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남자,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실 내 기준에서 이만하면 됐다고도 생각했다.
"혜수야, 나랑 결혼해주겠니"
그 말을 들을 때도 그다지 기쁘지는 않았다. 뜬금없는 고급 레스토랑에 정장까지 차려 입고 뭔가 혼자 한껏 들떠있는 모습에서 뭔가 오긴 왔구나 하는걸 이미 짐작했으니까. 커플링이 아니라 프로포즈 반지라는 것은 조금 의외였지만.
"좋아"
나는 20대 초반 대학생이 아니다. 불과 7개월 만의 프로포즈. 그다지 적절한 타이밍의 적절한 프로포즈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서른일곱의 나와 마흔 둘의 그. 아마 이 남자를 거절하고 나면 그 다음은 없거나 정말 받고 싶지 않은 상대의 반지일 것이다. 아마도 이 남자가 나의 마지노선. "불과 7개월"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7개월 간 만난 횟수가 채 스무 번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기훈은 항상 바쁜 남자였다. 작은 회사에서 차장으로 일한다는 그.
"고마워요"
그래도 다행이었다. 크게 흠이 있는 남자는 아니었다. 외적으로도 잘생긴 타입이 아닐 뿐, 못난 사람은 아니다. 아니 이목구비 자체는 매력적이었다. 성격도 수더분하고 성실한 성격과 자상한 면도 있는, 흔히 말하는 '결혼하기 좋은 남자'. 그렇다고 무슨 나도 '내 남자'를 이리재고 저리재며 흉보는 그런 나쁜 년은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자상하고 좋은 남자가 나한테 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다른 누군가라면, 분명히 이런 좋은 사람과의 인연을 간절히 바라며 행복하게 살길 바랄텐데'
가장 기뻐도 부족한 날, 나는 기훈의 웃는 얼굴을 보며 그 눈가의 주름살과 넓은 이마에 묘한 거리감을 느꼈다. 나쁜 년, 하고 나는 속으로 나를 욕했다.
나는 떠밀려가고 있었다. 회사 동료 가은의 뜬금없는 소개팅 제안. 내 나이가 몇 살인데 하며 거절했지만 정말 좋은 사람 한 분 소개시켜준다며 자기 다니는 독서모임에서 알게 된 그를 소개시켜 주었다. 소개팅에서 그를 처음 본 순간 나는 아랫 입술을 꾹 깨물었다. 울컥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 나도 잘 안다. 내 나이를. 하지만 반대머리를 소개팅에서 만난 것은 충격이었다.
"네 사실 저라도 놀랐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일 한다고 생각하시고 혜수씨 저랑 한 시간만 대화 나눠주시면 안될까요"
역지사지해보면 조금 비참함까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을 낮추는 정중한 말이었지만, 그 안에는 여유가 있었고 또 참 많은 고민이 있었을 말이었다.
"그거 엄청 연습한 말이죠? 다른 여자들한테도 다 써먹은 말이죠?"
겨우 멘탈을 수습한 내가 겨우 웃으며 한 말에 그도 조금은 자신감을 찾았다.
"세 번째 써먹은 멘트입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나는 그를 제대로 봤다. 이목구비는 오목조목했다. 키도 훤칠했고 몸매도 나이에 비해 다부졌다. 우리 회사 또래 남자들 생각해보면 더욱 그랬다. 아마 그가 머리카락 문제만 없었다면 솔직히 그는 나에게 기회가 오지 않았을 것이다.
"독서 좋아하신다고 들었어요"
"네, 혜수 씨는 책 좋아하시나요?"
네 라고 대답하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근 반 년 내에 읽은 책이 없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싶지만 책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니까.
"네, 좋아해요. 그런데 책 안 본지는 엄청 오래 됐네요. 기훈씨는 무슨 책 좋아하세요?"
"저는 무협소설 좋아합니다"
아….
물론 나도 한때 칙릿 소설 엄청 좋아했고, 아이돌 음악이나 장르 영화팬으로서 일부 사람들에 대한 편견 엄청나게 싫어하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소개팅에서 좋아하는 소설을 무협소설이라고 말하는 40대 남자를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 솔직히 코웃음을 참아낸 내가 대견했다. 그래도 다행히 남자의 다음 말에 이해는 했다.
"제가 출판사에서 일하거든요. 만화, 판타지, 무협소설… "
"아, 저는 무협소설 좋아하신다길래 약간 오타쿠 이런 쪽 생각했어요. 죄송해요"
"아아, 하하, 뭐 조금은 그런지도요"
그 즈음에서 대충 사이즈 나왔다고 생각했다. 그냥 오늘 집에 가서 얼른 푹 쉬고, 월요일에 출근하면 가은씨한테 밥 사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얼마 받은 거냐고 물어보면서. 하지만 기훈도 그리 멍청한 남자는 아니었다.
"그래도 분사하기 전의 모 기업이 컨텐츠 IP를 조금 갖고 있는 회사라서, 드라마 원작 작품도 조금 있고 얼마 전에는 상장하면서 회사도 상암 쪽으로 옮겼거든요, 왔다갔다 하느라고 너무 힘들어서 집도 그쪽으로 샀어요"
"어머, 자가세요?"
이러면 또 이야기가 살짝 다르지. 나를 뭐 속물이라고 해도 좋다. 단지 월세 95만원의 논현동 월세 라이프에 지쳤을 따름이다. 커피 다 마시면 헤어지고 혼자 영화나 볼까 하던 생각이 '지금 시간 애매한테, 그냥 둘이 저녁 조금 일찍 먹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까지는 고려해보기로 했다.
프로포즈에 응한 순간부터는 정말 물살에 떠밀리듯 진행이 되었다. 프로포즈를 받은 이후에야 난 내 친구들을 그에게 소개시켰다. 윤정이가 딱 보자마자 톡으로 < 야, 너 돈 빌려썼냐? > 라면서 묻길래 하마터면 커피 뿜을 뻔한 거 빼고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상견례 후 엄마가 조금 속상해 하는 바람에 진지하게 결혼 다시 생각해 볼까도 생각했지만 당장 나보다 엄마가 더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너는 하여간 명심해. 지금 남친 놓치면 넌 평생 혼자 사는거야"
"그게 뭐 어때서"
"정신차려"
결혼 준비는 시원시원하게 진행됐다. 기훈은 '네가 좋으면 나도 좋아' 모드였고, 나는 '이제와서 아무렴 어때' 모드였다. 웨딩드레스 입어보면서 솔직히 울 뻔 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너무 별로라서. 어차피 할 결혼, 조금 일찍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도 들었다. 기훈은 열심히 우와 우와하며 발연기 리액션을 해왔지만 그는 확실히 연기에는 소질이 없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나는 문득 그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뭐가?"
"못생긴 나한테 결혼해달라고 해서"
"뭐? 니가 왜 못 생겨"
"그냥 액면가가 그래"
둘의 첫 잠자리가 겨우 프로포즈 한달 전이라고 한다면 다들 믿을까. 빠른 프로포즈인 것도 있지만, 마흔 바라보는 남녀의 첫 잠자리가 만난 지 6개월만 인 것도 그가 많이 참아준 것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미친 생각인 거 나도 잘 아는데, 내가 아깝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분위기 잡아가는 게 싫었다. 나도 아줌마인 주제에 그가 아저씨처럼 분위기 잡아가는게 못마땅해서. 그의 입장에선 속으로 화도 많이 났으리라. 다 늙은 년이 뺀다며 속으로 욕할 법도 한데, 아니 실제로 욕했을지도 모르지만 기훈은 잘 참아주었다.
"사랑해"
그가 속삭이는 말에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진심에서 나와야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머리 속 한 켠에서 '사랑하지 않을 뿐이잖아'라는 말이 내 마음을 무겁게 했지만 그는 정말 진심이었다. 그는 정말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 라는 것을 그의 손길 하나하나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 따뜻한 손이 좋았다. 그래서 내 마음의 빗장을 열었다.
"사랑해"
정말 솔직히 말하지만 부끄러웠다. 사실은 내 군살을 그에게 보여주는 게 두려웠다. 20대 어느 날의 첫 경험보다 마음 속으로는 더 떨렸다. 버림 받을까봐. 별 거 없는 X이 쓸데없이 튕겼구나 하며 멀어질까봐. 그러나 기훈은 절대 그렇지 않았고, 최소한 그 두려뒀던 만큼은 믿음과 애정이 되어 그를 향했다.
누구의 표현을 빌어 '찍어내는 결혼식'이었다. 정말 별 것 없는. 발리로 떠난 일주일 간의 신혼여행은 좋았지만 사실 내 개인적인 평가로는 5년 전의 하와이가 더 내 취향이긴 했다. 포르쉐 오픈카 렌트는 좋았다.
"밥 먹었어?"
"아니"
배우자가 자가를 소유한 남자라는 것은 생각보다 큰 안정감을 주었다. 14평의 실 평수는 생각보다 작아서, 어떤 면에서는 차라리 전에 살던 논현동 9평짜리 원룸보다도 불편한 점이 있긴 했지만 내 집이 주는 안정감은 대단한 것이었다.
"내가 이 집에서 뭔 짓을 해도 쫒겨날 일은 없잖아. 그게 너무 좋아"
"그게 뭐야"
"나 스물일곱살 때 집주인 아줌마가 집세 4개월 밀렸다고 내 짐들 다 밖으로 끄집어 낸 적도 있었거든. 지금도 아주 가끔이지만 꿈에 나와. 너무 수치스럽고 죽고 싶었어"
생각해보니 10년 더 된 일이었다.
딱히 딩크로 약속을 한 것도 아니고 따로 피임을 한 것은 없었으며, 그가 그냥 밖에다 처리한 게 전부였지만 조절 기술이 좋은 편인지 우리는 2년 간 아이가 없었다. 종종 내가 "우리 불임인가봐" 하며 반은 장난, 반은 그의 의사를 묻는 질문을 했지만 그는 매번 "그럼 더 좋은거 아냐?" 하며 아무렇지 않을 따름이었다.
"소식은 없더냐"
물론 슬슬 시어머니와 친정에서 압박을 주긴 했지만 기훈이 더 그건 철저히 커버쳐주었다.
"내가 아들 겸 손주할테니 나만 이뻐해 줘"
아마 그 무렵이 내 삶에서 가장 안정적인 어떤 시점이었으라 생각한다.
캠핑 취미에 빠진 그는 매번 나를 캠핑에 데려갔지만, 겨울 캠핑은 정말 내 취향이 아니었다. 언젠가 한번 텐트 안에 일산화탄소가 차서, 내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산 경보기 아니었으면 둘 다 죽을 뻔 한 이래로 나는 한번도 그의 캠핑에 동행한 적이 없었다.
"미안해"
그게 내 잘못이었다. 어이없지만 미안하다는 말은 내가 하고 있었다. 가지 말라고 빌고 있었다. 그 여자랑 캠핑가지 말라며 나는 그를 붙잡고 있었다.
"혜수야, 나랑 결혼해주겠니"
그 말을 들을 때도 그다지 기쁘지는 않았다. 뜬금없는 고급 레스토랑에 정장까지 차려 입고 뭔가 혼자 한껏 들떠있는 모습에서 뭔가 오긴 왔구나 하는걸 이미 짐작했으니까. 커플링이 아니라 프로포즈 반지라는 것은 조금 의외였지만.
"좋아"
나는 20대 초반 대학생이 아니다. 불과 7개월 만의 프로포즈. 그다지 적절한 타이밍의 적절한 프로포즈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서른일곱의 나와 마흔 둘의 그. 아마 이 남자를 거절하고 나면 그 다음은 없거나 정말 받고 싶지 않은 상대의 반지일 것이다. 아마도 이 남자가 나의 마지노선. "불과 7개월"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7개월 간 만난 횟수가 채 스무 번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기훈은 항상 바쁜 남자였다. 작은 회사에서 차장으로 일한다는 그.
"고마워요"
그래도 다행이었다. 크게 흠이 있는 남자는 아니었다. 외적으로도 잘생긴 타입이 아닐 뿐, 못난 사람은 아니다. 아니 이목구비 자체는 매력적이었다. 성격도 수더분하고 성실한 성격과 자상한 면도 있는, 흔히 말하는 '결혼하기 좋은 남자'. 그렇다고 무슨 나도 '내 남자'를 이리재고 저리재며 흉보는 그런 나쁜 년은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자상하고 좋은 남자가 나한테 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다른 누군가라면, 분명히 이런 좋은 사람과의 인연을 간절히 바라며 행복하게 살길 바랄텐데'
가장 기뻐도 부족한 날, 나는 기훈의 웃는 얼굴을 보며 그 눈가의 주름살과 넓은 이마에 묘한 거리감을 느꼈다. 나쁜 년, 하고 나는 속으로 나를 욕했다.
혜수
나는 떠밀려가고 있었다. 회사 동료 가은의 뜬금없는 소개팅 제안. 내 나이가 몇 살인데 하며 거절했지만 정말 좋은 사람 한 분 소개시켜준다며 자기 다니는 독서모임에서 알게 된 그를 소개시켜 주었다. 소개팅에서 그를 처음 본 순간 나는 아랫 입술을 꾹 깨물었다. 울컥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 나도 잘 안다. 내 나이를. 하지만 반대머리를 소개팅에서 만난 것은 충격이었다.
"네 사실 저라도 놀랐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일 한다고 생각하시고 혜수씨 저랑 한 시간만 대화 나눠주시면 안될까요"
역지사지해보면 조금 비참함까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을 낮추는 정중한 말이었지만, 그 안에는 여유가 있었고 또 참 많은 고민이 있었을 말이었다.
"그거 엄청 연습한 말이죠? 다른 여자들한테도 다 써먹은 말이죠?"
겨우 멘탈을 수습한 내가 겨우 웃으며 한 말에 그도 조금은 자신감을 찾았다.
"세 번째 써먹은 멘트입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나는 그를 제대로 봤다. 이목구비는 오목조목했다. 키도 훤칠했고 몸매도 나이에 비해 다부졌다. 우리 회사 또래 남자들 생각해보면 더욱 그랬다. 아마 그가 머리카락 문제만 없었다면 솔직히 그는 나에게 기회가 오지 않았을 것이다.
"독서 좋아하신다고 들었어요"
"네, 혜수 씨는 책 좋아하시나요?"
네 라고 대답하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근 반 년 내에 읽은 책이 없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싶지만 책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니까.
"네, 좋아해요. 그런데 책 안 본지는 엄청 오래 됐네요. 기훈씨는 무슨 책 좋아하세요?"
"저는 무협소설 좋아합니다"
아….
물론 나도 한때 칙릿 소설 엄청 좋아했고, 아이돌 음악이나 장르 영화팬으로서 일부 사람들에 대한 편견 엄청나게 싫어하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소개팅에서 좋아하는 소설을 무협소설이라고 말하는 40대 남자를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 솔직히 코웃음을 참아낸 내가 대견했다. 그래도 다행히 남자의 다음 말에 이해는 했다.
"제가 출판사에서 일하거든요. 만화, 판타지, 무협소설… "
"아, 저는 무협소설 좋아하신다길래 약간 오타쿠 이런 쪽 생각했어요. 죄송해요"
"아아, 하하, 뭐 조금은 그런지도요"
그 즈음에서 대충 사이즈 나왔다고 생각했다. 그냥 오늘 집에 가서 얼른 푹 쉬고, 월요일에 출근하면 가은씨한테 밥 사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얼마 받은 거냐고 물어보면서. 하지만 기훈도 그리 멍청한 남자는 아니었다.
"그래도 분사하기 전의 모 기업이 컨텐츠 IP를 조금 갖고 있는 회사라서, 드라마 원작 작품도 조금 있고 얼마 전에는 상장하면서 회사도 상암 쪽으로 옮겼거든요, 왔다갔다 하느라고 너무 힘들어서 집도 그쪽으로 샀어요"
"어머, 자가세요?"
이러면 또 이야기가 살짝 다르지. 나를 뭐 속물이라고 해도 좋다. 단지 월세 95만원의 논현동 월세 라이프에 지쳤을 따름이다. 커피 다 마시면 헤어지고 혼자 영화나 볼까 하던 생각이 '지금 시간 애매한테, 그냥 둘이 저녁 조금 일찍 먹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까지는 고려해보기로 했다.
프로포즈에 응한 순간부터는 정말 물살에 떠밀리듯 진행이 되었다. 프로포즈를 받은 이후에야 난 내 친구들을 그에게 소개시켰다. 윤정이가 딱 보자마자 톡으로 < 야, 너 돈 빌려썼냐? > 라면서 묻길래 하마터면 커피 뿜을 뻔한 거 빼고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상견례 후 엄마가 조금 속상해 하는 바람에 진지하게 결혼 다시 생각해 볼까도 생각했지만 당장 나보다 엄마가 더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너는 하여간 명심해. 지금 남친 놓치면 넌 평생 혼자 사는거야"
"그게 뭐 어때서"
"정신차려"
결혼 준비는 시원시원하게 진행됐다. 기훈은 '네가 좋으면 나도 좋아' 모드였고, 나는 '이제와서 아무렴 어때' 모드였다. 웨딩드레스 입어보면서 솔직히 울 뻔 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너무 별로라서. 어차피 할 결혼, 조금 일찍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도 들었다. 기훈은 열심히 우와 우와하며 발연기 리액션을 해왔지만 그는 확실히 연기에는 소질이 없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나는 문득 그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뭐가?"
"못생긴 나한테 결혼해달라고 해서"
"뭐? 니가 왜 못 생겨"
"그냥 액면가가 그래"
둘의 첫 잠자리가 겨우 프로포즈 한달 전이라고 한다면 다들 믿을까. 빠른 프로포즈인 것도 있지만, 마흔 바라보는 남녀의 첫 잠자리가 만난 지 6개월만 인 것도 그가 많이 참아준 것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미친 생각인 거 나도 잘 아는데, 내가 아깝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분위기 잡아가는 게 싫었다. 나도 아줌마인 주제에 그가 아저씨처럼 분위기 잡아가는게 못마땅해서. 그의 입장에선 속으로 화도 많이 났으리라. 다 늙은 년이 뺀다며 속으로 욕할 법도 한데, 아니 실제로 욕했을지도 모르지만 기훈은 잘 참아주었다.
"사랑해"
그가 속삭이는 말에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진심에서 나와야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머리 속 한 켠에서 '사랑하지 않을 뿐이잖아'라는 말이 내 마음을 무겁게 했지만 그는 정말 진심이었다. 그는 정말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 라는 것을 그의 손길 하나하나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 따뜻한 손이 좋았다. 그래서 내 마음의 빗장을 열었다.
"사랑해"
정말 솔직히 말하지만 부끄러웠다. 사실은 내 군살을 그에게 보여주는 게 두려웠다. 20대 어느 날의 첫 경험보다 마음 속으로는 더 떨렸다. 버림 받을까봐. 별 거 없는 X이 쓸데없이 튕겼구나 하며 멀어질까봐. 그러나 기훈은 절대 그렇지 않았고, 최소한 그 두려뒀던 만큼은 믿음과 애정이 되어 그를 향했다.
누구의 표현을 빌어 '찍어내는 결혼식'이었다. 정말 별 것 없는. 발리로 떠난 일주일 간의 신혼여행은 좋았지만 사실 내 개인적인 평가로는 5년 전의 하와이가 더 내 취향이긴 했다. 포르쉐 오픈카 렌트는 좋았다.
"밥 먹었어?"
"아니"
배우자가 자가를 소유한 남자라는 것은 생각보다 큰 안정감을 주었다. 14평의 실 평수는 생각보다 작아서, 어떤 면에서는 차라리 전에 살던 논현동 9평짜리 원룸보다도 불편한 점이 있긴 했지만 내 집이 주는 안정감은 대단한 것이었다.
"내가 이 집에서 뭔 짓을 해도 쫒겨날 일은 없잖아. 그게 너무 좋아"
"그게 뭐야"
"나 스물일곱살 때 집주인 아줌마가 집세 4개월 밀렸다고 내 짐들 다 밖으로 끄집어 낸 적도 있었거든. 지금도 아주 가끔이지만 꿈에 나와. 너무 수치스럽고 죽고 싶었어"
생각해보니 10년 더 된 일이었다.
딱히 딩크로 약속을 한 것도 아니고 따로 피임을 한 것은 없었으며, 그가 그냥 밖에다 처리한 게 전부였지만 조절 기술이 좋은 편인지 우리는 2년 간 아이가 없었다. 종종 내가 "우리 불임인가봐" 하며 반은 장난, 반은 그의 의사를 묻는 질문을 했지만 그는 매번 "그럼 더 좋은거 아냐?" 하며 아무렇지 않을 따름이었다.
"소식은 없더냐"
물론 슬슬 시어머니와 친정에서 압박을 주긴 했지만 기훈이 더 그건 철저히 커버쳐주었다.
"내가 아들 겸 손주할테니 나만 이뻐해 줘"
아마 그 무렵이 내 삶에서 가장 안정적인 어떤 시점이었으라 생각한다.
캠핑 취미에 빠진 그는 매번 나를 캠핑에 데려갔지만, 겨울 캠핑은 정말 내 취향이 아니었다. 언젠가 한번 텐트 안에 일산화탄소가 차서, 내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산 경보기 아니었으면 둘 다 죽을 뻔 한 이래로 나는 한번도 그의 캠핑에 동행한 적이 없었다.
"미안해"
그게 내 잘못이었다. 어이없지만 미안하다는 말은 내가 하고 있었다. 가지 말라고 빌고 있었다. 그 여자랑 캠핑가지 말라며 나는 그를 붙잡고 있었다.
(중략 : 본 소설은 스타일박스 유료 메일링 서비스 구독자 전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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