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웠다. 아침에는 이 여자, 저녁에는 저 여자를 탐하는 생활. 그랬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솔직히 그랬다. 심지어 허무한 원나잇도 아니다. 두 여자 모두와 사랑을 하고 있는 상황. 서로 다른 두 타입의 여자를 만나는 것은 즐거웠다.
단순히 성적으로 즐겁기만 한 것도 아니다. 놀랍게도, 이미 상당한 권태에 빠져들었던 가영과의 관계도 그 무렵에는 나쁘지 않았다. 뭐라고 해야할까…. 마냥 끌려다니기만 하던 가영에 대한 나의 집착(?) 아닌 집착이, 아라와의 관계 덕분에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연애의 기본은 밀당이라고 하던가. 그 와중에 그녀 앞에서 매번 작아지기만 하던 나의 자존감도 많이 회복이 되었다.
"잘 생겼어요"
생전에 들어본 적이 없던 말이다. 내가 "에이~" 하며 손사레를 쳐도 "정말인데. 눈 너무 이뻐요. 나보다도 이쁜 눈이야" 라면서 말해주는 아라의 칭찬은 나의 자존감을 북돋아 주었다. 거울 앞에서 꾸미는 시간이 늘었다.
"오~"
새 옷을 입고 아라를 만났을 때 그녀가 보여준 그 반응… 사실은 가영에게 듣고 싶었던 말과 표정이었다. 무척이나 듣고 싶었던 말들. 옷 예쁘다는 말, 잘 생겼다는 말, 같이 있어서 즐겁다는 말들. 연인에게 의례 하는 겉치레든, 그냥 빈 말이든 뭐든 상관없었다. 연인에게 듣고 싶었던 말들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 의미없어진 말들이다.
가영은 카페에 앉아 있었다. 떨리는 마음, 미안한 마음, 도망치고 싶은 마음 등 복잡한 마음으로 그녀가 앉아있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다행히 가게 안에 손님은 우리 뿐이었다. 우리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렇게 앉아있었다.
"…왜 그랬어"
긴 침묵을 깨고 벌써부터 울먹이는 말투로 가영이 말했다. 나는 구차한 변명 대신 미안하다고만 말했다. 가영은 울음을 터뜨렸다. 정말 한심한 이야기지만 그때 나는 처음으로 묘한 정복감, 승리감을 느꼈다. 내내 끌려다니던 연애, 그저 쩔쩔매기만 하던 연애에서 처음으로 그녀의 울음을 터뜨린 순간이었다.
"미안해…"
하지만 역시나 가영의 눈물을 보자 그제서야 진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도대체 왜 그런 것인가 하는 회한이 들었다. 그냥… 문득 찾아온 일탈이었는지도 모른다. 가영을 만나면서 나 역시도 속으로 많이 곯았다. 서운한 일들이 많았다.
'아니…그건 근본적인 이유가 아니야'
그냥, 솔직하게 말해서 새로운 여자가 나에게 호감을 보인다는 것, 그리고 그 여자와의 만남은 마치 '운명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모처럼의 재회였다는 것이… 날 설레게 만들었다.
"미안해"
나는 세번째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뒤늦게 눈물을 찔끔 보였다. 그 눈물만큼은 진짜였다. 미안했다. 가영은 품에서 새 휴대폰을 내밀었다.
"내가 휴대폰 던져서 망가뜨렸잖아. 이거 너 써"
휴대폰을 받아들었다. 이렇게까지 날 생각해주는데… 하는 생각에 또 한번 미안했다. 나는 속으로 마음으로 굳혔다. 가영에게 다시 돌아가기로. 그날 일에 대한 공허한 대화 몇 마디와 이야기를 나눈 후, 나는 다시 한번 다짐하듯 말했다.
"정말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거지?"
울먹이며 묻는 가영. 그랬다. 애초에 그랬어야 할 일이다. 나는 나의 순정을 스스로 망가뜨렸다. 하지만 그녀가 다시 기회를 주었다.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했다.
"다신 안 그럴게"
가영을 만나고 집에 돌아왔다. 맥이 탁 풀렸다. 마음을 다잡기로 했다. 중심을 찾고, 다시 돌아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바람을 피웠고 그것을 두 여자에게 들켰는데 두 여자가 모두 나를 용서했다. 놀랍게도 두 여자가 다 나에게 기회를 주었다.
내가 무슨 대단한 매력을 가졌다고?
정이 쌓여서, 너무 갑작스러운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동안의 관계에 대한 회고와 반성, 혹은 그저 놓는 순간 상대에게 뺏길 것이 분명해서?
그 어떤 이유든 내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어쨌든 너무 피곤했다. 집에 돌아와 눈을 감았다. 핑핑 도는 머릿 속과 믿기지 않는 현실 사이에서 이미 내 머릿 속은 과부하 상태였다. 잠을 자기로 했다.
…아마 보통이었다면 그쯤해서 정신을 차리고(?) 가영에게로 돌아가는 엔딩이 기다리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한숨 푹 자고 일어나, 휴대폰부터 확인을 하니 아라의 카톡이 몇 개 와 있었다.
[ 뭐하고 있어? 밥은 챙겨 먹었어? 난 고기고기 편시락 먹었어 ]
[ 오늘 손님 없어서 넘 편하다ㅋㅋ ]
아마 아라로서도 무척 혼란스러울 시기가 틀림없을텐데도, 애써 아무렇지 앟은 척 카톡을 보내오고 있었다. 그 순간 또 아라가 한없이 가여웠다.
아라는 나에게 많은 비밀을 털어놓았다. 어린 시절부터 겪은 가정폭력과 질 안 좋았던 전 남친들의 이야기. 그녀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어쩌면 그런 병신 쓰레기들이 있을까' 싶었지만 사실 그놈들보다 더한 쓰레기가 나 아닌가. 물론 가영에게도 그랬지만. 그러고보니 이제와서 아라에게 다시 헤어지자고 말하기가 버거웠다.
실리적인 측면에서의 걱정도 새삼 또아리를 틀었다. 설령 가영이 지금은 다시 나를 이해해준다고 치더라도, 그 딱 부러지는 성격이 평생 이 일을 없던 일로 하고 넘어갈 수 있을까. 사귀는 내내 나를 힘들게 하지는 않을까? 물론 가영이가 그럴 애는 아니지만… 아라라고 해서 또 항상 나를 이해해주라는 법도 없고.
'어쩌면 좋지?'
우유부단이라고 해도 좋고, 미련하다고 해도 좋지만 일단은 그랬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어졌다. 불과 반나절 전에 '이제는 가영에게로 돌아가야 할 때'라고 확신했던 내가 원룸 창문 밖으로 지는 노을 앞에 그저 어쩌면 좋을까 라는 생각만 하게 됐다.
"밥은 좀 먹었어?"
"입맛이 없어서, 아직"
"그래두 먹어야지. 기운 좀 차려. 걱정된다"
내가 저지른 일 때문에 그랬을 지언정 가영이 힘없이 밥도 안 먹고 있다는 말에 마음이 아렸다. 그리고 전화를 끊고 또 애써 나를 위해 생글대는 아라의 목소리를 듣고 나면 가슴이 아팠다.
'병신새끼'
스스로를 욕했지만 도무지 선택을 할 수가 없었다. 생각이 돌고돌다 나중에는 '왜 문명사회는 일부이처제를 허용하지 않는 것인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런 망상까지 하다가 드디어는 나도 배가 고팠다. 햇반을 데워 밥을 먹었다. 아라가 자기는 안 먹는다며 한 보따리 챙겨준 참치캔을 따서 먹으며. 가영이가 사다준 물컵에 물을 마시며.
그 이틀 뒤, 나는 아라를 안았다. 어쩌면 나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여자로서의 위기감 때문이었을까. 평소보다 더 애틋한 느낌이었다. 또 그로부터 한달 여의 시간이 흐른 후, 이번에 나는 가영을 안았다. 그녀야말로 나를 완전히 잃을 뻔 했다는 생각 때문인지 더욱 적극적인 느낌이었다. 아라를 만나기 전, 한달에 한번을 할까 말까했던 가영과 나는 빈도가 잦아졌다. 아라와의 관계 역시 더 잦아졌다.
그 와중에 웃기는 것이라면, 아라를 품에 끌어안을 때 가영을 생각하며 미안함을 느꼈고, 가영을 품에 안으며 아라의 외로움을 걱정했다는 사실이다.
"무슨 생각해?"
"아무 생각도 안 해"
"…"
"아니, 멍 때릴 수도 있잖아"
"…"
한번도 가영과의 일에 대해 캐묻지 않았지만, 아라는 종종 수시로 그런 질문을 했다. 아마도 내가 그녀 생각을 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사랑해"
그래도 시간보다 좋은 약은 없었다. 한 달, 두 달의 시간이 흐르자 그토록 암울했던 시간은 기억에서 아주 천천히 사라지기 시작했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공포와 놀라움을 겪을 일도 없었다.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은 채. 물론 둘 중 하나를 정리해야지, 정리해야지 마음 속에 큰 돌덩이가 자리잡고 있었지만 감히 그것을 캐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어쩌면 나는 그저 '그러다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 '어떻게든 되겠지'는 생각보다 그리 멀지 않은 시간에 다시 찾아왔다. 그 때 그 날로부터 몇 달 쯤 지났을 때였으리라.
"하!"
어느 금요일 밤, 몇 달 만에 가영이 내 원룸에 찾아왔다. 몇 달만의 일이었다. 불과 10분 거리에 떨어진 가영의 원룸이었지만, 그녀는 내 원룸에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평생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그 광경을 또 볼까 봐 걱정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영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날도 나는 아라와 벌거벗은 채로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
믿고 다시 한번 기회를 준 남친이, 또 다시 그때 그 여자와 함께 이불 속에 누워있는 모습을 본 가영의 기분은 도대체 어땠을까. 감히 짐작도 가지 않는다.
"잠깐만요"
가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돌아나섰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라가 그녀를 따라나섰다.
"가영씨, 잠깐 이야기 좀 해요"
"너랑 할 이야기 없어"
아라가 그때 가영과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나는 모른다. 단지 아라는 필사적으로 가영과 뭔가 이야기를 하고 싶어했고, 가영은 그러나 말조차 섞고 싶지 않아했다.
나는 뒤늦게 참담한 마음과 빙글빙글 도는 머리를 붙잡고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둘이 건물 복도에서 실랑이를 할 동안 나는 천천히 옷을 입었다. 마음이 무거웠다. 사실 언젠가 찾아올 일이긴 했다. 그저 하루하루 미루고 있었을 뿐. 대가를 치를 순간이 다시 찾아왔을 뿐이다.
짝.
나는 가영에게 뺨을 맞았다. 그녀는 참 손이 매웠다. 건물 앞에서 가영이 말했다.
"니 짐 다 싸놓을테니, 30분 있다가 내 집에 있는 니 짐, 다 가져가"
가영의 통보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미 정리했다며 아라와 가영 모두를 속이던 나는 다시 한번 최악의 형태로 둘을 배신한 셈이었다. 울면서 가영은 집으로 향했고, 나는 멍하니 서있었다.
짝.
이번에는 아라가 내 뺨을 때렸다. 그 와중에도 뒤집어 쓰고 나왔던 돗수 없는 안경이 날아갔다. 다 틀린 것일까.
'내가 지금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일까'
아라는 물론 매력적이고, 나에게 과분한 착한 애다. 아마 얘랑 헤어진다면 다시 이런 애랑 만나기 힘들겠지. 하지만 그건 가영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평생의 짝이 될 수도 있는 여자인데'
부모님의 병환과 경제적 몰락. 서로가 가장 힘든 시기를 함께 위로하며 버틴 사람이다. 내가 정말 비루할 때 나를 케어했고, 나 역시 그녀에게 최선을 다했다. 심지어 바람을 피웠어도 나를 용서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런 그녀를 나는 또 배신했다. 그리고 이렇게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다. 길게 한숨을 쉬는 그 순간, 아라는 내 안경을 집어 들었다.
"미안해"
그 와중에도 내 뺨을 때렸다며, 미안하다며 나를 달래는 아라.
"가지마. 걔네 집 가지 말라고"
아라는 나에게 말했다. 나는 무너져 내리는 정신줄을 겨우 붙잡으며 대답했다.
"가야지. 걔 집에 있는 내 짐 가져와야지"
그러자 이번에는 아라가 말했다.
"같이 가"
"혼자 다녀올게"
"같이 가!"
나는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또 비정한 생각을 했다. 어차피 가영은 이대로 끝이다. 그렇다면 아라라도 붙잡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 같이 가. 근데 일단은 문 앞에 서있어. 너까지 걔네 집에 들어갈 필요는 없잖아"
가영은 내 짐을 깔끔하게 내 가방과 종이백 등등에 담아 문 앞에 내놓았다. 나는 아라와 함께 그 짐을 들고 집으로 향했다. 참담한 기분이었다. 정말 일을 크게 그르친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조강지처 버리면 안된다던데'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났고, 한편으로는 애써 '아라도 조강지처야' 하면서 나를 달랬다.
하지만 집에 거의 다 온 순간, 나는 갑자기 주저앉았다. 그렇게 힘들게 시작했고 어렵게 이어온 연애가 정말로 이렇게 끝나는구나 하는 실감이 집 앞에 거의 다 와서 느껴졌다. 바로 옆에 아라가 내 짐을 함께 들어주고 있었음에도.
'다 놓아버리고 싶다'
그리고 내가 주저 앉은 그 순간 아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가"
나는 그저 눈을 질끈 감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렇게 힘들면 가. 내가 사라지면 되잖아. 너네 둘 다시 만나면 되잖아…"
아라도 울고 있었다. 그랬다. 가영에게도 그렇지만, 아라에게도 나는 다시 없을 나쁜 놈이다. 여친이 있었음에도 속이고 만나서는, 몇 번 잠자리만 하고서는 헤어지자고 하질 않나, 몇 달을 양다리를 걸치지를 않나, 분명히 정리하겠다고 해놓고서는 몇 달이 지나도록 계속 속이고는, 이제는 아예 지 여친이랑 헤어졌다고 제자리에 주저앉아 울먹이는 병신 짓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라 입장에서도 정이 떨어질 만 했다.
"아니야, 그냥 너무 스트레스가 커서 그랬을 뿐이야"
나는 짐을 다시 들고 일어섰다. 그리고 아라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을 잡는 대신 다시 한번 싸대기를 날려도 할 말이 없건만, 아라는 그저 "미안해. 때려서" 하고 재차 사과를 할 따름이었다. 설령 그것이 '이 와중의 착한 척'이라고 해도 상관은 없었다. 두 여자한테 싸대기를 맞고, 오래 사귄 여친과 헤어지는 순간의 무너지는 멘탈을 잡아주었으니까.
"아라야, 내가 미안해. 잘할께"
나는 그렇게 아라의 손을 꼭 잡았다. 우리는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그 날의 일은 일단락 되었다. 하지만 그게 끝은 아니었다. 아라와 나와 가영의 삼각관계는 그게 겨우 시작이었다.
"다신 바람 안 피울거지?"
"어"
두 여자의 삶을 지옥으로 몰고 간… 착한 척, 순둥이인 척, 그저 유쾌한 척 가면을 쓴 진정한 쓰레기의 이야기는 이제 겨우 시작했을 따름이었다.
< 계속 >
단순히 성적으로 즐겁기만 한 것도 아니다. 놀랍게도, 이미 상당한 권태에 빠져들었던 가영과의 관계도 그 무렵에는 나쁘지 않았다. 뭐라고 해야할까…. 마냥 끌려다니기만 하던 가영에 대한 나의 집착(?) 아닌 집착이, 아라와의 관계 덕분에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연애의 기본은 밀당이라고 하던가. 그 와중에 그녀 앞에서 매번 작아지기만 하던 나의 자존감도 많이 회복이 되었다.
"잘 생겼어요"
생전에 들어본 적이 없던 말이다. 내가 "에이~" 하며 손사레를 쳐도 "정말인데. 눈 너무 이뻐요. 나보다도 이쁜 눈이야" 라면서 말해주는 아라의 칭찬은 나의 자존감을 북돋아 주었다. 거울 앞에서 꾸미는 시간이 늘었다.
"오~"
새 옷을 입고 아라를 만났을 때 그녀가 보여준 그 반응… 사실은 가영에게 듣고 싶었던 말과 표정이었다. 무척이나 듣고 싶었던 말들. 옷 예쁘다는 말, 잘 생겼다는 말, 같이 있어서 즐겁다는 말들. 연인에게 의례 하는 겉치레든, 그냥 빈 말이든 뭐든 상관없었다. 연인에게 듣고 싶었던 말들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 의미없어진 말들이다.
가면
- 4화 -
가영은 카페에 앉아 있었다. 떨리는 마음, 미안한 마음, 도망치고 싶은 마음 등 복잡한 마음으로 그녀가 앉아있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다행히 가게 안에 손님은 우리 뿐이었다. 우리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렇게 앉아있었다.
"…왜 그랬어"
긴 침묵을 깨고 벌써부터 울먹이는 말투로 가영이 말했다. 나는 구차한 변명 대신 미안하다고만 말했다. 가영은 울음을 터뜨렸다. 정말 한심한 이야기지만 그때 나는 처음으로 묘한 정복감, 승리감을 느꼈다. 내내 끌려다니던 연애, 그저 쩔쩔매기만 하던 연애에서 처음으로 그녀의 울음을 터뜨린 순간이었다.
"미안해…"
하지만 역시나 가영의 눈물을 보자 그제서야 진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도대체 왜 그런 것인가 하는 회한이 들었다. 그냥… 문득 찾아온 일탈이었는지도 모른다. 가영을 만나면서 나 역시도 속으로 많이 곯았다. 서운한 일들이 많았다.
'아니…그건 근본적인 이유가 아니야'
그냥, 솔직하게 말해서 새로운 여자가 나에게 호감을 보인다는 것, 그리고 그 여자와의 만남은 마치 '운명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모처럼의 재회였다는 것이… 날 설레게 만들었다.
"미안해"
나는 세번째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뒤늦게 눈물을 찔끔 보였다. 그 눈물만큼은 진짜였다. 미안했다. 가영은 품에서 새 휴대폰을 내밀었다.
"내가 휴대폰 던져서 망가뜨렸잖아. 이거 너 써"
휴대폰을 받아들었다. 이렇게까지 날 생각해주는데… 하는 생각에 또 한번 미안했다. 나는 속으로 마음으로 굳혔다. 가영에게 다시 돌아가기로. 그날 일에 대한 공허한 대화 몇 마디와 이야기를 나눈 후, 나는 다시 한번 다짐하듯 말했다.
"정말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거지?"
울먹이며 묻는 가영. 그랬다. 애초에 그랬어야 할 일이다. 나는 나의 순정을 스스로 망가뜨렸다. 하지만 그녀가 다시 기회를 주었다.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했다.
"다신 안 그럴게"
가영을 만나고 집에 돌아왔다. 맥이 탁 풀렸다. 마음을 다잡기로 했다. 중심을 찾고, 다시 돌아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바람을 피웠고 그것을 두 여자에게 들켰는데 두 여자가 모두 나를 용서했다. 놀랍게도 두 여자가 다 나에게 기회를 주었다.
내가 무슨 대단한 매력을 가졌다고?
정이 쌓여서, 너무 갑작스러운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동안의 관계에 대한 회고와 반성, 혹은 그저 놓는 순간 상대에게 뺏길 것이 분명해서?
그 어떤 이유든 내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어쨌든 너무 피곤했다. 집에 돌아와 눈을 감았다. 핑핑 도는 머릿 속과 믿기지 않는 현실 사이에서 이미 내 머릿 속은 과부하 상태였다. 잠을 자기로 했다.
…아마 보통이었다면 그쯤해서 정신을 차리고(?) 가영에게로 돌아가는 엔딩이 기다리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한숨 푹 자고 일어나, 휴대폰부터 확인을 하니 아라의 카톡이 몇 개 와 있었다.
[ 뭐하고 있어? 밥은 챙겨 먹었어? 난 고기고기 편시락 먹었어 ]
[ 오늘 손님 없어서 넘 편하다ㅋㅋ ]
아마 아라로서도 무척 혼란스러울 시기가 틀림없을텐데도, 애써 아무렇지 앟은 척 카톡을 보내오고 있었다. 그 순간 또 아라가 한없이 가여웠다.
아라는 나에게 많은 비밀을 털어놓았다. 어린 시절부터 겪은 가정폭력과 질 안 좋았던 전 남친들의 이야기. 그녀의 이야기들을 들으며 '어쩌면 그런 병신 쓰레기들이 있을까' 싶었지만 사실 그놈들보다 더한 쓰레기가 나 아닌가. 물론 가영에게도 그랬지만. 그러고보니 이제와서 아라에게 다시 헤어지자고 말하기가 버거웠다.
실리적인 측면에서의 걱정도 새삼 또아리를 틀었다. 설령 가영이 지금은 다시 나를 이해해준다고 치더라도, 그 딱 부러지는 성격이 평생 이 일을 없던 일로 하고 넘어갈 수 있을까. 사귀는 내내 나를 힘들게 하지는 않을까? 물론 가영이가 그럴 애는 아니지만… 아라라고 해서 또 항상 나를 이해해주라는 법도 없고.
'어쩌면 좋지?'
우유부단이라고 해도 좋고, 미련하다고 해도 좋지만 일단은 그랬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어졌다. 불과 반나절 전에 '이제는 가영에게로 돌아가야 할 때'라고 확신했던 내가 원룸 창문 밖으로 지는 노을 앞에 그저 어쩌면 좋을까 라는 생각만 하게 됐다.
"밥은 좀 먹었어?"
"입맛이 없어서, 아직"
"그래두 먹어야지. 기운 좀 차려. 걱정된다"
내가 저지른 일 때문에 그랬을 지언정 가영이 힘없이 밥도 안 먹고 있다는 말에 마음이 아렸다. 그리고 전화를 끊고 또 애써 나를 위해 생글대는 아라의 목소리를 듣고 나면 가슴이 아팠다.
'병신새끼'
스스로를 욕했지만 도무지 선택을 할 수가 없었다. 생각이 돌고돌다 나중에는 '왜 문명사회는 일부이처제를 허용하지 않는 것인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런 망상까지 하다가 드디어는 나도 배가 고팠다. 햇반을 데워 밥을 먹었다. 아라가 자기는 안 먹는다며 한 보따리 챙겨준 참치캔을 따서 먹으며. 가영이가 사다준 물컵에 물을 마시며.
그 이틀 뒤, 나는 아라를 안았다. 어쩌면 나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여자로서의 위기감 때문이었을까. 평소보다 더 애틋한 느낌이었다. 또 그로부터 한달 여의 시간이 흐른 후, 이번에 나는 가영을 안았다. 그녀야말로 나를 완전히 잃을 뻔 했다는 생각 때문인지 더욱 적극적인 느낌이었다. 아라를 만나기 전, 한달에 한번을 할까 말까했던 가영과 나는 빈도가 잦아졌다. 아라와의 관계 역시 더 잦아졌다.
그 와중에 웃기는 것이라면, 아라를 품에 끌어안을 때 가영을 생각하며 미안함을 느꼈고, 가영을 품에 안으며 아라의 외로움을 걱정했다는 사실이다.
"무슨 생각해?"
"아무 생각도 안 해"
"…"
"아니, 멍 때릴 수도 있잖아"
"…"
한번도 가영과의 일에 대해 캐묻지 않았지만, 아라는 종종 수시로 그런 질문을 했다. 아마도 내가 그녀 생각을 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사랑해"
그래도 시간보다 좋은 약은 없었다. 한 달, 두 달의 시간이 흐르자 그토록 암울했던 시간은 기억에서 아주 천천히 사라지기 시작했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공포와 놀라움을 겪을 일도 없었다.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은 채. 물론 둘 중 하나를 정리해야지, 정리해야지 마음 속에 큰 돌덩이가 자리잡고 있었지만 감히 그것을 캐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어쩌면 나는 그저 '그러다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 '어떻게든 되겠지'는 생각보다 그리 멀지 않은 시간에 다시 찾아왔다. 그 때 그 날로부터 몇 달 쯤 지났을 때였으리라.
"하!"
어느 금요일 밤, 몇 달 만에 가영이 내 원룸에 찾아왔다. 몇 달만의 일이었다. 불과 10분 거리에 떨어진 가영의 원룸이었지만, 그녀는 내 원룸에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평생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그 광경을 또 볼까 봐 걱정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영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날도 나는 아라와 벌거벗은 채로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
믿고 다시 한번 기회를 준 남친이, 또 다시 그때 그 여자와 함께 이불 속에 누워있는 모습을 본 가영의 기분은 도대체 어땠을까. 감히 짐작도 가지 않는다.
"잠깐만요"
가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돌아나섰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라가 그녀를 따라나섰다.
"가영씨, 잠깐 이야기 좀 해요"
"너랑 할 이야기 없어"
아라가 그때 가영과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나는 모른다. 단지 아라는 필사적으로 가영과 뭔가 이야기를 하고 싶어했고, 가영은 그러나 말조차 섞고 싶지 않아했다.
나는 뒤늦게 참담한 마음과 빙글빙글 도는 머리를 붙잡고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둘이 건물 복도에서 실랑이를 할 동안 나는 천천히 옷을 입었다. 마음이 무거웠다. 사실 언젠가 찾아올 일이긴 했다. 그저 하루하루 미루고 있었을 뿐. 대가를 치를 순간이 다시 찾아왔을 뿐이다.
짝.
나는 가영에게 뺨을 맞았다. 그녀는 참 손이 매웠다. 건물 앞에서 가영이 말했다.
"니 짐 다 싸놓을테니, 30분 있다가 내 집에 있는 니 짐, 다 가져가"
가영의 통보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미 정리했다며 아라와 가영 모두를 속이던 나는 다시 한번 최악의 형태로 둘을 배신한 셈이었다. 울면서 가영은 집으로 향했고, 나는 멍하니 서있었다.
짝.
이번에는 아라가 내 뺨을 때렸다. 그 와중에도 뒤집어 쓰고 나왔던 돗수 없는 안경이 날아갔다. 다 틀린 것일까.
'내가 지금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일까'
아라는 물론 매력적이고, 나에게 과분한 착한 애다. 아마 얘랑 헤어진다면 다시 이런 애랑 만나기 힘들겠지. 하지만 그건 가영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평생의 짝이 될 수도 있는 여자인데'
부모님의 병환과 경제적 몰락. 서로가 가장 힘든 시기를 함께 위로하며 버틴 사람이다. 내가 정말 비루할 때 나를 케어했고, 나 역시 그녀에게 최선을 다했다. 심지어 바람을 피웠어도 나를 용서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런 그녀를 나는 또 배신했다. 그리고 이렇게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다. 길게 한숨을 쉬는 그 순간, 아라는 내 안경을 집어 들었다.
"미안해"
그 와중에도 내 뺨을 때렸다며, 미안하다며 나를 달래는 아라.
"가지마. 걔네 집 가지 말라고"
아라는 나에게 말했다. 나는 무너져 내리는 정신줄을 겨우 붙잡으며 대답했다.
"가야지. 걔 집에 있는 내 짐 가져와야지"
그러자 이번에는 아라가 말했다.
"같이 가"
"혼자 다녀올게"
"같이 가!"
나는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또 비정한 생각을 했다. 어차피 가영은 이대로 끝이다. 그렇다면 아라라도 붙잡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 같이 가. 근데 일단은 문 앞에 서있어. 너까지 걔네 집에 들어갈 필요는 없잖아"
가영은 내 짐을 깔끔하게 내 가방과 종이백 등등에 담아 문 앞에 내놓았다. 나는 아라와 함께 그 짐을 들고 집으로 향했다. 참담한 기분이었다. 정말 일을 크게 그르친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조강지처 버리면 안된다던데'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났고, 한편으로는 애써 '아라도 조강지처야' 하면서 나를 달랬다.
하지만 집에 거의 다 온 순간, 나는 갑자기 주저앉았다. 그렇게 힘들게 시작했고 어렵게 이어온 연애가 정말로 이렇게 끝나는구나 하는 실감이 집 앞에 거의 다 와서 느껴졌다. 바로 옆에 아라가 내 짐을 함께 들어주고 있었음에도.
'다 놓아버리고 싶다'
그리고 내가 주저 앉은 그 순간 아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가"
나는 그저 눈을 질끈 감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렇게 힘들면 가. 내가 사라지면 되잖아. 너네 둘 다시 만나면 되잖아…"
아라도 울고 있었다. 그랬다. 가영에게도 그렇지만, 아라에게도 나는 다시 없을 나쁜 놈이다. 여친이 있었음에도 속이고 만나서는, 몇 번 잠자리만 하고서는 헤어지자고 하질 않나, 몇 달을 양다리를 걸치지를 않나, 분명히 정리하겠다고 해놓고서는 몇 달이 지나도록 계속 속이고는, 이제는 아예 지 여친이랑 헤어졌다고 제자리에 주저앉아 울먹이는 병신 짓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라 입장에서도 정이 떨어질 만 했다.
"아니야, 그냥 너무 스트레스가 커서 그랬을 뿐이야"
나는 짐을 다시 들고 일어섰다. 그리고 아라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을 잡는 대신 다시 한번 싸대기를 날려도 할 말이 없건만, 아라는 그저 "미안해. 때려서" 하고 재차 사과를 할 따름이었다. 설령 그것이 '이 와중의 착한 척'이라고 해도 상관은 없었다. 두 여자한테 싸대기를 맞고, 오래 사귄 여친과 헤어지는 순간의 무너지는 멘탈을 잡아주었으니까.
"아라야, 내가 미안해. 잘할께"
나는 그렇게 아라의 손을 꼭 잡았다. 우리는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그 날의 일은 일단락 되었다. 하지만 그게 끝은 아니었다. 아라와 나와 가영의 삼각관계는 그게 겨우 시작이었다.
"다신 바람 안 피울거지?"
"어"
두 여자의 삶을 지옥으로 몰고 간… 착한 척, 순둥이인 척, 그저 유쾌한 척 가면을 쓴 진정한 쓰레기의 이야기는 이제 겨우 시작했을 따름이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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