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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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니 아침 10시 반, 간밤에 여정이한테 전화가 왔었네. 그래봐야 취해서 헛소리나 한 이야기겠지. 시원하게 오줌 한 바가지 싸고 샤워를 한다. 요즘 살이 조금 빠진 것 같다. 깨끗하게 씻고 대충 걸쳐입은 다음 슬리퍼 신고 아침 겸 점심 먹으러 나간다.

"아 날씨 좋다"

꾸리꾸리한 비 오는 날씨다. 직장인들이 빗 속에 눅눅하게 젖어 출근할 때, 나는 상쾌한 백수 라이프를 즐기니까. 코코넛패밀리 매장 쪽으로 횡단보도 크게 돌아 10번 출구 뒷골목 밥집으로 향한다. 오늘 점심은 제육쌈밥이다.

"제육쌈밥 하나요"

질척이는 아스팔트 걷느라 와이드 슬랙스에도 빗물과 흙탕물이 튀었다. 찝찝한 기분은 달큰한 제육으로 달랜다. 비 줄줄 내리는 오전 11시의 고기집에는 오직 나 혼자 뿐이다. 아니, 저기 한 명 더 들어온다. 새하얀 피부의 새하얀 원피스를 입은 개쩌는 몸매의… 단발머리 그녀.

"제육쌈밥 하나요"
"네에"

평범한 고기집 알바로는 아까운 마스크의 훤칠한 알바생이 주문을 받으며 힐끔 그녀를 바라본다. 미녀라면 질리도록 봤을 강남역 고깃집 알바생도 눈길 힐끔 가는 예쁜 여자다. 나는 무척 다행히도 앉은 자리의 각도상 그녀를 마음껏 볼 수 있… 눈이 마주쳤다. 2초 정도. 나의 장점이자 단점이 다른 사람과 눈이 마주쳤을 때 절대 피하지 않는다는 거. 어릴 땐 그래서 시비도 많이 붙었다. 보통 대가리 푹 숙이며 "죄송함다" 하며 넘어갔지만. 대신에 여자들이 오해도 잘 하고 썸싱도 잘 생겼다. 작년까진. 여자는 나 따위는 흥미없다는 듯 폰질을 한다. 나는 다시 밥그릇으로 눈길을 돌려 쌈을 싼다. 왕 크게. 왕- 하고 먹노라니 이번에는 저쪽에서 나를 보고 터졌다. 뭔데. 하지만 더이상 의식하고 싶진 않다.

"음"

고짓집의 런치메뉴 제육쌈밥. 평범한 맛이다. 익히 아는 그 맛. 미리 세팅해놓아서 말라 비틀어진 마늘과 표면이 굳은 쌈장이 영 별로지만 그래서 더 땡기는 맛. 빗 속에서 근 12시간 만의 식사를 하고 있노라니 이제 좀 살 것 같다. 오뎅 반찬도 뭐 그럭저럭. 다 먹고 한숨을 내쉰다. 비는 거의 다 그쳤다. 그저 무서운 속도로 오르는 온도와 숨 막히는 습기만 남았을 뿐.



집으로 돌아와 신발만 갈아신고 차 키를 꺼냈다. 어디를 갈까. 눈을 지그시 감았다. 하루의 목표가 없다. 인생의 비전이나 계획도 없다. 그저 흘러가는대로 살고 있다. 모르겠다. 그냥 숨이 막히니 바닷가로 가고 싶다. 시동을 건다.

부우우웅-

6기통 350마력 엔진이 힘차게 시동이 걸린다. 얼마 전에 엔진오일 갈았더니 떨림도 사라졌다. 악셀에 발을 올린다. 그래봤자 강남, 한낮에도 그저 막힐 따름이다. 요샌 음악도 귀찮다. 라디오를 켠다.

"…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그 말을 듣고, 너어무 어이가 없어서…"

시덥잖은 사연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온다. 그래도 너무 조용한 것보단 낫다. 누군가와 함께 있는 느낌이라도 들어서. 얼추 40분을 가다서다 가다서다 하니 겨우 고속도로다. 조금씩 뚫리고, 속도가 난다. 한숨이 절로 내쉬어진다. 하지만 카메라가 너무 많다. 그것도 모자라 이 기세면 모든 도로에 구간단속이 생길 판이다. 정도껏 했으면 좋겠다. 차라리 정정당당히 세금을 올려라. 아니, 그것도 별로다. 그냥 올리지도 말고 카메라도 치워라.



2시간을 넘게 달려 도착한 곳은 강원도 어딘가의 해안도로. 평일의 오후라 제법 한적하다. 트인 한쪽 켠, 호떡 파는 아저씨 옆에 차를 세우고 떨어진 당을 보충한다.

"후우"

바닷가. 파도 치는 모습을 보니 조금 속이 후련해진다. 나는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왔는가라는 의문이 내 머릿 속에 떠오르지만 언제나와 같이 나는 대답 대신 차에 다시 오른다. 호떡을 먹다 옷에 설탕물이 떨어진 것을 뒤늦게 확인하고 짜증이 나지만 그래도 조금은 홀가분해진 마음이 나를 달랜다.

잠시 숨을 돌리고는 곧바로 또 어딘가 정처 없이 떠난다. 목적지 없는 여행은 설렘이 가득하다. 고성 앞바다로 향한다. 평일 늦은 오후의 어느 외딴 바닷가는 마음의 공허함 이상으로 충만한 아늑함을 준다. 기껏 여기까지 왔건만 먹는 것은 그저 칼국수다. 고성 특산물 느타리 버섯을 넣고 끓였다는 사장 할머니의 말에 고개는 끄덕이지만 딱히 특별한 맛은 잘 모르겠다.

"혼자 놀러왔나"
"네, 혼자 왔어요"
"왜사 혼자 댕기. 여친은 없어?"
"있는데 그냥 혼자 왔어요"
"싸웠나"
"안 싸웠어요. 사이 좋아요"
"그럼 데리고 댕겨야지. 혼자만 다니면 쓰나. 옛날에 우리 할아바이도 만날 지 혼자 어딜 그리도 쏘댕기는지 난들 재미 하나도 본 게 없어"

할머니는 혀를 찬다. 그새 미운 털이 박혔는지 김치 반찬 내려놓는 손이 거칠다. 나는 웃으며 "다음에는 여친 꼭 데려올게요" 하고 할머니를 달랬다. 그러자 미운 털이 좀 빠졌는지 "밥 주까" 하면서 대답도 듣기 전 수북하게 머슴밥을 내온다. 탄수화물을 이렇게 먹어서야 졸음 터지겠구나 싶었다.



차 막히기 전에 다시 강남으로 돌아갈까 고민하다가 예서한테 전화했다.

"나 지금 강원도 왔어"
"강원도? 왜? 서킷 타러?"

이제 얘도 어깨 너머로 배운게 있다고 서킷 타령을 한다.

"아니 그냥 바람 좀 쏘이러 왔어. 답답해서"

그리고 말에서 귀신같이 쓸쓸함을 캐치하고 애교를 피우는 예서.

"그러면 나를 데리고 가야지 혼자 가면 어떻게 해. 그러니까 쓸쓸하지!"
"그래, 다음 주에 같이 오자"

적당히 이야기를 조금 더 하고 끊었다. 무언가 이야기를 더 하고 싶었지만 할 수가 없었다. 예서도 바쁘고, 나도 나른해서. 차 안에 들어가 한숨 잠을 잤다. 눈을 뜨자 노을이 지고 있었다. 내일은 뭐하지. 오늘 밤은 어디에서 잘까. 해변을 걸었다. 1시간 넘게 노을을 배경으로 걷자 조금 소화가 되었다. 아직도 배는 부르지만.

'커피나 한잔 할까'

인스타와 코코넛맵을 뒤져 근처 풍경 좋은 카페를 찾아 차를 몰고 15분 정도 달려 커피를 마셨다. 그러나 외려 아까의 해변만은 못 하다. 그래도 카페의 물은 좋다.

'오우'

저렇게 가슴 파인 옷을 벌써 입어주시는 분이라니, 그저 감사하다. 그리고 요즘에는 예쁜애 옆에 더 예쁜애, 또 예쁜애가 스타일별로 다양하게 다녀서 너무 좋다. 수명이 1분은 늘어난 것 같다. 강원도에 온 이유는 충분히 이걸로 뽕 뽑았다. 커피를 다 마시고 차에 오른다.

[ 와 미쳤다 ]

아까 노을 지는 해변 사진들 몇 장 찍어서 예서한테 보냈더니 반응이 뜨겁다. 하지만 주말에 너를 데리고 와서야 이 해변이 사람으로 우글대겠지. 그러던 중 뒤늦게 여정이한테 또 전화다.

"왜"
"오빠, 요즘 왤케 전화가 안 돼"
"어 좀 바빴어. 왜"
"왜긴, 술 좀 사달라고"

아 미쳤나.

"나 지금 강원도야"
"정말? 나 지금 부천인데"

어쩌라고.

"그게 뭐, 멀잖아"
"아 왜 이렇게 까칠해? 뭐 기분 나쁜 일 있었어?"

그건 아니고… 내가 과민하게 반응한 것 같아서 적당히 핑계를 댔다.

"아냐, 오늘 하루종일 누구랑도 말 안 해서 그래. 입 처음 여는거야"
"뭐? 왜? 요즘 뭐 우울증 생겼어?"
"너 때문에 지금 생길 거 같아"
"미친, 꺼져"

시원하게 실없는 소리를 하니 이제서야 하루종일 미묘하게 가라앉은 마음이 조금 살아난다. 솔직히 얘가 조금만 이뻤으면 여정이랑 사귀었을지도 모른다. 네 번 고백을 깠으면 나 같으면 인연 자체를 끊었을 것 같은데 미안하면서도 고맙다. 때로는 짜증도 났다. 얘 때문에 헤어진 케이스도 있었으니까. 슬기 누나였던가. 이쁘고 못 생기고가 중요한게 아니라 여사친의 존재 자체가 짜증나는거라고.

"근데 강원도는 어쩐 일로?"
"어, 그냥 바람 쐬러 나왔어"
"나도 지금 강원도 갈까? 아 맞다 내가 말했나? 나 이번에 차 새로 뽑았어"
"뭘로?"
"치볼리!"

기왕이면 조금 더 멋진 차였으면 좋았을텐데. 돈도 많은 애가 웬 치볼리. 그래도 그딴 말은 안 하고 축하의 말은 건낸다.

"올, 축하해. 면허 따더니 바로 차 사네? 그럼 다음에 한번 시승시켜줘"
"싫은데"
"꺼져"
"어? 나 담배 타임. 그럼 담에 봐"

서로 독사 같은 말 한 마디씩 주고 받고 적당히 끊는다. 예서보다 여정이랑 더 많은 대화를 나눴네. 한참을 아무 것도 안 하고 차 안에서 라디오나 들으며 폰질을 좀 하노라니 해가 지고도 한참이 흘렀다. 뒤늦게 허기가 져서 바로 근처의 편의점 가서 4천원짜리 편의점 햄버거 하나를 먹었다. 거의 10년 만에 먹는 거 같은데 생각보다 괜찮다. 근처에서 잘까 하다가 내일 아침에 할 일 없을 것 같아서 그냥 출발했다.



"아, 진짜 어이가 없네"

뻥 뚫린 것은 1시간 남짓, 혹시나 암행70이라도 있으면 어쩌나 쫄리면서 205Km/h도 밟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지옥의 체증이다. 이 시간에 서울로 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생각했는데 생각 이상으로 많았다. 평일 밤에 강원도에서 서울로 뭐하러 가는데? 놀러? 아니면 서울 살면서 강워도 출퇴근 하나? 야근하고 집에 가는건가? 보통 그 반대 아닌가? 어쨌든 짜증이 난다. 예서 전화도 안 받았다. 그냥 심통이 나서.

결국 집에 도착한 것은 밤 10시가 훨씬 넘은 시간이었다. 운전하느라 고생한 발이 썩는 것 같다. 차를 세우자 관리인 아저씨가 뜬금없이 묻는다.

"차 말이여"
"네"
"주차장에 안 타는 차, 그거 뻘건 차는 유지비가 얼마나 나오나?"
"음, 뭐 많이 안 타니까, 보험료랑 뭐 그런거 빼면 생각보다 얼마 안 나와요. 한 대 뽑으시게요?"

내 말에 아저씨는 웃으며 손을 내젓는다.

"경비 월급으로 스뽀츠카를 워떻게 사"
"저도 중고로 샀는데요 뭐"

8천 7백을 줬지만. 적당히 농담 몇 마디 주고 받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씻고 나서 예서에게 습관적인 안부 전화를 마치고, 유튜브랑 인스타 좀 잠깐 보다가 배달의 족속 잠깐 켜서 뭐 시켜 먹으려다 포기하고는 그대로 눕는다. 아직 겨우 11시 반. 할 일 없는 백수의 삶이지만 그래도 오늘은 뭔가 한 것 같은 착각이 살짝 든다. 진지하게 뭘 했지? 하고 스스로에게 물었다가 현타가 넘 세게와서 자살할 뻔 했다.

내일은 뭘 먹을까. 예서네 필라테스 가게 놀러가서 점심이나 먹을까. 아냐, 가봐야 풀떼기 먹자고 할텐데. 노곤하고 지루하다. 내일은 부디 뭔가 재밌는 일이 생기길 바란다. 나른하고 따분해. 연애도 노름도 섹스도 운동도 영화도 취미도 골프도 뱃놀이도 승마연습도 수영도 영화도 게임도 여행도 책도 다 지겹고 다 재미없다.

그냥 누군가 이 공허함과 지루함을 채워줄 수 있는 정말 마음 맞는 재밌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그래봐야 이주일 정도면 다시 금방 지루해 지겠지만.

< 끝 >

덧글

  • 모모 2023/04/09 21:43 삭제 | 답글

    오랜만에 오셨네요~ +_+ 항상 응원합니다/
  • D 2023/04/26 09:58 삭제 | 답글

    이글루스 없어지는데 어디로 가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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