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지자" 소설

최후의 최후까지 미뤄왔던 그 한 마디. 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돌아오는 대답. 헤어지자는 말에 이렇게까지 쿨하게 대답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그래"

답변까지 1초.

눈물 한 방울, 서운함 1그램조차 없는 지나치게 드라이한 이별의 순간. 만난 기간 4년, 가져다 바친 데이트 비용 수천, 싸우고 빌고 화해하고 마음 졸인 마음고생 4년, 함께 한 즐거운 추억 속 사진 수백 수천 장. 그 모두가 그 한 마디에 아스라히 잿가루처럼 사라진다.

"하아"

허탈하지만 무슨 말을 더해야 할까.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나. 무어라 한 마디 쏘아주고 싶기도, 아니면 영원히 기억될 가슴 시린 한 마디, 아니면 슬픈 기억으로 남아 그나마 나를 위로해줄 한 마디? 그러나 그 어떤 말도 지금의 내 감정을, 그리고 그 허무함을 대변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렇게 몇 분의 시간이 흘렀을까. 나도 그녀도 이제 더이상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볼 힘이 없다. 아니 적어도 나는. 어쩌면 그녀는 지루함과 피곤함을 느끼고 있을지 모른다. 거기에 생각이 이르자 피식 웃음이 나온다.

"왜"

내 웃음에 그녀가 반응한다. 무어라 대답하면 좋을까. 생각은 이미 책 한 권을 쓰고도 남지만 서로가 주고 받은 말은 휴대폰 문자 메세지 하나를 다 채우지 못한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 관계의 근원적인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나랑 사귀면서, 나 사랑하기는 했냐"

세상에서 가장 바보 같은 질문. 그러나 어쩌면 지난 몇 년의 시간을 그나마 위로 받을 수 있는 한 마디. 영혼이 없어도 좋고, 진심 따위 남겨 있지 않아도 좋다. '사랑했지' 아니 그냥 '응'이라도 좋다. 나는 그 한 마디를 듣고 싶었다.

"모르겠어"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또 한번 내 가슴을 쓸쓸하게 한다. 그렇구나. 만약 반대였다면 어땠을까. 아마 나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노라고 확답할 수 있으며, 그 사랑하는 마음은 세상을 다 채우고도 모든 것을 불태울 수 있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만약 너를 위해서 죽으라면 죽었을 것이며, 아니 관두자. 어쨌거나 돌아온 답은 그랬다. 나는 또 한번 웃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왜 웃냐고 물었지만 나는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스스로가 불쌍했다.

"차라리 조금 일찍 말해주지 그랬냐.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없었으면서 왜 내 곁에 있었는데"

역시 묻는 것이 비참한 찌질한 질문이다. 하지만 묻고 싶었다. 이번에는 그녀도 답이 없었다.

"그냥 내가 잘해줘서? 호구처럼 다 가져다 바치고 그래서? 버리기는 아깝고 그래서 그냥 적당히 옆에 두고 싶었던거야? 마음에도 없었으면서?"

결국 이렇게 흘러가는건가. 찌질하고, 별로 타격도 가지 않는 짜증나는 질문으로 영원히 좆같은 기억만 남기고 이렇게 병신 같은 이별을 맞이하는 그런 흐름?

"나…"

나의 공격에 그녀는 어렵게 입을 연다. 무슨 말이 나올까. 미안해? 나 그냥 갈게? 아니면 욕 한 마디? 뭘까.

"괜찮아, 말해. 내가 찌질하다고 말하고 싶어? 말해, 욕해도 돼"

눈물이라도 흘리지는 않을까 기대했다. 그냥 헤어지면서 눈물 한 방울 정도는 보여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지난 시간들,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아니 사랑도 안 했다고 했지. 그래. 뭘 바라겠냐. 병신새끼. 스스로가 비참했다.

"갈게. 잘 지내"

흐. 엇갈리는 마음. 아니아니, 엇갈리기는 한건가. 정말로 궁금했다. 슬픈 것인지, 아픈 것인지, 고통스러운지, 해방감이 드는 마음인지. 그녀의 마음은 지금까지도 단 10cm 속을 들여다 볼 수가 없다. 이 와중에 저 말은 어떤 감정에서 어떻게 나온 말일까. 도저히 모르겠다.

"하아"

이 와중에도 묻고 싶다.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지금 니 감정은 어떤지, 내가 헤어지자고 하는데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그래' 라는 말을 하는 과정은 어떤 것인지, 지난 시간들에 대한 감흥이 고작 그 정도였는지, 내가 정말로 그렇게나 매력없고 의미없는 사람이었는지, 너에게 묻고 싶었다. 묻고 싶지 않았지만, 사실 물으면 안되는 질문이지만, 궁금해서 미쳐버리기 전에 묻고 싶었다.

"넌 내가 헤어지자고 하니 기분이 어때? 그냥, 속 시원해? 요만큼이라도 슬프기는 해?"

급기야 병신같이 눈물이 차오른다. 아 시발. 떨리는 목소리를 숨긴다고 숨겼지만 늦었다. 그녀의 표정에 아주 작은 낭패감이 떠오른다. 아니, 떠올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별 변화도 없다.

"나 가볼게"

그녀는 그렇게 가방을 들고 일어선다. 드라이하고 담백하다. 그 이상의 어떤 표현도 붙이기 어려울만큼. 내 연애는 그렇게 끝났다. 다 부숴버리고 싶을 만큼 아찔한 화가 치솟고 스스로의 헛수고가 분했다. 뒤늦게 찾아온 이 감당하기 어려운 분노에 손이 부르르 떨렸고, 그런 나를 힐끔힐끔 바라보는 다른 테이블 너머의 시선들이 분했다. 차오르는 눈물을 그렇게 간신히 삼키며 길게 한숨을 내쉰다.

"후우"

그렇게 한 템포를 넘기자 마냥 다 허무했다. 다른 애들과 다르다. 저 년은 나한테 뒤늦게 다시 연락을 해오지도 않을 것이다. 내가 어느 날 미쳐서 하면 몰라도. 세상에 이런 병신 같은 이별이 또 있을까. 내 호구 같은 연애는 그렇게 허무하게 끝났다. 다시는 이런 연애 따위 안 하겠다는 허무한 다짐만을 남기고.


덧글

  • 밀라 2019/01/07 01:47 # 삭제 답글

    힘내세요 스박님
  • 백인성 2019/01/07 11:36 # 삭제 답글

    응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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