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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바이 때문에 헤어졌어요"

승남의 말에 김 과장도 웃었다.

"그렇다니까, 보통 여자들이 남친 취미 중에 제일 싫어하는게 바이크잖아. 위험하다고."

승남도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승남의 기억은 8개월 전의 어느 날로 돌아간다.




"쓰읍"

선진물산 건 불합격 메일이다. 혹시나 해서 헤드헌터한테 연락 왔던 IGM건 물어봤더니 역시나 불합격이란다. 지난 일주일간 아홉군데에 이력서를 넣었는데 두 군데 불합격, 나머지는 감감무소식. 나이 서른여덟의 백수는 입맛이 쓰다. 집에서 보내 온 홍삼포 때문만이 아니다. 당연히. 은영이 집에서도 슬슬 압박 심해지는 것 같은데, 당장 백수 새끼가 뭔 결혼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오후 1시 반, 점심시간 끝나고 돌아와 지금 한창 바쁠 때겠지. 전화를 하려다가 슬그머니 내려놓는다.

"핑계는 좋네"

혼자 중얼거린다. 사실 요즘 그녀와의 전화도 부담스럽다. 할 말도 없다. 일자리는 어떻게 되어가냐, 오늘 하루종일 뭐했냐, 내일은 뭐할거냐, 근데 나 집에서 슬슬 결혼 이야기 하는데 등등. 하나같이 부담스러운 말들 뿐이다. 그렇다고 친구들한테 전화하면 집 대출금 때문에 걱정이다, 차 괜히 샀다, 내년에 미국 본사 발령 난다 등등 부러운 이야기들 뿐. 나이는 먹을만큼 먹었는데 10년 전과 비교해서 내 손에 쥐고 있는게 없다. 내 장미빛 미래는 다 바래버린 것만 같다.

"아니다 아니다"

신경 좀 돌리려고 게임이나 한 큐 돌릴까 했는데 그냥 나도 모르게 마우스에서 진저리를 치며 손을 떼게 된다. 갑자기 영이가 소리치는 환청이 귀에서 들릴 것만 같다. 쓰읍. 다시 침대에 벌렁 누워 인터넷이나 보려니까 형이 톡을 해왔다. 생일 톡 선물을 보내도 쿨하게 씹는 아재가 왠일로 톡인가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

"어, 웬일이야. 어? 바이크? 아 크로스 커브. 어어, 알지. 그거 내가 구해다 준거잖아. 어. 레알? 진짜? 에이, 내가 돈이 어딨어. 백순데. 어? 진짜? 진짜로? 헐! 아, 어. 그럼 조심히 타야겠네. 완전 마실용으로. 어어, 오케이. 그럼 없는 돈이라도 마련해봐야지. 어어, 그럼 지금 바로 가면 돼? 어 형 고마워 바로 갈께"

검은 수염의 산타클로스, 내 호적메이트 노승철이 좋은 선물을 베풀었다. 간다 크로스커브 13년식. 진짜 존예롭다. 나한테 왜 주냐니까 형수 눈치 때문에 맡겨놓는 거란다. 절대로 주는거 아니고 몇 년만 맡아 놓으라는데 그게 버리는거지.

"어후"

근데 진짜 거의 십 년 만에 타서 그런가, 상태가 별로라서 그런가. 2시간 몰고 왔다고 가랑이가 뻐근하다. 기분좋게 지하실에 세워놓고 시계를 보니 저녁 5시 40분. 은영이의 연락은 오늘 하루종일 없다. 쩝.

"밥이나 먹을까"

집 앞 왕돈까스 집으로 갔다. 오늘 첫 끼다. 먹는 것도 없는데 배는 왜 나오는가. 한 끼 든든하게 배 채우고 집으로 돌아온다. 여전히 은영이 연락은 없다. 아까 바이크 타고 오기 직전에 보낸 "언제 끝남?" 메시지의 1은 그대로다. 바쁜 듯 하다. 괜히 마음이 무거워진다. 집으로 돌아와 게임을 켠다. 솔직히 별로 땡기지도 않지만 하게 된다. 답답하다.



"어, 지금 끝난거야?"

저녁 10시 16분, 은영의 전화가 걸려왔다. 아까 7시 반에도 전화했지만 안 받길래 야근하려나 했는데 아까 퇴근은 6시 반에 했단다.

"엥? 전화 왜 안 받았는데"

무거운 은영의 목소리에 내 목소리는 애써 밝아진다. 하지만 은영은 그저 "그냥, 피곤해서" 라는 풀 죽은 목소리 뿐이다. 나는 답답해 뒤질 것 같은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뭐라도 대화꺼리를 찾으려다 "아참, 나 오늘 형이 바이크 줬어. 그, 너도 예전에 형 인스타에서 봤던 노란 그 바이크 있잖아" 라며 대화 주제를 잡았다.

"어?"

하지만 은영은 차가운 분노가 은은히 실린 목소리로 "오토바이? 그걸 왜?" 하며 묻더니, 그냥 형이 처치곤란이라 잠깐 받아왔다고 대답하자 분노를 쏟아낸다.

"그거 탈거야?"

잠시 망설이다 "아니 그냥, 가끔 마실 나갈 때…" 하고 대답했다. 은영의 톤이 높아진다.

"오빠, 요즘 힘들 거 같아서 더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오빠 취직 안 할거야?"

나는 말이 없어진다. 하지만 은영은 잠깐 쉬더니 말을 쏟아낸다.

"그래 취업 쉽지 않겠지. 근데 요즘 오빠 하루종일 뭐해? 그냥 이력서 쓴다, 뭐 그거 말고 하루종일 뭐해? 나 만나면 맨날 잠이나 잘라고 하고. 그게 다잖아. 우리 데이트다운 데이트 해? 그리고… 하… 엄마가, 아니야. 여튼 모르겠어. 나도 답답하고 힘들어. 근데 오빠는 지금 오토바이… 도대체 왜 그러는거야. 지금 그럴 때야?"

순간 답답함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애써 어렵게 말을 이어나간다.

"아니이, 나도 막 그거 열심히 탈라고 그런게 아니라, 그냥 형이 잠깐 보관 좀 해달라고 해서. 뭐 가지고 있으면 잠깐 마실 다니기도 좋고, 바람 쏘이기도 좋고 그런거야. 너도 나랑 바이크 타는거 좋다고 했었잖아, 옛날에"
"오빠"

나도 숨이 가빠진다. 젠장.

"나도 힘들어. 그래, 너 회사 다니는거 지금 힘든거 알겠는데, 나도 지금 힘들다고. 벌써 몇 달째 노는건지 모르겠어. 주변 친구들은 다들 잘 되는데 나만 제자리에 멈춰있는 것 같고, 너 힘든거, 너랑 결혼하는 것도 지금 내가 일자리도 없으니까, 부담스럽…"
"뭐? 나랑 결혼하는게 부담스럽다고?"
"아니 그런 말이 아니잖아. 나 지금 백수잖아. 백수인데 결혼 이야기를 내가 뭐 어쩔 수도 없는거고"
"내가 오늘 결혼 이야기 꺼냈어?"
"아 쫌! 꼭 오늘만이 아니래도 말이야"

서로 말소리가 높아진다. 헛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다. 목이 탄다. 전화를 받은 채로 생수 한 병을 따서 꿀렁꿀렁 마신다. 하지만 잠시 말이 없어졌던 은영은 다시 입을 연다.

"나도 오빠 요즘 힘든거 알아서 뭐라고 하고 싶지 않은데, 나도 힘들다고. 그래도 그냥 다 넘어갔어. 오빠 요즘 집에서 게임만 하고 빈둥대는거? 괜찮아. 힘들게 일한거 알아. 잠깐 쉴 수도 있지"
"나 빈둥댄 적 없는데"
"오빠!"
"아니 아닌건 아니라고. 내가 뭔 게임을 그렇게 했다고 그러는거야"

안다 나도. 이 흐름에서 굳이 태클 걸 필요 없다는거. 하지만 참기가 힘들었다. 그냥 이 상황 좋게좋게 넘기고자 태클 안 걸면 나는 결국 은영의 머릿 속에서 '집에서 빈둥거리며 게임이나 죽어라 하는 한량'으로 남을 뿐이다. 아닌건 아닌 것이다.

"오빠 저번에도 집에 가면…"
"아 진짜. 그럼 너 우리 집 세 번 왔을 때 게임하는 모습 세 번 봤다고 내가 게임 돌이면, 너 옷 사는거 내가 열 번 넘게 봤으니 넌 쇼핑중독자야?"

결국 유치한 말싸움이 되어간다. 나이는 먹었는데 치졸한 자존심 싸움으로 되어버린다. 한번 굽히고 넘어갈 수도 있지, 그래. 근데 나도 지쳤다. 내 마음도 간절하지 않다. 너는 더욱 그렇겠지. 내가 얼마나 한심하게 보일까. 싫으면 떠나도 좋다. 너 속으로는 너 자신이 아깝다고 생각하잖아. 서로 답답하고, 어이없는 마음에 말이 사라진다. 애써 먼저 내가 다시 입을 연다.

"내가 말이 좀 그렇긴 했는데, 나도 네 말이 서운했다는 이야기야. 그냥 지금의 이야기만 하자. 나 그래, 오늘도 불합격 메일 받았어. 그리고 형도 자기 딴에 나 생각해서 바람이라도 쏘이라고 바이크 줬는거 아닌가 싶어. 너 싫으면 걍 나도 안 탈게. 그럼 되잖아"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는게 아니잖아"

그 이야기가 아니면 뭔 이야기. 뭐? 다시 결혼 이야기라도 하자고? 나 백순데 결혼 이야기를 해?

"무슨 이야기를 하자는건데"
"됐다"

맞구만. 나는 어렵게 입을 연다.

"나 지금 백순데 결혼을 어떻게 하냐고"
"누가 내일 당장 하자고 하는거야?"
"아니 내일 당장 아니더라도, 당장 내가 백수인데 뭔 이야기를 어떻게 하냐고. 상견례 자리에서 백수입니다, 하고 인사해?"
"오빠 뭐 평생 놀거야?"
"아니 그 말이 아니잖아. 최소한 나도 자리라도 잡아야 뭘 다리라도 뻗을 자세라도 좀 잡지. 너도 뭐가 그렇게 급한데"
"내가 왜 이러겠냐고!"

압박이 내 생각보다 더 거센 모양이다. 근데 요즘 엄마들이 그런가? 다들 결혼 안 하고 못하는게 대세 아닌가? 후, 그래 여자나이 서른여섯, 본인보다 부모님 입장에서 더 초조한 것도 이해가 안 갈 것은 아니다. 그래도 내가 못하는걸 어쩌란 말인가.

"그럼 내가 뭘 어째야 되는데. 너 데리고 간다고 뭐 부모님한테 확인서라도 써 드려야 돼?"
"오빠 말 조심해"
"아니, 나도 답답해서 그래. 내가 뭘 어쩌면 되냐고"
"됐어. 그냥 접어. 오빠랑 결혼 안 해. 그럼 되잖아. 나도 더이상 안 졸라"
"아니 그런 말이 아니잖아"
"그런걸 꼭 말로 해야 돼? 확신이 필요한 거라고"
"당장 내 다음 달 카드값도 확신을 못 하겠는데 백수가 결혼에 대한 확신을 어떻게 가져!"

그냥 말하다가 답답하고 화가 뻗쳐서 빽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은영의 목소리는 방금 전과 달리 차분해졌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한다.

"오빠 그냥 우리 헤어지자"
"뭐?"
"헤어져"

그리고 은영은 전화를 끊었다. 두어번 전화를 더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다음 날에도 전화를 받지 않았고, 그 다음 날도 마찬가지. 그 다음에는 나도 전화하지 않았다. 일주일 후 다시 전화를 했고, 우리는 두 번 더 만나서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지만, 그때도 나는 백수였고 상황이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8년 인연의 허무한 마지막이었다.




"그럼 노 과장도 바이크 탄다고 하니까 여자친구가 헤어지자고 했던거야?"

승남은 잠시 말을 뜸들이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바이크 때문에 헤어졌죠. 정말 싫어하더라구요"

그래, 바이크 때문에 헤어진거다. 은영과 나는. 그게 내가 유일하게 납득할 수 있는 이유다. 물론 그 바이크는 그 다다음 달의 카드값이 되어 사라졌지만 말이다.

- 끝 -

덧글

  • 모모 2022/11/04 16:09 # 삭제 답글

    오랜만의 복귀시군요. 항상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었는지 내용이 가면 갈수록 공감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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