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광고

# 스타일박스의 소설을 이메일로 받아보세요! [ 링크 ]

가면 : 6화 [장편] 가면

애초에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지만, 굳이 저질렀다면 양다리는 걸리지 않는 것이 제일이다. 솔직히 재미있는 것도 잠깐이다. 스케쥴 관리나 금전적 이중지출, 연락과 변명거리를 만드는 스트레스, 때때로 몰려오는 큰 회의감. 그런 의미에서 양다리는 '즐거울 때 적당히 재미보다가 한쪽을 정리하는 것'이 답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사실 시도를 안 한 것은 아니다. 첫 잠자리를 가진 직후 아라를 버리려고 했고, 중간에 아라와 관계가 깊어질 무렵 가영에게 이별을 이야기 했었다. 물론 그 '정리'의 시도는 모두 실패했다.

둘의 마음이 진심이었고, 그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어려웠다. 결국 길어진 꼬리에 의해 나는 양다리를 발각 당했다. 그리고 한번 용서를 받았음에도 또 걸렸다. 물론 양측 모두에게.

제때 정리하지 못했다면 걸린 다음에라도 마음 독하게 먹고 이별을 통보하면 그만인 것을 나는 이번에도 그러지 못했다. 아라를 정리할 생각을 할 참이면 가영과 싸웠고, 가영에게서 갈아탈 생각으로 마음을 굳히면 꼭 아라와 싸웠다. 단순한 연인의 싸움이 아니다. 바람 피운 개새끼, 다른 년 정리하지 못하는 병신에 대한 미움과 애증이 터지는 싸움이다.

우스운 일이었다. 꼭 한쪽을 골라야겠다고 마음 먹으면 그녀와 싸웠다. 결국 굳게 다잡았던 마음이 '아 얘는 안되겠다'하는 쪽으로 기울고 만다. 그래서 돌아서면 또 한쪽이 나에게 손을 내민다. 그 지랄을 3년을 했다.

물론, 둘 다 한꺼번에 정리할 생각을 안 한 것도 아니다. 그때마다 나는 잔인한 통보를 했다.

"가영이 이제 안 만날거야. 근데 너도 안 만날거야"

그런 말들. 반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런 통보를 하면 상대는 나에게 안겨왔다. 그저 내가 좋아서? 아마도 아닐 것이다. 상대에게 나를 뺏기기 싫은 마음이, 나를 좋아하는 마음보다 컸을지도 모른다. 참 지랄 맞고 지독한 연애였다.





가면 : 6화






나는 그렇게 두 여자 사이에서 몇 번이나 걸리고도 바람을 계속 피워댔다. 그 와중에 또 잘났다고 다른 여자들을 찝적대기도 했다. 나는 그런 새끼였다. 문득 스스로에게 놀랄 만큼 쓰레기 같은 놈이었지만 이미 양심이 마비된 상태였기에 그 사이사이의 씁쓸한 감정 따위는 '이러다 어떻게든 되겠지'하고 알 수 없는 혼잣말로 커버할 수 있었다. 그게 어느새 몇 년이나 흘렀다.

"우리 제주도 여행 가자"
"제주도?"

가영이 모처럼 함께 여행을 가자고 했을 때 내 머릿 속에 떠오른 생각은 제주도에 대한 행복한 기대감이 아니라 '아 아라에게 무슨 핑계를 대고 여행 다녀오지?' 였다. 가영도 돈 나갈 곳 많은 어려운 상황에서 사실 무리한 여행이었다. 실시간으로 마음이 떠나가는 쓰레기 남자친구의 마음을 붙잡아보고 싶은 실낱 같은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 가자"

가영의 말에 나는 일단 승락했다. 가영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정신차리고, 여행가서 좋은 추억도 만들고 다녀오면 아라도 정리해야지 하는 생각도 했다.

"…"

제주도에 도착해서 가영이 운전하는 차를 타며 나는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주도의 풍경은 좋았지만 솔직히 좋은지도 몰랐다. 그저 마음이 무거웠다. 아라가 생각났다. 단순히 아라가 좋아서 만은 아니었다. 속고 있을 아라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 그저 안쓰러웠다. 물론 가영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와 장난 아닌데?"

비싼 풀빌라였다. 가영이 "나 무리 좀 했지" 라고 자랑했을 정도였다. 한층 마음이 쓰렸다. 더 좋은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제주 해변에서 함께 해수욕을 하면서 그토록 좋아하는 표정을 보고 깨달았다.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이렇게 나를 좋아해주는 애한테. 사랑스러웠다. 미안했고 고마웠다.

"어 나 지금 일하고 있어. 어어 좋긴 좋은데 뭐 잘 모르겠어. 어 미안 나 들어가 봐야겠다. 끊어"

중간중간 몰래 아라에게 전화를 했다. 반가워하는 목소리에 또 마음이 아팠다. 무슨 놈의 마음이 그리 아프다면서 양다리를 걸치고 자빠졌냐 하면 할 말이 없지만 그 미안하고 애틋한 마음이 바로 한쪽을 쉽게 끊어내지 못한 이유라고 답하고 싶다. 밤에는 고급스파 욕조에서 놀고 다음 날 아침에 제주도 여행지를 돌아다녔다.

그때였다.

한적한 해안도로 한 켠에서, 갑자기 가영이 펑펑 울기 시작했다. 당황한 내가 "갑자기 왜 울어" 하고 묻자 가영은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울었다. 나 역시 입을 닫았다. 한참을 울던 가영이 말했다.

"니 표정이… 하나도 재미없어 하는 것 같아서. 그 여자 생각하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얼굴에 떠올랐던 것일까. 아라를 생각하며 근심걱정, 두 여자에 대한 미안함으로 가득찼던 마음이 그렇게 표현된 것이었을까.

"아니야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그런거 아니야"

애써 부정했지만 서로 만난지 몇 년이 되는 사이에 표정 하나, 말투 하나로도 서로의 기분이나 감정쯤 짐작 못할 리 없었겠지. 미안했다. 모처럼의 여행을 내가 망친건가 싶어서 자책감이 크게 들었다.

"아니야 그런거. 정말 아니야"

가영을 겨우 달래고 여행을 계속했다. 그 맛있는 제주갈치, 그 맛있는 제주통돼지를 먹고, 제주도로 시집와 50년 시집살이를 한 경상도 할머니의 사연 많은 백반집에서 밥을 먹고, 고기국수와 땡볕에 달궈진 감귤까지 먹고 다시 서울로 왔다. 여행은 즐거웠다. 단지, 가영에게 미안했고 아라에게 미안했다.




"…그게 뭐? 그 년이랑 제주도 여행 다녀온게 뭐 어떻다는거야. 어쩌다가 헤어진거냐고 물은건데"

내 회상에 아라는 답답하다는 듯이 다그쳤다.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할 따름이었다.

"기본적으로는 그렇게 쉽게 딱 헤어지자고 헤어진게 아니라는 말이야. 어쩌다 보니 우발적으로 일이 벌어진거지"
"그러니까 뭐가 어떻게 된 건데"

나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가영이에 대한 나의 마음도 사실은 어느 시점부터는 애증이었다. 오랜 기간 알아왔고, 서로 힘든 시간을 같이 보냈고, 서로를 깊게 이해한다고 생각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만큼 서로에게 상처도 많이 주었다.

"너도 잘못한 거 많잖아"
"뭐?"

정말 솔직히 말해서 가영이 나를 처음부터 미친듯이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건 내가 그랬을 뿐이다. 항상 끌려가는 연애를 했고, 지는 연애를 했다. 내가 더 좋아했으니까. 수시로 하는 헤어지자는 말과 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책망에 나는 점점 작아졌다. 변명에 불과하지만 그래서 더 흔들렸던 것이다.

'내 자리로 돌아가자, 이 무슨 미친 짓이냐'라는 생각에 여러 번 반성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바람으로 시작한 연애에 내가 진지해질 수 있을까? 조강지처라는 말도 있잖아?'라는 생각으로 나를 다그치기도 했다.

"그래 내가 헤어져 줄게"

가영의 집에서 밤새도록 싸우다가 지쳐서 이별통보와 함께 집에 오기도 했고, 또 그날 밤 달려온 그녀를 달래주기 위해 다시 그녀의 집으로 향하기도 했다. 사실 그때만 해도 나는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마 나는 얘랑 못 헤어질 것 같다. 칼로 물 베기라고, 이렇게 싸우고 화해하고 하면서 서로 마음의 문을 다시 열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겠지'라고.

하지만 그런 내 가벼운 생각과 달리 가영은 이미 상상 이상의 스트레스에 노출된 상태였다. 내가 처음 가영에게 바람을 들키고 가영은 한달 만에 무려 14kg이 빠졌다. 불면증이 생겼고 불안증이 생겼다.



"그리고 그 모든 불편한 마음을 나에게 쏟아내고 있었지"

내가 가영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아라가 끊고 들어왔다. 이제는 아라에게도 여유가 좀 생긴 것인지, 웃으며 이야기 한다.

"매일. 정말 매일 매일 미친 욕을 해대는거야. 무슨 걸레가 어쩌고 거시기가 어쩌고 창녀가 어쩌고. 나는 듣도보도 못한 욕도 잘하더라. 그리고 너랑 뭘 먹으면 그걸 자랑하고, 니 남친은 어디 갔냐고 나는 내 남친이랑 지금 맛있는거 먹는데 너는 뭐하냐고. 나 지금 호텔 왔는데 너 어디서 뭐하고 있냐고 조롱하고"

아라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코웃음을 흘리더니 이어 말했다.

"하루에 문자를 거의 몇 백 개를 보내는거야. 배터리가 빨리 닳을 정도였다니까. 너랑 있을 때도. 정말 넌 몰랐어?"
"몰랐어"
"하긴 니 벗은 사진도 보내던데. 어쨌든 지가 기분 나쁜 일이 있으면 뭔 또 미친 사람처럼 쌍욕을 하고, 지가 기분 좋으면 나 놀리는 문자 보내고. 맨날 무슨 더러운 년, 걸레가 어쩌고 갈보가 어쩌고. 그래서 내가 이렇게 된거야. 너랑 그 년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웃으며 말하던 아라가 갑자기 울컥하더니 파르르 떤다.

"나 이제 어디 길만 나가도 세상 사람 모두가 내 욕을 하는 것 같고, 환청도 들려. 나 밖에 나가는게 무서워. 나 너 만나기 전에 이러지 않았어. 나… 나… 나 어떻게 할거야"
"… …"
"니가 딱 한 마디만 해줬어도 이러진 않았을거야. 니가 그때 그 년 앞에서 욕 한 번만이라도 했어도 안 이랬을거라고"

울먹거리는 아라. 미안했다.




그 날은 뜻밖에 찾아왔다. 양다리가 N년 차에 접어든 어느 시기의 겨울이었다. 가영의 집에서 놀던 나는, 컴퓨터로 쇼핑을 하다가 휴면회원 해제가 잘 안된다는 이유로 쿠메팡 아이디 좀 빌려달라는 가영에게 대수롭지 않게 안 쓰던 아이디를 빌려주었다.

"…잠깐만 일로 와봐"

가영의 표정은 심상찮았다. 그리고 화면에 뜬 내용을 보고 아차 싶었다. '안 쓰던 아이디'가 아니었다. 오히려 '양다리 안 걸리려고 새로 만든 아이디'였다. 그 안의 쇼핑기록은 내가 아라에게 선물한 겨울용 여자 재킷이었다.

"너 아직도 걔 만나?"

나는 부정했다.

"아니 예전에 잠깐 좀 그럴 때 그랬던거지"
"너 이거 지지난 주에 쇼핑한건데?"

가영의 표정이 심상찮게 구겨졌다. 겨우 몇 달간 잠재웠(다고 생각했)던 가영의 분노가 깨어났다.

"야!"

비명과도 같은 탄식이 내 귀를 찢었다. 내 멱살을 잡고 눈물이 터져 흐르는 그녀.

"전화해. 지금 당장 전화해서, 그 년이랑, 나 보는 앞에서 헤어져"
"침착해. 아 그런거 아니라고. 그냥 헤어지고 나서 미안해서…"

어림도 없는 변명이었다. 악다구니 같은 비명과 내 머리를 쥐어뜯으려는 가영 앞에 나 역시 호통을 질렀지만, 지옥 같은 분위기 속에 결국 긴 한숨과 함께 나는 전화기를 들었다.

"아라야"

전화기를 스피커폰으로 강제로 바꾸는 가영.

"어 자기야. 왜?"

반가워하는 아라의 목소리. 하지만 나는 한없이 잔인한 말을 그녀에게 쏟아내었다.

"우리 헤어지자"

마치 미친 여자 같던 가영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변한다. 조금 안심하는 듯한 표정. 하지만 아라의 목소리는 그 반대로 너무나 동요하는 것이 느껴진다. 마치 '철렁'하며 아라의 간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기라도 한 것만 같다. 지금 내 머릿 속도 빙글빙글 돌고 있다.

"뭐? 왜? 갑자기 무슨 소리야. 혹시 옆에 걔 있는거야?"

아라는 당황하며 물었다. 아라 역시 가영을 의식하고 있었다. 나는 아랫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말했다.

"어. 지금 옆에 있어. 아라야, 미안해. 헤어지자"
"영호야, 그게 무슨 소리냐고. 갑자기 왜. 나 못 헤어져. 너랑 못 헤어진다고"

아라의 당황 속에 울먹임이 느껴진다. 목소리가 젖어간다.

"미안해. 헤어지자"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곧바로 아라의 전화가 돌아온다. 이번에는 가영이 그 전화를 받았다.

"야, 이 미친 년아. 남의 남자 탐내지 말고 꺼져. 영호는 내 꺼야. 너는 그냥… 잠깐 데리고 놀다 버려지는거야. 알겠어?"

가영의 잔인한 말에도 아라는 이미 울먹이고 있다.

"잠깐 영호 좀 바꿔주세요. 이거 영호 폰이잖…"

가영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아라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다급하게 외치는 그녀.

"나랑 잠깐만 이야기 해. 영호야, 영호야. 그럼 쟤한테 욕이라도 한 마디 해. 욕이라도 해달라고!"
"…"
"봤지? 영호라는 애는 이런 애야. 꺼져"
"영호야, 영호야!"

애타는 목소리를 무시하며 전화를 또 끊어버리는 가영.




두 여자의 갈등 속에 나는 그저 우두커니 서있었다. 한없이 잔인한 말을 하는 가영의 눈에도 승리의 기쁨보다는 고통이 느껴졌다. 내 가슴이 아팠다. 또 전화기 너머로 간절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 아라의 목소리는… 마치 실시간으로 아라가 부서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건 아니었다. 이건 정말 아니었다.

"잠깐만 보고 이야기 해. 영호야 잠깐만!"

간절하게 외치는 아라의 목소리에 나는 흔들렸다. 나는 가방을 메었다. 이번에는 가영이 흔들렸다. 울리는 전화기를 버려두고 내 팔을 붙잡았다.

"어디 가"

나는 거친 숨을 겨우 다스리며 입을 열었다.

"가영아, 나 잠깐만… 아라랑 이야기 하고 올게"
"안돼 가지마"

이번에는 다급한 가영의 울음이 터졌다.

"가지마. 나도 지금 힘들어. 제발 가지마"
"아니 나 잠깐만 아라 걔랑 이야기 하고 올게"
"가지마. 가지마"

가영은 눈물만 흘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엉엉 하는 울음이 터졌다. 마치… 이번에 떠나면 나를 다시는 못 볼 사람처럼.

"아니 왜 우는거야. 가서 잘 이야기 하고 바로 올게"
"가지 말라고. 가지마"

내 눈에도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안쓰러웠다. 그냥 가지 말까. 하지만 두려웠다. 마치 아라가 안 좋은 생각이라도 할 것 같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적어도… 이야기라도 하고 와야 할 것 같았다.

"가지마, 가지마. 나 너 없으면 안돼"

가영은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며 말했다. 어쩌면 지금 몇 년 간의 순간 중 가영이 나를 가장 간절하게 바라는 모습인지도 모른다. 내가 한없이 받고 싶었던 가영의 마음이었다. 만약 몇 년 전에 그녀가 나에게 조금만 더 사랑을 표현했더라면…

'아니'

아니, 그건 아니다. 나는 결국 유혹이 있으면 흔들렸을 쓰레기다. 가영에 대한 한없이 안타까운 마음과 오랜 연인으로서의 미안함이, 다시 차가운 자기비하에 그저 뒤덮힌다.

"나 이야기 하고 올게. 돌아올게"

나는 그렇게 문을 닫고 가영의 집을 나섰다. 문 너머에서 가영의 긴 울음이, 큰 통곡이 들려왔다. 1층에 내려와서도 들리는 큰 통곡이었다. 아마 그녀는 알았던 것 같다. 그렇게 나를 영원히 못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을.




[ 어디야 지금. 나 정말 죽을 것만 같아 ]

아라는 간절히 나를 찾고 있었다. 나는 아라에게 [ 너네 집 가는 중 ] 하며 달랬다. 한편으로 가영의 톡이 날아왔다.

[ 가지마 영호야,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

나는 가영의 톡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문득 몇 달 전에 가영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영호야, 사람이 인연을 끊어내는데 어떻게 좋게좋게 끝낼 수 있어? 결국 모진 놈, 나쁜 놈이 되어야 되는거야. 니가 걔한테 어떤 마음을 갖고 있던, 결국 헤어질 때는 모진 마음을 품어야 되는거야. 알겠어?"

당시 그 말은 내 폐부를 찌르는 말이었다. 가영은 알았던 것이다. 오랜 연인으로서 나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좋게좋게, 어떻게든 상처를 덜 주려고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내 모습을 보며, 그런 모진 마음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조언한 것이었다. 물론 모진 그 마음의 방향이 아라를 향하길 바랬겠지만.



[ 아니다. 차라리 그냥… 차라리 너 걔한테 가. 나 버리고 걔한테 가 ]

많은 생각 속에 아라의 집으로 향하던 중, 가영의 톡이 날아왔다. 나는 이번에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는 아라의 집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이미 얼굴이 눈물콧물로 범벅이 된 아라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 모습에 나는 울음을 터뜨리며 아라를 끌어안았다. 그 날 이후로 나는 가영을 만난 적이 없다. 내 휴대폰에서 가영의 전화번호와 카톡은 바로 차단되었고, 아라는 "그 년이랑 한번만 더 연락하면 나도 이제 너 다신 안 볼거야" 라며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그게 끝이었다.




"뭐야, 그게 끝이라고?"

아라는 의아해 하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물론 진짜 끝은 아니었다. 가영을 버리고 아라로 확고히 마음을 정했던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아침 출근길에 휴대폰을 본 나는 놀랐다.

[ 부재 중 전화(5) : 02-XXXX-YYYY ]

모르는 번호였지만 나는 그 번호를 안다. 가영의 집 근처 공중전화 번호다. 물론 그 번호를 알고 있는 이유는 예전에 한참 싸웠을 때, 가영이 홧김에 나를 차단했을 때 나도 그 공중전화를 몇 번이나 이용했으니까.

새벽에 걸려온 전화였다. 새벽 5시, 5시 10분, 5시 30분, 5시 45분, 6시 10분… 아마도 새벽에 잠들지 못한 가영이 너무나 큰 고통 속에서 엄청난 굴욕감과 배신감을 느끼면서도 겨우 손을 내민 전화였으리라. 어찌 내가 그것을 모르겠는가.

'미안해'

하지만 난 가영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이번에 또 연락하면 다시 그 삼각관계의 구렁텅이로 떨어질게 뻔하니까. 언젠가 또 이런 지옥을 모두에게 경험하게 만들테니까.



"그게 정말 끝이야?"
"아니"

그로부터 또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모르는 휴대폰 번호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거기 조영호씨 휴대폰 맞죠…?"
"네, 맞습니다. 누구세요?"
"네, 저 서가영 친군데요. 예전에 한번 같이 사당에서 밥 같이 먹었던"
"아~ 네네, 알죠"

하지만 반가움보다는 두려움과 걱정이 앞서는 전화. 그리고 갑자기 급발진 하는 그녀의 친구.

"저기요, 지금 가영이 상태가 어떤 줄 알아요?"

두려웠다. 어떤 상태인지. 뭐가 또 어떻게 됐는데. 예전처럼 출근길에 지하철에서 쓰러진건가. 아니면 또 어디 몸이 안 좋아져서 병원에 실려간건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 오세요. 지금 당장 여기 서연대 병원으로… 당장 오시라구요!"

하지만 지금 회사인데 어떻게 당장 가겠는가.

"죄송한데, 상황이 어떤지부터…"
"당장 오시라구요!"
"아니 그러니까, 상황을 설명해주세요. 지금 뭐가 어떻게…"
"정말 이런 말 하고 싶진 않은데, 쓰레기 같은 분이시네요"

그리고 전화가 끊어졌다. 나는 어리벙벙했다. 당장이라도 병원에 가야하나. 하지만 갈 수 없었다. 지금 가봐야 또 한번 지옥의 구렁텅이에 빠질 뿐이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다 나의 업보다. 하지만 마침 걸려온 아라의 전화에 나는 목소리의 물기를 지우고 웃으며 받았다.

"어, 아라야. 어어. 나? 점심 먹었지. 어."

그렇게 가영과 나의 인연은 정말로 그렇게 끊어졌다. 물론 아라에게는 아직 아니었지만.


< 다음 화, 마지막 7화에서 이어집니다 >


덧글

  • 잼냐 2023/01/26 15:52 # 삭제 답글

    이 글은 미쳤습니다
    여태 본 글 중에서 제일 재미있습니다
  • 존잼 2023/01/28 12:06 # 삭제 답글

    7화 언제 나오나요..
  • 으아아아 2023/02/01 15:55 # 삭제 답글

    결말까지 쭉쭉 갑시다
  • VERANO 2023/02/20 21:27 # 삭제 답글

    쓰레기 주인공인걸 알고 눈살이 찌푸려지지만 읽게 되는 마력 ...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