 시간은 오후 3시 20분. 아침 8시가 넘어 잠을 잔 덕분이다. 그러나 두 겹의 커튼으로 가린 방 안은 칠흑과도 같았다.

"으음"

이미 3일이 넘게 뚜껑이 열린 채 방치된 생수통으로 입가심을 한 그는 겨우 일어나 세수를 시작했다. 거울을 봤다. 화장실의 불도 켜지 않았지만 그는 어둠 속에서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수염이 어마어마하게 자랐다. 마지막으로 언제 면도를 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코와 턱은 물론 뺨에도 털이 부슬부슬하게 일어났다.

"후우"

머리가 핑핑 도는 것이 느껴진다. 술 때문은 아니다. 금주를 한 지 석 달이 넘었다. 머릿 속의 혈류가 어디론가 빨려들어가는 듯한 이 엄청난 느낌은 한달여 전 쯤 초대받아갔던 교황청에서의 사고 때문이다.

"거기만 안 갔어도…"

난데없이 무슨 교황청이냐면, 퇴마작가로 활동한 지난 10년 간의 공적을 인정받아 겸사겸사 정 신부와 함께 공식 초대를 받았던 것이다. 코로나 시국인지라 공항에서 곧바로 바티칸으로 이송되고 2주간 격리를 명 받았지만, 그래도 교황청에 초청받아 왔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찼다. 김박스 팔자에 바티칸이 왠말인가. 식사도 괜찮았다. 확실히 거기까진 좋았다. 그러기를 열흘 째 되던 날, 옆 방에 격리되었던 정 신부가 방으로 찾아왔다.

"어? 신부님. 아직 2주 안 되지 않았나요?"
"오늘로서 해금되었네. 더 중요한 일정이 급히 생겨서"
"네?"
"암흑미사에 초정받았네. 자네와 나 모두"
"그 유치한 이름의 미사는 뭡니까"
"내용을 알면 유치하다는 생각은 안 들걸세"




사고는 그 암흑미사 때 일어났다. …뱀파이어 피 한 방울이 눈알에 튀었다. 그 자리에 있던 제이완 추기경이 눈에 즉시 성수를 들이붓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쯤 교황청 지하 감옥에서 산 채로 불태워졌을게다.

"으으윽"

다행히 그 자리에서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문제는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부터 발생했다. 특별히 제공된 호텔에서의 14일간 격리 기간이 지나고 자신의 은신처인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현관 문 앞에서 구토를 했다. 은신처 여기저기에 퇴마를 위해 걸어놓은 마늘냄새 탓이었다. 한국인이 문 밖에서 집 안에 걸어놓은 마늘냄새를 맡고 구토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김박스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병의 잠복기가 끝나고 본격적인 감염 증상이 시작됐다는 것을.

"허억"

만약 정말로 뱀파이어 피에 '감염'된 것이라면, 자신의 방 안에 가득한 퇴마도구를 생각해 볼 때 집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바로 끝이었다. 급히 전화로 동생을 불러 근처 모텔에 달방을 잡았다. 두 겹의 커튼도 빛 한 점 들어오지 않게쳤다. 동생은 크게 걱정했지만, 김박스는 그저 "몸이 안 좋아서 그래. 얼른 집에 가" 하고 손을 내저을 뿐이었다. 왜냐하면 당장이라도 동생의 목을 비틀고 피를 빨아대고 싶었으니까.

"츄으으으으읍"

며칠 후 동생을 통해 한의사 처방이라며 당일 채취한 사슴피, 녹혈을 말통으로 받아 마셨다. 목이 타죽을 것 같던 고통이 조금은 나아졌다. 김박스는 교황청에서의 그 날을 다시 떠올렸다.




…암흑미사의 주제는 무려 반 헬싱 교수의 장례식이었다. 전설적인 엑소시스트 명인의 마지막을 기리기 위해, 세계 각국의 엑소시스트들이 모인 그 자리에 김박스도 정 신부와 함께 한국 대표로 초대받은 것이다.

"반 헬싱이 실존인물이라고는 꿈에도 상상 못했는데요"
"브람 스토커가 드라큘라 소설에 관한 인터뷰에서도 언급했었지. 반 헬싱은 실존인물 모티브라고. 근데 사실은 모티브도 아니고, 그냥 있는 그대로의 묘사였어. 브람 스토커도 자네처럼 '퇴마작가'였거든"
"그렇군요. 그럼 반 헬싱은 지금 몇 살 나이로 죽은 겁니까"
"아무도 몰라. 가장 유력한 설에 따르면 160살쯤 된다고 하더구만. 기록에 따르면 일단 최소 140살은 넘었대"
"그 정도면 거의 세계최장수 노인 아닙니까. 사인은 뭐랍니까?"
"요즘에 갑자기 죽은 거면 이유가 뭐겠나. 당연히 코로나 바이러스지"
"맙소사"

세계 각국의 엑소시스트들과 수십에 이르는 '비밀 추기경'들의 참석 속에서 교황청 지하의 카타콤에서 조촐하게 치뤄진 반 헬싱 교수의 장례식은 어느새 마지막 절차에 이르고 있었다. 카타콤 동쪽에 있는 화장터로 떠나보내기 직전, 마지막으로 관에 누운 그의 손에 모두들 입술을 마치는 순서였다. 코로나 때문에 죽은 사람의 손에 단체로 돌아가며 키스를 한다는 장례 퍼포먼스가 충격적으로 황당했지만, 흔한 김치맨이 그렇듯 '남들이 다 그렇게 하니까' 역시나 따라하게 된 김박스였다.

"으음"

한 명 한 명, 순서대로 그의 반지에 입술을 맞추었고 드디어 김박스의 차례였다.

"음, 아리베데르치. …비록 이렇게나마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으아아악!"

김박스가 추모의 뜻으로 반지에 입술을 맞추기 직전, 그 유리반지가 갑자기 퍼석하는 소리와 함께 깨졌다. 다행히도 재빠르게 김박스는 고개를 젖혔지만 그 안에 들어있던 액체 극소량이 김박스의 눈에 튀었다. 눈을 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에 김박스는 제단에서 굴러 떨어져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제이완 추기경이 장례식을 위해 준비했던 성수를 그의 눈에 들이부었다. 즉시 통증이 가라앉았고, 약 10분 후에는 정신을 차렸지만 제이완 추기경은 심상찮은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김박스는 알 수 있었다. 이런 느낌은 정말로 10대 이후로 처음 느끼는 그 무엇이었다. 넘치는 에너지와 또 한 편의 폭발적인 색욕. 그러나 그것은 하복부의 충동과는 다른 그 무엇이었다. 갈증과도 비슷한, 그러나 너무나 허기진 진득한 액체에 대한 간절한 목마름.

"씨발"

그렇다고 정말 피를 빨 수는 없었다. 정 신부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감염을 악화시키는 길이었다. 사슴피를 마신 다음 날, 거울을 보고 깜짝 놀랐다. 송곳니가 눈에 띌 정도로 길어졌으니까. 그제서야 부랴부랴 정 신부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아무래도 그 눈에 들어간 '뱀파이어의 피'에 감염이 된 것 같다고.

"교황청 공식 메뉴얼상, 뱀파이어가 된 자는 무조건 화형이 답이네"
"해독제나 치료제는 개발이 안 된 겁니까? 전 세계를 무대로 몇 백년을 쌓아올린 성령과 퇴마의 본진 아닙니까. 무슨 방법이 없대요?"
"전신투석으로 감염을 늦출 수는 있지만, 문제는 그 투석으로 인해 또 다른 환자에게 2차 감염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어. 당분간은 참아보게. 어떻게든 내 방법을 찾아보겠네"

정 신부는 일단 피 검사를 위해 나의 피를 소량 뽑은 후, 큰 말통에 뭔 물을 가득 담아와 마시라고 권했다.

"이걸 마시게. 성수에다 뭐 이것저것 탄 물이니까, 치료에 도움이 될지도 몰라"
"성수라…제가 마귀라면 이거 마시면 저 바로 죽는거 아닙니까"
"글쎄. 효과는 나도 장담 못하네"
"후"

뭘 섞었는지 꾸덕꾸덕한 물이 역겨웠지만, 확실히 진득한 목마름이 일시적으로 사라지기는 했다. 그리고는 곧 하염없이 긴 잠에 빠져들었다. 정 신부의 말에 따르면 그대로 이틀간 꼬박 잠을 잤다고 한다. 눈을 뜬 나는 물었다.

"이제는 어쩌죠"
"교황청에 통보하면 즉시 엑소시즘을 하려고 사람을 파견할걸세. 아니면 나에게 그 일을 하라고 지시할 수도 있지. 하지만 더욱 큰 문제는 이미 제이완 추기경이 자네의 일거수 일투족을 상세히 보고하라고 나에게 지시를 내렸다네"
"사고였잖아요!"

김박스는 소리쳤지만, 자기가 생각해도 교황청의 대응은 당연했다.

"제발 빨리 치료방법을 찾아주세요"
"알겠네"



감염




반 헬싱 그 미친 놈은 왜 그런 위험한 물건을 죽을 때까지 소지했으며, 또 하필이면 그 물건이 그 찰나에 깨져버린 것인가를 수도 없이 생각한 김박스였지만, 그건 그저 '우연'이라는 말로 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다. 아니면 반 헬싱 스스로도 언젠가 찾아올 자신의 마지막에 대비하기 위해 그 피의 힘을 빌리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평생 죽여온 뱀파이어가 되어 '밤의 영생'을 누리고자 했는지도. 결국에는 안 한 듯 하지만.

'잠깐만'

반 헬싱의 나이는 정 신부 말로는 얼추 150살이라고 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인간은 그렇게 오래 못 산다. 성경 속 인물 몇몇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렇다면 반 헬싱은 흡혈귀 사냥을 하면서 무언가의 방법을 터득한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유리반지 속에 흡혈귀의 피를 보관했던 것 아닐까.

'맞아'

그렇게 생각을 해보면, 김박스 본인에게도 뭔가 방법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즉시 드라큘라 소설 완역본을 주문해서 읽었지만, 그다지 도움되는 정보는 없었다. 즉시 위키 등 인터넷을 찾아보았지만 '드라큘라'에 대한 문헌정보는 결국 서브컬쳐, 판타지의 영역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2021년에 드라큘라 피가 눈에 튀어 흡혈귀가 된 덕분에 퇴마 사제에게 화형당해 죽게 됐다'라는 허무맹랑을 넘어 유치한 3류 소설 같은 일에 김박스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실실 웃음이 흘러 나올 지경이었지만, 정말로 답이 없었다.

"무슨 호박 속 모기 피에 공룡 바이러스 걸리는 것도 아니고…참…"

게다가 정 신부가 준 성수를 계속 마시는 것도 조금 위험하다는 느낌을 느꼈다. 당장 어젯 밤, 흰 색의 혈변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무섭다는 생각에 결국 선글래스에 온 몸을 둘둘 말고는 밤의 응급실을 찾았지만, 놀랍게도 병원 현관 앞의 체온측정기에 찍힌 김박스의 체온은 18도였다. 이상체온으로 삑삑 거리는 기계 탓에 그는 병원 안으로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캬오오오오"

그날 밤 집으로 오던 길, 결국 김박스는 참지 못하고 길고양이를 잡아서 피를 빨았다. 스스로 인간 이하의 어떤 괴물이 되었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았지만, 방법이 없었다. 흰 색의 혈변이 심해지고 있었다. 기운이 없었다. 어쩌면 정 신부의 조언이… 조언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확실히 몸에 짐승의 피가 돌기 시작하자 에너지가 새삼 넘치는 것이 느껴졌다. 생스테이크에서 떨어지는 핏빛의 육즙을 빠는 것과도, 말통에 받아온 사슴피와는 차원이 다른 어떤 '살아있는 피'가 주는 힘. 강렬한 충동이 들었다. 바로 색욕의 힘. 당장이라도 어떤 여자의 목에 이빨을 박고 싶어졌다.

"우우우"

하지만 한국은 19세기의 트랜실바니아가 아니다. 세상 온 천지에 CCTV가 깔린 나라인데, 여자한테 그런 짓을 했다가는 다음 날 체포당할테고, 교도소는 커녕 구치소에 갇혔다가 태양 빛을 진하게 받고 잿가루가 될게 뻔했다.




띠리리리릿- 띠리리리릿-

때마침 걸려온 정 신부의 전화였다.

"자네, 지금 슬슬 한계지?"



(중략 : 본 소설은 스타일박스 유료 메일링 서비스 구독자 전용입니다)

스타일박스 유료 메일링 서비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에서!

블랙홀이 다가온다

2022년 11월 16일 그리니치 표준시 기준 오후 4시 33분. 시스템 세팅 및 안정화 단계를 거쳐, 드디어 본격적으로 임무를 수행하게 된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JWST).

"이게 뭐지?"

지구로 송신된 JWST의 데이터를 확인하던 STScI의 캐슬린 애너 연구원은 타란툴라 성운 이미지에 굵고 긴 검은 선이 그어진 것을 발견했다. 보정과정에서 발생한 데이터 오류라고 생각한 그녀는 데이터 체크를 요청했지만, 이미 그쪽에서도 "확인 중입니다" 라는 답이 돌아왔다.

"아…"

때마침 울린 배꼽시계로 마침 식사시간이 훨씬 지난 것을 뒤늦게 깨달은 그녀는 잠시 시계를 확인한 후, 식사를 포기하고 커피라도 한잔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JWST의 본격적인 운용이 시작된 이래로 고다드 우주비행센터에서 우주망원경과학연구소(STScI)로 소속과 위치를 옮긴 그녀는 매번 식사 한번 하기가 참 불편하다고 생각했다.

"기가 막혀."

로비층에 있던 카페 Azafran이 영업을 종료한 이래로 왕복 30분이 넘는 거리를 걸어서 이동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다들 처음에는 'NASA 측에서 우리 보험료를 낮추려고 일부러 운동 시키는 걸거야'라며 자조 어린 농담까지 했지만, 며칠이 지나자 다들 짜증을 숨기기 힘들었다. 주차한 곳까지 가는 시간을 감안하면 차량으로 이동하기에도 애매하고, 걷기에는 은근히 멀고, 임시 대안으로 제공된 킥보드나 캠퍼스 내 카트 트레인은 꼭 찾으면 안 보였다. 엄청난 시간낭비였다. 때문에 연구소 측에서는 샌드위치와 커피 케이터링 서비스를 매일 제공했지만, 식사시간 한참 지나 먹는 말라 비틀어진 샌드위치나 다 식은 커피는 이제 정말 신물이 나던 참이었다.

"어쩔 수 없지."

결국 주린 배를 안고 Mudd hall 카페까지 걸어가던 중, 전화가 걸려왔다. 애너는 짜증을 겨우 억누르며 전화를 받았지만, 그 내용은 모든 짜증과 분노를 한방에 영원히 날려버릴 정도의 엄청난 것이었다.

"블랙홀이요?"





블랙홀이 다가온다





아마 예전 같았으면 아무리 서두른다고 해도 이 많은 인원들이 한 자리에 세팅되기까지 족히 반나절은 걸렸을 것이다. 비상 연락망이 구축되어 있는 백악관과 국방성, 국토안보부 관계자 등 국가 주요인사들이라면 모를까, NASA와 ESA 산하 각 기관 책임자들과 관리자는 물론이요 세계 주요 천문연구소의 연구실 귀신들까지 800명이 넘는 사람들을 한 자리에 불러모아야 했으니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그럼 대책이 있는 겁니까?"

하지만 코로나 사태 이후 온라인 화상회의가 일상화 된 현재, 비록 온라인 회의라고는 하나 그들이 모두 모이는데에는 '겨우' 2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 물론 그 대가로 충분한 복안이나 검토가 준비되진 않았지만, 그 이상으로 시급한 이슈였다. 그 와중에 대통령은 바로 답을 원했고, 캐슬린 애너 박사는 대답했다.

"없습니다. 그 어떤 물리적인 방법으로도 블랙홀의 이동 궤도를 인간의 힘으로 변경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약 5초 간의 침묵이 회선을 가득 채운 가운데, 제임스 매킨지 국무장관이 물었다.

"그렇다면 블랙홀이 지구를 덮치는데 걸리는 시간과, 그 이후의 일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캐슬린 애너 박사는 아까 그들에게 시연한 패널에 검은색 마커로 재차 표시를 하며 간단히 설명했다.

"현재의 접근경로로 보건데 블랙홀이 지구의 영향권에 접어드는 것은 약 70일 후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일은…"

캐슬린은 미리 준비해 온 브리핑대로의 말을 하려다가 잠시 말을 흐렸다.




"태양의 600억배 질량을 가진 극대질량 블랙홀이, 엄청난 속도로 이동을 하면서 그 이동경로상의 모든 것을 지워버리고 있다?"

처음에는 아무도 못 믿었다. 단순한 데이터 오류로 생각했지만 4분 후, 16분 후 추가로 확보된 정보, 그리고 2시간 뒤 새롭게 관측한 데이터에서도 동일한 결과값이 산출됐다. 게다가 마침 ESA 측에서도 가이아 우주 망원경에 확보된 데이터가 이상하다고 연락이 온 참이었다. 무언가 심상찮게 일이 돌아가고 있다고 느낀 NASA 측에서는 몇 군데의 지상천문대에 확인 요청을 했지만 그 역시 마찬가지의 결론이 나왔다. 관계된 모든 이가 경악했다.

이동하는 블랙홀과 엄청난 질량을 가진 거대한 블랙홀까지는 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하지만, 이 천체의 문제는 엄청난 크기와 질량의 천체가 '갑자기 생겨났다'라고 할만큼 갑작스럽게 그 존재를 드러낸데다, 믿기지 않게도 그 속도가 광속을 아득히 뛰어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일단 그 자체로 모든 천문학자들이 기함할 이야기였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이대로라면 궤도가 정확히 지구를 향합니다."

비상식적인 속도로 해당 천체가 접근 중이었다. 지구에서 약 18만 광년거리에 떨어져 있었음에도 그 블랙홀의 영향력이 지구에 도달하는 것은 계산에 따르면 약 80일 이후. 당연히 블랙홀에 대한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사실상 지구의 종말을 암시하는 관측 결과였기에 이 내용은 처음에 NASA 내부에서도 뒤늦게나마 긴급보안사항으로 지정되었지만 이미 ESA를 통해 일부 정보가 유출되기도 했고, 어차피 지구에서도 '타란튤라 성운에 그어진 선'은 명확히 관측되는 것이었기에 약 36시간 후 보안사항을 해제하는 것으로 결정을 보았다.

당연히 뉴스가 보도된 직후 세상은 발칵 뒤집힐 것은 분명했기에, 백악관을 포함한 주요인사가 참여하는 긴급 온라인 회의가 소집되었다. 그리고 NASA 내부에서도 사전 브리핑을 위한 격론이 벌어졌는데, 그 중 일부는 의외의 의견을 내놓았다. 캐슬린 박사도 그 중 하나였다.




캐슬린 박사는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을 정리해서 새로운 의견을 제시하기로 했다.

"…블랙홀은 그 특성상 엄청난 중력으로 자신에게 접근하는 모든 천체를 산산히 원자 그 이하의 단위로 붕괴시킵니다. 지금까지의 우주론에 따르면 지구는 물론 태양계, 그리고 블랙홀의 궤도에 있는 모든 천체는 산산히 부수어지고 우리의 삶은 그대로 종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블랙홀은 우리가 알고 있던 기존의 우주론 자체를 초월하는 매우 특이한 천제이며, 엄청난 질량과 크기로 인하여 중심부의 중력이 매우 약할 것으로 예측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걱정하는 형태의, 지구와 우리가 중력에 의해서 산산히 찢겨지는 일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녀의 말에 잠시 모두가 말이 없어진 가운데, 대통령이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조금 쉽게 정리해주지 않겠나?"

NASA의 빈센트 넬슨 국장은 캐슬린 박사의 돌출 발언에 당황했지만, 그녀의 발언을 보장해주기로 했다. '70일 뒤에 우리 모두는 끝장이다'라는 리허설의 준비된 결론과 앞선 발언 반응과 달리, 모두의 눈빛에 한줄기 이채가 감도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캐슬린 박사는 침을 꼴깍 삼키며, 사실 굉장히 급진적일 수도 있는 의견을 제시했다.

"아마 우리 모두는 70일 뒤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한 순간에 원자 이하의 존재로 산산히 분해될 것입니다. 하지만 희박한 확률이지만, 그런 일 없이 무사하게 온전히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 이후의 일은 예측조차 불가능합니다."

모두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지만, 정치인들에게는 바로 한 줄기 희망의 존재.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것은 70일 이후의 실낱 같은 가능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장의 질서 유지를 위해서라도 희망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당연히 뉴스가 보도된 이래로 세상은 난리가 났다. 웃기는 이야기지만 고작 달이나 조금 크게 볼 수 있을 법한 50달러짜리 싸구려 천체망원경이 며칠 만에 완전히 동이 나고 중고매물조차 800달러가 될 정도로 '종말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욕망'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런만큼 천문학자들의 관심은 더더욱 폭발적이었다. 지구와 우주 궤도상의 거의 모든 '우주를 향한 눈과 귀'는 이제 그 블랙홀을 향했다. 파리에서 개최된 긴급 국제천문학회(IAUGA2022)에서는 해당 블랙홀의 이름을 '오메가'로 부르기로 결정했다.

마젤란 은하에서 우리 은하로, 마치 끝없는 탐욕을 추구하듯 그 엄청난 거리를 '속도의 개념을 초월한 속도'로 접근하고 있는 오메가의 존재는 그 자체로 공포였지만, 캐슬린 박사처럼 학회에서 일부 학자들은 소수 의견을 제시했다.

"기존의 모든 우주론과 블랙홀에 대한 이론을 부수고 있는 이 천체는 어쩌면, 희박한 확률이지만 위협적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박사님 의견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캐슬린은 곧 '세상에서 제일 바쁜 사람'이 되었다. 모두가 세상의 종말을 떠드는 가운데 그나마 희망을 설파하는 몇 안되는 인물이었으니까. 연일 전세계 언론의 인터뷰와 미팅 요청이 쏟아졌고, 그녀의 주장에 반론을 펼치는 주류 학자들 역시도 매우 강도높은 비판을 가해왔다. 오메가 접근에 대한 연구와 NASA, 천문학계 내외부에서의 협조와 비판 등 수많은 골치 아픈 일을 처리해나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약 3주간 그렇게 죽도록 시달린 뒤, 그녀는 NASA 소속으로 워싱턴 D.C의 NASA 헤드쿼터 건물로 불려왔다.

"오, 이게 누구야, '예측 불가능한 여자' 아닌가"
"아, 이제 그만요"

NASA 본부의 제럴드 포츠 부국장은 캐슬린을 보며 짖궂은 농담을 던졌다. 사람들에게 던져진 한줄기 희망 덕분에 치솟던 범죄율은 다시 감소세로 돌아섰다. 종말의 공포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던 사람들이 다시 한번 '그 이후의 삶'을 고려하기 시작한 것이다. 영국의 일간지 SUN은 "창간 이래 가장 우리 신문의 성향과 이름에 걸맞는 뉴스"라며 오메가에 의한 종말론과 한 줄기 희망을 자세히 소개한 이후, 2면에서 '물론 그 이후의 일은 예측조차 불가능합니다'라는 제목으로 어떻게 구했는지 10년 전의 캐슬린이 입은 비키니 사진을 게재했다. 그 사진은 아주 매력적인 사진이었지만, 현재의 체중이 많이 불어난 캐슬린의 모습과 기묘한 대비가 되어 사람들에게 웃음을 안겼다.

"신문사를 고소할까 했는데, 이제 얼마 안 남은 인생의 마지막 시간들을 재판하는데 쏟기 싫어서"
"희망의 전도사가 정작 본인은 종말론에 무게를 두는구만"
"이런 유명세로 딱 반년만 더 살았다가는 미쳐버리지 않을까 싶네요. 부국장님은요?"
"반반 정도? 오메가의 강착원반이 그렇게 작다면 기대를 걸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으니. 그보다…"

부국장은 캐슬린에게 ID카드를 건내고는 25분 뒤에 있을 제트추진연구소와의 미팅 이야기로 화제를 전환했다.




희망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다. 아무리 굉장히 특이한 특질의 극대질량 블랙홀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블랙홀이라는 압도적인 존재가 절망을 내포한 채 접근하는 중임에는 틀림이 없었고 '그 이후의 가능성'은 아무리 좋게 생각하더라도 비전이 없다고 생각한 이들은 '남은 삶에 충실하고 싶다'라는 이유로 온갖 범죄를 저질렀다.

살아있을 때 한번이라도 원하는 것을 가져보고자 하는 충동이 절도와 강도, 폭동을 유발했고, 그것은 물질을 넘어 사람에게까지 향해 온갖 성범죄가 창궐했다. 물론 범죄적 해결이 아닌 정상적인 방법, 즉 '소비와 연애, 결혼'으로 해결하는 이들도 많았다. 또한 그렇게 소유한 것을 남은 50일간이나마 안전하게 챙기기 위해 총기로 무장하고 자경단을 꾸리는 이들도 늘어났다.

다수의 국가에서 치솟던 범죄율은 그렇게 자경단이 조직되거나 계엄령이 내려지는 등의 조치가 취해진 이후로 간신히 안정세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또 언론에서도 '오메가 특별방송'으로 물리학 논쟁과 강의가 이어지며 '희박한 가능성'이 단순히 정부의 프로파간다가 아니라 실제로 물리학적으로는 가능한 일임이 인식되자 조금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희망을 갖는 이들이 생겼다. 그리고 '그래서 설령 가루가 되지 않는다면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갑론을박이 또 이어졌다.




"이미 시공을 초월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양자얽힘 현상의 미스터리를 웜홀의 존재로 풀어보고자 하는 연구가 존재합니다. 만약 그렇게 웜홀이 실존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걸음, 아니 서너걸음 더 나아간다면 극대질량 블랙홀의 경우 그 특성상 그 존재 자체가 웜홀이거나, 웜홀의 존재 가능성을 내포합니다. 또한 현재 관측되고 있는 오메가의 다양한 특성을 감안할 때, 이러한 예측은 더욱 희망적인 접근이 가능합니다."

NASA의 직원들이라고 해서 모두 이론물리학에 정통한 사람들은 아니다. 유명 축구구단에서 일하는 모든 직원들이 다 축구를 잘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그럼에도 사람들은 의례 'NASA 직원'에 대해 막연한 기대를 하기 마련이고 불안과 초조, 걱정과 호기심에 의해 주변의 아는 NASA 직원이 있기라도 하면 엄청난 양과 깊이의 물리학 질문을 퍼부어댔다. 적당히 얼버무리거나 모른다고 대답했다가는 "정부의 입막음이 두렵소? 나를 못 믿는거요?" 하며 시비를 거는 이들까지 있었기에 내부적으로 그러한 교육이 연일 이어지고 있었다.

"으음…"

또한 하루하루 엄청난 양의 정보와 논문이 쏟아지고 있는 오메가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업데이트 하고 논쟁을 거치고 브리핑하여 'NASA발 허튼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하는 조치이기도 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너무 시간도 촉박하고 검토할 시간도 부족했기에 오히려 '가설투성이의 허튼소리 경연장'이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오메가가 일종의 웜홀이라면, 흡수 이후에 블랙홀 너머로 날아갈 수도 있다는 겁니까?"
"네, 어디까지나 가설이지만요. 블랙홀 정보 역설에 대한 가설로 극대질량 블랙홀이 일종의 웜홀일 수 있…"
"제가 추가로 설명 드리죠. 러시아쪽 논문에서 제시된, 극대질량 블랙홀 내부에 양자쌍생성에 의한 음의 에너지가 가득차있다는 가설을 받아들일 경우 이러한 블랙홀 자체가 일종의 거대한 웜홀로서 기능할 수도 있습니다""

…어찌보면 그러한 현상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거대한 규모의 절망적인 재앙 앞에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희망적인 일'이라고는 '최대한의 객관성과 과학적 논리를 기반으로 한, 긍정적 해석이 가능한 가능한 가설의 도출' 뿐이었다. 덕분에 오메가 웜홀설, 초끈이론에 의한 차원게이트설 등 과학과 망상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무리한 가설들이 무려 NASA의 대회의실에서 오가는 진풍경을 매일 볼 수 있었다.




"5…4…3…2…1…All engines running. Liftoff!"

불과 두 달 사이에 우주로 발사된 위성체가 총 2,632대였다. 목적은 다양했다. 오메가의 접근궤도와 방향에 대해 추가적인 정보를 얻기 위한 관측 위성부터, 역시 천체관측용으로 전용된 군사위성, 종말을 대비하여 1해 분의 1의 확률이라고 하더라도 우주 공간에 인류와 지구 생명체의 흔적을 남겨놓기 위한 기념위성, 우주 공간에서 외부 은하나 성간 우주를 향한 최후의 메세지를 송신하는 특수 위성성 등 다양한 목적으로 발사된 위성체들이었다. 세계 각국에서 혼신의 힘을 다하여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하는 느낌이었다.

"마지막 위성 발사가 마무리 되었습니다."

이제 블랙홀의 영향력이 지구에 미치기까지 약 5일의 시간이 남았다. '광속보다 빠르게 접근 중인' 오메가는 이제 밤하늘에서 제일 밝게 빛나는 별 중 하나였다. 고배율의 망원경으로 보노라면 그 적청의 빛 한가운데에는 검은 구멍이 뚫린 것처럼 공허의 어둠이 엿보였고, 또 그 와중에도 호킹복사에 의해 거의 회색에 가까운 빛줄기가 뿜어져 나와, 그 모습은 마치 하늘에 떠있는 사악한 눈동자 같은 느낌이었다.

"아아…"

그것은 이미 블랙홀이라는 우주적 천체도, 자연재해도 그 무엇도 아니었다. 그저 사악하게 지구를 향해 다가오는 악마의 눈 그 자체였을 따름이다.

"캐슬린 박사님?"
"네"

캐슬린 역시도 그 압도적인 공포 앞에 모골이 송연했지만,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JWST에서 들어온 최신 데이터를 받아보았다. 그리고 그 데이터 값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오메가의 속도가 확연히 줄었습니다. 2,000C가 넘던 속도가 지금 거의 40C 수준까지 떨어졌습니다. 지금도 속도가 계속 천천히 떨어지는 중입니다. 마치 지구에 다가오기 전 감속이라도 하듯이"

일련의 사태로 최근의 NASA 분위기는 기존의 '차가운 이공계 집단'의 느낌이라기보다는 '과학을 숭배하는 일종의 컬트종교 집단'에 가까운 상태였다. 엄청난 질량을 가진 블랙홀이 지구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압도적인 공포 속에, 한줄기 희망에 기대어 가족과도 연을 끊은 상태로-몇 차례의 극단적인 테러 덕분에 NASA의 모든 연구시설은 외부 민간시설과의 연락 및 이동이 차단되었다- 연구에 매달리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분위기가 도출된 것이다.

"오메가의 갑작스러운 감속은, 오메가의 이동 원리에 있어서 국소 이방성 팽창설과 배치됩니다"
"웜홀설이 더 지지를 받겠군요"

많은 NASA의 연구진들은 이미 저 블랙홀의 정체를 단순한 우주 천체로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분명히 누군가의 어떤 강력한 의지가 담긴 신호였다. 마치 지구를 그대로 퍼담아 어디론가로 옮기고자 하는 그러한 존재.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그들은 더이상 블랙홀이, 아니 오메가가 두렵지 않았다.

"무슨 말들을 하는거야?"

그 결과로 최근 NASA의 공식 브리핑은 많은 사람들에게 기묘한 불편함을 안기기에 충분할 정도로 모호한 표현과 은유적이며 종교적 색채를 담아내기 시작했다. 아니 NASA 뿐만이 아니었다. '운명의 날'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방송국들은 '정서적 안정'이라는 이유로 정규채널에서 종종 찬송가나 찬불가, 나쉬드를 재생하기도 할 정도였다. 하지만 의외로 생각보다 별 일은 없었다. 극에 치달은 초조함은 오히려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흥분 속의 열띈 침묵'을 유발했다.


그리고 이윽고 운명의 날이 다가왔다.


캐슬린 박사의 예측은 적중했다. 오메가의 영향력이 충분히 닿을 법한 범위에 도착했음에도 온 세상이 찢겨나가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우주의 밤하늘이 서서히 어둠으로 잠식될 따름이었다. 천천히, 그러나 무서운 속도로 우리에게 친숙한 우주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오르트 구름이 사라지고 카이퍼 벨트가 어둠으로 변하며 태양계 저 멀리부터 우리의 우주가 어둠이 되어가고 있었다.

세계 각국의 주요 인사들은 이미 약 3일 전부터 대피소와 다양한 안전지대로 대피한 상태였다. '대피소'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지구는 물론이거니와 태양계 모두가 통째로 블랙홀 속으로 사라질 것이 확실히 되는 와중에도 일부 VIP들이 누릴 수 있는 특별함은 그렇게 마지막 순간까지도 여전히 존재했다.

그러나 또 의외로 많은 이들은 그저 높은 산에 오르거나 도시에 그대로 남아 온 하늘을 뒤엎은 거대한 눈동자를 맞이했다. 캐슬린 박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거대한 눈동자는 어느새 그저 온전한 어둠이 되어 모두를 칠흑처럼 감쌌다.

"아…"

박사가 느낀 그 순간의 기분과 감정은, 실망과 감동이 복합된 굉장히 특별한 그 무엇이었다. 감정을 느끼고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자체가 자기 자신의 생명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했지만, 방금 전까지 자신이 앉아있던 산 위의 잔디는 더이상 느껴지지 않았고, 텐트 속을 밝히던 램프의 불빛도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게임 속 배경 오브젝트들이 완전히 사라진, 어떤 그런 느낌.

자신이라는 존재만 빼놓고는 빛도 소리도 공기도 중력도 사라진 듯한 어떤 완벽한 무(無)의 공간. 캐슬린 박사는 어떤 해방감마저 느꼈다. 그 느낌은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그런 느낌이었다.


수많은 가설이 있었다. 그러나 그 무엇 하나 지금의 우주를 설명하진 못했다.


어느 틈엔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고 '나'라는 존재는 시간과 공간에 하나되어 있었다. 블랙홀이 무엇이며 NASA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도 않고 기억 속에서도 빠르게 잊혀져 갔다. 이것은 죽음인지도 모르고 어둠인지도 모르며 소멸인지도 몰랐다. 단지 온 세상에 지극히 가느다란 하나의 점이 되는 듯 했지만 그 희미한 느낌마저 사라지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아니 점은, 그리고 온 세상은 끝없이 아득하게도 찬란한 밝음을 향해 존재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지독하고 무섭다는 말을 넘어 그저 한없이 슬플 정도로 오래된 기억과도 같은 그 무엇이 지금의 상황을 단 두 음절로 설명했다. 물론 그것은 '빅뱅'이었다.

- 끝 - 

금주부터 블로그에 공개되지 않는, 스타일박스의 '미완성 단편(완성 단편 포함)'이 메일링으로 전달됩니다.   

"야, 시발 결국 다 헤어지게 되어 있어"

징징 짜는 윤재를 향해, 손에 묻은 케챱을 핥은 해창이 형이 별 일 아니라는 듯 쏘아붙인다.

"야, 니 돈 많아? 아니면 니네 집 돈 많아? 너 몇 살이야"

윤재가 촉촉한 눈시울을 겨우 진정시키며 "22살이요" 하고 대답한다. 그러자 해창이 형은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다 헤어지게 되어있어, 니들 나이 때는. 보통 결혼 암만 빨리해도 20대 후반이고, 여차하면 30대 중반인데…니가 뭐 씨발 지금 그 여자친구랑 10년 연애할거 같애? 백퍼 중간에 헤어지지. 안 그래? 그리고 대충 7~8년 연애해서 거의 30 됐다고 쳐. 그때는 뭐 니 여자친구랑 결혼할 돈 있어? 없지? 그럼 그때가서 놓아줘야 되는거야"

남 이야기가 아니기에 다들 말이 없어진다.

"자, 니네들 각자 최소로 니 돈 1억, 부모님이 물려줄 돈 최소 3억, 그 정도는 있어야 어디 신혼집 전세라도 잡고 사는거야. 그 돈 없으면 뭐 결혼도 못하는거고, 그냥 결국 언젠가는 여자친구가 다 헤어지자고 할 거야. 그게 다 니들 팔자라고"

해창이 형은 남은 감튀 몇 개를 한 입에 넣고 우물대더니 말을 이어간다.

"장담하는데 니들 중에 반은 나처럼 결혼 못 해. 그냥 잘해야 비슷한 수준 여자 만나서 대충 원룸에서 동거나 하며 살던가, 그냥 혼자 사는거야. 평생. 그게 니들 팔자야. 니들 비하하는게 아니라 현실이 그래"

모두 다 암담해진다. 그러나 형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결혼한 새끼는 뭐 행복한가? 아니지. 삼분의 일은 이혼 엔딩이야. 남은 삼분의 이는 그럼 즐거울까? 그것도 아냐. 애에 치이고, 마누라에 치이며 인생 존나게 고달픈거야. 뭐 정말 10% 정도 되는 애들은 행복할 수도 있겠지만 보통은 아니라고. 니들도 이젠 잘 알잖아"

뭐, 보고 듣고 자란게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다 좆도 아닌거야. 20대 초반의 이별? 매달려봤자 좆도 없는거라니까. 그냥 니들 나이 때에는 그저 되는대로 오지게 미친 놈처럼 이 여자 저 여자 만나고 다니는게 최고고, 그냥 막 별 지랄 다 하는게 짱이야. 뭐 그게 말처럼 쉬운건 아니지만"

어차피 언젠가는 다 헤어진다, 라는 해창이 형의 말이 나름 통했는지, 윤재의 표정도 조금은 시크해졌다.

"그리고 잘 살면 또 뭐해. 어차피 한 20년 30년 지나면 아무리 이쁜 마누라도 다 늙은 티 나는데. 외로운 것보단 낫지만, 대신에 고생도 많지. 안 그러냐. 니네 부모님들 어디 부부싸움 안 하든? 그 유전자 어디 가겠어. 다 똑같은거지"

뭐 사실 이쯤해선 해창이 형도 조언할 수준의 이야기는 아닌 듯 하지만 그래도 그는 말을 이어나갔다. 그 중 현중이가 물었다.

"그럼 형은 왜 사는 건데요. 다 좆도 없으면"

하 시크한 새끼. 그 어려운 말을 시원하게도 꺼낸다. 그러자 해창이 형은 주먹을 쥐고 위 아래로 흔든다.

"뭐 있겠냐? 존나게 딸이나 치고, 게임이나 좀 하고, 영화나 보고, 인터넷이나 보고, 종종 혼술이나 마시고, 월급 받으면 취미생활이나 하고, 삽겹살 먹고 치킨이나 좀 뜯고 곱칭이나 먹고, 그렇게 그냥 씨발 사는거지"

다들 한심하다고 생각하지만, 모두들 자신들의 삶이라고 크게 다를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새삼 삶이 허무하다고 느낀다.

"진짜 삶이 존나 뭐 없네요"

용주가 한숨을 쉬며 공감했다. 말 수도 적고, 몸은 돼지처럼 살찐 아다 용주. 우리 중 그 누구도 그가 서른 이전에 동정을 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지 않는다.

"진짜 너무 좆같은거 아니에요? 뭐 이래 씨발. 우리만 왜 이렇게 불공평한 건데요"

윤재가 급발진을 하지만, 정작 분위기를 이 사단을 낸 원흉 해창이 형은 피식 웃는다.

"그래도 딸칠 때는 기분 좋잖아"

차마 옆 테이블에서 들을까 두려워 지는 이야기다. 다행히 손님 없는 시간대다. 손님이라고는 우리 빼면 저 멀리서 정신없이 수다 떠는 커플 두 쌍 뿐이다.

"아니 씨발 인생에 행복이 딸딸이가 뭐에요 진짜. 좀 더 고차원적인 뭐 없어요?"

내 말에 해창이 형은 얼굴을 쓸어내린다.

"결혼해서 잘 사는 그런 애들 빼고, 형 또래의 장가 못 간 아저씨들은 대충 세 부류가 있어. 하나는 뭐 평생 여자를 지 리스 차 바꾸듯이 적당히 갈아치워 가면서 멋있게 사는 애들. 직업이 좋던가, 배경이 좋던가, 본인이 잘 났던가. 여튼 니들이 워너비로 삼지만 절대 그렇게 못 사는 잘난 새끼들. 또 하나는 나같은 찐따. 니들도 마찬가지야. 어지간하면 나처럼 될 거임. 그리고 마지막 남은 한 부류가 뭐냐면…"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다.

"타고나기는 찐따로 태어나도, 대충 빡시게 살다보면 잘 살아지기도 해. 보통은 중간에 알아서들 타협하고 적당히 어떻게든 짝 찾아서 대충 그저 그렇게 살아간다고. 니들이 존나 어릴 때는 인서울 기본에 SKY는 몰라도 최소 서성한은 웃으며 갈 줄 알았는데 현실은 지잡대 가는 것처럼, 대부분은 그렇게 타협을 해버린다고. 내 주제에 대충 이만하면 됐지 뭐 하면서. 근데 존나 소수지만 안 그런 새끼들이 있어. 뭐 좆도 없는데 존나게 야심만만한 새끼들"

나는 이때 해창이 형이 준식이 형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타협할 때 안 하고, 끝까지 곤조 있게 뭐 해나가는 새끼들이 있다고. 그게 직업이든 취미든 꿈이든, 대충 하다가 나이 쳐먹고 접는게 아니라, 그냥 설렁설렁하는 거 같긴 한데, 그래도 죽 뭐 곤조 있게 가는 새끼들. 그러면 뭐가 되긴 되더라. 그게 존나 멋있긴 해. 뭐 본인은 존나 고생했겠지만"

뭔가 암담하고 답 없는 현실의 벽 앞에서, 아주 작디 작은 희망의 빛을 본 기분이었다. 나는 뭘 꾸준히 하면 좋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그리고 그게 가능할지도. 아마 나는 적당히 선에서 타협할 거라는 생각을 했다. 아마 나도 30대 초중반에 만나는 적당한 여자랑 대충 결혼해서 살겠지. 현실에 타협해서.

"그럼 형은 뭐에 타협한 거에요?"

윤재의 말. 물론 해창이 형은 굳건한 얼굴로 주먹을 쥐고 손을 위 아래로 흔들 뿐이었고, 모두가 탄식 같은 웃음을 터트릴 때, 현중이 창 밖을 보며 혼자 뭔가 결연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본다. 녀석도 무언가의 결심을 한 것일까.

"뭔 생각 하냐?"

용주 역시 그것을 봤는지 현중에게 물었다. 현중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역시 주먹을 들어 위아래로 흔든다.


어느새 오후도 꽤나 지나가고 어둠이 다가와 이 패스트푸드 가게 안을 아늑한 황금색으로 물들이는 그 순간, 우리와 같은 암담한 청춘들은 그렇게 허무하게 삶의 비전들을 잃어버린다. 그 누군가의 가벼운 말 몇 마디가 아닌, 이미 예감하고 있던 답답한 공감에 의해.

- 끝 -

사이버펑크 2078 : 서울

한때 세계 7위권 경제대국이자 최첨단 IT 기기의 각축장, 한류로 상징되던 아시아 문화수도 대한민국은 급격한 인구감소와 그로 인한 노동력, 세수 감소, 떠밀리듯 맞이한 무리한 흡수통일, 내전, 내수시장 붕괴, 인적자원 유출, 기업 이탈, 무분별한 외국인 노동자 수입 등 온갖 악재의 악순환으로 불과 수십 년만에 극적인 몰락을 맞이한다.

"사업 정리했다더니, 집에 수영장을 깔았다고? 여전히 수입 좋나봐?"
"하이필로폰을 언제까지 쥐고 있을 수 있나. 이제 나도 네오강남 주민인데. 드론카 수입쪽으로 튼지 오래지"
"허허, 이 친구"

썩어도 준치라고, 그나마 강남 벨트만큼은 정치인 경호용 특수부대가 주둔하는 등 어떻게든 국가의 역량까지 동원하여 아직도 고급 번화가로 존재하지만 그 안을 살펴보면 온갖 썩은 정치인이나 불법 사업가들이 고급 주택들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한때 나라를 지탱하던 고학력 엘리트들은 모두 이웃나라로 탈출한지 오래다.

"오빠, 쉬다가"
"레볼루션까지 26만원에 해줄께"
"오빠 잘 생겼다. 공짜로 하고 나 술 한 병만 사줘, 응?"

현재는 폐역이 된, 잠실역과 주둔부대의 경계 저편으로는 화려하다 못해 천박한 네온조명의 사창가가 끝없이 펼쳐진다. 한때 랜드마크로 활약하던 초고층 건물은 그 건물을 중심으로 새로 지어진, 사이사이 거미줄처럼 공중 연결통로로 이어진 4개의 고층 빌딩을 거느린 채 정신없는 건물 외장 라이트로 그 천박함을 치장하고 있다. 100층이 넘는 초고층 클래식 럭셔리 빌딩과 그 일대 반경 7km의 모든 건물이 윤락행위와 그 부속 경제로 돌아가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거대 사창가. 과거의 누군가들이 본다면 수치스럽고 안타까울지 모르나, 오히려 지금은 "섹스 코리아"라는 어둠의 슬로건에 걸맞는 대한민국의 자랑 아닌 자랑거리다.

"ohhhh, fucki'nz gude"
"wow"

여전히 세계적인 미용시술 대국답게 보편적인 윤락녀들의 외모 수준이 높고, 그에 반해 붕괴된 경제로 인해 상당히 경쟁력 있는 가격이 인기의 비결이다. 물론 매력적인 윤락남들의 외모와 서비스 역시 과거 한때 세계를 흔들던 K-컬쳐 아이돌 문화의 흔적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다. 실제로 '하이돌'이라 불리는 상위 3% 꽃미남 윤락돌들 때문에 섹스관광을 위해 한국을 찾는 외국인도 많다. 국가 GDP의 6%가 이 '섹스 코리아'에서 발생한다.

"8기통 자연흡기 880마력? 아무리 튜닝 빡세게 한다지만 뭔 지랄을 해놓은거야. 오 젠장, 집을 팔아서라도 사고 싶네"
"돈이 부족하시다면 '다른 물건'으로도 거래 가능합니다"

또한 이미 전기 드론과 진공 튜브 트레인을 통한 인력수송이 세계적인 대세로 접어든 가운데, 동아시아에서 내연기관 차량을 실제로 몰아볼 수 있는 유일한 국가이기도 하다. 다른 나라라면 박물관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내연기관 자동차들이 아직도 무시못할 비율로 거리를 돌아다니는 대한민국은, 무려 '유연휘발유'까지 적지 않은 비율로 팔리고 있다. 주요 화학공업 기업들이 붕괴되고, 석유생산과 유통이 복마전이 된 덕분이다. 또 그 결과로 이웃나라 중국과 일본이 환경오염 이슈로 한국을 수시로 몰아붙이지만, 그런 것을 들은 척도 하지 않는 한국이다. 단지 길거리의 오래된 차량들은 대부분 과거 자국이 생산한 국산자동차라는 점이 과거의 영광을 조금이나마 떠올려 볼 수 있게 하는 부분이다.

[ 3동아빠 : K-2? 으흠, 혹시 10만원 가능한가요? ]
[ 꽁통지 : 30만원이라고 써놓은거 안 보여요? ]
[ 3동아빠 : 그럼 2031 수통은요? ]
[ 꽁통지 : 3천원에 가져가쇼 ]

치안부재와 군대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 저하는 결국 불법총기 시장을 융성하게 만들었고, 시민들은 각자 도생을 위한 무기와 각종 군용장비를 사이버 암시장 '캐롯랜드'를 통해 손에 쥐었는데 가장 흔한 무기는 역시나 손에 익은 K-2였다. 종종 K-1이나 K-5를 찾는 이도 있었지만, 역시 K-2가 일반적이었다. 한가지 우스운 점이라면 그 모든 총기와 장비들은 과거 치장물자라며 행보관들이 그렇게 수십 년간 창고에 쳐박아두던 새 것들이라는 점이다. 아끼다 똥이 된 정도를 넘는 블랙 코미디였다.


"돈 있냐?"
"없어요"
"그럼 몸으로 때우던지. 빨아"
"먼저 로우인 하고 하면 안되요?"
"야, 꺼져"

전신에 피어싱을 박고, 새로운 IT 강국으로 떠오른 필리핀산 싸구려 사이보그 장비를 팔에 이식한 길거리 10대 갱스터들이 로우인을 대낮에 빨며 돌아다니는 최악의 치안부재 동네 신림. 분명히 두어달 전 새로 페인트칠을 한 것 같은데 또 오늘 원인불상의 화재로 시꺼멓게 그을린 타임스티치몰은 오히려 그 깨진 창문들이 현재의 신림에 잘 어울렸다. 그래도 신림은 사정이 많이 나은 편이다. 최소한 젊은 사람들을 구경이라도 할 수 있고, 최소한의 경제활동이라도 이뤄지는 곳이니까.


"요즘 어때"
"똑같지 뭐. 아주 죽갔어. 오늘 국밥 두 그릇 판 게 다여"
"고기는 어찌 구했대?"
"우리 마누라가 공기총 하나는 기가 막히게 쏘잖여. 비둘기 새끼들이 전깃줄에만 앉았다 하면 기냥!"

경제의 붕괴는 자연스럽게 복지의 붕괴로 이어졌고, 대한민국의 노인들은 철저히 소외되었다. '암 또는 치매 발병시 안락사 허용'이라는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처절한 인권 사각지대는, 사실 오히려 죽음을 택한 자에게는 가장 확실한 복지였다. 60%가 넘는 노인들이 하루 한 끼로 살아간다. 제대로 된 약을 구하지 못해 저질 마약으로 진통제를 대신하고, 결국에는 범죄를 저지르다 젊은이들의 총에 맞아 죽는다. 2078 대한민국 노인들의 가장 흔한 죽음의 방식이다. 그들은 오천원짜리 비둘기 탕국 하나를 사서 매일 한 끼씩 3일간 먹고, 배양육 한 덩이를 훔치다 죽는다.


"여성가족부를 부활시킬 예정입니다. 앞으로 여성부는 이 나라 성매매 노동자들의 이익과 위생을 증진시키며 외국인 성구매자들에 대한 최대의 편의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또한 이 나라 모든 남성 성매매자들의 이익을 위해서도 힘써 노력할 것입니다"

물론 그래도 나라가 온전히 망한 것은 아니다. 절대 다수의 국가 기간 산업이 무너졌을 지언정, 예나 지금이나 나라에 충성하던 인력풀 하나만큼은 이해 안 가도록 좋던 나라 아니던가. 여전히 뛰어난 인재들은 수도 없이 튀어 나오고 있다. 국가 공인 해커부대, 국가 공인 마약 생산기지, 국가 공인 생화학 무기 판매, 국가 공인 산업 스파이 등 유수의 인재들이 각자의 전문 분야에서 달러와 위안을 벌어와 무너져 가는 나라를 지탱하고 있다. 거의 반 세기 만에 부활한 정부 부처 '여성부'가, 과거와는 180도 다른 목표로 업무를 행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로 말이다.



"欢迎"

중국어와 영어가 어지러이 간판들을 화려하게 수놓은 테헤란로와 강남대로의 붉은 네온싸인 중화빌딩 숲을 지나 학동을 거쳐 압구정에 이르면 비로소 한숨 돌리는 것이 가능하다. 적어도 이 동네는 안전하다. 인상 좋고 젠틀한 중국의 부자들이 과연 선진국 국민답게 선한 인상으로 웃으며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있다. 100미터당 300대가 넘는 밀도로 ICTV가 깔려있는 부자 동네에서 범죄를 저지를 멍청이도 없지만 말이다.

지난 수십 년동안 꾸준히 세를 불려 이제는 대한민국 인구 2/5를 차지하는 이중국적의 중국인들은 현재 제 1야당 '인민당'을 적극 지지하여, 향후 10년 내에 중한통일의 목표를 이루고자 하고 있다. 비록 지난 대선에서는 인민당 대선후보 장츠이지가 본토 대륙의 부인 이외에도 한국인 첩 열 명과 12명의 혼외자를 갖고 있다는 충격적인 폭로가 터지면서 아슬아슬하게 '민주국민파워당'의 임선영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할 수 있었지만, 차기 대선은 사실상 장츠이지가 유력하다. 어차피 지난 총선에서 인민당이 202석을 차지함으로서 새로운 한국인이 대통령이 되어봤자 식물대통령이 확실시 되지만.



"1소대 총원 8명, 휴가 1, 생리열외 1, 훈련열외자 1 이상 3명 제외 5인 집합 준비 끝!"
"쉬어"

대한민국의 국군은 극적으로 줄어, 한때 60만 상비군을 자랑하던 전력은 고작 7만 명이 되었다. 한 해에 아이가 9만 명도 태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것도 용한 상황이다. 군 복무기간은 4년 2개월. 장교 입대시 무려 8년. 지난 2032년 이래 남녀 모두 복무를 하는 군대이며, 긴 복무기간에 의한 국가 경쟁력 상실에 대비하기 위하여 군 입대 시기는 16세로 조정되었다. 또한 복무 중 고등학교 교육을 병행한다. 긴 복무기간 때문에, 많은 군인들이 아이를 낳아 전역을 시도한다. 물론 그런 경우 높은 확률로 남자들이 그녀를 떠나지만 말이다.

"육아는 현실이죠. 아 물론 서로 합의 하에 낳고, 덕분에 전역한 것도 맞고 혜영이한테 너무 미안하긴 한데, 육아는 현실이니까요. 저도 살아야죠"



…혹자는, 아니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완전히 몰락해버린 2078년도의 대한민국을 지옥이라 부르지만, 사실 그래도 남한 지역의 경우에는 버티고 살면 어떻게든 살아지기는 한다는 점에서 지옥이라 부르기에는 아쉬운 점이 있다. 사실 진짜 지옥은 통일과 내전 과정에서 골고루 방사능에 오염된 북한 지역이라 할 수 있다. 아이 셋을 낳으면 그 안에 반드시 기형아가 있고, 환갑을 넘게 살면 85%의 확률로 암이 발병하며, 강물로 농사를 지어 먹었다가는 2년 내에 사망하는 현세에 존재하는 지옥 2078 북한. 사실 그 덕분에 방사능 차폐 기술이 오늘날처럼 발전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천만 인구가 불과 100년도 되지 않아 30만이 된 것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그 모두는 멀리서 보았을 때 느끼는 비극일 따름이다. 정작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의외로 그리 나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지금 영등포 지하상가 인근 하수도에서 죽어가고 있는 노숙자 김박스 노인의 삶이 그러하다. 그는 엊그제 길바닥에서 용케도 바이아그라를 주웠다. 그리고 무려 55년 만에 힘차게 용솟음한 그의 분신과 함께 혼자만의 해피타임을 가질 수 있었다. 완전히 성적 능력을 상실한 자라도, 인체 본연의 ATP를 정력으로 치환할 수 있게 만든 이 비싼 신약이 어떻게 길바닥에 굴러다닐 수 있었는지는 미스테리지만, 아마도 어젯밤 광란의 파티를 즐기던 어느 부자의 주머니에서 흘렸던 것이겠지.

"흐흐…"

물론 무려 나흘간 굶은 구십대 노인이 초강력 향정신석 약물을 먹고 자위행위를 했으니 그 몸이 결코 성할 리 없으련만, 그래도 그는 수십 년만의 쾌감을 맛볼 수 있었고,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게 죽어가고 있었다. 덧없는 삶과 덧없는 죽음.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시대정신인지도 모른다.

귓가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삐 소리와 함께, 죽음이 정말 가까이 왔다는 것을 느낀 그는 눈을 감은 채로 피식 웃었다. 수십 년 전, 짓궂은 악취미처럼 써내려간 그 단편소설이 정말로 자신의 삶과 죽음을 이토록 이렇게 리얼하게 그려낸 것이었음에 놀라움과 어이없음을 느끼며 말이다.

근황

0. 격조했습니다. 이래저래 심란한 일들이 많았지만, 여전히 저는 살아 있습니다.

1.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백수 기간을 거쳐 현재 모 리걸테크 기업에서 열심히 일하느라 조금 정신이 없습니다. 먹고 살기는 언제나 힘든 일이니까요. 

2. 글은 언제나 틈틈히 쓰고 있습니다. 단지 완성을 시키지 못할 뿐 입니다. 참고로 오늘 기준 이 블로그의 임시저장 글은 1,246개입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3. 조만간 글은 업로드 하도록 하겠습니다. 

4. 조금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언제나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 본격 신대륙풍 똥믈리에를 위한 똥글 리스트 맛보기 > 



 

운동권

부채로 더위를 달래며 바둑 묘수풀이를 하시던 아버지는, 뉴스 속 대학생 시위대를 보며 잔뜩 역정을 내고는 혀를 찼다.

"저런 놈들이 나라 말아먹는 놈들이라고. 부모들이 죽어라 키우고 가르쳐서 대학 보내놨더니 하는 짓이라고는 데모질이라니. 아니 이 좋은 세상에 배가 부르면 저런 데모질이야? 그리고 저 부모들은 얼마나 속 터질거야? 에휴, 너도 혹여라도 대학 가서 저 지랄 하고 다닐 거 같으면 그냥 가지도 마. 알겠어?"

그는 뿔테안경까지 고쳐쓰며 뜬금없는 엄포를 놓았지만, 나는 별다른 대꾸 대신 "저 독서실 다녀올게요" 하고 집을 나섰다. 꼰대 말에 말 덧붙여봐야 싸움만 나니까. 건조한 공기가 입술과 코를 마르게 한다.

"응?"

정치인에 대한 선정적인 욕이 적힌 찌라시가 발에 채인다. 조금은 유치할 정도로 선정적인 멘트에 그저 피식 웃음이 나온다. 아마 아까 뉴스에서 나오던 운동권 시위대의 찌라시이리라. 우리 집이 대학가이다보니 집 근처 골목길에도 이런 찌라시와 급조한 벽보들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쩝"

무슨 싹 다 명단공개해서 사회생활 못하게 해야 한다느니 하는 극단적인 아버지 말에 완전히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 역시도 솔직히 반 정도는 그의 의견에 공감했다. 저렇게 화염병에 쇠파이프까지 들고 격렬하게 시위를 하는 대학생들의 모습은 무엇을 위한 투쟁인지 의문이 갈 정도였으니까.

"후우"

어쨌든 주말 저녁의 독서실은 한가했다. 내가 즐겨앉는 자리에 앉아 가방에서 책과 노트를 꺼내노라니 뒤에서 누가 나를 가볍게 툭 친다. 민주였다. 사실 주말임에도 굳이 독서실을 나온 이유의 80%는 '혹시 그녀와 만날 수 있을까'를 기대해서였다. 그리고 그 기대는 이렇게 완벽히 적중했다. 그녀는 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잠깐 담배나 한 대 피우자"
"어"

나는 담배를 안 피우지만, 그녀를 따라 말없이 1층으로 내려가 골목 뒤로 돌아갔다. 담배를 입에 문 민주는 벽에 몸을 기댄 채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나 그냥 대학 안 가려고"
"왜"
"시국이 이런 시국인데 대학교 간다고 뭐가 달라지니?"
"시국이 왜"

내 시큰둥한 말에 민주는 기가 차다는 듯 말했다.

"국가가 시민을 탄압하고, 억압하고, 감시하고, 어? 이런 독재국가가, 말이 돼? 헌법에서 보장하는…"

하지만 민주는 스스로의 목소리가 높다는 것을 깨닫고 곧 작게 말했다.

"이런 인권유린 그 자체인 세상이 말이 되냐고"

물론 나 역시 정치인 욕 한다고 끌려가서 고문 받고 이런 건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무슨 독재가 어쩌고 인권유린이 어쩌고 하는건 너무 오바 아니냐고 말을 하려던 그 순간, 눈 앞에 경찰 드론이 나타났다.

"흡!"

불과 10초 전까지 국가가 시민을 탄압하고 감시하고 어쩌고 하는, 운동권 대학생들이나 할법한 대화를 나누던 차였기에 나도 놀라고 민주는 심지어 바닥에 주저앉기까지 했다. 그 와중에 나는 비겁하게 '나는 아무 말도 안 했어요'라는 변명을 떠올리고 있었지만 경찰 드론은 그저

"금연구역 내 흡연은 벌금 1천 위안입니다. 시민번호 XX-401124-14o2TU2n 한민주, 벌금통지 완료"

라는 말을 세 번 반복한 뒤 다시 그대로 붕 날아가 버렸다. 민주는 겁에 질려 얼굴이 다 하얗게 변할 정도였지만, 겨우 한숨을 돌리고는 나에게 말했다.

"이게 정말 말이 된다고 생각해?"

나는 대답 대신 그녀의 손을 잡고 일으켰을 따름이었다. 아까 가슴이 철렁한 그 순간 조금은 민주의 말이 이해가 갔지만, 그래도 역시나 2058년의 요즘 같은 세상에 아직도 "우리의 모든 메신저 대화는 감청되고 있어"라면서 불편하게 손에 반지폰을 끼우고, 메신저도 안 쓰는 그 고집은 도통 이해가 안 갔다.

"메신저로 뭔 대화를 하길래?"
"대화의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고. 그걸 국가가 감시하는 자체가 문제인거야"
"아니 애초에 나쁜 대화를 안 하면 되는 문제 아니야?"
"아 정말 답답하다!"
"미안. 다른 이야기 할까?"

…뭐, 여자애들끼리는 의외로 남친에 대해서 별별 이야기들을 다 한다던데. 민주도 남친 있는 애들과 약간 그런 대화를 하는걸까? 조금은 기대를 하게 만든다. 근데 사실 그 이상으로 속 터지는건 나다. 무슨 중국 공장에서 생산되는 신형 이어팟은 뇌파 감청을 한다느니 하는 기가 막힌 소리에 조금은 귀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민주 같은 애랑 어울리다보면 나 역시 위험해지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도 오늘 처음으로 조금 들었다.

"으휴"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자리로 돌아와 책을 켰다. 독재에 항거해 싸운 위대한 혁명영웅들이라며 1980년대 혁명열사 대학생들의 모습을 재생하는 디지털북을 보노라니, 뜬금없이 요즘의 메신저 검열과 정치인 비판의 자유 등을 논하는 대학생들이 떠올랐지만… 역시나 경찰 드론을 불태우고, 폴리스봇에 화염병을 던지는 막 나가는 요즘 대학생들과 그들을 비교하는건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별 생각을 다하는구나"

아무래도 이대로는 집중이 안 되겠다 싶어서 다시 가방을 싸서 집으로 향한다. 일단 모의고사 성적만 유지한다면 중경대학교 입학도 꿈은 아니다. 중국어 성적도 괜찮고, 정 안되면 아버지 찬스로 시민단체 임원 자녀특례입학 신청을 해봐도 되고. 민주는 아버지가 국정원 출신이라 아무리 성적이 좋아도 출신성분 문제로 한국이나 중국 내 대학은 무리라고 했다.

'2060 한중일통의 해, 중경특별시가 앞서갑니다'

하늘에 떠있는 에드벌룬을 보며 빨리 통일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중국 내 대학으로 편입도 쉬워지고, 국경도 개방되니 중국 여자들 만날 수도 있고, 중국해 지하 케이블로 전력망 공급되니 에어컨도 쓸 수 있을테니까.

- 끝 -

인아

"7번 고객니임"
"네, 들어가자"
"응"

이미 가게 밖에서부터 진동하던 야끼토리의 향기는 왁자지껄한 가게 안에 들어서자 뿌연 수증기와 함께 나의 식욕을 강렬하게 돋운다. 그 증거로 이미 조금 출출하던 뱃속이 단번에 요동치기 시작한다. 인아도 마찬가지다.

"나 배고파"
"얼른 주문하자"

모모와 네기마를 추가하여 모둠 중짜로 주문하고, 오키나와 생맥주도 곁들인다. 별로 관심은 없지만 플레이오프 시즌 야구 캐스터의 현란한 중계는 이미 왁자지껄한 가게 분위기에 더욱 흥을 돋운다. 마른 안주로는 채워지지 않는 단백질에 대한 갈구를 간신히 시원한 생맥주로 달래본다.

"빨리빨리 나와"
"아 배고파"

옷에 배어드는 닭고기의 향과 가게 안을 감도는 훈연의 연기에 초조함을 느낄 무렵 TV 속에서는 드라마틱한 역전 안타가 터지고, 그와 함께 잘 구운 닭꼬치가 나온다. 둘 다 사진 찍을 새도 없이 바로 하나씩 집어들고 입으로 가져간다.

"아 존맛!"
"대박"

그래 봐야 닭꼬치, 그래 봐야 닭고기이건만 어찌 이리도 맛있단 말인가. 갓 구워 나온 닭꼬치의 맛과 향에 어우러지는 레몬즙과 매콤한 소스는 씹는 순간순간을 행복으로 만든다.

"진짜 미쳤다."
"나 여기 또 올래"
"그러자"



아직 배가 다 차기 전, 맛있는 닭꼬치로 그렇게 1차로 간을 보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2차로는 바로 옆의 횟집에 가서 대방어를 조진다. 이미 둘 다 허기는 달랬기에 대방어 소짜에 소주를 곁들이며 보다 고급진 기름진 맛을 음미한다.

"좋다"
"그러게"

살짝 내리다 만 비에 술은 잘 들어간다. 패딩 속 인아의 섹시한 의상은 아까부터 내 시선을 빼앗아 간다. 내 시선을 의식한 인아는 어느새 30대 중반에 접어든 그녀의 나이를 증명하듯 짖궂은 멘트를 던진다.

"아 오빠! 내 가슴 닳겠다, 닳겠어"
"무슨"

그녀의 말에 머쓱하게 소주를 또 한잔 들이킨다. 딱 가볍게 한 병을 비운 시간, 우리는 취기가 완전히 돌기 전 일어선다. 번화가 뒷 편의 부티크 호텔… 아니 모텔로. 이게 무슨 호텔이야.



요즘 모텔은 스타일러도 구비되어 있어서 좋다. 스팀에 옷을 씻기고, 우리는 우리대로 뜨거운 샤워로 하루종일 쌓인 피로를 벗겨낸다. 그리고 언제나의 패턴대로 침대에서 사랑을 나눈다. 일반적인 연인들의 애틋한 사랑으로 시작하는 듯 했던 우리의 관계는 그러나 곧 익숙하게 각자의 패티시를 충족하는 속삭임과 플레이로 이어지며 지난 석달간 쌓인 아쉬움을 원없이 토해낸다.

"나 말이야."
"응"
"승우 오빠랑 헤어졌어."
"왜"
"그냥"

헤어지는데 이유가 있나. 있지. 그러나 '그냥'이라고 던진 대답에 굳이 캐묻지는 않는다. 대답하기 싫어서 그런 대답을 했을 테니까. 하지만 나의 침묵에 그녀는 "더 안 물어봐?" 하며 또 묻는다.

"말해봐"

인아의 가슴에 손을 얹은 채로 이유를 물었다. 무어라 무어라 별로 공감 가지 않는 사연을 쓸데없는 감정묘사까지 잔뜩 집어넣은 채 설명하지만, 내 기준에서는 역시나 별 이유가 아니다. 그저 콩깍지가 벗겨지자 적당히 합리적인 이유를 찾았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근데 넌 그렇게 까탈스러운 애가 왜 나한테는 쿨하냐. 그냥 파트너라서?"

솔직히 그녀가 남친들을 까버린 이유들을 나한테 대입하면 나는 이미 애저녁에 아웃이다. 그런데 왜 나를 아직 만나지? 물론 서로 완벽한 잠자리 파트너이긴 하지만 정말 그 하나로 8년의 관계를 이어오는 것도 놀라운 일 아닐까.

"몰라서 물어?"

인아는 몸을 슥 나에게 밀착하며 다가온다. 사랑스럽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경계를 보내온다. 예쁜 것과 사랑스러운 것은 달라야 한다. 그냥 예쁘고 내숭 전혀 없는 파트너로 족하다. 나는 그저 그녀의 터치에 응할 뿐이다.



1시 51분, 서로 나른함을 느끼며 아까 술자리에서 나누던 이야기들의 보다 심도높은 버전의 대화를 나눈다.
2시 36분, 억지로 모텔방의 티비 채널을 돌려가며 잠과 싸워본다. 극도의 피로를 느끼지만 '모처럼인데' 하는 생각에 한번 더 무리를 한다. "오빠 왜 오늘 무리해?" 하는 인아의 질문에는 그저 "오늘따라 니가 더 이뻐 보여서"라며 답한다.

어느새 새벽 3시 10분. 직장 내 썸남의 이야기를 이어가던 인아의 이야기를 잠시 끊고 씻고 왔더니, 그새 지친 그녀는 그 사이 이미 잠이 들었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예쁘지만, 확실히 예전의 앳된 느낌은 없다. 그래도 여전히 곤히 잠든 얼굴은 귀엽다. 이불을 덮어준다.

그리고 그 순간 자는 줄 알았던 그녀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그러나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오빠 아직 나 좋아해?"

새삼스럽고도 뻔한 질문. 이 관계에 대한 마음 한구석의 찜찜함을 덜어내고 싶은 그런 질문. 그저 "좋아하니까 이렇게 만나지"라는 뻔한 진통제 같은 답을 먼저 떠올렸지만, 역시 그런 진부한 대답을 듣고 싶어 하는 말 역시 아니리라.

"아직도 비가 오네"

나는 대답 대신 괜히 말을 돌리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그러자 인아는 눈을 뜨며 진지하게 물어왔다.

"나 좋아하냐구"

그리고 그 질문에 나는 한술 더 뜨는 답을 한다.

"우리 사귀자, 인아야"

내 딴에는 적당히 그럴싸한 답이라고 생각했지만, 인아 입장에선 아니었나보다. 당장이라도 자려던 그녀의 눈이 확 뜨이며 조금은 정색하며 묻는다.

"마음도 없는데 무슨 연애를 해. 그리고 우리가 연애를 할 수 있어?"

…벌써부터 피곤해진다. 무슨 대답을 하든 그것으로 말꼬리를 이어 자신의 알 수 없는 감정을 배설하려 드는 것이 느껴진다. 피곤하다. 인아와 만나면서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이다. 사랑스럽다 어쩐다 하며 느껴지던 아까의 감정이 단번에 식는다. 쌓일만큼 쌓인 피로가 단번에 치솟는 화로 변한다.

"왜 마음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억누른다고 억눌렀지만 나 스스로도 깜짝 놀랄 정도로 내 목소리에 짜증과 화가 섞여 있다. 하지만 내 답변 자체는 꽤 좋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우리 관계가 정상적이야?"

…화가 섞여 있는 내 목소리와 질문의 내용을 인아는 '내 마음을 왜 이렇게 몰라주냐'라는 식으로 이해한 모양이다. 여전히 징징대는 질문이긴 해도, 목소리는 다시 많이 누그러져 애교가 섞인다. 아니, 그저 단순히 내가 화를 숨기지 못하자 그냥 분위기 망치고 싶지 않아 인아 입장에서도 한 수 접어준 것인지도 모르지만.

질문에 질문으로, 그리고 다시 질문으로 이어지는 대화. 간단히 말해 '답이 없는 대화'. 그리고 스스로 답을 알고 있는 대화. 그냥 아까 잠 슬슬 올 때 잘 것을 그랬나 하며 나는 대답 대신 바로 티비를 껐다.

"뭐라고 말 좀 해봐"

징징대는 인아의 목소리에 다시 한번 폭발할 것 같은 피로를 느낀다. 징징댐을 받아줄 남자친구와 헤어지니 그것을 나에게 쏟아내는 건가 싶어 기가 찼다. 어차피 여자야 만나면 그만이라지만, 8년 세월의 인연이 아까웠다. 딱 오늘 하루만, 딱 한번만 더 참아보기로 했다.

"나는 드라마 작가도 아니고, 심리치료사도 아니야. 그냥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만 말할 수 있어. 너가 좋아. 그게 다야. 피곤하니 너도 나도 예민해. 더 이야기하고 싶으면 푹 자고 내일 이야기 하자"

말이 길어봐야 그 안에서 뭐든 또 트집의 빌미만 줄 뿐이다. 사실 이 역시도 트집 잡으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는 말이고. 단지 지금까지 보아온 인아는 그런 애가 아닐 뿐이다.

"알았어"

그렇게 겨우 일단락 짓고 침대에 다시 누워 눈을 붙인다. 잠이 몰려오다 못해 사르르 녹을 지경이다. 단지 아까만 해도 내 팔베개를 하던 인아는 자기 베개에 머리를 대고 잔다. 어쩌면 좋은 인연 하나를 이렇게 잃을 수도 있겠구나 다시 한번 각오하며 눈을 붙인다.



어색한 침묵 속, 잠의 나락으로 끌려 들어가기 직전 인아의 한 마디가 의식의 저 편에서 들려왔다.

"잘자 오빠"

어렵게 용기를 낸 따뜻한 목소리. 나 역시 겨우 의식을 붙잡아 깨우며 대답했다.

"그래 인아야. 푹 자고 내일 맛있는거 먹으러 가자. 너 좋아할 만한 곳 찾아놨어"
"응"

그렇게 우리는 두 손을 꼭 잡았다. 예쁘지도 깨끗하지도 당당하지도 진지하지도 않지만, 서로 손 놓기 싫은 그런 후진 만남. 어렴풋하게나마 이 만남을 끝내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사귀었다가 헤어지는 것이라는 답을 깨달았고, 어쩌면 아까 그래서 인아가 내 사귀자는 빈말에 예민하게 굴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리고 이런 우리 관계에 대한 진리를 분명 내일 아침이면 새까맣게 잊을 것이라는 안타까움 속에서 나는 그렇게 의식의 끈을 놓았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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