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말했던가.
"개가 똥을 끊지"
그랬다. 개가 똥을 끊을 수는 있어도, 난봉꾼은 바람을 끊을 수 없다. 바람은 일종의 자극이다. 단순히 '일 더하기 일은 이'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연애를 배신하는 배덕감, 바람을 피우는 순간의 짜릿함, 그녀가 잠이 든 이후 뒤늦게 몰려오는 죄책감, 아침 저녁으로 다른 여자를 상대한다는 수컷으로서의 만족, 그 와중에 '그 누구도 나를 쉽게 놓지는 않겠구나'에 대한 안도감, 루즈해졌던 그녀와의 관계가 새롭게 느껴지는 어떤 자극들. 여자 하나 더 하기 하나는 쾌감 수백배다. 내 영혼을 타락시키는 대가로 얻는 수십 배 강한 자극이다. 아침에 가영이랑 자고, 저녁에 아라와 자는 하루는 그 무엇보다 만족스러운 하루니까. 나중에는 '아 한 명 정도… 3.5명 정도가 있으면 정말 딱이겠다' 라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가영아…"
그 더러운 쾌락의 모든 것을 하루 아침의 발각으로 단숨에 정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그때 내 머릿 속을 가득 채운 것은 '밑져야 본전'이라는 어이없는 논리였다. 가영이든 아라든, 설령 누가 헤어지자고 해도, 그녀에게 빌고 달래서 조금이라도 더 만날 수 있다면 이익 아니겠냐는 생각. 게다가 아무리 가영이라고 해도 하루 아침에 나를 정리하기가 쉬울 리 없다. 비록 짐을 싸서 내놓는 등의 행동과 말을 했지만 사랑과 정이라는 것이 어디 그리 쉽게 정리되는 것이던가.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나는 가영의 문 앞에 꽃다발을 놓았다. 오전 반차를 내고, 가영이 출근한 이후 그녀의 집에 들어가 집정리를 다 해놓기도 했다. 몇 번이고 용서를 구했다. 애초에 집의 비번을 안 바꾼 것만 보아도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생각보다 쉽게 가영은 나를 용서했다. 사실 나도 나였지만, 그녀 역시 집안 일과 직장 문제로 마음이 많이 힘들 때였다. 또, 아마 그녀도 알았을 것이다. 그녀가 정말 나를 버리는 순간, 나라는 인간은 곧바로 아라에게 가버릴 것을. 아마 그게 죽기보다 싫었을 것이다. 가영 입장에서는. 용서를 해준 가영은 나에게 정말 최선을 다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무렵의 나 역시도 분명 가영에게 조금 더 기울어 있었다.
"그거 조심해서 들어야 돼"
"어어"
가영은 내 생각보다 더욱 행동력이 좋은 여자였다. 그 이후 얼마 안 가 집을 빼고 왕십리로 이사를 했다.
"무서워"
뜻밖이었다. 가영은 아라가 무섭다고 했다.
"걔가 우리 집 앞에 몰래 서있다가 나를 찔러죽일 것만 같아. 무서워"
"그래…"
물론 그 시점까지 나는 아라를 여전히 만나고 있었다. 단지 나의 양다리 스킬이 더 교묘해졌을 따름이다.
전화를 두 대를 만들었다. 아무리 용을 써도, 결국 휴대폰 한 대로는 어떻게든 위험의 불씨를 만들기 마련이다. 물론 두 대를 만든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아무리 전화를 해도, 상대가 안 받으면 도대체 어디서 뭘 하는지 의심이 드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어어, 이제 슬슬 나도 저녁 먹어야지. 응. 너도"
정답은 루틴화였다. 인간도 결국은 동물이다. 연락을 하는 시간을 어느 정도 패턴화 시키면, 의례적으로 그 무렵의 연락만 잘 되는 이상 큰 의심은 하지 않기 마련이다. 게다가 몇 차례는 일부러 함정을 파기도 했다. 주말에 본가에 있거나, 혹은 늦게 야근을 하는 날 일부러 연락을 받지 않다가, 아라나 가영이 화를 내면 그제서야 실시간 인증샷을 보내며
"사람이 깜박하고 전화 못 받을 수도 있지, 제발 사람 의심 좀 하지 말라고!" 하며 버럭 화를 내기도 했다. 애초에 가영도, 아라도 잘 알고 있었다. 나라는 쓰레기는, 분명 헤어지는 순간 다른 여자에게 가서 만나자고 할 것이라는 것을. 그러니 쉽게 놓지도 못했으리라. 약이 올라서. (물론 나중에 질리게 되면 "그냥 차라리 너 가져" 하고 손을 놓을 수도 있겠지만, 당시에는 둘 다 그러기에 아직 나에 대한 미련이 남은 시기였다)
증거가 남는 것은 철저히 피했다. 바람은 항상 대수롭지 않은 작은 증거 때문에 걸린다. 작은 선물, 메모 한 장, 티켓, 영수증, 쓰잘데기 없는 사소한 문자 하나, 카톡 메세지 하나 등등. 진작에 찢어서 밖에 내버렸으면 될 일을, 어설픈 집착, 쓸데없는 미련으로 붙들고 있다가 며칠 동안의 죽네 사네 하는 지랄 같은 싸움으로 번지기 마련이니까. 수많은 삽질 끝에 주의력은 키우고, 미련은 없앨 수 있었다.
어설픈 동정 따위는 철저히 금물이었다. 난데없는 보상심리로 잘해주는 일 따위는 '나 지금 바람 피우고 있어'라는 인증과도 같으니까. 기억력도 좋아야 했다. 임기응변도 중요하다. 때때로 헷깔려서 헛소리를 할 때면 그것을 그럴싸하게 때워야 하기도 했다.
뭐 그래도 항상 완벽할 수는 없었다.
"아 이거 예전에 그랬던거야. 아 이게 내 가방에 왜 있는데 씨발"
"무슨 예전에 그런거야. 이거 지난 달에 나온건데. 제조일자를 봐"
"아 아니라고! 내꺼 아니라고. 니가 넣은거 아냐?"
"하! 방금 전에는 예전에 그런 거라더니, 이젠 니 것이 아니다?"
"아 진짜 미치겠네. 없는 말 지어내지 말고. 분명히 말하는데, 난 이거 몰라. 내 것도 아니고. 준호건가? 준호한테 전화 해볼께"
…그녀들이라고 어디 병신이라서 속아 넘어갔겠는가. 그냥 단지 믿고 싶었을 뿐이리라. 저 쓰레기가, 이미 몇 번이나 뒤통수를 친 쓰레기가, 제발 이번만큼은 아니길 하며 애써 모른 척, 정말 저 말도 안되는 주장을 그냥 믿고 싶어 믿는 수준에 이르렀을 뿐이리라. 아슬아슬한 연애는 계속 이어졌다. 나는 데이트를 할 때에도 수시로 화장실을 드나들어야 했다. 몰래 전화를 했어야 하니까.
"어, 나 원래 속 안 좋잖아"
그리고 나는 최대한 아라와 가영의 데이트를 철저히 다른 곳에서 했다. 아라와 강남에서 놀았다면, 가영과는 홍대에서 놀았다. 가영과 백화점 쇼핑을 하며 놀았다면, 아라와 놀이공원을 갔다.
"요즘…너 잘하는 것 같아"
역시 섹스는 멘탈 스포츠다. 연애 상대의 기분을 살피며, 혹시 만족하지 못할까 봐 내심 긴장하고 쫄리는 섹스가 아니라 순수히 내 쾌락 중심의 주도적인 섹스. 그 덕분인지 나의 잠자리 실력 역시 일취월장했다. 다른 누군가에게 내심 자랑하고 싶었을 정도로.
"이런 말, 내가 할 말이 아니긴 한데… 나는 그래도 아라 걔가, 어쩌면 우리 관계에 적당히 좋은 긴장을 불러온 측면도 있다고 봐"
"뭐?"
그런 연애가 몇 년 단위로 이어졌다. 종종 모든 것이 뒤집어질 기세로 싸우긴 했지만 또 아물기도 잘 아물었다.
"싸우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서로의 소중함을 걔를 통해서 깨닫게 됐잖아"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마라"
…그런 미친 발언을 내 입으로 꺼낼 정도로, 나와 가영의 관계는 많이 상처가 아물었다. 물론 그 가운데 싸우기도 크게 싸운 적도 많았다.
[ 가영아, 내가 모두 잘못했다. 이제 그만하자 ]
돌부처도 돌아앉게 만드는 것이 바람이라고 하던가. 때때로 "도대체 왜 그랬는데!"하는 가영의 히스테리가 극에 달할 쯤이면 나도 그녀도 한없이 지치기도 했다. 한번은 내가 모든 짐을 싸서 본가로 돌아간 적도 있었다. 그날 오후, 가영은 슬리퍼만 신은 채로 왕십리에서 수원까지 택시 타고 울며 불며 찾아오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가영은 분명 평소의 가영이 아니었다. 항상 똑부러지고, 콧대 높고, 자신만만하던 그녀가 아니었다. 그저 사랑하는 남친과 영영 헤어지게 될 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한없이 나약해진 소녀였을 따름이었다.
"미안해, 알았어, 다시는 너 버린다 어쩐다 안 할께. 사랑해. 정말 사랑해. 정말 미안해"
작아진 그녀를 품에 안고 두 손 꼭 잡은 채로 그녀의 작은 새 원룸에서 끌어안고 잤다. 밤이면 다시 어른이 되어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다. 다시 사이가 안정되고, 우리는 여행도 자주 갔다.
타이페이, 세부, 오사카…
그리고 그 모든 순간에 아라는 뒷전이었다.
'미안해'
처음부터 끝까지, 아라는 항상 뒷전이었다. 왜냐하면 이해해주는 여자니까. 그래도 용서해 주는 여자니까. 내가 못된 짓을 해도, 나쁜 말을 해도, 뻔히 의심되는 짓을 해도, 그럼에도 아라는 나를 이해해주었으니까.
"사실 나는, 너를 걔한테 뺏어온 다음에… 너랑 결혼하기로 하고, 결혼식 전날에 너와 그 년이 한 짓을 다 폭로하고 자살하려고 했어"
언젠가 아라가 한 말이다.
"…왜?"
"난 지는 걸 죽는 것보다 싫어해. 그 미친년한테는 지고 싶지 않았어"
나는 아라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한편으로는 아찔하기도 했다.
"너랑 그 년이랑 하던 지랄들을 생각하면 진짜…"
사실 숨긴다고 숨겼지만, 가영에게 아라를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몇 번인가 들킨 적이 있다. 그때마다 모든 것이 뒤흔들렸다. 사실 가영 입장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 울고 불고 난리 치는 것 이외에도 말이다.
"도대체 내가 뭘 어쩌면 돼?"
"시간을 좀 줘. 너는 나랑 항상 곁에 있었지만, 걔는 나랑 거의 이렇게 몇 년을 넘게 만났는데도 어디 제대로 된 데이트조차 한 적이 없어. 내 세컨이었잖아. 근데 결국 버림받는다고 해봐. 그게 심적으로 납득이 되겠어?"
"그럼 내가 뭘 어떻게 해야 되는데"
"나랑 걔랑 딱 일주일만, 딱 일주일만 같이 있다 올게"
"뭐?"
"정을 떼는 시간도 필요하잖아. 이별여행이라고 생각해 줘"
"미안해"
그 끝을 알 수 없는 아득한 심연을 들여다 본 기분이었다. 아라는 이어 말했다.
"니가 가영이를 정리하고 왔다고 했을 때도 처음에는 그래서 못 믿었어. 맨날 가영이 걔는 여전히 나에게 문자를 매일 수십통씩 보냈거든"
"내가 완전히 헤어지고 왔다고 한 다음에도?"
"어"
"그럼 언제부터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어?"
아라는 힘없이 웃었다.
"예전에는 맨날 너랑 같이 있는 인증샷을 보냈거든. 근데 언제부턴가는 그냥 문자만 오더라.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정말 너랑 헤어진게 아닐까 싶더라. 아! 참, 너는 나한테 지금까지 수도 없는 거짓말을 했지만 한번도 통한 적이 없어. 왠 줄 알아? 모두 다 가영이 걔가 니 사진을 보내왔거든. 난 남친이랑 맛있는거 먹는데 니 년은 뭐 먹고 있냐면서."
나도 할 말이 없었다. 그때 아라가 다시 물었다.
"다시 한번 말해봐. 근데 어쩌다가 헤어진거야"
나는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 진짜로 헤어진건 조금 우발적인 이야기야…"
< 계속 >
"개가 똥을 끊지"
그랬다. 개가 똥을 끊을 수는 있어도, 난봉꾼은 바람을 끊을 수 없다. 바람은 일종의 자극이다. 단순히 '일 더하기 일은 이'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연애를 배신하는 배덕감, 바람을 피우는 순간의 짜릿함, 그녀가 잠이 든 이후 뒤늦게 몰려오는 죄책감, 아침 저녁으로 다른 여자를 상대한다는 수컷으로서의 만족, 그 와중에 '그 누구도 나를 쉽게 놓지는 않겠구나'에 대한 안도감, 루즈해졌던 그녀와의 관계가 새롭게 느껴지는 어떤 자극들. 여자 하나 더 하기 하나는 쾌감 수백배다. 내 영혼을 타락시키는 대가로 얻는 수십 배 강한 자극이다. 아침에 가영이랑 자고, 저녁에 아라와 자는 하루는 그 무엇보다 만족스러운 하루니까. 나중에는 '아 한 명 정도… 3.5명 정도가 있으면 정말 딱이겠다' 라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가영아…"
그 더러운 쾌락의 모든 것을 하루 아침의 발각으로 단숨에 정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그때 내 머릿 속을 가득 채운 것은 '밑져야 본전'이라는 어이없는 논리였다. 가영이든 아라든, 설령 누가 헤어지자고 해도, 그녀에게 빌고 달래서 조금이라도 더 만날 수 있다면 이익 아니겠냐는 생각. 게다가 아무리 가영이라고 해도 하루 아침에 나를 정리하기가 쉬울 리 없다. 비록 짐을 싸서 내놓는 등의 행동과 말을 했지만 사랑과 정이라는 것이 어디 그리 쉽게 정리되는 것이던가.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나는 가영의 문 앞에 꽃다발을 놓았다. 오전 반차를 내고, 가영이 출근한 이후 그녀의 집에 들어가 집정리를 다 해놓기도 했다. 몇 번이고 용서를 구했다. 애초에 집의 비번을 안 바꾼 것만 보아도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생각보다 쉽게 가영은 나를 용서했다. 사실 나도 나였지만, 그녀 역시 집안 일과 직장 문제로 마음이 많이 힘들 때였다. 또, 아마 그녀도 알았을 것이다. 그녀가 정말 나를 버리는 순간, 나라는 인간은 곧바로 아라에게 가버릴 것을. 아마 그게 죽기보다 싫었을 것이다. 가영 입장에서는. 용서를 해준 가영은 나에게 정말 최선을 다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무렵의 나 역시도 분명 가영에게 조금 더 기울어 있었다.
가면 : 5화
"그거 조심해서 들어야 돼"
"어어"
가영은 내 생각보다 더욱 행동력이 좋은 여자였다. 그 이후 얼마 안 가 집을 빼고 왕십리로 이사를 했다.
"무서워"
뜻밖이었다. 가영은 아라가 무섭다고 했다.
"걔가 우리 집 앞에 몰래 서있다가 나를 찔러죽일 것만 같아. 무서워"
"그래…"
물론 그 시점까지 나는 아라를 여전히 만나고 있었다. 단지 나의 양다리 스킬이 더 교묘해졌을 따름이다.
전화를 두 대를 만들었다. 아무리 용을 써도, 결국 휴대폰 한 대로는 어떻게든 위험의 불씨를 만들기 마련이다. 물론 두 대를 만든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아무리 전화를 해도, 상대가 안 받으면 도대체 어디서 뭘 하는지 의심이 드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어어, 이제 슬슬 나도 저녁 먹어야지. 응. 너도"
정답은 루틴화였다. 인간도 결국은 동물이다. 연락을 하는 시간을 어느 정도 패턴화 시키면, 의례적으로 그 무렵의 연락만 잘 되는 이상 큰 의심은 하지 않기 마련이다. 게다가 몇 차례는 일부러 함정을 파기도 했다. 주말에 본가에 있거나, 혹은 늦게 야근을 하는 날 일부러 연락을 받지 않다가, 아라나 가영이 화를 내면 그제서야 실시간 인증샷을 보내며
"사람이 깜박하고 전화 못 받을 수도 있지, 제발 사람 의심 좀 하지 말라고!" 하며 버럭 화를 내기도 했다. 애초에 가영도, 아라도 잘 알고 있었다. 나라는 쓰레기는, 분명 헤어지는 순간 다른 여자에게 가서 만나자고 할 것이라는 것을. 그러니 쉽게 놓지도 못했으리라. 약이 올라서. (물론 나중에 질리게 되면 "그냥 차라리 너 가져" 하고 손을 놓을 수도 있겠지만, 당시에는 둘 다 그러기에 아직 나에 대한 미련이 남은 시기였다)
증거가 남는 것은 철저히 피했다. 바람은 항상 대수롭지 않은 작은 증거 때문에 걸린다. 작은 선물, 메모 한 장, 티켓, 영수증, 쓰잘데기 없는 사소한 문자 하나, 카톡 메세지 하나 등등. 진작에 찢어서 밖에 내버렸으면 될 일을, 어설픈 집착, 쓸데없는 미련으로 붙들고 있다가 며칠 동안의 죽네 사네 하는 지랄 같은 싸움으로 번지기 마련이니까. 수많은 삽질 끝에 주의력은 키우고, 미련은 없앨 수 있었다.
어설픈 동정 따위는 철저히 금물이었다. 난데없는 보상심리로 잘해주는 일 따위는 '나 지금 바람 피우고 있어'라는 인증과도 같으니까. 기억력도 좋아야 했다. 임기응변도 중요하다. 때때로 헷깔려서 헛소리를 할 때면 그것을 그럴싸하게 때워야 하기도 했다.
뭐 그래도 항상 완벽할 수는 없었다.
"아 이거 예전에 그랬던거야. 아 이게 내 가방에 왜 있는데 씨발"
"무슨 예전에 그런거야. 이거 지난 달에 나온건데. 제조일자를 봐"
"아 아니라고! 내꺼 아니라고. 니가 넣은거 아냐?"
"하! 방금 전에는 예전에 그런 거라더니, 이젠 니 것이 아니다?"
"아 진짜 미치겠네. 없는 말 지어내지 말고. 분명히 말하는데, 난 이거 몰라. 내 것도 아니고. 준호건가? 준호한테 전화 해볼께"
…그녀들이라고 어디 병신이라서 속아 넘어갔겠는가. 그냥 단지 믿고 싶었을 뿐이리라. 저 쓰레기가, 이미 몇 번이나 뒤통수를 친 쓰레기가, 제발 이번만큼은 아니길 하며 애써 모른 척, 정말 저 말도 안되는 주장을 그냥 믿고 싶어 믿는 수준에 이르렀을 뿐이리라. 아슬아슬한 연애는 계속 이어졌다. 나는 데이트를 할 때에도 수시로 화장실을 드나들어야 했다. 몰래 전화를 했어야 하니까.
"어, 나 원래 속 안 좋잖아"
그리고 나는 최대한 아라와 가영의 데이트를 철저히 다른 곳에서 했다. 아라와 강남에서 놀았다면, 가영과는 홍대에서 놀았다. 가영과 백화점 쇼핑을 하며 놀았다면, 아라와 놀이공원을 갔다.
"요즘…너 잘하는 것 같아"
역시 섹스는 멘탈 스포츠다. 연애 상대의 기분을 살피며, 혹시 만족하지 못할까 봐 내심 긴장하고 쫄리는 섹스가 아니라 순수히 내 쾌락 중심의 주도적인 섹스. 그 덕분인지 나의 잠자리 실력 역시 일취월장했다. 다른 누군가에게 내심 자랑하고 싶었을 정도로.
"이런 말, 내가 할 말이 아니긴 한데… 나는 그래도 아라 걔가, 어쩌면 우리 관계에 적당히 좋은 긴장을 불러온 측면도 있다고 봐"
"뭐?"
그런 연애가 몇 년 단위로 이어졌다. 종종 모든 것이 뒤집어질 기세로 싸우긴 했지만 또 아물기도 잘 아물었다.
"싸우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서로의 소중함을 걔를 통해서 깨닫게 됐잖아"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마라"
…그런 미친 발언을 내 입으로 꺼낼 정도로, 나와 가영의 관계는 많이 상처가 아물었다. 물론 그 가운데 싸우기도 크게 싸운 적도 많았다.
[ 가영아, 내가 모두 잘못했다. 이제 그만하자 ]
돌부처도 돌아앉게 만드는 것이 바람이라고 하던가. 때때로 "도대체 왜 그랬는데!"하는 가영의 히스테리가 극에 달할 쯤이면 나도 그녀도 한없이 지치기도 했다. 한번은 내가 모든 짐을 싸서 본가로 돌아간 적도 있었다. 그날 오후, 가영은 슬리퍼만 신은 채로 왕십리에서 수원까지 택시 타고 울며 불며 찾아오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가영은 분명 평소의 가영이 아니었다. 항상 똑부러지고, 콧대 높고, 자신만만하던 그녀가 아니었다. 그저 사랑하는 남친과 영영 헤어지게 될 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한없이 나약해진 소녀였을 따름이었다.
"미안해, 알았어, 다시는 너 버린다 어쩐다 안 할께. 사랑해. 정말 사랑해. 정말 미안해"
작아진 그녀를 품에 안고 두 손 꼭 잡은 채로 그녀의 작은 새 원룸에서 끌어안고 잤다. 밤이면 다시 어른이 되어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다. 다시 사이가 안정되고, 우리는 여행도 자주 갔다.
타이페이, 세부, 오사카…
그리고 그 모든 순간에 아라는 뒷전이었다.
'미안해'
처음부터 끝까지, 아라는 항상 뒷전이었다. 왜냐하면 이해해주는 여자니까. 그래도 용서해 주는 여자니까. 내가 못된 짓을 해도, 나쁜 말을 해도, 뻔히 의심되는 짓을 해도, 그럼에도 아라는 나를 이해해주었으니까.
"사실 나는, 너를 걔한테 뺏어온 다음에… 너랑 결혼하기로 하고, 결혼식 전날에 너와 그 년이 한 짓을 다 폭로하고 자살하려고 했어"
언젠가 아라가 한 말이다.
"…왜?"
"난 지는 걸 죽는 것보다 싫어해. 그 미친년한테는 지고 싶지 않았어"
나는 아라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한편으로는 아찔하기도 했다.
"너랑 그 년이랑 하던 지랄들을 생각하면 진짜…"
사실 숨긴다고 숨겼지만, 가영에게 아라를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몇 번인가 들킨 적이 있다. 그때마다 모든 것이 뒤흔들렸다. 사실 가영 입장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 울고 불고 난리 치는 것 이외에도 말이다.
"도대체 내가 뭘 어쩌면 돼?"
"시간을 좀 줘. 너는 나랑 항상 곁에 있었지만, 걔는 나랑 거의 이렇게 몇 년을 넘게 만났는데도 어디 제대로 된 데이트조차 한 적이 없어. 내 세컨이었잖아. 근데 결국 버림받는다고 해봐. 그게 심적으로 납득이 되겠어?"
"그럼 내가 뭘 어떻게 해야 되는데"
"나랑 걔랑 딱 일주일만, 딱 일주일만 같이 있다 올게"
"뭐?"
"정을 떼는 시간도 필요하잖아. 이별여행이라고 생각해 줘"
"미쳤어?"
"그래 미친 소리 맞는데, 걔 입장에서는 이미 미쳐도 할 말 없는 상황이잖아. 내가 잘했다는게 아니라, 그냥 상황이 그렇다고"
…소중한 남자친구를, 양다리 걸치는 다른 여자에게 보내주는 일. 그런 호구짓을 나는 가영에게 요구했다. 그리고 그 일주일간 나는 아라와 모처럼 둘도 없는 데이트를 즐겼다. 가영과의 연락에 마음 졸이며 데이트 중에 별 병신 짓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마음 편한 일주일간의 밀회를. 물론 처음부터 헤어질 생각 따윈 없었다.
"그래도 부족한거야?"
"딱 일주일만 더"
"마지막이야. 정말 마지막이야. 나도 너무 힘들어. 못 견디겠어"
"알겠어. 정말 마지막이야. 그 이후에는 절대 이런 일 없어. 조금만 이해해줘 가영아"
그렇게 이주일간 나는 아라와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그게 끝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 '무리한 요구'를 난 아라에게도 했다.
"걔가 많이 아퍼"
"아프건 말건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좋든 싫든 7년 넘게 만난 사람이야. 너 때문에 자살한답시고 약물까지 몽창 먹기까지 했어"
"그런다고 사람 안 죽어. 그거 다 쇼야"
"그래도, 이건 아니야. 나 아무래도 걔 곁에서 좀 내가 있어줘야 할 것 같아"
말도 안되는 개소리.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런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해도, 아라는 들어줄 것이라는 것을.
"절대로…절대로 걔한테 사랑한다는 말만은 하면 안 돼. 절대로!"
아라는 몇 번이고 그렇게 주의를 주었지만, 나는 그날 바로 가영의 몸을 더듬으며 사랑타령을 하고 있었다.
몰래하는 양다리를 넘어서, '정을 떼고 오겠다'라는 명분으로 대놓고 허락받고 하는 양다리, 그리고 "이젠 다시 걔 만날 일 없을거야. 믿어줘"라며 다시 몰래하는 양다리. 그 지난한 시간들을 되돌아보니 어언 5년이었다. 나는 1, 2년도 아니고, 두 여자의 인생을 무려 5년이나 뒤흔들어 놓은 것이었다. 두 여자의,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미래를 준비했어야 할 5년을 그렇게 나는 뒤흔들어 놓았다.
물론 매 순간 내 머릿 속에는 '이러면 안돼. 제발 이러지마' 하는 양심의 소리가 울러 퍼졌지만, 도저히 둘 중 하나를 정리할 자신이 없었다. 그 여자 모두 나에게 진심이었으니까. 나도 그 둘에게 진심이었으니까.
"그냥 정 때문이었어", "그냥 솔직히 밤일 때문에 그랬지 뭐" 라는 말로 나는 내 사랑을 스스로 부정했고, 두 사람의 삶을 산산히 짓밟았다. 차라리 불륜이라면… 그래도 한때 사랑했던 사람과 한순간이나마 결혼이라는 골에 도달할 수 있었겠지만, 나는 그저 우유부단과 미욱한 정과 섹스에 대한 집착으로 두 여자의 미래를 그렇게 훼손해버렸다. 그리고 언젠가의 날. 아라는 처연하게 울며 모든 것을 고백했다.
"다 그 년 때문이라고"
아라의 눈빛에서 원망을 본다. 좌절을 본다. 슬픔과 원한을 본다. 한없이 가라앉아 버릴 것만 같은 깊은 어둠을 본다.
"너는 몰랐다고 할 지도 모르겠지만, 그래, 차라리 몰랐기를 바래. 니가 알면서도 가만히 그 년을 그렇게 냅둔거면 내가 너무 괴롭잖아"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그 순간까지도 몰랐다.
"너 그 년이랑 만날 때, 걔가 나한테 직접 연락한거 알아?"
"뭐? 언제?"
무슨 소리야.
"매일. 매일 매일. 무시무시한 쌍욕, 너 내가 입 거친거 알지? 근데 나는 비교도 안 돼. 그 년은 어디서 본 적도 없는 더러운 욕을, 하루에 50통도 넘게 보내고, 너 잘 때 니 자는 사진, 니 옷 벗은 사진, 니가 쓴 콘돔 사진까지 매일 매일 나한테 보낸거 알아? 아냐고"
웃으면서 이야기 하던 아라의 얼굴은 어느새 차갑게 굳더니 눈물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했다. 그녀의 눈물보다, 그녀의 말이 더 당황스러웠다.
"무슨 소리야. 가영이 걔가 너한테 그런 문자를 보냈다고? 정말이야?"
아라는 급기야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정말 몰랐냐, 정말 몰랐냐고"
정말 몰랐다.
"나는 니가 참으라고 해서 참았어. 그 년이랑 한번만 더 싸우고 지랄하면 그냥 둘 다 버리겠다는 니 말, 니 그 말이 무서워서… 아니 그냥 나한테만 두 년 다 버린다면서 그 년한테 가버릴까봐 그게 무서워서 그냥 혼자 꾹 참았다고. 내리 3년을. 알아? 그 년이 온갖 쌍욕과 조롱을 나한테 퍼부을 때, 나만 참았다고."
나는 정말 몰랐다. 모른다고 그 업이 사라지지야 않겠지만.
…내가 아라를 속이고 가영을 속이며 양다리를 즐기고 있다고 생각한 그때. 이미 그 두 여자는 또 다른 지옥 속을 헤메고 있었다.
[ 아우~ 아라야 니 남친은 어디갔니?ㅋㅋㅋ 난 지금 내 남친이랑 데이트 중인데? 아~ 넌 남친없지 참~ㅋㅋㅋㅋ ]
가영은 아라의 연락처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가영은 나 모르게, 아라에게 수도 없이 많은 폭언과 사진들을 보내고 있었다. 가영과 내가 데이트를 하는 날이면 먹는 것, 물건 산 것, 내 사진, 같이 끌어안고 있는 사진, 호텔방 사진 등등을 모두 찍어 문자로 아라에게 보내고 있었다. 심지어는 내 나체 사진이나 사용한 콘돔 사진까지.
[ 난 오늘 내 남친이랑 호텔에서 뜨거운 시간 보냈는데ㅋㅋㅋ 아라 넌 방구석에서 뭐하고 있니? 미친 년아?ㅋㅋㅋㅋ ]
나는 지금도 가영이 아라에게 왜 그런 도발을 했는지 모른다. 내가 아라와 당시 계속 만나고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 문자로 현타 오게 만들어서 아라가 스스로 포기하게 만들려고 한 것인지 아니면 아라 때문에 흔들린 나와 자신의 연애에 대한 분풀이였는지.
"… …"
내 기억 속의 가영은, 그냥 나에 의한 피해자일 뿐이었다. 섹스에 미친 병신새끼를 믿어준게 죄의 전부인 불쌍한 가영. 하지만 사실 그녀 역시도 분풀이의 린치를 아라에게 가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마저도 안쓰러운 일인지 몰랐다. 미친 병신같은 남친 때문에 그녀 역시도 반쯤은 미친 것이나 다름 없는 짓을 하고 있던 것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아라가 당한 고통이 너무 컸다. 가영도, 아라도 가면을 쓰고 있었다. 나 못지 않은 가면을. 서로가 가면 속에서 울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고통과 분노와 증오와 슬픔의 비명을. 그 누가 들어도 미친 년 소리가 절로 나올 미친 짓을 했고, 또 누군가는 그 고통 속에서 정말로 미쳐가고 있었다.
…소중한 남자친구를, 양다리 걸치는 다른 여자에게 보내주는 일. 그런 호구짓을 나는 가영에게 요구했다. 그리고 그 일주일간 나는 아라와 모처럼 둘도 없는 데이트를 즐겼다. 가영과의 연락에 마음 졸이며 데이트 중에 별 병신 짓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마음 편한 일주일간의 밀회를. 물론 처음부터 헤어질 생각 따윈 없었다.
"그래도 부족한거야?"
"딱 일주일만 더"
"마지막이야. 정말 마지막이야. 나도 너무 힘들어. 못 견디겠어"
"알겠어. 정말 마지막이야. 그 이후에는 절대 이런 일 없어. 조금만 이해해줘 가영아"
그렇게 이주일간 나는 아라와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그게 끝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 '무리한 요구'를 난 아라에게도 했다.
"걔가 많이 아퍼"
"아프건 말건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좋든 싫든 7년 넘게 만난 사람이야. 너 때문에 자살한답시고 약물까지 몽창 먹기까지 했어"
"그런다고 사람 안 죽어. 그거 다 쇼야"
"그래도, 이건 아니야. 나 아무래도 걔 곁에서 좀 내가 있어줘야 할 것 같아"
말도 안되는 개소리.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런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해도, 아라는 들어줄 것이라는 것을.
"절대로…절대로 걔한테 사랑한다는 말만은 하면 안 돼. 절대로!"
아라는 몇 번이고 그렇게 주의를 주었지만, 나는 그날 바로 가영의 몸을 더듬으며 사랑타령을 하고 있었다.
몰래하는 양다리를 넘어서, '정을 떼고 오겠다'라는 명분으로 대놓고 허락받고 하는 양다리, 그리고 "이젠 다시 걔 만날 일 없을거야. 믿어줘"라며 다시 몰래하는 양다리. 그 지난한 시간들을 되돌아보니 어언 5년이었다. 나는 1, 2년도 아니고, 두 여자의 인생을 무려 5년이나 뒤흔들어 놓은 것이었다. 두 여자의,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미래를 준비했어야 할 5년을 그렇게 나는 뒤흔들어 놓았다.
물론 매 순간 내 머릿 속에는 '이러면 안돼. 제발 이러지마' 하는 양심의 소리가 울러 퍼졌지만, 도저히 둘 중 하나를 정리할 자신이 없었다. 그 여자 모두 나에게 진심이었으니까. 나도 그 둘에게 진심이었으니까.
"그냥 정 때문이었어", "그냥 솔직히 밤일 때문에 그랬지 뭐" 라는 말로 나는 내 사랑을 스스로 부정했고, 두 사람의 삶을 산산히 짓밟았다. 차라리 불륜이라면… 그래도 한때 사랑했던 사람과 한순간이나마 결혼이라는 골에 도달할 수 있었겠지만, 나는 그저 우유부단과 미욱한 정과 섹스에 대한 집착으로 두 여자의 미래를 그렇게 훼손해버렸다. 그리고 언젠가의 날. 아라는 처연하게 울며 모든 것을 고백했다.
"다 그 년 때문이라고"
아라의 눈빛에서 원망을 본다. 좌절을 본다. 슬픔과 원한을 본다. 한없이 가라앉아 버릴 것만 같은 깊은 어둠을 본다.
"너는 몰랐다고 할 지도 모르겠지만, 그래, 차라리 몰랐기를 바래. 니가 알면서도 가만히 그 년을 그렇게 냅둔거면 내가 너무 괴롭잖아"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그 순간까지도 몰랐다.
"너 그 년이랑 만날 때, 걔가 나한테 직접 연락한거 알아?"
"뭐? 언제?"
무슨 소리야.
"매일. 매일 매일. 무시무시한 쌍욕, 너 내가 입 거친거 알지? 근데 나는 비교도 안 돼. 그 년은 어디서 본 적도 없는 더러운 욕을, 하루에 50통도 넘게 보내고, 너 잘 때 니 자는 사진, 니 옷 벗은 사진, 니가 쓴 콘돔 사진까지 매일 매일 나한테 보낸거 알아? 아냐고"
웃으면서 이야기 하던 아라의 얼굴은 어느새 차갑게 굳더니 눈물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했다. 그녀의 눈물보다, 그녀의 말이 더 당황스러웠다.
"무슨 소리야. 가영이 걔가 너한테 그런 문자를 보냈다고? 정말이야?"
아라는 급기야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정말 몰랐냐, 정말 몰랐냐고"
정말 몰랐다.
"나는 니가 참으라고 해서 참았어. 그 년이랑 한번만 더 싸우고 지랄하면 그냥 둘 다 버리겠다는 니 말, 니 그 말이 무서워서… 아니 그냥 나한테만 두 년 다 버린다면서 그 년한테 가버릴까봐 그게 무서워서 그냥 혼자 꾹 참았다고. 내리 3년을. 알아? 그 년이 온갖 쌍욕과 조롱을 나한테 퍼부을 때, 나만 참았다고."
나는 정말 몰랐다. 모른다고 그 업이 사라지지야 않겠지만.
…내가 아라를 속이고 가영을 속이며 양다리를 즐기고 있다고 생각한 그때. 이미 그 두 여자는 또 다른 지옥 속을 헤메고 있었다.
[ 아우~ 아라야 니 남친은 어디갔니?ㅋㅋㅋ 난 지금 내 남친이랑 데이트 중인데? 아~ 넌 남친없지 참~ㅋㅋㅋㅋ ]
가영은 아라의 연락처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가영은 나 모르게, 아라에게 수도 없이 많은 폭언과 사진들을 보내고 있었다. 가영과 내가 데이트를 하는 날이면 먹는 것, 물건 산 것, 내 사진, 같이 끌어안고 있는 사진, 호텔방 사진 등등을 모두 찍어 문자로 아라에게 보내고 있었다. 심지어는 내 나체 사진이나 사용한 콘돔 사진까지.
[ 난 오늘 내 남친이랑 호텔에서 뜨거운 시간 보냈는데ㅋㅋㅋ 아라 넌 방구석에서 뭐하고 있니? 미친 년아?ㅋㅋㅋㅋ ]
나는 지금도 가영이 아라에게 왜 그런 도발을 했는지 모른다. 내가 아라와 당시 계속 만나고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 문자로 현타 오게 만들어서 아라가 스스로 포기하게 만들려고 한 것인지 아니면 아라 때문에 흔들린 나와 자신의 연애에 대한 분풀이였는지.
"… …"
내 기억 속의 가영은, 그냥 나에 의한 피해자일 뿐이었다. 섹스에 미친 병신새끼를 믿어준게 죄의 전부인 불쌍한 가영. 하지만 사실 그녀 역시도 분풀이의 린치를 아라에게 가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마저도 안쓰러운 일인지 몰랐다. 미친 병신같은 남친 때문에 그녀 역시도 반쯤은 미친 것이나 다름 없는 짓을 하고 있던 것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아라가 당한 고통이 너무 컸다. 가영도, 아라도 가면을 쓰고 있었다. 나 못지 않은 가면을. 서로가 가면 속에서 울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고통과 분노와 증오와 슬픔의 비명을. 그 누가 들어도 미친 년 소리가 절로 나올 미친 짓을 했고, 또 누군가는 그 고통 속에서 정말로 미쳐가고 있었다.
"미안해"
그 끝을 알 수 없는 아득한 심연을 들여다 본 기분이었다. 아라는 이어 말했다.
"니가 가영이를 정리하고 왔다고 했을 때도 처음에는 그래서 못 믿었어. 맨날 가영이 걔는 여전히 나에게 문자를 매일 수십통씩 보냈거든"
"내가 완전히 헤어지고 왔다고 한 다음에도?"
"어"
"그럼 언제부터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어?"
아라는 힘없이 웃었다.
"예전에는 맨날 너랑 같이 있는 인증샷을 보냈거든. 근데 언제부턴가는 그냥 문자만 오더라.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정말 너랑 헤어진게 아닐까 싶더라. 아! 참, 너는 나한테 지금까지 수도 없는 거짓말을 했지만 한번도 통한 적이 없어. 왠 줄 알아? 모두 다 가영이 걔가 니 사진을 보내왔거든. 난 남친이랑 맛있는거 먹는데 니 년은 뭐 먹고 있냐면서."
나도 할 말이 없었다. 그때 아라가 다시 물었다.
"다시 한번 말해봐. 근데 어쩌다가 헤어진거야"
나는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 진짜로 헤어진건 조금 우발적인 이야기야…"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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