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광고

# 스타일박스의 소설을 이메일로 받아보세요! [ 링크 ]

운동권

부채로 더위를 달래며 바둑 묘수풀이를 하시던 아버지는, 뉴스 속 대학생 시위대를 보며 잔뜩 역정을 내고는 혀를 찼다.

"저런 놈들이 나라 말아먹는 놈들이라고. 부모들이 죽어라 키우고 가르쳐서 대학 보내놨더니 하는 짓이라고는 데모질이라니. 아니 이 좋은 세상에 배가 부르면 저런 데모질이야? 그리고 저 부모들은 얼마나 속 터질거야? 에휴, 너도 혹여라도 대학 가서 저 지랄 하고 다닐 거 같으면 그냥 가지도 마. 알겠어?"

그는 뿔테안경까지 고쳐쓰며 뜬금없는 엄포를 놓았지만, 나는 별다른 대꾸 대신 "저 독서실 다녀올게요" 하고 집을 나섰다. 꼰대 말에 말 덧붙여봐야 싸움만 나니까. 건조한 공기가 입술과 코를 마르게 한다.

"응?"

정치인에 대한 선정적인 욕이 적힌 찌라시가 발에 채인다. 조금은 유치할 정도로 선정적인 멘트에 그저 피식 웃음이 나온다. 아마 아까 뉴스에서 나오던 운동권 시위대의 찌라시이리라. 우리 집이 대학가이다보니 집 근처 골목길에도 이런 찌라시와 급조한 벽보들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쩝"

무슨 싹 다 명단공개해서 사회생활 못하게 해야 한다느니 하는 극단적인 아버지 말에 완전히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 역시도 솔직히 반 정도는 그의 의견에 공감했다. 저렇게 화염병에 쇠파이프까지 들고 격렬하게 시위를 하는 대학생들의 모습은 무엇을 위한 투쟁인지 의문이 갈 정도였으니까.

"후우"

어쨌든 주말 저녁의 독서실은 한가했다. 내가 즐겨앉는 자리에 앉아 가방에서 책과 노트를 꺼내노라니 뒤에서 누가 나를 가볍게 툭 친다. 민주였다. 사실 주말임에도 굳이 독서실을 나온 이유의 80%는 '혹시 그녀와 만날 수 있을까'를 기대해서였다. 그리고 그 기대는 이렇게 완벽히 적중했다. 그녀는 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잠깐 담배나 한 대 피우자"
"어"

나는 담배를 안 피우지만, 그녀를 따라 말없이 1층으로 내려가 골목 뒤로 돌아갔다. 담배를 입에 문 민주는 벽에 몸을 기댄 채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나 그냥 대학 안 가려고"
"왜"
"시국이 이런 시국인데 대학교 간다고 뭐가 달라지니?"
"시국이 왜"

내 시큰둥한 말에 민주는 기가 차다는 듯 말했다.

"국가가 시민을 탄압하고, 억압하고, 감시하고, 어? 이런 독재국가가, 말이 돼? 헌법에서 보장하는…"

하지만 민주는 스스로의 목소리가 높다는 것을 깨닫고 곧 작게 말했다.

"이런 인권유린 그 자체인 세상이 말이 되냐고"

물론 나 역시 정치인 욕 한다고 끌려가서 고문 받고 이런 건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무슨 독재가 어쩌고 인권유린이 어쩌고 하는건 너무 오바 아니냐고 말을 하려던 그 순간, 눈 앞에 경찰 드론이 나타났다.

"흡!"

불과 10초 전까지 국가가 시민을 탄압하고 감시하고 어쩌고 하는, 운동권 대학생들이나 할법한 대화를 나누던 차였기에 나도 놀라고 민주는 심지어 바닥에 주저앉기까지 했다. 그 와중에 나는 비겁하게 '나는 아무 말도 안 했어요'라는 변명을 떠올리고 있었지만 경찰 드론은 그저

"금연구역 내 흡연은 벌금 1천 위안입니다. 시민번호 XX-401124-14o2TU2n 한민주, 벌금통지 완료"

라는 말을 세 번 반복한 뒤 다시 그대로 붕 날아가 버렸다. 민주는 겁에 질려 얼굴이 다 하얗게 변할 정도였지만, 겨우 한숨을 돌리고는 나에게 말했다.

"이게 정말 말이 된다고 생각해?"

나는 대답 대신 그녀의 손을 잡고 일으켰을 따름이었다. 아까 가슴이 철렁한 그 순간 조금은 민주의 말이 이해가 갔지만, 그래도 역시나 2058년의 요즘 같은 세상에 아직도 "우리의 모든 메신저 대화는 감청되고 있어"라면서 불편하게 손에 반지폰을 끼우고, 메신저도 안 쓰는 그 고집은 도통 이해가 안 갔다.

"메신저로 뭔 대화를 하길래?"
"대화의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고. 그걸 국가가 감시하는 자체가 문제인거야"
"아니 애초에 나쁜 대화를 안 하면 되는 문제 아니야?"
"아 정말 답답하다!"
"미안. 다른 이야기 할까?"

…뭐, 여자애들끼리는 의외로 남친에 대해서 별별 이야기들을 다 한다던데. 민주도 남친 있는 애들과 약간 그런 대화를 하는걸까? 조금은 기대를 하게 만든다. 근데 사실 그 이상으로 속 터지는건 나다. 무슨 중국 공장에서 생산되는 신형 이어팟은 뇌파 감청을 한다느니 하는 기가 막힌 소리에 조금은 귀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민주 같은 애랑 어울리다보면 나 역시 위험해지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도 오늘 처음으로 조금 들었다.

"으휴"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자리로 돌아와 책을 켰다. 독재에 항거해 싸운 위대한 혁명영웅들이라며 1980년대 혁명열사 대학생들의 모습을 재생하는 디지털북을 보노라니, 뜬금없이 요즘의 메신저 검열과 정치인 비판의 자유 등을 논하는 대학생들이 떠올랐지만… 역시나 경찰 드론을 불태우고, 폴리스봇에 화염병을 던지는 막 나가는 요즘 대학생들과 그들을 비교하는건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별 생각을 다하는구나"

아무래도 이대로는 집중이 안 되겠다 싶어서 다시 가방을 싸서 집으로 향한다. 일단 모의고사 성적만 유지한다면 중경대학교 입학도 꿈은 아니다. 중국어 성적도 괜찮고, 정 안되면 아버지 찬스로 시민단체 임원 자녀특례입학 신청을 해봐도 되고. 민주는 아버지가 국정원 출신이라 아무리 성적이 좋아도 출신성분 문제로 한국이나 중국 내 대학은 무리라고 했다.

'2060 한중일통의 해, 중경특별시가 앞서갑니다'

하늘에 떠있는 에드벌룬을 보며 빨리 통일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중국 내 대학으로 편입도 쉬워지고, 국경도 개방되니 중국 여자들 만날 수도 있고, 중국해 지하 케이블로 전력망 공급되니 에어컨도 쓸 수 있을테니까.

- 끝 -

덧글

  • ㅅㅂ 2021/12/20 11:11 # 삭제 답글

    흑흑 중공만세
  • 걈뮤 2021/12/22 20:08 # 삭제 답글

    훠훠훠 중국몽에 함께해야하지 않겠습니꽈?
  • ㅁㄴㅇㄹ 2022/01/24 11:59 # 삭제 답글

    와 미친ㅋㅋㅋㅋㅋㅋㅋ 이 짧은 글에 이런 반전이 ㅋㅋㅋㅋ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