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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아

"7번 고객니임"
"네, 들어가자"
"응"

이미 가게 밖에서부터 진동하던 야끼토리의 향기는 왁자지껄한 가게 안에 들어서자 뿌연 수증기와 함께 나의 식욕을 강렬하게 돋운다. 그 증거로 이미 조금 출출하던 뱃속이 단번에 요동치기 시작한다. 인아도 마찬가지다.

"나 배고파"
"얼른 주문하자"

모모와 네기마를 추가하여 모둠 중짜로 주문하고, 오키나와 생맥주도 곁들인다. 별로 관심은 없지만 플레이오프 시즌 야구 캐스터의 현란한 중계는 이미 왁자지껄한 가게 분위기에 더욱 흥을 돋운다. 마른 안주로는 채워지지 않는 단백질에 대한 갈구를 간신히 시원한 생맥주로 달래본다.

"빨리빨리 나와"
"아 배고파"

옷에 배어드는 닭고기의 향과 가게 안을 감도는 훈연의 연기에 초조함을 느낄 무렵 TV 속에서는 드라마틱한 역전 안타가 터지고, 그와 함께 잘 구운 닭꼬치가 나온다. 둘 다 사진 찍을 새도 없이 바로 하나씩 집어들고 입으로 가져간다.

"아 존맛!"
"대박"

그래 봐야 닭꼬치, 그래 봐야 닭고기이건만 어찌 이리도 맛있단 말인가. 갓 구워 나온 닭꼬치의 맛과 향에 어우러지는 레몬즙과 매콤한 소스는 씹는 순간순간을 행복으로 만든다.

"진짜 미쳤다."
"나 여기 또 올래"
"그러자"



아직 배가 다 차기 전, 맛있는 닭꼬치로 그렇게 1차로 간을 보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2차로는 바로 옆의 횟집에 가서 대방어를 조진다. 이미 둘 다 허기는 달랬기에 대방어 소짜에 소주를 곁들이며 보다 고급진 기름진 맛을 음미한다.

"좋다"
"그러게"

살짝 내리다 만 비에 술은 잘 들어간다. 패딩 속 인아의 섹시한 의상은 아까부터 내 시선을 빼앗아 간다. 내 시선을 의식한 인아는 어느새 30대 중반에 접어든 그녀의 나이를 증명하듯 짖궂은 멘트를 던진다.

"아 오빠! 내 가슴 닳겠다, 닳겠어"
"무슨"

그녀의 말에 머쓱하게 소주를 또 한잔 들이킨다. 딱 가볍게 한 병을 비운 시간, 우리는 취기가 완전히 돌기 전 일어선다. 번화가 뒷 편의 부티크 호텔… 아니 모텔로. 이게 무슨 호텔이야.



요즘 모텔은 스타일러도 구비되어 있어서 좋다. 스팀에 옷을 씻기고, 우리는 우리대로 뜨거운 샤워로 하루종일 쌓인 피로를 벗겨낸다. 그리고 언제나의 패턴대로 침대에서 사랑을 나눈다. 일반적인 연인들의 애틋한 사랑으로 시작하는 듯 했던 우리의 관계는 그러나 곧 익숙하게 각자의 패티시를 충족하는 속삭임과 플레이로 이어지며 지난 석달간 쌓인 아쉬움을 원없이 토해낸다.

"나 말이야."
"응"
"승우 오빠랑 헤어졌어."
"왜"
"그냥"

헤어지는데 이유가 있나. 있지. 그러나 '그냥'이라고 던진 대답에 굳이 캐묻지는 않는다. 대답하기 싫어서 그런 대답을 했을 테니까. 하지만 나의 침묵에 그녀는 "더 안 물어봐?" 하며 또 묻는다.

"말해봐"

인아의 가슴에 손을 얹은 채로 이유를 물었다. 무어라 무어라 별로 공감 가지 않는 사연을 쓸데없는 감정묘사까지 잔뜩 집어넣은 채 설명하지만, 내 기준에서는 역시나 별 이유가 아니다. 그저 콩깍지가 벗겨지자 적당히 합리적인 이유를 찾았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근데 넌 그렇게 까탈스러운 애가 왜 나한테는 쿨하냐. 그냥 파트너라서?"

솔직히 그녀가 남친들을 까버린 이유들을 나한테 대입하면 나는 이미 애저녁에 아웃이다. 그런데 왜 나를 아직 만나지? 물론 서로 완벽한 잠자리 파트너이긴 하지만 정말 그 하나로 8년의 관계를 이어오는 것도 놀라운 일 아닐까.

"몰라서 물어?"

인아는 몸을 슥 나에게 밀착하며 다가온다. 사랑스럽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경계를 보내온다. 예쁜 것과 사랑스러운 것은 달라야 한다. 그냥 예쁘고 내숭 전혀 없는 파트너로 족하다. 나는 그저 그녀의 터치에 응할 뿐이다.



1시 51분, 서로 나른함을 느끼며 아까 술자리에서 나누던 이야기들의 보다 심도높은 버전의 대화를 나눈다.
2시 36분, 억지로 모텔방의 티비 채널을 돌려가며 잠과 싸워본다. 극도의 피로를 느끼지만 '모처럼인데' 하는 생각에 한번 더 무리를 한다. "오빠 왜 오늘 무리해?" 하는 인아의 질문에는 그저 "오늘따라 니가 더 이뻐 보여서"라며 답한다.

어느새 새벽 3시 10분. 직장 내 썸남의 이야기를 이어가던 인아의 이야기를 잠시 끊고 씻고 왔더니, 그새 지친 그녀는 그 사이 이미 잠이 들었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예쁘지만, 확실히 예전의 앳된 느낌은 없다. 그래도 여전히 곤히 잠든 얼굴은 귀엽다. 이불을 덮어준다.

그리고 그 순간 자는 줄 알았던 그녀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그러나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오빠 아직 나 좋아해?"

새삼스럽고도 뻔한 질문. 이 관계에 대한 마음 한구석의 찜찜함을 덜어내고 싶은 그런 질문. 그저 "좋아하니까 이렇게 만나지"라는 뻔한 진통제 같은 답을 먼저 떠올렸지만, 역시 그런 진부한 대답을 듣고 싶어 하는 말 역시 아니리라.

"아직도 비가 오네"

나는 대답 대신 괜히 말을 돌리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그러자 인아는 눈을 뜨며 진지하게 물어왔다.

"나 좋아하냐구"

그리고 그 질문에 나는 한술 더 뜨는 답을 한다.

"우리 사귀자, 인아야"

내 딴에는 적당히 그럴싸한 답이라고 생각했지만, 인아 입장에선 아니었나보다. 당장이라도 자려던 그녀의 눈이 확 뜨이며 조금은 정색하며 묻는다.

"마음도 없는데 무슨 연애를 해. 그리고 우리가 연애를 할 수 있어?"

…벌써부터 피곤해진다. 무슨 대답을 하든 그것으로 말꼬리를 이어 자신의 알 수 없는 감정을 배설하려 드는 것이 느껴진다. 피곤하다. 인아와 만나면서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이다. 사랑스럽다 어쩐다 하며 느껴지던 아까의 감정이 단번에 식는다. 쌓일만큼 쌓인 피로가 단번에 치솟는 화로 변한다.

"왜 마음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억누른다고 억눌렀지만 나 스스로도 깜짝 놀랄 정도로 내 목소리에 짜증과 화가 섞여 있다. 하지만 내 답변 자체는 꽤 좋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우리 관계가 정상적이야?"

…화가 섞여 있는 내 목소리와 질문의 내용을 인아는 '내 마음을 왜 이렇게 몰라주냐'라는 식으로 이해한 모양이다. 여전히 징징대는 질문이긴 해도, 목소리는 다시 많이 누그러져 애교가 섞인다. 아니, 그저 단순히 내가 화를 숨기지 못하자 그냥 분위기 망치고 싶지 않아 인아 입장에서도 한 수 접어준 것인지도 모르지만.

질문에 질문으로, 그리고 다시 질문으로 이어지는 대화. 간단히 말해 '답이 없는 대화'. 그리고 스스로 답을 알고 있는 대화. 그냥 아까 잠 슬슬 올 때 잘 것을 그랬나 하며 나는 대답 대신 바로 티비를 껐다.

"뭐라고 말 좀 해봐"

징징대는 인아의 목소리에 다시 한번 폭발할 것 같은 피로를 느낀다. 징징댐을 받아줄 남자친구와 헤어지니 그것을 나에게 쏟아내는 건가 싶어 기가 찼다. 어차피 여자야 만나면 그만이라지만, 8년 세월의 인연이 아까웠다. 딱 오늘 하루만, 딱 한번만 더 참아보기로 했다.

"나는 드라마 작가도 아니고, 심리치료사도 아니야. 그냥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만 말할 수 있어. 너가 좋아. 그게 다야. 피곤하니 너도 나도 예민해. 더 이야기하고 싶으면 푹 자고 내일 이야기 하자"

말이 길어봐야 그 안에서 뭐든 또 트집의 빌미만 줄 뿐이다. 사실 이 역시도 트집 잡으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는 말이고. 단지 지금까지 보아온 인아는 그런 애가 아닐 뿐이다.

"알았어"

그렇게 겨우 일단락 짓고 침대에 다시 누워 눈을 붙인다. 잠이 몰려오다 못해 사르르 녹을 지경이다. 단지 아까만 해도 내 팔베개를 하던 인아는 자기 베개에 머리를 대고 잔다. 어쩌면 좋은 인연 하나를 이렇게 잃을 수도 있겠구나 다시 한번 각오하며 눈을 붙인다.



어색한 침묵 속, 잠의 나락으로 끌려 들어가기 직전 인아의 한 마디가 의식의 저 편에서 들려왔다.

"잘자 오빠"

어렵게 용기를 낸 따뜻한 목소리. 나 역시 겨우 의식을 붙잡아 깨우며 대답했다.

"그래 인아야. 푹 자고 내일 맛있는거 먹으러 가자. 너 좋아할 만한 곳 찾아놨어"
"응"

그렇게 우리는 두 손을 꼭 잡았다. 예쁘지도 깨끗하지도 당당하지도 진지하지도 않지만, 서로 손 놓기 싫은 그런 후진 만남. 어렴풋하게나마 이 만남을 끝내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사귀었다가 헤어지는 것이라는 답을 깨달았고, 어쩌면 아까 그래서 인아가 내 사귀자는 빈말에 예민하게 굴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리고 이런 우리 관계에 대한 진리를 분명 내일 아침이면 새까맣게 잊을 것이라는 안타까움 속에서 나는 그렇게 의식의 끈을 놓았다.

- 끝 -

덧글

  • 노루 2021/12/18 23:15 # 삭제 답글

    형님 기다렸습니다 저 화를 참는건 거의 도인수준인데 대단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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